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오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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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4 10:51:25
* 이 글은 픽션(fiction)입니다. 특정 단체ㆍ사건ㆍ사상ㆍ종교와 무관함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 이 소설을 있게 한 스튜디어 EIM의 작곡가 이영광 님을 기리며 ~
뭍이 보이기 시작했다. 먼발치서부터 조금이라도 더 빨리 보고 싶다는 염원이 통했는지 부두엔 해무가 끼지 않았다. 입술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정월 초하루를 앞둔 철이라 날이 차고 뱃머리에 서서 바닷바람을 고스란히 맞고 있었으나 추워서는 아니었다. 가슴 속에 오랫동안 묵혀둔 슬픔이 곧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아 입을 세게 앙다물고 있는 탓이었다. 눈물을 흘려서는 아니되었다. 기껏 쾌청한 날씨가 반겨주는데 부러 흐린 풍경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울지 말아라, 울지 말아라.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찬바람에 식히듯 부릅떴다.
단호하게 어깨를 안기었다. 지긋이 올려다보니 하랑은 이쪽을 보지 않고 있었다. 린은 하랑의 어깨에 살며시 고개를 기대었다. 사람의 체온이라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여 서늘한 옷자락을 뚫고 서서히 스민다. 하랑은 린의 정수리 위 최적의 위치를 찾듯 턱으로 몇 번 더듬거리다 자리를 잡고 머리를 쌓았다. 다정한 무게감에 린은 울상으로 웃었다. 안구를 짓누르듯 눈꺼풀을 세게 닫았다. 찬 두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은 바람이 시린 탓이라고 말없이 변명했다. 소매로 눈가를 슥슥 문지르는 사이 한층 성큼 고향에 다 와 갔다.
조선 아니, 대한민국이 저만치에 있었다.
배가 부드럽게 부두에 부딪쳐 나는 진동이 ‘드디어’라는 생각과 함께 온몸을 전율시켰다. 닻이 내려가고 배가 매였다. 선실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나와 지루한 선상 생활도 이젠 안녕이라는 듯 서둘러 작별을 고하려 하고 있었다. 가교(假橋)가 설치되고 승객들이 앞 다투어 내리기 시작했다. 마중 나온 이와 뜨겁게 포옹을 나누는 이도 있고 새삼스러울 게 없다는 듯 혼자 성큼성큼 목적지를 향해 곧장 가버리는 이도 보였다. 이제는 도리어 낯설어진 모국의 말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아아, 이곳은 내가 나고 자란 나의 고향이라는 생각이 물씬 들자 하루 빨리 도착하기만을 바랐던 마음이 무색하도록 설렘은 가라앉고 친숙함만이 감돌았다. 눈을 꼬옥 감았다가 떠도 눈앞의 풍경은 사라지지 않는다. 언제나 감은 눈꺼풀 뒤로 투사되어서만 보이던 고향이 지금 바로 이 앞에 있다. 실감이 심장을 관통하자 기쁨은 알알이 눈물로 흘렀다.
“어, 어어, 야야! 다들 어디 가! 신호님! 숭숭이! 배암! 쥐돌이에……관우 형까지!?”
하랑이 왼쪽 가슴께를 짚으며 만류하듯 허공으로 손을 내뻗었다. ‘수호령들 주제에 저래도 되는 거야?’라며 입을 샐쭉이다가 툭 놓아버리듯 웃어버린다. 린도 따라 부드럽게 미소를 머금으며 제 눈엔 여전히 사람밖에 보이지 않는 앞을 보았다. 신들에게 고향이란 여기 아닌 어디라도 될 것이나, 본디 하랑의 아버지가 모시는 신이었던 그들도 필시 오랜만에 반가운 곳을 찾아 기쁜 나머지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있는 것이리라.
짐을 챙겨 가교를 다 건너자마자 하랑이 바닥에 짐을 내려놓았다. 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보았다. 하랑은 씩 웃으며 주머니에서 고이 접어둔 흰 천 같은 것을 꺼냈다. 한 귀퉁이를 잡고 빨래 털 듯 펼쳐 들었다. 세진 않지만 간헐적으로 일렁이는 바닷바람에 펄럭이는 그것은 태극기였다.
하랑은 음양과 건곤감리의 위아래가 바로 되어 있는지 내려다보았다. 열일곱, 린이 처음 만난 그때와 변함없이 대담한 눈빛으로 주변을 슥 둘러본 뒤 별안간 여기저기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목청 터져라 한 마디를 연거푸 외쳐댔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장정이 들판을 뛰노는 망아지마냥 까불까불 인파를 휘젓는 모습은 경망스러울 법도 했다. 허나 부두에 있는 그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일제의 총검을 피해 달아났다가 해방 뒤 다시 부랴부랴 모국으로 돌아오는 일도 잦다. 광복의 기쁨은 조선땅을 비로소 다시 밟았을 때야 절감하게 된다는 것을 하나같이 이해했다.
목 놓아 우는 사람은 많이 봤어도 덩실덩실 춤을 추는 청년은 처음이었다. 절실한 기쁨이 반드시 눈물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랑의 신명은 이미 충분히 해방의 기쁨을 누린 이들의 여운도 더 길게 자아냈다. 겨울 바닷가의 추위를 사르고 따뜻한 대동(大同)의 기운이 흘렀다. 함께 너울너울 춤추는 사람은 과연 없지만 소심하게 또는 자신 있게 만세를 얹고 가는 이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겹쳤다.
“대한 독립 만…….”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가 슬픔에 메어 말을 끝맺지 못했다. 양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은 무심코 흠칫할 정도로 뜨거웠다. 눈물 자국이 금방 식어 그 위를 새로운 눈물이 덥히기를 반복했다. 기뻐야 하는데 어찌 가슴엔 아직도 맺힌 게 많은지 아렸다. 두 손으로 가슴을 쥐어뜯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콧물도 비죽이 흘러나왔다. 필시 몹시도 보기 흉한 얼굴일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부여잡고 있지 않으면 울음을 있는 대로 게워낼 것 같다. 하랑이 전염시켜놓은 기쁨에 차마 통한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항구에서 사람들이 거의 다 빠져나가고 드문드문해질 때쯤에야 하랑은 린의 곁으로 돌아왔다. 한겨울인데도 겅중겅중 뛰어다녀 몸에 열이 나는지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있다. 두 뺨과 코끝은 한바탕 눈싸움을 하고 난 뒤의 소년마냥 새빨갰다.
서로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던 하랑과 린은 동시에 볼에 바람을 잔뜩 넣었다 단숨에 쏟아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랑은 린의 얼굴을 가리키며 배를 부여잡고 푸하하하거렸다. 린은 하랑의 폭소에 이끌리다가도 그렇게까지 웃을 건 없지 않은가 싶어 갑자기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핑 도는 눈가를 닦으며 하랑은 한 손을 들어 린의 얼굴을 잡아 다시 제 쪽을 향하게 했다. 처음엔 부끄러운 듯했다가 이젠 적이 섭섭함이 묻어나는 얼굴이다. 하랑은 태극기를 들어 린의 젖은 눈매를 닦아주었다. 국기라는 점이 황송하여 린은 그 손을 밀어내려다 하랑이 갑자기 코를 쥐어오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랑은 눈을 가늘게 뜨며 히죽 웃었다.
“울다 웃어서 어떻게 됐는지는 이따 밤에 확인해봐야겠……으윽―.”
린은 싱긋 웃으며 하랑의 발을 사정없이 즈려밟았다. 발등을 부여잡고 한 발로 깽깽이 뛰는 하랑에게 태극기를 건네받아 코를 풀고 젖은 눈가를 마저 닦았다.
“소중한 조국의 상징에 코를 푼 것은 소녀밖에 없을 것이옵니다.”
린은 눈물 콧물 범벅인 태극기를 도로 접어 품에 꼭 껴안았다. 겨우 아픔이 가셨는지 찡그린 얼굴과 몸을 바로 한 하랑은 여전히 붉은 린의 눈시울을 힐긋 보며 내려두었던 짐을 들었다.
“조국 때문에 흘린 눈물이니 그 눈물을 닦아주는 것도 조국 아니겠어?”
린은 옹송그린 고개를 들었다. 하랑은 이까지 드러내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가자, 집에.”
“예, 오라버니.”
린은 그 손을 망설임 없이 마주잡았다. 자기가 붙잡은 힘 그 이상으로 굳세게 감싸오는 이 느낌이 참으로 좋았다. 만용에 넘치던 언행은 점차 난관에 부딪치고 씁쓸한 패배를 맛보기도 하면서 신중함과 의로움을 갖추어갔다. 그게 다 사부와 린 네 덕분이라고 수줍음을 감추듯 퉁명스레 말하는 그가 사랑스러웠다.
그 누구도 린과 하랑을 견주어 하랑이 린보다 어른스럽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미 하랑을 하산시키고 다른 제자들 돌보기에 여념이 없는 티엔은 지금도 저놈은 철이 덜 들어 걱정이라고 잘 부탁한다며 린에게 당부하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언제까지 애 취급 할 거냐 이 망할 사부야 하는 하랑에게 린은 고운 말 강좌를 늘어놓기 일쑤였다. 그래도 린의 눈에 하랑은 어엿한 어른이었다. 자유롭고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드로스트 가문은 무수한 악행을 폭로당하고 몰락했다. 미쉘을 비롯한 어둠의 능력자 친구들이 린을 구해주었다. 조국까지도 이젠 오랜 밤에서 깨어 여명을 맞이했지만, 린은 아직도 자기가 한국에서 네덜란드로 입양되어 가는 열여섯 계집아이인 채라고 생각했다.
* * *
“히야- 어찌 하나도 변한 게 없어. 이놈의 동네는.”
서울서도 도성 서녘 변두리에 있는 작은 마을 어귀로 들어서며 하랑은 감회가 새로운 듯 말했다. 지긋지긋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 같아도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동네 풍경을 눈에 담기 바쁜 눈길에는 숨기지 못할 그리움이 묻어났다. 영리하고 꾀도 잘 부려 고지식한 티엔을 놀려먹는 데 선수인 건 문제라 치더라도, 린은 처음 만났을 때와 변함없는 하랑의 이 순수한 소년 같은 면모가 좋았다.
“근데 린아, 정말로 괜찮겠어? 느이 동네에는 안 가 봐도…….”
부지런히 고개 돌리기 바쁘던 하랑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린을 보았다. 괜한 염려를 끼쳤다는 미안함의 한편 하랑의 속 깊은 배려가 기뻐 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번 귀성길은 오라버니가 나고 자란 곳을 보고자 함이었으니 소녀는 신경 쓰지 마시옵소서. 가고 싶어지면 얼마든지 갈 수 있는 거리일 터이니 걱정 없사옵니다.”
실은 돌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은 숨겼다. 드로스트 가문을 나오고서 바로 고향부터 찾았다. 집을 찾아, 부모님을 찾아왔지만 집도 부모님도 온데간데없고 린을 기억하는 사람들조차 변변히 없었다. 일제의 군화발이 짓밟고 들어오자 저 멀리 만주땅까지 아예 이주해버리고 돌아오지 않은 사람도 많으니 당연할만도 했다. 하랑은 10년이 지나도 하나도 변한 것 같지 않다고 하지만, 린에게 고향은 이제 이름뿐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반겨주는 이 하나 없는 막연하고 쓸쓸한 그리움의 초상.
“에그머니나! 너, 너……하랑이냐?”
길 맞은편에서 카랑카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살처럼 날아들었다. 흰 치마저고리에 무명 머릿수건을 한 여인은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하랑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인의 팔에 들려 있던 것이 분명한 대바구니는 바닥에 나동그라져 푸르죽죽한 시래기를 여기저기 흩어놓았다. 린은 아는 분이옵니까 하는 얼굴로 하랑을 곁눈질했다. 하랑은 잠시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웃었다. 손을 머리 위로 들고 크게 흔들며 여인에게 다가갔다.
“장 아줌씨 아냐? 우와― 진짜 이게 몇 년만이오? 그래. 나요, 나! 이하랑이!”
여인 장하주는 성큼 다가선 ‘낯선’ 청년을 보고 눈도 입도 다물지 못하고 넋 놓고 쳐다보았다. 하랑은 쑥스럽기도 하고 어쩐지 코끝이 찡한 것 같기도 해서 정신 못 차리고 있는 하주를 대신해서 쭈그리고 앉아 널브러진 시래기를 바구니에 주섬주섬 담았다. 린은 하랑과 여인을 번갈아 보다가 조심스럽게 하랑의 옆으로 가 함께 시래기를 주웠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이러고 있을 게 아니지. 이보오, 박수네! 나와 보시오! 나와서 누가 왔는지 좀 보아!”
하랑과 린이 엎어진 시래기를 다 주워 담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차에 하주는 손뼉을 딱 마주치며 골목 어귀에 있는 한 집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린은 여인이 달려든 그곳이 하랑의 고향집임을 직감했다. 하랑은 ‘호들갑스러운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니까’라고 중얼거리며 짐과 바구니를 들고 하주가 먼저 간 길을 그대로 따라갔다.
“신을 떼버린 지 언젠데 아직도 박수 타령인 게야. 대낮부터 왜 이리 소란이오?”
“일단 퍼뜩 나와 보라니까!”
“죽은 여편네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난 것도 아니거들랑 호들갑 좀 그만…….”
하주의 성화에 못 이겨 이명은 마지못해 안방에서 나와 마루로 발을 디뎠다. 간밤에 꿈자리가 유독 사나웠다. 떨쳐버렸음이 분명한 신령들이 알 수 없는 말로 저들끼리 소곤거리며 밤새 머리맡에서 떠들어댔다. 가뜩이나 신경이 곤두서 있던 차에 요란 떠는 하주에게 한 마디 쏘아붙여 주려고 나왔다. 마당에 선 사람을 발견하고는 당초의 목적은 말끔히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여어, 아부지. 아들 왔소.”
하랑은 하주와 마주쳤을 때보다도 더 머쓱하고 어색한지 괜히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언 10년만에 밟는 고향땅에 그만큼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였다. 하랑은 지난 세월 동안 자란 반면 명은 늙었다. 조선땅을 뜰 때만 해도 검던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웃을 때나 보이던 주름이 이제는 무표정이어도 푹 패어 있다.
다른 사이퍼들을 물색하기 위해 조선에 1년에 한 번 꼴로 출장을 다녀오곤 하는 티엔 편으로 편지를 부치는 게 고작이었다. 그냥 잘 있다고 소식만 전하면 됐지 그 편지도 티엔이 쓰라고 해서 쓴 거였다. 답장은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다. 티엔도 그저 ‘잘 계시다’라고 간략한 안부만 전해주었다. 그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건 하랑 나름의 각오 때문이었다. 막상 아버지의 얼굴을 보자 뒤늦은 뉘우침이 슬며시 고개를 들 줄은 몰랐다.
명은 망부석마냥 굳어 있다가 그대로 버선발로 마당에 내려와 천천히 하랑에게 다가섰다. 하랑은 어릴 적에 이런 부친의 얼굴을 많이도 보았다. 격렬한 춤사위 뒤에 망자의 혼을 몸에 받아들이고선 굿을 청한 유족에게 다가서는 그 순간의 표정과 비슷했다. 멍한 듯 황홀한 듯 오직 눈앞에 있는 사람 말고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한 그 꿰뚫는 눈길 그 자체였다.
두 손을 뻗어 얼굴을 어루만질 듯하다 결국은 가 닿지 않고 명은 손을 내려 하랑의 어깨를 꽈악 붙잡았다. 눈빛도 바뀌어 도저히 10년만에 만난 그리운 아들에게 보이는 거라곤 할 수 없을 정도로 엄한 눈길로 꾸짖었다.
“호기만장해서는 겁도 없이 훌쩍 가버릴 땐 언제고 이제와서 뻔뻔히 기어들어오느냐! 사내놈이 한 번 뜻을 품었으면 뭐든 이루고 돌아와야지. 보아하니 자란 건 키뿐인가 보구나!”
“감동의 재회 같은 건 나도 근지러워서 바라지도 않았지만 하나밖에 없는 아들내미한테 말투가 그게 뭐요? 하여간 노친네 안 본 사이 성질이 더 나빠지셨네!”
“……망할놈.”
입술을 삐죽이며 말대답하다가 하랑은 갑자기 고개를 숙여버리는 명을 보고 눈을 크게 벌렸다. 명은 아들의 어깨를 몇 번 퍽퍽 내려치고는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뒤로 돌아섰다.
“망할놈…….”
매몰차게 등을 보인 명의 어깨가 소리없이 떨리는 것을 보고 하랑은 아버지가 울고 있음을 눈치 챘다. 사니로서 여자처럼 치마를 입고 일부러 높은 목소리로 바리신의 내력을 절절이 읊는 아버지였으나, 굿 밖에서는 자상함과는 거리가 먼 딱딱한 가부장에 가까웠다. 적어도 하랑이 신당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할 적부터는 쭉 그래왔다. 그런 부친의 눈물이 낯설었다.
어찌 할 바를 몰라 시선을 헤매던 하랑은 린을 쳐다보았다. 린은 조용히 눈물을 훔치다 하랑에게 눈짓하며 명이 있는 쪽으로 고갯짓했다. 하랑은 쭈뼛쭈뼛 명에게 다가가 어쩐지 작아진 것 같은 아버지를 서툴게 부둥켜안았다. 명은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망할놈’을 또 다시 거듭 중얼거리며 하랑의 등을 퍽퍽 후려쳤다.
“……잘 왔다. 잘 왔어.”
“다녀왔소.”
린은 부자의 상봉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내색이야 않았지만 하랑이 속으로 얼마나 아버지를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다. 린에게 이번 여행은 해방된 조국을 찾는 상징적인 것이라면, 하랑에게는 그것을 포함해 오랫동안 못 만난 아버지를 찾아뵙는 일이었다. 어느 쪽이 더 절실하고 감격스러울지는 비교도 안 되었다.
문득 외로워져 린은 무심코 제 팔을 스스로 감싸안았다.
* * *
쌀이 끓고 밥이 다 되어 가는지 야릇한 냄새가 잊고 있던 허기를 상기시켰다. 진지한 눈길로 선전포고를 하는가 싶더니 나몰라라 ‘아 배고프다’라는 말을 태평스레 잇는 아들을 보며 명은 헛웃음도 터뜨리지 못했다.
아무리 본인이 하고 싶고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다고는 하나, 지체 높은 양갓집 출신이 분명한 린이 진지를 지어 올리겠다는 말에 명은 좌불안석이었다. 거들겠다고 말은 못할망정 자기가 원하는 반찬을 말하는 아들놈이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저 곱고 단아한 아가씨가 뭐가 모자라서 아들과 연인이 된 건지 모르겠다. 신을 떠나보내고 나서 후회한 적은 없었지만 지금이야말로 그 순간이 아닌가 싶다. 버린 신의 힘을 빌려서라도 하랑과 저 고귀한 아씨의 인연을 점쳐보고 싶었다.
자질구레한 근황을 묻는 부자간의 무뚝뚝한 대화가 오가는가 싶더니 하랑은 대뜸 자기 혼자 결정한 일을 통보해왔다. 이제 더 이상 그럴 자격은 없을지 몰라도 명으로서는 도무지 용납되지 않는 일을 하겠노라 아들은 밑도 끝도 없이 주장했다. 강단 있는 눈빛을 보고는 한눈에 어린 시절의 아들과는 달라졌음을 알아보았다. 린을 소개받고는 한 여자를 사랑하고 지킬 줄도 아는 사내로서 장성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명의 영안(靈眼)은 녹슬어버린 지 오래이니 그 판단은 틀렸을지도 몰랐다. 명은 진심으로 아들을 노려보며 무거운 침묵을 깼다.
“거짓부렁을 하겠다 이 소리냐?”
“거짓부렁이라니! 난 진심이라구. 내가 지금 아버지랑 농담이나 따먹자고 이런 소리 하는 줄 아쇼?”
“자격도 없는 놈이 감히 넘봐선 안 될 일을 하겠다고 설치는데 지금 그걸 나더러 진지하게 받아들이라는 소리냐? 지나가는 개가 웃겠구나.”
“아이씨, 이리 비협조적으로 나올 거요? 그냥 아부지는 보고 모자란 점만 고쳐주면 된다니까? 돈도 내가 다 마련해왔소. 저쪽서 나라가 독립했다는 소식 듣고 나서부터 내가 얼마나 연마했는지는 일단 보고나 판단하쇼. 어릴 적 어깨 너머로 구경했던 거랑 저쪽서 만난 요상한 여인네한테 시달려가며 청해 배운 거랑 합쳐서 썩 나쁘진 않게 한단 말이오.”
“널 가르칠만한 자가 있었단 말이냐?”
“그 뭣이냐, 고스트바스터인가 엑소시스트랬나. 저쪽에선 악령을 쫓는 일에 특화되어 있어서 좀 다르긴 한데 성남서 신딸로 수련했다던 여자가 있소. 실력은 좋은데 승질 한 번 개판이라……. 으으, 진짜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다행이지.”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는지 팔뚝을 문지르며 몸을 부르르 떠는 하랑을 명은 잠시 말없이 보았다. 거짓을 고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거짓인지 아닌지는 보면 곧바로 알 수 있다. 그래도 미심쩍은 것은 어쩔 수 없다. 아니,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아예 용납되어선 안 될 일이라는 생각을 못 떨치겠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이냐? 제사상을 극진히 차리고 성묘하지 않고…….”
“그게 가능했다면 내가 왜 진작 안 그랬겠소? 못 하니까 이 방법을 택한 거지.”
하랑은 답답하는 듯 한탄하고선 안방에서 부엌으로 통하는 문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더 정확히는 문 너머에서 바쁘게 오가며 정갈한 밥상을 차리고 있을 린을 바라보는 눈길이었다.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울었소.”
“…….”
“조국이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저 아이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눈물만 뚝뚝 흘렸소. 해방이 기쁜 일임에는 틀림없으나 나라가 자유를 되찾아도 서린이는 이미 소중한 것을 다 잃어버린 뒤였소. 나는 린이 한 번쯤은 맘 놓고 목 놓아 울었으면 좋겠소. 나한테 자격이 없다는 건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내가 제일 잘 아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 해주고 싶소. 이런 부탁을 할 사람도 도움을 받을 사람도 아버지밖에 없으니까. 염치없다는 건 나도 아오. 하지만 난 진심이라구…!”
저도 모르게 높아진 언성을 걱정하며 하랑은 슬쩍 부엌문에 눈치를 주었다. 다행히 부엌에선 끊임없이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명은 하랑이 거듭 강조하는 진심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다만 진심만 가지고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여전히 지배적이었다. 허락을 하든 안 하든 하랑은 이대로 밀고 나갈 기세인 듯하지만.
“그럼 그 동안 저 아씨는 어쩔 셈이냐.”
“어?”
“네 말마따나 이젠 연고라곤 없는 이 땅에 저 아씨를 홀로 놀릴 셈이냐? 말해두지만 일단 하겠다고 한다면 결코 호락호락하진 않을 것이다. 내 비록 지금은 한낱 필부에 지나지 않지만 옛일은 모두 어제처럼 몸에 배어있으니 말이다.”
“…….”
“그래도 하겠다는 것이냐?”
“……그래. 그래도, 하겠소. 할 거야. 자기만족일는지는 몰라도, 린이를 위해서.”
잠시 괴로운 듯 미간을 죄고 있다가도 끝내 결의에 찬 눈을 유지하는 하랑을 보고 명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입을 열었다.
“……좋다.”
“어, 어어……. 지, 진짜? 진짜지? 무르기 없기요?”
하랑을 활짝 얼굴을 피며 하늘을 향해 신나게 주먹을 내질렀다. 명은 못내 씁쓸하게 웃었다.
아들은 나와 다른 길을 가게 해달라고 기도했건만 신은 들어주지 않았다. 이제 명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아들의 곁에 신들은 여태 계속 있을 터, 신당 문을 닫아버린 것은 만고의 부질없는 짓이었는지도 몰랐다. 신들은 지금도 이 방 안에 있으면서 명을 보고 비웃고 있을까. 그런 신이라면 떼어내기를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문고리를 탁탁탁 치는 소리가 들리고 진지를 올려도 되겠냐는 목소리가 창호지 너머로 전해져왔다. ‘아싸! 밥이다, 밥!’ 하며 하랑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린이 건네주는 밥상을 안으로 들였다. ‘린이 요리 솜씨 끝내주니까 기대하셔도 좋소!’라며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하는 하랑을 보며 명은 어쩐지 저놈 평생 쥐여 살겠구나 하며 아들의 미래를 훤히 내다보았다.
* * *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 버선발에 늘 양갈래로 느슨하게 땋아 내린 머리도 오늘은 하나로 묶어 땋았다. 드로스트 가문에 있으면서 값비싸고 화려한 드레스도 이따금 입어봤지만 린은 이 소박하고 검약한 차림이 좋았다. 포트레너드에서는 오히려 너무 눈에 띄는 차림이라 실내복 정도로밖에 못 입지만 여기서는 마음껏 입고 돌아다녀도 좋았다.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과 그 옷을 똑같이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 이 곳은 실로 고향이었다.
설까지 새고 갈 생각으로 재단에서 장기 휴가를 받아 귀성길에 올랐다. 작년에 광복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오고 싶었지만 그쪽에서도 수습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또 하랑은 무슨 생각인지 일단 포트레너드에서 일력을 기준으로 한 신년을 맞고 나서 달력을 기준으로 한 새해를 고향에서 다시 한 번 보내자고 제안했다. 뿔뿔이 흩어져 살아도 명절에는 다들 반드시 고향을 찾는다. 10년만에 하는 아버지와의 재회에 어떤 계기 없이는 쑥스러워서 그러는 것이리라 짐작하며 린은 속으로 흐뭇해했다.
두꺼운 털옷을 걸침으로써 매무새를 끝내고 마당으로 나갔다. 하랑은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마당을 서성이고 있었다. 겉옷도 없이 저고리에 바지 차림이라 추운지 목을 잔뜩 어깨 아래로 움츠렸다.
“오라버니, 그러다 고뿔드시옵니다. 나들이 가는데 그 차림으로 돌아다니시다간…….”
“저, 그……린아, 있잖아……. 음, 그러니까 나들이 말인데……아무래도 너 혼자 다녀야 될 것 같아.”
“예?”
“같이 돌아보기로 했는데……미안해! 내가 아버지랑 좀 이래저래 할 일이 있어서…….”
하랑은 린한테 미안해 차마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힐금힐금 눈치만 보았다. 궁극적으로는 린을 위한 일을 도모하느라 혼자 돌아다니게 할 수밖에 없는 거지만, 지금 상황만 놓고 볼 때 이게 어딜 봐서 린을 위한 일인지 모르겠다.
멀뚱히 쳐다보던 린이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리자 하랑은 소리없이 허둥지둥했다. 역시 슬프고 화나겠지 싶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외나무다리에 선 기분을 톡톡히 맛보았다.
“저어, 린아……?”
“……후후-.”
“…엥?”
“오라버니, 왜 이리 귀여우시옵니까.”
“어엉?”
하랑은 린이 고개를 들더니 입가를 살짝 가리고 웃는 모양을 보고 얼이 빠졌다.
“송구하옵니다. 소녀가 좀 더 빨리 눈치를 챘어야 하는 것을.”
“……어, 그러니까……뭘?”
“아이, 부끄러워하실 필요는 없사옵니다. 아버님을 오랜만에 뵈어 기쁜 그 마음을 소녀가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부자지간의 오붓한 시간을 소녀 방해하지 않을 터이니 걱정 붙들어 매옵소서.”
“아……어, 음, 그래.”
아무래도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한 것 같지만 그게 사정상 좋으므로 하랑은 구태여 사족을 달지 않았다. 그것도 있지만 린이 일부러 명랑하게 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까닭이었다. 자기 걱정 없이 아버지와 그간 쌓인 이야기라도 나누기를 배려해주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언제나 자기 감정이나 이익보다도 자기를 희생하여 상대방을 먼저 챙겨주기에 여념 없다. 린의 미덕이기도 했지만 단점이기도 했다. 단점이라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하랑으로선 린이 손해 보고 사는 게 싫었다.
“그럼 소녀는 저녁 즈음 돌아올 터이니 염려치 마소서.”
린은 착실하게 안방에 있는 명에게도 다녀오겠노라 인사하고는 하랑의 배웅을 받으며 사립문을 나섰다.
스무 걸음쯤 걷고 나서 린은 집을 되돌아보았다. 이미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는지 마당에 하랑은 없었다. 헛헛한 가슴 한가운데 살며시 두 손을 모아 얹고는 겉옷을 꾸욱 그러쥐었다.
“사실은 갈 곳이 없사옵니다.”
배로 고향에 오는 동안 내내 하랑이 살았던 곳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평소에는 어린 시절에 관해 여간해선 이야기해주지 않았는데 여행길에 들떴는지 재미있는 추억들을 잔뜩 들려주었다. 구체적인 약속은 없었지만 린은 하랑이 그 이야기의 무대로 초대해줄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사실은……외롭사옵니다.”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었던 못된 진심을 자기 귀에도 들릴락 말락 할 만큼 작게 중얼거렸다.
하랑과 명이 상봉하는 그 순간에도 자기 일처럼 기쁘면서도 한없이 쓸쓸했다. 만약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나 또한 저러했으리라, 잠시 환영까지 보고는 더 비참해졌다.
길거리에 나다니는 사람들이 린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스쳐지나가는 익숙한 조국이다. 동양인이라며 신기해하지도 않고 옷차림을 보고 수군거리지도 않는다. 허나 왜 이리도 포트레너드에 있을 때보다도 혼자인 것 같은지 몰랐다.
* * *
명은 피리를 불다 말고 그 피리를 한 손에 쥐고서 하랑의 발뒤꿈치를 사정없이 후드려 쳤다. 하랑은 비명을 지르며 발을 움켜쥐고 바닥에 나동그라져 데굴데굴 굴렀다.
“아오씨, 왜 때리오?”
“말로 해서 못 알아들으면 맞아야지! 몇 번을 말해야 알겠느냐! 연주가 빨라질수록 뒤꿈치를 들고 재게 뛰어오르는 게 중요하다. 자유롭다 해도 규칙이라는 게 있다 이 말이다! 막 방방 뛴다고 되는 게 아니다!”
“아― 젠장. 알았소, 알았어! 근데 쫌만 쉬었다 합시다. 허리고 무릎이고 쑤셔 죽겠소!”
하랑은 에라 모르겠다 냅다 바닥에 큰 대자로 뻗었다. 명은 또 다시 매질할 심산으로 엉덩이를 들썩였다.
“이놈이…….”
“딱 10분이오 10분! 세상에, 저 바를 정 사부보다 귀신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아이고오, 내 팔자야…….”
하랑은 구시렁거리며 왼종일 뛰느라 헉헉거리는 숨을 골랐다. 구들장에 불을 넣지도 않았는데 땀으로 범벅된 아들의 얼굴을 가만 보다가 명은 말없이 피리를 내렸다.
식식거리는 하랑의 호흡도 이내 평정을 되찾고 창호지를 통해 이른 오후의 햇살이 스며들어 노곤히 밝은 실내에는 정적이 흘렀다. 명은 계속 허공만 쳐다보고 있다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계시냐.”
“응?”
“지금 이 방에 신들이 계시냔 말이다.”
“…아니. 없소. 죄다 신나서 지들 마음대로 마실 나갔거든.”
“제압이 더 이상 안 된단 말이냐? 그건 큰일…….”
“아, 아니오. 여전히 내 부적 속에서 영들은 살고 있소. 다만 지금은 벗 같은 거라서 그렇소. 아버지에게는 모셔야 할 대상이었지만 나한텐 일단 부하 같은 거였고……. 뭐어, 나중에 가선 내가 일방적으로 그 힘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신령들이 나와 함께 싸워주는 동지라는 걸 깨달았소. 정확히 설명은 못하겠지만 대강 그렇게 된 거요. 하핫―.”
“……허어, 신기하도다. 신과 그런 식으로 함께할 수 있다니. 기묘하다, 기묘해.”
명은 신당을 닫은 그 날을 새삼 떠올렸다. 문을 닫고 그 앞을 굳건히 지키고 섰어도 신은 아들에게서 계속 눈을 떼지 않았다. 하랑도 명의 어깨 너머로 들리는 신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명은 오히려 신과 하랑 사이를 가로막는 얄팍한 장벽에 지나지 않았다.
한평생 한결같이 모신 신이 자그마한 소원 하나 들어주지 않아 감히 원망했고 노여움을 샀다 그리 여겼다. 그리하여 신을 떼어 버리려고까지 했는데 사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신의 계획에 지나지 않았는가. 신에게 놀아났을 뿐인 명의 인생과 달리 아들은 신과 완벽한 공생을 이루고 있단 소리였다. 지금 드는 이 기분이 분노인지 질투인지 다행스러움인지 감사인지, 또 이 감정들이 아들을 향하는지 신을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한 번 신을 입은 자도 아무리 달아나도 결국 신의 손바닥 안이라 이건가.”
“엉? 방금 뭐라 했소?”
“아무것도 아니다.”
“뭐요, 신경 쓰이게. 아무것도 아님 말구……. 그럼 다시 연습합시다!”
하랑은 읏차-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도 다시 피리를 들고 입가로 가져가려다 주춤하며 하랑을 올려다보았다.
“랑아.”
“왜 그러오?”
“이 아비를 원망하느냐?”
“뜬금없이 그게 뭔 소리요?”
진심으로 모른다는 듯 하랑은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더없이 진지한 명의 눈빛을 보고선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품에서 부적을 꺼내 촤악 부채처럼 펼쳐 보였다.
“난 아부지가 양중이라 부끄러운 적은 없었고, 오히려 아버지가 무당이었기에 나는 이 힘을 얻은 거나 마찬가지요. 이 힘이 있었기에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었고 린이도 만났지. 내가 지닌 힘은 무당과는 다르지만서도 영력이라는 점에서 나는 아버지의 혈통이라 이거 아니겠소? 신당을 막아설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심정도 이제는 아오. 하물며 나라가 이름을 빼앗겼을 때였으니. 저 쪽빠리들은 우리것은 뭐든 짓밟으려 하지 않았소. 순사들의 그 으스대는 위협까지 내가 이어받지 않기를 바라셨을 테지. 원망 따윈 요만큼도 안 하오. ……오히려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되오.”
하랑은 마지막 말은 기어들어가듯 하고는 이런 건 성미에 안 맞는다는 듯 ‘아아아아―’ 하고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거칠게 훑었다.
“아으, 더워. 냉수 한 사발 들이켜고 오겠소!”
명은 문을 박차고 도망치듯 나가버리는 하랑의 뒷모습을 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다시금 허공을 눈으로 좇았다.
“거기 계시지요?”
대답은 없다. 했을지 몰라도 명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아들놈을 이태 지켜주셔서 고맙소.”
한때 몸주신이었던 존재들을 섬기던 자로서가 아니라 일개 아버지로서 고했다. 순간 언젠가 한 번 느껴보았던 감각이 명의 안에 잠깐 들어왔다가 나갔다. 명의 의지와 관계없이 모셨던 신 중에서 가장 강력한 영인, 신호(神虎)의 영이 몸을 사로잡고 아들에게 달려들었던 그날의 느낌과 비슷했다. 다만 거스를 수 없는 절대자에게 꼼짝없이 속박 당한 느낌이라기보다는, 어린아이가 인자한 노인에게 머리를 쓰다듬어지는 것과 같은 기분이라는 점에서 아주 달랐다.
“……고맙소, 고맙소…….”
명은 거듭 감사를 올리며 두 손을 꽉 모아 잡고는 그 위로 얼굴을 묻었다.
* * *
네 살배기와 세 살배기가 손을 꼭 잡은 채로 잠든 천사 같은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린은 고개를 들어 성모 같은 소꿉친구를 보았다.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셋째 아이를 품에 안고 젖을 먹이고 있다. 방 안으로 안내받고 앉자마자 갑자기 옷고름을 푸는 옛 벗을 보고 린은 소리없이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눈치로 왜 그러냐고 되물었다. 지난 10년 사이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된 소꿉친구와 아직 혼인조차 않은 스스로의 차이가 그 이상 강렬하게 와 닿을 수 없었다.
린은 여느 때처럼 아침식사를 마치고는 집을 나섰다. 한겨울인지라 멀리 바깥으로 나돌기엔 서울의 추위는 기억하는 것보다도 훨씬 매서웠다. 하랑이 예전에 다닌 보통학교가 있다고 들은 5리 정도 떨어진 데 가보기로 마음먹고 나섰다가 장터에서 얼핏 이름을 불렸다.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싶어 동명이인이겠거니 했는데 곧 눈앞에 기억 날 듯 말 듯한 얼굴이 나타났다.
양손에 아이 둘의 손을 잡고 또 한 아이는 업은 채로 꽤 무거워 보이는 보퉁이까지 한쪽 어깨에 둘러메고 있는 여인이었다. 같은 나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이른 고생의 흔적이 역력한 얼굴에 곧바로 알아보지는 못했다. 여전히 반짝이는 순진한 눈망울 하며 웃으면 하회탈처럼 변하는 정겨운 인상을 뒤늦게야 기억을 뒤져 찾아내고는 한 동네에 살았던 소꿉친구 박연지임을 알아보았다.
북적대는 시장통에서 해후를 나누기도 뭣해 집으로 가자는 제안을 거부하지 못하고 방문했다. 불을 피운 뜨뜻한 아랫목에서 큰아이 둘은 금세 잠들어버렸다. 젖먹이도 이제 배가 부른지 젖을 놓고 새근새근 숨소리를 냈다. 그저 침묵보다도 세 아이의 자그마한 숨소리를 듣는 편이 더 평화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참!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애 낳으니 건망증이 도져서 원.”
“응? 왜 그러니?”
“너한테 줄 게 있거든.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여태 보관한 보람이 있네 그려.”
“무어길래?”
“너네 부모님께서 나한테 맡기신 거. 막상 건네받을 땐 네가 언제 다시 조선땅 밟을 줄 알고 나한테 이걸 주나 싶었는데 세상사 참 신통하다니까.”
린은 예상치도 못한 말에 꿈쩍도 못하고, 연지가 막내아이를 잠시 바닥에 내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장롱 안을 뒤지는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다.
연지에게 당신들을 대신해서 전해달라고 하신 것은 손수 전해줄 수 없음을 예감하셨기 때문일는가. 이제는 다 떨쳐버린 알았던 비통함과 역사의 뒷전으로 사라진 드로스트 가문에 대한 분노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국을 유린하다 겨우 도망치듯 나간 일제에 대한 증오가 한꺼번에 치밀어 린은 찢어져라 치맛자락을 틀어쥐었다. 얼굴에는 결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드로스트의 사람으로 있으면서 가장 먼저 익힌 특기였다.
연지는 곧 제법 커다란 보따리 하나를 린 앞에 내려두었다. 원래 주인이지만 허락이라도 구하듯 린은 연지를 쳐다보았다. 연지가 어머니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조금 흔들리는 손으로 보자기 매듭을 풀었다.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 펼쳐진 보자기 위에는 낯익은 것들로 가득했다. 아버지가 특별한 날에만 입고 출타하신 물색 두루마기와 갓, 어머니께서 막 시집오셨을 때 입으셨다는 눈부신 상앗빛 저고리, 분홍색 치마, 하늘색 조끼 그리고 남색 조바위가 들어있었다. 그밖에도 문방사우나 빗, 옥비녀 같은 물건들이 깨끗한 무명천에 각각 따로 싸여 있었다.
린은 아버지의 두루마기와 어머니의 치마를 함께 펼쳐들어 꼭 끌어안았다. 그리운 향내 같은 건 세월에 다 쓸려나가고 오랫동안 장 안에 틀어박혀 있던 옷감 특유의 쿰쿰한 냄새뿐이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머, 린아. 이거…….”
연지는 두루마기 끝자락을 들추더니 무언가를 주워들어 건넸다. 오래되어 삭은 종이를 접어놓은 것 같은 그게 편지임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물건도 물건이지만 아마도 부모님께서 진정으로 남기고자 했던 것이 이 편지라는 것도 쉬이 알 수 있었다.
춥지도 않은데 달달달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건네받다가 떨어뜨렸다. 연지는 다시 주울 생각도 못하고 바닥에 떨어진 편지를 두려워하듯 쳐다보고만 있는 린을 물끄러미 보았다. 보다 못해 엉덩이를 들어 성큼 린과 더 가까이 마주보고 앉아 대신 편지를 주워 린의 손에 꼭 쥐어주었다.
격려해주는 연지의 두 손에 힘입어 린은 천천히 편지를 열어보았다. 틀림없는 부친 한현수의 필체였다. 정갈하고 힘 있는 이 글씨를 린은 어릴 적 멋도 모르고 흉내 내고는 했다. 고사리 같은 손이 아니라 염동력으로 붓을 놀리는 여식을 보고 당신들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서린이 보아라.
네가 이 서신을 보고 있을 즈음에는 나와 네 어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죽음이 두렵지는 않구나. 조국을 위해 저 천하의 금수만도 못한 도적의 무리와 맞서 싸우다 가는 것이니 행여 억측은 말거라. 이 아비와 어미는 너로 인해 죽는 것이 아니다. 대한의 독립의 위해 죽노라. 그에 무슨 수치와 회한이 있겠느냐.
재물과 너를 맞바꾼 것이나 다름없는 이 못난 아비와 어미를 원망하여도 좋다. 허나 조국은 미워 말거라. 오로지 통한스러운 것이 있다면 이 두 눈으로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는 것뿐이도다. 우리가 못 본 조국의 푸르른 하늘을 부디 서린이 네가 대신 보아주기만을 바랄 따름이다. 부디 몸 조심하거라.
“읏-.”
린은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어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억지로 삼켰다. 넘쳐흘러야 하는 것이 억지로 맺혀 있으니 가슴께가 손 쓸 수 없는 병에 걸린 것처럼 아팠다. 억누른 것들이 일제히 받기를 들고 일어서 우르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기세였다.
아무리 조국을 위해서라지만 큰 돈을 받고 팔아치우듯 이양으로 자식을 보내버린 당신들이 미웠다. 사실은 낯선 이국으로 가기 싫다고 아이처럼 떼쓰고 싶었다. 어버이의 목숨을 담보로 위협하는 드로스트 가문에 대해 치를 떨며 분노하면서도 애초에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없었을 일이라며 끝까지 부모를 탓했다. 정작 어버이는 린이 드로스트 가문에 대항하려고 했던 탓에 돌아가신 거나 다름없는데 딸을 나무라지 않으신다. 대외적으로는 독립운동을 하다 들켜 옥살이를 하던 도중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린이 그 알량한 자유를 놓지 못했던 탓에 당신들은 자유는커녕 삶조차 강탈당하고 마셨는데.
린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불효자식이다. 세상에 둘도 없는 불효자식이다.
잠자코 보고 있던 연지는 더 가까이 다가와 대뜸 린의 뒷머리를 잡아당겨 제 무릎팍 위에 놓았다. 영문을 몰라 린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고개를 들자 연지는 자애롭게 미소 지었다.
“내가 걸핏하면 울어대는 요 망아지들의 엄마 아니겠니. 하나가 더 운다고 해도 문제될 거 없다구.”
“……흑―.”
린은 연지의 말에 결국 필요없는 인내를 내려놓고 치맛자락에 매달렸다. 크게 소리 내어 울어도 괜찮을 텐데 아이들이 잠에서 깰까봐 끝내 숨죽여 눈물만 쏟아냈다. 예나 지금이나 상냥하고 철이 너무 든 소꿉친구의 머리를 연지는 아이 어르듯 다정하게 쓸어주었다.
* * *
반대편으로 돌아누운 지 얼마나 됐다고 하랑은 또 몸을 뒤척여 벽을 보고 누웠다. 똬리를 틀고 반쯤 잠들어 있던 푸른 뱀이 한쪽 눈만 뜨고 혀를 날름거리며 하랑을 쳐다보았다. 눈을 감고는 있지만 인상을 팍 쓰고 있는 것을 보아 잠을 자는 것 같진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몸을 또 뒤집어 반대편 벽 가까이 누워있는 백호 쪽으로 다시 돌아누웠다.
호랑이는 귀를 쫑긋이더니 눈을 떴다.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앞발을 핥았다. 뱀은 그런 호랑이를 보고는 똬리를 풀고 스르르 하랑의 머리맡을 기어올랐다.
“악사가 갑자기 배탈이 난 게 느이 아버지 잘못도 아닌데 왜 이리 제 성질을 못 이겨 안달이냐.”
“…그건 나도 알아. 그래도 이왕 배탈 날 거면 빨리 좀 날 것이지. 그럼 오늘은 린이랑 같이 다녀줄 수 있었는데…….”
하랑은 결국 못 참겠다는 듯 허공을 박차며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막 점심요기를 하고 다시 연습을 재개하려는데 사람 하나가 찾아와 급히 명을 찾았다. 까닭인즉슨 건넛마을에서 오늘 벌어진 굿판에서 장구를 맡은 악사가 무얼 잘못 먹었는지 탈이 나 도저히 연주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속히 도움의 손길을 요청한 거였다. 오늘이 길일로 잡혀 벌린 굿을 도중에 무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고, 명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곧장 그길로 나섰다.
그 탓에 오늘 연습은 물 건너가 버리고 하랑은 갑자기 텅 비어버린 시간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렇잖아도 린과 함께 있어주지 못해 미안했다. 정월 초하루까지는 심신을 정결히 해야 하기에 밤에도 린 혼자 작은 방에서 자게 했다. 얼굴을 맞대는 시간이라고는 아침과 저녁식사를 할 때뿐이다. 지금에 이르러선 어정쩡한 시각이라 곧 돌아올 린을 따라나서기에도 좀 그랬다.
각오한 일이지만 기분은 심히 무거웠다. 티는 안 내도 린은 외로움을 많이 탄다. 너무 많은 것을 참는 데 익숙한 그 아이가 적어도 내 옆에서는 아무것도 참지 않아도 되도록 하겠노라 다짐했건만.
“그렇게 침통해 있을 시간이 있거들랑 연습이나 더 하지 그러느냐. 그게 그 계집을 위한 일일 것 아니더냐.”
거무스름한 쥐가 느긋하게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기 딴엔 현명한 조언을 했다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하랑을 비롯하여 다른 신령들도 ‘저놈 분위기 파악 잘~ 한다~’란 눈으로 쥐를 쳐다보았다. 뱀은 하랑의 무릎 위에서 똬리를 틀고 있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스르르 쥐 앞으로 다가왔다. 잡아먹을 생각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뾰족한 앞니와 날름거리는 혀를 보자 습성이 본능적으로 경종을 쳤다. 쥐는 긴장하며 군침을 삼켰다.
“참……우리 쥐돌 양반께서는 어찌 그리도 입이 바르시오?”
“서생원이라니까!”
“오호라! 주인께서 붙여준 애칭을 소중히 여기지는 못할망정. 아아, 머리가 나빠서 기억을 못 하시는 거겠지요. 쥐돌 선생?”
“이, 이, 용이 되다 못해 하늘을 우러르며 바닥을 기는 반푼이가!”
“……승천하지 못하였어도 나는 더러운 시궁창을 기지는 않는다, 요 쥐돌아.”
“뭣이?!”
“아이 참, 두 분 다 그만하세요! 나리께서 노하시겠어요!”
둘의 언쟁을 빙글빙글 웃으며 관전하고 있던 금빛 원숭이가 뱀과 쥐의 뒷덜미를 각각 양손에 잡고 번쩍 들어올렸다. 쥐는 짧은 팔다리로 찍찍거리며 뱀한테 한 방 먹이고 싶은 듯 허공에서 발버둥 쳤다. 뱀은 가소로운 듯 코웃음 치며 쥐를 외면하면서도 꼬리를 신경질적으로 들썩였다.
“이봐, 잔나비! 너는 어느 쪽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느냐?”
“네? 저요?”
“그래! 있는 거라곤 세 치 혓바닥뿐인 이 간교한 뱀이 나한테 먼저 시비를 걸었잖아?”
“아아, 물론 싸움은 한쪽만 잘못해서 일어나는 게 아니죠.”
“옳지! 그렇지?”
“그래도 생원님이 더 바보 같다는 점에선 변함없는 것 같은데요?”
“뭬야? 이 놈이…….”
“다들 그만두지 못할까.”
가만히 지켜보던 백호가 제지하자 언쟁은 단숨에 마무리되었다. 원숭이는 바닥에 뱀과 쥐를 내려놓았다. 둘은 서로 한동안 노려보더니 흥 하며 서로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걱정되거든 지금이라도 나가보는 게 어떻겠느냐, 아해야. 곧 저녁때라 돌아오는 길일 테지만 마중이라도.”
“음, 도중에 엇갈리면 집에 아무도 없어서 린이가 걱정할 텐데…….”
백호의 머리맡에 직립부동으로 꼿꼿이 앉아있던 붉은 개가 갑자기 문 근처로 다가가 코를 킁킁거렸다. 하랑은 그런 개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관우 형, 왜 그래?”
“비 냄새가 난다.”
“비? 눈이 아니고?”
하랑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젖혔다. 한기만 들이닥쳤다. 처마 밑에서 올려다본 잿빛 하늘에서 비는 오지 않고 있었다. ‘뭐야, 안 오잖아…….’라며 젖힌 고개를 내리기 무섭게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날은 여전히 춥지만 눈이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는지 찬 비가 곧 제법 사나운 기세로 쏟아졌다.
“것 보아라. 천기(天氣)도 그리 말하고 있지 않느냐.”
“허헛, 진짜 그렇네.”
“먼저 나가서 아씨의 위치를 추적하겠습니다.”
호랑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개는 쏜살같이 달려나가 붉은 잔상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어흥 하품하고는 백호도 천천히 커다란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나도 그 아이를 찾으러 나서볼까.”
“으엉? 신호님까지?”
“어디서 비를 피하고 있으면 다행이련만. 잔나비야, 길을 잡거라.”
“예이―.”
붉은 개에 이어 마찬가지로 흰색과 금색의 잔상을 남기고 자취를 감추는 호랑이와 원숭이를 보고 하랑은 어안이 벙벙해 있다가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았다.
“어째 주인보다 더 린이를 챙기는구만. 너네는 어쩔래?”
하랑은 멀뚱히 제자리를 지키고 선 뱀과 쥐에게 물었다. 뱀과 쥐는 서로 슬금슬금 눈치만 보더니 크흠 하고 헛기침만 해댔다. 먼저 나간 셋에 비해 몸집도 작고 다리도 느리니(심지어 하나는 다리 자체가 없다) 지금은 별 도움이 못 된다는 걸 스스로도 아는 모양이었다. 하랑은 아무 말 않고 부적 안에 뱀과 쥐를 거둬들였다.
외투를 걸치고 우산을 받쳐 들었다. 미안해서 매일 어디서 시간을 때우는지 차마 묻지도 못했다. 하랑은 붉은 개가 얼른 린을 찾아내기만을 바라며 비 오는 거리로 나섰다.
5리길을 걸어 되돌아와 린은 하랑의 집이 있는 마을 어귀 서낭당 신목 앞에 섰다. 수령이 자그마치 400년도 더 된 이 노송을 일본군이 못 보았을 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베이지 않고 이 자리에 계속 서있는 것은 그 무뢰배들도 이 나무를 베면 천벌이 내릴 것이라는 말없는 신령함과 장엄함을 느꼈기 때문일쏜가. 색색의 헝겊과 삭은 종이가 달린 왼새끼줄에 둘러싸인 아름드리 소나무는 모든 잡념을 뒤로하고 나무가 보내온 지난 세월만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 신성한 나무 앞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손히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빌었을까. 또 얼마나 많은 신령들이 이 영험한 곳에 머물는지. 어쩌면 아직 저 세상으로 못 가고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도 모이지 않을까.
“어머니, 아버지……. 거기, 계시옵니까?”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하고 어버이가 여태 이승을 떠돌고 있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다만 철없는 그리움에 못 이겨 신목에 손을 올린 채 하릴없이 허공에다 대고 물었다.
관자놀이 밑이 젖어들었다. 한껏 고개를 치켜들고 나무를 우러르고 있는 터라 눈물은 뺨 위를 타고 흐르지 않았다. 눈물 말고 차가운 빗방울이 대신 뺨 위로 내렸다. 투둑투둑 속삭이듯 지면을 치는 작은 마찰음이 곧 솨아솨아 쏟아지는 소리로 이어졌다.
하늘이 함께 울어주고 있다 그리 생각하자 연지의 무릎 위에서 이미 다 펑펑 쏟아버렸을 눈물이 마르지도 않고 다시금 솟았다. 살점을 푹 파낼 듯 싸늘한 빗방울과 피의 온도와 같은 눈물이 얼굴 위로 뒤섞였다.
“엄마, 아빠……보고 싶어…….”
신목을 끌어안고 린은 그 앞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흐느꼈다.
하랑은 린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비를 가려주는 우산을 그냥 접었다.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눈을 가늘게 떠 무겁고 차가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는 곡을 잘하는 것이야말로 화랭이가 가장 잘해야 하는 것이라 누누이 강조했다. 박수 이명의 천도굿이 영험하기로 정평이 나있다는 건 나중에 머리가 커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서야 알았지만 실은 그 전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말을 제대로 떼기도 전부터 들었던 심금을 울리는 처절한 울음을 지금도 기억한다. 망자의 영혼을 입고 구슬픈 곡조를 뽑아내는 아버지의 율목은 유족들은 물론 구경꾼들까지도 서럽게 만들었다. 깊은 슬픔은 절실한 눈물을 자아낸다. 울음은 가슴 속에 돌덩이처럼 응어리져 있던 것을 들어낸다. 그리하여 죽은 자는 한을 떨치고 편히 잠들고, 산 자는 슬픔을 떨치고 남은 삶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사람은 울어야만 힘든 삶을 지탱해나갈 수 있는 연약한 존재다. 누구든 울 자격이 있다. 태어나자마자 다짜고짜 울음부터 터뜨리는 것이 인간 아닌가. 세상 떠나가라 체면 차리지 않고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주장하듯 소리 내어 울 수 있다. 인적이 없는 곳에서조차 빗소리에 숨어 그저 작게 흐느끼는 것만으로는 사람이 속에 담고 있는 한은 풀리지 않는다.
린아, 린아. 애달프고 가여운 내 사랑아.
하랑은 지면을 박차고 린에게 달려갔다. 린을 일으켜 세워 어깨를 잡아 돌리고는 그대로 으스러져라 껴안았다. 린은 놀라서 몸에 힘을 주고 뻣뻣하게 굳어 있다가 곧 사르르 긴장을 풀고 가냘픈 두 손을 하랑의 등 뒤로 돌렸다. 하랑은 린의 머리 위로 깊이 입술을 묻고 있다가 귀에 속삭였다.
“……이틀 뒤 초하룻날에 나는 굿을 할 거다. 린이 너를 위해.”
몸을 움찔했다가 하랑의 얼굴이 보고 싶은지 린이 품에서 떨어져 나가려 했다. 허나 아직 할 말이 남았다는 식으로 일부러 틈을 벌려주지 않고 하랑은 팔에 힘을 더 주었다.
“알다시피 난 무당으로 정식으로 수련 받은 적도 없고, 연습은 했을지언정 미숙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닐 거야. 절차도 원래는 훨씬 더 많고 복잡한데 간소화했고. 얼뜨기가 굿을 한답시고 설쳐서 정말로 이 삼라만상의 신들에게 재액을 당할지도 모르지. 신호님이나 관우 형이 지켜주기야 하겠지만……. 허나 모자란 부분은 성심으로 대신 채울 생각이다. 네가 돌아가신 부모님과 이야기할 수 있게 해주고 싶어. 너는……그리고 네 부모님께서는 ‘괴력난신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말라(不語怪力亂神)’고 한 성인의 말씀을 숭상한 유가의 사람들인데 그래도 괜찮겠어…?”
하랑은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린은 잠자코 품 안에 기대고 있다가 이번에야말로 얼굴을 봐야겠는지 단호히 하랑의 가슴팍을 잡고 밀어냈다. 린의 눈가는 너무 울어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곧 다시 울음을 터뜨릴 것 같으면서도 환하게 웃는 그 얼굴은 꽃보다도 아름다웠다.
“소녀가 이미 괴력난신하온데 꺼릴 것이 무에 있사옵니까?”
린의 말에 하랑은 그저 호탕하게 웃어버렸다.
정말이지 당해낼 수가 없다. 열일곱 만용 어린 패기로 넘쳐나던 그 시절 린을 만나보고 싶더랬다. 하도 그쪽 세계에서 유명하다길래 제까짓 게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 명성은 곧 이 이하랑 님이 꺾어주겠노라 마음먹었었다. 정작 만나보고는 그런 생각은 곧장 버릴 수밖에 없었으니 처음부터 린에게는 진 거나 다름없었다. 지는 건 죽기보다 싫지만 린에게는 져도 상관없었다. 애초에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준 것이 린 아니던가.
하랑은 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린은 하얗게 웃으며 그 손을 꼭 붙잡았다. 애정 어린 믿음이 담긴 손아귀 힘이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두 사람은 말없이도 같은 생각을 했다.
* * *
“하이고- 어쩜 살갗이 이리 고우이? 부드럽기도 비단결이고, 희기로는 신설에 버금가노라.”
“……부끄럽사옵니다.”
하주가 하는 칭찬에 얼굴을 붉히며 린은 젖은 수건 위로 코와 입을 묻었다.
내일 있을 굿의 절차와 린이 취해야 할 행동들에 대해서 하주에게 안내 받았다. 린은 굿의 구경꾼이 아니라 주체로서 굿판에 참여해야 했다. 기본적으로는 지정된 자리에 앉아 하랑이 하는 모양을 보고 몰입하면 그만이지만 각 거리의 내용에 따라 수행해야 할 일들이 몇 가지 있었다. 약식 굿이다 보니 기억해야 할 것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중요한 것은 하랑이 린을 위해주는 그 마음이다. 하주도 의식보다 중요한 것은 성심성의라고 했다. 신들은 본디 아이처럼 제멋대로이고 짓궂지만 아이만큼이나 순수하고 진실된 존재이기도 하다며. 하랑은 신내림 받은 무당도 아니고, 하물며 부적에 가둔 수호령 말고는 다른 영들은 감지하지도 못한다. 강신무라기보다는 영력 체험 없이 교육으로 세습하는 전라 당골에 더 가까웠다. 다만 천지신령에 진심을 호소하며 린의 부모님의 넋을 불러들이는 게 목적이었다.
하주에게 알아두어야 할 것을 들은 뒤에는 내일 굿상에 올릴 음식준비를 도왔다. 돕는다고는 해도 이미 거의 다 끝나서 린이 거드는 거라곤 뒷정리와 확인 작업에 불과했다. 처음부터 미리 알려주었더라면 도왔을 텐데라며 미안함에 몸 둘 바를 모르는 린에게 하주는 웃으며 하랑이 그 녀석이 널 깜짝 기쁘게 해주려 한 것이니 마음 쓰지 말라고 했다. 그 뒤에 무당만큼이나 원래 굿을 청한 이도 몸가짐을 정결히 해야 한다며 하주가 목욕을 시켜주고 있는 것이었다. 한겨울 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호사인지를 알기에 황송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린은 하주의 목욕시중을 받았다.
“그 까불이가 떡하니 색시까지 데리고 금의환향할 줄을 누가 알았겠어. 10년이면 강산도 바뀌는데 역시 사람은 눈이 홰까닥 할 만큼 바뀌는 게지.”
“새, 색시라뇨……. 아직 오라버니와 저는…….”
“혼인을 안 올렸다고? 둘이 만리장성 쌓았으면 부부의 연을 맺은 거나 마찬가지지 뭐.”
린은 부끄러워 물 속에 고개를 처박고 싶었지만 하주가 등을 밀어주고 있어 그러지도 못했다. 귀에 목덜미까지 새빨개진 린을 보며 하주는 ‘사내를 알면서도 이리 숫처녀 같으니 하랑이 그놈 색시가 이뻐서 밤마다 좋아 죽겠구만~’이라며 깔깔거렸다.
“참말로 어른이 되었어. 딱히 사고치고 다니는 사고뭉치는 아니었다곤 해도 어린 것이 지기 싫어가지고 겁대가리 없이 어른한테 덤비고 신한테까지 덤비고……. 그야말로 제 몸이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몸소 험한 꼴 많이 당하고 다녔어. 언제는 한 번 증말 죽사발이 되갖구 왔는데 그 꼴을 하고도 내가 이겼다며 씨익 웃는데 이놈 범상치 않다는 걸 그때만큼 강하게 느낀 적이 없었지. 그래도 계속 그런 식으로 살다간 정말로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서 하랑이 애비도 나도 걱정이었어. 헌데 그 자존심이 비뚤어지도록 강한 녀석이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이리도 의젓해질 줄이야. 참 인간사 신묘허다. 사람은 결국 사람이 바꾸는 게야.”
린은 하주의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들으며 하랑과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했다. 동향에서 온 사이퍼라는 사실만으로 얼마나 가슴이 뛰었던가. 다만 그 당시 하랑은 좁디좁은 조선땅을 벗어나 속이 시원하다는 식으로 나왔고, 더없이 고향이 그립기만 한 린과는 생각이 맞물리지 않았다. 겸손을 모르고 늘 의기양양한 그 태도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같은 조국을 두고 있더라도 마음은 이양 친구보다도 먼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런 그가 지금은 린의 곁을 지켜주는 가장 든든한 아군이라니. 하주의 말대로 사람의 인연이란 웃음이 나올 만큼 기묘했다.
“그게 다 네 덕분일 거다 필시. 하랑이 그놈이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 예쁘고 심성 고운 규수를 맞을 수 있었을 리가 없지.”
“그 반대이옵니다.”
“응?”
“저야말로 하랑 오라버니가 없었더라면 살 수 없었을 것이옵니다.”
“오호- 역시 그 녀석 복 받았군, 복 받았어!”
실같이 가느다란 달이 점점 더 이울었다. 초하룻날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 * *
사립문 기둥에 걸어놓은 홍천륙이 이따금 부는 바람에 펄럭였다. 린은 소복을 입고 합장한 채 눈을 감고 하랑의 목소리와 명의 장구 반주를 들었다. 상산군웅께서 이 피처럼 붉게 나부끼는 옷을 보고 내리셨을 터인가. 부디 내려오실 때 행여 놀라서 화살을 쏘지 마십사, 명의 장구반주는 느긋하고 잔잔했다. 월도를 손에 쥐고 군웅신에게 오늘 이곳을 굽어 살펴달라고 청하는 하랑의 목소리는 차갑지만 깨끗하고 상쾌한 겨울 아침 공기만큼이나 청명했다.
가시문 쇠문 벗고 난향 벌초 가면
염불 받고 바리공주 말미 받고
십대왕 위로하고 극락으로 연화대로 산하여
어버이 몽상 입고 삼밭에 들었으나
눈물 끝에 명을 주고 곡성 끝에 복을 주어
이 상사 석달 삼년 무고하길 비나이다
진오기가 정성이고
만신령님 우춘하고 만조상 대위하는 정성이나
이승 저성 멀기도 하도 할샤
빛 없는 정성에 낯 없는 정성이요
가고 아니 오노매니 눈물 마를 새도 없다
영정가망 놀아나오 부정가망 놀아나오
하랑은 월도를 내려두고 일어서 물이 반쯤 담긴 표주박을 왼손에 받쳐 들고 오른손으로 물을 건져 올려 멍석을 깐 굿청 군데군데 흩뿌렸다. 이어서 종이를 굿상 앞에 놓인 화로에 넣어 불을 붙이고 훌훌 털어버리듯 남김없이 태웠다. 언제 다음 박자가 내려칠 것인지 안달 날 정도로 느렸던 명의 연주도 치솟아 오르듯 빨라졌다가 여운도 남기지 않고 뚝 그쳤다.
옆을 지키고 선 하주가 린의 어깨를 감싸 안고 굿청으로 안내했다. 그 뒤로 일사분란하게 열두엇 정도 되는 구경꾼들이 뒤따랐다.
린은 굿상 바로 옆에 앉은 하랑과 마주보았다. 언제나 장난기 가득한 아이처럼 웃음기를 머금고 있는 듯한 눈동자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석류알처럼 붉은 광채가 나는 오른쪽 눈은 아름답기보다는 범접할 수 없는 경외를 느끼게 할 따름이었다. 린과 똑같이 흰색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긴 머리를 나무비녀로 쪽 지고 있지만 속세의 성별을 떠나 그는 지금 그저 무(巫)였다.
린은 하랑에게 목례하고는 굿상에 놓인 초와 향에 붙을 붙였다. 하랑이 이 굿판에 들 수 있는 온갖 부정을 물렸으므로 마음 놓고 술을 올릴 수도 있었다. 부모님의 넋을 향해 향과 술을 진상한 린은 이제 명의 장구뿐만이 아니라 해금과 피리를 맡은 다른 악사들의 연주를 들으며 굿상에 대고 공손히 절을 올렸다. 눈썹 위로 손을 포개 올리고 바닥에 앉아 허리를 숙이기까지의 일련의 절 동작을 반복하는 동안 하랑은 계속 창을 했다. 린의 부모님의 넋을 위로하고 불러들이기 위한 천도굿이지만 지금 이 거리에서는 린의 앞날에 대한 축원을 주로 담아 노래했다.
하랑의 창이 그치고 악기 연주만이 계속되었다. 린은 절을 다 올리고 나서 굿상 앞이 아니고 측면으로 옮겨 앉아 손을 모으고 부모님을 생각하며 기원했다. 잠시 안방으로 들어가 소복 위에 홍천륙을 걸치고 벙거지를 쓴 하랑이 다시 굿청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오른손에는 부채를 왼손에는 방울을 들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굿을 할 요량이었다. 하주가 잠시 굿상으로 다가와 진설물 중 고기만을 골라 종이로 덮었다. 살생을 불가하는 불교와 도교의 신을 청하기 위한 예의였다.
…………
부하천존 해가 돋아 일월광명 달이 돋아 화산명월 일광월광 양일광요
억만미력 팔만신선 구만불사 놀고 나서
동두칠성 남두칠성 서두칠성 북두칠성 삼태육성 칠원성군 하외 받아 놀고 나서
전씨 가중 조상불사 전안불사 산간으로 처사불사
신불사요 업불사요 복불사에 하외 받고
도당불사 부군불사
부모자손 안의 안당 영골 뺏골
이 고을에 거중을 점지 삼신천왕 제군불사 하외 받아
…………
장구를 치는 명과 마치 대화하듯 창을 주고받으며 노래하던 하랑은 잠시 부채와 방울을 내려놓았다. 굿상 앞으로 나아가 구름 위를 걷듯 사뿐사뿐 좌우로 왔다갔다거리다 불시에 뒤로 조심스레 한 발짝 디뎌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오른발을 오른쪽으로 왼발을 왼쪽으로 비껴 디뎌 쉼 없이 삼각형을 그렸다. 한 발을 딛고 나서 다른 한 발을 모두어 들일 때는 딛지 않고 가볍게 끌어 모으는 삼진삼퇴(三進三退)의 춤이다. 나비처럼 가볍지만 분명한 무게감과 경건함이 있었다.
같은 움직임을 반복하다가 하랑은 한 번 큰절을 올렸다. 방울과 부채를 다시 잡고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어올랐다.
춤이 멎고 음악마저 사그라든 정적 속에 홀린 듯 허공을 응시하던 하랑이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주변을 스윽 돌아보더니 평소보다 한층 낮은 목소리로 신을 입고 공수를 전했다.
잘도 했지 어버이 넋을 달래려고 한껏 위하려고 또 생각하고 궁리하고
그저 부모님 말씀대로 명대로 효도하고 정성 들였으니 참으로 잘도 했지
생각해주어 고맙다고 하신다 너무 고맙다고 우리 새끼 이쁘다고 그러신다
비록 일찍 스러진 넋이기는 하나 앞서 가버린 데 원망은 없으시단다
오냐 돌아가셔서 신이 되어 혼이라도 도와주고 넋이라도 도와주고
무덤 없이도 넋 있는 데는 산수에 꽃이 피고 명당자리 받았으니 걱정마라
린은 눈물 가득한 눈으로 공수를 받잡으며 고개를 연거푸 끄덕였다. 구경꾼들도 남몰래 눈물을 훔치거나 눈을 감고 비손하며 신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신이 나가고 하랑은 다시금 악기 연주에 맞추어 나풀나풀 춤을 추었다. 하주는 고기 위에 올려두었던 종이를 치우고 물러났다. 불교와 도교의 신을 청하고 난 뒤에 이제는 지역 산신과 제석신을 청할 차례였다. 하랑은 굿상 위에 놓인 술을 한 잔 들이켜고 접었던 부채를 촤르륵 펼쳐들었다. 이번에는 방울 대신 월도를 들고 높은 목소리로 새로이 신을 입고 노래했다.
굽이 봅소사 우청룡 좌백호 좌청룡 우백호 청룡백호 내린 줄기
팔도명산의 산신령님 산신 토신은 후토신령님
도당살륭 부군신령 정월 초하루 서북녘에 이 정성을
사실 만큼 사시다가 가셨다고 해도 설워 가엾을 텐데
광명 잃은 나라 이름 찾으려다 비장히도 가셨으니
상청 밑에 꽃이 피게 도와주고 곡성 끝에 영화 들라고 상복 끝에 경사가 나서
석삼년 아홉 해 곱게 나게 도와 드리리다
가지로 진오기 덕 입혀서
………
공수를 다 내리고는 가볍게 도무(跳舞)한 뒤 하랑은 굿상으로 다가가 들고 있던 월도를 조심스레 세웠다. 무구(巫具)를 세워 신께서 인간의 정성을 잘 받아들이셨는지 그 여부를 확인했다. 월도는 한 치 흔들림 없이 굿상 위에 우뚝 섰다.
다음 굿거리를 위해 하랑이 명과 안방으로 들어가자 하주와 그녀의 신딸이 부엌에서 갓 찐 시루떡을 들고 나왔다. 굿을 보며 함께 애도해주는 손들에게 린은 직접 시루떡을 나누어주었다. 객들은 린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며 술과 떡을 정중히 받아가 먹고 마셨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그 중에 연지가 있어 린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연지의 아이들은 떡을 보자 까르륵거리며 한 움큼 쥐고 입에 집어넣기 바빴다. 연지의 남편 제삼은 아이들이 목 막힐라 허둥지둥 물을 먹이려 들기 바빴다. 제삼이 하랑이 조선을 떠나기 전까지 가장 친한 친구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서 린은 이 또한 인연인가 싶어 웃고 말았다.
잠시간 떡을 나눈 뒤 굿판이 다시 정리되었다.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안방에서 새로 옷을 갈아입은 하랑이 모습을 드러냈다. 린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생전에 어머니께서 어떤 차림을 하셨냐고 하랑은 물은 적이 있었다. 여느 여염집 여인처럼 흰색 저고리와 치마를 입으실 때가 많았지만 린은 남치마에 옥빛 저고리를 입은 어머니가 고와서 좋았다고 대답했었다. 분명히 하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복식만으로도 린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눈앞에 나타난 것만 같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하랑이 천천히 마루에서 굿청으로 내려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표정도 걸음걸이도 몸가짐도 분위기조차도 하랑이 아니었다. 인자하게 엷은 미소를 띤 하랑은 멍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은 린의 앞으로 다가와 다소곳이 앉았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을 한 린의 얼굴을 그러쥐고 엄지만을 움직여 눈물이 그렁그렁 달린 린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린아, 내 아가야…….”
여느 때보다도 맑고 고운 목소리가 옥구슬처럼 하랑의 입술 새로 굴러 나왔다. 린은 두 손을 들어 입을 가로막았다. 입을 막았기 때문인지 사슴 같은 눈망울로 쏠린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다정하게 웃고 있던 하랑도 우는 린을 보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린의 두 어깨를 부여잡고 곡성을 냈다. 답답한 듯 가슴과 바닥을 번갈아 치며 린의 존재를 확인하듯 자꾸만 얼굴을 더듬거렸다.
“린아, 내 딸아……. 네 아비와 내가 조국을 위해 스스로 선택하여 걸은 길이었으니 어찌 한 점 부끄러움이 있겠느냐마는, 아직 어린 너를 그리 먼 곳으로 보내버린 것이 못내 한이 되어 이리도 섧구나……. 이 어미가 모질게만 느껴졌겠지. 밉기도 하였겠지. 미안하구나, 미안해…….”
“아니옵니다, 어머니. 소녀는, 소녀는……이제 어머니 마음을 압니다. 잘 압니다…….”
“너를 그리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네 생각에 매일 밤 그리워 베갯잇을 적실 줄이야 보내고 나서 알게 되었구나……. 다시 만나지도 못할 생이별인 줄 알았더라면 더 사랑해주고 더 아껴주었어야 하는 것을……. 이 못난 어미는 너를 생각해준다면서도 결국은 저 하나밖에 생각지를 않았다…….”
“어머니, 어머니……. 웃―.”
울음이 북받치는지 린은 또 다시 그 울음을 받아내듯 입가를 가렸다. 하랑은 그 손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잡아 내렸다.
“네가 한이 많고 원이 많구나. 어찌하여 소리 내어 울지 않느냐. 다 이 어미의 업이다…….”
“어, 어머니…….”
“네 울음소리를 가장 많이 들은 것이 이 어미일진대 무에 참을 필요가 있겠느뇨……. 가슴으로 받아내겠으니 아가, 어여쁜 내 아가. 고름처럼 고인 아픔을 짜내어라. 착한 내 딸아…….”
“……흑, 흐윽- 흐엉, 흐아아아앙―.”
망설이듯 목 안에서 들끓기만 하던 흐느낌이 점점 커지더니 이윽고 커다란 울음이 되어 터져 나왔다. 아이 같은 울음소리였다. 울음이 전염되어 연지와 제삼의 세 아이들도 린과 경쟁하듯 큰 소리로 울어제꼈다. 누구도 나무라지 않고 아이의 부모들도 자식들을 구태여 달래지 않았다. 함께 곡하는 것이 죄일 리 없으니 함께 서러워 굿이 더 진실해졌다.
구름 한 점 없이 연하게 파란 초하룻날의 하늘로 향 연기를 타고 린과 하랑의 곡성이 높이 가 닿았다.
* * *
작은 새가 잡힌 손아귀 안에서 달아나고 싶은 듯 날개를 퍼덕이는 것 같다. 바르르 떨리는 린의 하얀 어깨 위로 하랑은 입을 맞추며 계속 린의 흑단 같은 머리채를 빗어 내렸다. 하랑은 린과 사랑한 뒤에 반드시 머리를 빗어주었다. 하얀 등 위로 탐스러이 만발한 머리카락을 빗으면 와 닿는 빗끝의 감각이 오묘한지 린은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 뒤태가 요염하도록 고와 기껏 가지런히 빗어준 머리가 다시금 요 위로 흐트러지도록 만든 것이 몇 번이었던가.
손들이 모두 돌아가고 뒷정리를 모두 끝낸 뒤엔 이미 밤이 이슥했다. 달도 없는 밤 하랑과 린은 그간 떨어져 있던 시간을 메우듯 어둠 속에서 서로를 애타게 찾았다. 칠흑 같은 어둠은 눈의 존재를 무의미하게 만들 뿐 냄새와 맛과 소리와 감촉을 팽팽히 벼렸다. 얼굴을 보지 않고도 내 사람임을 알 수 있는 방법을 여럿 터득하게 만들었다. 어둠에 눈이 익지도 못할 만큼 깜깜하지만 서로를 사랑함은 은밀한 불씨를 지펴 온몸을 뜨겁게 밝히고 그 끝에 하얗게 빛나는 꽃을 뇌리로 잔뜩 피워 올렸다.
린이 심호흡하더니 엎드린 몸을 일으키려 바르작거렸다. 암묵적인 순서 교대 신호였다. 하랑은 린의 손에 빗을 쥐어주고는 그 옆에 제 팔을 포개어 베고 엎드렸다. 린은 먼저 손으로 아무렇게나 흩어진 하랑의 머리카락을 대강 모은 뒤 천천히 빗과 손을 함께 써서 빗어 내렸다. 이 나이 되도록 댕기머리를 하고 다니지야 않지만 계속 기르고 있는 것은 린의 바람 때문이었다. 한 번 짧아져보고는 편해서 그대로 단발을 유지하려 했으나 린이 아쉬워하여 결국 계속 기르기로 한 거였다. 정사 뒤의 이 암묵적인 의식도 좋거니와 린이 하랑의 머리 손질을 즐기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기분에 가까웠다.
“오라버니.”
“응?”
“감사하옵니다. 소녀가 마음껏 울게 해주셔서…….”
‘내가 좋아서 한 일인데’라는 대답을 내뱉으려다 하랑은 그대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린을 울게 한 것은 하랑이되 하랑이 아니어야 했다. 린의 어머니, 이윤임의 혼이었다. 하랑은 전달자에 불과했다. 빙의될 몸을 빌려주었으니 망자를 그리워하는 이의 처지에선 무당에게 감사하는 거야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하랑은 린이 그런 뜻으로 고맙다고 한 것이 아님을 감지하고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알고, 있었구나…….”
“예.”
“미, 미안해. 널 속이려던 건 아니었어! 난 정말로 접신할 수만 있다면 진짜…….”
“알아요, 오라버니. 소녀, 탓하고자 말을 꺼낸 것이 아니옵니다.”
분명히 린과 마주보고 있으나 밤눈이 듣지 않는 어둠은 표정을 가리지 않아도 숨겼다. 하랑은 눈을 대신해서 손을 들어 린의 얼굴을 더듬거렸다. 어둠은 시각 외의 모든 감각을 증폭시키지만 손끝으로 표정을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린은 얼굴을 감싼 하랑의 손에 응석부리듯 뺨을 가져다 대 문질렀다.
“정말로 어머니와 아버지와 이야기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다 그런 바람이 아예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일 테지요. 허나 어버이의 혼이 내리지 않아 차라리 잘 되었다고 지금은 진실로 그리 여기고 있사옵니다. 이승에서의 미련이거들랑 모두 잊고 저 세상에서 편히 눈 감으시는 것이 진정 두 분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옵니다. 어쩌면 이미 윤회의 고리 안에 드셨는지도 모르지요. 살아서는 조국의 해방을 당신들의 두 눈으로 보지 못하셨으니, 새로이 태어나 비로소 오늘날의 광명을 맞이하기 위해 어느 여염집 여인에게 잉태되셨을지도…….”
린은 침묵했다. 말을 끝낸 것이 아니라 끊은 것뿐이라는 느낌이 들어 하랑은 잠자코 어둠 속에서 린을 기다렸다. 린 또한 보이지 않는데도 하랑의 진지하고 따뜻한 눈길이 지켜봐주고 있다는 게 느껴져 빙긋이 웃었다.
“굿은 망자의 넋을 달래고 이승과 저승 사이의 불가능한 만남을 무당을 통해 가능케 하는 일이지만……소녀는 굿이 결국엔 산 자를 위한 것임을 알 듯하옵니다. 부모님께서 부디 편히 잠드시기를, 좋은 데로 가셨기를 빌면서 이상하게도 도리어 소녀가 위안을 얻었사옵니다. 그리운 이들은 그리운 대로, 소녀는 지금 곁에 있는 오라버니와 함께 살아가야 함을 더욱 절실히 깨달았사옵니다. 이 못난 소녀를 이리도 살뜰히 사랑해주시는 오라버니가 있어 저는 행복하니, 부모님의 빈 자리가 마냥 슬프지만은 않다고 생각했사옵니다.”
린은 제 왼쪽 젖가슴 위로 하랑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사랑…해요, 오라버니. 사랑…….”
하랑은 린을 확 품 안으로 잡아당겼다.
이 아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막막한 심정이 들어 고개를 높이 쳐들고 까만 천장을 우러렀다. 어찌할 도리가 없을 만큼 사랑스러워 발을 동동 구르고 싶다. 능력자가 아니라 평범한 조선의 남아와 여아로 태어났으면 만날 수나 있었을까. 그럼에도 그러했으리라 철석같이 믿고 싶었다. 진실은 우연이 낳은 결과라 할지라도 누가 처음부터 정해놓아서 절대로 바뀔 수 없기를 바라는 것이 이 인연이었다.
“……린아.”
“예, 오라버니.”
“나랑……가시버시 할 테냐?”
“예?”
“나한테……시집 올 테냐?”
“…….”
“…어, 그러니까……실은 내가 너한테 장가들고 싶다고나 할까……. 네가 내 아이를 낳아주면 고마움에 몸 둘 바를 모를 것 같달까…….”
꽤 전부터 별러왔고 지금이다 싶어 고심 끝에 건넨 청혼에 린이 묵묵부답이자 하랑은 불안해져 횡설수설했다. 품에서 린을 떼어놓고 얼굴을 바싹 들이대 표정을 살피려 했지만 여전히 그믐의 어둠을 이길 수는 없었다.
“린아, 뭐라 말 좀 해봐. 아이씨…….”
“……푸흡-.”
“…엉?”
하랑은 린의 어깨를 잡고 약하게 흔들며 보챘다. 린은 결국 필사적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까지 참았던 웃음을 빵 터뜨리고 말았다. 그야말로 박장대소하는 린에게 하랑은 어리둥절해져서는 ‘하하, 하…….’하고 메마른 웃음소리만 냈다. 실컷 웃을 만큼 웃은 뒤에야 린은 간신히 평정을 되찾고는 하랑의 얼굴을 더듬어 잡았다.
“소녀는 이미 몸도 마음도 오라버니의 것이 아니옵니까? 무얼 새삼스레…….”
“……어어, 그, 그렇지. 그렇지! 암, 그렇고말고!”
하랑은 승낙이나 다름없는 말에 기뻐 다짜고짜 린을 업고서 벌떡 일어나 제자리를 휘리릭 돌았다. 린은 떨어질세라 하랑의 목을 꼭 끌어안고 매달려 있다가 곧 화사한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서 혼례복도 다 구해서 가자. 미쉘이 입었던 그 웨딩드레스도 너한테 잘 어울릴 테지만 역시 연지곤지 붙인 네가 난 보고 싶다.”
“소녀도 사모관대를 차려 입은 오라버니가 더 보고 싶사옵니다.”
“이 땅이야말로 우리의 모국이고 고향이지만 우리를 축복해줄 친구들은 저곳에 더 많으니까 말이야. 실컷 축하받고 한껏 행복해지자구나!”
“……예. 예. 오라버니.”
“또 울어? 에휴, 이 울보.”
“맘껏 울라고 하신 것은 오라버니 아니옵니까.”
“아 참, 그랬지. 하하―.”
하랑은 뒤쪽으로 고개를 살짝 틀었다. 린도 하랑의 어깨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내밀었다. 언약처럼 두 사람의 입술이 맞물렸다.
정월 초하루의 밤이 지나고 달이 다시 차오르기 시작했다.
* * *
항구에는 작별 인사를 고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악수를 하거나 포옹을 하거나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한숨과 눈물 짓는 장면을 저마다 연출중이었다. 거기에 못 이긴 척 편승해서 석별의 정을 나누면 오죽 좋으련만. 마주보고는 있어도 각자 딴청 피우며 시선을 다른 데로 던지고 있는 하랑과 명을 보며 린은 곤란한 듯 웃었다. 사이가 나쁜 게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이 무뚝뚝함은 어찌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쑥스러움을 감추려고 뻗대고 있지만 이제 정말로 영국으로 건너가야 하는데 지금만큼은 어찌 안 되는 것일까. 보다 못해 린이 먼저 명에게 깊숙이 목례했다.
“아버님, 만수무강하시옵소서. 소녀 앞으로 자주 편지로 소식 알리겠사옵니다.”
“아씨야말로 몸 무탈히 마음 성히 지내시오. 변변찮은 대접도 못하고 돌려보내서 미안하오.”
“아씨라니오, 당치도 않사옵니다. 그냥 서린이라 불러주시옵소서. 소녀 마음이 편치 않사옵니다.”
“하오나 어찌 감히…….”
“허 참, 본인이 됐대잖소. 거 양반 융통성 없기로는 명부 심사하는 염라대왕 저리가라요.”
“이놈이 아비한테 말버릇하고는…….”
“으악-.”
린은 명을 대신해서 하랑의 오른팔을 사정없이 잡아 비틀었다. 하랑은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쳐다볼 정도로 크게 단말마를 지르며 꼬집힌 팔 위에 만연한 아픔을 달래보고자 필사적으로 문질러댔다. 린과 명은 마주보고 공범인 양 장난스럽게 웃었다.
명은 품을 뒤적여 흡사 손수건처럼 보이는 헝겊을 내밀었다. 직사각형 모양으로 접힌 천을 들추어보자 그 안에는 샛노란 종이에 붉은 글자와 문양이 잔뜩 새겨진 부적이 들어 있었다.
“내 비록 신을 저버린 화랭이의 몸이나 제대로 치성을 드리고 나서 쓴 거라오. 신력이 없어 실효는 별로 없을는지 모르나 앞으로의 아씨의 운수를 길한 방향으로 이끌고 큰 화를 면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으니 부디 받아주시오.”
“이런 정성 들인 것을 다……. 소녀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사온데…….”
“내가 주고 싶어 주는 것이니 마음 쓰지 마시오.”
“고맙습니다. 소녀, 목숨처럼 간직하겠사옵니다.”
린은 부적을 소중히 껴안았다가 조심스레 품 안에 넣었다. 하랑은 흐뭇하게 린을 보고 있다가 ‘응?’ 하며 명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 내 건?”
“흥. 네놈의 부적 따위는 없다.”
“아, 진짜 이러기요? 며느리만 이뻐하고 친자식은 어찌 닭 소 보듯 하오?”
“어허, 소한테 안 될 소릴 하는구나.”
“아이씨- 나 아버지 자식 맞소?!”
곧 출항한다며 아직 배에 오르지 않은 승객들을 재촉하는 선원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끝까지 발을 떼지 못하고 아쉬움을 토하던 몇몇 사람들도 서둘러 짐을 들고 여객선으로 올랐다. 하랑은 먼저 짐을 들고 린에게 가자고 말했다. 린은 망설이듯 가방을 들었다.
그대로 등을 돌려 앞장서 몇 걸음 가던 하랑은 혀를 차며 다시금 명의 앞으로 척척 걸어와 마주보고는 대뜸 말을 꺼냈다.
“같이 안 갈 테요?”
“…….”
“아부지 부양할 정도의 여력은 있소. 그러니까…….”
“나는 이 땅에서 나고 자라 이 땅을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내가 있을 곳은 여기밖에 없다. 죽어서도 이 땅에 묻힐 것이다. 박수 노릇은 진작 그만뒀어도 아직 굿판에서 내가 거들 일이야 많다. 네놈 덕 안 봐도 굶어 죽을 일 없으니 내 염려는 말고 얼른 가보도록 해라.”
“……그러오?”
하랑은 씁쓸하게 웃으며 멋쩍게 뒷머리를 훑었다. 명은 하랑의 어깨를 한 번 툭 치고는 린을 보며 허리를 숙였다.
“……못난 아들을 부탁하……부탁한다, 서린아…….”
숙여진 명의 머리를 보고 화들짝 놀라며 더 깍듯이 그 자리에서 절이라도 올릴 태세인 린을 하랑은 단호히 팔을 잡아 말렸다. 아쉬운 대로 린은 하랑의 손에 끌려가다가 몇 발짝 못 가고 꾸벅, 또 몇 발짝 못 가고 뒤돌아서 고개를 숙이기를 반복하며 이별을 고했다.
두 사람이 맨 꼴찌로 배에 오르자 서둘러 가교가 걷혔다. 부우우우 커다란 기적 소리를 내며 배가 천천히 부두를 뜨기 시작했다. 곧장 린을 데리고 선실로 들어가려다 말고 하랑은 짐을 내팽개치고 선미를 향해 달려갔다. 점점 멀어지는 부둣가에 여전히 우두커니 선 아버지를 향해 손나팔을 만들어 크게 외쳤다.
“곧 좋은 소식 전할 거야! 그러니까 그때까지 건강히 있으라구요, 아버지! 연락할 테니까!”
하랑을 뒤따라 온 린은 저 멀리 명이 황급히 뒤돌아서는 모습을 보았다. 보일 리도 없건만 그것이 눈물을 감추기 위한 행동임을 알 수 있었다. 돌아서있어서 보지도 못할 텐데 하랑은 아버지가 점이 되어 보일 때까지 팔을 높이 치켜들고 좌우로 엇갈려 크게 흔들어댔다.
팔을 내린 뒤에도 여전히 반도를 바라보는 하랑의 곁에 린은 조용히 다가서 팔짱을 끼고 어깨 위에 고개를 기댔다. 하랑은 한동안 더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가 후련히 한숨을 내쉬고는 린의 손을 굳세게 맞잡고 씨익 웃었다.
“가자. 집에!”
“예. 오라버니!”
배는 하랑과 린의 또 다른 고향으로 두 사람을 싣고 힘차게 파도를 갈랐다. 순풍이었다.
Fin.
*
- 어느 날 MP3로 하랑 테마를 들으며 걷는데 하랑이 신명나게 굿을 하는 장면이 무슨 계시마냥 떠올랐습니다. 거기서부터 ‘무당이 아닌 무당의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굿판을 벌이는 이야기’로 나아가 이 소설이 쓰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조사해야 할 방대한 자료의 양을 보고서 하랑은 굿판을 벌이고 나는 돌이킬 수 없는 큰일을 벌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으아아악 나 살려 고통은 셀프
- 표지와 간지는 하랑의 프로모션 영상을 캡처해서 포토샵 도장툴로 조잡하지만 나름 심혈을 기울여 편집해서 만든 것입니다. ㅎㅎ
- <경성스캔들>이라는 드라마가가 있었습니다. 작중 대사 가운데 ‘나라가 망해도 조선의 남녀는 사랑을 한다’라는 게 있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 기적 같은 일입니다. 전란 중에도 아이는 생기고 그 약하디 약한 새 생명들이 살아남아 지금의 우리까지 이어진 거니까요. 단순히 인간의 종족번식본능이 위기 상황에서 더 투철했다는 동물적 관점에서 보아야 할는지.
- 린의 아버지가 린에게 보낸 편지는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인 조마리아 여사가 아들이 사형선고를 받은 뒤 옥중으로 보낸 편지를 부족하나마 본떠보려고 했습니다. (출처: http://ppuu21.khan.kr/m/post/420)
감정을 극도로 억제했기에 그 슬픔이 더욱 배가되는 것은 왜인지. 대놓고 우는 사람보다 울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이 더 애처로워요.
- 린이 드로스트 가문에 왜 끌려 들어왔으며, 린의 부모님이 린을 네덜란드로 입양 보낼 수밖에 없었던 건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이 필요해서라고 그리 상상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뜻대로 되지 않는 린을 협박하기 위해 일본군을 통해 드로스트 가문은 린의 부모님을 인질로 잡은 거죠. 결국은 옥중에서 고문 당해 죽었다는 슬픈 설정입니다. 네덜란드와 일본은 실제 역사적으로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었음을 전제로 합니다. 언젠가 가능하다면 린을 비롯한 어둠의 능력자들의 이야기는 「Independence Day」라는 장편으로 다룰 생각입니다. 그에 앞서 우선은 관심 있으신 분은 제 장편 「Twilight ― heure entre chien et loup ―」에 전체에 걸쳐 그려낸 린과 미쉘을 이야기를, 특히 22편에서 린이 미쉘에게 보낸 편지를 참조해주세요. (내 소설 홍보대사)
- 린의 눈에는 신령이 보이지 않습니다. 처음엔 두 사람이 처음으로 사랑을 나눈 뒤에 린도 하랑의 신령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설정으로 가려다, 결국은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가능한 연출을 포기할 수 없었다는 후일담입니다. 그래도 둘이 혼례를 올린 뒤에는 보인다는 것으로.
- 신영복 선생님이 지은 「처음처럼」에서 나오는 ‘진정한 동행이란 우산을 씌워주기보다는 함께 비를 맞아주는 것’이라는 구절을 정말 좋아합니다.
- 이명은 신을 떼어내긴 했으나 무당이 아니게 되었을 뿐 굿판 자체에서는 벗어날 수 없을 겁니다. 평생을 신을 모시며 굿과 관련된 일을 하던 사람이 갑자기 완전히 다른 직종을 지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 얼마 전에 오싸에 올라왔던 나이 합작은 정말로 보배로운 합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그걸 본 시점에서 저는 한창 이 <진오귀>를 쓰고 있던 터라 토마쮸 님이 그리신 10년 뒤 하랑을 본 순간 정말 전율을 금치 못했습니다.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던 하랑이 바로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죠. 큽. 혹시라도 안 보신 분이 있으면 지금이라도 얼른 보러 가시지요!
- ‘바를’ 정은 당연히 중의적인 표현입니다. ㅋㅋㅋㅋ
- 하랑이 아버지 이명에게 하오체를 쓰는 이유는, 어릴 때는 이클립스에 보이듯 존대를 했지만 짜식이 능력을 얻고 나서 기고만장해지기 시작하고 왠지 부자 관계도 서먹해져 완전 반말도 아니고 경어도 아닌 어중간한 하오체를 쓰게 되었다는 그런 사연입니다. 조선양아치
- 린은 드로스트 가문에서 나와 그랑 플람 재단에 투신했습니다. 그랑 플람 재단은 더 이산 남탕이 아니게 되어 다들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고.
- 내내 린을 울리기만 했네요. 미안하다, 린아. 그래도 널 웃게 하는 건 하랑의 몫일지니.
- 미쉘 남편의 정체는 뭐 각자 원하시는 대로 생각하시옵소서.
- 오탈자 및 이상한 문맥 지적, 근거 있는 비판, 다양한 질문 환영합니다.
- 주요서식지: http://blog.naver.com/goastbaster
- 깨알 같은 전작 홍보(제목을 누르면 해당 소설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제목 | 길이 | 주연 | 부가정보 |
장편 (完) | 다이무스&트리비아+올캐러 | 안타리우스의 트리비아 납치 시도가 있은 뒤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된 그녀의 호위를 맡게 된 다이무스, 이윽고 벌어지는 전쟁과 제2차 인형실 끊기 작전 | |
중단편 (비정기 연재중) | 다이무스&트리비아+올캐러 | 「Twilight ― heure entre chien et loup ―」의 후일담격 소설, 사이퍼들의 여름 휴가 | |
손바닥글 모음 | 다무틀비 | 「포옹」, 「이종교배」, 「말장난」, 「수트 로맨스」 등 | |
손바닥글 모음 | 다무틀비 | 「춘정」, 「충동」, 「수트 로맨스 2」, 「태동」 등 | |
중편 (完) | 루이틀비마틴 +브루스 | 진격전의 배경스토리를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 루이틀비의 갈등, 마틴의 짝사랑, 마틴과 브루스 사이의 갈등의 실체 | |
NEW!! | 손바닥글 모음 | 마틴틀비 | 「고양이」, 「2월 14일」, 「갈증」, 「천사의 유희」 등 |
단편 | 피터미쉘데샹 | 지금으로부터 약 7년 후의 이야기, 미쉘이 모르는 피터의 진실 | |
단편 | 데샹미쉘피터 | 기묘한 모나헌 남매의 사정에 흥미를 가지고 접근하는 위선자 까미유 데샹 | |
단편 | 바레미쉘 | [연성교환] 중세 패러렐. 마녀사냥에 쫓겨 죽어가는 소녀와 그 소녀를 줍는 늑대의 이야기 | |
단편 | 다이무스 |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 |
손바닥글 | 드렉샬럿 | [커미션] 가끔 있는 헬리오스의 회식 자리에서 자꾸만 음식을 가방으로 숨기는 샬럿에게 의문을 품고 드렉슬러는 어느 날 소녀의 뒤를 좇는데... | |
손바닥글 모음 | 까미유&마틴... | [리퀘 이벤트] 「굴욕」 (웨슬J),「연쇄」(J),「무장해제」(휴톤+미쉘+트리비아) 수록 | |
설정집+손바닥글 모음 (비정기 연재중) | 올캐러 | 사이퍼들이 21세기에 태어나 평범한 대학생으로 살아간다면? | |
단편 | 벨져앤지 | [커미션] 부친 흑염 하이드의 의문스러운 죽음의 진상을 좇는 지하연합의 수장 앤지 헌트와 그녀의 호위를 맡게 된 검의 형제 기사단의 벨져 홀든 그리고 루이스 |
▶▶▶▶▶ 부록 ◀◀◀◀◀
【하랑의 신령에 관하여】 하랑의 인게임 스킬들을 보면 신령은 호랑이, 개, 원숭이, 쥐, 뱀이 있죠. 원래는 아버지 이명의 섬기는 신들이었죠. 다만 신령들이 아버지 이명보다 아들인 하랑에게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하랑은 타고난 능력으로 이명이 신을 떼어버리는 굿을 하는 그때에 달려든 영을 제압하여 자기의 힘으로 만들었습니다. 어쨌거나 ‘신’을 부적 안에 가두어 사역하는 것이니 하랑이 기고만장할만하지요. 신령들도 예상외의 사태에 무척 당황했을 겁니다. 감히 하찮은 인간 따위가 자기를 부리려고 하니 말이에요. 별수 없이 갇힌 몸이라 힘을 빌려주기는 하지만 처음에는 신령과 하랑의 사이는 엄청 살벌했을 겁니다. 하랑도 주인 노릇만 하려고 들었을 테니. |
【진오귀 굿에 관하여】 위의 후기에서 일찍이 밝혔다시피 ‘하랑이 린을 위해서 굿을 한다’는 간략한 구상에서 이 소설은 시작되었습니다. 지극히 당연히 굿의 종류와 내용 및 형식을 면밀히 조사할 필요가 있었지요. 일단 하랑의 보이스로 보건대 하랑도 서울 내지 경기 지역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서울 지역의 무당은 거의 다 강신무(降神巫), 즉 특수한 영적 체험인 신내림을 받은 무당이 대부분입니다. 이명도 호남 지방의 강신 체험 없이 교육으로 세습되는 무당인 ‘당골’이 아니라 강신무가 분명하죠. 이클립스에도 그렇게 나와 있고요. 그 중에서도 이명은 남성이니 박수 무당이입니다. 작중에서 나온 화랭이, 사니, 양중 등은 모두 박수 무당을 나타내는 말들입니다. 안경사당맞이 진오귀 보시다시피 실제로는 이렇게 엄청 많은 거리(탈놀음, 꼭두각시놀음, 굿 따위에서, 장場을 세는 단위)가 엄청 많은 큰 굿입니다. 전문 무당이 소화하기에도 벅찬 이 새남굿을 생초짜인 하랑이 완벽히 해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애초에 하랑은 신내림을 받지 않았기에 명이 작중에서 망설였던 것처럼 원래는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고요. 그 와중에 그래도 거의 평진오기만큼이나 절차를 간소화해서 하는 것이 하랑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①주당물림: 굿에 필요한 제물을 진설하고 굿판 입구에 홍천륙을 걸어둡니다. 홍천륙을 걸어두는 것은 굿하는 지역을 관장하는 군웅신을 청하는 것입니다. 이 군웅신이 굿하는 공간으로 강림하다가 놀라서 화살을 쏘면 주당살을 맞는데, 이를 막기 위한 절차에 해당합니다. 홍천륙은 주당살을 물리칠 수 있는 상산군웅의 옷입지요. 무당은 일상복을 입고 군웅신이 놀라지 않도록 장구를 느리게 치다가 막바지에 가서야 빠르게 쳐 끝냅니다. 느린 장단으로 시작하는 것도 군웅신을 놀라지 않게 하려는 의도죠. 이 주당물림이 행해지는 동안에는 무당과 악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굿판 바깥으로 나가 있어야 합니다. ②부정거리: 온갖 부정을 제쳐서 굿하는 공간을 정화하고, 굿의 연유와 굿하는 집안을 알리며 굿에서 모실 신과 조상들을 청하는 절차입니다. 무당은 주당물림과 유사하게 일상복 차림으로 장구를 치며 무가를 구송합니다. 무가 구송이 끝나면 물과 소지(燒紙)로 굿하는 공간 전체를 둘러 부정을 물립니다. 그 후에 망자의 가족들이 나서 향과 술을 올립니다. ③진적: 유족들이 굿상 앞으로 나와 절을 합니다. 절을 하는 동안에는 모든 악기가 반주를 합니다. 이때는 죽은 망자보다는 살아 있는 가족들의 제액초복을 주로 기원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새남굿의 안경사당맞이가 본편인 진오귀보다는 산 자를 위한 재수굿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여기서 알 수 있지요. 여기까지가 본격적인 굿이 행해지기 전의 준비 단계의 성격을 띱니다. ④불사거리: 일상복 차림으로 앉아서 진행하던 굿을 이제 일어나서 행하기 시작합니다. 각 거리에 해당하는 무복과 무구를 사용하고, 춤과 노래, 공수 등의 다양한 행위를 통해 본격적인 굿을 진행합니다. 불교와 관련된 거리이니 만큼 원래는 고깔에 흰색 장삼, 홍색 가사를 걸쳐야 하지만, 작중에서는 간소한 굿이다보니 원래 입고 있던 소복에 홍천륙을 걸치고 벙거지를 쓴 복장이라는 설정입니다. 여기서 무당은 굿상 앞으로 가 좌우로 나아갔다 물러서는 일명 ‘들이숙배 내숙배’ 춤을 추다가 절을 하는 둥 망자와 가족을 위한 축원을 전합니다. 다양한 형태로 분화된 양상을 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불교와 도교의 신을 청하여 그 신의 공수를 전합니다. 공수를 마친 뒤에 삼지창을 굿상 위에 세워 신께서 인간의 정성을 받아들이셨는지를 확인합니다. ⑤도당/본향거리: 불사거리와 거의 같지만 청하는 신이 불교와 도교의 신이 아니라 그 지역 토박이 신과 제석신(帝釋神; 집안사람들의 수명, 곡물, 의류 및 화복에 관한 일을 맡아본다고 함)을 청하여 공수를 내린다는 점만 다르다고 보시면 됩니다. ⑥초영실: 영실은 망자의 혼이 무당에게 실려 가족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하는 일종의 넋두리입니다. 초영실은 진오귀 굿에서의 첫 영실입니다. 아직 조상의 반열에 들지 못한 망자의 말을 듣습니다. 여기서 무당은 원칙적으로 실제로 망자가 생전에 입었던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러나 작중에서 하랑이 린의 어머니가 남긴 옷을 입지 않은 것은, 그 옷은 어머니가 평소에 린의 앞에서 자주 입은 옷이 아니기에 추억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역부족했던 까닭입니다. 원칙보다는 망자를 연상시키는 데 더 중점을 두었습니다. 또한 소설 안에서 실제로 다룬 부분은 딱 여기까지입니다. ⑦말미: 바리공주의 인도로 망자가 저승에 잘 들어가기를 기원하는 절차입니다. 말미는 춤과 같은 일체의 행위 없이 장구를 세워서 치고 방울을 흔들면서 바리공주 신화를 구송하는 것만으로 진행됩니다. 이때 바리공주를 상징하는 무복을 입는데 전체 거리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복색입니다. 전국 팔도 어느 굿이든 바리공주를 거론하지 않는 경우가 없을 정도로 중요한 무속 신이라서, 바리공주 사설을 실은 싣고 싶었는데 구성상 잘리게 되어 여기 부록에라도 아쉬운 대로 일부를 실어봅니다. (빡침주의) ………
⑧도령돌기: 무당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도 참여하는 대표적인 거리입니다. 가족들은 촛불, 향, 망자의 영정, 위패, 망자의 옷과 넋전이 올려진 돗자리를 들고 바리공주로 분한 무당의 뒤를 따라 걸어갑니다. 작중에서 린은 사진과 향만 들고 뒤를 따라갔다는 설정입니다. 도령을 돈다는 것은 ‘문을 통과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문처럼 생긴 구조물을 만들어놓고 그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데, 그 문은 바로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상징하는 것이지요. 무당이 연기하는 바리공주는 저승으로 무사히 인도하는 길잡이입니다. 세 번씩 각기 다른 무구를 들고 총 열두 번을 돕니다. ⑨상식: 별도의 상식상을 차려 망자에게 유교식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거리는 새남굿이 사회 상류층을 대상으로 하는 굿이었음을 나타내는 단적인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사를 올린다는 것은 망자가 조상의 반열에 들었음을 나타냅니다. 가족들이 제를 지내는 동안 무당은 계속 말미~도령돌기에 이은 바리공주의 복색으로 명두청배를 합니다. 명두청배란 일종의 저승길 안내로, 망자가 극락세계 연화대로 잘 가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망자가 조상의 자격으로 상식을 받긴 했으나 아직 저승으로 다 천도되지는 않았음을 뜻하는 행위이죠. 하랑의 집 마당에 차린 굿상과는 달리 유교식 제사상인 상식상은 안방에 별도로 차려두었다는 설정입니다. ⑩뒷영실: 초영실에 이은 후반부 영실입니다. 무당은 넋노랫가락을 부르며 망자의 유품이 든 상자를 들고 좌우로 춤을 추다가 내려놓습니다. 그 다음에 망자의 혼을 입고 가족들과 다시 한 번 이야기를 나눕니다. 작중에서 나타낸 초영실에서는 린이 어머니와 이야기를 했다면 뒷영실에서는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눕니다. 하랑이 린의 아버지가 남긴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쓰고 린의 아버지로 분한 채로 말이지요. ⑪베가르기: 다시 소복에 홍천륙을 걸친 복장을 하고서 말 그대로 베를 가르는 의식을 행합니다. 도령돌기에서는 문으로써 저승과 이승을 통하는 것을 연출했다면, 이 베가르기는 새남다리-저승다리-이승다리에 해당하는 각기 다른 세 종류의 베를 몸으로 찢어 가르며 산 자를 축원하고 망자를 저승으로 천도하는 상징적인 의식입니다. 도령돌기와 더불어 새남굿의 가장 중요한 의식으로 꼽힙니다. ⑫뒷전: 굿의 모든 절차를 마무리하는 대단원입니다. 이제 돌아가야 하는 구경꾼들에게 잡귀가 붙지 않도록 빨간색, 초록색, 노란색 천이 겹쳐진 천을 찢어줍니다. 새남굿뿐만이 아니라 전국 팔도 어느 굿이든 이 뒷전 과정에서 해학적인 성격이 두드러집니다. 하랑은 이 거리를 가장 훌륭하게 소화해냈습니다. ‘기묘한 눈빛의 령이여, 네가 날 기다렸구나. 나와 어디 한 번 실컷 놀아보자!’라는 대표 대사처럼 말이죠. ‘판을 벌리어볼까?’라는 대사도 마찬가지고요. 다른 사람들 눈엔 보이지 않겠지만 이때 하랑의 모든 영들이 주변에서 까불대며 펄쩍펄쩍 뛰어댔을 겁니다. 하랑 테마와 가장 잘 어울리는 거리도 바로 이 거리이고요. 이상으로 절차가 상당히 세분화되어 나타나지만, 모든 굿은 결국 ‘청신(請神)-오신(娛神)-공수-송신(送神)’의 구조를 띤다는 것만 알아두시면 됩니다. 말 그대로 신이 내리도록 간절히 부탁을 드리고, 그리하여 신을 즐겁게 하여 꾀고, 신을 몸에 입어 말씀을 전하고, 잘 가시라고 극진히 보내드린다는 거죠. 이는 ‘정화-신놀림-망자천도-뒷전’이라는 진오귀의 전체 구조와 일치하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더불어 본디 굿을 할 때는 구경꾼들에게 인정(人情)이라고 하여, 망자가 좋은 데로 가는 데적선하십사 넋전이라 불리는 돈을 중간중간 요구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허나 하랑은 본인이 마련한 돈으로 굿에 드는 모든 경비를 치른데다가, 결정적으로 정식 무당이 아니니 그럴 자격까지는 없었다는 설정으로 그 과정을 생략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구경꾼들은 마지막에 피차 어려운 처지에 많이는 못해도 부의금처럼 자그마한 성의나마 보이고 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작중에서 나온 굿과 관련된 용어 개념 설명을 덧붙이며 갈무리합니다. :) 비손: 두 손을 비비면서 신에게 병이 낫거나 소원을 이루게 해 달라고 비는 일 |
■ 참고문헌 ■
강명관, 「사라진 서울」, 푸른역사, 2010
민속원, 「인간과 신령을 잇는 상징 巫具」, 국립문화재연구소, 2005
소재영 외, 「한국의 민족문학과 계승」, 집문당, 2006 부록의 바리공주 사설은 이 책에 수록된 전문의 일부 실은 것입니다.
이경엽 외, 「(큰 무당을 위한) 넋굿」, 2011, 국립문화재연구소: 작중에 나오는 무가나 사설들은 모두 이 책의 새남굿 항목에 소개된 것을 변용하여 실은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부록의 사진 또한 이 책에 실린 사진을 이용하였습니다. :)
이능화(서영대 역), 「조선무속고」, 창비, 2008
이원섭, 「한국의 무당」, 블루패밀리, 1999
주영하 외, 「巫 굿과 음식 1」, 국립문화재연구소, 2005
최운식, 「한국인의 삶과 문화」, 보고사, 2006
최종성, 「조선조 무속 國幸儀禮 연구」 , 일지사, 2002
하효길 외, 「한국의 굿」,민속원, 2002
황루시, 「우리 무당 이야기」, 풀빛,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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