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그 뒤로 연합의 회장을 맡아 지금까지 왔습니다. 프랑스에서의 삶이 그립긴 하지만 여기서 이렇게 좋은 친구들을 만났으니 후회는 없어요. 아니 후회할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빴다고 해야 맞겠죠.
밝혀진 음모
그 때 아이거 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나중에서야 들을 수 있었답니다. 흑염과 번개가 난무하는 싸움터 한가운데 어디선가 드니스가 나타났었대요. 그녀는 명왕과 눈빛을 주고 받는 듯 하더니 다짜고짜 재스퍼를 공격했다고 하더군요. 그와 동시에 명왕의 번개 역시 재스퍼를 향했고요. 재스퍼가 놀라 도망치자 명왕은 추격을 명령했고 어쩔 줄 몰라 하던 모두는 그 서슬 퍼런 명령을 즉시 따를 수 밖에 없었다고 해요.
마치 단추를 꿰듯 완벽히 맞물려 돌아가는 상황에 의심을 품은 명왕은 드니스에게 은밀히 조사를 부탁했던 거에요. 제 멋대로이긴 했지만 재스퍼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유일했으니까요. 조사에 따르면 재스퍼는 안타리우스의 첩자, 그러니까 제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된 그 처참한 전쟁은 처음부터 안타리우스의 음모였다는 것이 밝혀진 셈이었지요.
인체 실험
아, 안타리우스. 노인이 이 끔찍한 단체를 설립한 후 10여년 동안 안타리우스는 무섭게 성장했습니다. 아마도 액자의 힘이었겠지만, 노인은 미래를 예언하거나 병자를 치유하는 기적을 선보이며 광신적인 추앙을 받았어요. 실제로 안타리우스의 구성원 중에는 능력자보다 기적에 현혹된 비능력자의 수가 훨씬 많았는데 이런 배경이 안타리우스로 하여금 그 끔찍한 실험들을 하도록 부추겼는지도 몰라요.
액자의 계시 덕분에 안개의 힘을 가장 먼저 깨달았던 노인과 추종자들은 디미스트에 숨어 비능력자를 능력자처럼 강화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부터 이미 드니스는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대요. 허나 철저한 보안 때문에 첫 번째와 네 번째 실험체가 각각 다리와 눈을 개조 받았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죠. 그러던 어느 날 첫 번째 실험체가 탈출하는 사고가 발생했고 드니스는 실험체의 행방을 추적하기 시작했어요.
슬픈 인연
포트레너드 사건을 기억하시죠? 그 때 카인이 저항을 결심한 결정적인 이유는 사실 한 여인 때문이었답니다. 그의 이름은 레나. 카인은 그가 종업원으로 있던 술집에서 가드로 일하고 있었지요. 술집이 불타고 그가 실종되자 카인은 그것이 오토와 부처의 짓이라 확신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사건이 종결되고 나서도 도무지 그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1년이 지난 후, 그러니까 저와 호위팀이 한창 쫓기던 그 때쯤, 레나가 돌아왔대요. 카인은 그녀를 위해 추적자들과 또다시 사투를 벌였고요. 하지만 그는…….
그래요. 레나가 바로 첫 번째 실험체였어요. 그는 스토커이자 안타리우스의 광신도였던 남자에게 납치되어 희생양이 되었다더군요. 더욱 안타까운 건 카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마지막 자의식마저 지워져 버린 그가 스스로 안타리우스로 돌아가 버렸다는 거에요. 자신을 기억조차 못하는 그를 위해 카인이 왜 그런 희생까지 감수했는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안타리우스가 괴멸된 지금도 레나를 찾아 헤매는 카인의 눈빛에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죠.
어쨌든 실험체, 그러니까 레나를 추적하던 드니스는 카인에게 쓰러진 광신도중 한 명이 헬리오스와 재스퍼의 이름을 언급하며 저주를 퍼붓는 걸 들었답니다. 의심은 확신이 되었고 그는 즉시 명왕을 찾아 아이거 산으로 향했죠. 그 뒤의 이야기는 조금 전에 말씀 드린 그대로예요.
안타리우스의 저력
비록 재스퍼의 음모는 실패했지만 안타리우스의 계획 전체가 무산된 건 아니었어요. 그들은 광신도가 된 가족을 인질로 삼거나 안개를 미끼로 삼아 능력자들을 포섭했습니다. 하지만 설마 얀센스키를 주축으로 한 러시아의 적기사들마저 그들에게 가담했을 줄이야, 흑기사나 용기사, 홀든과도 비견되는 그들만 아니었어도 후에 벌어진 싸움이 훨씬 쉬웠을 텐데……. 뿐만 아니라 노인 곁을 지키는 미니와 앰피라는 이름의 쌍둥이 역시 무서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요. 미니의 울음소리는 상대의 능력을 무력화 시킬 수 있었고 앰피는 그 반대였어요. 앰피가 정말 화가 났을 땐 상대방의 능력을 폭주시켜버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해요. 게다가 당시 이 둘은 고작 5살, 지나치게 잘 우는 나이였죠.
막강한 능력자들을 확보하고 강화인간의 실험까지 마친 안타리우스는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판단했던 모양이에요. 실종되었던 재스퍼는 안타리우스로 돌아가 노인과 함께 액자의 계시를 명분으로 능력자 세계를 향한 전면전을 선포했습니다.
동맹
그 무렵, 2차 능력자 전쟁 때 납치되었던 토니는 연합으로 돌아와 있었어요. 재건 작업으로 분주하던 저와 토니 앞에 명왕의 전언이 도착했습니다. 능력자 세계의 최고 위협으로 떠오른 안타리우스를 무너뜨리기 위해 연합의 힘을 빌리고 싶다는 내용이었어요. 생각할 필요도 없었죠. 우리는 힘을 합치기로 결정했습니다. 회사와 연합 최초의 동맹은 그렇게 시작됐어요.
하지만 우리의 움직임을 눈치챈 안타리우스는 천혜의 요새, 그리스의 도시 루사노에 틀어박혀 버렸습니다. 그 곳은 노인의 인형들과 레나를 비롯한 강화인간들이 불철주야 지키고 있었고 눈을 개조 받은 스텔라라는 강화인간까지 버티고 있어 시바 포 같은 은신능력자들조차 침투가 불가능했어요. 게다가 노인이 액자를 이용해 힘을 키우고 있는 이상 시간조차 우리 편이 아니었으니 천하의 토니라도 전전긍긍할 수 밖에 없었겠죠. 그 때마침 릭을 만나게 된 건 정말이지 하늘이 도우셨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네요.
인형실 끊기 작전
여행을 목적으로 미국에서 건너온 릭 톰슨은 공간이동 능력자였어요. 토니는 최대 5명까지 이동시킬 수 있는 릭의 능력을 고려해 지금껏 알려진 모든 능력자를 대상으로 새로운 작전에 참가시킬 정예요원을 선발했습니다. 최종 확정된 작전의 핵심은 이랬어요. “드렉슬러가 적기사들의 발을 묶어둔 상태에서 시바 포가 쌍둥이를 암살한 후 도일이 도시를 파괴해 공간을 만들어주면 빅토르 위고가 강화인간들을 상대하는 사이 다이무스가 재스퍼와 노인을 제거한다.”
단순해 보이지만 변수가 너무 많았죠. 일단 노인의 정확한 능력과 재스퍼의 전투력을 몰랐고 제멋대로인 시바 포의 성격도 위험요소였어요. 실행에 옮겼을 때에는 빅토르의 배신까지 겹쳐 자칫 실패할 뻔한 작전이었습니다. 결국 적들을 몰아넣는 데는 성공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운이 좋았던 것뿐이에요.
끝나지 않은 이야기
궁지에 몰려 액자를 들고 도망치려던 재스퍼가 노인에게 살해당한 후 시바와 다이무스는 노인을 잡는 데 성공했어요. 허나 노인은 두 사람을 조종해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게 만들었죠. 절체절명의 순간, 릭은 다이무스를 노인의 앞으로 이동시켰고 통제의 실이 끊긴 찰나를 놓치지 않은 다이무스는 노인을 베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끝내 액자는 손에 넣지 못했어요. 시바 포가 혼란을 틈타 액자를 들고 달아나 버렸기 때문이죠. 릭이 쫓아봤지만 시바를 따를 수는 없었고 그녀는 액자를 메트로폴리스로 가져간다는 말만 남기고는 사라져 버렸답니다.
메트로폴리스……. 우린 아직 그 곳에 대해 모르지만 그곳에선 또 어떤 운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능력자들이 아직도 무궁무진할 테니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