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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P. 마인드리더연람의재뉴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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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딜 멜빈 탱커 리첼 근딜 케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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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정보제공자, 리첼 스트라우스 (학생, 더 호라이즌, 소리능력자)

충동적이고 제멋대로에 이기적이고 짓궂은 재뉴어리 칸트. 의심의 늪에 빠져 있던 내게 손을 뻗어준 악당.
우리 독불장군께서는 일단 시작하면 모든 게 잘 풀릴 거라며 언제나 갑작스러운 통보와 동시에 임무를 시작하는 분이라
뒤치다꺼리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겉으로는 그럴싸하게 들리던 더 호라이즌의 실상이 이렇게까지 주먹구구식일 줄은 몰랐지.
물론 진실을 알았어도 나는 이 손을 잡았을 거다. 한 걸음 내디뎌 그 손을 잡고 나서야 내가 모든 걸 망쳤다는 자책,
부모나 어른들에게서 보호받지 못했다는 원망, 다음을 알 수 없어 성장하기를 거부했던 불안을 떨쳐버리고
나만의 무대를 만들어 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런데 있잖아. 재뉴어리, 너에게는 뭐가 남는 거지? 너는 모든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지만,
정작 네 머릿속에는 뭐가 자리 잡고 있는지 아는 거야? 이번에 기나긴 순행을 떠나기 전 단체를 한동안 잘 운영해 달라며
나에게 제법 많은 걸 들려준 넌데, 그 안에서 난 너 자신만의 이야기로 만들어 낸 곡조를 찾을 수 없었어.
네가 펼친 지도는 그립고 낯익지만 네 것은 아닌 필체로 가득한데, 그가 그려준 지도의 끝에 다다르면 넌 어디로 갈까?
모두가 방황할 때 너는 명확한 길을 따라 거침없이 갔지만 모두가 답을 찾았을 때 정작 너는 백지가 된 지도를 손에 들고 길을 잃지는 않을까?
혹시 지금 내가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든 것도 너의 음흉한 의도인 걸까? 하…너는 비터스위트맛 아이스크림 같아.

재뉴어리. 길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어두운 밤이 오면 빛나는 별 일곱 개가 하늘에 있을 거야. 하나는 조금, 아니다.
아주 어두울지도 모르지, 하지만 분명히 함께 있어. 알잖아? 거기가 네 자리야. 네가 손잡고 이끌어 준 그 자리에서 우리가 기다리고 있을게.
기억해 줘.

더 호라이즌

나에게 1930년은 격동의 시기였다. 그때 나는 사방이 높다란 벽으로 막힌 미로를 걷고 있었다.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껏 달리다가 막다른 벽에 부딪히기 일쑤였고, 고개를 들어 본 하늘은 언제나 어두웠다.
언니는 고치로 들어가 점점 두꺼운 벽을 쌓기 시작하는데, 나는 그게 꼭 나 때문인 것 같아서 그 벽을 두드리지도 외면하지도 못한 채
곁에서 발만 구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 마음이 그만큼 혼란하고 어지러웠기 때문에 재뉴어리의 손을 덥석 잡았던 것 같다.
재뉴어리의 말투, 표정, 행동이 그땐 얼마나 믿음직스러웠던지!

재뉴어리 앞에서는 모두 평화주의자가 된다. 심지어 애초부터 적의가 가득했던 사람들마저도! 그럴 법하지.
폭력과 강요 없이도 자신들의 뜻을 이해해 주고 함께해 주는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는데 마구잡이로 화를 낼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하지만 옆에서 지켜본 재뉴어리의 실상은 좀 독특하다. 만남의 결과는 항상 긍정적이지만,
그 과정에서 펼쳐지는 재뉴어리의 움직임은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변칙적이라 의도를 짐작하기가 어렵다.

뭔가 새로운 임무를 수행할 때도 마찬가지다.
제프 케이트 교수가 하달하든, 내부에서 회의를 통해 결정하든 흥미가 돋지 않는 건 쳐다보지도 않고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주변에서 뭐라고 하건 꼭 발을 들여야 직성이 풀렸다. 그러다 의도치 않은 일이 생긴다면?
그건 재뉴어리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재뉴어리가 어떤 사고를 치든 다들 재뉴어리가 하는 일에는 어떤 목적이 있을 거라고 짐작하며 받아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재뉴어리는 말을 너무 잘했다! 마치 머릿속에 드나든 것처럼 – 사실 훤히 보는 게 맞지만,
당사자도 모를 희망과 목표, 감정까지 꼭꼭 짚어주니 누가 뭐라고 한들 재뉴어리와 대화하다 보면 이내 그렇군, 하며
수긍하게 되는 것이다. 그날의 나처럼…. 하, 난 참 쉬운 상대였어.

그렇게 재뉴어리의 소개로 처음 더 호라이즌 멤버를 만나게 된 자리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초반에는, 음, 부자 부모님을 둔
특이한 아이들의 사교모임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도 그럴 게 TV나 라디오에서 지나가며 들은 이름들이 나왔으니까.
유럽 사교계에서도 통하는 인물인 칸트 교수 내외의 딸, 자신도 훌륭한 경력의 군인이며 군사학교에서 수많은 역전의 용사를 키워낸
제프 케이트 교수의 손자, 멜츠 제약 대표의 둘째 아들, 그리고 내가 직접 말하기는 좀 그렇긴 한데,
유럽에서 손꼽히는 오케스트라에 소속되어 활동한 적도 있는 부모님의 자식인 우리까지. 정말 화려한 목록이다.
아, 멜빈을 빼먹을 뻔했네. 재뉴어리가 보여준 명단에 집안이나 배경이 공란으로 되어 있어서 왜 이 모임에 속해 있는지
이해가 안 되는 녀석이었다.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래서 천재가 뭐라는 건데?’라는 생각이었고.
어쨌든 참가자 명단은 제프 케이트 교수가 직접 구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글쎄. 겉으로는 조금도 티 내지 않으면서
능력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재뉴어리가 과연 제프 케이트 교수의 의도를 그대로 수용했을까?
아마도 처음 명단을 만든 사람은 제프 케이트 교수가 맞겠지만, 더 호라이즌을 지금 멤버로 구성한 것은 재뉴어리일 것이다.

단체 생활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거울처럼 나를 비추지만 나를 봐주지 않는 언니와 둘이서만 있던 세상에서 벗어나
내가 노래하고 능력을 사용하는 게 당연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으니 신이 날 수밖에. 세상은 대체로 불협화음이지만
가끔 재미있는 멜로디가 들린다. 여전히 내가 가장 즐겨 듣는 음악은 ‘리사 스트라우스’인데, 최근 아무도 모르게 화음이 추가되고 있다.
뭐, 벌벌 떨며 살짝 얹힌 화음은 엇박자일 때가 많고 피아니시모보다 약하게 겨우 눌린 건반이 부서질까 두려워하는 듯해
애써 모르는 척하고 있지만 웃음을 삼키기가 어렵다. 불협화음이 가득한 세상, 너무 멋지다.

멜빈의 작업실

오랜만에 찾은 멜빈의 작업실은 여전히 너저분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상한 표현이지만 사실이다. 엄청나게 잘 정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고, 달리 보면 엉망인 것 같은데 나름 합리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마치 내가 얼마 전 휴지통에 던져 버린 망한 노래처럼?

“언제 봐도 멜빈 그 자체인 방이네.”

두서없이 쌓여 있던 책을 들춰보며 인사를 건넸다. 멜빈은 내 손에 들린 책을 채 가는 거로 답했다.

“있잖아, 부탁이 있어.”

멜빈은 곁눈질로 제피를 가리켰다. 멜빈의 어깨춤에서 부유하던 제피 L이 눈을 반짝였다. 정말 한결같이 귀찮아하는구먼.
그래도 부탁이 있어서 온 건 나니까 멜빈이 원하는 대로 제피에게 말을 걸었다.

“L, 잘 지냈니? 어디 뻑뻑한 데는 없고?”
- 안녕하세요, 리첼? 리첼도 잘 지내셨나요? 삑, 리첼의 체온이 정상보다 낮게 측정되었습니다. 현재 실외 온도가 매우 낮습니다.
긴 옷을 입을 것을 추천해 드립니다.
“고마워. 멜빈에게 부탁할 게 있어서 왔는데, 전해줄래?”

그러자 이 다정하고 건방진 기계가 이렇게 말했다.

- 삑, 리첼은 멜빈에게 부탁할 수 없습니다. 멜빈은 리첼의 부탁을 들어줄 의무가…
“이번 공연에 기타가 필요해서 말이야. 일렉트릭 기타를 개조했으면 해.”
- 멜빈은 리첼의 부탁을….
“앰프랑 세트로 부탁해. 기타로 무대 위에서 액션도 할 거거든? 자, 여기 내가 생각해 본 걸 적어왔어. 멜빈에게 전달해 줘.”
- 멜빈은 리첼….
“전. 달.”

가련한 제피는 주인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다시 거부 발언을 출력하려 했지만, 다행히 멜빈이 가로막았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멜빈이 내가 내민 종이를 가져가 위아래로 훑어보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주먹에 힘을 풀었다.
제피, 귀엽다고 막말하는 경향이 있어.

- 리첼은 하나만 똑바로 하는 걸 추천합니다.
“난 다 잘할 수 있는걸. 이번 기회에 기타도 제대로 쳐보고 싶단 말이야. 그리고 여기, 앰프 성능을 높여줘.
디자인은 이렇게 해도 괜찮지?”

이다음 대사는 뻔하지. 지긋지긋하다, 뻔뻔하다, 무례하다 등등 싫은 소리 몇 번 참으면 잘 만들어줄 거다.
일단 가져간 종이를 내려놓지 않는 걸 보면 흥미가 좀 생긴 것 같다. 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이내 누군가 문을 벌컥 열며 소리쳤다.

“멜빈! 오빠를 봤대, 그가 오빠를 만났대!”

캐럴이었다. 볼이 빨갛고 눈물이 글썽거리는 게 잔뜩 흥분된 얼굴이었다. 자주 만난 건 아니었지만 이런 표정은 처음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캐럴은 내가 있는지도 모르는지 마구 달려와 멜빈을 흔들어 댔다.

“들어봐, 내가 유럽까지 가서 물어봤어. 직접 그 애를 만나러 갔다고. 오빠가 한 말이 뭔지, 오빠가 하려고 했던 게 뭔지 알려달라고.”
“… 천천히 말해봐.”

귀를 의심했다. 멜빈 입에서 나온 말 맞아? 제피 아니고? 순간 제피가 멜빈 탈을 썼는지 확인할 뻔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멜빈이
나가라며 눈을 부라렸지만, 나는 캐럴의 조막만 한 손에 꼼작 없이 붙잡혀 있는 신비로운 멜빈을 계속 지켜보고 싶었다.
캐럴은 울먹거리며 뭔가를 말하려 애썼는데 감정이 앞서는지 정리가 잘 안되는 것 같았다.
항상 침착하고 냉정해 보였던 애가 흥분하는 것도 보기 힘든 일이었지만, 그보다 놀라운 건 멜빈이 누군가를 배려하고
인내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마음을 가라앉힌 캐럴이 전해준 이야기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시간이 어떻고 사건이 어떻고, 아까 나갔어야 했나 후회될 정도였다.
게다가 둘의 대화가 잘 마무리되지 않았다. 캐럴은 멜빈이 자기 말에 무관심하다며 화를 냈고, 멜빈은 끝끝내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 벽에 붙어서 내가 책장으로 보이길 바랐다.

“넌 항상 그래! 너 따위 다신 안 볼 거야!”

캐럴은 들이닥쳤던 기세 그대로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오죽하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멜빈을 찾아온 걸 텐데,
아무리 답답했어도 상대를 잘못 고른 것이다. 캐럴의 발소리가 멀어지기도 전에 멜빈은 이미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버렸다.
눈앞에서 내 주문서를 팔랑팔랑 흔들었지만 전혀 보이지 않는 듯했다. 잠시 멈춰 있던 멜빈이 입을 열었다.

“… 헨리가 연결했어.”
“너 괜찮아?”

멜빈은 내가 있었던 것도 잊었는지 흠칫 놀라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방금 그거 굉장히 한심하다는 눈빛 같았는데.
종이를 돌돌 말아 멜빈을 쿡쿡 찔러봤지만, 멜빈은 대꾸 없이 메신저를 꺼내더니 어딘가로 메시지를 보냈다.
답은 한동안 오지 않았다. 멜빈은 하는 수 없이 내가 내민 종이를 들여다보고 뭔가를 이리저리 끄적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멜빈이 작성한 설계대로 제피가 도면과 기본 모형을 제작하고 있는데 멜빈의 메신저가 울렸다. 재뉴어리였다.

- ‘지금 만나.’ 이거 맞아? 전후 사정 설명 없이 이렇게 달랑 보내 놓는 게 맞냐고? 나 요즘 갤러리 때문에 정신없는 거 몰라?
도와주는 거 하나 없으면서 왜 그래?
“어차피 너 마음 내킬 때 답하잖아.”
- 뭐라는 거야. 하여튼 지금 와. 한 시간 뒤에 시간 낼 테니까. 어라, 리첼이랑 같이 있었어?
“아니.”
- 지금 네 뒤에 있는데?
“아니.”

나는 다시 종이를 말았다. 기계고 주인이고 꼭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각광받는 갤러리 관장님

재뉴어리는 요즘 낡은 갤러리를 리뉴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간판만 달린 거나 다름없던 자기 엄마 소유의 갤러리를 물려받아 학교를 졸업하면 정식으로 운영하기로 했다는데,
그 전에 시험 삼아 유치했던 기획전이 큰 흥행을 거뒀다.
재뉴어리 말에 따르면 ‘명함이 없으면 부모님이 민망해해서 집안 돈이나 뽑아 먹으려고 굴리는 갤러리’가 미국 예술계에서
떠오르는 신성으로 주목받게 된 것이다. 재뉴어리는 얻어걸린 성공에 감격하는 척하며 사랑하는 부모님의 허영심을 한껏 채워드렸다.
딸의 갤러리가 인기를 얻어 콧대가 높아진 칸트 교수 내외는 온갖 파티를 신나게 활보했다.
길거리를 가득 채운 화려한 전단지와 현수막은 재뉴어리가 읽은 부모의 욕망과 그들이 바빠지면 딸이 뭘 하든 신경을 덜 쓸 거라는 계산의 결합이었다.
자식의 성공과 안녕을 바라고 응원한다며 자신들의 꿈을 주입하는 부모의 속물적 욕망은 너무나 당연하고 순수해서 나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내 부모님만 봐도 그렇다. 아, 물론 당연히 이럴 줄은 몰랐겠지만, 책임지지 못할 선택을 해서 나와 언니를 망가뜨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면서, 그런 일을 겪고도 우리가 평범하게 행복해지길 바라는 착하고 무능한 사람들.
부모님 때문에 괴롭고 힘들지만, 나와 언니를 볼 때면 사랑으로 모든 심장 박동을 채워버리는 그들을 원망할 수는 있어도 싫어할 수는 없었다.

갤러리 앞에 도착하자 잘 차려입은 재뉴어리가 플래시 세례 속에서 밝게 웃으며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재뉴어리는 질문하는 기자들 하나하나 눈을 맞추고 그들이 원하는 적당히 수줍고 곤란한 표정을 지어주며 능숙하게 인터뷰에 응했다.
기자들은 각자 자신이 인터뷰를 주도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기자들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으니 멜빈을 끌고 건물 뒤로 향했다.
걸리면 제일 곤란할 사람이 멜빈이잖아. 다행히 천재께서도 생각이란 걸 하시는지 이번만큼은 잡아끄는 대로 끌려왔다.

갤러리에서는 보이지 않도록 잘 안배된 사무 공간을 지나 재뉴어리의 사무실로 들어서자 겨우 긴장이 풀렸다.
멜빈이 자기 사무실인 양 태연하게 책상 서랍을 열어 과자를 꺼내 먹었다. 재뉴어리가 좋아하는 거라 들키면 한바탕할 게 뻔한데
지치지도 않나? 재뉴어리는 배려를 위선이라 생각하고 멜빈은 애초부터 상식이 없으니, 과자를 방문객에게 권하기 위해 꺼내 놓거나
남의 서랍에 들어 있는 과자를 마음대로 꺼내 먹으면 안 된다는 건 둘에게 존재하지 않는 선택지임이 분명하다.

“내 치즈 퍼프! 야, 너 감자칩도 먹었어?”

아니나 다를까, 재뉴어리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서는 곧바로 멜빈 앞에 달려와 과자 봉지를 훑었다. 다행히 일부는 뜯기 전이었다.

“이유를 알았어.”
“알면 말 좀 해봐, 내 키엘 칩스! 숨겨놓은 걸 왜 꺼내 먹니? 이러시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재뉴어리라고 멜빈이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는 걸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 재뉴어리에게는 멜빈에게서 빼앗은
감자칩이 중요할 뿐이었다. 하지만 나한테는 세상이 더 중요하다.

“키엘 팝스는 내가 한 상자 사줄 테니까…”
“키엘 칩스야! 넌 아무리 과자를 안 먹는다고 해도 이름조차 모르니?”
“…아 미안. 그런데 지금은 그보다 멜빈의 말을 좀 들어줘야 할 거 같은데?”

멜빈은 재뉴어리에게 빼앗길까 봐 손에 들고 있던 치즈 퍼프를 입에 쑤셔 넣은 상태였다. 어른 두 명 키우는 거 너무 힘들다.
헨리가 보고 싶다.

수레바퀴 위 나비

우여곡절 끝에 재뉴어리와 멜빈은 마주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라고 해봐야 캐럴과의 대화는 제피가 녹음된 음성 파일을
재생하는 것으로 전달하고, 멜빈은 다시 한번 연결고리는 헨리,라고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재뉴어리에게는 그것으로도 충분했던 것 같다.

“메트로폴리스 사건은… 우리가 만든 예측 모델링보다 일이 빠르게 진행되어 버렸지. 왜 미래가 달라진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답답하긴 했어. 그런데 지금 그 원인이 헨리라는 거야?”

멜빈이 입을 열지 않아도 재뉴어리는 답을 알았다. 우리에게 자세한 내용을 공유하지는 않았지만 재뉴어리와 멜빈, 그리고 헨리가
무언가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 목적에 따라 헨리는 시간여행을 했고
그 끝이 헨리의 죽음이었다는 사실도 이미 아는 내용이었다. 지금 재뉴어리의 설명은 전쟁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헨리의 행동이
트리거가 되어, 재뉴어리와 멜빈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막기 위해 준비했던 것이 무색하게 그 일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는 것이다.
입술을 짓씹던 재뉴어리는 멜빈을 똑바로 바라보며 확인했다.

“헨리가 그 군인을 만나 루사노에서 일어나는 안타리우스의 의식을 저지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에 그들이 그 순간 루사노에 있게 되었지.
의식은 결국 성공했어. 그러나 그 제빵사 천재 말로는 원래 예정되어 있던 것과 다르게 그들의 의식에 영향을 끼친 존재가
생겨버렸다는 거야. 안타리우스의 의식이 인식의 문과 연관되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 얼마 전 메트로폴리스에서 있었던
괴물 공습도 인식의 문이 폭주했기 때문이고. 아… 그렇게 헨리가 그들을 만난 것이 시작이었구나. 그 이형의 존재는 과거의 우리 미래에 없었어.
헨리가 그들을 루사노로 보냈고, 그들은 루사노에서 그 존재에게 영향력을 끼쳤고, 그래서 그 존재가 문을 열었다.
그래, 그래서 예정보다 문이 빨리 열렸던 거였어.”

수많은 우연이 겹쳐 비탈길로 접어든 수레가 어떻게 될지는 다들 알잖아?
그렇게 달리는 수레의 경로를 벗어날 수 없는 개미들은 그저 허무하게 수레를 바라볼 수밖에 없고,
이 와중에 작은 나비 하나가 수레바퀴에 살짝 앉은 거만으로도 수레 속도가 더 빨라졌다니 환장하지.

“액자가 열쇠야.”
“그래, 멜빈. 지나간 미래에서도 액자가 있는 곳에서 문이 열렸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거기에 액자가 없으면 될 줄 알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저스티스 리그가 액자를 가지고 있게 두지 않았을 거야. 녀석이 죽고 안타리우스가 액자를 탈취하는 미래를 막기 위해
최선의 방책으로 선택한 건 안타리우스를 조심하라는 경고. 오류를 줄이기 위해서는 그게 최선이었지. 덕분에 목숨은 지켰고.
하지만 액자가 안타리우스 손에 들어가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다니, 안일했어.”
“재뉴어리, 멜빈,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뭘 할 수 있을지는 이제 찾아야지. 해야 하는 건 변하지 않았어.”

헨리의 죽음으로 그가 더 이상 미래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판단한 재뉴어리와 멜빈은 헨리가 전한 마지막 미래에 초점을 맞춰
대비하고 있었는데, 이미 우리는 달라진 미래에 속해 있었다는 말이다. 재뉴어리는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하는 내게
충분히 설명하려고 했지만 나는 미래가 다른 방향으로 어두워졌다고 이해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묻는 내 질문에 재뉴어리는 씩씩하게 답해주었다.

“문이 열렸으면 닫는다. 열리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이미 열린 거 어쩔 수 없어. 닫는다!”
“닫으려면 열어야 해.”

재뉴어리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하지만 멜빈이 초를 치듯 한 마디 얹는다.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뭐? 그 액자인지 뭔지 때문에 이미 문이 열렸다면서?”
“문이 열린 건 여전히 액자 속이야. 대부분은 액자 속으로 못 가니까 그곳에서 문을 닫기는 매우 어려워. 장 바티스트 플람이
액자 속에 열린 문을 닫기 위해 얼마나 오래 여행했는지 얼마 전에야 겨우 알아냈잖아? 지금 메트로폴리스 사태는 액자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공명하듯 반응한 것뿐이야. 아직도 문은 우리 세상에 연결되지 못했어. 지나간 미래에서 문이 열렸던 장소,
거기에 뭔가 답이 있을 거야.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문이 열리는 게 확실한 곳, 그곳으로 가야 해. 그래야 마주 볼 수 있어.”
“그거, 전에 이야기해 줬던 거 맞지? 사람들이 엄청나게 죽고, 우린 끝없이 싸웠다는…. 결국 그 미래로 가야 하는 거야?”
“위험한 거 맞아. 안타리우스가 액자를 빼앗아 문을 열었고, 온 세상이 지금 메트로폴리스와 같이 되어버린 미래.
하지만 그 미래는 우리가 끝을 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야. 아이고. 그 멍청이가 액자를 잘 들고 있겠지?
아, 그 녀석, 내가 자기 살려준 거 알고 있나 몰라?”

재뉴어리가 멍청이라고 칭하는 사람은 대체로 한 명이다.
케니스가 뭘 알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가 이 일에 대해 전혀 모르거나 혹은 모두 알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그는 액자를 보호했을 것이다.
재뉴어리의 평가에 따르면 답답하고 한심하고 비효율적인 그에게 액자가 있다는 것이 운명이 우리에게 안배한
유일한 배려일지도 몰라. 고맙기도 하지.

재뉴어리의 초대

재뉴어리는 지체 없이 바로 그날 저녁 라이언과 캐럴을 집으로 초대했다. 재뉴어리가 혼자 지내는 아파트는 꽤 넓어서
평소에도 종종 모여 저녁을 먹곤 했기 때문에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라이언은 클레어와 함께 온다고 했고,
캐럴은 멜빈이 없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수락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언니한테 말도 못 꺼냈다. 언니를 따돌리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지금 이 분위기라면 반드시 한 입도 못 먹거나 먹고 나서 체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재뉴어리는 배가 고팠는지 식사 중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클레어 스미스는 아주 유능한 호스트였다.
재뉴어리가 초대한 식사 자리인데도 분위기를 주도하는 건 클레어였다. 라이언은 클레어가 하는 말에는 모두 동의하며 호쾌한 반응을 보였고
캐럴도 고갯짓 정도로 호응하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 초조한 건 나뿐이었다. 평화로운 시간은 재뉴어리가 어느 정도 배를 채우자
순식간에 깨져버렸다. 있잖아,로 시작한 재뉴어리의 말이 이어질수록 캐럴과 라이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캐럴은 숨을 들이켜며 비명이라도 지를세라 손으로 입을 꾹 막았다. 라이언은 고개를 푹 숙이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다 자신을 힐끔거리는 캐럴과 눈이 마주치자 애써 웃어 보였다.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낸 재뉴어리는 아무도 식사를 이어가지 않는 걸 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스크림 먹을 사람?”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재뉴어리는 브루클린에서 제일 유명한 집이라고 다시 권했고, 클레어가 마지못해 재뉴어리를 따라 일어섰다.
클레어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재뉴어리를 치워줄 사람은 클레어뿐이었다.

“… 라이언.”
“캐럴, 혹시라도 나한테 미안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헨리는 내 친구이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형은 의도적으로 자취를 감춘 거야. 무소식이 희소식인 상황이잖아. 난 걱정 안 해, 어련히 잘하려고. 케니스 하트잖아.”
“난 이렇게 될 줄 몰랐어. 그저 오빠 일을 알고 싶었을 뿐이고….”
“누구라도 그랬을 거야. 그런데 캐럴, 넌 아무것도 안 했어. 그러니까 미안해할 거 하나도 없어.
하지만 이제 우릴 위해 뭔가 해줄 거야, 그렇지?”

라이언은 남은 시간을 어리석게 쓰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형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지만 없어도 어쩔 수 없다며,
부정적인 생각들로 자기 시간을 망치는 일은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캐럴의 눈가와 코끝이 금세 빨갛게 물들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슬픔과 두려움의 바다 너머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늘 그랬듯 그 애는 입을 꾹 다물고 울음을 삼켰다.

클레어와 못돼 먹은 재뉴어리가 돌아왔을 땐 최소한 겉으로는 이미 정리가 된 후였다. 재뉴어리는 아이스크림 스푼을 입에 물고
라이언을 따로 불러냈다. 바로 직전에 자기 면전에서 잘 벼린 독설의 칼을 휘두른 여자인데 라이언은 아랑곳하지 않고
재뉴어리를 따라갔다. 클레어는 캐럴 옆에 앉아 살며시 손을 잡아 주었다. 다정한 손길에도 몸을 흠칫 떤 캐럴은
차마 클레어를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난 아직 돌아가는 걸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지금 저스티스 리그의 문제가 헨리 때문이 아니라는 건 알아.”
“하지만 오빠가…”
“아까 들으니 사건 진행이 빨라진 거라고 하더라. 그렇다는 건 그 일은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다는 뜻이었겠지?
좀 더 대비할 시간이 있었더라면, 이 일을 피해 갈 수 있었더라면, 다른 희망 사항이 무수히 많지만 결국 그건 다 희망일 뿐이지.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 헨리는 아무런 책임이 없어.”
“오빠를 탓하지 않을 거야?”
“응, 헨리 탓이 아니야. 원망하지 않을 거야.”

캐럴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또 눈물을 삼키는 것이다. 클레어는 말없이 캐럴의 손을 꼭 잡고 토닥였다. 이럴 때 재뉴어리라면
캐럴의 마음을 읽고 캐럴이 원하는 답을 하며 캐럴을 자책하게 만들 수도, 자책에서 벗어나게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캐럴에게 필요한 건 재뉴어리가 아니라 클레어였다.
나는 라이언에게도 그럴 거라는 생각에 마실 것을 들고 발코니에 있던 두 사람을 찾아갔다.

“둘이 뭐해?”
“케니스 이야기 중이었어.”

라이언은 재뉴어리가 형을 찾아보겠다고 했다며 들떠 있었다. 재뉴어리는 이 일을 절대 외부에 알려서는 안 된다고
라이언에게 재차 다짐을 받았다. 케니스를 찾기는커녕 그런 시도를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제프 케이트 교수의 귀에 들어가면
그는 대번에 의심할 것이다. 라이언도 그 사실을 익히 알았기 때문에 절대 부모님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결국에는 준비된 무대로 가야 해. 나는 합리적으로 유럽에 갈 방법을 찾을 테니까 리첼, 너는 사람 하나 찾아봐.”
“음, 내가 알만한 사람일까?”
“우리 모두 만난 적 있는 사람이야. 하지만 접점은 없는 사이지. 이런 일에 딱 맞는 사람이랄까?”

각자 위치로

나는 제프 케이트 교수가 짐작도 못 할, 혹은 관심조차 두지 않을 음악가 친구들이 많았고,
그들은 순식간에 재뉴어리가 필요로 하는 남자의 소재를 알려왔다. 재뉴어리는 멜빈을 시켜 그에게 제피 드론을 보냈다.
이윽고 연결된 화면 속에서 메마른 입술을 비죽이 올리고 웃는 남자는 바로 몇 년 전 모래폭풍 속에서 만났던 로널드 힐이었다.
그는 여전히 짜증이 잔뜩 어린 얼굴로 우릴 대했지만, 이렇게 잃은 게 많고 바라는 게 큰 사람은 재뉴어리가 이용하기에 좋은 상대였다.
론은 어딘가에서 감쪽같이 숨어 있을 케니스를 어떻게든 찾아내 동부까지 호송하기로 했다.
그새 재뉴어리는 자신을 유럽으로 보내 줄 사람을 구했다. 호승심과 자만으로 가득 찬 변호사 출신 정치인이었다.

재뉴어리가 선택한 정치인은 화이트 클라프를 위시한 제프 케이트와 한통속인 정치인들과 대립 관계에 있는 휴이트라는 인물이었다.
재뉴어리는 아직 그 정치인을 만나지도 않았지만 이미 그가 자신의 제안을 수락할 걸 상정하고 있었다. 멜빈이 감청으로 얻은 정보에 따르면
재뉴어리가 노리는 정치인이 곧 암살 위협을 받는다. 재뉴어리는 그 사실을 미리 알려 그가 위험에서 벗어나게 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 기회를 살려 직접 그를 구하면서 호감과 동조를 얻으며 가엾은 정치인을 효과적으로 흔드는 데 사용하기로 했다.
그는 절대 재뉴어리를 거역하지 못할 것이다. 재뉴어리에게 있어 자신의 영달만을 추구하는 정치인 설득쯤이야 식은 수프를 마시는 일과 같으니까.

예상대로 휴이트는 재뉴어리에게 홀랑 넘어가 메트로폴리스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능력자 단체와의 포용적 협력 관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모든 단어가 재뉴어리 머리에서 나왔을 법한 조합이다. 그리고 이 와중에 휴이트는 마치 복서처럼
화이트 클라프 한 사람만을 열심히 공격했다. 정치인들이란… 뭐 어쨌든 그의 목숨이 위험했던 건 명백한 사실이었고
그가 사주한 듯하다는 목격자의 증언도 있다 보니 화이트 클라프는 별다른 반박 성명을 내지 못했다. 휴이트는 이 기회를 살려
이상한 빛 기둥을 닫고 괴물들을 처치하기 위해 유럽의 유수한 단체들과 협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 큰 지지를 얻었다고 한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자 제프 케이트 교수는 유럽의 능력자 단체와 접선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최소한 주도권이라도 가져와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 듯했다. 마침 자기 말을 잘 듣는 어린아이 중에 그런 일에 적임자가 하나 있지 않나?
재뉴어리는 제프 케이트 교수의 ‘지시’대로 휴이트 의원의 유럽 순방단에 합류하게 되었다.

액자 배달 시작합니다

재뉴어리가 떠나기 며칠 전, 마지막으로 진행 상황을 점검하는 중이었다. 재뉴어리가 갑자기 저스티스 리그의 새 친구들을 소집하더니
나를 ‘리더 대리’로 임명한다고 공표했다. 재뉴어리는 당황한 내게 마이크를 쥐여 줬고 얼결에 내 취임식의 축하공연을 내가 하게 되었다.
뭐, 오랜만에 다들 웃고 떠드는 흥겨운 자리라 좋긴 했다.

그날 밤, 행사 개최자께서는 갤러리 사무실 소파에 드러눕다시피 기대앉아 과자를 우물거리며 손가락을 꼽고 있었다.
할 일은 다했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새롭게 더 호라이즌의 멤버가 된 저스티스 리그 인사들은 클레어가 책임지고 있으니 걱정할 게 없고,
갤러리는 정식 오픈을 위한 단장을 한다며 아예 리모델링 기획을 세워 놨고, 부모님에게는 제프 케이트 교수의 지시라고
‘사실대로’ 말했다고 한다.

“제프 케이트 교수가 뭐라고 하면서 허락했어?”
“이야, 요즘 헛꿈 꾸는 게 아주 무서울 정도야. ‘미국의 부국강병’ 운운하면서 브레이크 없는 폭주기관차같이 일장 연설을 하셨지.”
“네가 유럽 가는 게 어떻게 부국강병에 도움이 되지?”
“휴이트가 유럽의 능력자 단체와 교류하는 게 마치 유럽을 정복하러 가는 거로 보이나 봐. 참 재미있지 않나?
그는 누가 뭐래도 미국에 충성하는 훌륭한 학자이자 군인이자 기업인이었는데 이토록 뒤틀려 버렸으니 말이야.”

제프 케이트는 재뉴어리에게 휴이트 의원의 유럽 순방단에 합류하면서 키아라 호킨스와 동행할 것을 명했다고 했다.
저스티스 리그 출신 여자애가 제프 케이트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분 특성상 아마도 키아라를 통해
재뉴어리의 행보를 보고받으려는 목적일 듯하다. 이건 뭐 감시의 감시도 아니고…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클레어는
말을 아끼면서도 제프 케이트 교수가 키아라를 만나본 적이 없는 것 같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감시, 보고 그런 게 불가능한 친구라나?
몇 번 말만 전해 들은 나도 그게 안 될 거란 걸 알 거 같은데, 제프 케이트 교수는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얼마 뒤, 재뉴어리는 공식 사절단과 함께 유럽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휴이트 의원과 그의 보좌진은 키아라를 상대하느라
재뉴어리가 화물처럼 사람 하나를 더 태웠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재뉴어리는 세상 사람들이 케니스에게 호감을 느끼는 그의 성격, 신념, 태도 때문에 케니스를 싫어했으니 아마 재뉴어리 또는 케니스
어느 쪽이든 갑자기 안타리우스에게 납치당해 세뇌라도 당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케니스를 좋아할 일은 없을 것이다.
케니스가 한창 메트로폴리스를 활보할 때 재뉴어리는 케니스가 말도 안 되는 결정을 내린다며 한심하게 여겼고,
그 사례로는 누군가를 대가 없이 도우려 하거나 약한 자들을 위해 무리하게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손해가 되는 걸 알면서도
그대로 받아들이는 상황을 언급했다.

“답은 공멸밖에 없는 녀석이야. 그래도 요 멍청이 님의 수완은 입증됐고, 지난 몇 달 그런 일을 겪었는데도 전혀 꺾이지 않았더라.
하여간 한심해. 뭐, 그래서 액자 운반은 잘 해낼 거야.”

나는 재뉴어리가 진절머리를 내면서도 케니스랑 말을 섞는 이유가 그나마 말이 통하는 사람이 몇 안 남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재뉴어리의 눈높이에 있는 사람은 원래 한 손에나 꼽을 정도로밖에 없었다. 그 애는 항상 외로워 보였지만, 정작 외로움이 뭔지는 몰랐다.
멜빈은 그게 재뉴어리에게 더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하선 실패

배 위에서 재뉴어리는 수시로 통신을 보내왔다. 어지간히 심심한 것 같았다. 키아라와는 처음으로 긴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는데,
머릿속에 읽을 게 없어서 아주 흥미롭다고 했다. 너무 풀어지는 것 같으면 케니스를 몰래 찾아가 시비를 거는데,
케니스가 내가 참고 말지, 하고 생각할 때마다 머리에 꿀밤을 먹여줬다며 자랑스레 말했다.
케니스 같은 어른이 주변에 있었다면 내가 좀 덜 삐뚤어지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케니스는 참 어른이다.

어쨌든 재뉴어리가 떠난 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제피 L이 날아오더니 보고서를 잔뜩 인쇄해서 던져두고 떠났다.
문서마다 제일 윗줄에 일일 보고라고 적혀 있는데 날짜가 다 다른 것이 여러 날 분량을 한 번에 모아서 보낸 것 같다!
재뉴어리는 이따위 보고를 받으며 일한 건가 싶어 한숨을 쉬고 서류를 집어 들었다. 첫 장에 적혀 있는 날짜는…나흘 전이네.

- 미국 내 안타리우스 주요 전력 변화 없음.
- 알렉산더, 파올라 회복 중. 안타리우스 견제 언제 시작?
- 정정, 중부 유럽에 심판관으로 추정되는 인물 발견.

앞뒤 맥락이 없어서 이해하지 못하겠네. 재뉴어리가 일을 쉽게 하던 건 아니라는 건 알겠다. 다음은 어제 날짜였다.

- 그단스크 지역에 독일군 집결, 왜? 교전 발생. 배달부 하선 실패했지?
- 중부 유럽 순방 조기 종료 후 영국으로 이동 추천. 이미 가고 있겠지만.
- 경로 분석 결과 다음 하선지 흐로닝언 추천.

무언가 단단히 그르친 상황인 것 같다. 그런데도 걱정되지는 않았다. 재뉴어리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주변의 기억과 욕망을 읽어
최선의 결과를 만들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그동안 재뉴어리가 저 좋을 대로만 사는 줄 알았는데
꽤 앞날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뉴어리의 목표는 완성된 미래가 아니라 그 미래로 가는 여정에 그치는 게 아닐까,하는
의심이 살짝 얹힌다. 우리 리더는 영원히 변치 않아 아름다운 누군가의 꿈에 이끌려 그게 틀어지지 않게 애쓸 뿐,
그게 자신에게 어떤 의미일지는 단 한 번도 가늠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