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이샌더 이클립스 그 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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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1 10:4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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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 숙녀 여러분! 정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 토요일 밤이 아깝지 않을 최고의 무대가 드디어, 드디어 준비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시선을 훔쳐갈 준비가 되어 있는 최고의 곡예사, ‘지그프리드 램’을 소개합니다!”
‘말도 안 돼. 그런 멘트를 왜 준비한 거야? 그냥 단순한 덤블링이라고.’
담배 연기가 자욱한 선술집. 갈색 나무판자 바닥은 밟을 때마다 우지끈거린다. 낡은 벽과 천장은 수년 간 담배 연기에 찌들어 새까맣게 때가 탔다. 앙상한 샹들리제는 간신히 깜빡거리며, 당장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메달려 있다. 술집은 그다지 넓지 않아서, 모든 테이블에 사람이 꽉 찼지만 그 수는 30명이 넘지 않았다. 게다가 술잔을 든 주정뱅이들은 서로 자기 얘기를 떠들기 바빠 주인장의 말은 듣는 채도 안 한다.
주인장의 소개 멘트가 끝난 뒤 깜빡이던 샹들리제들이 차례대로 꺼졌다. 그제서야 주정뱅이들은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무대를 바라본다.
지그프리드는 입가에 가식 미소를 채우며 무대 위로 올라왔다.
손바닥 한 뼘 높이의 턱. 한 사람만 서도 꽉 차 보이는 간이 무대. 조명은 조악하고 음악은 아예 없다. 지그프리드는 자신을 시큰둥히 쳐다보는 관객들로부터 살짝 시선을 돌리며, 아무도 듣지 못하게 칫 하고 혀를 찼다.
‘적어도 예전엔 무대에 선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어. 이건 무대도 뭣도 아니야. 하지만…….’
지그프리드는 눈을 감았다.
‘개똥밭에서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고 했어. 살아야 해. 이렇게라도 살아야 해. 그래. 살자. 이 정도 부끄러움쯤이야. 살아만 있으면, 언젠간 다시 일어설 날이 올 거야. 반드시.’
그는 눈을 뜬다. 가짜 콧수염, 검은 나비넥타이, 브랜드도 없는 싸구려 정장, 우산을 잘라 만든 마술 지팡이.
‘이런 복장으로 곡예를 하게 될 줄이야. 기가 막혀서.’
지그프리드는 관객들을 주시하며 허리를 굽히고 팔을 크게 휘저어 인사했다. 관객들은 킬킬대며 자기들끼리 말을 주고받는다. “쇼 하고 있네.” 같은 소리도 들린다.
‘그래. 맞아. 그게 내 일이야.’
“자아, 지그프리드, 이번에 보여줄 묘기는 뭡니까?”
“40단 덤블링입니다.”
“와우! 40단이라니! 그게 뭐죠?”
주인장이 어린 소년처럼 두 손을 번쩍 펴 보이며 묻는다. 그는 더부룩한 갈색 수염의 백인이다. 담배보다도 시가가 더 어울리는 인상의 중년이었다. 지그프리드는 실소를 참아야 했다.
‘광대보다 더 광대 같군.’
“설명하기보다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지그프리드는 지팡이를 풍차처럼 빙글빙글 돌리더니 위로 휙 던졌다. 지팡이는 날아간다 싶더니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져 없어졌다. 지그프리드의 손에는 지팡이 대신 알록달록한 공이 두 개 들려 있었다. 주정뱅이들은 눈썹을 치켜들며 피식 웃었다.
“뭐였지, 저거?”
“야. 공짜로 볼만은 한데.”
지그프리드의 코에서 약간 거친 숨이 뿜어져 나왔다. 자신의 무대를 보기 위해 돈을 내고 몰려들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 두 손을 모으고 침을 꼴깍 삼키던 사람들.
‘공짜로 볼만 하다고? 그래. 당신들에겐 딱 공짜 수준의 쇼로도 충분하지.’
지그프리드는 허리의 뻐근함을 털어내듯 오른발로 발구르기를 했다. 골반에서부터 삐걱거리는 느낌이 나면서 시린 통증이 퍼진다.
‘괜찮아. 괜찮아. 무릎 힘 조절만 잘 하면.’
그는 두어 번 무릎을 이용해 몸을 튕기더니, 가볍게 풀쩍 백 덤블링을 했다. 관객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다시 백 덤블링을 한다. 다시 한 번 뒤로 점프, 그리고 또 다시 점프. 마치 트램폴린 위에서처럼 가볍게 뛴다.
관객들이 호오, 하면서 지켜보기 시작했다. 주인장은 관객들을 보며 손끝 박수를 쳤다. 박수를 쳐달라는 사인이었다. 하지만 반응은 여전히 미적지근하다.
지그프리드는 계속 가볍게 몸을 튕기다가, 갑자기 바닥으로 공을 세게 내리쳤다. 공이 튀어 오르자마자 그는 온몸을 구부렸다 펴서 물구나무서기를 했다. 튕겨 올라간 두 공은 그의 두 발바닥 위에 얹혔다. 그는 바닥을 짚은 양손으로 앞뒤로 움직이면서도 공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관객들이 오우, 하는 소리를 냈다. 그는 두 팔을 살짝 접으며 몸을 위로 튕겼고, 공이 튀어오르자 몸을 둥글게 말아 반대 방향으로 물구나무를 섰다. 튀어 오른 공은 그의 두 발바닥에 다시 얹힌다.
“야. 저걸 안 떨어뜨리네.”
“발바닥에 뭐 붙여놓은 거 아이가? 찍찍이라든지.”
이렇게 두어 번을 반복한 뒤 그는 다시 똑바로 선다. 그는 관객들의 표정을 확인한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그들의 입은 살짝 열려 있었다. 시선은 이미 충분히 무대에 고정됐다. 더 이상 술을 마시는 사람은 없다.
“이것이 베이스입니다. 이걸 응용해서…….” “아, 그런데.”
주인장이 끼어들었다. 그는 지그프리드를 가리고 앞에 서서, 자랑스럽게 두 팔을 벌리더니 입을 연다.
“여러분, 다음이 기대되시죠?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신 게 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밤만 특별히, 모든 종류의 주류를 20%나 할인…….”
관객들이 주인장을 비웃으면서 손사래를 친다. 그래도 한두 명은 주문을 하려고 손을 든다. 주인장이 무대에서 내려와 테이블로 달려간다.
‘기분 더럽게 만드네.’
지그프리드는 오른쪽 골반이 시큰거리는 것을 애써 참는다.
주인장이 돌아다니며 주문을 받는다. 사람들의 주의가 다른 곳으로 돌아간다. 속삭이던 소음들은 점점 웅성임으로 번져갔다. 무심코 얼굴을 찡그리던 지그프리드는 정신을 차리고 인상을 폈다.
‘이봐. 주의가 산만해지잖아. 젠장.’
그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한 뒤 입을 연다.
“이제 보여드리죠! 40단 덤블링을.”
사람들이 힐끔 자신을 돌아본다. 그들이 세는 것보다도 빠른 속도로 덤블링을 해야 한다. 가속되는 몸을 고스란히 중력에 맡겨야 한다. 그는 두 무릎에 힘껏 힘을 주어 풀쩍 뛰어올랐다.
허리에 힘을 주며 몸을 뒤로 젖히는 순간, 골반에서 두둑, 소리가 났다. 대못이 허리춤으로 파고드는 느낌이 들었다. 허리로부터 통증이 터지는 순간 배에 반사적으로 기합이 들어갔다. 그의 눈에 눈물이 찔끔 맺혔다. 그는 헉, 하는 단말마를 내며 그대로 바닥에 수직으로 꼬꾸라졌다.
“어우!” 사람들이 놀라 소리친다.
그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바닥에 자빠진 그 짧은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터져 나왔다. ‘끝났다. 젠장. 제대로 망쳤다. 망할. 내 신세.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돼?’
그는 눈을 번쩍 떴다.
“아…… 아이고야! 실패다!”
정적이 퍼지기 직전, 그는 바닥에 누워 버둥거리며 외쳤다. 마치 이것이 의도된 상황인 것처럼. 그러자 테이블에서 하하하, 하는 웃음소리가 퍼졌다. 순식간에 관중의 분위기가 떠들썩해졌다.
그는 재빨리 손목으로 눈에 맺힌 눈물을 훔쳤다. 그는 빳빳하게 굳어버린 오른쪽 다리를 부러뜨리듯 움직여 후다닥 일어났다.
우당탕 소리에 놀란 주인장도 그의 반응을 돌아보더니 실실 웃기 시작했다.
“이봐! 여기 화이트로 두 병 갖다 주시오!”
“여기도!”
“예엡!”
지그프리드는 과장된 몸짓으로 마구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이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게 아닌데요!”
그가 고개를 숙일 때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터졌다.
그는 고개를 숙일 때마다 어금니를 질끈 악물었다.
“아하하, 지그프리드, 수고했어.”
밤이 지나고 어둑어둑한 새벽이 다가온다. 밖에서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린다. 남은 손님은 없다. 두 사람은 테이블 앞에 앉아서 담소를 나눈다. 럼주를 두 병이나 마시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술집 주인. 지그프리드 옆에 앉은 주인장은 그의 어께를 토닥이며 쾌활하게 웃는다.
“덕분에 장사가 잘 됐어. 광대 한 명의 힘이 이 정도인 줄 진작 알았다면 더 좋았을 걸.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이 참에 광대를 테마로 가게 분위기를 바꿔볼까? 모르겠다. 오늘은 기분이다! 원하는 만큼 먹고 마셔라. 이건 일당에서 안 떼는 거다. 공짜란 얘기다.”
“아뇨. 괜찮습니다. 오히려 저야말로 감사하죠. 갈 데 없는 사람을 받아주셨으니.”
지그프리드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주인장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속물적이긴 해도, 근본적으로 나쁜 사람은 아니야. 게다가 이런 무대 자체를 좋아하는 것 같다. 잘 됐어. 앞으로 몸 관리만 잘 하면 희망이 있어. 메이저로 복귀하는 발판이 될 거야. 얼마 안 되는 돈이긴 하지만.’
골반에서 허리까지 깨어난 통증이 아직도 시큰거린다. 지그프리드는 아픔을 달래기 위해 럼주 마개를 딴다. 잔에 술을 붓고 입에 갖다 대는데, 찌르르, 하고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오. 잠깐. 천천히 마셔.”
주인장이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주방으로 향한다.
“어, 이게 누구야!”
많이 마셔본 적도 없는 술. 한 잔으로 어질어질해진 지그프리드는 손등에 턱을 괴고 힐끔 뒤를 쳐다본다.
“와 씨! 이게 얼마만이냐? 살아 있었냐! 하하! 어. 그래. 나? 나야 뭐 그럭저럭 잘 지내지. 아직도? ‘아직도’라니! 난 이게 평생직장이야. 그럼.”
지그프리드는 다시 술잔을 채워서 마신다. 들큰한 술 맛이 무뎌지기 시작한다. 이유도 없는데 괜히 웃음이 나온다.
“와우. 세상에.”
주인장이 놀란다.
‘무슨 일이지.’
“야. 너 이렇게 된 거, 여기 한 번 와라. 내가 쏠게. 야, 사양하지 마. 이건 권유가 아니라 부탁이다. 오랜만에 얼굴 한 번 보자. 응. 게다가 아주 ‘재밌는 게’ 있다고. 기대해도 좋을 걸.”
지그프리드는 다시 그를 힐끔 쳐다본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돌아오는 주인장. 얼굴은 이제 반색이 돼 있다.
“친구 분이신가요?”
“친구지. 해외로 돈 벌러 나갔는데, 아주 부자가 돼서 왔나봐.”
“네에.”
주인장이 이를 드러내면서 지그프리드에게 고개를 기댄다. 지그프리드의 눈이 게슴츠레해진다.
“너, 곡예 할 줄 안다면서. 공중그네라든가.”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보일 듯 말 듯.
‘몸 상태가 좀 그렇지만.’
“서커스단에서 일했죠.”
“그럼, 이번에 힘 좀 써라.”
주인장은 두 눈을 치켜뜨며 손등을 슥슥 비빈다.
‘그렇군. 친구를 잘 사귀어두었다는 건가.’
지그프리드의 안색을 확인한 그가 피식 웃는다.
“왜 그렇게 쳐다봐? 내가 친구를 돈으로 보는 사람 같아서?”
“아닙니다.”
그는 소리 내어 웃으면서 지그프리드의 등을 토닥인다.
“돈은 돈이고, 친구 좋은 건 좋은 거고. 역시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이렇게 된 거, 확실하게 뭔가 보여줘 봐. 만약 그 녀석한테서 뭐라도 떨어지면, 너에게도 가는 게 충분히 있을 테니까. 윈-윈 하는 거지. 무엇보다 그 녀석, 광대를 누구보다 좋아하거든.”
‘역시 속물적이군. 하지만.’
지그프리드는 턱을 짚었다.
‘그래. 말마따나, 돈 싫어하는 사람은 없지. 나도 예외는 아니야. 결국 돈 때문에 여기에서 일하는 거고. 살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고, 그 돈을 벌기 위해 살아가고…… 쳇. 제 정신이 아니군. 술 때문인가.’
그가 지그프리드의 어께를 팔로 감싸 안는다. 팔만으로 어께를 다 덮을 정도로 체구가 크다. 지그프리드는 고개를 끄덕인다.
“좋습니다. 대신, 준비는 잘 해주세요. 특히 안전장치 말이에요. 다시 강조하지만, 안전장치에 신경써주세요. 서커스는 기술이지 초능력이 아니거든요.”
“오케이. 계약 성립이다. 역시 뜻이 통하지. 우린 이제 같은 배를 탄 거다? 말만 해. 상식적으로 가능한 선에서 구해볼 테니. ‘투자’하면 본전은 뽑을 거다. 그 녀석, 사람이 워낙 좋거든. 게다가 한 번 장치를 마련해두면 앞으로도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거고. 너도 나도 꽤 돈 좀 벌 거야. 나는 ‘지그프리드 램’이라는 주식의 대주주가 되는 거지. 안 그래?”
그는 부리나케 달려가서 럼주를 한 병 더 가져왔다. 잔은 따로 가져오지 않았다. 그는 병따개를 순식간에 뽑아서 바닥에 버리더니 술을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라이샌더. 표정이 왜 그러지?”
두 사람이 앉기엔 사치스러울 만큼 길고 넓은 식탁. 그 식탁을 뒤덮은 하얀 식탁보엔 주름 하나 없다. 다이아몬드 패턴의 갈색 벽지로 둘러싸인 거실. 벽에는 정확히 일정한 간격으로 커다란 인물화들이 걸려 있다. 거실의 정중앙에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커다란 샹들리제가 달려 있다. 그것은 매우 높은 곳에 달려 있어서, 고개를 꺾어서 올려다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다.
올백으로 넘긴 은발, 같은 색깔의 짙은 눈썹. 은색의 삼백안. 라이샌더를 바라보는 눈매는 칼처럼 날카롭다. 뾰족한 귀, 더 뾰족한 코, 굳게 다문 입술. 주름 잡은 넵킨을 한 화이트 클라프는 라이샌더로부터 눈을 떼지 않고,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슥슥 썬다.
“마음이 편치 않아요.”
포크와 나이프를 쥔 채로 스테이크를 멀뚱멀뚱 주시하는 소년, 라이샌더. 정돈되지 않은 금발, 우수에 잠긴 바다 빛 눈. 그리고 창백한 피부. 눈 밑에는 지우지 않은 빨간 색 눈물 화장이 남아 있다. 갓 목욕을 마치고 나온 그는 하얀색 가운을 몸에 두르고 있다. 드러난 목과 팔은 가운보다 더 하얘서, 그 인상은 사람보다 오히려 인형에 더 가깝다.
“무슨 문제가 있나?”
나지막한 목소리로도 공간이 울리는 중저음이었다. 화이트 클라프는 포크로 고기 살점을 찍어 입에 가져다 넣는다. 그를 올려다보는 라이샌더는 쉴 새 없이 눈을 깜빡인다.
“그 버릇 고치라고 주의를 몇 번이나 줬을 텐데. 고칠 마음이 없나보구나.”
“죄송합니다.”
라이샌더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앳되다 못해 가녀린 목소리의 소년이었다. 그의 눈은 클라프의 시선으로부터 도망치듯 좌우로 이리저리 흔들린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공연에 관련된 문제인가?”
“아뇨. 그건 아니지만…….”
달그락, 하고 식기를 내려놓는 금속음이 울린다. 라이샌더의 몸이 흠칫하고 경직됐다.
“라이샌더. 너에게 가르쳐준 말이 있지 않니. 라이샌더. 라이샌더. 너는 누구지?”
두 눈을 내리깐 라이샌더는 입술만을 기계적으로 움직인다.
“저는 광대입니다.”
“광대는 무슨 일을 하지?”
“사람들을 즐겁게 합니다.”
“라이샌더. 다시 묻겠다. 라이샌더. 너는 누구지?”
“저는 광대입니다.”
화이트 클라프는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라이샌더는 숨조차 쉬지 않는다. 침 삼키는 소리조차 울릴 법한 침묵이 이어진다.
“라이샌더. 나를 보거라.”
라이샌더는 두 눈을 천천히 들어 화이트 클라프를 마주본다.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인자한 아버지 같은 미소였다. 라이샌더의 눈이 크게 뜨였다.
“라이샌더. 사람을 즐겁게 하는 광대는, 다른 사람 앞에서 슬퍼하면 안 된다. 슬픔은 전이되어 또 다른 슬픔을 낳기 때문이지. 라이샌더. 너는 누구지?”
“저는 광대입니다.”
“그래.”
화이트 클라프는 다시 포크와 나이프를 쥔다. 드디어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라이샌더도 그를 따라 식기를 집어 들었다.
“그래서. 라이샌더.”
“네.”
“요즘 무슨 문제라도 있니?”
“아뇨.”
“그럼, 식사 하자꾸나.”
초점을 잃은 라이샌더의 눈동자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라이샌더는 침실로 들어갔다. 침실의 벽지는 거실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이 저택의 모든 공간은 그곳이 그곳 같았다. 이곳 역시 족히 서른 명은 들어와 발 뻗고 잘 수 있을 만큼 넓었다. 그가 침대에 눕게 되면 조명은 자동으로 꺼졌다. 문 역시 알아서 닫혔다. 모든 빛이 차단된 공간 안에서, 윽, 윽, 숨을 헐떡이며 흐느끼는 가느다란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이 넓은 공간에서 한 명의 소년이 내는 울음소리 따위는 결코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했다.
‘되돌리고 싶어.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어. 되돌릴 수 없다면, 적어도 더 이상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고통 받지만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어떻게 되든 좋으니까.’
라이샌더는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는 깜깜한 이불 속으로 더 깊이 파묻혀 들어갔다.
‘클라프, 이 공간은 당신이 제게 주신 유일한 특권이겠죠. 그렇겠죠. 하지만 난…….’
라이샌더는 자신의 얇은 머리칼을 양손으로 마구 쓰다듬다가 의식을 잃듯이 잠에 빠졌다.
공중 그네가 있는 체육관은 술집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았다. 300미터 남짓 거리였다. 체육관에 들어선 지그프리드는 망연자실해서 입이 벌어졌다. 쌓인 철근 더미, 넓은 체육관을 가득 메운 먼지.
“그래서 저게……. 그겁니까? 공중그네?”
“응. 어때.”
지그프리드는 두 팔을 축 늘어뜨렸다. 옆에 선 주인장은 팔짱을 끼고 있다.
‘공중그네라기보다는 기중기 같은데.’
원형은 분명 공중 그네였다. 페인트가 다 떨어져서 녹슨 철근 기둥에 후줄근하게 매달려 있는 그네.
“혹시, 임대하셨습니까?”
“응.”
‘다행이다. 아니, 애당초 저걸 탄다는 것부터가 불행이지만.’
지그프리드는 고개를 돌려 머리를 긁적거렸다. 머리를 긁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그는 이윽고 이를 바득바득 간다. 담담한 태도의 남자를 쳐다보다가, 안절부절 못하고 몸을 비비 꼰다.
“솔직히, 아무리 봐도 안전해보이지 않는데요.”
“약간 노후 됐을 뿐, 기능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대.”
‘그 노후 됐다는 게 잠재적 기능적 결함을 의미하는 건데요. 젠장.’
그는 후우, 한숨을 쉬었다.
‘막상 닥치니까 막막하네. 젠장! 생각이 짧았어. 좀 더 상의를 해야 됐다고. 시설이 개판인 건 둘째 치고, 여기서 쇼를 해서 어떻게 술집을 부흥시킬 건데. 그네를 타면서 병나발이라도 불어야 되나? 피켓을 들고 술집 홍보라도 해야 되나? 생각해보니, 공중 그네로 원맨쇼를 해야 하잖아? 하라면 못할 건 없지. 근데 퍼포먼스가 너무 떨어지잖아. 임대료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그 사람이 그렇게나 부자야? 이런 데서 쇼를 한다고 해서 본전을 찾을 수 있겠어? 젠장! 젠장! 이 사람은 왜 일처리가 이따위로 빨라?’
지그프리드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래서. 그 친구 분은 언제 오신답니까?”
“삼 일 뒤에.”
‘망했군.’
그는 계속 얼굴을 가린 채로 입을 연다.
“좋아요. 뭐, 좋다고요. 그럼 그 전에 준비는 다 해둬야겠네요. 관객들도 모아야겠고.”
“그렇지. 그럼 시작해볼까.”
그가 팔을 걷어붙인다. 두꺼운 팔뚝에 온통 문신으로 도배를 해놓았다. 지그프리드는 손을 내리고 남자를 쳐다본다.
“뭐 해?”
“저희 둘이서요?”
“응.”
지그프리드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농담도.”
“농담 아니야.”
‘차라리 날 죽여라. 뇌에 근육만 가득 찬…….’
남자는 철근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가 읏차, 하고 소리를 내더니 자기 키보다 큰 철근을 뭉텅이로 들어 올렸다.
“잠깐.”
지그프리드는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남자를 가리켰다.
“어이, 나이도 어린 녀석이 삿대질 하게 돼 있나.”
“다, 당신 뭐야?”
그는 후다닥 일어나서 철근 앞으로 다가갔다. 남자가 세 개씩 들어서 옮기는 철근. 그는 철근 하나를 들려다가 허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에라이, 꼬추 떼라. 넌 나가서 홍보 해.”
“아악! 악! 잠깐, 말도 안 돼!”
날이 어두워졌다. 체육관의 조명을 켠 남자는 하나 남은 철근에 걸터앉아서 술을 빵에 적시며 입에 넣는다.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지그프리드는 빵을 뜯어서 깨작깨작 먹는다.
“후우. 힘들다.”
남자는 우람한 팔뚝으로 이마를 닦는다.
“이봐요. 당신, 혹시 능력자예요?”
“응? 응.”
지그프리드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 아저씨, 도대체 뭐 하는 인간이야? 바보야? 힘이 센 대신 머리가 안 돌아가나?’
“그 능력 갖고 술집이나 하면서 사는 거예요? 당신, 그 능력이면 돈을 얼마나…….”
“이봐. 낸들 몰라서 이 고생 하나.”
그는 끌끌대면서 수염을 매만진다. 그는 걷은 팔을 내밀어 문신을 보여준다. 두꺼운 팔에 빼곡이 그려진 문신은, 다름 아닌 문자였다.
“이게 그냥 문신일 거라고 생각해? 이건 문신이 아니야. 낙인이지.”
그는 문자를 읽는다. 그리고 남자를 마주본다.
“사람 이름.”
“그래. 짐작 가는 바 있어?”
그는 눈을 질끈 감고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살인자.”
“맞아.”
‘나는 왜 사람을 만나도 항상 이딴 인간들이랑 엮일까.’
“교도소에 가 있어야 할 분께서 왜 술집을 운영하고 계세요?”
“내겐 친구가 있잖나.”
“하! 나 참!”
그는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 친구란 분이 참 대단한 분이구만! 살인자도 멀쩡히 사회생활 하게 해주고!’
지그프리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보세요. 저는 살인자들 즐겁게 해준다고 광대 일 하는 게 아니거든요. 도대체 누굽니까? 그 친구라는 사람이? 이거 그냥 계약 취소 안 됩니까? 더는 살 떨려서 못 하겠습니다! 이러다가 저도 사람 잡는 거 아니에요?”
남자는 어께를 으쓱했다.
“내 알 바는 아니지. 난 그냥 그 친구랑 쌰바쌰바 해서 돈 타면 되는 거고. 그 친구가 광대를 좀 많이 좋아하거든. 우리는 한 배를 탄 입장이야. 계약 취소는 안 되지.”
“취소하겠습니다!”
“그러면 너 나한테 죽을 텐데?”
“협박하는 겁니까?”
“나도 어쩔 수 없는 입장이야. 그 친구 없으면 난 죽어. 너무 겁먹지 마. 넌 그냥 네 일만 잘 하면 돼.”
“젠장!”
“뭐, 정리나 마저 하자고. 페인트도 어디서 구해다가 칠 좀 하고.”
지그프리드의 어께에 우람한 팔뚝이 둘린다.
체육관에 불이 들어온다. 사람들이 모인다. 많지는 않다. 채 50명도 안 된다. 지그프리드는 옷을 갈아입었다. 전형적인 피에로 복장이었다.
‘개판이야. 광대에 대한 모욕이라고.’
남자는 체육관 문으로 뛰어나간다. 그는 체육관에 들어서는 남자를 마중한다. 그 남자는 정장을 입었다. 흰 머리칼에 약간 살이 쪘다.
‘그 사람을 닮았어. 그 사람. 화이트 클라프. 뭐야, 뭔데? 무슨 상황인데 이거?’
정장을 입은 남자가 다가온다. 남자는 지그프리드를 보고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소름이 돋았다. 그는 화이트 클라프를 닮았다. 하지만 본인은 아니다.
“당신.”
남자는 호주머니에서 시가를 꺼내 꼬나문다.
“당신. ‘화이트 클라프’를 알아?”
남자는 호오, 하고 놀란 표정을 짓는다.
“알다마다. 너, 내 아들이랑 무슨 관계지?”
지그프리드의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그의 서커스단 단원이었다. 지금은 서커스단 자체가 박살났지만.”
남자는 껄껄껄 웃는다.
“아들놈이 드디어 마음에 드는 녀석을 찾았나보구먼.”
“뭐?”
남자는 시가를 깊이 빨아들인 후 연기를 내뱉었다.
‘모르겠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사람들, 목적이 뭐야? 난 지금,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데?’
남자는 끌끌끌, 하고 웃더니 손사래를 쳤다.
“꼬마야, 걱정하지 마라. 네가 뭘 생각하든, 그건 전부 쓸데없는 기우니까. 난 그저 이 무대를 즐기기 위해서 왔을 뿐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