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과 탄환과 기억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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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25 09: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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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불타오르고 붉은 피가 바닥을 적셨다. 수많은 생명이 겨울의 꽃처럼 사그라들었다. 토마스가 피에 ♡은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친구가, 처음 보는 사람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땅에 스러졌다. 목숨을 빼앗는 병기의 소리가, 생명을 잃고 내뱉는 단말마가 들려왔다. 흘러넘치는 죽음의 소리에 귀를 막고 주저앉고 싶었다.
그러지 못한 이유는 어떠한 공포도 비명도 없이, 자신의 생에 의미 따위는 없다는 듯이 침묵 속에서 사라져 가는 강화 인간이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들의 입은 아무런 소리도 내뱉지 않았고, 그들의 눈빛은 한 줄기 빛조차 담고 있지 않았다. 영혼 없는 인형 같은 그들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어서 빨리 활기가 가득한 연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무엇을 얻기 위해 이렇게 싸우는 것일까? 이렇게 싸워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 그렇게 찾아온 평화 속에서 자신은 편안히 잠들 수 있을까?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얼음에 꿰뚫려 온기를 빼앗겼다. 자신은 그들의 죽음 위에서 편히 잠들 수 있을까?
길고 긴 전쟁도 서서히 끝을 향해 달려갔다. 마지막 강화 인간을 창으로 꿰뚫은 레오노르가 소리쳤다.
"전열을 가다듬어라! 부상자는 후방의 치료 능력자에게 응급 처지를 받아라! 부상이 심하지 않은 사람을 추려 공장 내부로 진입한다!"
레오노르는 그렇게 정예를 추려 공장 내부로 들어갔다. 토마스가 조금은 겁에 질린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저들은 무엇을 얻기 위해 싸우는 걸까? 무엇을 등에 업고 싸우는 것일까? 바닷가의 모래알보다 많은 것이 능력자가 싸우는 이유라지만, 스페인 황실을 호위하는 드라군이 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항상 입에 담는 것처럼 그들의 긍지를 위해 싸우는 것일까?
"토마스…"
불타오르는 하늘을 등지고 나이오비가 다가왔다. 피터와 엘리도 나이오비의 손을 잡고 다가왔다. 피와 피로로 물든 그녀의 얼굴에는 많은 표정이 섞여있었다.
토마스가 무릎을 꿇고 엘리를 껴안았다. 작게 떨리는 엘리의 몸에 토마스가 깊은 절망을 느꼈다. 이런 어린아이마저 싸워야 하는 현실에. 그럼에도 아직까지 찾아오지 않은 평화에.
"공장 안으로 누가 들어갔죠?"
"연합에서는 도일, 휴톤, 레베카. 앤디랑 로이 정도일까. 회사나 다른 조직의 사람은 잘 모르겠네. "
"그들이 무사하길 바래야겠네요."
엘리가 토마스의 이마에 흐르는 피를 닦아주었다. 피터가 신발에 묻은 피를 바닥에 문질러 닦았다. 이렇게 피에 무감정하게 반응하는 아이들이 너무나도 슬펐다. 토마스가 품에 깊게 파고든 엘리를 안아 들었다.
"엘리 졸려…"
"그래, 엘리. 이제 집에 가자."
칠흑의 구름이 빛나는 달을 좀먹었다. 전장 속 피어오른 평화라는 꽃의 향기는 짙은 핏내음이었다.
*
벨져가 강화 인간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몰아치는 칼날 속에서 거인이 거친 울음을 토해냈다.
"릭!"
릭이 하늘에 게이트를 열고 수많은 철골들이 강화 인간을 향해 떨어졌다. 철골들을 헤치고 달려 나온 거인의 크게 쳐낸 벨져가 다이무스를 향해 외쳤다.
"지금!"
다이무스의 검이 경고등의 빛을 받아 붉게 빛났다. 섬광이 번쩍이고 거인의 목이 하늘로 치솟았다. 쓰러지는 거대한 몸뚱이를 본 다이무스가 한숨을 내쉬며 칼을 꽂아 넣었다.
"겨우 끝났나."
"우선 여기서 나가야겠군."
벨져가 거인이 비집고 들어온 철문으로 다가갔다. 이미 거인이 문을 반쯤 짓이긴 탓에 벨져가 움직이지 않는 문을 억지로 뜯어냈다. 육중한 철문이 바닥에 떨어지며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금 소리가 누군가의 주의를 끌지 않았기를 바라지."
릭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화 인간 하나가 나타났다. 복도를 달리는 강화 인간을 본 자네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릭 씨. 당신 공간이동 능력자가 아니라 예언 능력자입니까?"
"지금만큼은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드는군."
"한가하게 대화나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다이무스가 달려오는 강화 인간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다이무스의 칼이 강화 인간의 허리를 베고 강화 인간이 반으로 갈라져 쓰러졌다. 바닥을 구르는 강화 인간을 본 다이무스가 칼을 휘둘러 피를 털어냈다.
"강화 인간의 강화 정도가 제각각인 모양이군."
"그나마 우리에게는 다행이군요."
복도를 걷던 벨져가 모퉁이를 도는 동시에 반대편에서 나타난 사람에게 검을 겨누었다. 동시에 자신의 목에 겨눠진 푸른 결정검을 보며 벨져가 코웃음 쳤다.
"그쪽이었나, 동장군? 돌아온 걸 보니 2층에서 무언가 건진 게 있는 모양이지?"
"우리나 그쪽이나 건진 게 별로 없을 텐데. 그나저나 갑자기 덩치 큰 녀석들이 뛰쳐나오기 시작했는데 무슨 일인지 알고 있나?"
"미안하군. 그건 우리 쪽 때문이거든."
검을 거둔 벨져가 루이스 일행의 상태를 살폈다. 큰 전투는 없었던 듯하다. 우리가 만난 강화 인간이 유난히 강했던 모양이로군. 전투를 지속해도 문제없겠어.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아가던 이들이 커다란 연구실에 도착했다.
수많은 강화 인간이 담긴 시험관이 가득한 연구실을 본 이들이 눈을 찌푸렸다.
"취향 한 번 고상하시군."
벨져가 연구실 바닥을 가득 채운 종이를 주워 드는 순간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적막을 깨고 울려 퍼졌다.
"어머? 불청객이 있네?"
어둠 속에서 걸어나오는 붉은 머리의 소녀를 본 벨져가 혀를 찼다.
붉은 단발머리. 호박빛 눈동자. 몸을 감싸는 청록빛 번개. 안타리우스의 강화인간 시드니.
"광신도."
"입 조심해. 배교자. 사유지에 멋대로 들어온 주제에 뻔뻔하네."
벨져가 칼을 쥐고 자세를 낮췄다. 거리는 약 10m. 이 정도면 단번에 달려가 목을 벨 수 있다. 정보를 얻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상대는 번개를 다루는 사이퍼. 그런 것을 아쉬워할 겨를이 없다.
벨져가 앞으로 달려 나가려는 순간, 시드니가 팔을 펼치고 광소를 터뜨렸다.
"그러니 벌을 줄게! 꺄하하하하하핫!"
그녀의 몸에서 푸른 번개가 터져 나왔다. 거미줄처럼 퍼져나간 수많은 번개들이 시험관 속에 담긴 강화인간을 향해 날아갔다.
"이런…!"
시드니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벨져가 시드니를 향해 달려갔다. 벨져의 칼이 시드니의 목을 베려는 순간 시험관을 부수고 달려 나온 강화 인간이 팔을 뻗어 벨져의 칼을 막았다.
그 뒤를 이어 수많은 강화 인간들이 시험관을 부수고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연구실을 가득 채운 강화 인간 너머 뒤로 몸을 감춘 시드니가 책장 뒤에 숨겨진 문을 열었다.
"어딜!"
루이스가 시드니를 향해 얼음의 창을 쏘아냈다. 시드니를 향해 빠르게 날아가는 얼음의 창 앞으로 강화 인간이 몸을 던졌다.
얼음의 창이 강화 인간의 아래턱을 박살내고 깊이 꽂혔다. 강화 인간이 턱에서 얼음의 창을 뽑아냈다. 강화 인간의 몸에서 푸른 번개가 튀고 찢어지고 박살난 아래턱의 상처가 아물어갔다.
두터운 강화 인간의 벽 뒤로 시드니가 벨져와 루이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잘 있어. 살아있으면 또 보자고."
시드니가 비밀 문으로 사라지고 강화인간이 그들을 향해 거친 울음을 토해냈다.
"돌겠군."
*
푸른빛을 내뿜는 시험관이 순식간에 썰려나가고 쏟아진 푸른 액체가 신발을 적셨다. 유령처럼 목을 노리고 날아드는 메스를 피한 잭이 팔을 휘둘렀다.
잭의 팔을 피해 클론이 머리를 숙였다. 클론의 머리 위로 섬광이 스쳐 지나가고 거대한 시험관이 반으로 갈라졌다.
잭에게 달려든 클론이 메스를 휘둘렀다. 눈앞을 스치는 메스를 피한 잭이 몸을 피해 클론을 보았다.
찰나의 순간을 틈타 날아드는 메스. 소리조차 없는 발걸음. 망설임 없는 공격.
그야말로 유령 같은 움직임이었다. 유령은 자신인데 말이지.
달려드는 클론을 피해 책상 뒤로 몸을 던진 잭이 테이블을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반으로 갈라진 책상을 걷어차고 수많은 종이가 하늘에 흩날렸다.
흩날리는 종이 사이로 잭이 주워 든 메스를 던졌다. 비수처럼 날아간 메스가 클론의 가슴을 꿰뚫었다. 가슴에 꽂힌 수많은 메스에도 클론이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멍청하긴."
클론이 휘두른 나이프를 피한 잭이 클론의 손목을 향해 나이프를 휘둘렀다. 나이프가 클론의 손목 힘줄을 끊어내고 피가 솟구쳤다.
잭이 몸을 돌려 비틀거리는 클론의 가슴을 걷어찼다. 가슴에 박힌 메스가 파고들어 클론이 피를 토해냈다.
"지루해."
순식간에 클론의 어깨를 붙잡은 잭이 나이프로 클론의 목을 베었다. 피가 솟구치며 쓰러지는 클론을 본 잭이 혀를 차며 말했다.
"기대했던 결과가 아니라 실망했나?"
잭의 말에 시험관 위 커다란 모니터로 옥사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설마. 오히려 그런 인형에게 졌다면 실망했을 거야. 단순히 감회 어린 쇼를 위한 것일 뿐이니까. 그나저나 자기 몸을 망설임 없이 베다니 놀라운걸.]
"그딴 가짜 몸뚱이에 관심은 없어. 용건은 끝인가? 이글은 어디에 있지?"
[그 백발 청년? 진실을 확인하러 갔지.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따라갈 건가?]
"나는 관심 없지만 클리브는 흥미 있겠지."
잭이 이글을 찾아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이글. 나는 과거를 지났다. 이 손으로 아버지를 베어 넘기고 과거의 몸뚱이도 찢어발겼지.
너는 밝혀지는 진실 앞에서, 당당히 서 있을 수 있을까?
*
태도가 허공에서 수십 번 부딪히고 충돌음이 벽을 때렸다. 분노와 증오 섞인 검이 서로의 목을 물어뜯기 위해 송곳니를 빛내며 달려들었다.
수많은 피가 튀어 오르고 백발이 빛을 받아 붉게 빛났다.
검 너머로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참을 수 없이 혐오스러웠다. 그 어린 시절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채 모든 것을 잃어야 했던 나약한 자신이 너무나도 싫어서, 세월이 지나 어른이 되었음에도 그때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해서.
맞닿은 칼 너머로 클론이 이글을 향해 소리쳤다.
"내가 바로 이글, 이글 홀든이다!"
"기껏 바라는 게 겨우 그런 거냐!"
경멸하는 듯한 이글의 눈에 순간 클론이 분노하며 이글을 강하게 밀어냈다. 클론의 힘에 밀린 이글이 뒤로 물러나 자세를 바로잡았다.
"모든 것을 가진 네놈이,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만들어진 내 기분을 알 리 없어!"
"모든 걸 가졌다고?"
이글과 클론의 검이 부딪히고 강렬한 힘에 클론의 몸이 밀려났다.
"그래, 모든 걸 가졌었지! 단 하나를 잃어버리기 전에는! 그 하나가 내 모든 것이었어! 내가 되고 싶다고? 모든 걸 잃어버리고 삶의 의미조차 잃어버린 빈 껍데기가 되어서 뭘 어쩌겠다는 거냐!"
클론을 밀어낸 이글이 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이글의 검이 클론의 검마저 베고 클론의 가슴을 베어 갈랐다. 클론이 가슴에서 피를 내뿜으며 힘없이 무너졌다.
강철의 검마저 베어버릴 정도로 예리한, 흉내조차 불가능한 참격.
결국 그는 가짜일 뿐이었다. 흐르는 피도, 느껴지는 고통도, 움직이지 않는 몸도 결국은 가짜에 불과했다. 진실된 것 앞에서 힘없이 꺾인 나의 검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글이 검을 갈무리했다. 어두운 복도를 항해 나아가는 이글을 클론이 붙잡았다.
"가는 거냐. 이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을 텐데."
클론의 말에 멈춰 선 이글이 힘겹게 말했다.
"…너도 알고 있었군."
"그래."
둘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차마 깨뜨리기 힘든 적막이. 무거운 적막 속에서 이글이 입을 열었다.
"물러서지 않을 거다.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더라도.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기에."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는 이글을 향해 클론이 짧게 혀를 찼다. 흉내 낼 수도 없는 그 의지에. 볼 수 없는 곳을 바라보는 그 시선에. 자신은 이글 홀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몸을 일으켜 자신의 의지처럼 꺾인 칼을 주워 든 클론이 말없이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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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의 다리가 아이작의 허리를 후려갈겼다. 아이작의 손이 레나의 목을 움켜쥐려는 순간 아이작의 손목을 향해 날아왔다. 총알을 피해 몸을 뺀 아이작이 작게 혀를 찼다.
저 멀리 공장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공장 방향을 본 아이작이 짜증 난다는 듯 카인을 보았다.
"여기까지군, 쓰레기."
아이작이 그림자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 아이작이 사라지자 떠나가려는 레나를 카인이 급하게 붙잡았다.
"이사벨."
카인의 목소리에 돌아선 레나가 카인을 향해 말했다.
"나비가 날고 있습니다."
"나비?"
쏟아지는 달빛을 바라본 레나가 가만히 눈을 감고 말했다.
"바깥의 창문을 열고 나타난 나비가 저를 부르고 있어요. 수많은 가시 속에 둘러싸인 나비가."
달처럼 푸른 머리칼을 가지고.
외로운 듯 무언가를 찾아 홀로 세상을 떠도는 가여운 나비.
꿈에서 본 듯 그립고 그리운, 어딘가 낯설고 어딘가 그리운 한 마리의 나비가.
"그 나비를 만난다면 무언가 알 수 있을까요? 그 나비는 제가 원하는 답을 줄 수 있을까요?"
기억을 잃은 인형이 푸른 눈동자로 카인을 바라보았다.
"나비를 만나고 답을 얻는다면, 그때는 당신 곁으로…"
그 말을 남긴 레나가 나타났을 때처럼 조용히 떠나갔다.
그녀가 떠나간 자리에서 맴도는 빛무리를 조용히 지켜본 카인이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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