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XON

[BLUEMOON] 3장. 여정의 끝

  해리가 가진 최면 능력, 대범한 기질, 명민한 두뇌는 사설탐정이 되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실제로 해리는 그랑플람에 대해 원래 알고 있던 이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 중에서 그의 행적에 가장 근접해 있었다.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 탓에 그 위치에 있는 자신이 얼마나 주목받는지 아직 알지 못했지만. 해리는 일지의 주인과 만날 장소가 정해지자 차안대를 씌운 말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왔고,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상대에게 쭈뼛거리며 평소라면 하지 않을 말을 내뱉고 말았다.

커피 한잔할 시간

  “커피… 한잔하겠습니까?”

  이클립스 기사를 면밀히 읽는 것부터 시작해 나름의 인맥까지 동원해 상대에 대해 파악해보려 했지만, 눈을 가리고 최면도 통하지 않는 사람을 앞에 두고 해리는 오랜만에 새내기 시절을 떠올렸다. 마음속으로는 여유를 가져야지, 우위를 점해야지, 외치고 있었지만, 주도권은 이미 그가 아닌 테이가 쥐고 있었다.

  “값을 쳐주신다면.”

  그가 말하는 건 커피 값이 아닐 것이다. 해리는 이런 정보를 들고도 놀라울 정도로 세속적인 테이를 보며 정보의 가치에 대한 기대치를 낮췄다. 침착할 필요가 있었다. 해리는 간단한 요깃거리를 주문했다.

  “따뜻한 카페라테로 주시오.”

  해리의 주문 끝에 테이가 이어서 말했다. 커피 한 잔 마실 시간밖에는 주지 못한다는 건가. 여전히 테이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 해리의 마음속 전화를 가라앉히고 냉정을 되찾아 주었다. 지금은 해야 하는 일을 해야 할 때다.

  “탐색하는 질문은 하지 않겠습니다. 이래 봬도 탐정인데 먼저 이렇게 말하는 거 흔한 일 아닙니다?”
  “랭커셔의 해리 H. 홈즈. 알고 있습니다.”
  “이거, 좀 뿌듯하네요. 열심히 일한 덕분에 이름이 좀 알려진 걸까요? 당신이 가진 걸 청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텐데 이렇게 시간 내 주신 것도 아마 그 덕이겠죠?”
  “글쎄요.”

  해리 딴에는 너스레를 떨어보았지만 테이의 반응은 미묘했다. 그러나 해리가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전 테이가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 손끝에서 나올 것이 떠올라 해리는 다시 평정을 잃었다.

  “일지를, 일지를 가져왔습니까?”
  “보고 싶다고 하셨으니.”

  원하면 되는 거였나? 아직도 해리가 항상 배고플 거라고 믿고 있는 할머니의 미트볼을 받은 기분이었다. 해리는 음식이 나오는 것도 모르고 테이가 건넨 벤 워렌의 일지에 빠져들었다. 성의 없이 너무 뜨겁게 데워져 나왔던 음식이 적당히 식었을 무렵, 해리가 고개를 들었다. 해리의 추측대로 그랑플람은 목적이 분명한 여행 중이었다. 그러나 일지 속 그랑플람은 하유영의 무리에게 도움을 준 후 새 여정을 시작하며 다시는 등장하지 않았다. 벤의 회상 속에서나 언급될 뿐이었다.

그랑플람의 종착지
  좀 더 면밀히 살피고 싶은 마음에 일지를 복사할 수 있을지 물어보려고 테이를 바라본 순간 해리는 흠칫 놀란 표정을 숨기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안대로 가려져 있던 테이의 눈동자는 시리도록 파랬다.

  “랭커셔의 해리 H. 홈즈.”
  “뭡니까, 이 상황? 원래 만나는 상대의 뒷조사를 철저히 하는 편인가요?”
  “신중한 편입니다. 오해는 마시길, 뒷조사는 당신이 런던 대학교 도서관에서 열람한 도서 목록을 확인하는 정도로만 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전개는 해리의 정수리부터 요추까지 관통하는 짜릿한 깨달음을 주었다. 맞는 길이었다. 자신이 어떤 경계를 넘어선 후 올바른 길을 찾아왔고, 이제 마지막 장벽을 넘기 직전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왜 나를, 아니, 아니 그보다 그랑플람은,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일지에 실마리가 있습니다. 당신이라면 알 겁니다. 그래서 보여드린 것이니.”

  해리라면 알 수 있다. 아마 누군가 해리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볼 수 있었다면 분명 감탄사를 내뱉을 것이다. 해리에게는 방금 본 일지의 모든 페이지가 펼쳐져 동시에 빛나며 중요한 단어를 남기고 사라지는 과정이 순식간에 보였다. 그랑플람, 목적, 30여 년 전 그날 이후 더해진 탄압, 강한 기운을 품은 혈, 혈지기, 문을 넘어온 사람들. 문, 그 문이 바로 해리가 찾던 것이었다. 루사노에서 추적자 로버가 보았던 공간의 문, 무한한 생과 끝없는 능력을 준다는, 안타리우스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것이 바로 그랑플람의 목적이기도 했던 것이리라.

  “해리, 밤의 여왕이 어떻게 칸도르의 하늘을 날 수 있는지 아십니까?”
  “액자 속 도시 말입니까? 도시로 갈 땐 그림자를 열어서 간다고 하던데, 저는 가본 적이 없어서 어떤 개념인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맞습니다. 그림자를 열어서 칸도르로 가지요.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액자에 표현된 도시에서 액자 영역 밖으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계속 왔던 곳으로 돌아오게 되죠.”
  “그럼 트리비아는 어떻게 제한 없이 칸도르의 하늘을 날 수 있는 거죠?”

  받은 질문을 되돌리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모릅니다.”

  해리의 표정이 일그러지려는 찰나 테이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장 바티스트는 결국 그 답을 찾아냈습니다.”

  테이는 품 안에서 그랑플람 재단의 문장이 찍힌 봉투를 꺼냈다. 그 안에는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황혼에 물든 황야였다. 사진 뒷면에 짧은 문구가 남아 있었다.

  ‘1931년 4월 18일, 위대한 탐험가가 마침내 칸도르의 황야에 다다랐다. 빛이 사라지고 내 스승, 내 오랜 벗, 장 바티스트의 여정이 끝났다.’

습격
  요즘은 그 위상이 예전 같지 않은 듯하지만, 적어도 해리 연배의 능력자라면 누구나 그랑플람의 이름 앞에서 목이 메는 기억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해리는 다행히 좋은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큰 차별이나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능력자 중에서는 매우 운이 좋은 경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운이 좋지 못했던 사람들을 수도 없이 봤다. 그랑플람이 없었다면 능력자 모두가 그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그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들을 모아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국을 세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떠났다.

  “사진은 누가 찍었죠?”
  “브루스 보이틀러입니다.”
  “그가 그랑플람과 함께 칸도르의 액자 밖으로 갔단 말입니까? 재단은 여태 이런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요?”
  “그랑플람 재단의 대다수는 이 일에 대해 모릅니다. 이 사진은 장 바티스트가 떠났다는 걸 내 어머니에게 알려주기 위해 일부러 찍은 거지요.”
  “… 그랑플람이 떠났다고요? 어디로요?”
  “모릅니다.”

  테이의 말에 따르면 그랑플람은 최소 1931년까지 살아 있었고, 40여 년 간 칸도르의 액자에서는 표현되지 않은 무언가를 찾고 있었으며 그런 그의 여정을 브루스 보이틀러와 테이의 어머니 등 어떤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빛이 사라지고 장 바티스트의 여정이 끝났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는 어디로 간 걸까? 안타깝게도 해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길지 못했다.
  해리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테이는 다시 안대를 쓴 채였고, 해리가 들고 있던 일지와 사진은 테이가 품에 갈무리한 후였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해리가 입을 벙긋거리는데 테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해리, 누구도 모릅니다. 문 너머로 간 사람들이 어디로 가는지, 또는 어디로 갈 수 있는지.”

  테이는 해리의 어깨를 가볍게 짚고 나지막이 말했다.

  “큰길로 가시오.”

  그 뒤는 난장판이었다. 피시싯, 하는 소리가 나고 이내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폭발음과 함께 전투가 시작되었다. 해리는 자리에 앉기 전 미리 봐 둔 가게 뒷문으로 달려갔다. 가게를 빠져나오기 전에는 미처 몰랐지만, 가게 안에서는 테이의 그림자 장막이 자신을 가리고 있었다는 걸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뒷문을 나서기 무섭게 즉시 추격자가 붙었다.

  “목표물 eta 확인.”

  테이의 당부가 무색하게도 노련한 추격자들은 해리를 점점 더 으슥한 곳으로 몰아넣었다. 해리는 도망치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머리를 굴렸다. 특징 없는 검은 옷과 복면으로 감쌌지만 선명하게 들린 미국식 억양과 자신 하나를 제거하기에는 지나치게 철저한 무장. 떠올리기 싫어도 요즘 국제 및 경제 신문에서 주기적으로 시끌시끌한 한 군수회사가 떠올랐다.

웨슬리 슬로언
  추격자들은 해리에게 자신들의 신분을 간접적으로 노출하는 실수를 저질렀지만, 해리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지면서 이들의 실수는 실수가 아니게 될 뻔했다. 어둠 속에서 두 발의 총성이 들리기 전까지는 해리도 그렇게 생각했다.

  탕, 탕!

  눈앞의 총구에서 포연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가장 가까이 있던 추격자 둘이 쓰러졌다. 단말마도 남기지 않는 명중이었다. 해리는 어둠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는 남자를 주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