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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팬픽]신비롭게 피어나라, 동방의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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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ta [47급]

2011-11-15 22:48:16

 

 

 

본 팬픽에는 일부 역사적 사실이 등장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전부 작가의 설정에 의한 허구이며, 그것에 대해 논박을 벌이실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본 팬픽은 린에 대한 정보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을 당시의 일부 정보를 토대로 만들어졌으며,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약 2주 전이기 때문에 이야기 자체가 거의 완전한 창작입니다. 따라서 이클립스의 공식 배경스토리와 상이한 구조를 가지기에 이 또한 거부감을 느끼실 것 같으면 뒤로가기를 눌러주십시오.

 

생각 외로 다크한 린 배경스토리라 밝고 희망찬 미래를 그리는 이 팬픽을 공개할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쓴 게 너무 아까워서 올립니다. 그럼 즐감하세요.

 

 

-두번째 베스트입니다. 부족한 작품을 선정해주신 조커팀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더불어 재미있게 감상해주신 독자 제현들께서도 좋은 하루 되십시오. 선정되신 다른분들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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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롭게 피어나라, 동방의 불꽃-

 


 

1920년, 동북 아시아의 조선이라 불리웠던 반도.

 

 한반도 태백산맥의 지류에 자리잡은 마을. 20여 호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조그마한 마을은 화전과 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가호별로 아이 하나 둘씩은 꼭 있었기에 여물지 않은 활기가 넘치는 이곳이지만, 그런 축복을 받지 못한 부부가 한 쌍 있었다.

 

 최근에 마을에 흘러 들어온 이 부부는 남편의 성이 서씨였는데, 이런 외진 곳에 자리잡은 사람답지 않게 글을 깨우치고 있었으며 성품이 온건하고 공정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빠르게 인정받아갔다. 그는 마을의 대소사에 언제나 힘을 보탰으며 글귀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만사를 제쳐두고 일을 돌보아 주었다. 그런 서씨를 마을 사람들은 서 첨지라 부르며 존경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소문으로는 서울에서 꽤 세도있는 양반댁이었다느니, 그게 아니라 정승댁의 서자 출신인데 주변을 못 견뎌 이곳까지 왔다느니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서 첨지는 그저 허허 웃어넘길 뿐이었다. 소문은 소문이고, 진실을 말해 줄 부부는 그저 허허 웃을 뿐이었기에 결국 마을 사람들도 소문은 소문일 뿐이라 하며 술자리의 농지거리로나 삼았고, 서 첨지 부부를 마을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해주었다.

 

 하지만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랴. 어느덧 부부는 불혹의 때를 넘겼지만 슬하에 자식 하나 없는 것은 큰 시름이었다. 마을 서낭당에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도 해보고, 영험 있다는 곳은 전부 다녀왔으며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온갖 방법을 시도해 보았지만 부인에게 태기는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서 첨지는 그러한 부인에게 타박조차 하지 않고 그저 아껴주며 사랑해주었다. 이 금슬좋은 부부는 단 하나의 근심거리 외에는 참으로 행복한 삶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밝은 보름달이 휘영청 뜬 깊은 밤에 서씨의 부인은 천길 꿈 속을 헤메이고 있었다.

 

 

 

 

 -아니, 대체 이곳이 어디일까...

 

 부인은 살면서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풍경 속에 서 있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산이라고는 없는 광활한 평야. 반 평생을 산에 둘러싸여 살아온 부인에게는 참으로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중에 문득 평야 한 가운데에 솟아있는 나무 하나가 보였다. 긴 풀이 휘날리는 평야에도 단 한 그루 서 있는 나무. 처음 보는 노란색 과실이 열려있는 나무는 이상하게도 부인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이것이 꿈이라고 명확하게 인지하는 부인은 이것이 태몽일까 기대하며 처음 보는 나무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탐스러운 노란빛이 감도는 둥근 과일에 손을 뻗는 순간, 발목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낀 부인은 소스라치며 밑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드넓은 평야에는 새파란 물이 차오르고 있었고, 혼란에 빠진 부인은 지푸라기라도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부인의 손목을 잡는 부드럽고도 강인한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에그머니, 이게 무슨 조화인지...

 

신비롭게도 그 손길이 손목을 잡자 부인은 물 위에 서 있을 수 있었고 이런 조화는 아무래도 신령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자신의 손목을 잡은 손등만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머리를 푹 수그린 부인의 귓가로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부인, 두려워하지 마시고 고개를 드십시오."

 

그제서야 쭈뼛쭈뼛 얼굴을 든 부인은 다시 한번 경악했다. 선풍도골의 선인이 아닌 밝은 갈색에 푸른 눈을 가진 색목인 남성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희한하게 도포를 걸치고 상투를 틀고 있으니, 순간 맥이 빠진 부인은 약간 날 선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어찌하여 외간남자가 임자 있는 아녀자의 손목을 함부로 잡는 것입니까. 도움을 받았으니 크게 책할 순 없으나 남녀가 유별하니 어서 손을 떼시지요.

 

 순간 살짝 얼빠진 표정을 지은 색목인은 순순히 부인의 손을 놓아주었지만 이미 산통은 다 깨져 있었다. 슬쩍 뒷통수를 긁던 이 남성은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부인에게 말을 걸었다.

 

 "으음... 이렇게 갑자기 만나게 된 것이 결례임은 알지만 부인에게 꼭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이 예의바른 색목인 남성은 간절한 목소리로 부인에게 호소했고, 어차피 이것이 꿈인 것을 잘 아는 부인은 대체 무슨 곡절이 있기에 꿈에서나마 자신을 찾아왔는지 궁금증이 일기 시작했다.

 

 -조선 팔도에 서양의 사람들이 들이치고 있다는 사실은 풍월로 들었지만 제가 사는 마을에는 전혀 연이 없는데, 어찌하여 저의 꿈 속에 나타나신 것인지요.

 

 다행히 부인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자 남성은 기뻐하며 말을 이었다.

 

 "많은 것을 얘기해드릴순 없습니다. 저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며, 그것을 무릅쓰고 이렇게 부인을 찾아 온 이유는 꼭 한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입니다."

 

 -부탁...이라니. 그저 시골 아낙네인 저한테 무슨?

 

 "부인은 오랜동안 아이를 가지지 못한 걸로 압니다. 그것은 부인의 탓이 아니라 부인의 업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순간 억장이 무너져 내린 부인은 눈물이 또르르 뺨을 굴러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혹시나 혹시나 했지만 자신의 팔자가 그랬다니. 남편과 지금은 세상에 없는 시부모님에게 너무나 큰 죄를 지은 것이다. 그것을 본 남성은 황급하게 말을 이어갔다.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그 업이 부인의 잘못에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부인의 아이가 가져야 했던 인연의 끈이 세상에 태어날 다른 아이가 빼앗아 가서 그리 된 것입니다."

 

 -하오면... 제 배 아파서 낳은 아이가 아니더라도, 다른 아이가 저에게 찾아온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그 아이와도 큰 인연을 가진 자이며, 그 아이가 겪을 고난을 잘 압니다.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기에 이렇게 꿈 속에서나마 부인을 만나고자 한 것입니다."

 

 -아아, 고난이라니요. 낳은 어미에게조차 버림받은 그 아이에게 또 무슨 고난이 찾아올 거란 말씀이신가요? 그리고 저는 또 그 운명을 어찌 받아들어야 하나요...

 

 소리죽여 흐느끼는 부인을 앞에 두고 이 남성은 잠시 침묵했다. 생전에는 그도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세상의 무엇보다 사랑하고 아껴주었으니까. 이미 예견된 숙명 앞에서 이 여인은 끝없는 슬픔을 안고 살아가야할 것이다. 그런 잔인한 결과를 알려주어야 하는 자신의 운명에도 자조의 미소를 보내며 다시금 당부의 말을 전했다.

 

 "마음 단단히 먹으셔야 합니다. 잠에서 깨어나면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실 수 없을 겁니다. 그것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하여 꼭 기억하실 것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이 광경만은 기억하실겁니다. 저 나무는 오렌지 나무라고 합니다."

 

 -오...어...어린쥐? 무슨 이름이 그렇다죠?

 

 "꽤나 네이티브한 발음이십니다만, 대충 그렇게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부인의 태몽으로 기억될 것이니, 잊으시진 않을 겁니다."

 

 중간에 알아들을 수 없는 말도 있었지만 부인은 기억에 새기며 다짐했다. 푸른 물이 차오른 너른 평야. 그 한복판에 솟아오른 오...오... 어린쥐 나무. 이것이 나의 태몽. 나의 아이를 보내 준 계시.

 

 "그리고, 언젠가 그 아이가 먼 곳으로 떠나는 순간이 올 지 모릅니다. 저 또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지만 그런 때가 온다면, 그 아이에게 힘이 되어줄 단 한마디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 그리하겠습니다. 말씀해 주세요.

 

 "[저 바다 너머로 오렌지 잎을 피워올리리]. 이것입니다. 꼭, 꼭 전해주셔야 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이걸로 끝인가요.

 

 "예, 이제 떠날 시간이 다 되어가는군요. 부인에게 짐만 지워놓는 것 같아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어떻더라도 저에게 자식이 온다고 하면 전부 감내해야지요. 잘 키워서 나라의 동량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얘기해주시니 마음의 짐이 조금 덜어지는군요. 부디 힘내십시오, 부인. 그대와 아이의 앞날에 영광의 햇살만이 비춰지기를."

 

 처음 보는 동작. 남자는 정중하게 한쪽 무릎을 물 위에 대고 꿇더니 부인의 손을 조심스레 받쳐올려 가벼운 입맞춤을 손등에 남겼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만큼은 부인도 망측스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아마 이 남성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예를 표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고개를 든 남성의 얼굴을 보자, 잊기 어려운 특이한 모습이 드러났다. 상투로도 감춰지지 않는 풍성한 갈색의 곱슬머리 아래에는 오른쪽 귓바퀴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에 대해 뭐라고 묻기도 전에 부인의 시야는 순식간에 암전되어버렸다.

 

 

 

 


"허-억."

 

"으...음? 부인, 무슨일이오?"

 

식은땀에 흠뻑 젖어 일어난 부인을 따라서 서 첨지도 잠이 깨었다. 둘 다 잠버릇이 없었기에 이런 일은 꽤 당황스러웠다. 잠시간 호흡을 다스린 부인은 헝클어진 기억을 다스렸다.

 

 꿈, 꿈이었는데. 너무나 선명한 기억이었는데 그 잠깐의 사이에 끝 모르게 흐려져 간다. 간신히 잡아챈 기억의 끝에서는 하나의 풍경과, 하나의 문장과, 하나의 얼굴만을 건져낼 수 있었다. 기억하는 순간 잊을 수 없는 선명한 낙인. 너른 평야에 차오르던 바닷물. 그 한복판에 서 있는 오...어...어린쥐 나무. 그리고 오른쪽 귀가 없던, 갈색 곱슬머리와 푸르게 빛나던 눈동자. 마지막으로 [저 바다 너머로 어린쥐 잎을 피워올리리]라는 말.

 

 이제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할 이 기억을 떠올린 부인은, 갑자기 몹시 슬픈 기분이 드는 것을 느꼈다. 가눌 수 없는 감정의 격류에 겁먹은 부인은 어떻게든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밖으로 바람을 쐬러 나가려 결심했다. 조심스레 이불을 들치고 일어나자 서 첨지가 걱정스레 물어왔다.

 

"부인, 이 시간에 어딜 나가시려 하오?"

 

"잠시... 잠시 바람 좀 쐬고 올게요. 땀 때문에 옷이 다 젖었군요."

 

완전히 탈력한 듯한 목소리에 더욱 걱정이 되었지만 차마 말리지 못한 서 첨지는 그러라고 손짓했다. 부인은 옷을 추스르고 장지문을 열어 마루로 나갔다. 그리고 또 다시 경악했다.

 

"여...여보! 여보! 이리 나와보세요! 어서요!"

 

"무, 무슨 일이오! 뭐요? 산짐승이오?"

 

놀라서 뛰쳐나온 서 첨지의 눈에도 놀라운 광경이 들어왔다.

 

대문 앞을 노니는 푸른 불꽃들. 불 붙은 나뭇잎이 바람에 날려도 저럴까 싶을 정도로 까불거리는 움직임은 저것이 결코 자연스럽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하나였던 불꽃들이 하나 둘 수를 늘리더니 대문 바깥쪽을 어지러이 날아다녔다. 이 비현실적인 광경에 서 첨지 부부는 넋을 잃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허어, 이것이 도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괴력난신 따위는 이 땅에 감히 발붙이지 못할 것이거늘... 저것은 대체...!"

 

그렇게 탄식하는 서 첨지의 귓가로 희미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작지만 확실하게 들려온 울음소리에 서 첨지는 흠칫 하고 부인에게 물어갔다.

 

"부인, 방금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셨소?"

 

"그런 것 같아요. 분명히 아이 목소리였어요. 저 대문가에서..."

 

여전히 푸른 불꽃이 뛰노는 대문 바깥쪽을 지그시 노려보던 서 첨지는 이윽고 결심을 굳힌 듯, 주먹을 불끈 쥐고 달려갈 태세를 갖추었다.

 

"거기 알 수 없는 요망한 것들아! 세상의 도리가 엄정하게 서 있거늘 어찌하여 괴력난신이 산 사람을 희롱하는 것이냐! 너에게 사람을 해칠 의도가 없거들랑 피안 속으로 사라지고 할 말이 있거들랑 서둘러 고하지 못할까!"

 

고함을 지르며 대문쪽으로 달려가는 서 첨지. 그 기세에 짐짓 겁먹은 듯 살짝 움츠러든 불꽃들은 다시금 재밌다는 듯 일렁거리며 물러서갔다. 그것을 본 서 첨지는 더욱 기세가 살아 대문을 부수듯이 열어젖히며 튀어나갔고, 그 순간 푸른 불꽃들은 폭발하듯 터져나가며 그 존재를 감추었다. 그 광경에 얼떨떨해진 서 첨지는 자기도 모르게 발을 멈춰섰고, 이윽고 귀청을 떨구는 듯한 우렁찬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니, 왠 아이가..."

 

울음소리를 찾아 눈길을 돌리자 강보에 둘러싸인 아이가 바닥에 놓여져 있었다. 아이는 무엇이 그리 섧은지 귀청이 떨어져라 울었고, 당황한 서 첨지는 자신도 모르게 강보를 안아들고 얼레주기 시작했다.

 

"아이야, 울지 말아라. 어허, 착하지. 뚝. 어루루루..."

 

신기하게도 서 첨지가 아이를 안아들고 달래기 시작하자 울음을 뚝 그치는 아이. 서 첨지가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 생각한 것일까. 어느새 활짝 웃으면서 서 첨지의 수염을 잡아당긴다. 이 맹랑한 아이에게 그 순간 마음을 전부 빼앗긴 서 첨지는 수염을 당기는 손길조차 사랑스러웠다.

 

"어이쿠, 아프다. 아가야, 수염이 다 뽑히겠구나. 나중에도 잡고 싶거든 어서 놓아라. 어이쿠."

 

그런 서 첨지의 옆으로 조심스레 다가온 부인은 아이를 보자 왠지 모르게 눈물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기쁨과 서러움이 섞인듯한 복잡한 감정은 당사자인 부인마저도 뭐라 설명할 도리가 없는 감정이었다. 부인은 서 첨지에게서 살며시 아이를 받아들었다. 밝은 보름달 아래 부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이의 눈망울은 짙은 쪽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어쩐지 모르게 꿈에서 본 남성의 눈동자를 연상시켰다. 아아, 역시 그 꿈은 태몽이었던 것일까. 자신에게 아기를 보내어 준 천지신명에게 끝없는 감사를 드리며 부인은 소리 죽여 흐느꼈다.

 

"하늘도 당신을 갸륵히 여기었나 보오. 이렇게 놀라운 방법으로 아이를 내려주시다니 말이오."

 

"그러한가 봅니다. 아아, 아가야. 이제부터는 내가 너의 어미이니라. 응, 그래. 착하다, 착해."

 

서 첨지 부부에게 둘러싸인 아이는 행복하게 미소짓다가 그 얼굴 그대로 곤히 잠들었다. 티 없이 해맑은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던 부부는 문득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역할은 서 첨지가 맡게 되었다.

 

"이름...이름이라. 도깨비불이 지켜 준 아이. 그래. 린(燐). 린이 좋겠소. 도깨비불 린 자. 어떠하오?"

 

"린... 린.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아가야, 인제 너는 린이다. 서 린. 잘 왔다. 린아..."

 

린을 감싼 강보 안에는 아이의 정체를 짐작할 만한 어떤 물건도 없었다. 다만 아이의 양 옆으로 고색창연한 놋쇠방울이 한 쌍 들어있을 뿐이었다. 두 개의 방울이 하나를 이루는 이 물건만이 유일한 단서였지만, 혹시나 해서 방울 네 알을 샅샅히 살펴보아도 특이한 것은 없었다. 다만 그 소리가 아주 청명하며 신비로운 울림을 가졌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부인은 어딘지 그 모습이 꿈에서 본 어린쥐 열매와 닮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사연있는 물건일 것이오. 잘 보관해 두도록 합시다."

 

"예. 아이가 춥겠습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어이쿠, 내 정신좀 보오. 서두릅시다. 탈이라도 나면 큰일이오."

 

허둥지둥 안방으로 들어가는 서 첨지 부부의 머리 위에선 모든 것을 아는 듯 요요로이 빛나는 보름달만이 온 세상을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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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허억, 험하다고는 들었지만 정말 놀랍군요. 김 서방, 이게 겨우 산맥의 지류란 말이지요?"

 

"어이쿠, 말도 마십쇼. 저 산맥 깊은 곳은 평생 산에서 살아온 사냥꾼들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합죠. 여기는 그래도 사람이 다니는 곳이니 이정도인 겁죠."

 

"훅, 후욱, 이 나라는 정말 신기하군요. 어떻게 이런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지 원. 헥, 헥."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합죠, 나으리. 이 땅의 백성들을 조건 없이 품어줄 곳은 오로지 산 뿐입죠. 근데 그건 제쳐두고, 갑자기 왜 이런 곳으로 오시자고 하신 겁니까요?"

 

"아... 별건 아니고요. 상인답게 이 땅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낱낱히 보고싶어서...아이쿠, 죽겠구나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험한 산길을 오르는 두 남자. 둘 다 유창한 조선말로 대화하고 있지만 한 사람은 놀랍게도 서양인이었다. 서울에서도 보기 드문 서양인이 태백산맥의 지류를 오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실 남사스러워서 말은 못했지만, 이 남자는 며칠간 꿈 속에서 크게 시달렸다. 잠만 들었다 하면 누군지 모를 목소리가 계속 메아리친 것이다. 이곳으로 가거라. 이곳으로 가거라. 그 말과 함께 선명하게 떠오르는 지형은 뇌리 깊숙히 새겨졌고, 견디다 못한 남자는 자신의 기억에 새겨진 풍경을 아는 사람을 수소문해 마침내 이곳까지 다다른 것이다.

 

"허 참, 여기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외딴 곳인뎁쇼. 아마 서울 사대문 안에 여기를 아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을 겁니다요. 이것도 인연은 인연인갑는디... 여튼 나리도 참 희한한 분이란 말입죠. 어찌 왠만한 조선사람보다 언문에 능통하십니까요?"

 

"하아, 하아, 이 땅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언어가 얼마나 대단한지 잘 모르는것 같아요. 참 안타까운 노릇이죠. 그리고 글자를 만드신 왕, 세종... 이라는 왕이셨나요? 그 분은 분명 대단한 천재이셨을 겁니다. 그런데도 그 훌륭한 문자를 언문이라고 무시하며 천대하다니, 그 분이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하실겁니다."

 

그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자신의 나라에서도 꽤나 수재로 인정받는 그였지만, 유럽의 어떤 언어 문자체계와도 다른 조선의 말과 훈민정음이라는 문자는 그를 놀라게 하기 충분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익히기 쉽고 쓰기도 쉽다. 문자와 언어를 익힐수록 세종에 대한 존경심은 커졌으며, 그것은 이 땅에 대한 애정으로 자리잡아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놀라운 학습 능력을 발휘해 조선 사람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조선말을 능통하게 구사했으며, 훈민정음 스물 넉자 또한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그로 인해 남자는 서울 안에서 편하게 자리잡을 수 있었으며, 그의 먼 선조가 발자취를 남긴 땅을 다시 한번 탐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옛 조상님도 이런 산은 오지 않았나보군요. 한 마디 언질이라도 해 놓으셨으면 좋았을 것을. 으으... 종아리, 허벅지가 떨어질 것 같군요."

 

"조금만 더 힘내십쇼. 말씀하신 마을은 저기 고개만 하나 더 넘으면 나올 겁니다요. 힘을 써야 할테니 잠시 저 바위 아래에서 쉬는게 좋겠습니다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서양인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 걸음을 옮겼다. 과연 그곳에는 널찍한 바위 하나가 자리잡고 있었다. 소나무 그림자로 가리워진 그 반석은 많은 손이 스쳐지나갔는지 반질반질하게 닳아있어 드러눕기 딱 좋은 모양새였다. 쓰러지듯 누워버린 서양인의 굴곡진 이마 위를 시원한 산바람이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이 남자는 마음 깊숙히 생각했다. 역시 이 땅은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곳이라고.

 

그렇게 퍼질러져 쉬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 한 쌍의 눈동자가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두 눈동자는 수풀 속에 잠긴 채 이방인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눈길은 한번도 보지 못한 서양인에게 향해 있었다.

 

"음? 뭔가 기분이 이상한데... 김 서방, 이 주변에 짐승이라도 있는 걸까요?"

 

"어이쿠, 그런 소리 마십쇼. 언제 호환이 닥칠 지 모릅니다요. 이런 깊은 산중에서는 산군님의 자비만이 살 길입죠. 그러니 조용히 땀만 식혔다가 어서 발길을 재촉합시다요. 산의 해는 금방 저뭅니다요."

 

"그런가요. 그럼 조금만 더 쉬었다가 일어납시다. 일단 지금은 호랑이건 뭐건 아무것도 못하겠으니까요. 아이고, 시워~언하다. 어이구구..."

 

머리칼과 눈동자와 피부를 빼면 조선사람과 완전히 동화되어버린 이 남자는 이상한 느낌을 떨쳐버리고는 바위 위에서 뒹굴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서늘함에 중독되어버릴 것만 같았지만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순 없었다. 잠시간의 꿀같은 휴식을 뒤로 돌린 채 두 남자는 고갯길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그 광경을 끝까지 바라보던 눈동자도 어느 사이엔가 자취를 감추었다.

 

두 남자는 노을이 물들 무렵에 목적하던 곳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리고 서양인은 충격으로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마을의 정경은 꿈에서 보던 것과 한치도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대체 무슨 조화일까. 경악을 넘어서 가벼운 공포마저 느끼며 서양인과 남자는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 보는 서양인에 크게 놀라서 우왕좌왕했다. 서양인과 함께 온 남자가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고, 서양인 또한 유창한 조선말로 거들어서 간신히 사정을 이해시킬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가장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 이 서양사람을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입을 모아서 마을의 유지에게 찾아가보라 말했다. 그리고 마을 외곽에 자리잡은 집까지 몰려온 두 남자는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이제... 좀... 쉬고 싶습니다... 배도 고프고..."

 

"저도 마찬가집니다요, 나으리. 이 집 주인장이 저희를 갸륵히 여긴다면야 신세를 질 수 있을 겁니다요."

 

다행히 집 주인은 손님을 대접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두 사람은 지친 몸을 누일 수 있었다. 사랑방에서 여독을 푸는 두 사람에게 집 주인은 호기심을 가지고 조심스레 접근했다.

 

"말로만 듣던 서양사람은 요괴같이 느껴졌는데 실제로 보니 머리칼과 눈동자를 빼면 다를 것도 없구려."

 

"하하, 세계 어느 땅을 가더라도 사람은 사람이더군요. 그래도 이렇게 편하게 받아주시는 분은 오랜만입니다. 늦었지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객을 편히 뫼시는 것은 집주인의 의무이지요. 과례 또한 실례이니 고개를 드십시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통성명이나 합시다. 필부는 서가올시다. 사람들은 서 첨지라고 부르곤 하지요. 부끄러운 노릇이지만 말이오. 허허..."

 

"서 첨지님이라, 잘 알겠습니다. 저는 유럽의 네덜란드에서 온 상인 레빈 드로스트라고 합니다."

 

"래... 래비? 두로수투? 거 희한한 이름이군요. 물 건너서는 다 그런 이름이랍니까?"

 

"조금 발음이 힘드실 겁니다. 자. 따라해 보십시오. 레, 빈. 레빈. 레빈입니다."

 

"래... 레... 음. 레비... 레빈... 레빈, 레빈. 맞소이까?"

 

"호오, 이렇게 빨리 발음하시다니, 과연 마을 사람들이 추천하실 만 하군요. 뒤의 드로스트는 성이지만, 앞으로는 그냥 레빈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음, 레빈. 이제 좀 익숙해지는구려. 그나저나 성씨가 이름 뒤에 있다니 그거 참 희한한 일이오."

 

"관념의 차이랄까요. 서양과 동양의 이름에 대한 인식이 다르니 그런 겁니다. 파고들면 복잡해지니 그저 그렇다고 받아들이시는게 편할 겁니다."

 

"그렇구려. 그나저나 머나먼 조선의 땅에서도 외진 이곳까지 구라파(歐羅巴 : 유럽의 한자 독음)의 사람이 온 것은 무슨 이유요? 필시 곡절이 있을 것이오만."

 

레빈은 동방의 식자에게 가볍게 감탄했다.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그의 의중을 눈치채다니. 과연 이곳은 한시라도 그를 심심하게 놔 두질 않는다.

 

"식견에 경탄하게 되는군요. 맞습니다. 괴이하게 여기실지 모르겠으나, 저는 꿈에서 보인 풍경을 찾아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꿈...이라? 이건 또 상상 외의 말씀이구려. 당최 무슨 꿈이길래 어려운 발걸음을 하시었소?"

 

"저도 참 당황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보름을 같은 꿈에 시달리면 뭐라도 해보고 싶은게 사람 아니겠습니까?"

 

보름동안 같은 꿈을 꾸었다는 말에 어지간한 서 첨지도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건... 참으로 고통스러웠겠구려. 서나흘도 아니고 보름을 같은 꿈이라니. 허어..."

 

"생각보다 고통스럽진 않았습니다. 그저 이 마을의 정경과 함께 이곳으로 오라는 목소리만 들려왔으니까요. 뭐, 좀 쇠약증상이 오긴 했습니다만."

 

쓴웃음을 지으며 토로하는 레빈의 얼굴에는 약간의 근심이 서려 있었다. 일단 이곳까지 온 건 좋았는데, 대체 꿈의 목소리는 무엇때문에 자신을 여기로 인도한 것일까? 그 의문에는 서 첨지도 명확한 대답을 해 줄수 없었고, 결국 레빈과 동행인은 얼마간 서 첨지의 집에서 머물기로 하였다.

 

"이거 참,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그런 걱정이들랑 마시오. 이런 곳에서야 외지의 소식이 언제나 그리운 법이지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방삯이라 여기고 편히 지내시오."

 

"제 비장의 이야기 보따리를 끌르려 하시는군요. 하하, 걱정마십시오. 혼이 쏙 빠질 이야기들을 준비해 놓을테니까요."

 

"기대되는구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내 서둘러 상을 봐오라 이르겠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산을 넘어오셨으면 꽤나 시장하실 터이니..."

 

"염치불구하고 부탁드리겠습니다. 물 말고는 뱃속에 든 게 없습니다. 하핫."

 

이국의 문물은 언제나 레빈을 즐겁게 하는 요소였다. 과연 이 산골마을은 무엇으로 그를 매료시킬까. 우선 조금 뒤 들어올 밥상에 기대를 걸며 레빈은 눈동자를 빛냈다.

 

 

 

 


구들이 따뜻해져옴을 느낀 두 남자는 노곤해지는 심신을 다스리며 식사를 기다렸고, 이윽고 사랑방의 문이 열리며 밥상을 든 여인네가 안으로 들어섰다.

 

"비록 산골의 거친 찬 뿐이오나 허기를 달랠 정도는 될 것입니다. 모자라더라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조용히 말하며 상을 내려놓는 여인네는 얼핏 보아도 불혹의 나이를 넘겼고 시간의 흔적이 아로새겨진 생김새와 손을 가졌지만, 몸짓 곳곳에 배어있는 기품과 또박또박한 발음이 그저 평범한 아낙네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상을 받은 두 남자는 손사래를 치며 부인에게 찬사의 말을 보내었다.

 

"무슨 말씀을. 객에게는 꽁보리밥 한 그릇에 간장 한 종지라도 진수성찬인 법입니다. 과한 겸양 또한 부담이니 그런 말씀 마십시오."

 

"거 부인, 산나물들이 아주 좋구먼 무슨 그런 소릴 하고 있으쇼. 내 이 은혜는 잊지 않겠수. 잘 먹겠수다."

 

그제서야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 부인은 이 예의바른 손님들에게 미소를 지어주려 했지만, 레빈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 몸이 굳고 말았다. 그 때문에 약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그것을 견디지 못한 부인은 급하게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방에 남은 두 남자는 조금 얼떨떨해하며 서로 마주보았다.

 

"어... 저 부인이 갑자기 왜 저러시는 걸까요? 절 보더니 마치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에이, 나으리께선 뭘 그런걸 신경쓰십니까요. 처음 보는 서양 사람인데 어쩌면 당연한 겁니다요. 나만 해도 혼이 빠져나가는 줄 알았으니."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은 있었지만, 김 서방의 말 또한 타당했기에 레빈은 군말 없이 수저를 집어들었다. 어느 새 젓가락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게 된 레빈은 산에서 나온 재료들로 정갈하게 만들어진 나물반찬과 생채, 고추장과 된장을 즐기면서 식사를 시작했다. 푸릇한 식단이었지만 두 남자는 기분 좋은 한끼를 마칠 수 있었다.

 

 

 

 

 


"여보, 참으로 희한한 일입니다. 저 서양 사람의 얼굴이 아주 낯이 익어요."

 

서 첨지에게 급하게 다가온 부인이 말을 꺼내었다. 부부 모두 서양인은 처음 보기 때문에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해야겠지만, 부인만은 달랐다.

 

"부인, 진정하시고 천천히 말씀해 보시오. 우리 부부가 서양 사람이라곤 처음 보는데, 그것이 말이 되오?"

 

"아니, 아니요. 전 처음이 아니지요. 제가 꾼 꿈 이야기를 기억하시나요?"

 

"꿈... 말이오? 혹시 린아를 얻었던 그 날 꾸었던 꿈을 말하는 거요?"

 

"예. 많은 것은 기억나지 않으나, 벌판에 차오르던 물, 한그루 어린쥐 나무, [저 바다 너머 어린쥐 잎을 피워올리리], 그리고 서양 신선님의 얼굴은 꼭 기억하고 있죠."

 

서 첨지 또한 불가사의한 느낌을 받으며 재차 질문했다. 세상에 그런 일이 있기란 어려운 일이었기에 그 또한 다급해졌다.

 

"부인은 혹시 그 서양 신선의 얼굴 때문에 저 레빈이란 사람이 낯이 익다고 하는 거요?"

 

"그래요. 처음 저 래...래... 서양사람의 얼굴을 봤을 때 정말 놀랬어요.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저 사람의 얼굴을 보니 분명 서양 신선님의 얼굴이 떠올랐어요."

 

"부인의 착각은 아니겠소? 부인이 지금까지 본 서양인이라곤 그 둘 뿐이니 어쩌면 구분이 어려울 수도 있소."

 

"아니, 아니예요. 이목구비부터 머리칼 색과 눈동자까지 전부 닮은 꼴이에요. 그걸 착각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에요."

 

이쯤 오자 서 첨지 또한 알수 없는 예감이 신경을 자극하는 것을 느꼈다. 태백산맥의 깊은 곳에 위치한 곳까지 꿈을 따라 온 서양인. 그리고 그 사람은 아내의 꿈에서 린아를 점지해 준 서양 신선과 빼닮았다라.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쩌면 우리 린아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소. 안 그래도 동네에서 좋지 못한 소리를 듣는데, 어쩌면 큰 상처가 될지 모르오. 그러니 린아를 잘 단속하시오. 나도 린아에게 몇 가지 해줄 말을 준비해 둬야겠소."

 

"알겠습니다. 곧 린아를 대려올게요."

 

부부는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을 찾아 동분서주 했다. 하지만 운명의 물레방아는 이미 기세를 얻어 돌아가기 시작했고, 한낱 인간의 힘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힘으로 가속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흐름은 이 평화로운 산골마을까지 다다르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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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뒷산은 그리 험하지 않으면서 먹을거리가 꽤 많은 편이었기에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곤 했다. 하지만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시간까지 아이들이 남아있는 일은 드물었고, 오늘은 그 드문 날임이 확실했다. 한 계집아이가 조심스레 길을 재촉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개암을 많이 주웠어. 어머니께서 좋아하시겠지. 후후."

 

어딘지 어른스럽게 중얼거린 계집아이는 치마 한가득 주워놓은 개암을 조심스레 끌어안고 산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주전부리가 모자란 산골 마을에서 개암 열매는 좋은 간식거리였고, 이것을 주워모으는 역할은 농사일에 바쁜 어른이 아닌 천방지축인 아이들이었다. 낮에는 우르르 몰려 올라간 아이들이었지만 해가 저물기 전에 전부 집으로 돌아갔고, 남은 것은 이 계집아이 뿐이었다.

 

"그런데, 아까 그 사람은 누굴까. 신기했어. 파란 눈에 갈색 머리칼이라니. 흐흥..."

 

아무리 철없는 아이들이고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산이라지만 어린 여자 아이를 혼자 두고 내려온다니,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종종거리며 산을 내려오는 계집아이의 외견을 보아하니 그 이유가 짐작되는 곳이 있었다.

 

아이의 머리칼은 아주 짙은 갈색이었다. 분명 먹빛에 가까운 색이었지만 햇빛에 드러내면 갈색으로 빛나는 머리칼은 마을에서 아이 혼자 뿐이었다. 피부도 이상하리만치 하얗고 고왔으며, 특히 똘망똘망한 두 눈동자는 몰라볼 수 없는 쪽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두고 보자면 꽤나 고운 자태였지만 하나 하나 꼽아 보자면 분명 이질적인 이 외모 때문에 아이들 사이에서는 백안시 되었고, 동네의 어른들 또한 귀신의 자식이 아닌가 수군대는 판국이었다. 뭇 아이라면 큰 상처를 받았을 지도 모르지만, 철이 들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 엄격한 훈육을 받은 이 아이는 상당히 조숙했고 그 덕분에 자신의 마음을 잘 지켜낼 수 있었다.

 

"아, 너무 늦었나보다. 해가 거의 저무는구나. 어두워지기 전에 내려가야 하는데..."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아이에게 아무런 영향이 없을 수야. 이 아이는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진 나머지, 버릇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게 된 것이다. 이것이 아이들에게는 더욱 기묘하게 비추어져 더욱 더 심한 따돌림을 받게 된 것이다. 물론 어른들이야 다 함께 사이좋게 지내라고는 하지만, 어디 아이들끼리 그렇게 되던가. 함께 산에 올라갈 때야 우르르 몰려갔지만, 정작 산에서는 아무도 이 아이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것이다. 결국 깊은 산 속까지 혼자 들어간 계집아이를 내버려 두고 나머지 아이들은 전부 집으로 가버렸고, 계집아이는 혼자서 산을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별 수 없구나. 조금 위험해도 지름길로 가는 수 밖에."

 

계집아이는 방향을 바꾸어 걸음을 옮겼다. 그 끝에는 약간 가파른 경사가 있었는데, 이곳으로 내려가면 곧 바로 계집아이의 집으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물론 대여섯살 먹은 아이가 내려가기엔 위험했지만, 산골 아이들이 다 그렇듯 다람쥐같이 날랜 동작으로 조심조심 경사를 내려갔다. 그 와중에 문득 고개를 돌리니, 꽤나 고운 산꽃이 돌 틈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계집아이는 그 자태가 한 눈에 맘에 들었고, 이것을 부모님께 가져다 드리면 몹시 기뻐할 것이라 여겨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위태롭게 뻗은 손에 꽃대궁에 닿고 그것을 잡는 순간, 아이의 발을 받치던 흙덩이가 부스러져버렸다. 아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레빈은 사위가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마을을 한바퀴 둘러보고 다시 서 첨지 댁으로 와 있었다. 그리고 이 마을이 꿈 속에서 보여준 곳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내가 여기로 와야할 이유라곤 없는데. 그 목소리는 나에게 뭘 원하는 건가.'

 

고민에 빠진 레빈은 이윽고 머리를 내저으며 상념을 털어버렸다. 어차피 즉홍적으로 와 버린 이상, 충분히 시간을 들여 그 이유를 찾아보리라 편하게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레빈은 뒷마당에 있는 도끼로 장작을 패면서 기분전환을 하기로 했다. 방과 식사를 대접받은 보답을 할 겸 해서.

 

"엇차. 도끼질이란게 익숙해지면 의외로 재밌다니까. 나도 조선 사람이 다 되어가는군. 하핫."

 

실없이 웃으며 장작을 패는 손길은 꽤나 익숙했고 장작 또한 시원하게 쪼개져 나갔다. 계절이 추울 때가 아니라 몇 없던 나무들은 순식간에 쪼개어져 정리되었고, 잠시 허리를 펼 시간을 가진 레빈은 태양이 마지막으로 빛을 발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무언가가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자그마한 아이라는것을 깨닫자마자 레빈은 두번 생각할 것 없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펼쳤다. 그것이 아니고서야 속도가 붙어 떨어지는 아이를 무사히 받아내기란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우-와-아아아앗!"

 

마음을 쥐어짜낸다. 머릿 속이 터져나가라 힘을 준다. 재능이 모자란 그가 '초상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고통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시가 급한 때. 모든 것을 무시하고 가문의 피에 새겨진 '염동력'을 전개한다!

떨어지던 몸뚱어리를 희미한 푸른빛이 휘감는다. 그리고 급격하게 속도가 줄어들더니 마치 깃털이 내려앉듯 부드럽게 레빈의 품에 안겨왔다. 지나친 과부하에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레빈은 품 안의 아이를 조심스레 들여다보며 어딘가 다친 곳이 있진 않은지 살폈고, 다행히 놀라서 혼절한 것 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잠시동안 완전히 탈진해버린 레빈은 이 아이를 서둘러서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가장 가까운 곳에 적합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부, 부인. 부인! 서 첨지님! 급합니다! 이리 와 주세요!"

 

레빈의 다급한 외침에 놀란 부인은 버선발로 뒷마당에 뛰어나갔고, 레빈의 품 안에 안긴 아이를 보고 소스라칠 듯 놀랐다.

 

"리, 린아! 이게 무슨 일이니! 여보세요, 대체 무슨...!"

 

"아이가 제 머리위로 떨어져 내리더군요. 간신히 받긴 했는데 저도 좀 무리가... 윽..."

 

정말로 레빈의 상태가 좋아보이지 않았기에 부인은 별 소리도 못 내고 서둘러 아이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쓰러질 것 같이 휘청거리는 레빈을 함께 온 남자와 힘을 합쳐 간신히 사랑방으로 옮겨 놓았다. 자리에 누운 레빈은 기절하듯이 잠들어버렸다.

 

 

 

 

 

 

 

 

 


다음 날이 되어 간신히 기운을 찾은 레빈은 자신의 옆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여아를 볼 수 있었다. 그 얼굴이 낯이 익다는 것을 알자, 어제의 일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지나갔다. 레빈은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다행이구나. 다친 곳은 없니?"

 

"전 괜찮아요. 아저씨야말로 괜찮으세요? 하루 왠 종일 앓으셨어요."

 

또박또박, 그리고 분명한 어조로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에는 감추지 못한 걱정이 섞여 있었고, 그것이 레빈을 기분 좋게 했다.

 

"괜찮단다. 다쳐서 쓰러진 게 아니라 너무 힘을 써서 지친거니까. 좀 푹 쉬면 나을거야."

 

"그런가요? 다행이예요."

 

한도의 한숨을 내쉬는 아이를 보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가능하다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지만 아직까지 손가락 까딱 하기조차 어려운 레빈에게는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아쉬움을 느끼며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레빈 또한 아이의 용모가 보기 드문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늦었지만, 구명의 은혜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려요. 전 서 린이라고 해요. 아저씨가 아니었더라면 전 크게 다치거나 죽었겠죠. 언젠가 꼭 보답할게요."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선택과 조리있는 말 솜씨는 아이가 꽤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하지만 너무나 조숙한 듯한 태도에는 조금 가슴이 아프다. 대 여섯살처럼 보이는 이 아이는 너무나 빨리 어른이 되어가려 하고 있었다.

 

"어린이는 그런 말 하는 게 아니란다. 너희들을 지키고 보살펴 주는건 어른들의 당연한 의무야. 그러니 린아, 너도 털어버리고 그저 즐겁게 뛰어놀려무나. 어제처럼 위험한 일은 하지 말고. 알았니?"

 

"네. 그럴게요. 음... 아저씨. 그런데 어제 무슨 일이 있었죠? 제가 기절하기 전에 뭔가 푸른빛을 본 것 같았어요. 그리고는 느릿하게 떨어지기 시작했죠. 그 빛에 굉장히 안심이 되었어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정신을 잃었구요. 깨어나고 보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어요."

 

어느 새 조잘거리는 린. 그나저나 큰일이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레빈의 '힘'을 봐 버린 것이다. 잠깐 당황한 레빈이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랴. 어차피 남에게 말해도 믿지도 않을 일일 테니, 레벤은 이 깜찍한 아이와 함께 작은 비밀을 공유하기로 결심했다.

 

"린아. 지금부터 보는 건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된다. 약속할 수 있겠니?"

 

"부모님에게도요?"

 

"물론이야. 어차피 말해도 믿지 않을 테지만, 그저 우리 사이의 작은 비밀 하나를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구나."

"에...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궁금해요. 약속할게요."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한 둘은 서로를 보며 살짝 웃었다. 그리고 레빈은 자신의 옆에 놓은 물수건 대야를 지그시 바라보며 집중하기 시작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대야의 주변에 푸른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 빛이 어제 자신의 감싼 것과 같은 색이란 걸 알아챈 린은, 뒤이어 일어난 일에 몹시 놀라고 말았다.

 

"어... 어? 이게 무슨 조화죠? 아저씨가 한 일인가요? 말씀해 주세요."

 

대야는 푸른빛에 휘감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슬금슬금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린의 주변을 한바퀴 돌고는 다시 제자리로 내려앉았다. 귀신이나 도깨비가 재주를 부린 것일까. 놀란 린은 조숙하던 면을 전부 던져버리고 다시금 지쳐버린 레빈을 보채기 시작했다.

 

"그...그러니까, 우리나라 말로는 사이코키네시스(psychokinesis), 음... 조선 말로는 뭐가 좋을까... 아, 그래. 염동(念動), 염동력(念動力)이라고 부르면 되겠구나."

 

"염...동력이오? 이게 설마 아저씨가 한 일이라는 거예요?"

 

말투에서 불신의 감정이 뚝뚝 묻어난다. 쓴웃음을 지은 레빈은 이 아이에게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해 주기 시작했다.

 

"본래 아저씨의 집안에서는 이런 힘을 쓰는 사람들이 가끔씩 나오곤 했단다. 사실 남한테 보여서 좋은 말 들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우리 조상님들은 이걸 잘 감추고 살아오셨지. 그런데 한 사백년 전쯤에, 아저씨가 사는 나라에서 큰 전쟁이 터졌단다.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자면 복잡하니까 넘기자. 우리 나라의 의기있는 사람들은 전부 한 성에 모여서 결사적으로 항전하기로 했지. 하지만 승산이 너무나 낮았어. 그래서 그때의 지휘자였던 빌렘 백작께서 결단을 내렸단다."

 

"와아. 어떻게 했나요. 비...빌렘...이라는 분이 결국 이기셨나요?"

 

린이라는 이름의 아이는 서양 발음도 어렵지 않게 해내며 레빈에게 질문을 던졌다. 꽤나 총명한 아이라고 느끼며 레빈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린아, 바다보다 낮은 땅이 있다면 믿겠니?"

 

"에이, 아저씨도 참. 제가 어려도 그런 거짓부렁에는 속지 않아요. 세상에 그런 땅이 어디있담?"

 

역시 총명해도 어린이는 어린이다. 레빈은 아이를 놀래키는것에 내심 재미까지 느끼며 그의 조국 네덜란드에 대해 소개했다.

 

"아저씨의 나라는 네덜란드란 곳인데, 사실 이 땅은 바다가 너무나도 많았어. 그래서 우리의 먼 조상들은 한가지 놀라운 생각을 했지. 강물 밑에는 땅이 있어. 그럼 바닷물 밑도 마찬가지겠지. 그렇다면 바닷길을 막고 물을 퍼 내면, 그곳이 바로 땅이 되지 않겠냐는 거였어."

 

그리고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 터무니없는 생각을 현실로 옮겼다. 방대한 시간동안 이어져 온 공사로 둑을 지어올려 바다를 고립시켜 호수로 만든다. 그리고 고립된 염호를 전부 퍼내어 땅을 드러낸다. 소금기에 절여진 땅은 그 자체론 쓸 수 없었지만, 바다로 흘러드는 강물은 담수이니 그것으로 한번 더 호수로 만든 다음 그 물을 퍼 낸다. 그러면 소금기가 가신 땅은 드디어 식물이 자라는 옥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네덜란드 사람들은 말하곤 하지. [하느님은 이 땅을 창조하셨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땅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우리의 조상이 남긴 유산이 빌렘 백작과 용사들의 목숨을 구했단다."

 

네덜란드의 기적같은 역사를 접한 린은 어느새 두 눈을 빛내며 레빈의 이야기 속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재차 질문했다.

 

"그러니까, 혹시 그 둑을 무너뜨려 수공을 쓴 건가요?"

 

"오오, 린아는 정말 똑똑하구나. 맞다. 성을 둘러싼 포위망을 뚫기 위해선 큰 힘이 필요했어. 바닷물이 밀려들어오면 사람들은 당연히 놀라겠지? 하지만 완전히 포위된 성을 나서서 둑을 무너뜨리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단다. 그리고 용기있는 사람들이 그 역할을 자청했고, 그 중에는 우리의 조상님도 끼어 있었어."

 

"와, 설마 그 조상님께서 그 힘을 가지고 계셨었나요?"

 

"물론이지. 많은 고난 끝에 마침내 둑에 다다른 선조님은 모든 힘을 발휘해서 둑을 무너뜨렸어. 침략자들은 설마 육지에서 바닷물이 밀려들거라곤 생각도 못했기에 이리저리 도망쳤고, 성 안의 사람들은 그 틈을 타 탈출할 수 있었지. 그 공적으로 선조님은 빌렘 백작님의 가신이 되었고, 드로스트라는 성을 하사받았단다. 조선도 공을 세운 백성에게는 성을 내리곤 하잖니? 그 이후로 지금까지 드로스트 가문의 맥이 이어져 왔고, 마침내 지금까지 당도한 거지. 어때, 재미있었니?"

 

"너무너무요! 빌렘 백작이란 분과 용사들도 대단하고, 레빈 아저씨의 선조님도 정말 용감하세요! 저희 나라에도 옛날 고구려의 을지문덕이란 장군님이 강둑을 쌓았다가 무너뜨려 수나라 대군을 물리친 이야기가 있는데, 네덜란드에도 그런 대단한 분이 계셨군요!"

 

사람이 사는 곳이란 어딜 가나 비슷한 것일까. 레빈은 묘한 감상을 느끼며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아, 그리고 혹시 이 얘기를 들은 적 있니? 한 60년 정도 전일거야. 큰 일식이 있었지. 하루 왠종일 태양이 가려진 날. 알고 있니?"

 

"아버님께 들은 적은 있어요. 온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고 했는데, 다행히 빨리 가라앉았다고요."

 

"그러니? 그런데 유럽은 조금 달랐어. 그 일식 이후에, 아저씨와 같은 '초상능력'을 가진 사람이 태어나기 시작한 거야. 물론 아저씨의 가문을 보면 그 이전에도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숨어서 살아왔을 수 있겠지. 그런데 그 일식의 날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에게서 능력들이 발현되기 시작하자, 아마 그 원인이 일식에 있지 않나 생각한 거지. 우리 드로스트 가문 또한 일식의 날 이후로 거의 한 세대에 한명씩은 능력을 가진 아이들이 태어났단다. 그 이전에는 아주 드물게 태어나곤 했거든. 그 힘도 선조님 말고는 미약한 정도였고."

 

"어... 그럼 조선에는 그런 사람이 없을까요?"

 

"아마... 있을거야. 아저씨가 꽤 많은 나라를 다녔는데, 어디에도 능력자가 없는 곳은 없었어. 하지만... 이 조선 땅은 괴이(怪異)에 대해서는 몹시도 배타적이더구나. 아마 능력자들은 그것을 숨기거나 산 속으로 들어가 버렸겠지."

 

그 말을 들은 린은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띄엄 띄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럼... 저도... 그런 이상한 인간일까요? 어른들은... 전부 그래요. 제가... 귀신의 자식이라고. 피부색도, 머리색도 눈 색도 전부 이상하데요. 그래서... 친구들도 저...저를 싫어해요. 저도 이러고 싶어서 이런 게 아닌데. 흑...흑."

 

감정이 북받쳐 올랐는지 흐느끼기 시작하는 린. 레빈은 당황해서 린을 달래려 했지만 아직은 꼼짝도 하지 못하는 몸으로는 무리였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염동력을 발휘해서 린의 등을 조심스레 쓰다듬어 주었다.

 

린은 어제의 푸른 빛이 자신을 감싸자, 형용할 수 없는 편안함이 찾아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무슨 조화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린은 곧 울음을 그치고 진정할 수 있었다.

 

"아저씨, 이제 괜찮아요. 힘드신거 같은데 이제 그만하셔도 되요."

 

"그...그래... 그리고 린아, 넌 분명히 사람이야. 자신에 대해 고민하고, 또 헤메이는 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란다... 설사 정말로 네가 인간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너는 사람이야! 이 아저씨가 보증할게. 그러니 슬픈 생각은 하지 말렴..."

 

꺼져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하는 레빈의 말에는 동질감이 느껴졌다. 린은 알 수 있었다. 유럽이란 곳에서도 능력자란 사람들은 주변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겠지. 그런 어린 시절을 넘기고서 레빈은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한 것이다. 린은 이 푸른 눈의 청년에게 설명할 수 없는 친근함을 느꼈다. 자신의 모범이 될 수 있는 남자는 그녀를 인정해 주었고, 그것이 린을 적이 안심시켰다. 그러자 긴장이 풀린 린은 급격하게 졸음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졸려요, 아저씨. 저 이만 나가볼게요. 이대로 있다간 자 버릴 것 같아요."

 

"여기서 자도 괜찮은데..."

 

"안 돼요. 아버지가 경을 치실걸요. 헤헤. 그럼 푹 쉬세요 아저씨. 전 이만 가 볼게요."

 

"그...그래... 잘 가렴."

 

린이 문을 열고 나가자, 너무 많은 염동력을 쓴 레빈 또한 기절하듯 잠들어버렸다. 그 입가에는 보람찬 미소가 걸려 있었고,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의 머리맡에는 린이 가져 온 고운 산꽃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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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정도 정양을 하고 기운을 차린 레빈은 마을과 주변의 산을 샅샅히 찾아보았다. 과연 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하지만 며칠간의 답사 끝에 내린 결론은, "분명히 꿈에 나온 곳이지만 특별한 것이 없다."였다. 동네의 원로들에게 주워들은 옛 이야기가 가리키는 산 골짜기라던지, 동네 아이들이 거점으로 삼는 둠벙이라던지, 여하튼 저 산에는 뭐가 있고 이 산에는 이게 있다는 시시콜콜한 것까지 전부 들쑤셔 내었지만 레빈은 결국 아무 소득도 얻을 수 없었다.

 

"더 이상 시간을 내기도 어렵고 하니 이제 떠나야 할 것 같군요."

 

보름동안 허탕을 친 레빈이 결국  떠날 의사를 비치자 첨지는 꽤나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허어, 별 소득도 없건만 벌써 가야한단 말이오. 안타깝소이다."

 

"어쩔 수 없지요. 분명히 꿈이 인도한 곳은 이곳인 것 같은데, 도무지 단서조차 없으니까요. 거기다 제가 자리를 오래 비우면 상회에서 잡음이 생길 수 있어서요. 사실 지금까지 있었던 것도 꽤나 무리였습니다."

 

"사정이 그러하다면야. 하지만 떠나는 발걸음이 아쉽기가 한량 없구려. 한동안 귀가 심심할 겨를이 없었는데 말이오. 허헛."

 

레빈은 세계를 두루 돌아다닌 덕에 재밌고 신기한 이야깃거리를 많이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린에게 이야기해 주는 사이 서 첨지도 슬쩍 어깨너머로 세상 돌아가는 풍월을 주워들은 것이다. 나중에는 체면 불구하고 부녀와 레빈이 마주앉아 도란 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다. 알맞게 구운 감자와 옥수수, 개암을 안주 삼아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은 어릴 적 조부모가 들려주던 옛 전설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레빈은 짧은 시간에 린과 아주 친밀해졌는데, 마을에서 겉도는 린에게 사람과 함께 하는 즐거움을 일깨워 주었다. 레빈과 산과 들을 쏘다니는 동안 린은 부모도 놀랄 정도로 밝아졌기에 서 첨지 부부는 레빈에게 가졌던 경계심을 완전히 풀 수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은 아닐 겁니다. 제가 보름동안 헛수고만 한 것은 아니니까요. 이 근방의 풍경이 아주 수려한데, 앞으로 상회의 사람들과 휴양을 오게 된다면 꼭 이곳으로 오려고 합니다. 아마 상회의 종업원들도 이곳이 무척 맘에 들겠지요."

 

레빈의 배려에 서 첨지 또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 서양인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적절하게 쓸 줄 알았다. 그러면서도 상대방을 불쾌하게 하지 않으니 식자로서 부족함이 없다 하겠지.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의문점이 떠올라 그것을 곧 바로 물어보았다.

 

"아, 레빈. 하나 물어 볼 것이 있소."

 

"기탄없이 말씀하십시오."

 

"혹시, 그 꿈에서 이 마을의 정경 말고 뭔가 특이한 것 없었소? 그러니까... 산 너머 하늘의 구름이나, 태양같은 것 말이오."

 

"...아! 그러고보니 그건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군요. 잠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기억할 수 있을 겁니다."

 

팔짱을 끼고 고뇌에 잠기는 레빈의 얼굴을 서 첨지도 초조한 마음으로 지켜 보았다. 자신의 의문점이 이 젊은이의 문제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윽고 눈을 뜬 레빈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구름이 아주 짙게 끼어 있었습니다. 그냥 구름이 아닌 먹구름이었어요.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낮게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바람이 심한지 아주 빠르게 움직였지요.  태양이라곤 볼 수 없었어요. 이럴 수가! 어떻게 이 중요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거지?"

 

가벼운 혼란에 빠진 레빈과 그를 진정시키는 서 첨지가 잠시 목소리를 높이는 사이, 마을의 원로 하나가 마침 서 첨지 바깥을 지나다가 한 마디 던졌다.

 

"아, 서 첨지. 자네 집에 있었군 그래. 안그래도 마을 전체에 전할 말이 있었는데 자네가 마지막이었어."

 

그 말에 레빈과 서 첨지는 고개를 갸웃 하며 원로의 말을 경청했다. 마을에 특별한 일은 없었는데?

 

"아마 내일 즈음에 큰 태풍이 몰아닥칠거야. 그러니 지붕 이음매를 다시 한번 살펴보고 날아갈 만한 것은 전부 집 안으로 들이시게. 이 늙은이의 감이 틀렸으면 좋겠지만..."

 

원로는 혀를 끌끌 차며 말하다가 무심코 둘의 얼굴을 보자 희한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레빈과 서 첨지의 표정 또한 원로의 얼굴만큼 희한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태풍... 바람. 빠르게 흘러가는 먹구름. 설마, 이것...?"

 

"음, 그런 것 같소. 아무래도 꿈이 가리킨 곳은 내일의 이 마을인가 보오."

 

두 사람이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이어나가자 원로는 슬쩍 자리를 피했다. 자신도 가재도구를 정리하러 가야 했기에. 마을로 향하는 노인의 등 뒤로 빛나는 태양이 유독 흐려 보이는 것은 아마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허 참, 어제만 해도 화창하더니 날씨가 미친년 널뛰듯 하는구먼요. 나으리, 이래서야 오늘 길을 떠나긴 글렀습니다요. 아마 산을 넘는 동안 큰 비가 올겁니다요."

 

"그렇겠군요. 하핫. 이거 참."

 

설마 하니 정말로 이렇게 될 줄이야. 레빈과 서 첨지는 서로 마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대체 레빈의 꿈은 무엇을 위해 지금의 순간을 그에게 보여 준 것일까? 노인의 말로는 태풍은 오늘 하루면 지나간다고 하니, 오늘 내로 그 연유를 전부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을 사람에게는 불안한, 레빈에게는 꿈을 결말을 알려줄 그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알지 못하는 운명의 굴레 또한 함께 오고 있었다.


정오가 지나자 산골의 하늘은 완전히 묵빛으로 채색되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져내릴 듯한 섬뜩한 색채. 마을 사람들은 진저리치며 방 안으로 파고들었고, 레빈만은 초조해하며 뒷마당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다가온 운명의 때가 작은 산골 마을에 당도했다. 그 시작은 급작스레 퍼붓기 시작한 빗줄기. 여름철 소나기와도 비견되는 억수같은 비가 산자락을 강타했고, 이윽고 불기 시작한 바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강풍으로 돌변해 괴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을 마을에서 살아온 노인들조차 처음 보는 격렬한 태풍에 몸을 떨었고, 두려울 것 없는 아이들조차 겁먹고 이불이나 어미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폭우와 광풍은 마을과 일대를 처참하게 유린하고 있었고, 레빈은 그 사이에서도 눈을 빛내며 사위를 노려보았다.

 

'자, 이제 내게 가르쳐 다오. 그 꿈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제 때가 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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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빈이 이를 악물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 시간, 마을의 뒤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던 산에서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에 너무나 많은 양의 비가 퍼부어지자 산이 수용할 수 있는 순간저수량을 넘어서버렸고, 강풍으로 인해 나무의 뿌리가 불안하게 들썩이자 주변의 흙이 견디지 못하고 물과 함께 쏟아져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나무 하나, 돌 몇덩이였던 붕괴는 꼭대기에서부터 얼마 내려오지 않아 기하급수적으로 덩치를 불리더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노도가 되어 마을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었다.

 

레빈만은 바깥에 있었기에 이변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은은히 떨리는 바닥. 처음에는 바람 때문이려니 했는데, 진동이 점차 커진다. 불길한 예감이 뇌를 스쳐 지나간다. 직감과 떨림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눈을 돌리자, 그의 푸른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산이 무너져내린다. 그 표현이 이토록 현실감 있는 문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레빈은 더 이상의 잡념을 버리고 목이 터져나가라 외쳤다.

 

 

"산사태입니다! 다들 피하세요! 어서요------!"

 

 

하지만 그 외침은 가장 빠르게 내질러져있지만 너무나 늦어버린 경고가 되어버렸다.

 

 

 

 

 

마을사람들은 놀라 뛰쳐나왔고, 이미 손쓸 수 없는 곳까지 다다른 산사태를 보고 전부 굳어버렸다. 마을은 주변의 산에 둘러싸여 분지처럼 되어있었기에 쏟아져내리는 토사에 완전히 파묻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높은 고지대로 피하기에는 마땅한 곳조차 없었다. 레빈과 마을 사람들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방향은 다르지만 지향점은 같은 각오를 다졌다. 한 사람은 희망을 위한 죽음을, 다른 사람들은 손쓸 수 없는 죽음을 각오한 것이다.

 

"아-아-아-아! 크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

 

레빈은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산사태와 정면으로 대치했다. 그리고 그의 생애 단 한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전력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목부터 얼굴까지 핏대가 솟아올라 붉게 물들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엄청난 푸른빛이 산사태의 정면을 감쌌다. 놀랍게도 산사태는 조금씩 그 기세를 죽이기 시작했다.

 

"크아! 아아아! 아아아악!"

 

하지만 너무나 급격한 능력의 발동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애당초 감당할 수 없는 용량의 힘이었을까. 레빈의 부릅떠진 눈에서 흰자위가 붉게 물들더니 눈꼬리로 핏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눈꼬리가 찢어지는 것과 실핏줄이 터지는 것이 동시였기에 억수같은 비에서도 두 줄기 선명한 피눈물이 레빈의 얼굴을 가로질렀다. 한계를 넘어선 과부하에 레빈의 육신이 망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산사태는 마을로 쏟아져내려오고 있었고, 레빈은 결코 힘의 행사를 멈출 생각이 없었다. 급하게 뒤를 돌아보니 마을 사람들은 그 엄청난 광경을 보고는 잠시 얼이 빠져 있었다. 레빈은 다급하게 고함을 질렀다.

 

"뭐합니까! 어서 피해요! 서둘러!"

 

레빈의 일갈에 마을 사람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서둘러 가장 가까운 산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저들이 피신할때까지 과연 자신이 버틸 수 있을까. 레빈은 희망을 찾으려 했지만, 그의 몸은 마음을 배신하고 천천히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심폐기능이 급격히 저하되고, 심장은 마침내 부정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불완전한 혈류의 흐름은 시시각각 레빈의 몸을 좀먹었고, 잠깐 잠깐 의식을 꺼뜨려놓았다. 레빈은 사그려져가는 투지를 다잡기 위해 크게 외쳤다.

 

"아직, 아직은 안 돼! 조금 더,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시간을 벌어야 된다고!"

 

그것은 이미 자신을 격려한다는 수준의 외침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버티기 위해 발악하는 절규. 마침내는 악을 쓸 기운조차 아끼기 위해 이를 악물었고, 엄청난 압력때문에 순식간에 잇몸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더불어 코피까지 터져나왔고, 이윽고 고막까지 파열되었다. 레빈의 얼굴은 칠공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마치 아수라와 같은 형상이 되었지만, 그에 비례해서 레빈의 염동력도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

 

쿠...쿠구구구...

 

잠시 기세가 죽었던 산사태가 다시금 가속도를 얻으려 하자 레빈의 두 눈이 점차 절망감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자신은 이미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지만, 마을 사람들이 대피하기까지는 시간이 모자라다. 그 시간이 아주 조금만 더 필요하다면 최후까지 손을 놓지 않겠지만 그 갭은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간극이었다. 레빈은 마음이 꺾이는 것을 느꼈고, 의식이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아저씨! 여기서 뭐해요! 왜 도망치지 않는 거냐구요!"

 

고막이 터진 레빈의 귀로 희미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그러자 희미해지던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목소리는 언제나 그를 살갑게 대해 주었던 린의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린은 하얀색 저고리에 연두색 치마를 입고 레빈의 등 뒤에 서 있었다.

 

"린! 너야말로 왜 여기에 있는거니! 어서 도망쳐! 내가 여길 막는 사이에 피신해야 해!"

 

"거짓말 말아요! 어차피 늦었어요! 지금 아저씨가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죠! 지금...지금 아저씨 거의 죽을것 같단 말이예요! 그런데 나보고 도망치라고요? 아저씨를 그렇게 내버려두고 내가 도망칠것 같아요!"

 

그 조용하던 아이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대든다. 그 마음이 레빈의 가슴을 아프도록 헤집는다. 이 아이는 처음으로 생긴 친구를, 자신을 떠나보내기엔 너무나 어렸던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있다간 둘 다 죽는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는 길을 택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런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린에게 레빈은 피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내가 말했잖니! 어린이를 지키는 것은 어른의 의무야! 그러니 어린이는 살아서 미래를 살아갈 의무가 있는거야! 넌 지금 의무를 저버리는 거다! 네가 정말로 날 생각한다면 어서 도망쳐! 이제 얼마 견디지 못해!"

 

극도의 집중력으로 능력을 유지하자 레빈의 몸에서도 푸른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레빈은 이것이 흔히 말하는 회광반조. 즉 사람이 죽기 직전에 가장 빛나는 순간이 마침내 찾아온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린은 눈물을 흩뿌리며 레빈을 뒤에서 껴안았다.

 

"이대로 아저씨를 버려두고 갈 수 없어요! 빌렘 백작은 마지막까지 자신을 따르는 사람을 버리지 않았죠! 전 결코 아저씨를 내버려두지 않을 거예요!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말하는 순간 린의 쪽빛 눈이 광채를 머금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레빈의 몸에 알 수 없는 활력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이건?"

 

레빈은 어리둥절해졌다. 갑작스레 몸이 편해진 것이다. 하지만 염동력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조화인가? 설마 하고 뒤돌아본 린의 눈동자가 새파란 광채를 담고 있는 것을 보자 레빈은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아이도 초상능력을 가지고 있었구나, 그것도 나와 같은 염동력 계열의!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힘을!'

 

그러나 아직은 스스로의 능력을 제어할 수 없을 것이다. 레빈에게 전해지는 힘은 그저 다스릴 수 없기에 새어나온 염동력이 자신에게 흘러들어 온 것일 뿐. 그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고 있지만, 이미 발사대의 역할을 하는 레빈의 몸이 만신창이인 상태이기에 아주 약간의 시간을 더 번 것 이외에는 큰 소득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대피할 시간은 아슬아슬하게 맞출 수 있겠지만, 자신과 이 아이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레빈은 하느님께 비탄에 찬 마지막 외침을 보내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천년 전의 성인이 최후에 남긴 말을 레빈 또한 입에 담을 수 밖에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전부 살아난들, 아이를 잃은 서 첨지 부부의 한은 어찌할 것인가. 그리고 머나먼 이국에서 마지막 혈육을 잃어버릴 자신의 형은 어찌할 것인가. 손쓸 수 없는 절망의 순간이 이제 곧 닥쳐온다.

 

그리고 진정한 운명의 순간 또한 이 장소에 찾아들었다.

 

"아저씨! 조금만 힘내요! 이번엔 제가 아저씨를 구해드릴 거니까! 아저씨의 선조님이 빌렘 백작을 살린 것처럼요!"

 

린은 레빈을 안은 손을 풀더니 저만치로 달려갔다. 화전이 자리잡은 마을의 가장 큰 공터. 그곳까지 순식간에 당도한 린은 쏟아지는 빗 속에서 쪽빛 눈을 부릅뜨고 산사태의 첨단을 쏘아보았다. 레빈의 염동력으로 물들어 파랗게 빛나기에 어디인지 모를 일은 없다. 설명할 수 없었지만, 린은 자신이 레빈을 구할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자신에게 이야기 해준 태몽의 한 자락이 뇌리에 새겨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낙인과도 같이. [저 바다 너머 어린쥐 잎을 피워올리리]. 린은 간절하게 외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풀어내었다.

 

"서양 신선님! 저에게 힘을 주세요! 바다 너머 어린쥐 잎을 피워올릴 수 있는 힘을요!"

 

그 순간 린의 몸에서 청광이 터져나왔다. 엄청난 기세로 퍼져나온 푸른 빛은 거의 꺼져가던 레빈의 염동력을 대신했고, 상상할 수 없는 거력으로 산사태 그 자체를 감싸고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무시무시한 양의 토사들이 린이 서있는 공터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한번 방향이 전환되니 그 이후로는 쉬웠다. 쏟아져 내리는 기세를 크게 감싸고 그저 방향을 틀지 못하도록 버티기만 하자, 토사는 물밀듯이 린에게로 쏟아져들어갔다.

 

"안돼! 린!"

 

레빈은 마지막 힘을 다해 염동력을 전개했다. 그러면서도 생각했다. '어떻게 저 아이가 드로스트 가문의 가언을...?'

 

 

 

 

 

 

 

린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것이 레빈의 마지막 염동력임을 눈치챈 린은 해맑게 웃었다. 레빈은 죽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레빈을 구한 것이다. 계집아이의 작은 가슴 속에 그렇게 빛나는 긍지가 새겨졌다. 그녀는 지금, 역사 속의 용사들이 만들어낸 기적을 체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평생토록 그녀의 삶을 인도하는 이정표가 되겠지. 하지만 그 길은 고난으로 가득 찬 길이다. 능력자(Cypher)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콰아-쿠콰콰콰--

 

 

허나 그런 미래따위, 지금 린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부모님과 레빈, 마을 사람들을 구하고야 말겠다. 그 일념 하나로 린은 거칠게 날뛰는 힘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억누르며 다스렸다. 그리고 산사태는 공터로 모여들어 쌓이더니 이윽고 조용히 침묵했다. 그리고 동시에 비가 그치더니 날이 개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의 소동이 거짓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해...냈다. 해냈어! 아저씨! 제가 해냈어요!"

 

그 외침을 들어 줄 레빈은 이미 선 채로 기절해 있었다. 하지만 그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새겨져 있었다. 아무도 죽지 않고 끝난 이 결말에 환희하는 미소가.

 

그리고 저 멀리 산자락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면 서 첨지 부부는 놀란 심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었다.

 

"여... 여보, 저것, 설마 당신의 태몽의 광경..."

 

"마...맞아요. 틀림없을 거예요. 그 신선님이 전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오늘이었던 거예요. 아아, 어미가 되어서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다니..."

 

푸른 염동력에 둘러싸인 산사태의 잔해 위에서 린은 연두색 치맛자락을 흩날리고 있었다. 그 댕기머리 위로는 찬란한 태양이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은 푸른 바다 위에 피어있던 오렌지 나무의 잎과 열매 바로 그것이었다. 기적의 한 자락을 지켜보던 서 첨지 부부는 그저 눈물 흘릴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딸이 짊어져야 할 숙명이 찾아온 것을 느끼면서. 그런 그들의 머리 위로 태양은 그저 따스한 온기만을 내려 줄 뿐이었다.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빛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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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아, 어딜 가더라도 아비와 어미, 그리고 이 땅을 잊지 말거라. 명심해야 한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아버지."

 

사건 이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에 마을의 혼란은 대충 수습이 되었고, 레빈의 몸 또한 많이 나아져 산을 오를 정도가 되었다. 이제 산사태에 파묻힌 화전터만 손을 보면 마을은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하지만 린에게 일상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린의 힘을 마을 사람들은 전부 보았고, 이제 완전히 그들과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린을 결코 받아들여주지 않을 것이다. 본래 집단은 이질적인 이를 배척하는 법이기에 린은 거기에 저항할 수도, 그리고 저항할 생각도 없었다. 애당초 이 마을에 별로 애착도 없었기 때문에 린은 어려운 결정을 주저하지 않고 내릴 수 있었다. 그녀는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린, 그때 마지막에 한 말 있잖니. 저 바다 건너 오렌지 잎을 피워올릴 힘을 달라고. 그걸 어디서 들었니?"

 

"그거요? 저희 어머니가 태몽에서 나온 신선님이 했던 말이라고 했어요. 저도 그때 왜 그 말이 생각났는지 모르겠어요."

 

"신...선? 신선님이 그랬다고? 정말?"

 

"어머니 말로는 아저씨랑 같은 서양 신선님이었더래요. 갈색 곱슬머리에 파란 눈인데 상투에 도포라서 무지 이상하셨다 그랬어요."

 

그 말에 어떤 예지를 느낀 레빈은 부인을 찾아가서 재차 질문했다.

 

"부인, 린에게 들었습니다. 태몽에서 신선께 말씀을 들었다고요. 그것을 자세히 좀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갑자기 그건 왜...?"

 

"린이 외쳤었습니다. [저 바다 너머 오렌지 잎을 피워올리리] 라고요. 그건... 저희 드로스트 가문의 가언입니다. 결코 이런 마을에서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예요."

 

"그...런가요? 그 꿈에 대해 기억나는건 몇가지 없어요. 가언이라고 말하신 그 문구와, 너른 들판에 차오르던 푸른 물과 어린쥐 나무 한 그루. 그리고 그 신선님의 얼굴 뿐이니까요."

 

너른 들판에 차오르던 푸른 물. 그것이 어딘지 빌렘 백작을 구원했던 둑 붕괴 작전의 모습을 연상시켰기에 레빈은 다시금 물어갔다.

 

"그 신선님의 이름은 혹시 들으셨습니까? 아니면 생김새라도."

 

"사실 그것 때문에 처음 당신을 봤을 때 놀랐답니다. 그 신선님과 당신은 무척 닮았어요. 머리색과 푸른 눈동자까지도. 그리고 이름은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그럼 혹시 다른 사람과 다른 특별한 곳은 없었습니까? 흉터라던지, 점이라든지요."

 

"그러고보니... 그 신선님, 오른쪽 귀가 없었어요. 잊을 수 없는 상처였죠. 그 외에는..."

 

"오른쪽 귀가 없었다고요? 그게 참말입니까?"

 

"네. 분명히 기억해요."

 

"이...이럴수가... 설마... 벨테브레 그 분이 왜 부인의 꿈 속에......?"

 

레빈의 입에서 튀어나온 벨테브레란 이름. 그것이 의마하는 바를 부인은 잘 몰랐지만, 레빈에게 있어서는 정말로 경악할 일이었다.

 

 

 

 

 

얀 얀스 벨테브레(Jan. Janse. Weltevree). 드로스트 가문의 방계 인물. 사실 방계 중에서도 평범한 이였던 벨테브레가 드로스트 가문에서도 유명한 이유는, 그가 동방무역선에 선원으로 떠났다가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벨테브레가 잊혀지지 않은 이유는, 동 시대에 조선에 난파했던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의 표류기에 잠깐 그 이름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하멜이 기술하기로 난파한 그가 네덜란드 사람이라 전하자 조선 정부는 벨테브레를 하멜에게 붙였다고 한다. 그는 조선에 귀화해서 박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고, 하멜이 그를 만났을때 벨테브레는 오랜동안 잊고 있어 몹시 어눌한 네덜란드 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오른쪽 귀가 없는 것을 보아 몹시 고생을 한 것 같다고 적어놓고 있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던 레빈은 놀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레빈이 조선에 온 이유도 하멜 표류기에 그 원인을 두고 있었다. 드로스트 가문의 사람에게 조선이란 나라는 어쩐지 전혀 모르는 타국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의 먼 선조가 당도해 숨을 거둔 땅. 레빈은 그 강렬한 이끌림에 의해 머나먼 조선까지 달려왔고, 마침내 그의 흔적을 찾은 것이다.

 

"설마... 내가 꾼 꿈도, 부인의 태몽도 그 분이 손을 쓴 것일까?"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헛소리라 치부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사실을 전해들었다. 사실 린이 서 첨지 부부의 친자가 아니라는 것. 태몽을 꾼 날 밤에 대문 앞에 버려져 있었다는 말을 듣자, 레빈은 확신에 가까운 어떤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아마 린은 벨테브레 그 분의 먼 자손이겠지. 흰 피부, 쪽빛 눈, 짙은 갈색 머리.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레빈은 자신의 생각을 서 첨지 부부에게 말했고, 서 첨지 부부도 어느 정도 인정했다. 린의 모습은 순수한 조선인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반박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레빈은 사건 이후 다시 침울해진 린에게 다가가 설득을 시작했다.

 

"린, 이제 너도 능력자(Cypher)가 된 거란다. 아아, 아직 어린 너에겐 너무나 가혹한 운명이구나."

 

"괜찮아요. 이 힘 덕분에 아저씨랑 마을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런 말씀은 안하셔도 돼요."

 

어른스러운 린의 대답이 서글프다. 레빈은 자신의 생각을 린에게 풀어놓았다.

 

"린, 그때도 말했다시피 조선의 사람들은 괴이(怪異)에 대해서는 너무나 배타적이야. 너도 마을 사람들의 시선을 봤겠지. 너는 이제 이곳에서 평범하게 살 수 없단다."

 

"...알아요. 하지만 그게 어쨋다는 거죠? 여긴 제 부모님이 있고, 제가 살아가야 할 곳이에요. 견딜 수 밖에 없어요."

 

"이런 말을 하게 되어서 미안하지만... 린. 아마 너는 드로스트 가문의 먼 조상님이 남긴 자손일 가능성이 높단다. 너도

네가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르단 걸 알거야. 나이가 들 수록 그 차이는 심해지겠지. 그럼 너는 결코 평범하게 살아갈 수 없어. 더구나 이 마을 사람들은 너의 힘을 전부 보았단다. 그들은 너를 두려워하겠지. 아저씨는 잘 알아. 능력자들이 일반인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는지... 아저씬 결코 널 그런 상황에 던져놓고 싶지 않다. 나와 함께가자. 드로스트 가문이라면 너의 울타리가 되어줄 수 있어. 따지고 보면 그곳이 너의 집이란다."

 

"그럼... 그럼 저희 부모님은 어떡하나요? 그리고 저는요?"

 

"어쩔 수 없어. 이렇게 지내다가는 너와 부모님 전부 불행해진다. 너희 부모님은 여전히 이 땅에서 살아가야해. 하지만 너는 그럴 수 없지. 이 땅의 모든 것이 너를 박해할테니까. 하지만 넌 아직 자유로워. 네가 가야할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단다. 그러니 너의 부모님을 그만 놓아주렴."

 

"그럴 수 밖에 없는 건가요? 정말로?"

 

"아저씨도 이렇게 하기 정말 싫어. 부모 자식을 생이별 시켜야 한다니... 그렇지만 어른은 어린이를 지켜야 해. 이대로 피지도 못한 채 사그라져버릴 너를 어떻게 가만히 두고 보겠니. 부모님은 내가 설득해 볼게. 그러니 너의 생각을 말해주렴. 네가 싫다면, 아저씨도 더는 강요하지 않을게."

 

그렇게 마무리지으며 레빈은 서글픈 눈빛으로 린을 바라보았다. 쪽빛의 눈동자는 이제 깊은 바다처럼 심원하게 빛나고 있었다. 염동력이 그녀의 안에서 타오른다는 증거. 이 아이를 올바르게 이끌어 주는 것 또한 어른의 의무. 조선은 아직 그럴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레빈이 최선의 수단을 강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린은 오랜동안 고민하더니 고개를 들어 레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런 힘이 생긴 건 분명 이유가 있겠죠. 그리고 아저씨가 여기에 있었던 우연도요."

 

린의 확신에 찬 말에 레빈은 그저 귀를 기울였다. 린은 재차 말을 이어갔다.

 

"그렇다면 아저씨가 가르쳐주세요. 제가 이 힘을 쓸 방법을. 아저씨라면 믿을 수 있어요. 저를 올바르게 이끌어주세요."

 

당당하게 웅변하는 린에게서는 어린 아이라고는 믿지 못할 기세가 느껴졌다. 레빈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감동이 가슴을 채우는 것을 느꼈다. 이 아이야말로 오렌지의 후예구나. 조상께서 안배하신 바다 너머의 오렌지 잎이구나. 레빈은 벅차오르는 눈물을 막지 않았고, 린은 조용히 레빈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 이후 레빈은 서 첨지 부부를 열심히 설득했고, 부부 또한 뾰족한 수가 없었기에 레빈의 제안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다가운 이별의 순간. 김 서방과 레빈, 그리고 린은 채비를 갖추고 마을 어귀에 서 있었다. 그들을 배웅하는 사람은 서 첨지 부부 뿐이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간 큰 신세를 졌구만유. 이 아이는 제가 목숨 걸고서라도 화란(和蘭 : 네덜란드의 한자 독음)으로 보내드릴테니 걱정 탁 놓으슈."

 

"어머니...아버지..."

 

레빈과 김 서방, 린이 각자 말하지 서 첨지 부부 또한 북받치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린을 보내며 절대 울지 않기로 다짐했지만, 그들을 올려다보는 이 어린 것의 눈망울을 보니 도저히 감정을 다스릴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배 아파 낳은 자식은 아니었으나, 린은 부부의 하나뿐인 자식이었고 소중한 보물이었다. 하늘은 결코 갈라놓지 못할 부모자식의 끈으로 가족을 묶었지만, 일식이 남겨둔 저주는 결국 이 가족을 생이별시키고야 만 것이다.

 

"레빈. 이것을 가져가 주시오."

 

서 첨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보따리 하나를 넘겨주었다. 레빈은 눈빛으로 질문했고, 서 첨지는 조용히 말했다.

 

"린에게 꼭 남겨주고 싶은 몇 가지를 꾸려보았소. 그 아이가 머나먼 이국에서 견디기 힘들어 할 때 그 아이에게 힘이 되어줄 것이오. 레빈 당신이 옆에서 지켜보다가 그런 순간이 오면 린에게 전해주었으면 하오."

 

"명심하겠습니다. 소중히 간직해 두죠. 안심하셔도 됩니다."

 

굳은 맹세의 말은 그 이상의 미사여구조차 필요없게 만들었다. 서로의 눈을 마주보며 굳건하게 고개를 끄덕인 남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린을 내려다보았다.

 

"린, 그곳에 가서도 네가 자랑스런 조선의 사람임을 잊지 말거라. 알겠니?"

 

"네. 그리고 절대 어머님과 아버님을 잊지 않을 거예요. 꼭!"

 

그렇게 당차게 대답하는 린의 댕기머리에는 예쁜 머리끈이 매달려 있었다. 고급스런 붉은 비단으로 만든 머리끈은 아이에게는 조금 이른 듯 했으나, 그것이 어머니가 딸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부인은 떨리는 손으로 린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그대로 꼭 껴안았다.

 

"..."

 

모두가 숨을 죽이고 어미와 딸의 이별의식을 보았다. 한 마디도 없었지만, 두 모녀는 천의 말과 만의 단어로도 전하지 못할 모든 것을 서로 교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린은 어미의 품에서 벗어나고서 힘차게 부모님께 고개를 숙였다.

 

"이때까지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강녕하셔야 해요!"

 

그리고는 등을 돌려 뛰어가기 시작했다. 뛰어가는 린의 등 뒤로 반짝이는 물방울이 점점이 떨어졌다. 애달픈 광경이었다.

 

레빈과 김 서방 또한 이별의 말을 남기고 린의 뒤를 쫓아 달려갔다. 그리고 서 첨지 부부는 말없이 그 등을 배웅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도깨비불이 가져다 준 아이는 이제 신기루처럼 그들의 품을 떠났다. 부부는, 그저 딸의 행복만을 바라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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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떠나는 레빈은 산을 타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을 접어두고, 그저 한결같은 기도를 품었다. 린을 위한 기도를.

 

'오렌지 공 빌렘이시여. 그리고 나의 시조시여. 이 땅에서 스러져 간 조상이시여. 불민한 후손은 먼 바다를 넘어 그대들이 피워 낸 오렌지 잎을 찾았나이다. 당신들께오서 남긴 오렌지의 혼은 그 무엇보다 찬란하노니, 다만 바라옵건데 이 작은 씨앗이 다시금 대양을 넘어서서 찬란히 피어나도록 해 주소서. 신비롭게 피어난 이 동방의 새싹이 자라나 불꽃처럼 일어나도록 살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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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롭게 피어나라, 동방의 불꽃 End=

 

 

 

 

 

본래는 네덜란드로 넘어간 이후의 챕터도 있었지만 설정의 괴리 때문에 쓴 분량만 올립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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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빈 미이라와 고스트 제피 할로윈에는 카를로스호박 히카르도의 사탕 탄야의 마녀 분장..? 잭-슈타인 강시 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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