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팬픽] Twilight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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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8 11:01:55
- 이 글은 픽션(fiction)입니다. 특정 단체ㆍ사건ㆍ사상ㆍ종교와 무관함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 Twilight - Prologue -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4851750)
Twilight 01.(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4904555)
Twilight 02.(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4963543)
Twilight 03.(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5060412)
Twilight 04.(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5910203)
Twilight 05.(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5999681)
Twilight 06.(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6069787)
Twilight 07.(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6132658)
해질녘 모든 사물이 붉게 물들고 저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
낮도 밤도 아닌 모호한 시간의 경계.
날이 어둑어둑해지면서 사물의 윤곽이 희미해지는 때.
날카로운 링거 바늘이 푸욱 왼팔마디에 드러난 얇은 혈관에 박혀 들어갔다. 바늘에 연결된 투명한 호스가 붉은 색으로 조금씩 덧칠된다. 홀쭉했던 비닐팩이 조금씩 혈액으로 차올랐다. 주먹을 쥐었다 펴다 하며 아무런 감흥없는 눈길로 헬레나는 몸 바깥으로 피가 빠져나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곳이 병원이었다면 누군가를 위해 친절히 수혈이라도 해주는 갸륵한 모습으로 비칠 것이다. 그러나 헬레나가 누워있는 건 병원 침대 같은 게 아니다. 시체 해부라도 이루어져야 할 것 같은 차디찬 철제 실험대 위였다. 게다가 헌혈을 위한 피라면 사람을 살리는 데 쓰이겠지만, 그녀의 피는 엄밀히 말하자면 사람을 죽이는 데 쓰인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문제는 생각해본 적도 없다는 듯 헬레나의 초록색 눈동자에 죄책감은 한 방울도 맺혀 있지 않았다. 다만 이 실험대 위에 누워 피가 모여드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때마다 회상에 잠겨들고는 한다. 왜일까. 혼자 가만히 침묵하고 있는 시간에는 지금과 앞으로의 일보다 지나온 일들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딱히 떠올리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추억도 아니면서 습관처럼 상념은 찾아들었다.
지금으로서는 어떻게 살 수 있었는지 치가 떨릴 만큼 궁핍했던 나날이다. 다만 가난이 비참해서 마음에도 없는 남자와 결혼을 했다. 적어도 남자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았지만 헬레나에게 있어 다만 지옥 같은 일상을 벗어나고 싶었을 때쯤 청혼해온 게 그 남자였을 뿐이다. 남자의 큰형이 제법 규모가 큰 방직공장의 사장이라는 말에 솔깃했다. 나누어가질 부모의 유산 정도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자신은 어리석어도 한참 어리석었다. 돈이 사람을 얼마나 더럽게 만드는지 알고 있을 참이었는데. 남편의 형은 다만 노동자로서 동생을 부려먹을 뿐 더 나은 대우도 없었다. 큰 이익을 위해서라면 친동생마저도 그저 기계의 부품으로밖에 보지 않았다. 아이는 생겨 배는 불러오고 남편은 쥐꼬리 만한 월급을 안겨다주며 바보같이 웃기만 했다. 언젠가 그놈의 몇 번인지도 모를 사과는 집어치우라고 했더니 기어이 마냥 웃기만 했더랬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에게 능력이 생겼다. 징후는 있었다고 했다. 자신과 만났을 때부터 어딘가 가슴 한쪽이 뜨겁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고 했다. 첫눈에 반해서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다가 아니었나봐, 라고 말하며 남편은 얍! 하고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허공에 불의 구체가 생겨났다. 마술 같은 게 아니었다.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적은 없었다. 남편은 사이퍼였던 것이다. 그는 회사나 연합 측에 가서 상담을 받아 보겠다고 했다. 공장일만으로는 더 이상 그 때 갓 태어난 아이를 포함한 세 식구의 생계를 책임질 수 없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어느 쪽이든 일단 속하기만 하면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받는데다가 능력을 좀 더 잘 다룰 수 있는 훈련을 받을 수도 있다고 했다.
기쁘지는 않았다. 당시 남편이 일하고 있던 곳은 베스터 가스 공장, 일체의 화기는 엄금되는 곳이다. 무얼 염려하는지 이미 알고 있단 얼굴로 남편은 충분히 조심하고 있고, 며칠 내로 사표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당장의 생활이 또 다시 어려워질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사이퍼로서 정식으로 인정될 때까지는 모르는 체 하고 계속 다니라고 했더니 남편은 단호히 거부했다. 행여 자기가 실수라도 했다가는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며 입에 발린 말을 했다. 배부른 것은 다만 탐욕스레 젖을 빨고 있는 무지한 갓난아이뿐인데도. 아이가 사랑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사표를 낸다고 결정한 그날, 도시락을 잊은 남편을 위해 아이를 옆집에 잠깐 맡기고 공장으로 향했다. 그게 자기의 삶을 바꾸어놓은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남편을 찾으러 다니다 질 나쁜 공장장에게 잡혀 성추행 당했다. 그것을 마침 사표를 내러왔던 남편이 목격한 게 발단이었다. 그 얼빠졌다고 생각한 그이는 불같이 화를 냈다. 사이퍼인 그의 감정에 동조하여 그의 몸에서 순간적으로 불꽃이 확 일어났다. 남편도 능력을 낼 생각은 없었는지 분노 속에서도 당황한 눈치였다. 이미 사무실 곳곳에 불이 옮겨 붙기 시작한 상태였다. 공장장은 겁에 질려 바닥에 주저앉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넘실거리는 불에 두려워 격해지는 감정을 주체 못하고 남편에게 그만두라고 비명을 질렀다. 남편은 안간힘을 쓰는 듯했지만 불이 잦아들기는커녕 더 큰 화마가 건물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 때 불 때문인지 이상하게 머리와 가슴이 뜨거웠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자기 몸에서 이상한 기운 같은 게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이 남편에게로 옮아가 이 불꽃을 더욱 맹렬하게 태우고 있다는 점을. 자신도 사이퍼였던 것이다.
어떤 정신으로 빠져나왔는지 그 기억은 이제 희미하다. 다만 자신의 능력을 깨닫자마자 어떻게든 그 불구덩이를 헤쳐 공장으로부터 달아나고 또 달아났다. 화염의 소용돌이 속에 버려둔 남편도 옆집에 맡긴 아이도 생각나지 않았다. 가슴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꽤나 영악한 머리는 자신의 힘의 정체를 그 와중에 냉정하게 분석했다 남편이 사이퍼에 관한 정보를 모으는 가운데 <능력자 일보>에서 본 적이 있었다. 사이퍼들에게는 능력의 한계치가 있어 그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아마도 자신의 능력은 타인의 능력을 강하게 해주는 촉매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희소한 능력은 돈이 된다. 누군가에게 비참하게 의지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속으로 ‘만세!’를 부른 순간 뒤쪽에서는 귀가 먹먹해질 만큼의 굉음이 들렸다. 폭격이라도 떨어진 듯한 끔찍한 폭발음이었지만 당시의 헬레나에게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축포 소리나 다름없었다.
핏핏-하는 작은 기계음이 들렸다. 어느 샌가 잠겨 있던 눈을 떴다. 필요한 분량만큼의 피가 다 뽑혔다는 신호였다. 빈혈로 쓰러지지 않을 만큼 빠듯하게 많은 양이 이 채혈의 적정량이었다. 아마 몸을 일으키면 여느 때처럼 뒷골이 서늘해지는 어지러움을 호소할 것이다. 이것은 헌혈 같이 고귀한 행위가 아니라서 기증자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이건 무상의 기증 행위가 아니다. 이전의 비참한 생활 따위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헬레나는 사치를 누리고 있었다. 이 피로 인해 누가 부작용을 일으켜 죽든, 강화된 능력자가 사람을 죽이든 알까보냐. 자기가 가진 것을 자기만을 위해 유용하게 써먹는 게 무어가 나쁘단 말인가.
차가운 핀 조명만이 실험대 위로 쏟아지는 이곳으로 타이밍을 가늠한 듯 옥사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는 하도 반복되어 서로가 무의식에 가까운 작업이었다. 헬레나는 스스로 바늘을 뽑고 알코올솜으로 피가 방울지는 자리를 지그시 눌렀다. 옥사나는 냉동박스에 혈액팩을 넣었다. 헬레나가 얼음 사이로 파묻힌 자신의 피를 물끄러미 보았다. 만약 어느 사이퍼든지 가까이에만 있으면 헬레나의 마음먹기에 따라 곧바로 그를 강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물리적으로 곁에 있지 않을 때도 일시적으로 큰 도핑 효과를 낳는 여러 종류의 정제나 물약을 만드는 원료가 되는 게 바로 자신의 피였다. 원액을 희석시켜 만드는데 그 농도에 따라 도핑 효과가 달라진다고 들었다. 다른 화학 약품과의 조합 방법에 따라 효과가 달라진다고 했던가. 파이크니 타즈니 스프린터니, 옥사나가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지만 헬레나는 하등의 관심이 없었다. 자신의 피가 낳는 결과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게 계속 멍하니 누워있지만 말고 나가 봐. 당신 딸들이 엄마 엄마 하면서 시끄럽게 울고 있거든.”
“간식 먹이고 낮잠 재웠는데……그 사이 깬 거야? 그리고 옥사나, 걔들은 내 아이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해.”
“왜~? 아아, ‘도플갱어’라고 부르는 게 더 나을까? 어쨌거나 유전적으로 동일하니까.”
“…….”
헬레나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짚으며 가까스로 바닥을 딛고 섰다. 옥사나는 안색이 창백한 그녀를 잠시 보더니 약품이 잔뜩 줄서있는 선반을 뒤졌다. 거기서 캡슐 하나를 빼들더니 친절하게 컵에 물까지 따라 헬레나에게 건넸다. 헬레나는 과도한 친절에 오히려 미심쩍다는 눈으로 옥사나를 쳐다보았다. 옥사나는 그녀의 의심 가득한 눈길에도 개의치 않고 요염하게 웃었다.
“후후- 당신이 안타리우스에 온 건 정말 행운이야. 어쨌거나 지하연합의 큰 축이었던 흑염 하이드를 죽인 건 당신이나 다름없잖아. 당신이 이룬 공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어. 진심이야?”
헬레나는 옥사나의 칭찬에도 못마땅한 듯 그녀의 손에 들린 약을 뺏듯이 받아들어 물과 함께 삼켰다. 어지러움을 단번에 가시게 해주는 약이지만 꺼림칙했다. 이것도 자기 피로 만든 약이었으니까. 동족상잔이라도 하는 기묘한 기분이 싫었다.
“뻔뻔하긴. 이쪽으로 오게 만든 건 당신네들이잖아.”
메스꺼운 기분을 해소하려는 듯 헬레나는 일부러 퉁명스레 옥사나에게 대꾸했다.
베스터 가스 공장에서 도망쳐 나와, 혹시나 폭발 사고 건으로 의심을 받을까 숨어 지내던 도중 ESPER가 파견한 헌터의 눈에 띄게 되었다. 자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자신만만했다. 그들이 그토록 찾고 있던 메타(meta)능력자가 나타나주었으니 말이다.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하며 임상실험체로 연구소에 체류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유전자 정보를 가지고 결국 능력자를 강화하는 약물을 개발해내지 못했다. 연구소장은 성과가 나지 않았으니 보수도 당연히 줄 수 없다며 입을 싹 씻었다. 참을 수 없었다. 자신들의 무능함을 탓하기는커녕 기꺼이 몸을 바쳐 실험에 응해준 자신에게 괜한 화풀이를 했다.
그 때 악마처럼 기회를 노리고 찾아온 게 안타리우스였다. 그들은 베스터 가스 공장 폭발 사고를 독자적으로 조사했다고 했다. 그 현장에서 유일하게 살아나간 헬레나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정황상 현장에서 혼자 살아나간 그녀는 방화범으로 몰릴 수 있다고 정신적으로 몰아넣었다. 거기서 거래를 제안했다. 가스 폭발 사고의 모든 증거를 말끔하게 지워줄 테니 그들에게 오라고 했다. 어떻게 아는 것인지 ESPER들 같이 도중에 실험을 방폐하거나 보수를 지급하지 않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그들은 더없이 달콤한 말로 사람의 마음 틈새를 교묘히도 파고들었다. 헬레나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그들이 내미는 손을 잡을 수밖에.
“어찌됐건 당신도 나름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잖아? 온갖 보석이랑 옷가지로 넘쳐나는 그 휘황찬란한 방이 그 증거 아니겠어? 온통 번쩍거리는 통에 눈이 다 멀 지경이야. 노안이 더 빨리 찾아올지도 모르겠어.”
“쓸데없는 참견이야.”
헬레나는 물컵을 일부러 실험대 위에 탕 내려두고는 출입구로 향했다.
“애들한테 가려고?”
옥사나는 재미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의 등에다 대고 물었다.
“……그 애들이 울면 정말로 단순히 귀여운 칭얼거림으로 끝나지 않으니까.”
“……후후후. 친자식은 버려도 또 하나의 나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가봐~?”
역린이었다. 헬레나가 홱 돌아보며 옥사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렇잖아도 커다란 눈을, 눈알이 튀어나올 듯이 부릅뜨고 무시무시한 안광을 발했다. 마치 푸른 숲에 새빨간 대화재라도 난 듯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가 살기로 이글거렸다. 그 눈빛이 하나도 무섭지 않은지 옥사나는 이내 깔깔거리며 웃었다. 헬레나는 악마 같은 웃음소리에 떨떠름하게 혀를 차고는 다시 등을 돌려 실험실을 나갔다.
머리가 아직도 지끈거리기 때문일까, 덩달아 심장 한 켠이 아려왔다.
* * *
사진은 말이 없다. 다만 보이는 것이 전부다. 더 없을 순간을 프레임에 담아낸다. 놓칠 수도 있었던 장면을 빠짐없이 셔터를 눌러 잡아내는 것이 실력있는 포토그래퍼일 것이다. 피사체는 찍히는 대상이므로 어느 정도의 수동성을 함의한다. 유능한 사진사는 모델에게서 그가 추구하는 동작과 표정을 끌어낼 수 있어야 했다. 특히 정물이나 짐승이 아닌 사람을 찍을 때는 더욱 섬세하게 접근해야 한다. 초짜라면 긴장하지 않게 촬영 현장에 녹아들 수 있게 잘 타일러 숨겨진 가능성을 이끌어낸다. 중견이라면 어느 정도 쌓아올려진 프라이드를 다치지 않도록 하며 요구사항을 전달해야 한다. 당대 최고 인기 모델이라면 제멋대로이고 오만하므로 잘 구슬려 그들의 프로 의식을 자극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런 생각없이 찍는 게 아니다. 시각으로 모든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만큼 더 신경써야 하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촬영장에는 대부분 과장된 칭찬과 제스처, 스태프들의 호응이 오고가며 분주함이 가득하다.
그러나 지금 르 블랑 기획전 촬영이 행해지는 이곳은 약간의 소곤거림을 제외하고는 묵묵한 셔터음만 기계적으로 터졌다. 포토그래퍼가 자신이 원하는 느낌을 모델에게 전달할 필요가 없었다. 트리비아 카리나는 요구하지 않아도 원하는 것 이상의 물건을 내놓는 녹슬지 않은 프로였다. 그녀가 사진사의 의중을 읽고 그가 바라는 것에 맞춰 표현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트리비아는 어디까지나 의상이나 소품을 걸치고 거기에 대해서 자기가 나타내고 싶은 것을 주장하는 것뿐이었다. 그게 최선이자 최상이었기에 포토그래퍼는 홀린 듯이 베스트 컷을 놓치지 않기 위해 셔터만 누르기 바빴다. 예술가로서 사진사도 자존심이 있을 테지만 피사체에 끌려갔다. 렌즈를 꿰뚫고 들어오는 존재감이야말로 일류 모델로서 트리비아가 지닌 불가침 저력이었다.
다이무스는 모든 조명과 집중이 트리비아에게로 쏠려 그늘진 벽에 말없이 기대서서 그녀를 주시했다. 본디 여성 패션 잡지와 무관한데다가 그게 아니라도 이런 계열에 관해서는 서먹하고 낯설었다. 그렇지만 새삼 타인의 직업 현장에 나와 견학해보니 생경하면서도 신기했다. 사람이 일에 임하는 태도는 다 다를 것이다. 다이무스는 자신의 소임에 관해서는 남들이 혀를 내두를 만큼 철두철미하다. 주어진 일을 해내지 못하는 이에게는 가차없는 질책을 가한다. 그것은 그가 어떤 일이든지 완벽하게 해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기가 가진 능력을 모두 발휘하며 노력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다. 프로 의식이란 것은 사자박토(獅子搏兎)의 정신이다. 사소한 일에도 정점에 서는 자로서의 위엄을 보여야만 한다. 게으름과 자만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쪽 세계에서는 무지렁이나 다름없었지만 적어도 트리비아 카리나가 그것을 가졌다는 것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다이무스는 지금 이 촬영장에 있는 모두가 트리비아에게 눈을 빼앗긴 것과 달리 포토그래퍼 필립에게서도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여기저기 자리를 옮겨 다니며 다양한 각도로 트리비아를 찍고 있는 남자는 더없이 열띤 눈을 하고 있다. 그야말로 숭배에도 가까운, 열렬하기 짝이 없는 시선을 아낌없이 쏟뜨렸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들어온 빛을 카메라 거울에 반사시켜 파인더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듯 보였다. 육안으로도 거듭해서 트리비아의 모습을 찍는 것만 같았다. 흠칫 놀라며 알 수 없는 오한에 팔을 쓸었던 것은 처음뿐이었다. 트리비아는 지지 않겠다는 듯 그 눈빛과 싸우고 있었다.
만족스러움 가득한 필립의 컷! 사인이 떨어지자 촬영장 여기저기서 한숨이 흘러 터졌다. 왠지 모르게 이 공간에 감돌던 긴장감의 실이 비로소 끊겼기 때문이기도 했고, 트리비아라는 최면에 걸렸다 그들이 깼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음 의상과 헤어, 메이크업을 위해서 트리비아는 쉴 틈도 없이 곧장 피팅룸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눈으로 좇다가 다이무스는 책을 꺼내들었다. 호위라는 것은 일종의 보험이기에 이변이 닥치지 않는 한 무료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가 임무에 헐렁해져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그는 자투리 시간이나마 자기를 진보시킬 수 있는 데 할애하기도 했다. 그 이유가 제일 크지만 하나 더는 일종의 경계 표시였다. 촬영장을 처음 찾은 날 이래로 이상하게도 여성 스태프들이 앉으라고 의자를 건네거나 차를 권하거나, 별 것 아닌 용건으로 말을 걸어오는 게 성가셨다. 그들의 이유 모를 호의를 비난하지는 않지만 결코 휴식을 취할 생각은 없었기에.
“다이무스 아저씨!”
눈으로 철학서의 활자를 쫓고 있던 다이무스는 낯익은 목소리에 아래쪽을 보았다. 마를렌이었다. 그 옆에는 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노란 우비 소녀도 함께였다.
“오랜만에 뵙네요-.”
마를렌은 흰 바탕에 물방울무늬가 그려진 원피스 치맛자락을 우아하게 펼쳐들고 요조숙녀처럼 얌전히 인사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마음껏 그 늠름한 가슴에 안아 붙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마를렌의 키로서는 다이무스의 허리에 매달리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것은 레이디로서의 품위가 손상되는 행동이었다. 다이무스는 분명 쾌활한 타입보다는 정숙한 편을 좋아할 것이라고 언젠가부터 멋대로 결정내리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냥 좋은 마음에 병아리처럼 졸졸 따라다니며 시끄럽게 굴었던 것을 반성했다. 여성스러움으로 어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이래로, 마를렌은 다이무스의 앞에서만큼은 얌전해지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안녕하세요오…….”
마를렌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여주는 다이무스에게 샬럿은 늘 그렇듯이 자신감 없이 말꼬리를 흐리는 독특한 어조로 꾸벅 인사했다. 순간 마주쳤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시선을 홱 피했다. 샬럿은 마를렌의 뒤로 흠칫흠칫 숨어들었다. 다이무스는 그게 자기를 무서워해서 그러는 게 아님을 알고 있다. 미안함에 다이무스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글림듀에서 지하연합 사이퍼들에게 영문도 모르고 습격당하고 한동안 병원에 입원해있을 때였다. 마를렌과 함께 병문안을 온 샬럿은 별안간 사과를 하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다이무스의 부상에 안 그래도 울먹이던 마를렌도 덩달아 샬럿을 껴안고 전염된 듯 울었다. 도통 아이가 왜 우는지 알 수 없어 언제나 침착한 다이무스도 과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상태를 보러 온 타라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달래준 덕분에 당황스러움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이유인즉슨 샬럿은 그가 습격당한 계기가 된 리버포드 화재 사건과 글림듀 화재 사건이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듣고 자기 잘못이 아닌가 성급하게 결론내린 것이었다.
헬리오스의 문장이 찍힌 천조각이 발견되었다는 유사점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마 그 사건으로 인해 겪었던 당황스러움과 두려움이 제대로 된 사리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들었을 터. 차근차근 그게 네 잘못이 아니라고 설명해주었지만 이해했으면서도 아이는 납득하지는 못했다. 근본적인 죄의식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다이무스가 그것을 어찌해줄 수는 없었다. 다만 불을 끄기 위해 그 현장에 있었던 것뿐인데 그런 식으로 생각해버리는 것은 결국 아이 내면의 문제였다.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면 샬럿은 그나마 울듯이 웃었다. 부러운 듯이 쳐다보면서도 마를렌은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샬럿이 왜 그러는지 아는지 ‘아이 참, 샬럿은 너무 착해서 탈이야.’라며 껴안아주고는 뺨과 뺨을 서로 비볐다.
“여기는 어쩐 일이냐.”
“……르 블랑을 훗날 이을 몸으로서 현장을 봐둘 필요성이 있다고 어머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마를렌은 샬럿에게서 떨어지며 열두 살짜리가 하는 말은 아닐 사무적인 이야기를 했다.
레이라는 정말로 표면상으로는 마를렌에게 그렇게 말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 얼굴은 후계자 수업을 분부하는 엄격한 가문주의 것이 아니었다. 딸의 소중한 연정을 조롱하며 재미있어 죽겠다는 얄미운 엄마의 얼굴에 지나지 않았다. 다이무스가 트리비아를 호위하게 되었다는 소식에 어딘가 안절부절 못하는 딸을 위한, 정말이지 불필요한 배려였다. 다 알고 있다는 듯 능글능글하기까지 한 레이라의 기색에 욱했지만 마를렌은 새침 떼며 의연하게 알았다고 했다. 물론 그게 귀여웠는지 어떤지 레이라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고, 마를렌도 결국 얼굴이 빨개져서는 화를 내며 모녀 싸움을 전개했지만.
그렇다. 마를렌은 다만 다이무스가 보고 싶었던 것뿐이다. 숙녀로서의 몸가짐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심한 그 날 이래로 아무 때나 아저씨를 만나러 갈 수 없게 돼버렸다. 어떤 핑계거리든 좋았던 것이다. 설령 그게 모친에게 농락당한 결과라 해도.
“……기특하구나.”
다이무스가 이번에는 마를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사랑받는 다이무스 본인을 제외하고는 이 촬영장에 있는 모두가 마를렌의 짝사랑을 알고 있는지, 부담스러울 정도로 따뜻한 눈길로 그 광경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마를렌은 자기가 잘 숨긴다고 착각하고 있었고, 다이무스는 왜 스태프들이 그런 시선을 이쪽으로 향하는지 몰랐다.
그런 동상이몽이 공중을 떠돌던 가운데 촬영장 일각에서 환호성이 올랐다. 피팅룸에서 다음 촬영 세팅을 마친 트리비아가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오늘의 하이라이트 의상이었다. 풍성하한 검은 머리채는 일부로 얼굴을 반쯤 가리도록 늘어뜨려 물결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직접 피어난 것처럼 장미 생화가 군데군데 그 위로 꽂혀 있다. 한쪽 어깨로 모아내린 머리카락과 이어지듯 우아한 광택을 자랑하는 장미색 드레스가 그녀의 완벽한 실루엣 위로 피어 있었다. 원래 장미가 모티프가 된 의상인지 고급스런 옷감이 여러 장 겹쳐 독특한 느낌을 내는 비대칭 드레스였다. 모두 같은 색의 옷감이 아니라 음영이나 질감을 계산해서 각기 다른 천들이 절묘하게 중첩되어 드레스가 아닌 정말로 장미를 입은 듯한 느낌을 주었다. 가슴이 과감하게 패어있고 비대칭이라 한쪽 다리는 허벅지로부터 발목까지 노출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순결하게만 보였다. 붉은 장미였지만 정열보다는 순수하다는 찬사를 보내고 싶어지는 기묘한 느낌이었다.
“예쁘다…….”
샬럿이 중얼거리는 말에 역시 넋 놓고 보고 있던 마를렌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흠칫흠칫 고개를 들어 다이무스를 보았다. 표정이야말로 평상시와 변함이 없었지만 저기에 시선이 빼앗겼다는 사실쯤은 ‘여자의 감’으로 알 수 있었다.
“피이― 나도 10년 뒤면…….”
마를렌은 요조숙녀 선언은 어디 갔는지 구두로 툭 하고 바닥을 차며 다이무스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불평했다. 그러면서도 마를렌은 다시 트리비아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자격없는 질투에 씁쓸하면서도 그 쪽으로 계속 눈길이 가는 것은 불가항력이다. 예쁜 것을 좋아하는 아이이기에 더욱 솔직하게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다이무스 아저씨한테는 지금 이게 임무, 임무, 임무…….’라고 마치 주문을 외듯 속으로 반복하며 재개된 촬영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하지만 어느새 그것마저 잊고 아름다운 장미 한 송이가 뿜어내는 향기에 취해 감탄을 흘렸다.
* * *
포만감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자연스레 느슨히 풀어놓는다. 누가 인간의 육체와 정신은 각각이라고 했던가. 배가 부르면 곤두섰던 신경도 절로 유들유들해지기 마련이다. 더욱이 맛있는 것을 먹었다면 정말 단순한 배부름으로 끝나지 않고 흡족함마저 가슴에 부푼다. 대미를 장식해줄 새콤달콤한 레몬 셔벗이나 진한 에스프레소, 호박 몽블랑 같은 것이 있다는 화룡점정이다.
앤지는 점심을 깔끔하게 마무리해주는 진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상쾌한 한숨을 흘렸다. 그러나 혼자만의 만족감만 가지고서는 한 끗 모자랐다. 함께 밥을 먹는 상대가 기뻐하지 않아도 맛있는 건 맛있는 거였지만 거기에 공감이란 조미료가 얹어지면 훨씬 맛있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그 상대가 소중한 사람일수록 더욱 나누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 하지만 루이스는 아직 기분이 가라앉아 있어 보였다. 그는 커피잔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가만히 공중을 오르는 김을 무거운 눈길로 보고 있었다.
앤지는 집무를 하다가 점심시간이 다 된 것을 알고, 연합 본사 안에 설치한 간이식당으로 내려갔다. 두령과 일반 구성원들이 함께 섞여 밥을 먹는 광경은 아마 회사에서는 보기 힘들 테다. 그러나 앤지는 상하관계가 아니라 친구처럼 소속 능력자들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지하연합 소속 능력자들이 존경해마지 않는 흑염 하이드의 딸도, 현 지하연합의 수장도 아닌, 다만 앤지 헌트로서 그들 모두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밥을 먹고 아주 사소한 생활을 공유하는 것은 그 첫걸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과연 처음에는 다들 어려워하고 토니마저도 다소의 권위를 위해 어느 정도 선을 두라고 했지만, 앤지는 젊기 때문인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진심은 통하기 마련, 결코 서면을 통해서는 알 수 없는 연합의 세밀한 애로사정들을 주워 담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특별한 일이 없다면 늘 앤지는 그곳을 즐겨 이용했다.
집무실에서 간이식당으로 가는 길에는 넓은 담화실이 있다. 담화실이라고는 하지만 휴게실에 가까운, 딱히 뭐라고 성격을 정의내리기 어려운 공간이다. 팀 임무에 관해 사이퍼들끼리 협의를 하기도 하고, 독서를 하기도 하고, 소파에 드러누워 낮잠을 자기도 하고, 체스 대국을 벌이거나 트럼프로 노는 등 자유로움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그 때문에 싸움도 잦아 슬슬 용도를 제한해서 공간을 분할하는 게 좋을까 하고 생각하면서도 앤지는 그 발랄함이 싫지 않아서 일단은 현상 유지였다. 잠깐 누가 있나 들여다보고만 갈 셈이었지만 앤지는 다른 그 누구와 착각할 수 없는 인물이 홀로 소파에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루이스였다. 그는 거의 장식용으로밖에 사용되지 않는 책장이 여럿 늘어선 곁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책은 펼쳐들고 있지 않았다. 후드의 그늘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앤지는 잠시간 그 모습을 멀찍이 보고 섰었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을 테지만 그의 주변에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다. 담화실에는 그 말고도 여럿이 있지만 루이스에게 신경을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지하연합의 젊은 영웅인데도 말이다. 그가 동경과 존경, 선망과 신뢰를 남들에게 받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그에게 가까워지려는 사람은 생각보다 없다. 루이스는 먼저 타인에게 다가가는 타입은 아니다. 그렇다고 사람을 잘라내는 것도 아니다. 적대하는 이가 아니라면 붙임성이 조금 부족하고 어색할는지 몰라도 어디까지나 친절하다. 영웅이라는 칭호를 타인이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인지, 본인이 그 이름을 못 견뎌하기 때문인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어둡도록 진지한 그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분위기가 발산되고 있는 것일까. 한 발짝만 다가서보면 정말로 좋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사람인데.
앤지는 담화실로 들어서며 인사를 건네는 다른 능력자들에게 친절히 인사하며 루이스에게 다가갔다. 깊은 생각에 빠져있던 건지 몇 차례에 걸쳐서 부르자 비로소 앤지를 알아차렸다. 점심은 먹었냐는 질문에 생각이 없다고 쓰게 웃으며 말하는 그를 약간 억지로 밖에 끌어냈다. 남들을 걱정하는 일은 잘하면서 자기를 돌보는 일에는 무심한 루이스이다. 언제나 자기의지가 확고하고 신념이 강한 그지만, 소중한 사람들이 조금만 밀어붙이면 넘어 와준다는 것을 이용하여 기어이 예정에 없던 외식에 동참시켰다. 맛있는 걸 먹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 그의 기분도 조금은 풀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지만 불필요한 배려였을까. 루이스는 맛있다고 말하며 밥을 먹고 앤지의 수다에도 성심성의껏 맞장구쳐주었지만 어딘가 모자랐다.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루이스에게는 취미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그래도 예전에는 서점에서 일하기도 했고 또 브랜다가 책을 좋아했기에 종종 독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언젠가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 이유를 물었더니 ‘책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더라.’라고 답했다. 그 대답에 앤지는 루이스의 마음속에 자리한 공허를 엿본 것 같았다. 연합에 투신하기 전의 그의 삶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짐작밖에 할 수 없지만 아마도 차가운 그의 능력은 사람들의 두려움을 샀을 것이다. 그러다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이 모인 연합에 들어오게 되었고 연인도 생겼다. 그러나 전쟁을 거치고 사람을 죽이며 결국에는 첫사랑의 배신과 죽음마저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그 일련의 과정에서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입고 삶의 허무함마저 뼈저리게 느꼈으리.
앤지는 지레짐작으로 루이스를 이해하려드는 자기 자신이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머리와 논리로 다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 사람 마음을 자기 뜻대로 재단하는 것은 폭력일 텐데도.
‘아아, 그래서 루이스는 트리비아를 사랑하는 걸까?’
앤지는 순간 가슴을 찌르르 지나가는 깨달음에 무심코 커피잔을 감싸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두 사람의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본인들에게 대놓고 물어도 그들 스스로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공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루이스와 트리비아가 연인이라는 사실이 퍼졌을 때는 모두가 믿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을 가지고 어울리지 않는다고 쉽게 말들 했다. 하지만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서는 얻을 수 없는 무언가를 트리비아에게서만큼은 루이스는 갈구하고 있을 터였다. 여전히 그게 무엇인지는 앤지는 감히 상상도 안 갔지만 같은 여자로서 트리비아를 볼 때 걱정이 되었다. 그것을 갖고 있다 해도 트리비아는 그것을 루이스에게 줄까. 그는 채워질 수 있을까. 영구동토(永久凍土), 그의 가장 강력한 기술에 붙는 이름만큼이나 그의 안에 뿌리 깊게 자리한 고독을 그녀는 감싸줄 수 있는 걸까.
“루이스, 아직 트리비아랑 화해 안 했어?”
“…! …….”
앤지의 물음에 깜짝 놀란 듯 황급히 시선을 올린 그가 주춤주춤 다시 내리깔았다.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얼굴이다. 루이스를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알 만한 일인데. 그는 숨기고 있는 셈이었을까.
“트리비아는 호위를 받아들였잖아. 뭐 땜에 그래? 설마 언제 사과하나 보자 쓸데없는 고집이라도 피우고 있는 건 아니지?”
“…….”
“……하아―.”
슬프지만 예상은 빗나가지 않은 듯했다. 조금 유치한 자존심 싸움은 접어두고 서로 아껴주기도 바쁠 텐데. 앤지의 깊은 한숨 소리에 루이스도 과연 죄책감이 들긴 했는지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 다문 입을 열었다.
“……계기를.”
“응?”
“화해의 계기를 못 잡겠어.”
“…….”
루이스의 눈동자가 헤매는 것을 보며 앤지는 또 한 번 한숨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브랜다가 첫사랑이었다고 하니 트리비아가 두 번째, 그의 연애 경험은 확실히 부족한 편이기는 하다. 더욱이 브랜다와의 사랑은 아마 현재 트리비아와의 관계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두 사람은 하늘과 땅 차이로 전혀 다르니까. 그러나 앤지도 결코 풍부하다고 할 정도는 아닌데. 이 어이없을 정도로 서투른 남자를 어찌 해야 할까 싶었다. 동시에 아직도 좋아하고 있는 남자의 연애 상담을 해줘야 하는 자기 처지를 조금은 동정했다.
“루이스, 트리비아랑 다이무스 씨가 같이 나가는 거 본 적 있어?”
“……응.”
“어떤 기분이 들었어?”
“…….”
앤지는 희미하지만 루이스의 잘생긴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팔꿈치를 테이블에 대고 깍지 낀 손에 턱을 괴고서 쓴웃음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 기분을 트리비아한테 전하면 돼.”
“……내가 왜…….”
“아아― 그러고 보니 요전에 식당에서 들리는 소리가, 루이스보다는 다이무스 씨가 트리비아한테 더 잘 어울린다는 소문이 있던대…….”
“…….”
아까보다 더 노골적으로 루이스의 얼굴이 비뚤어졌다.
“할 거지, 루이스?”
앤지는 어쩐지 좋아하는 아이를 괴롭히는 즐거운 심정으로 빙글빙글 웃었다.
“……알았어.”
“좋았어.”
앤지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아까보다 한결 편해진 기분으로 커피를 마셨다. 그런 그녀를 보던 루이스는 공연히 부끄러워져 조용히 한 마디 흘렸다.
“앤지……어쩐지 협박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지?”
“어머, 난 친절하게 조언해줬을 참인데? 내 우정 어린 고견을 그렇게 받아들이다니 섭섭한 걸.”
“…….”
“……걱정 마. 트리비아도 지금 너랑 같은 마음일 거야. 화해하고 싶지만 트리비아도 분명 일이 바빠서 타이밍을 잡지 못하는 것뿐이야. 그러니까 루이스 네가 먼저 다가가. 여자는 섬세한 동물이지만 의외로 또 단순한 구석이 있단 말이지? 지금 같은 상황에선 정공법이 제일이야. 둘 다 솔직하지 못해서는 결국 평행선이니까. 모름지기 신사가 먼저 레이디를 에스코트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고마워.”
루이스는 계속 심각하던 얼굴을 그제야 펴더니 수줍게 미소 지으며 예를 표했다. 어딘가 천진난만하게까지 보이는 그 솔직한 표정에 앤지는 두근거림을 느꼈다. 진지한 그는 언제나 무언가에 집중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가 많다. 무표정은 아니지만 웃고 있다는 이미지도 없다. 그런 그가, 그게 아니라도 지하연합 제일의 미남으로 꼽히는 그가 웃으면 어디 흔들리지 않을 여심이 있을까.
“자아― 그럼 내 친구를 위해 용기를 북돋아줄 노래라도 한 곡 할까?”
앤지는 들뜬 기분을 뿌리치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아, 아니, 그러지 않아도…….”
“내가 하고 싶어져서 그래. 음― 뭐가 좋을까……. 그래! 용맹한 해적의 노래가 좋겠어. 칼레의 무법자가 어느 항구에 사는 아리따운 여인에게 고백하는 노래야.”
앤지는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테이블에서 약간 떨어져 섰다. 테라스석 중에서도 가운데 자리쯤이었다. 앤지가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오르내리며 목을 가다듬자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이쪽을 주시해왔다. 앤지는 우렁찬 해적의 기상을 담아서 아름다운 목소리를 뽑아냈다. 이윽고 누군가는 따라 부르거나 박수를 치거나 하면서 흥을 돋웠다. 앤지는 루이스가 멍해져 있다가 쑥스러우면서도 즐거운지 소심하게 박수를 쳐주며 웃는 것을 보았다. 한 사람만을 위한 참이었을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막바지를 향해 노래를 치달으며 앤지는 다음 노래로는 무엇이 좋을지를 생각했다.
* * *
빡빡한 촬영 일정을 소화해내고 TP소로 가기 위해 르 블랑 본사 건물 입구로 나왔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이 된 지금까지의 강행군에 조금씩 지쳐갔다. 오늘 촬영의 마지막 컷 사인이 떨어지고 난 뒤에 탁 긴장의 실이 풀리려고 하는 것을 애써 붙들어 맸다. 쓰러지더라도 그것은 아무도 없는 자기의 방 안이어야 했다. 오늘은 사랑하는 밤에 깨어있을 여유도 없을 것 같았다.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푹신한 침대로 곧장 쓰러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아름다운 다양한 의상을 걸치고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은 아주 오랜만에 트리비아의 심장을 뜨겁게 달궜지만, 그것과 별개로 몸에 피로가 몰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수행원이 차문을 열어주자 뒷좌석으로 곧장 타려 했던 그녀는 문득 속눈썹 위로 갈앉는 따스함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보니 해가 본격적으로 지려는지 익어가고 있다. 낮의 젊은 흰 빛깔은 시간이 지날수록 성숙해져 지금은 엷은 주황빛을 띤다. 트리비아는 손차양을 만들어 손가락 틈새로 조금씩 장년의 햇살을 받아들였다. 한낮이라면 쨍쨍해서 눈을 질끈 감고 말았을 텐데 지금은 가늘게 뜨고 비껴볼 수는 있다. 아침 해가 갓 태어난 신생아라면 낮은 전성기의 청년, 오후의 장년, 저녁은 노년이다. 이 빛은 죽어가는 빛이다. 해는 매일 죽는다. 오늘의 죽음으로 태양이 잠들어가는 시간이다. 찬란하지는 않지만 가장 아름답게 타올라 끝을 맺는다.
트리비아는 수행원에게 ‘오늘은 됐어요.’라는 한 마디만 남기고 세느 강변로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공연히 걷고 싶어졌다. 몸은 더없이 피로감에 절어 있지만 프랑스의 해질녘을 만끽하고 싶었다. 영국에서는, 특히 안개가 더 자주 끼는 포트레너드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이 아닌가. 황혼이 보고 싶다면 트와일라잇에 가면 그만이지만 그곳의 시간은 멈춰있다. 때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보여주지 않는다. 아름다운 세느 강가를 걸으며 무르익는 석양을 때마침 즐길 수 있는 기회는 흔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정면을 외면하고 고개를 모로 돌리고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다. 급할 것이 없다. 아무리 서둘러야 하는 일이 있더라도 다리가 절로 속도를 늦춰야만 할 것 같은 느긋함이 이 풍경 속에 있다. 살랑살랑 기분 좋게 뺨을 스치는 미풍에 수면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다. 점점 농익어가는 석양이 물결 겹겹마다 곱게 색을 입힌다. 낮의 햇살 비치는 강물이 다이아몬드를 뿌려놓은 것 같다면 황혼이 내리쬘 때는 가을날 단풍에 젖은 듯하다. 종류가 아주 다른 아름다움이다. 세상의 이치를 다 꿰뚫고 너그러이 웃는 늙은이의 미소 같다. 곧이라도 사라질 듯 희미하지만 눈을 뗄 수 없다. 죽음의 공포가 코앞에 다가와 있지만, 이만 하면 행복한 삶이었노라고 겸손히 만족하며 물러나는 포용이다.
해질녘의 넉넉한 품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거기에는 낮도 밤도 없다. 빛도 어둠도 아니다. 유(有)도 무(無)도 아니다. 개도 늑대도 아니다. 모든 경계가 모호함이란 테두리 속에 녹아내린다. 질서없는 카오스(Chaos)이기도 하지만, 다름에서 오는 투쟁이 없는 코스모스(Cosmos)이기도 하다. 인간과 인간 아닌 것들이 같은 곳에 함께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대이다. 무언가를 구분하고 잘라내는 것이 무의미하게만 느껴진다. 그런 일몰의 마력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제는 좋든 싫든 익숙해진 호위의 그림자마저 편안하게 느껴진다. 무겁지만 고요한 발걸음과 침착하고 차분한 기색이 싫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의 존재에 오히려 안심을 느끼는 것이 요행도 없는 트리비아의 진심이었다. 어쩌면 다이무스 홀든이라는 남자가 호위를 맡았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은밀한 안도―.
트리비아는 느린 걸음을 멈춰 섰다. 고개뿐만이 아니라 몸 전체를 강 쪽으로 향했다. 이제 곧 해가 진다. 황혼의 절정이다. 꽃은 지기 직전 가장 아름다운 색과 향을 자랑하며 자기가 지닌 마지막 생명력을 태워낸다. 바야흐로 죽음의 벼랑 끝에 걸린 해는 가장 동그랗고 붉게 발광한다. 남아있는 모든 것을 토해 내버리듯 절실하기까지 한 발버둥이다. 눈물이 핑 돌 지경이다. 눈을 감았다. 아름다워서 안타깝다. 죽어가는 것에 대한 가벼운 연민은 아니다. 비길 데 없는 따스함은 눈부시지도 않아 다만 살갗으로 느껴지기만 한다.
“황혼(Twilight)을 좋아하나.”
“…….”
모든 것이 어두운 빛 속에 침잠해가는 가운데 나란히 선 남자가 드물게도 말을 걸어왔다. 놀라지는 않았다. 결코 먼저 말을 거는 일이 없을 것 같은 남자가 그런 게 의외로운데도. 노곤하게 저물녘에 같이 잠겨들었기 때문일까. 황혼의 취기가 트리비아에게도 다이무스에게도 똑같이 영향을 미친 게 틀림없었다. 저녁에는 이성이 활동하지 않는다. 더욱이 땅거미 지는 현장 한 가운데 서있다면 사람은 더욱 감성에 취한다. 강하지 않은 충동이 슬그머니 각자의 가슴 속에 자리 잡는다.
“heure entre chien et loup.”
낯선 언어, 그렇지만 너무나도 유명한 말이라서 모를 리 없는 표현이었다. 유창하게, 마치 노래하듯이 우아하게 트리비아의 입술에서 이곳 프랑스의 말이 흘러나왔다.
“이 시간은 밤으로 가는 길목이니까.”
눈을 떴다. 황혼녘은 밤의 직전이다. 밤을 사랑하는 트리비아에게 그 때로 나아가는 이 시간마저 사랑스럽지 않을 리 없다. 밤의 수단이라서만은 아니다. 황혼은 그것대로 아름답다. 또한 빛과 어둠 중 어느 것이 아름답냐고 묻는다면 트리비아도 냉정히 빛이라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화려한 반짝임을 그녀는 좋아할 수 없다. 눈부심은 밤의 천적이므로 본능적인 회피의식일는지 모른다. 하여 캄캄한 빛, 곧 밝은 어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쇠잔한 아름다움이 가져다주는 덧없는 슬픔에 다만 취한다. 어둠에 한없이 가까운, 그렇지만 완전한 빛도 될 수 없는 숙명을 걸머쥐고 있는 자기모순이 어쩔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사실―.”
갑작스레 벅차오른 가슴의 정체 모를 아픔을 견디지 못하듯 트리비아는 툭 말을 뱉어냈다. 입밖으로 낼 생각은 없었는데. 자그마한 후회가 밀려온다. 거짓은 아니지만 전할 필요도 없는 말일 텐데. 서두만 던져두고 말을 잇지 않는 것은 망설임이 아니다. 하고 싶은 게 아니므로. 이대로 흘려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이 되돌릴 수 있을까.
“……무언가.”
남자가 오늘만큼은 트리비아가 스스로 말을 꺼낼 때까지 끈덕지게 기다리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겨버리지 않을 것을, 그녀는 어쩌면 말을 꺼낸 순간부터 알았던 것 같다. 다이무스와는 대화를 나누어본 적도 없다. 지하연합과 헬리오사라는 소속 세력의 차이, 보호받아야 하는 이와 호위해야 하는 이의 차이, 감시당해야 하는 처지와 감시해야 하는 처지, 근본적으로는 여자와 남자의 차이 등, 맞물리지 못할 요소로 가득하다. 그렇지만 함께 있는 시간만은 착실하게 쌓여갔다. 적지 않은 시간을 공유한 상대에 대해 생각한다. 그 때문일 것이다. 황혼을 핑계로 분위기에 말리듯 다만 타인에 불과한 남자에게 별 것 아닌 진심을 내보여도 괜찮다고 생각해버린 것은.
“……당신한테는 감사해야 할지도 몰라.”
“……?”
마찬가지로 고집스레 정면만 보고 있던 다이무스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게 느껴졌다. 바람이 순간 두 사람 사이로 일렁였다. 살풋이 나부끼는 풍성한 검은 머리칼을 쓸며 트리비아는 묵혀둔 말을 꺼냈다.
“그 노인을 벤 것은 당신이니까.”
꾸밈없이 미소 지으며 트리비아는 다이무스와 마주보았다. 엄격하리 만큼 무표정한 남자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다만 덤덤하리라 생각했던 다이무스가 도리어 눈에 띄는 반응을 돌려주자 괜스레 무안해졌다. 자기답지 않은 부끄러움마저 심장을 간질인다.
트리비아는 스르르 미소를 거두고는 다시 세느 강 물결을 응시했다. 아직 옆에서 시선은 떠나지 않는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낮처럼 잔인하게 파고들지는 않더라도 황혼빛은 틈새로 스며든다. 그러나 이제는 그마저도 없다. 그림자가 끝까지 저항하듯 타오르던 빛을 마침내 덮었다. 어슴푸레한 어둠이 안개처럼 지상 위로 깔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시선이 떠났다. 트리비아는 점점 짙어져가는 어둠에 기분이 고조되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강변로를 벗어나 시가지로 돌아갔다. 리옹 역은 벌써 저만치였다.
* * *
루이스는 지하연합 본부 건물 그늘에서 초조하게 서성대고 있었다.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루이스가 거기 있는지 어떤지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게 아니라도 사람들이 서서히 잠들기 시작하는 이 시간대 연합에 드나드는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루이스는 서늘한 벽에 기대어 후드 아래로 주변을 신경 쓰며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바깥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을 결국 자기 마음의 문제였다. 새삼 자기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을 하려는지 자각이 되었던 것이다. 앤지의 진심 어린 조언과 격려를 무시할 수 없었다는 핑계를 대더라도 망설여지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호위를 받아들이라고 종용한 것은 루이스 자신이었고, 그게 결과적으로도 트리비아의 안전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이해하고 있을 참이었는데 막상 연인이 다른 남자와 동행하는 모습을 보니 더할 나위 없이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단순한 호위다. 그녀가 단독 행동을 좋아하여 호위 같은 것을 성가셔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알고 있는데, 알고 있는데…….’라고 속으로 거듭 되뇌며 말끝을 흐린 것이 몇 번이던가.
트리비아와 연인이 되고 난 뒤부터 한 번도 마음속에서 가시지 않는 불안감이 있다. 그녀와 냉전을 벌이고 있는 현재 그 불안은 더욱 증폭되기만 했다. 트리비아에게 특별 취급받고 있다는 자부심은 있다. 호불호가 눈에 뻔히 보이는 그녀의 얼굴과 몸짓이 모든 것을 말해주니까. 하지만 그래도 늘 무언가 모자랐다. 트리비아는 늘 어디론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 혼자만이 있을 수 있는 비현실적인 세계든, 그녀 자신의 그림자 속이든,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사람의 곁이든―.
루이스는 주먹을 꾹 쥐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못된 버릇은 잊을 만하면 다시 고개를 쳐든다. 생각이 많다. 하지 않아도 될 걱정과 고민까지 다 끌어안으려고 한다. 지금의 일만으로도 벅찬데 과거에 있었던 일을 자학하듯 되새김질하는데다가,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지레짐작하며 괴로워한다. 트리비아도 언젠가 말했었다. 왜 자기를 못살게 굴어 안달이냐고. 너무나도 적중이라서 그저 쓰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인간이 고통스러운 존재라고 한다면 그건 역시 생각하는 동물이기에 그럴 것이다. 고뇌가 없다면 쓰라릴 일도 없을 텐데. 그래서 루이스는 텅 비는 시간이 두려웠다. 임무가 빽빽하게 차있는 편이 좋았다. 생각할 겨를이 없어진다. 트리비아와 싸우고 만나지 않는 지난 시간은 더욱 공허하기만 했다. 앞뒤 재는 일은 지금으로서는 필요하지 않다. 루이스는 트리비아가 미치도록 그리울 따름이었다.
다만 정적만이 감돌던 어둠 중에 이상하리만치 선명한 기운이 두 개 느껴졌다. 하나는 연인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의 지금 그녀의 옆을 지키고 있는 남자의 것이었다. 연합 본사 입구 등불이 어슴푸레하게 비추는 최대한의 경계선 안으로 그들이 모습을 보였을 때 루이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다. 트리비아는 여전히 앞장서 걷고 배후를 지키듯 다이무스가 따르는 그 정위치는 그대로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타인이 봤다면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릴 정도로 미묘하지만, 트리비아의 누구보다 가까운 위치를 점하고 있는 루이스이기에 알 수 있었다. 예전만큼 딱딱하지 않은 기류가 저 사이에 흐르고 있다. 그 사실을 느낀 순간 루이스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본사 그늘에 숨겼던 몸을 드러냈다.
“루이스…….”
트리비아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이 아연하게 연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루이스는 괜히 그게 섭섭하게 느껴지는 기분을 뒤로 한 채 트리비아에게로 성큼 다가갔다. 손을 뻗어 트리비아의 손목을 조금 세게 잡아채 그녀의 몸을 자기 옆으로 끌어다 놓았다. 갑작스럽기만 한 루이스의 행동에 트리비아는 전에 없이 당황스러움을 얼굴에 누설했다. 다이무스마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잡힌 손목을 뿌리치지는 않고 그녀는 다이무스를 쳐다보는 루이스의 그늘진 옆모습을 이상한 듯 지켜보았다. 루이스는 그녀의 떠나지 않는 시선에 이상스런 만족감을 느끼며 꾸벅 다이무스에게 목례했다.
“트리비아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더없이 정중하고 바른 어조로 루이스는 다이무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그러나 후드 그늘이 깔려있어서 그런지 그 눈빛은 어둡고도 꽤 날카로웠다. 적의는 아닐지 모르나 적어도 방금 전 감사 인사에 어울릴 법한 것은 아니었다. 다이무스는 그 눈과 물러서지 않고 마주보며 루이스를 관찰했다.
루이스, 성은 불명. 27세. 결정사. 지하 연합의 영웅이라 불리는 사나이. 영웅이라는 그 거창한 칭호 아래에는, 다름 아닌 다이무스의 첫째 동생 벨저가 패배한 역사가 깔려 있었다. 2차 능력자 전쟁 당시 플랜 디코이에 의해 여러 명의 앤지 헌트가 각지에 나뉘어 도망다니고 있을 때, 재스퍼의 정보에 따라 진짜 앤지 헌트에게로 간 것이 벨저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무명의,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어느 젊은 능력자에게 벨저가 당했다고 들었을 때는 선뜻 믿기 힘들었다.
홀든가에서도 각별히 천재형에 속하는 벨저였다. 비길 데 없는 녀석의 오만함은 귀족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실력에 대한 콧대 높음이었다. 짜달리 노력하지 않아도 단련을 밥 먹듯이 빼먹어도 동생을 이길 수 있는 이는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풍족한 재능으로 흘러넘쳤다. 그런 녀석이 이름도 모르는 결정사에게 무릎 꿇어야 했으나 자존심에 산산이 금이 갈 만도 했다. 그 날 이후 반쯤 분노로 실성한 동생은 가문에 의해 오스트리아 어딘가에 있는 별택에 유폐되다시피 한 상태였다. 당주인 아버지 슈트라세 홀든의 명령에 따라 누구도 집안에서 그 이름을 공론화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굴욕을 이기지 못하고 좌절해버린 이에게 동정을 베풀 만큼 다이무스는 호인이 아니다. 그러나 가족이기에, 그에게 있어 소중한 아우라는 사실은 지울 수 없기에 다만 씁쓸했다.
이 남자가 아마 없었더라면 이 사이퍼계의 판도는 상당히 지금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유일한 흑염 하이드의 핏줄이었던 앤지 헌트는 의심할 여지없이 쾌검사들의 손에 죽었을 것이며, 2차 능력자 전쟁은 회사의 승리로 끝맺었을 것이다. 설령 가문이 파견한 쾌검사들을 물리쳤다 해도 앤트워프에서 맞닥뜨린 타라의 손에 힘이 다한 루이스는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터. 거기서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 트리비아 카리나였다. 그녀는 그 그림자를 열어 앤지 헌트를 트와일라잇으로 피신시키고 스위스 아이거 산으로 이 남자를 구해내 날아갔다고 한다. 루이스가 지하연합의 영웅일 터이나, 결국 그 영웅마저도 구해낸 것은 바로 저 여인이 아닌가.
“임무일 뿐이다.”
다이무스는 평소보다 더 딱딱한 어조로 대답하고는 홱 뒤로 돌아 걸어왔던 어둠을 되돌아갔다.
트리비아가 다이무스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고 있었다. 밤눈이 통상 인간보다 훨씬 좋은 연인임을 안다. 이젠 어둠에 묻혀 자기에게는 보이지 않는 남자의 모습이 그녀에게는 아직 보이는 것일까. 루이스는 트리비아의 뒤로 다가가 한쪽 팔로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휘어 감고 한쪽 손으로는 그녀의 눈가를 슬며시 덮었다. 너무나도 유치하고 어리석은 행동임을 안다. 그래도 그녀의 눈이 지금 딴 곳에 향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귀엽네, 내 남자.”
트리비아가 오른손을 뒤로 올려 루이스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루이스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부끄러우면서도 한없이 텅 비었던 마음이 차오르는 이 기분은 무엇인지. 실제로 트리비아는 자기보다 연상이지만 그래도 어린 아이 취급당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다. ‘귀엽다’라는 게 그녀의 입장에서는 찬사일 테지만, 다 큰 남자에게 어울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발끈하면서도 ‘내 남자’라는 말에 가슴이 떨린다. 그녀의 목소리가 자아내는 그 울림에 전율마저 인다. 치기 어린 질투심을 감 좋은 그녀는 알아차린 지 오래일 것이다. 그것을 기쁘다고 생각해주는지 아름다운 입술이 웃음을 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앤지에게 고맙다는 말을 나중에 더 해야겠다.
루이스는 트리비아의 어깨 위에 턱을 얹고 있다가, 고개를 틀어 코로 그녀의 목을 휘감고 있는 풍성한 머리채를 헤쳤다. 후욱 하고 그대로 숨을 들이마시자 트리비아의 향수 냄새와 본연의 체취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형용할 수 없이 좋은 향기가 스며들었다. 정신이 아찔하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갈증이 뒤끓는다. 입술 새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올 것만 같다. 오랜만에 몸에 와 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아까 전부터 안 그래도 없던 여유는 자꾸만 사라져간다. 그녀에게 굶었다.
루이스는 트리비아의 몸을 홱 반전시켜 마주보았다. 트리비아의 이런 얼굴을 알고 있다. 언제나 쌀쌀맞기 그지없는 연인이지만 이렇게, 가끔은 열에 들뜬 눈을 한다. 만년설이 녹아내려 툭 하고 맑디맑은 물방울을 떨어뜨리는 기적 같은 순간은 더없이 귀중하고 아름답다. 이 얼굴을 독점한다는 희열을 치졸하다고 누군가 욕해도 좋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루이스, 자신이 트리비아 카리나의 연인인 것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을 감고 서로 얼굴을 가까이 한다. 루이스는 트리비아의 숨결을 조심스럽게 베어 먹었다. 짙어진 그림자가 그들의 모습을 감추었다.
― 09에 계속.
*
-‘메타(meta)능력자’라는 건 곧 능력자에 대한 능력자. 능력자를 너머의 능력자. 곧 같은 능력자를 상대로 능력을 발휘하는 능력자라고 보시면 됩니다.
- 코스모스(Cosmos)는 정연한 질서의 세계를 나타내는 그리스어입니다. 그 반대말이 이 세계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혼돈을 나타내는 카오스(Chaos)고요.
- 아! 쫌! 이탤릭체 좀 먹히게 해줘 봐요!
- 애들은 솔직합니다. 그러하다.
- 샬럿은 어린데도 눈치가 필요 이상으로 빠른 아이일 것 같습니다. 자기가 잘못한 게 아니더라도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라고 왠지 버릇처럼 반복하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을 것 같은 이미지입니다. 인게임에서 패배하면 왜 울먹이면서 “저 때문에 진 것 같아요.”라고 하지 않습니까. 불우한 성장 과정이 그렇게 만든 거겠죠.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 드레스 모양은 그냥 제 상상입니다. 저런 걸 실제로 만들 수 있을지 어떨지는 차치하고, 걍 틀비랑 장미를 섞고 싶었습니다. 틀비는 뭐든 잘 소화하겠지만 역시 컬러로는 적과 흑이 가장 잘 어울리는 듯합니다.
- 앤지는 어디까지나 루이스의 아군이지만, 여자로서는 트리비아의 편이죠. 참으로 복잡한 심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힘내요, 스노우 퀸.
- 집요하기까지 한 황혼 묘사는 구성을 위한 기여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취향이기도 합니다.
- 루이스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연하입니다. 정신적으로 트리비아를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하죠. (여섯 살 차의 넘사벽) 그런 점이 아니라도 루이스 쪽이 더 트리비아에게 집착하는 듯한 느낌이 강합니다. 랄까, 트리비아도 타라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니 공평하게 루이스도 다이무스 때문에 한 번 심사가 뒤틀려봐라 라는 저의 고약한 심보가 없다고는 말할 수 음슴.
- 새삼 쓰면서 느꼈지만 진짜 트리비아랑 루이스는 참 잘났군요. 너무 대단해서 재수가 없으려고 합니다. 영웅(hero)과 그 영웅을 구해낸 숨겨진 영웅(heroine). 에라이, 존잘들끼리 다 해먹어라.
- 오탈자 및 이상한 문맥 지적, 다양한 질문 환영합니다.
- 깨알 같은 전작 홍보.
「은폐」(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3763240)
「유도」(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4004813)
「호접지몽(胡蝶之夢)」(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6171648)
- 이번 화의 소재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클립스는 현재 업데이트 중이라고 하니, 그 부분의 소재는 개인적으로 따로 편집해둔 텍스트본을 싣습니다.)
#Eclipse: Vol. 4.5 능력 증폭자 / 정보 제공자: 랠프 슈타인만(전 ESPER 생체 실험 연구원, 비능력자)
1. 한계
능력에는 한계가 존재합니다. 대부분의 능력자들은 어느 순간 자신의 힘에 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한계를 넘어 더 강해지기를 바라게 되죠. 욕망에는 끝이 없고, 그것을 쫓다 보면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됩니다. 저는 ESPER의 비밀 부서 Salvation에서 근무했습니다. 우리 팀은 한계에 부딪힌 능력자들에게 구원의 손길이 되기 위해선 한시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2. 능력 증폭자
우리는 다양한 생체 실험을 했고, 여러 해에 걸쳐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습니다. 손끝에 결과가 닿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도 꽤 여러 번이었지만, 완벽한 성과가 나오지 않았어요. 시간이 지나자 저는 깊은 회의를 느꼈습니다. 능력자들의 힘의 한계를 제어한다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한계라는 것은 또 생길 테고, 끝나지 않는 능력자들의 전쟁에 불을 붙이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요. 같은 부서의 연구원들도 저와 같은 생각을 공유하기 시작했을 무렵 연구소장은 좋지 않은 낌새를 눈치챘는지 다른 해결책을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능력증폭자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헌터를 고용해 은밀하게 작업을 시작했고, 유일한 능력증폭자인 “헬레나”를 찾아냈습니다.
능력증폭자들은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자각하기 힘들기 때문에 능력을 발현하는 것도 발현된 능력을 더 강하게 만드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녀는 특정한 일을 계기로 능력을 알게 된 것 같았습니다. 그녀의 표정으로 보아 그 계기는 그리 유쾌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요. 우리는 그녀의 유전자 속에서 증폭의 역할을 하는 DNA를 추출해내는 데 성공했고, 그것을 약으로 개발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녀는 실험대 위에서 의연했고 무척 들떠 보였습니다. 그녀를 보면서 저 또한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실험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연구소는 뚜렷한 결과를 내지 못하는 우리를 계속 압박했고 임상실험은 매번 실패했습니다. 약의 부작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결국 연구소측은 부서를 없애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 부서에 있던 직원들도 다른 팀에 흡수퇴거나 일부는 해고를 당했습니다. 팀이 해체되는 날 소장의 방에서 헬레나와 소장이 다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연구소장이 그녀와 했던 약속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에게 실험에 성공하지 못했으니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울부짖으며 방을 뛰쳐나왔습니다. 문앞에 서있던 저와 눈이 잠깐 마주쳤지만 저는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기억하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3. 등장
그 후로 몇 년 동안 그녀의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아주 우연히 행방을 추측할 수 있는 사건과 마주하게 됩니다. 새로운 능력 증폭자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었죠. 앰피…. 그 애는 그녀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복제 능력자가 그녀의 능력을 복제해 그 아이에게 주입시켰는지 애초에 복제능력을 가진 새로운 아이가 탄생하게 된 건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분명한 건 그녀가 ESPER를 떠나 안타리우스에 들어갔고 거기서 엄청난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죠. 표현할 수 없는 불안감이 저를 감싸고 그녀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제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찾아 나섰고, 헬레나의 아들 빅터 하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Eclipse: Vol. 4.5 바람을 움직이는 소년(삭풍의 빅터) / 작성자: ESPER 선임 연구원 스칼렛
2. 관련 사건 파일
NO. 0260104 베스터 공장 폭발 사고
공장 직원 전원이 사망해 최악의 사상자 수를 낸 폭발사고. 공장 시설의 전소로 화재 원인을 파악하지 못했다. 정부에서도 조사단을 늦게 파견해 사실을 은폐, 축소시켰다는 비난을 받았다. 시간이 지나자 정부와 경찰 당국은 단순 조작 실수로 가스 배관이 파괴되면서 가스가 주변의 불씨에 점화 되어 대폭발을 일으키는 참사로 이어졌다고 공표하고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 희생자들의 가족들과 주변인들은 사건 직후 시신과 유품을 발견하기 위해 사건을 현장을 찾았으나 제대로 된 단 한 구의 시신도, 단 한 점의 유물도 발견하지 못했다. 너무나 완벽하게 감춰져 있는 사건이다.
(검색어: 루이트리, 다이무스, 앤지 헌트, 헬레나 하스, 안타리우스, 옥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