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yphers

  • 검과 탄환과 기억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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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한폐인 [55급]

2022-10-02 12:2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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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이에게 검을. 다이무스의 요구는 과연 받아들여질 것인가. 


  아이의 의욕을 북돋기 위해 반쯤 농으로 하였던 약조. 이제 와서 테오도어가 그 약조를 무시한다 하여도 누구도 그를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다이무스 그 자신도 반쯤 잊고 있던 약속이니.


  허나 모두의 예상과 달리 테오도어는 다이무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누이를 부른 그는 일주일 후부터 검을 배울 것이라는 말을 건넨 후 차갑게 사라졌다.


  누이와 함께 방으로 돌아온 이글은 방 안을 뛰어다니며 누이가 검을 배우게 된 것을 마치 제 일인 양 기뻐하였다. 한참 환호성을 지르며 방을 뛰어다니던 이글이 누이를 껴안았다.


  "누나! 누나도 이제 검을 배울 수 있어!"


  "응… 으응… 정말 그렇네."


  "누나, 반응이 왜 그래? 엄청 기뻐할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누이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이글이 묻자 소녀가 고개를 작게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아직 얼떨떨해서 그래. 마냥 꿈만 같아서."


  "꿈이 아냐!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한 말이니 아무리 그 인간이라도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 없겠지."


  "이글, 아버님께 그런 말투는 못 써. 하지만 정말로 검을 배울 수 있다니 꿈만 같아."


  "누나는 벨져 형이 인정할 정도로 검의 천재잖아! 틀림없이 홀든가 최고의 검사가 될 수 있을 거야!"


  이글의 말에 소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선 이글을 이기기 위해서 노력해야겠는걸."


  "헹! 둘째인 벨져 형보다 셋째인 누나가 더 재능이 있다면 넷째인 나는 얼마나 천재일 것 같아? 누나가 나를 이기려면 한참은 노력해야 할걸!"


  "글쎄. 생각보다 금방 따라잡을 것 같은데."


  입술을 삐죽 내민 이글을 뒤로한 소녀가 방을 나섰다. 


  마음이 좀체 가라앉지 않고 울렁거렸다.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소녀가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사실 꿈이 아닐까?'


  이렇게 깨고 싶지 않은 꿈이 있을까. 방문을 닫고 조용히 창가에 선 소녀가 새하얗게 빛나는 백합꽃으로 가득 찬 정원을 바라본 소녀의 뺨에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어라."


  가늘게 흘러내린 눈물 한 방울을 따라 참고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검을 배울 수 있다. 그것 하나만으로 살면서 받아온 멸시와 차별을 단번에 보상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멈출 줄 모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내던 소녀가 눈물을 닦는 것도 포기한 채 무릎부터 주저앉았다.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리던 소녀가 뺨을 적시는 눈물을 닦아내다 지쳐 잠들었다.



  *

  누가 그리 말했지. 인간의 꿈이 달콤한 이유는 현실이 차갑기 때문이라고. 


  일주일 후. 검을 휘두르는 누이의 옆에서 다이무스가 분노를 감추며 칼집을 으스러뜨릴 듯 움켜쥐었다. 벨져는 이리될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이글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보았다. 


  이른 아침 기쁨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연무장에 찾아온 그녀가 받은 것은 햇빛을 받아 탁하게 빛나는 가느다란 세검이었다. 


  레이피어. 


  찌르기에 특화된 가벼운 검은 얼핏 보면 아직 다 성장하지 못한 소녀에게는 좋은 검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형제들 중 누이가 레이피어를 받은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홀든 가문에 레이피어 검술은 없다.


  홀든 가문의 누구도 레이피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레이피어를 가르치는 검사도 홀든 가의 검사가 아니라 남이나 다름없는 방계의 사람이었다.


  레이피어를 든 소녀의 모습은 형제들에게 차가운 현실을 강요했다. 누이를 절대로 홀든 가문의 검사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의지. 


  다이무스의 심장이 분노로 타오르는 듯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누이를 데리고 연무장을 떠나고 싶었다. 벨져와 이글도 같은 심정이겠지. 허나 그들 중 누구도 차마 그러지 못한 이유는 너무나도 밝은 웃음을 지으며 레이피어를 휘두르는 누이의 모습을 차마 자신의 손으로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홀든 가의 딸로서 레이피어를 받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도 모르지 않을 텐데도.


  레이피어를 휘두르는 누이의 모습을 더는 지켜볼 수 없었던 다이무스가 연무장을 떠났다. 분노로 가득 찬 발걸음으로 집무실로 향한 다이무스가 거칠게 문을 열었다.


  서류를 읽던 테오도어가 고개를 들어 느닷없이 나타난 다이무스를 보았다. 다이무스는 열일곱의 소년 치고는 나름 감정을 잘 다스리고 있었지만 그런 그라도 움켜쥔 손에서 튀어나온 힘줄을 숨기진 못했다. 


  "홀든가의 장남, 다이무스 홀든. 가주님을 뵙습니다."


  다이무스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소년의 목소리 사이사이에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섞여 흘러나왔다.


  "올 줄 알고 있었다. 꽤나 문을 거칠게 열더구나."


  "제가 올 줄 알았다면 제가 찾아온 이유도 알고 계실 터입니다만."


  "하고 싶은 말이 무어냐."


  다이무스가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러나 결국 감정을 가라앉힐 수 없었는지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버지는 저와의 약속을 어기셨습니다!"


  "누이에게 검술을 가르쳐 달라는 약속 말이냐? 지금쯤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을 텐데 내가 무엇을 어겼다는 것이냐?"


  "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아버지께서 더 잘 아실 텐데요!"


  "너는 누이에게 검술을 가르쳐 달라고 청했고 나는 너의 요구에 응했다. 그것이 전부다. 그리고 나는 그 녀석에게 가문의 검술을 가르칠 생각은 없다."


  "어찌 그리 누이를 미워하십니까?! 당신의 딸 아닙니까!"


  다이무스의 말에 안경을 벗은 테오도어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 딸은 없다. 홀든 가문의 가주, 나의 자식은 아들 셋 뿐이며 세상이 그리 알고 있다. 그것은 변하지 않아. 홀든 가의 일원이 아닌 자에게 가문의 검을 줄 수는 없지. 그 녀석에게 레이피어를 준 이유는 내가 했던 말을 지키기 위한 것일 뿐이다."


  "아버지!"


  분노한 다이무스의 말에도 테오도어는 화 낼 가치도 없다는 듯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느냐? 누이를 위해 화내는 네가 옳다고 생각하느냐?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옳은 것은 나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네가 옳지 못한 이유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힘없는 자의 말은 공허할 뿐이고, 공허한 말로는 무엇도 쟁취할 수 없다."


  테오도어의 말에 다이무스가 검을 뽑았다. 차가운 강철의 검이 빛을 받아 묵직하게 빛났다.


  "좋습니다. 힘의 논리. 아버지의 말을 따라 힘으로 제 뜻을 관철하겠습니다."


  다이무스의 검을 본 테오도어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움켜쥐었다.


  "의외로구나. 내게 검으로 도전하는 것은 네가 아닌 벨져라고 생각했다만."


  테오도어가 천천히 검을 뽑았다 검을 뽑는 동작만으로 한기를 품게 만드는 그를 보며 다이무스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와라. 너의 검이 얼마나 무딘지 내가 직접 깨닫게 해 주마."



  *

  "형은 알고 있었어?"


  이글이 씁쓸한 표정으로 누이를 바라보는 벨져를 닦달했다. 일주일 전 아버지가 누이에게 검을 내려줄 것이라 말했을 때 벨져의 표정에서 불안이 보였었다. 그는 필시 오늘의 일을 예견한 것이리라.


  "아버지가 누나에게 홀든 가의 검을 가르치지 않을 거라는 거, 형은 알고 있었어?"


  "어느 정도 예상은."


  "어째서! 그 인간이 약속했었잖아!"


  "과연 저 아이에게 검을 가르치라고 아버지를 설득한 사람이 우리 밖에 없었을까? 저 아이의 재능에서 눈을 돌리는 것이 과연 가문 전체의 뜻이었을까?"


  여동생의 검무를 본 벨져는 그녀가 가문 최고의 천재 중 하나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 봉오리조차 트지 못한 재능이 저 정도라는 것에 감탄했고, 앞으로 그 재능이 피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것에 한탄했다. 


  앞으로 그녀의 손이 검을 쥐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날 벨져가 쌍검을 쥔 그녀 앞에서 떠나지 못했던 것은 그녀의 검이 아름다웠던 것뿐만이 아니다. 그녀의 검무가 더는 볼 수 없는 덧없는 꽃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저 아이가 내 검을 휘둘렀을 때 그것을 본 사람은 나 말고 더 있었어. 하녀 둘과 정원사가 있었지. 그리고 새벽부터 저택에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어. 어쩌면 저 아이가 홀든 가의 남매들 중 가장 재능이 있는 아이일지도 모른다고.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저 아이를 불러 경을 쳤다. 검을 쥘 자격이 없는 자가 검을 쥐어서는 안 된다고. 그리고 그 소문을 낸 하녀 두 명은 가문에서 쫓겨났지. 정원사도 어머니가 아끼던 자가 아니었으면 쫓겨나게 되었을 거야."


  홀든 가의 비밀을 알게 된 하녀가 쫓겨났다. 이글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누이가 검을 쥔 것을 보았다는 이유로 사라지게 되다니 얼마나 잔혹한 일인가.


  "하지만 한 번 퍼진 소문은 걷잡을 수 없지. 수많은 사람들이 아버지를 설득하려 했고, 그중에는 조부님도 계셨다."


  "할아버지가?"


  할아버지는 병에 걸려 치료사가 항상 지켜봐야 할 정도로 몸이 좋지 않아 별채에서 나오는 일이 없었다. 이글도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의 얼굴을 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런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별채 밖으로 나섰다고?


  "조부님께서 아버지와 크게 다투셨지만 끝내 아버지의 뜻을 꺾지는 못하신 모양이다. 조부님의 말씀에도 끝내 뜻을 꺾지 않으신 아버지께서 가벼운 약조 하나 때문에 마음을 바꾸실 리 없다고 생각했다."


  벨져의 말에 이글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렇게도 누이를 홀든 가문의 자식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단 말인가. 


  찬란한 햇빛 아래 소녀가 탁한 세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검을 처음 쥔 소녀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능숙한 솜씨였다. 홀든 가문이 생겨난 이래 역대급 천재가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받지도 못하고 사라져야만 하는가. 마치 불에 타 사라지는 보물을 보는 것 같았다.


  "형은 이제 어쩔 거야."


  "뭐를."


  "누나가 레이피어를 배우는 거, 그냥 넘어갈 거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아버지가 레이피어를 내렸고 저 아이는 그것을 받았지. 그 순간 우리가 끼어들 여지는 없어졌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렸지." 


  "난 인정 못해. 레이피어가 문제가 아니라 누나가 가문 사람으로 인정 받지 못하는 거 이해 못하겠어."


  "뭘 할 생각이냐."


  "아버지가 왜 누나를 인정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아볼 거야.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무언가 굉장한 이유가 있을 거 아냐? 그 대단하신 이유가 뭔지 알아야 속이 후련하겠어."


  이글의 말에 고민하던 벨져가 입을 열었다.


  "정말 하찮은 이유라면 어떻게 할 거냐."


  "형은 뭔가 알고 있어?"


  "나도 몰라. 그런데 이 사건의 시작은 아주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하찮은 일에서 시작된 거라면."


  이글이 이를 갈았다. 열두 살 아이 답지 않은 다부진 팔에 굵은 힘줄이 솟아올랐다.


  "그 재수 없는 얼굴에 한 방 먹여주지 않고서는 못 참겠어."



  *

  섬광이 스치고 붉은 피가 흩날렸다. 다이무스의 검이 힘없이 떨어지고 붉은 피가 흘러내려 천천히 검을 적셨다.


  "이제 알았느냐."


  칼을 꽂아 넣은 테오도어가 다이무스를 향해 말했다.


  "제 감정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검을 드는 모습이 얼마나 오만방자한지 말이다."


  피에 붉게 물들어가는 자신의 검을 본 다이무스가 분을 삭였다. 힘의 논리로 도전했으니 패배한 그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물러가라는 테오도어의 손짓에 다이무스가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서는 소년의 발걸음에 깊은 자기혐오가 묻어 나왔다.


  마지막까지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방을 나서는 아들을 보며 테오도어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의자에 몸을 기댄 남자가 문득 자신의 처지가 한심해 창 밖을 바라보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자기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놈이 잘난 듯이 설교하는 모습이라니.


  "꼴사납군."



  *

  달빛이 어두운 복도를 푸르게 물들였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피를 많이 흘렸는지 창가에 비친 그의 얼굴이 조금 창백했다. 얼굴 위를 뒤덮은 새하얀 거즈를 본 다이무스가 얼굴의 붕대에 손을 올렸다.


  '한심하군.'


  상처가 깊어 능력자에게 치료받지 않는다면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을 것이라 했다. 그 말을 들은 다이무스는 흉터를 지우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 흉터는 불의를 보고도 침묵했던 자신을 향한 벌이었다. 얼굴 위로 드러난 자신의 죄였다. 이 흉터는 그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와 함께 할 것이다. 앞으로 자신이 진실에서 눈을 돌릴 때마다 자신을 바로잡는 길잡이가 되리라.


  "무모했어."


  복도의 그림자 속에서 벨져가 걸어 나왔다. 날카롭고도 지친듯한 그의 눈이 다이무스의 얼굴을 훑었다. 왼쪽 뺨을 뒤덮은 거즈는 지혈이 방금 끝난 참인지 조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지혈도 아직 안된 것 같은데 당분간 몸에 힘 좀 빼고 다녀야겠군."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여동생께서 오라버니를 뵙고 싶다고 방에서 기다리고 계신데 한 번 얼굴이나 비추시라고."


  "사람을 시키면 될 것을 직접 오다니 너답지 않구나, 벨져."


  "여동생께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부탁하는데 오라비 된 입장으로서 나서지 않을 수가 없지."


  날카로운 벨져의 목소리를 듣고 다이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누이가 홀든 가문의 사람이라는 것을 부정당한 것에 적잖이 마음이 상한 듯했다.


  "거즈를 바꾸는 걸 추천하겠어. 지혈이 안 끝나서 붉게 물들어있으니."


  "충고 고맙군. 그나저나 이글은 어디 갔는지 아나?"


  "글쎄. 무슨 생각이 있는 모양이던데 제발 그 사고뭉치가 이번에 크게 한 건 터뜨려줬으면 좋겠어."



  *

  이글이 자신의 침대 위에 몸을 던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인정해야겠다. 열두 살 꼬마의 힘은 역시 이것밖에 되지 않는 거겠지. 


  집안의 온갖 곳을 쑤시고 다녔는데도 아무것도 알아낸 것이 없었다. 대부분은 모른다며 고개를 내저었고,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은 사람들도 이글의 물음에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반쯤 도박의 심정으로 어머니를 살짝 떠보았지만 어머니도 아는 게 없는 듯했다. 어머니는 거짓말을 정말 못하는 사람이니 믿어도 되는 것이겠지. 


  "이제는 더 물어볼 사람도 없는데."


  머리 아파 죽겠네. 물을 마시러 주방으로 향한 이글이 계단을 내려가는 여자를 보았다. 꽃병을 소중하게 품에 안은 여인이 어두운 복도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저 여자는…"


  이글의 감이 그녀를 따라가라 말하고 있었다. 조용히 여자의 뒤를 따라가자 여자가 백합꽃이 가득한 정원으로 나서는 것이 보였다. 발소리를 죽이고 여자의 뒤에 선 이글이 그녀를 불렀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꺄악!"


  느닷없이 등 뒤에 나타난 이글을 본 여자가 비명을 내질렀다. 홀든 가의 정원사. 다이무스 형보다 나이가 어리던가. 비슷한 나이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러고 보니 그녀도 누나가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본 사람이었지.


  "이글 도련님? 어휴, 깜짝 놀랐잖아요. 홀든 가 사람들은 왜 이렇게 기척 없이 다니는 건지 모르겠어요."


  "기척 없이 다닌 게 누군데. 그렇게 유령처럼 정원으로 나가는데 수상하게 보이는 게 당연하잖아."


  이글의 말에 정원사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저는 정원사라구요. 정원사가 정원에 나서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요?"


  "그럼 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살금살금 정원으로 나온 거야?"


  이글의 말에 정원사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백합꽃을 가져다 달라고 어르신께 부탁받았거든요."


  "할아버지가?"


  할아버지가 백합꽃을 가져오라 말씀하셨다고? 할아버지가 왜…


  "아.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만나러 가셨다 했었지."


  "네. 가주님과 어르신이 밖에 다 들릴 정도로 언성을 높이며 이야기하셨거든요. 어르신이 집무실을 나서시다가 저를 보시고 밖으로 데리고 나오셨어요. 어르신께서 시간 날 때 백합꽃을 따다 별채로 가져다 달라하셨는데 마침 오늘 밤 시간이 나서 따러 온 거랍니다."


  정원사의 말에 이글의 눈이 번뜩였다. 아버지가 집무실에서 사람을 만나면 그 근처로는 아무도 가지 않는다. 가문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어리바리한 정원사가 그걸 알 리 없다. 창가에 있는 꽃을 가꾸다 방을 나선 할아버지와 만난 것일 테지.


  "할아버지가 대피시키신 건가."


  "네?"


  "아무것도 아니야."


  할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아버지의 칼에 베일 수도 있었다는 걸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저기 혹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무슨 이야기 한지 알아?"


  "으음…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아가씨가 검을 쥔 이야기를 하시는 것 같았어요."


  "다른 이야기는 없었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으음… 아. 어르신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시간이 지나도 카렌에 대한 열등감을 버리지 못하는 거냐고 하셨어요."


  카렌? 카렌이 누구지? 그 오만함 덩어리가 열등감을 가진 상대라고?


  끝없이 헤매던 미궁 속에서 천금 같은 단서를 얻은 듯했다.


  "이 이야기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한 적 있어?"


  "아뇨. 처음 이야기한 건데요. 저… 혹시 말하면 안 되는 걸 말한 건가요?"


  "엄청나게 위험한 걸 말한 거지. 그날 일은 잊어버려. 아버지가 알았다가는 곱게 끝나지는 않을 테니까."


  이글의 말에 정원사가 새된 비명을 내뱉었다.


  잔뜩 겁을 먹고 바들바들 떠는 정원사의 꽃병을 뺏어 든 이글이 그녀에게 말했다.


  "이건 내가 직접 전해드릴게. 할아버지한테 용건이 생겼거든."



  *

  "오셨군요, 오라버니."


  "날 찾았다고 들었다."


  소녀가 달빛에 빛나는 백합꽃의 정원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새하얀 미소 속에서 약간의 그림자를 본 다이무스가 얼굴을 돌려 거즈 덮인 상처를 감추었다.


  "무모하셨어요."


  채 감추어지지 않은 다이무스의 상처를 본 소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와 결투를 하셨다고 들었어요. 얼굴의 상처는 그것 때문인가요?"


  "벌써 소문이 퍼졌나 보구나. 어머니는 알고 계시느냐?"


  "쉬쉬하지만 곧 어머니도 아시겠지요. 당분간 과보호가 이어지겠네요."


  구름이 걷히고 달빛이 창을 타고 방으로 쏟아졌다. 침대에 기대어진 레이피어가 반짝였다. 탁한 아름다움을 발하는 레이피어가 다이무스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레이피어를 방에 가져왔구나. 연습용 검이라 곧 새 검을 받을 테니 굳이 가져올 필요가 없었을 텐데."


  "새 검을 주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저는 이 검이 마음에 들었답니다. 어두운 창고에 박혀있다가 간신히 빛을 본 모습이 마치 저 같지 않나요?"


  그런가. 레이피어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 건가. 열세 살 소녀가 낡고 버려진 검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다니 얼마나 애달픈 일인가.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이랍니다? 이글에게 말했더니 이글이 잔소리를 엄청 늘어놓더라구요."


  "너는…"


  해맑게 웃는 소녀의 모습에 다이무스가 혀끝에서 맴도는 말을 삼켰다. 그가 이제 와서 누이를 걱정할 자격이 있을까? 그의 걱정이 누이에게 가증으로 보이지 않을까? 


  그런 다이무스의 표정에 누이가 웃으며 물었다.


  "레이피어를 배우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건가요?"


  소녀의 말에 다이무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홀든 가에 레이피어 검술이 없다는 걸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니. 레이피어를 가르친다는 것은 너를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뜻이다. 너는 화가 나지 않느냐? 이제 와서 내가 이런 말 할 자격 없다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다이무스의 말에 소녀가 살며시 다이무스의 손을 붙잡았다.


  "오라버니가 걱정할 자격이 없다니요. 오라버니는 절 위해 검을 뽑으셨잖아요. 이미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녀가 웃으며 레이피어를 가볍게 휘둘렀다. 오늘 처음 들어본 검인데도 검을 다루는 모습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그녀가 타고난 검의 재능을 꽃피우는 것이 기뻤고, 그 검이 인정받지 못하는 검이라는 사실이 서글펐다.


  "물론 가문의 검술을 배우지 못한 것은 아쉬워요. 저도 발도술을 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래도 레이피어도 나쁘지 않아요. 가볍기도 하고. 지난번 벨져 오라버니의 쌍검을 휘둘렀다가 아침에 팔이 아파 혼이 났었답니다."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가볍게 레이피어를 휘둘렀다. 달빛이 레이피어의 검신을 타고 흐르며 반짝였다.


  "그리고 언젠가 제가 레이피어로 유명한 검사가 된다면 홀든 가에도 레이피어 검술이 생기지 않을까요? 홀든 가문의 초대 레이피어 검사. 듣기만 해도 멋지지 않나요?"


  "아버지가 계신 이상 무리일 텐데."


  "어머. 언젠가는 다이무스 오라버니나 벨져 오라버니가 가주가 되시겠지요. 그렇게 되면 저 하나쯤은 챙겨주시지 않겠어요?"


  "그것도 그렇구나."


  다이무스가 마른 웃음을 흘렸다. 결국 아버지가 가주의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그녀는 가문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소리였다. 그것을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는 것이 슬펐다.



  *

  이글이 색이 바랜 건물을 보며 침을 삼켰다. 할아버지가 별채에 들어가고 두문불출한 것이 벌써 20년이 되었다. 아버지가 가주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에 걸렸다고 하던데. 그나저나 할아버지가 걸린 병이 뭐지? 


  그때 별채의 문이 열리고 하녀가 나타났다.


  이글이 놀란 눈으로 별채에서 나온 하녀를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하녀였다.


  "이글 도련님.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짧은 말만 남기고 건물 안으로 사라진 하녀를 보고 고민에 빠진 이글이 그녀를 따라 별채로 발을 들였다. 하녀의 안내에 따라 커다란 문 앞에 선 이글이 조용히 문을 열었다. 열린 문 틈으로 책이 가득한 방 안에서 책을 읽는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조용히 방으로 들어선 이글이 노인을 향해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홀든 가의 삼남, 이글 홀든. 할아버님을 뵙습니다."


  "들어오너라."


  노인의 말에 이글이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섰다.


  "앉거라."


  노인이 이글에게 테이블 앞에 놓인 작은 의자를 권했다. 의자에 앉은 이글이 테이블 위로 놓인 쿠키를 보고 눈을 찡그렸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쿠키였다.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마치 그가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의자에 공손하게 앉은 이글을 본 노인이 기특하다는 듯 웃었다.


  "많이 컸구나. 마지막으로 본 것이 다섯 살 때였으니. 곧 있으면 청년이 되어서 가주 자리도 달라고 하겠어."


  "검으로 가주 자리를 잇는 것은 벨져 형이 되겠지요. 은행 오너의 자리는 다이무스 형이 물려받을 테고요." 


  "말하는 것도 제법 어른 티가 나는구나. 얼굴도 잘생기고 머리도 좋은 것이 커서 여자 여럿 울리겠어."


  껄껄 웃는 노인을 이글이 조심스레 살폈다.


  심각한 병에 걸려 별채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직접 보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매서운 눈빛은 바깥의 검사들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았고, 걷어올린 옷깃 사이로 보이는 건장한 팔뚝은 최근까지 단련을 거듭한 자의 팔이었다.


  "네가 올 줄 알고 있었다. 궁금한 것이 있어 물어보러 온 것일 테지?"


  "두문불출하시는 분 같지 않게 소식에 밝으시군요. 아직 아버지도 모르시는 일일 텐데요."


  "여기 있어도 들릴 이야기는 다 들린단다. 오히려 여기 있으니 더 잘 들릴지도 모르는 일이지. 네 아비는… 그 녀석은 자기가 관심 없는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으니 그런 거라 해둘까."


  노인이 술잔에 술을 채웠다. 넘실거리는 호박빛 술 너머로 이글의 호기심 어린 눈빛이 비추었다. 


  "제가 정원사를 만나고 이곳에 온 것은 할아버님의 의도대로 된 것입니까?"


  "내가 직접 시키진 않았다. 다만 내버려 두면 그리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는 했지. 오늘 네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내가 너를 직접 불렀을 것이다."


  이글의 등줄기로 짜릿한 전류가 내달렸다. 눈앞의 노인은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할아버님께서는 제게 무엇을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모든 것을."


  말을 마친 그가 술잔을 들이켰다. 술잔을 내려놓은 노인이 내쉬는 숨결에 진한 술냄새가 섞여있었다.


  "아들놈은 벨져를, 다른 놈들은 다이무스를 좋아했다. 헌데 그거 아느냐?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녀석은 이글 너다. 다른 녀석들은 너무 틀에 박혀있어. 다이무스는 너무 진지하고 벨져는 너무 콧대가 높아. 전형적인 홀든 가의 인간이지. 어린 나이에 벌써 그런 기질이 보이는데 커서는 어떻겠느냐? 내가 보기에 가장 자유로운 영혼은 너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지. 그렇기에 나는 네 녀석을 가장 좋아한다. 그래서 네 아비가 왜 저러는지 너에게만큼은 말해주고 싶구나."


  빈 술잔에 다시 술이 채워졌다. 호박색 술이 푸른 달빛을 받아 오묘한 색으로 빛났다.


  "무엇이 궁금하느냐?"


  그의 질문에 이글이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이내 마음속에서 정해두었던 하나의 질문을 꺼냈다.


  "모든 것을. 이 일에 관한 모든 것을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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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 OK Oh! 냠~ Love U~ 궁금해! YES! 히힛~
안녕하십니까? 예~예~ 모든 것은 신의 뜻... 불허합니다. 의외군요. 나 원 참... 시작할까요? 강화인간!!
안녕? OK 궁금하네요. 역시! 재미있네. 깜짝이야! 아~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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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넵!! 미안해요!! 앗! 좋아요! 엣헴. 추천! ㅠㅠ
안녕하심까~ 피- 좋다! 못마땅해... 곱다~ 덤비라! 후우- 아슴찮다..
허~허~ 아, 아니... 헐! 흠흠... 끄응... 시, 식은땀이.. 엥? 후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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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 피- 어머! 흐어 오오- 안돼! 랄랄라
우쭈쭈 하하 하? ?? 이거 참... -_- 안녕하십니까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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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잘 못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매우 화가 나는군요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좌절상태입니다 감탄했습니다 칭찬합니다
멋지군! 좋았어! 하하! 축하하오! 아아.. 5분전인데. 커피한잔 하겠소?
승리의 정유년! 정의로운 새해복! 극.한.공.성. 복! 받아랏! 음~ 직장인의 정석
많이 배웠습니다! 대단합니다! ?!! 축하드립니다 뭔가.. 부족해요 짝짝짝! 각오하세요! 으윽!
성탄의 축복을~! 메리 X-MAS~! 화이트 크리스마스야 해피~ 크리스마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성탄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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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군요! 좋은 시간 되소서 Merry 추석~! 우와~! 호~오! 가득해요~! 짱인데! 품위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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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합니다 궁금하네요 에구머니나! 슬프네요... 경멸스럽군요.. 후훗~ 뭐라고 하셨죠? 이, 이럴수가...!
아이작의 멋진 모습 이글이라 샤샤샤~ 트리비아 슬라이딩 시바 포는 달린다 까미유도 달린다 라이샌더 달린다 마를렌 점프! 샬럿 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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