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벤트] 3자회담(The Tria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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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1 09:4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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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픽션(fiction)입니다. 특정 단체ㆍ사건ㆍ사상ㆍ종교와 무관함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기차에서 내리자 네덜란드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암스테르담 중앙역은 분주한 소음으로 가득했다. 표정에야 드러내는 법이 없다지만 화이트 클라프는 사뭇 짜증스러웠다. 시끄러운 게 싫은 것은 아니다. 마술사는 손짓 하나로 자기를 향한 귀를 찌르는 환호성과 박수소리를 이끌어내는 자, 타고난 연예인인 그는 자기를 둘러싼 소란스러움을 즐길 줄 알았다.
다만 목적지를 향해 떠나가기 바쁜 이들로 가득 찬 역에서는 일류 마술사조차도 강제로 불특정다수로 편입될 수밖에 없었다. 오직 이 화이트 클라프를 향해 한결같이 쏟아지는 것이 아닌 각자의 지껄임에 지나지 않는 질서 없는 소음이 싫었다. 우아하게 1등칸을 타고 왔다지만 플랫폼은 2등칸, 3등칸과 공유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별수 없이 못마땅했다. 권위는 스스로부터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환경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화이트에게는.
드로스트 가문이 손님을 대접할 줄 아는 이들인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역 분위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외딴 세계에 홀로 존재하는 것처럼 집사는 화이트와 그의 동행인 탄야 랜킨을 맞아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빈틈없이 연미복을 차려입은 그는 드로스트의 첫 인상을 대변하듯 말끔하고 몸가짐으로 화이트와 탄야에게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네덜란드에. 화이트 클라프 님 그리고 탄야 랜킨 님. 드로스트 저택까지 두 분을 모시고 갈 당주님의 전속 집사 헹크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집사의 ‘네덜란드’라는 말이 ‘드로스트’와 동의어로 들리는 것은 필시 착각은 아닐 것이다. 네덜란드는 국가, 드로스트는 가문, 본디 차원이 달라야 하지만 드로스트는 실제로 이 나라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실질적으로는 이미 가문의 단위를 벗어났지만 그럼에도 자랑스레 가문임을 내세우는 것이 드로스트였다.
일개 심부름꾼이나 풋맨이 아니라 가문의 속사정을 모두 파악하고 있는 디아나의 전속 집사가 맞아주었다는 점에서 화이트는 짐짓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드로스트가 문화 후원 사업과는 따로 화이트를 저택으로 초대하는 데 그만한 가치와 무게를 두고 있다는 증거였다.
물론 이런 대접이 화이트에 대한 진심 어린 존중을 나타내는 것은 아님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그 무엇보다도 가문을 중시하는 디아나 드로스트다. 가문의 격식과 품위를 위시하는 데는 일절 아낌이 없었다. 손님을 정중히 대접하는 것이 곧 드로스트의 품격을 나타내주는 일이기에 공을 들여 쇼를 벌이는 거나 다름없다. 마술사 화이트 클라프는 자기를 위해 마련된 무대를 기꺼이 즐겨줄 줄을 알았다.
플랫폼을 벗어나 역 건물을 나서자 곧장 고급스러워 보이는 검은 승용차가 눈에 띄었다. 헹크는 세련된 동작으로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화이트는 ‘레이디 퍼스트’라고 하며 탄야에게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 고대 그리스의 키톤을 연상시키는 검은 드레스를 차려입은 탄야는 에스코트를 받으며 먼저 자동차에 올랐다. 귀부인이나 다름없는 우아한 자태였지만 그녀가 위험하다는 걸 화이트는 그 순간에도 잊지 않았다.
두 사람을 실은 차는 암스테르담 중심가를 지나서 교외를 향해 가는 것 같았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고층 건물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인적 또한 드물어졌다. 타인이 범접할 수 없는 영역으로 가까워질수록 드로스트 가문의 드넓은 사유지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쉼 없이 달리던 차는 족히 높이가 30미터는 넘어 보이는 빽빽한 침엽수림을 품고 있는 거대한 관문 앞에 잠시 섰다. 화이트는 앞유리로 내다보이는 검은 숲길을 보자 드디어 본격적인 드로스트 저택으로 향하는 길목에 들어섰음을 직감했다.
문이 다 열리자 차는 다시-발진했다. 대낮인데도 헤드라이트를 켜지 않으면 운전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두운 숲길은 이곳이 터널 안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일으켰다. 비밀이 많기 때문인지 그 비밀이 새어나가는 것을 극력 꺼리는 듯한 요새와도 같았다. 불안과 위압감을 절로 느끼게 하는 진입로다. 한 번 들어온 자는 결코 제 발로 걸어 나올 수 없으리라 무언의 협박이라도 당하는 것 같았다.
화이트는 어슴푸레한 나무 기둥의 윤곽만 간신히 보이는 바깥 풍경을 보는 척 유리창에 비치는 탄야를 주시했다. 탄야 랜킨은 언제이건 당황하는 법이 없었지만 오늘은 특별히 더 여유로워 보였다. 마굴로 들어가는 것 같은 이 어둑어둑한 숲길조차도 응당 자신이 지나가야 할 길인 것마냥.
당초 오찬에 초대받은 것은 화이트 클라프 혼자였다. 탄야가 동행하게 된 것은 화이트의 제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디아나에게 ‘솜씨 좋은 헌터’를 한 명 소개하고 싶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화이트는 드로스트 가문이 헌터들을 곧잘 고용하여 가문의 일을 맡긴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탄야가 만약 앞으로 드로스트 가문의 의뢰를 받게 된다면 자신의 공범인 그녀를 통해서 화이트에게로 드로스트 가문에 관한 정보가 흘러들어오게 된다.
화이트와 드로스트는 이미 협력관계를 맺기로 했지만 그들이 협력이란 이름으로 화이트를 이용하려는 것뿐임을 잘 알았다. 화이트는 자신이 서커스단에서 부리는 꼭두각시들과 같아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드로스트 가문에 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손에 거머쥠으로써 그들이 단지 화이트를 쓰고 버리는 카드 정도로 여길 수 없도록 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디아나는 생각보다 쉽게 화이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불청객’을 끌어들이는 데 대해 반감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마침’ 헌터가 필요한 일이 있어서 잘됐다며 반가운 신호를 보내왔던 것에 당황했던 것은 오히려 화이트였다. 디아나가 화이트가 탄야와 동행할 것을 처음부터 알았던 것처럼, 탄야도 디아나가 자신을 만나고 싶어할 것을 예상했던 것처럼.
마침내 숲 터널의 끝에 빛이 보였다. 숲을 벗어나자 비로소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드로스트 가문의 거대한 저택이 전모를 드러냈다. 정원을 지나 저택 본관 앞에서 차는 섰다. 화이트와 탄야는 헹크의 안내를 받아 디아나가 기다리는 중정(中庭)으로 향했다.
계절감이 느껴지는 화려한 꽃으로 만발한 정원은 정원사의 정성 어린 손길을 느끼게 했다. 지름이 3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분수대 중심에 서있는 천사상이 들고 있는 항아리에서는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분수를 앞에 두고 있는 커다란 석조 정자가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다. 흡사 작은 그리스 신전을 보는 것처럼, 기둥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직사각형의 정자였다.
그 아래 있는 눈부실 정도로 흰 테이블보가 깔린 기다란 정찬 식탁의 상석에 디아나 드로스트는 여신처럼 앉아있었다. 손님이 도착한 것을 발견하고는 디아나가 싱긋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연의 일치인지 디아나 역시 탄야처럼 키톤을 연상시키는 새하얀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다. 화이트는 시기적절한 농담을 떠올렸다. 디아나의 손을 잡고 그 위에 키스하고 입을 열었다.
“이거야 원, 두 여신과 함께하는 신전에서의 오찬이라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저는 신탁을 청하러 온 영웅이 아니라 일개 마술사입니다만.”
“신탁은 영웅만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을 섬기는 모든 이들에게 내려지는 것이었죠. 잘 오셨습니다, 화이트 클라프. 그리고……탄야 랜킨.”
디아나는 화이트에게서 시선을 돌려 탄야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기품으로 흘러넘치는 표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때조차도 우아하기 짝이 없을 드로스트 가문의 수장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분위기를 통해서 화이트는 디아나가 탄야를 환영하기 위해 이곳에 초대한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화이트가 개입하기 이전부터 서로 알고 원수라도 진 사이 같은 기류가 흘렀다.
“초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드로스트의 수장이시여.”
탄야는 보통 숙녀들이 하는 인사와 달리 화이트가 했던 것처럼 디아나의 손끝을 잡고 그 위에 입을 맞추었다. 신사의 에스코트를 받으면서 숙녀의 에스코트를 자정했다. 디아나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주며 인사를 받았다. 탄야는 이윽고 헹크가 디아나의 자리 왼편에 빼주는 의자에 우아하게 안착했다.
“저 같은 외부인을 이 장벽 높은 드로스트의 본가로 초대해주시다니 크나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름지기 특별한 자들을 옆에 두어야 그 자신의 가치도 올라가는 법이지요. 그래요, 디아나. 이 위대한 드로스트 가문의 수장인 당신과 같은 사람 말입니다.”
화이트는 자기의 가치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자기를 낮추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낮은 곳에 있는 자는 더 이상 낮아질 곳이 없다. 낮아지는 것은 높이 있는 자의 특권이었다. 겸손은 권력 있는 자만이 부릴 수 있는 미덕이다. 그래서 화이트는 겸손을 좋아했다. 화이트가 겸손하면 겸손할수록 상대방은 황송한 듯 화이트를 추켜올려 세워주려 하니까.
“우리 드로스트가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이 탁월하다는 것은 자부하는 바입니다. 드로스트가 미국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서 화이트 클라프, 당신만한 재목이 달리 없더군요. 처음에는 문화 후원의 일환으로서 달의 서커스단의 단장인 당신과 접촉했던 것뿐입니다만, 미국의 상원의원으로서의 당신과도 오늘 이렇게 마주할 수 있게 되어서 진심으로 기쁩니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디아나는 화이트가 자신의 말이 거짓임을 모르리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화이트는 물론 천연덕스레 속아주었다.
드로스트가 문화 후원에 아낌없이 돈을 쏟아 붓는 것은 사실이다. 문화에 투자하는 것이 대중에게 어필하기 가장 쉬운 지름길임을 고려한 처사임은 물론이나, 궁극적으로는 달의 서커스단에 대한 후원도 그런 전반적인 문화 사업의 일부분이라고 세간이 여기게 만들기 위한 밑밥임에도 틀림없었다.
드로스트 가문이 달의 서커스단에 후원 의사를 밝혔을 때 다른 이들은 몰라도 화이트만은 디아나의 의도를 단박에 알아차렸다. 미국 내에서도 능력자와 비능력자의 좋은 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화이트에게 접근하는 것이 목적이었음을. 능력자 중심주의인 드로스트 가문이 능력자를 배척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미국을 효과적으로 견제하기 위한 이중 스파이로서 화이트를 써먹으려는 의도를 모를 수가 없었다. 디아나는 화이트가 조국에 충성을 바치는 애국심 강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꿰뚫어 본 것 같았다.
“저야말로 달의 서커스단에 보여준 당신의 아낌없는 후원과 오늘의 초대가 진심으로 기쁩니다. 이 마술사 화이트 클라프는 미국 정부가 내세운 허울 좋은 마스코트로 이대로 눌러앉을 생각은 없습니다. 제 꿈은 그보다 원대하고 높은 것이죠. 비능력자들의 불안심리를 잠재우기 위해서 능력자인 저를 이용하면서도, 철저히 능력자들을 비능력자들의 통제 하에 두기 위한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미국 정부입니다. 그들은 저를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지만 사실은 제가 그들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바로 이 드로스트 가문의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 그런 제 의지를 오롯이 증명하지요.”
디아나는 화려한 듯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군말이 없는 화이트의 언변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며 제 뒤켠에 선 헹크에게 눈짓했다. 헹크는 미리 자리에 준비되어 있는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열어 디아나가 아닌 화이트의 잔부터 먼저 따라주었다.
만찬 참석자들의 잔이 모두 채워지자 디아나가 허공으로 잔을 내밀었다. 디아나를 중심으로 모이듯 화이트와 탄야의 잔이 부딪쳤다. 화이트는 와인 한 모금이 주는 여운을 충분히 음미하다가 아직 끝나지 않은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전부터 드로스트 가문을 우러러 봤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혈연 같이 모호하고 불확실한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맺어진 이 가문은 제게 사이퍼를 위한 파라다이스로 보였습니다. 능력자들로만 구성된 드로스트 가문은 점으로만 존재해왔던 능력자들의 힘을 한 데 뭉쳐서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비능력자들이 아무리 총화기를 발달시키고 고도로 군대를 조직한다고 해도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할 정도로 말입니다.
능력자들은 비능력자보다 월등합니다. 특별하고 축복받은 존재죠. 비능력자들에게 괴물 취급받으며 지배당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회사나 연합과 같은 주요 사이퍼 세력이 능력자와 비능력자의 화합을 도모하고 있는 건 솔직히 우스꽝스러운 일이죠. 물과 기름을 섞으려고 억지를 부리는 것과 같습니다. 성분 자체가 다른데 어떻게 섞일 수 있겠습니까?”
“역시 우리 드로스트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몸소 알려주시는군요. 제가 오늘 말하고자 했던 것의 반 이상을 이미 잘 알고 계셔서 수고로움을 덜었습니다. 허나 한 가지 주지시켜드리고 싶은 건,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지만 미국 정부가 막강한 것은 사실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 오늘의 드로스트와 당신 화이트 클라프의 만남과 같은 협력 관계를 하나씩 늘려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헤더 인더스트리를 필두로 한 미국이 아무리 막강한 재력과 조직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그들은 한 국가에 불과합니다. 스스로에게 도취되어 일당백이라 믿고 있지요. 그야말로 우리 사이퍼들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을 거라 믿는 것처럼. 언제까지고 앤더스빌과 같은 시스템이 통할 거라 생각하는지.”
디아나는 손 안에 넣은 잔을 빙글빙글 돌려 안에 든 액체를 흔들었다. 손동작 그 자체는 우아하기 그지없지만 붉은 액체는 잔에서 흘러넘칠 기세로 넘실거렸다. 그녀는 제 손에 의해 거세게 요동치는 그 액체를 미국이라고 보고 있는 것일까.
“오호라- 과연. 동업자가 더 필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후보로 점찍어놓은 대상이라도 있으십니까?”
“안타리우스.”
화이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디아나가, 드로스트 가문이 손을 내밀만한 세력이나 유명인사를 몇인가 머릿속에서 리스트로 작성해보았지만 그 후보에 넣을 생각조차 않았던 단체가 거론되자 다소 당황스러웠다.
안타리우스, 능력자들이 중심이 되어 비능력자를 현혹하는 집단으로서 미국 정부 또한 경계대상 1호로 삼고 있는 사이비 종교단체가 아닌가. 사이퍼가 비능력자의 삶을 위협하는 위험분자라는 인상을 심어준 대표적인 이들이기도 했다. 같은 사이퍼들에게조차도 공공의 적으로 군림하고 있다. 그 초대 수장이 정작「액자」라는 신비한 물건이 지닌 힘에 기대어 유사 사이퍼가 된 비능력자였다는 것은 실로 흥미로운 아이러니였다. 하물며 그「액자」는 오로지 비능력자만에게만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 또한.
“흐음, 다소 위험한 선택이군요. 헬리오스와 지하연합 그리고 중립 세력인 숭고한 길 재단조차도 적대시하는 집단이 아닙니까. 하물며 안토니오 구마스의 사후 한 풀 세가 꺾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드로스트 가문에 격조에 그들이 맞겠습니까?”
“대의를 위해서는 때로는 남들이 하지 않는 과감한 결단도 필요한 법입니다. 그 사이비 종교 단체가 회사와 연합 두 세력을 이간질시키고 급거 전쟁에까지 이르게 한 것은 엄연한 역사입니다. 진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 쭈욱 양자는 무수한 피를 흘려왔고, 안타리우스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도 여전히 해묵은 갈등을 반복하고 있는 중이지요.”
디아나는 흔들어대며 쳐다보고 있기만 했던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행동 자체는 호쾌한 축에 속해도 그녀는 어디까지나 우아했다. 태생적인 기품은 아마도 그녀의 작은 숨결마저도 품격 있게 느껴지도록 할 것이다. 와인의 맛 때문인지 아니면 그 와인에 빗대어 상상한 무언가를 꿀꺽 집어삼켰기 때문인지 입꼬리를 들어올린 디아나가 화이트 클라프와 진득이 눈을 맞췄다.
“화이트 클라프, 내가 왜 당신을 선택했는지 아십니까?”
“……이거이거, 스스로 대답하기 쑥스러운 질문을 하시는군요. 제 입으로 스스로의 매력에 대해서 논하라 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화이트는 디아나가 ‘안타리우스’라고 말했던 데 잇달아 두 번째로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못하고 헤맸다.
스물여섯, 거대한 가문의 수장을 맡기에는 연륜도 경험도 관록도 부족해 보이는 나이였지만 나이만이 줄 수 있는 것의 빈자리를 채우고도 남을 정도의 당돌한 영리함이 디아나에게서는 넘쳐흘렀다. 애초부터 화이트의 대답을 바라지는 않았다는 듯이 디아나가 웃으며 자문 아닌 자문에 대한 자답을 이었다.
“당신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 점을 높이 샀습니다.”
“미국에 대항할 이중 스파이로서 가장 적절한 조건을 충족시켰기 때문이 아니라요?”
“조건만 따지자면 당신을 웃도는 인선도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드로스트가 당신을 택한 것은 대중을 사로잡는 당신의 매력, 그건 재력이나 권력 같은 것보다도 훨씬 큰 잠재력을 가지고 가치 있는 결과를 이끌어냅니다.”
“사회 환원을 아끼지 않는 것도 그런 원칙의 연장선상이라 그 말씀이시군요? 다른 부자들이 불편해할 정도로 세계 각처에 기부와 구호를 아끼지 않는 드로스트죠. 물론 그 혜택을 제 달의 서커스단도 받았습니다만.”
“마음이나 생각, 이런 것은 제3자가 볼 때는 지극히 모호하고 불분명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당사자에게는 그만큼 확실한 것도 없습니다. 진실은 중요치 않습니다. 사실은 거짓일지라도 그것을 과반수가 믿느냐 안 믿느냐에 달렸을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짓은 진실로 탈바꿈합니다. 그러니 나는 대중을 매혹하는 능력을 가진 이를 높이 삽니다. 로벤을 대외적인 드로스트의 수장으로 내세운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는 천성이 온순합니다. 가문의 이미지를 선하게 보이는 데는 그만한 재목이 없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씀이 뭔지 알겠습니다. 안타리우스는 비교적 짧은 세월 동안에 두 거대 사이퍼 집단을 뿌리째 뒤흔들 정도로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죠. 사이비 종교라는 건 결국 신도들을 기반으로 형성되는 것, 안토니오 구마스가 대중에게 호소하는 능력이 뛰어났음을 높이 평가하신 거군요. 그가 죽었다고는 하나 수장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그 집단에서 그의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을 테니.”
“그렇습니다. 종교는 매우 강력한 동기죠. 나는 종교 특유의 맹목이 싫지 않습니다. 그들은 ‘길’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습니다. 그건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꺼이 그리하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규율을 어기지 않고 지켜나갑니다. 이미 규율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정도로 체화되어 있는 겁니다. 우리 드로스트는 그런 자들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앞으로 드로스트가 될 인물들도 마땅히 그리되도록 교육하고 있습니다.”
하녀 하나가 저택 본관 뒷문으로 나와 이동식 트레이를 밀며 정자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만찬 코스요리의 첫 시작을 떼는 아뮤즈부쉬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메뉴는 새우살과 아스파라거스에 완두콩 퓌레를 곁들인 관자구이인 듯 싶었다. 하녀는 음식이 담긴 접시를 옮겨오기만 했을 뿐 곧 목례하고는 본관으로 돌아갔다. 음식을 주인과 손님의 앞에 서빙하는 일은 모두 집사 헹크가 도맡아 했다. 빈 잔을 다시 채우는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접촉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재기의 징조를 감출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란듯이 여러 곳에서 행동을 노출시키고는 있습니다만, 접선하신다면 말단이 아니라 제2대 수장으로 유력하고 거론되고 있는 노인의 정부 옥사나 야코비치나 그에 준하는 사도급의 인물을 만나지 않으면 안 될 겁니다.”
“탄야 랜킨.”
디아나는 화이트 클라프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별안간 대화에서 소외시키고 있던 탄야를 불렀다. 화이트는 자기 맞은편에 앉은 탄야를 쳐다보았다. 탄야는 디아나 못지않은 우아한 동작으로 와인을 묵묵히 들이켜고 있었다.
직접 초대해놓고도 불청객인 양 디아나가 탄야를 일부러 무시하는 것은 화이트도 진즉 눈치 채고 있었다. 구태여 구실을 만들어 탄야를 대화에 끌어들이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달의 서커스단을 빛내줄 잠재성을 지닌 아이들을 탐색하고 데려오는 데 탄야의 도움을 많이 받아왔다지만, 그게 디아나의 심기를 거스를 이유는 되지 못했다. 둘 중 하나만 고르자면 화이트에게 버리는 패는 단연 탄야 쪽이었다.
“사냥꾼을 잡기 위해서는 사냥감의 행방을 좇는 것이 지름길이겠죠?”
착석한 뒤로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고 있던 탄야에게 디아나가 도전적인 시선을 보냈다.
헌터에게 헌터를 잡는 방법을 논하다니. 그것도 별다른 능력도 없이 헌터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어중이떠중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탁월한 사냥꾼인 탄야의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디아나는 실로 대담했다. 헌터로서의 탄야의 위명을 디아나가 모를 리 없었다. 실로 노골적인 도발이었다. 아니, 알기에 일부러 했으리라. 화이트 클라프가 겸손으로서 자기를 높이는 방식을 선호한다면, 디아나는 뛰는 이 위에 기어코 날고야 말 위인이었다.
“헌터의 시선 끝에는 말씀하신 대로 보통은 사냥감이 있을 테죠. 허나 잡는 자로서 잡히지 않으려는 자의 꾀를 꿰뚫어보는 헌터는 역으로 잡히지 않는 방법을 누구보다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헌터의 적은 헌터, 자기 사냥감을 다른 사냥꾼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미끼를 뿌려놓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대체할 만한 것이 있어야 가능한 수법이 아닌가요, 그건? 「액자」처럼 희귀한 물건은 눈속임으로도 복제가 불가능하지요.”
여유롭게 입가에 미소를 걸고 있으면서도 피차 눈에서 힘을 빼지 않고 서로를 응시하는 디아나과 탄야였다. 자기는 모를 까닭으로 신경전을 벌이는 두 사람으로 인해 이번에는 탄야가 아니라 자기가 소외당할 차례인가 하는 위기감이 문득 화이트에게 들었다. 그런 위기의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방금 디아나가 한 말에 화이트가 짚고 넘어갈 중요한 사안이 있었기 때문에 화이트는 대화로부터 용케 밀려나지 않을 수 있었다.
“설마 시바 포에게서 액자를 탈취하여 그걸로 안타리우스를 꾀어낼 생각이십니까?”
“시바 포와 여러 번 접촉을 시도해보았습니다만 역시 뛰어난 암살자답게 종적을 감추는 것이 능숙하더군요. 아까운 드로스트의 인재만 몇 잃었습니다. 허나 개의치 않습니다. 나는 그녀가 미국으로 가서 그 나라에 갈등의 싹을 틔워준 것에 대해 오히려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현 상태가 우리 가문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한 그녀의 심기를 굳이 거스를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안타리우스가 액자를 되찾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죠. 다음대 수장이 정해지지 않고 있는 유예기간이니 만큼 더욱 포가 가지고 달아난 성물을 되찾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을 겁니다. 내가 안타리우스에 보낼 선물은「액자」의 가능성을 지닌 또 다른 그림자 능력자입니다.”
“……아아- 과연. EMPRESS, 트리비아 카리나입니까.”
“음? 왜 그러시죠? 선물에 부적당한 요소라도 있습니까?”
턱에 손을 얹더니 시선을 모로 돌리며 뭔가 골똘히 생각에 빠지는 화이트에게 디아나가 물었다. 화이트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과장되게 으쓱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안타리우스에 그녀를 선물하는 데 대해 이견이 없는 것은 물론입니다. 아아, 그래서 오늘 랜킨과의 동행을 허락하셨던 거군요. 이 일이야말로 솜씨 좋은 헌터에게 맡겨야 할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헌터 탄야, 트리비아 카리나를 내 앞에 데리고와줄 수 있겠습니까? 보수는 얼마를 부르셔도 좋습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지원은 아끼지 않겠습니다.”
“후후후- 물론입니다. 아주, 아주 쉬운 일이라고 봐도 될 것 같군요. 밤의 여왕을 제 발로 덫으로 걸어 들어오게 할 만한 미끼는 이미 제 손아귀에 있는 것과 다름없으니까요.”
디아나의 아름다운 미간이 순간 일그러지는 것을 탄야는 놓치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할 테지. 탄야는 속으로 웃었다. 탄야가 말한 ‘미끼’가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차렸기에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다.
“수많은 제3세력들이 제2의「액자」를 갈망하며 그림자를 열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이동하는 능력을 지닌 트리비아 카리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실 겁니다. 외람되지만 드로스트 가문도 그 중의 하나일 거라 짐작합니다.”
“숨길 것도 없습니다. 사실입니다. 줄곧 눈을 떼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안타리우스에 건넬 선물로 다른 후보를 생각할 여지도 없이 그녀가 물망에 오른 것입니다.”
“그녀는 저와 같은 어둠의 능력자 아이 하나와 각별한 친교 관계를 맺고 있죠.”
“……미쉘, 모나헌 말이군요.”
아인트호벤 고아원, 탄야가 어둠의 능력자로서 거둔 아이들 대부분이 그곳 출신이었다. 그 고아원이 사실은 드로스트 가문 산하에서 비밀스럽게 운영되었던 사이퍼 양성기관이었음을 아는 것은 드로스트 가문의 당사자들과 탄야뿐이다.
어둠의 능력자 아이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불우하게 만든 이들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어둠으로부터 벗어나 한 줄기 빛을 붙잡기 위한 단서를 끊임없이 찾아 헤맸다. 그 고아원에서 자기들을 빼내준 탄야가 다시금 그 고아원으로 돌아가는 것과 다름없는 더욱 큰 절망을 맛보게 하려는 줄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디아나는 탄야가 과거에 드로스트 가문을 방해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드로스트 가문에 오점을 남겼기 때문에 처단해 마땅한 대상일 테지만 그녀는 언제나 가문을 이익을 우선시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탄야가 드로스트 가문에 협조적으로 나오는 이상 기꺼이 이용해주리라는 심산일 것이다.
탄야로선 디아나의 계산속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가 추구하는 것은 오로지 꽃처럼 피어나는 악의 향연, 실낱같은 희망마저 끊기고 더 이상 헤어날 수도 없는 절망에 허우적거리는 인간의 모습을 보는 것이 그저 즐거웠다. 까미유 데샹이 위선자(僞善者)라면 탄야 랜킨은 더할 나위 없는 위악자(爲惡者)였다
“그 아이를 인질로 잡으면 트리비아 카리나를 꾀어내는 것은 시시할 정도로 쉬운 일이 될 겁니다. 아, 원하신다면 트리비아 카리나뿐만이 아니라 미끼로 사용할 미쉘 모나헌 역시 당주님의 앞에 바치도록 하죠. 그 아이는 자아가 불안정하기는 하지만 아주 강한 염동 능력자입니다. 드로스트 가문의 일원으로서 교육시켜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조선에서 입양해왔다고 하는 동양인 아이와 마침 또래이고 하니 좋은 벗이 되지 않을까요?”
“……그 제안은 차차 생각해보도록 하죠. 당면한 과제부터 해결하고 나서 말입니다.”
아까 전의 디아나의 도발에 앙갚음이라도 하듯 탄야는 당장 이 자리에서 디아나의 채찍에 갈기갈기 찢겨도 모자라지 않을 말들을 뱉어냈다. 공격해온다면 순순히 당해줄 리는 물론 없겠지만 그 정도로 디아나의 심기를 아주 노골적으로 거스르는 말로 가득했다.
화이트 클라프는 두 사람의 마찰의 원인이 미쉘 모나헌, 더 나아가 어둠이 능력자와 관련된 무언가라는 것을 방금 오간 대화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었다. 오히려 탄야가 일부러 디아나에게 보란듯이 화이트에게 단서를 흘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디아나가, 정확히는 드로스트 가문이 다른 사람에게 들키고 싶어하지 않는 어떤 치부를 넌지시 광고하는 것처럼.
화이트는 속으로 경탄의 웃음을 자아냈다. 천하의 드로스트 가문의 당주조차도 거스를 수 있는 매서운 독전갈, 역시 탄야 랜킨은 보통이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위험천만한 패지만 끝내는 버릴 수 없을 터였다. 그녀는 어떤 카드로든 바뀔 수 있는 조커였으므로.
“자자- 그럼 여기서 제가 두 승리의 여신께 건배를 청하도록 하죠. 위대한 드로스트 가문과 마술사 화이트 클라프 그리고 헌터 탄야의 뜻 깊은 첫 공동작업의 성공을 기원하며―.”
화이트가 클라프가 허공으로 내민 잔에 디아나와 탄야의 잔이 와 닿아 하나로 합쳐지며 챙그랑하고 경쾌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축제의 서막을 알리는 기분 좋은 신호음 같기도 하고, 중요한 무언가가 산산조각 나는 파열음 같기도 했다. 오찬의 참석자 중 누구 하나 그 소리에서 어떤 징조를 읽어낼 생각은 하지 않고 각자의 상념을 안은 채 와인을 들이켜기만 했다.
Fin.
*
- 이 뒤에 이어질지도 모르는 긴 이야기의 외전격 도입부 같은 무언가
- 이 이야기에 쓰인 소재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사실과 상상은 읽는이가 스스로 가려가며 읽읍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