창 밖은 어느덧 노을이 지는 시간, 오렌지빛으로 물든 안개는 따스해 보였지만 사실 차갑고 위험한 것이다.
마치 사람의 마음처럼.
알아야 하는 것들
앤지 헌트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길고 긴 이야기를 들으며 앤지 헌트가 흥분하거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아마도 내게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수없이 되짚은 탓일 것이다. 앤지 헌트는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으면서도 항상 그 안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 명확하게 이야기하고는 했다. 그런 태도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 자리에서 달라지는 게 없다고 생각한 사이 너무나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드러난 사실과 가려진 진실을 알아가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쉴새 없이 흘러가고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 그동안 알고 있었던 것들을 뒤흔들고는 했어요.
우리에게는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해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도 했고, 당연한 인과라고 여긴 것들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얽혀 생긴 균열의 흔적이기도 했죠. 지금으로선 우리가 최근 알게 된 정보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지 알 수 없으니까요. 눈 앞에서 벌어지는 소모적인 전쟁에 집중하면서 우리의 숭고한 정신까지 마모되기 전에 다양한 협력을 얻으려고 해요.
우리에게 영향을 끼칠만한 건 더 다이아몬드와 로커드 마틴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정황이겠지만 왠지 그들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네요. 무엇보다 닥터의 의도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요. 그의 목적과 지향점에 대해서요.”
이미 가진 것들
“쉽지 않은 일이겠지요. 대서양 너머 대륙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를 알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일단 알 수 있는 것들부터 좀 더 정확히 정리해보려고 해요. 지금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들은 과거의 무언가로부터 시작된 것들일 테니까요.
언젠가 제가 이 전쟁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었지요? 단순히 연합과 회사 간의 싸움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고요. 그 예감이 사실이 된 것 같지 않나요? 그렇다면 당신이 주인공인 이야기도 이미 시작된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린 이미 그 이야기 속에 있는 거죠.”
앤지 헌트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지만 나는 왠지 머쓱한 기분이 되어 마주 보며 웃을 수가 없었다. 과연 내가 그동안 잘해왔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걱정을 말하자 앤지 헌트는 별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이 모처럼 소리 내어 밝게 웃었다.
“당신은 잘 하고 있어요. 언제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사실을 의심한 적이 없어요. 당신은 수많은 전투에 참여했죠. 이길 때도 있었겠지만 패배의 쓴 맛을 보기도 했어요. 수천 번의 담금질을 거치며 시간의 물결이 새겨지고, 당신은 강해졌어요. 그런 당신은 쉬운 길을 택하지 않을 거예요. 틀림 없이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을 하려 하겠죠.
믿기 어려운가요? 이해해요. 스스로를 믿는 건 어려운 일이죠. 하지만 저는 믿고 있어요. 당신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믿어요. 모두가 당신 옆에서 걷고 싶어하죠. 당신은 우리를 좋은 곳으로 이끌 테니까.”
그동안 만났던 회사와 연합의 능력자들, 그리고 내 동료들을 생각하니 든든했다. 아무리 험하고 거친 길이어도 그 길이 옳다면 나와 함께 걸어줄 동료들이 있다. 그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문제가 해결된 것 같았다.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
“그건 그렇고 최근 디미스트와 관련된 소문이 돌고 있는데, 들어봤나요? 아르헨티나에서 온 활달한 아가씨가 디미스트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소문 말이에요. 저도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앤지 헌트는 말을 아끼는 것 같았다. 다음에 이어지는 말을 들으니 조심스러운 태도가 이해되었다.
“그 아가씨가 헬리오스 소속이 된 후로는 제대로 만나본 적 없지만 그의 형제인 레오나르도 디아스와는 개인적인 일로 연락을 주고 받은 적이 있어요. 레오의 말에 따르면 에바 디아스는 디미스트의 안개도 충분히 뚫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사람이더군요. 그런데 에바 디아스가 어떤 것을 발견 했는지에 대해선 이상할 정도로 알려진 게 없죠”
디미스트의 안개 속에서는 무엇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고 들었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그런 곳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무언가를 발견했다면 아마 큰 화제가 되었을 테니 아무런 정보가 없다는 것은 쓸만한 걸 발견하지 못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앤지는 고개를 저었다.
“출처를 알릴 수 없는 정보원도 제게 아주 간단한 정보만을 전해줬어요. 에바 디아스가 디미스트 안에서 '고대 유적'을 발견했다, 라고요."
침묵이 그 어느 때보다 존재감을 과시했다. 먼저 내가 알고 있던 단어가 맞는지 의심했고 다음으로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여태까지 익숙하게 알고 있던 이 세상이 가장자리부터 갈라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포트레너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 1860년, 거대 일식이 세상을 바꾸면서였다. 그런데 포트레너드 안에서 고대 유적이라니?
수없이 많은 질문이 나를 헝클어놨고 답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앤지 헌트의 눈빛에서 나는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시작인 것도 아니었다. 이 도시의 발견조차도 우리가 알 수 없는 곳에서 진행되던 이야기의 한 단락인 것이다.
우리가 선택한 길
앤지 헌트는 창 밖으로 시선을 둔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을로 물든 옆얼굴이 트와일라잇의 한 장면 같아서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침묵은 불편한 마음과 편안한 마음을 모두 가져왔다. 여러 가지 상반되는 감정이 뭐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를 휩쓸고 지나가 나는 몹시 혼란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항상 그 곳에 있어 알아차리지 못했던 설렘과 흥분이 다시 한 번 격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과거의 그림자가 우리를 삼켜 끝 없는 어둠으로 짓누를 때 그 곳에서 벗어나려면 그림자가 스며든 방향의 반대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어둠이 짙은 곳으로 가야 한다. 그 너머에 빛이 있다. 나는 쉬운 길을 택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