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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lipse Vol.41 낙인을 찍은 소녀들 정보제공자, 마크 바이스(바이스 예술학교 이사, 비능력자)

나의 불행은 율리카 드로스트와 안드레 바이스 사이에서 태어난 순간 시작된다.

만약- 인류가 뱉을 수 있는 것 중 가장 쓸모 없는 단어를 사용해 표현하자면,
만약 어머니가 염동력자로 이루어진 드로스트 가문에서도 당시 수장이었던 안나 드로스트 다음가는 염동력자가 아니었다면,
만약 아버지가 전세계의 주목을 받는 뛰어난 조각가가 아니었다면. 나는 조금 덜 불행했을 수도 있다.
사람들은 두 사람의 아이는 반드시 특별한 무언가를 갖고 태어났을 거라고 말했다. 나 역시 내게도 그들과 같은 어떠한 재능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옳았다. 두 사람의 아이는 정말 특별한 아이였다. 그게 내가 아니었을 뿐.

강한 능력자, 혹은 뛰어난 예술가.
나는 그 중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내가 가지고 있을 거라 믿었던 특별함은 모두 내 친애하는 동생의 것이었다. 그 애마저도.

재능

말을 깨우치고 의식적인 행동을 할 수 있을 무렵부터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쓸모 있는 것이 되고 싶다.’

어머니가 염동력으로 움직이는 목마를 타고 아버지의 캔버스에 진흙을 문지르는 시절이 있었다.
두 사람은 나를 정말 사랑했다. 내가 무엇을 하든 화내는 법이 없었다. 원하는 것을 쥐여 주고, 바라는 것을 이루어 줬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나를 향한 애정은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내가 그들의 재능을 물려받았는지는 상관없었다. 두 사람의 애정엔 조건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애정 너머에는 의문이 항상 존재했다.

“우리 마크는 언제 쓸만해 질까?”

사랑을 가득 담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면서 어머니는 곧잘 그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정말로 그것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나는 그래도 괜찮았다. 내가 쓸모 있는 아이가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로 생각했으니까.

엘프리데가 태어났을 때 그 애도 나와 비슷한 삶을 살 게 될 거로 생각했다. 내 손가락을 쥐는 작은 손을 보면 연민과 동질감이 느껴졌다.
나는 자신을 위로하듯이 동생을 더 사랑하려 애썼다. 하지만 동생은 나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려고 태어난 존재였다.
그걸 몰랐던 나는 어머니를 쏙 빼닮은 아름다운 아기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애정을 주었다.

세 사람의 애정을 받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로 타고났기 때문일까? 엘프리데는 아버지의 뛰어난 미술적 재능을 물려받았다.
작은 손으로 대충 빚어낸 조각이 내가 정성 들여 만든 것보다 섬세했고, 원하는 색을 잘 이끌어내지 못하는 나와는 다르게 물감 농도를 조절하는 것도 뛰어났다.
어린 딸에게서 자신에게 물려받은 것이 확실한 재능을 발견한 아버지는 엘프리데를 무릎에 앉히고 채 여물지 않은 손에 붓을 쥐여 주며 미술을 가르쳤다.
나도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붓을 잡고 싶었지만 내겐 물려받은 재능이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붓을 잡지는 못해도 아버지가 만든 어린 천사 조각상의 모델이 될 수는 있었으니까.
진짜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따로 있었다.

그림자는 드리우고

그날 햇볕이 따스하게 비치는 놀이방에서 엘프리데는 아버지가 만들어준 작은 조각으로 햇빛을 가리며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었다.
놀이방 옆에는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음악실이 있었는데, 그날도 어머니의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옆에 캔버스를 세워놓고 엘프리데를 그렸다. 엘프리데 한 번, 캔버스 한 번, 번갈아 보며 붓을 움직였다.
반복적으로 엘프리데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을 때, 갑자기 그것이 날 덮쳤다.

“흐아아악! 시, 싫어! 어머니, 어머니! 아버지!”

흐물거리며 단단하고, 형태가 없으며 날카로운 끔찍한 형상이 나를 짓눌렀다. 그것의 이름은 죽음이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다급한 소리와 함께 어머니가 놀란 얼굴로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나는 어머니에게 손을 뻗었다.

“세상에, 엘프리데!”

구원을 바라며 눈을 한 번 깜빡인 사이에 어머니는 웃는 얼굴이 되어 있었다. 활짝 웃는 얼굴은 처음 봤기 때문에 나는 그 얼굴이 너무나 낯설었다.

“훌륭하구나, 엘프리데. 정말 멋진 능력이야.”

자부심과 기쁨으로 가득 찬 어머니의 목소리도 낯설었다. 내가 아는 어머니가 아닌 것 같았다.
누구세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묻는 순간 어머니가 나를 짓누른 형상처럼 변할 것만 같았다.
나는 당장 죽을 것처럼 숨을 삼키며 어머니를 향해 뻗은 손을 내렸다.

어머니는 감격한 얼굴로 엘프리데의 손짓에 따라 나를 짓누르는 그림자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내 목을 조르는 형상은 아버지의 조각을 어렴풋이 닮아 있었다.
미숙하게 만들어진 환영은 나를 밀친 뒤부턴 내 목을 조르거나 압박하지 못했다. 아픈 곳은 뒤로 넘어졌을 때 부딪힌 곳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슴이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답답해졌다. 엘프리데를 품에 가득 안으며 행복해하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점점 아득해졌다.

티샤 홀링스워스

나는 그림을 그렸다. 재능을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내게 필요한 건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방문은 꼭 닫고 혼자 있게 해달라고하면서도 나는 창문을 닫지 못했다. 함께 있고 싶지는 않았지만 소외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애가 처음 이 집에 온 날도 기억하고 있었다.

티샤 홀링스워스.
어둡고 지저분한 골목에 몸을 숨긴 채 버려진 신문을 읽으며, 불길하고 음침한 환영으로 사람을 놀라게 만들던 어린 능력자.
놀란 사람이 떨어트리고 간 유실물을 주워 생계를 이어가던 불쌍한 여자아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환영을 보고 엘프리데와 같은 능력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본 아버지는 그 애가 자신의 딸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믿었다.
확고한 형태의 이미지를 참고해야만 환영을 만들 수 있는 엘프리데와 다르게 그 애는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환영으로 만들 수 있었으니까.
어머니는 그 애가 가족에게서 버려져 혼자라는 사실에 기꺼워했다. 그런 이들이 드로스트 가문을 이루는 바탕이기 때문이었다.

“드로스트 가문은 뛰어난 이를 배척하지 않는다.”

온화한 얼굴로 내미는 어머니의 손을 그 애는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다급하게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 애의 얼굴에는 자신의 것을 가지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었다. 그 애가 간절하다는 것은 모두가 알아봤지만, 무엇을 간절하게 원하는지는 나만 알아봤다.
알아보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도 그 애와 같은 것을 바라고 있었으니까.

나는 창문 너머에서 멍하니 그 애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제 내 것을 갖기 위해 엘프리데와 같은 능력을 가진 그 애와도 겨뤄야 했다.

내 자리

엘프리데와 티샤는 서로를 매우 좋아했다. 무엇이든 함께 하고 싶어 했고, 서로에게서 좀처럼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둘의 사이를 지켜보던 어머니는 엘프리데와 티샤를 함께 가르쳤다. 나는 굳게 닫힌 별채 문 너머로 둘을 칭찬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곤 했다.
수업이 진행될수록 엘프리데의 환영은 티샤를 닮아 더 정교해지고 티샤의 환영은 엘프리데처럼 물리력을 가지게 되었다.
둘은 마치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언제나 붙어 다니던 둘이 떨어지는 것은 엘프리데가 드로스트의 헌터가 되기 위한 특별한 수업에 참여할 때뿐이었다.
그럴 때면 티샤는 우울한 얼굴을 한 채로 엘프리데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별채 근처를 서성이고는 했다. 나와 같았다.

“넌 엘프리데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정원을 가득 채운 햇살 속에서 티샤는 홀로 어두웠다. 그 애 주변은 명확한 경계를 그릴 수는 없었지만, 왠지 어둡게 느껴졌다.

“엘프리데는 유일해, 내게.”
“하, 그래, 너희 둘은 서로에게 너희뿐이니까. 그러니까 놓치지 말고 꼭 잡으라고. 힘들게 잡은 구명줄이 끊기지 않게.”

엘프리데를 시기와 질투로 대했다면 티샤에게는 악의로 대했다. 티샤의 끝없는 탐욕과 갈망이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아 역겨웠다.
그래서 그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티샤가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을 때 흠칫 놀라고 말았다.

“너 내가 그렇게 좋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거야?”
“언제나 날 보고 있잖아. 내가 혼자 있으면 말을 걸고.”
“관심 없어. 넌 아무 것도 아니잖아. 기분 나쁜 능력으로 구걸이나 하던 주제에.”

맞아, 라고 대답하는 티샤의 보랏빛 눈동자가 너무 맑아서 그 안에 비친 나는 마치 꿈속에 있는 것 같았다. 악몽이었다.
꿈속에서 한심하고 멍청한 남자애가 엉망진창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알고 있다. 티샤에게 뱉은 폭언은 전부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면죄부가 되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 말로 상처받은 게 티샤가 아니라 나였다고 해도 말이다.

티샤는 자신에게도 구걸하지 않았던 시간이 있었다고 했다. 티샤의 부모가 아이를 포기하기 전, 티샤에게서 달아나기 전,
누구보다 귀한 딸로 사랑받으면서 자랐던 시간을 기억한다고 했다.

“난 네가 부러워, 마크. 어른이 되면 예술학교를 물려받게 된다면서? 엘프리데가 그랬어, 학교는 네가 갖게 될 거라고. 자기는 필요 없대.”

티샤의 눈동자 속 내가 일그러졌다. 티샤는 같은 능력으로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엘프리데가 아니라 나를 부러워했다.
엘프리데의 옆자리, 함께 걸어 나갈 수 있는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것을 부러워했다. 나는 그 부러움에 웃어줄 수 없었다.

나는 바이스 예술학교에 입학하기에 알맞은 인재는 아니었다. 내 그림은 보통 사람들의 입맛에 맞출 수는 있지만
선도하거나 압도하지는 못하는, 딱 그 정도에 불과했다. 그래도 나는 반드시 이 학교에 들어가야만 했다.
드로스트가 될 수는 없었으니 바이스라는 이름이라도 지키기 위해서. 나는 그림에 내 모든 시간을 쏟았다.
내게는 정말 간절한 자리인데, 엘프리데에게는 먹기 싫은 사탕을 골라내듯 손끝만 까딱하면 언제든 치워버릴 수 있는 자리였다.
내가 없는 듯 대화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나는 애써 미소 지을 필요도 없었다. 내가 어떤 표정을 하든 어머니, 아버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 자리를 채우고, 가족들이 주는 사랑을 달게 받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닌 누가 채워도 상관없는 자리였다.

“닥쳐! 시끄러워, 꺼지라고!”

제발 내 자리를 빼앗지 말아줘, 나를 더 형편없는 인간으로 만들지 말아줘, 내가 얼마나 쓸모없는지 자각하게 하지 말아줘.
나는 애원하며 울부짖었다.
내가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있던 얄팍한 행복의 장막이 티샤의 존재 때문에 찢어지고 애써 외면했던 진실이 날 고통스럽게 했다.

“마크, 그러지 마. 화가 난다면 나한테 화를 내.”

등 뒤로 엘프리데가 다가온 줄도 모르고, 나는 티샤에게 소리쳤다. 내가 티샤를 윽박지른 걸 다 들었을 텐데도 엘프리데는 늘 그렇듯 다정하게 말했다.
그건 어머니, 아버지가 내게 주는 사랑과 같았다.

“네게…, 화를 내라고?”
“어차피 너는 내게 의미가 없는걸. 그러니까 뭘 하든 괜찮아. 알았지, 마크?”

악마가 둘이 되었다. 내게 좋은 모든 것을 앗아간 엘프리데, 내게 남은 것을 탐내는 티샤. 내게 가장 고통스러운 낙인을 찍은 소녀들.

마크 드로스트

처음 학교에 갔을 때 나는 매우 위축된 상태였다. 남들이 내게 바라는 것을 하나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능력을 가지는 건 불가능해 보였으니,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역할- 아버지의 아들로라도 존재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막상 학교에 가니 나는 생각보다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나는 남들이 가지지 못하는 기회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진짜 재능이 뭔지 아는 사람들에게는 가소로웠겠지만, 나는 꽤 준수한 성적을 낼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보고 배운 바가 다르니 당연한 결과였다.

예술학교의 정규 교육과정은 아주 기본적인 수준이었지만, 나는 내가 행정과 회계는 곧잘 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머니를 닮은 얼굴과 어린 시절부터 내 자리를 찾기 위해 치열하게 갈고 닦은 눈치로 나는 학생회장이 되었고, 그 일도 제법 잘 해냈다.
졸업하기 직전에 이미 아버지의 행정 업무를 이관받았고, 학교의 재정 관리나 입학, 졸업을 포함한 학사과정 관리를 배웠다. 나는 학교가 좋았다.

“마크, 네가 자랑스럽구나. 이대로라면 엘프리데에게도 보탬이 될 수 있을 게다.”

그게 내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칭찬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그렇게 인정받았다. 나는 내 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졸업하고 바로 바이스 예술학교의 이사로 취임했다. 놀랄 정도로 반향이 없었다. 마치 당연한 일이었다는 평이었다.
그동안 열심히 노력해온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쉴새 없이 일했다. 내게 주어진 보석을 더 갈고 닦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그 순간에는 이 보석이 엘프리데의 관심 밖에서 굴러다녔기 때문에 내가 가질 수 있었던 것이라는 것도 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첫 졸업 전시회. 바이스 예술학교의 졸업전시회는 졸업생들의 공연, 전시일 뿐이지만 미 동부 최대의 문화예술전이었다.
모든 면에서 차질 없이 준비했고 나는 내 성과에 자신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전시회를 돌며 우수한 학생을 추천하고 후원자를 모집했다.
아버지는 내 어깨를 감싸며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그에 제법 들떠 있었는지 내가 어떤 사실을 눈치챈 건 하루 이틀 정도 지났을 때였다.

나는 아버지가 소개해주는 사회 명사들이 낯익었다. 이름은 낯설었지만, 그들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아직 엘프리데가 모든 것을 차지하기 전, 사람들이 내게 어떤 기대를 품고 내가 그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을 거라 믿었을 때,
어머니를 따라 드로스트 본가에 갔을 때 만났던 사람들이었다. 그들 모두 드로스트였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내 얼굴이 사색이 되었을 수도 있고, 아무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기대에 찬 시선으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아버지가 낯설었다. 하지만 내가 어떤 표정이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은 평소와 같았다.
나는 여전히 내게 허락된 것만 가질 수 있었다.

배부른 자의 굶주림

엘프리데와 티샤가 입학했을 때 나는 이미 상급생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과 마주칠 일은 별로 없었다.
그저 먼발치에서 보고만 있어도 엘프리데와 티샤가 여전히 견고하게 이어진 관계라는 걸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내가 졸업한 후에도 이사로서 학교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항상 그 애들 이야기를 보고 들을 수밖에 없었다.
엘프리데는 점점 더 아름다워졌고, 빛났다. 레이디 율리카라고 불리던 어머니를 본뜬 듯 아름답게 자랐다.
티샤는 그런 엘프리데의 그림자를 자처했다. 엘프리데를 빼고는 대화를 나누는 사람도 없었고, 혼자 다니는 일조차 없었다.

나는 티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 남은 모든 것을 먹어 치우기 위해 온 악마. 해갈되지 않는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
그 애가 무섭고 두려웠다. 내가 정말 드로스트였다면, 나는 그 애가 원하는 걸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빼앗길 것만 있었다.
어느 날, 나는 변덕처럼 티샤가 홀로 춤을 연습하는 장소를 찾았다. 어디서 연습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찾아가 본 적은 없었다.
티샤 역시 그런 나를 먼저 찾아오지 않았다. 가족처럼 얽혀 있음에도 그랬다. 우리는 서로에게 다가서지도 피하지도 못하는 시간을 살았다.

“그렇게도 엘프리데가 좋아?”

티샤에겐 울타리 밖으로 내쫓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자신을 품어줄 가족을 원했다.
엘프리데는 티샤가 울타리 안에 머물 수 있는 답이었다. 나는 그 애가 놓쳐버린 조금 다른 답을 제시했다.

“나랑 결혼할래? 그럼 엘프리데와 가족이 될 수 있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농담처럼 말하긴 했어도 솔직히 티샤가 당장 그러자고 할 줄 알았다. 욕망을 가득 담아 눈을 반짝이며 내게 매달릴 줄 알았다.
티샤가 갖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이 내게 있었으니까. 나는 내게 머물던 티샤의 시선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다. 나는 그 애의 수단이 될 수 있었다.

“혹시 사랑 같은 거 입에 담을 생각도 하지 마. 넌 망가졌어, 그런 거 못 해.”

나도 그렇지만. 티샤는 늘 그렇듯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티샤의 목소리는 약한 쇳소리가 섞여 있어서 들을 때마다 내게 흠집을 새겼다.
나는 어떤 선언을 들은 것처럼 이해하게 되었다. 아, 그렇구나. 티샤는 내가 생각했던 만큼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너는 나와 원하는 것이 다르잖아. 나는 절대 날 버리지 않을 가족이 갖고 싶어. 드로스트가 되고 싶어. 그런 날 위해 드로스트가 될 수 있어?”

그 애의 말은 모두 옳았다. 나는 드로스트가 아니었다. 바이스였다. 그런데도 내게 드로스트를 빼면 남는 것이 없었다.
온전한 바이스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드로스트라는 이름을 버리면 바이스라는 이름도 버려야 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엘프리데도 나를 붙잡지 않을 것을 알기에 나는 악취가 나는 드로스트를 당장 버릴 수 없었다.

“안 돼, 너는. 못해. 다 쥐고 있으면서 먹고 싶은 것만 골라 먹고 싶어 하잖아. 그렇게 할 능력도 없으면서.”

티샤의 눈동자에 비친 남자는 허기에 지친 얼굴이었다. 하지만 메마른 얼굴에는 고통도 체념도 보이지 않았다.
그 얼굴이야말로 바이스였다. 온전한 내 것을 갖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드로스트의 소모품을 자처하는 탐욕스러운 가문의 본질이었다.
외면하고 있던 본질을 마주하고 나는 엘프리데가 왜 티샤를 선택했는지 알 수 있었다. 같은 능력은 계기일 뿐, 다른 거창한 이유가 아니었다.
엘프리데도 나와 같은 바이스였을 뿐이었다.

우리를 위하여

얼마 뒤 본가에서 나를 소환했다. 아버지가 유난히 자랑스러워하는 얼굴이었기에 내게도 그때가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본가에 도착한 나는 내가 예상했던 사람 앞으로 안내되었다.

“어서 와요, 마크. 안드레가 당신 칭찬을 많이 했지요. 당신과 한 번쯤 만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수면에 비치는 햇살처럼 빛나는 금발을 가진 소녀였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탐색은 없었다. 이미 나에 대한 모든 걸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나를 부른 것이다. 망가진 덕분에 완성된 바이스에게 미래의 수장으로서 드로스트의 첫 임무를 맡기기 위해.

“지저분한 과거 위로 화려한 가면을 쓴 자들이 있어요. 그 달 뒤에 있는 진짜 얼굴이 궁금하군요.”
“달의 서커스단은 폐쇄적인 조직이라 준비가 필요합니다. 세심하게 진행해 반드시 만족스러운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이유나 상황을 물을 필요는 없었다. 나는 내가 예술학교를 완벽하게 물려받기 위해서 이 일을 꼭 해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일을 진행하던 중 나는 어쩌면 티샤에게 기회를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로스트와 관련된 일이라고 말만 해도 그 애는 내가 던진 아주 가느다란 희망의 끈을 잡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티샤는 졸업 후 무작정 떠났다. 특유의 분위기와 재능으로 졸업하기 전부터 티샤의 데뷔를 후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티샤는 소식도 없이 가버렸다.
몇 달이 지나서야 티샤는 겨우 달의 서커스단원이 되었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그때 나는 이미 대부분의 정보를 정리하여 보고를 마친 상태였다.
엘프리데가 없는 티샤는 혼자서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 바이스 예술학교를 졸업한 재능으로 서커스의 흥을 돋우기 위한 막간 쇼의 무희 중 하나가 되었다.
한 번은 화를 내며, 그 다음 번에는 애원하며, 또 그다음에는 저주하며, 티샤는 계속 연락을 해왔지만 나는 답장하지 않았다.
자신의 재능을 소모하며 보내는 지금의 삶과 엘프리데의 곁에 있지 못한다는 사실 중 어떤 것이 더 절망스러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티샤가 이대로 잊히길 원했다. 드로스트와 바이스, 그 무엇과도 얽히지 않고 살아가길 바랐다.
그것이 내가 줄 수 있는 최고의 배려라고 믿었다.

티샤가 없는 엘프리데는 겉보기에는 괜찮았다. 아끼던 장난감을 잃은 것처럼, 그 장난감이 생각날 때는 날카로워지긴 했다.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이 주어진, 그 어떤 부족함도 느껴본 적 없는 엘프리데는 자신이 이토록 불안정한 상태라는 걸 인정하지 못했다.
그 당혹스러운 얼굴에 새삼 승리감을 느낄 정도였다. 나는 의도적으로 티샤를 언급하지 않았다.
아마 부모님은 티샤에 대한 일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드로스트의 임무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도 티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자연스레 티샤는 내 인생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졸업

3년을 기다린 엘프리데는 졸업을 결정했다. 실무에서 손을 뗀 아버지가 오랜만에 졸업전시회를 찾아 엘프리데의 전시회를 직접 홍보했다.
엘프리데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티샤의 그림까지 모두 출품했다. 그림 속 티샤는 엘프리데를 바라보고 있었다.
춤추는 티샤의 그림 위로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달의 서커스단에서 춤추고 있을 티샤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엘프리데가 전시회를 중단했다. 출품한 그림은 모두 팔아버리거나 동창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마치 예술학교에 남아 있는 자신의 흔적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예정에 없던 일이 발생한 탓에 나는 급히 엘프리데를 찾았다. 엘프리데는 마침 춤추는 티샤의 그림을 떼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
“아, 마크! 잘 왔어, 이거 받아.”

엘프리데는 내게 티샤의 그림을 떠넘겼다. 그것은 엘프리데가 가장 아끼는 그림이었다.

“난 여행을 좀 가야겠어. 멀리는 아니고. 그리고 돌아오면 제대로 일을 시작할 거야. 그러니까, 마크. 이건 네게 줄게.”

의미를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엘프리데는 모든 걸 알았다. 그리고 자신의 것인 티샤를 되찾아 옆에 두려는 것이다.
티샤가 간절히 원하는 대로.
나는 엘프리데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티샤를 놓아주라고 외칠 수도,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 변명을 할 수도 없었다.
어떤 것을 택해도 들어주지 않을 테니까. 그 옛날 그랬던 것처럼, 엘프리데에게 나는 언제나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 의미 없는 존재니까.
그림 속 티샤의 눈동자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았다. 비춘다고 한들 그건 바이스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