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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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30 22:26:22
도심에서 점차 멀어지다보면 주변의 집들은 점점 작아지고 낡아빠지고 냄새나고 조용해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뚝.하고 바닥에 깔린 콘트리트와 평평한 돌들이 사라진다. 그리고 적갈색
흙이 깔린 길이 지평선 너머로 이어진다. -이것이 라이언 하트의 '세계'의 끝. 이 너머로 넘어갈
필요도 없고 넘어갈 방법도 없다.
지금껏 이 '세계'에 대해 의문을 가진적이 없었다. 익숙하고 편안했으며 안락했다. 이곳의 모든
것은 그에게 열려있었다. 그 멜츠제약의 둘째 아들로서 부족함없이 자라왔다. 궁금한것이 있으
면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선생님과 먹고싶은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제때 가져다주는 시녀들과
사랑하는 어머니 존경하는 아버지 그리고 '형'...
이 '완벽한' 세계로부터 저 흙길을 밟고 지평선 너머로 나간 형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아
무리 생각해봐도 납득할만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한동안 그 끝을 쳐다보고 있다가 멀리 언덕에 자란 한 그루의 사과나무가 눈에 띄었다. 라이언
은 끌려가듯이 그 나무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
그 나무에는 선객이 있었다. 탐스러운 금발을 허리까지 내려뜨리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15세 전후의 소녀였다. 도시의 외곽, 100년은 됐을 사과나무 아래에서 상념에
빠진 소녀의 모습은 어딘가 비현실적이어서, 마치 라이언 자신이 다른 세상으로 온 듯한 느낌
마저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소녀는 사과나무가 서 있는 언덕을 방문한 소년을 보았다. 짙은 담록
색 눈에 라이언이 비추어졌을때 라이언은 왠지 모를 초조함을 느껴 손에 고인 땀을 닦았다.
침묵을 깬 것은 소녀였다. 방울새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안녕? 나는 클레어라고 해. 혹시 여기가 네 소중한 장소였어?"
라이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처음 와 봤어. 나는 라이언이야. 여기 살지 않는것같은데.."
"오늘은 처음이지만?"
말이 낮설다.
"오늘은?"
"곧 여기로 이사올거니까."
"...이곳은 마음에 들었어?"
클레어는 조금 고민하는듯 하더니 말했다.
"이 사과나무가 제일 마음에 들었어. 근데.."
"..근데?"
"구한 집에서 조금 멀어서말야. 주말에 가끔 마음먹으면 올 수 있긴 하겠지만."
라이언은 그 말에 사과나무 언덕 주변을 살폈다. 정말 놀라울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업자분한테 얘기를 들어보니까 말야-"
클레어는 황야의 저편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 나무는 과거 인디언들이 신성시하던 나무였대. 그런데 미국인들이 그들을 밀어내버
렸잖아? 그래서 미국인들은 아껴줄수없는 나무가 되어버렸대."
얄궂은 일이다. 라이언은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사과나무에는 무수한 열매가 매달려 새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으나 저 도시의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듯했다.
"그리고 업자분이 또 걱정하는거 있지? 이런 저주받은 나무 아래 있는다면 주민들의 오
해를 살 수 있다고 말이야."
인디언에 대한 뿌리깊은 증오는 아마도 이 사과나무를 아끼는 사람이라면 평등하게 칼
날을 들이밀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하자 라이언은 속이 메스꺼워짐을 느꼈다. 그러나 클
레어에게 있어서 그런 이야기는 그저 지나가는 이야기인듯했다.
오히려 담록색 눈에는 밝은 빛이 깃들어, 에메랄드 보석처럼 빛났다.
라이언은 그녀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섭지 않아?"
"지금은."
그러면 전에는 무서웠다는 말일까?
"즐겁게 살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라이언은 즐겁게 살고싶다면 오히려 '그런'것을 피해야한다고 생각했다.
클레어와는 이야기가 잘 맞물리지 않는다.
"어떤 부분이 즐거운거야? 그들을 도발하는게... 즐거운거야?"
라이언은 말을 하면서도 답답한 마음을 지울수가없었다.
이 밝은 미소의 소녀가 타인을 조롱하는것에 즐거움을 얻는다는건 어떤 질 나쁜 농담처럼 들렸다.
"아니야. 나는 그저 자유로운게 즐겁고 좋은거야."
라이언은 자신이 속한 미식축구 팀의 플레이를 떠올렸다.
승리와 쟁취에 자유가 비집고 들어올 틈은 없다. 그것은 오히려 패배하고 좌절하게 만드는 불필
요한 잡음이었다.
결과를 내고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그런 거추장스러운 짐 따위는 초장에 벗어제끼는것이 맞다. 나
머지 문제는 승리하고 나서 고민하면 될 일이다.
그렇다면 클레어는 이미 승리했기때문에 고민하고 있는것일까?
라이언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녀는 이기지도 못했는데 선택을 하려고 하고 있었다. 선택은 승자의 것임에도.
불쾌한 감정이 밑바닥에서부터 천천히 올라오는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클레어에게 부딪치고 싶지는 않아서 라이언은 입을 다물었다.
라이언에게 있어 견디기 어려운 침묵이 이어졌다.
클레어에게는? 알 수 없다. 그녀는 지평선 너머를 향하고 있을 뿐이다.
그 뒷모습은 그저 가벼웃 눈웃음을 던지는 듯 살랑이는 바람에 황금빛 머리카락이 흔들릴 뿐이다.
일주일 내내 비가 쏟아진 황량한 벌판에 문득 피어난 들꽃이 그곳에 있었다. 이유는 모른다. 언젠
가 짓밟히고 언젠가 시들것임에도 꽃은 피었다.
그 가녀림에도 꽃은 피고야 말았다. 라이언의 가슴은 어느새 연민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원망받을지도 모른다는것을 알고도 '즐거워 지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게으름도 아니고 오만도 아닌 무언가였다. 하지만 라이언으로서는 그것이 무엇
인지 알수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