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을 나서자 석양을 머금은 안개와 가스등 불빛으로 주변은 온통 오렌지 빛이었다. 앤지 헌트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아직도 머릿속을 맴돈다. 긴 이야기였다. 헬리오스, 지하연합, 능력자들의 전쟁과 포트레너드, 그리고 또…… 아, 머리가 아프다. 근데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더라?
브뤼노 올랑
저 멀리 말쑥하게 차려 입은 신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띠며 내 쪽으로 다가온다. 어딘지 꾸민 듯한 표정, 허나 신기하게도 그리 나쁜 인상은 아니다.
“오, 이럴 수가. 이렇게 멋진 젊은이를 보게 되다니, 내가 오늘 아주 운이 좋군. 마치 자네로 인해 이 주변 모두가 빛나는 듯 하구만. 어허, 당황하지 말게나. 그저 인사를 건네려는 것뿐일세. 나는 브뤼노 올랑, 이곳 포트레너드를 재건하고 있는 헬리오스 사의 대표라네. 만나서 반갑네.”
헬리오스의 대표라고? 재스퍼의 뒤를 이었다는 말인가? 그나저나 이 곳은 연합의 세력권일 텐데? 방금 연합 사무실에서 나왔는데! 회사의 대표쯤 되는 인물이 이렇게 아무데나 돌아다녀도 되는 건가?
“흠, 아마도 스노우 퀸을 만나고 나오는 길인가 보군. 아. 그러니까 앤지 헌트 말일세. 그 어린 여왕이 자네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나나 헬리오스 사에 대해 그리 좋은 말을 한 것 같지는 않군. 이렇게 내민 손을 부끄럽게 만드는 걸 보니 말이야.”
그제서야 그가 악수를 청하고 있었음을 눈치 챘다. 황망히 그의 손을 잡는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나? 2차 능력자 전쟁? 회사가 연합을 섬멸하려고 했다는 이야기? 그래,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니 회사가 악당처럼 여겨지지는 않던가? 하지만 말일세, 알다시피 세상 일이라는 게 어느 한쪽 편의 이야기만 들어서는 알 수 없는 거라네. 자네야 우연히 이 곳에 와서 처음으로 연합의 인물을 만나 그쪽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고, 우리 입장에서 보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 듣게 될지 어찌 알겠나?”
신사는 물 흐르듯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 강압적이지는 않지만 어쩐지 사람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벌써부터 굳이 구분하려 들 필요는 없다네. 각자의 이유로 멈추질 못하고 있을 뿐 지금의 싸움이 명분이 없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결국 회사나 연합이 가고자 하는 방향은 우리 같은 능력자들, 그리고 비능력자들까지 모두가 살기 좋은 세상이 아니겠나? 중요한 건 어느 세력에 속하느냐가 아니라 이 싸움을 끝낼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거지. 뭐, 나이는 어릴지 몰라도 연합의 여왕 역시 워낙 현명한 인물이니 이 부분에 있어서는 틀림없이 내 말에 동의할 걸세. 실제로 많은 능력자들이 자신의 신념이나 친분에 따라 상대 세력에 협력하는 일이 늘고 있지만 누구도 그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지.”
그러고 보니 앤지 헌트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모두가 잘못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대체 이 싸움은 왜? 무엇을 위해 시작된 걸까? 아니 그보다, 모두 알고 있다면서 왜 이 무의미한 싸움을 그만두지 못하는 거지?
신사는 내게 명함 한 장과 멋진 미소를 남긴 채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 갔다.
요기 라즈
브뤼노 올랑, 헬리오스의 대표 겸 스카우터라…… 스카우터? 분명 앤지 헌트는 연합의 스카우터를 만나보라고 했는데, 스카우터라는 게 회사에도 있는 거였나? 그런데 스카우터라는 게 대체 뭐지?...... 명함에 정신이 팔린 사이 뭔가에 부딪혔다. 고개를 드니 짙은 피부에 검고 깊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나를 보고 있다.
“나마스테. 당신이 여왕께서 말씀하시던 그 분이시군요?”
딱딱하지만 울림이 있는 목소리. 왜소하지만 다부지고 지적으로 보이는 남자다. 그는 합장을 한 자세 그대로 브뤼노가 사라진 방향을 흘긴다.
“흠. 나이도 많으신 분이 재빠르기도 하지. 대체 어디서 소식을 듣고 이렇게 빨리 달려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연합 사무실 앞에서까지……”
침착했지만 조금의 호의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도 이런 상황이 꽤나 익숙한 듯 하다.
“어쨌든 정식으로 인사 드리겠습니다. 저는 라제쉬 라마누잔, 연합을 위해 일하고 있는 스카우터입니다. 친구들은 요기 라즈라고도 부르지요. 나름대로 서둘렀지만 아무래도 제가 한 발 늦었나 봅니다.”
라즈? 이자가 바로 앤지 헌트가 말하던 연합의 스카우터인가?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모든 이야기를 들으신 모양이군요. 혹시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듣지는 않았습니까? 혼란스러우시겠죠. 이해합니다. 사실 저 역시 어째서 당장 이 싸움을 중지하고 다시 평화로운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건지 궁금하긴 마찬가지니까요.”
이미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본 듯한 말투.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싸움은 시작되었고 영국 정부가 포트레너드의 자치권을 내건 이상 어느 쪽도 선뜻 싸움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앞으로의 세력판도를 결정지을 정도로 포트레너드의 안개가 중요한 자원이란 사실은 틀림없으니까요. 심지어 얼마 전부터는 다른 나라의 정부나 신대륙의 능력자들까지도 안개를 눈독 들이고 있다는 징후가 심심치 않게 발견되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더욱 저 같은 스카우터들이 필요한 게 아니겠습니까? 새로운 능력자를 발굴하거나 상대 세력의 능력자들을 포섭해 조금이라도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두어서 나쁠 건 없을 테니.”
그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진다. 시종 미소를 띄우던 브뤼노에 비하면 꽤나 어색한 표정이다.
“각자의 이익과 원한을 연료 삼아 스스로 굴러가기 시작한 이 싸움이 언제 끝나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한가지 확실한 건 양측 모두 석연치 않은 낌새를 차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쩐지 누군가 이 싸움을 부추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거죠. 앨리셔의 피습이나 리버포드의 화재는 물론이고, 최근 들어 이공간에서 돌아온 능력자들이 자기 자신과 싸웠다는 등의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심증은 더욱 굳어집니다. 여왕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당신께 기대하고 있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이 싸움의 배후를 밝히는 것. 아직 무엇과도 얽히지 않은 당신이야말로 이 일에 적임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의 억양과 표정에는 묘하게 설득력이 넘친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자, 이제 더 이상 드릴 이야기가 없습니다. 남은 건 당신의 선택뿐이죠. 어떤 선택을 하든 자유지만 일단 경험부터 쌓으시길 권합니다. 앞으로 당신이 겪어야 할 수많은 모험을 위해서는 그게 최선일 테죠. 그러니까, 바로 이제부터가 시작인 겁니다.”
선택의 시간
선택이라…… 조용히 합장하며 배웅하는 라즈를 뒤로 하고 돌아서자 거대한 벽을 마주한 느낌이 든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지도 모른다. 흑막을 밝히길 기대한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도무지 자신이 없다. 하지만 묘하게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설렘과 흥분이 피어 오른다. 그래, 이것도 운명이라면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일단 강해지자. 나머지는 그 다음에 생각해도 충분하다.
주변은 어느새 한 치 앞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안개가 자욱했다. 허나 저 안개 속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이제 더 이상 아무 상관없다. 떨림을 느끼며 걸음을 내디딜 뿐. 무엇 하나 확실치 않은 이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