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린]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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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0 04:45:51
아아,
권태로운 구름이 권태로운 하늘을 느릿느릿 가로저어간다. 어찌 날아가는 새 한마리도 없이, 쨍쨍거리는 해만 하늘의 달이나 별같은 다른 빛나는 것들을 전부 몰아내고 제 혼자 교만에 절어 우쭐대고 있다. 저 역겹도록 거만스러운 태양은 다른 어떠한 흥미도 그녀에게 주지 못한다. 어라. 다행스럽게도 새는 날아간다. 편대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떼다. 그들은 하늘 위를 날아간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를 실망시킨다. 그들은 날아가지만 그 언제나의 브이자 형의 정형화된 편대를 벗어날 생각도 하지 않는다. 역시 어쩔 수 없이 권태에 찌든 생물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턱을 괸다.
맑다. 너무 맑다. 언제나같이 이 날씨는 너무 맑다. 달디 단 사탕도 일고여덞개를 꾸역꾸역 먹다보면 신물이 올라오는 법이다. 이 한숨이 나올 정도의 맑은 날씨라고 다를까? 고개를 떨구어 앞을 본다. 저 앞의 생기라고는 없는 놀이공원에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빨간 그네가 허수아비처럼 바람에 흔들린다. 아이 없는 시소는 좀체 올라가지 않는다. 본디 새 생명의 활기를 불어넣어야 마땅할 놀이터는 이 때에 이르러 그야말로 죽음만이 잠식한다. 진짜로 텅 빈 놀이터엔 강아지 한 마리나 고양이 한 마리도 어슬렁대려 들지 않는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한숨이라도 푹 내뱉는다. 아무것도 변함없는 지리한 권태다. 지독하도록 지루하다. 미칠 정도로 아무 재미도 없다. 아무것도, 심지어 숨쉬는 것 조차 지겨워진다. 어째서 아직 열 여섯 살 밖에 먹지 않은 소녀에게 이런 권태가 엄습하는가?
잠깐 스치는 화살처럼 떠오른 고민은 이 권태에서 오는 무력감에 너무나도 쉽게 잊혀진다. 바깥은 너무나도 권태롭다. 그렇다면 고개를 돌려 방 안을 바라보자. 어느 자잘한 유희거리라도 있는가?
매일 보지만, 볼 때마다 낯선 방 안. 타오르는 벽난로와, 녹아버릴 정도로 푹신한 침대, 하얀 레이스가 달린 예쁜 나무 옷장이 있는 소녀 린 드로스트의 방이다. 하지만 이것은 온전히 그녀의 방이 아니다. 벽난로도 그들의 것이다. 하얀 레이스도 그들의 것이다. 오로지 익숙한 것이라곤 침대밖에 없었으나, 그 마저도 온갖 서양의 장식으로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곳에서는 그녀의 영혼이 안착할 수 없다. 이곳은 그녀라는 가녀린 나비가 가벼이 날아 앉을 수가 없는 곳이다. 온통 이국의 물건으로 가득찬 이 곳은 그녀의 방이라 할 수 없다. 온통 낯설은 그들이 만든, 드로스트의 방이다.
시간이 지나면 이 먼 나라와 자신의 거리가 줄어들까?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시간은 이 낯설음으로부터 그녀를 감싸주지 못했다. 갈수록 이 모든 것은 더욱 낯설고, 그것은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다가오고, 끝내는 그 두려움마저 곧잘 새로운 권태가 되어 그녀를 벌레처럼 속에서부터 파먹게 된다. 그런 방을 지금 린 드로스트는 바라보고 있다. 안타깝게도 유희거리 따위는 전혀 없었다. 드로스트는 그녀의 방에 자잘한, 그녀의 유희거리가 될만한 것들을 전부 치워버린지 오래였다.
유희거리가 전부 사라진. 그녀는 느린 손길로 늘어놓은 수십개의 화장품 중 하나를 집는다. 그리곤 뚜껑을 열어 코끝에 대고 손으로 바람을 일으킨다. 작은 바람을 타고 청량한 알로에의 향기가 그녀의 코를 찌른다. 기분이 좋아질 법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잘못 뽑은 패다.이미 어제 하녀가 질리도록 그녀의 목이며 얼굴에 치덕치덕 발라댔던 것이 아닌가. 다시는 보기 싫은 표독스러운 권태나 진배없다.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통을 내려놓는다. 이번엔 향수로 보이는 다른 병을 따서 손수건 위에 두어방울 떨어뜨려 본다. 향숫물이 손수건 위로 진한 색의 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면서 향은 그 몇십배의 원을 공중에 그린다. 그녀는 크게 향기를 한번 빨아들이며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턱 걸터앉는다.
힘이 쭉 빠지면서 취하듯 빠져든다. 그리곤 힘을 쭉 빼버리고는, 의자에 의지해 쓰러지다시피 한다. 좋은 향기다. 이것이야 말로 그녀가 원하던 그런 것이 아닐까?
그 순간, 은은히 퍼지던 향기는 순식간에 넓은 방 구석구석으로 숨어버린다.
이제 그녀는 어찌할 줄 모른다. 방 안을 미친듯이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는 것은 금기다. 그리운 그곳을 추억하며 목놓아 우는 것 또한 허용되지 않는다. 방 안의 유리로 된 것들을, (예컨데 향수가 담긴 통 등을) 모조리 깨부수고 조각내며 희열의 음성을 내지르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금기를 어기는 것은 그 뒤에 올 처벌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그녀를 압도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이런 것들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용기도 없다. 한숨을 쉰다. 그럼 이제 아무 수가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 이국의 보석으로 어여쁘게 장식된 의자에 발까지 올린다. 그리고는 무릎을 끌어올리고 얼굴을 그 사이에 묻어버린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것 뿐으로, 어둠 속으로, 어둠 속으로. 어둠 속으로. 그녀는 권태라는 나름의 거대한 재난으로부터 피난해 버린다.
그녀의 무릎 사이로 의자 밑바닥이 아닌 무엇인가가 보인다. 희미하던 그 무언가는 점점 점토처럼 이리저리 뭉개지더니, 곧 하나씩 던져지듯, 철퍼덕 철퍼덕. 제 자리를 향해 꾸물꾸물 기어가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녀가 지니인 것 중 가장 먼 기억이다. 가장 그리워하는 것이며, 가장 아름다운 마지막의 잎새이다. 그녀가 이 재난에서 구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다. 대개 권태라는 것은 같은 무언가의 반복에서 오는 것이고, 무언가를 쉬이 따분하고 지치게 만들어 끝내는 사이를 갈라놓는 악질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 권태마저도 그녀의 이 기억에는 감히 내려앉을 수 조차 없다.
그것은 그녀의 아버지의 땅과 관련한 기억이다. 그녀가 미처 잡지 못했던 기억이다.
사철 변하는 산을 뒤에 놓고, 졸졸졸 흐르는 시냇가를 앞에 둔 어느 마을이 떠오른다. 논도 밭도 사람도 소도 가진 어느 평범한 조선의 한 마을이 떠오른다. 이십 여 채의 초가집과, 초가집보다는 조금 큰 기와집 두 채 정도를 가진 작은 마을이 떠오른다. 굵은 땀을 뚝뚝 흘리는 건강한 농부들과 길에서 작은 자갈들을 공깃돌 삼아 던지며 유희 하는 아이들 또한 떠오른다. 또 하나 같이 떠오른 것 중에는 한 기와집이 있다. 여느 세도가의 호화스러운 사치 중 하나와는 거리가 먼 소담한 기와집이다. 그 안에는 부녀가 있다. 가시지 않은 겨울의 뼛속을 후비는 추위를 피해, 아버지와 딸은 병풍 한폭이 쳐진 따수운 뒷목에서 밤을 굽고 있다. 딱딱하니 차갑게 굳은 갈빛 겉가죽이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금빛 화로 속에서 검은 빛으로 물들어가면, 어린 딸을 품은 아버지는 집게로 새까만 가운데 군데군데 발간 불기운을 품은 숯조각들을 쳐내고 잘 익은 군밤을 집어낸다. 그리곤 그의 살아온 만큼이나 거친 손으로, 품에 안겨 바둥거리는 이 작은 아이를 위해 밤을 깐다. 군밤은 숯이 감싸안은 밤이다. 숯이 뜨겁도록 품은 새침한 첫날밤의 새댁 같다. 누군가가 만지려고나 하면 누구라도 놀라 떨어뜨릴 수 밖에 없을 만큼의 열을 내뿜는다. 하지만 아버지는 방금 화로에서 꺼낸, 그런 군밤을 맨손으로 까낸다. 천천히, 투박하게. 군밤의 고열도 세월로 굳어진 그의 굳은살에는 당해내지 못한다. 비단 굳은살 뿐이랴. 당신의 딸에게 맛있는 군밤을 먹이겠다는, 그 한 조각 붉은 마음이 아픔을 지웠으리라. 일곱 살배기 어린 딸은 까내어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노란 속살을 두 손에 받아든다. 아직 남아있는 열에 깜짝 놀라 떨어뜨릴 뻔 하다, 양 손에 왔다갔다 올리기를 반복하며 입으로 후후 힘껏 불어댄다. 그런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에는 봄이 벌써 다 담겼다. 봄과 같은 아이는 몇번 그러더니 눈을 반짝이며 입에 쏙 넣어본다. 한 입 씹을 때 그 노란 속살이 가득 퍼지며 입안을 간지럽힌다. 두어번 씹으면 숨겨두고 있던 담백한 단맛이 혀뿌리로부터 진득하게 올라온다. 목으로 넘길 땐 은은한 감미와 아직 남은 따뜻한 온기가 목을 한가득 덮는다. 비로소 환한 미소가 아이의 얼굴에 떠오른다. 그리고
'똑똑똑'
아, 깨어버린다.
'똑똑똑' 하는 정확히 오 초를 주기로 들려오는 저 딱딱한 소리에 그만 그녀는 깨버린다.
'똑똑똑'
그대로다. 모든게 그대로다. 햇빛은 여전히 교만하고, 기러기도 여전히 브이 편대를 이루고, 그네도 여전히 흔들리고 시소도 그대로다. 암 것도 바뀌지 않았다.
"들어 오시옵소서."
그녀는 가쁜 숨을 고른다. 그러곤 저 저주받을 똑똑똑 소리부터 멈추기로 한다.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고 하녀가 들어온다.
"린 아가씨. 이제 수업가셔야 할 시간이에요. 슬슬 준비하시.."
하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한다.
"..아가씨, 우셨어요?"
그녀의 맑은 눈 밑에는 어느새 까닭 모를 물이 한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흠칫 놀라 손등으로 그 물을 슥슥 닦아내면서,
"네? 아, 아니옵니다. 그저, 그냥.."
그냥 그렇게 말 끝을 흐린다. 하녀는 어쩔 줄 몰라하며 우물쭈물한다. 그녀는 그런 하녀를 보며 또 괜시리 미안해진다. 그래서 이렇게 덧붙인다.
"저기..말이옵니다."
"네에?"
"오늘 간식으로.. 밤..을 먹을 수 있겠는지요. 구운.. 것으로.. "
떨리며 조금씩 더듬는다.
"네? 밤을..요? 갑자기.. 그것도 구운 걸로?"
"부탁, 하옵니다."
하녀는 뜻밖의 말에 의아하게 여기다, 그녀의 눈빛을 보고는 말 없이 알았다 하고 나간다. 린은 다시 의자에 허리를 펴고 앉아본다. 물론 그들이 해주는 군밤이 어릴 적의 그것과 같을 리가 없다. 하지만 이리도 어리석은 희망을 걸어보는 것은 그녀가 아직 추억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증거쯤이 될런지.
자, 이제 해야 할 일과가 생겼다. 린은 이제 불과 이십 분 전 만해도 미칠듯이 느꼈던 권태라는 괴물에서는 잠시나마 해방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향수가 그녀를 짓누른다. 그러나 이것은 권태와 같은 괴물과는 다르다. 권태가 잃는 것이라면 향수는 바라는 것이다. 짧은 견문으로 생각컨대, 바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것을 이룰 수 없을 때는 슬픈 일이다. 그것에 대해 희망을 가질 때는 아름다운 일이다.
그녀는 오늘도 아름답게 눈물 짓고, 아름답게 슬퍼한다.
무어별(無語別)
말 없이 이별하다
- 임 제 -
十五越溪女(십오월계녀)
열다섯 살 아리따운 아가씨
羞人無語別(수인무어별)
부끄러워 말없이 이별하였구나.
歸來掩重門(귀래엄중문)
돌아와 중문을 가리고는
泣向梨花月(읍향이화월)
배꽃 사이 달을 향해 눈물짓는다
------
사실 아니지만 오랜만에 온 느낌...
으..음 일단 완전 뒷북이지만 저번 오싸 너무 감사드립니다 ㅜㅜ 으 전혀 예상치도 못한 거여서.. 좋아해주신 분들 너무 감사하고 또 이번 소설이 이렇게 나와서(...) 죄송합니다..
제가 해석한 린 설정은 이렇다..라는 소설일까요. 아시는 분은 아실지도 모르겠지만 이상의 수필인 '권태' 에서 모티프를 땄어요. 단편입니다!
언제나와 같이 지적 환영하고요, 다음에 합작 재탕으로 뵈요 :3 (재탕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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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로운 구름이 권태로운 하늘을 느릿느릿 가로저어간다. 어찌 날아가는 새 한마리도 없이, 쨍쨍거리는 해만 하늘의 달이나 별같은 다른 빛나는 것들을 전부 몰아내고 제 혼자 교만에 절어 우쭐대고 있다. 저 역겹도록 거만스러운 태양은 다른 어떠한 흥미도 그녀에게 주지 못한다. 어라. 다행스럽게도 새는 날아간다. 편대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떼다. 그들은 하늘 위를 날아간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를 실망시킨다. 그들은 날아가지만 그 언제나의 브이자 형의 정형화된 편대를 벗어날 생각도 하지 않는다. 역시 어쩔 수 없이 권태에 찌든 생물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턱을 괸다.
맑다. 너무 맑다. 언제나같이 이 날씨는 너무 맑다. 달디 단 사탕도 일고여덞개를 꾸역꾸역 먹다보면 신물이 올라오는 법이다. 이 한숨이 나올 정도의 맑은 날씨라고 다를까? 고개를 떨구어 앞을 본다. 저 앞의 생기라고는 없는 놀이공원에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빨간 그네가 허수아비처럼 바람에 흔들린다. 아이 없는 시소는 좀체 올라가지 않는다. 본디 새 생명의 활기를 불어넣어야 마땅할 놀이터는 이 때에 이르러 그야말로 죽음만이 잠식한다. 진짜로 텅 빈 놀이터엔 강아지 한 마리나 고양이 한 마리도 어슬렁대려 들지 않는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한숨이라도 푹 내뱉는다. 아무것도 변함없는 지리한 권태다. 지독하도록 지루하다. 미칠 정도로 아무 재미도 없다. 아무것도, 심지어 숨쉬는 것 조차 지겨워진다. 어째서 아직 열 여섯 살 밖에 먹지 않은 소녀에게 이런 권태가 엄습하는가?
잠깐 스치는 화살처럼 떠오른 고민은 이 권태에서 오는 무력감에 너무나도 쉽게 잊혀진다. 바깥은 너무나도 권태롭다. 그렇다면 고개를 돌려 방 안을 바라보자. 어느 자잘한 유희거리라도 있는가?
매일 보지만, 볼 때마다 낯선 방 안. 타오르는 벽난로와, 녹아버릴 정도로 푹신한 침대, 하얀 레이스가 달린 예쁜 나무 옷장이 있는 소녀 린 드로스트의 방이다. 하지만 이것은 온전히 그녀의 방이 아니다. 벽난로도 그들의 것이다. 하얀 레이스도 그들의 것이다. 오로지 익숙한 것이라곤 침대밖에 없었으나, 그 마저도 온갖 서양의 장식으로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곳에서는 그녀의 영혼이 안착할 수 없다. 이곳은 그녀라는 가녀린 나비가 가벼이 날아 앉을 수가 없는 곳이다. 온통 이국의 물건으로 가득찬 이 곳은 그녀의 방이라 할 수 없다. 온통 낯설은 그들이 만든, 드로스트의 방이다.
시간이 지나면 이 먼 나라와 자신의 거리가 줄어들까?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시간은 이 낯설음으로부터 그녀를 감싸주지 못했다. 갈수록 이 모든 것은 더욱 낯설고, 그것은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다가오고, 끝내는 그 두려움마저 곧잘 새로운 권태가 되어 그녀를 벌레처럼 속에서부터 파먹게 된다. 그런 방을 지금 린 드로스트는 바라보고 있다. 안타깝게도 유희거리 따위는 전혀 없었다. 드로스트는 그녀의 방에 자잘한, 그녀의 유희거리가 될만한 것들을 전부 치워버린지 오래였다.
유희거리가 전부 사라진. 그녀는 느린 손길로 늘어놓은 수십개의 화장품 중 하나를 집는다. 그리곤 뚜껑을 열어 코끝에 대고 손으로 바람을 일으킨다. 작은 바람을 타고 청량한 알로에의 향기가 그녀의 코를 찌른다. 기분이 좋아질 법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잘못 뽑은 패다.이미 어제 하녀가 질리도록 그녀의 목이며 얼굴에 치덕치덕 발라댔던 것이 아닌가. 다시는 보기 싫은 표독스러운 권태나 진배없다.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통을 내려놓는다. 이번엔 향수로 보이는 다른 병을 따서 손수건 위에 두어방울 떨어뜨려 본다. 향숫물이 손수건 위로 진한 색의 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면서 향은 그 몇십배의 원을 공중에 그린다. 그녀는 크게 향기를 한번 빨아들이며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턱 걸터앉는다.
힘이 쭉 빠지면서 취하듯 빠져든다. 그리곤 힘을 쭉 빼버리고는, 의자에 의지해 쓰러지다시피 한다. 좋은 향기다. 이것이야 말로 그녀가 원하던 그런 것이 아닐까?
그 순간, 은은히 퍼지던 향기는 순식간에 넓은 방 구석구석으로 숨어버린다.
이제 그녀는 어찌할 줄 모른다. 방 안을 미친듯이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는 것은 금기다. 그리운 그곳을 추억하며 목놓아 우는 것 또한 허용되지 않는다. 방 안의 유리로 된 것들을, (예컨데 향수가 담긴 통 등을) 모조리 깨부수고 조각내며 희열의 음성을 내지르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금기를 어기는 것은 그 뒤에 올 처벌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그녀를 압도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이런 것들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용기도 없다. 한숨을 쉰다. 그럼 이제 아무 수가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 이국의 보석으로 어여쁘게 장식된 의자에 발까지 올린다. 그리고는 무릎을 끌어올리고 얼굴을 그 사이에 묻어버린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것 뿐으로, 어둠 속으로, 어둠 속으로. 어둠 속으로. 그녀는 권태라는 나름의 거대한 재난으로부터 피난해 버린다.
그녀의 무릎 사이로 의자 밑바닥이 아닌 무엇인가가 보인다. 희미하던 그 무언가는 점점 점토처럼 이리저리 뭉개지더니, 곧 하나씩 던져지듯, 철퍼덕 철퍼덕. 제 자리를 향해 꾸물꾸물 기어가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녀가 지니인 것 중 가장 먼 기억이다. 가장 그리워하는 것이며, 가장 아름다운 마지막의 잎새이다. 그녀가 이 재난에서 구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다. 대개 권태라는 것은 같은 무언가의 반복에서 오는 것이고, 무언가를 쉬이 따분하고 지치게 만들어 끝내는 사이를 갈라놓는 악질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 권태마저도 그녀의 이 기억에는 감히 내려앉을 수 조차 없다.
그것은 그녀의 아버지의 땅과 관련한 기억이다. 그녀가 미처 잡지 못했던 기억이다.
사철 변하는 산을 뒤에 놓고, 졸졸졸 흐르는 시냇가를 앞에 둔 어느 마을이 떠오른다. 논도 밭도 사람도 소도 가진 어느 평범한 조선의 한 마을이 떠오른다. 이십 여 채의 초가집과, 초가집보다는 조금 큰 기와집 두 채 정도를 가진 작은 마을이 떠오른다. 굵은 땀을 뚝뚝 흘리는 건강한 농부들과 길에서 작은 자갈들을 공깃돌 삼아 던지며 유희 하는 아이들 또한 떠오른다. 또 하나 같이 떠오른 것 중에는 한 기와집이 있다. 여느 세도가의 호화스러운 사치 중 하나와는 거리가 먼 소담한 기와집이다. 그 안에는 부녀가 있다. 가시지 않은 겨울의 뼛속을 후비는 추위를 피해, 아버지와 딸은 병풍 한폭이 쳐진 따수운 뒷목에서 밤을 굽고 있다. 딱딱하니 차갑게 굳은 갈빛 겉가죽이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금빛 화로 속에서 검은 빛으로 물들어가면, 어린 딸을 품은 아버지는 집게로 새까만 가운데 군데군데 발간 불기운을 품은 숯조각들을 쳐내고 잘 익은 군밤을 집어낸다. 그리곤 그의 살아온 만큼이나 거친 손으로, 품에 안겨 바둥거리는 이 작은 아이를 위해 밤을 깐다. 군밤은 숯이 감싸안은 밤이다. 숯이 뜨겁도록 품은 새침한 첫날밤의 새댁 같다. 누군가가 만지려고나 하면 누구라도 놀라 떨어뜨릴 수 밖에 없을 만큼의 열을 내뿜는다. 하지만 아버지는 방금 화로에서 꺼낸, 그런 군밤을 맨손으로 까낸다. 천천히, 투박하게. 군밤의 고열도 세월로 굳어진 그의 굳은살에는 당해내지 못한다. 비단 굳은살 뿐이랴. 당신의 딸에게 맛있는 군밤을 먹이겠다는, 그 한 조각 붉은 마음이 아픔을 지웠으리라. 일곱 살배기 어린 딸은 까내어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노란 속살을 두 손에 받아든다. 아직 남아있는 열에 깜짝 놀라 떨어뜨릴 뻔 하다, 양 손에 왔다갔다 올리기를 반복하며 입으로 후후 힘껏 불어댄다. 그런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에는 봄이 벌써 다 담겼다. 봄과 같은 아이는 몇번 그러더니 눈을 반짝이며 입에 쏙 넣어본다. 한 입 씹을 때 그 노란 속살이 가득 퍼지며 입안을 간지럽힌다. 두어번 씹으면 숨겨두고 있던 담백한 단맛이 혀뿌리로부터 진득하게 올라온다. 목으로 넘길 땐 은은한 감미와 아직 남은 따뜻한 온기가 목을 한가득 덮는다. 비로소 환한 미소가 아이의 얼굴에 떠오른다. 그리고
'똑똑똑'
아, 깨어버린다.
'똑똑똑' 하는 정확히 오 초를 주기로 들려오는 저 딱딱한 소리에 그만 그녀는 깨버린다.
'똑똑똑'
그대로다. 모든게 그대로다. 햇빛은 여전히 교만하고, 기러기도 여전히 브이 편대를 이루고, 그네도 여전히 흔들리고 시소도 그대로다. 암 것도 바뀌지 않았다.
"들어 오시옵소서."
그녀는 가쁜 숨을 고른다. 그러곤 저 저주받을 똑똑똑 소리부터 멈추기로 한다.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고 하녀가 들어온다.
"린 아가씨. 이제 수업가셔야 할 시간이에요. 슬슬 준비하시.."
하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한다.
"..아가씨, 우셨어요?"
그녀의 맑은 눈 밑에는 어느새 까닭 모를 물이 한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흠칫 놀라 손등으로 그 물을 슥슥 닦아내면서,
"네? 아, 아니옵니다. 그저, 그냥.."
그냥 그렇게 말 끝을 흐린다. 하녀는 어쩔 줄 몰라하며 우물쭈물한다. 그녀는 그런 하녀를 보며 또 괜시리 미안해진다. 그래서 이렇게 덧붙인다.
"저기..말이옵니다."
"네에?"
"오늘 간식으로.. 밤..을 먹을 수 있겠는지요. 구운.. 것으로.. "
떨리며 조금씩 더듬는다.
"네? 밤을..요? 갑자기.. 그것도 구운 걸로?"
"부탁, 하옵니다."
하녀는 뜻밖의 말에 의아하게 여기다, 그녀의 눈빛을 보고는 말 없이 알았다 하고 나간다. 린은 다시 의자에 허리를 펴고 앉아본다. 물론 그들이 해주는 군밤이 어릴 적의 그것과 같을 리가 없다. 하지만 이리도 어리석은 희망을 걸어보는 것은 그녀가 아직 추억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증거쯤이 될런지.
자, 이제 해야 할 일과가 생겼다. 린은 이제 불과 이십 분 전 만해도 미칠듯이 느꼈던 권태라는 괴물에서는 잠시나마 해방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향수가 그녀를 짓누른다. 그러나 이것은 권태와 같은 괴물과는 다르다. 권태가 잃는 것이라면 향수는 바라는 것이다. 짧은 견문으로 생각컨대, 바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것을 이룰 수 없을 때는 슬픈 일이다. 그것에 대해 희망을 가질 때는 아름다운 일이다.
그녀는 오늘도 아름답게 눈물 짓고, 아름답게 슬퍼한다.
무어별(無語別)
말 없이 이별하다
- 임 제 -
十五越溪女(십오월계녀)
열다섯 살 아리따운 아가씨
羞人無語別(수인무어별)
부끄러워 말없이 이별하였구나.
歸來掩重門(귀래엄중문)
돌아와 중문을 가리고는
泣向梨花月(읍향이화월)
배꽃 사이 달을 향해 눈물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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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니지만 오랜만에 온 느낌...
으..음 일단 완전 뒷북이지만 저번 오싸 너무 감사드립니다 ㅜㅜ 으 전혀 예상치도 못한 거여서.. 좋아해주신 분들 너무 감사하고 또 이번 소설이 이렇게 나와서(...) 죄송합니다..
제가 해석한 린 설정은 이렇다..라는 소설일까요. 아시는 분은 아실지도 모르겠지만 이상의 수필인 '권태' 에서 모티프를 땄어요. 단편입니다!
언제나와 같이 지적 환영하고요, 다음에 합작 재탕으로 뵈요 :3 (재탕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