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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현 정보제공자 루카 홀든 (독 능력자)

적의 적은 아군이 아니다. 그저 또 다른 종류의 적일 뿐이다. 우리는 적이 가득한 세상에 던져졌고, 그 안에서 어떤 손을 잡을지
선택은 분명 나의 몫이다. 그러나 한 번 선택한 뒤에는 결과가 어떻게 되든 이미 내디딘 걸음을 되돌릴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서로의 손을 놓지 않고 오롯이 버티며 함께 나아가는 것뿐이다.

뜻밖의 순간들

나는 어째서인지 어정쩡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홀든 가를 습격했던 붉은 머리 여자를 향한 복수심만으로 무작정 집을 떠나,
다이무스 님의 조언대로 이글 님의 뒤를 따르긴 했지만 그건 결코 쉽지 않은 길이었다. 이글 님의 행로는 바람에 날리는 낙엽 같아서
종잡을 수 없었고, 불가피한 피해를 남기기 일쑤였다. 이글 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며 민가에 입힌 손해를 배상하는 일까지 하게 되자
발걸음이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슬슬 내가 직접 정보를 모아 내 길을 가야 하나 그런 고민이 드는 시점이었다.

그러던 차에 한 무리의 어른들이 불쑥 나타나 ‘동쪽으로 가는 길’에 동행하지 않겠냐고 제안해왔다. 성인 남자 둘에 성인 여자 둘로
구성된 무리였는데, 겉보기에 괜찮아 보이는 어른도 있긴 했다. 그러나 키아라라는 이름의 여자는 전혀 말이 안 통하는데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고, 남자 하나는 교관님만 안 보이면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자기들끼리 킬킬대던 능글맞은 친구 놈을
떠올리게 하는 인상이라 영 신뢰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다이무스 님의 전언을 가지고 왔다. 다이무스 님은 이글 님을 따르는 것은 이제 되었으니, 내가 원하는 대로
결정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이글 님을 따르는 것은 솔직히 고생의 연속이었지만, 이자들과 함께 간다고 해서 앞날이 그리
유쾌할 것 같지도 않았다. 깊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거절할 수도 없었다. 다이무스 님께서 처음에
이글 님을 따라가라고 하셨던 것도, 이제는 이들과 갈지 고민해보라고 하는 것도 충분히 그럴만한 일이었다.
동으로 갈수록 점점 더 위험해진다는 것을 몸소 체감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여자 둘이 다시 한번 동행을 권유하기 위해
나를 따라왔다가 큰 화를 당할 뻔했다. 갑자기 시작된 적의 일방적인 공격이었다. 나는 그간 누적된 피로로 토혈까지 한 상태였고,
도저히 두 사람을 지킬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였다.

“내 친구한테 무슨 짓이야!”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키아라가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앞에 나타나 적의 공격을 튕겨냈다.
처음에는 서에 번쩍 동에 번쩍 하며 상대의 공격을 막아 내기에 급급해 보였지만, 이내 익숙해졌는지 자유자재로 공간을 이동하며
적의 공격을 교란했다. 그에 화가 난 건지 다시 한번 거대한 공격이 밀어닥쳤고, 나는 일반인이라고 생각한 다른 한 사람을
온몸으로 감싸 보호하려 했다.
그 때 내가 감싸 안은 사람의 눈동자가 프리즘처럼 다채로운 빛을 내뿜으며, 동시에 거대한 수정 벽이 솟아올라 우리를 보호했다.
나는 그저 내 품 안에서 벌어진 기적 같은 광경에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들으니, 정확히 그 때 능력이 발현된 것이라고 한다!
나는 정말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일시적인 고양감

급하게 뒤따라온 남자 둘이 자기 일행과 나까지 챙겨 그 장소를 가까스로 벗어나게 해주었다. 우리는 한참을 달린 뒤에야
겨우 멈춰 서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그만큼 상대가 무시무시했다.

“괜찮아요, 오데트?”

금발의 남자가 우리를 향해 달려오며, 방금 전 놀라운 광경의 주인공을 향해 걱정스레 물었다. 오데트라 불린 여자는
처음에는 입을 틀어막고 눈을 굴리다가 천천히 손을 떼고, 그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발현의 순간 보았던 다채로운 빛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여전히 굉장한 눈빛이었다.

“결국 발현했군요. 오데트, 이제 열은 내린 건가요?”
“네, 완전히요. 나, 지금 컨디션 최고에요! 알프스를 다시 넘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오데트가 발랄한 목소리로 답했지만, 케니스의 얼굴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두워졌다. 둘의 대화를 바라보던 주세페도 마찬가지였다.

“생각해보면 저도 어릴 때, 너무 신나서 물로 장난감을 잔뜩 만들어냈던 것 같아요.”
“어머, 케니스 당신도 꽤 귀여운 시절이 있었군요? 장난감이라니, 후후.”
“발현 후에는 일시적인 고양감이 찾아온다, 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군.”
“주세페도 참, 이 기분이 일시적이라니! 아무렴, 어때요? 그게 뭐건 문제될 건 없잖아요?”
“아냐, 오데트 양. 당신 지금 평소랑 너무 달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 두 남자 사이에서 오데트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두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눈 앞에서 두 손을 모아
빛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광물 조각이 손아귀를 넘쳐 우수수 바닥에 떨어졌다.

“이것 보세요, 전 뭐든 만들어낼 수 있어요! 이제 제가 모두를 지켜줄게요!”

오데트가 큰소리치자 서로를 흘깃 바라본 케니스와 주세페가 오데트의 양 팔을 붙잡고 끌어내려 바닥에 앉혔다.
오데트는 앉은 상태에서도 더 큰 광물을 만들 수 있다며 기어이 시범을 보이려 했다. 주세페는 어쩔 바를 몰라 하며
“차라리 나한테 욕을 해, 비아냥거리라고!” 같은 이상한 소리나 해댔다. 한두 번밖에 보지 않았지만 오데트는 침착하고,
조금은 어두워 보이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확실히 평소와는 다른 상태였다. 나는 그 광경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봤다.
어른들의 세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위험하고, 조금은 한심해 보였다.

삼고지례

한바탕 소동이 지나갔다. 오데트는 케니스의 끈질긴 설득 끝에 겨우 안정을 되찾았지만, 여전히 상기된 얼굴로
힐끔힐끔 나를 쳐다봤다. 절체절명의 순간 자신을 감싼 은혜를 어떻게 잊냐며, 제발 식사만이라도 대접하게 해달라고 하는 오데트의 눈에는
거절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었다.
결국 나는 오데트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이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그들의 이름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케니스 하트, 키아라 호킨스, 주세페 로시, 오데트 랑베르, 예상대로 시끌벅적하고 성가신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야외에서의 식사 자리는 평소처럼 허전하지 않고, 어쩐지 꽉 찬 느낌이 들었다.

“그때 말이야, 내가 분명히 봤다니까. 요 조그만 게 오데트를 딱 감싸더라니까! 어쩜, 너무 멋지잖아!”
“허, 이 녀석 물건일세! 그러게 내가 진작부터 영입하자고 했잖아.”
“루카, 고마워요, 정말로 고마워요. 나도 꼭 루카를 지켜줄게요..”
“아니 이미 했는데…아니, 하셨잖아요.”

방금 전까지 눈을 번들대며 광물을 쏟아내던 사람이 지켜주겠다고 말하는 모습에 나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신없는 소음에서 구해준 건 케니스였다.

“자, 다들 피곤할 테니까 오늘은 일찍 쉬죠. 루카도 어서 불가로 가까이 오고.”

…잠깐, 구해주는 게 아닌 거 같은데?
나는 눈을 좌우로 굴리며 어른들의 표정을 관찰했다. 케니스의 그린 듯한 미소, 키아라의 생각 없는 얼굴, 오데트의 감사로 가득 찬 눈동자,
주세페의 떨리는 볼. 주세페가 내 시선을 눈치챈 듯 있는 힘껏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어 보였다.

“얼렁뚱땅 벌써 일행인 것처럼 취급하지 마시죠?”
“에헤이, 들켜버렸네.”

주세페가 손에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딱 소리 나게 꺾었다. 케니스는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언제부터 모의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어른들은 모두 한통속이었다. 아니, 키아라는 빼야겠다. 속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던 건 맞으니까.

“루카, 네 의견을 무시하려는 건 아니었어. 다만, 아까의 일도 그렇고, 이 여정은 너무 위험하지. 그래서 솔직하게 말하자면
우린 네 도움이 받고 싶어.”

케니스가 겸연쩍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은근슬쩍 일을 처리하자는 얄팍한 생각이 이 사람 머릿속에서 나온 게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저도 고민해보려 했다고요.”
“정말이니, 루카? 긍정적으로 생각해주는 거야?”

오데트가 신이 나서 끼어들었다. 긍정적이라는 말을 붙인 적은 없는데, 오데트가 너무 좋아하니까 차마 아니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키아라는 말할 것도 없었다. 오데트는 키아라와 손을 맞잡고 됐어, 됐어, 하며 팔짝 뛰었다. 케니스의 얼굴도 한층 밝아졌다.

“저 같은 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이렇게 좋아하나요, 다들…”

앞서 두 번의 제안을 냉정하게 거절했는데도, 약간의 여지에 환호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괜히 미안하기도 했고,
부담스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했다. 이글 님의 뒤를 따르는 일은 바빴고, 외로웠다. 이글 님은 분명
내가 자신의 뒤를 따르는 것을 아실 텐데도,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나아가기만 했다. 그게 힘을 가진 자의 의지겠지.
나는 강해지기 위해 목숨을 걸었지만, 이 힘을 온전히 통제하지 못하는 한 여전히 강하다고 할 수 없다. 이런 내가 그 분의 뒤를
쫓기 벅차다는 것을, 어느 시점부터는 깨닫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의 초대는 분명 가주님이 주시는 또 다른 기회였다.
케니스는 마음이 편치 않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직 어린 너에게 이런 무거운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지만, 우린 정말 네 도움이 필요해. 우린 어떤 물건을 제자리에 갖다 놓기 위해
여행을 하고 있어. 문제는 우리가 가야 하는 곳이 아무래도 적진 한 가운데인 것 같고,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위험해질 거라는 사실이야.”
“그래, 임마. 너 같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처지를 이해하겠냐?”

주세페가 성큼성큼 다가와 내 머리를 마구 휘저었다. 아까부터 속이 울렁거리고 있었는데, 머리까지 흔들리니 어지러움과 함께
익숙한 통증이 밀려왔다. 피가 역류할 때마다 느껴지는 역한 냄새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나는 크흡, 하고 약간의 피를 뱉었다.
주세페의 동작이 딱 멈추고, 순간 주변이 정적에 휩싸였다. 그러더니 오데트가 태풍 때 부는 바람처럼 달려들어 내 머리에서
주세페의 손을 떼어냈다. 거의 후려치는 수준이었다.

“이 인간이 지금 제정신이야? 루카는 날 지켜줬는데, 이 경우 없는 인간이…!”

오데트의 잔소리가 휘몰아쳤다. 키아라도 허리에 두 손을 얹고 이번에는 주세페가 나빴다며 오데트를 거들었다.
케니스가 황급히 내 어깨를 두 손으로 붙잡고는 물었다.

“루카, 아무래도 우리가 너에 대해서 좀 더 알아야 할 것 같구나. 말해줄 수 있겠니?”

모든 일에는 연습이 필요하다, 무언가를 받는 일조차

안타리우스의 홀든 가 습격 사건, 그 뒤에 찾아온 불청객, 붉은 머리의 바바야가가 노아를 어떻게 농락하고 죽였는지,
기사회생으로 되살아난 내가 복수를 위해 길을 떠났다는 이야기까지. 노아 이야기를 할 때는 눈가가 시큰해서 울지 않기 위해
머릿속으로 화학식을 외워야 했지만, 그걸 제외하고는 그럭저럭 담담하게 이야기를 끝낼 수 있었다. 어쩐지 미카엘라에 대해서는
말하면 안 될 거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냥 나도 모르게 강력한 독 능력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식으로 대충 넘어갔다.
그 대목에서 케니스는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다행히 자세한 내용을 캐묻지는 않았다.

“그럼 넌 지금 중독된 거구나.”

케니스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나는 이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정작 입에서 나온 건 왜인지 변명 같은 답변이었다.

“잘 억제하는 중이에요.”
“아까처럼 피를 토하는 일이 잦니?”
“… 가끔? 아, 아뇨, 그런 일은 거의 없어요.”

변명을 하는 걸 들킨 걸까. 케니스가 엄한 표정을 짓자 홀든 가에 있던 시절 교관님께 혼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잘못한 게 없는데 왜 혼나고 있지? 나는 발끈한 마음이 들어서 뭐라도 더 대꾸하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눈 앞에 있는 것은
케니스가 아니라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오데트였다.

“루카, 이젠 루카가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루카를 혼자 둘 수 없어요. 어쩜, 이글이란 작자는 어떻게 당신을 돌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거죠? 루카, 이제 우리와 함께 가요. 위험한 길이라 권하는 게 미안했지만, 망설였지만… 그, 그래요!
나도 이제 능력자잖아요. 내가 열심히 연습해서, 내가 루카를 지켜줄게요.”
“아니, 아까 충분히 잘 지켜 주셨다고 말했잖아요…”
“그래, 루카. 백지장도 마주 들면 무거워지는 법이야. 내가 도와줄게.”
“키아라…무거워… 아니, 됐어요. 마음은 훌륭합니다.”

나는 오데트와 키아라를 피해 뒷걸음질쳤다. 혹시나 싶어 도와줄 사람을 찾아봤지만, 케니스는 눈을 내리깔고 턱에 손을 괸 채
깊은 고민에 빠진 것 같았고, 주세페는 그냥 멀뚱히 서서 자기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옮는 것도 아닌데 날 만진 걸
신경 쓰나 싶었지만, 당황한 눈동자로 가끔 나를 흘깃거리는 것이 괜히 자기 때문에 내가 피를 토한 것 같아 그러는 모양이었다.
표정이 아주 오묘했다.
아, 역시 이자들과 함께 하려는 여지를 주지 말았어야 했나.
케니스가 깊은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루카, 이리 와서 앉으렴.”
“됐어요. 이제와서 저 같은 녀석의 도움이라도 받으시게요?”

나도 모르게 빈정거리는 듯한 말이 튀어나왔다. 아까부터 내 말이 내 생각대로 나가지 않는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우린 네 도움이 필요해.”

케니스는 불가를 정리해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처음 보는 자신만만한 미소는 왠지 다정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너도 우리 도움이 필요할 것 같고.”
“전 혼자서도 잘 했는데요?”
“그래, 넌 잘 해왔어. 정말 잘했어.”

그 한마디 말이 뭐라고 마음이 일렁였다.

“하지만 앞으로는 중독 증세가 점점 더 심해지겠지. 혼자서는 감당하지 못할 때가 올 거야. 가뜩이나 힘든 길을 걷는 너에게,
그 길이 겹친다는 이유로 도움을 청하는 게 맞나 고민했어. 그런데 아무리 고민해봐도… 역시 함께 있는 게 좋을 거 같아.”
“일방적으로 제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될 거 같아서 부담이 덜 된다는 말인가요?”
“미안하지만 난 네가 어린아이라는 걸 알면서도 손을 빌리려고 할 정도로 처지가 급해, 부담은 느끼지 않아.”

아쉬운 소리를 하면서도 케니스는 미소지었다.

“널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서 다행이야.”

이상하게 케니스가 말할 땐 울컥하는 기분이 덜 들었다. 한참 어른인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나랑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을 텐데.
아니, 그래서인가? 케니스의 말은 설교나 입바른 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다.

“루카, 넌 정말 잘 해왔어. 잘 버티고 있고. 또…”
“잘은 모르겠지만… 루카가 대단하다는 거 맞지? 죽을 뻔했지만 살아났고, 지금도 죽을 거 같지만 살아 있으니까.”
“맞아, 키아라. 늘 그렇듯 네가 정답이야.”

케니스는 정말 기분 좋게 웃었다. 키아라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했다. 케니스가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떨어져 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얼마 전, 언제나 함께 있던 사람들이 모두 쓰러지고,
전 가주님이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하나뿐인 혈육이 죽었다. 죽음에 더 가까웠던 나는 기적적으로 회생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붉은 머리의 여자를 향한 복수심을 불태우며 여기까지 왔다.
날 죽이고 있는 독을 가슴에 품은 채, 이글 님의 뒤를 따르며 바쁘게 달렸다. 알 수 없는 도움을 받아 비약적으로 강해졌지만,
그 대가로 나는 반드시 죽는다. 케니스가 어깨를 두드릴 때마다 느껴지는 가벼운 진동이 꽁꽁 싸매왔던 무언가를 사르르 풀어내렸다.
나는 혼자 남았고, 위로 받지 못했다. 그런데 이들이,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도, 그러면서도, 내 보호자라도 되는 듯 굴고 있다.
나는 코끝이 찡해져서 괜스레 손을 휘저었다. 화제를 돌려야겠다.

“아, 됐어요. 이제 막 발현한 오데트나 신경 쓰라고요.”

케니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능력자 출현

‘일시적인 고양감’이라는 진단에 걸맞게, 오데트의 들뜬 기분은 며칠 가지 않았다. 다만, 기억은 그대로인지 때때로 창피해하거나,
날 볼 때마다 입술을 앙다물거나 혼자 고개를 끄덕이는 등 뭔가 다짐을 하는 듯했다. 일단 오데트는 때때로 시끄럽고 성가시지만,
어쩌면 순진할 정도로 착하면서도 책임감이 강한 사람인가보다. 음, 키아라는 항상 시끄럽고 성가시지만, 사람은 착한 거 같고.
주세페는 생각만큼 능글맞기만 한 건 아닌 거 같고. 케니스는…며칠 사이에 수없이 주세페에게 이런저런 지적을 받는 모습을 보니
세간에 묘사된 것처럼 초인 그 자체는 아닌 것이 확실하다.

케니스의 일행은 여러 곳에서 정보 지원을 받고 있었다. 지하연합과 헬리오스 같은 거대 조직에서 전해지는 정보도 있었지만,
즉각적이고 쓸모 있는 정보는 야구공만 한 작은 기계, 제피를 통해 얻었다. 어제도 그 작은 기계를 만지던 케니스가 근처 마을에서
안타리우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케니스 일행과 나는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그곳에 들르기로 했다.
케니스와 주세페는 주의 깊게 숙소를 선정했고, 덕분에 우리는 어른 넷에 청소년 하나라는 눈에 띄는 구성 치고는 꽤 조용히
숙소에 입성할 수 있었다.

제피는 이 마을을 소개하는 것 말고도 다른 정보를 전해주었다. 오데트처럼 인식의 문의 그림자의 영향을 받아 능력자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아이일 때와 성인일 때에는 행동 반경도, 파급력도 다르지. 아이일 때 발현하면 대부분 가족이나 친구들 정도가 알아차리고,
사고를 쳐봐야 자기 집이나 놀이터 정도겠지만… 성인은 달라.”
“어떻게 다른데?”
“어린아이들은 상대적으로 유연하지만, 성인이 되어 자아가 형성된 다음에 새로운 자아를 강제로 받아들이는 건 여태까지의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야. 거기서 오는 반발심과 절망감을 상상하면, 오데트는 정말 잘 버티고 있는 거야.”

케니스는 그동안은 성인이 된 다음 능력이 발현한 사례가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있어도 ‘간절한 기도’를 통해 얻었다는
증명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대부분이었고, 그들은 간절히 원하던 능력을 얻은 만큼 크게 문제를 일으키는 일도 드물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이 달라졌다. 인식의 문의 그림자가 사람의 형질마저 변화시켜, 비능력자였던 사람을 원했든 원치 않았든 능력자로
발현시킨다는 것은 이제 거의 기정사실화되었다. 흉흉한 소문이 들끓었다. 심지어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 인간 시절의 형체를
추정할 수 없는 괴물로 변해버렸다는 무시무시한 낭설도 돌고 있었으니까.
그런 소문의 영향인지 주세페가 마을을 돌며 모아온 최근 신문에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가득했다.

『나는 괴물이 아니에요! 능력자가 된 일반인들의 호소』
『사회적 딜레마로 부상한 능력자 인권 문제』
『어쩌면 다음은 나? 능력 발현 패닉』

“음, 여기 소방관 아저씨, 너무 불쌍하다.”

키아라가 읽고 있는 기사는 시카고에서 한 소방관이 화재 진압 도중 갑자기 불의 마녀로 발현한 사건이었다. 공포에 질린 그는
자신의 불을 제어하지 못했고, 결국 능력자 진압반이 출동해 그를 기절시켜야 했다. 이 화재에서 소방관 네 명이 희생되었다.
원래의 화재 때문인지, 갑자기 발현한 소방관 때문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평생 불을 진화하던 소방관이 불의 마녀가 되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이 밖에도 사건 사고가 많았다. 암스테르담의 한 은행에서 은행원과 대출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던
한 60대 여성이 갑자기 고주파를 내뿜게 되었다. 그녀가 소리치자 은행 안의 모든 전등이 깨지고 외벽의 유리벽까지 무너져 내려
부상자가 다수 발생했다. 얼마 전 새롭게 출범했다고 하는 도쿄 시부야구에서는 한 회사원이 실연의 충격으로 눈물을 흘리다
“젠장, 비나 쏟아져라!”라고 외침과 동시에 물 능력을 발현시켰다. 비는 여자가 탈진할 때까지 내렸고, 일본의 능력자 전담부에서
쓰러진 여자를 인계해 갔다. 한편, 카이로에서는 유적 발굴 현장에서 붓질을 하던 고고학자가 입김을 불다 모래를 조종하는 능력을 얻었다.
본인의 능력에 도취된 그는 발굴 현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현재까지 행방이 묘연하다고 한다.

신문 속 사람들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겁에 질렸고, 누군가는 도취되었고, 누군가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기도 전에 끌려갔다.
자연스럽게 눈 앞의 사람을 볼 수밖에 없다. 오데트는 그들 중 누구와도 같지 않았지만 동시에 모두와 닮았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 사람. 오데트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계속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오데트는 고뇌했다.

“역사적으로, 힘은 언제나 더 큰 비극을 낳기 위한 명분이었죠. 이 혼란은 대체 어떤 끔찍한 일의 명분이 될까요?”

오데트가 양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웅얼거렸다. 며칠 동안의 활발함은 물에 씻은 듯 사라지고,
오데트는 다시 예전처럼 시니컬한 역사학자가 되었다. 아니, 그건 아니다. 나는 오데트를 보며 생각했다.
오데트는 이제 시니컬하고, 광물을 다루는 능력을 가진 역사학자로 새로 태어났다.

오데트에게는 다행히도, 일행 중에 대지 능력자를 동생으로 둔 케니스가 있었다. 케니스는 광물을 어떤 형태로 구성하고 이용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으며, 전투에서 오데트가 광물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다양한 예시와 함께 체계적인 교육을 진행했다.
키아라가 주먹을 쥐면 손등에 거대한 광물이 뾰족뾰족 솟아오르게 만들어서 적을 때려부수자는 의견을 냈지만,
케니스는 그건 안된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키아라치고는 나쁘지 않은 의견 같았는데, 케니스는 광물을 이용해 신체를 변형시키는 것보다는
광물을 신체 외부에서 생성해 이용하는 방향으로 지도하려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모양이지만,
어디까지나 내 추측일 뿐이다.

오데트는 비능력자이던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되게 튼튼해진 체력을 바탕으로 케니스의 혹독한 훈련을 꾸준히 받았다. 또, 두꺼운 광물전서를
손에서 놓지 않으며, 광물의 구조와 특성을 외우는 데도 노력을 기울였다. 오데트가 능력을 쓰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외면하지 않을 뿐이었다. 손 끝에서 광물이 돋아날 때 아주 잠깐 얼굴이 굳기도 했지만, 곧 이를 악물고 모양을 다듬었다.
그건 새 힘에 들뜬 사람이라기보다는, 갑자기 떠안게 된 짐을 어떻게든 자기 방식으로 짊어지려는 사람에 더 가까웠다.
그 결과 마을에 들어서는 지금, 오데트는 비록 발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전투에서 어엿하게 한 사람 몫은 충분히 할만한 전력으로 거듭나 있었다.

물론 훈련과 별개로 오데트의 저조한 기분은 딱히 나아지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나 같은 인물이 제일 먼저…” 하고 말끝을 흐리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황급히 아무렇지 않은 척 굳은 미소를 지어 보이거나, 가만히 앉아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일이 많아졌다.
오데트는 예민하고 까다로운 사람이었지만 내게는 어떻게든 웃어 주려고 하는 어른 중 하나였다. 문득, 가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어떤 물건이 떠올랐다.

너의 의미

오랜만에 찾은 평화로운 마을이었지만, 지체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 케니스 일행과 나에게 느긋함은 사치였다.
그 말은, 내가 구상한 ‘작업’을 하는데 주어진 시간이 아주 짧다는 걸 의미했다. 나는 마을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최대한 활용했다.
그리고 마을을 떠나기로 한 날 아침 주세페가 이제 가자며 내 방문을 세 번이나 두드렸을 때에야 겨우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후다닥 짐을 챙기고 계단을 우당탕 내려오자 출발 준비를 마친 일행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느라 배가 고파졌다고 징징대는 키아라를 보니 내가 정말 이 일행에 합류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났다.

주세페가 마을에서 지하연합의 정보를 얻어왔다. 붉은 머리 여자, 바바야가의 소식도 있었다.

“너, 꽤 성가신 적을 상대하려고 하는구나.”

주세페의 말마따나 바바야가는 적나라한 활약상으로 동유럽의 아이들을 눈물짓게 하며, 여전히 목적을 알 수 없는 파괴를 일삼고 있었다.
그러나 케니스의 표정을 심각하게 만든 것은 다른 정보였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우리가 처음 만났던 숲 근처의 낡은 성이었다.

“상귀베인이라, 들어본 적이 없는데. 혹시 아나요, 오데트?”
“아주 오래된 가문이에요. ‘혈술사’라는 별칭이 있는데, 피를 다루는 능력을 대대로 이어왔다고 알고 있어요.”

오데트가 간략하게 설명했다. 주세페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엥, 그게 가능한가? 능력을 대대로 이어가는 게?”
“거대일식이 일어나기 전에는 능력자의 존재 자체가 전설로 여겨질 만큼 수가 적었죠. 대부분의 전설은 이상 기후 현상 등 우연히 일어난
일을 가지고 착각한 것이 아니냐는 학계의 의견이 우세해요. 물론 저를 비롯한 일부 역사학자들은 설화를 바탕으로 그들이 능력자일 것이고
제법 세력을 일군 경우도 있다고 추정을 하지만, 학계의 인정을 받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어요. 다시 돌아와서, 상귀베인이 정말 능력자인지,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뭔가를 성공했던 것으로 보여요. 잘 나갈 때는 거의 지방 영주 정도의 지위를
인정받았을 정도였으니까요.”

피를 다루는 능력자. 그건 아마도 오데트가 발현했을 때 우리를 습격했던 자일 것이다. 오데트의 추론이 맞다면, 우리는 옛날부터
알 수 없는 방법으로 능력을 전수하는 기기묘묘한 가문의 사람에게 단단히 찍힌 것이다. 왜 찍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근의 고난을 생각하면…이글 님이 우리가 그곳에 당도하기에 앞서 또 뭔가를 했을지도. 지금 우리는 잠시간의 후퇴를 마무리 짓고,
그들이 지금 머무르는 지역으로 보이는 코소보의 프로클레티에 산맥을 어떻게든 돌파해야 했다. 하지만 옛 영토를 수복하겠다며
가문의 부활을 선포한 능력자 가문이 우리를 강하게 적대시한다라… 이리보고 저리봐도 상황이 영 쉽지는 않아 보였다.

케니스는 제피로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을 공유하고 우회로를 알아보기로 했다. 잠깐의 시간이 주어지자,
나는 오데트에게 슬쩍 다가갔다.

“오데트.”

광물전서를 들여다보고 있던 오데트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나란 걸 확인하더니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주세페였다면 광물전서를 휘둘렀을 게 분명했다.

“줄 게 있어요.”
“응, 그게 뭘까?”

오데트는 얼마 전부터 자신도 모르게 말을 편하게 하고 있다. 마음을 열었다는 것이 느껴져서 그게 싫지는 않았다.
나는 조금 긴장한 채 주머니 안에서 손에 꼭 쥐고 있던 작은 장신구를 꺼냈다.

“저도 제가 능력자인 걸 얼마 전에야 알았거든요. 새로운 힘을 얻는다는 게,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고요.
그래도…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된 거니까… 오데트가 기념으로 뭔가 가진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건…”
“오데트가 처음 발현했을 때 광물 파편이 우연히 제 가방 안에 들어왔나 봐요. 제 솜씨는 보잘것없지만… 색이 아주 예뻐요.”

나는 괜히 쑥스러워서 오데트의 광물로 만든 장신구를 쓱 내밀었다. 오데트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오데트의 손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오데트의 능력은 아주 아름다워요. 아름다운 세상을 갖게 된 걸, 축하해야 하나… 물론 원치 않았다는 건 알지만요.”
“루카, 네가 직접 만든 거니?”
“네, 이것저것 만드는 걸 좋아하거든요. 진짜 별거 아니지만요.”
“아니야, 아니야, 루카…”

오데트는 아주 복잡한 표정으로 장신구를 꼭 쥐었다. 그 손안에서 작은 파편이 제 주인을 찾았다는 듯 희미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그 작은 빛이 급하게 만든 것치고는 꽤 뿌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줬다. 내가 만든 것은 보잘 것 없는 장신구였지만,
적어도 오데트가 그것을 거부하지 않아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오데트는 한참을 고개 숙인 채 말이 없었다.
그래도 장신구는 소중하게 쥐고 있었기에,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은 들지 않았다. 나는 가끔 고개를 끄덕거리는 오데트를
조금 더 지켜보다가, 얼른 인사하고 돌아섰다. 등 뒤에서 고마워, 라는 작은 속삭임이 들렸다. 왠지 젖은 듯한 목소리는 착각이 아닐 것이다.

돌아서서 몇 걸음 걸으니 그늘진 곳에 서 있던 주세페가 피식 하고 웃으며 내 머리로 손을 뻗다가, 황급히 자기 머리를 만졌다.
나도 피식 웃으며 그를 지나쳤다. 키아라가 빵 반쪽을 불쑥 내밀며 먹겠냐고 물었다. 평소 같으면 혼자 먹을 사람이 왠일이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앞을 보니 케니스가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가 전부 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조금 머쓱해졌다.
이들은 언제나 이렇게 서로를 지켜봐 주는 걸까, 그럼 이제 나도 일행이 되었으니 이렇게 계속 지켜봐 줄까?
오늘은 왠지 기침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렇게 됐으니 내일 아침에는 내가 먼저 인사해볼까? 노아도 좋아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