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팬픽]영웅전설-눈의 여왕, 겨울의 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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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6 01:25:12
20세기 초 유럽.
격변하는 시대.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것이 쏟아지는 세상이지만,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고도(古都)들은 시간이 빚어 낸 고색창연함과 전통을 계승해왔다.
그런 도시들 중에서도 세계적으로도 문화와 예술로 이름 높은 이곳,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예로부터 그 이름조차 빛이 바랠 정도의 예인(藝人)들을 무수히 배출해 왔다. 그에 걸맞게 오래 전부터 수준 높은 교육기관들이 설립되었으며, 개 중에서 음악에 한해서 가장 권위 있는 곳을 꼽으라면 언제나 첫 마디에 거론되는 곳이 있으니 바로 파리 국립 고등음악원(CNSM de Paris)이다. 프랑스 고전음악을 잉태하고 그 전성기를 이끈 위대한 음악원. 지금도 제 2의 쇼팽, 베토벤을 꿈꾸는 어린 새싹들이 자라나는 곳이다.
물론 어떤 명문이라도 학생들이 모여 있으니만큼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이라던가 기 싸움이 존재하고 있지만, 그 모든 파벌을 초월해서 음악원의 누구나가 인정하는 최고의 목소리가 있다. 듣는 사람이라면 찬사하지 않을 수 없는, 천상의 목소리라 불리는 여성.
그 정도로 칭송받는 이 여성은 지금 음악원 내부의 길을 바쁘게 가로지르는 중이다. 겨울의 색으로 물든 정원을 달려가는 여성은 놀랍도록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는데, 이목구비에서는 라틴계의 피가 강하게 느껴졌다. 약간 곱슬거리는 짙은 흑발은 갈가마귀의 깃을 떠오르게 했고, 눈동자는 선명한 황금빛으로 빛났다. 신장은 160cm 정도일까? 작은 키에 비해 겨울옷으로도 감춰지지 않는 육감적인 몸매는 그녀에게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정말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여성의 급한 발걸음을 멈춘 건, 기둥 뒤에서 들려온 바리톤의 음성이었다.
"여, 앤지. 오늘도 좀 늦었군?"
"뭐야, 쟈크. 알면 방해하지 마. 바쁘다고."
쟈크라고 불린 남성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농을 던졌다.
"이런 이런, 그 누가 짐작하리오. 음악원의 희망, 천상의 목소리, 온갖 미사여구가 빛이 바래는 앤지 헌트 양께서 사실은 방세에 허덕이는 슬픈 노동자란 사실을 말이야."
농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비아냥에 가까운 말이지만, 두 남녀의 사이는 꽤나 험한 악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밀했기에 앤지라고 불린 여성 또한 퉁명스런 목소리로 맞받아쳤다.
"쟈크, 나를 그렇게 안쓰럽게 여기면 빨리 비키지 그래? 이번에도 늦으면 그나마 괜찮은 일자리도 없어진다고. 나를 세느 강의 수많은 다리 밑으로 집어넣고 싶지 않으면 차라리 날 업고 뛰어 가주면 고맙겠어."
뚱한 대꾸에 쟈크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길을 비켜주었다. 앤지는 망설일 것 없이 그 옆을 지나쳐 달려 나갔다. 그런 그녀의 등 뒤에 쟈크는 마지막으로 크게 소리 질렀다.
"앤지! 그러니까 이만 마음을 돌려! 언제까지 그런 험한 일을 할 셈이야? 난 아직도 널 기다린다고!"
앤지의 귀에 아프게 파고드는 쟈크의 외침. 앤지는 귀를 틀어막고 싶은 기분에 진저리치며 애써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말이 맞다. 그녀는 쟈크같은 부유한 집안의 자제가 보면 충분히 험하다고 말할 수 있는 가게의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었고, 또한 그는 몇 번이나 앤지에게 구애하고 거절당했지만 여전히 그녀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쟈크는 친구 이상의 기분을 들게 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순수하고 직설적인 그의 호의가 싫은 것만도 아니다. 복잡하게 꼬인 현실과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간관계에 지친 앤지는 점점 발걸음이 느려지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완전히 발을 멈춘 앤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질까 하고.
"봐야 좋을 것도 없네. 구질구질하잖아."
잔뜩 찌푸려진 하늘은 마치 앤지 자신의 마음과 같아서 눈 뜨고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한숨을 푹 내쉰 앤지는 이왕 늦어버린 것, 일당을 깎일 각오를 하고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그런 그녀의 앞으로 조그마한 남자아이가 호외를 외치며 신문을 흩뿌렸다.
"호외요, 호외! 영국 런던에서 흑염 하이드와 검은 두건 칼라가 사망했답니다! 호외요, 호외!"
눈앞에 떨어진 신문을 주워들고 슬쩍 훑어본다. 지하 연합의 수장 흑염 하이드, 그의 후계자 검은 두건 칼라가 런던에서 의문의 사망. 본래 그 날은 헬리오스 사의 대표 헨리 밀러 3세와 회담이 예견된 날이었고, 회담 장소는 런던이었다고. 하지만 명왕이 런던에 도착하기도 전에 회담장의 주변에서 검은 불꽃이 피어올랐고, 마침 그 순간 회담장에 당도한 명왕이 수석 비서 타라에게 지시해 주변의 건물들을 파괴, 철거하여 더 이상의 큰 피해를 막았다고 한다. 칼라의 시신은 발견되었지만 하이드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고 적혀 있다. 왠지 가슴 한구석이 불편해진 앤지는 신문을 구겨 던져버렸다. 그녀와는 전혀 상관없는 능력자(Cypher)들의 이야기였지만 사람의 죽음은 지금의 앤지에게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그것이 누구이든 간에.
머리를 가볍게 털고는 우울한 마음을 걷어낸다. 그녀는 그녀의 삶을 책임지는 것만으로도 버겁다. 그 외의 감정낭비는 사치다. 앤지는 그렇게 자신에게 되뇌며 일터로 다시금 달려갔다. 더 이상 늦었다가는 그나마 받을 일당도 받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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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지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지친 몸을 끌고 자신의 집으로 들어섰다. 집이라고 해봐야 허름한 단칸방. 간신히 집이라는 구색을 댈 정도의 집기를 갖춘 이 자그마한 방이 앤지의 보금자리다. 그녀는 묵직한 겉옷을 벗어 대충 던져버리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이대로 잠들면 추위에 얼어붙겠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하기 싫다.
그녀는 멍하니 엎어져서 상념에 잠겨 들어갔다.
그녀는 미혼모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그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진, 기록, 하다못해 어머니에게 해주었을 자그마한 선물까지도. 앤지의 어머니는 홀몸으로 세상을 헤쳐 가며 앤지를 키워냈다. 허나 앤지가 가끔 아버지에 대해 물어보면 슬픈 얼굴로 침묵하곤 했다. 가끔은 아련함에 물든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며 눈물짓기도 했고. 어느 정도 철이 든 앤지는 더 이상 그런 질문을 하지는 않았지만, 가끔 자신의 머리칼을 보며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어머니를 보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외모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라틴계의 외모를 가진 그녀는 결코 어머니의 외모를 닮진 않으니까. 그나마 황금빛의 눈동자와 매력적인 눈꼬리가 어머니로부터 받은 특징이다. 앤지는 어머니와 닮은꼴이 하나라도 있다는 것에 만족할 수 있었다.
앤지의 어머니는 전형적인 프랑스 미녀였고 그녀를 종업원으로 원하는 곳은 많았다. 하지만 수입은 그리 많지 않았고 두 모녀가 넉넉하게 살기에는 파리의 물가가 지나치게 높았다. 그렇지만 앤지의 어머니는 결코 파리를 떠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눈길을 끌던 앤지의 재능. 바로 풍부한 감정을 담아내는 목소리와 고음과 저음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성대의 기교. 성악가로서 최상의 재능을 타고난 앤지를 가장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그녀는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또 일했다. 그리고 마침내 앤지가 파리 국립 고등음악원에 입학하던 날. 모녀의 생애 최고로 기뻐야 할 날에 앤지는 가장 큰 슬픔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본래 그리 튼튼하지 않았던 앤지의 어머니는 이십여 년 동안의 고된 노동으로 극도로 피폐해져 있었고, 앤지의 합격 소식에 마음을 놓아버리자 그 반동이 한번에 몰려온 것이다. 그렇게 쓰러져버린 앤지의 어머니는 손쓸 도리도 없이 쇠약해져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앤지는 스물이 되지 않아서 세상에 홀로 남아버렸다. 그렇지만 좌절하지는 않았다. 고난이야 이미 질릴 정도로 겪은 몸이다. 앤지는 어머니의 죽음을 어렵게 털어내고 음악원의 가르침에 미칠 듯이 몰두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그것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앤지는 채 1년이 지나기 전에 음악원 최고의 에이스로 자리매김했다. 그 와중에 바리톤과 베이스의 천재라 불리는 쟈크와도 만났고, 그와 페어를 이루어 노래를 부르는 날에는 앤지 또한 음악의 즐거움에 마음껏 빠져들었다. 그것은 쟈크 또한 마찬가지였다.
쟈크는 어느 새 앤지에게 빠져들었고 그녀에게 정식으로 결혼을 전제로 한 교제를 신청했다. 하지만 쟈크는 부유한 집안의 자제였고, 그 차이가 쟈크와의 관계에 일정 선을 넘지 못하는 장벽이 되었다. 만약 앤지가 받아들인다면 쟈크는 그녀와 약혼을 하고 싶다고 했고, 그러면 앤지는 경제적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음악을 만끽할 수 있겠지. 하지만 앤지는 그 마지막 장벽을 결국 허물 수 없었고, 지금껏 쟈크와 평행선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녀 또한 여자. 자신에게 끝없이 헌신적으로 다가오는 쟈크에게 마음이 끌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앤지는 자신조차 어쩔 수 없는 마음의 짐 때문에 쟈크의 구애를 계속 거절했다. 앤지의 마음과는 별개로, 흔히 말하는 여자의 직감이 쟈크와 자신이 결코 행복하게 살 수 없다는 어떤 확신을 주었기 때문에.
쟈크는 그런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무시하지도 않았다. 쟈크는 포기하지 않고 앤지의 주변을 맴돌았고 앤지의 가장 큰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요즘은 앤지도 슬슬 마음이 기우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과연 그녀의 남은 생애에 쟈크만큼이나 자신을 위해 줄 수 있는 남자를 만날 수 있을까? 어쩌면 쟈크는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선물해 준 인생의 반려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눈물이 솟구쳐 오른다. 어머니든, 쟈크든 누구라도 보고 싶어 미칠 것 같다.
돌아버릴 것 같은 외로움에 사무친 앤지는 가만히 있다가는 무슨 짓을 할지 몰랐기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동시에 문을 두들기는 노크 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사랑하는 부드러운 바리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앤지, 안에 있어? 잠시 얼굴 좀 봤으면 하는데."
어떻게 이 남자는 앤지가 그를 필요로 하는 순간마다 곁으로 다가올까. 앤지는 겉옷을 걸쳐 입고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언제나 한결같은 쟈크가 서 있었고, 앤지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런, 나의 공주님. 갑자기 이러시면 저도 당황스럽습니다만?"
장난스러운 그의 목소리도 지금은 감사할 뿐이다. 대꾸조차 하지 않고 더욱 파고드는 앤지를 당혹스럽게 바라보던 쟈크는 이윽고 결심한 듯 조심스레 팔을 들어 그녀를 껴안았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나라도 괜찮으면, 부서져도 좋으니까 힘껏 껴안아도 돼. 오로지 너만이 나를 가질 수 있으니까."
앤지는 그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 쟈크를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미소 짓는 모습이지만 쟈크의 얼굴은 그 어느 때와도 달랐다. 진실 된 사랑만을 웅변하는 그 이목구비에 참을 수 없는 열정을 느낀 앤지는 발꿈치를 들어 격하게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꿈결 같은 시간이 흐르고, 두 남녀는 조심스레 입술을 떼었다. 그리고 앤지는 상기된 얼굴로 자신의 마음을 밝혀갔다.
"쟈크. 언제나 고마웠어. 음악원에서 날 지켜주었던 사람은 오직 너뿐이었지. 지금까지는 널 받아들일 수 없었어. 하지만 이젠 괜찮을 것 같아. 너와 함께하고 싶어. 늦었지만, 날 받아주겠니?"
쟈크는 순식간에 환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방금 전보다 훨씬 정열적인 키스로 말이다. 두 사람의 머릿속에 번개가 수십 수백 번을 울려 퍼진 듯 했다.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된 순간, 쟈크는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이성의 끝자락을 간신히 부여잡고 앤지를 살짝 밀어냈다.
"쟈크……."
"앤지, 내 마음을 받아들여준건 기뻐. 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야. 아, 오해하지는 마. 너에게 더욱 충실하고 싶어서니까. 난 지금 이 기분을 좀 더 즐기고 싶어. 너와 함께 말이지."
어떻게 이렇게 하나하나 사랑스러울 수가 있을까. 그동안 애써 외면해왔던 쟈크의 매력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앤지는 아무 말도 못한 채 다시금 그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자크는 그녀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보아하니 저녁도 제대로 못 먹었지? 아까 껴안을 때 힘이 하나도 없더라니."
사실 종업원으로 일하는 식당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허둥지둥 빵 한 덩이만을 집어먹은 게 전부여서 몹시 허기진 상태였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발그레진 앤지를 보니 쟈크는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며 허둥지둥 말했다.
"이런, 놀리려는 게 아냐. 사실 오늘은 네가 기분이 영 저조하기에 술이라도 한잔 하러 가자고 온 건데. 마침 잘 된 거군. 늦은 시간이라도 간단하게 요기할 만한 곳을 아니까 거기 가보자. 배를 채우고 와인을 몇 잔 마시면 잠도 잘 올 거야."
이 남자는 정말… 자신조차 자신의 기분을 제대로 모르는데 이런 배려라니. 앤지는 자신을 이끄는 쟈크의 손이 데일 듯 뜨겁다고 느꼈다. 그의 손이 이끄는 대로 가면 어디를 가든 행복할 것만 같다. 아니,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쟈크가 찾아온 날이 오늘 밤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어때? 제법 괜찮지?"
"으응. 정말 맛있네."
두 사람은 간단한 안줏거리를 사이에 두고 와인을 주고받았다. 그들이 자리 잡은 곳은 꽤나 품위 있어 보이는 식당이었고 주변에는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꽤나 많은 사람들이 자리 잡고 나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앤지와 쟈크는 소란의 사이에서도 서로의 시선만을 의식하며 와인을 홀짝였다. 마치 그것만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도 되듯이. 그러다보니 어느새 꽤나 술기운이 올랐고 앤지는 의식이 고양되는 것을 느꼈다. 요리는 충분했고 와인은 맛있었으며 둘만의 시간은 별 다른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순간순간이 감미롭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이정도의 행복감을 느낀 것은 난생 처음.
더 이상 이 자리에 있다가는 어떻게 될지 몰랐기에 앤지는 자리를 파하고자 했고 쟈크는 군말 없이 그녀를 따라나섰다.
"참 이상해. 오늘 낮에만 해도 하늘이 우중충해 보였는데 지금은 이렇게 아름다워 보이다니."
열기에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앤지의 옆얼굴을 보던 쟈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늘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너만은 못해.'
"쟈크. 오늘은 정말 최고의 하루였어. 내일부터는 이런 나날이 계속되겠지?"
어딘지 여린 감정을 품고 말하는 앤지는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는 구석이 있었다. 쟈크는 까닭 모를 미소가 우러나오는 것을 느끼며 앤지에게 말했다.
"물론이지. 지금껏 못했던 모든 것을 너에게 해 줄 거야. 나의 모든 것은 오롯이 너의 것이니 부담스러워 할 것 없어, 사랑스런 공주님. 나는 이미 당신의 노예니까."
마치 어린 소년의 고백 같은 쟈크의 말에 앤지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릴 수 있었던 것은 얼마만일까. 앤지는 이제야말로 자신의 삶에 봄이 찾아올 거라 느꼈다.
그리고 그 희망은 한순간에 깨어져버리고 말았다.
"아가씨가 앤지 헌트인가?"
그녀의 집으로 가는 골목길을 걸어가던 와중, 옆 골목에서 튀어나온 검은 정장의 괴한들이 둘을 순식간에 둘러쌌다. 술기운이 올라 감각이 둔해진 앤지와 쟈크는 미처 대응하지 못하고 괴한들에게 포위되어버렸다.
쟈크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끼며 정체불명의 괴한들을 훑어보았다. 중절모를 깊숙이 눌러 쓴 남자들은 밤의 장막에 가려져 그 정체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쟈크는 앤지의 손을 조심스레 부여잡으면서 속삭였다.
'앤지. 딱 봐도 좋은 의도로 온 건 아니야. 널 아는 사람 중에 저런 자들을 보낼 만한 사람은 없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인 앤지는 괴한들이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소름끼치는 감각. 지금의 그녀는 몰랐지만, 그것은 살기였다. 그리고 미처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쟈크는 이들이 결코 좋은 의도를 가진 게 아닌 것만은 파악했다. 왜냐하면 어느 새 권총을 꺼내들고 두 사람을 압박하고 있었으니까.
"전부 알아보고 왔으니 시치미는 떼지 말도록. 순순히 우리말을 따르면 다칠 일은 없을 거다. 알겠나?"
괴한들의 리더로 보이는 사내가 고압적으로 말했다. 그는 이 남녀가 자신을 말을 거역하지 못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듯 했다. 쟈크는 그의 허를 찌르기로 결심했고, 앤지의 손을 잡고 그에게로 뛰어들었다.
의외의 반항에 사내는 거칠게 밀려났고 그 틈을 타 쟈크는 포위망 바깥으로 앤지를 밀어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쳤다.
"도망쳐, 앤지! 여기는 내가 막아볼게! 어서!"
"안 돼! 쟈크! 너야말로 거기서 빠져나와! 저들이 노리는 건 나잖아! 너까지…"
"이 녀석들, 질이 좋지 않아! 빨리!"
테너의 톤까지 높아진 쟈크의 고함에 움찔 놀란 앤지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간신히 떼놓았다. 처음이 어려웠지 한번 달리기 시작하자 자신도 놀랄 정도로 빠르게 뛰어나갔다. 그 와중에도 앤지의 마음은 죄책감에 짓눌려갔다. 왜 하필 오늘 이런 일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인데. 왜.
그녀의 어머니 또한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쟈크 또한 그녀가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에 위기에 빠졌다. 앤지는 놀랄 정도로 깊숙하게 자기혐오가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달릴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날카로운 총성이 골목길을 가로질렀다. 앤지는 놀라서 뒤돌아서며 외쳤다.
"쟈크-!"
괴한들을 막아서고 있던 쟈크는 배를 부여잡고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제기랄, 사람들의 눈에 띄기 전에 빨리 저년을 잡아 와! 지체할 시간이 없다!"
리더는 욕설을 내뱉으며 괴한들을 다그쳤고, 괴한들은 쟈크를 밀쳐내고 앤지에게 달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쟈크는 밀려나지 않고 버텨서며 그들을 온 몸으로 막아섰다.
"애…앤지. 빨리…빨리 도망쳐. 어서…"
쟈크의 목소리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깊은 울림을 가진 허스키한 목소리는 지금 죽음의 울림을 자아내고 있다. 앤지는 그것을 확실히 느꼈다. 쟈크는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앤지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뒤돌아 달렸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지켜 본 쟈크는 떨리는 미소로 그녀를 배웅했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담아 말을 쥐어짜냈다.
"아아… 사…사랑해. 앤지…"
그리고 쟈크가 남긴 최후의 고백은 연이어 이어지는 총소리에 묻혀 사라져갔다. 쟈크의 몸은 차가운 바닥에 늘어졌고, 괴한들은 시체가 된 쟈크의 몸뚱이를 걷어차고는 앤지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적막에 잠긴 골목길에 홀로 남겨진 쟈크의 시신 위로 한 송이의 눈이 내려앉았다. 그의 영혼을 추모하듯이……
"헉…헉… 흑. 흐윽. 쟈크. 흑…"
흐느끼며 골목길을 내달리는 앤지. 그리고 그를 뒤쫓는 검은 정장의 무리. 숨 막히는 추격전은 슬슬 괴한들의 승리로 결판나려 했다. 마침내 막다른 골목까지 몰린 앤지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담장을 보고 우두커니 서버렸다. 그리고 그 입구를 괴한들이 막아섰다.
"후우… 그러게 왜 난리를 쳐서는. 얌전히 말만 들었어도 남자친구가 죽진 않았을 텐데 말이야. 응?"
이죽거리는 괴한들의 리더를 보고 있자니 앤지는 슬픔 이전에 분노가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공포와 슬픔을 분노로 억누르자 그녀 자신도 놀랄 정도로 침착해졌고, 자신도 모르게 온 힘을 짜내어 위압적으로 소리쳤다. 소프라노의 고성이 괴한들에게 쏟아져 내렸다.
"대체 무슨 목적이기에 이런 짓을 하는 건가요! 끌려가기 전에 진실이라도 알고 싶군요! 어려운 질문인가요?"
그녀의 박력에 놀란 것일까. 괴한들은 잠시 움찔했지만 리더는 여전히 빙글거리며 그녀를 조롱했다.
"호오, 겨우 고함 한번으로 이 녀석들을 움찔하게 만들다니. 과연 흑염의 핏줄이야. 하지만 아직 어린 계집애일 뿐이지. 큭큭."
흑염? 앤지는 갑자기 튀어나온 명칭을 당장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잠시 시간이 흐르자 그 명칭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바로 오늘 보았던 이름이었으니까.
"흑염? 흑염…하이드? 지하 연합의 수장인 그 사람과 내가 무슨 상관이죠? 그것도 죽은 사람과 엮어대다니, 대단히 불쾌하군요!"
앤지는 한번 기세를 타자 자신도 모르게 그들에게 고함을 질러댔다. 리더 또한 그녀의 기세에 약간 주눅이 들었는지 순순히 대꾸해 주었다. 물론 비웃는 기색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이런 이런, 죽은 아비가 저승에서 슬퍼하겠구먼. 슬하에 남은 자식이라곤 이제 딸내미 하나뿐인데, 자기 부친도 모르고 말이야. 쯧쯧."
"…뭐? 그게 무슨 소리죠?"
리더는 더 이상의 잡담은 필요 없다는 듯이 휙 뒤돌아섰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이죽거리며 말했다.
"진실은 저승에 계신 아버지에게 들으면 되니까 걱정 말도록 해. 그럼 남자친구와 같이 상견례나 하러 가라고. 하하. 자, 뭐해? 저 년을 죽여!"
리더의 명령이 떨어지자 앤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곧 총탄이 자신의 몸 어딘가를 파고들겠지. 제발 단번에 급소를 관통해 주기를. 한 순간의 고통만 참으면, 쟈크와 함께 할 수 있어.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 순간은 영원히 다가오지 않았다.
"이봐, 너희들. 그만 멈추는 게 좋을 거다."
묵직한 음성이 앤지와 괴한들의 사이를 지나갔다. 그리고 기세등등했던 리더는 갑자기 나타난 사내의 손에 팔이 꺾여들린채로 절규했다.
"으아악! 빌어먹을! 이 새끼는 뭐야! 처리해!"
괴한들은 당황해서 사내에게 총구를 들이댔지만 리더를 방패로 삼은 사내를 쏠 방법이 없었다. 리더를 간단히 제압한 사내는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이 녀석이 험한 꼴을 당하면 너희들도 무사하진 못하겠지. 그러기 싫거든 총을 버려라."
무미건조한 목소리는 협박 이상의 경고를 담고 있었다. 괴한들은 잠시 망설이더니 천천히 총을 내려놓았고, 사내는 여전히 한 팔로 리더를 제압한 채로 괴한들에게 다가섰다.
"목숨을 건지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해라."
그렇게 말하고는 나머지 한 팔로 괴한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무언가가 으스러지는 섬뜩한 소리가 골목을 채웠다.
"끄아아아아아아악!"
비명이 울려 퍼진다. 놀랍게도 사내의 손이 움켜쥔 팔뚝은 기괴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표현이 이상한 것 같지만, 사내의 손이 움켜쥔 부분이 말 그대로 캔을 우그러뜨린 듯 일그러져버린 것이다. 사내는 무감각하게 다른 괴한들의 팔뚝을 차례대로 '으깨'고,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채 바닥을 뒹구는 괴한들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다리도 만져주고 싶지만, 도망은 쳐야 하니까 봐주지. 다만 이 녀석은 예외다."
사내는 리더의 양 팔을 부수고는 양 정강이 또한 으스러뜨려버렸다. 한도를 넘어선 고통에 리더는 그대로 까무러쳐 버렸고, 사내의 배려인지 오른팔과 왼팔 하나씩을 건진 괴한 둘이서 리더를 부축하고는 엉거주춤 사라져버렸다. 폭풍 같은 순간이 지나고, 앤지는 사내에게 집중할 시간을 가졌다.
중년에 접어드는 듯 한 외모. 각진 턱은 강인한 인상을 풍긴다. 짧은 백금발과 푸른 눈, 하얀 피부는 그가 북유럽 계통의 사람임을 짐작하게 했다. 잠시 말없이 앤지를 바라보던 그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늦는 바람에 지인 분을 구해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 말에 앤지는 쟈크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총성에 스러져 간 그의 뒷모습에 다시금 눈물이 새어나온다. 흐느끼는 그녀를 사내는 말없이 기다려주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앤지는 사내에게 질문을 던졌다.
"연합에서 오신 분인가요?"
예상외의 질문에 사내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녀는 분명 진실을 모르고 있을 텐데? 그리고 사내는 이어지는 앤지의 말에 그녀가 진실을 눈치 챈 것을 알게 되었다.
"저들이 그러더군요. 내가 지하 연합의 수장인 흑염 하이드의 마지막 핏줄이라고. 그렇다면 날 구한 당신도 연합의 소속이겠죠. 그렇지 않나요?"
극한의 상황에서도 무뎌지지 않는 의지. 정확한 통찰. 적들조차 잠시지만 압도하는 박력. 과연 시대가 선택한 영걸의 핏줄다운 재능이었다. 하지만 그 재능은 미처 꽃피기도 전에 잔인한 손길 아래 꺾여 떨어질 위기에 처했고, 다행히 이 사내는 간발의 차이로 그녀를 구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저는 연합 소속의 터커라고 합니다. 그리고 저들은 가증스런 회사의 주구들입니다."
회사라는 단체를 언급하는 터커의 눈에 혐오의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앤지는 회사라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회사? 설마 헬리오스 사를 말하시는 건가요? 그들이 왜 나를 노리는 거죠?"
작은 단서에서도 결과를 이끌어내는 그녀를 보며 터커는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아까도 그랬다. 적 앞에서도 당당히 버티는 배짱은 어지간한 남성조차 갖기 힘든데, 이 아가씨는 확실히 한 조직의 수장으로서 재능을 타고난 것 같다. 터커는 연합 참모의 선택이 틀린 적이 없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앤지에게 대답해 주었다.
"저들은 연합 자체를 완전히 말소시킬 생각입니다. 지금 수장을 잃고 허둥대는 연합의 상황은 저들에게 절호의 기회니까요. 그 섬멸작전의 일환으로 혹시나 후환이 될 지도 모르는 하이드 님의 핏줄을 제거하려고 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아, 제가 아니라 연합의 참모가 말입니다. 그리고 역시나 예측이 현실이 되었군요."
앤지는 현기증이 났다. 이걸로 자신이 그 유명한 능력자 집단의 수장 '흑염 하이드'의 딸인 게 확실해졌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 사실을 알았기에 진실을 말해주지 않은 걸까. 앤지가 능력자들의 세계와 접하지 않길 바라고서. 그저 평범한 성악가로서의 삶을 살길 바랐겠지. 하지만 어머니의 바람도 헛되이, 앤지는 지금 이 순간부터 능력자들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녀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이곳은 위험합니다. 일단 은신처로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등을 돌리는 터커. 그 뒤를 따라가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소문으로만 듣던 능력자들의 세계가 자신의 코앞에서 어른거리는 것을 느꼈다. 미지의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그녀를 옳아 매었다. 그녀는 간신히 말을 쥐어짜냈다.
"저는… 저는 갈 수 없어요. 제가 하이드의 딸이란 것은 인정하지만 전 아무런 능력도 없어요. 회사도 그 점을 알면 저를 가만히 내버려 두겠죠…"
한마디 한마디를 꺼낼수록 목소리가 작아진다. 결코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앤지는 그저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현실적으로 파악하는 자신에게 역겨움마저 느끼며 앤지는 말을 고쳤다.
"하…하하. 그렇죠. 헛된 희망이죠. 그럴 생각이었다면 애당초 회사는 절 신경도 쓰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아요?"
터커는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라는 능력자 조직의 표적이 된 이상, 앤지에게는 평범한 일상과 결별해야만 한다. 그것은 죽음, 혹은 능력자의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양자택일의 잔인한 선택. 앤지는 다시 한 번 쟈크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쟈크, 미안해. 나 때문에 네가…'
쟈크를 떠올리자 앤지의 마음속에 온기가 깃든다. 어머니 다음으로 자신을 사랑해 준 남자. 이제 그녀를 사랑해 준 사람들은 이 세상에 없다. 다시금 눈물이 고였지만, 쟈크는 자신이 울며 주저앉는 것을 바라지 않겠지. 그가 사랑한 앤지라는 여자는 당차게 일어서 세상에 맞서는 그런 사람이다. 그리고 앤지는 쟈크의 죽음을 결코 헛되게 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가죠. 어차피 이제 파리에서 살아갈 순 없겠군요.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는지, 어디 한 번 들어보도록 하죠."
아픔을 딛고 일어선 자는 강한 사람이고, 슬픔을 지고 내일을 찾는 자는 용기 있는 사람이다. 터커는 하이드가 남긴 마지막 희망이 격렬하게 불타오르는 것을 보고서, 그 자신 또한 희망이 피어오름을 느꼈다. 이제 이 아가씨는 연합의 공주로서 살아가겠지. 터커는 언젠가 여왕이 될 이 연약한 공주님을 끝까지 모시기로 결심했다. 그의 목숨을 걸고서 말이다.
"이쪽입니다. 서두르십시오."
터커와 앤지는 파리의 골목길 사이로 사라져갔다. 훗날 스노우 퀸이라 불릴 연합의 차기 수장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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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커는 은신처로 향하면서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흑염과 검은 두건의 죽음 이후 차기 계승자로 지목되었던 라이스 킨의 암살, 연합의 최고(最古) 에이스인 휴톤과 트리비아의 실종. 혼란에 빠진 연합에게 기습적으로 전개된 회사의 섬멸작전. 그리고 이 최악의 상황마저 미리 상정해놓고 이후의 계획을 입안한 연합의 참모 토니 리켓이라는 남자까지. 앤지는 얼굴 한번 못 본 토니라는 남자의 저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는 현재 회사의 포로 신세였지만.
"현재 연합은 모든 외부활동을 중지하고 각지의 거점에서 농성을 펼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선 그렇게 시간을 버는 수밖에…"
토니의 지시는 탁월했다. 본래부터 흑염 하이드라는 걸출한 리더의 카리스마로 결집된 연합이라는 집단은, 조직으로서의 완성도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허술한 구석이 있었다. 이런 조직은 강력한 구심점이 사라지는 순간 사분오열의 가능성이 큰 법인데, 토니는 회사라는 외부의 적이 침범한 타이밍을 적절히 이용, 그 자신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점조직들이 독립된 저항을 벌이도록 지시한 것이다.
이걸로 연합은 잠시간의 시간을 벌었지만 그마저도 임시방편. 차기 수장을 얻지 못하거나 회사의 조직적인 섬멸전이 계속 이어진다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와해되어 버릴 것이다. 그렇기에 흑염의 마지막 후손인 앤지의 존재가 부각되었고, 연합은 그녀를 차기 수장으로 맞아들이려 했다. 회사 또한 놀라운 정보력으로 그 사실을 입수, 앤지를 처리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행히 늦지 않게 터커가 나타나서 그녀는 목숨을 건졌고.
"그는 이 상황까지 온다면 써먹을 최후의 한 수를 준비해뒀습니다. 플랜 디코이라고 하더군요. 자세한 사항은 조력자들이 말해줄 겁니다."
터커는 외진 곳에 위치한 허름한 저택으로 앤지를 안내했다. 저택의 문고리를 독특한 리듬으로 두들기자 문이 살짝 열렸고 둘은 그 틈으로 빨려드는 듯 사라졌다. 저택은 두 사람을 집어삼키고서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침묵해버렸다.
"터커 씨, 성공하셨군요! 다행이에요. 늦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밝은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은 앵글로 색슨계로 보이는 여성. 화려한 금발과 푸른 눈을 가진 미녀였다. 그녀는 앤지를 돌아보더니 웃으면서 말을 걸어왔다.
"앤지 헌트님이시죠? 반가워요. 저는 브랜다. 앞으로 앤지님과 함께 할 연합 소속 사람이에요. 잘 부탁드려요."
그녀의 빛나는 생명력은 주변의 모든 것에 활력을 주는 것 같았다. 과묵한 터커도 그녀와 함께 있으니 표정이 조금 풍부해졌고, 앤지 또한 아직은 슬픔을 완전히 떨치지 못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 어느 정도 기운이 나는 것을 느꼈다. 앤지 또한 브랜다에게 답례를 보내었다.
"저도 반가워요. 저는 앤지 헌트.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두 사람의 대면이 끝나자 브랜다는 소개시켜 줄 사람이 한명 더 있다고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러면서 낯가림이 심하다느니, 소심하다느니 중얼거리는 것을 보니 식은땀이 살짝 흐르기도 했지만, 정작 끌고 나온 사람은 그런 편견으로 왜곡해 보기에는 너무나 미안한 사람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루이스입니다."
짧게 말하는 이 루이스라는 소년은 독특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진한 회청빛 머리칼. 대조적으로 붉게 녹슨 쇳조각을 연상시키는 적갈색 눈동자. 아직은 소년의 티가 남은 앳된 얼굴. 어딘지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루이스는 체구는 그리 크지 않지만 어딘지 믿음직한 느낌을 주는 소년이었다.
"반가워요, 루이스. 제 이름은 앤지 헌트. 많이 도와주셨으면 해요."
구성원의 소개가 끝나자 터커는 본래의 목적을 위해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자, 이제 소개는 끝난 것 같군. 그럼 브랜다, 이후의 일을 논의하도록 하지. 지령은 받았나?"
"예. 토니는 앤지 님을 확보하면 지체하지 말고 오스트리아로 향하라는 전갈을 남기셨어요."
"오스트리아…? 의외의 행선지인데."
"제 생각엔 그게 함정인 것 같아요. 아마 도망치는 본인들조차 왜 그곳으로 가는지 몰라서야 추적자들도 방향을 잡기 난감하겠죠."
"흠, 일리 있군. 그럼 준비는 다 되었나?"
"물론이죠. 지금이라도 바로 출발 할 수 있어요."
의사교환은 신속히, 행동은 즉각적으로. 네 사람은 빠르게 짐을 꾸려서 저택을 나섰다.
이때의 앤지는 알지 못했지만 토니의 안배는 세심하게 배치되어 그녀의 도주를 보조했다. 이날 밤 연합의 능력자들과 '가짜' 앤지로 구성된 6개의 팀이 각 방향으로 이동을 시작했고, 의외의 상황에 갈팡질팡하는 회사를 뒤로 하고 앤지 일행은 오스트리아로 향하는 기차에 무사히 탑승했다.
그 누가 알았으랴. 플랜 디코이, 이 탈출극이 후에 2차 능력자 전쟁이라 이름 지어지고, 불세출의 영웅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된 것을 말이다.
"여기가 오스트리아의 빈이로군요. 예로부터 수많은 악성(樂聖)들이 여기서 실력을 뽐냈죠. 언제고 오고 싶다고는 생각했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오게 될 줄이야…"
빈의 중앙 광장에서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하는 여자. 품이 넉넉한 코트와 머플러, 푹 뒤집어쓰는 클로슈 모자로 완벽한 방한태세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 또한 외모를 숨기기 위한 위장. 이 여자는 다름 아닌 앤지 헌트였다.
일행들 또한 나름대로의 변복을 거쳤다. 터커는 수염을 기르고 묵직한 슈트 차림, 루이스는 눈에 띄는 회색 머리칼을 숨기기 위해 모자를 쓰고 후드 티를 걸쳤고 브랜다는 머리를 땋고 천진난만한 스웨터 차림을 했다. 어떻게 보면 여행을 온 일가족처럼 보이는 구성.
일행은 쉴 틈 없는 도주로 마침내 목적지인 오스트리아의 수도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철도와 우마차, 버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자 앤지 본인도 놀랄 정도의 속도로 이동이 가능했고 플랜 디코이 또한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앤지 일행은 약간의 과로 외에는 별 문제 없이 이곳에 당도했다. 이후로의 행동은 오스트리아에 안배된 토니의 지령을 찾아 다시금 결정하게 될 것이다.
"숙소를 잡고 휴식을 가져야겠습니다. 여독을 풀어둬야 이후로도 무리가 가지 않을 겁니다."
무뚝뚝하지만 세심한 터커의 배려는 구성원들이 든든하게 기댈 수 있는 기둥이었다. 터커는 어떤 의미로도 이 집단의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었다. 일단 브랜다는 이곳의 지부와 접선을 시도해 보겠다며 시내로 사라졌다. 터커가 숙소를 찾으러 가겠다고 떠나자 이 너른 광장에는 루이스와 앤지 둘만이 남게 되었다. 앤지는 약간의 거북함을 느끼며 루이스를 돌아보았다.
"하실 말씀이라도?"
"…아뇨. 딱히."
앤지는 이 차가운 소년에게 아직도 다가가기 어렵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지금까지의 여정에서 앤지는 루이스와 브랜다 또한 능력자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사이를 가로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루이스는 자신의 능력과 마찬가지로 얼음장처럼 냉랭한 편이었고, 앤지는 그와 가까워지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았다. 특히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따라서 앤지는 그저 시간만이 관계를 개선시키리라 믿을 수밖에 없었고, 다행히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초반에 비해 지금의 둘 사이에선 어느 정도 대화가 이어지곤 했다.
물론 루이스와 브랜다는 원래부터 친분이 있었던 듯 허물없이 지냈고, 앤지는 두 남녀가 서로 애정을 품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점이 루이스와 친밀해지는데 약간의 거부감이 되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도 이 정도의 명소까지 왔는데 가만히 있기는 그러네요. 좀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한 바퀴 둘러보는 건 어때요?"
루이스는 잠시 앤지의 눈을 들여다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장족의 발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 앤지는 루이스와 함께 빈의 화려한 광장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흐르진 않았을 것이다. 애당초 그리 넓은 광장도 아니었고, 커다란 건물들은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공교로운 순간은 사람의 사정을 봐 주지 않는 법이고, 마침 앤지가 인파에 떠밀려 휘청거린 것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아…"
꽤나 거칠게 밀쳐진 앤지는 넘어질 듯 흔들렸고, 옆에 붙어있던 루이스가 그녀를 가볍게 부축했다. 흔히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일.
"고마워요, 루이스"
"아닙니다."
"…터커씨는 어디 가고,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어딘지 싸늘한 브랜다의 목소리가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질렀다.
"아, 브랜다. 다녀왔군요. 터커씨는 지금 숙소를 알아보러 갔어요."
앤지는 루이스에게 몸을 떼면서 말했다. 앤지로서는 별로 크게 생각하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이것이 이후로 일어날 모든 불행의 씨앗이 되었다는 것은 지금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 루이스, 그리고 브랜다조차도.
"…그렇군요. 이곳은 사람이 많으니 위험해요. 저기 인적이 드문 벤치에서 터커씨를 기다리죠."
브랜다는 왠지 사무적인 어투로 일행을 이끌었다. 미묘한 거슬림이 느껴졌지만, 앤지는 브랜다가 단순이 신경이 좀 날카로워진 것이라 생각하고 넘어갔다. 후에 앤지는 이때 자신의 실수를 마음 깊이 후회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는 없었다. 벤치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터커가 왔고, 일행은 숙소로 이동했다.
"브랜다, 지령은 확인했나?"
"예, 터커씨. 토니는 다음 행선지를 벨기에의 앤트워프로 지시해뒀어요."
"앤트워프라면, 안트베르펜?"
루이스는 짤막하게 물었고, 브랜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터커는 심각한 어조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앤트워프라니… 능력자 전쟁이 벌어졌던 그 도시에 대체 무슨 일로…?"
일행은 머리를 맞대고 연합 참모의 생각을 읽기 위해 고민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일행은 토니의 지령을 따르기로 결정했고, 며칠간의 휴식을 취하고 독일을 거쳐 벨기에로 떠날 계획을 세웠다.
마침내 오스트리아를 떠나기로 정한 날. 일행은 다시금 채비를 단단히 갖추고 발걸음을 옮겼다. 빈에서 독일까지 가려면 제법 먼 길을 가야 했지만 문명의 산물인 자동차라는 탈 것은 그 시간을 크게 단축시켜 주었다. 우마차와 가끔 얻어 타는 자동차는 일행의 중요한 이동수단이었고, 그들의 여정은 도로를 따라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당도한 추격자는 정확하게 도로 가운데를 점거하고 일행을 맞이했다.
"이제야 왔군. 기다리다가 좀이 쑤셔서 혼났다. 네년이 앤지 헌트지?"
허리춤에 칼을 패용한 다섯 사내들. 앤지 일행은 이들이 결코 좋은 의도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눈치 챘다. 누구라도 초면에 칼을 들이대는 사람을 보면 알 수 있을 테니까. 특히 앤지는 쟈크를 잃은 그 밤이 떠올라 무심코 어깨를 움츠렸다. 선두의 검사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흐흐. 보아하니 정답이군. 운이 좋아. 이걸로 최고의 공은 이 벨저가 차지하게 되었군."
터커는 그의 이름을 듣자 흠칫했다. 설마하니 홀든의 검사들이 직접 나서다니. 상정 외의 사태였다. 더군다나 가장 앞에 서 있는, 두 자루의 검을 양 허리에 찬 백발의 사내는 자신을 벨저라고 말했다. 홀든의 직계는 3형제. 그 중에서도 둘째인 벨저의 악명은 연합 내에서도 자자했다. 애당초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전투인원으로 보이지 않을 인원들만으로 구성한 일행이기에 홀든의 검, 특히 벨저의 무력에 당할 도리가 없었다. 터커는 위기감이 가슴을 묵직하게 채우는 것을 느꼈다.
"홀든… 대체 무슨 수로 우리의 행적을 알아낸 건가?"
"멍청한 녀석들. 오스트리아는 홀든의 근거지다. 더군다나 본가가 위치한 빈에서 며칠간 뭉갠 주제에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했나? 이런, 그 정도로 한심해서야 그 유명한 흑염의 자손이라는 사실도 농담인가 보군 그래."
퇴폐적인 목소리로 비꼬는 벨저. 앤지는 굴욕감에 몸을 떨었고, 루이스와 브랜다는 조용히 그녀의 양 옆에 섰다. 무사히 이 자리를 빠져나가긴 어렵겠지. 아직은 어린 일행을 잠시 뒤돌아 본 터커는 마지막 각오를 다졌다.
"루이스, 브랜다. 내가 이들을 막는 사이에 앤지 님을 모시고 도망쳐라. 뒤도 돌아보지 말고! 어서!"
그렇게 외침과 동시에 터커는 벨저에게 몸을 날렸다. 그의 능력인 악력은 쇳덩이에도 깊은 손자국을 남길 수 있을 정도. 조금 다친다고 하더라도 저 칼날을 잡아 우그러뜨린다면 적어도 시간만은 벌 수 있겠지!
하지만 홀든의 쾌검술은 터커의 예상을 아득하게 웃돌았다.
"뭐야? 장난치나? 뭘 믿고 이 몸의 칼 앞에서 날뛴 거지?"
재빠르게 뻗어낸 터커의 오른손 위에서 손가락들이 춤춘다. 터커는 잠시 멍하게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벨저는 어느 새 왼쪽 허리춤의 검병을 잡고 있었지만, 대체 언제 그것을 뽑아들고 다시금 납도했단 말인가?
'칼을 휘두르는 것이… 보이지…않았다.'
얼마나 빠르게 베어내었는지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는 오른손. 하지만 이제 그 손은 역할을 하지 못한다. 터커는 피어오르는 절망을 애써 찍어 누르고 온 몸을 던져 벨저에게 달려들었다.
"하핫! 부나방 같은 놈. 보고 있자니 웃음밖에 안 나온다. 그만 꺼져!"
그것이 터커의 마지막이었다.
벨저는 작정한 듯 양 손에 검을 잡고 춤추듯 움직였고, 그 검이 다시 검집으로 돌아간 순간 터커는 온 몸에서 피를 낭자하게 뿌리며 쓰러졌다. 앤지는 비통함에 가득 차 절규했다.
"안 돼! 터커-------!"
하지만 터커는 이미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죽은 자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니까.
"보아하니 이 녀석 말고는 줏대 있는 놈들이 없는 것 같군. 그럼 마무리를 해 볼까. 이봐, 이 녀석처럼 되기 싫으면 순순히 따라와라."
벨저는 앤지를 바라보며 긴장감 없는 목소리로 선고했다. 아마 그녀가 반항의 의사를 내비치면 순식간에 살기로 물들어 칼을 휘두르겠지. 앤지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일행이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앤지의 두뇌는 해결책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굴러갔고, 마침내 하나의 방법을 찾아내었다. 터커를 잃은 슬픔을 다시 한 번 마음 깊숙이 파묻으면서 앤지는 벨저에게 말했다.
"이봐요, 벨저. 당신, 게임을 좋아하나요?"
"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게임 하나를 제안하죠. 당신, 우리 중의 한 사람과 일기토를 벌여 승패를 정하는 거예요. 당신이 이기면 우리는 순순히 따라가죠. 그리고 우리가 이기면 순순히 보내주는 거예요. 어떤가요?
"공포에 질려서 머리가 잘못되기라도 했나? 내가 왜 그딴 게임을 해야 하는지 이유라도 들 수 있을까?"
여기서 말실수를 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앤지는 자신도 모르게 벨저를 도발했다.
"호오, 듣자하니 홀든 가라면 오스트리아에서 꽤 명망 있는 가문 같은데, 그 정도의 아량도 없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면 왜, 저희들이 두렵기라도? 아니면 실력에 자신이 없는 건가요? 실망이군요. 이 사실을 알면 사람들은 홀든 가의 명성이 거품이었다고 말하겠네요. 후후."
그 자신도 이런 독설을 할 줄 몰랐던 앤지는 내심 비명을 질렀지만, 의외로 벨저에게는 이 도발이 제대로 먹혀들었다.
"이런, 이 조그만 아가씨가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할 줄도 아는군. 놀라운데? 좋아. 그 게임 받아들이도록 하지. 하지만 조건 하나를 더 걸도록 할까?"
"뭐죠?"
"내가 이기면, 추가로 아가씨의 당찬 혓바닥을 받아가겠어. 어때? 괜찮지 않나?"
벨저의 눈이 섬뜩한 빛으로 번들거리며 앤지의 입술을 향한다. 앤지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지만, 지금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좋아. 그 잘난 아량을 베풀어서 잠시간의 시간을 주도록 하지. 누가 날 상대할지 정하고 덤벼라."
오만한 말투였지만 지금은 오만이든 거만이든 벨저의 우위였다. 앤지는 이를 갈면서 루이스와 브랜다를 돌아보았다. 브랜다는 순간기억 능력자. 한번 본 것은 결코 잊지 않지만 전투에는 관련이 없다. 앤지 자신은 완벽한 무능력자. 그렇다면 결국 루이스 외에는 싸울 사람이 없다. 하지만 이 소년의 능력은 얼음의 결정을 만들어내는 것. 이 또한 결코 전투에 맞지 않았다. 대체 이 소년에게 어떤 방법으로 승리를 쟁취해 달라 말할 것인가.
안절부절 못하는 앤지를 보던 루이스는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쥐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앤지 님. 그렇게 불안해하지 마세요. 당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그러니 뒷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세요."
그 모습을 쳐다보는 브랜다의 눈에서 불똥이 튀는 듯 했지만, 브랜다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그것을 까맣게 모르는 앤지와 루이스는 여전히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앤지는 자신도 모르게 루이스에게 말해갔다.
"루이스. 당신은 아직 싸움을 몰라요. 아니, 싸움을 가르친 사람도 없죠.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에요. 저 사람에게 싸우는 방법을 배워요. 마침 아주 좋은 교사가 될 수 있겠군요. 칼날에 몸을 대면 베일뿐이지만, 같은 칼날을 마주하면 튕겨낼 수 있어요. 모방하세요. 그럴 수 있을 때까지 몸을 지켜요. 당신을 믿을게요."
앤지는 이 여정을 시작한 뒤로 자신 안의 무언가가 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의 말도 그녀가 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가슴 속에서 솟아난 어떤 것을 내뱉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루이스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눈을 빛내더니 그녀의 어깨를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벨저에게로 걸어갔다.
"뭐야, 아직 꼬맹이잖아. 이런 이런. 칼에 어린놈의 피를 묻히기는 싫은데."
"…말이 많군. 홀든 가문이란 곳은 잔말이 심한 게 전통인가?"
"하핫? 이거 또 예상 외로 기개 있는 놈이었군. 꽤 맘에 든다. 그러니 철저하게 다져주지! 아, 그리고 너희들은 가만히 있어도 돼. 끼어들면 너희부터 죽여 버린다."
자신의 뒤에 선 검사들에게 경고를 날린 벨저는 순식간에 쌍검을 뽑아들고 쇄도해갔고, 루이스는 결정을 전방에 굳히며 임전태세를 갖추었다.
마침내 칼과 결정이 충돌하는 그 순간, 2차 능력자 전쟁이 남긴 영웅전설(英雄傳說)의 장대한 서곡이 마침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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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적인 공세, 일방적인 수세. 이렇게 표현 가능한 절박한 전투. 벨저는 거침없이 쌍검을 휘둘렀고, 루이스는 전방에 얼음의 결정을 펼쳐내며 필사적으로 방어에 몰두했다. 하지만 상황은 루이스에게 나쁘지많은 않았다.
결정의 능력으로 인해 루이스를 공격할 정도로 접근하면 냉기가 사지를 침범한다. 오랜 시간 그 영역에 있으면 몸이 둔해진다. 의외의 효과였지만, 벨저는 한번 공세를 잡아도 그리 오랜 시간 루이스를 핍박할 순 없었다.
"빌어먹을, 더럽게 춥군. 얼음결정이 뭔가 했는데 이런 방법도 있었군. 거기다 능력으로 만들어서 잘 베이지도 않나? 인정해주지. 아주 핫바지는 아니었구나, 네놈."
벨저의 눈에 흥분이 깃들기 시작했다. 터커가 힘없이 쓰러져 내심 실망하고 있는 그였기에, 나름대로 발악하는 루이스의 분전이 기특하기조차 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승리는 자신의 것이 되겠지. 벨저는 천천히 시간을 들여 루이스를 요리하기로 결정했다. 즐거움의 시간은 길면 길수록 좋으니까.
"사실 한 사람한테 칼을 오래 휘두르는 건 꽤나 오랜만이야. 그러니까 날 좀 더 즐겁게 해 주길 바란다! 혹시 알아? 내가 기분 좋으면 고통 없이 목을 날려 줄지!"
점점 기세를 더해가는 쌍검의 윤무. 마치 물안개가 피어오르듯 퍼져나가는 검광은 루이스의 방어를 천천히 무너뜨려갔다. 결정을 다루는 것도 무한하진 못하다. 하지만 루이스의 스태미나가 다 하기 전에 벨저를 이길 수단을 찾을 수 있을까. 앤지는 손에 땀이 차는 것을 느꼈다. 제발. 이길 수는 없어도, 죽지는 말아줘. 그렇게 끝없이 되뇌는 앤지의 옆에 선 브랜다는 벨저의 움직임을 유심하게 살피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루이스는 착실하게 방어를 굳혔지만 검격을 피해없이 넘기는 것은 불가능했고, 서서히 그 몸에 상흔이 새겨져갔다. 허나 벨저는 그것만으로도 꽤나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오오, 좋군. 분명 싸움이라곤 알지도 못하는 녀석인데 본능적으로 칼이 날아들 곳을 아는 건가? 뭐야, 다들 쉽게 말하곤 하는 '전투의 재능' 이냐? 이거 정말 재밌군. 다듬으면 꽤나 좋은 전력이 될 거야. 이런 원석, 쉽게 찾을 수 없는데 말이지. 연합 놈들 눈이 어두운건 알아줘야 해."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와중에서도 할 말은 다 하는 벨저가 정말로 얄미운 앤지였지만, 그의 말대로 루이스는 점점 더 방어에 익숙해져갔다. 처음과는 달리 전방 모두를 결정으로 감싸지 않아도 방어가 용이해졌다. 즉 벨저의 공격이 점점 눈에 익고, 방어요령이 익숙해져간다는 것. 말이 쉽지만 인생의 첫 싸움에서, 그것도 홀든의 쾌검사를 상대로 그럴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재능'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벨저는 루이스를 반드시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의 공세가 일순 격렬해졌다. 하반신과 상반신을 동시에 공격해 들어가는 쌍검! 비기라고 할 수 있을만한 이 공격에 루이스는 눈 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의 공격과는 다르다. 섣불리 방어했다가는 돌파 당한다. 어떻게 넘겨야 하는가? 루이스의 사고가 가속되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동안 수많은 방법이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이런 자신이 낯설기조차 한 루이스였지만, 그는 최선의 방법을 찾고 곧바로 실행했다.
"뭣?!"
당혹감에 젖은 벨져의 신음. 결코 피하지 못할 일격이었는데, 루이스는 상상을 초월한 속도로 뒤로 빠져나간 것이다. 그 궤적에는, 결정으로 만들어진 레일이 깔려 있었다. 그 위를 고속으로 미끄러져 벨저의 검권에서 몸을 피하는데 성공한 루이스는 자신 또한 조금 얼떨떨한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쳇… 발악하기는. 그래도 반응이 쏠쏠하니 재미있잖아. 점점 널 죽이고 싶어진다! 하핫!"
일그러진 웃음을 터뜨리며 벨저가 달려든다. 하지만, 방금 전의 사고가속을 통해 루이스는 완전히 전투태세로 전환되었다. 아까 앤지 님이 뭐라고 했더라? 그래, '모방'이다. 그렇게만 한다면 최소한 칼날을 마주할 순 있겠지. 지금 이 순간부터야말로 진정한 '결투'의 시작이다!
"이건 또 뭐야? 설마 내 흉내냐? 기분 나쁘군!"
자신의 검이 튕겨나가자 벨저는 씹어뱉듯 외쳤다. 그 검을 튕겨낸 것은, 다름 아닌 루이스의 손을 감싸며 솟아오른 고드름과 같은 결정이다. 양 손에 결정을 뽑아낸 루이스는 방어의 요령과 같이 벨저의 검을 차분하게 튕겨내기 시작했다. 일반인은 눈으로 보는 것 조차 어려운 홀든의 쾌검술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결정의 고드름. 아니, 고드름이 아니다. 벨저의 검과 마주할수록 그 형태는 날카롭게 다듬어져간다. 마침내 그 형상이 '검'이라고 불릴 정도가 되자, 루이스는 전력을 다해 양 손을 휘둘러갔다.
쩌정-!
처음으로 루이스가 벨저에게 공격을 가한 것이다. 벨저는 잠시 얼떨떨한 표정으로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설마 이런 애송이에게 자신이 공격을 허용했단 말인가? 순식간에 혈기가 솟아오른다.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받은 벨저는 노성을 지르며 루이스에게 달려들었다.
"이 노옴!"
그와 대조적으로 루이스는 침착하게 양 손을 놀린다. 두 개로 한정된 결정의 검은 루이스에게 다른 곳에 결정을 쓸 정도의 융통성을 부여했다. 그의 발이 잠깐 잠깐 생겨난 레일을 타고 미끄러지면서 벨저의 검을 피해낸다. 어떻게 보면 당사자인 루이스조차 예측 못하는 동선 때문에 벨저는 헛손질이 잦아졌고, 더불어 주변을 감싸는 결정가루들 때문에 점점 몸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 새 옷에 달라붙어 버석거리는 얼음조각들. 하지만 완전히 눈이 뒤집힌 벨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루이스를 압박해 들어갔다.
연신 마주치며 불꽃과 조각을 튕기는 둘. 루이스의 움직임은 미묘하게 벨저의 리듬을 타고 있었고, 벨저는 미칠 것 같은 분노에 몸을 떨며 칼을 휘둘렀다. 이 빌어먹을 애송이가, 감히 홀든의 쾌검을 흉내 낸단 말인가? 어디서 건방지게!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달리 루이스는 점점 싸움의 흐름이 자신에게 넘어오는 것을 느꼈다. 벨저의 공격은 강하지만 점점 단순해져갔고, 패턴 또한 반복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 속도와 힘은 아직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 다시금 방어 일변도로 태세를 전환한 루이스는 승리에의 길을 찾아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도저히 이길 방도가 보이지 않는다. 벨저의 공세를 뚫고 들어갈 수단이 루이스에게는 없다. 방법은 단 하나, 결정적인 빈틈을 찌르는 것. 짧으나마 단 한순간의 기회만 온다면!
그리고, 그 기회는 브랜다의 외침을 통해 마침내 루이스에게 깃들었다. 브랜다의 능력, 순간기억능력이 마침내 벨저가 반복하던 패턴의 헛점을 찾아낸 것이다!
"루이스, 오른발 밑!"
밑도 끝도 없는 외침이었지만, 극한까지 벼려진 루이스의 본능은 그 말을 번개처럼 이해했다. 오른발을 내밀며 오른쪽 칼을 휘둘러 오는 벨저. 루이스는 그 디딤발 밑에 매끄러운 결정의 판을 순식간에 만들어내었다. 미처 그것을 깨닫지 못한 벨저는 빙판을 밟고 미끄러져 자세가 무너져버렸다.
"이…이게!?"
당혹했지만 이정도로 꼴사납게 무너지진 않는다. 벨저는 억지로 자세를 잡아 몸을 되돌리려 했지만, 루이스는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추위 때문에 몸이 둔해진 벨저는 자신의 생각보다 한 템포 더 늦게 자세를 바로잡았고, 그때는 이미 루이스가 그의 옆을 스쳐가고 있었다. 허나 벨저는 역시 고수. 그 와중에도 오른손의 검을 교묘하게 휘둘러 루이스의 옆구리를 베어갔다. 날카롭게 선 루이스의 감각은 벨저가 휘두르는 검날의 궤적을 선명하게 느꼈지만, 결코 피할 생각은 없었다. 빠르게, 더 빠르게! 마침내 벨저의 검은 루이스의 옆구리를 길게 베어냈고, 동시에 루이스는 벨저를 완전히 지나쳐 그의 등을 점했다. 그리고 그 기세를 살려 팔꿈치로 벨저의 등을 찍어버린다!
"크윽!"
불안정안 자세에서 등 뒤로 강렬한 타격이 들어오자 벨저는 휘청거렸다. 그리고 루이스는 고통으로 불타는 신경을 혹사시켜 다음 수를 펼쳤다. 휘청거리는 벨저의 발 밑 전체에 빙판을 깔고 다시 한 번 그의 발을 걸어 챈다!
"이…이 자식이이이이이이!"
벨저는 최후의 절규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루이스는 몸을 돌려 그 등을 오른 무릎으로 찍어 내리고 결정으로 단단히 고정시켰다. 동시에 양 손의 결정검을 십자로 교차시켜 벨저의 목덜미 위에 꽂아버렸다. 마치 가위를 벌려 찍어 내리듯 말이다. 그것으로 승부는 종결되었다.
"이…이겼어. 앤지 님! 루이스가 이겼어요!"
기쁨에 젖어 외치는 브랜다. 앤지 또한 멍한 표정으로 브랜다가 흔드는 대로 몸을 맡긴다. 정말로 저 검귀에게 승리하다니. 앤지는 눈물이 솟을 것만 같았다. 루이스는 결국 목숨을 걸고 승리를 쟁취한 것이다. 그것도 자신을 위해서. 앤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쓰러져 있는 벨저에게 차갑게 말했다.
"벨저 공자. 승패는 가려진 것 같군요. 어떤가요? 패배를 인정하시겠습니까?"
이를 갈며 뭐라고 외치려면 벨저의 머리를 루이스가 슬쩍 움켜쥔다. 그 주변으로 결정이 모여드는 것을 보니, 섣부른 짓을 했다가는 머리통이 고드름에 꿰여버릴 터. 벨저는 부들부들 떨면서 패배를 인정했다.
"좋다… 내가… 졌다. 내 눈 앞에서 사라져라. 너희들도 가만히 내버려 둬."
"으음? 패배자 주제에 말이 사납군요. 뭐, 게임의 결과에는 승자도 승복해야 하는 법이지요.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부디 평안한 시간되시길."
벨저의 마음을 박박 긁어대는 앤지의 평온한 말. 벨저는 굴욕감에 가득 차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루이스는 그의 손과 발을 단단히 얼려버린 후 브랜다와 앤지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힘 빠진 목소리로 앤지와 브랜다를 재촉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서둘러 이곳을 이탈하죠."
세 사람은 망설이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 등 뒤로 우두커니 선 홀든의 쾌검사들과 바닥에 쓰러져 있는 벨저 홀든을 뒤로 한 채로. 루이스는 상처입고 지쳤지만 마침내 최초의 시련을 극복하고 한 사람의 전사로 새롭게 태어났다. 전설(傳說)의 씨앗은 드디어 싹을 틔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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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차례 위기를 넘긴 일행은 그 이후로는 별 탈 없이 독일을 넘어서 벨기에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 일행을 인도하던 터커가 사라진 빈자리는 컸지만, 앤지는 애써 그 자리를 자신이 채웠다. 루이스와 브랜다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터커에게 많은 의지를 하고 있던 터라 처음에는 굉장히 힘들었다. 하지만 앤지는 그들을 독려하고 위로하며 때론 위엄 있게 지시를 내리며 일행을 이곳까지 이끌어 왔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리더로서의 기량을 성장시켜나갔다. 그 와중에 루이스와 앤지는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에 와서는 꽤나 허물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친밀해졌다.
"이제 저 언덕만 넘으면 앤트워프 시(市)야."
앤지가 지도를 보며 말하자 루이스와 브랜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에는 얻어 탈 우마차나 자동차를 만나지 못해 꽤 오랜 시간 걸어야 했고 그로 인한 피로가 상당했다. 그나마 목적지가 코앞이라는 말을 듣자 힘이 솟아난다. 일행은 언덕을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앤지 님. 앤트워프에 당도한 이후로는 어떻게 할까요."
루이스는 앤지의 의사를 물었다. 그는 앤지를 무리의 리더로서 인정한 것이다. 앤지는 그 믿음에 감사함과 동시에 묵직한 부담도 함께 느끼며 대답했다.
"우선 브랜다가 연락책과 접선하는 게 최우선이겠죠. 그 사이에 우리 둘은 최대한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 있죠. 아니, 왠지 그것도 위험할 것 같군요. 루이스와 저는 시 외곽에서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곳에 자리 잡고, 미안하지만 브랜다가 수고를 좀 해주었으면 해요. 괜찮겠나요?"
"…그러죠. 어차피 연락책과 접선하는 신호를 가진 것도 저 뿐이니까요."
최근 들어 브랜다는 점점 더 어두워져갔다. 하지만 앤지는 자신과 일행을 무사히 챙기는 것도 버거웠던 때였기에 미처 브랜다의 상태를 헤아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치명적인 가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일행은 앤트워프 시에 당도했다. 루이스와 앤지는 계획대로 시 외곽에 자리 잡았고, 브랜다는 홀로 접선지역으로 향했다.
"오래 걸리네요. 브랜다는 괜찮을까요…"
"괜찮을 겁니다. 그녀는 보기보다 강하니까요. 요즘은 좀 힘들어하지만…"
"그러고 보니 브랜다와 루이스에 대해 제가 별로 아는 게 없군요. 허락하신다면, 조금 알 수 있을까요?"
"…특별한 건 없습니다. 그래도 궁금하시다면, 브랜다가 올 때까지 몇 가지 얘기해 드리죠."
벤치에 걸터앉은 채로 루이스는 과거를 잠시 회상했다.
영국 런던 외곽의 한 서점.
고서적을 주로 취급하는 이 한가한 점포의 주인은 인상 좋은 노인이었지만 주로 일하는 사람은 젊은 종업원이다.
아직 스물이 되었을까 의심되는, 젊다 못해 어려보이는 소년. 짙은 회청빛 머리칼에 녹슨 쇳조각을 연상시키는 검붉은 눈동자. 어딘지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 소년은 투박한 디자인의 앞치마를 걸친 채 서점 안의 먼지를 털고 있었다. 대충 하는 것 같아도 구석구석 꼼꼼하게 지나가는 먼지떨이의 움직임은 달인의 그것을 연상시켰다. 소년의 먼지 제거 작업을 멈춘 것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루이스. 어디 있어? 루이스!"
그 목소리를 들은 소년은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적당한 책 두 권을 꺼내들고 입구로 나아갔다. 이 서점에서 유일하게 햇빛이 비치는 계산대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루이스의 유일한 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여성이었다. 화려한 금발과 푸른 눈의 영국 미녀는 루이스를 보자 반갑게 웃으며 다가왔다.
"또 안쪽 구석에서 먼지랑 놀고 있었니? 오늘같이 화창한 날은 드무니까 햇빛을 좀 받아야지. 그러면 너도 좀 활력이 날 거야. 자, 나가보자."
미처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녀의 손에 잡혀 끌려 나가는 소년. 익숙한 일인지 별다른 거부의 몸짓 없이 조용히 밖의 벤치까지 당도했다. 점주인 노인 또한 빙그레 웃으며 두 남녀를 배웅할 뿐. 바깥은 그녀의 말마따나 영국의 날씨 치고는 드물게도 햇빛이 화창한 날이다. 밖에서 책을 보기엔 더할 나위 없는 조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낀 소년은 벤치에 자리 잡은 여성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꺼내온 책 중 한권을 그녀에게 건네었다.
"오늘은 루이스가 어떤 책을 가져왔을까. 기대되는걸."
환하게 웃으며 책을 펼치는 그녀를 본 소년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책을 펼쳐들었다. 그리고 조용한 독서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서너 시간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책에 빠져드는 두 남녀는 어쩐지 괴상한 느낌을 풍겼지만, 이 두 남녀에게는 근 1년간 지속해온 자연스러운 시간이었다.
루이스라는 이름의 소년은 부모가 없었다. 정확히 말해서는 철이 들었을 때부터 이 고서점의 주인이 그의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성도, 태생도 모르는 루이스를 거둔 노인은 선량했지만, 그 또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왔기에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는 잘 몰랐다.
루이스의 유년기는 고요하게 가라앉은 시간의 퇴적물, 즉 책들과 겹쳐 있었고 내성적인 성격이 어우러져 오로지 책 말고는 관심이 없는 소년으로 성장해버렸다. 노인은 자신의 실수를 통감했고, 궁여지책으로 점원 일을 하면서 사람을 상대하게 하면 조금 나아질까 싶어 그에게 일을 맡겼다. 결과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결국 루이스는 낯을 심하게 가리는, 책에만 관심을 가진 소년으로 자라났다. 사실 그렇게 된 이유에는, 루이스가 자신의 능력을 억지로 숨겨온 것도 한몫 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외진 고서점에 한 손님이 찾아왔다.
"여기, 아무도 없나요?"
안쪽에서 책을 읽던 루이스는 간만의 손님을 맞아 카운터로 나왔다. 그리고 그 손님을 마주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아… 찾으시는 책이 있습니까?"
자신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평소에 결코 먼저 말을 거는 일이 없는 루이스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손님은 루이스에게 책 제목을 말해 주었고, 그 책을 본 기억이 있는 루이스는 어렵지 않게 책을 가져다주었다.
"어머, 설마 했는데 정말로 이 책이 있었구나! 런던 시내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는데, 고마워요!"
활짝 웃으며 루이스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손님. 그 날도 드물게 화창한 날씨였다. 마침 가게 안으로 파고든 빛살이 손님을 후광으로 감싸듯 밟혀주었다. 사금을 녹여내 뽑은 듯 한 아름다운 금발. 반짝이는 청안. 루이스보다 두어 살 더 많아 보이는 여성. 루이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그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얼어붙어버렸다고 생각한 심장이, 그 순간 세차게 약동하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이 손님은 꽤나 자주 서점을 찾아왔다. 그 횟수만큼이나 루이스는 손님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마, 이 손님 또한 루이스를 특별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루이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 자신이 능력자란 것을 먼저 밝히진 않았을 테니까.
"루이스, 그것 알아? 능력자(Cypher)란 사람들은, 사실은 굉장히 가까운 곳에 있는 거."
그 말에 루이스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결코 그런 기미를 비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아챈 것일까?
흠칫 몸을 굳힌 루이스를 눈치 채고는 쓰게 웃는 여성. 그리고 그녀는 숨겨왔던 자신의 능력을 밝혔다.
"사실, 난 능력자야. 순간기억능력. 한번 본 것은 결코 잊지 않고, 언제든지 다시금 기억해 낼 수 있어."
루이스는 그 말을 듣고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내가 능력자인 것을 눈치 챈 것이 아니었구나.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녀가 능력자란 것은 놀랄 일이었다.
"브랜다, 왜 그걸 나한테 말한 거죠?"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루이스. 어쩌면, 어쩌면 그 또한 지금까지 숨겨왔던 마음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도. 그렇게 생각하자 브랜다의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천년, 만년같이 느껴졌다.
"딱히… 이유는 없어. 그냥, 루이스에게는 전부 말하고 싶은 걸. 왜, 그러면 안 돼?"
생긋 웃으면서 말하는 브랜다. 루이스는 그 미소에 저항할 수 없었다. 마음을 굳힌 루이스는 지금껏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능력'을 펼쳤다.
"어머? 이게 뭐지? 눈?"
계절에 맞지 않은 눈송이가 브랜다의 머리 위로 흩날렸다. 브랜다는 있을 수 없는 일에 눈을 크게 떴고, 옆에 앉은 루이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루이스의 손 위에서 노니는 결정 조각을 보았다.
"루이스… 설마, 너도?"
"맞아요. 저도 능력자예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전 이렇게 얼음 결정을 다룰 수 있어요."
생에 가장 큰 비밀을 공유하게 된 두 남녀. 이로서 둘은 더욱 가까워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인' 이라고 부를 정도로 발전했다. 그때 즈음엔 브랜다가 지하 연합의 소속으로 활동하는 것까지 밝혔고, 그녀의 제안으로 루이스 또한 연합에 적을 두었다. 하지만 둘의 일상에 변화는 없었다. 연합은 자급자족의 원칙을 내세우고 있었고, 루이스와 브랜다는 전투인력도 아니었으니까. 둘은 각자의 생계를 유지하며 지금까지 살아왔고, 아마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지금 실행되는 연합 최후의 작전, [플랜 디코이]의 발동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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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그랬구나…"
앤지는 가슴이 먹먹해져 더 이상 말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앤지에게 너무나 눈부셨다.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앤지의 마음 깊은 곳에 어둠이 자라나는 것만 같았다. 자신도 쟈크와 함께 했다면 이 연인처럼 서로를 위하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다행히 그 이상 어두운 생각이 자라나기 전에 브랜다가 등장했다.
"아, 브랜다. 왔군요."
"예. 접선은 마쳤어요. 그런데 조금 이상해요. 따로 내려온 지령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럴 리가 없는데…"
어두운 표정으로 말하는 브랜다의 얼굴에는 어쩐지 어색한 딱딱함이 어려 있었다. 앤지는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지만 딱히 꺼내어 말하진 않았다. 지금은 서로 믿어주지 않으면 위기를 해쳐나갈 수 없으니까.
"설마… 연합 내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브랜다, 지부의 상황은 어땠어?"
"거기도 혼란스러워. 지령이 없다고 듣고는 그대로 쫓겨나왔을 정도니까."
루이스와 브랜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어디로 행로를 잡아야 한단 말인가. 루이스는 자연스럽게 앤지를 돌아보았다. 무리의 리더는 이제 앤지니까. 루이스는 앤지에게 의견을 구했다.
"앤지 님. 여기서 계속 있을 순 없습니다. 앤트워프 시로 들어가서 좀 더 정보를 수집하던가, 아니면 다른 곳을 찾아 떠나던가.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앤지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거는 루이스를 쳐다보는 브랜다의 눈이 위험할 정도로 빛난다. 그리고 앤지를 슬며시 노려본다. 물론 앤지와 루이스는 이것을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그리고 파국을 알리는 전조가 일행의 사이로 찾아들었다.
"너희들, 능력자인가?"
그들이 등을 기대고 있던 건물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 셋은 흠칫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신들의 사방을 점거한 여섯 명의 남자들을 볼 수 있었다. 남자들은 카키색으로 이루어진 복장을 갖추었는데, 어딜 봐도 군인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들의 손에는 각자 소총들이 쥐어져 위협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당신들은 누구죠? 정체를 밝히세요!"
앤지가 나서서 고압적으로 외쳤다. 본능적으로 기세에서 밀리면 안 된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우리는 앤트워프의 시민들이 고용한 용병들이다. 내 이름은 발터. 이곳의 안전과 치안을 책임지는 입장이지. 다시 한 번 묻겠다. 너희들, 외부에서 온 능력자인가?"
담담하게 말하는 남자. 아마 그가 무리의 대장인 것 같다. 다른 다섯 명은 숨길 수 없는 전의를 드러내는 데 반해서 그 혼자만이 평온한 기도를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앤지는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받아쳤다.
"능력자인 것도 맞고, 외부에서 온 것도 맞아요. 하지만 우리는 아직 앤트워프 시에서 머물지 말지도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희를 이리 핍박하다니, 이게 무슨 짓인가요?"
그러자 대장으로 보이는 이는 한번 피식 웃더니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다른 다섯 명이 눈을 빛내며 소총을 추켜올렸다.
"너희들이 테러 분자라는 제보가 시에서 접수되었다. 능력자 전쟁으로 큰 상처를 받은 이 도시의 시민들이 불안에 떨게 할 순 없지. 반항하지 않기를 바란다. 조용히 잡혀서 며칠만 감금되어 있으면 시민들도 불안감을 떨칠 수 있을 거다. 그러니 협조하기 바란다."
이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그들은 앤트워프 시, 더불어 벨기에 자체에 발을 들이는 것이 처음이다. 그런데 테러라니? 대체 무슨 수작이 있었던 걸까? 앤지는 당황했지만 최대한 차분하게 응수했다.
"동의할 수 없군요. 저희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고, 그런 일을 할 계획도 없어요. 그러니 순순히 따라갈 이유도 없지요. 자, 루이스."
마지막 말에 루이스는 재빨리 상황판단을 마쳤다. 시 외곽의 숲. 탈출로는 그곳뿐이다. 루이스는 지체하지 않고 결정의 레일을 깔았고, 브랜다와 앤지를 양 팔에 껴안고 미끄러져갔다. 6명의 용병들은 창졸간에 일어난 상황에 신속하게 대응하려 했지만, 전투상황을 상정해두지 않았기 때문에 숲 속으로 사라져가는 루이스의 등을 노려볼 수밖엔 없었다. 발터는 이를 뿌득 씹고는 동료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존, 프란츠. 둘이 페어를 짜서 선발대를 선다. 저들의 흔적을 추적해라. 네드, 콜리오, 파비안. 셋은 후방에서 지원을 맡는다. 나는 중진에서 전황을 살피고 지시를 내리겠다. 자, 출발하자."
6인은 재빠르게 진형을 짜서 숲 안으로 달려갔다. 그 과정이 군더더기 없고 신속하다. 군인으로서 초일류로 보이는 이 6인.
앤지는 몰랐지만 이들은 능력자 세계에서도 꽤나 명성을 날리고 있는 앤트워프 6인방이었다. 후에 1차 능력자 전쟁이라고 이름 붙여진 분쟁에서 큰 상처를 입은 앤트워프의 시민들이 자구를 위해 고용한 프로 용병들. 6인의 정밀한 합공은 설사 에이스 능력자라고 해도 버텨내기 어려울 정도라고 했다. 대체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홀든의 검사 이후로 다시금 앤지 일행에 위기가 찾아든 것이다.
그와 동시에 지금껏 침묵하고 있던, 2차 능력자 전쟁이 노래하는 영웅전설(英雄傳說)이 다시금 시작되었다.
능력자 세계가 존속하는 한 결코 잊힐 리 없는 위업. 루이스와 앤트워프 6인방의 결전이 역사의 환호와 함께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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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으로 피신한 일행은 이후의 작전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우선 앤지가 루이스에게 물었다.
"루이스, 당신 총기류에 대해서 얼마나 파악하고 있나요?"
"따로 알아 본 기억은 없습니다."
"제가 알아요. 간단히 설명해드리죠."
브랜다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과연 순간기억능력자. 그녀의 기억에서 총기류에 대한 정보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6인의 무장에 대해서도 상세한 설명을 곁들인다.
"과연, 다행히 기관총이란 건 없는 거군요. 적어도 첫 한발을 조심하면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겠죠."
문제는 그 한발을 피할 수단이었지만, 앤지는 그 사실을 애써 무시했다. 사실 소총 말고도 문제는 산적해 있다. 수류탄이라 불리는 폭탄, 단검들. 그리고 확인되지 않은 또 다른 무장의 존재확률. 그에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은 루이스의 결정능력 하나뿐이다. 어떤 방법으로 이 위기를 타개해야하는가.
"미안해요, 루이스. 제가 그때 쓸데없는 조언을 한 바람에 당신의 능력은…"
앤지는 죄책감에 젖어 루이스에게 사과했다. 기실, 결정을 다루는 능력은 근접전에는 조금 어울리지 않았다. 원거리에서도 결정을 생성할 수 있는 만큼 그 능력은 후방의 지원에 좀 더 특화되어 있겠지. 하지만 백지와도 같았던 루이스에게 첫 전투가 남긴 흔적은 지울 수 없는 그림이 되어버렸다. 그의 전투논리는 결정검 두 자루를 활용한 근접박투에 물들어 있었고, 지금은 그것이 완전히 정착하여 지울 수도 버릴 수도 없게 된 것이다.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앤지 님. 당신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우린 오스트리아에서 전부 죽었겠지요. 그것이 최선이었습니다."
루이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은 앤지가 이 무리의 리더. 리더가 흔들렸다가는 조직의 안위가 불투명해진다. 앤지는 루이스의 일갈로 그것을 간신히 파악했고, 자신을 다시금 다잡았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루이스, 저는 이런 숲 속에서의 전투에선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어요. 보아하니 저들 또한 저희를 굳이 죽일 생각은 없겠죠. 그럼 저와 브랜다가 미끼가 되겠어요. 비무장에 반항하지 않는 여자들에게 먼저 총을 쏠 정도로 무뢰한은 아닐 거라 믿어보죠. 저들이 우리를 추적하는 동안, 루이스 당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겠어요."
앤지는 루이스에게 가혹한 지시를 내렸다. 이 깊은 숲속에서 6명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다니. 하지만 지금은 그 수가 최선이었다. 루이스는 굳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숲 속으로 사라졌다. 앤지와 브랜다는 그 등 뒤로 무운을 빌어 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그녀들 또한 숲의 안쪽으로 파고들어갔다. 루이스에게 승리를 가져다주기 위해.
선발대를 맡은 존과 프란츠라는 사내는 눈이 밝고 행동이 기민한 편이었다. 물론 그렇기에 리더인 발터가 이들을 전면에 세운 것이지만.
처음 흔적을 발견한 사람은 프란츠였다. 그는 존에게 조용히 수신호를 보내고 정지했다. 다가온 존에게 몇 가지를 속삭이고는 곧바로 흔적을 쫓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프란츠는 목표물의 꼬리를 잡을 수 있었다. 검은 머리의 여자. 저 테러집단의 리더로 파악된 여자다. 프란츠는 가볍게 미소 짓고 그 뒤를 밟았다. 사냥꾼으로서 냉혹한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프란츠는 자신이 사냥감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빌어먹을!'
미친 듯이 뇌리를 울리는 경고. 세계대전에서 갈고닦은 전투감각이 비명을 지른다. 지금 어디에선가 자신을 노리는 눈길이 있다. 몸을 피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옆의 수풀로 몸을 날리려고 했고, 그것이 곧 바로 프란츠의 실책이 되었다.
"뭐얏?!"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공포에 질려서가 아니다. 프란츠는 일류의 군인으로서 자신의 정신상태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던 기계적으로 행동을 수행할 수 있도록 단련되었다. 발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꽤나 단순했다. 그의 발이 지면에 얼음으로 달라붙어버린 것이다.
'젠장… 능력!'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프란츠의 정면 바닥에서 빠르게 솟아오른 얼음뭉치가 그의 양 무릎을 강타했다. 프란츠는 자신의 무릎이 부서지는 것을 느끼며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동료들에게 위기를 전파하기 위해서. 이들은 자신을 사냥할 정도로 주도면밀한 강적이라고!
"…운이 좋았던 건가."
처음 써보는 기술이었지만 다행히 성공적으로 먹혔다. 앤지의 사과에서 느낀 바가 있어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도 적을 공격할 만한 수단을 생각해 놓았는데, 그것이 효과를 본 것이다. 루이스는 기동력을 상실한 프란츠를 내버려 두고 다시금 깊숙한 수풀 속으로 사라져갔다.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이건… 프란츠의 목소리! 당했나?"
중진에 위치한 발터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능력자라고는 하지만 총알 앞에서는 어지간한 능력자들 또한 당해내지 못한다. 세계대전에서 숱한 전투를 거친 이 군인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꽤나 많은 능력자들을 처치하기도 했다.
"멍청한 녀석. 얼마간 편하다고 무뎌진 건가."
혀를 찬 발터는 수색작업을 재개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놀라운 광경을 목도하고 말았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허어."
발터 또한 노련한 야전군인. 하지만 인간이 산 채로 얼음에 갇혀있는 꼴은 보기 드문 광경이 틀림없다. 발터의 눈앞에는 단단하고 투명한 얼음 안에 갇혀서 눈을 굴리는 존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엄청나게 섬뜩한 광경이었다.
발터는 시험 삼아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얼음덩어리를 쳐 보았지만 얼음가루만 조금 깎아내었을 뿐이었다. 발터는 존을 구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를 방치하기로 했다. 군인들의 대장다운 신속하고도 가차 없는 결단이었다.
"그 안에 있는 게 차라리 안전하겠지. 놈들이 우리를 죽일 마음은 없는가보군. 존, 내 말이 들리나? 잠시 거기서 쉬고 있어라. 놈을 잡아서 그 감옥을 해제하는 수밖에는 없을 것 같으니."
다만 발터는 지속적으로 체온을 빼앗긴 존의 의식이 점차 희미해져 간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이윽고 존은 의식을 잃고 암흑 속으로 가라앉았다.
발터는 후방의 3인에게 다가가 새로운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선발대 2명이 당했으니, 좀 더 근접전에 능한 파비안과 자신이 선발대의 역할을 수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절대 두 명이 떨어지지 않도록 당부했다. 존의 끔찍한 모습을 전달하면서 말이다.
그 시간, 브랜다는 순간기억능력을 최대한 활용해서 다시금 숲의 입구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은 '원군'들에게 속으로 거친 욕설을 내뱉고는 표식을 남기고 다시 숲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투를 지속해야 한다. 그리고 살아남아야지. 여기서 죽어버려서야 본말이 전도될 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브랜다는 후방의 네드와 콜리오를 발견했다. 그렇지만 주변에 루이스는 없는 듯 했다. 브랜다는 입술을 깨물고 그들을 도발하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저들과 '약속'이 되어있으니 잡히더라도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브랜다는 둘에게 주변의 자갈돌을 마구 던졌다.
네드와 콜리오는 후방으로부터 돌멩이가 날아들자 본능적으로 두꺼운 성목을 엄폐물삼아 은신했다. 하지만 날아드는 것이 고작 돌멩이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은밀하게 수풀 사이를 이동했다. 브랜다는 그 움직임을 미처 눈치 채지 못했지만, 이 자리에 계속 있다가는 위험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주저 없이 몸을 돌려 달아났다. 네드와 콜리오는 그 뒤를 쫒아 추적을 개시했다.
그 시간에 루이스 또한 네드와 콜리오의 뒤를 조심스레 추적하고 있었다. 브랜다가 그 둘을 자극한 덕분에 신경이 쏠려 꽤나 대담하게 뒤를 밟을 수 있지만 그 둘을 상대할 방법을 생각하니 꽤나 난감해졌다. 고민할 시간은 별로 없다. 루이스는 둘의 뒤를 밟는 와중에서도 사고를 확장시켰고, 하나의 수단을 손에 넣었다.
전투의 시작 전에 브랜다에게 들었던 각종 총기류에 대한 설명. 거기서 하나의 힌트를 얻어낸 것이다. 근거리에서 다수의 탄자를 흩뿌려 넓은 살상범위를 가지는 산탄총(散彈銃). 그 형태를 재현할 수만 있다면 저 둘을 중거리 정도에서 제압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루이스는 그 형태를 구현하기 위해 머릿속으로 끝없는 시뮬레이션을 거쳤고, 마침내 그 형태를 확립했다. 이제는 실전에서 확인해야만 할 때다.
긴장을 풀기 위해 심호흡을 하고, 곧 바로 네드와 콜리오의 등 뒤로 결정의 레일을 깐다. 오른팔에는 새로운 기술을 준비하고, 루이스는 거침없이 레일 위를 미끄러져나갔다.
네드와 콜리오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위험한 예감에 총구를 돌리며며 몸을 반전시켰다. 충분히 빠른 반응이었지만, 이미 늦어버린 반응이 되어버렸다.
그들이 채 몸을 젖히기도 전에 루이스의 오른팔이 그들을 향한다. 왼손은 오른손목을 굳건히 움켜쥐어 조준을 견고히 다진다. 루이스는 오른 어깨에서부터 여러 조각의 결정을 고속으로 추진시켜 오른 손바닥으로 인도했다. 나선을 그리며 오른팔 위를 질주한 결정조각들이 손바닥에 모이는 순간, 그것을 강제로 충돌시킴과 동시에 손바닥에 조금 모아둔 결정을 폭사시킨다!
충돌로 인해 잘게 부서진 결정조각들이 작약의 폭발과 같은 추진력을 얻고 전방으로 비산했다. 그야말로 산탄총의 형상. 지근거리에서 터져 나온 결정조각의 쇄도에 네드와 콜리오는 미처 대응하지 못했다. 콜리오는 관자놀이에 꽤 커다란 결정조각을 얻어맞고 실신해버렸고, 전신을 강타당한 네드 또한 고통에 움찔거리며 바닥을 기었다. 루이스의 도박은 다행히도 성공으로 마무리 된 것이다. 루이스는 네드의 손발을 결정으로 묶었다. 이걸로 남은 적은 둘.
브랜다는 어느 새 루이스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루이스는 기술의 반동으로 오른 상박 전체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컨디션이 점점 추락하고 있는 것도. 앤트워프 시 까지 꽤 오랜 시간 걸었고, 얼마 쉬지도 못한 채 숲 속을 헤메이며 전투를 벌였다. 아직은 소년티를 벗지 못한 이 청년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지만 그에게 쉴 틈이란 없었다. 4명을 각개격파 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나머지 두 명은 결코 쉽게 당해주지 않겠지. 루이스는 미간을 접히며 나머지 둘을 찾아 달려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지막 둘을 찾을 수 있었지만, 루이스는 곤혹에 빠져들었다. 이들은 어느 새 자신의 접근을 눈치 채고는 자신이 숨는 곳마다 총알을 박아 넣었다. 드문드문 던져지는 수류탄 또한 큰 위협이 되었다. 다행히 직격은 당하지 않았지만, 소총의 초탄이 오른팔에 스치고 말았다. 급하게 결정으로 틀어막아 혈액의 유출은 방지했지만 기껏 만들어낸 새로운 기술은 이래서야 써먹을 수 없다.
루이스는 이를 갈며 타개책을 강구했다. 하지만 엄폐물에 몸을 가리고 사격을 가하는 저 둘에게 접근할 유효한 수단이 없다. 결정 레일을 미끄러지는 수단은 훌륭한 방법이었지만, 저들에게 그렇게 접근하다가는 벌집이 되기 딱 좋겠지. 특히나 저 수류탄이라는 폭발물은 정말 위험하다. 잠시 찾아온 소강상태를 틈타 루이스도 아름드리나무 뒤에 숨어서 생각에 잠겨들었다.
발터는 미칠 지경이었다. 어지간한 능력자는 코웃음 치면서 상대할 수 있는 자신들이 홈그라운드라고 할 수 있는 앤트워프 인근에서 이토록 고전하다니. 눈치를 보아하니 네드와 콜리오는 이미 당한 듯 했다. 이정도로 총성과 폭음이 울려 퍼졌는데 지금까지 당도하지 않은 것을 보면 거의 확실했다.
'빌어먹을. 그 년이 손쉽게 잡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니, 이게 무슨 꼴인가!'
분개하는 발터. 그가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작은 인기척이 루이스가 숨은 곳으로 다가가는 것을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전투의 분수령이 되었다.
"…앤지! 당신 왜 이런 곳에!"
소리 죽여 외친다는 기괴한 짓을 성공시킨 루이스는 미처 존댓말을 할 정신도 없이 앤지를 다그쳤다. 총탄이 난무하는 이 위험지역에 찾아오다니. 대체 무슨 짓인지. 하지만 앤지는 동요 없는 표정과 목소리로 루이스에게 말했다.
"아까부터 보고 있었어요. 당신이 저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맴돌 때부터."
"그렇더라도 당신이 도와 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저는 당신을 지켜야만 해요. 그러니 어서 몸을 피하세요. 저들은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겠습니다."
"알아요. 당신은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겠죠. 하지만 그래도 시간은 필요해요. 제가 시간을 버는 사이, 당신은 타개책을 마련해 주세요. 알겠나요?"
"위험합니다. 당신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연합의 차기 수장입니다. 스스로를 더 소중히 하세요!"
"그런 백일몽 같은 지위, 지금은 아무 소용없어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건 승리와 생존. 이 두 가지 아닌가요? 당신과 브랜다, 그리고 제가 살아남아 이 숲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시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도 모자랄 정도예요. 루이스. 다시 한 번 말할게요. 당신이 절 수장으로서 인정할 생각이 있다면, 나에게 승리를 가져다 줘요. 전 그것을 위해 얼마든지 적의 앞에 나설 수 있어요. 당신을 믿으니까요."
루이스는 이 거대한 신뢰에 더 이상 토를 달 수 없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앤지가 저들의 주의를 끌면 어떻게든 방법이 생길지도 모른다. 루이스는 이를 악물고 앤지의 작전에 찬성했다. 이제 모든 것은 루이스가 승리에의 방법을 도출하는 것뿐이다. 루이스는 모든 방법을 검토했고, 앤지는 그 사이에 양 손을 들고 발터와 파비안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
"멈춰라!"
발터의 날카로운 외침. 앤지는 경고대로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시간을 끌기 위해 발터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항복하겠어요. 쏘지 마세요. 제발…"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녀의 성악가로서의 재능이 모처럼 빛을 발했다. 풍부한 감정이 담긴 목소리는 공포를 절절히 담아내었고, 발터와 파비안 또한 저 여자가 정말로 항복하기 위해 나온 걸로 착각할 뻔했다. 하지만 발터는 자신을 채찍질하고 그녀의 접근을 불허했다.
"항복? 좋다. 하지만 너 혼자만의 투항은 믿을 수 없지. 다른 놈들은 어디 있나?"
"그들은 전부 저를 버리고 도망쳤어요. 이제 저 혼자 뿐이에요. 그러니 차라리 항복하는 게 목숨이라도 건사할 길이겠죠. 제발, 살려주세요."
애절한 목소리는 두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루이스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평범한 일반인으로서 살아 온 그녀가 죽음의 위기를 넘기고, 지금은 총구 앞에 아무런 방비 없이 몸을 들이대고 있다. 오로지 승리를 위해서. 루이스는 그녀가 연합의 수장으로서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새로운 수장을 위해 모든 것을 던져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조직의 상관으로서가 아닌, 앤지라는 한 인간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였다.
문득 루이스는 자신의 어릴 적 심상을 떠올렸다. 지금 이 순간 왜 그것이 떠올랐는지는 그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다. 아마 그 장면은 어떤 책에서 읽었던 장면이라고 기억한다. 혹한의 지대. 기온이 결코 0도 이상으로 오르는 일이 없다는 얼음의 대지. 어린 루이스는 그 구절을 책에서 읽고는 어딘가 굉장히 친숙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장면을 마음속에서 끝없이 그려나갔다. 얼음, 눈, 그리고 눈, 다시 얼음. 오로지 그것만이 존재하는 순백의 성역. 어린 루이스에게는 마음속의 풍경에 매료되었다. 그 집착을 떨쳐낸 것은 것은 브랜다가 그에게 다가오고 나서였다.
브랜다를 생각하니 잠시 웃음을 지을 수 있다. 그래. 앤지만이 아닌 그녀를 위해서도 지금은 이겨야만 하는 때다. 루이스는 왜 어릴 적의 심상풍경이 갑자기 떠올랐는지 알 수 있었다. 앤지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기 위해서다. 그렇게 생각하니 머릿속이 환하게 밝혀졌다.
그러고 보니 저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길이 단 하나 있지 않은가. 왜 지금까지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루이스는 유쾌함마저 느끼며 결정의 레일을 깔아나갔다. 길게. 충분히 가속도를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적절한 길이와 각도의 레일이 깔리자 루이스는 질주를 시작했다. 이제 건곤일척의 승부를 걸 시간이다!
발터와 파비안은 정면의 앤지에게 신경이 쏠린 나머지 하늘 위를 미처 쳐다보지 못했다. 루이스는 경사 진 레일 위를 질주, 그 기세를 살려 점프하여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날아 든' 것이다!
두 사람은 뒤늦게 총구를 들어올렸지만 이미 자세를 잡은 루이스는 능력을 전개하고 있었다. 미처 그들이 공격행위를 취하기도 전에 루이스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전부… 얼어버려!"
루이스의 능력이 허락하는 한계까지, 그의 주변으로 먼지만큼 작고 극도로 저온인 결정핵을 생성하여 퍼뜨린다. 크기는 작지만 루이스의 전력을 다해 온도를 낮춘 결정핵의 냉기는 범위 안의 공기 중으로 전도되며 일대의 기온을 강제로 끌어내렸다. 그 서슬 퍼런 기세에 공기 중의 수분이 동결되어 공중에 거미줄 같은 살얼음이 끼어갔다. 마침내 능력의 전개를 멈춘 루이스는 자신의 시도가 먹혀들어간 것을 볼 수 있었다.
장관이었다. 루이스의 능력이 닿은 범위 안쪽은 공중에 얼어붙은 살얼음으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그의 마음 속 풍경과도 같은 이미지. 능력의 간섭이 멈추자 외부의 공기로부터 열기가 스며들며 살얼음들을 다시 녹여나갔다. 잠시 동안 강림한 영구동토(永久凍土)는 흔적도 없이 소멸되었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냉각을 강요당한 두 사람은 심각한 동상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더 이상 싸울 수는 없을 거다.
루이스는 마침내 앤트워프 6인방과의 전투를 승리로 장식했다. 그 영광은 오롯이 그들을 위해 빛날 것이다. 그래야만 했는데.
파국은 미처 준비하지도 못한 순간에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그리고 루이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야 말았다. 아직 시련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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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그 순간 브랜다가 수풀을 헤치고 나타났다. 그녀는 정황을 살짝 살피고서는 루이스에게 다가갔다.
"끝난 거야, 루이스?"
"아, 브랜다. 무사했구나."
루이스는 지친 목소리로 브랜다를 맞이했다. 위험요소가 전부 제거되었다고 생각하자 루이스의 긴장이 탁 풀린 것이다. 브랜다는 그런 루이스이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안타까운 몸짓, 위로의 손길. 그 모든 것이 연인으로서의 애정을 나타내었지만, 브랜다에게는 불행하게도 발밑에 쓰러진 발터는 꽤나 근성이 있는 남자였다.
"너… 이 빌어먹을 년…!"
설마 발터가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브랜다는 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발터의 입을 잽싸게 막으려 했지만 발터의 외침이 한 발 앞섰다.
"우리를 속였구나! 별 탈 없이 잡을 수 있는 놈들이라고 그렇게 장담하더니…!"
결국 튀어나온 발터의 고함. 브랜다는 파랗게 질렸고, 앤지와 루이스는 발터의 외침이 일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것도 잠시, 앤지는 순식간에 상황을 이해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위험상황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지체 없이 루이스의 팔을 잡아끌었다.
"루이스!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요! 느낌이 좋지 않아요. 서둘러요!"
루이스는 앤지의 손을 뿌리쳤다. 그 눈은 브랜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루이스 또한 브랜다의 배신을 머리로는 이해했다. 하지만 믿고 싶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브랜다에게 눈빛으로 묻는 것 밖에 없었다. '대체 왜?'
그 강렬하고도 애달픈 눈길에 안절부절 못하던 브랜다의 표정이 일순 표독해졌다. 그리고 미처 손을 쓸 사이도 없이 발터의 목덜미를 즈려밟았다. 뼈가 어긋나는 불쾌한 소리와 동시에 발터는 즉사했다. 잠시 씨근덕거린 그녀는 결심한 듯 싸늘한 목소리로 외쳤다.
"제길, 이건 다 너와 저년 탓이야! 난 잘못한 게 없어!"
갑자기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루이스와 앤지는 얼떨떨해졌다. 브랜다는 모든 것을 포기했는지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패닉에 빠져 절규하는 그녀에게는 광기마저 엿보였다.
"루이스! 넌 나만을 바라봤어야 해. 넌 내거야. 영혼 한 점, 뼈 한 조각 까지도! 그런데 저 씹어 먹을 년이 너한테 꼬리를 쳤지! 그래, 그건 좋아. 넌 정말 멋진 남자니까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넌 저 년에게 눈길을 돌렸지. 감히 나를 버려두고! 용서할 수 없어. 알겠어? 이건 다 너희들이 눈이 맞은 탓이야! 인과응보라고! 호… 호호호… 호호호호홋!"
소름끼치는 웃음소리를 내뱉는 브랜다는 과연 그들이 알던 그 브랜다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루이스는 너무나 큰 충격 때문에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고, 앤지 또한 입술을 깨물며 마음을 다스렸다. 방금 전부터 계속 신경을 거슬리던 감각이 점점 더 심해진다.
"자, 루이스? 이제 그 년을 버리고 나에게로 와. 어차피 그 년은 살아남기 글렀어. 설마 여기까지 버틸 줄은 몰랐는데. 후후, 그것도 이젠 끝이지. 곧 회사의 사람이 올 거야. 모든 게 끝날 거라고. 루이스, 늦기 전에 달아나자. 우리 둘이서 영원한 행복을 찾으러 가야지."
"브랜다."
"사실은 너도 죽여버리고 싶었어. 내 능력을 알면서도, 감히 내 눈 앞에서 그딴 짓을 해? 내가 평생 그걸 기억하는 걸, 영원히 잊지 못할 걸 알면서! 루이스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네가 증오스러워! …하지만 그래도 난 널 사랑해. 난 네가 없으면 안 돼. 자, 이리 와, 루이스…"
그렇게 말하는 브랜다의 동공은 완전히 초점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녀는 지금 무엇을, 누구를 보고 있는 걸까. 흘러내리는 눈물에 섬뜩함까지 느껴지는 그녀의 광태. 루이스는 더 견디지 못하고 비통하게 외쳤다.
"브랜다!"
하지만 루이스는 그 이상의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의 사이로 불덩이가 쏟아져 내렸기에. 루이스는 앤지를 감싸며 급히 물러섰다.
"윽? 이건…."
자연적인 불이 아니다. 틀림없는 능력자의 소행. 긴장한 루이스는 주변을 훑어보았고 곧 당사자를 찾아내었다.
여자다. 여자치고는 보기 드물게 흰 셔츠에 검은 넥타이, 검은 슈트 차림새를 했다. 단정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불꽃같은 적발을 흩날리며 서 있는 모습에서 강렬한 압박감이 느껴졌고, 그 오른손엔 불꽃이 피어오른다. 방금 불덩이를 던진 주인공이 그녀인 것을 알아챈 루이스는 조심스럽게 몸을 추슬렀다. 분위기를 보니 절대 허투루 여길 만한 상대가 아니다.
"후후. 거기 아가씨가 앤지 헌트인가?"
어딘지 열에 달뜬 목소리에 소름이 돋는다. 아직 가라앉지 않은 루이스의 투쟁본능이 경고한다. 이 여자는 지금으로선 결코 이길 수 없는 상대라고. 루이스는 망설이지 않고 적에게 달려들었다. 동시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쳤다.
"앤지 님! 도망치세요! 여긴 제가 막겠습니다!"
"응? 이건 또 뭐지? 이런 녀석이 있다는 건 못 들었는데?"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오른팔을 치켜드는 여자. 루이스는 불길한 낌새를 느끼고 전력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어느 새 뜨거운 기운이 그의 몸을 감싸 안았다. 루이스는 급하게 결정을 주변에 둘러쳤지만 파고드는 화염을 전부 막아낼 순 없었다.
"으아악!"
나가떨어진 루이스는 생전 처음으로 느끼는 열기에 전율했다. 자신이 미처 손대지도 못하는 거리에서 이 정도의 공격을 가할 수 있다면, 지금의 루이스에게 싸울 수단은 전무했다. 한계를 호소하는 신체를 억지로 다잡으며 일어선 루이스는 절망감이 뇌리를 잠식하는 걸 느꼈다.
"그걸 피하다니. 꽤나 실력이 있구나, 너?"
허나 이 여자는 그것으로 끝낼 생각이 없는 듯 했다. 붉은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난다. 화염에 감싸인 오른손을 하늘 높이 치켜올리자 어느 새 어두워진 숲 속이 환하게 밝아졌다. 루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그것을 후회했다.
"어차피 앤지 헌트와 함께 있는 걸 보니 연합의 주구겠지. 그냥 다 같이 죽어."
무언가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지껄이는 여자에게 순간 울컥한 루이스는 어금니를 짓씹으며 앤지에게 몸을 던졌다. 그 와중에 잠시 주변을 훑어보았지만 브랜다는 어느 새 자취를 감추었다. 잡념이 머리를 터뜨릴 것 같았지만 루이스는 애써 마음을 비우고 능력을 전개했다. 일단은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결정을 굳히고 냉기를 퍼뜨리며 하늘로부터의 공습에 대비한다. 숲을 밝히던 화구들이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다. 숲 곳곳에서 폭발과 화염이 솟구쳤다. 악몽과도 같은 광경. 루이스는 방어 위를 두들기는 거력에 경악했다. 불덩어리라고 생각했는데, 이 충격은 마치 돌덩어리라도 떨어지는 것 같다. 그 느낌은 곧 확신이 되었다. 방어막을 두들긴 화염이 '부서져 조각나며' 흩어진 것이다. 대체 무슨 원리인지도 모르겠지만 저 여자의 화염은 고체화가 가능한 것 같았다. 이 정도라면 열기와 냉기 이전에 물리적 내구성이 먼저 한계에 부딪힌다. 루이스는 누적되는 충격으로 점차 힘이 고갈되어갔고, 마침내 결정들이 무너져 내린 순간 화염의 폭격도 그 끝을 고했다.
처참한 광경. 공성용 투석기로 쏘아내는 바위를 연상시키는 화염구의 낙하는 녹음으로 우거졌던 숲을 완벽하게 파괴했다. 이 참극을 구현한 당사자는 초토의 중심지에 오연하게 서 있었다. 상흔으로 얼룩진 대지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공간을 바라보는 붉은 눈은 놀람과 흥분으로 번들거렸다.
"대단한데? 설마 이 공격에서 살아남을 줄은 몰랐어. 칭찬해줄게."
순수한 감탄에 물든 목소리. 하지만 루이스에게는 그저 조롱일 뿐이다. 완전히 탈진한 루이스는 진한 패배감에 사로잡혔다.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저 여자가 손 한번 휘두르면 앤지와 자신은 확실하게 죽는다. 그것이 루이스를 견딜 수 없게 했다.
이제 루이스에게 남은 것은 없다. 터커도, 브랜다도 사라졌고, 앤지는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다. 대체 자신은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인가.
터커를 생각하니 슬픔이 밀려온다. 의지할 수 있었던 어른. 그의 단단한 팔뚝은 믿음직했고 그만큼이나 따뜻했었다. 하지만 차가운 칼날 아래 쓰러졌지.
브랜다를 생각하니 설명할 수 없는 허무함이 밀려온다.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 그녀의 미소만 바라봐도 행복했고 그 존재 자체로 구원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브랜다는 처음부터 어딘가 망가졌던 것이다. 루이스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 아마 플랜 디코이가 아니었더라도 둘의 사이는 언제고 파탄에 이르렀겠지. 하지만… 지금 이런 결말보단 나았을 것이다. 루이스의 마음이 꺾이려는 순간, 앤지의 옆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앤지 헌트. 연합의 수장 흑염 하이드의 딸. 처음에는 철없는 공주님으로만 알았지만, 여행 도중 보여준 앤지의 리더십은 루이스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터커가 죽고 난 이후로 삐걱거리는 일행을 단단히 결속시키고 지금까지 이끌어왔다. 위기상황을 파악하는 판단력, 활로를 찾으면 주저하지 않는 결단력, 적조차 압도하는 카리스마. 뛰어난 직감. 루이스는 어느 새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앤지의 존재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앤지 뿐이다.
루이스는 사지에 힘을 불어넣었다. 스스로를 가둔 자신을 구해준 사람은 브랜다였지만, 존재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자신의 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앤지였다. 앤지가 그를 믿어주는 이상, 루이스는 그 마음에 답해야만 한다. 그 의지를 살라 루이스는 마침내 두 다리로 일어섰다.
"당신… 이름이 뭐지?"
"뭐, 인심 좀 써볼까. 타라. 타라 시바스 조노비치. 헬리오스 사의 수석 비서지. 왜, 더 알고 싶은 건?"
"아니, 충분해. 내 이름은 루이스다."
"좋은 이름이긴 한데,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었어. 죽을 사람의 이름 따위 알아봐야 우울하니까."
타라는 서글픈 목소리로 말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오른손에 불꽃을 피워 올렸다. 결코 루이스를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의지. 루이스는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최후의 힘을 짜내었다.
"아니, 죽는 건 네가 될 거야. 내 손에 죽을 사람의 이름을 몰라서야 우습지."
그 말을 들은 타라의 눈이 희번덕였다. 다 죽어가는 녀석이 건방지게 나대는 꼴이라니! 타라는 꼭지가 돌아가는 것을 느끼며 전력으로 힘을 전개했다.
"애송이, 어디 큰 소리 칠 자격이 있는지, 내 앞에서 증명해 봐!"
"아아, 물론 그러고 말고. 간다, 타라!"
"덤벼라! 루이스!"
교차하는 운명, 대립하는 불과 얼음. 마침내 역사의 건반으로 연주되는 영웅찬가(英雄讚歌)는 절정부로 치닫기 시작했다. 이 노래의 마지막이 어떻게 끝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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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의 눈앞으로 화염이 날아든다. 죽음이 명확한 형체를 가지고 루이스를 압박해왔다. 허나 루이스의 질주는 고작 그런 불장난 따위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필사의 의지로 달려가는 루이스. 타라의 안색이 점점 굳어져갔고, 마침내 루이스는 공격이 가능한 포지션을 잡았다.
다시금 오른팔을 치켜든다. 손목을 그러쥐고 자세를 다진다. 그 팔뚝 위로 결정이 내달리고, 마침내 슬러그 탄과 같은 일격이 터져나가려는 순간 루이스의 발밑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그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큭!"
지지대가 되는 디딤 발이 무너져서야 조준이 맞을 리 없다. 루이스 최후의 일격은 허무하게 빗나갔다. 완전히 탈진해버린 루이스는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하지만 타라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져갔다. 그녀의 뺨에 난 작은 생채기에서 핏방울이 굴러 떨어진다. 결정의 조각 중 단 하나가 그녀의 몸에 닿은 것이다.
"…내 몸에 상처를 내다니, 과연 쭉정이는 아니었구나, 너."
타라의 적발이 거꾸로 솟는다. 붉은 홍채는 마그마와 같은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그녀 자체가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완전히 살의에 몸을 맡긴 타라는 화염의 온도를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발끝부터 재로 만들어주지. 가학의 흥분으로 채워지는 타라의 몸과 마음.
루이스는 그 모습조차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쓰러져 버르적대는 몸은 이미 그의 통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루이스는 이번에야말로 죽음을 각오했다. 자신의 죽음은 이제 당연한 수순이지만, 앤지만은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다. 하지만 힘없이 뻗은 손이 닿기에는 앤지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시야가 검게 물들어간다.
그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박쥐 떼가 폭풍과 함께 타라의 주변을 휩쓸고 지나갔다. 격한 기세에 타라의 불길이 어지럽게 흩어졌고, 타라는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방금 전의 그 박쥐 떼는 누군가를 연상시켰지만, 타라는 그 가능성을 애써 부인했다. 그 여자는 분명 사망 혹은 실종상태일텐데!
"오랜만이야. 타라. 건강해보여서 기쁜걸?"
나른한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타라는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이 목소리의 주인은 헬리오스의 숙적인 지하 연합의 원년 멤버. 그림자를 다루고 날개를 활용한 공중전이 특기인 에이스 능력자.
"트리비아, 카리나!"
분노에 찬 타라의 외침. 그런 그녀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림자 박쥐들이 일대를 휘몰아친다. 타라는 이를 악물고 화염을 펼쳐 박쥐들을 태워 떨어뜨렸지만 정작 트리비아에게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그 틈을 타 트리비아는 유유히 볼 일을 보았다.
"음, 시간이 없으니 이쪽 아가씨는 잠시 내 그림자 안에 들어가 줘야겠어요. 후훗."
쓰러져있는 앤지에게 다가간 트리비아는 자신의 능력으로 그녀를 그림자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 순간 트리비아는 틀림없이 방심하고 있었다. 회사의 에이스 타라가 그저 당하고만 있을 리 없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트리비아는 그 대가를 온 몸으로 받아내야만 했다.
"바로, 저기다!"
타라의 일갈과 함께 머리 위가 환해지는 것을 본 트리비아는 황급히 그림자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미처 그림자의 문을 닫기도 전에 유성의 낙하와도 같은 불덩어리가 그 안으로 침습했다.
"이런…성가시게 되었네."
트리비아는 미간을 좁혔다. 그녀만의 공간인 트와일라잇의 일부분이 무참히 파괴된 것이다. 더불어 번져가는 화염. 트리비아로서는 손쓸 도리가 없었기에 일단은 앤지를 최대한 구석진 곳에 눕혀두고 다시 그림자를 통해 바깥세상으로 나갔다.
"트리비아 네년… 죽은 게 아니었구나?"
"어머? 내가 죽었다고 광고라도 했었나? 타라, 당신 물러졌구나. 후후후."
교태로운 목소리로 조롱을 던지는 트리비아. 끓는점이 낮은 타라는 이마에 힘줄을 돋우면서 격하게 반응했다.
"흥, 차라리 잘 됐어. 내 손으로 끝장내고 싶었는데 살아 있어서 다행이지. 거기 뒹굴고 있는 놈이랑 한 세트로 구워주지!"
그때서야 트리비아는 발치로 눈길을 돌렸다. 정신을 잃은 루이스를 발견한 트리비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저기 그슬린 꼴을 보니 타라와 한판 붙은 모양인데, 아직까지 살아있는 게 용하다. 일단은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 챙겨가야겠지. 과로는 피부에 좋지 않은데. 트리비아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 루이스를 챙겨들었다. 그런 트리비아의 행태에 타라는 불꽃을 튀기며(말 그대로!) 날뛰었다.
"이 년이! 도망치려는 거냐? 거기 섯!"
트리비아는 '어맛, 뜨거라.' 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그리고 자신을 여기로 보낸 참모 토니 리켓을 열심히 씹었다.
"타라가 있다는 말은 한 마디도 없었는데, 그 녀석이 예측 못하는 것도 다 있네. 아… 싫다 정말. 그나마 이 녀석이 가벼운 게 다행이네."
그녀는 앞으로 날아가야 할 거리를 가늠하고는 신음을 내뱉었다. 토니 녀석. 정말 얼토당토않은 짓을 잘도 시킨다니까. 트리비아는 열심히 날개를 놀렸다. 달 밝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삼은 그녀의 비행은 어딘지 고달픈 월급쟁이의 힘없는 발걸음 같았다.
"죽어! 죽어! 다 타버려! 아하하하핫!"
발 밑에선 폭주하는 타라의 괴성이 아련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트리비아는 가볍게 무시하고선 우수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란스런 밤이야, 정말. 또 무슨 일이 얼어날까… 그냥 이 녀석은 떨어뜨려버릴까. 아우, 힘들어."
트리비아는 끊임없이 꿍얼댔다. 품에 안긴 소년은 결국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떴다. 인간은 생명의 위협에 민감한 것이 다시 한 번 증명되었다. 루이스는 잠시 멍한 눈길로 주변을 둘러보다 트리비아와 눈이 딱 마주쳤다.
"누, 누구시죠?"
"남의 이름을 물으려면 먼저 자기소개부터 하는 게 순서 아닐까?"
"아, 죄송합니다. 전 루이스라고 합니다."
아직 상황판단이 제대로 되지 않은 루이스는 쓸데없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트리비아는 픽 웃으면서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귀여운 이름이네. 난 트리비아 카리나. 그냥 트리비아라고 부르면 돼. 아, 잠깐. 밑은 보지 않는 게 좋… 늦었네."
루이스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 밑을 봐버렸고, 그제야 자신이 하늘 위를 날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순식간에 파랗게 질린 루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트리비아를 꽉 껴안았고, 트리비아는 심술궂게 장난을 걸었다.
"어머, 음흉해라. 아직 어린 것 같은데 꽤나 밝히네? 후후, 내가 좀 매력적이긴 하지만서도."
루이스는 얼굴을 붉히며 힘을 풀었다. 그리고 앤지에 생각이 미치자 급히 트리비아에게 질문했다.
"저와 함께 있던 분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분이 어디에 있죠?"
"걱정 마. 가장 안전한 곳에 모셔뒀으니까. 아, 지금은 안전하진 않겠구나. 에이, 별 일이야 있겠어?"
트리비아가 태평하게 말하는 그 시간, 트와일라잇에 방치된 앤지는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는 화염을 피해 이리저리 헤메이고 있었다. 그녀가 생명의 위협에서 탈출하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윽…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스위스에 있는 아이거 산 정상. 토니도 참 생뚱맞다니까. 벨기에에서 스위스까지 날아가라니. 다음에 만나면 가만히 놔두지 않겠어. 흥."
트리비아의 말에 익숙한 이름이 섞여있다. 루이스는 다급하게 물었다.
"토니라면, 토니 리켓? 연합의 참모 말인가요?"
"응? 네가 그를 어떻게 알아?"
"저도 일단은 연합 소속이니까요."
"아하, 네가 그 아가씨의 호위였구나. 들은 것과는 다른데? 왜 너 혼자야?"
루이스는 어두운 얼굴로 그 간의 여정을 설명했다. 트리비아는 고난과 시련에 가득 찬 그 여정을 극복한 루이스와 앤지에게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 벨저 홀든과 앤트워프 6인을 격파했다고? 너 정말 대단하구나. 맘에 들었어. 조금 있다가 그냥 떨어뜨려놓고 가버리려고 했는데 끝까지 책임져줄게. 후훗."
등골이 서늘해지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트리비아. 루이스는 그저 그녀의 팔 안으로 몸을 묻는 수밖에 없었다. 트리비아는 살짝 웃으면서 재차 날개를 쳤다. 목적지는 트리비아의 말마따나 스위스의 아이거 산 정상. 토니는 그곳에 당도하면 모든 일이 끝날 거라 다짐했다. 트리비아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연합은 괴멸 직전에 몰려 있었고, 회사와는 결판을 내야만 했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부르던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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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운 비행 끝에 트리비아와 루이스는 목적지에 당도했다. 스위스의 아이거 산. 만년설에 잠든 거인, 스위스의 악몽 등 여러 가지 별칭을 지닌 드높은 준봉. 루이스는 땅에 발을 딛자마자 다리가 풀려 쓰러졌다.
거친 숨을 내쉬며 몸 상태를 점검한다. 매달리기만 했어도 사람이 사람을 껴안은 자세는 꽤나 무리를 준다. 루이스는 전투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몸에 다시금 가해진 무리 때문에 거의 까무러칠 지경이었지만 애써 호흡을 추슬렀다.
"역시 근성이 있구나. 맘에 들었어."
완전히 몸을 밀착시킨 시간이 실로 수 시간. 트리비아와 루이스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꽤나 친밀해졌다. 루이스도 남자이니만큼 치명적인 매력을 자랑하는 트리비아에게 눈이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애써 눈길을 돌리며 트리비아를 재촉했다.
"이제 앤지 님이 무사한 지 확인해보죠. 그 분은 어디에?"
"어머나…?"
트리비아는 그제야 황급히 그림자를 열고 들어갔다. 잠시 뒤 트리비아와 함께 나온 앤지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곳곳이 그슬리고 검댕이 묻어있는 모양새. 보아하니 루이스만큼이나 고생을 한 듯 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지만 그녀 또한 제대로 서 있지 못할 정도로 지쳐있었다.
"다들 불난 집에서 빠져나온 생쥐 꼴이네. 후후."
일행에게 농을 던지는 트리비아 또한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이토록 오랜 시간 비행을 지속한 것은 그녀에게도 상당한 무리. 일행은 무언의 합의 하에 그림자 안으로 다시 몸을 밀어 넣었다.
"아아, 타라 그 망할 계집애. 내 비밀장소를 이렇게 만들어버리다니. 다음에 만나면 용서하지 않겠어…!"
환영의 도시는 그야말로 처참한 상태였다. 타라의 공격이 직격한 곳은 거대한 크레이터가 만들어졌고 그 주변으로 불길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손쓸 방법이 없었기에 일행은 그나마 따뜻한 온기에 위안 받으며 몸을 다스렸다. 그리고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토의를 시작했다.
"브랜다…의 말로는, 앤트워프 시에서 토니의 지령이 없다고 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저희에게 온 거죠?"
앤지의 물음에 트리비아는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앤트워프 시에서 호출이 오면 그쪽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어. 호출은 은신처에 접선이 시도되는 걸 기준으로 했는데?"
트리비아의 말에 앤지는 새파랗게 질렸다. 브랜다의 배신이 확실해지자 루이스의 얼굴 또한 급격히 흐려졌다. 우울해진 분위기를 띄워보고자 트리비아는 애써 웃으며 말을 돌렸다.
"괜찮아. 다들 이렇게 살아서 숨쉬고 있잖아. 삶에 감사하자구. 음~ 근데 문제가 딱 하나 있긴 해."
"뭐죠?"
"아마 접선인에게는 목적지를 가르쳐 줬을 거야. 그녀가 정말 배신했다면 이미 회사에 우리의 행보가 알려졌겠지. 여기에 오래 머물 순 없겠어."
앤지와 루이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브랜다는 앤트워프 시에 당도하기 이전부터 배신을 결심했겠지. 그렇다면 이미 그들의 목적지 또한 파악되었을 것이다. 여기는 이미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트리비아의 능력 또한 무한정하진 않았다. 그녀가 그림자의 문을 열고 이곳 트와일라잇에 머물기 위해선 지속적으로 능력을 발동시켜야 했고, 두 명을 추가하자 그 소모를 버티기 어려운 지경이 된 것이다.
결국은 산 정상을 벗어나 자구책을 찾기로 한 일행은 다시금 밖으로 나왔다. 그런 그들은 반긴 것은 눈과 폭풍만이 아닌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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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가 앤지 헌트 양이로군. 반갑소. 나는 헬리오스 사의 대표인 헨리 밀러 3세요."
딱딱하게 굳은 앤지의 귓가로 파고드는 중후한 음성. 그녀는 애써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보았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주름진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어가는 금발과 어울려 노년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단정한 차림새, 정중한 말투. 그러나 이 인상 좋아 보이는 노인은 다름 아닌 회사의 명왕. 흑염과 함께 일식의 시대가 선택한 최초의 영걸(英傑) 중 한 명. 그 존재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 뒤로 시립해 있는 사람들. 익숙한 얼굴인 벨저를 포함하여 누구도 만만해 보이는 사람이 없다. 회사에서도 추리고 추린 능력자들이겠지. 앤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머리로도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루이스는 아직 회복되지 않았고 트리비아 또한 지쳐있었다.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된 것이 안타깝군.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좀 더 건설적인 분위기로 만났을 텐데 말이오."
명왕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아는 흑염은 자신에게 결코 모자라지 않는 인물이었고, 맨손으로 지하 연합을 조직하여 수많은 능력자들을 인도한 선구자였다.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손을 잡으며 시대를 헤쳐 온 나날들. 명왕의 인생은 흑염을 제외하고선 논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런 악우의 마지막 혈육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다. 그와 꼭 같은 머리색. 이목구비 또한 하이드를 빼닮았다. 단 하나, 눈매와 눈동자의 색만은 하이드와 달랐지만 그것은 앤지만의 개성이었다. 그는 형언할 수 없는 애정이 마음을 채워가는 것을 느꼈다.
"앤지 양. 부탁드리겠소. 저항을 멈추고 투항하시오. 나는 회사 구성원들의 요구를 무턱대고 거절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연합의 해체와 당신의 목숨이오. 허나 나 또한 허수아비는 아니지. 그대의 안전은 내 명예를 걸고 책임져 주겠소. 그리고 연합의 구성원에 대한 불필요한 학살도 금지시키겠소. 어떻소?"
그 말에 뒤로 시립한 몇몇 사람들의 눈에 불만이 어린다. 특히 명왕의 바로 뒤에 선 젊은 남자는 노골적으로 명왕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명왕 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가증스러운 연합 놈들은 그 씨를 말려야 합니다. 특히 흑염의 핏줄은 어떤 변수가 될지 모릅니다. 저 년만은 기필코 없애야 합니다."
"재스퍼. 자네가 원하는 바는 잘 아네. 허나 저들이 사라진다고 해서 무엇이 남는가? 회사는 연합의 능력자들까지 포용할 정도로 크지 않네. 연합이 무너진다면 유럽은 혼란에 빠질 게야. 우리는 공존해야만 하네."
"아니, 아닙니다. 왜 저희가 연합의 능력자들을 거둬야 합니까? 설사 받아들이더라도 그들은 언제고 문제가 됩니다. 하지만 전부 없애버리면 모든 게 끝납니다. 여러분, 틀렸습니까?"
재스퍼는 침을 튀기며 호소했다. 그의 논리는 이미 회사의 지지를 받는 듯 대다수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개 중에서도 침묵하는 사람이 있었다. 몸을 갑옷으로 둘러싸고 투구로 얼굴을 가린 기사. 한 손에 든 것은 돌격용 마상창이었다. 그 기사만은 앤지 일행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앤지는 재스퍼라는 작자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세계대전이 끝난 지 10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그런 상황에서 다시금 대규모 학살을 주장하는 그가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웠다.
앤지는 자신이 나설 때가 된 것을 느꼈다.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이 자신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가 명왕의 앞에 당당히 섰다. 저런 헛소리를 지껄이는 자를 부하로 둔 그에게 절대 굽히지 않을 것이다. 앤지는 마침내 스스로가 아닌 연합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녀에게 익숙한 고양감이 몸을 채워갔다. 아아, 평생을 갈구해 왔다. 자신이 주인공인 음악 무대를. 그녀는 자신이 서 있는 이곳이 마치 오스트리아 빈의 국립 오페라극장(Staatsoper)과 같다고 느꼈다. 그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성악가들이 꿈에서라도 바라는 영광의 무대가 지금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눈보라가 그치며 장막을 걷어 올린다. 태양이 드러나며 무대를 밝힌다. 관중은 이미 착석해 있다. 그녀는 노래를 부를 때와 같이 심장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앤지는 고요한 알토의 목소리로 공연의 시작을 알렸다.
"연합의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를 아시는 분도, 처음 보시는 분도 있겠지요. 제 이름은 앤지 헌트입니다. 아, 여기서 흑염의 딸이니 그런 것은 전부 머리에서 지워 주세요. 그런 감투는 저에게 필요 없는 거니까요."
물 흐르듯 부드러운 어조로 전반부를 노래한다. 그리고 곧 힘이 넘치는 목소리로 선언한다.
"저는 지금부터 감히 연합의 수장을 자처하겠습니다. 흉계에 스러져 간 흑염 하이드의 뒤를 이어 제가 그 자리를 받겠어요. 도탄에 빠진 이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방황하는 이들을 인도하는 이정표가 될 겁니다. 여러분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저 앤지 헌트는 지금 이 순간부터 연합의 수장이 되겠습니다!"
메조 소프라노로 높아지는 음성. 무대의 긴장이 한층 고조되고, 관객은 넋을 잃고 그녀의 목소리에 빠져들었다. 심지에 재스퍼까지도.
"트리비아!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연합의 원년 멤버이자 에이스인 당신은, 저를 수장으로 인정하시겠습니까?"
트리비아는 즉답했다. 그녀에게 겹쳐 보이는 흑염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의 모든 것은 당신의 것. 영원한 나의 주인이시여."
트리비아의 맹세를 받아들인 앤지는 재차 루이스에게 말했다. 그에게는 다 갚지 못할 빚을 졌다. 하지만 미안함을 넘어서 앤지는 그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녀는 위엄과 신뢰, 그리고 한줄기 바램을 담아 소리 높여 외쳤다.
"루이스!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지금까지 나와 함께한 전우여, 당신은 저를 수장으로 인정하시겠습니까?"
앤지의 두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황금의 눈동자가 루이스를 직시하자 그는 눈이 부신 듯 눈꺼풀을 슬며시 감았다.
그것도 잠시. 눈을 뜬 루이스는 앤지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황금(黃金)과 적동(赤銅)이 교차하는 순간, 루이스는 강한 의지를 담아 충성의 맹세를 고했다.
"Yes, my lord."
―예, 그대는 나의 주군이시며.
"You are my Queen of forever."
―당신은 영원한 나의 여왕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루이스의 눈빛은 절대적인 충의를 담고 있었다. '저의 모든 것을 오롯이 그대에게.'
환희에 찬 앤지는 몸을 빙글 돌려 공연의 클라이맥스로 돌입했다. 소프라노, 소프라노! 더 높게! 더 격렬하게!
"이들의 충성을 걸고 맹세합니다. 연합은 결코 회사에게 굴복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지금 이 순간부터 부여된 수장의 권리로서 당신들에게 선포합니다!"
산 정상이 뒤흔들리는 듯 한 선언. 명왕을 포함한 회사의 구성원들이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앤지는 무대의 종막을 알리는 최후의 한 마디를 던졌다.
"자, 여러분이 나를 연합의 수장으로서 인정한다면 하나 제안하겠습니다. 쌍방의 명운을 건 대장전(Champion's Duel)을!"
챔피언. 조직 혹은 국가를 대표하는 무력의 상징. 단체의 명운을 그 등에 지고 싸우는 위대한 전사, 챔피언의 결투로 모든 것을 결착짓는 고대의 율법. 그것을 선고하는 앤지의 눈에 흐림 없는 의지가 빛났다.
재스퍼가 당황해서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벨저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복수심에 불타며 칼끝으로 루이스를 겨누었다.
"말 잘했다, 계집. 내가 회사의 챔피언이 되어주지. 덤벼라, 거기 얼음 애송이. 어차피 연합의 챔피언은 네놈일 테니까!"
재스퍼는 벨저를 말리려고 했지만 명왕의 제지에 이를 갈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속으로 온갖 욕설을 내뱉었다. 지금이야말로 연합을 끝장 낼 절호의 기회인데! 이런 어린애 장난에 이끌려가다니! 재스퍼의 마음과는 다르게 상황은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기꺼이 상대해주지, 칼잡이. 그때와 같은 망신을 당하지 않으려면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어느 새 이정도의 도발을 할 수 있게 된 루이스. 플랜 디코이의 여정은 어린 소년을 전사로 탈바꿈시켜놓았다. 이 자리에서 연합 챔피언의 자격을 가진 자는 루이스뿐이겠지. 하지만 상황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루이스의 다리가 미세하게 떨린다. 사실은 서 있기조차 어려운 상태. 온 몸에 새겨진 상흔은 신체의 기능을 저하시키고, 능력의 발동마저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루이스는 조용히 투지를 다졌다. 예견된 패배를 눈앞에 두고서도 적동색의 눈동자는 여전히 불굴을 외친다.
기사는 그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저런 눈빛을 가진 사내를 소년이라 부를 수 없겠지. 높은 각오를 결의한 순간 저 사내는 소년이었던 시절과 결별을 고하고, 한 남자로서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잘 모여들지도 않는 결정을 그러모으며 결전을 대비하는 연합의 남자를 보고서 기사는 결심했다. 자신의 마음과, 자신의 신념과, 자신의 명예를 다해 저 남자와는 자신이 싸우겠다고. 고결한 용기사, 알베르토 로라스는 벨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홀든 가의 벨저여, 이 결투는 본인에게 양보할 수 없겠소? 용기사로서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노니, 훗날 그대의 부탁 한 가지를 받아들이겠소."
성질이 급하고 충동적인 벨저였지만 멍청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저 빌어먹을 자식은 누가 나서도 이길 수 있다. 여기서 저 연놈들이 죽는 건 기정사실이니 굳이 자신의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다.
그의 자존심은 회복할 길이 없겠지만 벨저는 홀든의 둘째로서 역할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자신의 자존심과 회사의 유망주인 로라스의 양보.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벨저는 깨끗하게 포기했다. 검룡의 이름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으니까.
"그대의 결정에 감사하오. 이 일은 결코 잊지 않겠소."
벨저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전의가 사라진 이상 이런 자리에 있어봐야 괜히 손해만 볼 뿐이다. 그는 뒤로 물러서며 대꾸했다.
"뭐, 내 자존심도 그렇게 싸구려는 아니야. 검룡 양반의 명예 정도라면 비길 만은 하겠지. 어차피 저 놈을 처리하더라도 찝찝할 뿐일 테니, 차라리 잘 된 일이야."
경멸 어린 눈길로 남자를 쏘아보는 벨저. 그리고 남자의 등 뒤에 서 있던 회사의 목표, 앤지 헌트는 벨저의 말을 듣고 소리 높여 웃었다.
"호호… 벨저 공자, 자존심을 거론하는 당신의 오만이 우습기만 하군요. 이름 높은 홀든의 잘난 검, 이 사람의 결정에 꺾인 것이 불과 며칠 전입니다."
"닥쳐라, 계집. 그 이상 홀든을 모욕하면 검룡의 양보고 뭐고 없는 거야. 그 빌어먹을 자식의 시체쪼가리를 울면서 주워 모으기 싫으면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다."
터져 나오는 살기. 하지만 예전의 앤지가 아니다. 당당히 버티고 서서 그 살기를 받아낸 앤지는 관중들에게 선언했다.
"챔피언들이 정해졌군요. 이제 대장전을 시작해 볼까요?"
앤지는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루이스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미안해요, 루이스. 난 언제나 당신에게 의지만 하는군요. 이런 나를 용서해줘요."
루이스는 앤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여왕에게 승전을 약속했다. 지금은 그것만이 최선이었다.
"나의 여왕이시여. 그대의 기사를 믿으세요. 당신에게 바칠 월계관을 승리의 영광으로 장식하겠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그것이 허세일지라도 상관없다. 루이스는 결코 굴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회사의 챔피언 또한 그의 앞으로 걸어왔다.
"위대한 스페인 왕실의 충실한 가디언, 이름 높은 엘 시드의 후예, 아틀라티코 드라군의 명예로운 창, 알베르토 로라스요. 그대의 성명은?"
"……루이스."
지친 탓일까. 조금씩 끄는 말투로 이름을 밝히는 남자. 음성에서는 일말의 감정조차 실려 있지 않다. 완전히 메말라버린 것처럼. 말투부터 분위기, 그리고 능력마저 참으로 겨울과 같은 남자다.
"결투에 임하는 이상, 그대를 기사와 같은 격으로 대하겠소. 루이스 경(Sir Louis). 서로의 명예에 흠 없는 겨룸이 되기를 바라오."
"배려에 감사하게 되는군. 로라스 경(Sir Loras)… 좋아, 당신에게 경의를 표하며 도전하도록 하지."
자신을 존중해주는 로라스의 마음을 알아챈 루이스는, 나름대로 격식을 차리며 응답했다. 그야말로 기사 대전다운 전개에 로라스는 고양되는 심장을 느끼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거대한 마상창을 치켜올리며 거창의 자세를 잡는다. 용창 17식, 예의 표하기. 절도 있는 동작으로 기수식을 행한 로라스는 신체를 일깨우며 외쳤다.
"세가 불리한 것은 그대 같으니, 선공은 양보하겠소. 오시오!"
"사실이니, 사양은 필요 없겠지… 그럼 간다!"
루이스가 결정의 레일 위를 질주하고, 로라스가 창을 치켜들고 맞선다. 결정의 검과 강철의 창이 충돌한다. 마침내 2차 능력자 전쟁이 남긴 영웅전설(英雄傳說)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찬가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것은 겨울이 빚어낸 찬란한 보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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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렬한 교전. 루이스의 몸 어디에 그런 힘이 남아있었을까. 지금껏 보지 못한 흉흉한 기세로 결정의 검을 휘두른다. 로라스는 차분히 공격을 방어하며 틈을 타 한 번씩 창을 내질렀다. 절도 있는 동작, 정확한 공격.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로라스의 강함을 대변한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아무도, 아무도 죽게 하지 않겠어!'
루이스는 그것만을 원했다.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전부 쏟아냈다. 로라스는 결코 허투루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결정 산탄, 발치에서 솟아오르는 결정 뭉치, 냉기의 확산, 결정 레일의 기동력. 루이스의 정화(精華)가 화려하게 폭발했다. 하지만 매정하게도 루이스의 스태미나는 순식간에 고갈되었고, 움직임이 급격하게 느려지기 시작했다.
로라스는 루이스의 상태가 정상이 아닌 것을 눈치 챘다. 이 정도 싸움으로 텐션이 떨어지다니. 투구에 가려진 눈이 찌푸려졌다. 용기사의 명예는 정정당당한 결투에서만 빛을 발한다. 상처 입은 자를 핍박하는 것은 기사도에 어긋나는 일. 지금의 루이스를 이겨 보아야 그의 명예는 땅에 떨어질 뿐이다.
로라스는 루이스를 살려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 남자의 강함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결정과 창이 맞부딪히는 지금도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보다 날카롭고, 보다 정교하고, 보다 빠르게. 루이스는 대장전 와중에서도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었다. 로라스는 전성기에 도달한 루이스와의 결투를 상상하자 희열로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위해서 지금은 잠시 명예를 접어둘 때다.
타이밍을 재던 로라스는 짐짓 발 밑의 돌에 걸린 듯 휘청거렸다. 빈틈! 루이스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타아앗-!"
비명과도 같은 기합. 주변의 공기가 극저온으로 휩싸인다. 초저온의 결정핵을 중심으로 공중에 피어난 살얼음의 향연. 겨울에 물든 아이거 산 정상에서도 그곳만은 전혀 다른 이세계였다. 마침내 다시 한 번 강림한 영구동토(永久凍土). 로라스는 이미 각오를 한 상태였지만 온 몸을 파고드는 무시무시한 한기에는 견딜 수 없었다. 신체기능이 극도로 저하된 로라스는 결국 무릎을 꿇으며 속으로는 쓰게 중얼거렸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군. 설마하니 날 일격으로 전투불능에 빠뜨리다니…'
모든 힘을 토해낸 루이스 또한 휘청거렸지만, 결코 무릎 꿇진 않았다. 그 순간 승부는 결정되었다.
"제 챔피언의 승리입니다! 헬리오스의 여러분들, 이의가 있으신가요?"
앤지의 선언에 회사의 모든 사람들은 당황했다. 그들의 수장인 명왕을 돌아보았지만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결과에 승복해야 했다. 단 한사람을 제외하고서.
"웃기지 마라! 우리가 왜 네년의 억지에 장단을 맞춰야하지? 흥, 어차피 너희가 여기서 뼈를 묻으면 없던 일이 된다. 자, 여러분! 저 연놈들을 지금 당장 처치합시다!"
재스퍼는 차갑게 일갈했다. 하지만 회사의 사람들은 머뭇거렸고, 재스퍼는 갑갑해 미칠 것만 같았다. 조금만 더 하면 작전이 성공하는데! 그는 승부수를 던졌다.
"빌어먹을!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소! 그러니 죽여! 죽이란 말이야!"
재스퍼의 기세에 눌린 회사의 사람들은 하나 둘 앤지에게 다가서기 시작했다. 앤지는 속으로 크게 동요했다. 설마 마지막 순간에 이런 짓을 하다니.
아니, 그녀가 너무 쉽게 생각한 것뿐이다. 충분히 이런 상황을 상정했어야 했다. 그녀가 조직의 장으로서 아직 미숙하다는 증거. 앤지는 트리비아와 루이스를 한 번씩 바라보았다. 미안함을 가득 담아서.
'미안해요. 나 때문에 여러분들까지…'
루이스는 그 뜻을 알아채고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나의 여왕님. 당신은 틀리지 않았어요. 우리는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트리비아는 자신감에 가득 찬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앤지는 의아했다. 트리비아의 저 확고한 눈빛은 대체 뭘 뜻하는 걸까. 그리고 그 대답은 이변으로 찾아왔다.
"우웃? 이…이건?"
거대한 바위들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희미한 녹광에 감싸인 바위들은 위협적으로 회사의 사람들을 감싸고돌았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단 하나.
"이건 염동력! 설마 미쉘 모나헌이?!"
그 의문에 답하는 목소리는 아직 앳된 소녀의 티를 물씬 풍겼다.
"쳇, 트리비아. 날 또 이용한 거군? 아무리 당신의 부탁이라도 이건 좀 과하잖아."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트리비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최후의 조력자가 늦지 않게 당도한 것이다.
"언젠가 확실하게 갚아줄 테니까, 지금은 좀 도와 줘. 응?"
애교 섞인 트리비아의 애원에 미쉘은 짐짓 눈을 끔벅거리고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어이, 거기 신사 숙녀 여러분들? 순순히 물러나지 않으면 조금 험한 꼴을 볼 거야!"
외침과 동시에 바위들이 격렬하게 움직였다. 집채만 한 거암이 조약돌처럼 흩날리는 광경은 아무리 능력자라도 가슴 한구석을 서늘하게 했다.
"자, 다들 뒤통수 잘 챙기라고. 언제 깨질지 모르니까!"
미쉘의 새하얀 동공이 빛을 더했다. 그러나 호기로움도 잠시, 그 뒤로 파고 든 명왕의 한 마디는 좌중을 얼어붙게 하기 충분했다.
"후우. 나까지 나설 일이 없기를 바랐건만…"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던 명왕이 마침내 묵직한 한 걸음을 옮겼다. 일순간에 주변을 감싸는 존재감. 압도적인 기세에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명왕에게 쏠린다.
"조금 거칠더라도 이해해 주시게. 그럼, 부디 살아서 만나세."
슬쩍 들리는 손. 그와 동시에 사방이 하얗게 물들었다. 그리고 귀청이 떨어질 듯한 굉음이 사위를 채웠다.
잠시 시력과 청력을 잃은 앤지는 급하게 눈을 문지르고 상황을 파악했다. 마침내 파악한 하얀 섬광의 정체는 다름 아닌 번개였다. 사방 모든 것에 작렬하며 이글거리는 전류는 마치 신의 심판이 땅 위로 강림한 것 같았다. 번개에 직격당한 바위들은 산산이 깨져나가 있었고, 미쉘 또한 낭패한 표정으로 번개를 방어했다. 그녀에게 여유는 없어 보였다.
'루이스! 트리비아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앤지의 눈에 두 사람이 들어왔다. 주변에 흩어진 결정 조각과 검은 박쥐의 잔재를 보니 다행히 살아있는 것 같지만 번개에 그슬린 둘은 이미 의식을 잃고 있었다. 그 광경을 눈에 담은 앤지는 자신의 마음이 완전히 검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무엇인가가 끊어져나갔다.
훗날 앤지는 회상했다. 그때의 자신은 잠시 정신을 잃은 게 아니었나 하고. 그녀는 그 순간을 영원히 떠올리지 못했다. 의식은 희미했고, 눈앞은 어둠으로 뒤덮였으니까.
암흑으로 채색된 시야가 정상을 되찾았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나 있었다.
새하얀 겨울로 물든 산 곳곳에 검은색 불길이 날름거렸다. 그녀의 눈을 가린 어둠은 다름 아닌 검은 불꽃이었다. 신기하게도 그 불길은 루이스와 트리비아, 미쉘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그리고 수가 줄어든 회사의 사람들은 굉장히 낭패스런 안색으로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 그 사이에는 처음 보는 얼굴의 여성도 끼어있었다.
"괜찮으신가? 눈의 여왕."
앤지는 자신이 누군가의 품에 안겨있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곳에는 지친 얼굴의 명왕이 있었다.
"이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요?"
헨리 밀러 3세는 애틋한 눈길로 앤지를 내려다보았다. 앤지의 모습 위로 오랜 벗의 모습이 겹쳐진다. 명왕은 먼저 떠나버린 야속한 친구에게 잠시 투덜거렸다.
'못된 사람 같으니. 떠나면서도 남길 것은 다 남기고 갔구먼. 그래, 만족스러운가? 자네의 유산은 마침내 이 아이에게 모두 전해졌다네. 그러니 편히 쉬어도 좋다네. 하이드, 나의 벗이여…'
앤지는 멍하게 주변을 둘러보았고, 일행들이 시야에 잡히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다행히 셋 중 누구도 생명의 지장은 없어 보였다. 앤지는 크게 안도했다.
쟈크와 터커의 죽음은 그녀에게 너무나 큰 짐이었고, 지킬 수 없는 무력함을 통감케 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이 손에 남은 것만이라도…. 오직 그것만을 바랐기에 지금까지 싸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바램을 이루어 낸 것이다. 저기 있는 모두의 힘으로.
앤지의 뺨 위로 눈물이 달리고, 끝없는 사의(謝意)가 그녀의 심장을 채워갔다. 누구에게 바치는지도 모르는 감사를 끝없이 되뇌인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명왕은 앤지가 진정을 찾을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고, 곧 침착해진 그녀를 정중하게 내려놓았다. 옷매무새를 다듬은 앤지는 상황설명을 요구했고, 그녀가 의식을 잃은 사이에 일어난 일은 앤지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몸에서 검은 불길이 터져 나오는 순간(앤지는 그제서야 자신 또한 능력자가 된 것을 깨달았다.) 명왕은 전력으로 번개를 다루어 흑염을 억눌렀다. 그 와중에 저기 있는 여성(그녀의 이름은 드니스라고 했다)이 등장했고, 그녀는 명왕과 눈빛을 주고받고는 재스퍼를 공격했다. 명왕 또한 재스퍼에게 번개를 집중했고, 크게 놀란 재스퍼는 그 자리에서 재빨리 몸을 빼내었다. 명왕은 재스퍼의 추격을 지시했고 그 서슬 퍼런 기세에 회사의 몇몇은 즉시 그 뒤를 따랐다.
거기까지 말한 명왕은 목을 한번 축이고서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사실, 하이드의 죽음과 더불어 모든 것이 이상하리만치 잘 흘러갔네. 단추를 꿰는 것도 실수가 있는 법인데, 현실의 상황이 판에 박은 듯 진행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래서 난 드니스에게 은밀히 진상을 조사하도록 부탁했네. 역시 음모가 있었지. 음모의 배후에는 안타리우스라는 조직이 개입되어 있었네. 재스퍼는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첩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고."
재스퍼는 안타리우스의 주구가 되어 연합을 파멸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자신의 아버지가 희생되고 헤아릴 수 없는 피해가 발생했다. 얼굴조차 모르는 아버지였지만, 그들이 아버지와 쟈크를 해친 원흉이라는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앤지는 안타리우스라는 조직에 대한 증오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고 소리 높여 선언했다.
"이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실행하는 안타리우스라는 단체, 결코 좌시하지 않겠어요. 연합을 재건함과 동시에 그들과 결판을 내겠어요. 내 모든 것을 걸고!"
그녀의 주변으로 검은 불꽃이 타오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명왕은 그녀에게 정중하게 목례했다. 자신과 동격의 상대에게 바치는 경의. 이제 앤지는 가련한 공주가 아닌, 연합의 여왕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눈의 여왕, 당신의 의견을 존중하겠소. 그리고 지금 이 시간부로 헬리오스는 지하 연합에 대한 모든 적대행위를 중지하겠소. 당신이 아니었다면 양 조직이 전부 파멸했겠지.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리오, 눈의 여왕이여."
앤지는 눈의 여왕이라는 낯간지러운 명칭에 당혹감을 느꼈다. 예전부터 가끔 불리었던 공주라는 명칭보다 훨씬 과한 칭호. 앤지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여왕이라니, 당치도 않아요. 저는 아직 모자랍니다. 너무 과분한 명칭을 거두어 주세요."
명왕은 빙그레 웃으며 다시 한 번 말했다.
"여왕이여, 그대는 이 눈보라의 대지에서 왕위를 쟁취해냈소. 스스로 왕을 칭하고 자신의 손으로 텅 빈 왕관을 취했지."
명왕은 그 뒤의 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래, 자네의 아버지 하이드가 그랬던 것처럼…'
잠시 숨을 돌린 명왕은 곧바로 말을 이어갔다. 앤지는 그의 입을 막고 싶었다. 막상 타인의 입으로 들으니 부끄럽기 그지 없잖은가.
"모자랐던 자격의 정당함은 저들의 충성과 그대의 능력으로 입증되었고, 허무했던 왕관은 겨울이 품은 보석으로 찬연히 빛나고 있지. 지금의 그대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을 자는 없으리. 그러니 그대를 눈의 여왕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그 누가 여왕이겠소?"
겨울의 보석을 운운하는 명왕의 눈길이 루이스에게 닿았다. 앤지의 따스한 눈빛이 그 뒤를 이었다. 아아…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앤지 헌트는 없었겠지. 바로 저 사람이 나의 수호자, 나의 영웅, 그리고 나의 보석이구나.
명왕 또한 루이스의 활약상을 전부 보고받았기에 그 놀라운 위업을 이해하고 있었다. 루이스야말로 앤지의 왕관을 장식하기에 걸맞은 고귀한 겨울의 보석인 것이다.
앤지는 그걸 깨닫고서 입을 다물었다. 낯부끄럽지만 아무래도 명왕은 눈의 여왕이라는 호칭을 관둘 기미가 없었다. 살짝 한숨을 쉬고는 다시 명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후일 2차 능력자 전쟁이라 불리울 대립을 종결시키는 마지막 말을 꺼내었다.
"어쩔 수 없군요. 나 눈의 여왕, 지하 연합의 수장인 앤지 헌트는 그대 명왕, 헬리오스의 헨리 밀러 3세에게 공식적인 종전을 요청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물론이오. 명왕의 이름과 밀러 가문, 회사의 모든 것을 걸고서 화평에 찬성하오. 이제 전쟁은 끝났소."
훗날 이 선언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앤지의 코드 네임이 스노우 퀸(Snow Queen)이 되자 그녀는 다시 한번 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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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전쟁은 끝났다.
사람들의 입에서는 전쟁의 후일담들이 확대 재생산되어 끊임없이 퍼져나갔다. 유럽의 전역에 연합의 2대 수장 앤지 헌트와 새로이 등장한 에이스인 루이스의 이름이 알려지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앤지와 루이스의 행보에 열광했다. 현대에 다시금 펼쳐진 신화. 기적으로 가득 찬 그들의 여정에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고난의 시작, 시련의 초래, 마침내 그것을 극복하고 역사에 새겨질 업적을 달성한 두 사람. 그리고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루이스의 공훈에 사람들은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능력자들의 세계가 존재하는 한 결코 잊혀질 리 없는 영웅전설(英雄傳說). 전설은 또 다시 새로운 영웅을 낳아 쉼 없는 역사의 흐름을 그려나갈 것이다.
세인들은 오래도록 찬가를 부르리라. 눈의 여왕과 겨울의 보석이 달려나간 궤적을 추억하면서……
= 영웅전설-눈의 여왕, 겨울의 보석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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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가이신 김노스님의 블로그 : http://blog.naver.com/dbzlanfk825
루이스와 로라스 전투의 일부분은 파헬벨님의 용과 주정뱅이에서 빌려왔습니다. 다시 한번 허락해주신 파헬벨님께 감사드립니다.
저와 고락을 함께 한 김노스님께도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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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1 - 예엽님의 오타지적으로 벨저 대사의 회사를 연합으로 수정합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P.S 2
3번째 베스트네요. 선정해주신 조커팀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최근의 오프라인 예선때문에 몹시 다망하신 듯 한데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사이퍼즈가 언제나 건승하길 바랍니다.
P.S 3 문자메일님의 오타지적으로 후반부의 연합->회사로 수정합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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