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yphers

  • 검과 탄환과 기억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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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한폐인 [55급]

2022-10-09 13: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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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이트채플의 거리. 침묵마저 살해당한 듯 고요한 골목을 백발의 유령이 거닐고 있었다. 


  이것 참 오랜만이군. 


  그가 기억하는 화이트채플은 절망에 절여진 환락의 거리였다. 지금은 그가 기억하는 모습과 많이 달라진 듯 하지만. 


  50년 만의 거리. 의지할 것은 미약한 달빛뿐, 기댈 것은 이제는 희뿌연 기억뿐. 


  허나 그의 걸음걸이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를 부르는 듯이.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서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달처럼 빛나는 은빛 머리칼에 그림 같이 아름다운 얼굴. 그런 아름다움도 생기 없는 눈동자에 빛을 잃고 사그라들었다. 


  분명 저번에 반파 상태로 만들었는데. 차갑고도 부드러운, 인형을 찢어발기는 감촉이 아직도 손 끝에 남아있는 것만 같은데. 아버지가 없는 상황에서 저렇게 완벽하게 고쳐내다니. 클리브가 만났던 멜빈이라는 꼬마 솜씨인가.


  "솜씨 좋은 엔지니어가 붙어있는 모양이지?"


  비꼬는 유령의 말에도 인형의 감정 없는 두 눈동자는 푸르고 붉게 빛날 뿐이었다.


  "타겟 확인. 잭 더 리퍼로 확인됩니다."


  "나를 여기까지 불러낸 이유가 있을 텐데. 인형 주제에 복수를 위해 찾아왔다고 하지는 않겠지?"


  눈을 빛내는 트릭시를 본 잭이 불쾌한 듯 두 눈을 찡그렸다. 감정 없는 눈에서 새어 나오는 작은 위화감이 잭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고 있었다. 그 위화감이 두 눈동자 너머로 숨겨진 작은 감정의 파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잭이 허탈하게 웃었다.


  당연히 불쾌할 수밖에. 인간을 모방한 인형이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썩 달갑지는 않겠지. 인간에서 불완전한 영혼 찌꺼기로 영락한 잭에게는 더욱이.


  "네가 여기 찾아온 것은 안타리우스의 의지냐, 아버지의 의지냐? 아니, 아버지는 아니겠지. 아직 저승 구경을 하는 중이실 테니."


  순간 타는 듯한 분노가 눈동자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아버지를 욕한 것이 그리도 화난 것일까. 황폐한 실험실에서, 그를 진실된 아버지라 믿고 놀아났던 자신의 모습이 그녀에게서 보이는 듯했다. 우리 둘 다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을. 그럼에도 너는 그를 위해 분노하겠다는 거냐.


  "인형이 화도 낼 줄 아는군. 감정이 없는 척하더니."


  순간 그녀의 광선검이 푸른빛을 내뿜었다. 생명을 거두는 빛의 검이 초승달처럼 빛나며 어둠을 불태웠다. 잭이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며 단검을 꺼냈다.


  "섬멸 모드 작동. 목표를 제거합니다."


  "내가 기억을 잘 읽는 친구를 알거든. 나머지는 그 친구에게 듣도록 하지."



  *

  시간이 흘러 달은 가장 높은 하늘을 지나 천천히 서쪽을 향해 떨어졌다. 


  별채에서 나온 이글이 떨어지는 달을 보며 분노한 마음을 추슬렀다. 할아버지가 그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긴 이야기였다. 많은 사람들이 얽혀있는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였다.


  '아버지의 열등감이 불러온 이야기.'


  벨져 형의 예상이 맞았군. 이글이 달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딸을 짓밟고 무시해온 이유가 고작 열등감 때문이라고? 


  하찮은, 아주 하찮은 이유였다. 이해하려 노력해 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하찮은 이유 때문에 누나를? 


  정신 차리고 보니 그의 발걸음은 저택 뒤의 숲으로 향하고 있었다. 언덕 아래로 새하얀 백합꽃이 달빛을 받아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새하얀 백합을 보며 이글이 누이를 떠올렸다.


  '내 너에게 이 말을 해 준 이유는 단순히 너를 마음에 들어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똑똑하고 집념 있는 너이니 내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이 일에 대해 알아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허나 만약 그리했다면 너는 네 아비에게 달려가 검을 들었겠지. 그리고 처참하게 패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면 제가 어찌하시길 바랍니까?'


  '기다리거라. 네가 다이무스 보다 크게 자랐을 때. 네 아비가 쇠락했을 때. 그때를 노려라. 그것이 내가 너에게 원하는 것이다.'


  '그날까지 누이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오늘의 일을 함구하여라. 네가 네 아비를 검으로 이길 수 있는 날까지.'


  결국 진실에 닿고 나서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어리기 때문에, 그가 약하기 때문에.


  "으아아아!"


  이글이 빠르게 검을 뽑았다. 서늘하게 빛나는 검이 순식간에 굵은 나무를 베었다. 어른 허리만 한 나무가 천천히 쓰러지고 드러난 하늘로 달빛이 쏟아졌다. 달을 보며 헛웃음을 흘리던 이글이 고통을 호소하는 손목을 움켜쥐었다. 


  '겨우 나무 하나 베고 손목에 무리가 간 건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자신의 나약함을 통감하게 된다. 아버지가 아니라 다이무스와 비교해도 한참 부족한 실력이었다.


  아버지를 이기라고? 잘츠부르크 축제를 마치고 돌아온 저 강한 다이무스 형도 저렇게 무참히 패했는데? 설령 시간이 지나 그가 아버지를 이길 수 있게 되더라도 그 시간 동안 누이는 얼마나 고통받을 것인가?


  "젠장…"



  *

  이른 아침부터 누이는 연무장 구석진 자리에서 레이피어를 휘둘렀다. 벌써 레이피어를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에 천부적인 재능이 무엇인지 느꼈다.


  멍청한 아버지. 나보다 누나가 검을 배우는 게 가문에도 훨씬 이득일 텐데.


  검을 제대로 휘둘렀는지 기억도 못한 아침 훈련이 지나가고 이글은 점심을 같이 먹기 위해 그의 누이를 찾았다. 허나 누이는 이미 연무장을 떠나고 난 뒤였다. 레이피어 스승에게 물으니 10분 전에 갈 곳이 있다며 떠나갔다 했다. 뭐, 누나가 갈 곳이야 뻔하지만.


  정원으로 향하던 이글이 백합 정원에서 돌아오는 다이무스와 마주쳤다. 이글이 다이무스에게 정원에 누이가 있냐 묻자 다이무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없다고?"


  "없더구나. 곧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어디로 가버린 건지."


  평소라면 정원에서 꽃을 보고 있을 터인데 정원에 그녀가 없다니. 누이가 저택에서 갈 수 있는 곳이라 해도 그리 많지 않은데. 정원 말고 그녀가 갈 만한 곳이 어디가 있더라?


  곰곰이 생각하던 이글이 누이와 함께 가던 장소를 떠올렸다.


  저택 뒤 숲으로 향한 이글이 눈앞을 가리는 덤불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저번에 왔을 때는 지금보다 쉽게 지나갔던 것 같은데. 그때보다 키가 조금 더 컸다는 걸까. 다음에 올 때는 나이프 하나 들고 와야겠군. 이 멍청한 덤불을 정리해야겠어. 


  나뭇가지에 얼굴을 세 번쯤 찔렸을 때 덤불 끝의 절벽에서 익숙한 뒷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역시 여기 있었네. 내 비밀 장소인데 나한테 말도 안 하고 혼자 오면 어떻게 해."


  "생각보다 늦게 찾아왔네, 이글."


  홀든 가의 저택 뒤로 펼쳐진 정원 너머 숲 속 덤불에 가려진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면 이글과 누이만 아는 비밀 장소가 있었다. 커다란 나무 아래 울타리처럼 둘러쳐진 덤불. 벼랑 아래로 넓게 펼쳐진 숲. 


  홀로 탐험하다 발견한 이 비밀 장소는 이글이 그의 누이에게만 알려준 이후로 자연스럽게 그들만 찾아오는 비밀 장소가 되었다. 투덜거리며 옷에 묻은 이파리를 털어낸 이글이 커다란 나무뿌리에 걸터앉은 누이의 옆에 앉았다.


  "요즘 잘 찾아오지 않았으니까. 멀쩡한 정원 놔두고 왜 여기로 온 거야?"


  "그냥.. 우리가 조금 더 크면 여기에 찾아오는 것도 힘들어지지 않을까 싶어서."


  이글이 절벽 아래로 펼쳐진 드넓은 숲을 바라보았다. 절벽 아래로 흐르는 강이 숲을 가로지르며 저 멀리 뻗어나가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숲이 보이는 이 장소는 이글이 저택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언젠가 이 가문을 떠나는 때가 오더라도 이 광경은 그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여기도 오랜만인걸. 이글 네가 검술 연습을 시작하고 나서는 처음 오는 거 아냐?"


  "나는 그 뒤로도 몇 번 찾아왔었지. 마지막으로 왔던 게 두 달 전이었나?"


  이글의 말에 소녀가 부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뭐야. 날 빼놓고 혼자 왔다고?"


  "누나도 정원에 혼자 가잖아."


  "그건 내가 가자 해도 네가 안 간 거잖아!"


  "그랬던가."


  기분 좋은 바람이 이글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겼다. 절벽 너머로 푸르게 펼쳐진 숲을 볼 때마다 이글은 저 숲 너머 다른 곳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홀든 가문의 사람은 열네 살이 되고 잘츠부르크 축제를 끝내야만 자유롭게 밖으로 나가는 것이 가능했다. 잘츠부르크 축제를 마친 다이무스가 들려주는 바깥의 이야기는 그들의 눈을 빛나게 하기 충분했다.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 된다면, 누나는 어디에 가보고 싶어?"


  "나는… 바다. 바다에 가보고 싶어."


  "오스트리아는 내륙이라 바다가 없는 곳이라 했지. 바다를 보려면 프랑스나 이탈리아까지 나가야 할까?"


  "프랑스랑 이탈리아도 가보고 싶다… 뭔가 낭만이 있을 것만 같은 곳이야."


  "으엑."


  이글이 그녀의 말에 속으로 쓰게 웃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녀를 잘츠부르크 축제에 보내줄 리 없으니 그녀는 앞으로도 저택 밖으로 나설 수 없을 것이다.


  옹졸 맞은 늙은이 같으니라고. 이글이 자리에서 일어나 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나가자. 점심 먹어야지."



  *

  시간은 눈 깜빡할 새에 화살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른이 되고 싶다고 밤마다 생각한 열두 살 어린아이도 어느덧 열네 살 소년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런 이글을 보며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며 칭찬했지만 거울 속의 모습은 아직도 힘없는 어린아이 일 뿐이었다. 열네 살의 다이무스와 벨져는 지금의 자신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인가 그는 그의 누이를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누이는 이글을 볼 때마다 키가 더 자랄 것이라 말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차이 날 것이다. 하지만 이글은 그런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키로 정하는 게 아닐 텐데. 그렇다면 자신은 언제 어른이 되었다고 가슴 펴고 말할 수 있을까?


  햇빛이 따가운 7월의 어느 날. 다이무스가 그에게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잘츠부르크 축제에 갈 준비를 해야겠구나."


  그 말을 듣고 기쁜 마음보다 슬픈 마음이 앞섰다. 결국 그의 누이는 잘츠부르크 축제에 참가하지 못했다. 


  해바라기는 어느덧 그의 키를 훌쩍 넘어섰다. 저 해바라기만큼 키가 자랐을 때 그는 어른이 되어있을까? 방으로 돌아가던 이글이 복도 구석에서 그의 누이를 발견했다. 


  '누나?'


  그녀가 서있는 곳은 아마 검 진열장일 터이다. 조용히 발걸음을 죽이고 그녀의 뒤로 다가가니 새하얀 검집을 가진 장도가 보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평범한 검과는 다른 검이었다. 2m 가까이 되는 커다란 검. 저 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 홀든 가 제일의 검사가 되는 것일까.


  "검 앞에서 뭐해?"


  이글의 말에 누이가 깜짝 놀라며 이글을 보았다.


  "깜짝이야. 누가 남에 뒤에 그렇게 조용히 다가오래?"


  "이렇게 쉽게 뒤를 잡히는 걸 보면 누나도 멀었네."


  이글의 말에 누이가 키득키득 웃었다. 짧은 대화에도 누이는 새하얀 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거대한 장도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미안해."


  "뭐가?"


  "잘츠부르크 축제. 나 말고 누나가 갔어야 했는데. 순서도 그렇고 검술 실력도 누나가 벌써 나를 따라잡기 시작했잖아."


  "내가 잘츠부르크 축제를 못 가는 건 네 잘못이 아니잖아. 그래고 아직 너를 이길 수는 없을 걸."


  잘츠부르크 축제에 가지 못한다는 걸 알았을 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누이와 헤어지고 방에 돌아온 이글이 침대에 누워 누이가 검을 바라보았던 눈빛을 떠올렸다. 틀림없이 열망의 눈빛이었다. 검을 향한 열망. 강해지고 싶다는 열망. 홀든 가의 검사로서 홀든 제일의 검을 쥐고 싶다는 열망.


  '누나의 소망, 언젠가는 이룰 수 있게 만들어줄게.'


  시간이 빠르게 흘러 이글이 잘츠부르크 축제로 떠날 날이 다가왔다. 가족과의 인사는 이미 마쳤다. 너무 정신없이 지나가 형들과 어머니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버지가 했던 말만큼은 확실히 기억났다.


  [벨져만큼은 바라지도 않으니 가문의 얼굴에 먹칠하는 일은 없도록 해라.]


  비수 같은 충고에 헛웃음조차 낼 수 없었다. 그래. 당신은 그런 인간이었지. 


  집을 떠나는 준비를 하는 도중 이글이 아버지 몰래 누이를 찾아갔다. 누이는 홀로 방에 남아 저택 밖에 서 있는 마차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방에 찾아온 이글을 본 누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는 왜 왔어?"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잘츠부르크 축제에 간다는 데 마중도 나오지 않는 누나가 너무하다 싶어서."


  이글의 말에 누이가 힘없이 웃었다.


  "사람 많은 곳은 버거워서. 누나 성격 잘 알잖아."


  그럴 리가. 아버지의 눈치를 보고 밖으로 나서지 못하는 것이겠지.


  "동생이 위험한 곳에 간다는데 걱정도 안 해주는 거야?"


  "걱정은 무슨… 너 정도면 알아서 잘하겠지. 난 걱정 같은 거 안 해."


  그렇게 말한 누이가 조용히 웃으며 이글에게 잘 다녀오라고 속삭였다. 


  결국 누이는 끝까지 이글을 마중하는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마차 짐칸에 가방을 거칠게 쑤셔 넣은 이글이 저 멀리 누이의 방을 바라보았다. 떠나가는 이글을 향해 손을 흔드는 누이를 보며 이글이 작게 웃었다.


  마차에 올라탄 이글이 긴장한 눈빛으로 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안개에 뒤덮인 마을을 바라보았다. 떨리는 마음을 좀처럼 가라앉히지 못하던 이글이 누이가 떠나가는 자신에게 속삭인 말을 떠올렸다.


  [긴장하지 말고, 잘 다녀와.]


  누이를 생각하며 마음이 따듯해지는 것을 느낀 이글이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다녀올게, 누나.'



  *

  이글이 잘츠부르크 축제로 떠난 것이 벌써 6주 전의 일이었다. 이글은 알아서 잘 할 테니 걱정 따위 하지 않는다고 호언장담 했던 누이였건만 다이무스는 한 동안 이글 걱정에 휩싸인 누이를 달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오라버니. 벌써 6주가 지났는데 왜 이글이 오지 않을까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것 아닐까요?"


  "잘츠부르크 축제는 힘든 일이다. 보통 두 달은 걸리고 길게는 1년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단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고 봐야겠구나."


  "하지만 벨져 오라버니는 한 달 만에 돌아오셨는걸요."


  "그건 벨져잖니. 나도 돌아오는 데 두 달 정도 걸렸고. 이글도 검술에 재능이 있는 녀석이니 금방 돌아오겠지.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꾸나."


  "그래도…"


  다이무스의 희미한 웃음에 소녀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늦은 새벽,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해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던 소녀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가는 비가 소녀의 창문을 조용히 두들겼다.


  창 밖으로 보이는 정원은 평소와 달리 너무나 넓어 보였다. 언제나 자신을 향해 웃던 동생이 곁에 없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나는 이렇게 이글에게 의지하고 있었구나.'


  소녀의 마음이 파랗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파랗게 멍든 마음이 외로움으로 욱신거렸다. 


  네가 필요해 이글. 언제나처럼 내 옆에 있어줘. 


  욱신거리는 마음의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다. 우울한 마음처럼 차가운 비가 새벽을 적시고 있었다. 


  이렇게 슬픈 건 새벽 때문일 거야. 절대 내 마음이 약해서 그런 게 아니야. 


  그러니까 오늘 한 번만. 딱 한 번만 울자.


  조용히 떨어지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친 소녀가 비가 내리는 창 밖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황혼을 지나 해가 떠오를 때까지 눈물을 흘렸지만 푸르게 물든 마음은 좀처럼 원래의 색을 되찾지 못했다. 


  백합꽃이 만발한 모습을 보아도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창밖을 보던 소녀가 이글과 함께 갔던 비밀 장소를 떠올렸다. 그래 비밀 장소가 있었지. 한 번 가볼까. 그곳에 가면 우울한 마음이 조금은 달래어질까. 


  무언가에 이끌리듯 비밀 장소로 발걸음을 향한 소녀가 절벽 밑으로 펼쳐진 숲을 보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네가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보고 싶어, 이글."


  불행은 조용하게. 그리움에 물든 소녀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불행은 선명하게. 슬픔에 물든 소녀의 숨이 끊어지도록. 


  비에 ♡어 무른 땅이 천천히 갈라졌다. 순식간에 무너진 발 밑에 소녀가 비명 한 번 내뱉지 못하고 절벽 밑으로 떨어졌다.


  "아."


  불쾌한 부유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절벽 위에 자란 커다란 나무가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그 모습을 본 소녀가 자신이 절벽 밑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보는 마지막 장면이라는 것도.


  '이글…'


  슬픔에 파랗게 물든 백합이 절벽 아래로 하늘하늘 떨어졌다.



  *

  잘츠부르크 축제를 끝마친 이글이 집으로 돌아왔다. 두 달 사이 키가 컸는지 저택의 벽이 기억하던 것보다 낮아 보였다.


  누나가 기뻐하려나. 


  이글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저 멀리 다이무스가 다가왔다. 답지 않게 다급한 표정으로 달려온 다이무스가 이글의 앞에 섰다. 형의 그늘진 얼굴을 본 이글이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무슨 일이야, 형."


  "…좋지 않은 소식이 있다."


  다이무스가 숨을 골랐다. 숨을 고르는 동작 하나하나에 고통이 묻어 나왔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 다이무스가 전한 소식은 천천히, 하지만 날카롭게 이글의 마음을 찢어놓았다.



  *

  이글의 칼질에 서재의 문이 순식간에 조각났다. 이글의 등장에 테오도어가 조용히 이마를 찌푸렸다. 이글이 분노로 몸을 떨며 테오도어의 앞에 섰다. 자신이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알면서도 태연자약한 모습이 그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홀든 가의 삼남, 이글 홀든. 가주님을… 빌어먹을. 다 집어치워!"


  이글의 발길질에 의자가 하늘을 날았다. 머리 옆을 스쳐 지나간 의자가 벽에 부딪혀 박살 나자 테오도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못 본 사이에 꽤나 거칠어졌구나, 이글."


  "누나가 죽었는데도 참 태평하시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나!"


  거친 쇳소리를 흘리며 이글이 칼을 뽑았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이글의 칼을 본 테오도어가 조용히 칼을 뽑아 들었다. 칼이 뽑히는지 모를 정도로 소리 없는 발도였다.


  "이해를 못 하겠군. 그 녀석이 혼자 절벽에서 미끄러진 것인데."


  "이 자식이!"


  검의 폭풍이 몰아쳤다. 수많은 가구와 책이 그들의 검 앞에 힘없이 찢겨나갔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검과 검이 맞부딪혔고 테오도어와 이글이 검 너머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누구 때문에 누나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누나가 당신의 딸만 아니었으면 그렇게 허무하게 목숨을 잃을 일도 없었어!"


  이글이 테오도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목을 노리고 날아드는 이글의 칼을 튕겨낸 테오도어가 이글을 향해 말했다.


  "검의 재능은 열네 살의 다이무스보다 낫구나. 그 빌어먹을 성격만 고치면 되겠어."


  테오도어의 말에 이글이 냉소 가득한 얼굴로 그를 향해 소리쳤다.


  "하, 검의 재능이라고? 네놈은 검의 재능이 부족해 여동생을 쫓아냈나?!"


  순간 검을 쥔 테오도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글도 물러서지 않고 검귀처럼 칼을 휘둘렀다.


  "여동생을 향한 열등감 밖에 없는 당신이 잘도 그런 소리를 하는군! 가주의 자리를 찬탈한 패배자가!"


  이글의 말에 테오도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분노에 가득 찬 눈으로 이글을 본 테오도어가 으르렁거리며 소리쳤다.


  "네놈… 그것을 어디서 들은 것이냐!"


  "카렌 홀든! 홀든 가의 늙은이들을 부추겨 가주 자리를 빼앗고 그 여자를 쫓아냈지! 할아버지를 뒷방 늙은이 신세로 몰아내고! 왜! 누나를 보며 여동생을 떠올렸나! 누나가 네놈의 알량한 자존심을 건드렸나! 누나를 볼 때마다 나약한 패배자가 된 기분이었나!"


  순간 가주의 검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이글의 검이 힘없이 부러지고 오른눈에서 붉은 피가 솟구쳤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붉은 피를 본 이글이 그제야 자신이 베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심을 내니 이렇게나 실력 차이가 나는 것인가. 잘츠부르크 축제를 마치고 돌아와 강한 힘을 손에 넣었음에도.


  "오늘 네놈이 여기서 했던 모든 말. 네 누이와 카렌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 함구령을 내린다. 거역하면 어떻게 될지 잘 알고 있겠지."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것부터 신경 쓰는 것인가. 이글이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네놈은 인간실격이야. 인간으로서 무언가가 부족한 거라고.


  "인간으로서 부족한 주제에 화도 낼 줄 아는군. 그래, 반푼 어치 인간인 아버지.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지?"


  이글의 말에 테오도어가 별 감흥이 없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며 검을 꽂았다.


  "글쎄... 서재 수리비가 꽤 나가겠다는 생각뿐이군."



  *

  검이 조금만 더 깊었다면 눈을 잃었을 거라는 치유 능력자의 말을 뒤로한 이글은 백색 검집의 장도와 돈을 훔쳐 달아났다. 집 밖으로 뛰쳐나간 이글은 무작정 열차에 몸을 싣고 홀든 가에서 이틀 정도 떨어진 시골 마을로 향했다.


  태양을 집어삼킨 새카만 하늘이 꾸역꾸역 비를 뱉어내고 있었다. 비에 ♡은 머리칼을 쓸어 넘긴 이글이 장도를 끌며 산길을 걸었다. 두 시간 정도 걸었을까. 깊은 숲 속에서 밝은 빛을 발견한 이글이 빛을 따라 걸어갔다. 빛의 끝에 닿은 이글이 작은 통나무 집을 발견했다.


  이글이 무작정 문을 두들겼다. 집 안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백발의 여자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탄탄한 몸. 강인한 눈. 한 자루 칼처럼 날카로운 기백. 마치 야생동물 같은 여자.


  이글의 고모, 카렌 홀든이었다.


  비틀거리는 카렌의 숨결에서 진한 술냄새가 풍겨져 나왔다. 술에 취한 카렌이 이글의 얼굴을 보고 이마를 찌푸렸다.


  "이거…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 쌍판인데… 아, 그래. 잘나신 오라비네 자식이로군. 아버지가 보낸 편지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왜 찾아온 거냐?"


  허리를 숙이며 눈을 맞추는 여자를 향해 이글이 말했다.


  "검을 배우고 싶습니다. 검을 가르쳐 주세요."


  "켁."


  이글의 말에 카렌이 혀를 차며 술을 들이켰다.


  "잘나신 오라비를 두고 왜 이런 깡시골까지 기어들어온 건지… 기왕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술이나 따라주며 칭찬해주고 싶다만 나는 애를 싫어해. 꺼져라."


  생각지도 못한 차가운 말이었다. 떨어지는 비에 몸이 차게 식어갔다. 마음이 꺾일 것 같았다. 뺨에 흐르는 것이 빗물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정도로 물러날 거라면 처♡♡터 여기에 오지도 않았다.


  이글이 무릎을 꿇고 땅에 머리를 박았다. 진흙이 이글의 머리를 더럽히고 순백의 장도가 땅에 떨어졌다. 


  땅에 떨어진 순백의 장도를 본 카렌의 얼굴에서 취기가 사라졌다. 저 검은 분명…


  "이봐 꼬마. 나에게 검을 배워서 무엇을 하려는 거지?"


  "복수."


  이글의 목소리에서 소년 답지 않은 분노가 느껴졌다. 이글의 분노에 답하듯 순백의 장도가 빛을 받아 날카롭게 빛났다.


  "그 자식 밑에서 검을 배워서는 그 자식을 넘어설 수 없어. 그 자식을 이기려면 당신의 힘이 필요해."


  순백의 장도와 이글을 번갈아서 본 카렌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술을 들이켰다. 여기서 이 아이를 받았다가는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은데.


  '그래도 패기는 마음에 드는군.'


  "우선 들어와라. 이야기를 듣고 판단하지."


  남은 술을 전부 들이켠 카렌이 술병을 내던지며 집으로 들어갔다. 순백의 장도를 쥔 이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일어났다. 벌어진 눈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흐르는 진흙과 섞여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욱신거리는 눈의 고통이 누이를 향한 그리움에 삼켜 사라졌다.


  '누나를 잊지 않을 거야. 꼭 복수해 줄게.'


  카렌을 따라 집으로 들어서기 전, 이글이 빗속에서도 찬란히 빛나는 푸른 달을 바라보았다.


  한 여름 화사하게 피어난 백합 같았던 나의 누이, 릴리 홀든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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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 OK Oh! 냠~ Love U~ 궁금해! YES! 히힛~
안녕하십니까? 예~예~ 모든 것은 신의 뜻... 불허합니다. 의외군요. 나 원 참... 시작할까요? 강화인간!!
안녕? OK 궁금하네요. 역시! 재미있네. 깜짝이야! 아~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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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심까~ 피- 좋다! 못마땅해... 곱다~ 덤비라! 후우- 아슴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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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 피- 어머! 흐어 오오- 안돼! 랄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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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정유년! 정의로운 새해복! 극.한.공.성. 복! 받아랏! 음~ 직장인의 정석
많이 배웠습니다! 대단합니다! ?!! 축하드립니다 뭔가.. 부족해요 짝짝짝! 각오하세요! 으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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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군요! 좋은 시간 되소서 Merry 추석~! 우와~! 호~오! 가득해요~! 짱인데! 품위있군
Chu~♡ 파이팅! 우와앙.. 졌어 ㅠㅠ 이겼다! 흐~음? 뜨헉! 돼.. 됐거든! 사.. 살쪘..!
훌륭합니다 궁금하네요 에구머니나! 슬프네요... 경멸스럽군요.. 후훗~ 뭐라고 하셨죠? 이, 이럴수가...!
아이작의 멋진 모습 이글이라 샤샤샤~ 트리비아 슬라이딩 시바 포는 달린다 까미유도 달린다 라이샌더 달린다 마를렌 점프! 샬럿 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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