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택(Dilemma) 下 (完)
-
4,526
11
30
-
2015-11-24 10:39:11
* 선정대상 : 등록일 기준 하루 전 00:00~24:00까지의 게시물 (최대 3일 전까지 확장가능)
* 추천수 : 높은 순서대로 정렬, 공략 게시판과 팬아트 게시판(팬픽은 별도 조회)을 각각 조회
* 댓글수 : 조회수가 비슷할 경우, 댓글 수와 내용을 참고 (이때, 작성자가 추가로 단 댓글은 제외)
* 내용 : 게시판과 맞지 않거나 과도한 수위가 있는 글, 욕설 등의 내부 기준에 맞지 않는 글은 제외
* 오싸등록여부 : 많은 분에게 기회를 드리고자 1주일 이내 등록 된 경우 제외
* 제재여부 : 추천 수와 상관없이 현재 계정이 게임과 웹을 포함하여 제재된 경우 제외 (만료상태는 해당되지 않음)
- 부적절한 오늘의 사이퍼즈 신고 안내-
* 사이퍼즈 운영진은 오늘의 사이퍼즈를 최대한 공정하게 선정하려 노력하고 있으나 선정 후 발견되는 일부 저작권,타인의 작품 도용 및 비방과 관련된 내용에 대해서는 신고해 주시면 최대한 빠르게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 특히, 저작권이 있는 내용이나 트레이싱과 같은 무단 도용에 대해서는 오늘의 사이퍼즈 등록 철회 및 민형사상의 처벌을 받을 수 있음을 사전에 인지 부탁드립니다.
* 신고 및 문의 : 사이퍼즈 1:1 문의 (게임문의 → 게임신고(해킹/불법/추적) → 오늘의사이퍼즈)
* 이 글은 픽션(fiction)입니다. 특정 단체ㆍ사건ㆍ사상ㆍ종교와 무관함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 선택(Dilemma) 上(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22540052)
선택(Dilemma) 中(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22673579)
“벨져가……둘?”
앤지의 황당한 말에 루이스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루이스는 벨져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둘이나 눈앞에 나타나 있는 것을 멍하니 번갈아보았다. 나중에 나타난 벨져는 기존의 벨져를 매우 불쾌한 낯빛으로 주시하고 있다가, 힐긋 넋이 나간 것 같은 루이스에게 눈길을 던졌다.
“한심하군. 전투에서 진 것도 아닌데 겨우 간교한 세 치 혀에 무릎을 꿇다니. 비록 방심했었다고는 하나 이같이 유약한 사내에게 나는 졌단 말인가. 지독한 모욕이군. 지금 상황 자체가 이 벨져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굴욕적이다.”
벨져는 검 두 자루를 모두 뽑아들고, 왼쪽 검은 아래로 늘어뜨린 채 오른쪽 검만 반대편 벨져에게 겨누었다.
“너, 누구지? 순순히 정체를 밝혀라.”
“너, 누구지? 순순히 정체를 밝혀라.”
앞서 검에 겨누어진 벨져도 똑같은 대사를 토하며 허리춤의 검 두 자루를 모두 뽑아들고, 오른쪽 검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왼쪽 검만을 벨져에게 겨누었다. 앤지와 루이스가 있는 방향에서 볼 때 꼭 거울의 좌우대칭이었다. 무심한 듯하지만 차가운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예사롭지 않은 눈빛하며 굴욕을 감내하듯 가늘게 떨리는 한쪽 입가마저 똑같았다.
“……명을 재촉하지 마라.”
“……명을 재촉하지 마라.”
오른편의 벨져가 이를 앙다물고 위협했지만, 왼편의 벨져는 시치미 뚝 떼고 또 다시 모든 양태를 복사했다. 그게 신경에 크게 거슬렸는지 오른 벨져가 인상을 사정없이 구기며 선제공격을 단행했다.
앤지는 두 벨져가 칼을 부딪치며 싸우는 모습이 고스란히 보이는 제 눈을 의심했다. 벨져는 그야말로 빛의 번쩍임을 닮은 속도로 움직이는 섬광의 쾌검사이다. 2차 능력자 전쟁 당시 벨져가 루이스를 봐주면서 싸웠다고는 해도 너무 빠른 나머지 앤지는 전투가 끝날 때까지 그의 모습을 제대로 포착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때는 전투와 전혀 무관하게 살아왔던 일반인이었음을 감안한다고 치자. 흑염 능력자로서 각성하고 각종 훈련을 받는 지금도 최근에 본 벨져의 전투에서 그의 속도를 눈으로 따라가는 건 앤지로선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벨져 둘을 똑똑히 볼 수 있다는 건 앤지의 동체시력이 급성장했거나 실제로 벨져들이 느리게 움직이고 있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당연히 후자가 정답이었다. 엎어놓은 밥공기 두 개 중에 한 곳에만 주사위를 넣고 휙휙 섞는 도중 어느 쪽에 주사위가 있는지 놓치지 않으려는 것과 같이, 앤지는 오른 벨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벨져가 아닌 벨져의 칼날이 몇 합을 견디다 못해 부러지며 날아가 지면에 꽂혔다. 오른 벨져는 불쾌하다는 티는 여전하지만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왼 벨져의 반토막난 칼과 자기와 껍데기만은 똑같은 얼굴 사이를 위아래로 훑으며 코웃음 쳤다.
“굼벵이하고 겨루는 게 차라리 낫겠군. 얼굴과 목소리는 복사해도 과연 전투능력만은 베낄 수 없나보지, 면도날 잭?”
벨져가 내놓은 이름에 앤지와 루이스는 화들짝 놀라며 둘 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늘 반나절 가까이 진실이었던 오해가 허무할 정도로 단숨에 풀리며 모든 의문들이 말끔히 사라졌다. 앤지와 트리비아가 그토록 ‘쉽게’ 납치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세상에 단 한 명뿐일 벨져가 지금 회사 소속의 어느 동양 능력자처럼 그 신묘한 분신술이란 것을 쓴 것마냥 두 명일 수 있는 이유, 왜 진작에 이런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했나 하는 후회가 막심했다. 19세기 말 영국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변신능력자 면도날 잭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아아, 이런. 상황종료 키워드가 마침내 나와버렸군. 그렇다면 서둘러 막을 내려야겠지.”
왼 벨져, 아니 잭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쿡쿡거리다가 쓸모없어진 칼자루를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품에서 메스나 다름없이 예리한 면도칼을 꺼내어 날 위로 위태롭게 혀를 놀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벨져와 몸짓, 표정, 분위기마저 판박이였건만 아직 벨져의 껍데기를 쓰고 있는데도 기묘하게 번득이는 눈빛이 전혀 딴사람처럼 느껴지게 했다.
“이런 무식하게 큰 칼은 못쓰겠어. 역시 내 조그마하고 사랑스러운 면도칼이 제일 좋아. 한 손에 쏙 들어오고 숨기기도 쉽고 살을 찢는 느낌이 훨씬 더 가까이 느껴지고. 이히히히―.”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품위없이 웃지 마라! 당장 가면을 벗어! 불쾌하다!”
벨져는 흉한 잭의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화를 냈다. 잭은 그런 벨져가 가소롭기만 한지 능청스레 딴청을 피우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싫거든? 그리고 가면이라니? 이게 지금의 내 얼굴인데?”
“네 진짜 얼굴을 보이란 말이다!”
“거 말 못 알아듣네. 그 작디작은 귓구멍을 면도칼로 깎아 크게 만들어줘야 알아먹겠나. 이게 지금 내 얼굴이라니까? 난 누구도 될 수 있고, 누구도 아닐 수도 있단 말이다.”
“껍데기만 같다고 진짜가 되는 줄 아나?”
“진짜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가짜가 진짜지.”
“훌륭한 궤변이군. 가짜는 어디까지나 가짜다. 진짜와 비교할 가치도 없지. 가짜는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진짜가 될 수 없다.”
“진짜가 죽어버리면 가짜가 진짜고, 가짜인 걸 모르는 사람한테는 가짜가 진짜나 다름없지.”
“쭉정이로 알맹이를 대신하겠다는 억지를 쓰는군. 더 이상 말해봤자 내 품격만 떨어지니 그만하지. 심정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나를 욕보인 네놈을 베고 싶지만…….”
벨져는 눈에 띄게 여위고 안색이 파리한 앤지에게 잠깐 시선을 보냈다가 다시금 잭을 경계의 눈초리로 주시했다.
“너는 안타리우스의 개이니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정보를 한두 개쯤은 보유하고 있을 테지. 짜증스럽지만 지금은 네 명줄을 붙여놓은 채 끌고 가야겠다.”
“어이쿠- 누가 들으면 순순히 잡혀가는 줄 알겠네? 그나저나 안타리우스의 개라니? 칼침 한 번 맞아봐야 정신을 차리겠군. 난 그놈들하고 한 패가 아니야. 쓸모가 있으니까 이용하는 것뿐이지. 이번 일이 안타리우스가 시켜서 한 일이라고 생각하나? 지랄 마! 이 연극의 각본과 연출은 모두 이 잭 님의 손으로 이루어졌단 말씀이야!”
진심으로 억울한 듯 가슴을 치며 떠벌리는 잭을 조금 놀란 듯 보던 벨져는 곧 다시 날카롭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입을 열었다.
“목적이 무엇이냐? 뭣 때문에 이런 시답잖은 촌극을 벌인 거지?”
“시답잖다니? 킬킬킬- 종반부에 오셔서 잘 모르나 본데, 댁이 하찮다는 그 연극에 꼭두각시처럼 놀아나고 있는 사람이 여기 두 연놈 말고 얼마나 더 있는지 알기는 하나?”
“…….”
“것 봐!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의뭉 떨기는! 다들 내가 연기하는 네놈한테 깜빡 속아 넘어갔다고! 제기랄! 네놈만 끝까지 등장하지 않았다면 완벽했을 텐데. 그래야 진짜가 돌아오더라도 가짜가 만들어놓은 또 다른 진실 때문에 진짜는 영원히 진짜로 돌아갈 수 없게 되고, 비로소 나는 완벽하게 진짜를 훔쳐낸 셈이 되는 거지! 세간에는 일개 살인마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나는 일류 도둑이야. 물론 사람고기를 갈기갈기 찢어놓는 맛도 일품이지만, 쓸데없이 반짝거리는 거나 훔치는 좀도둑 새끼들하곤 격이 다르다 이거야!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이란 놈을 훔치는 것이 바로 이몸, 잭 님이지. 왕년에 빅토리아 그 늙은 여우마저도 그 년이 사족을 못 쓰는 알버트가 되어 감쪽같이 속였던 나야!”
앤지는 잭의 말에 새삼 소름이 끼쳤다. 잭이 희대의 연쇄살인으로 악명을 떨쳤던 것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벨져, 앤지, 루이스가 태어나기도 전인 1888년 8월 말이었다. 그렇다는 건 잭은 적어도 70줄에 들어선 노인이라는 말이 된다. 살아있을 수도 있는 나이인 것은 맞고 변신능력이라면 겉모습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겠지만, 적어도 움직임은 노인의 쇠약한 신체에서 보일 만한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잭의 연쇄살인으로 인해 분노한 빅토리아 여왕의 지나치다 싶은 강경대응이 개인적 원한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하는 당시의 추측이 보기 좋게 들어맞았음을 범인이 몸소 증명하고 있기까지 하다.
“아깝다, 아까워. 대체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찾아온 거지? 기껏 공들여 미행까지 해가며 행적을 파악했더니 당분간은 이쪽에 안 올 것 같아 보여서 결행한 거였는데. 소중한 여왕님들을 빼앗기고 피가 바싹바싹 마르는 기분 좀 느껴보라고 사흘을 재미지게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게 잘못이었나?”
“……싫은 것일수록 눈에 더 들어오는 법이지. 저 결정사의 얼음은 오늘처럼 달이 밝은 밤에 유독 선명한 푸른빛을 띠니까.”
“아하- 그렇게 된 거였군. 영웅이 용케 그 상황에서도 헨젤과 그레텔을 떠올렸다 그거지? 내 눈을 피해 떨어뜨린 그 조약돌을 미처 보지 못한 게 실수였어.”
“말이 많군. 잡담은 이걸로 끝이다. 네놈은 나와 함께 간다.”
“어허- 이러면 안 될 텐데? 나한테 함부로 칼을 들이밀었다간 저 아름답게 노래 부르는 새는 펑! 하고 터져버릴 텐데 괜찮겠어?”
“뭣이?!”
괜한 허세인가 싶어 반신반의하는 벨져에게 잭은 씨익 웃으며 보란 듯이 품속에서 작은 버튼이 달린 상자 같은 것을 꺼냈다.
“이게 뭔가 하면 말이야, 신데렐라의 시간에 터지게 되어 있는 폭탄이랑은 별개로 저 새장 바닥에 설치해놓은 소형폭탄의 기폭장치다 이거야! 내가 이걸 누르기만 하면 저 여자는 뼈도 못 추리게 된다 이 말씀. 늙은이는 보신(保身)에 아주 철두철미한 생물이거든.”
“……네 이놈―!!!!”
벨져는 날것 그대로의 분노를 거침없이 드러내며 불호령했다. 2차 능력자 전쟁의 막바지, 로라스가 루이스에게 패배를 선언했을 때보다도 더 격렬하고 살기마저 띤 분노에 앤지도 루이스도 흠칫하며 벨져를 쳐다보았다.
“앤지 헌트가 죽으면 네놈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손에 죽는다.”
“누가 뭐래? 그러니까 이 칼 치우는 게 피차 신상에 좋을 거라 이 말이다, 애송아. 고분고분하게 어른 말씀을 들으라고? 응?”
벨져는 한동안 더 주체하지 못하는 노기를 담아 잭을 쏘아보다가 마지못해 검 두 자루를 칼집으로 되돌렸다.
“그래. 그렇게 나오셔야지. 말했다시피 난 이번만큼은 죽이는 데 별로 관심이 없다고. 누구든 될 수 있는 이 능력만 있으면 사실 요절내는 건 너무 식은 죽 먹기라서 말이야. 지금 이 상황만 봐도 하이드의 유일한 핏줄인 스노우 퀸과 안타리우스 놈들이 그토록 탐내는 그림자 여왕을 나는 너무나도 쉽게 손에 넣었지. 가짜는 절대로 진짜가 될 수 없다고 했지만 결과를 보라고? 결국 껍데기(皮相)에 속아 넘어가는 게 인간이야. 벨져 홀든, 네놈 앞에는 언젠가 그 모르모트 노친네 모습으로 나타나줄까?”
“감히……그 더러운 입으로……제레온 경을 모욕하지 마라―!!!!”
“모욕? 난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받아들이는 입장까지 고려하라는 건 억지지. 내가 한 가지 충고하겠는데 말이야, 그 검의 형제 기사단인가 뭔가 이대로 계속 비밀주의로 가다간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거라곤 장담 못하겠어. 하긴, 그 때문에 안타리우스놈들이 되게 너희를 성가셔하는 것 같기는 하더라고. 피험체 주제에 대놓고 대항하려는 것도 고까워하는 눈치고. 그 늙은이, 딸 걱정을 별로 안 하나봐? 뭐어, 나야 계속 지금처럼 신비주의로 나가주면 다음에 또 한바탕 벌이기엔 좋지만 말이야. 선택은 어디까지나 네놈의 몫이야.”
“…….”
잭의 유들유들한 말투에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지로 삭이는 와중에도 벨져는 잭이 가지고 놀 듯 손 안에서 굴리고 있는 기폭장치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어이쿠- 이런, 벌써 시간이. 피날레로 화려한 불꽃놀이까지 구경하고 커튼콜을 듣는 시나리오였는데, 더 느적거리다간 나까지 폭죽이 되어버리겠어. 그럼 나는 이만 퇴장하도록 하지. 워- 워- 내가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 꼼짝도 하지 말라고. 기폭장치는 보이는 데다 어련히 알아서 놔두고 갈 테니까. 나도 저 새의 노랫소리가 맘에 들어서 죽이고 싶진 않거든.”
잭은 기폭장치를 내보인 채로 히죽거리며 입구까지 뒷걸음질쳤다. 잭이 엉거주춤 바닥에 기폭장치를 내려놓고 후다닥 등을 돌려 어둠 속으로 몸을 내던지자마자, 벨져는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에 잭의 뒤를 쫓아 나갔다.
잔상조차 남기지 않고 눈 깜짝할 새에 사라져버린 벨져의 뒷모습을 앤지는 멍하니 눈으로 좇았다. 날카로운 파찰음이 들리고 묵직한 쇠붙이가 연거푸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자 문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루이스가 그 사이 자물쇠와 손발을 옥죄던 구속구를 뜯어냈는지 나오라는 듯 말없이 새장문을 잡고 서있었다. 마주치지 않는 눈은 앤지의 어깨 너머 허공쯤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앤지는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던 슬픔이 엉금엉금 기어 나와 고개를 빼꼼 내미는 것을 느꼈다. 그토록 나가고 싶었는데도 지금은 감옥 밖으로 한 발짝 내딛는 것조차 무서웠다.
“……고마워, 루이스. 구해줘서…….”
앤지가 스쳐지나가며 체념하듯 흘린 한 마디에 루이스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앤지의 연심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알게 되자마자 그간 앤지와 쌓아왔던 소소한 추억들이 지금까지와 다른 의미로 변색되어가는 것을 자각하는 자신에게 욕지기가 치밀었다.
뒤늦게야 깨달았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루이스가 끝내 연인을 구하지 않고 젊은 영웅으로서 지하연합의 수장을 구하러 왔을 거란 사실은 슬프도록 흔들리지 않았다. 앤지가 상처받는다 해도, 트리비아의 죽음을 두 눈 뜨고 보게 되더라도.
남은 시간 동안 이대로 여기 가만히 서서 트리비아와 한날한시에 폭발에 휩싸여 죽어버릴까. 더없이 유혹적인 구상에 앞뒤 안 재고 휩쓸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허나 비틀비틀 입구를 향해 걸어가는 앤지의 뒷모습을 외면할 수가 없다. 벨져가 잭을 추격하러 간 이상 앤지를 지하연합까지 안전하게 호위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트리비아의 뒤를 따르는 건 그 모든 것을 수행한 뒤여야 했다.
“트리비아, 미안해. 미안해…….”
여태 그래왔듯이 오늘도 미룰 수밖에 없는 스스로를 저주하며 루이스는 또 다시 버릇처럼 사과를 읊조렸다.
자정까지 남은 시간 23분.
* * *
넷을 기절시키고 남아있는 것은 여섯,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서는 벗어났다고 해도 자네트가 혼자라는 사실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상태라도 온전하면 모를까 오른쪽 옆구리와 왼팔에 총상을 한 대씩, 등에는 컴뱃나이프가 깊이 할퀴고 지나간 자상이 제 아픔을 알아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양다리와 오른팔을 다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일 지경이다.
용병들은 예상대로 머릿수가 더 많다는 이점을 마다하지 않고 살렸다. 한 무리가 자네트의 주의를 끌면 나머지가 자네트의 사각으로 비집고 들어오거나 일부는 중거리 지원으로 빠지거나, 정당한 승부라는 것 없이 오로지 생존에 천착해온 이들답게 꼼수가 난무했다. 살상을 감수하면 전투는 훨씬 수월했겠으나 그러고 싶진 않았다. 돈만 받으면 아이건 여자건 다 죽이는 족속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자리에서 일찌감치 처단하는 것이 백 번 옳을 성싶으면서도, 이들에게도 부양해야 할 가족은 있지 아니한가 아량을 베풀고 싶어지는 것이다.
무방비 상태인 트리비아를 지키며 싸워야 하는 것도 약점이 되었다. 총질이 난무하는 현장이다 보니 자네트를 빗나간 탄환이 트리비아의 배와 다리에 맞고 말았다. 눈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총격을 당하면 놀라서라도 비명을 지를 법한데, 그러지 않아서 자네트는 트리비아가 다쳤다는 걸 전투가 시작한 이래로 꽤 늦게 알아차렸다. 그것도 제 눈으로 발견한 게 아니라 용병 하나가 싸우던 도중 목격했는지 동료들에게 온갖 육두문자를 더해 조심하라고 소리를 질러서 알게 된 거였다. 인질을 걱정하는 납치범의 수족들이라니 황당무계하지만, 그게 나중에 여자를 능욕하려는 심보에서 비롯된 행동임을 알기에 자네트는 분노하며 트리비아가 갇힌 새장 주위를 떠나지 않고 보호하며 전투에 임했다. 행동반경이 제한되니 당연히 공격 사거리도 회피 범위도 현저히 좁아져 불필요한 부상을 입는 건 필연이었다.
“난 신경 쓰지 말고 싸우도록 해.”
격렬했던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자네트와 용병들이 피차 숨을 헐떡이며 서로의 형세를 말없이 주시하고 있는 때, 트리비아가 조용히 자네트에게 한 마디 건넸다. 자네트는 홱 뒤로 돌아 트리비아를 노려보고 싶은 충동을 죽이며 바싹 말라있는 입술을 콱 깨물었다. 구체적이지는 않았던 트리비아에 대한 미움과 질투가 내면에서 삽시간에 윤곽을 갖추어 갔다.
“마음껏……싸우라고? 지금 그걸……말이라고 하십니까?”
몸은 떨려도 검을 쥔 손에는 동요가 옮지 않도록 자네트는 칼자루를 부러뜨릴 듯 억세게 쥐었다.
머리 한 구석에서는 트리비아가 자기를 보호하며 싸우다가는 더 시간을 지체하고 상황이 나아질 것이 없다는 이성적인 판단을 고한 것이리라 냉정하게 납득했다. 불행히도 극심한 체력 소모와 정신적 피로 거기에 마음의 상처까지 겹친 자네트는 그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일 만한 상태가 못 되었다. 남은 목숨 걸고 지켜주려 하고 있는데 알량한 자존심에 걸림돌이 되기 싫다는 이유로 목숨을 쉽게 내던지려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당신이 죽으면 그가 슬퍼할 게 뻔한데―!!”
악 쓰듯 절규하며 다시금 용병들에게 달려들려다가 자네트는 흠칫 발끝에 힘을 주고 관성처럼 나아가려는 몸을 억제했다. 용병들마저도 공격해오려는 자네트를 보고 방어태세를 취하다 말고 황급히 폐공장 입구를 돌아보았다. 자네트를 등지고 배후를 훤히 내주는 셈이었지만, 생존에 특화된 본능이 더 커다란 위험이 전방에 도사리고 있다고 경고를 보낸 까닭이었다.
“오라…버니……?”
자네트는 자기도 모르게 말끝을 올려 묻고 말았다. 무심결에 군침을 삼켜 타는 목을 축였다.
다이무스가 태도를 뽑아든 채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침입자를 경계하며 총을 겨누기 바빠야 할 용병들도 제자리에 굳어버린 채 미동도 못하고 있다. 도저히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탓이었다. 이 드넓은 폐공장 내부 구석구석까지 뻗칠 정도로 어마어마한 살기를 다이무스는 거칠 것 없이 내뿜고 있었다.
자네트는 이토록 화가 난 다이무스를 난생 처음 보았다. 투지를 넘어선 다이무스의 살기도 피부로 처음 접해보았다. 얼굴 모양새만은 평소의 그와 다름없이 단정한 무표정이건만, 진중한 눈썹도 강경한 입술도 어쩐지 다 낯설고, 무엇보다 지옥불이 타고 있는 것 같은 검푸른 눈동자가 가장 생경했다.
용병들은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을 떠나 공기나 다름없는지 다이무스는 그들을 지나 자네트를 스쳐 트리비아가 갇힌 새장 앞까지 와서야 멈춰 섰다. 트리비아의 복부와 다리에 난 총상을 보더니 조용히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쥐 죽은 듯이 고요한 가운데 칼자루를 고쳐 쥐는 그 소리가 곧이라도 칼날이 심장으로 푸욱 파고들 것만 같은 착각에 빠뜨려 용병들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물러가라.”
조용한 한 마디였지만 분노를 있는 대로 쏟아내는 고함보다도 무서웠다.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는 말이었지만 용병들은 곧이라도 자기 목을 뎅겅 베어갈 것 같은 태도의 시퍼런 칼날에서 줄곧 눈을 떼지 못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 사람이 못할 짓은 없었다. 삶에 집착하는 용병들이기에 더욱더 죽음 앞에서 솔직했다. 문제는 슬기로운 임기응변과 도리어 죽음을 재촉하는 짓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졸렬한 습성을 이기지 못하고 한 용병이 공포심에 되는 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아아, 저 여자가 형씨 여자요? 거, 걱정 마쇼! 터, 털끝 하나도 아, 안 건드렸으니까. 보, 보시다시피 저렇게 가, 갇혀있는데 우리가 뭐, 뭘 어, 어떻게 손을 댔겠소? 다, 다치게 한 건 고의가 아니라 그게……어쩌다보니……. 여, 여보쇼! 우, 우리는 그냥 고용주가 시키는 대로 저, 저 여자를 구하러 오는 놈들은 마, 막으라는 지시를 받았을 뿐이오! 우, 우리는 죄가 없소! 그, 그러니까―.”
“꺼지라고 했다!”
다이무스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용병들에게 칼을 겨누었다. 안개처럼 분자 상태로 퍼져 있을 때도 위협적이었던 살기가 한꺼번에 뭉쳐 가슴 한가운데를 관통하고 지나가자 용병들은 사색이 되어 총을 떨어뜨리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앞에서 당장 사라졌으면 하는 것들이 되레 겁을 먹고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을 보고 꼴도 보기 싫은 듯 다이무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도로 트리비아를 보고 섰다.
“―!! 오, 오라버니! 23시 56분입니다! 곧 폭탄이 터질 것입니다. 얼른 빠져나가야 합니다!”
자네트는 얼이 빠져 다이무스의 행동거지를 보고 있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잊고 있던 시간을 확인하고는 재촉했다. 다이무스가 흩뿌리는 위압감에 사로잡혀 있던 용병들은 폭탄이라는 말을 듣더니 아비규환이 되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기특하게 기절해 있는 제 동료를 하나씩 업고는 줄행랑쳤다.
“크리스티네, 너는 먼저 밖으로 피해 있어라.”
무어라 항변하려다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어쩔 수 없이 납득하며 자네트는 주춤주춤하다가 뿌리치듯 입구를 향해 뛰었다.
다이무스는 새장 창살을 크게 베어냈다. 토막 나서 파이프가 된 창살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아플 거다.”
다이무스는 트리비아의 날개를 물어뜯고 있는 금속제 와이어를 끊어내기 전에 한 마디 했다. 팽팽한 철사들이 칼에 끊겨 일시에 튕겨 나가며 생기는 충격파가 고스란히 날개로 전해져 와 트리비아는 고통스러움에 몸을 떨었다. 상당히 아플 텐데 신음 한 자락 흘리지 않는 트리비아의 모습이 애처로웠다. 최대한 덜 아프게 구출해낼 수 없는 상황이 다이무스의 분노를 더욱 부추겼다.
“오라버니, 어서―!!”
자네트가 비명처럼 다이무스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트리비아의 발목을 묶은 밧줄을 끊을 시간은 없다 판단하며, 다이무스는 수갑과 연결된 쇠사슬만 잘라내고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트리비아를 안아 올려 공장 입구를 향해 빠르게 뛰었다.
다이무스가 공장을 벗어나자마자 이 일대의 황폐함이 빚어낸 그간의 적막을 더 이상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콰앙하고 굉음이 터지며 폐공장이 폭발했다. 후폭풍에 등 떠밀리듯 다이무스는 트리비아의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꼭 껴안고서 자기 몸이 먼저 바닥에 부딪치도록 하여 멀리 몸을 내던졌다.
정적을 찢어발기는 폭발음이 떠안긴 경황없음이 겨우 추슬러졌다 싶었을 즈음, 다이무스는 트리비아의 등을 한 팔로 받친 채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아까 미처 끊지 못한 발목의 밧줄을 잘라내고 눈가리개를 풀어주었다. 눈꺼풀을 파르르 떨더니 트리비아가 천천히 눈을 열었다. 다이무스는 슬픔을 닮은 안도에 휩싸이며 충동적으로 트리비아를 껴안았다.
트리비아는 반사적으로 힘이 하나도 없는 팔을 들어올려 넓은 가슴팍을 밀어내려고 했다. 다이무스는 트리비아의 부상이 생각나 아차 싶었는지 밀리는 대로 밀리는 듯하다가도 불안한 듯 트리비아를 더욱더 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다이, 무스…….”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
따뜻하다. 트리비아는 그제야 자기가 갇혀 있는 동안 아주 많이 추웠음을 깨달았다. 이 싸늘한 몸이, 한겨울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냉랭함이 온기에 목말라 있었음을 눈치 채지 못했었다.
마주 끌어안아 주어야 할 것인가 주저하는 차에 다이무스의 어깨 너머로 슬픔이 역력한 자네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타는 공장 불빛이 어른거리는 눈동자는 원망스레 다이무스의 등을 담고 있었다. 이윽고 외면하듯이 자네트가 뒤돌아섰다.
질끈 눈을 감았다. 닳고 닳은 루이스의 뒷모습이 지금 이 순간 눈꺼풀 뒤로 유독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동안 견뎌왔던 것을 모두 놓아버리듯 트리비아는 잠의 수렁으로 떨어져 갔다.
“앨리셔?”
“…….”
“앨~리~셔~.”
“…….”
이글은 벤치에 나란히 앉은 앨리셔의 눈앞에 대고 손을 왔다갔다했다. 아무리 살짝 눈을 내리깔고 있다지만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처음 봤을 때처럼 머리 뒤로 비치는 후광은 오늘도 여전한데, 그 빛이 역광이라도 되었는지 앨리셔의 낯빛은 눈에 띄게 어두워져 있었다. 이래서 말하기 싫었던 건데, 이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슬픔을 머금은 연인의 옆모습을 가만히 보았다.
이틀 전 있었던 경악스러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앨리셔와 함께 트리비아의 행방을 열심히 수소문하다가, 자정을 넘겨 낭패감을 맛보고 있을 때 다이무스로부터 트리비아를 찾았으니 복귀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앨리셔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부리나케 까미유의 병원으로 달려가니 다이무스는 자네트의 병실에 있었다. 트리비아는 극도로 피로가 누적된 상태에서 총상까지 입어 수술이 끝난 뒤에도 면회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앤지는 부상은 없지만 트리비아와 마찬가지로 사흘간 아무런 영양도 섭취하지 못하고 극심한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절대안정이 필요한 상태였다.
자네트의 병실에 모인 세 사람을 찾아와 루이스에게서 들은 사건의 전말을 알려준 것은 토니 리켓이었다. 벨져가 범인이 아니라 내 그럴 줄 알았다고 의기양양하면서도 다행스러움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편으로는 이번 사건이 많은 파국에 직면하게 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았다. 루이스와 트리비아의 관계하며 그 틈바구니에서 난처하게 된 앤지, 트리비아를 구한 다이무스와 그런 형을 꼼짝없이 지켜보아야 했던 크리스티네의 심정까지도. 가짜는 그 모두를 최측근에서 관찰한 것마냥 미묘하게 얽힌 감정 노선을 올올이 헤아리고 있었다. 누구든 될 수 있는 능력이 대체 얼마나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소리일지 오싹했다.
놀라운 것은 토니의 이야기를 다 듣고 하나같이 넋이 나가 있을 때, 잭을 추적하다가 놓치고 뒤늦게 온 벨져에게 다이무스가 사정없이 한 방 먹였다는 거였다. 더 놀라운 건 피하려면 피할 수도 있었던 것을 벨져는 아무 말도 않고 무표정하게 터진 입가에서 나는 피를 손등으로 감추기만 했다. 이글은 단단히 별렀던 제 주먹을 슬그머니 숨겨야 했다.
벨져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일에서 가장 큰 책임을 떠안고 있는 게 또 벨져였다. 뒷맛이 하나같이 씁쓸하고 찝찝한 일이라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도 간청을 하니까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만 빼놓고서 어떻게 된 영문이었는지 앨리셔에게 알려주는 현재였다. 앨리셔야말로 이 일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타인의 불행을 제것처럼 받아들여 가슴 아파 하고 있다.
이글은 아까는 마음속으로만 내쉬었던 한숨을 이번엔 정말로 후욱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앨리셔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불쑥 손을 뻗어 앨리셔의 두 뺨을 잡고 자기를 보게 만들었다. 앨리셔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글을 내려다보았다.
“하여간 우리 공주님은 걱정이 많아서 탈이라니까. 지난번에 못했던 데이트 오늘 겨우 하는 건데 계속 이렇게 시무룩해 있을 거야?”
“아, 죄송해요. 그…….”
“괜찮으니까 말해봐.”
“……무서워서요.”
“무서워?”
전혀 예상 밖의 말이 나오자 이글은 되물으며 눈을 꿈뻑였다. 앨리셔가 치맛자락을 틀어쥐는 것을 보고 뺨을 어루만지던 손을 내려 무언가를 혼자 견디고 있는 듯한 가냘픈 손을 어딘가로 이끌듯이 다정하게 그러쥐었다. 큰 손이 따뜻하게 감싸오자 옹송그리고 있던 작은 손이 스르륵 힘을 빼고 풀어졌다. 앨리셔는 자유로이 나는 독수리의 독존 영역인 하늘을 연상시키는 이글의 푸른 눈을 물끄러미 보다가 조심조심 말을 꺼냈다.
“제가 만약 그런 상황에 처했으면 어땠을지를 상상하니까 너무 두려운 거 있죠? 무엇보다……단순히 겉모습만 같은 가짜를 보고 이글 씨라고 생각해버릴까봐 그게 제일 겁이 나요. 이글 씨에 대해서 잘 안다고 단단히 착각하고 있던 자기자신과 마주보게 될까봐 그것도…….”
가정만으로도 정말 무서운지 포갠 손에서 미세한 떨림이 전해져왔으나, 앨리셔는 알기나 할까. 지금 자기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말을 하고 있는지. 이글이 툭하면 좋아한다 사랑한다 할 때마다 홍당무가 되어선 ‘저도요…….’라고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말하는 게 전부면서, 종종 이렇게 자각 없이 실로 대담한 고백을 하고는 한다. 꾸밈없는 진심이 이렇게 예쁘고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인 줄 이글은 앨리셔를 통해서 알았다.
심각하기 그지없는 앨리셔와 달리 이글은 싱글벙글했다.
“절대로 그렇게 안 되는 정말 쉬운 방법이 있는데. 우리 공주님은 너무 똑똑해서 어려운 문제만 잘 풀고 정작 쉬운 건 놓치는 것 같단 말이야.”
“정말요? 그게 뭐에요?”
응달에 해가 비끼듯 솔직한 희망과 기대로 가득 차는 앨리셔의 순진한 얼굴을 보며 이글은 웃었다.
“간단해. 앞으로도 계속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둘만의 추억을 잔뜩 쌓아나가는 거지. 둘의 첫 만남 장소는 어디였는지, 제일 처음 받은 선물은 뭐였는지, 자잘한 거라도 좋으니까 무조건 함께 나누면 돼. 기쁜 일도 힘든 일도 서로에게 숨기지 않고 솔직히 털어놓는 거야. 그런 게 다 우리가 서로를 틀림없이 알아보는 유일무이한 열쇠가 될 테니까. 안 그래?”
이글이 제시하는 방법에 앨리셔는 감격하면서도 석연치만은 않은지 미묘한 얼굴을 했다. 우물쭈물 이글의 눈길을 피하듯 앨리셔는 마주잡은 손으로 슬며시 눈길을 떨어뜨렸다.
“기쁜 일이라면 몰라도 힘든 일까지……말예요?”
“고럼! 힘든 일일수록 마구마구 푸념하고 기대야지.”
“…….”
“어어- 이것 봐. 힘든데도 괜찮다고 거짓말할 생각이었어? 안 돼 안 돼. 쓸데없는 비밀을 만드니까 뭐든 사단이 나게 되어 있는 거라고.”
“……이글 씨가 투정부리는 제 모습을 보고 싫어할까봐 그건 그것대로 두려운 걸요.”
두 번째 급습이었다. 왜 앨리셔가 침울할수록 이글의 마음은 덩실덩실 춤을 추는지 모르겠다. 앨리셔가 이글을 좋아하는 것보다도, 자신이 앨리셔를 사랑하는 마음이 훨씬 더 크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이글이었다. 그러니 앨리셔가 괜한 걱정을 하고 있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사랑스러운 마음씀씀이가 결코 기쁘지 않을 리는 없었다.
“난 앨리셔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지만, 힘들다며 나한테 기대주면 더 좋을 것 같은데. 내가 힘들 때 우리 공주님은 나한테 무릎베개도 안 해줄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요. 이글 씨한테 힘이 될 수 있다면 전 뭐든…!”
“그것 봐. 나도 그렇다니까? 이제 알겠지?”
“……네.”
“아이 착하다, 우리 천사.”
이글은 앨리셔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그 손을 그대로 미끄러져 내려 앨리셔의 뒷머리를 잡고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촉하고 새의 암수 한 쌍이 서로의 부리를 쪼듯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부끄러움에 눈을 돌릴 것 같으면서도 꼭 이 순간만큼은 촉촉이 젖은 눈을 올곧이 맞춰오는 앨리셔였다. 그럴 때마다 이글은 심장이 철렁하며 앨리셔를 자기만 아는 곳에 숨기고 싶어지곤 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내가 앨리셔를 싫어할 리는 없으니까 걱정 붙들어 매셔요. 하도 우리 공주님이 이뻐서 눈독 들이는 것들이 어찌나 많은지 늘 노심초사하는 건 나라고?”
“이글 씨야말로 괜한 걱정이셔요. ……깃털 없이 천사는 날 수 없답니다.”
이글과 앨리셔는 둘 다 귓구멍에서 김이라도 푸슉하고 나올 것처럼 얼굴을 붉히며 함께 부끄러워졌다.
* * *
장미꽃다발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목을 단번에 끌었다. 잔뜩 흐린 오후, 건물도 하나같이 차가운 잿빛에 행인들이 걸친 옷도 대부분 어두운 색깔이라 흑백사진 같은 도심 풍경에서 홀로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까닭일 것인가. 꽃다발이 원래 괜히 한 번 쳐다보게 되는 화사한 물건이기는 해도 꽃의 여왕이라 불리는 붉은 장미를, 그것도 들고 있는 사람이 사람인지라 더욱 선망과 호기심의 눈초리를 보낸다는 것을 알 만큼 다이무스는 물정에 밝지 못했다. 도중에 꽃집에 들러야 했고 은행에서 까미유의 병원까지는 걸어서 15분이면 되는 거리라 걷고 있는 것이었지만, 이럴 줄 알았다면 차를 가지고 올 걸 하고 조금 후회했다.
꽃집에 들어서자마자 탐스럽고 싱그러운 붉은 장미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것이 화근이라 할 것인가. 영업용 미소를 띠고 친절하게 맞으며 ‘뭘 찾으세요?’라고 묻는 점원에게 아무 대답도 않고 뚫어져라 장미에만 눈길을 주었다. 점원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손님 안목이 탁월하시다느니, 이게 오늘 아침에 들여온 그 유명한 발칸의 장미라느니 한껏 들뜬 어조로 설명하다가 ‘연인에게 선물하시려는가 봐요?’라고 물어왔다. 그 질문에 다이무스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병문안 꽃다발을 사러 왔소’라며 목적을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당황한 점원은 상도덕이 투철한 건지 환자를 배려해서인지, 병문안 꽃다발은 조금 더 차분하고 마음에 안정을 주는 색조가 좋지 않을까 하며 저어했다. 다이무스도 처음에는 향기가 짙지 않고 청초하고 순결한 느낌을 주는 꽃을 사려고 마음먹고 가게에 들어선 것이었지만 장미에서 마음과 눈길이 떠나지를 않았다. 점원의 조심스런 만류에도 고집스레 ‘이걸 주시오’라고 했으니 말 다했다.
완고한 다이무스의 의지를 꺾지 못하리라 생각한 건지 어차피 장사에 더 보탬이 되는 건 비싼 장미 쪽이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 여긴 건지, 점원은 ‘아, 아아- 연인에게 병문안 가시는가 보군요? 진작 그렇게 말씀하시지!’라며 허둥지둥 꽃다발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금 찾아가려고 하는 트리비아는 연인은 아니지만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대금을 치르고 이상스런 만족감을 품은 가슴에 꽃다발을 안고서 다이무스는 가게를 나왔다.
안개꽃과 같이 흔히 장미와 함께 어울리는 다른 꽃은 일절 빼고 빈틈없이 장미로만 꽉 들어찬 꽃다발은 꽤 묵직했다. 백 송이까지는 아니지만 ‘몇 송이 드릴까요?’라고 묻는 점원에게 ‘적당히’라고 했다가, 아무래도 꽃다발이 빈약한 것 같아 세 번인가 ‘더’라는 말을 하여 지금의 이 화려한 꽃다발에 이르렀다. 한 송이만 있더라도 고귀한 존재감을 뽐내는 붉은 장미이거늘 무리를 지으니 황홀감마저 준다.
다이무스는 문득 프리츠 가의 5월 정원을 떠올렸다. 어린 날 크리스티네에게 하얀 장미 한 송이를 따다주었던 추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장미 가시가 그토록 날카로운지는 그 때 처음 알았다. 피가 흐르는 왼손을 뒷짐 져 숨기고 오른손으로 장미를 건네자 별이 깃든 것처럼 빛났던 누이의 눈동자를 기억한다. 누군가에게 꽃을 선물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인 셈이었다. 하물며 정열을 띤 붉은 장미는 태어나서 처음이다.
사람들의 눈길을 거북하다고 의식하는 것도 어느새 잊고 다이무스는 잠시 길가에 멈춰서 장미꽃다발에 가볍게 코끝을 가져다댔다. 향수의 원료로 쓰이는 장미라 그런지 순간 정신이 어찔할 정도로 풍성한 향기가 비강을 한가득 메웠다. 부드러운 장미 꽃잎과 살짝 맞닿은 입술꼬리가 저도 모르게 하늘로 끌려 올라간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차를 끌고 오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에까지 사로잡혔다. 다쳤다가 회복중인 트리비아가 걱정되기는 해도 꽃다발을 들고 찾아가는 이 길이 소년처럼 설렜다. 이런 감정을 살아오면서 달리 맛본 적이 있었던가. 요즈음의 다이무스에게는 처음이 비처럼 축복처럼 머리 위로 내리고 있었다.
병원에 도착하여 곧장 꼭대기층까지 자꾸만 서두르려고 하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계단을 올라갔다. 지금은 면회가 가능할 정도로 상처도 아물고 기력도 회복한 상태라고는 하지만 이틀 전까지만 해도 계속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절대안정을 기해야 하는 환자이기에 사람들이 드나드는 일이 가장 드문 최상층 맨 구석진 곳에 트리비아의 병실은 있었다. 그게 병환에 따른 조치만은 아닐 거라 생각하며, 복도로 접어드는 모퉁이를 돈 다이무스는 그 끝에 서있는 인물을 보고 우뚝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루이스였다. 다이무스가 온 것도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 두려워하는 눈으로 하염없이 병실문만 쳐다보고 있었다. 마침내 결심이라도 한 듯 주먹을 꽉 쥐고 문을 두드리려다 뭔가에 가로막힌 듯 멈칫 손을 뒤로 숨겼다가 그러기를 몇 차례 반복하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다이무스가 도착하기 한참 전부터 저 어리석은 되풀이를 거듭하고 있었으리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차마 노크를 하지 못하는 그 심정을 어찌 헤아려보려 한다면 헤아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허나 다이무스는 내가 만약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따위의 가정은 추호도 할 생각이 없었다. 루이스의 불행에 교만하게 자기자신을 대입해보고 그를 동정하는 것은 위선적인 모욕 행위나 다름없다. 무엇보다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트리비아를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사정 사연 다 들어 이해하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젊은 영웅을 향한 엄연한 분노와 상처 입었을 트리비아의 마음을 직시할 따름이었다.
다이무스는 잠시 멈추었던 걸음을 움직였다. 가까워지는 남자의 구둣발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루이스는 움찔 어깨를 튀며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다른 두 눈빛이 빠르게 교차했다. 청결한 평화로움만이 있던 병원 복도가 벼랑 끝자락의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무어라 딱 한 가지만 꼽기 힘들 정도로 무수한 심상들로 뒤끓고 있던 루이스의 눈동자가 다이무스가 안고 있는 강렬한 장미꽃다발로 떨어졌다. 점점이 불씨로 흩어져 있던 것들이 일시에 엉겨 붙더니 순간 광폭한 불기둥이 되어 눈 안에서 치솟아 올랐다. 얼음의 심지에서 타오르는 불은 얼마나 뜨겁고 광폭할 것인가. 그러나 겁화를 견디고 담금질된 냉철한 칼날은 혹독한 냉기도 무자비한 열기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이무스는 장미꽃다발을 쥔 손에 다짐하듯 더욱 힘을 주고는 트리비아의 병실문에 루이스가 하지 못한 노크를 전했다.
문 옆으로 뒷걸음질 쳐 비켜나 있던 루이스가 ‘들어와’라는 트리비아의 목소리가 들리자 급히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다이무스가 문을 반도 열기 전에 루이스는 다이무스가 왔던 복도를 도망치듯 달려 나갔다. 다이무스는 그런 루이스를 외면하고서 병실로 들어섰다.
날씨가 흐린데도 블라인드를 반쯤 내린 채로 병상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트리비아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고요한 호면처럼 투명한 은회색 눈동자가 방문자가 다이무스임을 확인하더니 미세한 물결이 일었다. 트리비아의 눈 안에도 한 데 뭉치지 못하고 방황하듯 잘게 찢긴 감정의 조각들이 정처 없이 표류하고 있었다.
몸은 좀 어떤가, 그렇게 안부부터 물을 작정이었던 다이무스는 성큼성큼 트리비아의 곁으로 다가가 말없이 장미꽃다발을 내밀었다. 다이무스는 연인들의 망가진 틈새를 비겁하게 절호의 기회로 삼을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다만 트리비아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을 때 누군가가 심장을 가슴 밖으로 뚝 따간 것 같은 그 비통을 두 번 다시 맛보고 싶지 않았다.
아아, 지금이라면 알 것 같았다. 꽃집에 들어서자마자 장미가 먼저 눈에 들어왔던 이유를. 한 번 밖으로 꺼내어진 심장이 거기 걸려 있었던 게다. 지금 다이무스는 트리비아에게 제 심장을 건넸다. 피처럼 붉고 장미 향기가 나는 묵직한 심장을 트리비아는 말없이 건네받았다. 비록 입가에는 미소 한 점 없었지만 다이무스의 가슴은 은밀한 희망을 딛고 활기차게 뛰어올랐다.
* * *
찻잔을 입가로 가져간 벨져는 위화감을 느끼고 양쪽 눈매를 날카롭게 치켜들었다. 얼그레이였다. 제일 좋아하는 건 아삼이지만 홍차만큼은 종류를 크게 가리지 않고 대체로 다 즐기는 편이라 대수롭지 않게 한 모금 들이켰으나, 인상이 절로 써질 만큼 떫은맛이 혀를 저릿하게 했다. 품위도 생각하지 않고 신경질적으로 찻잔을 접시 위에 도로 내려놓았다. 불편한 침묵이 창궐한 방 안에 다기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몇 배는 증폭되어 더욱 심기를 거슬렀다.
앤지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맛없는 차를 내온 적이 없었다. 아무것도 대접하지 않을지언정 대충 구색만 갖추자고 실패작을 내놓는 무례한 행동을 저지를 위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벨져의 기호에 딱 들어맞는 것도 아닌 차를 내놓은 것하며, 그마저도 빈말로도 맛있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맛없게 우려낸 것은 그만큼 지금 앤지의 마음이 온전치 못하다는 증거였다.
하물며 아무리 할 일이 쌓여 있다고는 해도, 차만 덜렁 내놓고 업무를 보면서 이야기를 듣겠다며 서류더미로 훌쩍 돌아간 전례도 없었다. 벨져는 혀를 차며 굳은 얼굴로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는 앤지를 노려보았다. 벨져가 기억하는 한 앤지가 다시 책상 앞에 자리 잡은 이후로 서류는 단 한 장도 넘어가지 못하고 첫 장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슬픔을 잊기 위해 일에 몰두하는 듯했지만 저래선 이도 저도 아니었다.
“벌써 업무에 복귀해도 되는 건가?”
“트리비아와 달리 난 외상은 없는 걸요. 푹 쉬었으니 이제 괜찮아요. 일이 산더미 같은데 가만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간 대신 업무 보느라 고생한 토니를 생각해서라도…….”
벨져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손꼽아 기다렸다는 듯 앤지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재빨리 답했다. 생각해놓은 말을 한답시고 했으나 그런 자기의 태도가 얼마나 어색한지 자각은 되는지 앤지는 이내 합죽이가 되었다.
숨통을 조르는 정적이 또 다시 앤지의 집무실 정중앙으로 소리없이 굴러떨어졌다. 벨져는 여전히 앤지를 뚫어져라 보고 있지만 앤지는 고집스레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뛰쳐가 저 서류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언제든지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하는 자존심이 한사코 뜯어말렸다.
“자기관리도 실력이다. 제 상태가 어떤지 모를 정도로 앤지 헌트는 어리석은 여자였나?”
“정말로 괜찮아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아 그리고……또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되네요. 그때 벨져가 때맞춰 와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내가 지금 사례나 듣자고 온 줄 아는가?”
“…….”
벨져는 소파에서 일어나 앤지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더 이상 외면할 수만은 없을 텐데도 앤지는 서류에 구멍이라도 낼 작정인지 계속 눈길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왜 나를 바라보지 않는 거지?”
“…….”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봐라, 앤지 헌트.”
“…….”
굳어 있는 시선만큼이나 앤지의 입술도 고집스레 침묵했다. 벨져는 굴욕과 그만큼의 비참함을 짓이기듯 입을 세게 다물었다가, 소름끼칠 정도로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꺼내들었다.
“내가 두렵나?”
“―! 베, 벨져…….”
“왜? 아예 귀까지 막아버리지 그랬나? 그래. 내 얼굴을 보면, 내 목소리를 들으면 내 가죽을 뒤집어 쓴 그놈이 했던 말과 행동들이 악몽같이 떠오르겠지. 필경 지옥일 것이다. 자, 얼마나 끔찍한지 한 번 소상히 털어놓아 보아라, 스노우 퀸.”
“…….”
“……날 보라고 했다!”
앤지는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다가 눈이 맞자, 화들짝 놀라며 게 눈 감추듯 머리를 숙였다. 벨져는 내면에서 팽팽해질 대로 팽팽해진 인내의 실이 기어코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책상을 빙 둘러가 앤지의 턱을 잡고 강제로 얼굴을 들어올렸다.
“가짜 따위에 현혹될 앤지 헌트였나? 내가 사람을 봐도 단단히 잘못 봤군 그래. 네가 그걸 모를 정도로 아둔하다면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시 가르쳐주도록 하지. 그놈은 가짜였다는 걸, 지금 네 눈앞에 있는 것이야말로 감히 다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벨져임을 똑똑히 새겨주마.”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이 얼굴을 맞대고 벨져는 으름장을 놓았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벨져의 눈을 흔들리는 눈빛으로 감내하던 앤지의 눈망울에는 곧 눈물이 그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안구 표면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흐르지 않으려 저항하던 눈물이 끝내 범람하여 뺨을 적셨다. 앤지의 눈물을 본 벨져가 흠칫 놀라며 손을 놓고 몸을 뒤로 뺐다. 눈물이 시야를 흐려주는 덕분인지 앤지는 종전처럼 벨져의 눈을 피하지 않고 오롯이 마주했다.
“어떡하죠, 벨져? 이렇게 된 건 전부 나, 나 때문이에요…….”
“…이제는 자학인가? 차라리 피해망상에 빠져 있는 편이 더 보기 좋을 것 같군.”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는 앤지의 눈을 들여다보며 벨져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입으로는 비릿한 미소를 띠고서 한껏 비꼬았다. 앤지는 눈물은 나와도 울음소리는 내지 않으려고 애쓰듯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내가 루이스의 모습을 한 가짜에게 속아 넘어가지만 않았다면, 설령 트리비아가 납치되었더라도 루이스는 마음 편히……아니, 마음 편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나 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트리비아를 구할 수 있었어요…….”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걸 생각해라. 트리비아 카리나가 납치되지 않았다면 그놈은 별 문제 없이 너를 구했을 거라고!”
“아뇨. 그건 아녜요. 나는……벨져 나는, 나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닌 몸입니다. 나는 지하연합의 수장이에요.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와 같은 위기에 빠져서는 안 될 의무가 있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제 소속 능력자도 변변히 알아보지 못하고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그래요. 벨져 당신 말대로 나는 수장일 자격도 없는 너무나도, 너무나도 어리석은…….”
“지하연합의 수장? 그런 건 내 알 바가 아니다! 나는 인간 앤지 헌트의 얘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직책이 너의 전부인가? 적어도 나는 너의 지위나 혈통 따위를 보았을 작정은 없다. 내가 너를 처음 만났을 때 너는 아직 수장도 뭣도 아니었다. 그저―.”
벨져는 말을 그쳤다. 목뼈가 두 동강 난 것처럼 앤지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매달리듯 벨져의 두 팔을 부여잡은 것이다. 팔을 붙들고 있는 가녀린 손이 안타까운 떨림을 여실히 전해왔다.
“가르쳐줘요, 벨져. 나는 이제 어쩌면 좋죠? 무슨 얼굴로 루이스를 봐야 할까요? 트리비아한테도 너무……미안해서……. 이제 난 루이스를……루이스를…….”
말을 잇지 못하고 앤지는 숨 죽여 울었다. 흐느끼는가 싶더니 그마저도 자격 없음을 스스로 단속하는 것처럼 음소거를 하고 속에서만 요동치는 울음에 어깨를 들썩였다.
앤지가 못 다 한 말을 벨져는 짐작할 수 있었다. 정황만 전해 들었을 뿐 잭이 정확히 무슨 말을 지껄여 루이스와 앤지를 농락했는지는 모른다. 지금처럼 추궁해도 말해주지 않을 거란 예상도 했다. 다만 벨져는 루이스를 향한 앤지의 연심만은 싫을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번 일이 앤지로 하여금 루이스에 대한 마음을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했음 또한 알 수 있었다. 설령 이번 일로 루이스와 트리비아가 헤어지더라도 그가 자신을 선택할 일은 죽을 때까지 없으리라는 절망이 앤지를 짓누르고 있는 것일 테다.
당장이라도 앤지를 감싸 안아주고 싶다. 걷잡을 수 없이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해주고 싶다. 벨져는 앤지의 손아귀에서 팔을 확 빼내어 떨리고 있는 어깨에 닿기 직전 멈추고 말았다. 앤지는 지금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다. 있는 대로 벌어져 있는 마음의 틈새로 파고들기란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 건 사절이었다. 앤지가 몸소 벨져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다면 다 부질없었다. 비겁하게 얻은 마음은 비참함을 낳을 뿐이다.
매달릴 곳을 잃은 앤지의 손이 눈물에 젖은 얼굴 위로 덮이는 것을 보며, 벨져는 다시 한 번 그녀를 향해 내뻗어지려는 팔을 억눌렀다. 앤지의 머릿속이 어찌할 도리가 없을 만큼 이 벨져로 가득 찼을 때 비로소 그녀를 품에 가두리라. 맹세하듯 벨져는 칼자루를 쥐며 소리 없는 앤지의 울음을 가만히 들어주었다.
* * *
억지로라도 잠을 청했어야 했다. 끔찍한 갈림길 앞에 서야 했던 악몽 같은 그날의 사건 이후로 잠들지 못하는 밤은 끊이지 않고 있었다. 달이 이울었다 다시 차올라 돌아온 보름의 밤인 오늘, 커튼 치는 걸 잊은 창가로 새어드는 환한 달빛이 유독 더 불면을 강요해왔다. 창가에 기대어 멍하니 시린 만월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처음에는 트리비아가 먼 하늘에서 하강해오는 줄 알았다. 깜짝 놀라 창문을 열어 몸을 반쯤 내밀고 보자, 그게 트리비아 본인이 아닌 그녀의 사역마인 그림자박쥐라는 것을 알았다.
박쥐는 팔랑팔랑 들어와 달빛이 닿지 않는 방 안쪽 어둠 속을 날며 루이스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는 듯한 동태에서 박쥐가 루이스를 어딘가로 안내하기 위한 사자로 보내졌다는 것을 눈치 챘다. 이 박쥐를 따라간 곳에 주인인 트리비아가 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다. 끝내 병문안 한 번 하지 못하고 병실 앞에서 무의미한 시간만 흘려보낸 졸렬함이 여태 나아질 기미를 안 보였다. 미치도록 보고 싶은데 봐서는 안 된다는 위기의식이 자꾸만 도리질을 치는 것이다.
함께 보내는 밤이 아니면 아침형 인간인 루이스는 자정이 되기 전에 잠이 든다는 걸 트리비아는 알 터였다. 그럼에도 부러 이 ‘늦은’ 시간에 박쥐를 보낸 것은 그녀 나름의 도박이었을 것인가. 아니면 15일 전의 그 날과 똑같이 보름달이 휘영청한 이 밤, 루이스가 잠들지 못하고 있을 것을 알고 겨냥한 것인가. 도박이라면 가망이 있었고 노렸다면 외통수였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불안한 예감이 메슥메슥 속을 어지럽히는데, 루이스는 자기가 무엇을 이토록 두려워하고 있는지 애써 알아차리지 않으려 했다. 박쥐의 존재를 묵살하고 이불을 뒤집어써 이마적 오지 않는 잠을 기다리고 싶지만, 박쥐는 트리비아의 오감과 이어져 있다. 트리비아가 이미 루이스가 깨어있다는 걸 봤는데도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루이스는 참담한 기분으로 옷을 갈아입고 숙소를 나섰다.
박쥐가 루이스를 이끌고 간 곳은 코어레너드에서 가장 높은 미국계 무역회사
건물을 타고 박쥐는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높은 곳을 좋아하는 트리비아답게 옥상에 있는 듯했다. 루이스는 심호흡하고는 결정 슬라이드로 건물 외벽과 거의 수평을 이루고 올라가 옥상 위에 안착했다. 난간에 걸터앉은 트리비아의 뒷모습이 바로 보였다. 갓 옥상에 도착했는지 박쥐는 내뻗은 트리비아의 손 위에 새처럼 앉더니 검은 안개가 되어 손끝에서 흩어졌다.
“……트리, 비아…….”
용기 내어 루이스는 트리비아를 불렀다. 그동안 한순간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꿈에서조차 매일 보았던 연인인데, 참으로 오랜만에 입에 담아보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가움, 이는 연인 사이에 느낄 감정은 아니었다. 가장 가까운 사이여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과 오랜만에 재회했을 때나 드는 인상에 맨 먼저 사로잡히고 마는 것인가. 루이스는 제멋대로 납득 못할 감정에 휩싸이는 속내에 이를 까득 갈았다. 허상을 쫓아내듯 고개를 좌우로 털었다.
불러도 못 들은 것처럼 여전히 등을 보이고 있는 트리비아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달이 온 누리가 아니라 오로지 트리비아를 비추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앞모습은 환한 달빛에 샅샅이 드러나 있을 텐데, 루이스가 보고 있는 뒷모습은 달의 이면처럼 짙은 그림자로 뒤덮여 있었다. 앞으로는 달빛이란 낚싯줄에 걸려 홀연히 달로 건져올려질 것 같고, 뒤로는 그녀 자신의 그림자 늪으로 풍덩 빠질 것 같았다. 어느 쪽이든 그녀가 사라져 버리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자, 제 손으로 트리비아를 죽인 거나 다름없다고 절망한 그 때의 그 기분이 선명히 되살아났다. 마음이 다급해져 뭐든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쫓겼다.
“미안해! 미안해, 트리비아. 미안……. …….”
미안한 마음은 티끌 하나 없이 진실했으나 심정에 비해 사과의 말은 턱없이 보잘것없었다. 트리비아가 고작 사죄나 받으려고 불러낸 게 아님을 알고 있는데도 불안은 제멋대로 침착함을 마모시켰다.
침묵하며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트리비아가 잠깐 고개를 돌려 뒤돌아보는 듯하더니 날개를 펼치고 난간을 박차며 훌쩍 날아올랐다. 이대로 밤하늘로 떠나버리는가 싶어 루이스는 난간 앞까지 달려가 공중으로 손을 뻗었다. 트리비아는 날개를 펄럭이며 루이스의 손이 닿을락말락한 허공에 서서야 비로소 뒤돌아보았다.
미미한 슬픔을 감춘 지독스런 무표정을 하고 있을 줄 알았던 트리비아는 뜻밖에도 미소 짓고 있었다. 보름달의 가호를 받아 요염한 윤기가 흐르는 짙은 머리카락과 날개가 아름다웠다. 달빛을 등지고 있어서인지 그늘진 얼굴에 은회색 눈동자는 달의 분신인 양 신비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앤트워프에서 위기에 처한 루이스를 구한 것이 천사가 아니라 ‘악마’였음을 새삼 곱씹었다.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잘 버텨주었다며 칭찬하듯 눈꼬리를 살짝 휘며 지었던 매끄러운 미소가 아니라, 자조의 색을 띤 미소가 붉은 입술 위로 번져 있다는 점이었다.
첫인상도, 갓 연인이 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강하고 늠름하며 고고한 줄로만 알았던 트리비아였다.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지금 보고 있는 저 깨질 것만치 연약한 미소야말로 그녀의 본질이라는 걸 이제는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루이스는 여전히 처음 만난 날 이래로 트리비아에게 의존하고만 있었던 거였다. 아무도 죽게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누구보다 지켜주고 싶은 트리비아는 예외였고,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가 불가피한 선택의 면죄부인 양 착각하고 있었다. 무슨 자격으로, 무슨 자신감으로 그녀에게 한낱 영웅의 연인이기를 강요했단 말인가.
“루이스.”
“…….”
“루이스.”
“…….”
트리비아의 눈과 마주하자 루이스는 뜻도 모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라고, 안 된다고 그녀의 입에서 지금 나오려고 하는 말을 막아보려 무의미하게 저항했다.
“진작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트리비아는 계속해서 가로 젓는 루이스의 고개를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붙잡았다. 이대로 트리비아의 손을 잡고 끌어당겨 껴안아버릴까. 붙잡힌 루이스는 트리비아와 고스란히 눈길을 얽으며 생각했다. 슬픈 미소가 보이지 않도록, 아무 말도 못하도록, 숨이 멎을 정도로 두 팔로 꽉 휘어감으면, 그러면 피할 수 있을까. 몸은 오히려 꿈쩍도 하지 않는다.
“루이스, 우리 이제……그만하자.”
끝내 트리비아의 마음에서 떠나 밖으로 나오고야 만 한 마디에 루이스는 모든 소리가 귀로부터 멀어져가는 느낌을 받았다. 깊은 밤, 사위는 원래 고요했지만 정적이 작은 침묵들을 잡아먹고 제 덩치를 더 크게 불리고 있는 중이었다. 먹먹해지는 귀와 반비례하여 루이스의 마음속에서는 ‘뭘?’이라는 물음이 크게 메아리치고 있었다. 몇 번 울리다 마는 게 아니라 이편과 저편 사이를 오가며 점점 더 커지는 소리였다.
트리비아가 무엇을 말했는지 알면서도 이해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용을 썼다. 오아시스를 잃은 사막이 된 마음에도 왈칵 눈물이 솟아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루이스의 눈물을 본 트리비아의 눈썹이 아래로 처지고 미간에는 슬픔이 고이며 좁혀들었다. 트리비아도 울음을 참듯 얼굴을 찡그렸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루이스의 관자놀이를 잡고 있던 손이 미끄러져 내려 젖은 양 볼을 상냥하게 어루만졌다. 이번에는 트리비아가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루이스가 고개를 가로저은 것에 대한 부정이었다. 루이스는 입술을 깨물며 뺨을 어루만져주는 두 손을 겹쳐 잡고, 곧이라도 비집고 나올 것 같은 오열을 억눌렀다.
“……차라리……원망하고 탓하기라도 해……. 왜…… 왜…….”
울음이 차오르는 목구멍을 틀어막듯 루이스는 고개를 아래로 꺾었다. 난간 위로 떨어져 방울진 눈물 위로 야속한 달이 영글었다.
소리라도 지르며 때리고 미워하기라도 하면 이렇게 아플 것 같지는 않았다. 이해한다고는 하지 않지만 서운하다고도 하지 않는 트리비아가 도리어 원망스러웠다. 하나부터 열까지 맞지 않아 사사건건 싸웠던 나날이 무색하도록 이별은 왜 모든 것을 없던 일로 되돌릴 것처럼 구는가.
트리비아가 이제는 루이스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겠다는 의사였다. 배반당하는 것에 대해, 예외가 되어야 하는 것에 대해 켜켜이 쌓인 묵은 밉살스러움까지도 몽땅 걷어내 버리겠다는 거였다. 잘못했다고 빌 수도 없게, 가지 말라고 애원할 수도 없게 트리비아는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려 하지 않는다. 결별에 대한 예의 같은 슬픔만이 있을 뿐, 지난날에 관하여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는 태도가 루이스에게는 훨씬 잔인했다.
“왜, 싸워보지도 않고……기회조차 주지 않고……왜…….”
기회는 많았다. 붙잡지 않았을 뿐이다. 이해해주리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만회를 미루고 인내를 강요했다.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가장 소중한 것은 뒷전으로 한 채 앞만 보고 걷다가, 똑같이 어쩔 수 없는 이유로 결국엔 발이 묶이고 말았다. 나의 어쩔 수 없음은 이해해달라고 하면서도, 너의 어쩔 수 없음은 부당하다며 고개를 젓고 있다.
걸핏하면 어긋나 다른 연인들처럼 달콤한 시간이 마땅치 않으면서도 헤어진 적은 없이 함께 해온 시간에 앞으로도 쭉 그러하리라 믿었다. 내가 뭐라고 나는 예외일 것이라 믿었단 말인가. 헤어지는 이유가 이번 일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서 더 억지생떼를 쓰고 싶었다. 언젠가는 일어나고야 말았을 일이고, 하필 그게 오늘임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트리비아는 부드러운 손길로 루이스의 고개를 들어올렸다. 평소에는 우아하다고 생각했던 일련의 동작들이 이별의 끝에서 최대한 상처주지 않으려는 듯 조심하는 것만 같아 서러웠다. 눈물은 애원처럼 솟아 파문이 인 수면처럼 시야를 흔들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아름답지 않은 적이 없었던 트리비아의 얼굴이 물에 풀린 잉크처럼 기묘하게 일그러져 보였다. 트리비아의 엄지가 눈물 고인 눈가를 달래듯 닦아주었지만, 가죽장갑으로 눈물이 스며들 리도 없고 번지기만 한 눈물은 바람에 마르며 두 뺨을 싸늘히 식히기만 했다.
소용없다는 걸 알았는지 트리비아의 손가락은 눈가를 떠났다. 대신 얼굴이 가까워져 왔다. 차갑지만 부드러운 감촉이 이마 위로 스치듯 잠깐 닿고서 멀어졌다. 이마 위 따위가 아니라 같은 입술로 찾아들어야 했다. 뒷머리를 휘어잡고 당장이라도 그녀의 숨을 들이켜 답답한 이 숨통을 트여주고 싶어도 이제 그 향기는 내 것이 아니다. 더 이상 트리비아의 연인일 수 없는 현실이 엄습해 와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
“안녕, 루이스. 안녕.”
점멸하는 빛 같이 흐린 미소와 함께 트리비아는 한 마디를 남기고 돌아섰다. 루이스는 손을 내밀어 허공을 긁었지만 달빛으로 녹아버린 듯 그녀는 밤하늘에 묻히고 없었다. 보름달은 여전히 자애롭게 루이스를 굽어보고 있었으나, 그믐처럼 그의 마음은 허망했다. 눈물이 흐른 자국 위가 산에 타들어가는 것처럼 아파왔다.
“……윽―.”
신음하며 관절이 툭 빠진 듯 무릎을 꺾으며 루이스는 무너져 내렸다.
대체 어찌 해야 좋았단 말인가. 트리비아를 구해야 했다는 말인가? 그건 그것대로 많은 것을 망가뜨렸을 거라는 전망 이전에, 루이스는 앤지가 아닌 트리비아를 구한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해서 연인은 떠나간 것이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란 단념이 모든 것에 끝을 고했다.
내 잘못이다. 내 잘못이다! 그럼에도 세상이 왜 내게만 이토록 잔인한가를 끊임없이 생각한다. 왜 영웅 같은 것이 되었나 자문해본다. 그 날 벨져에게 지고 그대로 죽었더라면, 차라리 그랬더라면 이 모든 고통을 몰랐을 것이다. 브랜다가 되살려 보여준 기억을 못 본 척 하고 능력을 숨긴 채 책을 읽지 않는 서점 직원으로 죽은 듯이 살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다만 돌아가고만 싶었다.
“……으아아악―!!!!”
한 남자의 고통에 찬 비명이 타인에게 무관심한 도시의 밤거리를 홀로 질주했다. 더러는 애가 끊어지는 듯한 절규에 가슴이 철렁해 창문 밖을 내다보기도 했지만, 이내 다들 잘못 들은 거라 치부하며 금방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Fin.
*
- 손에 붙는 ‘오른’과 ‘왼’이란 말의 어원은 오른≒옳은, 왼≒그른 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왜 좀 나이 드신 분들 중에 더러 오른손을 ‘바른 손’이라고 하는 걸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작중에서는 이런 어원적 의미를 차용하여 썼지만, 이적 <왼손잡이>란 노래처럼 실제로는 오른손과 왼손의 차별이 없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 앤지 목소리는 소연 님이라고 상상하며 대사를 썼습니다. 대표적으로 <겨울왕국FROZEN>의 엘사, <이누야샤>의 카(구)라 성우를 맡으신 소연 님. 세계관의 화자가 앤지인데 <세계관 읽어주는 앤지 헌트> 이런 식으로 보이스 드라마가 만들어지면 참 좋겠습니다. 인게임에서 루이스 NPC 누르면 열람할 수 있는 세계관에서 앤지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면 참 좋을 텐데...그 이전에 앤지 공식 용모파기부터 만들어줬으면...제발...( mm)
- 면도날 잭이 안타리우스라는 건 제가 세계관 정보를 토대로 상상한 것이며 사실은 어떤지 모릅니다. 잭이 어떤 식으로 안타리우스와 관련되어질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제 장편「Twilight ― heure entre chien et loup ―」17화를 참조하시면 좋습니다.
- 다이무스가 회상하는 5월의 프리츠 가문의 장미 정원 관련 추억담은, 저의 현대 패러렐 소설인 <대학퍼즈!> #.7 레베자넷 에피소드 <연애상담>에서 먼저 구체적으로 쓰인 이야기입니다. 대학퍼즈는 현대 배경이라 사이퍼즈 공식 세계관의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이 <선택(Dilemma)>과 원칙적으로는 이어질 수가 없지만, 시대를 안 타는 내용이니까 이케이케 통하는 걸로.
- 후회없는 선택이라는 게 정말로 있을까요? 흔히들 극단적으로 ‘어머니와 아내가 물에 빠지면 둘 중 누구를 구할 것인가’라고 묻지만, 어느 쪽을 골라도 후회만 남는 것이 선택인 듯 싶습니다. 사르트르의 ‘인생은 B(Birth)와 D(Death)사이의 C(Choice)다’라는 말은 정말 희대의 명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고로 인생은 언제나 내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의 연속이란 비관이 슬쩍 고개를 처드네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 The Road Not Taken>는 그것을 긍정했지만서도...
- 오탈자 및 이상한 문맥 지적, 근거 있는 비판, 다양한 질문 환영합니다.
- 주요서식지: http://blog.naver.com/goastbaster
제목 |
길이 |
주연 |
부가정보 |
장편 (完) |
다이무스&트리비아+올캐러 |
안타리우스의 트리비아 납치 시도가 있은 뒤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된 그녀의 호위를 맡게 된 다이무스, 이윽고 벌어지는 전쟁과 제2차 인형실 끊기 작전 | |
중단편 (비정기 연재중) |
다이무스&트리비아+올캐러 |
「Twilight ― heure entre chien et loup ―」의 후일담격 소설, 사이퍼들의 여름 휴가 | |
손바닥글 모음 |
다무틀비 |
「포옹」, 「이종교배」, 「말장난」, 「수트 로맨스」 등 | |
손바닥글 모음 |
다무틀비 |
「춘정」, 「충동」, 「수트 로맨스 2」, 「태동」 등 | |
중편 (完) |
루이틀비마틴 +브루스 |
진격전의 배경스토리를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 루이틀비의 갈등, 마틴의 짝사랑, 마틴과 브루스 사이의 갈등의 실체 | |
손바닥글 모음 |
마틴틀비 |
「고양이」, 「2월 14일」, 「갈증」, 「천사의 유희」 등 | |
손바닥글 모음 |
마틴틀비 |
「악몽」, 「체스」, 「친애」 등 | |
단편 |
피터미쉘데샹 |
지금으로부터 약 7년 후의 이야기, 미쉘이 모르는 피터의 진실 | |
단편 |
데샹미쉘피터 |
기묘한 모나헌 남매의 사정에 흥미를 가지고 접근하는 위선자 까미유 데샹 | |
단편 |
바레미쉘 |
[연성교환] 중세 패러렐. 마녀사냥에 쫓겨 죽어가는 소녀와 그 소녀를 줍는 늑대의 이야기 | |
단편 |
다이무스 |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 |
손바닥글 |
드렉샬럿 |
[커미션] 가끔 있는 헬리오스의 회식 자리에서 자꾸만 음식을 가방으로 숨기는 샬럿에게 의문을 품고 드렉슬러는 어느 날 소녀의 뒤를 좇는데... | |
손바닥글 모음 |
까미유&마틴... |
[리퀘 이벤트] 「굴욕」 (웨슬J),「연쇄」(J),「무장해제」(휴톤+미쉘+트리비아) 수록 | |
설정집+손바닥글 모음 (비정기 연재중) |
올캐러 |
사이퍼들이 21세기에 태어나 평범한 대학생으로 살아간다면? | |
단편 |
벨져앤지 |
[커미션] 부친 흑염 하이드의 의문스러운 죽음의 진상을 좇는 지하연합의 수장 앤지 헌트와 그녀의 호위를 맡게 된 검의 형제 기사단의 벨져 홀든 그리고 루이스 | |
단편 |
하랑린 |
사이퍼즈 세계관의 현 시점으로부터 약 10년 후,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해방되고 난 뒤 하랑과 린은 함께 조국을 방문한다. 하랑은 린을 위해서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는 듯한데... |
▶▶▶▶ 차기작 예고 ◀◀◀◀
인형실 끊기 작전의 종막, 무단으로「액자」를 탈취해 간 암살자 시바 포,
휘말려든 전쟁에 종지부를 찍고 자유를 되찾기 위해 여배우를 쫓는 여행자 릭 톰슨,
안타리우스의 성물(聖物)인「액자」를 회수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강화인간 스텔라,
그리고 별빛의 천적이자 트와일라잇의 원래 주인 밤의 여왕 트리비아 카리나.
. . . COMING SOON . . .
♥ 즐감하셨다면 꼭꼭 추천/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