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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lipse Vol.38 하태의 이클립스 편집부

최근 위대한 모험가 그랑플람과 함께 항해한 선원의 일지가 큰 화제죠.
재단은 일지의 내용은 물론, 획득 경위나 소유자를 밝히지 않고 있지만 관련된 인물에 대해서는 추측이 가능했습니다.
재단에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으니까요. 하지만 여전히 알려진 것이 없어, 그와 관련된 추측이나 소문이 무성했죠.
누군가는 진실을 알려야 했습니다. 그 누군가는 당연히 재단이 되어야 했지만, 애석하게도 재단은 침묵했죠.
그래서 이클립스 편집부는 일지를 확보하고자 다양한 노력을 했습니다.
많은 노력 끝에 확보한 문서에는 일지의 사본과 재단 이사인 브루스 보이틀러가 헬리오스에 보내는 특정 인물에 대한 추천사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었죠. 이클립스 편집부는 진실을 알리는 그 누군가가 되고자 합니다.
비록 그랑플람의 항해에 대한 비밀이 이 특별 기사로 풀리기엔 어려움이 있겠지만, 추측과 소문에 휘둘리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쾌속으로 달리는 기차와 바다 위를 나는 비행기로 손쉽게 대륙 간 이동이 가능해졌다지만
아직도 아시아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점이 많이 있소.
황금과 철로 만들어진 족쇄를 들고 덤비는 이른바 ‘오랑캐’에 맞선 아시아의 유구하고 신비한 힘은
결코 쉽게 우리를 들이지 않으니 말이오. 아시아 지역의 능력자를 확보하는 일은 모든 단체가 목표로 하는 일이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능력자의 소재 파악조차 어려운 실정이오.
스카우터 티엔을 필두로 하는 본 재단의 아시아지부 스카우트 사무소가 고군분투하고 있으나 알다시피
다른 지역에 비해 배타적이고 조심스러운 아시아 능력자를 포섭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오.
그중에서도 조선은 알려진 것이 없고 폐쇄적이라 교류가 어렵다는 건 귀사 역시 알고 있는 부분이라 생각하오.

서두가 길었군. 얼마 전 조선에서 온 한 청년이 먼저 나서 적극적으로 본 재단에 연락을 취해왔소.
그 청년의 이름은 테이, 그랑플람과 함께 항해했던 선의의 자손으로 재단에 부친의 일지를 전달해왔소.
재단은 그의 부친이 그랑플람에 대해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고 판단하여, 그를 통해 부친과 접촉할 생각이오.
그를 위해 재단은 앞으로 테이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을 거요. 테이의 신원은 본 재단의 아시아지부 스카우트 사무소를 통해 확인한바,
본인이 말한 내용과 틀림없이 일치하며 의심할 여지 없으니 쓸데없는 염려는 붙이지 마시길.
본 문건은 귀사에 테이를 소개하고 그의 요구사항을 전달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오.

재단에서 작성한 테이의 추천서와 테이가 전달한 일지를 첨부하니 확인하시고,
이후 문의 사항이 있다면 본 재단의 행정담당관 레너를 통해 전달하시오.
노파심에서 적는 말이네만, 테이는 매우 잘 훈련된 전사이며 명예와 실리를 모두 중시하는 균형 잡힌 인물이오.
아직 젊은 나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받아온 훈련과 다양한 국가를 탐방하며 얻은 경험이 목적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의지를 뒷받침하여
어느 면으로나 부족함이 없는 청년이오. 나는 그를 크게 신뢰하고 있소. 그러니 혹시 그를 대함에 있어 소홀함이 있거나
반대로 재단 소속인 그를 회유하려는 알량한 수작을 부린다면 내가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이오.

- 브루스 보이틀러의 추천서

조선군 체탐인 하태의

그랑플람 재단이 어떤 소규모 조직에 대해 처음 인지한 것은 중국에서였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재단의 중국 내 활동을 관찰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정확한 구성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대체로 4~5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정보 수집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랑플람 재단이 그들에 대해 인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의도적으로 재단 앞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이 다시 나타난 것은 놀랍게도 스페인이었습니다. 아마 그쯤에서 그들은 그랑플람 재단과 협업하기로 한 것 같습니다.
그들 중 한 남자가 혼자 재단 사무실을 방문하여 자신을 조선군 체탐인 소속 하태의라고 밝히며 그랑플람 재단의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그는 얇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는데, 거동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테이라고 하시면 됩니다. 편하게 부르십시오.”
그가 원하는 것은 자국 내 능력자 연구에 필요한 기술 지원이었습니다. 그는 정중하며 예의를 갖춘 영어를 사용했고
표현이나 수사가 영국인과 다름없었습니다.
여느 아시아인과는 다르게 6피트가 넘는 장신에 고된 훈련으로만 얻을 수 있는 탄탄한 몸을 가지고 있어서 전형적인 군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자국 내 정보를 묻는 민감한 주제는 우회하며 시종일관 단정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끌었습니다.
결국 그 대화의 끝은 그랑플람 재단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테이가 스스로 제공하지 않았다면
벤 워렌의 일지도 손에 넣지 못 할 뻔했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비록 그 영토의 크기는 크지 않지만, 목재와 금을 비롯한 각종 자원이 풍부하여 열강이 주목하는 땅입니다.
그들은 철저한 쇄국으로 열강의 침탈을 방어했지요. 그러나 이제 태세를 전환하여 문호를 개방하려는 듯합니다.
그 시작으로 그랑플람 재단을 선택했다는 것은 재단의 행보가 그들의 목적에 부합했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테이의 부친이 그랑플람과 함께 항해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테이의 부친인 벤 워렌은 포트 벨에서부터 그랑플람과 함께 한 선의로 캐링턴 경과도 안면이 있는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잘 지내십니다. 비록 풍족하게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본인이 원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다.”
그랑플람 재단의 일원으로서 사심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우리는 모두 그가 들려주는 벤 워렌의 이야기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랑플람의 벤 워렌

나는 벤 워렌, 아일랜드 출신의 의사이며 오늘은 항해를 시작한 지 2712일째 되는 날이다. 지금 나는 배가 아닌 곳에서 이 일지를 적고 있다.
어느덧 일지는 작은 궤짝을 채우고도 모자라 넘치고 있다. 궤짝을 채우는 동안 나는 알았어야 했다. 내가 길 찾기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아니 알고 있었잖아? 장 바티스트는 왜 날 배에 묶어 놓지 않았는가? 아, 원망할 수는 없지. 묶어 놓으려고 덤비는 걸 피해서 도망친 거니까.
이건 다 장 바티스트 때문이다.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픈 것도 장 바티스트 때문이다.
여기는 우리가 떠나온 곳과 너무 다르다. 항해하면서 지나온 곳과도 다르다. 풀이나 열매를 봐도 먹어도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우리가 불시착한 곳이 어느 쪽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우리는 많은 일을 겪었다. 정박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곳에 들러서 그곳의 능력자를 찾았다.
장 바티스트는 능력자들을 만나 그들의 기원을 조사했다.
거대 일식이 있은 지 38년. 대부분 능력자는 30살 이하의 젊은 사람들이었고, 장 바티스트는 그들을 직접 거두거나
안전한 곳으로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왔다.
힘든 항해였지만, 나를 포함한 선원 모두는 장 바티스트를 존경했다. 우린 그에게 구원받았으니까.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여긴 참 아름다운 곳이다. 이젠 보이지 않지만, 바다 빛깔이 아주 푸르고 해변에는 검은 바위가 많았던 게 기억난다.
바위는 날카로웠고, 거기에는 먹을 게 많았다.
배고프다, 이게 다 장 바티스트 때문이다. 그래, 나는 길을 잃었다. 이게 다 장 바티스트 때문이다!!!

강가의 벤 워렌

나는 벤 워렌, 아일랜드 출신의 의사이며 오늘은 항해를 시작한 지 2714일째 되는 날이다. 내 몸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먹을 수 있는 풀을 몇 개 찾았다. 다행히 흐르는 물도 찾아 식수 걱정도 덜었다.
다만,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가면 산 밑으로 내려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물길은 산속 깊은 곳에 있는 작은 호수로 나를 안내했을 뿐이다.
이제는 돌아갈 수도 없었다. 신이여, 난 왜 되는 게 없지.

나는 나름 미래가 기대되던 외과의였다. 장 바티스트가 꾀어내지만 않았어도 마르세유의 내 작은 집에서 허브나 키우고 있었을 텐데.
다시 밤이 되었다. 보름인지 달이 엄청나게 크고 밝다. 오늘은 또 어디서 밤을 지새우지. 장 바티스트는 날 찾고 있는 걸까?
호수로 다가가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름드리나무 사이 달빛을 반사하는 호수는 비현실적이었다. 잠깐 내가 죽었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극심한 허기가 나를 다시 지상으로 패대기쳤다. 이토록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서 잠시도 감동할 수가 없다니. 그뿐이 아니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이미 내 뒤는 늑대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아, 대체 나한테 왜들 이러는 거지.
큰 개 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늑대들이었지만 숫자가 많아서 이길 수 없을 것 같다. 난 손댄 곳이나 겨우 투시가 가능한 비전투 인원이라고.
장 바티스트 플람, 사람을 데리고 왔으면 함부로 배를 떠나지 못하게 묶어놨어야지! 속았어, 속았어…… 문을 찾아야 한다느니,
자기 진찰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느니 인자한 할아버지가 세상 떠나기 직전에 유언 남기듯이 내 손 꼭 잡길래 젊은 혈기에 박차고 나왔는데
진찰은 개뿔이, 정작 본인이 선원 중에 제일 건강하고, 여기 있었으면 늑대들 따위 다 때려 잡아줬을 텐데… 장 바티스트, 보고 싶어요.
그래도 마지막이 아름다운 호숫가라니 정취 있다.
나는 그래도 한 놈은 데리고 간다는 마음으로 수통 끈을 손에 묶었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

“---------.“
바람이 불어오는 호수 위에 달빛이 빚어낸 듯한 아름다운 여자가 서 있었다. 환각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내 풀을 헤치고 오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목소리도 새하얀 옷도 엄청나게 잘 어울렸다. 허기와 함께 심장에 통증이 왔다.
흉부, 복부가 모두 만신창이다.

“---------.“
나는 아마 그때 그 여자가 천천히 걸어와 질문 대신 칼을 던졌어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숨이 멎은 건 늑대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여자가 점차 다가오자 늑대들은 가랑이 사이에 꼬리를 말고 낑낑대다가 한두 마리씩 도망쳐버렸다.

“흐음, 이 말은 통하려나?”
“흐어어, 말도 해!”

여자의 입에서 서툰 프랑스어가 나왔다. 놀란 내가 소리 지르는 바람에 여자도 놀랐다.
깊은 강물같이 검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출렁거리며 내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경계심도 의심도 나일 강가의 흙먼지처럼 씻겨 내려가고 오직 그 안에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만을 남겼다.

“보아하니 양인 같은데 예까진 어찌 왔소? 이 호수는 신성한 터이니 발 딛지 마시오.”
“아름다우십니다, 아가씨. 하늘에서 내려왔던가 호수에서 솟았던가 둘 중 하나시죠? 지상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니까요.”
“실성을 하였나?”
“위대한 항로가 저를 여기까지 인도했군요.”
“배를 타고 온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이 자가 바로 그들 중 하나란 말인가… 그건 그렇고, 참 멀리도 오셨소.
바닷가에서 예까지 사흘은 꼬박 걸어야 할 것인데.”

아름다운 님프는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향했다. 이미 나는 그게 지옥이라도 상관없었다.

활빈당

나는 벤 워렌, 아일랜드 출신의 의사이며 오늘은 항해를 시작한 지 2715일째 되는 날이다. 님프가 나를 이끈 곳은 지옥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장 바티스트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벤! 살아 있었군. 뭐 대체로 운이 좋은 녀석이라서 큰 걱정은 안 했다만.”
“와! 그것참 감사하네요!”
“자, 진정하고 일단 좀 씻게. 자네 냄새나.”

장 바티스트의 말은 항상 옳았다. 나는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동료들과 인사를 나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곳은 조선이라는 나라이며, 우리가 있는 곳은 특정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 입구에는 있는 작은 팻말에는 완벽하게 균형 잡힌 천칭이 새겨져 있었다.
내가 함부로 님프라 불렀던 하유영 님은 혈지기1) 의 혈통을 이은 후계자이자, 이곳 활빈당의 당주였다.
최근 마을 근처에 프랑스인 선교사가 온 적이 있었는데 유영 님과 몇몇 사람들이 프랑스어를 배운 덕분에 의사소통할 수 있었다.

“조선에서도 이런 모양의 천칭을 사용하나요?”
“물론이오. 이런 천평칭은 약재와 같이 귀한 것을 잴 때 쓰지.”
“아, 저울대 가운데 불꽃무늬가 아주 예쁘네요.”
“그건 삼족오라고 하오. 삼족오는 발이 세 개 달린 까마귀인데 본 당의 이전 시대부터 사용해오던 문장이지.”

3은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가장 완벽한 숫자라고 설명하는 유영 님의 표정에 뿌듯함이 가득해서 어디가 어떻게 까마귀인지는 물어볼 수가 없었다.
삼족오와 천칭은 400년 전, 활빈당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이전부터 내려온 상징이었고,
그 상징 아래에서 유영 님을 비롯한 선대 혈지기들은 오랜 세월 이 땅의 능력자들을 지켜왔다고 했다.

“이렇게 한가하게 앉아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소.”

유영 님이 말했다. 유영 님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표정이 겉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는 편인 것 같았지만,
숨길 수 없는 초조함이 눈빛과 목소리에 담겼다. 8년 전, 유영 님 전에 활빈당을 이끌던 분이 마지막으로 본 환시가 장 바티스트였고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모두 예정되어 과거부터 시작된 것이라 했다.

“하여 관아와의 관계는 악화 일로를 걸을 뿐이며, 돌이킬 수 없소.
무력 충돌은 피하고자 하였으나 저들이 내지른 칼에 눈 감고 맞아줄 수는 없는 터.
계시를 받고자 찾아간 호수에서 당신의 동료를 찾았고, 시기적절하게 당신들이 온바, 이는 하늘이 도우심이오.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이달 보름이 지나기 전에 거사를 진행하려 하오.”
“최선을 다해 도울 것입니다. 염려 마십시오. 우리 선원들은 숙련된 전사들이기도 합니다.”

장 바티스트는 자신 있게 말했다.

“도움을 준다고 하니 참으로 다행이오. 이 땅은 예로부터 상서로운 힘과 혼탁한 힘이 함께 흐르고 있소.
두 힘 모두 흐르기만 할 뿐, 땅 너머로 흘러나오지 않아 모두가 무탈할 수 있었소.
그러나 어느 날 혈이 파괴되기 시작하더니 땅 아래의 힘이 요동쳤소.
하여 문을 넘어 이 세상에 도착한 내 선조들이 혈지기를 자처해 열린 것을 억지로 닫아왔지.
그리하여 이 땅이 무탈할 수 있었다면 다행이겠으나 그렇지 못했소.”

유영 님의 말은 이해하기 어려워 우리 중에 그 말을 알아듣는 이는 장 바티스트 뿐이었다.

“강한 기운을 품은 혈이 열린 적이 있소. 내 선조들이 그 목숨을 바쳐 겨우 닫았으나, 이미 빠져나간 힘을 막을 순 없었소.
힘이란 강할수록 어디로 뻗어 나갈지 예상할 수 없는 법. 힘을 품은 이들이 민간에 끼친 피해는 이루 말할 것이 아니며,
삭월을 등에 업고 태어난 낭인이 궐까지 난입하여 행패를 부렸으니 추상과 같은 불호령이 떨어진 것 또한 당연한 일이겠지.
그 후로 힘을 가진 이들을 잡아 가두는 일이 이어지다가 30여 년 전 그날, 세상의 기가 달라짐을 보시고 크게 경계하시며
기어코 척화비를 세워 능력을 가진 이들을 더욱 탄압하시니 오늘의 이 사단에 이른 것이오.”
“비단 이곳만 변한 것이 아닙니다. 바다 너머에도 그날 이후로 능력을 가진 이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리하여 약삭빠른 사기꾼부터 위정자까지 모두 그 힘을 이용할 생각만을 하고 있지요.
오히려 이곳의 군주는 그런 점에서는 매우 결벽이 강하더군요.”
“늘 그랬던 것은 아니고, 이번 주상이 그러하오. 그래서 더욱 용서가 없으시지.”
“회유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군요.”
“잡혀간 이들은 모두 극심한 노역을 하게 될 것이오. 열 살 남짓한 어린아이들이 서넛이나 되니 하루가 시급하오.”
“원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유영 님의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먼발치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며 나는 그저 할 수 있는 것이 기도뿐이라 슬펐다.
가슴이 미어지면서도 그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아픈 게 나라서 다행이라고.

조선의 벤 워렌

나는 벤 워렌, 아일랜드 출신의 의사이며 오늘은 항해를 시작한 지 2717일째 되는 날이다.
작전은 성공했고, 우리는 조선의 관아를 습격한 범죄자가 되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동안 지나온 거의 모든 국가에서 우리는 이런 일을 했다. 구하고, 구하고, 구했다. 이번 일은 비교적 쉬웠다.
유영 님의 바람이 조선 최고의 전사라는 갑사들을 무릎 꿇린 덕분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무사하진 못했다.

유영 님도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나는 그것이 슬프면서도 기뻤다.
유영 님이 가장 먼저 치료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나는 이미 가슴이 터져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의 치료가 끝난 뒤에야 유영 님 앞에 앉아 붕대를 감았다. 나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저는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다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해괴하구나. 어찌 그런 말을 하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가 지껄이는 헛소리라 생각해 주세요.
저는 그저, 이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을 다른 사람이 가지는 것보단 내가 갖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무력함과 공포도 내 것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망도 미안함도 불안도 모두 내가 가지고,
다른 사람들은 그저 성공했을 때의 기쁨만 알았으면 합니다. 다른 누가 저를 치료하며 이런 마음을 가진다고 생각하면,
저는 견딜 수가 없어요.”

유영 님은 별말 없이 그저 나를 바라보았다. 눈가가 이지러지는 것 같기도 했고 입매가 달싹거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짝 날이 섰던 어깨가 조금 부드러워지고 숨소리가 깊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아무 말 없이 붕대를 감았다.

“참 이상한 사람이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 유영 님이 말했다. 나는 유영 님께 어떤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내가 외면한 사이 나는 깊은 강 한가운데 들어와 있었다.
범람하는 강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나는 강물이 흐르도록 두었다. 빠져 죽어도 좋았다.

새로운 사명

나는 벤 워렌, 아일랜드 출신의 의사이며, ……이 땅에 머문 지 12일째 되었다.
오늘 장 바티스트가 떠났다. 나는 이곳에 남기로 했다. 나는 지난 8년간 선의로서 이들의 항해를 지켜봤다.
그들의 사명을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큰 재주도 능력도 없고 어떤 결단을 내려본 적도 없었다.
이 항해도 장 바티스트가 나를 원했기 때문에 참여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것은 나의 첫 번째 결정이었다. 결정하자마자 엄청난 후회와 죄책감이 뒤따랐다.
내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이 삶을 살았는지는 상관없이 이미 내 삶은 지난 8년의 항해에 꼭 맞게 길들어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배를 타지 않아도 괜찮아. 어허, 울지 말래도.”
“흐어지마안…서선의인데에…..”
“걱정 말게. 자네를 대신할 사람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아.”
“즈금그글이르라그……”
“누구나 자기 삶에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지. 그럴 때마저 남의 눈치를 봐야겠나?
이기적인 결정을 내린다고 누가 뭐라 하지 않아. 세상이 그래, 어차피 자네가 중심이 되는 세상은 없어.
자네가 뭘 해도 세상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아. 그러니 자네도 세상을 좀 더 걷어차 보게나.”
“…….”
“그렇다고 너무 놀지는 말고. 이곳에서 할 일을 찾아. 하유영 님을 도와서 조선의 능력자들을 계속 구하고 도우란 말일세.”

하여간에 못된 사람이다. 장 바티스트는 눈물이 쏙 들어갈 독설을 인자하게 늘어놓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내 인생 밖으로 나갈 것처럼 거침없이 멀어졌다.
나는 울지도 못하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확신할 수 없는 자신에게 환멸을 느낄 때마다 그가 남긴 사명이 나를 지탱해주겠지.
나는 벤 워렌, 아일랜드 출신의 의사이며, 유영 님과 함께 조선 땅의 능력자들을 지키는 사명을 받았다.
아직도 후회와 불안함이 가득하지만, 장 바티스트는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능력이 사라지면

나는 벤 워렌, 얼마 만에 쓰는 일지인지 모르겠다. 먹고 사는 일이 힘들다는 건 변명이다. 사실 유영과 눈을 마주치고 손을 잡고
무릎을 맞대고 앉아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너무 좋아서 다른 일은 할 수가 없다. 하루하루가 행복하다.
정착할 수도 없고 드러낼 수도 없는 삶을 살지만 그래도 좋았다.

아이가 생기고 유영은 좀 쇠약해졌다. 좋은 약 한 번 먹이지 못하는 것이 미안할 따름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늘 있었다.
자리보전도 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유영을 보면 야속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유영은 유영의 일을 하는 것이고, 나는 내 일을 해야 했다.
최근 들어서 투시가 안 되는 것 같다. 원래 미약한 능력이었는데 그나마도 사라지면, 사라지면… 사라지면 평범한 사람이 되는 거지.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대로 내 능력이 사라지고 유영의 능력이 사라지고, 모든 의무에서 손 떼고 우리 예쁜 딸 도린이와 유영과 함께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유영은 절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 땅의 능력자를 구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니까.

단장

마지막으로 기록을 남긴 게 언제였더라.

능력이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을 적어놨구나.
우리에게 벌어진 일들이 너무나 참담하여 기록을 남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허나 잊어서도 안 되는 일이기에 펜을 들었다.

나는 능력과 함께 사명을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런 일일 줄은 몰랐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유영의 능력이 사라져 간다.
내 보잘것없던 투시는 이미 없어졌다. 그토록 바라왔던 일이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힘들었다. 우리가 잃은 것은 능력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는, 누구의 탓을 할 수 있을까?

쫓고 쫓기던 나날, 관아에 서른 남짓한 젊은이가 부임하면서 우리는 그동안의 생활이 그나마 평화로웠음을 알 수 있었다.
그자가 붓을 들면 누구도 그를 이길 수가 없었다. 그가 그려낸 것만이 진리였고 현실이었다.
몇 번의 구출이 실패하고 숨돌릴 새도 없이 조정의 정군이 거주지를 습격했다. 선봉에 그 남자가 있었다.
성과 비명, 폭력과 비통함이 가득한 마을을 산책하듯 뒷짐 지고 거닐다가 도포 자락을 펄럭일 때마다
붓끝에서 불길과 물줄기, 매서운 바람이 쏟아져 나왔다.
은신처에 숨겨둔 아이들이 걱정되었지만,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퇴로를 뚫는 게 먼저였다. 그런 비정한 선택을 한 건 우리였다.

바삐 퇴로를 뚫는 사이, 군은 은신처 가까이 진입해 있었다. 남자는 은신처 앞에서 붓을 들었다. 아이들을 모두 잃을 수 있다는 각오를 했지만,
그것이 막상 현실로 다가오자 숨이 막혔다. 하지만 남자 붓끝에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는 인상을 바꾸더니 돌연 퇴각을 명했다.
나와 유영은 뒷산에서 남자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보았다. 그 정도로 가까웠는데 그는 황급히 마을을 떠났다.
우리는 주변을 살필 겨를도 없이 은신처로 달려갔다.

그곳에 두 아이가 있었다. 유영이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그만두어라!”

유영이 외쳤다. 도린이 태의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이제 괜찮으니, 그만둬! 그만!”

유영이 달려가 태의를 빼앗으려 했다. 어찌나 꽉 안고 있던지 도린의 하얗게 질린 손이 어둠 속에서 눈에 박혔다. 유영이 이를 악물고 매달렸다.
도린이 쉴새 없이 중얼거렸다.

“……히, 조용히, 조용히, 조용히, 조용히……”
“도린아! 정신 차려라, 도린아!”
“……용히, 조용히, 조용히, 조용히, 조용……”
“그만!!!”

유영과 아이들을 중심으로 태풍이 이는 듯했다. 유영이 눈동자의 실핏줄이 모두 터질 정도로 이를 악물며 바람을 모았지만,
이상할 정도로 바람은 점차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 격렬한 바람은 세 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빙빙 돌아 맺혔고
딸아이 이름을 부르는 유영의 목소리가 조각났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무언가 폭발하는 것이 느껴졌다.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 기이한 정적이 끼어들었다. 바람 한 점 일지 않았지만 나는 다리가 풀려 크게 휘청거렸다.
내 안에 오래도록 보관되어 있었던 무언가가 산산이 부서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상실감과 슬픔이 쏟아졌지만 주워 담을 시간이 없었다.
나는 네발로 기어가 태의를 안아 들고 그대로 달렸다.

산속에 마련한 작은 움막에 태의를 눕히고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눈을 뜨지 않았다. 나는 태의를 안고 울었다.
잃은 것이 너무 많았다. 그렇게 울고 울다가 몸속의 눈물을 모두 말려버렸다. 그래서 유영이 축 늘어진 도린을 안고 왔을 때
나는 눈물 대신 피를 흘렸다.

“……무서웠어요, 어머니, 너무 무서웠어요.”
“그래. 미안하다. 어미가 미안하다.”
“무서웠어요…… 무서워요……”
“도린아. 안다, 어미가 안다. 이제 괜찮을 것이야. 이제 다 괜찮을 것이다.”

결코 괜찮아질 수 없겠지만 유영은 도린을 안고 끊임없이 속삭였다. 도린은 그날의 공포로 각성했다.
울면 들키니까, 그럼 맞거나 끌려갈까 무서워서 끊임없이 조용히 하라고 되뇌었다고 했다.
태의가 누나 치맛단을, 발목을 움켜쥐고 사정하는데도 무서워서 멈출 수가 없었다고 한다. 태의의 심장이 약해지고 숨이 약해지고,
주변에 아무도, 자기 자신마저 모두 없어질 때까지, 조용히, 조용히, 끝없이 되뇌었다고 했다.

“어머니, 죄송해요. 이렇게 태어나서 죄송해요.”
“네가 어미 애간장을 끊어 놓으려고 작정했구나. 그런 말은 말아라.”
차가운 손끝을 주무르며 달랬지만 눈물이 쉬 그치지 않았다. 유영이 도린을 꼭 안았다.

“도린아, 네가 우리 딸이라서 참말 좋다. 강보에 싸여 꼬물대는 널 보고 네 아버지가 울며 말하기를, 하늘이 주신 선물이라고 했지.
나도 그리 생각했다. 내가 힘든 길을 걷는 것을 가상하게 여기시고 하늘이 주신 보물이 바로 너란다.”
도린은 흐린 눈으로 유영을 바라보다 겨우 고개를 돌렸다.
“태의야, 미안해. 누나가 널 지켜줘야 하는데, 미안해…… 태의야......”

도린은 미동 없이 누워 있는 태의의 눈가를 쓸며 미안하다, 미안하다 되뇌었다. 태의에게는 내가 필요한데, 내가 태의를 지켜줘야 하는데.
그리 말하는 아이는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차가운 손끝을 잡고 유영이 속삭였다.

“언제로 돌아가도 꼭 널 다시 만날 거야. 널 다시 낳을 거야. 다음 생에도 지금 그대로 오렴.”

도린은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열두 살이었다. 조선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봉분을 올린다는데 우리는 그럴 수 없었다.
딸이 좋아했던 꽃과 아끼던 공깃돌 다섯 개를 올려놓았다. 늘 갖고 싶어 했던 빨간 댕기는 무덤 위에 올려줄 수 없어 함께 묻어 주었다.

정신을 차린 태의는 앞을 보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보이는 것이 너무 많아 무엇이 실재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어둠이 보인다고 했다.
타고난 힘을 도린이 눌러 주고 있었던 것이리라. 부모가 모르는 사이에 아이들은 서로 살길을 찾아 협력하고 있었나 보다.
태의는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두려워하며 울기만을 거듭하다 흰 새벽 지쳐 쓰러졌다.
그러다가도 경기를 일으키며 일어나 다시 울어버리니 잠시도 잠들지 못했다. 유영은 도린의 치맛단으로 눈가리개를 만들어 태의에게 씌워 주었다.
힘이 물체에 담길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태의는 그제야 헛것을 보지 않았다.

“언젠가.”
가리개가 풀리지 않도록 단단히 묶는 법을 알려주었다.
“이 가리개를 벗고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사람, 음험하지 않은 사람, 흉계를 품고 있지 않은 사람, 원한을 등에 업지 않은 사람,
입으로 뱉는 말과 글로 적는 말이 다르지 않은 사람, 업신여김을 비수처럼 품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태의가 눈가리개를 벗고 마주할, 얼굴이 맑고 손이 따스한 사람이 있다면.

가족의 삶

오랜만에 펜을 들었다. 장 바티스트는 살아온 흔적을 남기는 것이 가장 중하다 했다. 그 양반은 잘 지내고 있을는지.
하긴 내가 누구를 걱정하나.
그동안 달라진 것이 많았다. 왕이 바뀌었고, 우리는 활빈당에서 나와 산에서 살고 있다.

도린이가 각성한 그날 많은 사람의 능력이 약화되거나 아예 사라졌다. 어떤 이는 상실감에 몸서리치기도 했고
어떤 이는 기쁨에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능력을 잃은 사람들은 활빈당 밖 세상으로 가기로 했다.
이제 평범한 사람이 되었으니 어디서 무엇을 해도 그만한 차별과 핍박을 받을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에 희망을 보는 것 같았다.

떠난 사람 중 일부는 품삯을 모아 활빈당에 보내왔다. 또 다른 일부는 관아에 밀고하여 조정의 군사를 보내왔다.
어느 쪽도 받아서 곤란한 것들이라 활빈당은 또다시 은거지를 옮겼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들의 만류에도 은거지를 떠났다.
가뜩이나 힘든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낯선 산속에 정착했다. 처음에는 조금 힘들었지만 내 능력은 원래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니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조선 사람들은 청진기로 병변을 확인하려는 나를 불신했다.
이곳엔 손목에 묶은 실만 짚어도 오장육부 어디가 아픈지 알아내는 사람들이 천지였으니까!
결국 나는 약초를 뜯어 양약 기술을 섞은 약을 만들고 유영은 활을 들고 사냥을 했다.
유영이 예전처럼 강한 힘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교함은 그대로였기 때문에 큰 멧돼지를 혼자 잡기도 했다.
나는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는 지나치게 눈에 띄는 터라 저자에 나가는 것은 주로 유영이 맡았다.
유영은 좋은 장사치는 아니었다. 어느덧 유영의 손을 붙잡고 다니던 태의가 약초와 가죽을 곧잘 팔게 되었다.

평화로웠다. 그 일이 있은 뒤로 벌써 몇 년이 지났다. 몇 번을 옮겨 다녔고, 그사이 우리는 다시 아이를 얻었다.
막내 조이는 평범한 아이였다. 내 약은 배앓이약으로 제법 잘 팔렸고, 유영이 가끔 잡는 큰 짐승 가죽도 큰돈이 되었다.
돈이 모일 때마다 활빈당으로 보내니 형편이 풍족해지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은 무탈하고 사랑스럽게 잘 자라주었다.

태의는 도린이 맞이하지 못했던 열세 번째 생일을 맞았다. 태의가 성장하면서 유영은 태의를 훈련하고
힘을 다스리는 방법을 가르치는데 몰두했다. 상처를 달고 돌아오는 날이 이어졌지만 태의는 개의치 않았다.
능력을 능숙하게 다루게 되면서는 눈가리개를 하지 않아도 힘들어하지 않았다.
태의는 대범하게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돌파하며 점점 강해졌다.

조선의 변화

왕이 바뀐 지 여러 해가 지나도 달라진 것이 없던 차에 저자에 나갔던 유영이 물건을 팔지 못하고 돌아왔다.
반나절은 꼬박 걸어야 하는 산길을 날듯이 뛰어 올라와 산밑 마을에 감별사가 왔다고 알려왔다.

도성에서 시작된 능력자 감별은 각 지방 목사가 있는 고을을 중심으로 점점 퍼져나가 조선 팔도를 그물로 훑듯이 하여
조선의 능력자를 모조리 확인하고 있다.
감별사 앞에서 자신이 가진 능력을 선보이면 옆에 선 서기가 능력을 발현하는데 걸리는 시간이나 발현되는 부위, 효과 등을
상세하게 글과 그림으로 적는다고 한다. 능력이 유용하다면 쓰임을 인정받고 크게는 중앙의 관직까지 임할 수 있다고 하는데,
제어 불가한 능력을 가졌다면 되려 수용되거나 감시가 따라붙는다고 한다.
조정이 활빈당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는 듯, 활빈당 소속의 몇몇 능력자는 위험하지 않은 수준인데도 감시자가 붙은 것 같다고 한다.

고위험군으로 분류되면 담당 감시관이 지정되며 권역 외로 이동할 때에는 항상 보고해야 했다.
일정 기간 군역을 치러야 했으며, 위기 상황에는 나라에서 기간 및 분야 불특정의 군역을 요구할 수 있다는 문서에 수결을 받는다.
당장은 거주지 이동 외에 어떤 제약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등록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태의는 반드시 고위험군으로 분류될 것이다. 우리는 감별을 피해 점점 더 깊은 산으로 거주지를 옮겼지만,
조선 관군의 집요함을 생각하면 끝까지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행히도 아직 활빈당 구성원 중 강제수용되거나 물리적 제재를 받은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조정을 믿을 순 없다.

결단

달이 밝아서 일지를 남기는 데 무리 없을 것 같아 구름이 가리기 전까지 기록을 남겨 본다.

지난 5년간 활빈당의 많은 구성원이 감별 후 일자리를 얻었다. 나라에서 보증한 일자리라 삯은 일한 만큼 받을 수 있었다.
사람들의 형편이 점점 더 나아졌다. 그리고 다음 활빈당주로 지목되는 단아가 감별을 받겠다, 결단을 내리고 관아의 뜰에 섰다.
그 자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 후 아직 나쁜 상황은 없었다.
단아는 고위험군으로 분류되었는데 나이가 어려 군역을 치르지는 않고, 우선 거주지 이동 제한이 적용되었다고 한다.
그밖에는 활빈당에 대해서 탐색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다른 능력자들에 대해 캐묻지도 않았다.
물론, 지켜보는 눈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 일종의 긴장 상태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태의도 열여덟이 되어 더는 감별을 미룰 수 없었다.
“단아는 이제 고작 열셋인데 그러한 결단을 내렸소. 내가 참으로 면구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더이다.”
“어쩌면 열셋이라 내릴 수 있는 결단 일지도요. 유영, 자책하지 마세요.”
“우리는 잃은 것만 생각하고 이 손에 없는 것만 바라왔는지도 모르겠소. 태의도 장성하여 제 몫을 해야 하는데 그 앞을 가로막은 꼴이며,
평범하게 살 수 있던 조이에게 불필요한 시련을 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유영, 그렇다면 더 미루지 맙시다. 그런 생각 그만하고 일어나요. 지금 당장 갑시다.”

나는 괴로워하면서도 망설이는 유영의 손을 잡았다.
잃은 것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잃을 것이 더 남아 발목을 잡는구나 싶어 마음이 복잡했다. 당장 날이 밝는 대로 감별을 받으러 가기로 했다.
우리는 어쩌면 그 옛날 은신처에 아이들만 남겨두고 사람들을 구하던 시절과 달라진 게 없었는지도 몰랐다.
천칭이 균형을 이룰 때까지 이 땅의 능력자들을 돕는다는 사명을 이어가는 한 그럴 것이다.
이제는 창가에 부는 바람 소리로, 싱그러운 풀숲을 스치는 풀벌레 소리로, 햇살이 가득한 개울가 찰랑거리는 소리로만 기억되는
딸아이의 목소리가 밤새 들렸다.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타박 받는 기분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나를 핑계 삼지 마시고 아우들에게 잘하시오, 내 딸은 허리에 손을 짚고 그렇게 또랑또랑 말할 아이였다.

감별

감별은 생각보다 쉽게 지나갔다.

“부모가 능력자라 해도 아이가 능력자인 일은 잘 없고 그 반대의 일도 잘 없는데, 이 댁은 큰아이는 능력자에 작은아이는 능력자가 아닌 걸 보니
큰아이는 어머닐 닮고 작은아이는 아버질 닮았다 해도 다들 믿겠구먼.”

감별을 진행하던 감별사가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없으니까 능력이 없다고 한 것인데, 마치 원래 없었던 것처럼 능력자가 아니라는 확인을 받으니 기분이 참 묘했다.
잃었을 당시 내게 능력은 큰 것이었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게 정말로 중요한 것이었나 싶었다.
세상에 이능 없이 태어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은데 내가 그중 한 사람이 된 것뿐이었다. 감별이 끝나고 며칠 뒤 태의는 군역을 치르기 위해 떠났다.

아이의 성장

군역을 치르고 돌아온 태의는 군인이 되겠다고 했다. 도성에 가보니 그곳이 별천지라 했다.
도성은 이제 능력자를 차별하는 일이 잘 없고, 먹는 것을 비롯해 동생의 배움도 도성이 더 나을 거라고 했다.
얼마 전 추천으로 체탐인에 취재 보고 결과만 기다리는 중인데 자기 생각엔 될 것 같단다.
혼자 고민하고 생각해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니 가슴이 먹먹해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데 태의가 도리어 우리 손을 잡았다.

“세상이 변했어요. 주상 전하께서 담대한 분이시래요. 그동안 외면했던 능력자를 똑바로 보고 너희가 무엇이냐,
무엇을 할 수 있느냐 하문하실 분이라고 하더라고요. 이제 활빈당도 좀 더 세상에 나서야 해요. 작은 일만 해서는 큰돈을,
아니, 크게 도울 수가 없잖아요.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을 증명해야 해요. 우리가 무엇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요.”

태의에게는 항상 미안했다. 잘 자라주는 것이 기특했지만 잘해주지 못한 것은 마음에 맺혔다.
알면서도 다른 선택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못내 미안했다. 그런 아이가 이렇게 노력하고 애썼다고 생각하니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체탐인이 되면 그 자신과 직계 가족이 나라에서 준비한 임대주택에서 살 수 있으니 좀 불편하더라도 녹봉을 모아 보기로 했다.
태의는 사실 이 주택에 빈자리가 없다면 엄두도 못 냈을 거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도성의 물가 역시 별천지이며,
집 가진 사람들의 횡포가 이루 말할 데 없다고 하니 말이다.

그리하여 거주지를 도성으로 옮기기로 했다. 조선에 와서 큰 고을에 나가본 적이 없다.
제법 큰 장이 서던 마을도 내가 아주 어릴 때 살던 시골 마을 같았다.
마르세유처럼 활기찬 곳일까? 사람이 가득하고 다닥다닥 3층 건물이 붙어 있고 높은 종탑이 어디서든 보이는 그런 곳일까?
결정하기 전에는 두려운 마음뿐이었는데, 막상 도성으로 간다고 하니 조금쯤 흥분되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도성으로 가는 날이 기다려진다. 오히려 유영이 걱정이 많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정말로 세상이 변했다면, 우리도 변해야 한다.
그래야 태의와 조이에게 변한 세상을 물려줄 수 있으니까.

잠시의 이별

아무래도 이것이 일지의 마지막 장이 될 것이다. 마지막에 적는 이야기가 즐거운 일이라 참으로 다행이다.

조이가 선빈원의 정식 연구원이 되었다. 선빈원은 조선의 능력자를 감별하고 옳은 길을 제시한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연구소였다.
단아가 활빈당주로서 협조를 위해 선빈원에 들 때 몇 번 따라간 후로 줄곧 선빈원에서 일하고 싶다 노래를 부르더니
과거에 합격하여 수습 연구원이 된 것이 벌써 한 해가 지났다. 이제 수습 기간이 끝나고 정식으로 연구원으로 채용된 것이다.
막내가 어느새 커서 제 밥벌이를 다 하게 되다니. 새삼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이 훌쩍 가버린 것이 느껴진다.

“그리 좋으냐?”
“좋고 말고요! 어머니, 제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아시잖아요.”

웃는 조이를 바라보는 유영의 눈가에 주름이 가득하다. 그 곱게 지는 주름이 꼭 웃는 상이라 보고 있노라면 목구멍이 컥 막힐 정도로
가슴이 벅차게 행복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조선 땅에 온 것이 다 유영의 웃는 눈매를 만들기 위함이라 생각하니
그제야 삶의 보람이 채워진다.

“가면 또 줄곧 공부할 터인데. 공부하는 일이 좋은가? 너는 참 형이랑은 다르고 다르구나.”
“공부해야죠. 공부 많이 할 거예요.”

허리를 세우고 앉으니 조이도 태의 못지않게 실한 몸을 가졌다. 비록 운동을 덜 하여 살이 하얗기는 했지만
총명한 눈동자를 빛내고 앉아 있는 얼굴도 참 보기 좋았다. 조이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선빈원에서 공부하는 사람들 덕분에 형도 체탐인이 되고, 활빈당 사람들도 맞고 사는 일이 사라졌잖아요.
모를 때에는 피하고 외면했던 사람들이 이제 능력자가 무엇인지 알고 나니까 겁내지 않고 제대로 평가해주니까요.
저 공부 많이 해서 낱낱이 다 알고 싶어요. 왜 그런 힘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게 어떤 의미인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다시는 활빈당 사람들, 아니 어떤 능력자도 차별받지 않게요.”
“아이고, 얼굴은 아직 강아지처럼 복실하니 귀엽고 고운 아기가 하는 말은 참으로 미덥다.
내가 잘 키웠지, 우리 강아지, 요 복실 강아지.”
“어머니! 저도 이제 스물이 넘었는데 언제까지 강아지예요?”
“강아지를 강아지라 하지 뭐라 부르니?”
“…… 적어도 개라고 해주세요.”

유영이 웃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태의에게 조이의 합격 소식을 담은 편지를 쓰며 나도 같이 웃었다. 태의는 요새 항상 외국에 나가 있다.
혹시나 해 어릴 적부터 가르친 영어와 프랑스어가 초반에 태의에게 많이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그 탓에 먼 타국을 떠돌게 된 것 같아
괜한 짓을 했나 싶다가도, 본인이 능력을 인정받고 빠르게 진급하는 것에 뿌듯해하는 태의를 보면 역시 잘한 일이다 싶었다.

얼마 전에 태의가 전보를 보내오기를, 내 일지를 쓸 일이 있을 것 같다 하여 정리 중이다.
최근 장 바티스트가 세운 숭고한 길 재단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들린다. 그때 뿌린 씨앗이 이렇게 자라
아시아까지 이름을 알릴 정도가 되었다니 그는 역시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사람들은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담아 그를 그랑플람이라 부른다고 한다. 문득 장 바티스트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어떤 마음으로 이 땅을 떠났을까? 항해는 원하는 곳에서 끝났을까? 이곳에 남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가 내게 이곳에 남으라고 말해준 덕분이었다. 나는 유영을 도와 많은 능력자를 도울 수 있었다. 그게 나의 쓸모였다.

모쪼록 이 일지도 아들의 손에서 제 쓸모를 찾아 사용되기를 바란다.

1) 땅의 기운이 비틀려 생긴 괴이한 공간을 혈이라 부른다. 혈은 주로 국운이 다하거나, 커다란 재해가 일어나기 전에 열린다 하여 상서롭지 못한 것으로, 언급조차 꺼려하는 경우가 많다. 한 번 열린 혈은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닫을 수 없고, 특수한 힘을 가지고 태어난 혈지기만이 닫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