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스러운 물의 소녀들에게] - 물 안개, 무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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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7 09:4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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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의 하트하트. 진짜.)
- 여러분. 이 소설은 겁나 깁니다. 그래도 읽어주면 연승하실거예요.
: 진짜... 겁나 길어요... 공미포 16000자예요.
- 1934년을 기준으로 작성했습니다! :)
- 설정 구멍이요? 네오플도 설정구멍내는데 제 구멍 정돈 봐주세요!!
- 마를렌이 샬럿을 애칭으로 부르는데, 날조입니다 :D 이유는 후반부에 나와요!!!
- 잘 부탁 드립니다!!!! :D
영국의 날씨는 언제나 지독했다. 그저 비가 많이 오고 안개가 많이 낀다는 말로 단순히 정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불편하다고만 느끼는 건 일부 특정 계층일 뿐. 낮으면 낮은 위치에 있을수록 여름에도 느껴지는 싸늘함을 이겨낼 수 없었다.
아이는 낡디 낡은 모포를 마저 끌어올렸다. 같은 처지인 아이들의 그것처럼 낡아 빠진 모포는 그래도 늘 깨끗하게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다. 아이의 모포는 군데군데 묻어 있는 흙을 제외하곤 제법 깨끗했다.
엉망으로 엉켜있는 푸른 머리칼을 행여 들킬세라 얻은 후드로 꽁꽁 싸맨 아이는 옹기종기 모여 앉은 다른 아이들을 가만 바라보며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저 무리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혹여 이 끝자락 자리마저 빼앗겨 쫓겨날까 두려워 몸을 잔뜩 움츠렸다. 이 곳에서 마저 쫓겨난다면 몸을 의탁할 장소를 찾는 것조차 힘들었다.
비야, 제발 멈춰.
우릴 더 춥게 하지 마.
우리를 더 괴롭히지 마.
나를… 더 괴롭게 하지 마.
자꾸만 떨어지는 빗방울은 눈앞에서 흐르는 강을 잔뜩 부풀렸다. 가뭄이 잘 들지 않는 땅이기에 이 비는 꼭 재앙을 부르는 것 같았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게 너무 싫었다. 자꾸만 떨어지는 빗방울을 멈출 힘이 없어, 자꾸만 눈물이 떨어졌다.
***
"로테! 일어나! 잠이 너무 길어!"
묘하게 프랑스 억양이 섞인 영어가 들렸다. 이 목소리는 아이가 잘 아는 사람의 것이다. 아직 잠에 취한 몸을 가누지 못한 아이를 거칠게 이리저리 흔든 그녀는 빛이 들지 않도록 쳐 둔 커튼을 크게 걷어 내곤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분명 30분 전까진 같은 침대에서 잠들었던 사람인데 언제 이렇게 일어나서 준비를 마찬가지. 한참 달게 자고 있던 샬럿은 반쯤 몸을 일으키며 눈을 비볐다. 흐린 시선 사이로 결 좋은 검은 머리칼이 양쪽으로 높게 묶여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보였다. 장난기 가득한 몸짓이긴 했지만 그 손길도, 저를 보는 눈빛에도 다정함이 담뿍 배어 있었다.
"으응…. 아직 8시인데……."
"안 돼! 오늘은 나랑 약속한 게 있잖아?"
해맑게 웃으며 눌린 머리를 손으로 빗어 넘겨준다. 잔뜩 엉켜서 살릴 수도 없을 것 같던 머리칼은 이제 없었다. 맑고 푸른 빛이 예쁜 머리칼은 마를렌의 손에 얽히는 게 없이 주르륵 아래로 쓸어내려간다. 이 머리카락은 그녀가 저를 돌봐준 애정이나 마찬가지라서 다른 사람들이 쓰다듬는 것은 아직 거부감이 들지만 마를렌이라면 쓰다듬는 건 물론, 몇 십 가닥을 뽑아도 좋았다. 샬럿은 베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마저 일으켰다.
"같이 산책 가는 거지?"
샬럿이 피크 디스트릭에 호수를 만든 지도 시일이 지났다. 만들어 두고 보러가지 못 했다. 도시에 조성된 산책길이 호수를 품어 더 예뻐졌다는 소리를 들어서 더욱 보고 싶어 하는 샬럿을 위해 마를렌이 며칠이나 명왕을 졸:라 얻어 낸 기회였다. 어른들의 도움 없이. 둘이서 걸어서 최근 유행하기 시작한 대중교통인 버스나 전철도 타보고 도시락을 만들어서 같이 보러가자 약속했다. 모처럼 맞은 맑은 주말이다. 샬럿이 호수를 만들어 낸 이후 또 사고를 칠 지 모른다는 이유로 막아 가보:지 못 했던 곳이었지만 갈 수 있게 된 날이 맑아 다행이었다.
"응! 일단 회사에 들리려고 했으니까, 같이 들리자. 앨리셔 언니한테 머리 해달라고 하자~"
앨리셔는 흔쾌히 해 줄 테지만 굳이 귀찮게 하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머리 묶기 쯤은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 그럼에도 굳이 들리자는 건 아마 회사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위치를 알려주자는 이유가 첫 번째고 이걸 핑계 삼아 오랜만에 휴일을 얻은, 날이 서지 않은 회사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게 두 번째다. 샬럿은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에서 완전히 내려섰다. 갈 때마다 간식 따위를 챙겨주는 앨리셔나 루시는 샬럿이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샬럿은 늘 입는 외출복을 찾아 집어 들었다. 가벼운 원피스에 노란 우비. 비가 자주 오는데다 간혹 능력이 발현되어 비가 내릴 때 유용한 의상이었다. 잠옷을 벗기 전 옷들을 침대 위에 올려두려는데 마를렌이 부드럽게 그 손을 저지한다. 눈을 반짝이는 게 뭔가 수상해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후후후, 짧은 호흡으로 웃음을 뱉은 마를렌이 가져온 수트케이스 안에서 짠! 하고 옷 한 벌을 꺼내들었다.
"어때? 예뻐? 요즘 유행하는 디자인의 원피스야. 르 블랑 신작이래서 가져와봤어!"
흰 세로 스프라이프 무늬에 가슴에는 프릴이 잔뜩 달리고 하얗고 둥근 플랫 카라 앞에 얇은 노란 리본이 메어진 물색의 원피스였다. 덤으로 추워질 때 입는 물색 케이프가 같은 세트인 듯 다른 손에 들려있다. 어른들 건 투피스로 나뉘어 치마가 그리스풍으로 나눠지는 거야. 옷에 대한 설명을 죽 이어가는 마를렌 역시 같은 디자인의 리본색만 하얀색인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평소엔 교복과 비슷한 옷을 입고 있던 앨리셔도 중요한 자리에선 이것보다 조금 단정한 양복을 입고 있던 기억이 난다. 샬럿은 옷을 받아 들곤 살짝 비죽이며 말했다.
"지난 주에도 옷을 가져왔잖아."
지난 주엔 하얀색 케이프 카라가 인상적인 옷을 대뜸 들고 와 선물이라고 말하며 안긴 그녀였다. 키가 그렇게 급하게 자라는 게 아니라서 넉넉하게 품에 맞춘 우비만으로도 충분하다 하는데도 마를렌은 그게 아니라며 허리에 손을 짚었다.
"지난 주 건 봄 의상이었잖아? 이제부터 여름이니까, 여름 옷 입어야지."
르 블랑가의 다음 주인이라는 건 이런 거구나…. 아무리 르 블랑 가문의 가게라곤 하지만 자꾸 가져오면 다들 싫어하니 그러지 말라고, 적어도 가져온다면 마를렌의 것만 가져와 달라고 벌써 한참이나 이어져 온 실랑이 했지만 씨알도 머기지 않는다. 결국 샬럿은 얌전히 수긍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어딘지 신이 난 마를렌이 도와주겠다며 약하게 들어간 코르셋의 리본을 등 뒤에서 쭉 당겼다.
사실 이런 사소한 것도 그녀와 샬럿의 차이점 중 하나였다. 샬럿은 마를렌을 만나기 전엔 리본으로 된 약한 코르셋이 달린 옷도 입어본 적 없었는데 마를렌은 늘 이렇게 타인이 도와주저야 하는 옷이 더 예쁘다며 좋아했다.
나는 로테를 돌보는 게 제일 좋아. 해맑게 웃으며 옷을 정리해준 마를렌은 등에 달린 노란 리본을 예쁘게 정리하곤 샬럿의 손을 붙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그대로 전해져왔다. 샬럿은 그 손을 마주 잡으며 웃어 보였다.
통통 튀는 두 아이의 발걸음은 방 밖으로, 그리고 집 밖으로 이어졌다.
***
헬리오스 사는 코어 레너드 번화가와 가까운 곳인 만큼 아이들이 단 둘이서만 다니기에 충분히 치안이 좋았다. 덕분에 걱정없이 따사로운 햇살을 맞은 채 살살 걸으며 도착한 두 사람은 로비에서 저희를 알아보는 사원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냉큼 2층으로 올라섰다.
공식적으로 능력자들의 집합소라고는 하지만 이 곳 역시 여느 회사와 다르지 않았기에 비 능력자와 능력자들이 이런저런 일을 하는 곳이다. 층수와 능력치, 직위에 따라 사람들이 갈 수 있는 장소가 따로 있었고 주요 능력자로서 이름은 올리고 있지만 아직 아이인 마를렌과 샬럿이 갈 수 있는 곳은 한정되어 있다. 그 몇 안 되는 장소 중 2층 휴게실이 두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운이 좋으면 앨리셔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볼 수 있다. 닫혀있는 흰색 나무문을 기운찬 손길로 열자 그 안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타라와 자네트, 그리고 앨리셔와 눈이 마주친다. 마를렌은 함박 웃으며 냉큼 앨리셔에게 가 안겼다.
"언니이!"
"어머, 두 사람 다 어쩐 일이야?"
"앨리셔만 보이는 거야? 나는?"
"타라 언니도 반가워요!"
잠시 웃음소리가 휴게실을 채웠다. 문 앞에서 마를렌의 손을 놓은 샬럿은 얌전히 자네트 옆에 앉았다. 딱히 살갑게 다가가기도 애매하고 이들도 그런 저의 성격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니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그게 정답이었는지 자네트가 웃으며 과자 하나를 건네주었다. 직접 구웠는 지 소박하고 동글동글한 모양의 초콜릿 쿠키였다. 샬럿은 고개를 끄덕이고 입에 과자를 한입 물었다. 달콤한 맛이 가득 퍼져서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말 무슨 일 있던 거니?"
"으으응! 그냥 다들 보고 싶어서 왔어요! 언니! 저번에 로테한테 해줬던 그 머리, 또 해줘. 응?"
며칠 전 새로 옷을 샀다며 왔을 때 앨리셔가 묶어줬던 머리 모양을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머리를 반 잡아 나머지를 아래로 늘어트리고 그 머리 가운데 커다란 리본을 다는 방식이었다. 마를렌은 미리 준비해 온 빗과 머리핀을 그녀에게 건넸고 앨리셔는 웃으며 샬럿에게 다가가 머리카락을 빗으로 정리했다.
"어디 놀러갈 생각이구나?"
"로테랑 같이 산책 갈 거예요! 가서 샌드위치도 먹고 물놀이도 하고?"
"아 맞아, 디스트릭에 간다고 했지? 그래서, 같이 먹을 샌드위치는 챙겼고?"
"응. 베티가 챙겨줬어요!"
타라의 물음에 활짝 웃으며 대답한다. 능력자 3차 전쟁이니 안타리우스와의 전쟁이니 이런 건 어른들의 문제일 뿐, 아이들이 사소한 일상을 즐기는 건 그들도 바라는 일이다. 타라는 모처럼 가져왔던 과자들을 깨끗한 종이에 싸서 마를렌에게 건넸다. 휴일에도 일해야 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직접 만들어 온 간식이었지만 마를렌과 샬럿에게 주었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어. 하긴 뭐라 하더라도 그걸 찍어 누를 수 있는 위치다. 타라는 조금 아쉬운 눈초리를 할 사람들을 잠시 떠올렸다가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웠다.
"몸조심하고. 혹시나 무슨 문제가 있다면 무조건 가까운 전화국에 들러서 연락 주고."
"나도 로테도 능력자라고요? 제 몸 정돈 지킬 수 있어요. 훈련을 얼마나 하는 데요!"
엣헴! 뽐내듯 말한 마를렌은 말끔하게 정리된 샬럿의 머리를 보며 활짝 웃었다. 물빛 머리칼이랑 루비처럼 예쁜 붉은 눈에 딱 어울리는 노란색 리본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마를렌 역시 오늘은 늘 하던 머리끈 대신 샬럿과 똑같은 디자인의 리본을 양쪽으로 나눠 끼웠다. 머리색이 다른 것만 빼면 누가 봐도 저와 샬럿은 자매처럼 보이겠지. 손잡고 예쁜 공원을 거닐기 딱 좋은 날씨였다. 마를렌은 집에서부터 들고 나온 바구니에 타라가 준 과자를 집어넣고 어색한 지 계속 어깨에 닿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샬럿을 손을 잡았다.
"알고 있지만 요즘 많이 위험하니까 그렇지. 잘 다녀와. 다녀와서도 집 가기 전에 들러줘. 나는 오늘 하루 종일 회사에 있을 거니까."
"응!"
"네!"
잔뜩 기분이 좋아진 두 사람이 사이좋게 대답하곤 휴게실 밖으로 나갔다. 그 뒷 모습에 손을 흔들어 주던 앨리셔는 마를렌이 떠넘긴 빗을 휴게실 한쪽에 잘 정리해두고는 다시 앉았다. 과자는 사라졌지만 아직 따뜻한 차는 남았다. 다시 티타임을 즐기기 위해 찻잔을 집어 올리는 데 샬럿과 마를렌이 빠져나가며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곤 곧바로 루시와 에바가 안쪽으로 들어온다. 앨리셔는 차를 더 준비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어디 놀러가는 모양입니다. 밝아보이네요."
"그러게. 나도 같이 가고 싶다~"
"루시양은 오늘 정기보고하는 날이잖아요?"
앨리셔가 찻잔을 건네며 웃자 루시는 한숨을 푹 내쉬며 늘 들고 다니는 부채로 살짝 입을 가렸다.
"이건 좀 봐줘야 한다고 봐. 난 학교생활도 벅찬걸. 그나저나 어디로 가는데?"
"디스트릭. 샬럿이 만든 호수를 보러간대."
호수라…. 좋네. 차를 한 모금 호록 넘기고 짧게 숨을 뱉었다. 오랜만에 날도 맑고 큰 창으로 햇살도 들어오고 차향은 따뜻하다. 요즘 피곤했는데 피로가 풀어지는 느낌이다. 루시는 소리 나지 않게 찻잔을 내려놓고선 다리 하나를 반대 다리에 얹었다. 그에 비해 정말 후룩 소리가 날 정도로 호탕하게 차를 들이킨 에바는 끼고 있던 장갑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원래 자매입니까?"
"응? 아니야. 그만큼 사이 좋아 보이지?"
"뭐…. 능력자 전쟁으로 고아나 난민이 많이 생겼다곤 들었습니다. 그런 사람끼리 가족을 맺는 건 많이 봤으니 처음엔 신경 쓰지 않았고요. 하지만 마를렌은 재벌가의 자녀라면서요? 그런 아이가 이런 전장에 있는 것도 이상합니다. 게다가 자매가 아니더라도 샬럿도 가족이 있을 텐데요."
에바의 대사에 잠시 타라와 자네트, 그리고 앨리셔의 시선이 한번 공중에서 얽혔다. 회사에 합류한 지 시일이 지나긴 했지만 스카우터나 윗선들만 파악할 뿐, 나머지 회사원들은 서로 개개인의 과거사에 터치하지 않는다. 오지랖이라며 타박할 수도 있었지만 자네트는 그녀에게 받은 도움을 기억하고 있기에 굳이 타박하기 보단 적절한 말로 대꾸하는 것을 선택했다.
"샬럿양은 마를렌양이 빌로시티라는 곳에서 처음 만나 이곳 글림듀까지 함께 왔다는 것 같습니다."
"빌로시티라니……. 그런 위험한 곳을 두 아이가요?"
"…마를렌이 가출했거든."
"…네?"
"가출. 레이라가 잘 부탁한다며 연락은 하고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가출이지. 르 블랑가에서 정말 기함했어. 프랑스의 아이라고. 영국까지 그래도 여러 번 어른들의 보호를 받았다는 것 같지만 여기까지 오다니."
대단하지? 가벼운 투로 던진 마를렌의 이야기에 에바가 따로 이을 말이 없는 지 얼탄 얼굴로 굳어버렸다. 이 사실을 처음 안 것이 에바만은 아닌 지 루시도 놀란 눈으로 타라를 쳐다보았다.
"가출?! 그런 위치에 있는 아이가?! 그 위험한 빌로시티까지!? 세상에……. 사실 샬럿도 그럼 어디 재벌가의 자녀나 뭐 그런 거야?!"
"아니. 샬럿은 가족 없는 게 맞을 걸"
"아아……."
"…게다가 애가 너무 소심해서 좀 살가운 사람을 붙여서 넌지시 물어봤는데 그 아이가 겪었던 일을 들은 사람이 그렇게 말해줬다고 그러더라."
‘안락한 환경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찾을 수 없다’고. 그 말에 평탄한 삶을 살아오지 못 한 이들의 입이 굳게 닫혔다.
"일단 난 명왕의 비서이니 대충 내막을 듣긴 했지만……. 이걸 굳이 입 밖에 내고 싶진 않아. 브뤼노도 조사를 포기했을 정도니까."
고작 10살 된 아이였다. 순진하고 내성적인 아이가 어른들보다 속내를 능숙하게 숨길 줄 아는 걸 보면 뭐가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꽤 큰일이 많았던 모양이구나. 산뜻하게 시작했던 티타임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내려앉았다. 그 뒤로 한동안, 모두들 입을 떼지 않았다.
***
아이는 늘 외로웠었다. 가장 처음 기억나는 기억은 다정하게 안아주던 청년의 모습. 이 사람이 아빠인가 싶을 정도로 다정했던 사람이 자신을 무어라 불렀는 지 기억나지 않았다. 지금 불리는 이름은 지어주기 귀찮았는 지 가장 가까이 있던 디저트의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이제 겨우 6살이 된 아이는 자꾸만 화를 내는 사람의 눈치를 보며 창문 밑으로 몸을 숨겼다.
"이 망할 것! 어디갔냐고!!"
"원장님 취하셨어요. 그만 진정하세요!"
"진정하게 생겼어?! 머리색이 저러면 결정 능력자라고 해서 가져왔더니 결정은 만들지도 못하고 겨우 물보라나 일으키고! 게다가 겨우 3급?! 일상생활에나 써먹는 수준이라잖아!"
쾅 소리가 나는 걸 보니 또 책상을 내려친 모양이었다. 깜짝 놀라 몸을 움찔이며 다시 아래로 숨었다. 세간엔 결정 능력자인 사람들은 푸른색 계통의 머리칼을 타고 난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이의 머리색을 본 원장은 아이가 최근 위명을 떨치고 있는 지하연합의 능력자와 같은 능력을 타고 났을 거라 생각하고 거금을 주고 사왔었다. 그런데 이렇게 쓸모없을 줄은 몰랐다며 늘 화를 내고 있다. 그 화를 딱히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고 간혹 술이 들어가면 그 화는 온전히 아이에게 쏟아졌다. 그의 말로는 아이가 아주 어린 시절 불에 탄 집에서 구출되어 고아원을 전전하다 이곳까지 흘러들어왔다고 했다.
학대라는 말이 어울리는 상황이지만 아이에겐 돌봐줄 사람이라고는 그 밖에 없었다. 얻어맞고 구박을 받아도 아이는 이 곳외에는 갈 곳이 없었다. 만약 이 곳에서 내쳐진다면 가야할 곳은 저 굴다리 밑이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비록 능력을 잘 발전시켜 다른 곳에 써먹어 돈을 벌겠다는 꿈은 날아갔지만 물은 생활과 밀접하다. 물통을 채우거나 세탁을 할 땐 그런 아이의 능력도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시리게 차갑다는 단점만 제외한다면 아이의 능력은 나쁘지 않았다. 잘 자라서 식모로 쓰든 같은 고아원 아이들을 미끼삼아 일하러 보내든 어떤 식으로든 이용가치는 있다. 그걸 알기에 멀쩡한 정신일 때 그는 절대 아이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래 이건 술이 문제야. 술이 나빠. 나쁜 건 더러운 거야.
아이가 늘 되뇌던 주문 같은 말이었다. 고아원 아이들과 심부름을 갔을 때 들었던 말이기도 했다. 저렇게 더러운 옷을 입고 다니는 건 나쁜 거야. 가까이 있던 이들이 인상을 쓸 정도로 그닥 좋지 않은 말이었지만 아이들은 그저 적의와 호의만을 구분할 뿐, 그 말의 정의를 가늠하긴 어렵다. 아이의 마음속엔 나쁜 것은 더럽고, 더러운 것은 나쁘다는 인식이 생겼다.
능력으로 허드렛일을 도왔을 때 아이가 일으킨 물보라가 더러운 곳을 깨끗하게 씻어내었던 것을 기억했다. 제 능력은 아주 약했지만 더러운 것을 씻어낼 수 있었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가 술을 더 마시지 않는다면 고아원의 아이들을 괴롭힐 일도 없을 것이고 아이는 배척당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좋은 결과만 있을 거라고 생각한 아이는 새벽, 모두가 잠든 시간을 틈 타 원장이 가진 모든 술병을 내다버렸다. 버린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열 수 있는 건 전부 쏟아 버리고 그 안으로 물로 깨끗하게 씻어냈다. 열 수 없는 병은 모두 깨진 채로 한 구석에 처박혔다.
한 가지밖에 생각하지 못 한 아이는, 그 다음날 돌아올 폭풍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이제 더는 맞지 않을 거라고, 사랑 받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외롭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 채 이거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뿌듯한 마음에 치맛자락을 적신 포도주 자국을 보:지 못하고 꾸깃꾸깃, 침대에 몸을 던졌다.
***
단순한 산책로였던 고스트 워크는 호수를 중심으로 공원으로 새롭게 꾸며져 있었다. 휴일을 맞아 여러 가족이 나들이를 나와서인지 여기저기 떠들썩하다. 마를렌과 샬럿은 서로 사이좋게 나눠 쥔 피크닉가방을 호수 근처 적당히 그늘진 잔디밭에 내려놓았다.
"우와! 크다! 로테, 대단해!"
"에헤헤, 정말?"
"응응! 진짜 넓어!"
냉큼 샬럿을 꼭 끌어 안은 마를렌은 그 안은 팔을 놓지 않은 채 반짝 반짝 거리는 호수의 표면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샬럿이 인위적으로 만든 호수라지만 꽤 관리가 잘 된 건지 물까지 깨끗하다. 아직 살고 있는 생명체는 없는 듯 해서 아쉽지만 샬럿의 기억으론 땅에서 물을 같이 끌어왔었다고 하니 몇 년이 더 지나면 생명체들도 하나둘 생겨날 것이다.
마를렌은 샬럿을 한 번 더 꽉 끌어안고서 놓아 주었다. 쪼그려 앉아 열어 본 피크닉 바구니 맨 위엔 타라가 준 쿠키가, 그 바로 아래엔 노란 체크무늬가 예쁜 도톰한 천이 있었다. 그 천을 꺼내 샬럿과 끝을 나눠 잡고 넓게 폈다. 두 명이 누워도 충분할 크기의 천이 초록색 잔디 위에 깔렸다. 마를렌은 천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적당한 돌을 주워 끝에 놓고 그 위에 냉큼 앉았다.
"로테도 어서 앉아!"
"응!"
돗자리 위에 앉아서 치마를 정리하던 샬럿은 곧 돗자리의 끝으로 가 손을 꼼지락 댔다. 샬럿의 버릇 중 하나였다. 뭔가를 하기 전 반드시 손을 씻는 것. 아무래도 먹기 전 손을 씻는가 싶어서 마를렌은 손을 씻기 위해 물을 주륵주륵 흘려보내던 샬럿에게 손수건을 건넨다. 그 호의를 받아 들여 손을 말끔히 닦은 샬럿이 다시 가운데로 와서 바구니에 관심을 보였다.
"베티가 만들어 준 거야?"
"응! 나도 로테도 좋아하는 걸로 잔뜩."
바구니 안에는 소고기가 들어간 패스티에 여러 가지 파이와 샌드위치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꺼내 놓고 보니 한두 가지가 아니다. 으깬 감자와 햄이 잔뜩 들어간 샌드위치나 시금치와 치즈 키쉬에 민스 파이까지. 간식으로는 졸인 사과가 올라간 타르트가 준비되어 있다.
사실 이건 마를렌이 좋아하는 음식이지 샬럿이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었다. 프랑스에서, 그것도 의류 재벌가에서 온 마를렌은 하나의 음식도 다양하고 맛있는 걸 선호했지만 샬럿은 음식에 크게 맛을 따지지 않았다. 고기가 많이 들어간 기름진 음식보단 단순하고 간결할수록 먹기 편해서 좋아한다.
그럼에도 제 주장을 하지 않는 이유는 있었다. 샬럿은 소심하고 조용하긴 해도 눈치는 빠른 편이다. 명왕이 저를 싫어하는 것은 마를렌이 샬럿의 손을 잡고 그 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느끼고 있었다. 안 그래도 천덕꾸러기인데 음식까지 가리면 그 집을 관리하는 메이드나 집사들까지 싫어할 것 같아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거기에 정말로 마를렌과 함께 먹는 거라면 다소 부담스러운 음식들도 맛있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여기 놓인 모든 음식은 샬럿도 좋아하는 게 맞았다. 키쉬 하나를 건네받은 샬럿은 웃으며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베티의 음식솜씨는 훌륭해서 입 안 가득 고소함이 퍼젔다.
"맛있다. 식었는 데도 맛있어!"
"로테, 이것도 먹어봐! 샌드위치도 맛있어!"
둘이 앉아서 나무그늘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받으며 점심을 먹는 건 행복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살짝 그늘 밖으로 나간 발을 동동: 거리며 한참을 먹던 두 사람은 어느 정도 배가 차자 아직 손도 대지 못한 음식들을 아쉽다는 듯 바구니에 챙겨 넣고선 다시 호수를 바라보고 앉았다.
"글림듀에도 강은 있지만 이렇게 예쁘진 않았던 것 같아."
"그래도 강변 따라서 산책길도 있고, 길에 강아지나 고양이도 많잖아. 거기 다니는 거 좋아하면서."
"그건 그렇지~"
키득키득 웃은 마를렌은 그대로 샬럿의 어깨를 잡아 당겨 누웠다. 언니! 치마! 겨우 무릎을 덮는 기장의 치마가 걱정되는 지 샬럿이 눈을 찌푸렸지만 마를렌은 손으로 탁탁 쳐서 자신의 치마와 샬럿의 치마를 정리하는 것 말곤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채였다. 못 말려 정말. 그 모습에 샬럿은 웃음을 터트리며 마를렌을 마주보았다.
손을 꼭 잡은 채 한참을 마주 보니 그렇게 웃음이 났다. 험난한 전장에 자주 들어간 적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늘 함께 집에서 보내기 때문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건 일상인데도 그랬다.
샬럿은 제 손에 쥐어진 마를렌의 손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마를렌이 무슨 할말이 있냐는 듯 눈을 깜빡이며 샬럿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저 웃음을 담은 얼굴로 한참 그 손을 보던 샬럿이 새삼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언니는, 만약 이 전쟁도 끝나고 언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겠지?"
"음, 그래야겠지? 르 블랑의 다음 대표는 내가 될 테니까."
"영국은… 자주 와 줄 거야?"
따라 나올 답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샬럿은 몇 주에 한 번씩은 굳이 그 답을 듣기 위해 마를렌에게 이 질문을 던졌다.
"무슨 소리야! 로테! 나랑 프랑스로 가기로 했잖아! 같이 여행도 하면서 의상공부도 하고, 어려운 사람도 돕고 하자고 했잖아! 내가 왜 널 로테라고 부르는데?"
마를렌은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 박력에 놀라서 샬럿 역시 누웠던 몸을 일으켰다. 마를렌이 엄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훅 들이밀었다. 샬럿이 놀라 몸을 살짝 움츠렸지만 마를렌의 얼굴은 단호하게 대답을 바라고 있었다. 굳이 질문을 던진 만큼 해야 할 답도 알고 있다. 샬럿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 이름의 프랑스식 애칭이니까."
"맞아! 너는 곧 샬럿이 아닌 샤를로트라고 불릴테니까! 샬럿이란 발음도 좋지만 이쪽이 더 우아하잖아?"
애초에 영어는 너무 발음을 짧고 단순하게 발음해. 우아한 맛이 없다고. 마를렌은 살짝 불평하며 다시 몸을 눕혔다.
"응. 맞아.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내 소원이 됐어."
"당연한 건데 무슨 소원씩이나! 패션이 더 뛰어난 건 프랑스쪽이지만 영국도 실용성은 무시할 수 없으니까, 그 전까지 부지런히 배워야지."
그 말을 마치고 마를렌은 몸을 바로 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예뻐, 샬럿은 마를렌의 중얼거림에 이번엔 좀더 가까운 곳에 제 몸을 뉘였다.
"정말이지, 로테는 내 말을 못 믿는 거야?"
살짝 눈동자만 돌려 흘기자 샬럿이 어색하게 웃음을 흘기곤 그녀에게서 몸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정말 구름이 군데군데 가린 예쁘고 하얗고 푸른 하늘이 시리게 눈에 들어왔다. 원래라면 호수에 발이라도 담가볼까 했지만 생각보다 호수가 깊은 지 안전을 위해 펜스를 둘러서 들어갈 수 없었다. 아쉽지만 가까운 자리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바람도 적당하고 그대로 낮잠을 자면 정말 기분 좋을 텐데. 배도 부르고 햇빛에 따스하고 바람이 시원해서 슬금슬금, 호박색 눈을 감싸고 있던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언니? 자?"
"……."
어느 순간 말이 없다 싶더니 정말 잠든 모양이었다. 못 말려……. 아침에 그렇게 빨리 일어나서 부산스럽게 굴더니 결국 졸린 거구나. 샬럿은 잠이 든 마를렌에게 사이좋게 입고 왔던 얇은 망토를 어깨에 하나, 다리에 하나 덮어주곤 자신은 다리를 끌어 모아 잠이 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평온한 일상이라니, 불과 1년여 전만 해도 이런 행복이 찾아들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샬럿의 입술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언제든 떠올려도, 그녀가 내민 손을 잡았던 그 날의 기억은 평생 좋은 기억으로만 남을 것이다.
***
모종의 사건이 있은 후 아이는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단순히 술값을 버렸다는 이유로 몇 달, 갑자기 난 고아원의 불을 끄지 못 했다는 이유로 몇 달, 다른 이와 어딜 다녀도 항상 아이를 제외한 이만 다쳤고 한 번 망가졌던 고아원 건물은 불로, 바람으로, 그 외에도 여러 악재들로 고통 받았다.
처음 아이와 함께 들어왔던 아이들은 이제 남지 않았다. 처음은 그저 재수가 없다고만 생각했던 원장의 의심이 아이에게 옮겨가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3년이나 이어진 고아원에서의 학대를 참지 못한 아이는 결국 도망치듯 거리로 나왔다. 낡은 원피스만 겨우 챙겨 입고 나왔지만 그나마도 감지덕지였다. 아이가 처음 닿은 다리 밑의 은둔처엔 저보다 못한 옷차림의 사람이 많았다.
'암흑의 목요일'이라는 아이는 잘 알지 못하는 이유로부터 시작된 대공황은 모든 이들의 인심을 각박하게 만들었다. 한 번 고아원에서 나오게 된 아이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몇 번인가 난민 구제소에도 기웃거려봤지만 아이의 몸으로는 그 텃세를 다 받아내기 힘들다.
보급 받은 빵과 운이 좋으면 얻을 수 있는 우유 한 병, 계란 한 알. 그마저도 앞에 사람이 많으면 받지 못 해 굶는 날이 더 많았다.
겨우겨우 식량을 받아 한 쪽에 자리를 잡아도 빠르게 먹지 않으면 빼앗기는 일도 부지기수인지라 급하게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우유를 급하게 들이마시다 사레가 들려 제 가슴을 툭툭 쳤다. 막힌 건 목인데 이상하게 눈시울이 시려왔다.
아이는 눈물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아원에서 도망 나와 자리 잡은 이 화이트 채플은 조금만 긴장을 늦춰도 어디론가 쉽사리 끌려가곤 했다. 차오르는 눈물을 꾹꾹 안으로 밀어 넣고 숨을 다 잡았다. 그래도 오늘은 밥을 먹었으니까 다른 날 보다는 낫다.
볕에 두었던 모포를 거두어 몸을 감쌌다. 아침부터 먼 곳에 숨어 깨끗하게 세탁해둔 것이다. 예전에 있던 사건으로 능력자를 배척하는 곳이니 아주 적은 양의 물을 끌어낼 때도 그 누구의 눈도 없는 곳에서 해야만 했다. 모처럼 아침, 낮 시간이 맑았었기에 오늘은 하루 종일 맑아서 춥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쟤야? 쟤가 물을 움직였다고?”
“아까 저 뒤에서 빨래하는 거 봤어! 저쪽은 수도가가 아니라고!”
“꼭 작은 비구름 같았어.”
“그럼 쟤 능력자야?”
그 살인마 같은? 아이의 몸이 흠칫 떨렸다. 뒤에서 수근 대는 목소리에 시선을 들어 바라보자 한데 모여 있던 그들은 좀 더 바짝, 서로 붙었다. 아이의 붉은 눈은 늘 악마의 그것 같다고 불려왔었다. 저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 하는 건가? 마주친 눈을 다시 아래로 떨궜다.
조금 더 몸을 움직여 떨어져 앉았다. 아무런 낌새도 없이 갑자기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자신이 우울할 땐 늘 얕게라도 비가 왔었던 것 같다. 좋았던 날이 급하게 변했다. 그것도 저 먼 쪽은 여전히 맑은데 그녀가 있는 부근만 구름이 깔렸다. 아이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견디기 힘들었다.
비야, 제발 멈춰.
내리는 게 나 때문이라면, 그치는 것도 내가 할 수 있어야 하잖아. 제발 멈춰줘. 아무리 간절하게 바라고 또 바라도 오히려 거세질 뿐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아이의 고개가 무릎 위로 떨어졌다.
런던의 가장 초라한 장소인 이 곳에서 쫓겨난다면 갈 수 있는 곳은 나락뿐이었다. 이미 능력자임을 밝혀 포트레너드에 정착해보려 했지만 능력이 미미하고 아직 어린데다 고아원에서 마저 도망 나왔기에, 그녀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능력자도 받아준다던 한 고아원은 이미 불에 타 사라졌으니까. 얼핏 소문으로 들었던 능력자들의 슬럼가라면 또 혹시 모른다. 햇볕도 잘 들지 않는 곳이라지만 그래도 능력자라고 배척받을 일은 없겠지.
그래도 아직은 이곳을 떠나고 싶진 않았다. 아이는 시치미를 떼기로 마음을 먹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화이트 채플에 머물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대공황이 끝나서 스스로 아주 작은 직장이라도 얻을 수 있게 될 때까지. 그때까지만 이라도 머물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소망했다.
***
"로테, 로테! 일어나~ 어서!"
이건 아까의 데자부 인가. 샬럿은 뉘였던 몸을 일으키며 눈을 비볐다. 아무래도 새근거리는 마를렌의 숨소리를 듣다가 저도 모르게 잠에 빠진 것 같다. 언제 덮어준 건지 마를렌에게 덮어 주었던 망토가 제 몸을 덮고 있었다. 아깐 분명 밝았는데 지금은 주위가 어둑어둑했다. 벌써 해가 저문건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샬럿을 깨우고 난 뒤 부산하게 움직이던 마를렌은 어느 새 샬럿이 깔고 앉은 천을 제외한 모든 것을 바구니에 넣고 샬럿의 손을 잡아 당기고 있었다.
"곧 쏟아질 것 같아. 일단 공원 바깥쪽 가게 밑에서 비 좀 피하자."
"……비?"
"이 천은 굳이 챙겨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니까, 이걸로 일단 막고 뛸까?"
샬럿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를렌은 가벼워진 바구니를 한 쪽 손목에 건 채 그 손으로 천을 잡아 당겨 서로의 머리 위에 씌우고 남는 손으로 샬럿의 손을 꼭 쥐었다. 샬럿은 순식간에 한 손에는 천, 한 손에는 마를렌을 꼭 쥔 채 이제 막 일어나서 어안이 벙벙한 상태에서도 빠르게 뛰는 마를렌을 따라가기 위해 부지런히 뛰었다.
공원 근처의 노천 카페들은 대다수 문은 닫았지만 그래도 짤막한 처마 밑은 비를 피하기엔 부족함이 없다. 마를렌은 바구니가 적셔지지 않게끔 쓰고 왔던 천을 깔고 그 위에 내려놓았다. 오늘 일기예보엔 큰 비는 없었으니 말 그대로 지나가는 소나기인 모양이다. 기껏 놀러왔는데 비라니 좀 속상하긴 하지만 다친 곳도 없었고 비가 내리기 직전에 피해서 모처럼 입고 왔던 예쁜 옷과 구두도 끝단만 조금 적시고 말았다. 이 정도는 평소에도 겪는 일이니 괜찮아. 참 다행이지? 동의를 구하기 위해 샬럿에게 말을 거넨다. 그런데 돌아와야 할 답이 오질 않는다.
내리는 비를 보는 샬럿의 표정이 묘했다. 마를렌이 늘 봤던 수줍은 모습이나 낯을 가리는 모습, 그리고 사르르 미소를 짓는 모습이 아닌 아무런 표정이 없이 그저 흐릿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 마를렌은 이 표정이 뭔지 알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보였던 모든 것을 체념한 눈이었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저 눈빛은 아주 가끔씩, 나타나서 마를렌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샬럿을 처음 만났을 때의 상황은 아직도 또렷히 기억한다. 길을 잃어 도착했던 그 어두운 도시에서 샬럿을 발견하고 반짝이게 만들겠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남아 드리웠던 제 자신의 그림자처럼 샬럿에게도 커다란 그림자가 아직도 남아서 샬럿을 괴롭히고 있는 거겠지. 덩달아 마를렌의 표정의 굳어진다. 쿡쿡 찔려오는 가시같은 감정이 할 말을 제대로 고르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저 말없이 축 늘어진 샬럿의 손을 꼭 쥐었다. 부러 시선을 아직도 내리고 있는 비에 둔다. 닿은 어깨가 살짝 떨렸다. 조용한 분위기에 샬럿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아도 느껴졌다.
마를렌을 향했던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으...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입술을 달짝이느라 몇 번이나 얕은 숨소리가 함께 튀어 나왔다. 결국 나올 말이 뭔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그 이야길 듣지 않고 선수 치기로 했다.
"이건 로테 탓이 아니야."
"...응?"
"샬럿, 네 탓이 아니야.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하지 마."
단호한 얼굴로 샬럿을 바라본다. 이게 정답이었구나. 샬럿의 눈가는 그 눈동자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루비 같은 예쁜 색. 푸른 머리색과 대비되어 더 반짝이는 이 눈동자를, 체념이나 괴로움이 아닌 고마움이 가득 담겨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을 마를렌은 그 누구보다 좋아했다.
"비 곧 그칠 것 같은 걸? 비 그치면 바로 돌아가자. 올 때처럼 같이 버스도 타고 이야기도 하면서 이렇게 손 잡고 가자. 그럴 거지?"
이미 비를 맞으며 뛰어 오느라 신고 있던 구두나 양말은 좀 차가워 졌다. 사실 돈이 좀 더 들더라도 택시를 부를까 했지만 익숙하지 않은 버스도 타보고 함께 길을 찾으며 이야기 했던 그 기분 좋은 일을 다시 경험하고 싶었다. 샬럿은 굳이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대답하지 않은 채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힘을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를렌의 예측이 적중했다. 꽤 거세던 빗줄기는 금세 사그라 들었고 아직 구름은 남았지만 조금씩 하늘이 맑아졌다.
"봐. 금방 그쳤지? 로테가 내리는 비가 그치는 건 아쉽지만, 원래 비라는 건 언제고 그치게 되어 있는 거야."
오래 기다리지 않아서 다행이야. 마를렌은 빙긋 웃으며 바구니를 챙겨 들었다.
"...응."
한 박자 늦게 샬럿의 대답이 들렸다. 마를렌도 샬럿도 이게 어떤 말의 대답인 지 알고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왔었을 때처럼 손을 잡고서 발걸음을 옮겼다. 즐겁게 먹고 떠드느라 비워낸 바구니는 가벼웠고 두 사람의 걸음은 더 가벼웠다.
"우비 입고 올 걸 그랬나 봐. 모처럼 언니가 준 건데..."
"에이, 얼마나 한다고 아까워 하는 거야. 게다가 깨끗하게 세탁해 달라고 하면 그만 인걸? 뭐든 더러워진 건 깨끗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이젠 더러운 건 꼭 나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의 경험이 늘 이런식으로 제 생각을 잡는다. 샬럿은 치맛자락에 든 풀물을 빤히 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우와, 로테! 저것 좀 봐!"
"응? 뭔데?
그래도 마를렌의 옷에 풀물이 덜 들어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멈춰선 마를렌이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강제로 멈춰 선 샬럿이 마를렌의 어깨에 살짝 부딪혔다. 대체 뭐야? 샬럿이 한 마디를 더 붙이며 그녀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늘을 살금살금 물들이던 노을 사이로 일곱 빛깔의 무지개가 구름을 받침대삼아 그녀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와아...! 무지개!"
"예쁘다."
색을 담을 수 있는 사진기가 있다면 꼭 찍어두고 싶을 정도로 예쁜 장면이었다. 샬럿은 미소를 지은 채 그 모습을 눈에 담자고 다짐했다.
"무지개의 의미, 알아?"
"무지개?"
마를렌이 활짝 웃으며 물었다. 일반적인 영국에서의 의미는 행운이다. 샬럿은 행운이라고 대답했다.
"무지개는 약속의 상징이기도 해. 가톨릭에서 흔히 말하는 신이 한 약속의 상징."
가볍게 말한 마를렌이 몸을 빙글 돌려 샬럿을 마주 바라보았다.
"널 처음 봤을 때 한 내 '약속'처럼, '반드시 지켜지는 약속'이란 의미야."
그렇게 말하며 웃는 마를렌의 등 뒤로 무지개가 걸렸다.
***
빌로시티, 어느 날 솟아오른 세계수의 등치는 깊숙한 곳에 있는 만큼 그 안개가 더 짙을 것이라 예상한 이들이 많았지만 실상은 안개가 전혀 발생하지 않아 능력자들이 외면한 지역이었다. 빛이 들지 않아서 밤이고 낮이고 등불을 밝히고 살아야 하는 불편함이 있는 이 곳은 포트레너드의 이점을 보고 싶어 하는 비능력자들, 그 중에서도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는 이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코어레너드든 글림듀든 리버포드든 자유롭게 발을 댈 수 있는 곳들이지만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불황에 안그래도 높았던 물가는 치솟았다. 봉급은 그대로거나 줄어 들었다. 높은 런던의 물가를 감당하기란 쉽지 않았다. 어쩌면 능력등급이 낮은 능력자나 일용직 노동자들이 모여드는 것은 거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건 아이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는 사실이었다. 갈수록 더해지는 불행과 자꾸만 마주치는 이상한 아줌마. 그녀는 아이에게 이 곳으로 가면 무언가 달라질 거라고 속삭였다. 그 달콤한 상상에 혹해서 그녀가 나타날 때마다 거취를 바꿔 온 아이였다. 아이는 이동할 수록 더 안 좋아지는 상황이 조금 이상했지만 갈 곳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아직 죽고 싶지는 않으니까. 안 좋은 상황에서 늘어난 아이의 눈치가 그녀의 말을 따라서 좋을 게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이는 움직였다.
먹지 못해 앙상하게 마른 다리로 한참을 걸어 빌로시티에 닿았을 땐 정말 이대로 굶어 죽지 않을까 싶었다. 능력으로 마실 물을 만들려고 해봐도 다른 곳에서보다 더 능력을 내기 힘들었다. 처음 여기에 발을 디뎠을 때, 어린 여아라는 말에 눈독 들이는 자도 있었고 실제 손을 댄 자도 있었지만 지저분하고 깡마른 꼬마였다. 잡아 갔다간 오히려 병원비도 건지지 못할 것이다. 아이는 다시 거리로 내쳐졌다.
차라리 그대로 잡혔다면 어떻게든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런 끔찍한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아이는 살아보려 구걸을 했지만 가장 최근에 얻은 것이라곤 겨우 빵 두 조각이었다. 그래도 무언가 입에 들어갔다고 조금 더 버틸 수 있긴 했다.
그래도 이제 슬슬 버티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흐릿한 눈가에 자꾸만 예전의 기억들이 스쳐지나갔다. 아이는 이걸 뭐라고 부르는 지는 몰랐지만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사라지는 구나……. 춥고 졸리던 날이 이어지던 지독한 삶이었지만 노력하고 노력했는데도 결국 죽는 거라면, 그건 받아야 들여야 했다. 아이가 마지막으로 배운 것은 결국 체념이었다.
어두운 벽에 기대어서 모포를 몸에 감은 채 눈을 감았다. 사실 눈을 뜰 기력도 없었다. 잠은 오지 않았다. 저쪽 술집에서 큰 소리가 나는 게 들렸지만 그건 아이완 관계 없는 다른 이야기일 뿐이었다. 이제 곧 조용해 질 거고, 어쩌면 평생 저 소리를 들리지 않을지도 몰랐다. 지금에 와선 그게 달갑기까지 했다.
"어라? 어린 애?"
낯선 이의 목소리였다. 사투리도 제법 들어봤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목소리는 그 어떤 사투리와도 달랐다. 아이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가 궁금해서 힘겹게 눈을 떴다. 검은색 머리카락과 흰 옷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천사님?"
"그렇게 들으니 기분은 좋지만, 천사는 아니야. 사람이라구?"
나를 데리러 온 천사가 아니구나. 조금 들떴던 마음이 다시 가라 앉았다. 한순간 피어 올랐던 희망이 사그라진다. 아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야? 부모님은? 너도 가출?"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고아원을 나온 게 가출이라면 가출일 수 있겠네. 아이는 느릿하지만 정확하고 우아한 상급계층의 영어를 구사하는 제 또래의 사람이 이런 곳에 있는 게 신기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아이는 이 곳에 있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좀 더 번화가, 그것도 비싼 저택에나 어울릴 것 같은데……. 그녀의 속사::정이 조금 궁금해졌다.
"난 지금 누군가를 찾고 있어. 포트레너드에 있다고 해서 온 건데……. 여긴 포트레너드가 아닌가?"
아이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아! 그럼 여기가 포트레너드야?"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열심히 대답한 건데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허리에 손을 짚은 그녀가 허리를 숙여 아이의 얼굴 앞에 제 얼굴을 내밀었다.
"너 아깐 말할 수 있었잖아. 왜 고개짓만 해? 그건 숙녀의 예의가 아니지!"
"…힘이 없는걸……."
맥이라곤 하나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지막으로 음식을 밀어 넣은 게 3일 전이었다. 그마저도 딱딱한 호밀빵 한 개가 전부였다. 그 힘이 지금까지 남아 있을리가 없다. 아이의 힘 없는 모습을 한참 내려다 보던 그녀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입술을 꾹 깨물더니 들고 있던 가방을 열었다.
안에서 얼마 전 전쟁에서 유행했다던 건식량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꽤 되는 양의 음식을 아이에게 내밀었고, 평소라면 한 번은 의심하고 먹었을테지만 너무 배를 곯았던 아이는 허겁지겁 그 음식들을 제 입으로 밀어 넣었다.
"체하겠다. 천천히 먹어. 다 네 거야. 난 곧 목적지니까 많이는 필요 없거든."
체하겠다는 그녀의 말에도 아이의 속도는 느려지지 않았다. 빠르게 음식을 다 먹고 나니 그래도 힘이 생긴 건지 아이의 얼굴에 약간의 핏기가 돌아왔다. 그녀는 어디서 가져온 건지 모를 물이 든 컵을 아이에게 내밀며 아이 앞에 쭈그려 앉았다.
"얘, 너 이름이 뭐야? 난 마를렌이야, 마를렌 르 블랑."
"…샬럿."
"샤를로트?"
"샤를로트가 아니라 샬럿……."
"흐음, 아직 영국식 발음은 어렵단 말이지…. 예쁜 이름이네."
예쁘다고? 자신의 이름은 근처에 있던 케이크에서 따온, 그냥 대충 지어진 이름이었다. 한 번도 예쁘다 생각 한 적 없었는데... 아이, 샬럿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예쁘다고? 케이크에서 따온 이름인걸?"
"뭐 그런 디저트도 있긴 하지만 말야. 요즘은 유행이 지나가긴 했지만 왕정시대 땐 귀족들의 모자를 부르는 이름이었거든. 모자란 신분을 나타내는 귀중품이잖아? 같은 이름이라면 그 쪽으로 생각하는 게 더 좋은 걸. 넌 여자아이니까. 그게 더 어울리는데?"
마를렌은 그렇게 대답하며 웃었다. 처음 보는 아이에게 친절을 베풀고 마냥 웃는 그녀가 신기했다. 샬럿은 순식간에 들어온 대사에 슬쩍 눈치를 보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아무튼 샤를로트. 넌 헬리오스가 어딘지 알아? 포트레너드 글림듀에 있대! 여긴, 아닌 것 같아서."
"어딘지…… 알아…."
느릿하게 대답을 마치자 마를렌의 표정이 확 살아났다. 샬럿은 최근들어 씻지도 못해 마냥 더러운 자신의 손을 거리낌없이 덥석 잡는 손길을 느꼈다.
"거기에 날 데려다 줘! 아, 가출 아니라고 했지? 그럼 갈 곳은 따로 있는 거니?"
"아니……?"
"좋아! 아예 나랑 같이 가자. 괜찮지? 갈 곳 없다며?"
"으응……. 그건 그렇지만, 가는 곳이 어딘데…?"
"가면 좋을 거야. 그건 내가 장담해!"
이제 겨우 9살이 된 아이였지만 겪은 일이 많았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을 덥석 따라갈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샬럿은 잡힌 손을 빼내기 위해 슬쩍 고개를 흔들며 등 뒤 벽으로 더 붙었지만 마를렌은 오리 걸음하듯 한 번 뛴 것으로 그 거리를 다시 좁혀버렸다.
"난 네 눈동자가 루비같아서 마음에 들어. 마침 같이 지낼 또래아이가 필요하기도 했고."
"…오늘 우리 처음 봤는데…."
"음. 이름을 알았잖아! 나머진 지금부터 알아가 보자! 어때?"
처음으로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이의 말에 거취를 옮길지도 모른다. 샬럿은 고민하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마를렌은 포기하지 않았는지 앞에서 계속 샬럿의 눈을 맞추려 애쓰며 대답을 종용했지만 쉬이 할 수 있는 결정이 아니었다.
"좋아! 기분이다! 지내다가 마음에 안 들거나 귀찮으면 얼마든지 날 떼놓아도 좋아. 대신 네가 날 따라온다면 이거 하난 약속해줄게."
"약속?"
무슨 약속? 내용이 조금 궁금해졌다. 샬럿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눈이 서로 마주쳤다. 이번엔 샬럿도 피하지 않았다.
"네가 날 따라오는 그 순간부터, 절대 난 널 혼자로 만들지 않을 거야!"
"…계속 있어 주는 거야?"
"응! 아, 물론 혼자 해야 할 건 혼자 하는 거지만, 내가 네 돌아올 장소가 되어 줄게."
마를렌이 새:;끼 손가락 하나를 샬럿에게 내밀었다. 마를렌이 샬럿에게 한 말은 가족이 되자는 말과 똑같았다. 이제까지 그 어떤 사람도 샬럿과 일정기간 이상을 지내주지 않았다. 이제까지 겪은 불행들이 샬럿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제까지 혼자여야 괜찮았던 기억도 떠올렸다. 그래도 혹시라도...
"…내가 도움이 될까…? 나도 일단은 능력잔데……."
"능력자?"
"…물을 다룰 수 있어."
샬럿은 아주 작은 물웅덩이를 발 아래에 만들었다. 겨우 지름이 10센티 쯤 되는 웅덩이였지만 뭐라도 먹었기 때문에 눈에 띄는 형태로 발현한 것이다. 샬럿은 불안한 표정으로 마를렌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시시하다고 거부당할까봐 두려워서였다. 그런데 마를렌의 눈이 과도하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우와! 물? 정말이네?! 나도 물 능력자야! 정말 인연인가 보다!"
마를렌의 손 위에 작은 구슬들이 하나 둘 피었다. 슬쩍 손가락으로 찔러보니 정말 손가락이 물에 적셔졌다. 그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제 능력관 달리 이렇게 구체를 유지 할 수 있는 정도라면 꽤 높은 급의 능력자란 소리다. 샬럿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인연… 거리가 멀것이라 생각한 단어는 입속에서 겉돌았다. 마를렌이 아직 어떤 사람인지 알지도 못하고, 착한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도 셈이 되질 않았다. 샬럿은 그간의 불행을 떠올렸다. 착한 사람이라면 자신때문에 다칠 지도 모르는 데, 그럼 그 상황을 어떡해야 하는 지 알고 있는 모든 단어들이 엉켜서 머리가 뒤죽박죽이었다.
그래도 한 번 쯤 마음가는 대로 해도 괜찮다면……. 그렇다면…….
"내가 따라가도, 될까?"
"물론이야! 잘 부탁해, 샤를로트!"
샬럿은 마를렌이 내민 손을 꽉 잡았다. 먼저 일어선 마를렌이 샬럿의 손을 그대로 잡아 당겼다. 앞으로의 일은 잘 모르겠다. 이제까지 알고 있던 것도 사실 없었다.
그래도 지금 서로 잡은 손이 아주 따뜻하다고, 샬럿은 생각했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애기들 너무 좋아해요... 사랑해 우리 애기들... 너네가 짱이야...
오타는 봐주세요.
비문도 봐주세요.
한글날이라 소설 쓰고 싶었어요. 한글 너무 예뻐요 한글이 짱이야.(?)
감상이 좋은데, 길어서 안읽었다는 덧글은 굳이 남기지 말아주세요 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