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은 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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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6 16:48:27
그림은 M자탈모이글님이 그려주셨습니다.
*
[따르릉-. 따르릉-.]
울리는 알람을 끄고 휴고 엔리케즈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버릇이 나빴던 모양인지 이불은 바닥에 떨어져있었고 커버는
반쯤 나와 있었다. 커버와 이불을 원상태로 돌려놓고 휴고는
정신도 차릴겸 샤워를 했다.
요란했던 잠버릇 덕택에 머리카락은 몇시간만에 산발이 되어있
었는데 중력에 저항하는 몇가닥의 머리카락을 바로잡는데 꽤 시
간을 잡아먹어버렸다.
서둘러 면도를 하고 휴고는 부엌에 섰다. 토르티야 반죽을 만들
고 숙성될 수 있도록 수건을 덮은 뒤 재료를 다듬기 위해 식칼을
쥔다.
누군가를 위해서 음식을 준비한지는 꽤 됐다. 사서 일을 시작하
고 나서는 계속 혼자 있었으니까. 딱히 사람을 가렸던것은 아니다.
도시라는 형태에 익숙해지지 못했을뿐이었다.
휴고의 고향은 시골이었다. 옆 집의 식기 갯수도 알 수 있을정
도로 서로 가까웠기때문에 처음 도시에 올라왔을때 사람들이
서로에게 쌓는 벽에 대해서 이질감을 느꼈다.
그러나 휴고는 곧 그 이유를 알수 있었다. 사람은 너무 많고 전
철은 무기질적으로 구간을 오갔으며 모두가 오직 한가지, 돈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휴고에게 있어 도시의 것들은 아직까지 영 낮설은 것들이라
반년이 지났음에도 전동차가 출발하거나 멈추거나 커브를 꺾
을 때 휘청이고는 했다. 그래도 식료품점과 책방의 직원과는
안면을 좀 텄다. 그것은 다소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관계에 가
까웠지만.
재료를 다듬는것을 마무리하고 팬에 기름을 뿌린다음 불을 올
린다. 닭고기와 햄 등등 익혀야 할 식재료를 점검한다. 상그리아
에 넣을 과일을 팬의 온도가 올라가기 전에 얇게 자른다. 팬 위에
식재료를 올리고 휘저으면서 휴고는 다시 상념에 잠겼다.
레오노르? 레오노르에 대한 생각은 일부러 멈추었다. 잠버릇
이 얌전한 휴고가 밤중에 침대를 어지럽힌 원인이었고 손을
움직이게 만드는 원인이자 손을 멈추게 만드는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위해만드는 도시락이 그녀에 대한 이러저러
한 생각때문에 완성되지 못한다면 그만큼 우스운 일도 없을것
이다.
그녀의 동생인 다리오 경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도서관을
방문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특이한 부류에 속했다. 무엇보다
관심사의 광범위함에 대해서. 가끔 식사를 잊으면서도 몰두
하는 천재적인 집념에 대해서. 그래서 '다리오 드렉슬러'의
'발명'에 관한 기사를 신문에서 접했을때 휴고는 딱히 놀라지
않았다.
어쩌면 스쳐지났던것에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구체화시켜
실용화시키는 발명이란 그런 괴짜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는것
이 당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토르티아를 주었던 이유도 어쩌면 그 연장선상에 있었을것이
다. 친분을 위해서는 아니다. 오히려 여러 금서를 다루는 사서
의 입장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럼에도 토르티아를 건
넸던 이유는 사람이 책에 파묻히는 이 적막한 도서관을 찾아와
불을 밝혀 온기를 퍼뜨리는 '사람'에 대해 휴고가 그리워했기
때문이다.
책은 누군가 찾아와 읽고 생각하고 느끼기 이전까지는 아무것
도 아니다. 그 이전까지는 죽은것과 다름없다. 어느 비가 오던
날 서고에 혼자 등불을 밝히고 있던 휴고는 그곳이 마치 공동
묘지 같다고 생각했었다.
부엌에 고이는 기름냄새를 빼기 위해 작은 창문을 열었다. 시
간은 아직새벽 다섯시 삼십분. 서서히 떠오르는 해는 거리를 둘
러싼 잠(어둠)을 보듬어 일으키고 있었다. 고기를 식히는동안
수건을 덮어두었던 또르띠아 반죽을 꺼내 평평하게 피고 기름
없이 팬에 굽는다.
입맛을 당기는 향긋한 냄새가 퍼진다. 익숙하면서도 낮선 냄
새라고 휴고는 생각했다. 평소보다 조금 비싼 재료를 사용하
기는 했지만 그렇게 큰 차이는 없을텐데 그 냄새와 모양새는
평소보다 훨씬 깊고 풍부하며 선명했다. 휴고는 자신도 모르
는 새에 노래를 흥얼거렸다.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고요해 흰구름 저멀리 외로이 흐르네.
갈곳을 모르고 바람에 이끌려 거니는 어린 소녀♪
♪행복한 맘으로 둘이서 노래해. 서로를 위하여 손잡고 기도해.
이 세상 모든것 머물길 바라네. 순박한 마음으로.♪
♪외따른 방앗간 어두운 그늘에 둘이서 어울려 십자가 만들어
기쁨에 넘쳐서 어쩔줄 모르는 철없는 어린 마음.♪
*
휴고가 약속장소인 공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사람들이 이곳저곳에 자리를 펴고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있을 레오노르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며 공원을 가로지르던 휴고는 곧 공원의 중
앙에 있는 호수 근처 오렌지 나무 아래 돗자리를 깔고 그를
기다리는 레오노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오래간만이로군 휴고."
"네. 오랜만입니다 레오노르."
다소 사무적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두 사람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레오노르는 휴고를 사랑했고 휴고는
레오노르를 사랑했으므로. 레오노르는 돗자리와 호신용 검
외에는 따로 가져온것이 없었으므로 이 장소에서 꽤 기다리
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레오노르에게 물었다.
"우선 상그리아로 목을 축이시겠습니까?"
"그대의 배려에 감사하지. 부탁하겠어."
"네. 기사님."
더운 날씨에 빨리 미지근해지는것을 방지하기 위해 두꺼운
수건으로 감싼 상그리아가 담긴 유리병을 꺼내어 가져온 유
리잔에 상그리아를 채운다. 새콤한 과일의 향이 배인 적포도
주가 여름날의 강렬한 햇볓을 받아 반짝였다.
상그리아를 받아든 레오노르는 그것을 천천히 음미하며 마시
고는 담백한 미소로 휴고의 성의에 보답하였다. 레오노르가 잔
을 내려놓는것을 보고 휴고가 물어보았다.
"이제 7월이로군요. 일은 어떤가요?"
"날씨가 날씨인지라 신입들의 훈련에 대해서는 평소보다 풀어
주고 있어. 외부 활동은 조금 자제하는 편이고. 쌓인 문제들은
여러가지지만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당장에 해결할수있는 일
들이 아니니까 그것도 어느정도는 두고 보고 있는 편이지."
"그렇군요. 저희도 요새 꽤 한산합니다. 다들 외출을 다소 꺼
리고 있으니까요. 왕국의 명을 받은 사서로서는 다소 무책임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러한 날씨 덕분에 레오노르와 함께 피
크닉을 올 수 있어서 기뻐요."
"신이 마련해준 휴일이라고 생각할 작정이야."
"신께 감사드려야겠군요."
당신에게 식사를 권할 용기를 주었던 부분도 함께요. 휴고는
뒤의 말을 삼켰다. 진심을 말하면 왠지 지금의 행복이 달아날
것같았기 때문이다. 갈증을 느낀휴고는 유리잔 하나를 더 꺼
내어 상그리아를 반쯤 채우고 목을 축인다음 가져온도시락을
풀었다.
갓 구워진 작은 토르티야에 속을 채운 타코들이 한입크기로
올망졸망하게 담겨있어 만든이의 정성이 느껴지는 도시락이
었다.
그리고 잇따라 오는 길에 빵집에서 산 바게트 빵과 살구 잼,
곁들일 샐러드, 마늘 소스로 간을 한 새우구이가 속속들이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을 채웠다. 그것을 보고 레오노르는 놀라서
말했다.
"준비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걸렸을텐데.."
"저에게 이 정도는 눈 깜빡할 새에요. 시장하시죠?"
"그럼 고맙게 먹도록 하지."
맑디 맑은 호수 위로 푸른 하늘이 비추고 무리를 지은 조각구
름이 백로 무리 위를 지난다. 레오노르는 그것을 한동안 보고
있다가 옆에 있는 휴고에게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본인도 모르게 새어나온 말이었을것이다.
"저 백로는 참 하얗군.."
"네. 우아하기도 하고요."
"...휴고. 백로에게 있어서 깃털은 무엇일까?"
"비와 바람으로부터 몸을 지켜주는.. 옷 이상의 무언가가 아
닐까요?"
"갑옷이라고 하기엔 너무 아름답군."
"그런가요? 레오노르의 갑옷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가?"
"예. 흙투성이가 되어도 긁히고 찌그러져도 아름답다고 생각
해요."
"너무한 말이로군."
"어째서요?"
"그렇게 듣자면 내 갑옷은 꽤 자주 흙투성이가 되고 긁히고 찌
그러져 있는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쿠쿡.. 제법 위트 있는 농담이로군요, 레오노르."
"음? 그게 농담같은 거였나?"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요. 무엇보다 레오노르가 갑옷이 망가
지는 것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고 있으니까요."
"그렇군. 나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을 듣고
보니 내 생각과 그 말이 서로 다른것같아."
"레오노르는 의외로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모르는것 같아요."
"그런가? 이래뵈도 꽤 신경쓰고 나온건데.. 치마를 입는 편이 더
좋은가?"
레오노르는 셔츠의 크라바트와 그 가운데 달린 타원형의 짙푸른
오팔 브로치를 매만지며 물었다. 휴고는 물론 새하얀 셔츠도, 어
디까지나 단정함에서 벗어나지 않는 크라바트도, 그녀의 눈처럼
반짝이는 오팔 브로치도 위에 입은 얇은 가죽 조끼도, 군살없이
단련된 라인이 드러나는 군청색 바지에 대해서도 불만이 없었다.
다만 다소 놀란듯 어쩌면 실망한듯 그러면서도 화가 난듯한 그
고양이 같은 얼굴이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웠을 뿐이다.
"아니에요. 레오노르는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 얘기가 아니에요."
"치마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들릴수도 있겠군. 오해가 생길 말투는
삼가는것이 좋을것같아. 휴고."
그럴 마음은 없었지만 잠자는 사자의 콧털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다소 짖궂었던것도 휴고 본인이 잘 알고 있었으니 물러서기로 했다.
"네. 알았어요. 그보다 전의 그것 말인데요. 실마리가 될만한것을
적어왔어요."
휴고가 건넨것은 서류가 빼곡히 들어찬 우편봉투였다. 레오노르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고 조심스레 서류를 꺼내보았다. 모두 필사본
으로서, 꽤 많은 시간이 걸렸음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 의문에 휴고
가 답했다.
"관련 서적은 전부 다 외부 반출 금지였거든요. 어쩔 수 없이 베껴
왔죠."
"수고를 시켰군."
"뭘요. 레오노르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어렵지 않아요."
레오노르는 최대한의 감사의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묵묵히 서류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의 검의 형제 기사단.. 정체불명
의 조직... 능력자를 대상으로 한 인체실험... 알비노 현상... 액자.
.. 저울... 안개... 숲... 의식... 그리고 [문].
서류를 읽는 레오노르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휴고는 보
았다. 슬픔? 두려움?아니 그것보다는 조금 더 명확한 것. 그것은
고요히 떨리는 분노였다. 휴고는 그 정당한 인간적인 분노에 공감
했다. 하지만 순수히 그 감정에 몸을 맡길수는 없었다. 레오노르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뒤틀린 정의로 모든것을 더럽히고 짓밟고 굴복시키는 그
독선, 그 이단에 대해 누구보다 먼저 창과 방패를 들것이 분명했다.
레오노르와 휴고 두 사람이 믿는 신의 가호에도 안전을 장담받지
못하는 이교도와의 싸움에 누구보다 먼저, 누구보다 용맹하게.
차라리 휴고 자신이 전사였다면 옆에서 그녀를 지켜줄수도 있었
을텐데. 휴고는 안타까움에 레오노르 몰래 이를 악물었다. 지금
이 순간에라도 그녀를 잃을것같은 막연한 불안감이 커지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는것이 그의 최선이었다.
레오노르는 꽤 오랫동안 묵묵히 서류를 넘겼다. 그러다가도 다시
앞으로 가고, 아주 뒤로 가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가 서류를 다시
우편봉투에 집어넣었을 때는 이미 백로 떼는 사라지고 토르티야는
딱딱해지고 상그리아는 미지근해져 있었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
미소의 휴고-. 휴고 엔리케즈가 있었다. 레오노르는 그 모습에 잠깐
숨을 삼켰다. 그리고 웃음을. 최선의 웃음을 지었다.
"휴고. 휴고 엔리케즈."
"네. 레오노르. 말씀하세요."
"다음 데이트 때는 우리 역할을 바꿔보도록 하지."
"그럼 '숙제'도 내드려야 하나요?"
레오노르는 잠깐 손에 쥔 우편봉투에 시선을 던진 후에 상냥한 웃
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