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렉타라] 회사, 그리고 밤, 그리고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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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2 03:23:00
브금..을 한번 올려봅니다 같이 들으셔도 되고 안 들으셔도 되고.. 브금 선택하는 센스가 구려서 원
https://www.youtube.com/watch?v=G-Vg2YS-sFE
어울릴진 모르겠지만 포탈2 에 쓰였던 곡인 The National의 Exile Vilify 입니다.
브금 넣는 법을 몰라서 어쩔 수 없이 유투브 링크로...
새 탭에서 열어주세요
<XMETA content="text/html; charset=UTF-8" http-equiv="Content-Type">빗방울이 회사의 창문을 때렸다. 그 소리는 새벽에 이슬이 나뭇잎에 톡톡 떨어지듯 상쾌한 소리가 아니라, 썩은 토마토가 퍽하고 뭉개져 찐득히 늘어붙는 듯 한 소리였다. 빗방울이 뭉개지는 소리는 이내 드렉슬러의 귓전을 때렸다. 드렉슬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아, 젠장. 하필 지금..."
다른 불이 다 꺼진 회사에 드렉슬러는 혼자 남아 불을 밝히고 있었다. 다른 날 같다면 로라스가 옆에서 기다려 줄 테지만, 그는 이미 에스파냐로 휴가를 간 상태였다. 드렉슬러는 일하던(정확히는 발명을 하던)것들을 내려두고 빗방울이 뭉개지는 창문을 바라보며 푹 한숨을 쉬었다. 로라스가 휴가를 떠나는 당일만 해도 그는 기쁨을 내색할 수 없었다. 이제 종일 따라다니는 잔소리꾼 하나가 없어지는구나, 하는 생각에 아이처럼 들떴었다. 로라스가 기차를 타는 순간에도 싱글벙글하고 있던 때문에, 자못 섭섭해있던 로라스에게 한소리 들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도 드렉슬러에겐 그런 원망섞인 잔소리따윈 전혀 문제 될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웬걸, 바로 다음날 예고도 없던 비가 쏟아지다니. 비가 올 줄은 전혀 몰랐던 일이어서 우산은 없는 것이 당연했다. 여차하면 까짓거 맞으면서나 갈까 하고도 생각했지만, 집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미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회사 사람들은 모두 퇴근했고, 구비되어 있는 우산 한 짝도 없었다.
'차라리 창을 우산 삼아 갈까,'
생각은 금세 고개를 저어 지워버렸다. 그 어떤 창이라도, 비에 축축하게 젖어 녹스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수는 하나 뿐이 없었다. 그냥 회사에서 자진 야근을 하는 수 밖에.
'쏴아아.. 퍽, 퍽, 퍽, 쏴아아..투둑, 툭....'
쏴아아 하는 쏟아지는 빗소리 가운데 가운데로, 비는 여전히 창문에 뭉개지고 있었다. 이제는 더 세게, 빠르게 달려와 퍽 하고 깨졌다. 비는 창문에 깨지고 있었다. 드렉슬러는 어두컴컴한 밖을 내다보고는 한숨을 다시 쉬었다. 비가 오기에 일단 추가로 처리할 일이 있었다. 첫째로, 창을 건조한 창고로 옮겨야 했다. 비만 아니라면 연구하던 창을 계속 만들것이나, 자칫하여 습기에 창이 녹스는 날엔 전부 끝장이었다. 그 다음엔 만들던 창에 대해 간단한 메모를 해두어야 했다. 무슨 창을 만들고 있었는지, 어떤 용도와 의도로 만들었는지, 크기는 얼마나 되고 모양새는 어떠한지.. 천재라고 자부하는 그였지만 전부 기억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일하던 서류 뒷면에 펜을 가져다 대다가 멈추었다. 서류에다 메모를 했다가 혹 그 마녀가 보기라도 한다면, 메모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만들던 창 까지도 한꺼번에 불태워버릴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큰일날 뻔 했군."
이라며 드렉슬러는 책상 밑에서 작은 주황색의 메모지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이 직접 개발한 '위급 시 투창으로 사용 가능한 만년필'(그가 특허를 내었으며, 현재 시가 약 80달러) 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메모를 한 자 한 자 읽어가면서 썼다.
"신 개발 품명.. 회전창... 길이..170.. 무게...70..평범한 투창에..회전의 파괴...력을... 더했으며.... 회전은...효과를..극대화...하기 위해...황금장방형의......황금..회전..! 오케이!"
드렉슬러는 펜을 탁 소리나게 놓고, 황홀한 듯 도취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나는 천재야."
그는 이번에 만든 창이 제법 마음에 드는 듯 했다. 이 창이 완성되면, 특허청에 가서 특허를 내고, 각종 상금과 트로피를 타고, ..그럼 당분간 아무도 창 만드는걸 방해하지 않겠지.. 그런 즐거운 망상에 그는 빠져있었다. 그러자 곧 그는 세번째 할 일이 생각났다. 그건 이 즐거운 망상에 대한 축배를 스스로 드는 것이었다. 마침 비도 오고, 혼자밖에 없겠다. 맥주가 딱 어울리는 날이었다.
드렉슬러는 기지개를 쭉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은 여전히 계속 비에 후들겨지고 있었다. 드렉슬러는 그런 것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듯,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냉장고로 다가갔다. 그러나 냉장고를 연 순간, 그의 표정은 맨 처음 비가 왔을 때처럼 구겨졌다.
남아있는 맥주는 단 한 병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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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어쩐다.'
그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얼굴을 있는대로 찌푸렸다. 맥주가 정말 마시고 싶기는 한데.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텐데.. 차라리 와인으로 대신할까, 했지만 와인도 이미 다 떨어진 지 오래였다.
'오늘은 정말 재수 옴 붙은 날이구만.'
그는 다시 밖을 쳐다보았다. 시커먼 정적 속에 시끄럽게 쏟아지는 저주스러운 물덩이들의 소리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성공을 위하는 축포인줄만 알았다. 하지만 다시 들어보니 그 소리만큼 따갑고 혐오스러운 것이 없었다.
"망할 비! 바보 같은..!"
그리고 그는 충동적으로 옆에 있던 타라의 재떨이를 집어 내던지려다 겨우 참았다. 다행히 그는 아직 이성적으로 생각할 힘이 남아있었다. 그는 바로 옆, 다이무스의 자리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리곤 크게 한번 심호흡을 하고 생각을 시작했다.
오늘 맥주를 마셔야 하는것은 당연했다. 이제는 거의 의무처럼 다가와버린 충동은, 이제 억누를 수 없었다. 그래. 맥주를 마셔야 하는 건 어쩔 수 없어. 그렇다면 어떻게 마실 것인가? 첫째로, 나가서 여기서 가장 가까운 펍에 가는 길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저 망할 비들을 맞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아니면 회사로 누구를 불러서 맥주를 사오게 하던가... 이 발상은 좋지 않았다. 일단 애초부터 그 혼자 마시는 것이 목적이었거니와, 지금은 새벽 2시 10분. 이 시간에 누가 부른다해서 오기나 할까. 친구라고는 하나 밖에 없는 그 로서는 더더욱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세번째는 여기 있는 물과 일부 재료들로 알코올을 합성하는 방법을 고안하는 것,은 드렉슬러가 잠시 이성적이지 못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역시 첫째 방법. 이 시간대에, 비도 오는데 펍에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혼자의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구석자리 정도는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아무렇게나 입었던 구겨진 와이셔츠를 나름대로 다듬고, 넥타이도 풀어서 다시 꽉 조이고. 그리고 그 위에 갈색 마이를 휙 둘러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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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비 내리는 밤은 드렉슬러가 생각했던 것 보다도 훨씬 추웠다. 폭신하고 하이얀 눈발을 계획하던 구름은 자신이 성급했던 것에 화풀이라도 하듯 진눈깨비같은 차가움의 비를 매섭게 쏟아붓고 있었다. 드렉슬러는 이들을 너무나도 얕보고 있었다.
그는 양 팔로 자신을 꽉 끌어안고 덜덜덜 떨었다.
그의 머리속에선 아까보다도 수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곧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오늘 기상예보에서 비가 온다는 얘기가 있었던가? 아니, 그러면 또 어쩔것인가. 그렇다 해도 결국은 보지 못한 내 탓이거니와, 아무리 잘 가 보았자 끝은 추잡스러운 남 탓일 뿐일거다. 그럼 무슨 생각을 해야 하나? 아니, 애초에 왜 맥주가 그렇게 먹고 싶었나?
그는 나온지 정확히 6분 만에 나온 것을 몹시 후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6분이라는 거리는 다시 돌아가기도 싫은 만큼이었으며, 그는 그저 생각하는 동안도 목표를 향해 천천히 걷고 있었다.
'쏴아아,.척..척..쏴아아..쏴아아.....'
비는 건물 안에서와 달리 거칠 것이 없었다. 쏴아아-는 이제 간간히 들리는 드렉슬러의 발소리에만 끊겼다. 길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비오는 한밤중에 나돌아다닐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그래도 우산을 쓴 채 배회하는 행인 정도는 있을 법했었다. 하지만 거리에는 찌익거리는 벌레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쏴아- 하는 연속적이고도 지루한 빗소리만이 그의 귓 속에 때려박혔다.
뿌옇게 옅어진 노란색의 가로등만 켜진 밤거리에는, 애석하게도 아무도 그와 함께하지 않았다.
"제길!"
그는 원망에 찬 목소리를 다시 한번 씹어뱉었다. 그리고 잠시 멈추었다.
가로등이 듬성듬성 켜져있는 곳에.. 그가 들어서 있던 곳은 한 공원이었다. 그래, 아마 날이 화창할 때 마다 그 마녀의 반강제 명령으로 샬럿과 마를렌을 데리고 산책 나왔던 곳이다. 그리고 이곳으로 왔다는 것은, 그가 길을 완전히 잘못들었단 걸 의미했다. 펍으로 빙 둘러 가는 길에 있는 공원은, 햇빛이 쨍쨍한 날에는 제법 울창한 활엽수들이 볼만했다. 아이들을 공원에 풀어놓고 그 사이 벤치에 앉아 있으면, 회사로부터 해방된 느낌에 창을 만들지 않아도 평화롭고 상쾌했다. 그는 공원에서 뛰노는 아이들이나 연인, 혹은 강아지들을 보고서는 별 감흥이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벤치에 앉아 쳐다보는 하늘에 떠 있는 한 점 구름이라던가 벤치 조금 옆에 서 있는 크지 않은 한 그루 나무에는 제법 감동을 받았다. 그것들을 보면서 그는 동질감을 느끼곤 했다. 무리에서 떨어져나와 앞서 흐르는 조그만 구름, 공원의 수 아름드리 나무들과 떨어져 제 혼자 꼿꼿이 서있는...(이런 표현들은 이것들에 대한 그의 주관적인 의견에서 나온 것이다.)
"아저씨~ 드렉슬러 아저씨~"
아, 이건 또 그때의 회상이다. 이 공원에 오면 항상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구나. 그리고 이건 또 더 먼 때도 아니고 바로 오늘 낮에 들었던 소리였다.
"아저씨! 솜사탕 사주세요, 솜사탕!"
이건 마를렌의 목소리였다. 옆에, 혹은 뒤에 고개만 빼꼼히 내민 샬럿을 달고 다니는.
"너네들 저 설탕덩어리가 뭐가 좋다고 맨날 사달라는 거냐? 저런거 먹으면 통통물만두 되고 이나 다 썩어빠지지. 안돼. 돈 없어."
그런 말을 들은 드렉슬러는 으레 이렇게 퉁명스레 답하곤 했다. 그러면 이 영악한 열한살짜리는 이렇게 답했다.
"이는 매일 닦는다고요! 그리고 샬럿도 먹고싶다고 했단 말예요."
"명왕이나 이사가 먹고싶다고 해도 안사줄거야. 뭣보다 내가 왜 사줘야 되는데?"
드렉슬러는 벤치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끼며,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마를렌은 잠시 고민하더니,
"뮈, 그럼 할 수 없죠. 그러고보니 타라언니가 오늘 드렉슬러 아저씨 막 찾던데. 솜사탕도 안 사주시니 일찍 들어갈 수 밖에 없겠네요~ 어서 가요!"
하고 등을 홱 돌렸다. 샬럿도 우물쭈물하더니 마를렌을 따라 뒤돌아섰다. 그 때 드렉슬러는 어제 서류 뒷면에 발명구상을 하다 짜증이 나는 통에 북북 찢어버린 일이 생각났다. 그녀가 발견하기 전에 쓰레기통 깊숙히 넣어놓긴 했지만, 설마..
그는 황급히 발걸음을 떼려는 마를렌의 어깨를 잡았다. 마를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드렉슬러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 마녀는 그를 찾지 않았다.
마를렌에게 속은 것 같아 그는 분했지만, 오늘 보았던 구름과 작은 나무를 떠올리다 이내 잊어버렸다.
....하지만 지금의 하늘은 거무튀튀한 구름들의 기름진 덩어리 같았고, 벤치 옆의 나무는 어느새 추위에 시들어 초라했다.....
....'펍이나 가자.'
잡생각은 이내 그의 얼굴로 들이치는 무수한 빗방울에 씻겨내려갔다. 그는 공원을 그리 지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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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지금 장난해?"
"그러니까, 드렉슬러경, 죄송합니다만 저희 펍은 그 새벽 1시까지만 영업합니다."
드렉슬러는 물에 빠진 쥐, 아니, 차라리 물에 빠진 참새같았다.
저런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표정을 지을만한 참새는 없을테지만 말이다. 기껏 찾아간 펍의 불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비에 젖을대로 젖은 그를 일단 가게에 들여놓긴 한 주인장은 상당히 난처해 있었다.
"저번에는 새벽 3시까지도 열었잖아? 분명 내가 그때까지 마시고 갔다고.."
그의 앞에는 주인장이 그를 위해 마련해놓은 난로가 놓여있었다. 난로의 안에서는 붉은, 어쩌다가는 노란 빛의 불꽃이 솟아올랐다. 드렉슬러는 그 녹을듯한 따뜻함 앞에서 떠나고 싶지 않아했다.
"그 때는 주말이었잖습니까. 주말엔 새벽 4시까지도 연다구요. 하지만 평일에는..."
주인장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드렉슬러는 고개를 돌려 난로 안을 바라보았다. 펍 안에는 작은 등이 하나 켜져있었으나 사실 어둡게나마 펍 안을 제대로 비추는 것은 그들 사이의 난로였다. 난로는 펍의 짙은 갈색 나무벽을 비췄다. 조금 전의 흥취를 증명하듯 나무벽에서는 짙은 나무냄새와 진한 술냄새, 물비린내가 섞여 드렉슬러의 무딘 코를 찔렀다.
'후둑, 후두둑, 쏴아아......후두둑...'
펍 안에서 들리는 빗소리는 조금 더 독특했다. 처마에서 물이 후둑,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쏴아..하는 소리를 간간히 끊어놓고 있었다.
드렉슬러는 펍에 들어오기 전 부터 취해 들어 온 것 같았다. 어린애처럼 투정부리는 것도 그렇고, 말없이 난로 안만 쳐다보는 것도 그랬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일었다. 주인은 여간 골치가 아픈것이 아니었다. 단골을 야박하게 내치는 것도 도리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계속 이 침묵을 유지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주인은 잠깐 생각하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곧 주인장은 병에 담긴 맥주를 들고 나왔다.
"드렉슬러경! 냉장고에 남겨둔 맥주가 한 병 있는데, 저희가 마시려고 했지만..특별히 드립죠. 단골이기도 하고, 여기까지 오신 노고가 있으니 특별히."
드렉슬러는 주인장이 들고 나온 맥주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난로에 비친 갈색병은 아름다운 구리색을 띠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맥주병을 주인장에게서 건네받았다. 그리고는 말없이 한참 쳐다보았다.
"좀만 기다리슈, 곧 안주도 내올테니까.. 같이 얘기나 하지 그래요."
주인장이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드렉슬러는 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터덜터덜 나무 문 쪽으로 다가갔다.
"드렉슬러경! 어디가세요! 밖은 추워요!"
주방으로 들어가던 주인장이 깜짝 놀라 나가는 그를 붙잡았다.
"....놔. 혼자 갈거야."
드렉슬러는 들어올 때보다 더 취해있는것 같았다. 가게 나무벽에 스며든 술기운 때문이었까...
"그러다 감기 걸리시면 어쩌려고요, 지금까지 비 맞으면서 오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하세요."
드렉슬러는 붙들어진 팔을 더 모질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말없이 주인장을 가는 눈으로 째려보았다.
"...갈거야."
그의 눈은 한층 더 취기가 돌아보였다. 주인장은 꾹 잡았던 손의 힘을 천천히 풀었다.
"허, 거 참..."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는 주인장을 뒤로 하고, 드렉슬러는 젖은 나무 문으로 다가갔다. 천천히.
'쏴아아아... 후둑, 후두둑, 쏴아아아.....'
끊기는 빗소리가 가까워졌다.
드렉슬러는 문을 열고, 맥주병을 꼭 쥔 채 연속적인 저 빗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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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렉슬러가 도착한 곳은 어쩐지 다시 그 공원이었다. 비는 그치지 않고 그의 머리를 때렸다. 그의 아무렇게나 세운 머리도 푹 젖어 그의 눈을 찌를듯 말듯 계속 내려왔다.
지금 아무도 찾지 않는 빈 공원에, 숨소리도 들리지 않게 드렉슬러가 그 벤치에 앉아있었다. 시들어버린 작은 나무가 옆에 있는 그 벤치에.
'탁'
맑은 소리가 울렸다. 병뚜껑을 따는 소리가 이렇게 맑다. 터덜터덜 걸어 많이 흔들리지도 않은 탓에 흐르는 거품도 적다. 비는 계속계속 쏟아진다. 맥주에 빗물이 더 들어치기 전에 드렉슬러는 맥주병을 입에 대고 고개를 젖혔다. 빗소리가 꿀꺽거리는 소리를 가린다.
"....드렉슬러!"
문득 누군가 그를 불렀던 기억을 그는 떠올렸다.
"드렉슬러~ 퇴근 안할거야?"
마녀의 소리였다. 분명 오늘 저녁 즘 들은 소리다. 그는 왜인지 목구멍으로 미지근한 맥주를 들이부으며 마녀의 목소리를 뇌에서 끄집어내고 있었다.
"..내 맘 아냐? 직원이 일 좀 더 하겠다는데 말리는 회사도 있냐?"
등 뒤로 들려오는 타라의 능청스런 질문을 그는 짜증스럽게 되받아쳤다.
"아냐,아냐. 누가 일 더하는걸 말린대? 다만 평소엔 언제나 정시 칼퇴근 하고는 다음날 지각하면서 창을 한무더기 갖다가 창고에 몰래 넣어놓는 다리오 드렉슬러씨가.. 회사에 남는다니까 조금 신기해서."
타라는 들고 있던 머그잔을 소리나게 내려놓고는 작은 미소를 띄웠다. 그것은 어쩐지 그날 낮의 마를렌의 것과 비슷한 것 같다고도 느꼈다. 그리고 드렉슬러는 확실히 뜨끔했다.
"무,무슨.. 쓰잘데기 없는 소릴.."
타라의 미소가 조금 더 커졌다.
"구석탱이에 박아놓으면 내가 모를 것 같아? 아직 안태웠으니까 걱정마. 맘만 같아선 다 녹여버린 다음에 샬럿 개구리 숟가락이나 만들어주고 싶지만... 그랬다간 울고불고 난리칠게 뻔한데 어떡하겠어?"
드렉슬러는 말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갈색 장갑을 낀 두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저래서 저 망할 마녀가 싫은거야. 사람을 무슨 바보취급하고는, 자존심이란 녀석을 그 높은 하이힐로 꾹꾹 짓밟는다. 그리고 정작 자기는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능글맞은 미소를 씩 짓는데, 그 미소를 보면 완전한 패배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창고 구석에 창을 숨겨놓은걸 알고 있었다니. 그럼 여태까지 날 매일같이 손바닥 안에 두고 있었단 것 아닌가? 자신이 몰래 살금살금 걸어가 주위를 몇번 둘러보고, 창고에 창을 넣고는, 주변의 비품들을 쌓아 겨우 숨기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자신을 그녀는 매일같이 상상하곤(혹은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 짜증나는 미소를 지었단 것 아닌가. 그는 부끄러움에 다시한번 고개를 숙이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말야, 말한 김에 내일까지 저 고철 덩어리들 전부 치워줄래? 보이진 않지만 신경쓰여서 말이지. 내일까지 안치우면 진짜로 다 태워버릴거야. 알았어?"
이번에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못들은 척 하며 서류에 집중하는 척 할 뿐이었다. 타라는 아까보다도 장난기 도는 표정으로 그의 뒤에 다가가 어깨의 들어간 부분을 세게 눌렀다.
"알았어요~ 못 알았어요?"
"악! 악!"
드렉슬러는 순간 비명을 지르며 마녀의 손을 떨쳐냈다.
"..듣고 있었나보네. 그럼 알았지? 회사에 남는다니 잘 됐네. 내일까지 부탁해~"
타라는 다시 한번 그 승리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곤 드렉슬러의 양복입은 어깨를 두번 툭툭 치고 뒤돌아섰다. 그리고 하이힐의 또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저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소리가 사그러들자, 드렉슬러는 주위를 두리번 두리번 둘러보곤 책상을 쾅 쳤다.
"이런 빌어먹을 마녀어어! 내가 일 말고 다른 걸 하는 꼴을 못봐! 그깟 창 좀 봐주면 안되냐고!"
그리고는 다시 그 머리를 양 손으로 감싸쥐고 벅벅 긁어댔다.
"짜증나 진짜..."
그리고는 책상위에 늘어지듯 엎어졌다. 가문에서 파면되었을 때도 이 정도로 짜증나지는 않았다. 그 때도 그냥 '해 볼테면 해 보라지,' 식이었다. 그래서 가문의 어른들이 그를 향해 독설을 퍼부을 때도 눈 하나 깜짝 안하던 그 였다. 그런데 고작 여자 하나가 이러는 걸 가지고 이 정도라니. 그는 스스로도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앞으로 혹 자신이 대머리가 된다면 다 저 마녀자식 때문에 생긴 원형탈모가 시작일 터이니 가발 값은 전부 저 마녀에게 청구해버리리라.. 그가 마침 생각하던 것이었다. 그 때, 다시 또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화들짝 놀라 곧바로 다시 자세를 잡았다.
"드렉슬러~"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도 모른체 하면 아까처럼 또 어깨 공격을 당할 것 같아 이번엔 바로, 하지만 최대한 짜증이 섞이게 대답했다.
"...뭐. 왜 또!"
"어머, 왜 그렇게 성질이람? 오늘........."
점점 흐릿해졌다. 이상하다. 왜 이 다음으로 기억이 나질 않나?
드렉슬러는 술병을 입에서 떼었다. 술은 삼분의 일 정도가 남아있었다. 마녀의 목소리가 흐릿해지면서 빗소리는 점점 선명해졌다.
'쏴아아.. 쏴아아... 후두두두.. 쏴아아...'
비는 이제 그의 몸과 옷을 전부 적시고는 더 하다 못해 소매자락과 머리카락 끝에서 뚝 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술병이 다시 차는 느낌이었다. 아뿔싸. 귀한 술이 묽어지는구나. 하고 그는 다시 술병에 입을 댔다. 다시 마녀의 목소리가 선명해진다.
".....오늘 밤에....."
얼마 못 마시고 다시 입을 떼었다. 제길, 술이 들어가면 마녀 목소리가 들리다니. 그는 재수없다는 듯 빗물로 듬뿍 젖은 소매로 입가를 슥 훔치고는 다시 술병을 물었다. 다시 선명해진다.
".......오늘 밤에......비....."
다시 입을 뗐다. 비? 그는 지체없이 다시 술병을 물었다. 또 선명해진다.
".......오늘 밤에 비 오니까, 야근 안 할거면 일찍 가라고. 우산은 있지?"
아,기억났다. 비 온다고 했지.
그리고 그 때 그는 건성으로 "어" 라고 답해버렸던 것도 기억났다.
다시 입을 뗀 순간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빗 소리만 넓은 공원에 가득했다. 시간은 새벽 3시,이제 모두가 잠들었을 시간.
'쏴아아아... 아아아....후둑후둑.....'
문득 그는 오한이 들었다. 옷이란 옷은 전부 젖어버렸으니 당연했다. 그럼에도 그가 지금까지 몰랐던 것은 잔뜩 올랐던 술기운과 아까의 그 회상에 집중했던 탓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인제 만끽하는 자유의 기운은 로라스가 떠날때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춥고, 피곤했다. 그는 도저히 회사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어? 드렉슬러? 여기서 도대체 뭐하는거야? 미쳤어?"
이젠 정신까지 혼미한가보다. 술도 안마셨는데 마녀 목소리가 들리니...
"드렉슬러? 드렉슬러?"
'쏴아아아.......후둑, 후둑, 퍽, 퍽, 후둑, 퍽...'
순간 그는 마녀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것을 들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연속적이던 빗소리가, 이제는 툭 툭 끊기는 것을. 그리고 조금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거무튀튀한 먹구름이 아닌 샛노오란 천.. 우산.. 그리고 옆을 보았다. 순간 그는 놀라 비명을 지를 뻔 했지만 몸이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옆에 앉은 마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타라?"
그가 본 것은 분명 빗물로 가득 젖었을 벤치에 앉아, 자신에게 우산을 씌우고 자신의 어깨를 흔들어대는 마녀였다.
"너야 말로 왜 여기 있는거냐아...."
드렉슬러는 몽롱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다시 시계를 보았다. 새벽 3시가 틀림없었다. 이 시간에 마녀가 여기에?
"역시 우산같은거 없었지? 왜 나온거야? 여튼 이해할 수가 없어... 오늘 비 온댔잖아?"
그가 처음보는 타라의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이었다. 신기해서 한참을 쳐다보았다.
"내가 못살아, 못살아. 너 이러다 감기걸리면 핑계대고 또 일 안 나올거면서. 누가 다 책임지라고. 봐봐, 다 젖었잖아."
그녀가 잔소리를 시작했다. 평소처럼, 하지만 평소와는 다른 목소리로, 느낌으로. 평소와 다름없이 그를 꼬마아이 대하듯 하였으나 이번에는 그의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녀가 따뜻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녀는 능력 때문에 항상 몸이 뜨거웠다. 그래서 여름이면 항상 빙수라던가 아이스크림을 자주 찾았는데.. 그리고 종종 그가 사주기도 했고.. 잡생각은 다음 잔소리에 덮였다.
"공원까진 또 왜 온거야? 혹시나 싶어서 와봤더만.. 이거라도 둘러. 다 젖어서 옷을 어떻게 해주지도 못하겠네. "
그리고 그녀는 목도리를 그의 목에 둘러주고는 두어번 쳐 모양새를 잡았다. 목도리가 물이 스민 옷에 젖는 것 정도는 신경쓰지 않고. 그녀의 목도리는 능력 때문일까, 덥혀져 있었다. 순간 목이 화끈해지며 정신이 드는 듯 했다. 그의 뇌리에도 열기가 오르며 그녀에게 해야 할 질문이 생각났다.
"...여긴 왜 온거야?"
타라는 계속, 쉬지않고 잇던 잔소리를 멈추었다. 아차, 싶은 표정으로 멈추었다. 그렇게 시간이 멈춘 듯 어색한 정적이 있었다.
.........
.........
빗소리가 다시 들렸다. 말소리가 끝나고 정적속에 빗소리가 다시 공원에 울려퍼졌다.
'쏴아아아... 쏴아아아아...'
공원 전체에 울리는, 상쾌하게 씻겨 내려가는 소리.
'두두두두두두.. 투두, 투두두둑..'
와중에 작은 폭으로 그들을 둘러싸는, 두들기는 소리.
빗소리 속에 빗물과 함께 흙들은 가라앉았다.
그와 같이
들뜬 마음은 진정되고, 생각은 정리되고, 조용히....
밤 비란 그런 매력이 있는 것이었다.
..........
"우산 없을거, 알고 있었거든."
타라가 입을 떼었다.
"..뭐?"
"집에 도착해서야 생각났어. 남아있는 우산이 없었던거. 게으른 니가 우산을 가져올리도 없고."
드렉슬러는 '게으른'에서 얼굴은 약간 찌푸렸지만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산들고 기다렸지."
"기다려?"
"그래. 비가 올 때까지."
"...비는 두시 정도부터 왔어."
"알아."
"퇴근은 10시 였잖아."
타라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래, 10시였지. 그런데 어떡해? 비가 안오는데."
타라가 생글 웃어보였다. 드렉슬러는 흠칫했다. 놀리는 웃음이 아닌, 그런 미소를 언제 본 적이 있었던가.. 타라가 말을 이었다.
"차라리 밤을 샜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었지. 그러면 마음이라도 편하잖아?"
그는 더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런 그녀는 너무 낯설었고, 이런 분위기는 너무 낯설었다.
"그래서 기다렸더니 비가 오더라. 차도 없어서 그냥 걸어왔어. 그런데 기껏 찾아간 회사에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그녀의 집에서 회사까지는 대략 걸어서 20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그리고 그녀가 도착했을 즈음엔 이미 그는 비틀거리며 비 내리는 거리 속을 거닐 즈음이었다.
"그럼 그냥 가지 그랬냐."
그는 다른 곳을 힐끔 쳐다보며 한마디 뱉었다.
"..불.. 켜져있었거든. 그리고 니 창.. 자리에 그대로 있더라."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다시 나왔지. 싸돌아 다니는 참새 한마리 구하러."
"...구했군, 결국."
그의 한마디에 이번엔 그녀가 놀란 듯 쳐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다시 생글 웃어보였다.
"구했지, 결국."
그도 웃었다.
그렇게 웃었다.
'싸아아.. 쏴아...두둑, 투둑, 두두..'
빗소리가, 공원을 다시 덮었다.
-끝-
(여담)
"...어?"
드렉슬러는 슬프게도 또 한가지 잊어버린 말이 있었다.
"말했지? 내일까지 안 치우면 다 태워버린다고."
"너...너...너....."
드렉슬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주먹을 꽉 쥐었다. 주먹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타라는 손을 입에 대고 킥, 웃었다. 그리고는 그 앞에 다가가, 발꿈치를 조금 들었다.
그렇게 입술을 겹쳤다.
".....?!"
갑작스럽게 당한 키스에 그가 사태파악에 힘쓰는 동안 타라는 그의 목에 목걸이를 하나 걸어주었다.
"그 고철 녹인게 샬럿 개구리 숟가락 만들기 만으로는 너무 많더라고. 아까 키스하고 이건 사과의 선물?"
그리고는 다시 뒤를 돌아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드렉슬러는 한동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프라디지 드라군]
.....
"맙소사."
[프라디지 드라군]
그리고 드렉슬러는 감기에 걸려 휴가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