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XON

Cyphers

[BLUEMOON] 4장. 인식의 문

  몇 차례의 총성이 더 울린 후, 골목은 다시 평소와 같은 고요를 되찾았다. 그건 먼 곳에서 들리는 음정이 엇나간 노랫소리, 뭔가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 피로에 찌든 가게 주인의 호통 소리, 고양이의 게으른 선전포고 따위로 채워진 고요였다. 하기야 총성도 디시카의 일상이었으니 색다른 것은 없었다. 어차피 새벽이 골목에 닿기도 전에 쓰러진 자들의 흔적은 사라지고 늘 그랬던 것처럼 철없는 토사물이나 같잖은 주먹다짐의 흔적만 남을 것이다.
  지금 디시카의 뒷골목보다 더 지저분한 건 해리의 머릿속이었다. 해리는 자신이 알고 있던 웨슬리의 정보를 훑었다. 그러나 퇴역 후에도 로커드 마틴에서 전투 장비를 지원받는 전직 장군이 자신의 후원사를 공격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해리가 생각해낸 것 중 가장 그럴듯한 가설은 웨슬리가 해리의 숨통을 확실히 끊기 위해 자신의 아군을 먼저 치워버렸다는 것이었다.

전쟁
  호신술을 배우면서도 숨이 찼던 해리가 실전으로 다져진 전직 군인을 피해 달아나기는 요원한 일이다. 해리가 눈을 굴리며 마른침을 삼키는데 웨슬리가 총의 장전 상태를 확인하며 무심하게 말했다.

  “이제 괜찮소. 그들이 내 앞에 대놓고 나타날 입장은 아닌 터라.”
  “이거 참, 감사합니다.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 주셔서.”
  “당신이 위기에 몰리길 기다리고 있었소. 그래야 내가 지나가던 시민을 구할 수 있거든.”

  웨슬리는 고갯짓으로 해리를 이끌었다. 그도 이 도시에서는 이방인일 텐데, 바쁜 듯한 걸음을 조금 따라가니 이내 큰길이었다. 숙련된 추격자조차 이 골목 어딘가에 웨슬리가 도사리고 있는 것을 몰랐으니 그가 어디서부터 해리를 뒤따랐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난 그 일지도, 그랑플람도 관심 없소. 그러나 그것들과 얽혀 만들어지는 참상은 좀 다르지.”
  “뭔가 사건이 터진다는 것입니까?”
  “곧 큰 전쟁이 발발할 거요. 힘을 키우려는 자들이 노릴 법한 소식 아니겠소.”

  몇 달 전부터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고, 전쟁이 멀지 않았다는 몇몇 황색신문의 얄팍한 선동에 증권시장이 흔들리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전운이 감도는 시기였다. 젊은 시절 지겹게 들었던 포성이 다시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전쟁을 막을 방법이 있겠습니까?”
  “솔직히 잘 모르겠소. 과분한 기회를 받아 미래를 바꿔보려 했지만, 대응하면 할수록 예상과 다른 미래가 펼쳐졌지. 어쩌면 이것조차 예견된 미래일지 모르니 나는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피해를 최소화하는 수밖에.”
  “그 말씀은 참, 혼란스럽군요. 지금 여기 계시는 이유도 모르겠고요.”
  “당신은 지금도 너무 많이 알아 문제요. 하지만 하나는 더 알아야겠군. 내가 지금 당신 목숨을 구했다는 것 말이오.”

  목숨값을 선불로 치른 덕분에 해리는 불리한 계약을 시작해야 했다. 웨슬리는 해리가 알고 있는 인식의 문에 대한 모든 정보를 원했다. 이 모든 게 웨슬리의 작전이었다면 해리는 꼼짝없이 걸려든 셈이었다.

  “난 이미 소중한 친구와 굳게 믿었던 사람을 잃었소. 혼자 어떻게든 미래를 바꾸고자 애썼던 청년이 눈앞에서 쓰러졌을 때,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지. 전쟁만은 막아보고자 일을 진행하고 있네만, 난 지금 곤란한 처지라오. 지난날 고개를 돌렸던 것들이 이제 날 겨냥하는군. 친구가 그렇게 지키고 싶어 했던 친구의 미래를 저버린 결과겠지.”

  웨슬리의 눈빛은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웨슬리가 개인사를 말하면서까지 해리를 속일 이유는 없었다. 해리는 그가 정말로 전쟁을 막고 싶어 하며, 통제할 수만 있다면 막강한 전쟁 억제력이 될 인식의 문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는 걸 믿기로 했다.
전차가 다니는 길까지 왔을 때 웨슬리의 걸음이 느려졌다. 호위는 여기까지인 듯했다.

  “다음엔 밝을 때 보세나.”
  “그땐 조간신문 대신 보실만한 걸 가져오겠습니다.”

  어떤 목적이건, 웨슬리 역시 빛의 힘을 이용하려는 세력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힘은 그저 힘일 뿐, 정말 인식의 문이 가진 힘이 전쟁을 막을 수 있을지 아니면 반대로 이 문을 얻기 위한 전쟁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어느새 사라진 웨슬리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해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1935년 1월 5일
  일식은 한 해에도 몇 번이나 일어나는 천체 현상이며, 20세기의 천문학자들은 이제 그 시기를 예측할 수 있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번 일식이 몰고 올 변화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메트로폴리스 대규모 소요 사태 발생, 미연방 정부 비상사태 선언.’
  ‘저스티스 리그 사실상 괴멸, 케니스 하트의 행방 묘연해.’
  ‘안타리우스 대규모 구호 활동 개시, 구원회 단장 시드니 현장 방문 예고.’

  하나만 해도 반년은 호사가들의 안줏거리가 될 제목들이 아침저녁으로 새롭게 기사화되었다. 메트로폴리스를 혼란에 빠뜨린 괴물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극히 일부였다. 다들 능력자와 관련된 일이라 짐작할 뿐이었고, 기실 대충 맞는 말이었다. 메트로폴리스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 모든 기자가 연일 더 자극적인 기사를 쓰기 위해 경쟁하듯 사막으로 몰려들었고,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시민들과 괴물을 사냥하기 위해 찾아온 헌터들이 도시와 연결된 길을 가득 채웠다.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기사는 케니스 하트의 실종 사건이었다. 저스티스 리그 본부가 습격을 받아 목격자도 없는 상황, 강력한 능력자이며 멜츠 제약의 후계자인 케니스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극했다. 한 가십지 기자는 케니스 하트의 동생에게 형의 실종을 바라보는 심정을 묻겠다고 더 호라이즌을 찾아갔다가 드럼 스틱으로 흠씬 두들겨 맞았다는 기사를 썼다.

  “그러니까 문이 열렸다고요?”
  “네, 살짝 닫혀 있던 문이 거센 바람에 다시 열렸다고 보시면 돼요.”
  “살짝 닫은 게 그랑플람이고 거센 바람이 안타리우스고요?”
  “반만 맞았어요. 문을 닫은 건 그랑플람이 맞지만, 문을 연 건 안타리우스가 아니에요. 바람은 그냥 불어오는 거예요.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죠.”

  해리의 넋이 나간 듯한 질문에 앤지 헌트는 친절한 대답을 돌려줬다. 그간의 조사 결과를 듣고 싶다는 연락에 잠시 잊고 있던 의뢰인의 존재를 떠올린 해리는 황급히 문서를 정리해서 약속 장소로 달려왔다. 해리의 성취는 색다른 방향에서 시야를 넓혀준 의뢰인 덕분이라 해도 무방하니 최대한 성의를 다해 보고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약속 장소에는 선한 눈을 가진 자신의 의뢰인뿐 아니라 가볍게 손을 흔들고 있는 앤지 헌트, 팔짱을 끼고 몸을 틀어 앉은 벨져 홀든이 있었다. 스푼을 내려놓을 때 나는 작은 ‘달그락’ 소리에도 올빼미처럼 눈동자만 움직여 자신을 노려보는 벨져 때문에 차를 씹는지 스콘을 마시는지 도통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물론 그보다 더한 건 앤지 헌트가 꺼내는 대화 주제였다.

문이 열린 후
  앤지 헌트는 문이 열린 순간 칸도르에 있었던 트리비아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트리비아는 전에도 그 빛을 본 적이 있다고 했어요. 빛이 액자 밖에 있었기 때문에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이 트리비아 뿐이었는데, 일단 가까이 가지 말라고 했지요. 하지만 빛은 사라졌고, 트리비아가 그 방향으로 갔을 때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대요.”

  인식의 문은 칸도르의 액자에서 보이는 영역 밖에 있었다. 그리고 40여 년의 여정 끝에 1931년 그랑플람이 결국 칸도르의 황야에 열린 문을 닫았다. 하지만 얼마 전, 다시 거대한 빛의 기둥이 생겼고, 이번에는 괴이한 생명체들이 나타나 트리비아를 공격하려 했다. 트리비아는 일단 그것들을 막을 생각이었지만 ‘어떤 존재’의 등장 때문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레오노르 경에게 미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요. 우리는 트리비아의 연락을 받고 즉시 벨져를 불렀어요. 루이스는 트리비아를 구하기 위해, 벨져는 문을 확인하기 위해 그림자를 넘어 칸도르로 갔어요.”

  칸도르, 액자가 메트로폴리스에 있었기 때문에 그림자로 연결된 두 도시의 동화는 극심했고, 결국 칸도르와 메트로폴리스의 연결이 실체화되었다. 칸도르에서 루이스와 벨져는 격렬하게 싸웠지만 그들 앞의 괴물 수를 일시적으로 줄일 수 있었을 뿐, 결국 수많은 괴물이 액자를 통해 메트로폴리스로 넘어오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액자가 보관되어 있던 저스티스 리그의 본부는 완전히 파괴되고, 저스티스 리그에 소속된 대부분의 일원이 목숨을 잃었다.

  “케니스는 끝까지 액자를 지켰어요. 힘든 결정이었을 거예요.”

  저스티스 리그의 남은 세력은 대부분 더 호라이즌으로 흡수되었다. 더 호라이즌이 나서면서 케니스가 액자를 들고 더 호라이즌에 합류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케니스는 여전히 행방불명이었고 더 호라이즌의 리더 재뉴어리는 그 모든 의혹을 무시로 일관했다.

문, 그림자, 그리고 만남
  상황이 이쯤 되면 더는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다. 지금은 괴물에 대한 의문과 가십이 주를 이루지만, 인간사가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결국 사람들은 이 사태의 원인을 찾아내 죗값을 받아내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이 어디서 시작된 건지 모를 바람이었다고 한다면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해리, 당신이 조사를 계속했더라면 인식의 문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겠죠. 그리고 당신이라면 반드시 사람들에게 알려주려 했을 거예요.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겠지만, 지금처럼 영문도 모르고 피해를 보지는 않았겠죠. 그렇게 자연스럽게 스며들기를 바랐는데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었나 보네요.”

  앤지 헌트는 인식의 문을 다루는 것이 워낙 치명적인 사안이라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고 했다. 아마 그것은 헬리오스의 헨리 밀러 3세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사실 3차 능력자 전쟁에 몰두하던 두 단체의 최상위 수뇌부는 레오노르 드렉슬러의 갑작스러운 면담 요청 전까지 루사노의 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하지 못했다. 아니, 관심에서 제외하고 있었다는 표현이 좀 더 정확하겠다. 하지만 첫 퍼즐 조각이 맞춰지자 앤지 헌트는 곧바로 이글을 통해 벨져와 그의 동행인을 수소문했고, 동시에 빛에 관련된 과거 문헌이나 기록 조사를 선행 과제로 채택했다.

  그러다 최근 자신과 깊은 대화를 나눴던 능력자가 해리에게 어떤 의뢰를 했는데, 의뢰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해리가 찾아내는 정보들이 현안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뒤로 해리의 행보를 지켜보았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어떤 사건이 일어나 본격적인 공표가 이뤄지기도 전에 인식의 문은 열리고 말았다. 물론 그랑플람이 지금 이곳에 남아 있었다 하더라도 문 건너편에서 문을 열고 돌아오는 귀환자를 대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거, 참. 내가 들을 말이 아주 많을 것 같군요.”
  “제 입장을 이해하고 용서해 주신다면, 곧 열릴 회사와의 대담 내용을 정보로 드리죠.”

  칸도르에 문이 열린 후 세계 곳곳에서 빛이 치솟았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갑자기 솟구치는 빛은 인식의 문과 비슷해 보였지만, 그것들은 불완전한 뒤틀림이었다. 앤지 헌트는 문이 열려 있어서 생기는 이 흔적을 문의 그림자라고 칭했다. 비록 진짜 문이 열린 것은 아니었지만, 빛 주변의 생태를 변화시키거나 괴물을 불러들였기 때문에 여기저기 새로운 전장이 생겨났다. 칸도르와 가장 동화된 메트로폴리스에는 문의 그림자가 특히 더 많아, 모르는 사람이 먼발치에서 보면 장관이라는 경탄을 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유로운 마음을 품기에는 눈앞의 아비규환이 너무나도 생생한 상태, 능력자와 비능력자 모두 시대를 이끄는 단체들의 결단을 갈망하기 시작했다.

  “안개를 둘러싼 대립을 멈출 수는 없겠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전쟁을 준비해야 하겠군요. 레오노르 경이 수고해주신 덕에 명왕과의 대담이 가능해졌으니 이번에는 각별한 성과가 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