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yphers

  • Silent Night - 일곱 개의 변주곡 -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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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바스터 [64급]

2014-05-30 10:47:50

- 이 글은 픽션(fiction)입니다. 특정 단체ㆍ사건ㆍ사상ㆍ종교와 무관함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 Silent Night - 일곱 개의 변주곡 - 
  Prologue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9839919)
  01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10134287)
  02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11117932)
  03-1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11321355)
  03-2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11412696)

 

 


* BGM: 김윤아 <담(String ver.)>

 

 

  변변한 가로등불도 없이 희미한 달빛에 의존해 상대의 윤곽만을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도시 외곽 한 구석에 더 짙은 어둠이 열렸다. 같은 검정끼리라도 경계가 있음을 보여주듯 칠흑같은 그림자가 어둠 속에서 까맣게 일렁였다. 색이라기보다는 무(無)를 구현해놓은 느낌이었다. 긴장감에 등을 꼿꼿이 세우며 빨라지기 시작하는 고동을 느꼈다. 그저 듣기만 했을 뿐 그녀의 그림자 안에 실제로 들어가는 건 이게 처음이었다. 원한 건 나였다. 아무말도 없이 툭하면 종적을 감췄다가 홀연히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그녀를 잃을 것 같은 불안감에 붙잡아 네가 가려는 그곳에 함께 가고 싶다고 말했다. 연인이 되기 전에도 되고 난 후에도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깊고 차가운 눈동자가 한동안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더니 조용히 돌아서 걸었다. 말은 없었지만 따라오라는 그녀 나름의 신호임을 알고 좇아 이 그림자 문턱까지 이르렀다.


  그녀가 그림자능력자이자 밤의 여왕이란 이명을 지녔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어둠은 인간의 본능적인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선뜻 발을 들여놓기가 망설여졌다. 집어삼켜질 것 같았다. 영영 저 안에 갇혀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허나 물러날 수는 없었다. 연인에 대한 예의와 스스로 말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태도는 두려움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두 주먹을 꽉 쥐고 눈을 질끈 감으며 몸을 내던지듯 그림자 안으로 들어섰다.

 


  원래 그림자가 그러하듯 당연히 아무런 감촉도 없었다. 눈을 떠보니 바깥과 깜깜하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이곳이 현실이 아닌 신비한 이공간임을 알게 하는 건 이 어둠 속에서도 홀로 색과 형태가 뚜렷한 그녀뿐이었다. 나의 모습은 그림자에 깜깜 묻혔지만 그녀는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주인임을 증명하듯 온전했다.


  내가 들어온 것을 확인한 그녀는 뒤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그녀에게는 내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곳에서 미아가 될까봐 빠른 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그저 걷기만 했다. 방향을 틀지도 않고 그저 일직선으로 걸었다. 거리감이 없기에 그게 곧게 난 길인지도 사실은 잘 알지 못했다. 걷는지조차도 모르겠다.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정처없다. 그 말은 지금 상황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표현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가늠을 못했다. 이곳의 시간은 현실과 똑같이 흐르기는 할까. 아니, 시간이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스스로의 존재를 지워버린 듯한 어둠 속에 들어앉아 있으니 형이상적인 상념만이 하릴없이 폭주했다. 이곳에 더 있다가는 미쳐버릴지도 몰랐다. 그런 조바심에 입을 열었다.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야?”


  묻고 싶은 걸 내뱉은 셈이었지만 동시에 또렷이 울리는 자기 목소리에 안도했다. 혹시 우주처럼 진공 상태라서 뭐라 말을 해도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고 마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던 것이다. 나는 분명히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다행스러울 수 있는 건지.


  “트와일라잇을 찾고 있어.”


  물어도 내심 대답을 얻을 수 없으리라는 체념을 깨뜨리듯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트와일라잇이라면 일루전을 통해도…….”


  말을 하다 말고 스스로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일루전을 거치지 않고도 자유로이 칸도르를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하물며 사이퍼계의 그 누구보다도 그곳을 먼저 발견한 그녀에게 할 말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녀의 것이지만 낯설기만 한 어둠 속에서 사뭇 초조한 탓일까. 후회와 함께 부끄러움을 곱씹고 있는데 그녀는 또다시 예상을 넘어서는 말을 건넸다.


  “내가 찾는 건 그 트와일라잇이 아니야. 또 다른 트와일라잇이지.”
  “또 다른 트와일라잇?”


  더 설명이 듣고 싶다는 투로 반문했지만 그녀는 그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그녀만이 이정표처럼 빛나기에 애초부터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었지만 더욱 강렬한 눈빛을 등 뒤로 보냈다.

 


  그녀만의 독특한 능력으로 트와일라잇을 찾아냈다는 사실은 그녀 자신을 전혀 행복하게 해주지 않았다. 구마스 노인은 「액자」 속에서 그녀를 발견하고는 성스러운 계시인 양 떠벌리고 다녔고, 지금은 또 다른 「액자」를 좇는 탐욕스런 인간들의 잠재적인 먹잇감이 되어 노려지고 있을 뿐인데. 하물며 그곳은 안개를 둘러싼 세력간의 다툼은 물론이며 2차 능력자 전쟁의 남은 갈등을 풀기 위해 한때 싸움터가 되기도 했던 곳이다. 차라리 세 번째 환영의 도시따위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액자」가 없었더라면 무고하게 죽어나간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브랜다조차 배신자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불행을 야기할 뿐인 이공간을 찾아 어쩌려는 것일까.


  “찾아서 뭘 하려고?”


  달려가 손목을 잡고 그녀를 돌아세웠다. 제법 필사적인 몸짓이었다. 표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찾기를 바라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그림자 안으로 오지 못하게 곁에 붙들어두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가능성만으로도 충분히 고통 받고 있는데 실제로 찾아낸다면, 그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녀는 결코 그녀가 사랑하는 평온 속에서는 살 수 없을 텐데. 아니, 가정의 일부는 틀렸다.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제2의 트와일라잇을 찾는다면 이번에야말로 그녀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뭘 하겠냐는 질문에 아무말도 하지 않는 건 달리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찾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거였다. 그녀를 괴롭게 하는 것이 없는 세계를.


  “트리비아.”


  뭐든 말해보라는 식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애달프게 보챘다.


  “트리비아…….”


  그녀 자신의 안식처를 찾는다는데 뜯어말릴 권리가 있는가, 연인이라는 이름만으로. 그녀는 홀로 있는 것에 만족해버린 인간이지만 그런 그녀를 원한 건 나였다. 그녀에게 트와일라잇이 안식처라면 내게는 그녀야말로 돌아올 곳이었다. 불의 마녀의 화마 속에서 구해주었고 영웅으로 추앙받는 낯선 분위기에 억눌려 있을 때 그녀만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그저 바란다면 곁에 있어주었다. 이기심이라는 건 알지만 그녀까지 잃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제 왼손을 조금 세게 붙잡고 있는 내 오른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다시 눈을 맞추며 오른손을 내밀어왔다. 어리둥절해져서는 그녀의 손을 힐끔 쳐다보고는 이게 뭐냐고 눈으로 물었다.


  “함께 가겠어?”


  늘 그렇듯이 작은 편에 가까운 목소리지만 이상하게도 귀가 먹먹하리만큼 그 말이 경종을 울렸다. 심박수가 뛰기 시작했다. 설렘이면서도 놀람이었다. 고독을 원해 혼자 훌쩍 사라져버리는 게 아니라 그 동행자로서 그녀가 지목해주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이 손을 기꺼이 잡아야 할 것이다. 타인의 기대와 그에서 비롯되는 책임이 버거워 숨이 턱 막혀올 때가 몇 번이던가. 모든 부담을 저버리고 나의 구원인 그녀와 단둘이 살 수 있다면. 꿈만 같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왼손은 그녀가 내민 오른손을 잡을 듯 서서히 다가가다가 끝내 잡지 않고 그녀의 왼손을 잡은 오른손마저 스르르 놓아버리고 말았다. 언젠가 이루고 싶은 꿈이지만 그 꿈은 지금 당장 이루어서는 안 되었다. 여전히 사이퍼들은 비능력자들에게 핍박받고 있고 그런 능력자들 사이에서도 불화와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것을 못 본 척 그녀와 당장에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대가 버겁기는 해도 내가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해야 했다. 내가 아니더라도 그 누구라도 할 수 있을 테지만 아직 그런 이가 없다면, 나를 필요로 해주는 이들이 있다면 나라도 앞장서야 했다. 최선을 다해 지하연합을 떠받치고 있는 새내기 수장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했다. 아직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아직은 안 돼. 하지만 나중에 반드시……. 그때까지 미력하나마 도울게.”


  진심이었다. 이 지루한 황혼녘의 싸움을 끝내고난 뒤 그녀와 함께 꾸려갈 미래를 상상했다. 아까 잡지 않은 그녀의 오른손으로 다시 왼손을 뻗었지만 피했다. 시선마저 외면하며 그녀는 다시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트리비아?”


  그녀가 점점 멀어져가는데도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뒤돌아서는 찰나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에 설핏 스쳐지나간 상처받은 얼굴이 비수처럼 마음에 박혀버린 까닭이었다.


  내가 그녀의 손을 잡지 않았고 그녀 또한 잡지 않은 자신의 왼손을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잘 보이는 그녀의 뒷모습으로 눈길을 보냈다.


  실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도 생각할 수 없었다.


  헤매는 손으로 주먹을 꽉 그러쥐며 그림자 속을 달렸다. 떠나가버리는 그녀를 잡기 위함이 아니라 혼자 남겨지기가 무서워 그녀를 좇는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길도 나지 않은 숲인데도 헤매지 않는 건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상한 느낌이다. 트리비아가 그림자 안에서 자유로이 다니는 것도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한편으로는 잊어버릴 만하면 찾아와 다시 기억을 더듬어 되살릴 수 있을 정도로 꽤 자주 찾는다는 뜻이었다. 그 사실을 새삼 알아차리자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장에라도 숲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다리는 습관처럼 터벅터벅 목적지를 향했다.


  밖에서 보면 이곳은 수령이 오래된 나무가 즐비한 원시림일 뿐이지만 그 실상은 묘지였다. 일반 장지에는 묘를 쓸 수 없는 죄인이나 신분을 감춘 사망자를 상당한 금액을 치르는 대신에 이 숲에 묻을 수 있다. 숲 주변은 보호구역이라는 위장으로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이  있기에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오로지 철조망 동서남북에 나있는 네 개의 문 가운데 하나를 통해야만 들어올 수 있었다. 루이스는 애초에 조문객이 별로 없는 이 숨겨진 묘역에 발을 들일 수 있는 비밀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약간 어둑어둑하기는 해도 군데군데 나무들끼리 서로 촘촘히 머리를 맞대고 있는 틈으로 빛이 새어드는 한낮이다. 숲이 워낙 넓어 오는 도중 다른 묘지를 발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거대한 묘지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평화롭게 새가 지저귀어도 으스스하기만 했다. 다시는 찾지 말아야지, 그런 다짐을 수도 없이 했으면서도 생각이 날 때마다 또 찾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간 더 깊숙이 걸어 들어가자 위에서 숲을 굽어보면 그 자리만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보일 작은 공터가 나타났다. 무성한 잡초와 들꽃이 아무렇게나 뒤섞인 가운데 잿빛 묘비가 우뚝 서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루이스는 한참을 숲 속에서 나가지 않고 묘비만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만고 끝에 내린 결정인 양 아주 천천히 묘비 앞으로 다가갔다.

 

 

Branda
(1907~1932)

 

 

  이름과 생몰연대가 적혀 있을 뿐인 아주 초라한 묘비였다. 삶의 행적을 집약해놓은 문구조차 없었다. 고아인 루이스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연고가 없는 브랜다이기에 묘비를 만들 적에 그녀의 인생을 평하는 역할은 자연스레 그에게 맡겨졌지만 도무지 할 말이 없었다. 꽃다발이라도 바치면 공백이 많아 쓸쓸한 묘비가 그럴듯해 보일 테지만 꽃은 늘 준비하지 않았다. 배신자 브랜다는 앤지의 선처로 그나마 루이스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게 시체를 수습하여 어렵사리 묻혔다. 그 당시 전쟁으로 인해 죽은 적들이 다 그러했듯이 쓰레기처럼 단체 소각당했어야 할 그녀의 존엄을 지켜주었다.


  배신자의 옛 연인도 이렇게 배신자였다. 하물며 그는 영웅이라는 불리는 사나이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누구인들 그를 용서하겠는가.

 


  “브랜다.”  ‘트리비아.’


  첫사랑의 이름을 부르면서 지금의 연인을 생각한다.

 


  “넌 나의 구원이었어.”  ‘넌 나의 구원이야.’


  누구도 안을 수 없게 차가운 얼음이 엉겨붙은 팔을 브랜다는 따뜻한 가슴으로 품어주었다.


  안트베르펜에서 마녀의 불꽃에 삼켜질 뻔한 위기에서 트리비아가 건져주었다.


  브랜다가 이마를 맞대어 머릿속으로 흘려보내준, 핍박 받는 사이퍼들의 비참한 현실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이대로 도서 외곽 서점에서 죽은 듯이 지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비로소 지하연합에 투신했다.


  영웅이란 이름에 억눌려 방황할 때 우유부단하게 헤매는 자신에게 트리비아는 냉철함을 불어넣었다.

 


  사랑했다. 사랑한다.

 


  “넌 날 사랑하기는 했니?”  ‘넌 날 사랑하기는 해?’


  브랜다는 앤트워프에 도착한 이후 감쪽같이 자취를 감춰버리고는 재스퍼에게 살해당했다는 차디찬 소식으로 돌아왔다. 세상을 위해 힘쓸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영구동토와 같은 마음을 녹여준 온기와 상냥함은 모두 연기일 뿐이었나.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트리비아는 지금 나한테는 당신이 필요하다는 서툰 고백을 받아들여주었지만 언제나 진심을 숨기고 있는 눈동자로 아득한 곳을 바라본다. 사랑한다는 말에도 침묵으로 응수하기에 안타깝게 몸을 포개 차가운 체온만 뒤섞는다. 살아있어도 이미 떠난 듯이 멀기만 하다.

 


  루이스는 묘비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활시위 모양으로 깎인 가로 단면을 어루만지다가 조심스럽게 껴안았다. 양지 바른 곳이지만 돌은 차가웠다. 묘비 주인의 품은 언제나 포근하고 부드러웠는데. 죽음은 모든 것을 꺼뜨려놓았다. 동시에 죽지 않았음에도 차가운 트리비아의 품이 떠올랐다.


  타라의 무자비한 유성우 아래 패배를 예감했을 때, 검은 날개를 펼치고 수백 마리의 박쥐떼와 함께 나타나 보일 듯 말 듯 신비한 미소를 짓던 트리비아는 차라리 악마였다. 도를 넘어선 아름다움은 어딘가 치명적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우친 순간이었다. 배신당했다는 걸 아프도록 알면서도 언제나 목에 걸린 가시처럼 걸리던 브랜다의 존재가 그때만큼은 완벽하게 사라졌다. 우습게도 ‘이제 살았구나’라는 생각보다는 ‘이제 죽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원초적 본능을 건드리는 생생한 에로스이면서도 영면으로 유혹하는 음울한 타나토스였다. 얼음보다도 차가운 그녀의 몸은 자극적이지만 결코 뜨거워지지는 않듯이. 브랜다를 안으면서 느꼈던 충족감이 없었다. 더욱 허기만 질 뿐 품에 있는데도 있는 것 같지 않아 팔 안을 여러 번이고 확인했다.

 


  새로운 이공간을 찾으면 함께 그곳으로 가자던 트리비아의 손을 잡지 않은 그날을 후회한다. 현실의 모든 문제를 수습하고 난 뒤에 그녀와 남은 생을 함께 하고 싶다는 그 맹세는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당시 자신은 몰랐던 사실을 트리비아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였다. 이 싸움은 루이스의 명이 다하는 그날까지도 쉬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중은 아마도 없었다. 그저 그 손을 잡았어야 했다. 정말로 다 버리고 떠나지는 못하더라도, 오히려 지켜지지 못할 약속이기에 각오만은 보여야 했다.

 


  브랜다는 자신에게 세상을 구원할 힘이 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그저 격려의 소리겠거니 웃어 넘겼지만 플랜 디코이 수행 과정에서 그 말은 예언이 되었다. 적들에게 쫓기는 급박한 상황은 지혜를 짜내게 만들었고 그렇게 고안해낸 기술들은 위기를 차례차례 물리쳤다. 그 유명한 쾌검사 벨저 홀든마저 이 손으로 쓰러뜨렸다. 그렇게 사선을 넘으며 커진 힘이 트리비아에게 안심을 주지는 못했다. 브랜다가 만약 배신하지 않고 지금도 곁에 있다면 그녀는 안도하며 웃어주었겠지. 하지만 이 현실에 이미 절망해버린 트리비아에게 먼 훗날의 약속은 부질없는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트리비아를 사랑하게 된 독심술사를 동정한다. 그는 가시가 그득한 장미덤불에 스스로 발을 들어놓으려 하고 있다. 아플 것이다. 이미 그곳에 잔뜩 흐른 피를 그는 아직 보지 못했다. 상관은 없었다. 얼마나 고통스럽든 그는 이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누구라도 같았다. 하지만 트리비아의 연인은 이 루이스였다. 그 자리를 내어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트리비아에게 미래가 의미없다면 적어도 그녀의 현실을 붙드는 것은 루이스여야 했다. 그것만이 루이스가 트리비아를 사랑하는 지금의 전부였다.

 

 

* * *

 

 

  엷은 검은색 장막 뒤에서 컬러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뿐더러 그저 적들이 양사방에서 진격해올 뿐인 단조로운 내용이지만. 트리비아의 그림자 안에 있는 지금 놀라울 정도로 정적만이 가득했다. 이곳으로 인도한 트리비아는 원래 읽을 수 없다지만 어둠에 묻혀 보이지는 않아도 다이무스도 분명 지금 여기에 함께 있는데. 소위 ‘기’라고 불리는 신기한 것을 다스려 마음을 무장할 수 있는 동양인 티엔의 마음과 흡사한 사람인 듯했다. 과거를 돌아보거나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오로지 현재에 충실하여 어떠한 사태에 직면하지 않는 한 잡념으로 마음속을 채우지 않는다. 다이무스가 공(空)이라면 트리비아는 허(虛)였다. 다이무스의 생각은 때가 되면 들어차지만 트리비아는 애초에 읽을 수가 없기에 아무것도 없었다.


  우습게도 엘리어트에게 의존해 잠시 이 능력이 없는 듯 살았을 때보다 적극적으로 이용하자고 생각한 때부터 읽을 수 없고 읽히지 않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연합의 토니 리켓처럼 암호 같은 사람도 있고 라제쉬 라마누잔처럼 명상을 통해 생각을 비우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회사의 크루그먼 이사처럼 때에 따라 순간적으로 자기자신마저 속일 줄 아는 신통한 재주를 지닌 사람도 있었다.

 


  임무 수행 도중만 아니었다면 마음을 놓고 이 안온한 어둠 속에 잠겨들고 싶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림자 안에 있는 건 상당히 생경한 경험이지만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자신의 모습은 온통 암흑으로 뒤덮였지만 트리비아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인다는 이유만으로도 헤매지 않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이 그림자 속에서 가장 자유로운 존재다. 그 대가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바깥에서는 가장 부자유스러운 존재이다. 그녀의 날개는 날고 싶다는 어릴 적 동심 어린 꿈을 다시 꾸게 해주었지만 정작 그녀가 좋아하는 모델일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그림자는 트와일라잇을 찾게 해주었지만 노인의 호기 어린 시선에 노출되고 안타리우스가 붕괴된 이후로도 그 잔당들의 마수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었다. 공공의 적인 그들만이 아니라도 시공간을 초월하는 신비한 힘에 눈독을 들이는 사람은 점점 늘어나기만 했다.

 


  가엾은 사람.


  아마도 여제의 자존심이 결코 용납하지 않을 감상을 품었다. 일말의 연민은 그녀를 향한 목마름을 더욱 태울 뿐이었다. 아직 먼발치에서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지만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희망을 엿보았다. 그녀를 일방적으로 조르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았다. 영웅은 하지 못한.

 


  “…! 저건 RABBIT이 아닌가요?”


  일단 HQ를 발동시키고 난 뒤 재빨리 그림자 안으로 모습을 감추어 관찰하는 도중 세 번째 단계까지는 저번 1차 조사 때 본 패턴과 같았다. 복제능력자, 센티넬과 철거반, 트루퍼까지 광장을 향해 물밀 듯이 몰려들었다. 조사단이 면밀히 살피지 못했던 네 번째 단계에 이르자 마틴은 더욱 눈앞의 광경에 집중했다. 그림자 안은 게이트웨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이용하는 것이라 게이트웨이이면서 신기하게도 게이트웨이가 아닌 곳이기도 했다. 스캐닝이 통하지 않을 것이란 우려와 달리 이어져 있기에 조사가 한결 수월했다. 멀리 보이는 클론 하나를 목표로 설정해 시야를 잠시 빌렸다. 스캐닝은 공중에 흐르는 정신의 흐름을 타서 시야 안에 없는 불특정대상을 이용할 수도 있지만 타깃이 눈에 닿는 곳에 있으면 한결 시전이 쉽고 지속시간도 오래간다. 분명했다. SALVATOR와의 비운의 러브스토리로도 유명한 강화인간 레나와 똑같이 생긴 클론 너댓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건 새로운 사실이군요. 안타리우스가 사이퍼뿐만이 아니라 강화인간까지도 복제하기 시작했다는 증거겠지요.”


  마틴은 사태의 심각성을 냉정하게 분석하는 자기말의 무게를 마디마디마다 느낄 수 있었다.

 


  안타리우스는 트와일라잇뿐만이 아니라 디미스트 등 회사와 연합의 힘이 미치지 못한 곳에서 고도의 안개정제술을 이용해 은밀하게 비인도적인 실험을 자행해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뚜렷한 연고가 없어 갑자기 행방불명되어도 사회적으로 별 문제가 되지 않는 민간인들을 납치해서 강화약물을 투여해 제조하는 강화인간이다. 타고난 사이퍼는 아니라 개조 이전에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그들을 복제했다는 것은 안타리우스가 복제능력자만이 아니고 또 다른 전력 증강의 길을 찾아냈다는 소리였다. 가령 강화인간의 재목이 된 인간은 선천적으로 강화약물과의 상성이 좋아 실패작으로 남지 않고 강화에 성공했다는 사실에 착안했다고 치자. 그 가설에 따라 우선 클론을 만들고 그들에게 약물을 투여해 ‘같은’ 강화인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초기 안타리우스가 민간인을 납치하는 것보다도 훨씬 위험이 적고 강화 실패 가능성도 줄이는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새로운 이공간의 시작인 게이트웨이를 먼저 발견해낸 것도 안타리우스라는 사실과 함께 그들이 갖추고 있는 대단한 기술력이 소름끼치도록 다가왔다. 아이작이 사이퍼계를 도발하듯 퍼뜨리고 다닌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그들이 소멸하는 건 대체 언제일까.”

 


  대화가 오갈 일이 없고 워낙 말수가 적은 동행들이라 재단에서 출발한 뒤부터 그나마 말을 한 것은 마틴뿐이었다. 다이무스도 트리비아도 임무에 집중하고 있을 테지만 그 과정에서 불필요하게 자기 생각이나 의견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어차피 2차 조사가 끝나고 회의가 잡혀 있는 탓도 있을 것이다. 침묵이 검은 침전물처럼 내려 쌓이는 와중에 트리비아의 중얼거림이 귀를 사로잡았다.


  의문 형식이었지만 답을 바라는 게 아니고 오히려 그녀의 혼잣말에 가까웠다. 트리비아를 쳐다보니 본인이 그런 말을 했다는 자각조차 없는 듯했다. 아차 싶은 표정도 떠오르지 않은 지독한 무표정이지만 그 말 안에 깃든 그녀의 진심을 엿본 것 같았다. 처음 만난 그날처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건 루이스의 기억에서 본 트리비아의 모습이 뇌리에 생생하게 떠오르는 까닭이었다.

 


  트리비아는 이 현실을 떠나 고독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 이공간을 원하고 있었다. 그녀가 왜 존재감이 두드러지면서도 곧 사라져버릴 듯 덧없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트리비아는 현실에 마음을 두고 있지 않았다. 언젠가 떠날 것을 택했다. 그건 선택도 아니었다. 궁지에 몰린 그녀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트와일라잇을 잃어버린 그녀의 상실감은 마틴의 상상보다도 엄청났다. 트리비아는 노인을 미워하고 안타리우스를 증오한다. 마틴도 재단 후원자로서 조화를 파괴하는 안타리우스를 당연히 적대시해왔지만 그녀를 고통스럽게 하는 근원이 그들임을 깨닫고 난 지금은 격렬한 분노가 샘솟았다.

 


  “모든 비극은 구마스 노인이 「액자」를 손에 넣으면서부터 시작됐죠. 그 작자가 칸도르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세상은 분명 지금보다 훨씬 평화로웠을 겁니다.”


  부질없는 가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랬더라면 어땠을까 끝내 하고 만다. 하물며 내가 비행능력자라면 사랑하는 사람과 아름다운 밤하늘을 함께 날 텐데, 그런 유년의 소망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난 가정이다. 노인이 「액자」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불행이 셀 수 없이 많다. 수백 수천 개의 오해와 불화와 죽음에는 모두 안타리우스가 개입되어 있었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헬리오스와 지하연합조차 이미 완전한 화해를 이루고 비능력자들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트와일라잇이 트리비아 씨만 알고 있는 세계로 남았다면 노인이 발견하기 전까지 그랬듯이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조용히 전설 속에서 잠들었겠죠. 그게 모두에게 행복한 일이었을 텐데.”


  마틴은 씁쓸한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그 ‘모두’에서 자신은 빠져야 한다는 생각에 서글퍼졌다. 트와일라잇이 트리비아만의 공간인 채로 있었다면 그녀는 자유를 위해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두었을 것이고 마틴은 죽을 때까지 트리비아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이상은 자신의 불행과 직결되었다. 마음의 소리가 들려도 읽을 수 없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지만 아직까지 완벽한 무음을 선사하는 건 오직 그녀뿐이다. 설령 앞으로 또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이와 만나게 된다고 해도 마틴은 트리비아 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이 없을 거라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들리지 않는 것 그 이상으로 이미 트리비아는 마틴의 운명으로 자리잡았다.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알아야 하는 삶은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불행하다는 확신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능력이 발현되기 이전에도 사람 말을 곧이 믿는 바보는 아니었지만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건 더없이 비참한 일이었다. 표리가 있는 건 당연한데도 모든 것을 의심부터 하고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하는 생각마저 전부 거짓인 양 느껴졌다. 부모님과 여동생마저도 걱정하는 한편 마음을 읽히는 것에 두려움이 내비쳤기에 한때 미웠다. 몰라도 될 인간의 속내가 자기 안으로 꾸역꾸역 게워지는 끔찍함에 차라리 귀가 멀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은 생각보다 견고한지라 망가지지 않았고 제법 영리한 머리는 삶의 유리한 방향으로 능력을 마음껏 이용하기로 했다. 영영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할 수는 없을 거라는 절망을 대가로. 브루스와 만나 엘리어트와 잠시 팀을 이루었을 때도 사라지지 않은 확신이었는데 그걸 한순간에 깨뜨린 게 트리비아였다. 결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밤하늘을 날 수 없을 거라는 체념을, 아름다운 밤의 날개를 지닌 데다가 마음을 읽을 수도 없는 그녀가 눈앞에 나타나 거두게 만들었다. 원하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이토록 나를 위해 태어나준 것만 같은 미치도록 사랑스러운 존재를.

 


  루이스, 바보 같은 사람. 왜 그녀의 손을 잡지 않았을까. 그가 후회한다는 것 또한 읽었지만 영웅은 이미 기회를 잃었다. 왜 몰랐을까. 무언가를 먼저 말하는 일이 좀처럼 없고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을 것 같은 트리비아가 루이스와는 이상과 소망을 나누었는데. 비록 어긋난다고는 해도 그녀의 진심을 그녀의 입으로 직접 전해들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면서 어리석게도 본인은 그 중대한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소중한 사람들이 있어도 종국엔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고 홀로 살아갈 고고한 사람. 아름다워서 고독한 사람. 그게 트리비아이고 그래서 그녀의 연인으로 있다는 건 특별한데. 왜 선택받은 본인은 모를까. 트리비아는 그녀 나름으로 루이스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 물론 그걸 루이스에게 알려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트리비아와 루이스 사이에 난 균열, 그곳이 마틴이 있어야 할 자리였다. 트리비아가 루이스에게 기회를 다시 주려고 한다면 마틴은 그 기회를 막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트리비아 씨, 전…….”


  “……크리스티네?”


  착각이 아니라면 꽤나 오랫동안 자기에게 머물러 있는 트리비아의 시선에 전율하며 마틴은 충동적으로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자신의 손은 보이지 않지만 손아귀에 들어오는 가느다란 팔목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 행동만큼이나 충동적으로 혀끝까지 차오른 고백을 동요가 깃든 다이무스의 목소리가 가로막았다.

 


  마틴은 다이무스가 시선을 빼앗긴 방향으로 황급히 시선을 틀었다. 정확히는 그가 보이지 않으므로 그저 트리비아의 행동을 무심코 따라했을 뿐이었다. 눈을 휘둥그레 떴다. 평정심을 계속 유지하던 다이무스가 눈에 띄게 마음을 흐트러뜨린 것도 이해가 갔다. 거기에는 헬리오스 소속 능력자이자 오스트리아 황실호위대원인 코드네임 ROSE 자네트와 똑같이 생긴 클론들이 대여섯 정도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무기마저 그녀와 같은 레이피어였다. 다만 자네트의 늠름하고 차분한 인상과 달리 다른 복제능력자들처럼 자아가 없어 차가운 무표정이라는 점만 달랐다.


  회사 소속 능력자와 똑같이 생긴 클론이 안타리우스에 있다는 엄청난 사실 앞에 그림자 속은 조용히 패닉에 빠졌다. 2차 게이트웨이 조사의 성과는 생각보다 많을 것 같았다.

 

 

* * *

 

 

  “이것 참, 경찰서는 아무 잘못한 게 없어도 뭔가 사람을 켕기게 한다니까. 브루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브뤼노가 양복 재킷 단추를 다시 단정하게 채우며 넉살 좋게 말했다. 브루스는 브뤼노를 흘긋 곁눈질하고는 성큼성큼 제 갈 길로 갔다.

 


  침몰선 사건에 관한 조사를 받기 위한 정기소환일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헬리오스의 최초 주장대로 그저 노후 선박에 예정된 결말이었으며 다행히 인명 피해는 0명이었고 재산 손실도 크지 않으므로 조용히 넘어갔어야 할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랑 플람 재단이 나중에 침몰선에 관한 새 주장을 제기하면서 해경 입장에서는 조사를 계속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수사에는 영 진척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양측의 상반되는 주장만 있을 뿐 뒷받침할 뚜렷한 증거가 없었다. 원래 헬리오스는 장 바티스트 플람이 바다의 람블라 시절부터 사용한 배를 양도받아 무역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고 그랑 플람 재단도 필요할 때마다 그 배를 공유하여 사용해왔다. 회사가 독자적으로 자기들의 문장만 달아 새로 건조한 배가 아닌 이상 어느 쪽이 썼는지를 사실상 구분하기 힘들었다.


  해경은 문제를 크게 키우고 싶지 않아서 헬리오스측 주장이 맞다는 데 초점을 두고 수사를 마무리짓고 싶어 했다. 선실 내에 뚜렷이 남은 야수의 발톱 자국이 난제이기는 했다. 브루스는 해경 앞에서 일부러 손을 변형시켜 자신의 발톱 자국과 선박에 남은 것이 일치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회사측은 선박이 파손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우연의 일치라고 맞받아쳤다. 정말 어느 쪽 배인지를 판가름나게 해줄 결정적인 증거품인 항해일지가 홀연히 자취를 감춘 것이 가장 문제였다.

 


  한쪽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명백한 흥미로운 사건이기에 이는 자연스레 언론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형제지간이나 다름없던 회사와 재단의 불화설에 관해 여기저기서 사실과 추측이 난무했다. 최근 재단이 지하연합과 공동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현황과 함께 그간 회사에 종속되다시피 해 독립 세력으로서 크게 두드러지지 않은 재단의 존재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브루스는 물론 재단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서에 출두했지만 그런 부수 효과를 내심 기대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게이트웨이 조사건은 극비에 부쳐져 외부인들은 알 수 없지만 안으로도 바깥으로도 회사로부터의 독립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브루스, 이런 건 소모적인 논쟁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은 안 드는가? 이쯤하고 침몰선이 우리 회사의 교역선이었음을 인정하고 적당히 덮는 게 좋을 듯한데. 게이트웨이 건으로 바쁜 이 시기에 굳이 이 문제를 가지고 물고늘어질 필요가 어디 있겠나?”


  브루스의 넓고 씩씩한 보폭을 우아하고 세련된 걸음걸이로 단숨에 따라잡은 브뤼노가 살짝 목소리를 낮춘 채 말을 건넸다. 브루스는 내용보다도 어쩐지 더 심기를 거스르는 유들유들한 브뤼노의 말투에 폭언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으며 태연함을 가장했다.


  “그럴 수는 없지. 이대로라면 우리 재단이 허위 사실을 유포한 게 되는데. 진실이 덮는다고 되는 줄 아는가?”


  “하하. 자네 말이 이상하군. 그럼 우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건가, 지금? 애초에 해경은 당연히 침몰선이 우리 것이라 생각해서 먼저 연락을 해왔고 우리도 출항기록과 입항예정일을 대조해본 결과 스페인과의 교역을 마치고 귀항하는 배임일 밝혀졌네. 뒤늦게 걸고넘어진 건 오히려 자네들 쪽이야?”


  “흥. 출항기록 같은 거야 얼마든지 조작 가능하거늘 그런 걸로 발뺌하려 들지 말게나. 애초에 영국의 주요 항구는 겉으로는 정부가 관리하고 있다고 해도 실질적으로는 무역계의 큰손인 헬리오스가 거의 주름 잡고 있다는 건 코흘리개들도 아는 사실이야. 자네가 방금 말한 그 스페인 상단과도 이미 입을 맞춰놓았을 테고.”


  브루스는 관심 없다는 듯 퉁명스러운 말투로 응수했으나 사실 그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당장에라도 브뤼노의 멱살을 잡아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뻔히 서로 누가 진실을 말하고 거짓을 말하는지 알면서도, 거짓이 진실을 가장하며 기만하려 드니 그 뻔뻔스러움에 구역질이 다 날 지경이었다.

 


  “이보게, 침몰선 인양 시기와 자네의 귀환 시기가 거의 일치한다는 건 다수 목격자의 증언으로 사실임이 밝혀졌지만 그렇다고 그 점을 이용해 우리와의 불화를 조장하다니. 자네들이 새로운 방침에 불만을 품으리라는 건 예상했지만 차분히 대화로 타협해나갈 수도 있는 것을 이번 게이트웨이 건도 그렇고 이런 식으로 보복하는 건 너무 심했네. 누가 뭐래도 헬리오스와 숭고한 길 재단은 피를 나눈 거나 다름없는 형제지간이 아닌가? 존경하는 그랑 플람의 신의를 저버리…….”


  “감히 네놈이 그 더러운 입으로 그랑 플람의 이념을 논하느냐?!”


  마침내 인내의 한계가 폭발했다. 곰이 포효하듯 브루스는 노기를 숨길 생각도 않고 다짜고짜 브뤼노의 멱살을 거칠게 틀어쥐었다. 과연 브뤼노도 그 성난 기세에 깜짝 놀랐는지 잠시 얼굴이 굳어졌다가 두 손바닥을 들어 순순히 항복을 표시했다.


  “워- 워- 진정하게나. 내 나름 섭섭함을 표현하려던 건데 이거야 원,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격이구만. 소란 떨어서 피차 좋을 것 없네. 주변을 좀 보게.”


  브뤼노의 속삭임에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씩씩대던 브루스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브루스의 노호(怒號)에 혹시 뭔 일에 휘말릴까 무서워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일부러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는 행인들이나 깜짝 놀라 제자리에 꼼짝없이 굳은 채로 시선을 보내오는 사람들을 보자 브루스는 쓴맛을 다시며 밀치듯 브뤼노의 멱살을 놓았다. 브뤼노는 헛기침을 하며 비뚤어진 타이를 고쳐 맸다.


  좋지 않다. 속사정을 모르면 누가 봐도 브루스가 브뤼노를 위협하고 있는 장면일 것이다. 언론에 알려져야 하는 건 재단에 대한 회사의 횡포이지, 회사에 대한 재단의 협박 같은 게 아니었다.

 


  “이보게, 나도 답답하다네. 결국 이 모든 건 항해일지가 없기 때문이야. 그게 자네 말대로 자네가 타고 모험한 배라면 분명 항해일지를 썼을 테지? 생전에 그랑 플람도 여정을 기록하는 일을 매우 중시했다고 하지 않는가. 직접 삽화까지 그리는 열성을 보일 정도로. 그런 그를 누구보다도 존경하는 자네가 선장을 맡았을 테니 그 일을 게을리 했을 리도 없고. 자네대체 그 모험에서 얻은 게 뭔가?”


  “…말해줄 도리는 없네!”


  “우리측에서 사람을 보내 해경에게서 유류품을 받아 왔는데 도무지 항해일지는 보이지를 않았어. 해경들은 분명 커다랗고 두꺼운 양장본을 보았다고 했는데 말이야. 건네준 사람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수상하고.”


  “흥! 어지간히도 멍청한 녀석인가 보지.”


  “마틴이 회사에 자네보다 우호적이고 그건 지금도 그렇지만 그렇게 노골적으로 미심쩍은 흔적이 남았다면 우리로선 이젠 그를 멀리하고 싶은 심정이라네. 그건 당연히 진짜 우리 교역선 항해일지일 텐데 그가 해경의 기억을 조작해 빼돌린 셈이 되지 않는가. 그게 자네의 항해일지라면 글쎄, 자네의 주장대로 그랑 플람 재단의 정찰선임이 밝혀질 유일한 증거품인데 굳이 빼돌려 숨긴 이유가 몹시도 궁금하군. 무슨 일이 있어서라도 읽고 싶을 정도로.”


  “…….”


  “그럼 나는 먼저 가보겠네. 지금은 게이트웨이 건에나 서로 집중함세.”


  브뤼노는 방금 전 멱살을 잡힌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환하게 웃어 보이고는 경찰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헬리오스 본사를 향해 걸어갔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다가 브루스도 서둘러 재단으로 돌아갔다.

 


  서류를 대면하기보다는 직접 발로 뛰는 일을 선호하는 브루스이기에 형식적으로 마련된 사무실 책상 위에는 명패를 제외한 물건이 울려져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오늘은 말끔하게 치워진 책상 한가운데 쭈글쭈글해진 가죽표지 책이 놓여 있었다. 브루스는 사무실 문턱에서 그것을 발견하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 문을 쾅 닿고 서둘러 책상 곁으로 다가갔다. 표지 한가운데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The Truth belongs to someone who believe it.

 

 

  틀림없는 마틴의 필체였다.

 

 



― 05에 계속.

 

*
- 이번 화는 진격전 스토리에는 나와 있지 않은 오리지널 스토리라고 할 수 있겠네요. 다급한 상황에서는 고도의 정신 집중을 요하는 스캐닝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생각할 때 <일곱 개의 변주곡>이란 제대로 된 작전 계획을 수립하기 전에 또 한 번 조사단을 파견하여 정보를 모으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현실성을 고려했습니다.
- 이번 화만큼 늘 소설 첫머리에 쓰는 안내문이 무겁게 느껴지는 경우고 없는 듯합니다. 세월호 참사 잊지 않겠습니다.
- 건드리면 마구 찔릴 것 같은데 막상 꺾어보면 섬약하게 부러지는 한 떨기 꽃 같은 사람이 좋습니다.
- 디즈니 애니메이션 <FROZEN> 삽입곡 <For the first time in forever (Reprise)> 엘사의 대목 중 "Yes, I'm alone. But I'm alone and free."라는 말이 나오는데 자연스레 트리비아가 떠올랐습니다. 엘사를 보면 트리비아가 참 많이 떠오릅니다. 안나 역으로 미쉘을 캐스팅해서 패러디하고 싶을 정도로,
- 남자는 첫사랑을 절대로 잊지 못한다고 하지요.
- 브뤼노랑 브루스랑 쓰면서 몇 번을 헷갈렸는지. 이동게이트와 게이트웨이를 혼동한 거랑 같네요.
- 오늘의 오타: 행방불멸☞행방불명, 받침 하나로도 의미가 정반대가 되네요.
- 사실 첫머리 BGM은 piano version 말고 string version으로 싣고 싶었는데 유튜브에는 없더군요. 크흡, 소장하고 있는 음원을 첨부하는 건 불법이고. 개인적으로 멜론이나 소리바다 같은 서비스를 구입해서 이용하시는 분은 그걸 검색해서 틀어놓고 읽으시면 더 좋습니다.
- 오탈자 및 이상한 문맥 지적, 비판, 다양한 질문 격하게 환영합니다. (전작 포함)
- 주요서식지
: 블로그(http://blog.naver.com/goastbaster) / 트위터(@winzs76) / 익명질문함(http://ask.fm/winzs76/)
- 깨알 같은 전작 홍보.
「은폐」[피터미쉘데샹]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3763240)
「유도」[데샹미쉘피터]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4004813)
「호접지몽」[다이무스]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6171648)
「Twilight」[올캐러/장편]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8138407)
「손바닥글 모음」[다무트리]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8953308

「한 여름밤의 꿈」[올캐러/비정기 연재중]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10394173)
- 이번 화의 참고자료는 다음과 같습니다.

 

 

 

 

 

 

 

 

 

 

 중급 진격전 APC한테도 못 이기는 발컨 인증샷.jpg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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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예~예~ 모든 것은 신의 뜻... 불허합니다. 의외군요. 나 원 참... 시작할까요? 강화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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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궁금하죠? 축하드립니다. 너에게는 뭐든 주고 싶어. 칭찬 드립니다. 대-단하십니다. 내겐 보여, 너의 죽음 당신을 믿습니다. 이런 미래는 싫어!
감사합니다. 기쁩니다. 축하합니다. 칭찬해 드리죠. 놀랍군요. 심기가 불편합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매우 화가 나는군요.
짝.짝.짝.짝 고마워... 멋있어... 지금 이게 뭐하시는 거죠? 대다나다 히에엑... 헉! 깜짝 놀랐습니다. 그만해!!!!!
옳소! 감탄했습니다. 흐음 후회할거요! 감사합니다. 놀랐습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정색) 축하드립니다. 칭찬해 드립니다. 놀랍군요. 매우 화가 나네요. 큰 충격입니다. 놀랍군요.
이럴수가... 감히! 네가! 아니?! 장하군! 응?! 좋다! 그건 아니다! 고맙다!
감사합니다 잘 못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매우 화가 나는군요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좌절상태입니다 감탄했습니다 칭찬합니다
멋지군! 좋았어! 하하! 축하하오! 아아.. 5분전인데. 커피한잔 하겠소?
승리의 정유년! 정의로운 새해복! 극.한.공.성. 복! 받아랏! 음~ 직장인의 정석
많이 배웠습니다! 대단합니다! ?!! 축하드립니다 뭔가.. 부족해요 짝짝짝! 각오하세요! 으윽!
성탄의 축복을~! 메리 X-MAS~! 화이트 크리스마스야 해피~ 크리스마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성탄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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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빈 미이라와 고스트 제피 할로윈에는 카를로스호박 히카르도의 사탕 탄야의 마녀 분장..? 잭-슈타인 강시 루시
기자님의 감탄사 : 호-오! 기자님의 일과 : 신문 보기 기자님의 사과 : 이거 실례! 기자님이 놀라면 : 어이쿠! 기분이 좋아 보이는 잭 기분이 나빠 보이는 잭 천진난만한 잭 상큼한 인사를 날리는 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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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합니다 궁금하네요 에구머니나! 슬프네요... 경멸스럽군요.. 후훗~ 뭐라고 하셨죠? 이, 이럴수가...!
아이작의 멋진 모습 이글이라 샤샤샤~ 트리비아 슬라이딩 시바 포는 달린다 까미유도 달린다 라이샌더 달린다 마를렌 점프! 샬럿 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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