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yphers

  • Silent Night - 일곱 개의 변주곡 -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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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바스터 [62급]

2014-02-21 10:50:43

- 이 글은 픽션(fiction)입니다. 특정 단체ㆍ사건ㆍ사상ㆍ종교와 무관함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 Silent Night - 일곱 개의 변주곡 - Prologue

 

 

 

 

 

 

  브루스는 여느 때와 같이 우뚝 선 기념비와 마주보고 섰다. 지금은 길 떠나고 없는 음유시인이 가락을 만들고 노랫말을 붙인 시를 읽을 때마다 가슴 속에는 무한한 열정이 들끓었다. 곤히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줄줄 욀 수 있을 정도로 마음 속 비석에 새기고 또 새긴 가사지만 볼 때마다 기운을 북돋운다. 설령 이 시비가 언젠가 닳아 없어지더라도 그랑플람의 업적을 기억하고 기리는 이 내면의 비석은 결코 풍화되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 곳에 정착하여 안주하지 않고 끝없이 미지의 것을 꿈꾸고 그곳으로 용기 있게 나아가는 ‘모험’의 정신. 다르다 하여 배척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흡수하지도 않으며 다른 것은 다른 것대로 어우러지게 하는 ‘조화.’ 그랑플람을 숭배하는 동료들을 격려하고 신용하는 ‘신의.’ 이 숭고한 정신을 흐트러뜨리는 자에게는 응당 징벌을 내려야 하리라.


  흔들림없는 신념으로 스스로를 몰아세우며 재단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성질 급한 그답게 보폭이 크고 걸음걸이도 빠르다. 재단후원자 몇몇이 브루스를 발견하고는 인사를 채 다 건네기도 전에 척 하고 손만 들어 보이고는 쌩하니 스쳐 지나갔다. 매사 열정을 갖고 임하므로 평소 같았더라면 동료들의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귀 기울였을 것이다. 오늘은 중대한 사안을 처리해야 하는 날이므로 오로지 거기에만 몰두했다. 시계를 보니 예정 시간 1분 전이었다. 과부족없이 시간을 쓴다. 지각은 말할 가치도 없고 여유마저 사치였다. 활력(VIGOR)으로 가득 찬 그에게는 1분이든 1초든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시간이다. 허투루 사용할 수는 없었다.

 


  재단 가장 안쪽에 있는 회의실 문 두 짝이 환영하듯 활짝 열려있었다. 역시나 브루스가 마지막 한 사람이었는지 입구로 가까워지는 그에게로 수십 쌍의 눈동자가 쏠렸다. 그 시선에 기죽지도 않고 그는 비어있는 제 자리로 가 앉았다.


  “어서오세요, 브루스 씨.”


  맞은편에 앉은 마틴이 빙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매번 무시해도 포기 않고 말을 거는 마틴을 흘긋 보고는 브루스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모자를 벗었다. 한결같이 냉담한 태도에 마틴은 마음 상해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짙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아, 이제 모두 모였군요. 재단을 위해서 각기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걸음해주셔서 우선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는 말씀부터 드…….”
  “거두절미하고. 시간이 아깝네. 톰슨, 속히 탐사 결과를 보고해주게.”


  브루스가 마틴의 의례적인 인사를 사정없이 끊었다. 단지 조용하기만 하던 회의실 안에 급속도로 긴장감이 휘몰아쳤다. 브루스는 굳게 팔짱을 낀 채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틴은 그런 그를 보고 쓰게 웃으며 왠지 모르게 입장이 곤란해진 듯한 릭을 구해내듯 먼저 입을 열었다.


  “그도 그렇군요. 일을 처리할 때는 일정한 절차를 밟아야 하지만 속도도 중요하니까요.”


  브루스가 끼얹은 찬물을 미온수로 바꿔놓듯 마틴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한순간 날카롭게 곤두선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임원들은 거북함을 수습해준 그를 내심 다행이라는 듯 보며 신뢰의 눈길을 보냈다. 브루스의 굵은 눈썹은 좁혀들었다. 릭은 가볍게 마틴에게 목례하며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헛기침했다.


  “조사 결과를 보고 드리겠소. 나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 사이퍼로서 여기 계시는 보이틀러 씨의 부탁을 받고 새로운 이공간 탐사에 나섰소. 의뢰가 아니라 부탁이라 표현한 것은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께서 더 잘 알겠지만 그 단계에서는 재단의 일이 아니고 사적인 용무라는 명목으로 그가 내게 찾아왔기 때문이오. 이공간은 현재 트와일라잇의 최초발견자라고 알려진 트리비아 카리나의 행보에 전 사이퍼계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듯이 민감하고 중요한 사안인데다가 사전 정보가 확실치 않은 상태에서 움직이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소.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 개인적인 호기심이 동해 은밀하게 공간의 흐름을 읽고 틈을 찾기 시작했소. 하여…….”

 


  “실례지만 미스터 톰슨, 실은 본격적으로 탐사 결과 보고를 듣기 전에 몇 가지 짚고 넘어갈 사실이 있습니다.”


  묘하게 대립각이 섰던 공기를 수습했던 장본인이 우습게도 정중하게 제동을 걸었다.

 


  “공간의 조짐과 기색을 읽는 데 뛰어나 인형실 끊기 작전의 주역이기도 했던 당신이 그 일을 맡은 것에는 결과적으로 이의가 없습니다. 확실히 사이퍼계 구성원 전체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문제라 순수하게 관심이 갔을 법도 하나 가벼운 기분으로 손을 대기에는 너무 큰 문제라고는 여기지 않으셨습니까?”
  “하하, 챌피 군. 심문한 상대가 틀린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나? 추궁은 나한테 해야지.”


  말이 잘리고 또 말이 잘렸다. 브루스는 짐짓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섞었지만 마틴을 쳐다보는 눈길에는 숨길 수 없는 못마땅함이 보였다. 공연한 데서 걸고넘어지지 말라는 경고의 뜻마저 담겨 있었다. 노골적인 괄시에서도 아랑곳 않고 마틴은 빙긋이 미소 지었다.


  “심문이니 추궁이니 꽤나 과격한 표현을 쓰시는군요.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브루스 씨를 제외한 임원 모두의 궁금증을 대신해서 묻는 겁니다. 새로운 이공간이 존재함은 이 회의가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진실일 테지만 결과론만 가지고 논할 수는 없습니다. 정보의 입수처가 어디인지 동료들에게 나누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랑플람의 숭고한 이념 그 세 번째, 신의를 생각해서라도.”


  마음껏 떠들어보라는 듯 마틴의 언변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브루스가 마지막 말에 있는 대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재단후원자들과 정보를 공유하지 않은 그가 이념을 지키지 못했다고 비아냥거리는 듯한 어조가 묻어났던 것이다. 팔짱 안에 숨긴 그의 손이 터져나갈 듯 주먹을 쥐었다.


  싸가지가. 속으로 이를 바득 갈며 브루스는 입을 열었다.


  “릭이 말한 대로지. 말 그대로 신빙성이 몹시 낮은, 루머에 가까운 정보였기 때문이라네. 적을 섣불리 믿는 건 너무나도 어리석은 일이니까. 순순히 현혹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적?”


  마틴뿐만이 아니고 회담장 안에 있는 이들 모두가 이구동성을 냈다. 어서 대답하라는 듯 재단원들의 눈이 호기심으로 강렬하게 번득였다.


  “안타리우스의 사신 아이작이 내 앞에 홀연히 나타난 적이 있네.”
  “…!!!”


  소리없이 경악이 와장창 떨어져 산산조각났다. 정작 말한 본인은 아무런 표정 변화없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기분 나쁜 말투로 ‘안타리우스는 새 둥지를 찾았다.’고 떠벌리더군. 거기가 어디인지 알고 싶다면 공간능력자에게 찾아보라고 시키라고, 문을 열어뒀다고 온통 두루뭉술한 말만 지껄이고 사라졌네. 진실인지 아닌지는 직접 확인해보라는 건방지기 짝이 없는 태도였지.”
  “검은 사신이 찾아왔다는 시점에서 이미 큰 문제가 아닙니까? 헌데 어찌…….”

 

  그나마 마틴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질문을 던졌지만 그도 놀라움을 채 다 수습하지는 못한 듯 말끝을 흐렸다.


  “아이작이 거물이라는 점은 내 부정 않겠지만 그 악질적인 무리의 잔당이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사이퍼계에 괜한 불안감을 조장하려고 용쓰고 있다는 건 다들 알고 있을 텐데. 큰 소란 피우고 싶지 않았어. 중요한 일이니만큼 내가 먼저 신중을 기하고 싶었던 걸세. 진상을 알아보고 난 뒤에 켕기는 구석이 발견되면 의논하리라 마음먹은 거야. 그 결과 지금 이 자리에 자네들을 불러 모은 거지. 이런 내 뜻을 알아주리라는 ‘믿음’으로 말일세.”


  브루스는 조금 전 마틴의 은근한 조롱을 재차 비웃듯 이념을 들먹였다. 마틴은 미소를 흐트러뜨리지는 않았지만 낭패라는 눈빛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것도 매우 일리가 있는 까닭이기는 하군요. 일찍이 함께 의논해주셨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습니다만. 톰슨 씨에게 주셨을 보수도 사재로 지불하셨을 것 아닌가요. 브루스 씨의 열정과 추진력에는 못 따라가겠군요.”


  “조화를 도모하는 데 방해되는 것을 배제하기 위해 그깟 몇 푼이 뭐가 아깝겠나. 오히려 대가가 너무 적어서 탈이지. 릭, 쓸데없이 순번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이. 보고를 계속해주게.”


  브루스는 껄껄 호방한 웃음을 터뜨리며 가만히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릭에게 눈짓했다.

 


  “…그러면 이어 말씀 드리겠소. 보이틀러 씨가 부탁할 때 사신의 말을 알려주기는 했지만 막막했던 것도 사실이오. ‘문을 열어두었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만으로는 이공간은 찾아지는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회의감도 들었고. 실제로 엄연히 존재하지만 그곳이 현실은 아닌 칸도르는 전혀 감지하지 못했으니 말이오. 하지만 아이작이 말한 그 이공간은 정말로 ‘문을 열어두었다’는 표현이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거기로 통하는 공간의 균열이 뚜렷하게 느껴졌소. 그게 어떤 감각인지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그리로 이동게이트를 만들어 현실과 연결시켜 이동해보았소. 결과는 성공적이었소. 안타리우스가 우리에게 진실을 고해준 셈이오.”


  릭은 참은 말을 단숨에 쏟아내고는 물을 한 모금 들이키며 잠시 심호흡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였소. 아이작은 마치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겠다는 듯 정보를 흘렸지만 적진에서 당당히 행동하기란 어리석지 않소? 일단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복제능력자들이었소. 같은 제복에 똑같은 얼굴을 한 클론들이 무리 지어 그 안을 순찰하듯 돌아다니고 있었소. 일단 나 혼자 살펴볼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탐사해본 바로는, 규모는 코어레너드의 절반 정도로 전체를 둘러보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소. 하지만 이 ‘전체’라는 말에 어폐를 느끼는 것은 내가 그 이공간 전부를 파악했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오. 내가 조사한 그 한계 너머로 더욱 광대한 공간이 느껴졌기 때문이오. 말하자면 그곳은 새로운 이공간의 초입에 지나지 않는단 소리요.”


  “놀랍군요. 노인의 사후 급격히 쇠퇴하여 잔당들이 일으키는 작은 사건은 장난처럼 보일 정도였는데 그들은 우리보다 일찍이 또 다른 이공간을 발견해내고 터를 잡아 여전히 비인도적인 실험을 행해왔다는 소리군요. 일찍이 일루전을 점령하고 트와일라잇에서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릭의 말에 조용한 웅성임이 일었다가 마틴의 냉정한 분석에 다시 쥐죽은 듯 잠잠해졌다. 위기상황을 구체적으로 전해 듣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막연한 위협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잠재운다. 부정적인 심리에서 벗어나고자 머리는 필사적으로 방책을 강구하기 시작한다. 크게든 작게든 재단의 이념을 가슴에 새기고 있는 구성원들이기에 가능했다.


  되레 차분해지는 릭은 회장 분위기에 의외롭다는 듯한 얼굴로 아직 끝나지 않은 보고를 이었다.

 


  “트와일라잇을 탈환하기 위한 안개수집장치(HQ) 파괴 작전 때는 클론들의 복제부작용이 발견되어 치명적인 만큼 위협이 되지는 못했습니다만 현 시점에서는 어떠할는지 모르겠소. 안타리우스의 클론의 샘플을 구하고 이공간을 더 자세히 조사하여 그들의 전력을 파악할 필요가 있소.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이 더 큰 위협이 되기 전에 또 한 번 전쟁을 치르게 되는 수도 있다는 우려도 들지만……. 우선 필요한 최소한의 정예들로 팀을 구성하여 침투 작전을 실행할 것을 이 자리에서 제안하는 바요.”


  릭의 힘 있는 주장에 회장 안이 다시금 술렁였지만 난색을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공간의 실재, 더욱이 안타리우스가 얽힌 사안이라면 만전을 기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넘어야 할 산이 눈 앞에 떡하니 생긴 셈이었지만 힘 있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옆에 앉은 사람과 서로 동의를 확인하는 둥 재단후원자들은 모두 그랑플람의 사람들이었다. 결코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동지들이여, 주목하시오.”


  두려움보다는 희망으로 눈을 빛내는 이들을 수염을 쓰다듬으며 내심 흐뭇하게 보던 브루스가 책상을 가볍게 주먹으로 내리치며 이목을 모았다.


  “여기 릭이 탐사결과를 토대로 제안한 새로운 이공간의 시작, 명명 게이트웨이(Gateway) 침투 작전은 많은 변화를 초래할 것이오. 재단의 위상, 회사는 물론 연합과의 관계, 사이퍼계 전체의 판도까지 모든 것을 바꾸어놓을 걸세. 이는 우리가 그랑플람의 이름으로 주도하는 커다란 기념비적인 사건이라네. 따라서 더욱 신중하고 현명하게 일을 추진해야 하네. 그랑플람의 숭고한 정신을 머리에는 차갑게 심장에는 뜨겁게 새기면서.”


  브루스는 어쩌면 자기도 이 순간을 기다려왔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오늘도 습관적으로 재단 건물 입구에 멈춰서서 되새겼던 <숭고한 길>을 떠올리자 마음속에 뜨끈한 감격이 들끓었다. 끝나지 않은 그랑플람의 항해는 여전히 재단후원자들의 가슴에 꿈과 사명을 안긴다.

 


  “우선 조사단으로 파견할 정예 멤버를 구성하는 게 급선무겠군요. 톰슨 씨, 규모는 어느 정도가 적당하고 보십니까?”
  “시전자인 나를 제외한 최대 다섯 명까지 한꺼번에 이공간으로 이동시킬 수 있소. 재단에서 한 명, 회사와 연합에서 각각 두 명씩 선발해 동맹군 형태로 협조를 요구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보오.”


  릭은 기다렸다는 듯이 준비한 소견을 내놓았다. 재단후원자들 대부분이 이견이 없었고 마틴도 마찬가지였지만 릭 혼자만의 제안은 아니라는 점을 똑똑히 인지했다. 브루스의 개인적인 부탁이었으니 이 회의가 열리기 전 상당 부분 작전 내용에 관한 공모가 끝났을 것이다. 확실히 최선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 국면을 마음껏 휘어잡고 있는 것은 명백히 브루스였다. 그가 구심점이 되고 있다.


  “우리 재단에서는 당연히 마틴이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소. 자칫 작전 수행중 생길 수 있는 회사와 연합 간의 갈등을 잘 중재할 만한 것도 그고, 스캐닝을 비롯한 그의 능력은 정보 조사에 매우 유용하지요.”
  “암. 챌피밖에 없지.”
  “과찬이십니다.”


  다른 후보는 생각해볼 여지도 없는 듯 재단 임원들은 하나같이 이 자리에서 가장 젊은이를 지목했다. 약간은 곤란한 듯 겸연쩍게 웃고 있는 마틴이지만 불과 스물넷에 이미 분에 넘치는 권력을 쥐고 있는 무서운 애송이였다. 기대 받는 일에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여러 조건을 따져볼 때 마틴이 재단 대표로 작전에 참가해야 한다고 브루스도 생각하기는 했지만 입맛이 못내 씁쓸한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회사나 연합은 자율에 맡기는 게 좋겠지. 이 정보를 함께 나누지 않고 벌써 작전까지 수립한 채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우리를 여간 고까워하지 않을 테니까.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사안이니 만큼 아마 대충 예상이 가는 에이스급 사이퍼를 내줄 테지만.”


  브루스는 웃지 않았지만 내심 통쾌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특히 헬리오스에 대해서는 더욱 쾌재를 부르고 싶었다. 그랑플람의 명성과 지위를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 헌신짝 버리듯 한 회사에 대한 복수심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말로 하지는 않지만 재단후원자들 모두가 그리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그 대단한 명왕조차도 결코 평온한 얼굴로는 있을 수 없을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연합 측에 한해 한 명 정도는 지명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아까 미스터 톰슨이 잠깐 언급하기도 했지만 트리비아 카리나 말입니다.”


  임원 가운데 하나가 조용히 의견을 얹었다. 브루스는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뜨는 마틴의 안색을 곁눈질하며 동의한다는 듯 곧장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트와일라잇 최초발견자가 지하연합 소속 능력자 코드명 EMPRESS 트리비아 카리나임이 뒤늦게 밝혀졌을 때 사이퍼계는 약속이라는 한 듯 그녀에게 주목했다. 환영의 도시, 그것도 포트레너드나 메트로폴리스처럼 지도에 표기할 수도 없는 이공간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는 위험하고도 매력적인 그림자능력에 대해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인형실 끊기 작전 이후부터는 「액자」와 함께 제멋대로 모습을 감춘 시바 포의 행방이 여전히 묘연한 상태인지라 모두가 또 다른 「액자」의 존재가능성에 관해 더욱 강하게 의심하기 시작했다. 트리비아 카리나 스스로가 새로운 공간을 찾고 있다는 소문도 무성해지면서 서로 경쟁하듯 여제의 일거수일투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재단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녀의 동태를 살피는 업무를 쭉 관장해온 임원의 소견이니 수용할 가치가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번 작전에 밤의 여왕을 의무적으로 참가시켜야 할 이유는 얼마든지 있었다. 잘하면 그녀의 능력으로 게이트웨이 간섭 정도를 더욱 높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확실히 이점이 많기는 하지만 좀 더 고려해볼 필요가 있는 인선입니다. EMPRESS는 아시다시피 안타리우스가 수장 노인을 잃고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중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녀를 아직 이렇다 할 정보도 없는 적진 한가운데, 그것도 지원을 가려야 갈 수도 없는 이공간에 투입하는 것은 너무도 큰 위험성을 수반합니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조사단 전체에 무의미한 희생을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트리비아 카리나’라는 난제를 두고 회장 안이 조용한 혼란에 빠졌다. 긍정적인 측면에 주목하면 그녀의 활용도는 무궁무진하고, 부정적인 측면만 보자면 최악의 경우 안타리우스에 그녀가 납치당하고 나머지 사이퍼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 심각한 단점을 감수할 정도의 이익을 먼저 취할 것인지 안전하게 진행하여 손실을 최소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천칭 위에서 두 안(案)의 무게는 한 치 오차도 없이 동일했다.


  “연합 측에서는 사태의 중대함도 있고 트리비아 카리나가 투입됨으로써 그들도 따로 얻게 될 이익이 있을 것이므로 분명히 우리가 요구하면 내어주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오. 결국 이 자리에서 우리가 당락지어야 한다는 소리인데, 별 수 없지. 다수결로 정합세.”

 


  근소한 차이이기는 했지만 즉석에서 손을 들어 이루어진 투표는 찬성으로 결론이 났다. 굳이 민주주의적 방식을 취하지 않았더라도 브루스는 결국 찬성 쪽으로 기울어질 것이라 예상했다. 모험에는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도박과 비슷하다. 도전하지 않은 자에게는 성취도 없는 법. 위기를 사서 맞아들여 이기는 일도 필요하다. 브루스는 수 싸움에서 진 분함이 아니라 이유 모를 근심이 서리는 마틴의 얼굴을 이상스레 관찰했다.


  “당장이라도 회사와 연합에 사람을 파견해 작전 내용과 요구 사항을 알려야 합니다. 회사 쪽에는 반발을 최소화할 겸 회사 여러 중진들과 돈독한 신뢰 관계를 쌓은 챌피를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쩐지 자네 한 사람한테 너무 많은 일을 맡기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구만.”
  “아뇨, 당치도 않습니다. 숭고한 재단을 위해 이 한 몸 바친들 무엇이 아까울까요. 제가 도맡아 잘…….”

  “아니. 회사에 가는 것은 날세. 자네는 연합을 맡아주게.”


  브루스가 화기애애하기까지 한 임원과 마틴의 대화를 가차없이 끊었다. 그의 열정과 추진력은 재단의 명예를 높이는 일에 많은 보탬이 되었지만 같은 재단후원자들을 불편하게 할 때도 꽤 많았다. 정당한 이견조차 그의 불호령 앞에서는 불식되어 큰 오류가 아닌 이상 그냥 입을 다물어버리고 마는 경우도 잦았다. 재단에서 비교적 어린 축에 속하는 마틴만이 그의 불 같은 성격을 앞에 두고도 대항하고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브루스 씨, 제가 연합에 가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요?”


  마틴의 차분한 물음에는 뚜렷한 이유가 없다면 지하연합에 갈 이유가 전혀 없다는 뜻이 담겨있었다. 재단 자체는 상명하복식 관료제를 취하지 않으므로 임원이라고, 연장자라고 꼭 따를 필요는 없었다. 다만 브루스는 자기가 결정내린 사안은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므로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아까 말했듯이 이번 작전은 회사와의 본격적인 관계의 재정립일세. 우리는 헬리오스의 부속기관 따위가 아니라 회사 이전부터 존재한 집단이야. 그랑플람의 정신을 가볍게 본 이들과 친목할 필요는 더 이상 없네. 반발하든 말든 눈치 볼 것 없다 이 말일세. 자네도 조화를 생각하는 재단의 인재라면 연합의 인사들과도 접촉해야 할 필요성이 있지 않겠나?”


  은근히 비꼴 셈이지만 마틴은 미소 지으며 알겠다고 답했다. 꾸민 것도 아니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이 느껴져 되레 당황스러웠다. 아직 브루스가 마틴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을 때가 떠올랐다. 재단원들을 필사적으로 설득하여 재단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마틴이 보인 순수한 웃음을 쓸데없이 회고하게 만들었다. 이미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연기와 진심 사이에 경계가 없어진 놈이라 자기 느낌도 믿을 게 못 되는데.


  브루스는 남모르게 혀를 차며 마틴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내 마음만은 읽지 않겠다고 호소했지만 한 번 약속을 어긴 자의 말을 신뢰하기란 어렵다. 신의를 먼저 저버린 건 녀석이므로 믿어줄 의리는 없었다.

 

 

* * *

 

 

  앤지는 방금 전까지 조용히 폭탄을 투하하고 간 청년을 집무실 문 앞까지 배웅하고 돌아온 토니와 마주보고 그저 웃고 말았다.


  “토니의 예견이 역시 맞았다고 해야겠죠.”
  “과연 저도 그랑플람 재단이 ‘새로운 이공간’이란 화제를 들고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입니다.”


  앤지는 쓰게 웃으며 아주 식어버린 홍차로 목을 축였다. 한 모금의 온기만 즐겼을 뿐 뜻밖의 방문객의 입에서 부드럽지만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엄청난 말들에 정신 팔리지 않으려고 자신을 다잡기 바빴다. 애프터눈티를 즐길 여유는 깔끔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겨울이라 익숙할 법한데도 차가움에는 매번 놀란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 뱃속에 자리하는 여실한 싸늘함이 차라리 혼란을 잠재워주는 것 같아 잘 되었다.


  “한동안 약화되었던 그랑플람 재단의 동향을 꾸준히 살펴온 것이 비로소 도움이 되네요. 토니의 선견지명이 아니었다면 그냥 얼이 빠지고 말았을 거예요.”
  “이로써 확실시되었습니다. 피를 나눈 형제였던 헬리오스와 숭고한 길 재단은 아예 갈라섰군요.”


  토니는 턱에 손을 짚은 채로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싱긋 웃으며 앤지와 눈을 맞추었다.


  “이 일을 어떻게 보십니까, 스노우 퀸.”


  현재 집무 도중인 것은 맞지만 공식석상이 아닌 이상 이명으로 부르는 일이 거의 없는 멘토를 보며 앤지는 잠시 눈만 깜빡였다. 영리한 그녀는 곧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차가운 찻잔을 두 손에 품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지하연합에는 더할 나위 없는 절호의 기회죠.”
  “호오, 어찌 그리 생각하십니까? 이 늙은이는 회사와 재단의 난투극에 연합이 말려든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앤지는 반쯤 남은 홍차를 단숨에 들이켜버리고는 그 호쾌한 마시기와 달리 더없이 우아한 손길로 잔을 내려놓았다.

 


  “헬리오스는 위대한 모험가 장 바티스트 플람의 명성을 빌려 세워졌습니다. 그랑플람이라는 이름 하나만 보고 회사로 소속을 정한 이들이 당시 꽤 많았기에 회사의 능력자층은 단숨에 두터워졌습니다. 아버지께서 러시아 혁명을 지원한 것을 계기로 지하연합 구성원 수가 비약적으로 늘었던 현상과 비슷하죠. 그밖에도 명왕이 회사를 설립할 때 그랑플람은 바다의 람블라 시절 벌어들인 돈을 아낌없이 투자했습니다. 능력자와 비능력자의 권익 보호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젊은 헨리 밀러 3세의 패기를 높이 샀던 거죠.

 

  하지만 그랑플람은 다시 모험을 떠나고 회사는 재단과의 연관성을 조금씩 퇴색시켜나가며 독립 세력으로 우뚝 섰습니다. 그랑플람의 이름에 기대지 않고 헬리오스라는 고유 브랜드 가치를 창출해냈습니다. 오히려 그게 진짜 목적이었다고 봐야겠지요. 더욱이 아예 숭고한 길 재단을 하청업체처럼 다루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재단 입장에서는 여간 괘씸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들이 숭배하는 그랑플람의 은혜를 입 싹 씻고 모른 척 하는 것과 다름없으니까요.”


  앤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안락 소파인데도 딱딱한 등받이 의자에라도 앉은 듯 등을 곧추세웠다. 지금부터가 진짜 할 말이라는 듯.


  “재단은 자기들도 모르게 조금씩 회사에 종속되고 있던 처지를 뒤늦게나마 알아차리고 서서히 독자적인 행동에 나섰습니다. 이번 게이트웨이 침투 작전은 그야말로 재단이 주최하여 주도하는 최초의 사건이지요. 아까 마틴 챌피가 밝혔듯이 사이퍼계의 불안을 부러 가중시킬 필요는 없으므로 일단은 각 세력 안에서도 일부만 아는 기밀로 다루어질 테지만 이번 일은 분명히 많은 것을 뒤집어놓을 것입니다. 회사가 재단을 거의 흡수하다시피 하면서 누려왔던 모든 이권들이, 재단이 회사와 완전히 결별하면서 분산되겠지요. 연합과 회사라는 이분법적 대립 구조가 그랑플람 재단이란 제3세력, 강력한 중립 세력의 등장으로 완화되는 효과를 기대해볼 수 있습니다. 우선 비대해진 회사의 세를 어느 정도 약화시킨다는 점에서 충분히 연합에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잘 알아보셨습니다.”


  토니가 흐뭇한 얼굴로 쳐다보았으나 앤지는 입을 약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그렇게 시험해보지 않으셔도 자연스럽게 나올 말인데.”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늙은이의 자그마한 낙 같은 겁니다.”

  “토니가 그러는 것도 이해는 가요. 전 아직 반쪽짜리 수장인 걸요. 최대한 가족들에게 걱정 끼치지 않으려고 애쓰고는 있지만…….”
  “잘하고 계십니다. 제가 주책이라 괜히 아가씨를 불안하게 했군요.”


  앤지가 아니라는 듯 옅게 미소 지으며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가로흔들던 고개를 창문으로 고정시키고는 멀거니 시선을 보냈다. 착잡함과 따뜻한 걱정이 뒤섞여 복잡한 눈빛을 만들어냈다.

 


  “……트리비아가 또 괴로워지겠군요.”


  한숨 섞인 말을 흘리며 앤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우중충한 영국 겨울 오후의 얼어붙은 한기가 유리창을 뚫고 들어올 듯했다. 손끝에 묻어나는 냉기가 소스라칠 정도로 차다. 언젠가 우연히 스친 트리비아의 피부결만큼이나 싸늘했다.


  “……토니.”
  “예.”
  “왜 숙명은 원치 않는 이에게서만 비켜나지 않는 걸까요?”


  앤지는 손바닥으로 창문에 서린 김을 훔쳐냈다. 뿌연 가운데 투명한 곳이 생겨나 앤지의 얼굴을 비추었다. 토니는 거기에 비친 젊은 수장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가 말한 숙명이란 트리비아를 가리켰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평범하게 프랑스에서 노래를 부르며 지낸 앤지 스스로를 무의식적으로 함축하고 있기도 했다. 토니는 앤지가 굳이 대답을 요구한 게 아님을 알고, 애초에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운명은 너무나도 기구해요. 요기 라즈는 세상이 그녀에게 맞춰져 돌아가고 있다고 말했지만 좋은 것만이 아녜요. 오히려 나쁜 점이 더 많죠. 누구보다 조용히 살아가고 싶어하는데 안타리우스도 회사도 재단도 심지어 우리조차도 그녀를 이용하고 있죠. 그녀를 조사단 필수 구성원으로 요구한 마틴 챌피의 논리에 저는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었어요.”


  어느새 뿌옇게 흐리기 시작하는 지점을 손톱으로 의미없이 긁다가 앤지는 천천히 토니에게로 돌아섰다.


  “나 역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그의 눈에는 그녀를 이용하려는 사람들 중 하나로 비치지 않았을까요?”


  앤지의 눈 안에는 간절히 부정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토니는 그녀가 원하는 말은 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수장은 자기 결단이 갖는 무게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그랑플람 재단은 비능력자와 능력자, 더불어 능력자와 능력자 간의 완벽한 조화 공존을 꿈꾸는 집단입니다. 지극히 이상적, 다시 말해 비현실적입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이념이 지향하는 진정한 목적을 새기기보다 이념 자체에 경도될 확률이 높습니다. 명목을 지키기 위해 오히려 실질을 배반하게 되는 경우가 있지요. 이념을 지키기 위해서라곤 하지만 왠지 이번 일은 솔직히 제 밥그릇 지키기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듭니다. 이공간은 물론 안타리우스는 사이퍼계 구성원 전체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숙제가 맞지만, 이번 일을 빌미로 재단이 회사와 연합을 마음대로 휘두르려고 하지는 않는지 경계해야 합니다. 그래요. 우리는 그녀를 사지로 내몰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녀를 진심으로 지켜줄 수 있는 것도 우리뿐입니다.”


  앤지는 토니의 논리적이어서 더 희망적인 말에 그저 애달프게 미소 지었다. 잠시 눈을 내리깔며 트리비아를 그리고 그녀의 연인을 생각했다. 지금 가장 아픈 것은 그일 거라는 생각에 트리비아를 걱정하는 순간보다도 마음이 아파왔다.

 

 

* * *

 

 

  팔 안에 잠겨 있는 순간만큼은 그녀가 온전히 내 것이라고 착각한다.


  장기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오랜만에 함께 보내는 밤, 그간의 공백을 메우듯 트리비아와 격정을 나누었다. 우리 사이에 뜨거움이 태어나는 유일한 순간이다. 열에 들떠 흐트러지는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답다. 그녀가 아름답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몸을 포개는 순간의 그녀가 더욱 각별한 것은 다른 사람은 절대로 볼 수 없는 모습이기 때문일 것이다. 침대 위로 물결치듯 흔들리는 밤빛 머리칼도, 달뜬 한숨과 자극적인 목소리도, 등에 휘감긴 그녀의 차가운 맨손. 다름 아닌 맨손이 맨살에 부드럽게 매달려있다. 달아오른 체온에도 일말의 싸늘함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는 찬 손이 걸려있다.


  여간해서는 땀을 흘리는 일 없는 코끝에 땀방울이 아슬아슬 맺혀 있다가 흔들림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의 얼굴 위로 떨어진다. 경황없는 와중에도 희미하게 눈을 뜨며 인상을 찌푸리는 그 얼굴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그녀는 더욱 불쾌한 듯 미간을 좁힐까. 사랑스러움을 이기지 못해 흐트러진 숨마저 빼앗아 깊숙이 들이킨다.


  그녀에게도 표정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그녀의 무표정을 때로 견딜 수가 없다. 웃는 얼굴이 보고 싶지만 화를 내는 그녀가 더 낫다. 언젠가 내가 죽더라도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것처럼 여느 타인을 바라볼 때와 같은 눈빛으로 그녀가 쳐다보는 순간이 더 두렵다.


  트리비아를 꼭 끌어안은 채 그녀의 몸 위로 그대로 무게를 맡겼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떠오르듯 흰 어깨 위로 입술을 묻은 채로 숨을 골랐다. 그녀는 첫사랑 브랜다처럼 따뜻하지 않다. 온기에 젖어도 미온이다. 아주 따스함이 없는 것은 아니기에 그 한 줌을 아끼듯 팔에 힘을 주었다.


  “……비켜.”


  가쁜 숨이 잦아들고 맞닿은 가슴으로 느끼는 심장 박동도 느려졌을 즈음 오랜만에 만난 연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그거였다. 명령조였지만 진이 빠진 목소리 때문에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싣고 있던 무게를 줄이며 몸과 몸의 틈새를 열자 그녀의 가냘픈 손이 어깨를 잡고 살짝 밀어냈다. 몸을 일으켜 뒤로 물러나자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렸다. 느릿느릿 헤매지 않고 욕실로 향한다. 이윽고 들리는 샤워기 물소리를 들으며 모로 누워 방금 전까지 트리비아가 누워있던 자리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약간 체온이 남아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온기를 심장에 이식하고 싶었다. 너와 나의.


  정사의 흔적을 미련없이 물에 흘려보내고 마는 야속함에 쓰다듬던 자리를 무심코 꽉 틀어쥐었다.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임무 보고 후에 앤지에게서 들은 얘기로 알고 있었다. 집을 찾는 게 망설여졌지만 그리움이 더 컸다. 충동적으로 껴안은 몸은 차갑지만 부드러웠고 장미향이 났다. 거세게 부딪치는 욕망을 밀어내지 않은 그녀가 나를 배려한다고 여겼다. 그녀가 나의 연인이라고 느꼈다. 그 전에도 지금도 나의 연일일 텐데 내 안의 불안에 치인다. 앞으로도 그녀가 나의 연인일지 습관적인 두려움을 곱씹고 마는 것이다.

 


  물소리가 그치고 얼마간 시간이 더 흐른 뒤에 트리비아가 침대로 다가왔다. 그녀에 뒤이어 샤워하려고 몸을 일으키다가 그녀가 도로 입은 것이 잠옷이 아니고 외출복인 것을 발견하고는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산책 가려고?”
  “…….”
  “기다려. 같이 가.”
  “아니야.”
  “뭐가?”
  “산책 아니야.”


  침대 아래 아무렇게나 떨어진 옷가지를 끌어모으다 말고 다시 허리를 펴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어느 때건 눈을 맞추지 않는 일이 없다. 상대를 꿰뚫어보면서도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겠다는 듯 닫힌 눈빛이다. 괜스레 기가 죽어 먼저 피하고 마는 게 몇 번이던가.


  “밖은 추워.”


  가죽장갑에 단단히 싸인 트리비아의 가느다란 손목을 붙잡았다. ‘가지 마’라는 말을 직접 꺼내지는 못했다.


  “춥지 않아.”


  그녀는 내 손아귀에서 단호하게 손목을 비틀어 빼냈다. 아름다운 눈동자 안에는 몇 십 분 전의 열기라고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텅 빈 것도 아니지만 결코 생기 넘치는 것도 아닌 신비로만 가득 찼다. 무얼 생각하는지 알고 싶고 다가가고 싶어지는 비밀스러움이 아니라 감히 범접할 수 없다는 생각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망을 안긴다. 천 길 낭떠러지 끝에 핀 꽃 한 송이가 거기 피어있다. 그 꽃은 꺾을 수 없어. 누군가가 속삭인다.


  “도와주겠다고 했잖아.”


  제 안에 울려 퍼진 말을 뿌리치려 했다.


  “필요없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짜증스러움마저 묻어났다. 이대로 가다간 또 의미없는 실랑이를 벌이게 될 것이다. 싸움은 피하고 싶지만 그녀를 이대로 혼자 보내는 것보다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가 언성을 높이는 한 나는 그녀에게 아무래도 좋은 타인은 아닐 테니까. 스스로에게 피학적인 위로를 할 생각은 전혀 없는데. 왜 우리는 서로가 소중하다는 사실을 그렇게밖에 확인하지 못할까.

 


  매몰찬 거절에 아무 대꾸도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녀를 붙잡을 이유도, 따라나설 구실도 없어 초라했다. 연인, 그 이름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 너무나도 많다. 트리비아 카리나의 연인이기에 더욱 더.


  “쉬어.”


  잠깐 그녀의 손길이 닿았다 꿈결처럼 멀어졌다. 차가운 가죽 장갑의 감촉이 뺨에 닿았지만 따뜻했다. 부드럽지는 않아도 그녀의 낮은 체온보다는 어쩌면 따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들자 그녀의 모습은 이미 온 데 간 데 없었다. 쫓아가고 싶어도 쫓아갈 수 없는 그녀 혼자만의 세계로 떠나버렸다.

 


  촉촉한 나른함은 겨울밤 스미는 한기에 이미 말라비틀어졌다. 트리비아를 품 안에 가두어두었던 곳도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식어빠졌다. 루이스는 지친 듯 다시 침대 위로 몸을 내던졌다. 눈가를 손등으로 짚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몸을 옆으로 뉘며 매트리스에 얼굴을 묻었다. 온도는 없고 그녀의 향기만이 묻어났다. 비참한 황송함이었다.

 

 

 

* * *

 

 

  “그랑플람 재단에서 어찌 감히 이런 건방진 짓거리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타라가 긴급 소집된 이사회 개회 선언을 끝내자마자 임원 가운데 하나가 분기를 숨기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 얼굴을 울그락푸르락하며 화를 내는 그가 유별나기는 했지만 그가 분노하는 이유에 다들 공감했다. 내색하는 정도만 달랐을 뿐 못마땅하다는 기색은 역력했다. 안색을 바꾸지 않은 건 무표정한 헨리 밀러 3세와 흥미롭다는 듯 콧수염을 쓰다듬는 브뤼노, 평소와 다름없이 태연자약한 윌라드 정도였다.


  “일이 참 재미있게 되었습니다. 드니스가 ‘안개’에 관한 정보를 지하연합에도 흘려버렸을 때와 비슷한 경우로군요. 우리끼리 독점할 수도 있었던 정보를 연합과 굳이 공유하다니요. 아니, 안개 건보다도 훨씬 더 중차대한 사안입니다. 새로운 이공간이라니. 하물며 어떻게 그 존재를 알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자라처럼 입을 꾹 다물기만 하니 원, 아, 물론 브루스는 자라가 아니고 곰이지만 말입니다. 하하하.”


  “자네는 도대체 지금 그런 시답잖은 농담이 나오는가?!”


  “이런 상황이기에 농담을 하는 거지요. 흥분해서는 보일 것도 안 보이게 되지 않습니까? 마냥 화만 내기보다 저들의 숨은 의도를 파악해야 합니다. 지금 이 자리는 그러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주지하셔야지요.”


  불같이 화를 내던 임원도 브뤼노의 유들유들하지만 반론의 여지가 없는 말에 헛기침하며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올랑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감정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저들이 왜 형제나 다름없는 우리 헬리오스를 배신했는가에 대해 냉정하게 고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먼저 배신한 건 그쪽이다’라는 논리 아니겠습니까?”


  다른 임원의 차분한 말을 바로 이어받은 것은 윌라드였다. 회사 중역으로서는 이 자리에서 가장 젊은 윌라드는 노장들의 위협적인 눈길에도 전혀 겁먹지 않고 여유롭게 뜸까지 들여가며 말을 이었다.


  “우리 회사가 내놓은 새로운 방침은 사실상 그랑플람 재단을 회사 산하기관으로 복속시키는 것과 다름없는 처사였습니다. 하물며 숭고한 길과는 따로 명왕 직속의 밀러 재단까지 따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현재 총수의 양녀가 된 앨리셔 캘런 양을 필두로 매우 뛰어난 인재들을 발탁하여 적극 후원하고 있지요. 그 전까지는 재단이 해오던 일을 회사가 더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그랑플람 기념사업을 제외하고는 실상 회사와 재단의 업무 경계가 모호해졌습니다. 물론 표현이 듣기 좀 거북하실는지도 모르겠지만 그걸 ‘노린’ 게 맞고요. 하지만 재단이 가만히 두고 보지만은 않았던 겁니다. 새 방침을 비웃듯이 그들은 독자적인 활동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비영리 법인으로서 영리 법인인 회사의 ‘후원’과 ‘협력’을 받을 뿐 모종의 구속력을 행사할 권리가 회사에게 없다는 점을 내세워서 말입니다. 단연 그 중심에는―.”


  “브루스 보이틀러와 마틴 챌피가 있지.”


  윌라드의 말을 밀러가 대신해서 끝맺었다. 총수의 입이 열리자 윌라드의 말에 한없이 빨려들고 있던 임원의 이목이 전부 그리로 쏠렸다. 윌라드는 말을 빼앗긴 불쾌함을 얼굴에 전혀 드러내지 않고 차분하게 흐름을 유지했다.

 


  “그렇습니다. 회사의 새 운영책이 발표된 뒤부터 이상스러울 정도로 재단의 중대한 사안의 중심에 서기 시작한 젊은 인재 마틴 챌피와 재단에서 가장 오래된 후원자 중 한 명이자 긴 항해를 마치고 돌아와 톡톡히 재단의 혁신에 기여를 하고 있는 브루스 보이틀러입니다. 마틴의 경우에는 회사에 매우 우호적이고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 몇몇은 그 청년과 꽤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계시지요. 그 나이에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친절하고 배려심 넘치지만 정신 차리고 보면 그는 늘 자기가 원하는 결과로 사람들을 이끌어가지요. 물론 사람의 마음을 읽는 그 능력 덕분이겠지만 그걸 두 배, 세 배로 활용하는 그 자의 소질 내지 재능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소문으로는 브루스와 사이가 틀어졌다고 들었지만 겉으로 보이는 행보에는 교차점이 많습니다. 불화설도 자작극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입니다.”


  마틴과 자주 접촉하는 몇 임원들은 윌라드가 은근하지만 확실히 짚어 보내는 시선을 피했다. 회사 임원으로서 기밀을 흘리고 다니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지만 단서를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뒤가 구린 구석은 없었다. 마틴은 독심술사인데도 이상하게 경계를 풀고 마음을 터놓게 하는 매력이 있었으므로.

 


  “사실 재단의 단독행동은 예전부터 작게나마 확실히 있어왔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랑플람을 기리는 식전 행사나 주화 발행 사업 같은 게 이전부터 있었다고는 해도 갑자기 그랑플람호를 찾는 정찰선을 정기적으로 보내거나 각지에 퍼져있는 그랑플람의 흔적을 찾고 관련 물품을 수집하는 둥 딱히 부자연스러울 것까지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위화감이 드는 활동을 통해 조금씩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습니다. 브루스가 긴 모험을 떠난 것도 그쯤이고 말입니다. 동양권 사이퍼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스카우팅에 박차를 가하기도 했지요. 루시 리는 다행히 우리 소속이 되었지만 바로 지지 않겠다는 듯이 이하랑을 영입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또 다른 임원이 조심스럽게 회사의 맹점을 짚었다.

 


  “그 일련의 독단들이 마침내 두각을 드러낸 사건이 바로 침몰선 인양 건 아닙니까. 일부 언론들이 회사와 재단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추측성 기사를 내보내게 만들었습니다. 배는 한 척인데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는 바람에 지금도 재단 측에서는 계속해서 재조사를 의뢰하고 있다지요. 조사하는 경찰들도 안 됐습니다. 사실 헬리오스가 세워지고 난 뒤 몇 십 년간은 본디 장 바티스트 플람이 소유하고 있던 상선을 양도받아 무역 사업을 펼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그랑플람의 표식이 새겨진 회사 소속 배가 많지요. 그 뒤에 새로 건조한 배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재단이 필요할 때마다 배를 빌리기도 한다는 점에서 골머리를 앓는 겁니다. 경찰에 알리지 말고 우리 선에서 해결 봐도 좋았을 텐데 굳이 일을 시끄럽게 만든 것은 명백히 노이즈 마케팅을 염두에 둔 겁니다. 회사와 사이가 안 좋다는 사실을 공론화하기 위해서.”


   “가장 효력 있는 증거가 되어줄 항해일지도 양도받은 물품 리스트에서 발견되지 않았을뿐더러.”


  브뤼노의 발언에 빼먹어서는 안 된다는 듯 윌라드가 말을 더했다.


  “그 항해일지,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 * *

 

 

  조용히 밤하늘에 비끼는 검은 날개 그림자를 발견하고 마틴은 추위를 잊은 듯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혹시나 마주치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부풀어 앤지 헌트의 집무실로 안내되어 가는 길에도 열심히 구석구석 곁눈질했다. 용무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도 먼발치에 있어도 단박에 알아볼 자신감이 무색하게 트리비아는 그림자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그녀는 결코 모를 혼자만의 상실감을 그나마 보상 받듯 그녀는 오늘도 같은 하늘길을 지나간다. 그녀의 일상 안에, 습관 속에 몰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은밀하게 기뻤다.


  이토록 추운 날 바람을 느끼는 그녀는 춥지 않을까. 그녀의 비행궤도를 따라가며 생각한다. 독특한 저체온 체질을 지니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는 있지만 그게 그녀가 추위를 느끼지 못할 이유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곁에서 가만히 겉옷을 벗어 걸쳐주고 싶다. 아니, 그보다는 두 팔 안을 그녀로 가득 채우고 싶다. 그녀의 몸이 냉기를 내뿜기에 더 온기가 필요할 것만 같은데.

 


  헛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저곳에 실재하지만 닿을 수 없다. 사랑하는데, 사랑하고 싶은데 가만히 이렇게 지켜보고만 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은 절대로 아니었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허상을 연모하는 게 아닌 이상 접촉하고 싶다는 욕망은 당연함 그 이상으로 들끓는다. 강렬하기 짝이 없는 이 마음은 언제나 상상 속에 그녀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게 한다. 뚜렷한 환각을 볼 정도로 절실하지만 낯선 감정인 게 문제였다. 타인에게 한없이 빠져드는 이 느낌이 더없이 좋지만 두렵다. 그녀를 향한 욕망은 상상이 금기를 하나씩 깨갈수록 더 커져만 가는데 정신 차리고 보면 그녀 곁에 섣불리 다가서지 못하는 현실만이 남아있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을 대하는 방법 같은 건 잊어버렸다. 하물며 사랑에 빠진 여인이다. 원치 않아도 들리는 경우가 부지기수, 설령 잘 들리지 않더라도 읽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진실을 찾아내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는데. 그녀로 인해 내가 사람의 마음을 마리오네뜨처럼 자유자재로 조종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저 타인의 마음에 맞추어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회의감이 들었다. 마음을 읽지 않고서는 어떻게 행동할지 감조차 잡지 못하는 나는 기어이 이 능력의 노예가 되어버린 건 아닌지 두려움이 엄습했다. 너무 오만했던 것일까.

 


  그녀를 처음 만난 그날보다 공기는 훨씬 차갑지만 달은 유독 밝다. 저 멀리 그녀의 날개가 보였다. 오른손을 위로 뻗어 올려 원근감을 잊은 채 그녀가 있는 곳을 부드럽지만 꽈악 그러쥐었다. 내려서 살핀 그곳에는 당연히 아무것도 없었지만 분명히 있었다. 손을 살포시 심장께로 가져다 댔다. 그녀는 내게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아직 먼 곳에 있는 사람이지만 따뜻함으로 스며든다. 그녀의 날개는 잃어버린 순수를 일깨운다.


  아직 능력이 발현되지 않아 무엇이든 꿈꿀 수 있었던 그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밤하늘을 날고 싶다는 소년의 로맨틱한 꿈은 기어이 끝나버린 줄 알았다. 없어진 게 아니라 잠시 잊고 있었을 뿐이라는 걸 그녀의 날개가 펄럭이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소년은 이제는 청년이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바라고 있었다. 사람을 사랑하게 되기를, 그 사람과 함께 밤하늘에 닿을 수 있기를. 타인의 마음을 읽게 되고 인간에 대한 혐오가 커지면서 꿈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더 커져만 있었다.

 


  걸어서는 따라갈 수 없는 트리비아의 비행속도에 그녀는 이내 밤이 되어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점이 되어 사라진 곳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코트 품을 뒤적여 가죽수첩을 꺼내들었다. 그 사이에 고이 끼워둔 낡은 종잇조각을 조심스레 펼쳐보았다. 꽤 오래 전 일자 신문이라 구하는 데 꽤 애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고생은 이 사진을 눈앞에 마주한 순간 씻은 듯이 사라졌지만.


  모델 트리비아 카리나의 마지막 런웨이를 담은 사진이었다. 지금도 전설로서 끊임없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그날의 패션쇼에서 그녀는 감탄하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 현장에 있지 못했다는 안타까움 이전에 그 당시 그녀의 존재조차 까마득히 몰랐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현장의 열기를 가늠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구구절절 찬사를 늘어놓은 기사 전문을 읽지 않아도 사진 한 장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몸에 쫙 달라붙는 검은색 드레스에 인간으로서 가져서는 안 될 커다란 박쥐 날개가 원래 옷의 일부인 양 활개치고 있었다. 웃지도 울지도 않는 오묘한 그녀의 무표정이 더욱 그녀가 서있는 곳만을 비현실로 만들어놓았을 터.

 


  알 수 있었다. 그때까지는 억지로 접어서 숨겼을 날개를 사람들 앞에 활짝 내보이며 서글픈 해방감을 느끼는 대신에 좋아하는 일을 잃었다. 자유도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선택권이 없던 것뿐이다. 자포자기하듯 자기 본래 모습을 드러냈다. 백조가 죽기 직전 가장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내듯이 그녀는 속으로는 절망에 찬 비명을 지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마지막 쇼는 역대 최고의 걸작으로 남았다. 허나 지기 직전의 꽃은 한창 피어나기 시작할 때의 풋풋한 설렘을 그리워하기 마련인데.

 


  “하지만 내겐 당신의 절망조차 사랑스러워.”


  약간 메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마틴은 사진 속 트리비아의 날개 위로 깊이 입을 맞추었다.

 

 

― 02에 계속.

 

*
- 이 「Silent Night」의 시점은 공식세계관의 시점과 전작 장편 「Twilight」 사이입니다. 덧붙여 제가 쓰는 모든 사이퍼즈 소설은 모두 시간축만 다를 뿐 평행세계는 아닙니다. 신캐가 출시되면서 새롭게 밝혀진 정보에 따라 약간의 수정은 이루어지지만, 공식설정들을 토대로 상상하여 구축한 세계관은 제 작품들 전체를 통틀어 공유합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캐릭터만 가져오고 아예 시공간적 배경을 바꾸어버리는 패러렐을 쓸 가능성도 있지만)
- 「Twilight」 완결 후기의 Q&A 코너에 일찍이 밝혔듯이 「Silent Night」은 원래 단편이었습니다만 진격전이 등장하게 되면서부터 상당히 많이 살을 덧붙였습니다. 단편 「Silent Night」은 마틴의 감정에만 주목하는 글이라면 중편 「Silent Night」은 진격전의 배경스토리인 '게이트웨이 침투 작전'이란 커다란 사건과 연루되죠. 참고로 Q&A 코너에 소개한 루이트리 단편 <The Devil is mine>과 <Devil may cry>과도 합쳤습니다.^^
- 트리비아의 마지막 런웨이에 <Let it go>가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 오탈자 및 이상한 문맥 지적, 비판, 다양한 질문 격하게 환영합니다. (전작 포함)
- 주요서식지: 블로그(http://blog.naver.com/goastbaster) / 트위터(@winzs76)
- 깨알 같은 전작 홍보.
 「은폐」[피터미쉘데샹](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3763240)
 「유도」[데샹미쉘피터](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4004813)
 「호접지몽」[다이무스](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6171648)
 「Twilight」[올캐러/장편](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8138407)
 「손바닥글 모음」[다무트리](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8953308)
- 이번 화의 소재는 다음과 같습니다.

  

 

 

 

 

 

 

   

 

P.S. 시간나시는 독자 분들께서는 제 블로그 들러서 요거 한 번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굽신굽신.

       (http://blog.naver.com/goastbaster/150183886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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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극공입니다. 훠이훠이 하.하.하. 매우 화가 납니다. 총기 손질중입니다. 저와 한 판 붙어보시겠습니까? 당신에 대한 정확한 진단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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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짝.짝.짝 고마워... 멋있어... 지금 이게 뭐하시는 거죠? 대다나다 히에엑... 헉! 깜짝 놀랐습니다. 그만해!!!!!
옳소! 감탄했습니다. 흐음 후회할거요! 감사합니다. 놀랐습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정색) 축하드립니다. 칭찬해 드립니다. 놀랍군요. 매우 화가 나네요. 큰 충격입니다. 놀랍군요.
이럴수가... 감히! 네가! 아니?! 장하군! 응?! 좋다! 그건 아니다! 고맙다!
감사합니다 잘 못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매우 화가 나는군요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좌절상태입니다 감탄했습니다 칭찬합니다
멋지군! 좋았어! 하하! 축하하오! 아아.. 5분전인데. 커피한잔 하겠소?
승리의 정유년! 정의로운 새해복! 극.한.공.성. 복! 받아랏! 음~ 직장인의 정석
많이 배웠습니다! 대단합니다! ?!! 축하드립니다 뭔가.. 부족해요 짝짝짝! 각오하세요! 으윽!
성탄의 축복을~! 메리 X-MAS~! 화이트 크리스마스야 해피~ 크리스마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성탄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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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합니다 궁금하네요 에구머니나! 슬프네요... 경멸스럽군요.. 후훗~ 뭐라고 하셨죠? 이, 이럴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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