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잿더미, 태울 수 없는 심장
-
11,413
23
32
-
2015-05-28 08:32:20
* 선정대상 : 등록일 기준 하루 전 00:00~24:00까지의 게시물 (최대 3일 전까지 확장가능)
* 추천수 : 높은 순서대로 정렬, 공략 게시판과 팬아트 게시판(팬픽은 별도 조회)을 각각 조회
* 댓글수 : 조회수가 비슷할 경우, 댓글 수와 내용을 참고 (이때, 작성자가 추가로 단 댓글은 제외)
* 내용 : 게시판과 맞지 않거나 과도한 수위가 있는 글, 욕설 등의 내부 기준에 맞지 않는 글은 제외
* 오싸등록여부 : 많은 분에게 기회를 드리고자 1주일 이내 등록 된 경우 제외
* 제재여부 : 추천 수와 상관없이 현재 계정이 게임과 웹을 포함하여 제재된 경우 제외 (만료상태는 해당되지 않음)
- 부적절한 오늘의 사이퍼즈 신고 안내-
* 사이퍼즈 운영진은 오늘의 사이퍼즈를 최대한 공정하게 선정하려 노력하고 있으나 선정 후 발견되는 일부 저작권,타인의 작품 도용 및 비방과 관련된 내용에 대해서는 신고해 주시면 최대한 빠르게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 특히, 저작권이 있는 내용이나 트레이싱과 같은 무단 도용에 대해서는 오늘의 사이퍼즈 등록 철회 및 민형사상의 처벌을 받을 수 있음을 사전에 인지 부탁드립니다.
* 신고 및 문의 : 사이퍼즈 1:1 문의 (게임문의 → 게임신고(해킹/불법/추적) → 오늘의사이퍼즈)
그깟 자존심, 그깟 신념, 그깟 사람, 그깟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어.
하지만 그것들을 빼면 사람에게는 무엇이 남지?
- 달이 밝은 밤. 포기할 줄 모르는 그녀에게, 카인 -
Cyphers Fanfiction (구작 리메이크)
잿더미, 태울 수 없는 심장
글 : 세크레트
어울릴지도 모르는 BGM: https://www.youtube.com/watch?v=AULG4MoYxQk
(DJ Okawari: Flower Dance)
-------------------------------------------------------------------------------------------------------------
지금껏 살아왔던 이야기는, 미담처럼 아름다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추례하고, 비참하기까지 하며, 존중받을 가치가 없었던 바보같은 사람의 이야기.
돌아보지 않았던 시절의 이야기를 하며, 왜인지 후회가 물 밀듯 몰려왔다. 돌이키고 싶은데, 더 이상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정해 버렸다. 남이 미웠다면 그 사람을 욕하고 원망하며 복수하면 그만일 뿐이겠지만. 지금 너무나 미웠던 건 내 자신이었다. 나 자신이 부끄럽고, 창피하고, 싫었다. 고개를 숙이니까 취기가 아지랑이처럼 몸을 휩쌌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괜히 가슴이 뛰어서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술기운이 느닷없이 확 올라와서 생각의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해야 할 말이 있었는데... 머리가 자꾸 어지러워진다. 지금껏 못했던 그 말을, 지금이야말로 해야만 하는데. 눈을 감은 지금 말하지 않으면 영영 다시는 말하지 못할 것 같았기에.
감은 눈꺼풀 사이로 촛불 빛이 옅게 아른거리며 흔들린다. 눈을 감고,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니까, 등 뒤에서 추위와 어둠이 나를 향해 무섭게 달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쫓기었던 기분에, 촛불로, 그 미약했던 온기로 달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문득, 이 자리에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 큰 위안으로 느껴졌다. 여태까지 혼자 말하고 있었고, 대답은 한 마디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귀뚜라미 소리만이 하늘 아래 가득 울렸다. 아무런 대답도 없는 그가 괜히 원망스러워서, 귀뚜라미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으면 하고 속으로 바랐다. 그에게서 단 한 마디라도, 말을 듣고 싶었다. 견딜 수 없이 무너질 것만 같은 마음에, 침묵의 무게는 견뎌내기에 너무 무거웠다. 결국, 나는 또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던지듯 한 마디를 더 내뱉았다.
"이런 나를, 어떻게 생각해요?"
생각을 거치지 않고 나온 한 마디의 말.
무엇을 기다리는지, 벌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나는 그 말 한 마디에 완전히 얼어 버렸다.
대답이 이번에도 들려오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답이 없었던 것이 나에게는 벌처럼 느껴졌다.
한 가지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역시, 나는 안 되는구나.
탁, 하고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순간 놀라서 어깨가 살짝 흔들렸다. 지나치게 긴장한 탓일까.. 정적을 깨는 한 줄기의 소리에 눈을 들어 다시 앞을 본다. 빈 위스키 잔이 눈에 들어온다. 많은 유리 그릇들이 정리되지 않은 나무 탁자도 보인다. 흐릿한 시야를 좀 더 들어 앞을 바라봤다. 아직 빈 술잔을 채 손에서 놓지 않은 중년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무심한 사람.
괜히 화가 나서 그의 손에서 술잔을 낚아챘다. 비틀거리며 탁자 위의 위스키 술병을 붙잡아 그의 술잔을 원망으로 넘치도록 따르고, 가득 찬 잔을 집어들어 그의 손에 콱 다시 쥐어 주었다. 그는, 술이 자신의 손에 튄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아무런 힘도 감정도 없이 무심히 내 손의 술잔을 붙잡았다. 괜시리, 술잔을 쥔 손을 놓지 못하고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나쁜 사람. 나쁜... 정말 나쁜 사람....
그의 거친 손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나를 잡아주지 않는 그 손의 한기를, 조금 더, 조금만 더 끌어안고 있고 싶었다.
하지만, 왜일까. 나쁜 사람 이라는 말만 수없이 머릿속에서 되뇌이며 나는 그의 손을 가만히 놓아 버렸다.
"한 잔 더 들어요."
하며 나는 그가 기다릴 새도 없이 내 잔을 가득 채워 훔치듯 한 잔을 더 비워버렸다.
여전히 그의 눈을 바라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갑자기 몹시 무력해진 기분이 들었다. 바보스러움에, 탁자에 고개를 떨궜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속에서 올라왔다. 최대한 딸꾹질로 보이게 노력하며, 나는 그렇게 탁자에 엎드려 끅, 끅 거리며 감정에 가득 취해 버렸다.
정말..
이 남자가 정말 나한테 이럴 수 있는 걸까?
당신은 나에게 아무런 생각이 없을 리가 없어.
카인, 그래. 그게 당신의 이름이었지.
당신은 나를 미워할 거야.
나는 쏴 죽여도 모자랄 년이니까.
그런데
...나는 정말 이 남자에게 아무것도 아닌 걸까?
고개를 살짝 들어서 잠시 내 손을 바라보았다.
한 순간에 많은 단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재앙, 파괴, 마녀, 마귀, 귀신, 악마 ....
단어들을 읊는 동안, 한 순간 갑자기 눈 언저리가 시렸다.
한 순간 생겨난 강렬한 빛에 눈앞이 얼룩덜룩해졌다.
당황해서 왼팔로 얼른 눈가를 덮었다.
왜 흘렀는지도 모를 눈물을 닦아낸 뒤 다시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마녀의 수정구가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오른손에 쥔, 둥그런 흰색 수정 모양 테두리 안에 용의 숨결과도 같은 주홍빛 불의 회오리가 소용돌이쳤다. 화염구의 크기는 작았지만 열기는 얼굴까지 전해질 정도로 강했다. 열기가 얼굴에 닿자 문득 마음 한쪽이 꺼지는 것 같이, 갑자기 어깨에서 힘이 쭉 빠졌다.
그래, 이게 나였지.
이름조차 불리우기 힘든
재앙의 불꽃.
내 앞에 있는 당신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지...?
아무렇지 않다고 얘기할 수는 없을걸.
아마 미워하겠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실 나를 없애버리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겠지?
난.. 당신의..
원수... 니까.
원수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올리자 순간 몸이 오한을 일으켰다.
약하게 떨리는 팔을 팔짱을 껴 맞댄 채 그에게 들키지 않게 조용히 다시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몇 시간 전, 그와 처음 이 야외 테라스로 들어온 때를 떠올렸다.
등나무 아래, 멋들어졌던 자리에 앉자마자, 코트를 벗지도 않은 채 그는 자리에 앉아서 담배에 불을 붙였고, 노을이 가득했던 하늘을 지긋이 먼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곁눈으로 슬쩍 본 후 메뉴판을 덮고 종업원에게 소리를 쳤다.
"이거랑, 이거랑 이걸로 가져와. 알아들었어? 확인할 필요 없으니까 빨리 가져와!"
그는, 내가 왜 종업원에게 화를 내는지 알았을까?
소리를 질렀던 탓인지, 주문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술이 나왔다. 술이 나오기 전까지, 잠깐이었지만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도, 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조용히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긴장감도, 기대도 아닌 묘한 기류가 흐르는 것이 싫어서, 술이 나오자마자 술잔을 들고 그와 내 잔을 모두 따랐다. 그렇게 첫 잔을 따르고, 두 번째 잔도 따르고, 몇 번의 잔을 연거푸 따르는 동안 우리는 아무런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여러 잔을 연달아 마시고도 전혀 취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잔이 여러 번 돌고 나서, 그에게 말을 걸었었다.
"카인 씨."
잠시 뜸을 들이고 나서 말을 이었다.
"구면인 사람을 '씨' 라고 부르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어색하더라도 달리 부를 방법이 없으니 이해해줘요."
반쯤 차 있던 위스키 잔을 들고 마저 비워버린 후 다시 말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각오를 다지듯 잠시 침을 꿀꺽 삼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세 살때 내가 처음으로 무언가를 태웠다고 해요. 나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처음으로 태운 건 마을의 건초 더미였고, 불에 놀라서 뛰쳐온 어른들의 말로는 어른 키 높이만큼 솟아오른 불꽃 속에서 내가 웃고 있었대요."
그 대목에서 나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왜 다들 그러잖아요. 처음 불을 보면 그저 신기하고, 그게 얼마나 위험한 줄 모르니까..."
"어른들은 설마 세 살짜리가 그런 큰 불을 일으켰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나 봐요."
한숨을 한 번 쉬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일곱 살 때 일이 터졌어요."
"내가 잡고 있던 친구의 인형을 쥔 그대로 태워버렸어요. 왜 태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때 몹시 화가 나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그 사건을 잊을 수 없는 건, 그 아이의 놀란 눈빛 때문이었어요."
"텅 빈 눈에 공포, 환멸, 두려움이 가득차서 울지도 못했던 어린아이의 그 눈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는 아이의 모습과 내 손에 쥐어진 불타버린 인형을 번갈아서 바라보며 난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어요."
"그 때부터, 사람들은 나를 피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무서운 눈을 지으며 나를 따돌렸죠."
"그런 사람들의 눈을 볼 때마다 더 화가 났어요. 화가 날 때마다 무언가가 불타서 사라졌고."
"...내가 화가 나지 않은 상태에서 원하는 것을 태울 수 있게 되기까지는 그 뒤로 3년이 더 걸렸어요."
그 뒤로도 나는 주절주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가 대답할 틈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과 접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수학자가 된 이야기,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이용당했던 이야기, 소중한 많은 걸 태워버린 이야기, 연합에 들어가게 된 이야기 등...
나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이야기를 이 남자에게 털어놓았다. 포트레너드의 디시카 이야기만 빼고.
"...이런 나를 어떻게 생각해요?"
밤이 깊도록 이어졌던 대화가 소용돌이처럼, 고개 숙인 내 머릿속을 휩쓸고 지나간다.
이야기는 길었고,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속은 후련했다.
단 하나, 마지막에 던진 말이 마음에 걸려 떠나질 않았다.
기억의 조각들을 겨우 붙잡고 부스스 다시 고개를 들었다.
대답을, 들어야만 했다.
내 이야기는 이걸로 마쳤다.
그는 과연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동정일지, 미움일지. 그래, 차라리 나를 미워했으면, 차라리 그래 주었으면,
그러면 내가 자유로울 수 있을텐데. 그 말을, 그 말 한마디를 들어야만 했다.
더는 피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들며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바로 그 순간, 그의 눈 또한 내게로 옮겨왔다.
눈이 마주친 순간, 반쯤 열렸던 말문이 움찔하며 바로 다시 닫혔다.
무엇에 놀란 것인지, 순간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이를 악물었다.
...그래. 어차피 나는 악녀였다. 그의 시선에 겁을 먹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
나는 나쁜 년이다. 저속하고, 악질이며, 세상 모든 저주를 받고 자란 여자다.
죽어도 내 할 말을 다 하고 죽는 사람이다, 나는...
그렇게 수없이 다짐하며, 다시 눈을 치켜떠 그의 눈을 노려보며 바로 말을 던졌다.
용기가 생기면서 속에서는 왜인지 알 수 없이 불같은 화가 올라왔다.
"디시카에서,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죠?"
테이블 너머로, 회색 트렌치 코트를 입은 반 백발의 사내의 표정이 보인다.
잠시, 정말로 아주 잠시, 내 말을 들은 순간 그의 표정이 변했다.
그의 눈이 움찔하며 흔들린다. 입매를 더 세게 질끈 다물었다. 그의 비어 있던 눈에 잠시 초점이 돌아왔다.
역시, 역시 그랬다.
아무런 생각이 없을 리가 없었다.
내가 만들어낸 그 비극에.
순간, 내가 씁쓸한 미소를 지은 듯한 묘한 착각이 들었다.
지금밖에 없다. 그를 닦달해서 그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는 순간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말해요. 당신의 비극은 순전히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그 도시를 내가 불태웠고, 그것 때문에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지게 되었으니.
자, 이런 나를 어떻게 생각해요?"
말을 하면서, 마치면서도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음 속으로만 웃고 있었는지, 그게 얼굴에도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웃고 있었다.
갈 데까지 간 미친 X, 이라고 내 자신을 평가했다.
미워한다고 답하겠지, 그렇겠지.
그게 나니까,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게 바로 나니까.
그 대답을 기다리며 나는 웃고 있었다.
테이블 너머, 그의 모습에서 처음으로 동요가 느껴졌다.
처음으로, 정말로 벽 같던 그에게서 생기가 느껴졌다. 감정 없는 송장 같던 그에게서 진한 사람 느낌이 묻어났다. 회한, 분노, 미움, 어느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처음으로 본 그의 인간다운 모습은 감정으로 가득 물들어 있었다. 그는 그 감정들을 몸에 휘감은 채로 조용히 고개를 숙여 술잔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먼 곳에서 손에 쥔 술잔으로 옮겨왔다. 고개를 숙인 탓에, 그의 표정은 더 이상 읽을 수 없었지만, 그는 술잔을 또렷이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붙잡은 연인의 손인 것처럼, 그는 술잔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대답을 들으려면, 그를 더 괴롭혀야 했다. 정말로 괴로워서 속에 담은 말을 내뱉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만큼.
그래서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고개를 나직이 숙여, 그를 도발하듯이 올려보며 말했다.
곁눈으로, 그는 내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틀림없이.
"대답하기 전엔, 보내주지 않을 거야.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솔직히 말해요. 있는 그대로 들어줄 테니까."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이 순간만큼은, 괜히 즐거웠다.
그의 앞에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것? 그를 동요시켰다는 것? 무엇이 즐거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손에 쥔 잔을 힘주어서 붙잡았다. 그리고는 한참이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아무것도 아닌 바닥의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모습이, 너무나, 텅 비어 보였다. 지쳐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숙인 그의 어깨는 쳐지지 않았다. 문득 사진에서 보았던, 히말라야 산맥을 올라가던, 등짐을 진 셰르파가 떠올랐다. 짊어지고 있는 것이 있기에 지쳐 주저앉지 못하는 짐꾼의 모습이, 내 앞의 그의 모습과 묘하게 겹쳐 보였다.
그가 지고 있는 마음의 짐이, 이 순간 내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결코 그렇게 할 수는 없었지만, 손을 뻗어 그의 어깨에 내 손을 얹고 싶었다. 그가 지고 있는 마음의 짐은 내가 만들어낸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런 짓을 할 수가 없었다.
생각들이 교차하며, 얼굴에 띈 미소가, 조용히 지워져 갔다.
그가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시간이 영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사실 그 시간은 내가 위스키 한 잔을 더 따르고 그 반을 마시는 데 걸린 시간이었을 뿐이었지만.
잔을 여전히 똑바로 바라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아무렇다고도 생각하지 않네. 당신에 대해서는, 아무렇지도 않아."
단호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그는 그의 말을 내게 전달했다.
어렵지 않게,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그의 말이 진심어린 진심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럴 리가, 그럴 수가 없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거짓말."
분노에 치가 떨렸다.
이를 꽉 악물고 소리쳤다.
"...거짓말이야...!!!!"
가장 듣기 싫었던 대답, 가장 들을 수 없는 대답이 그에게서 들려왔다.
숨을 몰아쉬며, 소리를 치며 테이블을 탕 치고 일어났다.
"그럴.. 그럴 리가 없어."
그는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그 눈은 다시 텅 비어 있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속 보이는 그런 가식은 집어치워!!! 많은 사람들한테 속아 왔던 나야...
그런 가식도 내가 모를 줄 알아?!!!!"
열기가 몸을 휘감는 게 느껴졌다. 도깨비불 같은 불꽃 덩어리가 어느새 몸을 휘감고 있었다.
잠시 숨을 몰아쉬며 마음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그런 나에게, 그가 나를 또렷이 바라보며 쐐기를 날렸다.
"진심일세."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불꽃이 한 순간 눈 앞을 뒤덮었다.
잠시 사이에 머릿속에서 모든 생각이 날아갔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모든 기억이 일순 단절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허억... 헉..."
정신을 차렸을 때는, 주위가 모두 불바다였다.
장소는 어느 새 테라스에서 내려다 보이던 바닷가 백사장으로 옮겨와 있었다.
발 밑에서, 알이 굵은 모래알들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그슬리는 것이 느껴졌다.
키보다 높이 올라온 불꽃 사이에, 열 발 정도의 거리를 둔 채,
그와 나 주위에만 불꽃이 닿지 않는, 작은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 그가 올라오는 불길을 팔로 막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후.. 후후..."
문득 얼굴에 쓴 웃음이 다시 피어올랐다.
그래, 결국 그도 다를 게 없었어.
나를, 능멸하는.. 사람들...
결국 다 태워버리면, 돌아볼 필요도 없이 끝일 뿐이야.
돌이킬 수 없는 건 다시 돌아볼 필요도 없으니까...
두 발 앞으로 걸어가며 그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걸어가면서 불길이 길을 열어 주었다.
이곳에서는 내가 지배자며, 여왕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는 나만의 영화(榮火).
나는 그를 지배할 수 있다.
그를 또렷이 노려보며 가만히 오른손을 뻗었다.
꽃같이 피어오른 불꽃이 손에서 뻗어나가 뱀 같은 기다란 형상이 되어 그를 휘감았다.
그는 도망치려고도, 피하고려도 하지 않은 채, 두 손을 내려놓았다.
몸을 휘감는 불꽃 속에서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 눈에 아까는 볼 수 없었던 표정 하나가 나에게 향해 있었다.
술 기운에 흐릿한 초점을 그의 얼굴에 고정시켰다.
그의 마지막 표정은 무엇일까. 공포? 두려움? 분노?
그 표정을 눈에 새기리라 다짐하며, 그의 얼굴을 직시했다.
한 걸음씩 걸어가며 더욱 분명해진,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너무나 분명히, 연민의 감정이 서려 있었다.
나를, 불쌍히 여기는...
몸을 휘감는 불꽃 속에서...
이빨이 으드득 갈렸다.
눈이 뒤집힐 정도로 화가 났다.
나를 동정한다고? 지금? 당신이 지금 날 동정할 수 있어...?
"그런 가식 따위 집어치워!!!!!!!!"
밤하늘에, 괴성이 메아리치며 그의 주위에 홍염이 폭발했다.
불기둥이 치솟고 있는 동안 나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에 헛구역질이 났다.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혐오감이 온 몸을 감쌌다.
머리를 감싸고, 비명을 질렀다.
누구에게도 닿을 것 같지 않은 공허한 외침.
그렇게 비명을 지르다가, 나는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눈물을 흘리며, 불꽃 속에서 나는 얼굴을 가리고 주저앉아 흐느끼고 있었다.
주저앉아서, 울다가, 고개를 들자 불기둥이 보였다.
순간 마음이 얼어붙는 듯했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저 속에서 타고 있는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안... 돼... 멈춰...!!
내가 피워낸 불을 내가 끄지 못한다는 걸 그 때는 알았을까.
불 속으로 몸을 던졌을 때는 그토록 그렇게 지키고 싶어했던 목숨조차 아깝지 않았었다.
그에게 달려들듯 안기는 순간, 피어 있던 꽃이 확 시들듯이 거짓말처럼 불이 사라졌다.
눈앞이 하얘졌던 그 순간 뒤, 그와 나는 튕겨나가듯 그슬린 백사장 위에 누워 있었다.
숨을 몰아쉬며, 내가 달려들었던 곳을 뒤돌아보았다.
바닥에, 속이 빈 원 모양으로 그을린 자국이 보였다. 불기둥 속은, 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태울 수 없었을 것이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고개를 바닥에 내려놓고 다시 숨을 몰아쉬었다.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샌가 풀어진 머리카락이 바람에 볼을 간질이는 것만 느껴졌다.
부스럭거리며 그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만이 들었다.
...무사했구나.
그 생각이 들자 몸에 조금 힘이 돌아왔다. 힘들게 몸을 추슬러 백사장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힘이 빠진 탓인지 밤의 바닷바람이 제법 차게 느껴졌다.
주저앉은 나에게 검게 그을린 손이 다가왔다.
손가락 사이에 하얀 담배 한 개비가 쥐어져 있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본 그곳에는, 하얀 달빛을 배경으로 그가 서 있었다.
여기저기 그을리고 탄 코트를 입은 그의 모습은 그다지 멋지진 않았지만. 힘없이 웃음이 나왔다.
나를 미워하지 않는 그가, 너무 미웠다. 그를 아직도 가지고 있는 그녀는 더욱 미웠다.
바다를 바라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담배를 물고 있는 그의 모습을 더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숙이고 손을 뻗어 내가 미워하는 그에게 다시 불꽃을 들이밀려고 했다.
불꽃은 아예 나오지조차 않았다.
마음 한구석에서 그것을 강하게 거부했다.
나는 그를 태울 수 없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불꽃이 태울 수 없었던 것은 단 하나 뿐이었다.
이미 타 버린 것,
잿더미.
알고 있었지만
그제서야 깨달았다.
내가 태울 수 없던 그의 심장은 이미 잿더미였다.
뻗은 손이 무색하게, 그가 고개를 숙여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가만히 내 손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울음이, 왈칵 나왔다.
흐느끼는 소리를 내기 싫어서 담배를 길게 들이마셨다.
기침이 마구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담배를 계속 들이마셨다.
그에게, 너무나도 크게 진 기분인데, 그가 준 담배에조차 지고 싶진 않았다...
기침 소리를 듣고, 달을 바라보던 그가 가만히 뒤돌아서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다시 달을 바라본다.
그의 등 너머로 말 소리가 들렸다.
"미안하네."
"...그런 말 말아요.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난 당신에게 어떤 감정을 가져야만 하는 거죠?"
"정말로, 당신에겐 아무런 원한도, 감정도 없어."
"...알아요. 아니, 이제서야 알았어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곧 떠나버릴 것 같은 그의 등 뒤로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건넸다.
"...당신이 강해 보였어요. 그런 일을 겪고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게.
그런데 이젠 알았어요. 더는... 말하지 마요."
"........."
그가 조용히 허리춤의 벨트에서 무언가를 끌렀다.
다시 뒤돌아선 그의 손에는, 작은 유리 병과 작은 잔 두 개가 쥐어져 있었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는 나에게 잔을 따라 건넸다.
내가 잔을 받아 벙 쪄 있는 동안, 그는 자신의 잔도 가득 따랐다.
그가 작게, 아주 가만히 웃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은 착각이었을까.
그가 건배를 권했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난 그와 건배를 하고 작은 잔 속에 든 것을 단숨에 마셔버렸다.
마신 뒤에,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한 잔 만으로 몸을 가누기 힘든 독주...
독한 기운이 목을 타고 올라올 즈음, 나는 그것의 용도도 알 수 있었다.
매일 밤, 그는 잠들기 전에 그 잔을 마실 것이었다.
그러지 않고는 잠들 수 없기에.
눈을 뜨고 있는 동안에는 잊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기에...
바보같은 사람....
정말 당신은 바보야....
웃음을 지으며,
흐려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걸로, 안녕이겠지. 지금은.
흐려지는 의식 뒤로 그가 건네는 최후의 말이 들려온다.
「 ... 자존심, 그깟 ... 사랑.... 있어....
하지만 ..... 사람에게..... 남지? 」
눈을 떠 보면, 여관 내지는 어딘가의 집이겠지.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
고지식하고, 바보같은 사람.
아무것도 없는데 가득 찬 척 하는 사람.
그런 당신이 싫지 않으니까....
나를 용서해줘. 다음에 만날 때까지.
안녕,
안녕.
-----------------------------------------------------------------------------------------
3년쯤 전, 글 쓰는 방식을 바꾸기 전에 썼던 구작 글입니다.
요새 쓰는 글에 비교해봐도 글감은 제법 괜찮게 나온 것 같아서,
아쉬운 마음에 리메이크를 해서 올려보게 되었습니다.
모쪼록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