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족혐오(Mirror)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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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3 10:58:35
- 이 글은 픽션(fiction)입니다. 특정 단체ㆍ사건ㆍ사상ㆍ종교와 무관함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체스 대국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모든 이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체스판 위일 것이다. 과정상의 재미도 빼놓을 수는 없지만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승패의 향방이다. 체스는 말의 움직임이 승부를 결론지으므로 판 위의 치밀한 전쟁으로부터 한시도 눈을 떼어놓지 않아야 한다. 하물며 직접 머리를 굴려 수싸움 하는 말의 주인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모의 전쟁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상대방을 좀더 궁지에 몰아넣을 수를 궁리하기 바빠야 한다. 그러나 검은 말의 지휘관인 마틴 챌피는 본인의 군대에 별 눈길을 주지 않고 오로지 판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앉은 흰 말의 주인 까미유 데샹을 가만히 주시하고 있었다.
작전 <일곱 개의 변주곡>을 무사히 완수하고 그랑 플람 재단, 헬리오스, 지하연합으로 구성된 동맹군은 안타리우스의 클론 샘플을 손에 넣었다. 그 분석을 사이퍼 유전자 연구 분야 최고권위자인 닥터 까미유에게 의뢰했다. 그가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연구는 아니기 때문에 현재 ESPER 기관에서 다른 연구원들의 협력을 받아 샘플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경과를 알아보기 위해 마틴은 까미유의 진료소에 방문했다. 조사가 다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적인 연구 목적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들었다. 그런데 까미유는 그나마 있는 성과를 아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보고서를 건네주었다. 아름답다고까지 평가하고 싶을 정도로 완벽한 서류였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거의 형식적인 것에 가까운 질의응답이 오가는 데 그쳤다. 볼일이 끝났으므로 곧장 자리를 뜨려는 마틴을 까미유가 잡았던 것이다. 처음 이 진료소에 들어섰을 때부터 테이블 위에 두다 만 듯 놓여있던 체스판을 가리키며 시간만 괜찮다면 상대해주지 않겠냐고 권유해왔다.
마틴은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내심 까미유를 의심스럽게 생각했다. 독심술사에게 체스를 요구하다니, 투시능력자와 포커를 두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체스의 룰은 알고 있으나 마틴에게는 시시하기 짝이 없어 번번이 게임도 안 되었다. 상대방의 수를 다 알아버려 이길 게 뻔한 게임이 무에 재미있겠는가. 게임의 재미를 돋우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스릴을 능력이 발현하고 난 이래로 마틴은 모른 채 살아왔다. 그럼에도 패배가 정해져 있는 게임을 제안하는 까미유의 의도를 몰랐다. 읽혀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일까? 물론 이윽고 까미유에게서 들려오는 마음의 소리를 통해 그가 자신을 시험하려 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정보다 일이 일찍 끝났기 때문에 다음 스케줄까지 시간이 충분하고 거절할 구실도 딱히 없었다. 무엇보다 이대로 물러나는 건 도망치는 것 같아서 수락했다.
사실은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구역질 날 것 같은 혐오감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짐짓 여유로운 미소를 가장했다. 독심술사는 기본적으로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을 혐오한다. 아니, 표리일체인 인간이 존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을 고려할 때 겉과 속이 좀더 밀착된 인간에게 호감이 간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독을 토해도 그것에 모종의 죄책감을 갖고 있는, 뉘우칠 줄 아는 사람이 좋았다. 거짓보다 진실에 가깝고자 하는 인간 군상에는 정이 간다. 헌데 이 세간의 러브콜을 한몸에 받는 유명인사는 겉과 속이 다르다는 걸 굳이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독심술사에게 보란 듯이 말과 생각을 달리했다.
“이거야 원, 번번이 가로막히다니. 나름 체스 실력에 자부하는 편인데 말이야. 내가 장고 끝에 악수를 두는 걸까, 네 체스 실력이 출중한 걸까?”
“글쎄요. 딱히 비결이랄 건 없습니다만.”
“코드네임이 그래서 그런지 다방면으로 사람들이 매력적으로 느낄 만한 재주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군. 부러울 정도야.”
“…….”
마틴은 까미유가 하얀 나이트를 옮기자마자 바로 검은 비숍으로 그 말을 제것으로 굴복시켰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아뿔싸 하는 눈빛은 정말로 실수한 것처럼 보였지만 마음으로는 이럴 줄 알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만약 이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까미유에게서 아무런 위화감도 발견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마틴만이 자신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칠 수 있는, 연기력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출중하기에 시도할 수 있는 실로 대담하면서도 은밀한 장난이었다.
위선자, 닥터 까미유. 소문으로 까미유의 선행만 전해 들었을 당시엔 코드네임을 부여한 정부의 처사에 의문을 품었지만 그 안목은 탁월했다. 그는 결코 선인이 아니었다. 입으로는 겸손을 자처하면서도 속으로는 끝을 모를 오만과 악의로 가득 차있다. 그럼에도 그는 선의 대명사로 불린다. 그야말로 거짓으로 진실을 빚어내며 진실을 무력함을 농락한다.
“그런 닥터의 코드네임은 평소부터 생각한 거지만 이상하군요. 누구보다 세계 평등 구현에 이바지하고 계신 분인데. 세간의 질투일까요?”
“하하. 질투라니. 당치도 않아. 나 말고도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구슬땀 흘리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어. 매스컴은 아무래도 과장이 심하니까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게 좋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이들이야말로 진짜 세계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지. 나는 그 분들의 발치에도 못 따라가.”
마틴은 까미유의 코드네임이 오명이라는 듯 안타까움을 담아 말했고, 까미유도 지지 않고 자기 공적을 불특정다수에게로 돌렸다. 속으로는 누가 더 말과 다른 생각을 하는지 서로 대결하기 바빴다.
각자의 코드네임을 가지고 비꼬고 비웃는다. 까미유의 ‘위선자’라는 이름은 그의 본질을 꿰뚫어본 자가 용기 있게 표명한 진실이다. 그럼에도 오히려 까미유로 하여금 곡해받고 있다며 사람들로부터 동정심과 더불어 더욱 확고한 지지를 얻게 만들었다. 그 코드네임이 본인에게 더할 나위 없는 이름임을 아는 것은 그 자신뿐, 타인이 먼저 그 진실을 부정하며 거짓된 선을 칭송하게 만들었다.
마틴의 ‘매력적인’이란 이름은 그의 능력에 대한 조소다. 사이퍼의 코드네임은 능력과 관련하여 짓는 것임을 고려할 때, 사람의 마음을 읽고 조종해서 그를 매력적인 인간으로 믿도록 조작했다는 식의 비꼼이 담겨 있었다. 물론 실제로는 조롱이 아니다. 마틴이 독심술사임을 알고 있음에도 모두 그를 매력적이라 말해준다. 마틴은 연기를 한 적은 있을지언정 언제나 올바른 일을 한다고 확신했다. 결코 위선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진짜 위선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지 까미유는 지금 태도로써 묻고 있다. 마틴 스스로도 품고 있는, 애써 외면하려 했던 의념을 들춰내려 한다. 선이라고 주장해도 위선과 결과가 같으니까. 타인을 움직여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그 속내가 선이든 악이든 무의미하다고 그는 말하는 거였다. 입으로도 마음속으로도 그런 말은 한 마디도 않고 있지만, 마틴의 통찰력이 스스로 거기까지 결론을 내릴 거라는 확신이 내재되어 있었다.
불쾌하다. 저 작자의 의도대로 생각하고 그 생각을 이해하는 스스로가 싫었다. 그 모든 것이 내는 결론은 단 하나, 까미유 데샹과 마틴 챌피는 별수없이 닮았다는 사실이었다. 탁월한 외모, 부드러운 목소리, 두터운 인망, 뛰어난 능력. 스스로 내세운 적 없지만 타인이 먼저 추켜올려주는 그 모든 점들이 비슷하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체크메이트.”
마틴은 블랙 퀸으로 화이트 킹을 왕좌에서 끌어내렸다. 흰색 말이 비켜나고 그 자리를 검은 말이 당당하고 담담히 차지하는 것을 잠자코 보던 까미유는 장난스럽게 두 손바닥을 올려 보였다.
“완벽한 패배야.”
결과에 순순히 승복하는 깔끔한 자세라고 남들은 말할 테지만, 진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하는 내면을 듣는 마틴에게는 웃음도 안 나는 촌극에 불과했다. 언제나 체스는 재미가 없었지만 오늘부로 더 싫어하게 되었다. 승리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언제나 체스말에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었다. 까미유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는 애초부터 체스말에 관심이 없다는 점이 달랐다. 승리에만 관심이 있을 뿐 말은 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그 수단이야 어떠하든 서슴지 않는다. 말을 하나씩 잃을 때마다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표정으로 한 치 흐트러짐 없이 가장하고서.
마틴은 의미없는 승리가 패배 그 자체보다 더 굴욕적이라는 사실을 맛보며 보고서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까미유는 이만 가보려는 손님을 배웅하려는 일말의 행동도 취하지 않고,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자세 그대로 싱긋 웃기만 했다. ‘너의 패배야’라고 선언하는 무언의 말은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던 마틴의 인상을 구겼다. 다행히도 이미 출입문을 향해 까미유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얼굴을 그에게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뒤도 안 돌아보고 곧장 나가려고 했던 마틴은 문고리를 잡고 잊은 게 있다는 듯 ‘아’ 하고 소리 내며 뒤로 돌아보았다.
“저는 당신이 싫습니다. HYPOCRISY.”
“동감이야. ATTRACTIVE.”
굳이 혐오를 숨기려 들지 않는 건 피차일반이었다. 까미유 또한 마틴을 싫어한다. 완벽한 거짓 연기로 진실을 가지고 노는 그의 본질을 실제로 꿰뚫어보고 그 은밀한 계획을 근본적으로 망칠 수 있는 힘을 지닌 독심술사를 그가 달가워할 리 없었다. 애초에 자신의 마음이 읽힌다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마틴이 읽지 못하는 사람도 이 세상에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거짓말을 하면서도 그 대가로 타인의 마음을 간단히 손에 틀어쥐는 저 위선자에게 자신만큼은 그가 진심을 희롱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수 있었다. 언제까지나 까미유 데샹을 가식으로 대해주리라. 불쾌함과 혐오스러움을 인내하고서라도 그의 사악한 계획의 오점으로 남아주리라 다짐했다. 그것이 마틴 스스로가 까미유와는 다르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 동족혐오(Mirror)
일말의 감정도 없는 총알은 늘 그렇듯 담담하게 총구를 빠져나갔다.
총은 실로 우아하다. 불쾌한 피를 뒤집어 쓸 일도 없이 이젠 향긋하기까지만 초연 냄새만 남길 뿐. 후우- 가벼운 날숨으로 연기를 날려버린다.
살인에 대한 죄책감? 그런 게 있을 리가.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에 주저가 깃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일격에 급소를 꿰뚫는 속사는 ‘해결사’ 거너 J의 전매특허. 양심의 가책은 없다. 표적의 딸이 곰인형을 끌어안은 채 겁에 질려 울음소리도 못 내고 있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의뢰는 일가의 말살. 짭짤한 수고비를 대가로 중심표적과 그의 아내 그리고 딸아이까지도 없애라는 지시.
자, 이제 남은 건 저 변변한 반항도 못하는 약해빠진 생물. 간단하다. 몸 어디에 겨누든 총알이 채 박히지도 않고 벽까지 뚫고 나가버릴 야들야들한 몸.
뚜벅뚜벅, 워커 굽소리가 자기 귀에도 퍽 공포스럽게 들렸다. 아이는 여전히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곧 숨넘어갈 듯 딸꾹질만 해댔다. 그 눈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머스켓을 습관대로 휘리릭 한 바퀴 돌려 홀스터에 꽂아 넣었다. 안 그래도 큰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아이의 앞에 다리를 쩍 벌린 채 쪼그려 앉았다. 오른손 엄지와 검지만을 팽팽하게 펴고 나머지 손가락은 접은 채로 그 날카로운 검지끝을 아이의 희고 깨끗한 이마 위로 댔다.
“BANG-!!”
이마를 살짝 밀었다가 떼고는 검지를 입가로 가져와 후 불었다.
“심심한데 나한테 복수라도 하러 올 테냐, 꼬맹아?”
아이는 공황상태에 빠져 있으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야 원. 별로 킬러로서 전도유망한 것 같진 않군. 노려보든지 해야 할 거 아냐.
속으로 투덜거리며 바깥에서 들리는 사이렌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법무부 검찰국이 피해자가족 보호일환으로 기존신원을 말소하고 새 호적을 줄 테니 겨우 아이 하나 가지고 의뢰인에게 꼬투리 잡힐 일은 없을 것이다. 아이따윈 시끄럽고 적자생존사회에서 그냥 놔둬도 알아서 도태될 약한 생물이니 굳이 죽일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거너 J가 표적을 죽이지 않을 리 없지 않은가? 총알이 아까운 것뿐이다. 총알은 언제라도 아껴야 한다. 슬로언을 쏘는 짜릿하기 그지없을 그 순간을 다른 잔챙이들에게 허비한 탓에 총알이 모자라다면 그보다 더한 굴욕이 있으랴.
“Adios-.”
짤막한 작별인사를 남기고는 미리 봐둔 도주로를 따라 달렸다. 멍청한 짭새들은 대충 조사하고는 인근 마피아의 소행이라고 단정 지어버리겠지. 오직 한 사람만이 진범을 기억하고 쫓아올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 작은 가슴에 방아쇠가 생겼다면 이 거너 J의 앞에서 당기기 위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담백하기 그지없는 ‘살의’라는 탄환을 담아.
“재미있겠어.”
시크한 웃음을 흘리며 주차해둔 애마를 타고 밟았다.
정말이지 더욱 슬로언을 쏘고 싶은 밤이었다.
― 연쇄(Sin)
거너 J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한 발로 두 놈을 동시에 끝장낼 수 있다면 총알도 아끼고 어차피 뒈질 거 귀찮게 구는 잔챙이들을 좀더 빠르게 정리해 여가시간을 더욱 많이 확보하는 효과까지 따라오지 않는가. 공짜는 좋아하지 않지만―애초에 공짜라는 게 존재할 리도 없고―최소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끌어내면 뿌듯하다. ‘정당한’ 대가는 얼추 치른 셈이고, 거기에 자신에게 천운이 따라준다는 걸 확인할 수 있어서 더할 나위 없다.
운이라는 건 참으로 짜릿하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걸 매번 실감할 수 있게 해줘서 아주 마음에 든다. 행운의 여신이 이쪽을 향해 미소 지어줄 때면 정말이지 열렬히 키스라도 퍼붓고 싶은 심정이다. 안 그래도 나중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지면 악마한테 딱 한 번만 여신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개같이 구걸해볼 생각이었는데. J는 폭풍우가 들이닥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펍 문간에 우뚝 서서 반드시 그 계획을 실천하리라 다시 한 번 굳게 다짐했다.
“아쉽네. 화약이 젖을까봐 집에 ‘귀부인들’을 두고 왔는데 말이야.”
“그거 의외로구나. 거너 J의 이름이 울겠어.”
휘이잉 허공을 사정없이 난도질하는 바람의 아우성 속에서도 J는 웨슬리의 말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포착해내며 문을 닫았다. 판초 우의를 휙 벗어 아무렇게나 옆으로 던져두고는 부러 웨슬리가 앉아있는 자리에서 한 자리를 비워두고 나란히 앉았다. 주문은 하지 않았다. 손님한테 좀처럼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이곳 주인장은 J가 늘 마시던 걸로 알아서 내어줄 것이다. 유례없는 태풍이 부는 오늘같은 날에도 고집불통이 컨셉이라는 양 이 펍만은 문을 열 것이란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게다가 오늘은 언제나 만나고 싶어 마지않는 웨슬리 슬로언까지 대령되어 있다. 오, 여신님 그리고 이 세상 제일가는 뻣뻣한 마스터. 아이 러브 유 쏘 머치.
고향 서부의 분위기를 닮은 이 술집에서 J는 향수를 쥐똥만큼도 느끼지 않는다. 그리움이란 놈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단단한 심장은 여간내기는 가지지 못한다는 자부심에 어깨가 절로 으쓱해진다. 사랑이니 우정이니 말랑말랑한 감정은 배부른 돼지 새끼들의 사치스러운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이 비정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데 필요한 감정은 분노와 약간의 양념으로서 필요한 재미 그뿐이다. 웃음은 내가 살아있음을 자각하게 해주는 아주 중요한 요소다. 물론 J가 치는 농담에는 대부분 웃지 않는다는 게 아주 사소한 문제라면 문제일까. 웨슬리 슬로언의 창자에다가 콜로라도의 목장을 다 뒤져 제일 살이 뒤룩뒤룩 찐 돼지를 찾아낸 뒤에 그 고기를 갈아 넣어 소시지를 해먹으면 그것 참 맛나겠다는 센스 만점 조크를 왜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정말로 아쉬워. 평소부터 이곳은 MARSHALL의 시체가 나뒹구는 걸 보고 싶은 장소라고 생각해왔거든. 물론 당신은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죽는 게 가장 어울리겠지만. 내가 살인자로 몰릴 혐의가 제로에 가깝게 수렴된다는 점에서 더욱더.”
“하하-. 그거 고맙구나. 언제나 이 아저씨를 생각해주고 있다니.”
조용히 J의 앞에 잔이 놓였다. 표면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으므로 자칫 손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한다는 명분과 유들유들하기 짝이 없는 웨슬리의 태도에 대한 짜증을 한 데 담아 잔을 꽉 쥐고는 원을 그리듯 흔들었다. 얼음과 물이 뒤섞이는 이 야릇한 소리가 안주나 다름없었다.
J는 웨슬리에게 잔을 들어 보이며 ‘치얼스(Cheers)’라고 말했다. 허공에 잔을 부딪은 뒤 단숨에 데킬라 온더락을 들이켰다. 입술에 닿자마자 불붙은 듯 맹렬하게 다가오는 짜릿함. 맛이라기보다는 감촉에 가까운 이 열기는 언젠가 샤워를 끝내는 것도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밀고 들어온 원나잇 상대를 떠올리게 했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남자 허벅지는 제법 튼실해서 취향이었는데 말이야. 발정난 수캐의 거시기 같은 뜨거움. 천박한 비유지만 이 이상 가는 수사도 없을 거라 확신했다.
절정처럼 위장으로부터 머리로, 발끝으로 퍼지는 알콜의 열기를 충분히 맛보며 천천히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두었다. 그와 동시에 J는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일어나 품속에 숨겨둔 머스켓 두 자루를 꺼내어 웨슬리에게 겨누었다. 허나 속사로 위명을 떨치는 거너 J의 자부심을 비웃듯 총구 한 쌍은 허무하게 침침한 허공을 겨누고 있었다. 이윽고 철컥 하고 뒤통수로 와닿는 차가운 철제 총구는 패배의 감촉을 여실히 전하고 있었다.
“널 가르친 게 나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나보구나, 제인.”
“그 더러운 입으로 내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J는 재빨리 상체를 숙여 뒤에 있던 스툴을 차 넘어뜨렸다. 웨슬리가 그것을 피하는 틈을 타 홱 뒤로 돌아 다시금 그에게로 총구를 향하려고 했다. 그러나 J가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웨슬리는 그녀의 움직임을 예상했는지 J의 무릎 관절 뒤쪽을 가볍게 걷어차 자세를 무너뜨렸다. 쿠당 하고 마룻바닥 위에 쓰러지는 J가 일어나기 전에 웨슬리는 그녀의 허리 위에 무게를 싣고 앉았다. J의 두 손목 관절을 꺾어 머스켓을 떨어뜨리게 만들었다. J는 웨슬리가 주워든 자신의 애총을 빼앗으려고 바동거렸다. 앙칼진 손을 요리조리 잘도 피하면서 웨슬리는 총알을 모두 빼내어 제 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네 본명과 별 차이가 없는 이름을 부여하다니. 헤더 인더스트리도 장난이 심하군. J와 제인, 너무 비슷하잖아.”
“능구렁이. 그 장난에 당신도 일조했으면서 발뺌하기는.”
웨슬리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권총을 다시 친절히도 J의 손에 쥐어주었다. 완벽한 제압과 무장해제, 청출어람은 아직도 멀었나보다. 절로 이가 빠드득 갈렸다. 여전히 위에서 비킬 생각을 않고, 남들은 애틋하다고 말할 테지만 J의 처지에서는 그저 속을 박박 긁는 것에 지나지 않은 눈길로 웨슬리는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시키지. 그 뻔뻔한 면상을 후려갈기기 전에.”
“……많이 컸구나, 작은 꽁지머리 소녀(my little ponytail lady).”
마룻바닥 위로 퍼진 J의 기다란 금발을 웨슬리는 한 줌 건져 올려 입을 맞추었다. 조롱 그 이상도 아닐 행동에 당초 계획을 수정해 머리통에 총알을 박아 넣는 대신 총신으로 때려죽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J는 거칠게 팔을 휘둘렀다. 웨슬리는 여유롭게 그 매서운 공격을 피하며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널브러진 스툴을 다시 제자리에 세워놓으며 마스터에게 사죄를 건넸다. 눈앞에서 갑작스레 일어난 난전에도 별 놀란 기색없이 웨슬리가 추가 주문하는 술을 내어주는 주인장에겐 꽤나 하드보일드한 과거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J는 총을 거두었다.
꽤 험한 말만 골라 웨슬리를 향한 저주를 퍼부으며 J는 자리에 앉았다. 웨슬리는 J 앞으로 잔을 밀어 섹시한 갈빛 액체를 따라주었다. 군침을 꿀꺽 삼키게 만들 정도로 농염한 향취가 비강을 간지럽혔다. 병 라벨을 보자 생산단위는 얼마 되지 않지만 맛이 끝내주기로 유명한 양조가 라옹 베르트의 걸작이었다. J로서도 딱 한 번, 한 잔만 맛본 술이다. 값은 가히 천문학적으로 비싸다. 이걸 어떻게 마스터가 입수했는지 다시 한 번 이 집주인의 불가사의한 매력에 빠져들며 J는 거절하지 않고 그 잔을 손에 넣었다.
“흥. 이빨 빠진 호랑이인 척 혼자 있는 점잔 다 빼더니 여전히 뒷구멍으로 챙길 건 다 챙기고 있으신가 봐?”
“너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날이 오다니. 이상한 기분이야. 너를 보면 내가 나이 들었다는 걸 실감하게 돼.”
J는 무심코 손이 안주머니로 향하려는 것을 억눌렀다. 총알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까먹은 것도 아닌데 놈에 대한 살의는 분초 단위로 끓어올라서 곤란하다. 그 분노를 삭이기 위해 유리잔까지 씹어먹을 듯한 기세로 술을 집어삼켰다.
마음에 안 든다. J는 웨슬리의 현재를 말하고자 하는데 웨슬리는 J의 과거를 자꾸만 들먹인다. 스물여섯의 J를 앞에 두고 열둘의 J를 그는 보고 있었다. 헤더 인더스트리의 수행원으로 나름 이름을 떨쳤다고 하는데 어린애 취급 받는 것이 지독히도 싫었다. 회상하는 그의 눈빛 속에 환상처럼 어리고 있는 ‘제인’ 헤이스팅스가 되는 게 불쾌했다. 입길로 넘쳐흐른 술을 소매로 닦으며 다시 비운 잔을 쾅 웨슬리 앞에 두었다. 웨슬리는 잠자코 웃으며 술을 따라주었다.
“남은 무장해제시키고 자기는 여전히 품속에 무기를 지니고 있다니. 훌륭해. 아, 오해는 마. 비꼬는 건 아니야. 지배하는 쪽은 언제나 정의지. 브라보! 정당한 승부따위 개나 주라지. 난 그걸 당신에게 배웠어. 핫하-.”
“그게 아니다.”
“뭐?”
J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턱을 괴고 눈을 치켜뜬 채 웨슬리를 쳐다보았다. 웨슬리는 잠시 J와 마주보다가 겉옷 안주머니에서 데저트 스톰을 꺼내들었다. J는 저걸 뺏어서 놈을 쏴죽이는 건 어떨까 상상했다. 자기자신의 무기에 당하는 웨슬리 슬로언의 죽음도 아주 우스꽝스러워서 좋은 시나리오인 듯 싶다. 허나 좋은 술이 가져다주는 나른하고 편안한 취기는 상상을 상상으로만 그치게 만들었다. 어쩌면 웨슬리의 설명을 J는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너는 언제나 나를 쏘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겠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앞으로도 너를 쏠 생각이 조금도 없어. 방아쇠를 당길 마음이 없다면 제아무리 살상능력이 뛰어난 총도 무기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
“지금 그걸 나더러 믿으라는 거야?”
“믿을지 안 믿을지는 네 자유다만, 진심이다.”
“하-. 웃기지 마.”
J는 코웃음치며 다시금 장인이 빚어낸 신의 음료를 꿀꺽 삼켰다.
“그러는 너도 안심하고 내 앞에서 취하려는 것 같구나. 그 페이스로 마시다간 곧 취해 쓰러지고 말 거야. 좋은 술이라 숙취는 없지만 도수는 높으니까.”
“얕보지 마. 난 웬만한 사내새끼들보다 더 잘 마시니까. 먼저 나자빠지는 건 당신이야.”
“과신은 좋지 않다, 제인.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과신과 확신이 다르다는 것쯤은 알아야지, 꼰대 양반. 나이를 허투루 처먹었나? 당신은 내가 절대로 당신을 죽일 수 없을 거라 생각해서 총은 무기가 아니라느니 그딴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두고 봐. 당신 목숨은 내가 쥐고 있어. 웨슬리 슬로언, 당신의 숨통을 끊는 건 나야. 이 거너 J라고…….”
J의 기억은 대강 거기까지였다. J는 자신이 잠들어 있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일으켰다. 순간 머리가 핑글 어지러워 비틀거렸으나 가까스로 스툴을 붙잡아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약간 눈을 가늘게 뜨고 환한 실내를 둘러보았다. 덧문을 연 창으로 맑게 갠 하늘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간밤의 폭풍우가 무사히 지나간 것을 축복하듯 새파란 하늘이다. 주인장은 J가 깨어나도 아랑곳 않고 바닥을 닦는 일에만 집중했다. 아프지는 않지만 J는 멍한 머리를 손으로 짚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일은 누가 가위로 잘라내 가져간 것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J가 방금 전까지 엎드려 잤던 테이블 근처에 얇게 저민 레몬 몇 조각이 담긴 물컵이 보였다. 얼음이 얼마 녹지도 않았다. 마스터는 정녕 인간이 아닌 건지. 예지 능력이라고 있나 보다. 그 모든 불가사의가 별로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신비로운 사람이다. J는 시원한 레몬수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다시 스툴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뭔가 다리에 얽히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스툴의 낮은 등받이에 아슬아슬 걸려 있는 옷을 발견했다. 홱 잡아채어 살피니 분명 웨슬리가 걸치고 있던 겉옷이었다. 어쩐지 쌀쌀한 허전함이 든다 싶었더니 잠들어 있는 동안 이 옷이 J를 덮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옷을 틀어쥔 손이 하얗게 질리며 바르르 떨렸다. J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펍을 뛰쳐나갔다. 사람들이 하나둘 갖다 버린 잡동사니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 그 옷을 바닥에 거세게 내팽개쳤다. 그리고 구둣창으로 사정없이 짓밟았다.
“웨슬리, 슬로언―!!”
간밤의 비로 진창이 된 흙바닥에서 옷이 넝마가 되는 건 삽시간이었다. 숨이 약간 가빠질 정도로 격렬한 발길질을 끝내고 마무리로 마른 침까지 뱉었다.
J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며 골목을 이루는 칙칙한 회벽에 몸을 기대섰다.
“……빌어먹을.”
놈이 말하는 거라면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섭리도 순순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허세를 부리려던 건 아니다. 그가 대등한 상대로 봐주기를 마음 한구석에서 원하고 있었던 거였다. 모형 권총 사격 실력을 아저씨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꽁지머리 소녀와 현장에 떴다 하면 겁 많은 누군가가 오줌을 지리게 만들 수도 있는 거너 J는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 인정의 증거였다. 잘했다고 아저씨가 웃으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던 그때와 놈을 시체로 만들어야 스스로의 실력을 확신할 수 있는 현재.
지금 막 어렴풋이 필름이 끊기기 전 웨슬리가 했던 말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래. 너만이 나를 죽일 자격이 있겠지.”
그 말이 주는 기묘한 만족감에 가슴이 다 설렜다. 허나 잊지 말아야 했다. 그 대단한 작자도 그저 원래 자신이 가졌어야 할 몫을 되찾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J가 하려는 건 한낱 복수가 아니었다. 감히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한 힘을 손에 넣어 세상을 쥐고 흔드는 일이다. 웨슬리 슬로언은 그 과정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야 했다.
J는 골목을 나서며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늘 음울하기 짝이 없는 흐린 날씨만 보다보니 저 창천은 조금 고향의 하늘과 닮아있는 것도 같았다.
― 굴욕(Resistance)
“어, 트리비아! 여기야 여기!”
“우와아아, 트리비아다아―.”
임무를 마치고 단골 펍에서 휴톤과 만나기로 한 트리비아는 그만 펍 문간에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트리비아가 입구로 들어서는 걸 보면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큰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반겨주는 휴톤이야 의외로울 것이 없었다. 다만 그 옆자리에 초록색 머리카락이라서 더욱 상기된 얼굴이 눈에 띄는 미쉘이 있었던 것이다. 평소에 트리비아 앞에서만큼은 기질대로 활발해지고는 했지만, 휴톤처럼 큰 목소리로 연신 트리비아의 이름을 부르며 한쪽 팔을 높이 치켜들고 반갑게 흔들어대는 행동을 공중에서 하지는 않는다. 약간 혀가 꼬부라진 발음하며 잘 익은 사과 같은 두 뺨을 보건대 술을 마신 게 분명해 보였다. 그 원흉이 누구인지 안 봐도 뻔해, 트리비아는 휴톤을 살짝 째려보며 가까이 다가갔다.
“트리비아~ 보고 싶었어~.”
“어머.”
옆자리에 앉자 미쉘이 두 팔을 활짝 벌려 품으로 안겨들었다. 트리비아는 조금 얼떨떨해서는 미쉘을 마주 안아주었다. 그게 좋은지 미쉘은 에헤헤 웃으면서 트리비아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마음껏 부볏거렸다. ‘좋은 냄새-’하고 말하며 방싯방싯 웃는 아이를 보며 트리비아도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미쉘의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자기도 아직 어른의 보살핌이 필요한데도 어린 남동생을 책임지고, 어둠의 능력자 집단의 리더로서 활동하느라 지나치게 의젓해서 응석부리는 방법을 잘 모르는 아이인데. 술의 힘일까. 트리비아로서도 처음 보는 미쉘의 거리낌없는 어리광이었다. 사람한테 관심은 꽤 많지만 경계심이 강해서 고양이에 가까운 아이가 지금만큼은 꼬리를 신나게 흔들어대며 주인에게 달려드는 강아지 같았다.
이 흐뭇함에 계속 빠져 있어도 좋았을 테지만, 반대편에서 느껴지는 어안이 벙벙한 시선으로 눈길을 돌렸다. 자기가 헛것을 보는지 의심스러운 듯 휴톤은 입을 딱 벌린 채 눈을 연거푸 비벼대고 있었다. 미쉘이 사랑스러운 것과는 별개로, 아이에게 술을 먹인 저 웬수를 그냥 모른 척 넘어갈 수는 없었다. 스윽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매서운 시선을 향하자 휴톤이 정신을 차리고 저도 모르게 등을 꼿꼿이 세우며 두 손을 무릎 위에 얹고 바로 앉았다. 본인도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슬금슬금 눈길을 피하며 도망칠 구석을 찾고 있었다.
“미쉘.”
“으응~?”
“취했니?”
“나 안 취했어! 그냥 예쁜 주스 몇 잔 마셨을 뿐인데……흐헤헤, 기분이 되-게 좋네? 날아갈 것 같아. 난 트리비아처럼 날개도 없는데 슈웅~하고.”
별로 우스울 것 없는 말인데도 뭐가 그리 웃긴지 미쉘은 트리비아의 품에서 떨어져 나와 별안간 배를 잡고 혼자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기분이 나쁜 것보다야 좋은 건 다행이지만 취해도 제대로 취했다. 미쉘의 숨결에 섞인 알콜 냄새는 별로 강하지 않았다. 지금 미쉘 앞에 놓인 잔의 모양으로 보나 복숭아, 레몬 등의 풍미가 느껴지는 것으로 보나 칵테일을 여러 잔 마신 듯했다. 별로 센 술은 아니었을 테지만 처음 마셔본 탓도 있을 테고 선천적으로 술이 약한 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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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비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휴톤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휴톤은 그새 자기 죄를 잊고 미쉘이 웃자 본인도 덩달아 호탕하게 웃으며 맥주를 들이키다가 다시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게, 저, 뭣이냐. 미쉘이 피터 잠든 거 보고 연합에서 나오는 길에 마주쳤는데 너 만나러 간다고 하니까 같이 가고 싶어하는 눈치길래. 또 기운이 없어 보이기도 했고……. 이런 데서 우유 한 잔이라는 것도 웃기잖아? 애 취급하는 거 싫어하는 타입 같고. 그래서 칵테일 정도는 괜찮겠지 하고 시켜줬는데, 예쁘다고 막 감탄하면서 맛있게 마셔주니까 마스터도 기분 좋은지 자꾸 만들어주고 그래서…….”
휴톤은 도움을 청하는 간절한 눈길로 바 너머 주인장을 보았으나, 그는 나를 끌어들이지 말라는 식으로 시치미 뚝 떼고 흰 천으로 유리잔 닦는 일에만 열중했다.
술은 어른한테 배우는 게 맞지만 휴톤은 술선생으로 삼기에는 가히 최악에 가까웠다. 저 쓸데없이 근육만 비대한 주정뱅이가 아이라고 해서 사양할 리가 없다. 자제할 줄 아는 것이 핵심인 주도(酒道)를 가르치기는커녕 다다익선이라고 부어라 마셔라 할 게 뻔한 친구의 습성을 슬프도록 잘 알고 있었다. 술 자체가 나쁘다고 하는 건 아니다. 다만 트리비아는 미쉘이 기운 없어 보였다는 휴톤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아하하- 트리비아, 나 지인짜 기분이 좋아. 아까까진 기분이 저엉말 안 좋았거든? 저 아저씨가 만들어준 주스엔 신기한 힘이 있나봐. 있잖아, 아저씨. 아저씨도 사이퍼야? 아저씨는 좋겠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낫게 해주는 능력자라서…….”
안 그래도 하얗게 그슬려서 생기 없어 보이는 신비로운 눈동자가 더욱 초점을 잃고 허공을 방황했다. 멍하니 앉아 실없이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던 미쉘이 이내 고개를 떨어뜨렸다. 휴톤은 다시금 맥주를 입 안으로 털어 넣으려다가 혹시 미쉘이 우는가 싶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가 아이의 어깨를 잡고 괜찮냐고 말을 걸려는 것을 트리비아는 조용히 고개를 흔들어 제지했다.
술맛이 좋은 것은 물론이고 술집 치고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라서 무척 마음에 든 펍 안의 고요가 갑작스레 의식되었다.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여가수의 애절한 노래는 그 기묘한 정적을 더욱 두드러지게 할 뿐이었다. 두 어른은 아이가 스스로 침묵을 깰 때까지 말없이 기다려주었다.
“……있지, 트리비아.”
“응.”
“피터가 학교 사육장에서 공동으로 키우는 토끼들을 전부 죽여버렸대.”
“…….”
미쉘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깨까지 오는 곱슬거리는 초록빛 머리칼이 미쉘의 얼굴을 드리워 표정을 살필 수가 없었다. 술의 흥취가 남아 목소리는 말하고 있는 내용과 달리 별로 비통하지도 않았다. 아이의 아픔은 그래서 더 칼날같이 전해졌다.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그냥 그랬대, 그냥……. 불쌍하지도 않냐고 화를 낼 뻔했는데 나 참았다? 혼내도 피터는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난 장난감을 망가뜨리는 거랑 살아있는 동물을 죽이는 거랑 뭐가 다른지 설명해줄 수도 없었어. 나도 그냥 그런 거니까. 당연해서 그냥 그런 거니까. 피터가 토끼를 죽인 이유랑 내가 그 토끼를 가여워하는 거랑 똑같은 거야…….”
미쉘이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또 그렇게 한참 침묵이 이어졌다.
“……피터가 그렇게 된 건, 나 때문이야. 전부 내 잘못이야…….”
미쉘은 무어라 웅얼거리더니 바 테이블 위로 콩 하고 이마를 박았다. 이윽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잠이 든 것이다.
트리비아는 미쉘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론, 그만 가. 미쉘을 집으로 데려가야겠어.”
“뭐어? 방금 왔잖아? 한 잔도 안 하고?”
“이 아이를 이렇게 불편하게 자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아.”
“허헛, 참. 영판 엄마로구만!”
휴톤은 군말 않고 테이블 위에 술값을 얹어두고는 조심스레 잠든 미쉘을 안아 올렸다.
평소에는 펍에서 나와 트리비아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길에 휴톤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바빴다. 오늘은 얌전히 밤거리의 정적에 융화되었다. 그는 침묵을 어색해하지는 않지만, 침묵하지 않아도 될 때면 시종일관 대화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데도. 조금 생경하면서도 제법 괜찮은 정적을 음미하고 있는데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비슷해.”
“…?”
“너랑 미쉘 말이야. 비슷하다고. 술 마시면 미묘하게 솔직해지는 게.”
“……아닌 사람도 있어?”
“아니. 술의 힘이야 원래 엄청나지만 워낙 평소에 자기를 보이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눈에 띈다고 해야 하나. 물론 미쉘은 그 정도가 크고 넌 그것마저 아주 쬐끔이지만.”
트리비아는 휴톤의 품 안에서 새근새근 잘도 자는 미쉘을 살피다가 물끄러미 휴톤의 옆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술을 마시면 사람은 솔직해진다는 전형을 아이는 금방 보여주었다. 그러나 트리비아는 취기를 알기는 해도 한 번도 흐트러진 적은 없었다. 그 와중에 휴톤은 자신이 드러내려 한 적 없는 무언가를 보았던 걸까.
“뭐어, 근본적으로는 다르겠지. 미쉘은 억누른다고 하면 넌 보일 생각이 아예 없는 거니까.”
“……그래. 이 아이는 나와 달라. 어쩌면 술의 힘을 빌려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지. 오늘처럼.”
“그걸 인정한다면 애한테 술 먹였다고 너무 구박하지는 말라고, 여왕님.”
“설마 지금 잘했다는 건 아니겠지? 내가 안 왔으면 제지 안 하고 계속 마시게 했을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슴다. 죄송함다.”
“알면 됐어.”
트리비아는 자는 미쉘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며 뺨을 어루만졌다. 오늘밤은 이 소중한 아이가 부디 술김에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푹 잘 수 있기를 기원했다.
― 무장해제(Drunken)
*
-「연쇄」를 제외한 소설들은 전부 커미션 개시 기념 리퀘 이벤트 당첨자 분들께 드린 소설입니다.
- 까미유와 마틴은 정말로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마틴은 선, 까미유는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설령 그 경계는 불분명할지라도 말이죠.
- 최근 웨슬제이가 좋아지네요. 커미션으로 쓴 드렉샬럿과 마찬가지로 직접 글로 써보니 정이 붙는 마법.
- J의 대사는 하나하나 성우 이용신 님의 J 연기 톤을 살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용갓느님 목소리 덕분에 J 누님을 한층 더 앓습니다. 진짜 웨슬리 성우이신 조규준 님이랑 두 분이서 대화하는 거 듣고 싶어요. 사이퍼즈 인터넷 라디오 방송국 이런 거 안 들어주시나요. 아니면 드라마시디 내주세요. 요새 성우 섭외하는 걸로 보나 매거진으로 보나, 성우 콘텐츠 쪽에도 퍽 신경을 쓰는 듯한데 저로선 아직 한참 부족하지 말입니다. 끄아아아.
- 휴톤은 트리비아 절친, 미쉘도 트리비아 절친, 그러므로 휴톤과 미쉘도 친구. 전 세대 차이 나는 우정을 정말로 좋아합니다. 특히 제가 트리비아&미쉘 조합을 무척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는 어떤 인연으로 맺어진 깊고 각별한 사이인데 연성물이 많이 안 보여서 슬픕니다. 친구이자 자매 같고 모녀 같은 틀비미쉘 우정 같이 파주실 분 안 계십니까. 흑흑.
- 오탈자 및 이상한 문맥 지적, 비판, 다양한 질문 환영합니다. (전작 포함)
- 주요서식지: 블로그(http://blog.naver.com/goastbaster) / 트위터(@winzs76) / 익명질문함(http://ask.fm/winzs76/)
- 깨알 같은 전작 홍보
「은폐」[피터미쉘데샹]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3763240)
「유도」[데샹미쉘피터]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4004813)
「호접지몽」[다이무스]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6171648)
「Twilight」[올캐러/장편] (http://blog.naver.com/goastbaster/150156219319)
「손바닥글 모음」[다무틀비]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8953308)
「한 여름밤의 꿈」[올캐러/비정기 연재중]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10394173)
「늑대와 소녀」[바레미쉘]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11709858)
「lone」[드렉샬럿]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13320328)
P.S.1 전작 장편「Twilight」은 팬아트게시판에서 모두 자삭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위의 전작 홍보 좌표에 보이듯이 앞으로는 제 개인 블로그에서만 보실 수 있습니다. (소중한 댓글들은 일일이 스샷 찍어서 고이 보관하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