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yphers

  • Silent Night - 일곱 개의 변주곡 -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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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바스터 [65급]

2014-07-29 10:50:14

- 이 글은 픽션(fiction)입니다. 특정 단체ㆍ사건ㆍ사상ㆍ종교와 무관함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 Silent Night ~ 일곱 개의 변주곡 ~ 

  Prologue  01  02  03-上  03-下  04  0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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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포한 클론은 모두 미리 준비해온 진정제로 잠재운 뒤 손발을 구속하여 트리비아의 그림자길로 호송되었다. 사로잡은 클론은 모두 여덟 체로 무기형과 원소형, 근접형이 고루 섞여 있었으나 자네트와 닮은 클론은 그에 포함되지 않았다. 마틴과 정신을 잃은 클론을 옮길 만한 완력이 부족한 여성능력자들은 릭의 이동게이트로 먼저 돌아가 곧바로 실험체들이 연구기관으로 옮겨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두었다.


  릭의 이동게이트가 있던 자리 곁에 풍경이 기묘하게 갈라지며 검은 입을 쩍 벌렸다. 길잡이인 트리비아가 먼저 나오고 나머지 작전 멤버들도 나와 준비된 들것에 클론들을 눕혔다. 이로써 <일곱 개의 변주곡> 작전은 실질적으로 마무리된 셈이었다. 후속 연구 및 조사와 회의가 이루어져야 할 테지만 당장은 치료와 휴식이 절실하다. 치명상은 아니라도 다들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고 엄청난 수의 적을 상대한 터라 체력이 많이 고갈된 상태였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을 만큼 고도의 집중력을 요했기에 정신력 또한 극한에 부딪쳤을 것이다. 목표가 완전히 달성된 것은 아니지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클론을 여러 체 확보했다. 한동안 추이를 지켜봐야 할 테지만 게이트웨이 장치는 파괴했기에 당분간은 기능하지 못할 것이다. 자축 속에 다음 마무리 회의 때까지 푹 쉬는 것이 그들의 당면과제였다.


  “트리비아 잠만. 안에 루이스 들갔디.”


  브루스가 다음 회의 소집일을 통보하며 해산을 선언하려던 찰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림자문을 닫으려는 트리비아를 도일이 약간 당황스러운 얼굴로 제지했다. 트리비아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의아스런 눈빛으로 도일을 보다가 작전 멤버들을 죽 둘러보았다. 덩달아 다른 멤버들도 서로의 모습을 눈으로 훑었으나 과연 루이스는 없었다.


  “클론 내리놓고는 그냥 들가든데. 뭐라도 떨어뜨린 긴가?”


  트리비아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조용한 한숨을 쉬며 그림자 안으로 도로 들어섰다. 그림자의 주인이 그 안으로 모습을 감추자 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풍경만이 남았다. 임시 동맹에 불과한 사이라도 함께 작전을 무사히 수행해낸 동료로서 인사 한 마디 없이 쌩하니 사라진 태도야 질책받을 만하지만 굳이 붙잡기에도 구차한 이유였다. 그 안에 누가 갇힌 채로 트리비아가 문을 닫아버리면 큰일이었고, 루이스가 트리비아의 연인임을 다 알기에 촌스럽게 별 말하지 않았다.


  작전은 종료되었다. 어제와는 다르지만 같은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야 니 레이튼 어데 가노?”
  “아앙? 당연히 집에 가지. 피곤해 죽겠는데.”
  “어허, 무신! 작전도 무사히 끝났는데 한 잔 안 하고 가는 게 어뎄노?”
  “어어 이 새끼야, 이거 놔!”
  “휴톤이랑 레베카가 먼저 자리 잡고 있는댔다. 루이스랑 트리비아는 난주 올 끼다. 먼저 퍼뜩 가재이!”
  “야!!”


  브루스가 해산을 명하자 도일이 레이튼에게 거의 헤드락 수준의 어깨동무를 한 채로 술자리로 강제 연행하려 들었다. 마틴은 그 모습을 미소 띤 얼굴로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트리비아가 사라진 자리를 더 이상 웃음기라곤 남아있지 않은 얼굴로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지금 마틴을 사로잡고 있는 건 걷잡을 수 없는 질투와 부러움이었다. 입술 새로 감탄인지 비애인지 모를 탄식이 흘러나왔다. 엄연히 그녀의 것인 그림자 안으로 허락없이도 다시 들어갈 수 있는 이유는 그가 그녀의 연인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미칠 것 같다. 왜 루이스가 다시 그림자 안으로 들어갔는지는 트리비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훗날 루이스를 만날 기회가 있다면 눈을 맞추고 기억을 읽어내면 그만일 테지만 그런 문제가 아니다. 나중에 그 기억을 읽으면서도 분할 테지만, 지금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장소에 사랑하는 그녀와 루이스가 단 둘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어찌 하려야 할 수도 없기에 더 안타까움과 분노가 치밀었다.

 

  마틴은 제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트리비아를 이 품에 안았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서늘한 장미향을 들이켰고, 뺨으로 와닿는 숨결에 희미한 간지러움을 느꼈으며, 차갑지만 비단실처럼 부드러운 살결을 어루만졌다. 내리감긴 아름다운 눈꺼풀 위로 입도 맞추었다. 꿈만 같은 일이었지만 꿈이 아니었고 꿈같지도 않아서 더 애가 탄다. 보통 사람보다 기민한 독심술사의 인지와 감각은 언제든지 그때 그 기억을 생생하게 불러일으킬 수 있다. 허나 아무리 실감나게 떠올릴 수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 품 안에 그녀가 있던 그 순간만 못했다.


  자조가 흘러나왔다. 그토록 멀기만 했고 아직도 가깝지는 않은데 우연찮은 기회를 얻어 트리비아에게 닿아보자, 그녀의 곁에 있는 것이 내가 아닌 현실이 더욱 아프게 다가왔다. 아예 이루어지지 않는 소원은 웃어넘기며 체념할 수 있지만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소망은 초조함을 부추긴다. 다시금 그녀를 품에 안고 싶다. 비겁하게 정신을 잃은 틈을 타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깨어있는 그녀를, 그럼에도 밀어내지 않고 가만히 머물러주는 고요를, 아마도 지금 영웅의 팔 안에서는 그렇게 할지도 모르는 밤을.

 

  “동정하지 말아요. 오만일 뿐이에요.”


  트리비아를 가졌음에도 헤매기만 하는 루이스를 향해 한 마디를 읊조린 마틴은 재단 건물로 걸어 들어갔다. 스캐닝은 물론 오랜만에 마인드 컨트롤까지 사용했기에 정신은 찌든 때가 낀 듯 피로했지만 쉬고 싶지 않았다. 트리비아를 향한 자신의 깊은 상념에 먹혀들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 감정은 스스로도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심연이었다. 달랠 수 없는 갈증에 하릴없이 허덕이기보다는 일을 해서라도 강제로 잊고 싶었다.


 
* * *

 

 

  “……뭐하는 거야?”


  루이스는 갑자기 들려오는 트리비아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트리비아는 루이스의 등 뒤에 있었지만 이 그림자 안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길잡이라도 방향감각을 자랑할 수 없다. 아예 방향이라는 게 없는 까닭이다. 오로지 트리비아만이 헤매지 않는 이곳에서 루이스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소리가 방향성 없이 들려오기 때문에 여기저기 시선을 헤매다가 겨우 그녀를 발견하고 한심하게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트리비아를 따라 처음으로 그림자 안에 들어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눈앞에 그녀의 뒷모습이 보인다는 것만으로도 별로 불안할 것은 없었다. 불안이야 했지만 그건 그녀가 그림자 속으로 훌쩍 모습을 감추어버릴 것 같은 느낌에 그랬다. 혼자 그림자 안에 남겨진 불안은 내면으로부터 샘솟았다. 앤지의 말 그대로였다. 존재 자체가 지워지는 건 아닌가 싶은 짙은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지는 기분은 잠시간이라도 충분히 끔찍했다. 공간감이 미치고 이윽고 시간 감각마저 미쳐버리는 이 공간에서는 아주 잠깐의 시간도 영겁처럼 느껴졌다. 짓눌릴 듯한 고독의 무게만이 가장 친한 동반자가 되었다. 경험해보기 위해 스스로 발을 디뎠지만 그 선택을 당장에 취소하고 싶은 심정에 휩싸였다.

 

  화가 난 것도 아니고 어이없어 하는 것도 아니고 무표정하기만 한 트리비아의 얼굴을 쳐다보던 루이스는 잠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궁금한 게 있지만 물어볼 수가 없다. 그녀는 과연 자신의 공간에 감히 함부로 침입한 이를 쫓아내기 위해 들어왔을까, 아니면 이곳에 홀로 남겨진 연인을 찾으러 온 걸까. 답이 뻔했기에 질문도 되지 않을 질문일 것이다. 갇힌 것도 아니고 제발로 아직 문이 열린 틈을 타 홀린 듯이 들어와 본 것이기에 더더욱. 이미 알고 있을 참이었지만 그런 사실을 확인하는 게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다.


  익숙해질 듯 익숙해지지 않는 괴로움에 오히려 오기가 생긴다. 지금도 여전히 두렵기만 한 이곳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여전하지만 스스로의 행동을 고집하고 싶었다.


  “날 이곳에 혼자 있게 해줘.”
  “……루이스.”
  “입구도 만들지 마. 혼자 있어보고 싶어.”
  “…….”


  루이스는 천천히 트리비아에게 다가갔다. 발바닥이 뭔가를 딛는 느낌도 없는데 걷고 있고 가까워진다는 건 두 번 겪어도 퍽 기묘한 느낌이다. 손만 뻗으면 바로 닿을 거리에 그녀와 똑바로 마주보며 섰다.


  “너를, 이해하고 싶어.”


  자신감은 없었지만 목소리는 의외로 떨리지 않았다. 그에 자신감을 얻어 계속 말을 꺼냈다.


  “너의 연인으로서 너를 알고 싶어. 알려주지 않아도 좋아. 내가 알아차릴 테니.”


  보이지도 않는 손을 뻗어 트리비아의 뺨에 닿았다. 이상한 느낌이다. 스스로는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이 칠흑 속에서 그녀를 만지는 감각만이 자신이 이곳에 있음을 확신하게 해준다. 그녀는 여전히 차갑다. 이윽고 찾아올 봄을 예감할 수 없을 정도로 좀처럼 상기되는 일이 없다.


  “네가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더라도 섣불리 쫓지 않을게. 그저 언제나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오기만 해줘. 이 전쟁을 끝내고 너와 함께 네가 자유롭게 날개를 펼칠 수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을 때까지, 그 때까지만…….”


  대답을 바라지는 않았다. 이것은 일방적인 맹세였다. 트리비아는 대답을 대신하듯 펄럭 날개를 펼쳤다. 인간은 결코 가지지 말아야 할 새까만 박쥐 날개는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신체를 변형시키는 사이퍼가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 중 날개는 그녀만이 유일무이하다. 두려움은 아니다. 그녀의 날개에 대해 품는 감정은 경외다. 이 날개는 루이스에게 구원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그녀의 날개는 그를 구했다.


  “너를 지키고 싶어.”


  조심스레 날갯죽지 아래로 손을 넣어 트리비아를 품에 안았다.


  “너와 함께 살아가고 싶어.”


  그녀의 몸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의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아니 별 의미가 없더라도 좋았다. 더 이상 몸이 떨리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시키듯 그녀를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사랑해.”


  트리비아는 침묵했지만 어깨에 살포시 얼굴을 묻어왔다. 등으로 무언가 살짝 와닿았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은 채 얌전히 아래를 향하고 있었지만 날개가 움직여 그를 감쌌다. 왠지 모를 감격스러움에 울컥했다.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트리비아의 고독한 그림자 안은 지금 그녀와 루이스 둘만의 밀실이 되었다. 루이스는 아주 잠깐 동안이지만 이대로 트리비아와 함께 이곳에 하나가 되어 잠겨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전쟁을 치른 뒤의 논공행상 자리만큼 희비가 격렬하게 교차하는 곳도 없을 것이다. 작전 <일곱 개의 변주곡>은 전쟁과는 다르기에 전공을 세워 상을 받는다거나 형벌을 부과하기 위한 군법재판이 열릴 일은 없지만, 작전 수행 후 이루어지는 회의에서 따져야 할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작전 구성원 특성상 각 세력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이들만 참여했다. 소속 세력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이 회의에서 마음을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무런 문책 받을 일이 없는 이와 있는 이의 긴장감의 차이는 과연 클 것이다. 겉으로 티가 나지는 않지만 미묘하게 홀가분함과 그렇지 않음으로 나뉘는 회장 안의 공기를 독심술사인 마틴은 느낄 수 있었다.


 
  “작전 <일곱 개의 변주곡>의 지상목표였던 클론 샘플 조사 결과에 관하여 우선적으로 보고하겠습니다. 사이퍼 유전자 연구의 권위자인 닥터 까미유의 주도 아래 ESPER 기관에서 조사 및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보고서는 우리 그랑 플람 재단이 아니라 ESPER 소속 선임연구원 미스 스칼렛이 작성한 것을 보고서에 첨부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우리가 <일곱 개의 변주곡> 수행 이전까지 알고 있던 클론들에 관한 정보에 상당 부분 수정을 가해야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MARSHALL이 지휘한 안개수집장치 파괴 작전 당시 클론들은 분명 우수한 성능을 지니기는 했으나 복제부작용으로 인해 지속적인 위협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강화인간들과 그들의 특수 기어장치 그리고 안타리우스 소속 능력자만이 번거로운 상대였죠. 헌데 인간의 형상을 했을 뿐 얼마 안 있어 진흙인형처럼 허물어지고 말았던 그들이 지금은 조사 결과 유기체로서 거의 완벽에 가깝다고 합니다. 그것도 통상의 인간보다 월등한 신체능력을 가진 인간인 셈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인간을 복제할 수 있는지 현재 과학기술을 가지고선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합니다만, 어쩌면 안타리우스가 보유한 기술력은 우리가 지닌 것보다도 반세기 정도 앞서나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옥사나 야코비치의 복제능력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리라 사료됩니다.


  한편으로 다들 전투 도중 느끼셨을 테지만 끔찍하게도 클론들은 통각이 거세되었습니다. 전투상황에서 고통은 최소한의 자기방어기제임에도 그들은 아픔을 느끼지 못하므로 목숨이 끊어지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공격을 시도합니다. 본인이 더 이상 전투 불능 상태에 빠졌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로 말입니다. 강화인간부터가 그랬지만 그야말로 살인병기로서 인간을 함부로 다루는 그들의 극악무도함에는 차마 분노를 금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 복제능력자들을 과연 같은 인간으로 대해야 하는가 하는 철학적인 고민도 우리는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덧붙일 사실은, 클론들의 뇌파를 검사한 결과 분명히 사고기능이 있지만 사고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자아라고 거칠게 정의한다면 자아가 발아할 가능성은 있지만 그 가능성이 완전히 닫힌 상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현상을 토대로 연구팀은 안타리우스가 지능의 프로그래밍이 가능하다는 놀라운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강화인간은 때로 플래시백 현상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백지 상태의 뇌에 지능을 프로그래밍한 클론들은 그럴 가능성이 애초부터 없는 것이지요. 아무리 복제세포를 제공한 모체의 전투력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검증되었다 해도, 통각이 없고 오직 안타리우스의 명령만을 ‘생각하는’ 이 클론들은 앞으로 우리가 안타리우스와 대적할 때마다 상당한 위협이 될 것은 자명합니다.”


 
  마틴은 무거운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고는 잠시 침묵했다. 마틴이 자아낸 정적은 지금까지 한 말의 심각성을 청중들이 곱씹을 시간을 선사함으로써 사태의 중대함을 일깨웠다. 동시에 다음 이어질 말에 대한 긴장감까지도 자연스럽게 확보했다. 침묵이 충분히 무르익은 시점을 가늠하여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또 한 가지, 우리는 ROSE의 클론으로 추정되는 개체는 확보하지 못한 것에 관하여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마틴의 말이 떨어지자 저번 회의 때와 달리 이목은 자네트가 아닌 트리비아에게 쏠렸다. 자네트 클론 이야기를 하는데 혐의라고 할 만한 것은 거의 트리비아에게로 떠넘겨진 상태였다. 그 상황이 마틴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섣불리 두둔하는 것은 트리비아를 위해서도 자기를 위해서도 별 보탬이 되지 않는다. 중립을 지키며 그녀 스스로가 해야 할 변호에 부자연스럽지 않을 만큼의 논리적 동의를 덧붙이는 것이 최선이다.


  “ROSE와 닮은 클론은 아시다시피 EMPRESS와 BLADE가 맡은 서쪽에서 출현했습니다. 저는 때마침 서쪽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그 현장으로 향하던 참이었습니다. 당시 그 클론들은 BLADE가 맡고 있었는데 EMPRESS가 도중 그를 지원하더니 이윽고 전담하여 클론을 상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클론들과 함께 그림자 장막에서 나온 순간 피투성이가 된 클론들이 보였고, 강력한 전격계 클론들의 급습에 부득이 제가 잠시 정신을 잃은 EMPRESS를 대신하여 서쪽의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우리가 목표로 하던 클론은 전투 불능상태였으므로 전격계 클론의 벼락을 피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새까맣게 타버렸습니다. 안타깝게도 왜 ROSE와 외형이 동일한 클론이 안타리우스에 있는지 규명할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일련의 과정에 몇 가지 석연치 않은 점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지금부터 EMPRESS에게 질문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일찍부터 트리비아에게 주목하고 있던 것과 달리 마틴은 그제야 그녀를 보았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던 트리비아 또한 그 시선은 받아들였다. 이렇게 똑바로 눈길을 얽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들리지도 읽히지도 않는다. 허나 지금만큼은 그 가슴 설레는 경이에 취하지 않고 마음을 꽉 다잡았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한 그림자 안의 일을 보았다. 평소와 같다. 본인은 말한 적이 없지만 독심술사이기에 이미 읽어서 알고 있는 사실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면 되는 일이다.


  알고 있는 것을 의도적으로 모른 척하기만 힘들다. 영원한 비밀이 있을 수 없는 것도 인간은 스스로 기억을 지울 수 없는 까닭이다. 허나 마틴은 10년도 넘게 매일같이 이미 겉으로 드러난 정보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실의 경계를 확실하게 구분 지어야 하는 일상을 보내왔다. 실수란 있을 수가 없다. 하물며 마음을 직접적으로 읽은 것도 아니고 스캐닝이란 특수능력을 사용한 것이라지만 보통 사람들처럼 ‘목격’했을 뿐이다. 무엇보다 트리비아가 혐의에서 풀려나올 수 있게 하는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오로지 이 마틴 챌피뿐이다. 아무도 모르고 오직 트리비아만이 마틴이 그녀를 변호하려 든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다.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것이다.

 

  “BLADE를 대신해서 ROSE와 유사한 클론을 상대하려고 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나중에 자기 행동이 추궁당할 것을 트리비아가 몰랐을 리 없었다. 게다가 이미 앤지 헌트나 토니 리켓이 그녀의 진의와는 관계없이 대외적인 정당성을 확보해 줄 모범답안을 마련해주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말할 것이다. 화사와 재단이 그 말을 100퍼센트 신뢰하지는 않겠지만 논리상 어긋남이 없다면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그녀의 말이 ‘거짓’임을 아는 건 마틴 자신뿐이다. 그 ‘거짓’을 증명하지 않음으로써 진실을 지킬 생각이었다. 브루스의 항해일지를 빼돌린 것처럼.


  “지하연합이 헬리오스를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사실은 개인적인 감정으로 움직였지만 대의명분으로 포장하는 것이 그것을 감추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다. 마틴은 트리비아가 아니, 더 정확히는 지하연합이 어떤 해명을 준비해왔을지 예상했기에 문제없이 그 흐름대로 가리라 확신했다. 이건 모두 그림자로 뒤덮인 가운데서도 홀로 묻히지 않고 트리비아는 그 안에서 빛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틴은 진실을 볼 수 있었다. 이 능력에 감사했다.


  “그 말씀은 ROSE의 유전자를 이용해서 만들어졌을지도 모르는 클론이기에 ROSE와 같은 헬리오스 소속인 BLADE가 그 클론과 대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까?”


  “그래.”


  “잠깐만요, 그건 우리 헬리오스를 의심한다는 걸로 들립니다만. 동맹의 임무를 저버리고 우리가 혐의를 없애기 위해 증거를 말소하려고 했단 말입니까? 그건 회사와 BLADE에 대한 모욕입니다.”


  타라가 마틴과 트리비아의 대담을 끊고 이의를 제기했다. 늘 표정에 자신감과 여유가 흐르는 그녀의 얼굴은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감정 조절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편이 지금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데 더 효과적임을 알고 지은 표정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EMPRESS의 행동은 오히려 헬리오스가 나중에 의심을 받을 만한 가능성을 없앴음을 제고해주십시오. 결과적으론 그 클론을 생포할 수는 없었습니다만, 만약 BLADE가 클론의 목숨을 끊었을 경우를 가정해보십시오.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증거인멸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했겠지요. 결코 귀사의 에이스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생길 불상사에 대비해 의심의 여지를 원천봉쇄하고자 했던 것뿐입니다. 오히려 연합으로서는 회사의 명예를 지킨 셈이 됩니다.”


  루이스의 침착한 답변은 ‘지하연합이 헬리오스의 꼬투리를 잡을 만한 일을 놓칠 리 없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었다. 즉, 트리비아가 의도적으로 자네트 클론을 죽였을 거라는 가능성에 대해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녀가 지하연합측에도 고하지 않은 진실이다. 대의명분으로 움직이지는 않는 그녀를 아는 그들은 짐작했을지도 모르지만 거론하지 않고 넘어갔을 것이다.

 


  트리비아와 자네트 사이에 개인적인 접점은 하나도 없다. 지하연합과 헬리오스, 견제세력간이라는 사실만이 명백하다. 그에 비해 다이무스와 자네트는 같은 세력이며, 자네트가 크리스티네 프리츠임을 아는 이 <일곱 개의 변주곡> 멤버들은 유년시절부터 두 사람이 친밀한 사이임을 안다. 알지만 루이스가 그 점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지하연합 나름의 배려였다. 임무에 사사로운 감정을 개입시키는 건 자긍심 높은 능력자에겐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도 수치일 것을 이해했다. 하여 트리비아의 행동은 돌발적이거나 감정적인 대응으로는 보일 수 없었다. 지하연합이 자네트 클론을 의도적으로 죽일 이유는 어디를 봐도 찾아볼 수 없기에 트리비아의 ‘실수’는 용인되는 것이다.


  그림자 안에서 이미 클론들은 트리비아에게 죽었다. 모두가 자연스레 예기치 못한 전격계 클론의 ‘동족상잔’ 때문에 샘플을 회수하지 못했다고 여기고 있다. 헬리오스 입장에서는 자네트 클론의 죽음의 진상을 추궁할 필요가 없었다. 연합은 정말로 자네트와 안타리우스가 관련이 있음을 증명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없애준 셈이다. 반박할 말도 없는 것은 물론이다. 허나 재단은 이번 작전의 주도자이자 중립세력으로서 모든 것을 꼼꼼히 따져보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그것이 트리비아에 대한 모든 의심이 여지를 없애는 일이기도 하다.

 

 

  “EMPRESS, 당시 전투 상황에 관해 좀더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그 클론들은 몹시 빠른 속도로 상대의 틈을 찌르고 들어와서 거리를 벌리고 싸우는 데 유리한 내겐 정공법으로는 까다로운 상대였어. 하물며 하나도 아니고 셋이었으니까. 하나는 BLADE가 상대하고 있을 때 피치 못하게 숨통을 끊었지만 어쨌거나 그림자로 시야를 가린 뒤 공격하여 속히 전투불능상태에 빠뜨리는 게 유리하다고 생각했지. 그 시도는 성공했지만 그림자의 사각으로 다른 클론들의 공격이 곧바로 들어올 줄은 예상치 못했어. 나를 노린 공격은 내가 이미 민첩하게 움직일 수 없게 만든 그들에게로 떨어졌어. 여기까지가 내가 다시 의식을 되찾고 전투에 합류하기 전까지의 기억이야.”


  담담하게 말하던 트리비아 마지막 한 마디에선 잠시 마틴과 눈을 마주하고는 슬그머니 옆으로 돌렸다. 정신을 잃은 그녀가 깨어나자 여전히 클론들을 조종하며 만면의 미소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그녀가 지은 표정과 비슷했다. 조금 놀란 듯하면서도 어딘가 부끄러운 듯한 얼굴이었다. 그녀에게는 수치의 표현일지 몰라도 마틴에게는 그저 사랑스럽게만 보이는 얼굴을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심장 고동이 빨라졌다. 앤지 헌트 같은 감이 좋은 사람이 이 자리에 없기를 바랐다. 마틴은 필사적으로 평정을 가장하며 다이무스에게 눈길을 돌렸다.


  “BLADE도 혹시 클론과의 전투에서 얻은 정보가 있으십니까?”

  “……그 클론들이 구사하는 검술은 ROSE의 실제 검기劍技와 비슷하다고 판단한다. 이상이다.”


  다이무스의 침착한 말은 조용하게 파격적이었다. 타라는 ‘아니나다를까’란 표정을 지었고, 자네트는 약간 고개를 떨어뜨렸다.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자네트를 두둔하지 않고 공정함을 견지하려는 그의 태도는 트리비아가 일부러 자리를 바꾸어 자네트 클론을 상대하려 한 행동과 묘하게 어우러졌다. 자기가 맡고 있던 적을 타인에게 넘긴 건 자존심을 무릅쓰고라도 대의를 위해 움직일 것을 택했다는 인상을 주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걸 그 스스로가 가장 잘 알 것이다. 그때 현장에서 마음이 흔들렸음을 자책하며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다. 물론 섣불리 자네트를 편드는 것보다 그렇게 하는 게 그녀를 위한 일이라는 이유도 있을 터. 무엇보다 마틴만큼 정확하게는 알지 못하더라도 다이무스도 어렴풋이 깨달았을 것이다. 트리비아가 자네트 클론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는 사실을. 다만 그 이유를 모를 뿐이다.


  “허나 전투기술이 비슷하다는 이유도 ROSE가 안타리우스와 관련이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사이퍼의 유전자에 관해서 아직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는 바, 기술적 유사성이 반드시 유전적 동일성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SECRETARY. 증거가 불충분한 상태에서 정황만 가지고 억측하는 건 안 될 일이지요. 현실적으로 봤을 때 아무래도 제레온 경의, 더 정확히는 검의 형제 기사단의 행보를 못마땅하게 여긴 그들의 보복의 소치라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합니다. 우리의 공공의 적을 타파하기 위해 가장 정력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그들이라고 알려져 있으니까요. 간교한 이간질 공작을 벌여 우리로 하여금 다시 내부분열을 일으키게 하려는 속셈일 것입니다.”


  마틴이 빙긋이 웃으며 순순하고 자연스럽게 헬리오스측을 두둔했다. 앞으로 회사와의 관계를 다시 쌓아올리기 위한 포석이었다. 재단의 변화 중심에 마틴이 있고 항해일지 건에 역시나 그가 개입했다는 심증을 갖고 있으므로 회사는 앞으로 마틴을 경계하려 들 것이다. 하지만 마틴은 그들이 자신을 경계하도록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지금은 지하연합과도 가까워지기 위해 활동하고 있지만 회사와도 예전만큼이나 ‘돈독하게’ 지낼 생각이었다. 설령 회사 사람들에겐 전혀 그럴 마음이 없다 할지라도 마틴이 그렇게 다시 만들 것이다.

 

 

  “해치워도 해치워도 끊임없이 밀려오는 적들을 보며 다들 생각한 바가 있었을 것이오.”


  클론 문제에 관해서 일단락된 듯 보이자 브루스가 회의주도권을 가져가며 화제를 바꾸었다.


  “그렇소. 그 엄청난 물량을 도대체 어떻게 보급하는 걸까 하는 경악과 의문일 것이오. 분명 인형실 끊기 작전으로 노인이라는 구심점을 잃고 뿔뿔이 흩어진 안타리우스였을 텐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거요. 옥사나 야코비치의 비상한 복제능력을 바탕으로 노인 사후 혼란을 예상보다 훨씬 빨리 수습하고 중심을 다시 잡은 게지. 사이비 종교단체 티를 벗지 못한 과거였다면 지금은 엄연한 사이퍼 세력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의 저력을 지닌 것이 틀림없소. 게이트웨이에 그들이 설계해놓은 진격시스템은 그런 힘의 과시라고 보아야 하오. 오만하게도 스스로 불멸성을 논하듯이.”


  브루스는 치가 떨린다는 듯이 이를 바득 갈고 주먹을 꽉 쥐며 스스로의 분노를 잠시간 음미했다.


  “그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물론 안타리우스가 새로운 이공간을 발견해냈기 때문은 물론이오.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트와일라잇에 이어 우리보다 먼저 게이트웨이를 찾아낼 수 있었는지에 관해서도 지속적으로 조사해야 할 것이오. 노인의 생존 당시 「액자」의 계시로 칸도르로 통하는 길인 일루전을 찾아냈다고 전해지오. 그러므로 현실에서 게이트웨이로 이어지는 곳은 없는지 탐색해야 하오. 한편으로는 인형실 끊기 작전 이후 시바 포가 들고 달아난 「액자」의 행방에 관해서도 심각한 고민이 필요하오. 그녀가 정녕 「액자」를 그들에게 전했는지 아니면 새로운 매개물을 손에 넣었는지 우리는 아군이 아닌 모든 것을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하오.


  적은 진일보한 그들의 힘을 숨길 생각도 않고 우리에게 먼저 다가와 그 사실을 알렸소. 이는 수치스러워해야 할 일에 틀림없소. 인형실 끊기 작전 이후 도래한 평화에 우리는 너무 마음을 놓고 있었던 거요. 이제는 그런 안일한 태도를 싹 갖다 버려야 하오. 우리 재단은 진정한 평화를 도모하는 데 위대한 능력자 그랑 플람의 이름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오. 그들은 대공황의 여파를 이용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민간인들까지 끌어들이고 있소. 이는 분명한 도발이오. 조화를 위해서 우리 사이퍼들은 비능력자들의 안위를 책임져야 할 필요성이 있소. 그들에게는 안타리우스는 물론 어려운 경제상황에마저 저항할 힘이 없소. 지금보다 더욱 민간인들의 삶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사이퍼계의 문제가 그들의 삶에 침투하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오. 그 과정에서 회사와 연합은 반드시 협력해야 하오. 그렇게 함께 비능력자들을 돕는 과정에서 사이퍼들끼리의 해묵은 갈등도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 나는 믿소.”


  

  브루스는 열정과 희망에 가득 찬 어조로 말했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고 더욱이 감동적이기까지 했지만 헬리오스와 지하연합은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강한 중립 세력만이 서로 반목하는 세력 사이에서 제법 큰 영향력을 끼치기 좋은 자리를 점할 수 있다. 그랑 플람 재단은 지금 그런 입지를 이 자리에서 굳히고 있었다. 반박할 수 없는 당위적인 명분을 거부할 수는 없다. 재단은 앞으로 회사와 연합이 스스로 거부할 수 없는 권유와 제안을 지속적으로 해올 것이다.


  그들은 키를 잡았다.


 

* * *

 

 

  “엘리어트, 넌 갑자기 널 밀어내버린 날 원망하니?”


  기분 좋게 잔을 짠 부딪쳐 몇 번째인지도 모를 건배를 반복하던 도중 마틴이 불쑥 말을 내밀었다. 다시 한 번 기분 좋게 원샷하려던 엘리어트는 당황스러움에 목구멍이 턱 막혀 사레 들렸다. 켈록켈록 거나하게 기침을 하다가 겨우 진정하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엘리어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마틴을 쳐다보았다.

 


  마틴은 브루스와의 약속을 깨고 재단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쓰기로 결정한 그날 이래로 한 번도 엘리어트와 만난 적이 없었다. 같은 재단후원자이지만 피차 바빠 의도적으로 피하지 않아도 우연으로도 마주치는 일이 드물었다. 먼발치에서 엇갈릴 때도 아는 척하는 건 엘리어트 뿐이었고 마틴은 알아차리지 못한 척했다.

 

  엘리어트의 체질 같은 무력화 능력 덕분에 다시 보통 사람이 된 것 같은 기쁨을 맛보며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그런 고마운 친구를 재단을 위한 일이었다고는 해도 의도적으로 멀리한 게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렇게 불쑥 술자리로 불러냈지만 바람 맞을 각오도 했는데 그가 넉살 좋게 웃으며 펍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는 왠지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제까지도 친했던 것처럼 아무런 추궁도 하지 않는 친구를 되레 자기가 못 견뎌 한심한 질문을 하는 게 부끄럽다. 연기하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은인 브루스와 사랑하는 트리비아와 이 둘도 없는 친구에게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마틴이 포기하려 했지만 마지막까지도 포기할 수 없는 순수한 마음이다. 스스로가 틀리지 않았다고 여기기 위해 은혜와 연모와 우정을 이용하는 자신이 씁쓸했다.

 


  엘리어트는 마틴의 등을 퍽퍽 두들기며 그럴 리가 있냐고 한바탕 웃어버릴까 했다. 허나 마틴의 무섭도록 진지한 얼굴에 차마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겨우 진정한 목으로 다시 맥주를 흘려넣고선 입을 열었다.

 

  “아니? 내가 왜?”


  엘리어트는 어깨를 으쓱하며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마틴은 놀란 듯 입을 약간 벌린 채로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재단의 공식 미남이 이런 얼빠진 얼굴을 한다는 걸 알면 포트레너드 전역에 널린 그의 여성팬들은 실망하기는커녕 귀엽다고 난리를 치겠지라고 생각하며 엘리어트는 마틴의 등을 적절한 세기로 한 번 후려쳤다.


  “얌마, 네가 인기 많은 건 네 옆에서 오징어로 산 세월이 제일 긴 내가 제일 잘 안다고 자부하긴 하지만 말이야, 나도 여기저기 불려다니는 바쁜 몸이시거든? 건방진 마틴 챌피, 이 엘리어트 형님을 뭘로 보는 거야.”


  펍에 있는 몇몇 여성들의 열띤 시선 안에 덩달아 노출되는 걸 의식하며 신의 불공평함을 원망하듯 아몬드를 한 움큼 입에 넣고 아그작아그작 씹었다.


  “넌 나랑 달리 머리가 엄청나게 좋은 녀석이니까 어련히 생각이 있겠거니 하고 말았지. 그때 넌 뭔가 굉장히 중대한 결정을 한 듯도 보였어. 촌스럽게 사나이 하려는 일을 꼬치꼬치 캐묻기도 쫌 그랬고.”
  “내가 뭔가 수상한 일을 꾸민다는 의심은……안 해봤어?”
  “넌 그런 짓 안 해.”


  엘리어트의 단언에 마틴은 더욱 입을 크게 벌리고 이젠 눈까지 휘둥그레 떴다.


  “너만큼 재단을 아끼는 놈이 어디 있다고. 짜샤, 아까운 맥주 김빠지게 하지 말고 퍼뜩퍼뜩 마셔. 난 오늘에야말로 네놈 취하는 꼬락서니를 한 번 봐야겠다.”


  마틴은 그제야 첫 잔을 받고는 반도 마시지 않은 자신을 잔을 내려다보고는 마침 목이 탔다는 듯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엘리어트는 빈 잔을 거품이 흘러넘칠 만큼 가득 채워주었다.


  “게다가 나나 다른 재단후원자들은 너한테 빚을 진 셈이야. 말은 안 하지만 다들 너한테 고마워하고 있다고. 형제나 다름없던 헬리오스가 그런 식으로 나오니까 다들 우왕좌왕하기 바빴는데, 재단을 지키려고 제일 눈코 뜰 새 없이 뛰어다닌 게 너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어. 회사를 그대로 내버려뒀다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지 상상도 하기 싫다 야. 우린 헨리 밀러 3세가 아니고 그랑 플람을 따르는 사람들인데 말이야.”


  “그 과정에서 수많은 거짓말을 했다 해도? ……신의를, 저버렸다고 해도?”


  엘리어트는 잔을 쥔 마틴이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잔을 꽉 쥐는 것을 힐긋 보았다. 스스로를 참을 수 없다는 듯 마틴은 그답지 않게 맥주 한 잔을 한꺼번에 들이부었다. 엘리어트는 술잔을 테이블 위에 탕하고 거칠게 내려놓는 마틴을 묵묵히 보다가 가뿐히 한숨을 쉬며 다시 잔을 채워주었다.


  “뭐어, 솔직히 지금에야 터놓는 거긴 하지만 넌 처음 만났을 때 좀 무섭긴 했지.”
  “……내가?”
  “의외지? 첫인상도 그렇고 널 경계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 거야. 능력을 알고 나면 반응이 좀 달라지기는 하지만……여튼 넌 너무 멀쩡해서, 그래서 이상했어.”
  “…….”


  엘리어트는 테이블에 턱을 괴고 과거를 내다보듯 허공에다 시선을 내다걸었다. 마틴은 한꺼번에 속으로 알콜을 부은 터라 확 올라오는 술기운을 느끼며 엘리어트가 보고 있는 기억을 공유하듯 같은 곳을 보았다.


  “이몸이 무력화 능력자잖냐. 내 능력특성상 난 넘치는 능력을 주체 못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일이 많았는데 넌 그들처럼 우울증에 빠지지도 사람을 기피하지도 도와달라고 무작정 매달리지도 않았지. 지나가는 여자들이 보면 백이면 백 다 돌아볼 정도로 잘생긴 데다가 박식하고 친절하지만 왠지 알 것 같더라. 겉으론 멀쩡해 보이는데 아 얜 뭐가 끝장나도 단단히 끝장난 녀석이구나 하고. 내가 친화력이랑 사교성하면 둘째가면 서러운데 너같이 지독히도 마음 안 여는 놈은 진짜 앞으로도 없을 거다. 뭐, 그런 너도 결국엔 이 엘리어트 님께 굴복했지만. 핫핫핫―.”


  엘리어트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마틴에게 어깨동무했다.


  “넌 결국 마음을 열었어. 그게 중요한 거야. 내가 아닌 그 누구에게라도 너는 마음을 열 준비가 되어 있던 놈이라고. 사람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네가 남의 마음을 함부로 다를 리가 없잖아? 특히 재단 동료들한테는 더욱더. 우리 눈은 옹이구멍이 아니야. 네가 거짓말을 하면서 죄책감을 느꼈을 거라는 거 다 알아. 신의, 그래. 원칙은 원칙이니 너는 우리의 이념을 속인 게 되지만 중요한 건 하나도 변하지 않은 거야. 재단을 지키고 그 안의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한 일이었잖아? 솔직히 네가 재단의 핵심으로 자리하자마자 눈에 띄게 재단의 움직임이 변하는 걸 감지하면서 이 자식이 진짜 무서운 놈이기는 하구나 생각이 들었는데 그게 다 재단을 위한 네 헌신이었으니까. 별 위기감도 안 가지고 있던 내가 불로소득을 얻어서 얼마나 부끄러웠는 줄 아냐? 감사 인사를 하려고 해도 이사님들 사이에 있는 게 네 일상이 되다보니 어째 나도 좀 삼가게 되고…….”


  엘리어트는 마틴의 뒷머리카락을 일부러 엉망으로 흩어놓으며 씨익 웃었다.


  “근데 이렇게 우리의 높으신 마틴 챌피 님이 왕년의 형님을 잊지 않고 찾아주시다니 소인 감개가 무량합니다! 오늘 술값은 출세한 네가 쏘는 거 맞지?”
  “오늘 술값‘도’겠지. 언제나 네가 먼저 뻗어서 늘 내가 냈던 것 같은데?”
  “어, 그랬나? 기억이 잘~? 하하하.”
  여전히 어깨동무한 채 저러다 깨먹는 건 아닌가 주인장이 날카롭게 째릴 정도로 잔을 세게 부딪친 두 남자는 다시금 해후주를 들이켰다.
  “그런데 마틴 너 안 본 사이에 말이야, 진짜 얼굴 좋아졌어. 뭐 좋은 일이라도 있었냐? 이 이상으로 내가 꼬시려는 여자들까지 꿰어가면 곤란한다고, 이 자식아.”
  “…실은 말이야…….”
  “응- 응-.”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


  엘리어트는 입을 딱 벌리며 마틴을 보았다. 문제는 술 삼키는 걸 잊어먹어서 놀라움으로 벌어진 입으로 그대로 술이 비죽 흘러나와 다시 컵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 더러운 광경에 마틴은 더 말하고 싶은 기분이 싹 달아나는 것 같았다. 오늘은 만취해서 뻗어버린 엘리어트를 두고 술값을 내지 못해 다음 날 주인장에게 시달리게 할까 진지하게 고민되었다. 엘리어트는 충격으로 한동안 더 굳어 있다가 황급히 술잔을 내려놓으며 스툴과 함께 아예 옆에 앉은 마틴 쪽으로 몸을 완전히 돌렸다.


  “이거 완전 빅뉴스인데! 누구의 것도 되지 않는 사내들의 공공의 적 마틴 챌피가 드디어 한 여자를 위해 뭇 여자들 울리게 생겼구나! 누군데? 이뻐? 어떤 사람이야?”
  “……고요하고, 아름다운 밤 같은 사람이야.”
  “뭐여, 그게. 시방 나란 수수께끼하냐? 그런 두루뭉술한 말로 어물쩍 넘길 생각 말고! 아니다, 아니야. 조만간 제수씨 한 번 소개시켜주라!”
  “지금 당장은 힘들 걸.”
  “왜?”
  “짝사랑이라.”
  “뭐어?! 천하의 마틴 챌피가?!


  엘리어트는 온 열과 성을 다해 믿기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애쓰는 것 같았다. 펍 안 사람들의 눈이 전부 이쪽으로 쏠리자 마틴은 엘리어트에게 입술 위로 검지를 붙여 보이며 조용히 하라고 했다. 평소라면 호기 어린 시선과 함께 마음의 소리도 복작복작 들려올 테지만 지금 곁에 있는 건 무력화 능력자다. 마음만 먹으면 들을 수야 있겠지만 긴장을 늦추고 있어도 들리지 않는다.


  “이야, 세상에 널 거부할 여자가 어디 있다고……. 서, 설마 유부녀는 아니지? 친구야, 난 널 그렇게 키우지 않았단다.”
  “……엘리어트, 점점 네가 날 평소에 어떻게 보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일까? 우리 오늘 심층 상담이라도 한 번 하는 건 어때?”
  “헉. 됐거든! 야, 진짜 누구야. 얼른 불어!”
  “아직은 말 못해.”
  “우리 사이에 뭘 숨겨? 야, 마틴 챌피. 야!”

 


* * *

 

 

  비가 오는 날의 숲은 모든 것이 잔뜩 웅크린 채 숨죽이고 있는 것 같아 거북하다. 빗물을 빨아들여 한층 더 자라기 위한 발돋움에 예비하는 것이라고는 해도 그것이 마치 일시적인 죽음으로 느껴져서 섬뜩하다. 비가 오면 잔뜩 피어오르는 흙과 풀냄새는 낭자한 피냄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곳이 그냥 숲이 아니라 몇 개인지도 모를 무덤을 품고 있는 숲이라서 그런지도 몰랐다.


  달랑 이름과 생몰연대만이 적힌 브랜다의 묘비는 비에 젖어 더 진한 회색이 되어 한층 음울해보였다. 썰렁한 공터에서 묘비는 그야말로 묘비임을 주장하듯 겨울비의 을씨년스러움과 어우러졌다. 배신자의 말로로 딱 어울리는 풍경이라고 냉혹하게 평할 수도 있을까. 그 발치에 내려놓은 희디흰 백합 꽃다발은 아름답다기보다 분위기를 망치는 이물질로 보였다. 여태껏 한 번도 꽃을 바친 적은 없었기에 오늘에야 처음 알았다.


 
  브랜다가 참 좋아했던 꽃이었다. 루이스는 그 진한 향기가 싫었지만 자기가 향기롭다는 걸 뽐내는 꽃다움이 좋다고 했다. 그녀가 좋아한 꽃이지만 조화弔花가 되었다. 그녀는 자기가 좋아하는 꽃이 자기 무덤가에 바쳐지리라 예상했을까. 백합은 그녀가 좋아했다는 이유에도 영면에 든 이에게 바치는 조화라는 명분에도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 브랜다는 배신자다. 그녀의 죽음은 존엄하지 않으며 그녀에 대한 추억을 반추하는 것도 그녀로 인해 죽은 터커를 비롯한 동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 꽃은 모욕이었다. 한때 사랑했던 여인을 위한 것도 아니고 죽은 동료들을 위한 것도 아닌 루이스의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았다. 이 무덤을 찾는 것은 이제 마지막이라는 맹세의 표시였다.


  “브랜다.”


  제법 거센 빗줄기가 나뭇잎을 때리고 나뭇가지를 짓누르며 쏟아지는 소리에 목소리는 거의 묻혔다. 누구도 듣지 못하고 자신의 귀에만 맴돌고 마는 소리라서 말에 거리낌이 없었다.


  “네가 내게 준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야. 그러기엔 내가 너무 비참하니까.”


  사람들에게 안 좋은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가 이제는 무참히 잊혀가는 브랜다를 루이스가 의심하는 것은 끝내 그녀를 미워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배신자라고 욕하며 그녀가 자신에게 나눠주었던 온기를 모두 연기라 생각할 수 있었다면 차라리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살면서 가장 행복하고 평온했던 순간을 거짓으로 치부해버리기엔 스스로에 대한 연민이 앞섰다. 배신한 그녀를 미워하지 못하는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지금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어쩌면 앤지가 그만두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죽을 때까지 우유부단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결정하기를 계속 미루고 있었다는 점에서 한심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세상 사람들 모두가 브랜다를 욕하고 미워해도 루이스는 그저 침묵할 뿐 그 반열에 참여할 수 없었다. 배신자라는 이유로도 화는 나도 마음이 미움으로 돌아서지는 않았다. 그것이 숨길 수 없는 루이스의 본심이었다.


  “사랑했어, 브랜다.”


  과거형이다. 지금까지는 모른 척했을 뿐 현재진행형이었을지도 모른다. 트리비아를 사랑하면서도 가슴은 여전히 브랜다를 떠나보내지 못했다. 그래서 트리비아에게 불안을 안기고 자신 또한 불안했다. 지금 그 모든 미련을 청산함으로써 비로소 현실과 마주보려 했다. 과거에 일부 남겨두고 온 마음을 주워 담아 단단히 챙기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 한다. 이 비가 그치고 백합이 썩어 이 무덤가 거름이 되는 것보다도 일찍.


  루이스는 잠시 웅크리고 앉아 비에 얼어붙은 묘비 위로 살짝 입을 맞추었다. 이윽고 몸을 일으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숲을 빠져나갔다.


  빗물에 살짝 입술을 적시는 정도의 마지막 입맞춤과 비에 얼어붙은 백합 향기만이 공터에 남았다. 사람의 자취는 온데간데 없었다.


  영원히 그럴 것 같았다.

 

 

* * *

 

 

  다른 사람들이 보면 결코 동행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서로 동행을 자처한 적도 없지만 비록 3미터라는 거리에도 서로를 명백히 의식하고 있는 묘한 침묵이 마틴과 브루스 두 사람이 나란히 걷고 있음을 증명했다.


  공교롭게도 헬리오스 본사에서 각기 볼 일을 마치고 나와 정문에서 딱 마주친 두 사람은 잠시 눈빛만 주고받고는 제각기 갈 길로 갔다. 두 사람의 행선지는 회사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재단이었기에 동행 아닌 동행이 된 것이다.


  누가 먼저 말문을 여나 겨루듯 끈덕진 무언만을 고수하던 와중 각자 정면에서 오는 사람과 비켜서느라 서로의 거리를 좁히게 되었다. 누가 보면 분명한 동행으로 보일 터였다. 좀처럼 정면으로 오는 행인이 없어 다시 거리를 벌릴 구실이 없었다. 피차 고집스럽게 정면만 보고 걷다가 브루스는 급한 제 성질을 견디지 못하고 약간의 굴욕감을 애써 무시하며 무거운 입을 뗐다.


  “……당분간 회사의 교섭하는 일은 내가 전담하겠다고 했을 텐데.”


  “그건 엄밀히 말하면 <일곱 개의 변주곡>에 관련된 사항에 한하는 거죠. 물론 지하연합과의 돈독한 관계를 쌓아올리기 위한 접촉도 충분히 하고 있습니다. 조화에 있어 결코 편벽됨이 있어서는 안 되니까요. 회사와도 전처럼 긴밀한 우호 관계를 다져나갈 생각입니다. 게다가 브루스 씨는 주로 브뤼노 씨와 만나시잖아요? 저는 다른 임원들을 담당한다고 생각해주세요.”


  “……선박 유류품 인도 과정이나 재단의 급진적인 행보 때문에 회사 임원들이 너를 예전처럼 예뻐할 리가 없을 텐데.”


  “네. 확실히 눈에 띄게 경계하더군요. 하지만 제가 그 상태로 내버려둘 리 없잖아요? 사람의 마음을 얻는 건 제 특기니까요.”


  “……능구렁이 같은 놈.”


  “그건 회사의 크루그먼 이사님쯤 되어야 들을 수 있는 소리 아닐까요.”


  브루스는 한바탕 부딪치고 난 뒤에 마틴이 어딘가 뻔뻔해졌다는 느낌이 들어 눈을 가늘게 뜨며 혀를 끌끌 찼다. 하지만 전과 달리 ‘진심’은 아니었다. 멀어진 사이가 다시 가까워지기 위한 거리를 재듯 서로가 아직 쑥스러운 것뿐이었다. 자존심이 있어 손바닥 뒤집듯이 예전으로 돌이킬 수는 없는 것이다. 결코 예전과 똑같을 수도 없었다. 서로 잘못한 것이 있고 서로 인정하는 것도 있다. 이해는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헬리오스는 확실히 우리 재단을 잠식하며 허울로 만들려는 만행을 저질렀지만, 그랑 플람의 뜻을 계승하는 우리는 그런 그들마저도 포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지켜나가야 하는 건 재단 그 자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의 숭고한 정신과 그를 바탕으로 세워진 이념이니까요. 회사가 그걸 재단보다 더 잘 지켜나갈 수 있었다면 글쎄요, 회사의 방침대로 되는 것도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겁니다. 회사-재단 협력 이원 체제보다는 아무래도 단일 체제가 업무 처리 속도도 빠르고 효율도 좋으니까요. 하지만―.”


  브루스의 얼굴이 곧이라도 노성을 쏟아낼 듯 서서히 달아오르며 일그러지는 것을 제지하듯 마틴이 갑자기 단호한 어조로 전환했다.


  “회사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재단을 흡수해서 더욱 세를 불리고 지하연합보다 우위를 점하려고 했습니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것을 억지로 섞을 필요는 없죠. 물이 기름 위에 떠있도록 자연스러운 그 상태가 흐트러지지 않는 것이 바로 조화입니다. 거기엔 우열이 없죠. 우열이 없기에 조화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 헬리오스의 작태는 조화를 파괴하는 행위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정당성은 어디에도 없을뿐더러 아예 관계의 파괴가 필요했죠. 그랑 플람의 이념을 망치는 자들이 재단과 형제지간을 자칭하게 둘 수는 없었으니까. 더 이상 그들이 그랑 플람의 이름을 마음대로 이용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습니다.”


  브루스는 잠깐 치밀어 올랐던 화도 잊고 묵묵히 마틴의 말을 듣기만 했다.


 
  두 사람은 어느새 재단 앞에 도착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숭고한 길>이 새겨진 재단 기념비 앞에 나란히 섰다. 한동안 눈과 마음으로 시구를 읽어내리기 위한 시간을 보내다가 마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쩌면 회사에게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한 짓은 괘씸하지만 그로 인해 재단후원자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었고, 그간 소홀했던 지하연합과의 관계 구축을 위한 첫걸음도 내딛게 해주었으니까요. 새로운 시작, 새로운 모험, 새로운 항해입니다. 가라앉은 것은 다시 떠오르기 마련이니까.”


  마틴은 아예 브루스에게로 몸을 돌렸지만 브루스는 계속해서 시비를 응시했다. 더 이상 그 내용을 보고 있지는 않았다.


  “브루스 씨.”


  이름을 부르는 마틴의 목소리가 퍽 진중해서 브루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예상외의 말이 들려와 브루스는 몸을 돌려 정중히 허리를 숙인 마틴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순순히 사과한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막상 사과를 받아보니 뼈저리게 깨닫는다. 사과를 바랐던 게 아니다. 마틴은 잘못한 게 없었다. 녀석이 누구보다 필사적으로 재단을 지키려 했음을 일찍이 인정하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는 이 능력을 멋대로 사용했습니다. 허나 그건 나와 그리고 당신이 사랑하는 재단을 위한 일이었음을 의심하지는 말아주세요. 그 방법이 달랐고 또 앞으로도 충돌하는 일이 종종 생길 테지만, 다른 길을 간다 해도 뜻은 하나이기에 우리는 늘 그 길 끝에서 만날 겁니다. 그러니 부디 제 마음을 알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더 이상 당신과 냉전하고 싶지 않아요.”


  브루스는 마틴의 솔직한 사죄에 스스로가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이 고집은 자기 잘못을 뒤늦게라도 순순히 시인하는 마틴의 태도에 비하면 얼마나 사소하고 부질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가. 젊은이의 유연함을 비열한 기회주의라 치부해버린 과거를 후회한다. 그걸 분별할 줄 아는 것이 바로 연로한 이만이 지닐 수 있는 특권일 텐데. 두 눈을 스스로 가리고 있던 셈이었다.


 

  그랑 플람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사회로부터 소외당하여 울분과 외로움을 앓던 사이퍼들을 기꺼이 거두었다. 그대로 짐승의 삶을 살거나 인간의 삶을 파괴하기에 자연과도 어우러지지 못하고 짐승만도 못한 삶의 끝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마틴을 재단으로 영입한 것도 브루스 자신이 그랑 플람에게 받은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함이었다. 이용가치가 높지만 그만큼 위험해서 오히려 조화를 파괴할 수 있단 이유로 마틴은 재단에 거부당했다.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로 브루스는 재단을 설득했다. 그랑 플람은 누구도 밀어내지 않았다. 그의 강인한 품은 모두를 거두었다. 갈 곳이 없는 이는 재단으로 올 수 있어야 했다. 그것이 그들의 웅이 바란 일이다.


  브루스로서도 우려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재단 입단시에 거치게 되는 심사 과정에서 마틴은 이념에 완전히 부합되는 인물은 아니었다. 하여 이사진들도 독심술이란 능력의 양날검 같은 위험성과 함께 더 반대했는지도 몰랐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마틴은 특유의 사교성으로 금방 재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고 누구보다 그랑 플람의 이념을 몸소 실천하는 재단원으로 거듭났다. 능력을 사용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자기를 받아들여준 곳에 대한 애정으로 오롯이 대하는 거였다. 엘리어트와 함께 다니면서부터는 더욱 녀석은 매력적인 사람이 되었다. 가정을 이루어 만약 아들이 있었다면 이런 기분일 거라고, 아니 피가 이어져 있지 않아도 친아들이나 다름없다고 여겼다. 한때 그 신뢰를 배반당했지만 사실은 이렇게나 순수하고 올곧다. 처음부터 그랬듯이.

 

 

  마틴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려고 하자 브루스는 그 머리를 다시 누르듯이 손을 턱 얹고는 머리카락을 새집처럼 헤집었다. 퍽 거친 행동처럼 보였지만 그 손길은 의외로 다정했다.


  “……흥, 애송이가.”


  마틴은 무겁게 이고 있던 손이 떠나가자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모자를 괜히 눌러쓰는 브루스의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미소 짓고 있는 그의 입술을 발견했다. 꼿꼿하고 넓은 등이 앞장서 척척 재단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걸 가만히 보다가 미소 지으면서 마틴은 브루스의 뒤를 쫓아 달렸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나란히 황혼에 길게 늘어졌다.

 

 


― epilogue로 이어집니다.

 

 

*
- 일찍이 「할로윈 外(다무트리 손바닥글 모음)」의 <날아오르다>와 <할로윈>에서도 썼지만 트리비아의 날개가 어디 붙어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일단 일반적으로 날개가 붙어 있는 등으로 했습니다. 패션의 완성하는 아이템이라고 플레이버 텍스트에 되어 있어서, 기본룩처럼 엉치뼈 근처에 붙어 있다고 해야 하는 걸까 생각도 했지만 ‘그건 옷이잖아?’라는 현실적인 생각을 버릴 수도 없군요. 그래서 예전과 달리 지금은 의지에 따라 감출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하물며 트리비아의 진짜 날개 색은 검다고 하니까요. 아님 날개가 기본룩 날개장식이랑 연동(?)한다고 생각해야 하는 건지. 사실 저도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대체 트리비아 날개는 어떻게 생겨먹은 거지. 혼돈의 카오스.
- ‘잠겨 죽어도 좋으니’란 표현은 이정하 시인의 <낮은 곳으로>의 일부를 차용했습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표현이죠.
- 통각이 거세되었다는 건 아무리 불을 태우고 수장시켜도 아무 변화 없는 인게임 내의 얼굴을 참고했습니다. 무서워요.
- 엘리어트는 무력화 능력을 가지고 강한 능력에 억눌려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해주는 그런 아주 착한 사람이라고 그려보았습니다. 그야말로 안타리우스의 미니와는 다르게 능력을 사용하는 거죠. 미니가 아마도 울음소리로 적들의 무장 해제시켜 거의 일방적인 살육이 가능하도록 하는 능력이라면 엘리어트는 안정제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 오탈자 및 이상한 문맥 지적, 비판, 다양한 질문 격하게 환영합니다. (전작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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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폐」[피터미쉘데샹]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3763240)
「유도」
[데샹미쉘피터]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4004813)
「호접지몽」
[다이무스]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6171648)
「Twilight」
[올캐러/장편]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8138407)
「손바닥글 모음」
[다무트리]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8953308

「한 여름밤의 꿈」[올캐러/비정기 연재중]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10394173)

늑대와 소녀」[바레미쉘]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11709858)

- 이번 화의 참고자료는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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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 OK Oh! 냠~ Love U~ 궁금해! YES! 히힛~
안녕하십니까? 예~예~ 모든 것은 신의 뜻... 불허합니다. 의외군요. 나 원 참... 시작할까요? 강화인간!!
안녕? OK 궁금하네요. 역시! 재미있네. 깜짝이야! 아~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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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정색) 축하드립니다. 칭찬해 드립니다. 놀랍군요. 매우 화가 나네요. 큰 충격입니다. 놀랍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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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잘 못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매우 화가 나는군요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좌절상태입니다 감탄했습니다 칭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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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정유년! 정의로운 새해복! 극.한.공.성. 복! 받아랏! 음~ 직장인의 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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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합니다 궁금하네요 에구머니나! 슬프네요... 경멸스럽군요.. 후훗~ 뭐라고 하셨죠? 이, 이럴수가...!
아이작의 멋진 모습 이글이라 샤샤샤~ 트리비아 슬라이딩 시바 포는 달린다 까미유도 달린다 라이샌더 달린다 마를렌 점프! 샬럿 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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