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캔터베리에서 열린 헬리오스와 지하연합의 회담은 능력자 사회의 구도를 재편하는 전환점이었다. 비능력자 중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크게 인지한 편인 포트레너드의 시장 퀸시 N. 제임스의 주선으로 만난 양 단체 수뇌부는 사태를 효율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서로의 역할을 나누기로 했다. 전 세계에 확충한 무역망을 중심으로 인적, 물적 자원의 지원이 용이한 헬리오스는 거점 확보 후 문의 그림자를 지우는 데 우선 집중하고, 지하연합은 확보된 거점에서 인식의 문에서 나온 괴물이나 문의 그림자 때문에 변이된 개체를 처리하기로 한 것이다.
쓰면 뱉는다
평화의 시대에 재건을 이룬 코어레너드는 소박한 석조 건물이 세계수의 가지 사이에 소담하게 늘어선 예전 모습을 되찾았다. 구불구불 뻗어 올라간 세계수 가지 근처는 대개 공원으로 활용되었는데, 해리는 그런 공원 중 하나에 앉아 어제 발행된 뉴욕 타임스를 읽고 있었다. 미 연방정부가 단체의 기능을 상실한 저스티스 리그의 인허가를 취소할 거라는 기사가 헤드라인이었다. 저스티스 리그는 그동안 공권력이 감당할 수 없었던, 때로는 감당하지 않으려 했던 미국 내 능력자 문제를 해결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다. 무엇보다 인식의 문이 열렸을 때 저스티스 리그의 희생이 없었다면 미국 서부가 혼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봤을 텐데, 미 연방정부의 약삭빠른 결정에 괜스레 입이 썼다.
“훌륭한 음식이 제공되지 않는다면, 손님들은 짐을 싸기 마련이지.”
거칠게 신문을 접어 옆에 내려놓는데 스리피스 수트를 차려입은 노신사가 말을 걸었다. 항상 얄밉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이 되는 탓에 가까이하긴 싫지만 멀리할 수도 없는 헬리오스의 스카우터, 브뤼노였다.
“아니, 능력자 등록을 하면 국가에 용역을 제공해야 할 수도 있고 이외의 의무가 강제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자신의 신원을 보장받고 보다 자유로운 활동을 하기 위해 감수하고 등록하는 것인데, 이렇게 갑자기 단체 인허가를 취소하면 저스티스 리그에 등록된 능력자들은 어떻게 하라고요. 당장 메트로폴리스 출입증부터 직접 처리해야 하는데 이 난리통을 겪은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합니까?”
“상원에서 낸 의견이라고 하던걸. 거기 이런 쇼의 전문가가 하나 있지 않은가. 국민들이 메트로폴리스 사태를 보며 두려움에 떨고 있으니, 관심을 돌릴 게 필요했을 거야. 저스티스 리그가 사라졌다고 하면 국민들은 마치 이 사태가 해결된 것처럼 느끼고 이 문제에서 관심이 멀어지겠지.”
“저스티스 리그가 목숨 걸고 액자를 지키지 않았다면 상황은 더 심각했을 거란 걸 모르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나저나 액자는 대체 어디 있는 걸까요?”
“어디에 있든 케니스 하트가 액자를 지켰네. 안타리우스가 조용하다는 게 바로 그 증거지. 액자가 그들 손에 떨어졌으면, 그들은 지금 당장 액자가 자신들에게 돌아온 것은 신의 뜻이라 말하며 전쟁이라도 일으켰을걸.”
전쟁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오늘 아침 해리에게 이 신문을 건넨 전직 군인이 떠올랐다. 그는 요즘 아리안의 신화적 학설을 검증하는 데 심취한 독일유산학술협회가 새 친구를 사귈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관계는 능력자와 비능력자 모두에게 나쁜 소식일 것이다. 해리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그게 저스티스 리그의 사람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브뤼노가 그 특유의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말이야, 더 호라이즌이 저스티스 리그의 남은 사람들을 수용하기로 한 게 빠르게 처리되었어. 클레어 스미스 양도 앞으로의 거취를 고민하다가 더 호라이즌에 합류하기로 했다는구먼.”
“아, 스미스 양이 더 호라이즌으로 가면 다른 저스티스 리그 사람들도 좀 더 안심하고 소속을 옮길 수 있겠군요. 잘된 일이네요.”
더 호라이즌의 리더는 파악이 잘 안 되는 인물이다.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저 이 사태를 더 악화시키지만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었다.
달면 삼킨다
새로운 소식을 접할 수 있을까 싶어 들린 지하연합 사무실이 유난히 분주했다. 헬리오스가 문의 그림자를 지우는 힘을 가진 능력자를 포섭하기 위해 대대적인 채용 공고를 내건 것처럼, 지하연합도 새 전력을 확보하기 위해 관련 단체들과 끊임없는 접선을 이어갔다. 연합을 구성하는 근간 단체 중 팔티잔 연합은 오히려 조만간 도움을 요청해야 할 것 같다고 회신했으며, 아일랜드를 기반으로 하는 흑기사는 영국과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공식 방문을 피했다. 그러나 그동안 연합이 겪은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묵묵히 뒤를 받쳐 온 카모라 마피아는 이번에도 앤지의 요청에 즉각 응했다.
“누가 오길래 이렇게까지 경계를 하는 거죠?”
지하연합에는 극단적으로 경계심이 높거나 낮은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지금 해리가 말을 건 레베카는 그중에서도 경계심이 아예 없는 쪽이었다.
“탐정 나리라면 들어보셨겠지, 무자비한 복수자로 이름을 떨친 인물. 카모라에 있던 기간이 길었던 것도 아닌데, 그때 활동이 얼마나 인상 깊었던지 카모라를 떠난 후에도 이름 앞에 복수를 붙여 부르는 바로 그 인물!”
“히카르도 바레타? 그가 온다고?”
“탐정 씨도 그의 팬인가 봐요? 그런데 그는 예상보다 빨리 왔다가 방금 돌아갔어요. 히카르도는 카모라의 행동대장으로 복귀했고, 동시에 연합의 일원으로서 이탈리아 쪽 소요를 막는 일을 분담하기로 했죠.”
“아니, 그런데 왜 다들 나와 있는 거요?”
“사무실에 벌레가….”
해리는 뒷말을 기다리지 않고 앤지의 사무실로 뛰어갔다. 히카르도 바레타는 비록 사건의 중심인물은 아니었지만, 카모라 마피아에 미치는 영향력뿐 아니라 닥터 까미유의 대적자로도 유명했다. 그런 그가 연합의 선봉이 된다는 건 천금과 같은 정보였다.
앤지의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 해리는 순간 아차 싶었다. 들어서자마자 트리비아와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부상에서 회복되었다는 말은 들었지만, 중상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멀쩡해 보였다.
“제 손이 정신을 잃고 그만 노크를…”
“아유, 됐어요, 해리. 이렇게 달려오다니, 당신도 바레타 씨의 팬인가 봐요?”
“아까부터 다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그건 그렇고, 말해봐요, 앤지. 그가 뭐라고 하던가요? 아니, 그가 왜 갑자기 카모라에 복귀하고 연합을 찾아온 거요?”
“그 이야기를 하려면 우선, 여기 미쉘이 전해주는 소식을 들어야 할 거예요.”
그제야 트리비아 옆에 앉아 있던 작은 소녀가 보였다. 무한한 힘을 가진 탓에 눈이 하얗게 타버렸다는 기적의 소녀였다. 앤지는 생글생글 웃으며 히카르도 바레타는 본인이 가려는 길이 무엇인지 이제 정확히 알게 되었고, 지하연합은 그의 든든한 조력자로서 각자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최상의 도움이 될만한 밀월관계를 만들어냈다고 자찬했다.
어둠 밖으로 드러난 능력자들
지난번 자신을 용서한 대가를 하나 더 제공하는 거라며 장난스레 입을 뗀 앤지에게 얻은 정보는 놀라웠다. 능력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어둠의 능력자는 여태 알려진 구성원이 네 명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비밀에 싸여 있었다. 그런데 그 네 명 중 한 명인 미쉘 모나헌이 트리비아에게 이 불가사의한 집단에 닥친 파경을 전해줬다. 닥터 까미유가 의대에 다니던 시절부터 그의 연구를 돕던 헌터 탄야 랜킨이 더는 어둠의 능력자 소속이 아니며, 마지막 순간까지 까미유를 지독히 힐난한 후 방문을 끊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다툰 덕분에 미쉘은 그들의 마지막 대화를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동안 널 봐준 건 네 꿍꿍이를 몰라서 그랬던 게 아니라 네가 쓸모 있어서야. 네 가치를 증명한다고 했잖니? 이제 더 증명할 필요가 없구나. 참아주는 것도 여기까지, 넌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서서히, 그리고 끝까지 짓밟아주마.”
“뭘 말하는 건지는 알겠는데, 다크 헌터. 실험에 성공했다는 건 통제 가능한 조건으로 같은 결과를 수십 차례 반복해서 얻었을 때나 할 수 있는 말이야. 당신이나 나나 이제 본격적으로 실험을 해야지.”
“네 그 휘황찬란한 결과물? 그래, 넌 처음부터 항상 날 속이려 했어. 샤르코는 변절자가 아니었던 거지? 둘이 작당을 하고 몇 년 전부터 큰 진전 없던 연구를 그 미국 회사에 뒤집어씌운 건 결국 네 무능을 가리기 위한 거였을 테지.”
“에릭은 언제나 충성스러웠다. 그의 가문이 그래왔듯 말이야. 그나저나 속였다니, 섭섭하네. 당신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나와 손잡았나? 우린 서로를 즐겁게 이용했지. 난 내 세상을 만드는 데 당신의 지원이 필요했고 당신은 당신 세상을 만드는 데 내 연구가 필요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만 만들어냈던 짓은 앞으로도 네 친구한테나 해야겠구나. 아, 이제 친구가 없나, 다 써버려서?”
“…어쨌든 이제 인식의 문이 열렸으니 난 다시 연구를 시작할 수 있게 됐다. 곧 성과가 날 거고. 그런데도 떠나겠다니 유감이야. 아, 그러고 보니 미아는 같이 안 간다던데. 마음을 사는 데 실패했군, 안타깝네?”
“그 애는 내가 만들었으니 날 결코 벗어날 수 없어.”
“오빠 안부나 전해주지 그랬어, 걔가 충격받고 마음이 흐트러졌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럼 가서 전해주렴. 네가 세계수의 거름이 되는 꼴을 보고 싶었는데, 이만 가봐야겠구나.”
협상 완료
이 다툼을 전해 들은 히카르도 바레타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에게는 여러 가지로 충격을 준 사건이었을 것이다. 까미유의 복잡한 행보가 외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며, 그가 언젠간 예전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완벽하게 부정하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실험. 까미유가 인식의 문에 대해 알고 있고, 그의 실험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에 히카르도는 크게 절망했다고 한다.
“이 멍청한 놈을…”
그의 분노를 대변하듯 벌레들은 불길한 소리를 내며 그의 주변을 맹렬하게 날아다녔다. 가슴 저린 분노가 자신의 능력과 피만으로는 전혀 해소할 수 없었다는 회한으로 바뀔 때쯤,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변색된 손 사이로 한참 비명을 지른 듯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미친 짓을 멈추고, 그를 무너뜨리는 것. 내 목표는 그거다.”
“우리 목표는 완전히 같진 않지만, 크게 다르진 않네요. 잘해보자고요.”
앤지는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히카르도는 무례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오래 그 손을 바라보다 악수를 받아들였다. 회상을 마무리하며 앤지는 누군가의 손을 잡는 것이 그에게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거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