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팬픽] Twilight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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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5 11:25:19
- 이 글은 픽션(fiction)입니다. 특정 단체ㆍ사건ㆍ사상ㆍ종교와 무관함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 Twilight - Prologue -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4851750)
Twilight 01.(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4904555)
Twilight 02.(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4963543)
Twilight 03.(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5060412)
Twilight 04.(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5910203)
Twilight 05.(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5999681)
Twilight 06.(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6069787)
Twilight 07.(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6132658)
Twilight 08.(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6202740)
해질녘 모든 사물이 붉게 물들고 저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
낮도 밤도 아닌 모호한 시간의 경계.
날이 어둑어둑해지면서 사물의 윤곽이 희미해지는 때.
밀러는 서류를 보고 있다가 정중한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며 웃음을 흘렸다. 직위상 자기가 누군가를 방문하는 일보다 찾아오는 일이 많다. 누군가에게 볼 일이 있어도 어지간한 인간이 아닌 이상 직접 움직이지 않고 불러들일 수 있다. 딱히 밀러가 게을러서가 아니었다. 사소한 권위의 표시였다. 산은 움직이지 않는다. 성실한 일개미 같은 인간들이 그 위를 오를 뿐이다. 나서지 않고도 남들이 자기를 위해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지도자의 능력이다. 밀러는 인간들의 이익을 탐하는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인물이었다. 그것은 욕망, 개개의 바라는 바를 읽어내고 그에 합당한 일을 주어 사람을 부린다. 그는 자기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곧 회사에 대한 기여로 이어지는 윈-윈(win-win)을 추구했다. 그런 통찰력이 있기 때문인지 이젠 노크 소리로도 대충 들어올 사람이 누군가를 판가름할 수 있다.
출입 허가를 내리자 예상을 저버리지 않고 다이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출입구를 닫고는 절도 있게 허리를 숙여 보이더니 척척 다가와 서류를 철한 파일을 밀러 앞에 내려두었다. 트리비아 카리나의 호위 임무 보고서였다. 이제는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쌓여가고 있었다. 그의 완벽주의가 돋보이는 보고서는 보고 들은 것을 간결하고 정확한 문체로, 그야말로 객관성을 철저히 갖추고 있다. 다이무스 홀든은 틀림없는 회사 세력에 속한 에이스 능력자지만 과연 진짜 그런가 싶을 정도로 그는 공명정대하다. 그 때문에 이 호위 임무를 맡긴 것이지만, 굳이 지하연합을 옹호하지도 회사측에 유리하게 해석하려 들지 않는다. 이런 인물을 청렴결백하다고 하는 것이겠지. 그에게 한 국가를 주고 정치를 맡기면 그 나라가 어찌 될지 새삼 궁금했다.
“늘 수고가 많네. 가업이나 다른 임무로도 피곤할 텐데.”
“아닙니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아니, 잠깐. 바쁘지 않으면 나랑 차 한 잔 하고 가지.”
다이무스는 전에 없던 밀러의 제안에 선뜻 수긍이 안 가는 듯 보였다. 때마침 타라가 노크를 하고 들어오더니 테이블 위로 간단한 다과를 곁들어 홍차를 내왔다. 다이무스가 평소에 보고서를 내러왔을 때 이런 식의 대접은 없었다. 보고서만 제출하고 가면 그만이었다. 오늘은 밀러가 다이무스와 무언가 이야기하려고 작정한 것이리라. 영리한 그는 타라가 차를 준비하는 것만 보고 상황 파악을 끝냈다. 밀러가 먼저 소파에 자리를 잡자, ‘실례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반대편에 앉았다. 차를 드는 것도 밀러가 먼저 한 모금 마시고 나서였다. 연장자를 존대하는 예의범절이 몸에 밴 행동거지에 밀러는 차를 마시려는 김에 재미있다는 듯 자연히 올라간 입꼬리를 잔 뒤에 자연스레 숨겼다. 믿음직스러워도 이렇게나 믿음직스러울 수 있을까. 지나치게 과묵하다는 것만 제외하면 홀든 후작이 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이런 아들을 두면 더 바랄 것이 어디 있으랴.
대접해준 상대에게 실례되지 않을 만큼 여러 번 차분히 홍차를 음미한 다이무스는 찻잔을 컵받침 위에 내려두고 조용히 밀러를 쳐다보았다. 밀러가 할 말이 무엇인지 궁금할 터다. 빨리 말하라고 재촉하지도, 용건이 뭐냐고 물어보지 않는다. 다만 그 무겁도록 깊은 검은 눈동자로 상대를 진득이 주시한다. 밀러는 그의 진지한 태도에 오히려 그를 붙잡은 자기의 이유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용건이라고는 해도 거창한 것은 아니라네. 다만 보고서 위로는 알 수 없는……아아, 오해하지는 말게. 자네 보고서는 완벽해. 우리 헬리오스사가 요구하는 정보는 다 들어있어. 다만……그래, 이건 개인적인 호기심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지. 자네가 호위를 하면서 느낀 점이나 심경이라든가 그런 게 궁금할 뿐이라네. 공적인 입장 다 걷어내고 다이무스 자네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것 말일세. 무례하다고 생각한다면 내 사과하지.”
“아닙니다. 다만 무엇을 말하면 좋을지 떠오르지 않을 뿐입니다.”
“하긴 그도 그렇군. 그럼 질문할 테니 답해주겠는가?”
“알겠습니다.”
밀러의 편한 태도와 달리 다이무스는 분명 공적인 자리가 아닌데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회사 총수의 앞이라서 그런 것인지, 그의 천성이라 그런 건지, 둘 다인 건지. 밀러는 자기 맘대로 2번을 정답으로 삼고는 빙긋이 웃으며 그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트리비아와 안타리우스 노인의 접점이 무엇일 것 같은가?”
“……접점이 있다는 것을 상정하는 대답을 요구하십니까?”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자네 마음일세. 내 질문은 아무래도 좋으니 느낀 대로 대답해주게.”
밀러는 속으로 다소 놀라움을 숨기며 알 수 없는 미소만 지어 보였다. 다이무스가 질문 자체에 의문을 가지고 되물어온 적이 있었던가. 자기 견해는 어떻든 상대의 질문 의도에 맞는 답을 계산해서 으레 내놓지 아니었던가. 오호라, 이것 봐라. 밀러는 오늘 다이무스를 불러 세우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다이무스가 트리비아를 의심하고 있지 않다는 편린이 보여 흥미로웠다. 다이무스는 잠시 시선을 내리깔고 답을 고심하는 듯하더니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우선 접점이 있는지 없는지에 관해서는 판단이 불가능합니다. 제가 이 호위 임무 중에 본 것만으로는 확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트리……EMPRESS와 노인이 관계가 있다고 한다면……그녀는 노인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째서?”
“……여기서부터는 순전히 제 짐작입니다만, 아마도 트와일라잇에서 노인과 단둘이 만난 적이 있다는 그 사실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겠는가.”
밀러의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얼굴을 보며, 다이무스도 능숙하게 설명하기 힘든지 어려운 얼굴을 했다. 그러나 그는 생각을 연거푸 곱씹으며 침묵하다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먼젓번 회담에서 TACTICIAN이 말한 화가의 존재를 차치해두면 그녀는 트와일라잇 최초의 발견자입니다. 아마도 자기만 알고 있다고 생각한 공간에 다른 누군가가 갑자기 나타났다면, 그것은 외딴곳에 정체 모를 이와 남겨지는 공포……가 아닐까 사려됩니다.”
“……흐음―. 그녀는 타인이 있든 없든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아 보이지만……. 무언가 노인에게 위협이라고 당한 겐가?”
“……노인이 그녀를 위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꽤나 단정하는구먼.”
“노인이 아직 안타리우스가 사이비 종교 단체에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그녀를 버릇처럼 거론했다는 사실이나, 그 마리오네뜨를 건네받았을 때의 발언을 미루어 보건대……노인이 EMPRESS에게 갖고 있는 감정은 아마도 호의입니다.”
“……허어―. 그 노인이 트리비아를 사랑하기도 한단 말인가?”
“…….”
“그 노인이 「액자」 위로 떠오른 트리비아의 모습을 마치 신이 내린 계시처럼 신도들에게 설파했다고 하니……. 외형만을 볼 땐 어느 쪽인가 하면 그녀는 악마 쪽에 가깝겠지만, 성모 마리아에게 숭고한 사랑을 구하는 어린 양의 심정이라고 표현해야 하는 건지……. 허허, 거참. 만약 그렇다면 자네가 트리비아에게 호위로 붙어있는 게 그 작자 아주 고깝겠구먼. 그래서 그런 기분 나쁜 인형을 일부러 애꿎은 애한테 들려 보내 친히 경고라도 하려 했던 건가.”
밀러는 어이없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예상치도 못한 사건의 전말이 꽤 흥미로운지 눈을 반짝였다.
“그럼에도 강행수단까지 취해가면서 납치하려 들었던 것은 역시 트와일라잇을 다시 손에 넣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될 테고. 허 참, 사업상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로군. 목적은 그것이라 해도 동기는 지극히 감정적이지 않은가. 과연 모태가 종교 단체라고 해야 할까…….”
밀러로서는 쉬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구조로 움직이는 단체가 끈질기게도 죽지 않고 끊임없이 되살아난다는 게 신기했다. 이익에 따라 인간은 움직인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그로서는 사업에 감정을 개입시키는 일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감정은 판단을 흐린다. 그럼에도 그런 맹목이 때로는 위협적일 수도 있다는 건지. 회사와 연합을 웃도는 그들의 뛰어난 기술력은 분명 옥사나와 그녀가 거느리는 연구진이 만들어낸 성과가 분명할 텐데도. 그 우수한 과학자들마저 양지에 있지 않고 굳이 안타리우스에 머물러 있는 이유 역시 합리적인 것은 아닐 터. 인간의 존재의의를 이성적 사고에서 찾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는 취소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 생각은 비단 안타리우스에 관한 것만은 아니고, 아주 조금은 지금 자기 눈앞에 있는 다이무스를 겨냥한 것이기도 했다.
* * *
메트로폴리스 위로 창백하도록 시린 보름달이 떠올랐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이 기계도시 위로 비치는 달빛은 어딘가 더욱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은은한 빛이 빌딩숲 사이사이로 내리쬐어 차갑기 그지없었지만, 안타리우스의 신도들은 그것을 황홀한 듯 바라보았다. 검은 로브에 달린 큰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던 그들은 모두 경건히 그것을 벗어 내렸다. 고개를 있는 힘껏 젖혀 달이 휘영청 떠있는 밤하늘을 질리지도 않고 보았다. 수백 쌍의 눈동자에 하나도 빠짐없이 월인(月印)이 찍혔다. 애타게 손을 뻗어도 결코 손이 닿지 않는 달을 눈에 새겨 넣고 싶은지 오래도록 우러렀다. 그들에게 있어 절대적 상징은 일식, 그림자 그리고 황혼이었지만, 왕의 두 번째 귀환을 가능하게 한 저 만월 역시 이제는 그들에게 하나의 고귀한 표식이 되었다.
무리가 웅성이기 시작했다. 수군거림은 아니고 감탄을 금치 못해 탄성을 내지르거나 감격해서 흐느끼는 이들이 속출한 탓이다. 하늘을 우러르던 그들의 시선이 떨어져 광장 일각에 설치된 무대 위로 나타난 인물에게 고정되었다. ‘노인’이었다. 먼젓번 신도들의 기억에 있는 연로한 모습이 아닌 젊은이였지만 다른 누구와 착각할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많은 기적을 베풀었던 「액자」가 그의 품에서 빛나고 있지 않은가. 이 밤에는 없어야 할 찬란한 황금빛이 「액자」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노인은 제각기 황홀경에 취해 소란스러운 좌중을 진정시키려는 듯 한 손을 들어보였다. 웅성임은 일제히 멎었다. 수백에 다다르는 무리들이 빼곡히 광장을 채우고 있지만 발소리 하나, 옷자락 스치는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그들은 노인이 죽으라 하면 기꺼이 죽기라도 할 것이다.
“나는 돌아왔다.”
격앙되지 않고 더없이 덤덤한 목소리였지만 신도들은 전율에 몸을 떨었다. 그들은 이 순간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왔기에.
“다시 한 번 우민한 이들에게 기적을 보이리라. 내가 너희를 구하리라―.”
아까보다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노인은 말했다. 환희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던 좌중은 참지 못하고 포효에 가까운 환호성을 내질러다.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조아리기 바빴다. 그 모습을 만족스러운 듯이 보던 노인은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신에게 선택받았다. 무지한 이들을 이 손으로 구원코자 위대한 이 능력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게 주어졌던 것이다.”
신도들은 흐느꼈다.
“능력은 그것을 가지 못한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들은 어찌하고 있는가? 파벌을 나누어서 여전히 싸우고 있지 않은가? 이 무의미한 싸움을 내가 이제는 끝내리라. 저 치들의 눈에 내가 광명을 낳을 것이며, 서로 헐뜯기만 하는 입술에는 평화의 노래가 흘러넘치게 하리라―!”
고조되어가는 노인의 어조에 발맞추어 신도들은 무어라 목소리 높여 외쳐댔다. 헬리오스를 향한 무시무시한 적의, 지하연합을 향한 비웃음, 안타리우스를 모르고 사는 가엾은 시민들에 대한 연민 등 갖가지 사념의 소용돌이가 광장으로 휘몰아쳤다.
“나의 신부를 맞이하러 갈 것이다.”
한껏 흥분에 찬 노인의 어조는 좌중을 다시 잠재우듯 작아졌다. 노인의 얼굴이 환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의 왕이 기뻐하자 신도들도 덩달아 즐거워했다.
“트리비아와 성혼(聖婚)을 치르고 우리의 성지 트와일라잇을 저 악의 무리로부터 되찾을 것이다!”
노인이 주먹 쥔 손을 하늘로 번쩍 치켜들었다. 무릎을 꿇고 있던 신도들도 거기에 이끌리듯 모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두 손을 하늘로 향했다. 아득히 위로 뜬 달을 품에 끌어안으려 안달하듯 그들의 몸짓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노인은 집단 광기에 찌든 이들을 가늘게 뜬 눈으로 보았다. 무대 장치 뒤에서 자기의 인형실에 매달려 뜻대로 움직이는 마리오네뜨를 보듯 업신여겼다. 이내 그는 신도들을 향해 들고 있던 액자를 뒤집어 열띤 눈으로 그림을 바라보며 어루만졌다. 지금은 보이지 않는, 트와일라잇의 하늘을 나는 아름다운 여인의 흔적 더듬듯 상냥하면서도 농염한 손길이었다.
「액자」는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
* * *
“에……그러니까 이건 닥터한테 가져다주고……. 방금 하신 말씀은 네덜란드로 가서 그대로 전하면 된다 이거죠?”
“그렇습니다.”
카를로스가 종이봉투 안에 들어있는 서류를 팔랑팔랑 넘겨보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태의 중대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뭐가 그리도 기쁜지 카를로스는 방실방실 웃었다. 윌라드는 그 모습을 보며 노파심에 입을 열었다.
“조심한다고 생각하지만 만약을 위해서 다시 한 번 일러두겠습니다. 절대로 정체를 들켜서는 안 됩니다.”
“에이― 아저씬 걱정이 많아서 탈이에요. 제가 언제 한 번이라도 실수한 적 있었어요?”
“믿음직스럽기는 합니다만…….”
“걱정 마요. 저 때문에 아저씨를 곤란하게 만들지는 않을 거예요.”
카를로스는 맡겨두라는 듯 가슴을 활짝 피며 주먹으로 두드려 보였다. 윌라드는 쓴웃음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아닙니다.”
“네?”
“내 일보다는 나는 너의 신변을 걱정하는 겁니다. 그들의 눈을 피해 그녀에게 접촉해야 합니다. 단지 말을 전하는 것뿐이라 해도 상대가 상대입니다. 방심은 금물이에요.”
“……네에―.”
카를로스는 윌라드가 걱정해주는 게 좋으면서도 쑥스러운지 헤헷-하고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칼. 학교는 제대로 다니고 있습니까?”
“……일단은요.”
카를로스는 여전히 웃고는 있지만 아까와 달리 눈빛이 각박해졌다. 윌라드의 조용한 눈길에 이 상황을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일이 불가능함을 깨닫고는 카를로스는 주저하듯 입을 열었다.
“아저씨, 저 그냥 학교 안 가면 안 돼요? 학교 안 다니면 아저씨한테 더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은데…….”
“안 됩니다.”
“아저씨…….”
“너는 영리합니다. 그것을 계발하지 않는 것은 손해지요. 하물며 모국에는 학교를 다니고 싶어도 다니지 못하는 친구들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
“무엇보다 이건 프레드의 유지입니다. 나를 생각해주는 마음은 기쁩니다만 너는 아직 어립니다. 후견인으로서 네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어느 정도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너를 지키는 게 내 의무입니다. 은혜를 갚고 싶다면 그 때 가서 갚아도 늦지 않습니다. 사실 이번 일도 마음이 편치는 않습니다만…….”
“아니에요! 제가……생각이 짧았어요. 아저씨한테는 늘 받기만 하는데 배부른 소리를……. 그리고 진짜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전 저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굉장히 기쁜 걸요?! 이렇게 춤이라도 추고 싶어진다니깐요?!”
카를로스는 활짝 웃으며 잠시간 재롱 피우듯 현란한 스텝을 밟았다. 윌라드는 결코 어느 때곤 마냥 풀죽지 않는 카를로스를 자상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럼 다행이고요. 이만 나가봐도 좋습니다. 가정통신문은 꼬박꼬박 제게 갖고 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네―.”
카를로스는 활기차게 대답하고는 출입구로 애용하는 윌라드의 집무실 발코니 창으로 다가갔다. 창을 열어젖히자 돌풍이 홱 카를로스의 몸을 휘감았다. 곧장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려던 카를로스는 잠시 주춤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윌라드는 그런 카를로스를 이상한 듯 보더니 의자에서 일어나 소년의 옆에 나란히 섰다.
“왜 그러십니까?”
“바람이……안 좋아요.”
“네?”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속삭이고 있어요.”
카를로스는 드물게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바람을 느꼈다. 윌라드도 덩달아 하늘을 우러렀다. 곧 쿵 하고 지상으로 운석이 되어 떨어지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검고 육중한 구름이 잔뜩 하늘을 뒤덮고 있다. 시각적인 무게와 관계없이 불안정한 기류를 타고 매우 빠르게 정신없이 흘러간다. 뺨으로 와 닿는 공기는 질척하고 끈적하게 달라붙는다. 한바탕 비가 쏟아질 것 같다. 윌라드의 가슴이 공연히 빨리 뛰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천둥벼락의 기운이 느껴져 감응한다.
“어쩐지 불길한 일이 생길 것 같은 날씨로군요.”
“조심하세요, 아저씨. 오늘은 밤에 나가지 않는 게 좋겠어요.”
“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랑 플람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헤헷- 고마워요! 이만 가볼게요!”
카를로스는 씨익 웃더니 바닥을 차고 곧장 흐린 하늘의 점이 되어 사라졌다. 윌라드는 호인의 미소를 지으며 손 흔들며 배웅해주다가 거짓말인 양 웃음기를 싹 지웠다. 발코니 창문을 닫고 들어온 그는 바람에 조금 덜컹이기 시작하는 창을 무심한 눈길로 응시했다. 순간 번쩍 하고 소리없이 번개가 울었다. 윌라드는 재미있다는 듯 입술 끝을 올리고 더욱 혼란스러워지는 하늘을 즐거운 듯 응시했다.
* * *
촬영은 끝났다. 스태프들은 자축의 환호성과 박수를 울렸다. 촬영 마지막 날임을 알고 다시 직접 현장에 발걸음한 레이라는 회식을 제안했지만 트리비아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간밤의 꿈자리가 안 좋았다. 설상가상으로 날씨까지 음울하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트리비아의 가슴에 알 수 없는 소란스러움이 그치지 않았다. 촬영 중에는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연기했던 터라 잊을 수 있었지만, 그만큼 촬영이 끝나자마자 애써 외면했던 불안은 거대한 파도가 되어 밀려왔다. 주역이 빠지는 게 어디 있냐고 구슬려보려던 레이라도 트리비아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눈치 챘는지 고맙게도 함께 가자고 부추기려던 스태프들까지 저지해주었다.
꽤 힘들고 지치는 스케줄을 완수해냈다는 순수한 달성감도 있지만, 이제는 저 불쾌한 포토그래퍼의 시선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도 기쁨의 하나였다. 가장 먼저 회식 자리를 조를 것 같던 필립이 침묵만 고수하는 게 이상하기도 했지만 트리비아는 스태프들에게 간단히 인사만 건네고 도망치듯 촬영장을 벗어났다. 오늘은 르 블랑이 준비해주는 차도 거절하지 않았다. TP를 이용해야 한다는 불쾌함도 없다. 그저 집에 가서 조용히 고독에 잠겨들고 싶었다. 정체 모를 무언가가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은 딱히 해소할 길이 없기에 다만 견뎌내야만 했다.
이미 해가 지고 어둠이 짙게 깔린 지 오래였다. 황혼은 없었다. 아침부터 구름이 두껍게 깔린 하늘을 황혼과는 다른 의미로 낮과 밤의 경계를 없애놓았다. 이 어둠은 아늑하지 않다. 밤의 여왕인 그녀에게마저도 오늘의 어둠은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본디부터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는 듯, 안 맞는 옷을 입은 듯 불편했다. 여느 때처럼 TP의 메스꺼움을 참으며 포트레너드 초입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선 트리비아는 곧장 어둠을 열치려는 손을 공중에서 멈추었다. 아무렇게나 펼쳐진 그녀의 다섯 손가락이 의미없이 허공을 긁다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오늘은 언제나 반겨주는 듯한 그림자의 품마저도 그립지 않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그 안에 마치 삼켜지기라도 할 것 같은 망상이 들었다. 그래도 다른 길은 없다. 그 그림자마저 없다면 트리비아가 갈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단념하고 다시금 그림자를 불러내려던 트리비아의 어깨를 잡는 정중한 손길이 있었다.
“잠깐 여기서 기다려주겠나.”
트리비아는 다이무스의 의도를 몰랐지만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골목을 벗어났다.
호위가 곁을 떠나도 되는 건가 하는 의문은 품지 않았다. 그럴 만한 일이 있겠지라며 당연히 생각했다. 그런 자기 모습을 발견하며 트리비아는 자조했다. 이런 게 신뢰일까. 믿음은 경계심을 얇게 하고 의심을 버리게 만든다. 애초에 트리비아가 다이무스를 의심할 이유도 없지만 믿을 이유도 없었다. 역시 저 남자가 노인을 죽였다는 사실이 자신에게 알게 모르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일까.
다이무스는 몇 분 지나지 않아 트리비아의 곁으로 돌아왔다.
“차를 불렀다. 20분 정도 기다려야 한다.”
트리비아는 예상치도 못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면 다이무스는 평소와 다름없이 무뚝뚝한 얼굴로 마주볼 뿐이었다. 그녀는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아까와 마찬가지로 고개만 끄덕였다. 다이무스도 수긍한 듯 마주 고개를 까딱였다. 잔뜩 낀 안개로 축축이 젖은 벽에 기대지도 않고 꿋꿋이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선 다이무스를 트리비아는 주시했다.
이유도 묻지 않고 다만 트리비아가 그림자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처사. 의중을 넘겨 짚이는 게 결코 기분 좋지만은 않았지만 사실 지금으로서는 고마웠다. 솔직히 배려를 받아들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트리비아는 와글와글한 가슴을 다잡으려는 듯, 한 손으로 주먹을 쥐고 왼쪽 가슴 위를 꾹 눌렀다. 초조함은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다. 잠시 눈을 내리깔고 깊게 한숨 쉰 그녀는 골목 입구를 향해 걸었다. 다이무스는 눈을 뜨고 그녀의 뒷모습을 말없이 보았다. 트리비아는 입구로 완전히 나서기 전에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조금 걷고 싶어.”
예전 같았으면 툭 그렇게 말만 내뱉고 멋대로 나갔을 그녀였으나, 직접적으로 허락을 청하지는 않아도 다이무스를 쳐다보기는 했다. 다이무스는 아무 말 않고 트리비아에게로 다가갔다. 트리비아도 그 모습을 보고 역시 말없이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언젠가의 밤산책 풍경을 그대로 빼닮았다. 가로등 불빛마저 자욱한 안개에 제멋대로 흩어지고 어둠이 진한 검은색 유화 물감으로 몇 겹이고 덧칠된 것 같은 밤. 불길해서 인적마저 어둠에 먹혀들어가고 침묵마저 침묵하는 밤. 그러나 뒤늦게 찾아온 불청객만 아니었다면 당시 트리비아의 기분은 더없이 좋았다. 지금은 정반대였다. 어둠마저, 트리비아의 절대적 아군인 그림자마저도 자기를 거부하는 듯한 불안만이 야금야금 내면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 마음을 흩어버리려 그녀의 발걸음은 필요 이상으로 박차를 가해갔다.
트리비아의 흔들리는 내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빠른 걸음이 얼마 안 가 주춤했다. 툭, 그녀의 눈꺼풀 위로 섬뜩한 물방울이 맞았다. 기다란 속눈썹 위로 위태롭게 물방울이 맺혔다. 트리비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처럼 그 물방울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처음엔 눈꺼풀만 적셨던 물방울이 이윽고 정수리로, 이마로, 입술로, 어깨로, 쇄골 위로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다. 안개비인가도 싶었는데 가늘던 비는 조금씩 굵어졌다. 장대비까지는 아니라도 우산을 쓰지 않으면 언젠가는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될 게 분명했다.
트리비아는 차갑디 차가운 습기에 젖어들기 시작한 머리칼을 조용히 쓸어 올렸다. ‘최악이야…….’라고 중얼거리면서도 비를 피할 생각도 않고 그 자리 그대로 섰다. 비가 싫지는 않다. 그래도 청승맞게 맞는 걸 좋아하지는 않는다. 우산을 쓰고 비오는 거리를 걷는 취미도 없다. 다만 집 안에서 따뜻한 차라도 마시며 비오는 풍경을 감상하는 게 제일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녹빛 머리칼을 가진 친구와 함께 집에서 시간을 보냈을 때처럼.
가만히 눈을 감고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비가 사정없이 얼굴 위로 번져갔다. 한기가 조금씩 몸으로 스며들었다. 춥다. 소름이 돋는다. 감각만은 선명해서 어서 따뜻한 곳으로 가자고 외치고 있었으나, 이 쌀쌀함이 조금은 소란스러운 마음을 강제로 입다물게 하는 것도 같았다.
뒤에서 찰박찰박 비에 젖은 바닥을 걷는 남자 구두소리가 들렸다 싶자, 언젠가처럼 뒤에서 손목을 잡는다. 하지만 그 때처럼 아프지 않은, 부드럽다면 부드럽다고도 말할 수 있을 법한 망설임까지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왜일까. 오늘은 이상하게도 예전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게 하는 계기들도 가득 차 있다.
트리비아는 느적느적 눈을 뜨고 고개를 틀어 다이무스를 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닿자 다이무스는 곧장 트리비아를 붙잡은 채 그나마 비를 피할 만한 건물 그늘 아래로 데리고 갔다. 트리비아는 다시 빗속으로 나가기도 뭣해 어딘가 아쉬운 눈빛으로 비오는 풍경을 멍하니 응시하며 한 손을 밖으로 뻗었다. 손바닥 위로 빗물이 조금씩 모여 자그마한 웅덩이 된다. 그 위로 물방울이 경쾌하게 튀었다.
갑자기 트리비아의 한기가 따뜻하게 감싸였다. 무언가가 뒤에서 포근하게 어깨 위로 걸쳐졌다. 무의식적으로 어깨에서 흘러내릴 것만 같은 것을 붙잡으며 트리비아는 나란히 서서 빗속을 응시하는 남자를 보았다. 다이무스의 겉옷이었다. 보통 남성의 코트 같은 것보다 훨씬 묵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것이 저 남자의 평상시 임무복, 견갑주를 비롯한 보호구들이 달려있으니 당연했다. 겉은 빗물에 조금 스며들었을지 모르나 그 안에 아직 남은 체온은 식어버린 트리비아의 몸에 델 듯이 따뜻했다. 재미있게도 다이무스의 세팅된 머리칼이 빗물에 젖어 어그러져 조금 흘러내린 것을 보며, 트리비아는 옷을 좀 더 끌어 당겨 여미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도리어 감기에 걸릴 것 같은데.”
“……이 정도로 감기에 걸릴 만큼 허술하게 단련하고 있지 않다.”
“그 말 그대로 돌려주고 싶지만?”
“……여성은…….”
“…….”
“……몸을 차게 해서는 안 된다.”
“……페미니스트네.”
반쯤 진심 반쯤 농담 섞인 말에도 하나하나 성실하게 대답해주는 다이무스를 보며 트리비아는 희미하게 웃었다. 조금은 마음이 가라앉는다. 편안하다. 뜻밖의 비에 기분은 더욱 곤두박질칠 뻔했는데. 저 무뚝뚝한 남자에게도 본의 아니게 사람을 유쾌하게 만드는 힘이 숨겨져 있기라도 한 건지.
방금 전까지 바닥을 끊임없이 적시던 비가 그쳤다. 지상으로 빗방울이 부딪히는 독특한 소리가 주춤하더니 이내 멎었다. 시험 삼아 밖으로 손을 뻗어도 빗방울은 더 이상 닿지 않는다. 트리비아는 그게 소나기였나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며 건물 처마 아래를 벗어나 가려고 발을 내딛었다.
“……!!!”
트리비아와 다이무스 둘 다 동시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이무스는 재빨리 검을 뽑아들고는 트리비아를 자기 뒤로 숨기며 날카로운 눈길로 주변을 경계했다. 어둑한 골목길 사이사이에서, 낮은 건물들 지붕 위에서 수상쩍은 기색은 잔뜩 휘감은 이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욱한 안개와 어둠에 가려 정확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킬킬거리는 불온한 웃음소리만큼은 뚜렷했다. 그 가운데는 극단적으로 상반된 기색만이 떠돌았다. 긍정의 극에는 광기 도사리는 숭배가 있었고, 부정의 극에는 두려움 뒤섞인 살의가 있었다. 기묘한 감각이 뒤섞여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안개 속에서 뚜벅뚜벅 한 사람이 두 사람에게로 가까워졌다. 그의 정체를 확인한 두 사람은 놀라는 한편으로 그럴 줄 알았다는 심정을 공감했다. 불과 한 시간쯤 전만 해도 함께 있었던 르 블랑의 포토그래퍼 필립 몽펠리에였다.
“이런 데서 마주치다니……이거 대단한 우연이네요!”
일촉즉발의 상황인데도 필립의 말투는 지나치게 상쾌했다. 정말로 우연히 마주친 기쁨이라도 표현하듯 필립은 과장되게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물론 그는 다이무스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오로지 트리비아만을 강렬히 쳐다보고 있었다. 다이무스가 트리비아를 더욱 감싸듯이 막아서자, 그녀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게 불쾌한지 그제야 남자는 다이무스를 하찮다는 눈길로 보았다.
“……정체를, 드러내라!”
다이무스의 말에 남자는 의미심장하게 미소 짓더니 손가락을 딱 튀겼다. 건물 옥상에서 연거푸 육중한 무언가가 몸을 던졌다. 남자의 뒤로 가지런히 정렬하는 것은 틀림없는 안타리우스의 강화인간이었다. 트리비아는 그 머릿수에 압도당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처음 습격당했을 때는 기껏해야 서른이 조금 넘을까 말까한 인원이었지만 지금은 어떤가. 족히 백을 넘어서는 강화인간들이 하나같이 무감정한 얼굴로 이쪽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을, 정확히는 한 사람을 납치해가기 위해서는 지나친 병력이지만 그만큼 확고한 의지가 눈에 보였다. 전과 같은 실수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게다가 지금은 성가신 전력이 하나 더 있으니 만전을 기하겠다는 것이었다. 강화인간만으로도 성가신데 아직 건물 옥상에서 내려오지 않고 진을 치고 있는 저들은 분명 사이퍼일 터.
“……예감이 너무 잘 들어맞아서 탈이야.”
그들이 앞에 나타나자 아이러니하게도 트리비아의 가슴을 어지럽히던 소란이 말끔히 걷혔다. 하필이면 그림자길을 통하고 싶지 않은 날에 다시 습격해오다니. 거북함을 참고서라도 그림자를 통해 곧장 코어레너드로 돌아갔어야 했나. 아니, 저들은 결심을 굳혔기에 그곳이 어디든지 분명 소동을 벌였을 것이다. 물론 결과적으로 지금 이 상황이 저들의 형편에는 더 좋다는 게 매우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불안이 가시고 그 자리에 평정이 아닌 불쾌가 대신 자리 잡는 것은 더없이 짜증이 났다. 그러나 불평을 토로할 여유는 없었다. 절체절명의 사태임은 확실하니까.
필립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왔다. 다이무스의 칼끝이 곧이라도 목덜미에 와닿을 거리에서 겁내지도 않고 그는 칼과 평행을 이루며 팔을 뻗었다.
“가십시다, 여제여. 우리의 왕께서 당신을 불러들이셨습니다.”
“……같은 대답을 반복하는 것도 이젠 지쳐. 하지만 말길을 못 알아듣는다면 몇 번이건 다시 말해줄게. 나는 가지 않아.”
트리비아는 질린다는 얼굴로 필립을 쳐다보며 명료한 말투로 고했다. 필립도 트리비아가 이제 와서 순순히 따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지 딱히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이윽고 고개를 숙이더니 큭큭거리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필립이 고개를 들 때쯤 트리비아는 조금 움찔하며 걸치고 있는 다이무스의 겉옷을 꾹 쥐었다.
“역시 인형실이 심겨져 있었나…….”
“큭큭, 아둔하긴. 이제야 알아챈 건가? 하긴 헷갈렸겠지. 그래서 이 몸을 택해 나의 트리비아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으니까. 파장도 아주 잘 맞고 하물며 트리비아에 대한 마음까지도 비슷한 인간이니까. 뭐, 이제 와서 알아차렸다 해도 아무 소용없지만…….”
남자는 가소롭다는 듯이 다이무스를 가늘게 뜬 눈으로 보았다. 다이무스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냉정히 상황을 파악했다. 강화인간은 개체마다 실력 차이가 난다. 우수한 개체들로만 뽑아 왔다고 해도 반쯤은 적어도 다이무스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인해전술용 미끼에 불과할 것이다. 강화인간을 제외하고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능력자는 정확히 열 명. 그 가운데 아마도 이 공간의 규모를 보건대 세 명쯤은 결계사일 것이다. 나머지 불명하다. 자연원소계인지 정신형인지 그 어디에도 분류되지 않는 특수형인지. 저 능력자들이 어떤 조합을 가지고 공격해올지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의 성패였다.
임무는 반드시 달성해야만 한다. 적어도 트리비아만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에 아니라면 하나의 솟아날 구멍은 오늘 우연히 전화로 부른 차였다. 약속 장소에 두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알아차리고 회사나 연합 측에 연락을 넣어줄 것이다. 지원군이 닿을 때까지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문제는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어 시간 끈다는 기색을 들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아니, 다 떠나서 그런 방법은 다이무스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정말로 이 전투에서 승리하는 쪽이든 시간을 끄는 쪽이든 해야 하는 일은 오직 하나뿐이다. 이들을 모조리 검으로 베어내고 트리비아를 지킨다. 그게 다였다.
“칼이 또 더러워지겠군…….”
다이무스는 조용히 뇌까리며 남자에게 여전히 칼을 겨눈 채로 물러서라는 듯 앞으로 걸었다. 남자는 칼이 앞으로 나가는 만큼 뒷걸음질 쳤다.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이런, 거친 수단은 쓰고 싶지 않은데 말이야……. 이 상황에서 설마 이길 셈인가? 트리비아의 손을 빌릴 생각도 없이? 건방지기가 하늘을 찌르는군, 다이무스 홀든.”
“건방진 것은 네놈이다.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고 인형과 잔챙이들만 가지고 덤비다니. 정녕 다시 한 번 죽어야 정신을 차리겠는가.”
다이무스의 엄한 경고에 옥상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능력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의 양 옆으로 늘어선 그들은 적의와 살기로 등등해서는 다이무스를 노려보았다.
그들에게 다이무스는 누구보다 증오스럽기 짝이 없는 대상이다. 릭 톰슨도 그렇지만 결국 그들의 왕을 벤 장본인은 다이무스였다. 이 남자가 없었더라면 그들의 왕이 한 번 죽지도, 그동안 실의에 빠져 숨어 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안타리우스가 전성기를 구가할 당시 누리던 모든 영광을 검 하나로 빼앗아 간 사내다. 신도들에게 노인의 죽음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신의 대행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에게는 신이나 다름없는 기적을 행한 노인이다. 모든 섭리한 초월한 것 같은 그들의 왕이 죽음만은 이기지 못했다. 부활해서 돌아왔지만 수장을 잃은 공포는 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그것은 곧 ‘다이무스 홀든’이라는 존재에 대한 공포로 직결되었다. 무섭지만 반드시 처리해야 할 눈엣가시였다. 그런 존재가 설상가상으로 왕의 옆에 나란히 서는 것을 유일하게 인정받는 여왕을 데려가려는 것을 방해한다. 다이무스에 대한 증오의 골은 더욱 깊어져만 갈 뿐이었다.
마치 주인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이에게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충견처럼, 신도들은 개줄만 풀어주면 당장이라도 다이무스에게 달려들 것 같았다.
“그만둬라. 여기는 귀중한 나의 신부를 맞이하는 신성한 자리다.”
남자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신도들이 그나마 흥분을 가라앉히자 노인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트리비아, 그대는 나와 함께 가야만 해. 그대의 능력을 진정으로 이해해주는 자가 있던가? 그것을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이는? 그대가 가진 능력은 그대가 속한 곳에서는 다 발휘할 수 없어. 나만이 그대를 정녕 이해하고 그대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줄 수 있어.”
상대방에게 더없는 신뢰를 심어주는 확고하고도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였다. 트리비아는 표정이 한순간 흔들렸다. 그녀는 질끈 눈을 감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반짝 뜨인 눈에는 일말의 동요도 남아있지 않았다. 다이무스의 겉옷을 벗어 바닥에 떨어뜨린 그녀는 다이무스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녀의 어깨에서 검은 그림자의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내가 있을 곳은 ‘여기’야.”
트리비아는 노인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강하게 단정했다. 다이무스는 고개를 틀어 트리비아를 다소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다이무스의 도발에도 꿈쩍 않던 노인이 트리비아의 말에는 실망스러움을 감추지 않고 오롯이 드러냈다.
“그래……그렇단 말이지……. 그래도 그대는 나의 것이 되어야 해. 그것은 내가 「액자」의 주인 되고, 그대가 그 그림자 능력을 가진 이래로 결정된 사실이야. 저 남자는 이 자리에서 죽고, 그대는 나와 함께 간다.”
노인은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얼굴로 고하고는 뒤돌아서 구석으로 빠졌다. 허락이 떨어졌다는 신호인지 강화인간들의 무기질한 기색이 표변했다. 전투태세, 살기를 마음껏 뿜어대기 시작했다.
트리비아와 다이무스는 전투의 정석처럼 무의식적으로 등을 맞대고 섰다. 다이무스는 등 뒤로 여전히 젖어있어서 차가운 그녀의 체온을 느끼며 조용히 한 마디 건넸다.
“물러나 있는 게 어떤가.”
“마냥 보호받고만 있을 정도로 약하지 않아서.”
등 뒤에서 단호하게 돌아오는 대답에 다이무스는 저도 모르게 뜻모를 미소를 엷게 떠올렸다. 트리비아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역시 그녀가 가만히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라 이미 납득하고 있었던 것 같다. 호위로서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저들이 트리비아의 목숨을 노리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걸리적거릴 것 없이 저들을 해칠 수 있는 트리비아가 유리한 게 사실이다. 오히려 극한으로 집중해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다이무스 쪽이었다.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등을 떠나 앞으로 뛰쳐나갔다. 강화인간들도 동조하듯 튀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이무스의 예상대로 강화인간들은 두 패로 갈라져 각각 트리비아와 다이무스에게로 달려들었다. 다짜고짜 사방에서 뛰어드는 대여섯의 강화인간을, 기를 모아 360도로 지면을 훑듯이 쓸며 베어내는 보름달베기로 흩어냈다. 피했는지 타격감은 없었다. 절명참철도를 쓰지 않는 한 고도로 훈련된 강화인간 여럿을 한꺼번에 베어내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참철도는 다이무스의 검기(劍技)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집중력과 기력을 소모시키는 궁극기였다. 아무렇게나 소진할 수는 없다. 틈이 생기는 대로 하나씩 베어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강화인간들과 자신의 전투를 지켜볼 뿐 여전히 참여하지 않는 능력자들이 신경 쓰였다. 강화인간들과의 전투로 자신의 체력이 소모되기를 기대하는 것인지, 아니면 강화인간들과의 전투에서 생기는 빈틈을 노려 급습해올 참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다. 다이무스는 둘 다 허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형실 끊기 작전부터 글림듀 피습 사건까지 거치며 피가 나는 수련을 거듭하고 또 거듭했다. 허물은 되풀이하지 않아야 한다.
강화인간들의 비약적인 신체 능력에서 나오는 파워와 스피드는 위협적이었다. 자아를 잃은 병기면서도 정확한 합을 맞추어 순간순간 생기는 빈틈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 빈틈을 곧 없던 것으로 할 정도로 다이무스의 속도는 강화인간들 웃돌았다. 사각(死角)으로 파고들어도 귀신같이 그 기척을 읽고 돌아서서, 오히려 그들이 공격해올 때 생기는 틈을 노리고 반격을 가했다.
다이무스의 검술은 정적(靜的)이다. 현란하지 않은 필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하고 공격을 가한다. 느려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라서 마치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일 뿐. 그의 무기인 태도가 가벼워서도 아니다. 통상의 칼 열 배에 달하는 중량의 철을 어느 동양의 장인이 수없이 담금질하여 만들어낸 ‘괴물’. 그 어마어마한 질량만큼의 위력이 그의 손끝에서는 발휘되었다. 한 번 그의 칼에 베이면 그것은 요행이 허락되지 않는 분명한 살(殺)이 된다. 단순한 자상(刺傷)으로 끝나지 않는다. 일격필살(一擊必殺) 일도양단(一刀兩斷), 한 번 검을 든 이상 그 불문율은 반드시 지키는 게 그의 검사로서의 긍지였다.
희미한 어둠 가운데 끊임없이 피보라가 날린다. 철퍽철퍽 투명한 빗물로 얼룩졌던 바닥은 자꾸만 붉게 물들어갔다. 강화인간들 대다수가 아무런 죄도 없이 납치당해 실험체로 전락한 동정해 마땅한 존재라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 베어주는 게 그들을 위한 일이라는 고결한 목적의식도 없다. 이것은 다만 임무이자 적은 용서없이 배제하는 게 기본 원칙이었다. 망설임도 흔들림도 없이 모든 불필요한 상념을 지우고 검과 한몸이 되어 강화인간들을 하나하나 쓰러뜨려 나간다. 머릿수가 머릿수이기에 상대하는 과정에서 생긴 약간의 타박상과 출혈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부상 축에도 끼지 못한다. 다이무스의 주변에 서있는 강화인간은 더 이상 없었다. 피웅덩이 속에 시신만이 잔뜩 널려 있었다.
다이무스는 다소 흐트러진 호흡을 고르며 공중에 홱 태도를 휘둘러 덕지덕지 묻은 선혈을 털어냈다. 여전히 피가 방울져 있는 칼날을 그대로 가만히 수수방관하고 있는 안타리우스의 능력자들에게 겨누었다. 그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꽤 강한 강화인간들이었는데도 모조리 다이무스의 손에 죽어나간 게 조금은 충격인 듯했다. 그러나 그들은 큰 당황스러움을 보이지도 않았다. 다이무스는 능력자들을 주시하면서도 슬쩍 트리비아 쪽을 의식했다. 인해전술용으로 준비된 강화인간은 다이무스에게로 향했는지 그녀는 꽤 고전하고 있는 듯했다. 무엇보다 트리비아를 방해하는 강화인간 가운데는 RABBIT이 있었다. 동생 이글에게 치명상을 입혔다는 비능력자 카인과의 관계로도 널리 알려졌지만, 그녀는 안타리우스의 강화인간 중에서도 사신 아이작을 빼면 최강을 자랑한다. 역시 트리비아 쪽은 완벽하게 발을 묶어두고 있는 중이라고 판단해도 괜찮을 듯했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더욱 명백해졌다. 아마도 자신을 죽이기 위해 준비되었을 저 능력자들을 속히 처단하고 트리비아를 돕는 것이다.
“아직도 꽤나 여유로우신가 본데……네놈 말마따나 그 강화인간들은 잔챙이야. 그렇지만 우린 달라. 우리는 우리의 왕께서 인정하신 선택받은 전사니까.”
터번을 두른 아랍계 남성이 시미터(Scimitar)를 허리춤에서 뽑아들고 히죽히죽 웃으며 다이무스를 쳐다보았다.
“더없는 영광이야……. 분명히 당신 손으로 직접 저 남자를 찢어놓고 싶으실 텐데……. 그런 숭고한 사명을 우리에게 친히 맡겨주시다니…….”
매우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폭탄머리 여자가 손톱을 날카로운 갈고랑이처럼 변화시키며 꿈꾸는 듯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우후후-. 잘나신 귀족 나으리는 어디를 때려야 예쁜 비명을 지를까~?”
채찍을 바닥으로 치며 호리호리하게 키가 큰 남자가 여자 같은 말투로 말했다.
“타고난 집안에 명예에 능력까지 가져서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도련님이라서 맞기도 전에 꽁무니를 빼지 않을까?”
일반 남성의 팔뚝 만한 굵기를 가진 기다란 철제 봉을 흔들며 근육이 우락부락한 사내가 킬킬거렸다.
“빨리 죽이고 싶어…….”
두 눈 밑에 기묘한 문신을 새긴, 어딘가 심히 우울해 보이는 긴 흑발 생머리 여자가 타롯 카드를 펼쳐 들고 입을 가린 채로 중얼거렸다.
“왕께서 보고 계신다. 경솔한 발언은 삼가라.”
매끈하게 생긴 남색 장발 남성이 차갑게 말하자 제각기 흥분해서 떠들던 능력자들이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저 능력자들의 리더격인 듯했다. 남자는 열 살쯤으로 보이는 소년의 손을 잡고 능력자들의 가장 배후에 서있었다. 죽은 생선처럼 생기 하나라고는 없는 무기질한 눈동자가 섬뜩했다. 아이가 남자를 물끄러미 올려보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아이는 활짝 웃더니 곧 흙장난이라도 하려는 듯 피웅덩이 진 바닥에 서슴지 않고 손바닥을 댔다. 다이무스는 지금부터 무언가 벌어지는 것을 예감하고 검을 다잡았다.
쿠구구구― 지진 같은 땅울림이 일어나더니 다이무스의 발밑에서 무수한 ‘손’이 솟았다. 스톤 골렘이 땅 속에서 손을 뻗어오는 듯한 광경이었다. 다리를 잡으려드는 움직임을 피해 도약해서 다른 곳으로 몸을 비켜놓자 서늘한 시미터의 칼날이 곧바로 목께로 날아들었다. 최소한으로 고개를 틀어 피했으나 칼끝이 닿아 다이무스의 얼굴에 예리한 자상을 남기고 가 피가 방울져 흘렀다. 태세를 정비할 틈도 없이 거대한 다섯 개의 갈고랑이가 얼굴을 덮듯이 돌진해왔다. 빛의 속도로 몸을 옆으로 틀어 검으로 그것을 베어내었다. 여자는 예상했다는 듯이 반대편 손을 뻗어 다이무스의 팔을 할퀴고 지나갔다. 살점을 긁어냈는지 강렬한 화끈거림이 느껴졌다.
아픔을 맛볼 여유조차 없다. 거구의 사내가 곧장 육중한 기둥 같은 봉을 다이무스의 정수리로 내려찍어왔다. 우웅-하고 위협적으로 공기를 가르는 기색에 간신히 상체를 숙여 옆으로 비켜났다. 방금 전까지 그가 서있던 자리는 끔찍하게 갈라져 운석이라고 떨어진 양 커다란 구덩이가 움푹 패었다. 반격할 여지도 주지 않겠다는 듯 다이무스의 칼끝으로 장미 줄기 같이 가시 달린 채찍이 말려들었다. 그것을 떨쳐내려 주춤한 순간 타로 카드의 비가 쏟아 내렸다. 다이무스는 황급히 만월참으로 검풍을 흩어 카드를 반대방향으로 흩어냈으나, 궤도를 채 수정하지 못한 카드 몇 장이 그대로 다이무스의 어깨와 등, 팔 등지에 그대로 꽂혔다. 순간적으로 근육을 강화하며 깊숙이 박히는 것은 면했지만 예리한 아픔과 출혈이 남았다.
잠시간 전투가 멈췄다. 다이무스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사방을 포위한 채 노골적으로 비웃고 있는 이들의 기척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집중했다. 한 번의 합동 공격만으로 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것은 점점 지쳐가는 다이무스를 보며 그들이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그게 자못 불쾌하여 다이무스는 눈썹을 약간 찡그렸다.
지금 감히, 누구 앞에서 여유 따위를 부린단 말인가.
다이무스가 심호흡하는 것을 능력자들이 보았다고 생각한 순간 그들의 눈이 향하고 있던 곳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마치 시간을 잘라낸 것처럼 정적만이 공간을 잡아먹었다. 아이가 힘껏 차올린 축구공 마냥 아까 전까지만 해도 몸에 붙어있던 근육남의 머리가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그 머리통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핏물 낭자한 바닥 위로 처박히며 데굴데굴 구른다 싶었을 때, 거구의 목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더니 그대로 털썩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다이무스는 하찮은 벌레 보듯 이젠 단순한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사내의 시신을 업신여기다가 칼에 묻은 피를 다시 다시금 털어냈다.
“명을 재촉하지 마라. 어차피 네놈들은 다 내 손에 죽는다.”
재미있다는 듯 빙글빙글 웃던 능력자들의 안색이 싹 달라졌다. 웃음기 하나라고는 없는 냉혹한 전사의 얼굴이다. 다이무스는 아까 전과는 비교되지도 않을 만큼 강한 살기에 검을 쥔 손을 더욱 다잡았다. 지금부터가 정말로 위험하다. 이제부터 저들에게 방심이라는 요소는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전력을 한 사람 몫 깎아놓기는 했지만, 가장 전력으로서 결정적이지 않은 가지를 쳐낸 것에 불과함을 알고 있었다. 다이무스는 굳게 두 발바닥을 땅에 고정시키고 검을 겨눈 채 태세를 다잡았다.
아까 전과는 반대로 원거리 공격인 트럼프의 비가 먼저 다시 내렸다. 다시금 칼로 걷어내려 했으나 수백 장의 카드들이 다이무스의 주변에 거대한 상자라도 만들 듯이 사방으로 줄서 다닥다닥 붙기 시작했다. 가두어지기까지 기다려줄 아량은 당연히 없다. 신속하게 틈새를 베어내고 뛰쳐나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카드에 가려 좁아진 시야와 넓어진 사각을 발판삼아 양옆에서 시미터와 손톱이 빠르게 접근해왔다. 설상가상으로 정면에서는 채찍이 수직으로 이쪽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좌우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는 상체를 굽히고 정면으로 빠져나가야 하겠지만, 그것은 몸을 가를 듯이 뻗쳐오는 채찍의 마수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답은 하나였다. 다이무스는 달려 나가던 관성을 거부하듯 몸을 급히 홱 뒤로 내뺐다.
“거긴 저승문이야, 잘생긴 오빠.”
“…!”
타로를 조종하는 여자가 무감각한 말투로 고했다. 카드가 거대한 칼날 모양을 만들어 다이무스의 등을 향해 날아와 꽂히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방과 양옆이 막혀서 미리 짠 듯이 마련된 후방에 진짜 공격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예상한 다이무스는, 다리 근육을 순간적으로 강화하여 지면을 박차고 그대로 공중을 뛰어 돌아 칼날의 진행방향 반대편에 섰다. 예상치 못한 광속의 움직임에 여자는 재빨리 카드를 자기 앞에 방패처럼 세우려 했지만 이미 다이무스의 신속한 칼날이 우아한 궤적을 그리며 여자의 심장을 꿰뚫은 지 오래였다.
그런 순간 갑자기 다이무스 주위의 풍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섬세한 유리세공이 공중에서 산산조각 나 다이아몬드 더스트처럼 파스스 바스러졌다. 다이무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쁜 예감이 그의 묵직한 바위 같은 침착함을 거세게 뒤흔들었다. 그는 자신이 찌른 칼에 쓰러져 안기듯이 푹 몸을 기대오고 있는 여자의 몸을 조심스레 떼어놓고 보았다.
“……트리, 비아……?”
아연하게, 얼이 빠져 처음으로 여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트리비아는 죽음이 완연한, 빛이 꺼진 눈으로 다이무스를 쳐다보며 피를 왈칵 토해냈다.
타로 카드 조종사를 찔렀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는가.
나는 지켜야 할 존재를 오히려 손상시키고 말았는가.
언제, 어디서부터 환각이었는가?
아니다! 노인이 그녀를 죽게 내버려둘 리 없지 않은가.
깨어라. 환각은 지금 이 풍경이다!
다이무스가 심기일전하며 한 번 눈을 질끈 감았다 뜨자, 풍경이 다시 한 번 와르르 붕괴되었다.
“다이무스―!”
그의 자각을 더욱 일깨우듯 트리비아의 절규가 다이무스의 귀로 날아와 꽂혔다. 이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그녀에게 처음 이름을 불렸다는 사실에 깨달았다. 다이무스는 필사적으로 움직이려 했으나 다리가 땅바닥에서 떼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그의 다리가 바위덩어리에 무릎께까지 파묻혀 있었다. 잠깐 환각에 미혹되는 한 순간을 안타리우스의 능력자들은 노려왔던 것이다. 정말로 얼마 되지 않는 찰나였지만 그 기회를 무법자들은 놓치지 않고 잔인하게 파고들었다.
“…으윽…!”
다이무스가 발밑의 함정을 벗어나려는 순간 피웅덩이에서 뾰족한 얼음의 송곳이 솟아나 가차없이 몸을 꿰뚫었다. 얼음에 꽂혀 차가울 것만 같은데, 마치 상체 한 가운데 불구덩이가 뒤끓는 듯한 뜨거움을 느끼며 다이무스는 입으로 붉은 피를 쏟아냈다. 고통에 정신이 도는 것을 느끼며 힘겹게 시선을 들었다. 아이의 손을 잡고 있던 장발 남자가 이쪽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그의 손끝에는 자잘한 얼음 결정이 붙어 흰 냉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방관하듯 가만히 상황을 주시하고만 있던 남자에게 한 순간이라도 신경을 쓰지 못했던 자신의 안일함에 다이무스는 이를 빠득 갈았다. 그 자책감은 저 결정사뿐만이 아니라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또 한 사람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후후. 나는 이 몸이 한 번도 능력자가 아니라고 한 적은 없는데 말이야.”
필립, 아니 ‘노인’이 검지와 중지를 관자놀이에 짚은 채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그는 화가 날 정도로 느긋한 걸음으로 다이무스의 앞으로 다가왔다. 다이무스는 남자를 있는 힘껏 노려보며 피웅덩이에서 솟아나 자기 몸을 관통하고 있는 얼음 기둥을 안간힘을 쥐어짜 칼로 잘라냈다. 남자는 굳이 말리지 않았다. 이미 치명상을 입혔다는 확신에서였다. 발목을 붙잡고 있던 장애물도 사라진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스러운 몸을 그나마 제대로 서있도록 고정해주던 얼음이 잘려나가자 다이무스는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털썩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고 말았다. 태도를 기둥처럼 땅에 박아 어떻게든 짚고 일어서려 애썼다. 한쪽이라도 무릎을 꿇어버린 굴욕도 있지만, 지금 업신여기고 있는 저 작자의 눈길이 더없이 치욕스러웠던 탓이다.
“나가라―!”
순간 남자에게로 새까만 박쥐폭풍이 날아들었다. 예상했는지 그는 여유롭게 옆으로 피하며 강화인간들 틈을 겨우 빠져나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트리비아를 보았다. 유감스러운 듯이 남자는 그녀에게 말했다.
“안 됐지만 트리비아, 이미 늦었어.”
“늦은 건 당신이야…!”
“……?!”
비가 오지 않고 고요하기만 하던 공간으로 전조도 없이 우레 같은 천둥소리와 함께 억수 같은 장대비가 들이닥쳤다. 능력자들과 강화인간들은 순간 당황하며 무심코 제각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노인’은 황급히 고개를 들어 결계사들이 있는 방향을 보았다. 세 명이 힘을 합쳐 균형을 이루고 있던 결계였다. 결계란 현실 공간을 거절하여 만들어낸 일종의 이공간, 술사의 정신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깨질 수 있다. 결계사 하나가 트리비아의 박쥐떼에 까맣게 둘러싸여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 박쥐는 애초부터 ‘노인’을 공격하기 위한 게 아니라 결계를 깨고 잠시나마 안타리우스를 혼란으로 몰아넣기 위한 목적으로 날렸던 것이었다. 그는 당황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황급히 아래로 시선을 향했으나 다이무스는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순간 벼락이 번쩍하더니 우르르 쾅 내리쳤다. 놀라서 하늘을 우러르자 남자를 힘겹게 안아 들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여인의 유려한 실루엣을 두 눈으로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저격! 저격하라!”
남자는 대기시켜놓은 저격수들에게 분노 가득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밑에서 벌어진 아수라장을 뒤로 한 채, 트리비아는 비 내리는 어두운 허공에다 재빨리 그림자문을 열고 먼저 다이무스를 밀어 넣었다. 트리비아도 그 안으로 날아드려는 순간 언젠가처럼 뒤에서 잔혹한 총성이 연거푸 들려왔다.
“……으읏!”
다이무스는 때마침 간헐적으로 밤하늘에 번쩍이는 번갯불에 트리비아의 몸이 총격에 의해 되는대로 진동하며 붉은 피가 사정없이 튀는 것을 보았다. 당장이라도 그 쪽을 향해 손을 뻗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망연자실해서는 다이무스는 다만 바보 같은 한 마디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어째, 서…….”
다이무스의 그 말이 겨우 닿기는 했나보다. 그 순간 트리비아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아마도 그는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 느끼고 있을 고통만큼이나 처절하게 일그러져서는, 그럼에도 너무나도 아름답고 처연하게 미소 지으며 트리비아는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은……날 수 없으니까……. 그 뿐이야…….”
더없이 잔인한 한 마디를 남기고는 트리비아는 손짓하여 그림자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바늘 같이 차갑게 지상으로 꽂히는 빗줄기와 하나가 되어, 트리비아는 끝없이 끝없이 추락해갔다.
― 10에 계속.
*
- 소설의 기본 5단 구성 단계로 치자면 이번 편부터 ‘위기’라고 할 수 있겠네요. 발단과 전개까지 보시느라 다들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ㅇㅅㅇ/ ~**
- 아인트호벤 맵이 드디어!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치고 나오더군요. 두근두근합니다. 아인트호벤 맵 자체 분위기랑 음악을 굉장히 좋아해서 굉장히 기대됩니다.(호자도 이~뻐~) 특히 그 공격할 수는 없는데 상대가 보이는 철조망 대치 구역. 뭐야, 이거. 애틋하잖아. (뭐래) 신캐만큼 자주일 수는 없겠지만 신맵도 조금씩 늘었으면 좋겠습니다. AOS가 Aeon of Strife(전투의 영겁)이라고 한다면, 사이퍼뿐만이 아니라 그 지형지물도 전투에 상당한 재미를 더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숲이라든가 사막이라든가 호수라든가, 아님 복층 구조라든가 버프나 디버프 지역이라든가 막 이런 거 만들어줬음 좋것다.
- 종교적으로나 민속적으로나 ‘결혼, 혼인’이라는 것은 남녀의 교합을 통해 더욱 ‘완전해진다’, ‘풍성해진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 카를로스(Carlos)→칼(Carl). 윌라드도 자기의 어린 충복 정도는 애칭으로 부르지 않을까요. 아니, 이미 애를 종처럼 부린다는 점에서 거기에 사랑이 있는지는 쓰는 저조차도 확신이 안 갑니다만. 윌라드가 나쁜 사람이기는 하지만 뭐랄까, 또 마냥 나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일단 그런 느낌입니다.
- 다이무스는 사람을 잘 ‘보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수는 극도로 적지만 대신 말없이 관찰하고 한발 앞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배려하는 사람이죠. 그래도 말하는 싸가지는 밥 말아 드심.ㅋㅋㅋㅋ 근데 그게 좋음.(소곤)<<
- 다이무스의 전투신을 쓸 때는 다이무스 테마 BGM을 무한 반복해서 들으며 썼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그거 들으면서 읽으시면 더 좋을 듯. 아, 언젠가 사이퍼즈 전체 BGM 감상문을 써야 할 텐데 말이죠. (먼 산)
- 신캐 드립 나도 한 번 쳐보고 싶은 욕망을 이번 편에 담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음슴. 조커팀, 어서 활 능력자를 내놔라. 대표적인 원거리 무기인 활이 없는 게 말이 되는가. 보통활과 석궁 페어가 좋것어.
- [레드팀] 환각의 필립 님 "아오, 다무 개핀데 그걸 못잡냐, ♡♡아.;;"
저격의 단K 님 "틀비가 있었는지 내가 어찌 앏. ♡♡♡.ㅠㅠㅠ"
[블루팀] 태도 다이무스 님 "나대지마랔ㅋㅋㅋ."
밤의 여왕 트리비아 님 "그 정도는 당연한 거얔ㅋㅋㅋ."
- 비행의 안 좋은 예: ①낙하지점 보고 있는데 저격 맞고 우아하게 추락(카인 ♡♡♡) ②이륙하다가 거미지옥에 낚임(히깔도 바호구 ♡♡) ③찍었는데 거기 때마침 크허나 글빔, 그리고 끔살. ♡♡. 그쵸. 클레어의 궁극기가 사실 클빔이듯이, 틀비의 궁극기도 박폭인 거겠죠. (그래도 비행 좋아요.)
- 오탈자 및 이상한 문맥 지적, 다양한 질문 환영합니다.
- 깨알 같은 전작 홍보.
「은폐」(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3763240)
「유도」(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4004813)
「호접지몽(胡蝶之夢)」(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6171648)
- 이번 화의 소재는 다음과 같습니다.
(현재 이클립스는 공식적으로 업데이트 중이지만, 개인적으로 이미지 파일로 저장해둔 것은 그대로 싣겠습니다.)
Ps.1 08편에서 들어온 질문에 관한 답변입니다.
01. 우선 경상도 사람이라도 물으셨는데, 본의 아니게 신상이 털리는군요.ㅋㅋㅋㅋ 네, 그렇습니다. 더 정확히는 부산 사람입니다. 개인적으로 자주 쓰는 표현인데 한 번도 지적받은 적이 없어서 신선하네요.ㅋㅋㅋㅋ
02. 사투리랄까, ‘토속어(土俗語)’를 뜻하는 ‘탯말(胎-ㅅ말)’이란 용어를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짜달리’는 지적하신 바와 같이 ‘짜달시리’의 준말입니다. 자주 쓰는 입말 그대로를 썼다고 생각해주세요. ‘짜달시리’의 본래 뜻인 ‘별로, 그다지, 썩’ 등으로 써도 좋았지만, 표준어로는 절대로 나타낼 수 없는 느낌이 탯말에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03. ‘마음에도~했다’ 부분에 관해서는, 우선 ‘마음도 없는 남자’로 고치게 될 경우에는 문맥상 당착이 생기므로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마음이 없는 것은 헬레나지 헬레나의 남편이 아니기 때문이죠. ‘마음에도 없는 결혼’으로 수정하라고 권고하신 것은 아마도 ‘결혼’이란 낱말이 이미 내포하고 있는 의미 때문에 그러신 거겠죠. 일반적으로는 여성이 결혼을 한다는 것은 그 상대가 남성이라는 뜻이 포함된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도 헬레나의 상대가 남성임은 뒤에서도 충분히 밝혀지고요. 그런 점에서 ‘남자와 결혼’이라는 표현은 잉여(redundance)적입니다. ‘아내가 결혼했다’처럼 아내는 이미 결혼한 사람을 이르는 말인데 결혼을 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물론 저 문장은 의미 잉여가 아니라 역설적 표현을 위해 쓰인 것이지만요.)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고쳐야 할 부분이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마음에도 없는’이 꾸며주는 말은 ‘남자’임을 표면에서 강조하고 싶습니다. 의미적으로는 ‘그게 그거’가 됩니다만, 우선 통사적으로 보이는 결과 또한 문장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수정하지 않겠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문자 자체가 주는 느낌도 있고요. 또한 아직 동성혼이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국가가 대다수입니다만 그들의 권익을 배려하는 차원에서도.ㅎㅎ
그나저나 여태까지 문장에 관해서는 직접적으로 지적해주시는 분이 없으셨는데 매우 기쁩니다. 그렇잖아도 문장력이 굉장히 부족하다는 자각이 있고, 또 본인은 그냥 지나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점들이 있기에 많은 공부가 됩니다. 자양분으로 삼아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Ps.2 08편 소재와 관련해서, 빅터와 관련된 이클립스 이미지가 없어서 텍스트본을 실었었는데 제가 언제였는지는 몰라도 이클립스 이미지를 저장해둔 게 있더군요. 그래서 텍스트본을 빼고 이미지를 실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Ps.3 마찬가지로 08편 본문 가운데 루이스의 나이를 27세로 표기했었는데 28세로 수정했습니다. 프로필에 있는 나이에서 1년 정도 지난 시점이 이 Twilight의 시간적 배경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주인공 트리비아는 34세, 다이무스는 30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