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yphers

  • 검과 탄환과 기억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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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한폐인 [55급]

2022-10-21 10: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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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래서, 내가 침입조에 들어온 것은 네놈 때문이로군."


  "너도 확인하고 싶은 게 있으니 거절하지 않은 것 아니냐."


  퉁명스럽게 물어보는 클리브에게 이글이 짧게 답했다. 칼을 휘둘러 피를 털어낸 이글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건물은 보기보다 훨씬 넓었다. 건물에 들어선 침입조는 건물 내부에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확신하고 팀을 셋으로 나웠다.


  마틴, 루이스, 티엔이 2층, 다이무스, 벨져, 자네트, 릭이 1층을 맡고 이글과 클리브, 호타루가 지하를 맡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과 헤어져 지하로 들어선 이글이 호타루를 향해 말했다.


  "호타루, 먼저 가라."


  "뭐?"


  "너는 실내에서 행동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으니까. 우리 속도에 맞춘다면 오히려 볼 것도 못 보겠지. 먼저 가."


  이글의 말에 호타루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속셈이지, 홀든?"


  "앨리셔를 구하는 데 그게 최선이라 생각했을 뿐이야. 싫다면 내 옆에 계속 붙어있던가."


  이글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호타루가 그림자 속으로 몸을 감췄다.


  순식간에 사라진 호타루를 보며 클리브가 부럽다는 듯 감탄했다.


  "히야. 저 능력은 볼 때마다 부럽네."


  "한 눈 팔지 마. 여기는 적지니까."


  모퉁이를 돌자마자 나타나는 강화 인간을 눈 깜짝할 새에 썰어버린 이글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하의 연구시설은 연구시설보다 미로를 연상시켰다. 편의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시설의 배치에 사람을 골탕 먹이기 위해 만들어진 듯한 길들. 예상을 훨씬 웃도는 지하의 넓이.


  클리브와 함께 지하를 뒤지던 이글이 조바심에 혀를 찼다.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었다. 무언가 발견해야 하는데.


  "이봐 이글."


  클리브가 급하게 이글을 불렀다. 이글이 다가오자 클리브가 서류를 건넸다. 종이의 상태를 보니 오래된 서류는 아닌 듯했다.


  서류의 특수한 강화 인간의 제조와 그 실패에 관한 내용이었다. 페이지를 넘기던 이글이 강화 인간 제조 실패의 해결책 부분을 보고 이를 갈았다.


  [사이퍼의 능력 중 가장 다채로운 활용 방법을 자랑하는 능력은 빛 능력일 것이다. 고속 이동, 신체 일부를 빛으로 변형, 가열 및 발화, 빛의 굴절을 이용한 환영 생성 등 활용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그중에서도 앨리셔 캘런(이하 실험체)의 능력은 빛을 이용한 세포의 강화로 이것은 전례가 없는 특수한 능력이다. 상대방의 신체에 영향을 끼치는 점은 루드비히 와일드의 회복 방해 능력과 비슷해 보이지만, 루드비히의 능력이 빛으로 상대를 태워 회복 능력을 저하시키는 방식이라고 증명된 것과는 달리 실험체의 능력은 어떻게 상대방의 능력을 강화하는지 밝혀진 바가 없다.


  실험체의 빛이 증폭시키는 것은 동체시력, 회복력, 혈류 가속, 근력 등이 있으며, 놀라운 것은 실험체의 빛이 피험체의 정신을 안정시키고 신체 붕괴를 막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실험체의 빛은 거대 강화 인간의 정신을 안정시켜 실험을 원활하게 하는 것은 물론 육체의 붕괴를 막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실험체의 빛이 강화 인간과 클론 제작 등 연구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만큼 원리를 분석하고 실험체와 비슷한 능력을 가진 사이퍼의 확보가 필요하다.]


  마지막까지 글을 읽은 이글이 분노에 가득 찬 눈으로 종이를 노려보았다. 종이를 찢어버리지 않은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앨리셔가 여기 있었다는 점은 확실하군. 어쩌면 앨리셔의 클론을 만들었을지도 모르겠어."


  "아니. 클론은 적어도 홀든이나 프리츠 정도의 데이터가 있어야 유의미한 클론을 만들 수 있다고 했어. 그러고도 내 클론은 몸이 붕괴하고 있었지. 앨리셔의 클론은 그리 쉽게 만들 수 없을 거야."


  "더 큰 문제가 하나 더 있어, 이글."


  클리브가 다른 서류를 건넸다. 서류에는 거대 강화 인간의 성공 사례와 실패 사례가 정리되어 있었다. 


  "성공에 비해 실패가 너무 많아. 그만큼 폐기해야 할 강화 인간이 많았다는 소리야. 아이작을 만났을 때 기억해? 그 큰 놈 보고 폐기 대상이라 했잖아."


  클리브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가 꺼낸 말은 그의 표정보다 심각한 것이었다.


  "여기에 그런 폐기할 강화 인간이 보관되어 있지 않을까?"


  *

  벨져가 바닥에 쓰러진 연구원의 멱살을 거칠게 낚아챘다. 여기 오기까지 열두 명의 강화 인간을 베었지만, 이전까지 본 적 없는 불쾌한 강화 인간이었다. 말 그대로 감정 없는 인형. 그렇게 불쾌한 강화 인형 사이에서 간신히 붙잡은 연구원이다. 반드시 정보를 얻어야 했다.


  "루사노 수도원을 기억하나, 릭? 선도 악도, 추악함도 아름다움도 모두 공존하는 곳이라 했지. 하지만 이곳에는 추악함 밖에 없군. 더는 여기에 있고 싶지 않네. 거친 수를 써서라도 이 광신도의 입을 열어야겠어."


  벨져의 말이 끝나자 안타리우스의 연구원이 벨져를 향해 광소를 터뜨렸다. 


  "거친 방법이라고? 거친 걸 좋아하나? 거친 게 무엇인지 보여줄까?"


  한껏 광소를 터뜨린 연구원이 벽에 붙은 붉은 버튼을 눌렀다. 경고등이 붉게 빛나고 날카로운 사이렌이 귀를 찔렀다.


  "여기가 네놈들이 죽을 장소인지도 모르고 기어들어왔구나! 벌 받을지어다, 안타리우스를 따르지 않는 이단들이여!"


  무언가가 박살 나는 거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손이 연구소의 강철 문을 찢어발겼다. 문을 억지로 비집고 방으로 들어서는 거대한 강화 인간을 본 릭이 혀를 찼다.


  "이글이 말한 덩치 큰 강화 인간이 저건가 보군."


  "불쾌한 눈이군요."


  자네트가 레이피어를 뽑아 드는 순간 강화 인간이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3m의 덩치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에 벨져와 자네트가 저도 모르게 몸을 빼냈다.


  순식간에 포탄처럼 쏘아진 거인이 연구원을 들이받고 벽에 처박혔다. 벽에서 먼지가 피어오르고 바닥에 연구원의 피가 터진 잉크처럼 퍼져나갔다.


  벨져가 쌍검을 뽑고 두 검이 경고등의 붉은빛을 받아 두 개의 적월처럼 빛났다.


  "정보를 위해 누군가를 처리할 정도의 지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데."


  다이무스가 먼지 속에서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점멸하는 경고등과 시끄러운 사이렌 살얼음을 밟는 듯한 불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 소리가 내가 상상하는 그 소리가 아니었으면 좋겠군."


  다이무스의 염려스러운 말과 함께 먼지가 걷히고 강화 인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쯤 찢겨나간 연구원을 들어 올린 강화 인간이 연구원을 물어뜯었다. 강화 인간의 입에서 터져 나온 핏물을 본 다이무스가 질색하며 말했다.


  "정정하지. 지능이 있는지도 의심스럽군."


  "동감합니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네요."


  남은 발목을 던져버린 강화 인간이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붉은 피가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입가에 묻은 피를 핥으며 입맛을 다시던 거인이 자네트를 보고 작게 눈을 빛냈다.


  "여자는… 부드러워서… 맛있어."


  "말할 정도의 지능은 있군요. 상당히 불쾌하지만."


  강화 인간이 자네트를 향해 바람처럼 달려들었다. 믿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달려드는 강화 인간을 간신히 피한 자네트가 식은땀을 흘렸다.


  "빠르기는 하지만 피하지 못할 건 아닙니다. 문제는…"


  자네트가 저린 손목을 움켜쥐었다. 스쳐 지나가는 거인의 허리를 향해 레이피어를 휘둘렀지만 마치 강철에 찔러 넣은 것처럼 힘없이 튕겨 나왔다.


  "흉측한 근육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단단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쩔 수 없지. 베일 때까지 계속 베는 수밖에."


  벨져가 쌍검을 들고 강화 인간에게 달려들었다. 거인이 내지른 주먹과 벨져의 검이 충돌하고 강철이 충돌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뒤이어 날아오는 주먹을 물 흐르듯 유려한 움직임으로 주먹을 전부 피해낸 벨져가 거인의 목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큭."


  손등으로 벨져의 검을 막아낸 강화 인간이 벨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벨져가 바람처럼 움직여 강화 인간의 손을 피하자 강화 인간이 질렸다는 듯 벨져에게서 눈을 돌려 릭을 바라보았다.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벨져를 무시하고 릭에게 달려간 거인이 릭을 향해 기둥처럼 거대한 팔을 휘둘렀다. 날아오는 주먹을 향해 릭이 게이트를 열었고, 거인의 머리 옆에 열린 게이트에서 거대한 주먹이 튀어나와 강화 인간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중장비가 충돌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을 구른 강화 인간이 벌떡 몸을 일으켜 릭을 향해 달려들었다.


  릭이 달려드는 강화 인간을 워프로 피하고 다이무스가 거인의 목을 향해 칼날을 쏘아 보냈다. 거인이 팔을 휘두르자 날카로운 칼날이 손등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났다.


  "설마 모기 쫓는 듯한 손짓으로 날려버릴 줄은 몰랐는데."


  "형."


  벨져가 강화 인간을 경계하며 다이무스에게 다가갔다.


  "방금 내가 녀석 하고 붙었던 거 기억 나? 내 공격에 신경도 안 쓰는 놈이 목에 날아오는 공격만큼은 손으로 막아냈지."


  그러고 보니 다이무스가 목으로 날린 칼날도 막아냈지. 그의 내구도를 생각한다면 막을 필요가 없는 공격인데도.


  "목이 약할 거라고?"


  "실험해봐서 나쁠 건 없지."


  다이무스가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바깥이 시끄럽다. 필시 이 놈 같은 강화 인간이 날뛰고 있는 것이겠지. 증원이 오면 몹시 귀찮아진다.


  "틈을 만들어라. 녀석의 목은 내가 베지."



  *

  건물 사이를 달리며 달아나는 강화 인간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은 카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군.


  "언제까지 이 짓거리를 반복해야 하는지."


  카인의 옆에서 주위를 둘러보던 이름 모를 남자가 그에게 탄을 건넸다.


  "섬멸조의 전투가 잦아들고 있습니다. 그만큼 저희는 바빠지겠지만 끝이 멀지 않았겠죠."


  카인이 총알을 장전하는 사이 검은 바람이 그림자 사이를 달려 나갔다.


  검은 바람이 카인의 옆을 스쳐 지나가고 카인의 옆에 있던 남자가 모습을 감추었다.


  "이런!"


  카인이 그림자 사이를 움직이는 검은 바람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알은 길을 잃고 허공을 갈랐다.


  "젠장."


  순간 카인의 앞으로 커다란 무언가가 날아왔다. 바닥을 굴러 날아오는 물체를 피한 카인이 바닥에 혀를 찼다.


  방금까지 그에게 탄환을 건네주던 남자였다.


  순식간에 목이 부러진 채로 죽은 남자를 본 카인이 이를 갈았다.


  인간의 목을 단숨에 꺾어 살해할 정도의 신체능력. 칠흑으로 온몸을 감싼 강화인간.


  "자주 보는군. 가면 남자."


  건물의 그림자 속에서 새하얀 가면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검게 칠해진 가면의 입술이 심장에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여기서 ♡♡줘야겠다, 쓰레기."


  바닥을 기듯 몸을 숙여 달려 나간 아이작이 카인의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바닥을 굴러 목을 움켜쥐려는 거대한 손을 피한 카인이 아이작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아이작이 순식간에 몸을 피하고 총알이 애꿎은 벤치를 박살 냈다.


  "요즘 정말로 싸울 때마다 운이 좋지 않군!"


  건물 사이를 가로지르며 그림자처럼 움직인 아이작이 카인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등 뒤에서 달려드는 아이작에 카인이 미처 총을 겨누지 못했다.


  "잘 가라, 쓰레기."


  강철조차 으스러뜨리는 거대한 손이 카인을 향해 날아왔다. 죽음의 예감에 카인이 굳은 순간, 푸른 섬광이 하늘에서 내리 꽂혔다.


  강렬한 발차기가 아이작을 후려갈겼다. 힘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나가 바닥에 처박힌 아이작이 고개를 들어 푸른 섬광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만나는군, 토끼."


  "만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이작."


  거칠게 숨을 들이켠 아이작이 레나를 보고 킬킬 웃었다.


  "그렇게는 안되지."


  아이작과 레나가 강렬하게 충돌했다.



  *

  "미치겠군. 드디어 넓은 곳에 나왔어."


  수많은 방과 복도를 지나 이글과 클리브가 넓은 홀로 빠져나왔다. 홀에는 수많은 컴퓨터와 연구 자료가 펼쳐져 있었고 벽을 가득 채운 모니터는 음산한 노이즈와 회색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여기는 쓸만한 게 있을 것 같은데. 시간이 너무 지났는데… 이봐. 클리브."


  클리브가 고통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무언가가 영혼을 좀먹는 것 같았다. 눈 뒤로 붉은빛이 튀었다.


  "제발… 아냐. 그럴 리 없어."


  "이봐, 클리브. 괜찮아?"


  "으으… 으아아악!"


  클리브의 눈이 붉게 빛나고 피처럼 끈적거리는 살기가 이글의 목덜미를 스쳐 지나갔다. 머리를 감싸 쥔 잭이 비틀거리며 주위를 훑었다. 


  복도의 배치, 모니터의 위치, 탁하게 점멸하는 잿빛 전등. 


  모든 것이 기억 속의 그 장소와 같았다. 아버지에게 실험체로 연구당하던 시절의 그 연구소. 


  "이봐, 잭. 너 괜찮냐?"


  단검을 꺼낸 잭이 이글을 향해 말했다.


  "내 생각이 맞다면, 저 복도로 가면 앨리셔가 있을 거다."


  잭이 책상 옆에 있는 복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처음 온 것 치고는 이상하게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이 건물은 내가 강화 인간이던 시절의 연구실과 같은 구조로 되어있어. 아버지의 뒤틀린 취미와 보안으로 인해 길이 쓸데없이 복잡하지. 왼쪽, 오른쪽, 직진, 오른쪽. 그 뒤로는 계속 직진이다. 그러면 아마 넓은 연구실이 나올 거다. 앨리셔는 그곳에 있을 거야."


  "아버지? 연구?"


  "쓸데없는 건 묻지 마. 나머지는 그 닌자 아가씨에게 맡겨. 서둘러. 지금쯤이면 안타리우스의 연구원들이 앨리셔를 데리고 도망치려 할 거다."


  "이런 젠장, 죽지 말라고!"


  잭을 뒤로한 이글이 복도로 달려 나갔다. 이글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잭이 벽에 걸린 커다란 모니터를 향해 말했다.


  "이제 되었나? 이제 모습을 드러낼 때가 된 것 같은데."


  잭의 말이 끝나자 회색 노이즈를 흘리던 모니터에서 밤하늘처럼 검은 머리칼을 가진 여성이 나타났다. 익숙한 얼굴에, 놀란 잭이 비릿하게 웃었다. 아, 자신의 기억 속에 갇힌 자를 본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오랜만이군, 옥사나 야고비치. 아니, 탄야 랜킨인가?"


  [누구든 상관없지 않아? 오랜만이야, 잭. 그자 안에 갇혀, 너 자신이 되기 위해 변신해야 하는 기분은 어때?]


  "생각보다 나쁘진 않군. 이 몸은 전 몸보다 잘생겼거든."


  [내가 보기에는 큰 차이 없는 것 같은데? 둘은 꼭 닮았거든. 그래,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네가 여기까지 와서 다행이야.]


  하, 내가 여기까지 오기를 바랐다는 건가? 


  그거 좋군. 나도 너를 만나고 싶었거든.


  잭이 벽에 걸린 수많은 모니터 중 하나를 뜯어냈다. 벽 뒤로 드러난 붉은 버튼을 누르자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책장 뒤의 비밀 문이 열렸다.


  [어서 와, 너와 재회한 기념으로 너를 위한 선물을 준비했어.]


  맹독처럼 끈적거리는 목소리에 잭이 모니터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손끝으로 내달리는 칼날이 모니터를 반으로 가르고 찢어진 전선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기다려, 네 목을 물어뜯으러 갈 테니."



  *

  얼마나 좁은 복도를 달렸을까? 잭이 말한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꺾고 한참을 달렸다.


  호타루는 뭘 하고 있을까. 잭은 어디로 갔을까. 다른 층으로 간 사람들은 무사할까? 


  수많은 생각이 사슬처럼 뒤얽혀 심장을 옥죄었다. 잡념이 끈적하게 복도에 퍼져 발목을 붙잡았다. 


  아니야, 집중하자. 지금은 앨리셔가 무사한지 확인할 때다. 


  어두운 복도를 빠져나가 빛으로 몸을 던진 이글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탁한 빛이 어두운 복도에 익숙해진 눈을 찔렀다. 


  "으어어억!"


  생각보다 발이 더 빨리 움직였다. 무언가 거대한 그림자가 이글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직 눈은 빛에 적응하지 못해 앞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글은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날개처럼 유려하게, 부리처럼 날카롭게. 이글이 칼을 뽑아 달려드는 강화 인간을 베어냈다.


  "한눈에 봐도 실패작이잖아. 이딴 걸로 내 앞길을 막으려 한 건가."


  시력을 되찾은 이글이 쓰러진 강화 인간을 내려다봤다.


  "심심풀이도 안되는군."


  "그래. 심심풀이 정도가 아니면 내가 곤란하지."


  좁은 방에 자신의 음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니,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다. 이글이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거칠게 찢어진 상처. 풀어헤친 머리칼 사이로 빛을 잃은 두 눈. 귀기 넘치는 그 모습은 마치 피에 굶주린 검귀를 보는 듯했다.


  "여어. 썩어가는 몸뚱이는 잘 해결하고 오셨나?"


  "고칠 수도 없고, 고칠 생각도 없어. 네놈을 찢어놓을 때까지만 버틸 수 있으면 충분해."


  클론의 말에 이글이 칼을 뽑으며 날카롭게 웃었다.


  "재미있군. 지난번보다는 쓸만하겠어."


  이글과 클론의 검이 강렬하게 충돌했다. 부딪힌 검 너머로 보이는 상대방의 눈동자. 그 너머로 보이는 자기혐오와 동족혐오. 


  상대방의 존재를 결코 인정할 수 없다. 마치 도플갱어처럼. 


  원인도, 이유도 모르는 분노에 몸을 맡기며 서로를 향해 광기 섞인 살의를 던졌다.


  "이번에는 나를 만족시켜 달라고."



  *

  자신이 걷는 곳은 어디인가.


  빛바랜 연구소의 복도? 기억 속에 잠긴 과거? 


  모르겠다. 현실과 과거가 겹쳐 이제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잊어버릴 것만 같았다. 


  어두운 복도를 걷는 자신은 과거의 잭인가, 현재의 잭인가? 


  복도 끝 작은 빛을 향해 걷는 자신은 클리브 스테플인가 잭 더 리퍼인가? 


  나는, 클리브는, 우리는 옳은 곳으로 가고 있는 걸까? 


  나의 아버지. 비틀린 애증 속에서 나는 그를 찌르지 말았어야 했나? 확실히 처리했어야 했나?


  아버지를 삶과 죽음의 경계 속에 던져 넣은 건 어째서지? 그가 나처럼 되길 바래서였지. 현실과 과거 속. 실재와 허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클리브에게 기생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나, 잭 더 리퍼처럼. 


  수많은 시험관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아버지를 다정한 사람으로 기억하던 그 시절의 나는 어째서 실험실의 조명은 푸른색인지 궁금해하곤 했다. 지금의 나는 그런 걸 궁금해하지 않아.


  나는 정말 잭 더 리퍼인가? 잭의 기억에 짓눌려 스스로를 잭이라 생각하는 클리브가 아닐까? 나는 진실의 찌꺼기일까? 진실이 되려는 거짓일까? 듣고 있어, 클리브? 제발, 내게 대답해줘.


  [어서 와. 기분이 어때? 네 기억 속에서만 존재했던 과거로 돌아온 기분은?]


  "나를 위한 선물이란 게 이건가? 나 하나를 위해 공장을 과거처럼 꾸민 거라면 분에 넘치는 선물이로군."


  쓸데없는 감상이라. 잭이 스스로를 비웃었다. 


  쓸데없는 감상이라니. 이성의 끈을 간신히 붙잡고 있을 정도로 과거와 현실 사이를 헤매는 중인데. 


  기포가 떠오르는 푸른 시험관. 책상 위에 흩어진 서류. 무기질적인 소리를 뱉어내는 시계. 모든 게 자신의 기억 속 그대로였다. 기억보다 더 선명하게, 현실보다 더 현실처럼.


  눈앞의 광경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현실에 매달리는 것뿐이었다. 피안과 이승의 경계에 선 자처럼. 마치 그의 아버지처럼.


  [무슨 소리야. 너를 위한 선물은 아직 꺼내지도 않았는걸.]


  옥사나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잭이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뭐가 있는지 모르면서, 그곳에 뭐가 있는지 아는 것처럼. 누군가가 자석으로 자신을 끌어당기는 듯했다. 시험관의 숲을 헤치고 그가 멈춘 곳은 남자가 들어있는 거대한 시험관 앞이었다.


  [자, 잭. 너를 위해 준비한 나의 선물이야.]


  거대한 시험관의 물이 빠져나가고 남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안의 남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를 보자마자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가 클리브가 말했던 클론이라는 것을.


  클리브가 그랬지. 정체는 모르겠지만 클론이라는 것은 확실하다고. 


  홀든이나 프리츠 정도의 데이터가 있다면 그럴듯한 클론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두 가문의 데이터보다 훨씬 많은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면 훨씬 정교한 클론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안타리우스의 실험체로 수년 동안 실험체였던 자신의 클론이라면.


  시험관을 박살 내며 천천히 걸어 나오는 남자를 보며 잭이 이를 갈았다.


  그럴 리 없어. 


  목덜미까지 늘어진 흰색의 장발. 붉은 눈동자. 목덜미를 스치는 진득한 살기. 


  언제나 시험관의 유리에 비치던 자신의 얼굴.


  [특별히 제작한 잭 더 리퍼, 너의 클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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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 OK Oh! 냠~ Love U~ 궁금해! YES! 히힛~
안녕하십니까? 예~예~ 모든 것은 신의 뜻... 불허합니다. 의외군요. 나 원 참... 시작할까요? 강화인간!!
안녕? OK 궁금하네요. 역시! 재미있네. 깜짝이야! 아~니? ...
웃음 두려움 만족 놀람 동의 분노 좌절 인사
안녕하세요? 넵!! 미안해요!! 앗! 좋아요! 엣헴. 추천! ㅠㅠ
안녕하심까~ 피- 좋다! 못마땅해... 곱다~ 덤비라! 후우- 아슴찮다..
허~허~ 아, 아니... 헐! 흠흠... 끄응... 시, 식은땀이.. 엥? 후어어..
후훗~ Trick or Treat! 사.탕.내.놔. 소녀... 억울하옵니다... 사, 사탕 주세요! 해피... 핼러윈... 날 위해 사탕 정돈 줘야지? 목표? 당연히 사탕이지!
안녕~ ?? 피- 어머! 흐어 오오- 안돼! 랄랄라
우쭈쭈 하하 하? ?? 이거 참... -_- 안녕하십니까 안됩니다
ㅇㅅㅇ 으르릉... 나, 나! (정색) 깔깔 아니야!! 뿌잉 메~
안녕하십니까! 흐응? 흐으으응?! 척! 칫.. 좋-았어! 엥? 후에엥-!!
칫 엄숙하고 근엄하고 진지하다 믿습니다 내 안의 ...가 깨어난다 영업 중 할많하않 충격! 공포! 둠칫 둠칫 두둠칫
파이팅!! 고마워~ 졌어... 히힣 극대노 미안! 거울 앞에서 자의식 과잉된 십대 라이언
저는 지금 극공입니다. 훠이훠이 하.하.하. 매우 화가 납니다. 총기 손질중입니다. 저와 한 판 붙어보시겠습니까? 당신에 대한 정확한 진단 안돼!
뭐가 궁금하죠? 축하드립니다. 너에게는 뭐든 주고 싶어. 칭찬 드립니다. 대-단하십니다. 내겐 보여, 너의 죽음 당신을 믿습니다. 이런 미래는 싫어!
감사합니다. 기쁩니다. 축하합니다. 칭찬해 드리죠. 놀랍군요. 심기가 불편합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매우 화가 나는군요.
짝.짝.짝.짝 고마워... 멋있어... 지금 이게 뭐하시는 거죠? 대다나다 히에엑... 헉! 깜짝 놀랐습니다. 그만해!!!!!
옳소! 감탄했습니다. 흐음 후회할거요! 감사합니다. 놀랐습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정색) 축하드립니다. 칭찬해 드립니다. 놀랍군요. 매우 화가 나네요. 큰 충격입니다. 놀랍군요.
이럴수가... 감히! 네가! 아니?! 장하군! 응?! 좋다! 그건 아니다! 고맙다!
감사합니다 잘 못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매우 화가 나는군요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좌절상태입니다 감탄했습니다 칭찬합니다
멋지군! 좋았어! 하하! 축하하오! 아아.. 5분전인데. 커피한잔 하겠소?
승리의 정유년! 정의로운 새해복! 극.한.공.성. 복! 받아랏! 음~ 직장인의 정석
많이 배웠습니다! 대단합니다! ?!! 축하드립니다 뭔가.. 부족해요 짝짝짝! 각오하세요! 으윽!
성탄의 축복을~! 메리 X-MAS~! 화이트 크리스마스야 해피~ 크리스마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성탄이구나~
Good! Thank U Missing U Useless It's pretty good Oops WHY! Please wait
멜빈 미이라와 고스트 제피 할로윈에는 카를로스호박 히카르도의 사탕 탄야의 마녀 분장..? 잭-슈타인 강시 루시
기자님의 감탄사 : 호-오! 기자님의 일과 : 신문 보기 기자님의 사과 : 이거 실례! 기자님이 놀라면 : 어이쿠! 기분이 좋아 보이는 잭 기분이 나빠 보이는 잭 천진난만한 잭 상큼한 인사를 날리는 잭
좋군요! 좋은 시간 되소서 Merry 추석~! 우와~! 호~오! 가득해요~! 짱인데! 품위있군
Chu~♡ 파이팅! 우와앙.. 졌어 ㅠㅠ 이겼다! 흐~음? 뜨헉! 돼.. 됐거든! 사.. 살쪘..!
훌륭합니다 궁금하네요 에구머니나! 슬프네요... 경멸스럽군요.. 후훗~ 뭐라고 하셨죠? 이, 이럴수가...!
아이작의 멋진 모습 이글이라 샤샤샤~ 트리비아 슬라이딩 시바 포는 달린다 까미유도 달린다 라이샌더 달린다 마를렌 점프! 샬럿 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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