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yphers

  • 검과 탄환과 기억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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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한폐인 [55급]

2022-09-24 10:4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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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글은 폭주하는 클리브의 어깨에 손을 댄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누군가가 이글의 머리에 손을 쑤셔 넣어 잔뜩 휘젓는 듯했다. 어릴 적 이글의 기억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휘몰아쳤다. 끝없이 넘쳐흐르는 기억 속에서 이글이 정신을 잃었다


  "자… 이걸 어떻게 할까."


  칠흑의 남자가 쓰러진 클리브와 이글을 보고 키득거리며 웃었다. 봉을 움켜쥐고 쓰러진 이글과 클리브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씨익 웃으며 봉을 치켜들었다.


  "받은 돈 값은 해야지."


  그때 소리보다 빠른 속도로 총알이 남자의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날아오는 총알을 간신히 봉으로 쳐낸 남자가 재빨리 엄폐물 뒤로 몸을 감추었다. 총알을 튕겨낸 충격으로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흘러내렸다.


  "경고 사격으로 팔 한 짝이라니, 자비가 없으시군."


  엄폐물 뒤에서 숨을 고른 남자가 청력을 증폭시켰다. 카인은 이 쪽을 지켜보며 움직이지 않는 듯했다.


  '자.. 이제 어떡할까.'


  저쪽은 이쪽의 움직임을 모두 파악하고 있다. 이렇게 불공평할 수가. 그리고 만전의 상태라도 저런 사람과 싸우는 것은 피하고 싶다. 음속이 넘는 탄환을 가볍게 튕겨내는 지하연합의 검사가 새삼 괴물 같이 보였다.


  게다가 상대는 카인 스타이거. 전장의 전설. 요행이나 실수를 바랄 수는 없는 상대. 찢어진 손아귀로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승산이 없는 상대였다.


  "그렇다면 도망쳐야지."


  받은 만큼 일하자. 돈을 떼어먹을 생각은 없지만 돈 이상으로 일할 생각도 없다. 그리 결론을 내린 남자가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스코프 너머로 순식간에 사라진 남자를 본 카인이 작게 혀를 찼다. 도망치는 솜씨 하나는 인정해야겠군.


  쫓으려면 못할 것도 없지만 지금 그것보다 이글과 클리브다. 이글과 클리브에게 다가가 숨을 쉬는 것을 확인한 카인이 그들의 몸을 살폈지만 외상은 없었다. 외상이 아니라면 이들을 이렇게 만든 원인이 무엇일까. 카인이 답을 내리기 전에, 클리브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클리브... 아니. 잭이로군."


  "클리브가 아니라서 실망했나?"


  잭이 두통 때문에 괴로운 듯 머리를 흔들었다. 마른 백발이 그의 머리를 따라 흔들리며 달빛을 흐트러뜨렸다.


  "어떻게 된 건가? 검은 남자와 교전 중에 쓰러진 건가?"


  "어떻게 된 건지는 저기 누워있는 놈한테 물어보고."


  카인의 말을 적당히 흘려보낸 잭이 이글의 품을 뒤졌다. 이글의 품에서 무전기와 나이프를 챙긴 잭이 두통을 떨쳐내려는 듯 관자놀이를 마구 문질렀다.


  "볼일이 있어서 여기서부터는 따로 움직이지. 조금 있다가 보다고."



  *

  그래. 기억났다. 남자의 증폭 능력에 당해 폭주하다 이글에게 닿아서 기절해버렸지.


  "최악이군."


  아니. 최악은 아니다. 클리브가 있는 곳은 폭주한 사이코메트리로 인해 떨어진 공간인 것 같으니. 적어도 죽지는 않았다는 것이겠지.


  순간 아무것도 없는 새카만 공간에 천천히 색이 채워졌다. 푸른 하늘. 넓은 초원. 언덕과 구름. 풀과 꽃과 나무. 고풍스러운 대저택과 아름다운 정원.


  정원의 한가운데 세워진 화려한 분수를 장식하는 가문의 문양을 본 클리브가 저택의 정체를 깨달았다.


  "홀든 가문의 저택이잖아!"



  *

  소녀가 태어난 날은 홀든 가문의 정원에 백합꽃이 만발한 날이었다. 긴장된 표정으로 방으로 들어선 홀든 가의 가주, 테오도어 홀든은 자신의 아이가 딸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실패했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남자는 차갑게 방을 나섰다. 갓 태어난 핏덩어리는 제 아비의 손조차 잡지 못하고 어미의 품 속에서 작게 울었다.


  여자는 한 번도 보여주지 못한 남편의 차가운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제나 모두를 평등하게 대하고 다정하게 웃어주던 남자가 자신의 딸을 향해 실패작이라 말했다. 어째서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넷째를 가졌다. 원래부터 몸이 약했던 그녀는 셋째를 낳은 것도 기적이라고 여겨졌지만 남편의 강행으로 넷째를 가졌다. 원래부터 약했던 몸과 휴식 없는 임신으로 그녀의 몸은 위태롭기 짝이 없었고, 수많은 치료 능력자와 의사의 노력 끝에도 그녀는 결국 아들을 낳으며 자궁을 잃고 말았다.


  남편은 그렇게 힘들게 얻은 아들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딸아이를 낳을 때에는 볼 수 없었던 미소였다. 아들을 품에 안은 남편이 그녀에게 격려의 말을 건넸다.


  격려.


  ♡먹이 딸아이를 한 번도 안아주지 않은 남편이 아들을 품에 안고 1년 만에 건넨 격려의 말이었다.



  *

  다이무스가 기억하는 누이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그가 여덟 살 아이였을 때의 일이었다. 여동생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어떤 연유에서인지 그의 아비는 형제들이 누이를 보는 것을 탐탁지 않아하여 자주 볼 수는 없었다.


  처음 만난 여동생의 모습은 마치 작은 초식동물 같은 모습이었다. 아이는 절대 자기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떼쓰지 않았으며 울지 않았다. 아이는 초원의 토끼처럼 끊임없이 다른 이들의 눈치를 살폈다.


  다섯 살 아이 밸져보다 훨씬 얌전한 여동생의 모습은 언뜻 보면 겁에 질려있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 쭈뼛거리며 다이무스 앞에 선 여동생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오라버니."


  잔뜩 긴장한 소녀를 보며 다이무스가 작게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았다. 다이무스의 손에 흠칫 놀란 소녀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보는 소녀에게 다이무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잘 부탁한다."


  다이무스의 말을 들은 소녀가 활짝 웃으며 다이무스의 손을 붙잡았다. 마치 생각지도 못한 환대를 받았다는 듯이.


  여동생의 손을 붙잡은 여덟 살의 여름. 다이무스는 자신이 쥐고 있는 권리의 무게를 깨닫기 시작했다.



  *

  열한 살의 벨져가 달빛 아래에서 홀로 쌍검을 휘둘렀다. 아버지의 명을 받아 쌍검을 배우기 시작한 지도 꽤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쌍검 실력은 좀처럼 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검술이 일취월장하고 있다 말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검은 제자리걸음일 뿐이었다.


  서툴게 움직이는 벨져의 칼과 칼이 부딪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바닥을 굴렀다. 달빛을 받아 빛나는 쌍검을 보고 한숨을 내쉰 벨져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위를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작게 고개를 내민 그의 누이가 조용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을 휘두르는 벨져와 조용히 지켜보는 여동생. 그 기묘한 사이가 계속된지도 어느덧 1년이 되어갔다.


  여동생의 시선에 벨져가 문득 그녀가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고 제자리걸음인 그의 검을 멸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구한 달빛처럼 내려앉는 그녀의 시선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분을 이기지 못한 벨져가 바닥에 검을 팽개치고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방에서 토라져 한참을 분을 삭이던 소년이 문득 연무장에 남겨진 검을 떠올렸다.


  홀든 가 검사의 검은 주인 이외에 누구도 만져서는 안 된다. 그의 검은 아직도 연무장에 남겨져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이것을 알게 되신다면 얼마나 경을 치실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소년이 재빨리 연무장으로 달려갔다.


  연무장에 달려간 벨져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푸른 달 아래 백발의 소녀가 검무를 추고 있었다. 새하얀 백발과 날카로운 쌍검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며 이리저리 흔들렸다. 조금은 어설프지만 자신의 검술보다는 훨씬 부드럽고 세련된 검술이었다.


  소녀의 움직임을 본 벨져는 천재가 무엇인지 깨달았고,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깨달았다. 자신이 믿었던, 사람들이 치켜세웠던 재능은 얼마나 알량한 것이었나. 천재라는 것은 분명 자신의 누이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녀의 슬픈 검무는 새벽 연습을 나온 홀든 가문의 검사가 그 둘을 볼 때까지 계속되었다.


  다음 날. 그의 누이는 아버지께 호되게 혼났다. 검을 휘둘렀다는 이유였다. 검의 가문의 자식으로 태어나 검을 휘두른 것이 죄라고 말했다. 저런 재능을 가지고 있는데도, 재능을 펼쳤다는 이유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었지만 소녀에게는 누군가를 원망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소년은 처음으로 소녀의 방에 찾아갔다. 그를 맞이하는 소녀는 애써 밝게 웃었지만 눈가의 눈물자국은 감출 수 없었다. 소녀를 뒤로한 돌아선 벨져는 처음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의심했다.



  *

  홀든가에 손님이 찾아왔다. 황제의 호위를 맡는 자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가 오스트리아 최강의 검사라는 소리였다.


  제레온 프리츠. 황제가 인정한 제국 제일의 검. 소문으로만 듣던 그를 만날 수 있다니.


  열 살의 이글과 그의 누이는 제국 제일의 검을 볼 수 있다며 가슴을 졸였다. 그의 누이는 파티에 참가할 드레스를 준비한다며 파티 며칠 전부터 기쁜 얼굴로 방을 뛰어다녔다.


  연회장에 들어서자 저 멀리 형들이 보였다.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는 둘에게 다가간 이글이 누이는 어디 있냐 묻자 형들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알 수 없는 웃음이었다.


  이글은 누이를 찾아 연회장을 떠돌았지만 그 어디서도 누이를 찾을 수 없었다. 연회장을 돌아다니던 이글이 사람들의 사이에서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는 백발의 건장한 남자를 발견했다. 아버지와 남자의 대화를 들으니 그가 제레온인 듯했다.


  이글을 발견한 아버지가 그를 불렀다. 이글을 옆에 세운 아버지가 제레온을 향해 말했다.


  "셋째 아이일세."


  아버지의 말에 이글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저는 넷째잖아요. 셋째는 누나잖아요.


  그렇게 말하기에는 아버지의 손이 그의 어깨를 너무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아무런 반론도 용인하지 않겠다는 손이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제레온의 질문에 대답한 이글이 간신히 아버지의 곁을 벗어났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연회장을 벗어난 이글이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누이는 이곳에 초대받지 못했다는 것을. 아버지는 누이를 홀든 가의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누이의 방문을 열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침대 위에 펼쳐진 새하얀 드레스와 빨갛게 물든 두 눈. 이글을 보고 웃는 누이의 얼굴에 담긴 감정은 슬픔도 분노도 아닌 포기였다. 그녀의 얼굴을 본 이글의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이글이 누이를 품에 안자 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차마 크게 울지 못하고 새어 나오는 울음을 삼키는 누이를 품에 안은 이글이 멍하니 창밖으로 만개한 백합꽃을 바라보았다.


  형들의 씁쓸한 웃음의 의미가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그녀를 인정하지 않는 아버지가, 알면서도 침묵한 자들이, 무엇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가장 미웠다.




  *

  햇빛이 따갑게 피부 위에 내려앉는 여름이었다.


  아름다운 백합 꽃의 정원 속 새하얀 꽃들 사이를 거니는 소녀가 있었다. 별빛마저 바랠 듯이 환하게 웃는 소녀의 어깨너머로 한 명의 소년이 서 있었다.


  짧게 쳐낸 백발과 굳센 눈매, 다부진 몸과 큰 키. 파르스름하게 깎아진 턱선에서 어른의 모습이 엿보였지만 군데군데 어린아이처럼 앳된 모습이 남아있었다.


  한참 꽃을 따던 소녀가 등 뒤에 선 소년을 발견하고 그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오라버니시군요. 정원에는 어쩐 일로?"


  "너는 정말 백합을 좋아하는구나."


  "그럼요. 깨끗하고 새하얀 것이 보고만 있어도 즐거워지지 않나요?"


  백합꽃을 한 아름 끌어안은 그녀가 소년의 머리에 백합꽃 하나를 꽂았다. 그 모습을 보고 소녀가 깔깔 웃었다. 허나 그렇게 밝게 웃는 소녀를 보고서도 소년의 얼굴은 밝아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녀석이 또 방에 틀어박혔다. 아침부터 틀어박혀서 점심도 걸렀어. 아버지께서는 내버려 두라고 하시지만 어머니께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신 듯하다. 몸도 약하신 분이 무리하신다고 유모가 강제로 끌어낼 기세야. 네가 가봐야겠다."


  "어머. 또 방에 틀어박혔어요? 아이 참. 식사를 거르면 몸에 안 좋다고 그렇게 말했건만."


  리본으로 백합꽃을 묶어 꽃다발을 만든 소녀가 남은 백합꽃 한 아름을 소년의 품에 건넸다. 꽃다발을 든 소녀가 소년을 향해 화사하게 웃어 보이고 저택을 향해 하늘하늘 걸어갔다. 소년이 고민 어린 눈빛으로 저 멀리 걸어가는 소녀를 쳐다보았다. 흩날리는 꽃잎처럼 고민도 털어버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소년의 왼손이 검을 꽉 움켜쥐었다.



  *

  한나는 홀든 가의 유모였다. 홀든 가에서 일한 지 스무 해가 넘어가는 그녀보다 가문의 집안일에 빠삭한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그녀도 두 손 두 발 다 드는 일이 있으니 홀든가 세 도련님의 쇠고집이었다.


  강철로 만든 검을 휘두르는 집안이라 그런지 고집이 어지간한 철근 못지않았다. 그런 도련님들의 고집도 홀든 가의 마님 앞에서는 꺾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 마님도 어찌할 수 없는 일 중 하나가 막내 도련님이 방에 틀어박히는 것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막내 도련님의 방 앞에서 한참 동안 발을 동동 구르던 한나가 멀리서 다가오는 소녀를 보고 손뼉을 치며 달려갔다.


  "아이고, 아가씨! 어디 계시다 이제 오셨어요!"


  "난 늘 정원에 있잖아. 또야?"


  "예. 아침부터 지금까지 나오시지 않고 계셔요. 마님께서 방금까지 도련님 방 앞에 계시다가 간신히 돌아가셨답니다."


  결국 어머니는 방에 들어가셨구나. 소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힘들게 막내를 낳은 어머니는 네 남매 중에서도 막내를 특히 아꼈다. 어머니의 속을 가장 많이 썩이는 것도 막내지만.


  "점심을 준비해 줘. 금방 데리고 내려갈게."


  한나가 그 말을 듣고 허둥지둥 밑으로 내려갔다. 방문 앞에 선 소녀가 들으란 듯이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는 문을 가볍게 통통 두드리고 문 너머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들어갈게."


  대답을 듣지 않고 소녀가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침대에 앉아 창문 너머를 바라보는 작은 소년의 등이 보였다. 열두 살 정도의 소년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잔뜩 토라져 있었다. 살금살금 걸어간 소녀가 소년의 침대에 살짝 걸터앉았다. 소년은 소녀가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체 오래된 창 너머 푸른 하늘만 바라보았다. 소녀는 그런 소년을 보며 살짝 웃으며 물었다.


  "이름대로 하늘을 좋아하는구나."


  "누나는 이름대로 꽃을 좋아하잖아."


  소녀가 리본으로 묶은 꽃다발을 소년에게 내밀었다. 방 안에 은은한 백합꽃 향기가 퍼져나갔다. 어깨너머로 내밀어진 꽃을 슬쩍 바라본 소년이 다시 홱 고개를 돌렸다. 그런 소년을 보며 살짝 웃음지은 소녀가 침대 옆 서랍장 위에 놓인 꽃병에 꽃을 꽂았다.


  "정원에 꽃이 잔뜩 피었어. 언덕이 새하얗게 물들 정도로. 얼마나 예쁜지 몰라."


  "알아. 늘 그렇잖아."


  "그래. 늘 그렇지. 한 번 보러 가는 게 어때?"


  소녀의 말에도 소년은 말없이 하늘만 바라볼 뿐이었다. 소년의 옆에 앉은 소녀가 소년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살짝 빗었다. 소년의 머리카락은 제법 길어 어깨를 덮을 정도로 자랐다. 소녀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소년의 머리카락을 땋았다. 제법 잘 땋는 것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했다.


  "또 아버님께 대든 거야? 무턱대고 아버님께 대들 나이는 지나지 않았니?"


  소녀의 말에 소년이 퉁명스레 말했다.


  "세상 다 산 것처럼 말하네. 아직 스물도 안됐으면서."


  소년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소녀가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깔깔 웃었다.


  "그래. 아직 우리 둘 다 그럴 나이는 아니지."


  결국 소년은 왜 방에 틀어박혔는지 말하지 않았다. 소녀가 아무리 캐물어도 소년은 조개처럼 입을 딱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소녀는 소년이 왜 그런지 알고 있었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소녀가 재잘재잘 떠들면 소년은 아무 말 없이 소녀의 손을 잡았고, 둘은 아무 말도 않고 방을 나섰다. 늘 있는 일이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둘을 본 한나가 달려나왔다.


  "이제 내려오셨어요, 이글 도련님?"


  그런 유모를 보며 이글은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유모. 나 배고파. 밥 줘."



  *

  늦은 점심을 먹은 소녀와 이글은 백합이 가득 핀 정원으로 꽃놀이를 나섰다. 식물 능력자인 정원사 덕에 봄부터 가을까지 백합꽃이 만개하는 이 정원은 어머니가 아끼는 정원이었다. 어머니를 닮은 소녀는 백합을 좋아해 자주 정원으로 꽃놀이를 나왔다. 흐드러지게 핀 꽃들 사이사이로 거닐며 꽃향기를 맡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꽃놀이를 즐기던 둘은 분수대로 향했다. 제 나이대 어린아이처럼 재잘재잘 떠들며 분수를 향하던 둘이 분수대 앞에서 큰 키의 남자와 마주쳤다. 짧게 쳐올린 새하얀 백발에 날카로운 눈매. 단단한 몸과 세월의 흔적이 깃든 주름. 홀든 가문의 가주, 테오도어 홀든이었다.


  소녀가 테오도어를 보자마자 굳어진 얼굴로 허리를 푹 숙여 인사했다. 홀든 가문의 가주라면 소녀의 아버지일진대 아버지를 향한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소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 채 그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차가운 눈으로 소녀를 본 테오도어가 짧게 혀를 차며 돌아섰다. 이글이 어린아이 답지 않은 살기 가득한 눈으로 아버지에게 달려드려 하자 소녀가 다급하게 이글을 붙잡았다.


  "안돼, 이글."


  테오도어가 한참을 멀어지고 나서야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소년은 아버지가 사라지고 나서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주먹을 꽉 쥐었다.


  "이건 불공평해! 왜 아버지는 누나한테만 그러는 거야!"


  "어쩔 수 없잖니. 내가 여자니까."


  "아버지는 여자가 싫은 게 아니야! 누나가 싫은 거지! 나한테는 맞지도 않는 검을 가르치면서 누나한테는 검을 가르치지 않잖아! 어쩌면 누나가 벨져 형보다 더…!"


  이글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소녀가 그를 껴안았다. 소리치던 이글이 소녀의 몸이 작게 떨리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소녀가 이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글… 그만…"



  *

  열일곱의 다이무스가 정원을 달리듯 걷고 있었다. 열두 살 동생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몰래 숨죽여 우는 누이를 보며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 무엇도 변하지 않았다. 그와 벨져는 아직도 힘없는 소년이었고, 누이는 희망보다 포기가 더 많은 소녀였다. 변한 것은 불의에 분노하는 소년이 된 이글뿐이었다.


  열두 살 동생보다 못난 형이 될 수는 없지. 저택을 나서려는 남자를 붙잡은 다이무스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향해 말했다.


  "아버지. 대련을 요청합니다."


  다이무스를 돌아♡♡ 않은 남자가 시종에게 짐을 맡기며 말했다.


  "지금은 안된다. 내 볼일이 있으니 마치고 와서 상대해주도록 하마."


  "지금이 아니면 안 됩니다. 아버지."


  다이무스의 말에 남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아들의 눈은 한 치의 망설임 없는 검의 눈이었다.


  "검을 부딪히려는 이유가 무엇이냐."


  "아버지를 이긴다면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약조를 하셨었지요. 그것이 필요합니다."


  고민한 남자가 자신의 옆에 선 남자를 내세웠다.


  "내가 검으로 인정하는 자다. 내 일정이 있어 검을 직접 들지는 못하니 이 녀석을 대리로 세우지. 불만 있느냐?"


  다이무스가 아무 말 없이 검을 뽑았다. 남자도 다이무스를 보며 검을 뽑았다.


  조용히 마주 보던 둘이 순식간에 검을 부딪혔다. 첫 합에 남자는 아들이 아직 어린 소년일 뿐이라는 생각을 고쳐야 했다. 그의 검에서 이전에는 없었던 날카로운 결단이 엿보였다.


  순식간에 승부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남자의 예상과는 다르게 승부는 열 합만에 다이무스의 승리로 끝났다. 거친 숨을 가라앉히며 다이무스가 검을 거두었다.


  남자가 자랑스러운 듯, 허나 조금은 미묘한 표정으로 다이무스를 바라보았다. 조금 고민한 남자가 다이무스에게 원하는 것을 말하라 입을 열었다. 남자의 말에 다이무스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입을 열었다.


  "누이에게 검을 가르쳐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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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예~예~ 모든 것은 신의 뜻... 불허합니다. 의외군요. 나 원 참... 시작할까요? 강화인간!!
안녕? OK 궁금하네요. 역시! 재미있네. 깜짝이야! 아~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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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넵!! 미안해요!! 앗! 좋아요! 엣헴. 추천! ㅠㅠ
안녕하심까~ 피- 좋다! 못마땅해... 곱다~ 덤비라! 후우- 아슴찮다..
허~허~ 아, 아니... 헐! 흠흠... 끄응... 시, 식은땀이.. 엥? 후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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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 피- 어머! 흐어 오오- 안돼! 랄랄라
우쭈쭈 하하 하? ?? 이거 참... -_- 안녕하십니까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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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궁금하죠? 축하드립니다. 너에게는 뭐든 주고 싶어. 칭찬 드립니다. 대-단하십니다. 내겐 보여, 너의 죽음 당신을 믿습니다. 이런 미래는 싫어!
감사합니다. 기쁩니다. 축하합니다. 칭찬해 드리죠. 놀랍군요. 심기가 불편합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매우 화가 나는군요.
짝.짝.짝.짝 고마워... 멋있어... 지금 이게 뭐하시는 거죠? 대다나다 히에엑... 헉! 깜짝 놀랐습니다. 그만해!!!!!
옳소! 감탄했습니다. 흐음 후회할거요! 감사합니다. 놀랐습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정색) 축하드립니다. 칭찬해 드립니다. 놀랍군요. 매우 화가 나네요. 큰 충격입니다. 놀랍군요.
이럴수가... 감히! 네가! 아니?! 장하군! 응?! 좋다! 그건 아니다! 고맙다!
감사합니다 잘 못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매우 화가 나는군요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좌절상태입니다 감탄했습니다 칭찬합니다
멋지군! 좋았어! 하하! 축하하오! 아아.. 5분전인데. 커피한잔 하겠소?
승리의 정유년! 정의로운 새해복! 극.한.공.성. 복! 받아랏! 음~ 직장인의 정석
많이 배웠습니다! 대단합니다! ?!! 축하드립니다 뭔가.. 부족해요 짝짝짝! 각오하세요! 으윽!
성탄의 축복을~! 메리 X-MAS~! 화이트 크리스마스야 해피~ 크리스마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성탄이구나~
Good! Thank U Missing U Useless It's pretty good Oops WHY! Please wait
멜빈 미이라와 고스트 제피 할로윈에는 카를로스호박 히카르도의 사탕 탄야의 마녀 분장..? 잭-슈타인 강시 루시
기자님의 감탄사 : 호-오! 기자님의 일과 : 신문 보기 기자님의 사과 : 이거 실례! 기자님이 놀라면 : 어이쿠! 기분이 좋아 보이는 잭 기분이 나빠 보이는 잭 천진난만한 잭 상큼한 인사를 날리는 잭
좋군요! 좋은 시간 되소서 Merry 추석~! 우와~! 호~오! 가득해요~! 짱인데! 품위있군
Chu~♡ 파이팅! 우와앙.. 졌어 ㅠㅠ 이겼다! 흐~음? 뜨헉! 돼.. 됐거든! 사.. 살쪘..!
훌륭합니다 궁금하네요 에구머니나! 슬프네요... 경멸스럽군요.. 후훗~ 뭐라고 하셨죠? 이, 이럴수가...!
아이작의 멋진 모습 이글이라 샤샤샤~ 트리비아 슬라이딩 시바 포는 달린다 까미유도 달린다 라이샌더 달린다 마를렌 점프! 샬럿 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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