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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lipse Vol.51 풍전등화 정보제공자, 오르반 미하이(법학자, 팔티잔 연합, 소리능력자)


숫자로 시대의 변화를 예측하는 학자와 눈에 보이지 않는 별의 자취를 더듬는 점성술사가 백 년의 낮과 밤을 다듬어 함께 만든 순간이 왔습니다.
한 세기가 끝나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는 즈음이면 그들은 함께 입을 모아 부르짖습니다. 샛별 아래 태어난 위대한 아이들이여!
방금 태어난 아이들이 무얼 알겠습니까마는, 미래를 향해 저마다 각자의 발자욱을 떼는 새싹은 떡잎을 떼고 기지개를 켜기도 전에
지나친 관심과 주목에 파묻혀버리죠. 그러나 걱정 말아요, 오늘 태어난 아이에게 내일의 백 년을 이끌라는 무도한 관심은
저 높이 있던 붉은 해가 질 때쯤에는 사람들의 입에서 사라지는 수준의 이야깃거리에 불과하거든요.

하지만 이즈음 빛의 관을 쓴 것처럼 주목받던 아이 중 하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기대에 부응해 팔티잔의 기치를 빛냈어요.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단단하게 다지던 또 다른 아이는 꺼질 듯 말 듯 일렁이는 팔티잔의 불꽃 속에서 부러진 창 한 자루를 지탱하게 되었지요.
자, 팔티잔의 이야기를, 마르티나와 그레타의 이야기를 들려 드릴게요.
자매는 결코 나란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심장은 결국 같은 음률에 맞춰 뛰었답니다.

자매의 비밀

오스트로프츠키는 대대로 폴란드의 축복받은 평원에서 풍족한 삶을 살았어요.
자매의 아버지는 형제가 많은 집안의 막내였는데도 금전적인 걱정 없이 학업을 완료해 교사가 되었고,
어머니는 외동딸로 태어나 제법 규모가 큰 농장을 물려받았지요.
훌륭한 품성과 성실한 의지를 가진 부모의 관심과 사랑 속에 자매의 어린 시절은 물질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항상 풍족했습니다.

이 그린 듯 아름다운 가족의 가장 큰 시련은 그레타가 능력을 발현시킨 것이었어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워낙 소극적이고 수줍음이 많던 그레타가 일으키는 바람은
늦은 오후 이마를 간지럽히고 길가의 꽃을 춤추게 하는 살랑바람이었어요.
사실 그레타의 정말 귀여운 특기는 따로 있었지요. 그건 바로 마르티나가 어디에 있건 반드시 찾아내는 능력이었답니다.

“난 다 알아, 마르티나, 이 나무 위에 있지?”
“와, 그레타, 정말 대단해! 여긴 못 찾을 줄 알았는데.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비밀이야.”
“그러지 말고 말해봐, 다음엔 더 꼭꼭 숨어버리게.”
“소용없어. 난 그냥 알거든. 바람이 불면 알아, 마르티나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어.”

마르티나는 갓 태어난 거위처럼 자신을 따라다니는 그레타가 자신을 찾아낼 때마다 귀여워 어쩔 줄 몰라 했죠.
닮은 점이 전혀 없는데도 꼭 붙어 다녔던 자매 둘만이 간직한 작은 비밀이었어요.

될성부른 나무, 그리고 떡잎

유럽이 전에 없던 전화에 휩싸였을 무렵, 마르티나는 창공을 향해 첫발을 뗍니다. 극장에서 상영했다면 끝없이 손뼉을 치고 싶은 한 편의 영화 같달까요?
지역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이었고 부모님의 자랑이었으며 그레타의 우상이었던 마르티나.
이 오달진 소녀가 전쟁을 비판하기 위해 지역 신문에 기고한 사설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줬고, 멀리 바르샤바까지 마르티나의 이름이 알려졌지요.
마르티나는 의리와 자비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희생의 가치를 알았죠. 누구도 넘어지지 않기 위해 서로 손을 꼭 잡아야 한다고 말하던 마르티나를
모두가 사랑했어요.

이 시기에 두 자매는 퍽 소원해 보였는데, 성장하며 각자의 성을 쌓아가는 자매의 사랑과 분노, 짜증, 동경과 열등감, 억울함 같은
복잡한 감정이 충돌하여 매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결과물이었답니다. 뭐 사실 자녀가 여럿인 집안이라면 으레 있을 법한 일이죠?
모든 것에 뛰어난 마르티나에 비해 두드러지는 것 없는 청소년기 생활을 보낸 그레타는 무시당하기 일쑤였어요.
구름이 저마다 다르게 흐르듯 파도가 저마다 다르게 달리듯 그레타가 마르티나와 같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죠. 마르티나와 다른 점을 그레타의 모자란 점이라 정해버리고는, 작은 아쉬움마저 그레타를 위해서가 아닌
마르티나를 공격하기 위한 것으로 바꿨어요. 그레타는 그들에게 언제나 마르티나의 약점일 뿐이었습니다.

부모님의 깊은 사랑과 훌륭한 교육 덕분에 그레타는 높은 자존감을 가진 건강한 아이로 자랐지만 주변의 시선은 짓궂음을 넘어 비열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그레타는 자기 마음에 상처가 생기는 것보다 이러한 한심한 작태들이 변질되어 언젠가 자신이 마르티나를 증오하게 되는 날이 올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마르티나는 영민한 아이였고, 누구보다 그레타의 속마음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레타의 고심과 거리감을 조용히 이해했어요.
그렇게 자매는 서로 거리를 두고 각자의 목책을 설치하게 됐어요.

팔티잔 입성

하늘을 향해 자라는 나뭇가지가 서로 만나 어우러지듯, 마르티나는 결국 팔티잔 연합1)에 닿았습니다.
능력자라는 주제에 국한되지 않고 단체의 정체성을 확장해 사회에서 소외된 약자를 품고자 한, 팔티잔 연합의 달궈진 창이 지키려는 세상은
마르티나가 언제나 바라왔던 길.
그렇게 마르티나는 팔티잔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이제 막 날아오를 준비를 하는 어린 새처럼 마르티나는 기대와 자신감,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며 이제껏 디뎠던 대지를 박차고 올랐지요.

“정의로운 스트리보그의 옷자락에서 시작된 바람이, 부디 오래도록 마르티나를 보우하길.”

그레타는 마르티나를 위해 기도했어요. 그 바람을 타고, 마르티나는 자기 자리를 찾아갔습니다.
자신의 말을 하는데 두려움이 없던 마르티나는 기자가 되어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웠습니다. 유럽 각국의 분쟁에 누구보다 가까이 다가가
비탄의 절규를 듣고 규탄의 펜을 들었죠. 마르티나는 자주 견제를 받았고 가끔은 습격당했습니다.
위험한 순간에 마르티나를 구한 건 팔티잔 연합이었죠. 마르티나는 자신을 향한 위협이 가족을 향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때까지 팔티잔 연합에 소속되어 있지 않던 유일한 가족인 그레타를 설득해 가족 모두가 팔티잔의 울타리에서 안전하게 지내길 바랐습니다.
마르티나의 믿음은 확고했고, 처음으로 그레타의 오묘한 표정을 읽지 못했죠.
그도 그럴 것이 마르티나가 창공을 향해 손을 뻗으며 성장했듯, 그레타의 생각과 능력은 드넓은 폴란드의 농지에 단단한 뿌리를 내렸는걸요.

정상에 서다

마르티나는 비를 내리고 마른 나무를 불태우는 능력자는 아니었지만 빛나는 지혜와 단단한 용기를 지녔지요.
제멋대로 자라난 넝쿨을 정리하듯 팔티잔 연합을 정리해 잘 짜인 태피스트리처럼 가꾸었어요. 하늘을 찌를 듯한 명성으로 쌓은 계단을 올라
모든 이의 선망과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아슬아슬한 첨탑의 끝에 우뚝 선 마르티나는 끝내 팔티잔 연합의 새로운 횃불지기가 되었습니다.
마르티나가 팔티잔 연합의 선봉에 설 수 있었던 건 재능과 명성뿐 아니라 언제나 자신을 지지하는 든든한 동료를 가진 덕분이었죠.
특히 팔티잔의 무력과 지모를 각기 상징하는 파벨과 바스티안을 위시한 젊은 층의 강력한 지지는
마르티나가 폴란드 팔티잔의 대변인이 되는데 큰 도움이 되었어요.
마르티나는 가진 것을 어떻게 하면 잘 사용할지 금세 알아냈어요. 폴란드 팔티잔은 독일과 폴란드 정부를 상대로 한
비스와 강 전역의 권리를 위한 투쟁에서 승리의 나팔을 불었지요.
마르티나, 마르티나, 승리의 횃불지기. 파벨과 바스티안은 ‘마르티나의 양 팔’로 불리며 혁혁한 성과를 올렸습니다.
그들은 심장 가득 승리의 함성을 간직한 채 바르샤바2)로 향했지요. 마르티나는 영광의 순간에 그레타가 함께 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그레타는 마르티나가 내민 손을 거절했어요. 마르티나는 홀로 바르샤바에 발을 딛었고, 그 첫걸음은 팔티잔의 새로운 시대로 향하는 한 걸음이었습니다.

사라지는 사람들

팔티잔 연합은 순항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먹구름이 몰려왔어요. 유고슬라비아의 국왕이 타국의 민족주의자들에게 피습되면서 각국은,
특히 독일은 민족주의자들을 경계하고 타국에 체류 중인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국경 너머 총검을 든 자들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알았을까요, 그들의 눈은 지켜야 할 자들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미처 둥지를 마련하지 못한 능력자들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하고 알아채기도 전에 적기사와 같이 터전을 잃고 방랑 중이거나 아직 알려지지 않은 능력자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마르티나는 싸우기로 했습니다. 능력자를 지키기 위해 외국어를 쓰는 자들과 폴란드 영토 내에서 전투를 치러야 했지요.
독일과 폴란드 모두 마르티나를 눈엣가시처럼 여겼어요.

사라진 마르티나

이제껏 그래왔듯 마르티나는 두려움 없이 맞섰습니다. 팔티잔 연합은 전에 없이 큰 적을 맞닥뜨리게 되었고, 어디를 둘러봐도 같은 편은 없어 보였죠.
다짐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든 싸움이었어요. 실종되어 돌아오지 않거나 사망하여 겨우 수습된 사람의 자리만큼 불안이 맺히고,
끝내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럴수록 마르티나는 더욱 열심히 사건 해결에 매진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마르티나는 파벨을 불러 넌지시 말했어요. 최근 능력자 실종 사건의 단초가 될만한 뚜렷한 심증을 얻었고,
이를 뒷받침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를 곧 확보할 수 있을 것 같다고요.

“이봐, 마르티나. 그럼 미리 준비를 해야지, 어서 사람들에게…”
“기다려줘, 지금은 아니야.”
“지금 이 순간 누군가 납치될 수도 있는 거라고! 왜 망설이는 거야? 혹시 말이 새나갈까 봐 그래?”

마르티나는 드물게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말을 고르고 골라 어렵게 뱉은 한 마디는, 자신을 믿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파벨은 이해할 수 없다고 투덜대면서도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는 마르티나의 의견을 들어주었습니다.

“파벨, 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꼭 나를 찾아줘.”
“당연한 말을…. 아, 그런 소린 하지 마, 불길하니까.”
“나를 찾을 수 없다면 내 동생을 찾아. 그 아이라면 날 찾아낼 테니까.”
“어허, 그만두라니까?”

그것이 마르티나의 마지막이었습니다.
파벨과 바스티안은 백방으로 마르티나를 찾았지만 으슥한 뒷골목 어느 구석에서 부러진 폴암과 폴암을 장식하던 군기만을 발견했지요.
부러진 건 마르티나의 폴암만이 아니었습니다. 마르티나가 지탱해오던 팔티잔 연합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더 많은 불안이 더 잦은 균열을 불러왔고, 사람들은 자의로 혹은 타의로 팔티잔 연합을 떠나게 되었지요.

부러진 창을 들어라

음정을 찾는 연주자가 누른 첫 음처럼, 마르티나의 실종은 비극으로 치닫는 3악장의 시작이었어요. ‘마르티나의 양 팔’은 손뼉을 마주치지 못하고
계속 엇갈릴 뿐이니 누구도 박자를 맞출 수 없었습니다. 파벨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마르티나를 찾는데 조직의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했지만,
바스티안은 마르티나가 없는 지금 섣불리 움직였다가 더 큰 피해를 보게 될 수 있으니 우선 조직을 다시 정비해야 한다고 맞섰지요.

“누구보다 마르티나를 찾고 싶은 건 나야.”

마르티나와 사적인 관계가 있던 걸로 알려진 바스티안이 이를 악물고 겨우 한 마디 내뱉었어요.
그 목소리에는 누구보다 큰 상실감이 담겨 있었고, 눈가는 붉었지요.
파벨의 말처럼 다들 바로 마르티나를 찾아 나설 것 같이 굴다가도 바스티안이 개인보다 조직을 위해야 한다고 말하면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어요.
파벨이 결국 마르티나의 마지막 부탁을 모두에게 전했을 땐 바스티안이 크게 화를 내고 말았죠. 마르티나를 혼자 보낸 것은 물론이고
이런 시점에 외부인이나 다름없는 그레타를 끌어들이려 하는 파벨의 의도가 의심된다고 말이에요.

시간은 흐르고 팔티잔 연합은 점점 목마른 꽃처럼 시들었어요. 다시 물을 준다면 피어날 수 있을까요? 서로를 향한 의심, 사라지는 능력자들,
폴란드 정부의 압박, 그러한 가운데 갑작스레 신문 기사로 알려진 마르티나의 사형 집행 예정 소식까지.
귀를 막고 외면하고픈 불협화음에 지친 파벨은 막무가내로 그레타를 데려왔어요.

“넌 찾을 수 있다며, 마르티나가 어디에 있든.”
“그건… 아주 어릴 때 일이에요. 놀이처럼요. 폴란드 어디에 있든 찾을 수 있는, 그런 건 아니라고요.”
“마르티나는 네가 자길 찾아낼 거라고 믿었다.”

갑자기 찾아와 실종된 마르티나를 찾아내라고 억지나 다름없는 말을 하는 파벨이었지만 그레타는 차마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마르티나의 마지막 흔적이라는 부러진 폴암은 창대가 퍽 닳아 있었지요. 비능력자인 마르티나가 얼마나 치열하게 싸워왔는지 그 안에 모두 담겨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마르티나의 의지를, 마르티나가 지켰던 사람들을, 마르티나의 손에 들려 있던 팔티잔의 횃불을 외면할 수 있을 리가요.


이렇게 팔티잔 연합의 역사에 새로운 장이 시작되었습니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그레타의 삶에서도 새로운 장이 시작되어 버렸네요.
바람 앞의 등불이란 흔들리기 마련이지만, 불길이 타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맞닥뜨려야 하는 일이죠.
이 기류는 위태로운 횃불이 다시 불붙게 하는 바람이 될 것입니다.
어두운 시기에 불을 밝히고 어려운 시기에 물러서지 않는 자매여, 정의로운 스트리보그의 옷자락에서 시작된 바람이,
부디 오래도록 마르티나와 그레타를 보우하길.

1) 전쟁 당시 폴란드 농민은 영세한 농가 규모에 따른 생산량 저하를 제고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는데, 중부 유럽에서 활동하던 팔티잔 연합은 자구권을 요구하는 농민들을 영합하여 집단 농장을 형성하는 등 직접적인 경제활동을 지원했다. 원래 팔티잔 연합은 능력자를 주축으로 한 능력자 단체였지만, 폴란드의 농민을 품게 되면서 능력자에 국한되지 않고 도시의 노동자, 지식인 등 다양한 계층의 영입을 시도했다. 이렇게 각계각층에서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팔티잔 연합은 폴란드에서 손꼽히게 주목할 만한 단체 중 하나로 거듭나게 되었다. 명부의 기록에 따르면 마르티나의 어머니가 먼저 가입했고, 어머니의 곁에서 팔티잔 연합의 활약을 본 마르티나 역시 자연스럽게 팔티잔에 가입하게 되었다.
2) 1929년부터 닥친 대공황은 폴란드에도 깊은 상흔을 남겼다. 1933년 2월 7일 베를린의 국회의사당이 불타고 독일 정부가 독일 내 사회주의 정당을 탄압하기 시작할 무렵, 터전을 잃은 능력자들을 규합하면서 도시 노동자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마르티나는 참모들과 상의해 팔티잔의 근거지를 바르샤바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