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yphers

  • 검과 탄환과 기억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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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한폐인 [55급]

2022-09-17 07:3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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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칠게 숨을 들이쉬며 클리브가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린 그의 눈앞에 끝을 모르는 심연이 펼쳐졌다. 어디로 눈을 돌려도 보이는 것은 어둠뿐.


  혹시 이게 사후세계라는 건가? 열차의 싸움 속에서 결국 머리가 깨져 죽었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클리브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싸움 실력은 미덥지 못하지만 적어도 그 둘이 자신을 그렇게 죽게 내버려 둘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래서 도대체 여긴 어디야."


  새카만 공간에 앉아 한참을 고민하고 주위를 둘러본 클리브가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도저히 모르겠다.


  죽은 것도 아니고, 어디 갇힌 것도 아니고. 


  그나저나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손목시계를 바라보던 클리브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시곗바늘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내 몸에서 빛이 나네?"


  나는 사실 반딧불이였나? 


  확실한 것은 평범한 상황은 아니라 이거군. 바닥에 주저앉은 클리브가 어쩌다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기억은… 역시 열차인가? 열차 뒤에서 습격당한 뒤로 기억이 없는데.


  "아니야. 골목길에서 이글의 얼굴을 본 기억이 있어."


  황폐화된 도로. 싸늘한 바람과 탁한 스모그 냄새. 낡은 건물들. 막상 기억해내려니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골목이었는데. 분명 내가 취재도 갔던 것 같은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나갈 무렵 거리 한쪽에 선 낡은 표지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화이트채플."



  *

  백발의 남자 두 명이 낡은 도로를 걸었다. 


  스모그 특유의 탁한 냄새를 풍기는 싸늘한 바람이 건물 사이로 몰아쳐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인기척은 있지만 관리되지 않은, 전형적인 슬럼의 모습이었다. 소리 없는 도시의 건물 속에서 흐리멍덩한 눈빛이 느껴졌다.


  "뭔가 내가 기억하는 화이트채플과는 다르군."


  "댁이 살아있던 시절은 50년 전 이야기잖아. 노친네의 기억 따위 믿을 수 있을까 보냐."


  "거슬리는 단어가 지나간 것 같지만 나중에 이야기하고. 내가 기억하는 화이트채플은 길거리에 부랑자나 약쟁이가 넘쳐나는 거리였는데 지금은 텅텅 비어있잖아."


  주위를 잠시 둘러본 잭이 골목 사이에 쓰러져있는 남자를 끌고 나왔다. 남자의 숨결에서 묻어 나오는 술과 약물의 냄새에 이글이 눈을 찡그렸다.


  "저거 눈 뜬 꼴을 봐. 완전히 글러먹었군."


  남자 앞에 몸을 숙여 냄새를 맡은 잭이 이마를 찌푸렸다.


  "아편이 아니군. 신종 약인가?"


  "새삼스러울게 뭐가 있나. 화이트채플이 언제부터 아편 같은 얌전한 약을 했다고."


  "여기 있었군."


  좁은 골목에서 나온 카인이 쓰러진 남자를 구경하는 이글과 클리브 옆에 섰다.


  "뭐야 꼰대. 주변 정찰은 끝냈나?"


  "정찰이랄 것도 없더군. 주위에 아무것도 없어. 골목의 부랑자들 빼면 거리가 죽은 듯이 조용하네. 혹시 몰라서 레이더를 설치해두고 오긴 했네만. 정말 여기가 안타리우스의 거점이 맞는 건가?"


  "이제부터 그걸 알아봐야지. 이봐 잭. 뭐 알아낸 거 있나?"


  "글쎄. 확신은 없다만."


  남자의 몸을 몇 번 살피던 잭이 느닷없이 남자의 허벅지에 단검을 쑤셔 박았다. 보기만 해도 이마가 찌푸려질 정도로 피가 흘러넘쳤지만 남자는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초점 없는 눈으로 웃기만 했다. 남자의 반응을 살피던 잭이 혀를 차며 남자의 옷에 단검의 피를 닦았다.


  "글렀군."


  "뭐가 말인가?"


  남자의 상태를 묻는 카인을 보며 잭이 한숨을 내쉬었다.


  "혈관. 근육. 뼈. 신경. 멀쩡한 게 하나도 없어. 무슨 짓을 했는지 감도 안 잡히는군. 장기도 제대로 기능하는 게 손에 꼽을 정도에 몇몇 장기는 들어있지도 않아. 피사체가 저래서야 해체할 마음도 안 생기는군."


  "원인은. 짐작 가는 게 있냐?"


  "하나하나 떼어놓고 생각하면 이유야 많겠지만 이렇게 골고루 글러먹은 경우는 흔치 않지. 지금으로서는 안타리우스의 실험 재료로 쓰인 경우 밖에 떠오르지 않는군."


  "...제대로 찾아온 게 맞나 보군."


  "이제 어떡하지? 헬리오스에 지원을 요청해야 하나?"


  "아직은 확실하지 않네. 그들의 거점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으니까. 단순히 안타리우스가 실험체의 보급과 폐기를 위해 이용하고 있는 곳일지도 모르잖나."


  "뭐가 됐든 거점이 멀지 않다는 소리로군."


  빨리 앨리셔를 찾지 않으면. 이글이 이를 갈았다. 안타리우스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젠장."


  순간 느껴지는 살기에 이글이 칼을 움켜쥐었다. 그림자가 어두운 골목 속에서 빠른 속도로 달려 나왔다. 그림자를 휘두르는 주먹을 피한 이글이 그림자를 향해 칼을 휘둘렀고, 그림자가 반으로 갈라지며 붉은 피가 흩날렸다. 강화인간의 ♡♡가 바닥에 떨어지고, 그 소리를 신호 삼아 강화인간들이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왜 안 나오나 싶었지!"


  이글이 달려오는 강화인간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이글의 검이 어설프게 막으려는 강화인간의 쇄골을 끊어내고 허리까지 베었다. 쓰러지려는 강화인간의 머리를 움켜쥔 이글이 그를 찌르려는 다른 강화인간을 향해 집어던졌다. 달려드는 강화인간이 이글이 던진 ♡♡와 뒤엉키고, 카인의 총이 강화인간의 머리를 향해 불을 뿜었다.


  "슬슬 짜증 나려고 하는군."


  "동감일세. 질리지도 않고 찾아오는군."


  "그렇다고 물어본다고 대답해주는 놈들도 아니고."


  잭이 투덜거리며 달려드는 강화인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강화인간의 주먹을 피한 잭이 강화인간의 목에 단검을 휘둘렀다. 살과 뼈가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피가 울컥 솟구쳤다.


  "그래서. 저 놈은 대답을 해줄 만한 놈인가?"


  강화인간 둘을 한꺼번에 썰어버린 이글이 얼굴에 튄 피를 닦아내며 건물 위를 가리켰다.


  달빛이 내려앉은 건물의 지붕 위에 눈을 붉게 빛내는 칠흑의 남자가 서 있었다. 살짝 뛰어오른 남자가 깃털처럼 가볍게 거리 위에 내려앉았다. 흠잡을 곳 없이 부드러운 남자의 움직임에 이글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안타리우스의 강화인간은 아닌 것 같군."


  오히려 자신과 같은 신체 강화 능력자의 움직임과 비슷하다. 살아있는 움직임. 신체를 극한까지 갈고 닦은 그 움직임은 안타리우스의 강화인간들이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강화인간은 아닌 듯하군. 안타리우스의 신자인가?"


  "난 종교 따윈 안 믿어. 살면서 신 따위 한테 도움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가볍게 봉을 휘두른 남자가 이글을 보고 킬킬 웃었다.


  "안타리우스인지 뭔지 내 알 바는 아니지만 나는 용병이라 돈에 움직이거든. 뭔가 마음에 안드는 보라색 머리의 여자에게 의뢰를 받아서 온 것뿐이야."


  보라색 머리 여자라는 말에 잭이 이를 갈았다. 옥사나 야고비치인가. 


  순간 카인의 총이 불을 뿜었다. 순식간에 봉을 튕겨 휘두른 남자가 카인의 총알을 튕겨냈다. 자신의 총알을 여유롭게 튕겨낸 남자를 본 카인이 작게 혀를 찼다.


  "요즘은 개나 소나 내 총알을 튕겨내는 모양이군."


  카인이 투덜거리며 품에서 기관단총을 꺼내 들었다. 카인이 총을 장전하는 모습을 본 남자가 양손을 들며 말했다.


  "기다려, 카인 스타이거. 네 상대는 내가 아니야. 의뢰인이 하나 더 있거든."


  남자의 말과 함께 구름이 걷히고 은색 달이 천천히 거리를 밝혀나갔다. 싸늘한 바람이 그들 사이를 휩쓸고 지나갔다. 순간 카인의 품 속에서 레이더 감지기가 누군가를 감지한 듯 시끄럽게 울부짖었다.


  "나에게 의뢰한 사람은 두 명이다. 한 명은 너희들을 여기서 붙잡아 두라는 명령. 다른 하나는…"


  순간 카인이 당황한 얼굴로 뒤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 카인의 뒤로 달빛을 받아 빛나는 푸른 머리칼의 여자가 서 있었다. 아무렇게나 자른 거친 머리칼. 인형처럼 감정 없는 눈빛. 안타리우스의 첫 번째 강화인간, 강각의 레나였다.


  "하나는 자신을 카인과 둘이서 있게 해 달라는 내용이었지."


  "이사벨!"


  감정 없는 눈동자로 카인을 바라본 레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 그녀를 보며 카인이 눈을 부릅뜨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를 따라가야 할지 고민하는 듯 핏발 선 눈으로 레나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는 카인을 향해 이글이 말했다.


  "가봐, 꼰대."


  이글의 말에 카인이 놀라며 이글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함정일 것 같지는 않고, 주위에 이미 사람의 기척은 없어. 저놈은 내가 어떻게 할 테니 가 봐."


  이글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카인이 품에서 무전기를 꺼내 이글에게 건넸다. 어지간히 당황했는지 무전기를 건네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고맙네."


  그 말을 남긴 채 카인이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 모습을 지켜본 칠흑의 남자가 빙글빙글 웃으며 이글을 바라보았다.


  "이걸로 의뢰 하나는 완료. 도와줘서 고맙군, 이글 홀든."


  "의뢰도 도와줬는데 서로 깔끔하게 헤어진다는 전개는 안될까?"


  "의뢰비는 선금으로 받았으니 그것도 상관없겠지만 돈 받은 만큼 일하자는 주의라서."


  예고도 없이 칠흑의 봉이 이글을 향해 날아왔다. 빠르게 미간을 노리고 날아오는 봉을 튕겨낸 이글이 남자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강철과 강철이 충돌하는 소리와 함께 잭이 남자를 향해 달려 나갔다. 봉을 거둔 남자가 잭이 휘두르는 단검을 따라 팽이처럼 돌며 뒤로 물러났다.


  "어디 한 번!"


  남자의 봉이 바닥을 내리찍어 바닥의 벽돌을 후려갈겼다. 벽돌 파편이 튀어 오르고 남자가 봉을 휘둘러 돌을 쳐내 잭을 향해 날려 보냈다. 날아오는 돌을 피해 재빨리 뒤로 몸을 피한 잭이 불만스러운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팔 하나 정도는 잘라낼 생각이었는데."


  칼날이 오는 방향을 따라 몸을 돌려 피해를 최소화한다. 말이 쉽지 어지간한 실력과 배짱 없이는 할 수 없는 묘기다. 게다가 저 옷.


  "평범한 셔츠처럼 생긴 주제에 방검복이란 말이지."


  손 끝에 남는 감촉이 명백히 이질적이었다. 천과 살점을 가르는 느낌보다는 마치 고무에 칼질을 한 느낌이었다.


  "제일 귀찮은 타입이 나왔군."


  "이대로 싸워서 지진 않겠다만."


  남자는 어떻게 싸워야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지 잘 알고 있는 상대였다. 근거리와 원거리를 자유롭게 드나들며 상대를 농락하는 데 익숙한 자. 깡다구가 있다면 몇 대 맞는 한이 있더라도 접근해 상대를 붙잡는 정면돌파 수법을 쓰겠지만 아쉽게도 이글과 잭 모두 그런 방법과는 거리가 멀었다.


  "차라리 휴톤이나 도일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강한 한방을 가진 그들이라면 저 자에 대한 대책도 쉬웠을 터인데. 그들의 부재가 뼈저리게 아쉬웠다.


  '그나저나 이상하군.'


  처음에는 단순한 신체 강화 능력자일 것이라 추측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가 힘을 쓰는 방식이 그가 아는 신체 강화 능력자와 다른 느낌이었다.


  이글이 어떻게 남자를 쓰러뜨릴지 고민하고 있는 사이, 잭이 이글에게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군. 시간 초과다."


  "뭐?"


  순간 이글의 옆에서 끓어오르는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당황한 이글이 급하게 그를 보았지만 이미 잭은 사라진 뒤였다.


  "뭐야! 뭐야! 여긴 어디야!"


  주위의 건물을 보고 당황한 클리브를 본 이글이 골머리를 싸맸다.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둘이 싸워도 돌파할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은데 이런 사이코메트리 능력밖에 없는 일반인을 데리고 뭘 하란 말인가…


  음? 사이코메트리?


  "이봐, 클리브. 네가 필요하다."


  "어, 뭐야! 이글? 우리 기차 안이였잖아. 여긴 어디야?"


  "일일이 이렇게 설명하는 것도 귀찮아 죽겠군."


  이글이 클리브의 목을 검은 남자 쪽으로 돌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저놈은 우리 적이다. 내가 싸우다가 틈을 만들 테니까 네 능력으로 저 녀석 머리를 휘저어버려."


  클리브의 대답도 듣지 않고 이글이 남자를 향해 달려가 검을 휘둘렀다.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충돌한 검과 봉이 철이 깎이는 비명을 내질렀다. 


  공수 변환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동작 하나하나에 페인트가 섞여 날아온다. 다른 건 몰라도 저 봉술 하나만큼은 괴물 같은 상대였다. 다른 때라면 싸울 맛이 나는 상대라고 좋아하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그런 싸움 속에서 마음속 거슬리는 무언가가 이글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가 신체 강화 능력자가 아니란 것은 확실하다. 그런 주제에 자신과 힘으로 맞먹는다. 이런 싸움 방법을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어디서 보았지?


  "잡다한 생각이 많아!"


  이글의 칼을 크게 튕겨낸 남자가 이글의 품에 파고들어 어깨로 들이받았다. 묵직한 충격이 이글의 전신을 뒤흔들었다.


  '맨손 격투도 하는 건가!'


  비틀거리며 물러난 이글을 본 남자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허리를 손으로 짚었다. 검은 옷 위로 천천히 퍼져나가는 피를 본 남자가 이글을 향해 봉을 겨누었다.


  "그걸 맞고 비틀거리는 걸로 끝난 것도 신기한데 그 짧은 새에 옷 사이를 베다니 어이가 없네."


  칼과 봉이 다시 충돌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공격이 순식간에 교차했다. 지루한 공방 속에서 순간 목을 노리고 날아오는 봉을 고개를 꺾어 피한 이글이 남자의 봉을 크게 쳐냈다.


  "지금!"


  "으아아! 될 대로 돼라!"


  클리브가 재빨리 남자를 향해 달려갔다. 사이코메트리의 푸른빛이 그의 손에서 넘실거렸다. 클리브가 검은 옷의 남자를 향해 달려가며 문득 생각했다. 


  저번에도 이 말을 했던 것 같은데. 그때는 결과가 어땠지? 처참했지. 이번에도 그렇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과민반응일까 기자의 감일까?


  크게 흔들린 자세를 바로 잡는 이글의 눈에 문득 칠흑의 사내의 표정이 보였다. 달려오는 클리브를 보면서도 남자는 당황하지 않고 웃고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것처럼. 


  그의 표정을 보고 이글의 머리가 싸늘하게 식었다. 계속해서 이글을 괴롭혔던 위화감. 평범한 신체를 순간순간 강화하는 특수한 싸움법.


  "클리브! 멈춰!"


  이글이 클리브를 향해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클리브는 이미 남자를 향해 손을 뻗은 후였다.


  "그 자식, 증폭 능력자야!"


  클리브의 손이 남자의 허리에 닿고, 클리브의 푸른빛이 불꽃처럼 순식간에 피어올라 클리브의 몸을 집어삼켰다. 타오르는 듯한 푸른빛 속에서 클리브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금방 편하게 해 주지."


  무릎을 꿇고 고통스러운 숨을 몰아쉬는 클리브를 향해 남자가 봉을 치켜들었다. 


  "그렇게 둘까 보냐!"


  이글이 남자의 허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이글의 칼이 남자의 허리 깊숙이 파고들었다. 방검복으로 미처 막지 못한 충격에 남자가 공중을 날아 골목 사이 상자 더미에 처박혔다.


  이글이 검을 꽂고 클리브를 바라보았다. 좀처럼 약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푸른빛이 클리브의 몸을 휘감으며 넘실거렸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클리브를 본 이글이 저도 모르게 클리브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자신의 어깨를 움켜쥔 이글을 본 클리브가 경악에 물든 목소리로 소리쳤다.


  "…잠…깐 …이글!"


  순간 푸른빛이 이글의 팔을 타고 그의 몸까지 휘감았다. 시야를 뒤덮는 푸른 불꽃 속에서 노란 나비가 하늘을 날았다. 화이트채플 골목 사이사이에 새하얀 백합꽃이 피어올랐다. 푸른빛이 하늘마저 집어삼키고 이글의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그의 기억 속에서 이글의 코끝으로 그리운 향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리운 당신의 향기. 한여름 집 뒤뜰의 공원을 가득 채운 새하얀 백합의 꽃향기….



  *

  얼마나 그녀를 쫓았을까. 달빛이 간신히 내려앉은 골목에 멈춰 선 카인이 레나를 발견했다. 거칠게 자른 푸른 머리칼. 감정 없는 눈동자. 머리칼처럼 푸른 입술. 모든 것이 그때와는 다르지만, 그 모습 속에서도 아름답던 과거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사벨. 나의 그리운 사람. 물망초처럼 가련하고 사랑스러운 나의 연인이여.


  카인이 힘겹게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사벨."


  카인의 말에 레나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제 이름은 레나, 강각의 레나입니다. 카인 스타이거."


  레나의 무감정한 말이 카인의 가슴에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그의 앞에 선 너무나도 변해버린 연인의 모습이 카인에게 현실을 깨달으라고 재촉하는 듯했다.


  "자네는 이사벨일세. 누가 뭐라고 해도 자네는 이사벨이야. 그 외의 이름은 자네에게 필요 없네!"


  처음 그녀가 전장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카인은 한 가닥 희망을 품었었다. 그녀를 되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그녀가 안타리우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강각의 레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속으로 수천 번을 울부짖었다. 잔혹한 칼날로 사람의 가슴을 난자하는 슬픈 현실이었다.


  "자네가 나에게 돌아오기만 하면 돼.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 내가 자네를 지켜주겠네. 그 무엇도 두려워할 필요 없어. 제발 돌아와 주게."


  카인의 애달픈 말에도 레나는 무감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은 당신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어째서! 그런 꼴이 되어서 무엇을 해야겠다는 말인가!"


  애탄 카인의 말에 레나가 푸른 달을 바라보았다. 눈을 간질이는 달빛을 바라본 레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누구일까요?"


  알 수 없는 말. 허나 레나의 눈은 그 무엇보다 단호했다.


  "저는 당신이 기억하는 이사벨이 맞습니까? 당신이 기억하는 이사벨은 기억이 지워지며 죽은 것이 아닐까요? 제가 당신이 기억하는 이사벨이라는 것을, 당신은 무엇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건…!"


  이사벨의 말에 카인이 말을 삼켰다. 자신이 아는 이사벨은 죽은 것이 아닐까. 과거의 전쟁터가 우습게 보일 정도로 두려운 생각은 이따금씩 기어 나와 그의 생각을 사로잡았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카인은 필사적으로 의식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는 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그를 지탱하는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구하고 싶은 사람의 입에서 듣는 것은 어떤 고통인가.


  전쟁터의 불꽃보다 뜨거운 절망이 카인의 가슴을 불태웠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카인에게 다가간 레나가 그의 가슴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저는 이사벨일까요, 레나일까요? 누구도 제게 그 답을 알려줄 수는 없겠지요. 저만이 찾을 수 있는 답일 겁니다. 만약 그 길의 끝에 있는 것이 이사벨이라면, 저는 망설임 없이 당신의 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살며시 카인의 입술에 입을 맞춘 레나가 무표정한 얼굴로, 하지만 조금은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아직은 이렇게 홀로 답을 찾아나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당분간 저를 찾지 말아 주세요."


  그 말을 남긴 레나가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카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떠나가는 그녀의 뒤를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그녀의 머리칼처럼 푸른 달빛이 위로하듯 카인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달이 밝군."


  푸른 달과 그림자가 어우러진 밝고도 어두운 거리에서 카인은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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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 OK Oh! 냠~ Love U~ 궁금해! YES! 히힛~
안녕하십니까? 예~예~ 모든 것은 신의 뜻... 불허합니다. 의외군요. 나 원 참... 시작할까요? 강화인간!!
안녕? OK 궁금하네요. 역시! 재미있네. 깜짝이야! 아~니? ...
웃음 두려움 만족 놀람 동의 분노 좌절 인사
안녕하세요? 넵!! 미안해요!! 앗! 좋아요! 엣헴. 추천! ㅠㅠ
안녕하심까~ 피- 좋다! 못마땅해... 곱다~ 덤비라! 후우- 아슴찮다..
허~허~ 아, 아니... 헐! 흠흠... 끄응... 시, 식은땀이.. 엥? 후어어..
후훗~ Trick or Treat! 사.탕.내.놔. 소녀... 억울하옵니다... 사, 사탕 주세요! 해피... 핼러윈... 날 위해 사탕 정돈 줘야지? 목표? 당연히 사탕이지!
안녕~ ?? 피- 어머! 흐어 오오- 안돼! 랄랄라
우쭈쭈 하하 하? ?? 이거 참... -_- 안녕하십니까 안됩니다
ㅇㅅㅇ 으르릉... 나, 나! (정색) 깔깔 아니야!! 뿌잉 메~
안녕하십니까! 흐응? 흐으으응?! 척! 칫.. 좋-았어! 엥? 후에엥-!!
칫 엄숙하고 근엄하고 진지하다 믿습니다 내 안의 ...가 깨어난다 영업 중 할많하않 충격! 공포! 둠칫 둠칫 두둠칫
파이팅!! 고마워~ 졌어... 히힣 극대노 미안! 거울 앞에서 자의식 과잉된 십대 라이언
저는 지금 극공입니다. 훠이훠이 하.하.하. 매우 화가 납니다. 총기 손질중입니다. 저와 한 판 붙어보시겠습니까? 당신에 대한 정확한 진단 안돼!
뭐가 궁금하죠? 축하드립니다. 너에게는 뭐든 주고 싶어. 칭찬 드립니다. 대-단하십니다. 내겐 보여, 너의 죽음 당신을 믿습니다. 이런 미래는 싫어!
감사합니다. 기쁩니다. 축하합니다. 칭찬해 드리죠. 놀랍군요. 심기가 불편합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매우 화가 나는군요.
짝.짝.짝.짝 고마워... 멋있어... 지금 이게 뭐하시는 거죠? 대다나다 히에엑... 헉! 깜짝 놀랐습니다. 그만해!!!!!
옳소! 감탄했습니다. 흐음 후회할거요! 감사합니다. 놀랐습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정색) 축하드립니다. 칭찬해 드립니다. 놀랍군요. 매우 화가 나네요. 큰 충격입니다. 놀랍군요.
이럴수가... 감히! 네가! 아니?! 장하군! 응?! 좋다! 그건 아니다! 고맙다!
감사합니다 잘 못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매우 화가 나는군요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좌절상태입니다 감탄했습니다 칭찬합니다
멋지군! 좋았어! 하하! 축하하오! 아아.. 5분전인데. 커피한잔 하겠소?
승리의 정유년! 정의로운 새해복! 극.한.공.성. 복! 받아랏! 음~ 직장인의 정석
많이 배웠습니다! 대단합니다! ?!! 축하드립니다 뭔가.. 부족해요 짝짝짝! 각오하세요! 으윽!
성탄의 축복을~! 메리 X-MAS~! 화이트 크리스마스야 해피~ 크리스마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성탄이구나~
Good! Thank U Missing U Useless It's pretty good Oops WHY! Please wait
멜빈 미이라와 고스트 제피 할로윈에는 카를로스호박 히카르도의 사탕 탄야의 마녀 분장..? 잭-슈타인 강시 루시
기자님의 감탄사 : 호-오! 기자님의 일과 : 신문 보기 기자님의 사과 : 이거 실례! 기자님이 놀라면 : 어이쿠! 기분이 좋아 보이는 잭 기분이 나빠 보이는 잭 천진난만한 잭 상큼한 인사를 날리는 잭
좋군요! 좋은 시간 되소서 Merry 추석~! 우와~! 호~오! 가득해요~! 짱인데! 품위있군
Chu~♡ 파이팅! 우와앙.. 졌어 ㅠㅠ 이겼다! 흐~음? 뜨헉! 돼.. 됐거든! 사.. 살쪘..!
훌륭합니다 궁금하네요 에구머니나! 슬프네요... 경멸스럽군요.. 후훗~ 뭐라고 하셨죠? 이, 이럴수가...!
아이작의 멋진 모습 이글이라 샤샤샤~ 트리비아 슬라이딩 시바 포는 달린다 까미유도 달린다 라이샌더 달린다 마를렌 점프! 샬럿 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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