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랍#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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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9 21:56:36
북적거리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 손님들이 오기
전에 미리 장사준비를 하려던 포장마차 주인은
자신의 포장마차 앞의 벤치에 앉아있는 특이한
옷차림의 여성을 보고 말을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혹시 누구 기다리세요?"
여성은 다소곳하게 앉아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데이트 상대를 기다리고 있어요."
"이런. 이렇게 예쁘고 우아한 상대를 기다리게
하다니.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그래
요?"
"음... [세상의 진실을 찾는 사람]이에요."
"네에? 저... 어디 귀하신 분으로 보입니다만..
세상 물정을 잘 모르시나 보군요. 세상에서는
보통 그런 사람을 '수상쩍은 사람'이라고 부
른답니다. 아가씨. 그 사람이 오기 전에 집으
로 돌아가는게 좋겠어요."
"후후. 수상쩍기는 해도 좋은 사람이에요."
"수상쩍은데 좋은 사람일수가 있나요? 아무
튼 나쁜말 안할테니까 어서 돌아가요. 그 사
람의 특징을 알려주면 내가 대신 둘러대줄
게요. 어서요."
"곤란하게 됐네요. 음... 이건 어때요? 저는 몰
래 숨어있을테니까 그 분이 오시면 아저씨께서
보시기에 나쁜사람이 아닌것같으면 저를 불러
주시겠어요?"
"알았어요. 그럼 제가 안된다고 하면 안되는 겁
니다?"
"네. 정말 친절하신 분이로군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헨켈이라고 합니다. 아가씨는요?"
"제 이름은..."
라리아는 순간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짓더니 말
했다.
"제 이름은 트릭시 폭스에요."
"그렇군요. 트릭시 양. 일단 마주치면 안되니까
어서 숨는게 좋겠어요."
"네. 헨켈씨만 믿고 있을게요. 괜찮다고 생각이
드시면 두 손을 머리 위에 올려서 두 팔로 큰 동
그라미를 그려주세요."
"알겠습니다. 맡겨만 주세요!"
라리아는 방금 앉았던 벤치가 보이는 어느 한 카
페테리아의 2층에 자리를 잡았다. 기다린지 30분
정도 지나 클리브가 헐레벌떡 뛰어오는것이 보였
다.
*
클리브는 오늘 아침 편집실의 넓디 넓은 책상에서
잠을 깼다. 책상에는 이번호 기사가 적힌 용지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고 어젯밤의 우중충한 날씨는
이미 사라져, 드물게도 따스한 빛이 창문을 통해 방
에 드리우고 있었다.
누군가와 데이트하기에 좋은 날이로군. 클리브는 멍
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하기야 그런 청춘이란 클리
브 스테플과 전혀 인연이 없지만 말이다.
클리브는 볼에 흥건히 고인 침을 닦고 몸을 일으켜
스트레칭했다. 마감후에 찾아오는 약간의 달성감과
그보다 큰 무력감을 느끼며 클리브는 탕비실에서 커
피 한잔을 타와 한모금씩 마시며 어지럽혀진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바쁠 일이 없었다. 그럼에도 클리브는 께름직한 기
분을 느꼈고 책상을 다 정리할동안 계속해서 그것을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
았다.
이런 때를 대비해서 메모장이 있다. 클리브는 코트의
안주머니를 뒤졌다. 하지만 웬일인지 메모장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항상 들고다니는데 이상한 일이다.
노트와 펜은 기자의 무기다. 자신을 가르친 사수가 이
것을 안다면 뭐라고 말하며 사람을 들었다놓을지 상
상하기만해도 간담이 서늘해진다.
정말 이상한 날이다. 날은 맑고. 마음은 평온하고. 메
모장과 펜은 품에 없다. 매일 이런 기분이었으면 좋겠
다고 생각하며 클리브는 퇴근하기 위해 사무실 밖을
나서려다가 동료 기자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멜다 양. 좋은 아침입니다~"
클리브의 인사를 받은 멜다가 활짝 웃으며 답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클리브. 기분이 좋아보이는군요.
마감 다음날에 데이트라니. 정말 부러워요."
클리브는 깨달았다. 그리고 애써 다시 물었다.
"데이트..요?"
"어머. 혹시.. 바람맞으신건가요?"
"아니요. 그건 아니고요. 하..하하.."
"설마... 잊고계셨어요?"
클리브는 식은땀을 흘리며 억지로 웃어보였다.
*
클리브는 약속시간보다 한시간이나 늦게 도착했다.
그쯤 되면 기다리는쪽에서는 상대방이 어떤 피치못
할 상황에 처했거나 해서 오지 못할것이라 생각하
고 대부분 돌아가겠지만 라리아라면 하루종일이라
도 기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한시바삐 달
려온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약속한 장소에 없었다.
클리브는 그녀가 자리에 없다는것에 안도를 느끼고
무거운 코트를 벗은다음 땀으로 질척해진 와이셔츠
의 넥타이를 풀었다.
"이보쇼. 당신이 클리브인가 하는 작자요?"
그런 클리브에게 핫도그 가게 주인이 시비조로 말을
걸어왔다.
"아. 네. 이클립스의 기자 클리브 스태플이라고 합니
다."
클리브는 두 손으로 공손하게 명함을 넘겼다. 헨켈은
내켜하지 않아하면서 그것을 받았다. 클리브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나저나 배가 고프군요. 핫도그를 하나.. 아니 두개
주시겠어요? 아침을 아직까지 못 먹어서 말이죠. 기
자생활이란게 참 그래요. 식사 한번 편하게 제때 먹지
를 못하니 말이죠. 사장님도 먹는 장사를 하실테니 다
른사람들 식사할때 식사를 못하시겠군요. 물론 제가
하는 일에 긍지를 갖고 있습니다만 때로 서글퍼지는
건 어쩔수없는것같아요."
"음... 그건 그렇죠... 3실링(한화 2만4천원)입니다."
터무니없는 가격에도 클리브는 웃으며 지불했다. 의심
스럽게 클리브를 쳐다보는 헨켈의 시선은 전혀 알아채
지 못했다는듯이 그 자리에서 클리브는 핫도그 하나를
맛잇게 해치웠다. 휴지로 입술에 묻은 소스를 닦은 클
리브가 1실링을 헨켈에게 건네며 말했다.
"정말 맛있군요. 제가 지금껏 먹어본 핫도그 중에 최고
였습니다. 이것은 감사의 표시입니다."
헨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1실링을 받고서 말했다.
"아... 고마워요."
"나머지 하나는 제 소중한 레이디에게 맛보여주고 싶군
요. 이 맛있는 핫도그가 식어버리기 전에요. 그래서 말인
데 혹시 길고 아름다운 은발에 동양의 전통 복장을 입고
있는 우아한 여인을 보신적이 있나요? 두시간전에 약속
을 했었는데 제가 밤을 새서 마감을 하느라 늦어버렸거
든요. 아이구. 지금도 머리가 멍-하고 눈꺼풀이 무거워요.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잖아요? 그래서 헐레벌떡 왔더니
벌써 약속시간이 한참을 지나버린거있죠? 혹시 이미 돌
아가버린건 아닐까요?"
클리브는 풀이 죽t어 고개를 숙였다. 헨켈은 고민하며 라
리아가 자리잡고 있는 카페테리아 2층을 곁눈질했다.
그것을 클리브는 놓치지 않았다. 가짜 눈물을 닦아내며
클리브는 헨켈에게 말했다.
"제가 잘못한 일이니까 불평하는건 꼴불견이겠죠. 돌아t갈
기운도 바닥나가는것같아요. 그럼 저는 저쪽의 카페테리
아에 가서 커피 한잔 마시고 정신좀 차리고나서 집에 돌아
가야겠군요. 많이 파세요."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가세요."
클리브는 헨켈이 곁눈질했던 카페로 들어가 커피 한잔을
주문해 받아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라리아가 손을 흔들
며 반겼다.
"와. 클리브. 어떻게 그 아저씨한테서 제가 있는 장소를
알아냈어요?"
클리브가 그녀의 앞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세상의 진실을 아는 방법]이라고만 해두죠."
라리아는 재미있어하며 말했다.
"클리브는 역시 재미있는 사람이에요."
"재미있다는 말. 잘못 쓰면 상처받을수도 있는 말이에요?"
"그런가요? 그렇다면 사랑에 빠진 아가씨를 한시간동안이
나 바람맞힌 죄 많은 남자는 그 아가씨에게 얼마나 큰 상
처를 줬을까요?"
"아.. 그건 역시 할말이 없네요. 미안해요."
"흐음... 봐서요. 손에 그건 뭐에요?"
클리브가 포장된 핫도그를 라리아에게 건넸다.
"전에 말했던 핫도그에요. 최고급이죠."
"핫도그에 최고급이라는 말은 뭔가 안어울려요."
"이 핫도그. 무려 2실링입니다."
"무슨 특별한 재료라도 들어갔어요?"
"네. 정보료로 말이죠."
"흐응..."
라리아는 클리브의 대답에는 큰 관심 없이 대답하고
서 받아든 핫도그의 포장을 풀어 한입 베어물었다.
열심히 오물거리며 꿀꺽 삼킨 라리아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음.음. 학생 식당과는 뭔가 느낌이 다르네요! 약간..
퇴ㅍㅖ적인것 같아요!"
"풉..!"
가감없는 솔직한 표현에 클리브는 마시던 커피를 뿜
었다. 더러워진 테이블을 비치된 냅킨으로 닦아낸
클리브에게 라리아가 말했다.
"혹시 제가 퇴ㅍㅖ적이라는 말을 잘못 쓴건가요?"
"아니요. 꼭 그런건 아닌데..."
"퇴ㅍㅖ적인 맛..퇴ㅍㅖ적인 맛.. 퇴ㅍㅖ적인 맛 아
니에요?"
"풋..... 크흠... 틀린건 아닌데 오해를 부를 말이랄
까요."
"흐응... 이상하네요. 난 꽤 정확한 표현을 했다고 생
각 했는데."
"정확하기 이전의 문제라서요. 아무튼 퇴ㅍㅖ적이라
는 표현은 금지에요. 금지."
"아쉬워라."
"아쉬울거 하나도 없습니다~."
"클리브는 고압적이고 자기중심적인데다가 감수성이
떨어지네요."
"뭐라고 말해도 퇴ㅍㅖ적이라는 말은 금지에요. 그냥
제가 반응하는게 재밌어서 그러는거잖아요."
"클리브는 참 귀여운것같아요. 꼭 복슬이 같아요."
"강아지같은데요."
"땡. 고양이입니다."
"에휴..."
클리브는 라리아가 핫도그를 다 먹기를 기다려 말했다.
"기다리는동안 뭐 했어요?"
"음.. 큰 느티나무에 남자아이가 너무 높이 올라가서
나중에 그것을 알아챈 엄마와 아빠가 당황한 일하고
요. 할아버지들끼리 비둘기에게 먹이 주는 경쟁을 하
다가 신고를 받은 경찰관들이 와서 말리는 일하고요.
바바리를 입은 한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와 핫도그 가
게 사장님이랑 얘기하는걸 봤어요."
"흔한 광경을 보기만 한것 뿐이잖아요..."
"클리브. 놀라지 말고 듣도록 해요. 클리브에게 익숙
한것들은요. 어머나 세상에! 저에게는 모두 새롭고
신기한것들뿐이랍니다."
클리브는 의심쩍은 표정으로 라리아를 보았지만 라리
아는 웃음지을뿐이었다. 클리브는 슬쩍 한 손을 테이
블 아래로 내린다음 길게 늘어뜨려진 라리아의 옷자
락을 잡아 사이코메트리로 읽어보려고 했지만 라리아
가 갑자기 일어서는 바람에 균형을 잃고 테이블에 코
를 박았다.
"크흐~"
"저 기다리는동안 하고싶은게 생겼어요! 그러니까 따
라와주세요!"
"아. 잠깐만요. 코가..코가.."
"클리브는 수상쩍은 생각을 하면 입꼬리가 살짝 올라
가는 버릇이 있다는거. 알고 있어요? 그건 벌이에요.
그러니까 엄살부리지 말고 따라와요."
"으윽...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라리아에게 이끌려 클리브가 도착한곳은 공원 중앙에
있는 넓직한 분수대였다. 분수대의 물은 클리브의 허
리정도까지 차올라 있었다. 라리아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클리브의 손을 잡은채로 분수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잠깐... 라리아 저긴 분수라고요. 들어가면 저ㅈ어요."
"왜요? 저ㅈ는게 싫어요?"
"싫은건 아닌데..."
"얼굴도 꾀죄죄하고 머리는 떡져있잖아요. 기분 가라앉
지 않아요?"
"그야 깨끗한편이 좋긴 한데... 분수는 씻는곳이..아앗..!"
클리브가 말하면서 긴장을 푸는 순간을 노려 라리아가
클리브를 분수 안으로 끌어들였다. 클리브는 완전히 균
형을 잃어 넘어지고 말았다. 라리아는 클리브의 손을 놓
기보다는 같이 넘어져주는 쪽을 택했다.
[풍덩!]
"나...나는 맥주병이란 말이에요! 푸하! 푸...콜록!케윽!
사..살려..콜록!!! 주..켁!!케엑!!...요!!!"
클리브는 필사적으로 사지를 움직이며 라리아에게 도움
을 요쳥했다. 그러자 같이 쓰러진 라리아가 클리브를 덥
석 안았다. 하지만 클리브는 이성을 잃고 손발을 마구휘
저었고 라리아는 필사적으로 클리브를 안아 진정시켰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수심이 얕으니까 일어서요! 진정
해요 클리브!!"
"살려!! 살려주세...요?"
클리브는 라리아의 말에 허우적대는것을 멈추었다. 곧
클리브의 두 다리는 분수의 바닥에 닿았다.
"괜찮죠? 진정해요. 내가 심했어요. 미안해요."
클리브는 뒤통수를 긁으며 라리아의 말에 대답하려고
했지만 라리아의 코에서 흐르는 피를 보았다. 클리브
는 안주머니에서 완전히 저ㅈ어버린 손수건을 꺼내 라
리아에게 건넸다.
"휴... 오히려 제가 미안해요. 이걸로 코피 닦아요."
"어머. 왠지 코가 맵더라니. 고마워요 클리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라리아는 통증에 살짝 표정을 찡그리더니 부끄러워하
며 얼굴을 돌리고 코피를 닦았다. 피를 닦아 손수건을
따로 챙긴 라리아가 웃으며 클리브에게 말했다.
"손수건은 따로 깨끗이 해서 돌려드릴게요. 그리고 일
단 저기 벤치로 가서 한숨 돌릴까요?"
"네. 그렇게 하죠..."
클리브는 맥없이 라리아가 가리킨 벤치에 앉았다. 다
행스럽게도 햇빛은 따스히 저ㅈ은 몸을 덥혀주었다.
하지만 클리브로서는 체면이 서질 않았다. 시작부터
계속 어설픈 꼴만 보여줄 뿐이었으니까.
어색한 침묵속에서 클리브는 계속 고민했다. 라리아
는 말이 없고 자신은 무슨 말을 해야할지 감도 잡히
지 않았다. 괜찮냐고 물어보면 라리아는 괜찮다고 할
것이다. 다른것을 하지 않겠느냐고 물어보면 라리아
는 괜찮다고 할것이다. 이런저런 선택지가 클리브의
머리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그 어느것도 클리브는 고
르지 못했다. 그보다는 고르고 싶지 않았다. 라리아
의 상냥함에 지나치게 기대고 있다는 인상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것에 의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자신의 현재 상황에 자존심이 조금 상했기 때
문이다.
시간은 긴 침묵속에서 길게 늘어졌다. 클리브의 초조
함은 켜켜히 쌓여간다. 그 침묵을 끊어낸것은 라리아
의 귀여운 재채기였다.
[엣취!]
"...라리아. 우리 돌아t갈까요?"
"그럼 클리브 집을 보여줄래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