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진행 중인 이벤트
캐릭터선택

CYP. 식물 능력자갈증의플로리안

연관 캐릭터

원딜 탄야 원딜 미아

기본정보
능력 및 활용 스킬
스토리
이클립스 ESPER 보고서 관련문서
미디어
콘텐츠 보이스

Eclipse Vol.46 영원한 천국 정보제공자, 플로리안 훅스 (식물능력자)

쉴 새 없이 파도를 밀어 올리는 바다도, 억수같이 쏟아지는 폭우도 나를 채울 수 없어. 내 심장엔 커다란 구멍이 있으니.
나는 이유 모를 상처에 꿰뚫려 옴짝달싹 못 하고 울기만 했지. 내가 무슨 잘못을 했지? 내게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거야?
새벽이슬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시작된 질문은 늦은 밤 포식자의 발톱에 갇혀 내지르는 단말마가 끝날 때까지 이어져.
몇 번을 몇십, 몇백 번을. 이유를 찾으려 할 때마다 진실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돌아왔지.

그래, 난 이미 알고 있었어, 보드라운 솜털을 뒤집어쓰고 작은 새처럼 지저귀며 영혼에 어둠을 속삭이는 악마가 있다는 걸.
그것들이 내 것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것도. 알면서도 난 절망 속에 처박혀 빼앗기기만 했지. 모르고 싶었던 것뿐이야.
하지만 이젠 달라.

“넌 아무것도 아니야.”

차가운 유리 벽 너머에서 손과 발이 묶인 채 서서히 사그라드는 악마의 숨결이 느껴져.
감당하지 못할 힘을 움켜쥐고 그분의 관심을 끌려 했으니 이게 바로 자업자득이지. 가져선 안 될 걸 가지고, 탐낸 대가.

꼴 좋다. 넌 이제 아무것도 못 해.
모든 걸 바로잡았으니, 다신 네가 모든 걸 망치게 두지 않을 거야. 다신 그런 일을 겪지 않을 거야.
언제였던가, 이제는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작은 악마가 그랬던 것처럼 네가 내 모든 걸 빼앗아가게 두지 않을 거야.
이번만은 내 것을 꼭 지킬 거야. 절대 빼앗기지 않아.

꽃에서 태어난 천사

내 기억의 첫 번째 순간은 햇빛 가득한 방에서 들리는 어머니의 웃음 소리야. 따스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커튼을 흔들면 어머니는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낮게 웃었지. 햇살보다 부드러운 손길이 내 이마에 닿고 머리카락을 흩트리다 내 얼굴을 한껏 감싸면
곧 입맞춤이 이어졌지. 끊임없이 내 뺨에 닿는 온기에 난 가슴이 단단해지는 걸 느끼며 깔깔 웃었어. 손 닿는 모든 것이 매끄러웠고
눈길이 가는 모든 곳이 반짝거렸지. 부모님만이 아니라 수많은 고용인이 모두 날 사랑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이라 추켜세웠어.
유모는 내가 부유하고 아름다운 부모님을 가진 가장 행복한 도련님이라며 날 기다리는 빛나는 미래를 속삭였지.

갖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면 부모님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걸 내 손에 쥐여주었어.
나는 이 작은 성의 왕이었지. 내가 조금이라도 싫어하는 사람들은 즉시 내 앞에서 치워졌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졌어.
날 둘러싼 모든 것들이 날 위한 것들이었지. 모든 게 내 것이었어, 내 것.

“우리 천사, 꽃에서 태어난 우리 플로리안. 사랑해, 우리 아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쥐여주며 어머니는 내 뺨에 입을 맞춰주고, 아버지는 사랑하는 날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다고 했지.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들마다 갖고 싶다고 졸랐어.
대부분 가져도 쓸모없는 것들이었지만, 손에 쥐는 그 순간에 부모님의 사랑을 가득 느낄 수 있었으니까.
부족한 게 없던 내 행복한 시간.

그러나 어린 나는 몰랐던 거야. 지극한 행복은 악마의 시샘을 산다는 걸.

신께 바라노니

내 방 창문 밖에 펼쳐진 햇살 가득한 언덕에 갑작스레 먹구름이 드리워 사위가 어두워졌던 그 순간처럼,
10살 된 내 인생에 악의 가득한 먹구름이 낀 거야.

“플로리안, 네가 곧 형이 되겠구나! 아직은 잘 모르겠지? 어머니의 뱃속에 우리 천사의 동생이 찾아왔단다.”
“얼마나 작고 예쁠까, 꼭 네 어린 시절 같겠지? 이제 이 애도 많이 컸으니 말이에요.”

부모님은 기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어. 내 머릿속은 끊임없이 떠오르는 질문으로 엉망이었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커버려서 나를 닮은 아이를 데려온다는 건가요? 나는 이제 작고 예쁘지 않나요?
무엇을 물어도 답은 긍정일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웃기만 하는 나를 두고 부모님은 행복한 얼굴로 대화를 나눴지.
내가 이해하지 못할 대화가 오가는 동안 원한 적 없는 동생이란 존재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를 갉아먹는 게 느껴졌어.
나를 발끝부터 야금야금 먹어 치우려는 이 악마를 막아 달라고 기도했지만, 신은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지.
결국 동생이란 이름의 악마는 태어나 내 것을 탐하기 시작했어. 내가 쓰던 요람, 유모의 시선, 부모님의 품까지, 모두.

동생은 만족을 모르고 내 것을 더 빼앗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더라. 시도 때도 없이 울었어.
어머니는 온종일 그것을 끌어안고 있어야 했고,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는 나보다 그것을 먼저 찾았지.
유모도 내 곁에 있어 주지 않았어. 도련님은 이제 다 컸으니 의젓하게 혼자 있을 수 있죠? 내게 돌아오는 건 이 말뿐이었어.
고용인들도 앵무새처럼 유모와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지. 옷을 입혀주던 여자도, 밥을 먹여주던 남자도.
나는 부모님에게 매달렸어. 하지만 내가 울며 호소해도 동생에게 정신을 빼앗긴 부모님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

“그만하렴, 플로리안. 언제까지 애처럼 굴 순 없다.”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품엔 나와 꼭 닮은 황금색 머리카락과 보석 같은 눈동자를 가진 동생이 안겨 있었어.
어머니는 다기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줬지만, 그 손도 이내 그것에게로 가버렸지. 어머니마저도 날 버린 거야.
아무도 내 편을 들어주지 않고 아무도 나를 돌아보지 않는 순간이 와버렸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지.

나만을 쓰다듬어주던 손길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어. 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속삭이던 목소리도 빼앗겼지.
악마는 모든 게 완벽했던 세상을 부숴버리고 내 것은 하나도 남지 않은 세상을 새로 빚어 모든 걸 빼앗아갔어.
아무리 노력해도 녀석은 쉬이 내 것을 돌려주지 않았지.
불합리해. 이건 옳지 않아. 이래서는 안 돼. 되돌릴 수 없다면 멈춰줘, 더 나빠지지 않게.
빌고 또 빌었어. 악마가 오지 않게 해달라는 소원은 들어주지 않던 신이 그 소원은 들어주었지.
내 시간은 행복한 순간에 멈춰 흐르지 않게 되었어.

한 송이 관심과 사랑을

11살 무렵부터 키가 전혀 자라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부모님은 잠시 내게로 관심을 돌렸어. 동생이 태어난 뒤
내게 신경을 써주지 못했기 때문에 성장이 더딘 것 같다는 의사의 진단 때문이었지. 부모님은 눈물을 흘리며 날 안아주고
날 향한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거라고 맹세했지.
난 어리석게 부모님의 눈물을 믿었어. 한여름 창틀에 놓인 얼음처럼 금세 말라버릴 거라는 것도 모르고.

내가 다시 부모님을, 사랑을 조금이나마 돌려받으려 한 걸 눈치챈 동생이 아픈 척을 하기 시작했어.
밤이고 낮이고 끙끙대는 바람에 난 다시 혼자 있게 되었지. 부모님이 미안하다며 고용인을 잔뜩 붙여 주긴 했지만,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그들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주제에 오히려 성가시게 구는 탓에
그들을 피해 정원으로 도망쳐야 했지. 뭐, 그러다가 내 능력을 깨닫게 되었어.

가정교사가 왔다며 나를 찾아 헤매는 고용인을 피해 정원의 화단 속에 웅크린 채 들키고 싶지 않다고 진심으로 빌었어.
매번 내게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가정교사를 보고 싶지 않았거든. 뭐든 나를 숨겨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
나팔꽃 덩굴이 스르륵 다가왔어. 그리고 누구도 나를 찾을 수 없도록 무성한 잎과 질긴 줄기로 나를 감쌌지. 사람들은 나를 찾지 못하고
몇 번이나 내 곁을 스쳐 지나갔어. 모두 나팔꽃 덩굴 덕분이었어.

그 뒤로 식물은 최선을 다해 나를 돕기 시작했어. 기만과 탐욕으로 똘똘 뭉친 흉물이 뒤뚱거리며 날 쫓으면 정원의 잔디가 길게 자라나
그 작은 발을 휘감아 넘어뜨리고, 엉겅퀴 잎은 얼굴을 할퀴어 댔지. 하지만 이 가증스러운 것이 그럴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달려가
원래 내 것이었던 부모님의 품으로 뛰어들었어.

“플로리안, 네 동생을 보렴. 우는 얼굴이 네 어릴 때와 똑같단다.”

어머니의 말에, 그 미소에 나는 사랑스러운 미소로 답했어. 그리고 두 손으로 악마의 동그란 뺨을 감싸 쥐었지. 그때 생각했을 거야.
나를 닮은 이 얼굴이 있는 한, 내 자리는 점점 더 위협받을 거라고, 결국 완전히 빼앗길 거라고.
그 강렬한 통찰 덕분일까? 나를 흉내 낸 뺨이 어느 날 울긋불긋하게 변하기 시작했어. 악마가 본색을 드러낸 것일지도 모르지.
그래서 어머니가 울먹이며 그것을 끌어안아도 괜찮았어. 조금만 지나면 어머니도 깨닫고 악마를 멀리하게 될 거라고 믿었거든.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부모님은 전보다 더 그것에게 얽매여서는 한시도 그 곁을 떠나지 않으려 했어.
내가 아닌 그 악마를 품에 안고 미안하다며 매일 울고 애원했지. 나를 고용인들에게 맡겨둔 채로. 부모님을 위해 애쓰는 건 나인데,
쓸모없는 것들이 쇠약해질수록 사랑스러워지고 있는 건 나인데!
어째서 악마를 더 사랑하는 거야!

무너져가는 세상

다른 날은 희미해도 내 열여섯 번째 생일은 기억이 나. 집에서 열린 내 생일 파티는 풍성하고 화려했지만,
모두가 날 흘끔거리느라 어색하고 경직된 분위기만 가득했지. 그래도 난 괜찮았어. 부모님이 내 곁에 있었거든.
날 보는 눈에 슬픔이 일렁였지만, 그 안에 비춘 건 나뿐이었으니까.
악마가 그 얼룩덜룩한 얼굴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형, 생일 축하해. 그래서 무, 무리라고 했지만, 용기를 냈어.”

갑작스럽게 나타난 동생은 내가 받아야 할 주목을 손쉽게 가로챘어. 잔뜩 상기된 얼굴을 보아 이 순간을 기다린 게 분명했지.
가증스러운 악마 녀석! 나를 힐끔거리던 사람들이 동생을 둘러싸고 오랜만의 외출을 축하하기 시작했어.
긴 치료를 견뎌 낸 것을 칭찬하고 예전 얼굴을 되찾은 것 같다며 다정한 말을 주고받았지.
부모님은 동생을 안아 올리며 우리 자랑스러운 천사라고 어르고 뺨에 사랑이 가득한 입맞춤을 남겼지. 수도 없이.
이 애가 형을 워낙 좋아해서, 어떻게든 형의 생일을 축하해 주고 싶어서 열심히 치료를 받았다는 말도 했어.
다들 그 기특하고 갸륵한 마음씨를 보듬을 때, 동생이 날 바라보며 웃었어. 내 생일에 날 보는 건 그 악마뿐이었지.

환하게 웃는 부모님을 위해 견디려고 해봤지만, 도저히 견딜 수 없었어. 악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만 따라다니며 괴롭혔고,
그럴수록 사람들은 나만 보면 그 악마를 찾았지. 동생이 참 귀엽네, 사람들 입에선 그 소리만 나왔어. 나는 온데간데없이 잊혔지.
난 더 귀엽고 사랑스러워져야 했어. 그럼 잃어버리지 않겠지, 놓쳐 버리지 않겠지. 부모님이 다시 나만 안아주겠지.
생각이 강해질수록 내 뺨은 홍조로 가득하고 빛나는 눈동자에 충만한 생명력이 흘러넘쳤어.
주변 사람들 몇몇이 갑자기 아프다던가 쇠약해졌지만, 그건 내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지.

하지만 부모님에겐 그게 문제였나 봐. 마을 사람들이 공포에 떨고 있다며 날 외면한 채 집 밖으로만 나돌았지.
식생에 맞지 않는 식충 식물이 갑자기 나타난 이유를 찾기 위해 학자들을 초빙하고, 사람들을 달래기에 급급했어.
멀쩡한 나무를 뽑고 잔디를 갈아엎는 걸로도 모자라서 마을의 초목을 아예 없애려는 저 어리석은 사람들을 말이야.
그 행태를 보다가 난 갑자기 깨달았어.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온 마을의 식물을 뽑아 없애려는 거라면,
나도 모든 일의 근원을 없애면 되는 거 아닐까?

고개를 돌리니 늘 그렇듯 내 옷을 꼭 쥐고 있는 동생이 보였지. 나는 그 애를 바라봤어. 그리고 웃었지.
내 충직한 덩굴이 녀석의 머리 위에서 아름답게 춤추다가 날 마주 보며 웃는 동생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어. 얼룩덜룩한 얼굴이 금세 구겨졌지.
아아, 처음부터 이렇게 하면 될걸. 괜한 수고를 했지 뭐야.

“안 돼!”

만족스럽게 웃고 있는 나를 밀치며 누군가가 동생을 끌어안았어. 어머니였지.
뒤늦게 달려온 아버지는 내 덩굴을 쥐어뜯었어. 갑작스러운 공격에 나가떨어진 난 바닥에 쓰러져 그 모습을 바라봤어.
악마의 이름을 부르며 악을 쓰는 부모의 얼굴을.

“어떻게 좀 해봐요, 우리 아이가 죽겠어요! 당장 떼어내요!”

울부짖는 어머니의 외침에 아버지가 칼로 내 덩굴을 찢었어. 내가 내지르는 비명에도 멈추지 않았지. 난 비명을 지르며 계속 덩굴을 불러냈어.
덩굴을 난도질하는 아버지를 붙잡고, 동생의 얼굴을 할퀴기를 반복했지. 하지만 소용없었어. 나는 아직 약했고, 악마는 강했지.
덩굴을 모두 찢어낸 아버지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를 바라봤어.

“네가, 너는……. 넌 우리 플로리안이 아니야!”

악귀같이 시뻘게진 아버지의 얼굴을 아직도 기억해.
죽지 않고 살아남은 동생을 끌어안은 채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날 보던 어머니의 얼굴도.

“괴물, 이 괴물, 우리 플로리안을 어떻게 했어!”

그들은 나를 원망했어. 악마는 내가 아닌데, 괴물은 저 녀석인데!
악마에게 완전히 영혼을 팔아버린, 이제는 내 사람이 아닌 그들을 두고 몸을 돌렸어. 나를 잡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지.
처음 나타났을 때 없애 버렸어야 했는데, 그때를 놓쳐서 이렇게 되고 말았어. 내 세상이 무너져 버린 거야.
후회가 밀려왔어.

돌아갈 마음은 없지만

열일곱 살에 그 집을 나왔고, 그 뒤로 내 삶은 문제없이 흘러갔어. 어디서든 문을 두드리며 눈물을 글썽이면 되었지.
고아원을 전전하는 나는 영원한 11살이었어. 아마도 내 행복이 끝났던 해라 기억에 남았나 봐. 항상 11살이라고 말했지.
마냥 쉽지만은 않았어. 고아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기력을 잃기 시작하자, 자라지 않는 나를 두렵게 바라봤거든.
입양도 몇 번 갔지만, 내게 어울리는 사랑을 주는 곳은 없었어. 다시 떠날 수밖에 없었지.
그렇게 나는 점점 더 멀리, 원래 살던 곳에서 먼 곳으로 가게 되었어.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을 만큼.
아쉽진 않았어. 오히려 날 알아볼 만한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어차피 돌아갈 생각 따윈 없었으니까.

그렇게 5년, 아니 6년인가? 누군가 깜짝 놀란 눈을 하고 내 옛 이름을 부르는 거야.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했어.
내 이름의 일부를 나누어 가진 그 악마를 생각할 때마다 몸이 떨릴 정도로 무서웠거든.
그땐 다 잊어버리고 싶었어. 내 과거를, 이름조차도. 날 부른 이들은 그런 내 두려움도 모르고 마구 떠들어대기 시작했지.

처음에는 걱정이 가득한 말들이라 듣기에 나쁘지 않았어. 내가 집을 떠나 힘들진 않았을지,
부모님이 걱정하실 거라는 희망 어린 말까지. 그게 실수였어. 그 달콤한 말을 들어선 안 됐는데.
그들은 내게 부모님의 근황을 알려주었어. 날 죽은 아이로 만들고 동생과 함께 지방으로 떠났다고 말이야.
난 이렇게 살아 있는데! 죽어야 하는 건 그 악마인데!
화가 치밀어 올랐어. 내 감정을 붙잡을 수 없었어. 그건 고스란히 내가 숨기고 있던 힘이 되어 그들에게 쏟아졌지.
고아원 벽에 달라붙은 담쟁이가 우수수 쏟아져 내려 내게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전한 이들의 입을 틀어막았어.
새어 나오는 비명까지 남김없이.

아인트호벤 고아원

내 힘을 본 고아원 원장이 나같이 특별한 아이가 있어야 할 곳은 다른 곳이라고 했어.
당장에 쫓아낼 줄 알았는데 원장은 날 오히려 칭찬하며 웃었지. 그렇게 난 아인트호벤 고아원으로 가게 되었어.
날 아인트호벤 고아원에서 온 이들에게 넘기던 날, 원장은 크게 기뻐했지. 날 꽤 비싼 값에 팔았던 모양이야.

어린애를, 그것도 능력을 가진 어린애를 돈으로 사는 고아원이라니.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내 생각과는 다르게 아인트호벤 고아원은 지내기 나쁘지 않았어. 거기다 능력을 키우고 제어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켜주었지.
그곳에서는 힘을 숨길 필요가 없었어. 나만의 특별함이 아니게 된 건 아쉽지만, 그들 모두 능력자는 특별하다고 말해줬어.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내 식충 식물들은 별로 도움이 될만한 일이 없어 보였지만.

난 아주 기초적인 능력 제어 훈련부터 시작했어. 선생들은 내가 계속 힘을 숨겨온 탓에 힘이 감정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지만,
능력을 완벽히 제어하게 되면 더 강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될 거라고 했어. 하지만 내 힘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지.
그래서 알 수 있었어. 그들은 항상 웃는 얼굴로 우리가 모두 특별한 아이라고 했지만, 능력이 작은 아이들은 점차 소외되고 있다는 걸.
하지만 자기 전 찾아와 하나하나 뺨에 입 맞춰 주며 좋은 꿈 꾸라고 속삭이고 이불을 덮어주는 게
옛날에, 언젠가 햇살이 내 이마를 간질였던 것이 떠오르게 해서 나는 그곳에 꽤 오래 머물렀어.

물론 언젠가 떠나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어. 모두가 다정하고 친절하지만,
담장에는 철조망이 둘러 있고 외부인의 출입이 철저히 제한되는 고아원이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
나는 언제나 그래왔듯 내가 빠져나갈 적당한 장소와 시간을 찾고 있었어. 그러다 흥미로운 걸 발견했지.
MI7, 영국의 첩보 기관의 사람들이 이곳에 있었어. 그들이 비밀리에 운영하는 고아원, 그게 이 고아원의 진실이었던 거야.
강력한 능력자를 미리 선별하여 육성하고, 다양한 능력을 연구하는 게 목적이었지.
때때로 훈련에 참여하지 않은 아이가 붕대를 감고 나타나거나, 밤새 악몽에 시달리는 듯한 비명이 들리는 건 그 이유였던 거야.

생각해보니 이 고아원에는 같은 능력을 가진 아이가 없었어. 종자를 고르듯 서로 다른 능력을 가진 아이들을 키웠지.
아, 딱 하나. 염동력자 남매가 있었지. 그 둘은 MI7에서 가장 주목하는 애들이었어. 남매 중 누나인 미쉘은 조금 바보 같다는 점만 빼면
나와 비슷한 점이 많았어. 그 애의 동생도 악마인데, 내가 아무리 말해줘도 도통 못 알아듣고 되레 화를 내곤 했거든.

그날 밤에도 베티의 비명이 들려왔어. 어디에도 없을 엄마 아빠는 왜 찾는담. 이미 자기를 내다 버렸는걸.
하여간 멍청한 애들이야. 그렇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지.

떠날 때

얼마 뒤 붕대를 감고 나타난 베티는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였어. 애들이 말을 걸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동공이 풀려 있었지.
그건 좀 이상한 일이었어. 아이들은 소중한 실험체인 만큼 이렇게까지 함부로 다루진 않았거든. 하지만 훈련을 빌미로 찾아오는 외부 강사,
그러니까 MI7 요원이 바뀐 뒤로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어. 뭔가 달라지기 시작한 게 분명했지.

나는 살기 위해 강사들을 주시했어. 그리고 그들 중에 어깨에 달린 훈장이 빛나는 남자가 모든 걸 지시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지.
항상 웃는 얼굴에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지만, 안경 너머 눈동자는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던 남자. 나는 남자의 목소리가
찬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라는 걸 알게 됐어. 그의 심장은 얼어붙어 있다는 것도.

사라졌다 돌아오는 아이들의 상태는 점점 심각해지고, 급기야 돌아오지 못하는 아이들이 생기기 시작했어.
난 더 머뭇거려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 그들은 방문해서 훈련을 진행하며 다음 훈련 대상의 명단을 작성하는데 그 남자가 내게 이름을 물었거든.

“밥, 밥이에요.”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눈을 빛내며 난 남자에게 이전 고아원에서 지어준 이름을 댔어. 이런 얼굴로 이런 표정을 지으면
누구나 방심하기 마련이니까. 남자는 수첩에 이름을 적다가 내 얼굴을 보더니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 이름을 되뇌었어.
그렇게 남자는 몇 명의 아이들 이름을 적어 갔어. 나랑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애들은 이제 몇 없었는데, 모두 그 애들이었지.
이제 때가 된 거야. 그날 밤이 기회였어.

하얗게 타버린 것들

다음 훈련 대상으로 관리받기 전에 달아날 생각이었어. 저녁 훈련이 끝나면 고아원은 고요하면서도 분주하게 움직여.
그만큼 빈틈이 많아져서 내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어려울 것 같았거든.
하지만 그날은 달랐어. 훈련이 끝나면 엉망이 된 아이들을 조용히 옮기고 최선을 다해 치료해 주던 선생들이 그날따라 보이지 않았지.
애들은 울며 선생들을 찾았어. 마치 그들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것처럼 굴었지. 난 저렇게 되지 않을 거야. 멍청한 짓거리를 하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나는 고아원 뒷문으로 향했어. 우유 배달이 오는 시간이니까 부엌 쪽문이 열려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
주변이 이상하게 조용했지만, 나는 밖으로 나가는데 정신이 팔려 그 긴장감을 무시하고 복도에 발을 내디뎠어. 그때였지.
복도 끝에서 갑자기 밝은 빛이 터지듯 빛나고 곧이어 열기가 밀려왔어. 거센 불꽃이 달려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아.
누군가의 비명이 들린 것도 같았어.

고아원 건물은 걷잡을 수없이 무너지기 시작했어. 겁에 질린 아이들이 저마다 능력을 쓰며 고아원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가버린 줄 알았던 MI7 요원들이 다급한 얼굴로 밀어닥쳤어. 난 무너진 건물 잔해 사이에서 그들이 한 짓을 모두 지켜봐야 했지.
내가 만든 작은 늪이 점점 메말라가고 불길이 점점 커졌지만, 그들 앞에 나설 수는 없었어.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도와달라고 간절하게 빌었어. 살려달라고, 이 불길과 그보다 더 무서운 요원들을 치워달라고.
그때 요원 하나가 불이 붙은 가구에 맞아 나가떨어졌어. 그들은 웅성거리며 가구가 날아온 곳을 살폈지. 그곳엔 모나헌 남매가 있었어.
복도에 막 발을 들인 것 같았지. 다른 아이들에겐 냉혹했던 요원들이 남매에겐 손을 내밀었어, 위험하니 어서 이곳을 나가자고 말했지.
하얗게 타버린 두 쌍의 눈동자가 그들을 바라봤어. 하나는 망설였지만 하나는 단호했지.

“손대지 마.”

어린아이의 어눌한 발음이었지만, 요원들이 멈칫거렸어. 두려워하는 게 분명했지. 저 어린아이 하나를 말이야.
그런데도 그들은 손을 거두지 않았어. 더 가까이 다가갔지. 다가오는 이들을 향한 피터의 눈이 조금 남아 있던 색을 모두 잃고 새하얗게 타들어 갔어.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던 불붙은 물건들이 허공으로 치솟았지.

“안 돼, 피터!”

미쉘이 말리려 했지만, 그것들은 주저 없이 요원들에게 쏟아지듯 날아갔어. 불길이 더욱더 강하게 치솟고, 주변은 엉망이 되었지.
내가 숨어 있던 잔재도 그에 휩쓸려 모두 흩어졌지만, 내 능력으론 늪과 덩굴에 의지해 당장 불길을 피하는 게 고작이었어.

“미, 미쉘, 미쉘! 도와줘, 나도 데리고……!”

매캐한 연기가 날 가로막았어. 콜록거리면서 난 필사적으로 미쉘을 불렀어. 그 애만이 날 구해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미쉘은 요원들이 쓰러진 것에 당황했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도 듣지 못했어. 아니 모르지, 모르는 척했을지.
날 무시한 채 미쉘은 피터를 안아 들더니 그대로 등을 돌렸어. 날 두고 가려는 게 분명했지. 미쉘! 온 힘을 다해 소리쳤지만, 고개를 돌린 건 피터였어.
동공이 타 버린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지. 착각이 아니었어. 하얗게 타들어 간 눈동자는 분명히 날 보고 있었어.
날 바라보며 그 작은 손으로 미쉘의 귀를 꼭 막았지.
미쉘은 피터를 꼭 안은 채 심호흡하며 달아나기 시작했어. 염동력으로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전부 치워버리면서.

어리석은 미쉘, 바보 같은 미쉘. 내가 말했잖아, 네 동생은 악마라고. 너를 걷잡을 수 없는 나락으로 끌어들일 거야!
아니면 넌 이미 그곳에 있는 거야, 평생 벗어나지 못할 거야! 네가 가진 건 널 절망시키는 동생뿐이니까!

뒤늦게 정신을 차린 요원들이 남매를 잡기 위해 달려갔어. 잡혀라, 잡혀 버려라!
나는 흐릿해지는 시선으로 그들을 쫓았지만, 그들은 이내 사라져 보이지 않았어. 날 도와줄 이는 어디에도 없었어. 절망에 파묻힌 내 몸은 점점 기울어갔어.
그리고 내가 만든 작은 늪으로 쓰러졌지. 죽고 싶지 않아. 하지만 방법은 없었어. 나는 불길 속에 홀로 남아 남매의 힘을 떠올렸어.
실로 가공할 힘이었지. 내게는 없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덩굴로 나를 감싸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어.

불타는 고아원엔 요원들의 목표를 잃은 분노와 또다시 악마 때문에 죽어가는 나만이 남았어.

단 하나의 사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연기를 너무 많이 들이마셔서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아팠어.
몸 안의 수분이 모두 빠져나간 것처럼 버석거리고 온몸이 고통의 비명을 질렀지.
뜨거운 불꽃에 타버린 덩굴이 날 칭칭 감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어.

고통이 밀려오니 조금씩 정신이 들고, 내가 왜 이런 꼴이 되었는지 떠올랐지.
아무 문제없었는데, 난 달아날 수 있었는데. 또 악마들이 나를 망친 거야. 대체 왜 내게만 이런 시련이 닥치는 걸까?
멍해진 머리가 답이 없는 문제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나를 괴롭혔어. 매 순간이 고통스러웠지.

그때 발소리가 들린 거야. 저녁부터 안 보였던 선생들이 떠올랐지. 나는 특별한 아이니까 찾으러 온 걸 거야.
다른 아이들은 모두 버려졌지만, 나는 아닐 거야, 난 아무 잘못이 없으니까. 이제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지만 난 필사적이었어.
어떻게든 움직여 나를 알리려 했지. 그 덕분이었을까, 발소리가 내 바로 앞에서 멈췄어.
후우, 하고 숨소리가 들리자 나를 감싸고 있던 덩굴이 검게 변해 흩어졌어. 불씨가 날려 몸에 닿았지만, 비명은 나오지 않았어.
내 가슴은 희망으로 가득 차서 오로지 날 구한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지.

“남은 건, 너 하나뿐이구나.”

그건 내가 평생토록 기다려왔던 말처럼 느껴졌어. 옥사나, 가장 절실한 순간에 내게 와 가장 달콤한 말을 해준 단 하나의 사람.
나는 기꺼이 그가 내민 손을 잡았어.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걸 인정받은 거야.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은 주지 않는다는 신의 말씀처럼, 나는 내게 주어진 시련을 감당한 거야.
그리고 이제 합당한 보상을 받을 거야. 모든 게 완벽했던 내 세상을 되찾을 거야.

작은 화분

옥사나는 나를 안타리우스에 맡겼어. 그는 내가 더 특별해지길 바라는 것 같았어.
안타리우스의 연구원들은 내가 타인의 생명력을 흡수하여 모습을 유지하는 걸 알고는 날 추켜세웠지.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복사하여 젊음을 유지하는 옥사나 님의 능력을 떠올리게 한다며 수군거리기도 했어. 그 순간 내 심장이 얼마나 뛰었는지 몰라.
가슴이 벅차올랐지. 나는 사실 그의 아이였던 게 아닐까? 내게 주어졌던 시련은 이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존재했던 게 분명했어.

하지만 기쁨은 잠시뿐이었어. 화상으로 일그러진 내 피부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거든. 옥사나의 곁에 서기엔 형편없는 모습이었지.
날 추켜세웠던 연구원들도 그런 날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했어.

“옥사나 님께서 어째서 저런 별 볼 일 없는 아이를 거두신 건지.”

연구원들은 내가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거라고 말하며 비웃었어. 쓸모없는 취급을 받았지. 난 특별한 사람인데, 옥사나의 아이가 분명한데!
어리석은 자들의 비웃음에 화가 치밀어 올랐어.
더 빨리 나아야 해, 더 귀엽고 아름다워져야 해. 난 분노에 사로잡혀 연구원들의 생명력을 쥐어짜듯 흡수했어.
하지만 내 몸은 여전했어. 마치 내 능력의 한계를 본 것 같았지.

드루이드 소년

나는 연구원들에게 내 몸을 맡겼어. 이 능력을 더 강하게 해줄 수 있다면 뭘 해도 상관없었으니까.
그렇게 안간힘을 쓰는 중에 옥사나가 돌아왔어. 다 죽어가는 남자애를 하나 데리고 말이지.

“옥사나 님! 이 아이는 대체?”
“살려. 필요한 순간이 올 테니까.”

옥사나가 살리려는 저 아이는 대체 누구지? 나는 호기심과 그보다 더한 질투심을 느끼며 그 소년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어.
전설 속 드루이드처럼 그 애의 손끝에선 꽃이 피고 지기를 반복하고 있었지. 마치 고목의 깨진 틈으로 샘이 흐르듯 능력이 흘러넘쳤어.
소년을 보는 연구원들의 눈동자에 경이로움이 스쳤지.
그 뒤로 나는 잊혔어. 날 연구할 가치가 없어졌다는 듯이 연구원들은 소년에게 몰두했지. 그들은 소년을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어.
하지만 소년을 보호하듯 피어오르는 꽃에 가로막혀 생명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지. 나는 그 모습을 지켜봤어.

나는 고작 깨진 화분 속에 갇혀 안간힘을 쓰는 잡초인데, 저 애는 대지에 우뚝 솟은 거목이구나.
소년을 보고 있으면 놀라웠어. 저렇게 작은 생명력이 저런 꽃을 피우다니, 이미 다 죽어가는 몸뚱어리를 가지고도 이런 능력을 보여주다니.
그리고 동시에 의문이 들었지. 내가 그토록 바라던 것을 가진 주제에 왜 허망하게 잃고 있지?

그날 나는 악몽을 꾸었어. 내 꿈에서 드루이드 소년은 꽃을 피워 옥사나의 앞길에 뿌려주고 있었지.
소년이 만든 햇살이 가득한 숲길엔 커다란 나무들이 적당한 그늘을 만들어 시원한 바람이 불고 옥사나가 밟는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향기를 뿜었어.
내 자린데, 내가 해야 할 일인데, 모두 그 소년이 차지하고 있었지.

꿈에서 깬 나는 그 애의 남은 생명력을 모두 뽑아버리고 싶어졌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도록. 옥사나가 그 애를 찾을 수 없도록.
생명력을 흡수하듯, 저 능력도 내가 흡수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그렇게 된다면?

감당하지 못할 힘

나는 식물의 방해와 소년의 육체적 한계로 실험을 엄두조차 내지 못한 연구원들을 찾아갔어.

“저 능력을 쓸 수 있게 해줄게요.”

연구원들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어. 이미 내 능력을 연구해서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들은 나와 소년을 두고 몸을 뒤로 물렸어.
그 행동에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 것 같았지.
문제가 생기면 모두 내게 뒤집어씌울 게 분명했어. 하지만 그게 뭐? 또다시 빼앗기는 것과 다를 게 없잖아?

난 거대한 시험관을 앞에 두고 힘을 쏟아냈어. 목마른 포도나무가 물을 갈구하듯 내게서 뻗어 나간 식충 식물이 소년의 힘을 끝없이 흡수하기 시작했지.
난생처음 겪는 힘의 내달림에 몸이 견디지 못하고 덜덜 떨렸지만 멈출 수가 없었어. 내 온몸이 생명의 싱그러움에 환희를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와 동시에 고통과 분노가 밀려왔어.이 정도로 대단한 걸 움켜쥐고 있었다니! 주제도 안 되면서!
더, 더, 더 많은 힘을 원해. 네가 가진 걸 원해. 모두 다 내놔, 네 힘, 네 생명, 네 모든 걸 내놔!

끝없는 허기

배가 너무 아파서 나는 손으로 배를 쓰다듬었어. 구멍이 뚫린 줄 알았는데, 그건 허기였어.
힘이란 이런 건가? 이렇게 탐욕스러운 건가? 나는 지독한 허기를 느끼며 몸을 돌렸어. 실험실엔 내게 문제가 생길 시 제압하기 위해 보내진 신도들이 있었지.
하지만 그때 내 눈에는 그들이 그저 음식으로 보였어.

“이건, 날 위한 만찬이구나.”

평소처럼 손을 뻗었어. 줄기가 나아가 그들의 생명력을 흡수할 거로 생각했지. 하지만 내가 흡수한 힘은, 이제 내 것이 된 힘은 고작 정도가 아니라고 외치듯
발아래에서 꿈틀거렸지. 거대하고 강력한 힘이 날 위해 치솟았어. 소중한 것을 대하듯 나를 감싸고 내 허기를 채우기 위해 움직였지.
굵은 뿌리가 사방으로 빠르게 뻗어가는 게 느껴졌어. 날 둘러싼 먹잇감의 비명과 애원도. 하하.

유리 벽 너머에 낯익은 연구원들의 희열에 찬 얼굴이 비쳤어. 내게 바쳐지는 생명력도 점점 늘어났지.
난 해낸 거야, 성공한 거야. 저들을 만족시키고 내가 드디어 특별한 존재가 된 거야.

소년의 나약한 몸으론 감당할 수 없던 능력이 내게로 와 드디어 꽃을 피우고 거대한 숲을 이뤘어.
남은 건 마지막 만찬으로 남겨둔 소년을 먹어 치우는 일뿐이었지. 하지만 난 마지막 만찬을 즐기지 못했어.
소년을 먹어 치우려 할수록 내게 온 능력이 사라지는 게 느껴졌거든. 내가 흡수한 이 힘의 뿌리가 소년이었던 거야.
나는 힘을 거둘 수밖에 없었어. 뿌리가 사라진 식물은 존재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괜찮아. 온전히 내 것이 되지 못한 건 아쉽지만, 이 소년의 생명이 붙어 있는 한 나는 이 힘을 계속 쓸 수 있고,
이 애는 영원히 이 유리관 안에서 살 테니까.
이제 옥사나에게 보여줄 거야.
내가 훨씬 필요한 아이라는 걸, 내가 바로 아름답게 피어난 그의 꽃이라는 걸, 이 애의 능력과 생명력 모두 내가 쥐고 있다는 걸.
그러면 내가 그의, 어머니의 가장 소중한 아이가 될 테니까.

종이꽃

모든 게 달라졌어. 끝까지 지워지지 않았던 지독한 화상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살을 찢는 고통은 잊혔지.
난 내 힘에 익숙해졌어. 온몸에 흉터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생명력이 가득한 내 몸, 내 힘이 만들어낸 거야. 이게 진짜 힘이야.

“이런 걸 독차지하고 있었다니, 어울리지 않게.”

볼품없이 늘어진 앙상한 몸, 생기 없이 파리한 얼굴, 이건 이제 아무런 가치가 없는데 소년의 발치에는 여전히 꽃잎이 내려앉아. 그렇게 힘을 빼앗았는데도.
정말이지 가증스럽고 원망스러워.
소년이 내게 힘을 빼앗겼다는 보고를 듣고도 어머니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
그건 아마도 네게 기대하는 게 없기 때문이겠지. 넌 버려진 거야.

이제 나와 어머니 사이를 가로막는 건 하나밖에 남지 않았어.
힘을 견디지 못하는 약해빠진 소년과는 다르게 거대한 나무를 키워낼 수 있는 아이, 어머니의 곁에 있는 유일한 아이. 소년과 팔찌와 목걸이를 나눈 유일한 혈육.
나는 소년의 손목에 걸려 있던 투박한 팔찌를 쥐었어. 그리고 천천히 손목에서 빼냈지. 앙상하게 마른 손목이 텅 빈 채 흔들렸어.

내가 이것마저 빼앗으면 네게 남는 게 뭘까? 팔찌를 빼앗기면서도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하는 네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선택받은 그 아이에게 너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소년의 팔찌를 손에 넣고 나니 그와 내가 가깝게 느껴졌어. 아마 이 팔찌를 차고 있는 다른 아이도 마찬가지겠지.

사람들은 너와 그 아이를 그분의 아이라고 불러. 그분의 아이, 옥사나의 아이. 정말 매력적인 말이야.
힘을 나눈 우리는 형제나 다름이 없으니, 나도 이제 그분의 아이겠지. 물론 가장 가치 있는 아이는 내가 될 테지만.
형제가 된 기념으로 목걸이는 남겨둘게. 남은 다른 아이가 널 보고, 제 처지를 깨달을 기회를 줘야 하니까.

어머니와 나는 영원히 함께할 거야, 그리고 완벽한 사랑이 영원히 나를 채워줄 거야.
너는 절대 사랑받을 수 없겠지. 그래도 슬퍼하지 마. 대신 아름다운 꽃으로 널 장식해 줄게, 너에게 어울리는 모습으로,
네가 가장 사랑하는 우리의 여동생과 함께 꽃 안에서 잠들어. 그게 내가 주는 선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