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이야기가 멈춰 있던 그 시간에도 많은 일이 일어났어요.”
우리의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반복되고 있어요. 갈등은 사소한 이유로 시작되었지만, 쉽게 진화되지 않았어요. 그 동안 일어난 수많은 일 가운데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판단하느라 고민이 많았답니다. 누가 열쇠를 쥐고 있느냐에 따라 진실은 때론 거짓으로, 거짓은 진실로 위장되곤 하니까요.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힘을 가진 자의 선택에 의해 변하고 있고, 어리석은 자들은 늘 그렇듯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어요.
자, 그럼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펼쳐볼까요? 제가 이야기를 끝난 바로 그 시점부터의 이야기, 혹은 그 이전의 이야기를요. 많은 일이 일어났는데도 아주 긴 시간이 흐르진 않았답니다. 시간이란 상대적인 것이니까요. 누군가에게는 수십 가지 일이 일어났던 복잡한 하루가 어떤 이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범한 하루가 되기도 하죠. 변한 게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여전히 안개를 위해 싸우고 있고, 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전장에 합류한 시간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신기하게도 모든 이야기는 미묘하게 연결되어 있어요. 모르고 지나쳤던 이야기와 풀리지 않았던 이야기들 모두 말이죠. 물론 그 사실을 인지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죠. 새삼스레 우리가 있는 이 공간의 시간이 궁금해지네요.
거대 영웅들
이전까지 미국 사회의 영웅은 거대 기업들이었어요. 성공에 대한 숭배와 금융, 실업계의 구세주들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가 있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대기업들의 보이지 않는 후원으로 많은 일을 해냈어요. 대신 그들은 노동자들의 가난을 규정해버렸답니다.
재무장관이 전문가로부터 절세 수법을 전수 받았고, 대기업들이 공공연히 한 푼의 소득세도 납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들의 위대함은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노동자들은 최악의 실업률을 외면한 정부와 비윤리적인 기업들을 비난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나왔고, 시위의 규모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의 시선은 그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습니다. 시바 포가 액자를 가지고 메트로폴리스로 왔기 때문이죠. 서로 빛을 나눠주는 영광스런 국민으로 잘 포장되어 있던 미국은 그동안 능력자와의 갈등을 표면화하지 않았지만, 시바 포, 그녀가 가진 액자는 갈등의 기폭제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불안해진 사람들은 능력자들과 연관되어 있던 과거의 일까지 거론하면서 정부에 대처 방안을 요구했지만, 정부는 국가관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미온적인 정부를 대신해 일부 의원들은 사람들을 선동해 좋지 않은 여론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일부는 “처단”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어요.
능력자들은 먼저 자신의 가족과 친구, 이웃과 동료에게 이해를 구했습니다. 이전처럼 그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 수 있다고 기대했겠죠. 하지만 부당한 처우를 받은 능력자들은 점점 과격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국회 상임위원회는 비밀리에 능력자 보호를 위한 안건을 상정하는 의견을 기각하고 미국 정부는 어떤 편에도 서지 않겠다는 특별 담화문을 발표했어요.
유니언 광장 점거
오히려 그 성명은 능력자와 비능력자의 사이가 악화되는 계기가 되었어요. 시위대들은 유니언 광장을 점거하고 난동을 부렸고, 사건 현장을 수습하기 위해 방문한 상원의원 레이먼드와 그의 보좌관, 그리고 경호원들이 크게 다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능력자들에 의해 테러를 당한 것이라며,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를 비난하고 나서기 시작했어요. 어느쪽 할 것 없이 시위행렬이 길어지자 진압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정부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어요.
결국 미국 정부는 직접 나서지 않으면서 여론을 달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어요. 그들은 영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고, 영국 정부는 M I7¹을 미국에 파견했습니다.
2인조, 클라우디스와 프랑크
M I7은 사람들의 바람대로 미국에서 활동을 시작한 그 날, 상원의원 레이먼드를 공격한 범인을 색출하는 저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들은 2인조로 활동하는 클라우디스와 프랑크였습니다.
M I7은 대변인을 통해 클라우디스는 공포를 유발하는 능력자로 대상의 가장 안 좋은 기억을 끄집어내 두려움에 빠뜨렸고, 그 혼란 속에서 프랑크가 흡혈 능력을 사용해 차가운 손길로 공격했다고 밝혔습니다. 레이먼드의 보좌관 중 한 명이 온 세상이 회색 빛으로 변색된 것처럼 색을 구분할 수 없게 된 것을 증거로 들었습니다. 이전에 클라우디스와 프랑크의 능력으로 인해 회색 도시에 갇혀 버린 것처럼 색을 잃은 자들이 있었거든요.
“우린 거짓말을 한 적이 없어. 그저 진실을 숨긴 것 뿐이야. 너희는 진실을 안다 해도 달라질 게 없거든. 우릴 범인으로 지목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신나서 떠들어대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이건 모두 쇼야.”
– 프랑크 B. 스톡턴
프랑크는 법원 앞에 몰려든 기자들의 카메라를 향해 외쳤어요. 클라우디스와 프랑크는 1등급으로 분류된 능력자였어요. 그들이 자신들을 불리하게 만들 증거 따위를 남겨 놓았을까요? 우리는 의심을 품었지만, 사람들은 범인이 밝혀졌다고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그 때 ‘그 자’가 유니언 광장에서 평화를 추구하는 퍼포먼스를 벌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마술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에 흥분했죠. 그 자의 공연은 미국 전역에 생방송 되었어요.
마술사, 화이트 클라프
네, 맞아요. 화이트 클라프, 마술사 출신의 상원의원. 관중을 향한 그의 트랩은 우아하고 절제되어 있어요. 천천히 사람들을 매료하다가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관중의 숨통을 단번에 끊어 놓죠. 그의 고결한 함정에는 빠지지 않을 수가 없어요.
다음 장에서는 그 자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마술사로서 엄청난 인기를 얻어 로드 아일랜드 하원으로 당선되면서 정치가의 길에 입문한 그의 이야기를요.
“저는 화이트 클라프라는 가명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 이름은 마술처럼 내 삶을 더 경이롭고 신비하게 만들어주죠.”
– 워싱턴 포스트지 인터뷰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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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88년 8월 말 런던에서 발생한 연쇄 살인 사건 살인마 잭의 능력을 밝혀낸 영국 정부 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