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yphers

  • 검과 탄환과 기억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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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한폐인 [55급]

2022-08-24 19: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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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



  *


  "이것 참... 깐깐한 비서님이구만."


  클리브가 헛웃음을 흘리며 비서실의 문을 닫았다. 타라에게 두 시간 정도 드잡이를 당하니 헬리오스를 구경하겠다는 마음도 싹 사라지고 말았다. 마녀야. 저건 마녀가 틀림없어. 누군지 몰라도 그녀를 불의 마녀라 부른 사람에게 경의를 표한다. 깐깐한 비서라고 불평한 것도 들었을지 몰라. 뒤에서 불덩이가 날아올지 모르니 빨리 벗어나자.


  서둘러 비서실에서 멀어진 클리브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눈으로 ♡았다. 자, 말은 저렇게 했지만 헬리오스를 그냥 나갈 수는 없지. 몇 가지 만져보고 나가볼까. 걸리지만 않으면 괜찮은 거지. 그런 거야. 


  헬리오스를 돌아다니며 몇 가지 장식들을 집어봤지만 그럴듯한 기억은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차라리 명왕의 정보를 기대하는 편이 좋겠지. 카인과 이글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서두르도록 할까.


  그때 달칵하고 문이 닫히는 작은 소리가 클리브의 발길을 붙잡았다. 고개를 돌린 클리브의 눈에 다이무스의 방에서 나온 앨리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앨리셔 캘런. 빛의 능력자이자 명왕 헨리 밀러의 양녀. 그 뒤에는 수많은 진실과 거짓이 얽힌 이야기가 있었다. 과연 그녀는 그 이야기에 도달했을까? 클리브와 눈이 마주친 앨리셔가 의외의 인물을 발견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신.. 이클립스의 클리브 스테플 씨군요."


  "명왕의 양녀께서 한눈에 알아볼 정도면 나도 꽤 유명해졌군. 헬리오스의 다른 친구들한테도 열심히 이클립스를 홍보해 달라고?"


  능글맞은 클리브의 말에 앨리셔가 무언가 곰곰이 생각했다.


  "당신.. 확실히 사이코메트리 능력자였죠. 기자가 아니라 능력자로 고용되어 일했던 적도 있나요?"


  "고용이라… 오랜만에 들어보는군. 기자가 되기 전에는 사건 현장 파악이나 부검을 위해 자주 고용되곤 했지. 그런데 그런 건 왜?"


  "…당신을 고용하겠어요, 클리브. 지하연합의 능력자 이글 홀든에 대해 조사해주세요."



  *

  얼마 전 헬리오스의 파티에서 일어났던 작은 소동. 이글 홀든이 크리스티네 프리츠에게 소리친 사건 말이다. 대부분은 망나니의 난동이라 여기고 넘어갔지만 그 사건에는 몇 가지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앨리셔도 느낀 것이겠지. 다이무스의 방에서 나온 걸 보니 그녀 나름대로 그 사건에 대해 알아보려고 수를 쓴 모양이다. 잘 되지 않은 모양이지만.


  '하지만 상대가 하필 그 홀든이어서야…'


  홀든 가문은 먼 영국까지 그 이름이 알려진 가문이다. 그 가문에 대해 무언가를 알아낸다고 해도 기사로 낸다는 건 불가능하다. 잡지사에, 클리브 개인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입막음을 위한 압력이 들어오겠지. 


  발표하지 못하는, 돈이 되지 않는 기사는 쓸모가 없다. 외부 활동을 극단적으로 자제하는 드로스트 가문의 정보를 캐내는 것도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인데, 천하의 홀든 가문은 어떨까? 말할 필요도 없다. 또 쓸모없는 기사를 가져왔다고 편집장에게 욕이나 얻어먹겠지. 


  게다가 그에게는 시간도 없다. 명왕의 양녀의 개인적인 요청보다 헬리오스의 이름으로 건 명왕의 의뢰가 훨씬 중요하다. 어떤 것을 선택할지 일고의 가치도 없다. 하지만.


  "개인적인 호기심이 끓어 넘치는군."


  이런 흥미 넘치는 이야기를 수첩에 기록하지 않고 배길쏘냐. 기자 된 자로서 사람의 흥미를 끄는 이야기를 놓칠 수는 없지.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클리브가 앨리셔의 제안을 수락했다. 앨리셔 캘런을 등에 업으면 헬리오스 내부를 원 없이 돌아다닐 수 있겠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최대한 그녀를 이용해 주지.


  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이글이라면 가장 먼저 지하연합이 떠오르지만.


  "아무래도 지하연합에 아는 사람도 없이 가는 것도 그렇고, 이런 비밀 이야기는 집안 관계자한테 캐내는 게 더 빠르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래도 당사자 몰래 뒷이야기를 캐내는 것 같아 죄악감이 들지만요."


  "그걸 생업으로 삼고 있는 내 입장도 생각해주지 않으련."


  우선 헬리오스 내에 홀든 가문의 관계자가 사람이 누가 있을까. 방금 전에 앨리셔가 다이무스의 방에서 나온 것을 보니 다이무스는 허탕이겠지. 그렇다면 접근해야 할 사람은…


  "홀든 가문의 잉게보르트 홀든이로군. 지금 여기 있으려나?"


  "잉게보르트 씨라면 3층이네요. 지금 계실지는 모르겠지만요. 우선 가보도록 할까요?"


  거침없이 잉게보르트의 사무실로 향한 앨리셔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문 너머로 들려오는 대답에 앨리셔가 문을 열자 잉게보르트가 읽던 서류를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 오셨군요, 앨리셔 아가씨. 부외자까지 대동하고 말이죠."


  잉게보르트 홀든. 홀든 가문의 방계. 홀든 3형제의 이름에 가려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쾌검사지만 홀든 가문이 그를 믿고 헬리오스로 파견했다는 점에서 그의 실력을 엿볼 수 있다. 홀든 가에서 인정받는 그라면 이글의 일에 대해 알고 있지 않을까?


  "여기 아가씨가 올 줄 알았다는 것은 둘 중 하나로군요. 이야기해 줄 마음이 있던가, 우리가 한 발 늦었던가."


  클리브가 쥐고 있던 수첩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물었다. 부외자가 있다는 것에 의외지만 앨리셔가 올 줄 알았다는 눈치다.


  "아쉽게도 후자입니다, 클리브 씨. 다이무스가 직접 찾아와 제게 함구령을 내리더군요. 앨리셔 아가씨가 찾아왔을 경우 이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고요."


  역시. 다이무스에게 거절당한 앨리셔가 찾을 사람이라고 해야 잉게보르트 밖에 없다. 잉게보르트에게서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앨리셔를 본 잉게보르트가 이마를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앨리셔 아가씨, 어째서 이글을 바로 찾아가지 않는 겁니까?"


  "찾아가 봤어요. 비록 사고가 있어 직접 묻진 못했지만 몇 가지 이야기한 것으로 바로 느낄 수 있었죠. 잉게보르트 씨는 이글 씨가 그 일에 대해 말해줄 거라 생각해요?"


  "그 아이 성격이라면 ♡♡도 말하지 않겠죠."


  "그래서예요. 그 이야기에 대해 들으려면 이글 씨보다 다른 사람을 찾아가는 게 훨씬 빠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앨리셔 아가씨는 무슨 생각을 가지고 그 아이에 대해 알려는 겁니까?"


  잉게보르트의 질문에 앨리셔의 얼굴이 살짝 굳어진다. 


  "그 아이의 과거를 알아, 무엇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무엇을 하실지 한 번쯤은 생각해 보셨겠죠?"


  그녀의 동기. 이 모든 일의 시작. 그녀는 무슨 생각으로 이번 일을 파헤치자고 생각했을까?


  "언제나 망나니라고 불리고 있는 녀석이지만 머릿속에는 많은 것을 담아놓는 아이입니다. 녀석은 자기가 원하는 모습만 남들에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 녀석의 속내는 아무도 모릅니다. 의외로 멀쩡할지, 썩어 문드러졌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제가 찾는 사람은 그 아이의 마음을 열어줄 사람입니다."


  잉게보르트가 테이블 위의 각설탕을 집어 입에 넣었다. 와득, 하는 각설탕 씹는 소리와 함께 잉게보르트의 날카로운 말이 앨리셔의 마음을 헤집었다.


  "아가씨는 그 녀석의 마음을 열어줄 수 있는 사람입니까?"


  잉게보르트의 말에 앨리셔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결국 앨리셔는 잉게보르트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알겠어요, 잉게보르트 씨. 이만 가보도록 할게요."


  앨리셔의 말에 클리브가 침통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나는 의뢰받은 일을 할 뿐이지만 앨리셔는 어떤 기분이 들까. 


  "아, 클리브 씨."


  잉게보르트가 방을 나서려는 클리브를 불러 세웠다. 멈춰 선 그에게 잉게보르트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저 미소의 의미는 무엇일까? 호의? 적대?


  "늦었지만 자기소개부터 할까요, 클리브 씨. 홀든 가문의 잉게보르트 홀든이라고 합니다."


  잉게보르트가 악수를 권해왔다. 느닷없이 악수를? 이제 와서? 그가 자신에게 전하려는 것이 있는 걸까? 그는 여기서 나를 시험하려는 것일까?


  클리브가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기자가 된 이후로, 이 능력을 손에 넣은 이후로 그의 삶은 도박의 연속이었지. 한번 믿어♡♡. 내 기자의 감이라는 녀석을. 자신의 손을 붙잡는 클리브를 향해 잉게보르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앨리셔 아가씨와 이글 그 아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잉게보르트와 악수를 나누고 방을 나서는 클리브에게 앨리셔가 작게 물었다.


  "무슨 얘기한 거예요?"


  클리브가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열차 정기선이 몇 시지? 카인과 이글에게는 늦으면 기다리지 말고 가라고 미리 말해뒀으니 괜찮겠지.


  "서두르지 아가씨. 중요한 단서를 잡았어."


  잉게보르트가 그에게 보여준 한 명의 여성. 이글이라는 인간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


  "서두르자. 기차가 떠나기 전에 홀든가의 유모, 한나를 만나야 해."



  *

  "늦는군."


  서쪽 하늘을 불태우며 추락하는 해를 보며 이글이 한숨을 내쉬었다. 클리브가 보고를 위해 헬리오스로 간지도 세 시간이 지났다. 너무 늦으면 먼저 떠나라는 그의 언질이 있었지만 그리 오래 걸리는 걸까. 아마 헬리오스 내부를 돌아보고 있는 것이겠지만.


  "일이 일찍 끝나고 헬리오스를 구경하는 중이라면 괜찮겠지만, 설마 아직까지 타라에게 잔소리를 듣는 건 아니겠지."


  "그 아가씨라면 그럴듯하군. 앞으로도 클리브를 보내야겠네. 자네나 나나 잔소리를 듣는데 재주는 없으니 말일세."


  안타리우스의 버려진 연구소를 발견하고 이틀이 지났다. 결국 알아낸 것 없이 의문만 가지고 돌아와야 했다.


  백발의 아이, 검은 머리의 여자, 클론.


  백발의 아이는 누구일까? 정말로 이글의 추측처럼 백발의 아이가 자라 검은 머리의 여자가 된 걸까?


  검은 머리의 여자는 계속해서 이글의 앞에 나타난 강화인간으로 밝혀졌다. 그녀가 이글을 찾아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클론의 정체. 말 그대로 정체불명. 클론이라. 클론이라면 복제 능력자인 옥사나 야고비치의 능력을 이용해 만든 녀석일 터. 복제 능력자는 한 번 능력을 사용하는데 많은 힘을 소모한다고 하던데. 그녀가 직접 능력을 사용할 만큼 중요한 클론인가?


  알아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의문을 밝히려면, 안타리우스를 잡으려면 더 빨리, 더 많이 움직여야 해.


  [내 수양딸 앨리셔가 위험하네. 자네가 그 아이를 보호해줬으면 좋겠어.]


  "빌어먹을."


  이글이 조용히 칼을 움켜쥐었다.


  "이런 곳에서도 우리를 습격하려고 나타날 정도면 우리가 잘하고 있는 거겠지."


  순식간에 칼을 뽑은 이글이 황혼 속에서 날아온 섬광의 백사를 찢어발겼다. 휘몰아치는 칼날 사이로 카인의 수류탄이 날아갔다. 괴한이 칼을 휘둘러 어둠을 타고 날아가는 수류탄을 튕겨냈다. 익숙한 몸놀림, 익숙한 검술이었다.


  수류탄이 폭음이 공원의 대기를 후려갈기고 카인의 총알이 하늘을 날았다.


  "성대한 환영식이군."


  비릿한 목소리와 함께 회색빛 대도가 날아오는 총알을 잘게 썰어냈다. 틀림없는 이글 홀든의 검법. 이 포트레너트 땅 위에 저 검법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단 둘뿐이다. 이글 홀든과, 그의 클론.


  "여어. 네가 그 소문이 자자한 내 클론이로군. 기분 나쁠 정도로 똑같은데."


  이글을 보며 비릿하게 웃는 클론 이글의 등 뒤에서 붉은 망토를 눌러쓴 여성이 걸어 나왔다. 눌러쓴 망토 사이로 잠깐씩 보이는 새하얀 가면과 백발이 그녀가 누구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반가운 사람도 있고 말이야."


  카인이 리볼버에 총알을 밀어 넣으며 이글의 옆에 섰다. 카인이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장비를 점검했다. 설마 코어레너드 한복판에서 안타리우스와 싸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 총알을 넉넉히 들고 오지 못했다. 총알이 떨어지면 그는 전력 외다. 하다못해 클리브라도 이곳에 있었으면 좋으련만.


  "총알이 없으니 최대한 빨리 끝내도록 하지. 근처에 사람도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저들이 무언가 수를 쓴 모양일세."


  "그렇다면 저기 빨간 망토 아가씨를 꼰대가 맡으라고."


  이글이 클론을 향해 흑도를 뽑았다. 흑도가 석양을 받아 붉게 빛났다.


  카인의 총이 불을 뿜으며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망토의 여자를 향해 날아가는 총알을 튕겨낸 클론이 순식간에 이글을 향해 달려 나갔다. 쾅! 하는 검과 검이 부딪혔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인 굉음을 내며 이글과 클론이 격돌했다.


  "나는 이 빌어먹을 클론하고 이야기 좀 해봐야겠어!"


  "나도 한 번쯤은 네 놈과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원본!"


  눈 깜짝할 새 수많은 검격이 휘몰아쳤다. 땅이 터지고 대기가 비명을 질렀다. 뼈를 끊어낼 듯한 사나운 검격의 폭풍에 카인과 여자가 말려들지 않도록 몸을 피해야 할 정도였다.


  클론의 검을 능숙하게 빗겨낸 이글이 클론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을 피해 바닥을 구르는 클론을 내려다본 이글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검법을 훔쳐 적당히 흉내 내고 다니나 본데…"


  경멸과 멸시의 눈빛으로 클론을 본 이글이 검 끝으로 그를 겨누었다.


  "와라, 가짜. 격의 차가 무엇인지 여기서 보여주지."



  *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잉게보르트 씨 덕분에 이렇게 만나 뵙게 되는군요."


  클리브가 살짝 숨을 몰아쉬며 웃었다. 유모 한나. 홀든가 3형제를 길러낸 홀든가의 유모. 홀든 가의 관리자 바스티안과 함께 홀든 가에서 가장 오래 지내온 사용인. 그녀라면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늙은이를 만나고 싶으시다니 별일이군요. 게다가 잉게보르트 씨가 보내서 왔다니…"


  아직도 그녀는 우리를 반신반의하는 듯하다. 앨리셔가 있으니 이렇게 이야기라도 할 수 있는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바로 무시당했겠지. 여기서는 내가 아니라 그녀에게 맡겨둘까.


  '아가씨. 여기서는 아가씨가 나서야겠어. 직접적으로 묻지는 말고 적당히 돌려서. 이글의 어린 시절은 어땠는가 같은 이야기 말이야.'


  '알겠어요.'


  자, 여기서부터는 임기응변이다. 얼마나 많은 정보를 캐낼 수 있는지는 순전히 운에 달려있지.


  "한나 씨는 어렸을 때의 이글 씨를 어떻게 기억하시나요?"


  의외의 질문을 받았다고 생각한 걸까. 살짝 놀란 눈치의 한나가 이내 웃으며 앨리셔를 바라보았다.


  "이글 도련님은… 언제나 활기찬 아이셨습니다. 언제나 형제분들과 같이 장난을 치며 돌아다니셨죠. 머리는 좋지만 공부에는 힘을 쓰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그 때문에 주인님과는 사이가 좋지 않으셨어요. 


  도련님은 항상 주인님과 싸우시고 방에 틀어박히시고는 하셨답니다. 어찌나 고집이 세신지 한 번 방에 틀어박히시면 형들은 물론 마님께서도 방에 들어가시지 못할 정도였죠. 방문 앞에 서서 도련님이 나오시길 빌면서 발을 동동 굴렀던 게 생각이 나네요. 


  이글 도련님을 달래 방 밖으로 모시고 나오는 건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그리운 시절이네요."


  이글의 이야기를 꺼낸 한나의 눈에 따스한 빛이 감돌았다. 한나에게 그 시절은 추억으로 가득 찬 시절이었을까.


  "이글 씨는 아버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나요?"


  "사실 지금도 그리 사이가 좋진 않답니다. 주인님과 형들은 사이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글 도련님은 주인님을 몹시 싫어했답니다. 주인님께서는 이글 도련님을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모르겠지만요. 


  이글 도련님은 주인님께 혼나는 것은 잘 참았답니다. 도련님께서 참지 못하시는 건 남이 부당하게 혼났을 때였답니다. 자기 일보다 남의 일에 더 관심이 많은 아이셨죠. 부당한 대우를 하시는 주인님이 싫다고 주인님 밑에서 검도 배우지 않겠다고 말하셨을 정도였죠. 결국 이글 도련님은 열네 살 때 잘츠부르크 축제가 끝나고 집을 나가버리셨답니다."


  "이글 씨가 집을 나갔다고요?"


  한나의 말에 앨리셔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내게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네. 이글 도련님이 다시 집에 나타나셨을 때가 스물이 넘어서였습니다. 한 동안 가문을 떠난 도련님이 돌아오셨을 때 그는 이전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어요. 성격, 말투, 행동 모든 게 달라져 있었죠. 


  그가 어디로 갔던 건지, 무엇을 한 건지는 모른답니다. 형들과는 편지를 주고받았는데도 어디로 갔는지는 말하지 않았다고 해요. 주인님께서는 돌아온 도련님을 보고 어디로 갔는지 짐작은 하시는 모양이지만요."


  한나의 말에 클리브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글이 열네 살 때 집을 나갔다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잉게보르트나 다이무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글의 일이 과거의 트라우마라는 것은 확실하다. 과거의 트라우마가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한 것인가? 그런 느낌은 아닌데…


  그렇다면 이글이 집을 나간 후의 일일까? 혼란스러워하는 앨리셔를 두고 드디어 클리브가 입을 열었다.


  "한나 씨, 혹시 홀든가 형제들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주실 수 있습니까?"


  "혹시 궁금하신 게 있나요?"


  "다이무스와 벨져는 자주 혼나는 편이었나요? 그 둘은 혼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요."


  "네에… 주인님께서 도련님들께 바라는 것은 하나였답니다. 검술이었죠. 검술에 있어서 다이무스와 벨져 도련님은 주인님을 절대적으로 따랐어요. 두 분께서는 재능과 의지 모두 가지고 있었죠. 특히 벨져 도련님은 성장이 눈에 띌 정도로 검술을 좋아하는 아이셨답니다. 그러다 보니 주인님께서 그 둘을 혼내시진 않으셨어요."


  "그렇군요. 혹시 그 세 명에게 사촌 형제가 있었나요? 사촌 형제도 홀든 가문의 가주에게 검을 배웁니까?"


  "아뇨. 가주의 직계만 가주에게 검을 배운답니다. 방계의 사람들은 가주에게 검을 배우지 않죠. 사촌 형제는 없답니다. 주인님의 형님께서는 어렸을 때 잘츠부르크 축제를 통과하지 못해 파문당했거든요."


  형들은 혼나지 않았다. 사촌은 없다.


  "집안 분위기는 어땠나요? 어머니하고 사이는 어땠죠?"


  "마님께서는 형제분들을 굉장히 아끼셨답니다. 마님께서는 몸이 약하셔서 바깥 활동을 안 하셨고 교육은 대부분 주인님이 도맡아서 하셨죠. 형제분들의 사이는 좋았지만 주인님과의 사이는 미묘했어요. 형들과 주인님께서는 사이가 좋았지만 이글과는 사이가 나빴거든요. 이글 도련님이 집을 나가신 후로도 형들과 가끔 편지로 연락을 했다고 하니 형들과 사이가 나쁜 건 아니라 생각해요."


  그 뒤로도 클리브가 이글과 형제의 관계라던가 부모님과의 관계에 몇 가지 더 질문했다. 


  이야기하는 도중 해는 어느새 완전히 산 너머로 떨어졌고 가스등이 칠흑의 하늘을 빛내기 시작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차가 기적소리를 내며 한나와의 인터뷰의 끝을 알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갑자기 찾아온 무례에도 불구하고 질문에 답해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늙은이가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요. 앨리셔 아가씨, 다이무스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노부인은 마지막까지 웃음을 잃지 않고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앨리셔는 그런 그녀를 배웅하러 나섰고, 클리브는 잠시 테이블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기차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앨리셔가 돌아왔다. 그녀는 아직도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는지 얼굴에 혼란이 가득 차 있었다.


  "저는 한나 씨와 이야기해봐도 잘 모르겠네요. 이글 씨가 열네 살 때 집을 떠났다는 게 굉장히 의외이긴 하지만요. 클리브 씨는 뭘 알아낸 게 있나요?"


  "글쎄… 우선 하나씩 정리해 보자고."


  첫 번째. 이글의 트라우마가 된 사건은 그가 집을 나가기 전의 일이다.


  "이글 씨가 집을 나가고 난 후에 일어난 일일 수도 있지 않나요?"


  "이글이 집을 나간 후에는 형제들과 편지만 주고받았다 했어. 그렇다면 잉게보르트 씨가 사건을 알 수 있을 리 없지. 안다 해도 그가 우리를 이글의 열네 살 이후의 행적을 모르는 한나 씨에게 보낼 리도 없고."


  두 번째. 한나 씨는 형제와 형들이라는 표현을 같이 사용했다.


  "그게 어쨌다는 거죠?"


  "사촌이 있다면 그들을 포함해서 형제라고 부를 수 있지만 가주의 형이 파문당하고 그들에게 사촌 형제라고 부를 사람은 없다고 했지."


  그렇다면 형들과 형제들이라는 표현이 번갈아 나오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형들과 형제들을 굳이 구분해서 부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세 번째. 이글은 남이 부당하게 혼나는 것을 참지 못했다.


  "누가 부당하게 혼났다는 거지? 가주가 기대하는 것은 검술의 성취고, 둘 다 재능도 있다 했지. 가주가 직접 검을 가르치는 것은 자식들 뿐이고, 현 가주의 자식은 셋이야. 본인이 혼나는 건 참아도 남이 부당하게 혼나는 건 참지 못한다. 하지만 그 형들은 혼나지 않았다는데?"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다.


  네 번째. 방에 틀어박힌 이글을 달래 방 밖으로 데리고 나온 존재.


  "누가 데리고 나왔다는 거지? 이글이 방에 틀어박혔을 때는 한나와 그의 형제, 심지어 어머니까지 방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어. 그를 달래는 것을 힘들었을 거라 말했지."


  부모도 형들도 유모도 들어가지 못하는 방에 들어가 이글을 달래어 데리고 나올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다섯 번째. 이글이 집을 나간 후 한나의 표현이 형들로 고정된다.


  "형제가 아니지. 무언가 바뀐 거야. 형제라는 표현이 이글이 집을 나간 뒤로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어."


  무언가가 일어난 것이다. 형제라는 표현이 사라질 정도로 커다란 일이.


  앨리셔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도 이 이야기의 어색함을 발견한 듯하다. 톱니바퀴 하나가 빠진 시계처럼 이야기가 헛돌고 있다. 


  완성된 이야기가 아니야. 중요한 퍼즐 조각 하나가 빠져 있었다. 완벽한 이야기 속에서 한나가 일부러 감춘 마지막 퍼즐 하나를.


  "혼나지 않는 형들. 누군가가 부당하게 혼나는 걸 참지 못하는 이글 씨. 형제들과 형들의 차이. 이글 씨를 달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간 사람. 무언가가 하나 빠져있네요."


  "그게 트라우마의 원인이겠지. 형제와 형들의 차이를 깨달았을 때 갑자기 홀든 가의 관리자 바스티안이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오르더라고.


  [홀든 가문에는 다이무스와 이글 말고 또 한 명의 아들이 있어. 가문에서 공개를 꺼려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


  "그건 벨져 씨를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요?"


  "설마. 벨져는 검을 잡은 이래로 루이스에게 패배하기 전까지 검의 천재로서 사람들의 시선이 떠나간 적이 없었어. 루이스에게 패배한 후 사람들의 관심이 떠나간 것을 즐기기까지 했을 정도였지. 가문에서 공개를 꺼리는 아들이 적어도 벨져는 아니야."


  그렇다면 바스티안의 인터뷰가 의미하는 것이 뭘까.


  홀든가의 가주에게 또 다른 자식이 있는 것이다. 홀든가 삼형제라는 이름에 가려진 자식이.


  "하지만 아들이 아냐. 바스티안이 왜 아들이라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랬다면 형들과 형제들이라고 표현을 구분할 이유가 없지."


  "그렇다면…"


  "그래."


  이 이야기에 빠진 중대한 퍼즐 조각 하나. 그것이 이글이 가문을 떠난 이유와 트라우마의 원인이다.


  "이글에게 여자 형제가 한 명 있었다는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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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 OK Oh! 냠~ Love U~ 궁금해! YES! 히힛~
안녕하십니까? 예~예~ 모든 것은 신의 뜻... 불허합니다. 의외군요. 나 원 참... 시작할까요? 강화인간!!
안녕? OK 궁금하네요. 역시! 재미있네. 깜짝이야! 아~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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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넵!! 미안해요!! 앗! 좋아요! 엣헴. 추천!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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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아, 아니... 헐! 흠흠... 끄응... 시, 식은땀이.. 엥? 후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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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 피- 어머! 흐어 오오- 안돼! 랄랄라
우쭈쭈 하하 하? ?? 이거 참... -_- 안녕하십니까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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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흐응? 흐으으응?! 척! 칫.. 좋-았어! 엥? 후에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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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기쁩니다. 축하합니다. 칭찬해 드리죠. 놀랍군요. 심기가 불편합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매우 화가 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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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수가... 감히! 네가! 아니?! 장하군! 응?! 좋다! 그건 아니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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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군! 좋았어! 하하! 축하하오! 아아.. 5분전인데. 커피한잔 하겠소?
승리의 정유년! 정의로운 새해복! 극.한.공.성. 복! 받아랏! 음~ 직장인의 정석
많이 배웠습니다! 대단합니다! ?!! 축하드립니다 뭔가.. 부족해요 짝짝짝! 각오하세요! 으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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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빈 미이라와 고스트 제피 할로윈에는 카를로스호박 히카르도의 사탕 탄야의 마녀 분장..? 잭-슈타인 강시 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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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군요! 좋은 시간 되소서 Merry 추석~! 우와~! 호~오! 가득해요~! 짱인데! 품위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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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합니다 궁금하네요 에구머니나! 슬프네요... 경멸스럽군요.. 후훗~ 뭐라고 하셨죠? 이, 이럴수가...!
아이작의 멋진 모습 이글이라 샤샤샤~ 트리비아 슬라이딩 시바 포는 달린다 까미유도 달린다 라이샌더 달린다 마를렌 점프! 샬럿 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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