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퍼즐(Mem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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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3 11:5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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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픽션(fiction)입니다. 특정 단체ㆍ사건ㆍ사상ㆍ종교와 무관함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 For. 하랑별 ~
퍼즐은 오늘도 미완성이었다. 아이작은 도넛홀처럼 퍼즐 그림 한가운데 뻥 뚫려있는 불완전함을 바라보며 짐짓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레나는 테이블을 가득 메운 퍼즐 그림에 난 구멍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푸른 눈동자다. 스스로의 감정을 감추는 일이 능숙한 포커페이스라서가 아니라 정말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기 때문에 자아낼 수 있는 눈빛이다. 기억을 잃어버린 강화인간만이 발할 수 있는 특유의 빛깔이었다.
수장 안토니오 구마스가 죽고서 안타리우스가 와해된 것처럼 보였던 그 시기에 잠깐 우리 밖을 벗어났다지만 금세 다 잊고 예전의 토끼로 돌아왔다. 레나가 덮어버린 판도라의 상자를 해금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열쇠인 카인 스타이거가 그에게는 절호의 기회였을지도 모르는 그 때 그녀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것이 토끼가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운명의 효시 같아서 당시 아이작은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한참을 미완성의 퍼즐 그림을 바라보고 있던 레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다짜고짜 아이작의 방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침대, 테이블과 의자 두 개, 작은 옷장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살풍경한 방이다. 뒤질 곳이 얼마 안 된다.
레나는 자신이 무얼 하는지도 전혀 모르는 얼굴로 방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우선은 침대부터, 명백히 1인용 침대지만 늘 레나가 아이작의 팔 안에 갇혀 잠드는 곳이기도 하다.
강화인간에게는 원칙적으로 사실(私室)이 없다. 독방을 지닌 강화인간은 아이작을 제외하고는 13사도 중의 하나인 제키엘 정도였다. 보통은 군대 내무반 내지 병원처럼 열댓 명 내외로 한 숙소에서 단체생활을 한다. 훈련-식사-강화-수면 이외의 사생활이란 게 없다. 사적일 수 있을 만한 자아 자체가 희미해진 존재들이니.
스텔라처럼 전부 기억하고 있지만 잃은 척 연기하고 있는 앙큼한 예외도 있긴 하다. 그걸 속여 넘기기 위해 더욱 철저히 자아 없는 군중 속에 소리 없이 묻혀 있는 무서운 여자였다. 사도놈은 제 누나가 그러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제 아무리 대단한 사도 제키엘이라지만 놈은 스텔라에게만은 태도가 달랐다.
사도가 아닌데도 아이작에게 개인적으로 방이 주어진 것은 아이작이 일종의 강화인간들의 감시관 같은 자리에 있는 까닭이다. 누가 임명해준 적은 없고, 스스로가 원한 것도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그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직급이 아니라도 가면을 벗기 위해서는 사적인 공간은 필수였다. 기억을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다른 이들 앞에서 맨 얼굴을 보일 수 없었다. 아직도 모든 것을 생생히 기억하는 지금은 가면이 얼굴이다. 거짓(假) 얼굴(面)이 아니라 아이작에게는 정말로 참된 얼굴이다.
안타리우스의 사신 아이작이 강화인간 1호 레나에게 집착한다는 사실은 이미 안팎으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아이작은 망각에 철저히 사로잡혀있는 레나를 감상하는 것을 즐겼다. 기억을 잃어버린 강화인간은 그밖에도 있다. 그럼에도 레나여야만 하는 것은 그녀야말로 완벽한 망각인 까닭이다.
“토끼.”
침대 시트는 물론 옷장 안, 개가 냄새를 추적하듯 바닥 구석구석까지 기어가면서 없는 마지막 조각을 찾아다니는 레나를 아이작이 불렀다. 레나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바닥을 무의미하게 훑던 손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작에게로 다가왔다.
“…? 당신은 누구입니까? 성문(聲紋)은 REVIVAL과 같지만 안면은 다르게 인식됩니다.”
“큭큭큭- 그래. 바로 그거지. 그거야, 토끼.”
아이작은 벗고 있던 가면을 도로 썼다. 그제야 갸웃거리고 있던 고개를 바로하고 레나는 아이작을 알아보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작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레나의 허리를 왼팔로 휘어감아 끌어당겨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레나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눈만 깜빡이다가 살며시 아이작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동이다. 기억을 잃은 이에게는 의도라는 것이 없다. 본능, 습관 또는 훈련의 성과가 행동으로 나타날 뿐이다. 이렇게 무릎 위에 앉힐 때면 레나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품에 얌전히 안겨들어 잠이 들곤 했다. 실제로 누군가를 떠올리며 한 행동은 아닐 테지만, 기억을 잃기 전의 흔적임에 틀림없을 거란 생각에 분노가 치밀고는 했다. 레나의 목덜미를 홱 잡아채서 바닥에다 내팽개치고 싶은 기분이다. 허나 아이작은 레나의 머리를 가만히 쓸어주기만 했다.
짧디 짧은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걸려드는 일이 없다. 여성체 남성체를 불문하고 강화인간의 머리카락은 레나처럼 짧게 깎인다. 긴 머리카락은 시야를 가려 전투에 방해된다는 이유였다. 질끈 묶고 다닌다지만 풀면 허리까지 올 정도로 긴 스텔라의 머리카락은 제키엘이 조장한 예외였다. 덕분에 스텔라는 기묘한 빛을 발하는 눈깔 때문이 아니라도 여러모로 눈에 띄었다.
가끔 앞장서가는 스텔라의 뒤통수에서 흔들거리는 포니테일을 볼 때마다 뽑아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고는 했다. 그런 짓을 했다간 사도놈이 어떤 지랄발광을 할지 몰라 귀찮아서 관뒀을 뿐이다.
쌍으로 기억을 지우지 않은 남매는 볼 때마다 아이작의 성질을 돋웠다. 기억을 지우고 싶은 아이작에게 일부러 잊지 않으려고 애쓰는 두 헌팅턴이 걸리적거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이작은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맞춰진 퍼즐을 내려다보았다. 연인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함께 강변을 바라보는 장면이 담긴 그림이다. 모자란 마지막 한 조각은 연인의 손이 포개져 있어야 하는 딱 그 부분이다. 심술궂기까지 한 미완성이다.
지금은 아이작이 직접 죽여 치운 뒤지만 한 안타리우스 소속 능력자가 강화인간들을 불쌍히 여겨 오락거리용으로 던지고 간 퍼즐이었다. 자아가 없으니 놀이에 관심 있을 리도 없는 강화인간들은 잠깐 들춰보기만 했을 뿐 맞추려고 들지는 않았다. 유일하게 레나만이 무슨 연유인지 퍼즐을 맞추고 또 맞췄다. 이제는 외울 법도 하건만 언제나 처음 맞춰보는 것처럼 오랜 시간을 들여 맞춘다.
레나가 퍼즐을 맞추는 것을 감상하고 그렇게 다 맞춰진 퍼즐을 다시 엉망진창으로 흩어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이 아이작의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였다. 레나가 퍼즐을 맞춘다. 아이작은 그것을 뭉개뜨린다.
아이작이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퍼즐을 흩어놓으려는 순간 예고도 없이 벌컥 방문이 열렸다. 물론 문은 잠가두었다. 이 무례한 방문자는 걸쇠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드나들 수 있는 마스터키를 보유한 몇 안 되는 인물 중의 하나라는 말이 되었다. 또각또각 거슬리는 하이힐 소리를 내며 방으로 들어서는 것은 강화인간 제조자, 소위 ‘어머니’ 옥사나 야코비치였다.
“노크는 매너를 가진 문명인의 기본이지, 어머니. 그 좋은 머리로 이 아들의 간언을 알아듣지 못했을 리는 없고, 일부러 묵살하는 건가? 그런 건가? 응?”
“어머- 내가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했나? 그나저나 아쉬운 걸. 오늘은 네가 가면을 벗고 있는 무방비한 모습을 포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늘도 실패했네. 이 어미가 아들 얼굴을 다 까먹게 생겼는 걸.”
“…….”
아이작은 가면 속 얼굴을 있는 대로 구겼다. 품에 레나만 없었어도 당장에 저 예쁘장한 얼굴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반대편 벽으로 처박아버렸을 것이다. 아니, 이는 감미로운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레나가 있든 없든 아이작은 옥사나를 결코 죽일 수가 없었다.
아이작이 가면을 쓰기 시작한 건 강화인간 개조를 받은 뒤였다. 원래부터 사이퍼였다. 능력자와 동등한 수준으로 비능력자의 신체 능력을 끌어올리는 강화 개조를 받을 필요는 없었다. 다만 기억을 지울 수 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강화인간이 되는 일을 선택했다. 나의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아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되도록.
불행하게도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기억은 찰거머리처럼 머릿속에 들러붙어 떨어져나가지 않았다. 제키엘처럼 기억을 남겨두기를 바란 것도 아닌데 저주처럼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다. 대신 가면으로 얼굴을 덮어버리고, 자신의 얼굴이 찍힌 예전 사진 기록을 전부 무단으로 말소시켰다. 아이작의 맨 얼굴 운운하다가 그 자리에서 시체가 되어 나뒹구는 이들이 속출하자 더 이상 아무도 사신의 과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다만 가면을 뒤집어썼을 뿐이고, 그 안에 얼굴이 그대로 남아있음에도 가면 속의 얼굴은 이제 과거였다.
옥사나는 아이작의 가면 뒤를 기억하는 이들 중에서 유일하게 거리낌 없이 말해도 죽임 당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옥사나는 아이작이 자기만큼은 건드릴 수 없음을 알고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도발을 일삼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친히 이 누추한 곳에 왕림을 다 하시고. 여왕 기분 내려면 권위도 좀 부릴 줄 알아야지. 직접 행차하는 것보다 사람을 시켜 불러들이는 것이 여왕답다고 생각하지 않나? 아, 진짜 여왕이 아니라 모르는 건가. 안토니오 구마스는 살아생전 오로지 액자 속을 날아다니는 그림자의 여왕 트리비아 카리나에게만 집착했었지. 결국 어머니는 첩이라 그건가. 그렇다면 강화인간들은 모두 사생아인 셈이군. 이런 근본 없는 콩가루 집안 같으니라고. 멋지군, 멋져! 음흐흐―.”
예쁘장한 얼굴이 삽시간에 추악하게 일그러지더니 옥사나가 품 안에서 형광색 액체가 든 주사기를 꺼내 아이작의 목덜미에 꽂아 넣으려고 했다. 아이작은 왼팔로 가볍게 그 악에 받친 공격을 막았다.
“품위를 지키셔야지? 다음 수장으로 유력하게 지목되는 사람이 이렇게 감정적이어서야. 지금은 가짜라도 노력하다 보면 진짜에 한없이 가까워질지 어찌 알겠는가? 이렇게 단순한 ‘장난’에 일일이 반응해서는 곤란하지.”
“건방진 것! 명심해. 네 기억을 지워줄 수 있는 것은 나뿐이라는 걸. 네가 품 안에 소중히 안고 있는 그 아이처럼 말이야.”
“아아, 물론이야. 아침에 눈 뜨고 잠드는 순간까지 매일 마음에 새기고 있지. 그러니 어머니의 분부를 받잡아 하달 받은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지 않나? 칭찬을 해줘도 모자랄 판인데 말이야. 죽은 아버지와의 불화를 애꿎은 자식에게 해소하는 게 올바른 가정교육방법은 아니잖아? 안 그런가? 음흐흐- 부디 하루 속히 내 기억을 지워달라고. 물론 기억 때문에 내가 지금만큼 강하지 않게 되는 불상사는 없게 하라고.”
“…….”
옥사나는 안 그래도 찡그리고 있는 얼굴을 한층 더 찌푸리며 아이작에게 붙잡힌 팔을 홱 빼냈다. 방금 전의 도발이 옥사나의 내밀한 감정을 건든 것이었다면, 방금 것은 능력자 내지 과학자로서의 옥사나의 자존심을 긁은 거였다.
옥사나의 강화인간 개조 프로젝트의 대전제는 기억을 지움으로써 감정을 거세하면 오로지 명령만으로 움직이는 살인병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모든 기억을 말소당한 강화인간들은 개조받은 신체 능력에서 비롯되는 일당백의 전투력을 기반으로 살육에 거리낌이 없게 되었다. 그마저도 ‘기억이 남아있는 개체’에 비해서는 약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강화인간 연구이론의 기둥을 뿌리째 흔드는 대표적인 예가 제키엘, 스텔라 그리고 아이작이었다.
기억을 지니고 있어 때로는 성가신 존재들인데도 안타리우스에 혁혁한 공을 세우는 이 예외들을 옥사나로서는 무시할 수 없었다. 예외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을수록 당연히 학설의 신빙성은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들을 볼 때마다 옥사나가 심기 불편해 한다는 것을 아이작은 알고 있었다.
제키엘은 의심할 여지없이 안타리우스의 골수 신봉자지만, 놈은 옥사나를 차기 수장으로서라기보다는 안토니오 구마스의 최측근 정도로만 경의를 표한다. 노인을 제외한 그 어떤 누구도 섬길 의지가 실상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액자의 주인으로서 액자를 통해 이적을 행하는 또 다른 이가 나타나면 몰라. 스텔라는 임무 수행은 착실히 하지만 역시나 남동생 생각밖에 없었다.
그 둘보다 문제인 게 아이작 본인임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안타리우스에게 공헌하고자 하는 갸륵한 생각은 추호도 없다. 소속감도 옅다. 강화 개조를 받았는데도 기억을 지우지 못하고부터 그 경향은 더욱 노골적이게 되었다. 명백한 화풀이였으며 이 꼴 보기 싫으면 어서 기억을 지워달라는 떼쓰기이기도 했다. 옥사나에게도 아이작은 연구자로서의 패배감 내지 굴욕을 안겨주는 산 증거와도 같았다. 서로를 향한 죽도록 강렬한 살의만이 이 우스운 모자지간에 존재였다.
“흥- 그토록 기억을 지우고 싶으면 기억이 없는 척이라도 하고 다닐 것이지, 그렇게 자아가 뚜렷하다는 걸 동네방네 떠벌리고 다니는 건 뭐람? 그런 태도야말로 오히려 기억소거를 방해하는 거라고는 생각 안 해? 레나에 대한 네 심상찮은 집착만 해도 그래. 자아가 생생하기에 집착이란 것도 하는 거지. 그렇게 껴안고 있으면 그 아이의 강한 망각이 네게로 옮을 것 같기라도 하니?”
“……어머니, 가끔 망각을 포기하고서라도 당신의 사지육신을 찢어 죽이고 싶을 때가 있어.”
“가끔? 어머나- 고마워라. 자주가 아니라서 정말이지 눈물겹게 고맙구나.”
옥사나는 최종적으로 상대를 조롱하는 대결에서 승리했다고 믿는지 깔깔거리며 팔에 끼고 있던 두툼한 파일을 테이블 위로 내팽개쳤다. 그 충격파에 퍼즐이 흩어졌다. 다른 이의 손에 레나가 맞춘 퍼즐이 어그러졌다는 불쾌함에 그 어느 때보다는 진심 어린 살의가 솟구쳤다. 허나 안타깝게도 아이작에게는 아직 대상이 누군지를 가려가며 살해 욕구를 억누를 수 있는 자의식이 똑똑히 살아 숨쉬고 있었다. 무심코 격노로 떨릴 것 같은 손에 힘을 꽉 주며 파일을 들춰보았다.
“자아, 네가 제일 좋아하는 임무야. 기억을 되찾고 탈주한 강화인간들을 잡아들이는 일.”
“오호라- 간만의 청소부 일인가? 배신자 쓰레기들을 처리하는.”
“생포하지 않아도 돼. 죽여서 시체만 가지고 귀환해. 해부한 뒤에 소각해버려야지.”
아이작은 서류를 넘기다가 자신이 죽여서 끌고 와야 할 대상을 확인하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흐음, 이 녀석은 강화인간 2호가 아닌가. 좀처럼 안 보인다 싶었더니 드디어 덜미가 잡혔다 이거군.”
“아까워. 초기 시리즈가 제일 걸작이 많은데 말이야. 다들 레나처럼 좀 얌전하면 좋을 텐데.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 구석도 있지만 레나야말로 내 최고의 걸작이라 할 수 있지. 네가 예뻐하는 것도 이해해. 그녀야말로 네가 진실로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야. 진부한 표현을 빌리자면 희망의 등불 뭐 그런 건가?”
“이번 임무엔 토끼를 데려가겠어, 어머니.”
옥사나는 또 다시 아이작의 신경을 살살 긁을 요량으로 내뱉은 말에 예상반응이 나오지 않자 짜증이 난 얼굴로 아이작을 흘겨보았다. 이윽고 왜 레나를 데려가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강화인간 2호와 1호는 꽤 친했거든. 친구의 임종 정도는 지키게 해주려는 이몸의 사소한 배려라고나 할까.”
“어머, 그야말로 사신이란 이름이 아깝지 않은 악행이네. 그치만 진심은 2호가 네 손에 무참히 살해당하는 걸 보고도 레나한테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싶은 것뿐이면서.”
“재단의 독심술사 애송이 저리 가라군, 어머니. 큭큭큭-.”
“애들이 날고 기어봤자 부모 손바닥 안이지.”
옥사나는 볼일 다 봤다는 듯 아이작의 방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아, 한 가지 좋은 걸 가르쳐줄까?”
까먹은 게 있다는 듯 옥사나가 뒤를 돌아보며 제안하듯이 물었다. 아이작은 옥사나가 또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는지 경계의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아이작 네가 직접 2호를 처리하는 것보다는 토끼를 시켜서 죽이게 하는 게 훨씬 재미있지 않을까?”
그 말을 남기고는 옥사나는 깔깔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아이작은 아연해 있다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크크큭…크하하하―! 역시 어머니 당신은 최고야! 지상 최고의 악마라고! 멋져! 음흐흐흐―.”
아이작은 있는 대로 웃어젖히다가 불시에 딱 멈추고는 이를 까득 갈며 있는 힘껏 테이블을 내려쳤다. 그 서슬에 퍼즐 조각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레나는 그새 깊은 잠에 빠졌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로 계속 잠들어 있었다.
* * *
카인은 초조하게 펍의 출입구를 곁눈질하며 술을 들이켰다 평소부터 좋아해서 즐겨 마시던 럼이건만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고 취기조차 오르지 않았다. 술이 아니라 되레 강력한 각성제라도 되는 것처럼 문으로 쏠린 신경은 자꾸만 날카롭게 곤두섰다.
문이 열리는 소리만 났다하면 스툴이 뒤로 발라당 엎어질 기세로 일어섰다가, 들어서는 인물이 기대하던 사람이 아님을 확인하고 실망하고서 다시 자리에 않기를 수차례 반복하고 있었다. 아직 약속시간까지 15분도 더 남았다는 것을 카인 역시 모르지 않았다. 펍 개점 직후부터 눌러앉아 벌써 몇 시간째 한 자리를 전세 낸 것처럼 지키고 앉아 있었다.
문이 열리는 횟수를 세는 일도 포기했을 무렵, 그래도 그 사이 학습된 조건반사 반응처럼 문소리가 들리자 카인은 문에다 홱 시선을 꽂았다. 수명을 단축시키는 기다림이 마침내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웨슬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서울 정도로 강렬한 눈길을 보내는 전우를 보며 웨슬리는 쓰게 웃으며 다가왔다. 카인이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음이 일목요연했는지.
“미안하이. 내가 늦었군.”
“……아니, 내가 빨리 왔을 뿐이야.”
“그냥 술 한 잔 하자는 약속으로 해둘 것 그랬나. 급작스레 중대한 사안을 들었다간 자네 심장에 무리가 갈까봐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뜻으로 전화로 용건을 이야기해둔 건데. 오히려 자네를 10년은 더 일찍 늙게 만들어버린 건 아닌가 싶군.”
“싱거운 소리를. 그보다-.”
“워워- 급한 건 알지만 벗이 목을 축일 시간조차 주지 않을 셈인가.”
“……그렇군. 미안하네.”
“그렇게 진지하게 사과하면 내가 도리어 머쓱해진다네. 자, 우선 여기 자료부터 받게. 부가 설명은 차차 해줄 테니.”
웨슬리는 카인에게 서류봉투를 건네주고 마스터에게 위스키를 주문했다.
카인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음에도 막상 선뜻 열어보지는 못했다. 서류를 꽉 틀어쥔 채로 겁에라도 질린 것처럼 웨슬리를 바라보았다. 웨슬리는 초 단위로 생사가 갈리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의연하기만 했던 전우가 이럴 때마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연인, 이사벨과 관련된 일이라면 누구보다 강인해질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한없이 나약한 사내가 되어버리는 것이 카인 스타이거였다.
웨슬리는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카인은 그제야 무슨 허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떨리는 손으로 서류 봉투를 들춰보았다.
“이건…….”
카인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서류에 기재된 사실을 정신없이 읽어 내려갔다. 웨슬리가 입수해온 정보는 안타리우스에서 탈주한 강화인간 2호로 추정되는 여성에 관한 정보였다.
카인은 주로 독자적으로 이사벨, 그러니까 세간에는 강화인간 1호로 알려진 레나의 행방을 찾아 헤맸다. 카인이 비능력자임에도 능력자들의 전쟁에 끼어든 이유도 오로지 안타리우스에 사로잡힌 레나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개인이 긁어모을 수 있는 정보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지만 카인은 끝끝내 소속을 거부했다. 드니스가 헬리오스로 들어오라고 권했었다. 나이오비 역시 성향상으로 지하연합이 잘 맞을 거라고, 소속세력을 등에 업는 편이 레나를 찾기에 수월할 거라고 조언했다. 확실히 회사보다는 연합이 체질에 맞을 테지만 그곳에는 얼굴 마주치기가 영 껄끄러운 은발 애송이가 있어서 곤란했다.
개인적인 애로사항이 아니라도 소속은 카인이 이사벨을 되찾는 데 걸림돌이 될 거라는 전망이 있었다. 안타리우스는 사이퍼계의 공공의 적이다. 오랜 세월 반목하던 회사와 연합마저도 손을 잡게 했다. 카인에게도 그들은 철천지원수 그 자체지만 이사벨이 어찌됐건 안타리우스의 강화인간이라는 것은 사실이었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간병기로 개조당했다고는 하나 그런 사정을 세상이 고려해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카인은 반드시 혼자 힘으로 이사벨을 되찾아야 했다.
웨슬리가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독자적인 정보망을 통해서 카인에게 이사벨과 관련된 정보를 물어다주었다. 그 대가로 카인 역시 웨슬리를 위하여 은밀한 일들을 처리해주거나 했다.
웨슬리가 은퇴한 미군 장교 그 이상의 것임을 카인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다. 허나 결코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다. 웨슬리에게는 카인의 그런 점이 마침 형편이 맞아서 다른 사람한테는 맡길 수 없는 일들을 부탁하는 것이리라.
웨슬리는 분명히 생사고락을 함께한 피의 전우지만, 절대로 사기 치지 않는 끈끈한 거래관계이기도 했다. 카인은 이사벨만 되찾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으며, 웨슬리는 막강한 배후 권력을 쥐고 있는 만큼 입이 무섭고 실력이 뛰어난 사수가 필요했다. 카인 스타이거와 웨슬리 슬로언은 그렇게 둘도 없는 친구다.
“그 여자가 정말로 강화인간 2호인지 어떤지는 확실하지 않네. 늘 그래왔듯이 안타리우스의 강화인간임을 자처하고 나섰던 이는 한 명도 없었으니까. 강화인간들의 감시자인 검은 사신의 보복이 두렵기 때문인지……. 오히려 회사든 연합이든 아니면 그랑 플람 재단에라도 신변 보호를 요청하는 편이 오히려 배신자로서 안타리우스의 손에 처리당할 확률이 지극히 낮아질 텐데 말이야.”
“……자유를, 추구하는 게지.”
“자유?”
웨슬리가 또 한 모금 위스키를 들이켜려다 말고 카인의 착 가라앉은 말에 되물었다. 카인은 한동안 굳게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안토니오 구마스의 사후 잠깐이나마 안타리우스가 와해되었던 그때, 많은 강화인간들이 탈주했지. 희미한 기억이나마 더듬어 제각기 고향으로든 어디로든 달아났어. 언제 사신에게 잡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있을지언정 더 이상 짙은 안개 속을 걷는 기분이 아니었을 테지.
회사나 연합에 보호를 요청했다면 어느 세력이든 반드시 조건을 내걸었겠지. 안타리우스에 관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대가로 지켜주기로. 그런 건 보호라는 이름의 감시일 것이 자명해. 강화인간에 관한 데이터를 뽑히기 위해 그는 또 다시 안타리우스에 있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차디찬 실험대 위에 올라야 할지도 모르지. 숭고한 길 재단이 주도한 작전 <일곱 개의 변주곡>에서 확보한 클론들이 지금 딱 그 짝 아닌가?
안타리우스를 쫓기 위해 전 오스트리아 황실호위대장 제레온 프리츠가 설립한 검의 형제 기사단에 속한 홀든가의 둘째도 강화인간을 그저 쓰다 버리는 부속품 정도로밖에 보지 않는다고 하더군. 얼마든지 교체 가능한 대체재로서. 난 절대로 이사벨이 그런 꼴을 당하게 하진 않겠어. 세상 모두를 적으로 돌린다 할지라도 그녀만큼은―.”
“사과하겠네. 자네 심정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경솔한 말을 했군.”
“아니. 자네 말에는 틀린 게 하나도 없어. 나 역시 이사벨밖에 생각하지 않으니까. 나머지 강화인간들은 실은 어찌되든 상관없노라 그리 쉽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런가.”
웨슬리는 카인에게 잔을 들어보였다. 카인도 웨슬리가 온 뒤로 내버려두고 있다시피 했던 잔을 집어들고 함께 부딪었다. 반 잔 정도 남은 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미뤄두었던 취기가 이제야 한꺼번에 밀려오기 시작하는지 몸이 이상하게 들떴다. 아니, 취기라기보다는 이사벨에게 한 걸음 가까워졌다는 섣부른 기대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여자를 찾아갈 건가?”
“물론이지.”
“설령 그녀가 강화인간 2호가 맞다 해도 변변한 정보 하나 못 얻을지도 모르네.”
“실망하는 데는 이미 익숙해. 어떤 작은 단서라 할지라도 아무 지침 없이 오리무중을 걷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
카인은 서류를 도로 봉투 안에 고이 넣었다. 별안간 극한에 내던져진 것처럼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려왔다. 주체할 수 없는 자신의 손을 애달픈 눈길로 내려다보다가 기도하듯이 꽉 깍지 껴 마주잡았다. 스스로 붙잡아두는 것은 소용이 없는지 손아귀 안에서 떨림은 더욱 크게 아우성칠 뿐이었다. 카인은 소리 없는 절규를 손 틈새로 불어넣듯이 주먹 위로 입술을 꽉 억눌렀다.
“……슬로언, 나는 두렵네. 이사벨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여전히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두렵네…!”
카인은 눈을 질끈 감으며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진심을 토해내었다.
이사벨을 찾아 헤매다 마침내 눈앞에 마주했을 때의 그 환희는 카인 인생 최대의 것이었다. 동시에 가장 극심한 좌절이기도 했다. 이사벨은 이사벨이었으되 강화인간 1호, 레나였던 것이다. 카인이 그녀를 알아보든 말든 레나는 기계처럼 “명령을 수행하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서슴지 않고 카인을 공격했다. 끔찍한 강화실험을 당한 터라 별수 없다 그리 이해해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내 얼굴을 보면 그래도 무언가 어렴풋이 떠올려주리라 안일하게 했던 기대가 배반당한 아픔은 생각보다 컸다.
그 날 이후로 악몽의 내용이 바뀌었다. 이사벨을 만나기 전에는 전쟁후유증이 도져 언제나 비명과 피와 화약 냄새가 난무하는 전쟁터에 다시 서는 꿈을 꾸었으나 그녀로 인해 더 이상 그 꿈은 꾸지 않게 되었다. 이사벨을 잃고 나서는 그녀를 거듭해서 놓치고 마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이 겨우 이사벨을 만났건만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그녀의 공허한 푸른 눈동자만이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기묘한 꿈으로 변했다.
언젠가 웨슬리와 함께 미쉘 모나헌을 만났던 기억이 새삼 되살아났다. 강한 염동력의 기운에 의해서 하얗게 타버린 그 눈은 레나를 연상시켰다. 흰 자위와 눈동자의 구분이 없는 인형 같은 허무한 눈동자. 레나처럼 자신을 보고 있으되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그런 눈이라 보고 있기 힘들었다. 그 소녀에게는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었으리라 생각하지만 그 눈을 보자마자 굉장히 싫은 것을 본 듯 시선을 홱 돌리고 말았다.
웨슬리는 말없이 카인을 바라보다가 모아 쥔 그의 두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얹었다. 카인은 타인의 온도가 와 닿자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열고 웨슬리를 보았다.
“그래도 그녀의 기억을 되찾아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오직 자네뿐이지 않은가. 그렇지 않나?”
웨슬리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하는 말에 카인은 왈칵 울음이라도 치밀 것 같아 입을 앙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목 안에서 가래처럼 들끓는 어떤 감격을 가까스로 삭이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깍지 끼고 있던 손에서 한 손을 갈라내 웨슬리의 손 위에 포개고 힘주어 잡았다.
“암, 그렇고말고…!”
희망은 부질없는 것이다. 거듭 기대를 배반당하고 절망을 맛볼 때마다 그리 확신하면서도 또 다시 또 다른 희망에 쉬이 들뜨고 만다.
‘살라는 계시입니까. 신이여, 당신은 내게 지금 살라고 명하시나이까?!’
카인은 자신의 손 위에 있는 웨슬리의 손에서 보이지 않는 신을 느꼈다.
떨림은 그새 멎고 없었다.
* * *
아이작은 달빛이 내리쬐지 않는 응달 안에서 기척을 죽이고 있었다. 곧 아이작을 따돌렸다고 생각했는지 한결 안심한 얼굴로 난간을 타고 올라와 사뿐히 옥상 위에 착지하는 강화인간 2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미 같군. 건물 외벽을 타고 기어올라오는 꼴이 말이야. 음흐흐―.”
그런 강화인간 2호를 보고 맘껏 비웃으며 아이작은 월광의 양지로 나와 제 그림자를 드리웠다.
상대가 방심하는 순간 단숨에 의표를 찌르는 이 쾌감은 이루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 동시에 조울증처럼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같이 찾아왔다. 구태여 잊은 기억을 되살리려 무던히도 애쓰며 돌아가기 위해 도망치는 강화인간들이 노여운 것이다. 아이작이 다만 갖고 싶었던 단 하나, 망각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발버둥이 보기 싫었다. 그래서 생포하라는 지시가 있었음에도 그냥 짜증나서 죽여버린 강화인간이 몇이던가.
이제 제 손으로 죽인 강화인간의 머릿수를 헤아리는 것도 관뒀다. 아니, 그 무엇이든 가급적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알지 않을 수 있다면 그리 했다. 계속해서 쌓여가는 기억의 양이 많을수록 더욱 기억이 지워지기 힘들까봐 저어했다. 한때는 오히려 마구잡이식으로 다른 기억을 쌓아올려 걸리적거리는 과거를 파묻어버리려는 시도도 했었지만 다 부질없었다.
“강화인간 2호, 그래. 1호인 토끼는 다리를 개조 받았고 너는 그 두 팔을 개조 받았지. 팔과 다리, 아주 좋은 콤비였지. 그렇지 않나? 토끼는 제자리에서 뛰어올라 적을 내려찍어 죽였고, 너는 적을 들어올려 하늘 높이 내던져 깨부쉈지. 때로는 토끼가 적을 걷어차서 하늘로 보내기도 하고, 네가 높은 곳에서 적을 떨어뜨리기도 했고. 위아래 위위아래, 그건 아주 재미난 풍경의 리듬이었어. 그 광경을 다시는 못 보다니. 아쉽군, 아쉬워. 큭큭큭-.”
“그만해! 그런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아! 난 더 이상 강화인간이 아니야!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는 그런 끔찍한 괴물이 아니라고!”
“오호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지금도 강화된 그 튼튼한 두 팔을 보란 듯이 사용하는 이유는 뭐지? 한 번 강화인간은 영원한 강화인간이다. 몸만 도망치면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아니지, 아니야. 기억은 언제나 너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지. 평범한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을 ‘되찾은’ 거라고 너는 말할 테지만 틀렸어. 스스로가 강화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선명히 기억하는 한 예전의 너로 돌이킬 수 없다. 네게 처음부터 돌아갈 곳은 없었단 말이지! 음흐흐흐-.”
“시끄러워! 난 절대로 그 악마 소굴로 돌아가지 않을 테야!”
“누가 데려간다고 했나? 난 사신이야. 잊었나? 네게 죽음을 선사하러 왔지. 물론 너를 죽이는 것은 내가 아니야. 내 마지막 온정을 베풀고자 너의 훌륭한 옛 파트너를 데리고 왔지. 내 손에 죽는 것보다는 친구 손에 죽는 편이 황천 가는 길 더 편하지 않겠어?”
“서, 설마 이사벨이…!”
“……이사벨? 그게 누군데?”
과거 강화인간 2호였던 여자는 불시에 아이작으로부터 뻗쳐 나오는 살기에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 아이작은 기분이 좋을 때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강화인간들에게 느슨하다가도 철저한 기분파인만큼 변덕스러워 갈피를 잡을 수 없기에 더욱 껄끄러웠다. 자아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던 강화인간 시절에도 그 불길한 광기를 슬슬 피해다녔던 것 같다. 레나만이 아이작을 두려워하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토끼, 겠지? 네가 말한 이름을 가진 강화인간은 안타리우스에 없다. 알겠나?! -! 으음?!”
아이작은 을씨년스러운 디시카의 밤을 찢어발기는 커다란 총포 소리를 듣고는 재빨리 멱살을 쥐고 흔들고 있던 여자를 들어올려 방패막이로 삼았다. 방패의 머리통에 정통으로 총알이 박혔는지 가면 위로 후덥지근한 피가 훅 끼쳐왔다.
아이작은 몇 발 더 날아드는 저격을 역시나 재주있게 고기방패로 막아내며, 저격 지점으로부터 추정되는 방향의 사각지대에 해당하는 곳에 숨었다. 자기가 죽었는지도 모르고 죽은 것 같은 강화인간 2호의 두개골을 수박 으깨듯이 한주먹으로 깨부순 아이작은 피와 뇌수 사이에서 총알을 꺼내들어 달빛에 비춰보았다. SSV-58 드라그노프의 총탄이다. 카인 스타이거가 틀림없었다.
“크흐흐- 이거 뜻밖의 재미있는 쇼가 한바탕 벌어지겠구만. 좋군, 좋아!”
아이작은 말도 안 되는 각력으로 이 건물에서 저 건물로 도약하며 최초의 저격지점에 도달했다. 허나 거치대와 식지 않는 총구만이 덩그러니 아이작을 맞이할 뿐 카인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쥐새끼 같은 놈. 음?!”
타앙- 아이작이 잠시 카인이 있던 자리를 살펴보는 사이에 또 다시 총탄이 날아들었다. 아이작이 강화인간 2호와 대치하고 있던 건물에서 이리로 오기까지는 채 3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 사이에 또 다른 곳에 자리를 잡고 저격을 시도할 줄은 몰랐던 터라 아이작은 고스란히 왼쪽 어깨에 총탄이 박혔다.
몸 안쪽의 근육이 질긴 통구이 고기가 되어 익어버릴 것 같은 뜨거움 뒤에 곧 격통이 찾아들었다. 그나마도 다행이었다. 0.5초만 더 늦게 움직였어도 영락없이 총탄이 심장에 박혔을 것이다. 강화수트가 방탄 기능을 어느 정도 해준다지만 저격용인 대구경 총화기까지 막아주지는 못했다.
“과연 비능력자인데도 그 홀든가의 망나니 셋째를 농락했을 만하군. 큭큭큭-.”
실로 대단한 사격술이다. 적외선 투시가 가능한 스코프를 달았겠지만 그래도 달빛 말고는 별다른 광원조차 없는 이 밤에 어둠을 뚫고 표적을 맞히는 솜씨가 야행성 맹수와도 같았다. 여러모로 비능력자에게 악조건인 자연 환경을 무시하고 이 정도로 무시무시한 화력을 내뿜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철저히 준비했다는 소리였다. 적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은폐하면서도 반대로 적을 내다보기는 쉬운 여러 요지에 언제든지 바로 저격을 개시할 수 있도록 거점을 마련해두고, 거리감을 눈에만 의존하지 않고 어둠 속에서도 잴 수 있을 정도로 마을의 모든 구조를 훤히 외우고 있다는 거였다.
“그렇군! 여기는 포트레너드 동부, 디시카! 카인 스타이거가 SALVATOR라는 위대한 별명을 얻은 발상지가 아니었던가! 그러니 마을 주민들이 이런 흉악한 무기를 제 집 지붕 위에다 설치할 수 있도록 기꺼이 배려한 거겠지. 그렇지 않나? 구원자여!”
아이작이 쩌렁쩌렁 울리는 큰 소리로 도발하자 닥치라는 듯 연거푸 총탄이 날아들었다. 아이작은 곧 왼팔이 잘려나갈 것 같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킬킬거리며 총알을 피했다.
아까처럼 저격을 정통으로 맞을 가능성을 피해서 우회해서 가면 또 다시 카인이 다른 곳에 자리를 잡는 시간을 스스로 제공하는 꼴밖에 더 되지 않았다. 위험하기는 하지만 치명상을 최대한 피해가며 정면돌파하는 편이 영리한 쥐새끼를 잡을 수 있는 지름길인 것 같았다. 거리만 좁힌다면 무서울 것이 없다. 놈이 근접전에서 쓰는 권총 스미스 앤 웨슨은 아이작에게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하므로.
“꽁무니 빼는 것도 이걸로 끝이다!”
아이작은 저격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맹렬히 돌진해갔다. 오른쪽 허벅지에 한 발 관통당했고, 왼쪽 옆구리에도 또 한 발이 살을 도려내며 스쳐지나갔지만 아이작의 이동 속도는 전혀 줄지 않았다. 예상대로 곧 시야 안에 카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리석군! 정면으로 들어오는 것을 봤다면 겁 먹고 도망쳤어야지! 기회다 싶어 나를 끝장낼 수 있을 것 같았나? 이몸을 너무 얕보는군, 비능력자! 손에 무기가 들려있지 않으면 허약하기 짝이 없는 주제에!”
아이작은 마침내 카인이 있는 건물 옥상에 착지했다. 반대편 난간을 등지고 서서 아이작과 마주보는 카인은 긴장은 했으되 흔들림 없는 손길로 장전된 권총 두 정을 들고 아이작에게 쏴댔다. 명사수의 실력 치고는 허술한 사격술이었다.
“어디를 쏘는 거지? 당황해서 수전증이라도 왔나? -아니?!”
아이작은 피융하고 가면 모서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총탄이 주는 충격을 감지했다. 그제야 카인이 엉터리 사격을 하는 게 아니라 헤드샷을 피하고 가면을 떨어뜨리기 위해 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곧이라도 얼굴에서 흘러내릴 것 같은 가면을 겨우 부여잡으며 아이작은 황급히 옥상을 나가는 문을 열고 그 뒤에 몸을 숨겼다.
“가리고 싶기에 가면으로 얼굴을 덮었겠지. 숨기 위해 네놈은 가면을 택했겠지만 도리어 약점을 선전하고 다니는 것과도 같다. 적어도 까맣게 위장칠 정도는 하는 것이 좋겠군. 하얀색은 반사광 때문에 너무 뚜렷이 잘 보이거든. 특히 이렇게 달빛이 환한 밤에는 더욱더.”
“이 쓰-레-기-가―!”
아이작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잔뜩 억눌린 음성으로 카인에게 저주 서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육중한 군홧발 소리가 가까워졌다. 아이작은 이를 갈며 촉각을 곤두세웠다.
가면을 고정시키느라 부자유스러운 한 손을 포기하고 나머지 한 손만으로 싸우는 것은 불리했다. 단 한 순간이라도 카인의 멱살을 잡을 수 있다면 한 손으로도 목을 부러뜨리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만, 놈은 절대로 아이작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지금 다가오는 것도 빗맞힐 가능성을 낮추기 위한 가장 최적의 거리를 확보하기 위함이지 아이작 좋으라고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이사벨은 어디 있나?”
“2호도 그렇고 오늘따라 자주 듣는 낯선 이름이군. 내가 모르는 인간을 왜 내게 와서 찾지?”
“시치지 떼지 마라!”
화가 다 날 정도로 냉정하기 그지없던 카인의 평정에 와장창 금이 갔다. 아이작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카인은 아이작의 약점을 겨냥해서 총으로 쏘았지만, 카인의 약점은 지금 아이작의 손아귀에 있었다. 보이지 않는 터라 더욱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다는 점이 아주 마음에 드는 약점이었다.
“시치미?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데 내가 안다고 잡아떼는 건 댁이지.”
“큭- 레나, 강화인간 1호는 어디 있나? 이렇게 말해야 알아들을 텐가?!”
“아아, 토끼 말인가. 난 또 누굴 말하는가 했지. 음흐흐흐-.”
약올림은 좋은 진통제가 되어 아이작의 온몸 여기저기를 뚫은 총상의 고통마저 잊게 했다. 카인의 침묵이 아이작의 심술이 보기 좋게 먹혀들었음을 증명했다.
“그나저나 준비성이 철저하시군 그래. 내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야. 흐음- 알 만해. 웨슬리 슬로언의 정보력이겠지. 강화인간 2호의 정보를 용케도 잡아냈군.”
“네놈이 나타날 줄은 몰랐다. 그저 그 여자에게 이사벨에 관한 걸 물으려고 했을 뿐이다. 만일에 대비해두었던 것뿐이지만 신께서 날 도우셨군. 맨몸으로 강화인간을 상대하는 건 미친 짓이니까.”
“이거 왜 이러시나? 너무 순순히 나약함을 인정하는군. 그러고도 이곳 디시카 주민들의 영웅인가? 구원자라는 이름이 울겠군.”
카인은 아이작의 말에 잠시 고개를 들고 달이 휘영청 밝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이 신의 축복라면 달은 신의 자애로움이라고 이사벨이 말했던 적이 있다. 세상 어느 곳에도 신이 있듯이, 세상 어디에도 이사벨과의 추억이 서려있다.
“……비능력자든 사이퍼든, 강화인간들도 결국은 신의 이름 아래 다 똑같은 인간일 뿐이다.”
“크하하- 그것 참 대단한 논리 납셨군. 사랑하는 여자가 괴물임을 인정하기 싫어서 다른 무수한 괴물들까지 긍정하는 길을 택하다니. 참 갸륵한 위선이로군!”
“뭐라 지껄여도 좋다. 네놈만 잡을 수 있다면 그녀에게 도달하는 것은 시간문제겠지. 안타리우스의 사신, 아이작.”
“내가 네놈 따위에게 그렇게 순순히 잡혀줄 것 같나?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나는 결코 입을 열지 않아. 절대로 토끼가 기억을 되찾게 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지. 토끼의 망각은 내 것이야.”
“……그렇군. 네놈은 간절히 잊고 싶은 것이 있나보군. 얼굴을 가려야 할 정도로.”
“닥쳐라! 다 안다는 듯이 지껄이지 마라!”
아이작은 말 내용 자체보다도 사실이라고 확신하는 듯한 카인의 덤덤한 말투에 더 뚜껑이 열려 문 뒤에서 뛰쳐나가 카인이 있음직한 곳으로 돌진했다. 카인은 약삭빠르게 거리를 벌리며 아이작의 가면을 향해 재장전한 권총을 겨누었다. 아이작은 이 이상 충격을 받았다간 가면이 산산조각 나버릴 것을 예감하고 오도 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네놈은 잊고 싶은 쪽이겠지만 나는 그 무엇 하나 결코 잊을 수 없다. 괴로운 기억을 포함해서까지도 이사벨과의 추억은 지키고 싶으니까. 지금 나를 버티게 하는 원동력은 오직 그것뿐이야. 그녀만이 내게는 구원이다. 반드시 모든 기억이 지워진 그녀를……그녀의 기억을 되찾을 것이다.”
카인은 기도하듯 고해하듯 아이작에게 굳은 결심을 토로했다. 한껏 비꼬는 반응을 보일 거라 생각한 아이작이 침묵을 지키자 카인은 왠지 불안해져 권총을 다잡았다.
“……크큭- 크하하하―!!!!”
“뭐가 우습나?”
밑도 끝도 없이 박장대소하는 아이작을 보고 카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과장되게 가면을 붙잡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배를 움켜쥐고 웃던 아이작이 기분 나쁜 키들거림이 묻어나는 말투로 카인에게 말을 내던지기 시작했다.
“네놈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군. 가엾군, 가엾도다! 토끼의 기억이 강제로 지워졌다고? 천만에! 토끼는 스스로 기억을 잃을 것을 선택했단 말이다!”
“……뭐라고?”
카인은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어진다는 것도 잊고 스미스 앤 웨슨을 정조준하고 있던 양 손을 툭 떨어뜨렸다. 아이작이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의식은 이해를 거부했지만, 무의식은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는 온몸의 맥을 탁 풀어놓았다.
“네놈은 토끼와의 추억이 네놈을 연명하게 한다고 했지만 토끼는 아니었다 그 말이다. 오히려 정반대지! 네놈과 행복했던 옛 시간들은 강화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극심한 고통 속에서는 오히려 독이었지. 과거의 행복은 현재의 불행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 뿐이니까. 그래서 토끼는 차라리 너를 잊고 싶다고 했다. 스스로 망각을 원했다!”
“닥쳐라! 그럴 리가 없다! 이사벨이 그럴 리가 없어! 허튼 말로 이간질하려들지 마라!”
카인은 마구잡이로 총을 쏴댔다. 중상을 입은 아이작도 가뿐히 피하고 남을 정도로 엉성한 조준이었다. 곧 총탄이 바닥나고 방아쇠가 철컥거리는 쇳소리만 났다. 재장전할 시간을 주지 않고 아이작은 낄낄 웃으며 단숨에 카인에게 접근하여 목을 잡아 들어올렸다.
카인은 무시무시한 악력으로 숨통을 틀어막는 아이작의 손을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강화인간에 비한 비능력자의 무력함이란 계란으로 바위 치기 수준이라는 것을 통감할 뿐인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카인의 두 안구가 툭 불거져 실핏줄이 두 눈을 징그럽게 충혈시켰다.
“나는 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토끼가 훌륭한 강화인간으로 거듭나는 모든 과정을. 기억이 없고 자아가 없는 존재의 그 순수한 아름다움을 네놈은 절대로 모르겠지. 나는 토끼로 인해 강화인간이 될 것을 마음먹었다. 스스로가 원해서 기억을 잃은 그녀야말로 내가 언젠가 반드시 기억을 지울 수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아아, 실로 멋지군. 기억상실이란 대단하지 않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일로 하는 것마저 가능하지. 적어도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만큼은 완벽한 무(無)를 창조해내니까!”
유열에 차서 떠벌이던 아이작은 카인이 숨이 꼴딱 넘어갈 지경인 것을 보고 선뜻 손을 놓았다. 카인은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져 목을 부여잡고 허겁지겁 산소를 들이켰다. 그 와중에도 죽일 듯이 아이작을 올려다보는 눈빛만은 꽤 매서웠다.
“걱정 마라. 난 네놈을 죽이지 않아. 네놈이 쭉 살아서 알짱대야만 토끼의 기억이 정말로 어떤 계기로든 돌아올 리가 없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으니까. 죽일 필요가 있게 되더라도 너를 죽이는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
카인은 예고도 없이 등 뒤로 급습해오는 기척에 화들짝 놀라며 긴급히 좌로 굴러 회피했다. 방금 전까지 카인이 있던 자리가 움푹 파이고 그 위에 레나가 서있었다.
“이사벨!”
“코드네임 SALVATOR로 판명, 안타리우스의 적으로 인식하고 생명반응을 지우겠습니다.”
“이사벨, 제발…!”
카인은 본능적으로 스미스 앤 웨슨의 탄창을 도로 채웠지만 쏠 수 없었다. 레나가 카인을 죽이려든다 해도 카인에게 레나는 그저 기억을 잃은 이사벨일 뿐이었다.
“크하하하- 그래! 나는 이걸 보고 싶었지! 네놈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토끼와 좌절하는 네놈의 낯짝을! 더욱더 좌절하라, 구원자. 네놈의 절망이 내 기쁨의 양식이니까!”
아이작은 미친 듯이 웃으며 공격당하기만 하는 카인과 묵묵히 급소를 노리는 레나의 비극 같은 희극을 감상했다.
“음?”
이왕이면 카인이 죽지 않을 만큼 레나가 반죽음으로 만들어놓는 데까지 구경하고 싶었지만 건물 아래에서 불온한 기척이 느껴졌다. 물론 아이작과 레나의 아군은 아니었다.
“보나마나 웨슬리 슬로원이 지원병이라도 보낸 거겠지. 토끼, 멈춰라. 보금자리로 돌아간다.”
“…? 아직 대상의 죽음이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상관없어. 이리와.”
“알겠습니다.”
“이, 이사벨! 가지 말게! 가지 말아줘!”
카인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포복자세로 기어서라도 퇴각하려는 두 사람에게 가까워지려 했다. 아이작은 그런 카인을 보고 노골적으로 비웃음 가득한 코웃음을 치고는 반대편 건물로 훌쩍 뛰었다. 레나도 도약 준비 자세를 취했다.
“이사벨!”
레나가 잠깐 멈칫하더니 카인을 뒤돌아보았다. 카인은 희망에 들떠 자꾸만 감기는 눈을 부릅떴으나, 레나의 눈은 여전히 공허하기만 했다. 레나는 카인을 물끄러미 보더니 곧 아이작의 뒤를 따라 저편의 어둠으로 뛰어들었다. 달로 귀환하려는 방아 찧는 토끼처럼 힘찬 도약이었다.
“크윽, 으아아악―!”
카인은 혼신의 힘을 다해 피 끓는 절규를 내뱉고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단숨에 악몽으로 끌려들어갔다.
* * *
“선물이다, 토끼.”
아이작은 여느 때와 같이 퍼즐 그림의 빈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는 레나의 눈앞으로 불쑥 네모난 상자를 내던졌다. 상자가 떨어지는 충격에 오래되어 성긴 퍼즐 조각들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가 뿔뿔이 흩어졌다. 레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선물’의 개념을 내면에서 검색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는 듯했다.
“선물은 생일 같은 특별한 기념일에만 주고받는 물건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이것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 오늘부로 그 상식을 뜯어고치도록 해. 특별한 날이 아니라도 누가 주면 그냥 받는 것이 선물이라고.”
“알겠습니다.”
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작이 준 상자를 열어보았다.
“퍼즐입니까?”
“그래.”
“이미 퍼즐은 갖고 있습니다.”
“그거랑 다른 거야. 새 거라고 새 거.”
“새 거…….”
아이작은 레나가 상자 안에 담긴 퍼즐 조각들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는 것이 답답했다. 상자 밑에 깔린 삭은 퍼즐조각들을 전부 너덜너덜한 상자에 쓸어 담고는 새 퍼즐 조각들을 테이블 위로 우수수 쏟았다.
“이건 기존의 500피스, 아니 499피스짜리보다 두 배 더 많은 1000피스짜리다. 게다가 아무런 그림도 없는 백지 퍼즐이지. 이건 맞추는 데 꽤 시간이 걸릴 거다. 지루하지 않을 거야.”
레나는 무슨 시범조교의 설명이라도 듣는 것처럼 아이작의 말을 경청하더니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퍼즐을 맞춰나가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반대편에 앉아 레나가 퍼즐을 맞추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림이 없는 만큼 오로지 조각의 모양에만 의존해서 맞춰나가야 하는 퍼즐이라 맞추기 힘들어야 했다. 허나 이전의 그림이 있고 조각 개수도 반토막인 데다가 몇 백 번도 더 맞춰본 퍼즐보다도 레나는 오늘 처음 보는 이 백지 퍼즐을 더 잘 맞춰나가는 것 같았다. 마치 여기에 알맞은 조각을 감지하는 센서가 손끝에라도 달려있는 것처럼 척척 흰 면적을 넓혀 테이블 위를 가려나갔다. 아이작은 매끈한 흰색 퍼즐 조각 표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반사광이 점점 강해질 때마다 눈이 부신 것처럼 조금씩 미세하게 가면 속 눈을 더 가늘게 떴다.
두 시간 정도 흘렀을까. 마침내 외따로 떨어져 나온 조각은 하나도 없게 되었다. 하얀 파편들이 한 데 모여 흡사 퍼즐 문양이 그려진 흰 테이블보처럼 완전히 테이블 위를 뒤덮었다. 아니, 완전히는 아니었다. 또 다시 퍼즐 정중앙의 한 조각만이 누락되어 있었다. 레나는 그 구멍 너머에 무언가 있는 것처럼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들여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아이작을 보았다.
“이상합니다. 마지막 한 조각이 모자랍니다.”
“…흥, 재수없게 불량품을 샀나보군. 됐다, 토끼. 밤이 늦었어. 이만 잘 시간이다.”
“네.”
아이작은 레나를 안아올려 침대로 데리고 가 눕혔다. 평소처럼 옆에 함께 붙어 눕지 않고 가만히 서서 내려다보는 것이 이상했는지 레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할 일이 남아서 조금 이따가 잔다고 하니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물 고맙습니다.”
“-!”
레나는 감사를 전하고 스르르 눈을 감더니 곧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었다. 아이작은 순간 아주 희미하지만 레나가 미소 지은 것처럼 보여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다시 보자 레나의 입술은 여전히 무감정한 일자를 그리고 있었다. 안도와도 비슷한, 허나 왠지 모를 허탈함을 담은 한숨을 내쉬며 도로 의자에 앉았다.
아이작은 주머니를 뒤적여 무언가 꺼내들었다. 레나가 부족하다고 했던 마지막 1000번째 퍼즐 조각과 성냥갑이 그의 손에 들려있었다. 성냥갑에서 성냥 하나를 꺼내 그어 불을 일으켰다. 망설임 없이 퍼즐에 불을 붙였다.
퍼즐은 아이작의 손 안에서 순식간에 산화되어 검은 재로 변했다. 아이작은 손 안에서 잿가루를 더욱 으깨어 검게 물든 손을 순백의 퍼즐 위로 닦아내듯 문질렀다. 퍼즐이 끔찍하게 더럽혀졌다.
“토끼, 너는 그렇게 계속 영영 되찾을 수 없는 마지막 조각을 찾아 헤매는 거다. 나를 위해. 음흐흐흐―.”
아이작은 재투성이 손을 그대로 가면 위에 얹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울음인지 웃음인지 분간할 수 없는 기묘한 신음이 목구멍 안에서 들끓었다.
“쓰읍- 얼굴에 더러운 게 묻었군.”
아이작은 거칠게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욕실로 들어가며 방 안의 불을 껐다. 검게 뒤덮인 흰 퍼즐조각들은 욕실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빛에도 좀처럼 반사광을 내뿜지 못하고 가만히 꺼져 있었다.
fin.
- 원래부터 카인과 레나와 아이작 세 사람의 관계성에 대해 구상하고 있던 것과 더불어 사이퍼즈 공식 트위터에서 밝힌 레나의 취미가 <퍼즐 맞추기>라는 사실에 의거하여 쓰인 소설입니다. 정말 이 트윗을 본 순간 마음이 무척 먹먹해졌더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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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리적거리는 기억이 있거나 비밀이 많은 인물들은 모두 잠재적으로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마틴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굉장히 싫어하지 않을까요. 아이작과 루드빅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생각합니다.
- 오탈자 및 이상한 문맥 지적, 근거 있는 비판, 다양한 질문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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