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스위트 홈 정보제공자, 엘리어트 레너 (그랑플람 재단, 약화능력자)
다녀왔어, 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 또한 집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마틴의 부상
유망한 염동력자이자 동부유럽 지방의 스카우터인 에리히 모르겐슈테른의 보고를 받고 마틴은 대상 능력자를 직접 스카우트하기 위해
해당 지역으로 향했다. 아마 스카우트에 성공한다면 마틴의 첫 번째 에이스급 능력자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마틴이
큰 부상을 입고 돌아왔다. 마틴은 믿을만한 의사를 요구했고, 나는 극비리에 의사를 수소문해야 했다. 의사는 마틴의 부상이 심각해 보인다며,
멜츠 제약에서 새로 나온 테라나이트 함유량이 높은 연고를 처방하며 미소 지었다. 신상 연고는 효과가 확실했지만 비용도 확실히 부담스러웠다.
나는 마틴의 자존심에 흉터가 남을 새라 아낌없이 비용을 지불했다. 속내를 알 수 없던 브루스를 드디어 몰아내고 재단의 새로운 미래를
제시하기 시작한 마틴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가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엔데카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묻는 내게 마틴은 안정적으로 새 능력자를 확보했으며, 아무 문제없었다고, 이제 다 마무리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마틴이 데려온 새 능력자는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한지 의심이 갈 정도로 사회성이 부족했다. 먼저 나서서 뭔가를 하는 경우도 없었고,
부탁을 받거나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라고는 온통 엉망으로 만드는 것밖에 없었다. 일단 기본적으로 힘조절이 안 되고 일반적인 상식이 없어서
잠깐 들어줘, 정도의 부탁도 이해시키려면 한참을 설명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결국 아무 일도 하는 것 없이 하루종일 가만히 있기 일쑤였는데,
오뚝하니 앉아서 멍하니 기다리는 것은 정말 잘했다.
“엔데카, 정말 잘 했다.”
하루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 기특해서 칭찬을 했다.
“나 잘할게. 엘리어트도 마틴처럼 나한테 집 줄 거야?”
“글쎄, 마틴이 그 정도는 아닐 텐데… 어쨌든 난 돈이 없어서…”
“그럼 엘리어트 말은 안 들을래.”
“난 잘했다고 칭찬한 거잖아.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마틴 말만 들을게.”
그놈의 집, 집, 집! 단순한 칭찬조차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를 어디다 갖다 쓴단 말인가? 재단의 재원이 돼? 몇 살인지도 파악이 안 되는데
재원이 되겠어? 누구라도 마틴의 말이 헛소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건틀릿을 착용시키고 훈련장에 내보내면
싹수가 푸르스름하게 보이는 게 눈의 착각인가 싶으면서도 왠지 또 잘 키워보면 강력한 전력이 될 것 같고, 하여간에 알쏭달쏭한 후원자였다.
아무튼 하필이면 이런 괴상망측한 인물을 데려온 마틴의 당시 상황과 심경, 그리고 그의 등에 새겨진 채찍으로 맞은 듯한 상처에 대해서는
해명이 필요해 보였다. 나는 처음에는 브루스 보이틀러의 지시로 마틴의 능력을 통제했지만, 그랑플람 재단을 진정으로 위하는 행동을 하는 게
누구인지 스스로 판단하라는 마틴의 제안에 그의 능력 통제를 포기하고 그 뒤로 줄곧 마틴의 곁에서 그를 도와왔다.
처음엔 마틴이 나를 멀리 했지만, 내가 마틴의 뜻에 동조한다는 걸 안 후부터는 우린 제법 긴밀한 관계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나에게도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없는 진실이 있다는 것은 심각한 상황이다.
이윽고 더 심각한 상황이 펼쳐졌다. 이사회의 실세로서 재단의 일부를 은밀하게 장악해오다 이번 브루스의 축출을 계기로 전면에 떠오른
호아킨 브라가. 그가 긴급 이사회를 소집했고, 마틴은 증인의 자격으로 불려갔다. 좋지 않은 상황이다.
이사회 소집
그나마 다행인 건 마틴이 거동에 문제가 없을 정도로 몸이 회복된 다음이었다는 것이다. 마틴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증인석에 앉아 있었다.
마틴은 능력을 다시 활용하기 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저렇게 천연덕스럽다. 난 마틴이 또 무슨 잘못을 했나 싶어 이렇게 먼 발치에서 입술만
바짝바짝 말리고 있는데. - 이 말은 우리 활동이 늘 규정 안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의미라 짧게 끊겠다. 나는 한순간 타인의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의 능력을 부러워하며, 초조한 기분으로 객석에 앉아 이사회의 진행을 지켜보았다.
호아킨 브라가가 먼저 발언했다.
“저는 오늘 오전 한 장의 전보를 받았습니다. 동부 유럽 스카우트 지부의 사무실에서 보낸 전보입니다. 이게 바로 여러분을 긴박하게
소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내용은 짧으니까 염려 마십시오. ‘스카우트 사무실 피격.’”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랑플람 재단은 복지단체나 다름없어서 일반인에게도 능력자에게도 이미지가 좋은 편이었다.
피습당할 일은 거의 없었다.
“자, 놀라셨겠지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마저 읽겠습니다. ‘습격자 안타리우스 추정.’”
호아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좌중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간혹 고성이 나오기도 했다. 안타리우스가 거의 모든 능력자 단체와
척을 지고 있다는 사실은 능력자들에게 특별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랑플람 재단의 사무실을 습격했다는 것은 안타리우스가 그랑플람 재단에게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졌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전보를 보낸 사람은 지금 동부 유럽에 파견되어 있는 에리히 모르겐슈테른입니다. 마틴 챌피, 그에 대해 잘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이번에 포스토이나에 가서 직접 만나기도 했습니다.”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는데 마틴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에리히는 브루스 보이틀러의 추천으로 그랑플람 재단에 합류한 인물이라
마틴과 분위기가 좋지 않아 보였다. 그가 보낸 전보는 마틴에게 불리한 정보일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마틴의 채찍으로 맞은 듯한 상처를 떠올렸다.
설마 아니겠지, 설마, 요즘 유명해진 심판관이라는 자한테 맞고 온 건 아니겠지. 나는 저도 모르게 두 무릎을 손으로 꼭 쥐었다.
“나도 그를 잘 압니다. 그는 믿을만한 능력자에요. 추정이라고 하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말했다는 건 거의 확실하다는 말입니다.
안타리우스가, 안타리우스가 그랑플람의 스카우트 사무실을 습격했다는 말입니다.”
호아킨은 좌중을 둘러보며 안타리우스라고 두 번 말했다. 얄미운 영감, 분위기를 몰기 위해 일부러 저러는 거다. 호아킨 브라가는 여태
마틴에게 경어를 쓰지 않으며 친한 척을 해왔는데, 지금은 그게 마틴을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보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는 것 같아 불쾌했다.
마틴은 이사회와 결탁한 것으로 보이는 상태지만, 사실 마틴과 이사회는 서로를 전혀 믿지 않고 있다. 언제든지 잡았던 손을 뿌리칠 수 있는
사이란 말이다. 지금 호아킨 영감이 손을 뿌리치려고 힘을 주려는 게 분명했다.
수상한 산회
그 때 이사회 내에서 그나마 마틴에게 동조하는 축에 속하는 아리아나 홉스가 손을 들고 발언권을 얻었다.
“저도 에리히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말씀대로 그는 믿을만한 인재이니 그가 말했다면 거의 사실일 겁니다. 하지만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왜 하필 지금일까요? 안타리우스는 최근 홀든 가문을 급습하고 연이어 지하연합과 제법 큰 교전을 벌이면서, 예, 다들 아시겠지만
스노우퀸의 출전으로 상당히 많은 전력이 소진된 것으로 보고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랑플람까지 적으로 돌리다니, 자기들이 뭐가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그 말씀은 습격 주체가 안타리우스라는 데에는 동의한다는 건가요?”
호아킨이 핵심을 짚었다. 아리아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마틴을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는데 아리아나라고 마틴의 생각을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리아나의 시선을 받은 마틴이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총괄 스카우터라는 직책을 맡은 이후 스카우트 사무실에 피격 사건이 벌어져 진심으로 유감입니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다인가?
“안타리우스가 그랑플람의 사무실을 습격했다는 것은 가볍게 다룰 사안은 아닌 듯합니다. 에리히와 연락하며 빠르게 진상을 알아보고
보고 드리겠습니다.”
만약 안타리우스가 그랑플람 전체를 적대하기 위해 그랑플람 사무실을 습격했다면 마틴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랑플람의
스카우터 사무실이기 때문에 공격한 거라면 총괄 스카우터인 마틴에게 책임이 돌아간다. 마틴은 교묘하게 스카우터 사무실 습격을
그랑플람 재단에 대한 습격으로 돌려 말하며 주제를 돌리려 하고 있다. 하지만 호아킨이 순순히 넘어갈 리 없다.
“그렇군…알겠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호아킨이 순순히 마틴의 말에 납득하며 물러선 것이다. 호아킨은 이사들에게 신속한 피해 복구를 요구했고,
이사들과 재발 방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의논했다. 이사회는 긴급하게 소집된 것에 비해 시시하게 끝났다.
사람들이 저마다 의견을 내며 홀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나는 마틴을 바라보며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틴이 능력을 쓰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재단의 번영에 쓰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신념을 돕기 위해 그의 능력을 제어하던 것을 멈춘 것이다.
만약, 개인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사용했다면 나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신뢰는 없다
비정상적인 이사회를 마치고 나는 마틴에게 만나자고 연락을 보냈다. 하지만 마틴은 거절했다. 두어 번 더 끈질기게 연락을 보내자
마틴이 마지못해 알았다고 회신했다. 나는 즉시 마틴을 찾아갔다. 마틴은 엔데카와 종이접기를 하고 있었다. 그저 내 속만 미어터진다.
“얘기 좀 해.”
“하아… 알았어요, 하세요.”
“여기서 바로 말하긴 좀 그래. 아니, 네가 좀 그럴 거 같아. 그래도 말해?”
마틴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옆에 앉아 있던 엔데카에게 잠깐 자리를 비우겠다고 말했다. 누구에게나 다정하게 말하는 마틴이었지만,
내가 보기에도 엔데카를 대하는 데에는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처음에는 타인과의 교류를 막는 격리적 측면에 치중하는 듯했으나,
함께 하는 시간이 조금씩 늘면서 세상 물정 모르는 아기를 양육하는데 재미를 붙인 걸까. 자기 동생한테도 저렇게 신경 쓰는 것을
내가 보질 못했는데, 이성적인 느낌은 전혀 없었지만 친동생보다 더 아끼며 귀하게 대하는 것은 확실했다.
사무실 옆 휴게공간으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그때, 뭐야?”
“뭘 말하는 거예요?”
“호아킨 브라가에게 능력을 썼지?”
“생사람 잡지 마요, 좀. 누구랑 대화만 하면 쫓아와서 항상 능력을 썼냐고 물어보기나 하고.”
“말 돌리지 말고. 이상한 상황에서만 물어보는 거야, 그때는 분명 이상했고.”
마틴은 자꾸 의뭉스럽게 넘어가려 했지만, 나는 집중력을 잃지 않고 다시 질문했다.
“능력, 썼어?”
그러자 마틴은 대답 대신 흐음, 하는 콧소리를 내더니 되려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랑플람 재단이 더 확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변화해야 할까요?”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지 마. 내 질문에 먼저 답해.”
“재단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강한 능력자를 포섭하는 게 중요해요. 그래요, 보이틀러 씨가 동양의 능력자들을 스카우트한 거 자체는 좋아요.
그들은 하나 같이 에이스 급에 필적하는 능력자들이었고, 비록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힘을 사용하긴 하지만 강력한 건 사실이니까요.”
“마틴 챌피.”
“강한 능력자를 포섭하는 게, 중요하다고요. 엘리어트.”
엔데카는 재단에서 요구하는 무력 기준을 수월하게 통과했다. 전투 능력만 보자면 에이스 급이었다. 하지만 마틴의 지금 같은 반응은 이상했다.
그에게는 일종의 광기가 느껴졌다. 나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내가 말도 안 되는 짐승의 목줄을 끊어 놨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나는 언제든 마틴의 목줄을 쥘 수 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의 멱살을 잡고 말했다.
“나 후회하게 만들지 마.”
“재단을 위해서, 그 말에 저 역시 진심입니다. 당신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요.”
마틴이 속삭이듯 답했다. 마틴은 재단의 앞날을 위해 은인인 브루스를 연금시키기까지 했다. 나는 그를 한 번만 더 믿기로 했다.
마틴이 알든 모르든 상관없다. 다음 의심스러운 상황에선 무조건 마틴의 능력부터 약화시키고 볼 것이다.
그럼 알겠지, 마틴이 그동안 나를 속이고 있었는지 아닌지.
두 번째 이사회
애석하게도 그 상황은 금방 찾아왔다. 마틴이 에리히와 직접 이야기하겠다고 떠난 사이 마틴과 교차하여 에리히의 보고서가 도착했다.
엔데카의 출신을 의심하던 에리히가 엔데카의 흔적을 되짚어 엔데카가 지하연합과 안타리우스의 교전 당시 안타리우스 측에서 싸우던
강화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었다. 보고서는 재단 이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마틴은 이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는
에리히의 첨언이 있었지만, 이미 이사회는 마틴이 안타리우스와 손을 잡은 것처럼 벌벌 떨며 몰아가기 시작했다. 나도 부정하고 싶었지만,
엔데카가 안타리우스의 강화인간이라면 사회성 부족이나 집이 연구실이라는 이야기, 무서운 심판관 이야기가 다 들어 맞으니 변명할 수조차 없었다.
에리히의 보고를 듣고 마틴이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사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엔데카와 타인의 접촉은 제한되고
마틴은 증인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이사회 앞에 서게 되었다.
“안타리우스가 재단의 후원자가 되다니 천인공노할 일입니다!
호아킨이 문제제기를 시작했다. 그는 안타리우스가 얼마나 파렴치한 집단인지 성토한 후 그런 안타리우스가 그랑플람을 잠식할 목적으로
후원자가 된 것 마냥 떠들었다. 엔데카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잠식은커녕 잠만 자는 어린 애가 뭘 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사회의 태반은 호아킨의 사람이었고 그렇지 않더라 해도 호아킨의 말솜씨에 이미 넘어간 사람들이었다. 마틴은 항변했다.
“강화인간도 능력자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엔데카는 안티리우스를 떠났고,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따라서 능력자인 엔데카가 후원자가 된 것은…”
“너의 그 제멋대로인 판단 때문에 재단 사무소가 공격받은 것이다. 니콜라스 클레멘츠가 공식 서한을 보낸 것은 아는가?
’재단이 불법 점유하고 있는 안타리우스의 강화인간 1기를 돌려줄 것.’ 나는 그의 서한이 부당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래서 안타리우스의 뜻대로 행동하시겠다는 겁니까? 니콜라스 클레멘츠의 서한이야말로 엔데카가 안타리우스와 관련이 없다는 걸
증명하는 것 아닌가요?”
“강화인간은 안타리우스를 떠날 수 없게 되어 있다. 계속 안고 있다가는 불을 지고 화약고로 들어가는 셈이지.
안타리우스와 전면전이 벌어질 것이며, 재단에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생길 것이야!”
“엔데카는 강력한 능력자입니다. 재단이 확보한 인재로, 재단의 발전을 위해…”
“너는 재단에 심대한 위협을 제공했어. 이건 용서할 수 없는…. 행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작의 요소는 분명히 있겠지.”
맹렬한 공세를 퍼붓던 호아킨이 갑자기 딴소리를 시작했다. 이번 기회를 틈타 마틴을 완전히 축출하겠다는 각오로 밀어붙이던 사람 답지 않다.
호아킨은 마틴의 정상을 참작할 이유가 없다. 내가 생각했던 이상한 상황이 온 것이다. 나는 마틴에게 집중했다.
그리고 그를 포장하듯 한겹 한겹 내 힘으로 그를 감쌌다. 마틴을 거의 다 감쌌을 무렵 마틴과 눈이 마주쳤다.
나도 마틴을 마주 응시하며 마틴의 능력을 마저 약화시켰다.
“감히…!”
호아킨이 갑자기 소리를 쳤다. 그러나 마틴에 의해 조종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문제는 더 복잡해질 것이 뻔했기 때문에
호아킨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분노로 떨리는 몸을 추스르며 마틴에게서 멀어졌다. 의심은 사실이 되었다. 마틴은 그의 마음을 조종하여
이사회를 상대로 승기를 잡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재단의 미래를 위해 이사회를 장악하는 게 중요하다는 마틴의 의견도 맞는 말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조종해가면서 얻은 것이 귀한 것이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건 옳지 않은 일이다.
나는 찰나의 순간 브루스의 성난 얼굴을 떠올린 후, 올바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반전의 기회
그 결과 나는 마틴과 나란히 그랑플람 재단 지하의 작은 독방에 갇혔다. 그랑플람에는 감옥이랄 것이 없기 때문에 지하실 창고를
감옥으로 쓰곤 한다. 내가 여기 들어와 있을 줄은 몰랐지만, 알았다면 청소를 좀 더 해놨을 것이다.
“올바른 길을 걷는 결과가 이거에요?”
옆방에서 빈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마틴이었다. 피해자는 우리 둘 말고 좀 더 있었다. 호아킨이 마틴을 주축으로 한 젊은 후원자들을
줄줄이 엮어서 한직으로 보내거나 활동 정지를 시킨 후, 공석에 자신에게 이로운 인물들을 대거 영입했다.
더 정확히는 낙하산 인사를 단행하기 위해 공석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사회를 장악한다는 건 네가 없을 때에도 그 권력이 행사된다는 뜻이어야지. 네 앞에서만 순해지는 이사회가 무슨 도움이 돼?”
“이상론은 잘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절 배신했나요?”
“배신? 배신은 네가 했지. 네가 먼저 능력을 함부로 썼잖아.”
“그 순간은 벗어났어야죠. 엔데카의 효용성을 입증할 시간만 조금 확보하면 판도를 뒤집을 수 있었어요.”
“그건 네 생각이잖아. 나도 엔데카에 대해 확신 못하는데 너를 따르는 사람들은 어떻게 설득하고, 이사회를 어떻게 이겨?
걔가 능력이 있는 것과는 별개로 왜 이렇게 조급한 선택을 한 거야?”
“이사회는 이미 재단의 신념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있었고, 이들을 축출하려면 단기간에 강한 힘을 가진 자들을 끌어 모아야 했어요.”
“그러니까 그건 알겠다니까? 왜 이걸 너 혼자서 생각하냐고! 이렇게 혼자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게 보이틀러씨랑 뭐가 다른 건데?
차이는 있네. 보이틀러씨는 너처럼 남의 생각 훔쳐보지는 않으니까.”
“아니 그건…”
벽 하나를 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제삼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 뭐, 좋아보이십니다?”
“에리히, 꺼지십쇼… 음? 당신은 진짜 안 좋아 보이네요. 무슨 일이에요?”
“아, 뭐, 곰 앞발에 좀 맞았죠. 여기 편지도 받아왔는데, 보이틀러 씨가 합류할 거면 편지를 읽…”
“합류합니다.”
마틴은 에리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답했다. 브루스 보이틀러와 빚었던 신경전 따위는 전혀 없었다는 듯 산뜻한 태도였다.
“그렇게 쉽게 답할 거면, 보이틀러씨한테 왜 그렇게 뻗댄 거야, 너?”
“전 언제나 브루스 씨가 손을 내밀어 주기만을 기다렸어요. 이 순간에 손을 내밀어 주신다면 당연히 응해야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녀석들은 다 저런가,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에리히는 아, 뭐, 그럼 편지는 두고 갑니다, 라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도 몰래 들어온 처지일 테니 이해는 한다. 왠지 마틴에게서 빨리 멀어지려고 한 것 같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편지에 뭐라고 써 있어?”
“기다려봐요. 마음의 준비를 좀 하고 읽으려고 하니까.”
“난 마음의 준비가 필요 없거든. 빨리 꺼내서 읽어, 누가 오면 어쩌려고 그래?”
“하여간 각박한 사람. 알았어요.”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마틴이 오직 진실을 알기 위해 브루스 자신에게 끊임없이 대화를 요청한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책무를 나누지 않기 위해 비밀로 해왔던 것인데, 마틴이 이런 폭주를 벌여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 그럴 줄 알았다면 진작에 비밀을 나누었을 것이다.
“… 하여, 진실을 알 준비가 되어 있다면 에리히에게 답변을… 엘리어트, 들었어요? 진실을 알 준비래요. 내게 진실을 알려주신대요.”
“우리에게, 겠지. 하여튼 잘 되었네. 보이틀러 씨의 가택 연금은 풀린 건가? 너 때문에 집에 묶이셨잖아.”
“우리 때문에, 겠죠. 브루스 씨라면 어떻게든 할 거예요.”
비록 재단의 초기 멤버는 아니었지만, 장 바티스트 플람과 각별한 사이로 알려졌던 브루스 보이틀러는 그랑플람 재단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가택 연금 정도는 우습게 풀고 나올 줄 알았다. 물론 시도때도 없이 마틴만 찾는 엔데카도 발광할 줄 알았고.
사고뭉치들
하루, 아니 이틀쯤 지났나. 우당탕, 뭔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마틴이 있는 방 쪽에서 큰 소리가 났다. 창고 근처의 울타리 문짝이 뜯기는 소리였다.
“마틴, 마틴!”
“엔데카! 여기까지 와줬군요, 어디 다친 덴 없나요?”
역시나 난리법석이 발생했다. 그렇게 얼마 전에는 효용성 어쩌고 하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이용하는 방식을 고민하는 것처럼 굴더니,
엔데카를 환영하는 마틴의 표정과 말투를 보면 그의 판단은 분명히 이사회를 타도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두 사고뭉치가 감동적인 재회를 하고 있을 때 두 번째 문도 열렸다. 그리고 의외의 인물이 등장했다. 아시아지부 스카우터 티엔이었다.
티엔은 문을 열며 내게 목례하고는 중얼거렸다.
“다친 게 아니라 다치게 했지, 사람들을.”
“그게 무슨 소리에요, 엔데카가 사람들을 때리다 다치기라도 했나요?”
“하, 드디어 머리까지 굳은 건가. 너를 내놓으라고 그 꼬마가 사람들한테 행패를 부렸다.”
“아니, 엔데카,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하다니요.”
티엔은 나를 바라봤지만, 난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분위기나 환기할 겸 독심술사들이 다 그렇죠 뭐, 라고 말 같지도 않게 답했는데
티엔은 내 답변을 수용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눈에 티엔의 뒤에 서 있는 거구의 남성과 그의 곰 같은 손이 보였다.
“이 꼬마가 날뛰는 걸 제압하느라 나랑 티엔 둘 다 뛰어들어야 했네. 결국 마틴 자넬 찾으러 간다고 하니까 멈추더군.”
“보이틀러 씨.”
또 다른 감동의 재회였다. 마틴은 보이틀러에게 고개를 숙였고, 나는 티엔에게 보이틀러의 가택 연금이 풀린 거냐고 물었다.
돌아온 건 보이틀러의 호통이었다.
“애초에 난 갇힌 적이 없었다!”
“분명 가택연금으로 결론짓고 처분을…”
“없었다면 그런 줄 알아, 이놈아!”
역시나, 가택 연금 정도는 우습게 풀고, 아니 짓밟고 나오셨구만. 브루스 보이틀러에게 모든 길은 직진이니까 아마 정문 열고 나왔을 거다.
집을 봉쇄하던 이사회의 끄나풀들은 저 멀리 날려버리고 말이다.
브루스의 진실
마틴의, 아니 원래는 브루스 보이틀러가 사용하던 집무실에서 마틴, 티엔, 나 세 명은 브루스에게서 그의 행보가 내포한 의미를 듣게 되었다.
물론 엔데카도 우리 곁에 있었지만, 집 타령만 하고 브루스의 말을 제대로 듣지는 않았으니 세 명이 맞다.
신기한 점은 티엔이 엔데카를 잠시 응시할 때마다 순간적으로 칭얼거림이 줄어드는 점인데…이건 넘어가겠다.
“나는 그랑플람 재단의 번영에는 관심이 없는 게 맞다.”
“브루스 씨….”
“끝까지 들어라, 마틴. 나는 재단의 번영에는 관심이 없지만, 플람이 설립한 재단이 내가 세상을 뜬 후에도 그의 유지를 따랐으면 하는 마음은 있다.
사회에서 차별받는 능력자를, 능력자끼리는 차별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서로 돕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 이 엔데카라는 녀석도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는 가능성이 미약하게라도 있다면, 그랑플람이 받아들여야 할 능력자가 맞다. 마틴, 나는 네가 스카우트한 녀석이 마음에 드는구나.
재단의 숭고한 인재답게, 행동했다.”
마틴은 고개를 숙였다. 아마도 엔데카는 마틴의 처음이자 마지막 스카우트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곧 모든 것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감과 동시에
호아킨 일당은 짧은 통치를 마치고 축출될 것이다. 결국 재단의 번영에 관심이 없다는 말과는 별개로, 브루스는 마틴을 비롯해 재단의 젊은이들에게
귀감을 보이는 결과를 도출하겠지.
“내게는 또 다른 사명이 있다.”
브루스는 플람의 사명을 자신의 대에서 몇몇만 데리고 수행하려 했으나, 이는 자신의 오만이었다 말하며, 진실에의 탐구를 지속적으로 하던 마틴을
더는 말릴 수 없음을 인정한다. 티엔은 브루스의 여정에서 만난 능력자로, 브루스의 목적이나 사명에 대해서 다 알지는 못하지만 그의 뜻대로
새로운 능력자를 스카우트하는 일을 해왔다고 말했다. 마틴은 그가 브루스와 새로운 일을 한다고 오해하고 있었다며 사과했다.
다만, 테이는 브루스의 사명과 뜻을 맞대고 있으며, 티엔이 스카우트한 게 아니라 그가 직접 티엔을, 더 정확히는 브루스를 찾아왔음을 알려주었다.
테이는 지금 브루스를 대신해 ‘오래된 분’을 모시고 있으며, 특정한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음도 공유해주었다.
브루스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먼 옛날, 지금은 사라진 어느 왕조에서 수많은 사람이 하나의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면 문이 열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마틴
니콜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