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yphers

[BLUEMOON] 7장. 포석

묘수
  해리는 오랜만에 만나는 의뢰인을 위한 정보를 정리하다 문득 생각에 잠겼다. 입안 어딘가 모래알 하나가 돌아다니는 느낌, 손끝 어딘가 아주 작게 종이에 베인 느낌, 길을 걷다 거미줄에 걸린 듯한데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느낌. 해리는 이런 걸쩍지근한 느낌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바로 해리 자신이 무언가를 놓치고 지나치는 것 같다는 스스로에 대한 경고였다. 해리는 본능이 알려주는 신호를 무시하지 않고 집중했다. 하지만 답은 쉽사리 도출되지 않았고, 손으로 입술을 쓸다 이내 짓씹으며 고민에 빠진 해리를 구한 것은 의뢰인이 가볍게 탁자를 두드리는 소리였다.

복기
  앤지 헌트, 그리고 벨져 홀든과 함께 마지막으로 봤던 의뢰인은 만날 때마다 느꼈던 선한 인상을 여전히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며 해리는 인사를 건넸다.

  “아이고, 오시는 줄도 모르고 제가 딴생각에 빠졌군요.”
  “중요한 고민을 하셨던 거겠죠, 탐정님이시니까요.”

  마지막으로 만났던 자리에서 의뢰인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세계의 변화를 정리하고 연결점이 있다면 그에 대해 더 알아봐 달라고 요청했다. 해리는 일단 그간 일어난 일을 알려주었다.

  “이미 잘 아시겠지만, 과거의 일부터 되짚어 보죠. 메트로폴리스 사건 이후 저스티스 리그의 인허가가 취소되고 미국 정계에는 약간의 충돌이 있었습니다. 그때 인허가 취소를 반대했던 휴이 롱스태프라는 미국의 의원이 능력자 단체들과 협약을 맺기 위해 유럽으로 왔고요. 애초에 능력자 단체들은 인식의 문의 그림자와 그로 인한 소요를 그대로 둘 마음이 없었으니 롱스태프 의원이 하는 일이라고는 허례허식 가득한 사진 찍기뿐이었습니다만, 그래도 능력자 단체의 활동이 좀 더 제도권의 비호 아래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는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능력자 단체의 운신 폭도 좀 더 넓어졌죠.”
  “그리고 어디 보자, 닥터와 헌터의 연대가 끊어졌다는 소식은 이제 술집에서도 식상한 소재고요.”
  “전 그걸 헬리오스에서 들었을 정도니까요.”
  “그리고 이건 이번에 조사하며 알게 된 것인데, 탄야가 엘베강에서 자신이 옥사나의 뒤를 이었으니 모든 안타리우스는 자기 휘하로 들어올 것을 천명했죠.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거나 일부 신도가 실종됐다고 하는 이야기가 떠돌던데 그보다 더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하는군요. 지금 소문도 아주 아찔하기 그지없거든요.”

  그다음 이야기는 의뢰인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네, 그리고 탄야의 첫 원정이 잘츠부르크로 향한 것이네요. 탐정님도 아시겠지만, 홀든의 본가를 습격한 사건 말입니다.”

일어날 수 있는 일
  의뢰인은 사건 이후 헬리오스 내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몇 번이나 방문했음에도 지하연합보다 정보를 얻기 어려운 헬리오스의 내부 사정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의외의 선물이었다. 가장 먼저 언급된 것은 잘츠부르크 사건 이후 피해 규모를 산정하고 지원을 어떻게 할지 논의하는 자리였다. 대략의 보고가 끝나고 새로이 홀든의 임시 가주가 된 다이무스 홀든의 발언이 이어졌다.

  “가용 전투 인력이 보존되어 있으므로 결론적으로 홀든의 전투력은 크게 손실되지 않았습니다.”
  “피해가 적은 것은 가용 전투 인력이 당시 독일 작전에 차출된 덕분이라고 해도 되겠군요.”

  같은 말도 아 다르고 어 다르게 들릴 수 있으니 표현을 점검해야 하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인데, 이를 떡하니 무시한 표현이 눈치 또는 염치가 없는 한 임원의 입에서 나올 줄이야. 덕분에 회의장은 순식간에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안타리우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느끼고 다들 본인들의 사업장이나 집안을 단속하고 있을 때 홀든은 어린 늑대인간을 구하기 위해 가용 전투 인력의 절반을 독일로 보냈다. 결국 안타리우스의 타깃이 된 홀든은 외로이 참사를 받아들여야 했다. 차출된 전투 인력이 다른 가문이나 사업장처럼 본가를 지키고 있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괴멸적 피해를 보지는 않았을 것은 쉽게 예상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누군가는 다이무스가 이 순간 태도를 꺼내 들더라도 이해해 주자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 피해는 비전투 인력 위주로 발생하였고 그중에서도 가벼운 중독 증세를 호소하던 이들은 이미 회복세에 접어들었습니다. 물론 독의 근원에 가까이 있었거나 독에 오래 노출된 인원, 안타리우스와 직접 전투를 벌이던 예비 전투 인력의 손실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에, 한동안은 홀든의 헬리오스 지원 규모가 줄어들 수밖에 없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홀든은 건재하고 곧 다시 위세를 떨칠 것이니 과한 개입은 사절하고 적당한 동정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한두 명쯤은 내심 찔리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경거망동한 사람이 그중에 포함되어 있으면 좋으련만. 다이무스의 발언을 끝으로 회의는 종료되었다. 사람들의 심심한 애도와 위로를 들으며 회의실을 나서는 다이무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헤나투 교수였다.

  “다이무스 홀든.”
  “교수님.”
  “이 일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무엇보다 미안하오. 혹여라도 내 발언 때문에…”
  “명왕의 결정에 교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모르겠지만 그분은 미안해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다이무스는 일별하며 교수를 등지고 걸었다. 그의 빈자리는 헤나투 교수의 한숨이 깊게 채웠다.

저물어간다
  그다음 이야기는 그랑플람 재단의 속보였다. 사실 해리도 정보원을 통해 겨우 하루 전 공유 받은 소식이었다. 얼마 전 대회의에서 그랑플람 재단의 유력 인사를 연금하는 결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정보원은 그 인물이 누구인지까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해리는 그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건 앞에 있는 의뢰인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아마도 브루스 보이틀러가 마틴 챌피와의 싸움에서 한 발 밀려난 것 같군요.”
  “맞습니다. 이거 참…”

  입 밖에 내진 않았지만 해리는 프리츠의 몰락과 이번 홀든의 습격에 재단의 혼란이 방점을 찍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한 세대가 저물어간다.

두 번째 습격
  해리와 의뢰인이 나란히 상념에 잠겼다. 그러나 생각하는 것은 달랐던 모양이었다. 애잔함을 느끼고 있던 해리와는 달리 의뢰인은 고개를 갸웃하는가 싶더니 해리에게 의외의 말을 건넸다.

  “홀든이 두 번 습격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의뢰인은 다이무스가 본가를 찾아갔다가 두 번째 습격에 대한 단서를 얻었다고 알려줬다.

  “루카라는 소년이 독연에서 살아남았어요. 하지만 해 질 녘 찾아온 불청객으로 인해 순식간에 동생을 잃었다고 합니다. 새빨간 머리카락을 가진 깡마른 여자였다고 하더군요. 여자 앞에서 동생의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고 하는 걸 보니 여자는 인형술사로 추정됩니다.”
  “돕지는 못할망정 공격을 가하다니 히어로는 아니겠군요. 그 소년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참 공교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의뢰인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으니 듣고 알려달라며 꺼낸 말은 충격적이었다.

  “소년은 큰 상처를 입었지만, 기적적으로 생존했습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여자는 닥터와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아이가 살 수 있었던 건 닥터 덕분인지도 몰라요. 고상하기로는 손꼽히는 데샹과 악당이라니, 그렇게 안 어울리는 이미지가 있을까요?”

  닥터의 이름이 나온 순간부터 해리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엉망진창인 머릿속이 빠르게 재구성되고 개편된다. 모래를 뱉어내고 손끝의 상처를 찾아내고 거미줄을 걷는 과정이다. 여자, 인형술사, 붉은 머리, 닥터, 이다음은 추측일 뿐이다. 닥터와 함께 일했던 발생학자의 이름은 에릭 샤르코였다. 의뢰인인 EC는 어쩌면 에릭 샤르코의 머릿글자를 딴 게 아닐까? 그가 아직도 닥터와 함께 있다면, 에릭 샤르코는 해리에게 의뢰했던 정보를 닥터에게 건네준 것이 아닐까? 어쩌면 애초부터 닥터를 위한 정보였을 수도 있다. 그래서 닥터가 그 여자와 동행 중이라면, 그렇다면 해리는 홀든을 두 번째로 습격한 범인의 정보를 알고 있는 셈이다.

착수
 해리는 의뢰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괘념치 말라고 말하며 의뢰인은 미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해리가 지금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해리는 그 길로 헬리오스를 찾아가 다이무스에게 면접 교섭 요청을 했다. 시간을 길게 낼 수 없다고 말하는 다이무스와 헬리오스의 한 정원에서 만날 수 있었다.

  “제가 우연히 들었는데, 홀든의 본가가 두 번 습격을 당했다는 게 맞다면 당신이 알고 싶어 할 정보를 제가 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뭘 말입니까?”
  “가해자, 그러니까 복수의 대상 말입니다. 안타리우스야 이미 알려진 타깃이고 두 번째 습격자에 대한 정보가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다이무스의 눈빛이 서릿발처럼 매서워졌다. 침착으로 가장하고 있었지만, 이 사내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복수에 대한 열망과 격정이 가득 차 있었다는 걸 짐작하게 했다. 해리는 품에서 EC가 요청했던 인적 사항이 담긴 서류를 꺼냈다. 당장 받을 것 같았지만 다이무스는 그 서류를 노려보기만 했다.

  “대가는 받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저, 이 악당이 죗값을 치르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다이무스는 사위를 무겁게 가라앉힐 정도로 가득했던 분노를 순식간에 거두었다. 해리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약하게 한숨을 쉬었다. 다이무스는 살짝 몸을 돌리고 있었는데 등 뒤에서 내리쬐는 햇살에 그의 얼굴이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였다.

  “안녕, 자기.”

  그림자 속에서 창백한 팔이 튀어나왔다. 팔은 다이무스의 목덜미를 감싸며 점차 몸을 드러냈다. 해리는 비명과 같이 튀어나오려는 심장을 겨우 삼키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다이무스의 짙은 그림자 속에서 이내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 어디서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은신술을 선보인 시바 포는 손끝으로 다이무스의 흉터를 훑으며 아름다운 새가 지저귀듯 말했다. 그러나 인형실 끊기 작전 당시처럼 직접 검을 빼 들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은 지저귐이 아닌, 놀림에 불과했다.

  “액자를 떠넘기고 나니까 심심하지 뭐야? 네가 나선다면 나도 다시 화끈해진 유럽에서 좀 놀아볼까 봐.”
  “손 치워라.”
  “여전히 딱딱하네, 재미없고.”

  시바 포는 다이무스를 내팽개치듯 손을 뿌리쳤지만, 다이무스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금세 다이무스에게서 흥미를 잃은 시바 포가 해리가 아직도 손에 들고 있던 서류에 시선을 주었다.

  “그거, 이리로.”
  “아니 이게 개인정보라서 함부로 드리고 그러는 게…”

  해리의 거절보다 시바 포의 은신이 빨랐다. 순식간에 사라진 여자는 해리의 눈앞에 나타나 서류를 낚아채 읽기 시작했다. 눈 뜨고 서류를 빼앗긴 해리는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흐음, 이래도 나서지 않을 거야?”

  시바 포는 성의 없이 서류를 넘기며 다이무스를 떠보았다. 다이무스는 말없이 시바 포의 손에서 서류를 빼앗았다. 시바 포는 한 번 코웃음을 치더니, 바닥에 떨어진 서류 몇 장을 살짝 털어 펴서는 다시 해리의 손에 돌려주었다.

  “탐정님, 부탁이 있습니다.”
  “제게요? 그게 뭡니까?”
  “이 서류, 지하연합의 이글 홀든에게 주십시오.”

  시바 포가 끼어들었다.

 “정말이야? 걔 미쳐 날뛸 텐데 뒷감당 되겠어?”

  해리도 그 점이 의문이었다. 해리는 당연히 다이무스가 이 일을 직접 조사하고 처리할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 전 다이무스의 지극한 분노를 경험한 후여서 더욱 그랬다. 해리의 의문 어린 시선을 받으며 다이무스는 담담히 말했다.

 “제가 해야 하는 일과 녀석이 하고 싶은 일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다른 것은 당연하겠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을 하고 누군가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기분이 영 개운치는 않았다. 무게감이 느껴지는 말에 해리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시바 포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정말, 재미없기로는 첫 번째야.”

  그러더니 시바 포는 해리의 그림자 속으로 쓱 사라졌다. 해리가 깜짝 놀란 것은 두말할 것 없었다. 그 뒤로 한동안 해리는 자기 그림자를 밟아보는 버릇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