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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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7 02:40:10
"무슨 생각을 하고있나요?"
창밖을 향해있던 고개를 돌려 여자를 보았다. 그녀는 날카로운 시선에 미소로 답했다.
"이곳에 너무 오래있었어."
"누가 따라오기라도 하나요?"
"..."
"해가 곧 질거에요. 적어도 오늘은 머물다가세요."
창밖은 저물어가는 석양에 물들어 길었던 하루를 끝내려하고있었다. 낮은 가고 밤이 오
고있다는것이 견딜수가없어서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괜찮아요. 밤에는 모두가 잠들거에요. 초조해하지 말아요."
"아니야... 그들은 그렇지 않아. 오히려... 밤에 더욱 ...잠들지 않아."
닫힌 방문이 금방이라도 열리고 그들이 들이닥칠것이다... 그런 생긱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는 지금이 더 무섭다. 여자는 그
마음을 모르는것이 분명하다. 알았다면 적어도 이렇게 성가시게 굴지는 않을
테니까.
"식사는 하셨어요? 샌드위치를 좀 가져왔는데."
묵묵히 호의를 받아들였다. 엊그제 쥬스가 싫다고 했더니 커피로 바뀌었다.
"저 사실 이 나이에도 커피를 못마시거든요. 그래서 한 소리 들었지 뭐에요."
"커피를 싫어하는건가?"
"쓴맛은 그럭저럭 넘길수있지만 마시고나면 가슴이 무서울정도로 뛰거든요."
무심코 커피를 한모금 마셔본다. 그렇게 유난을 떨 정도는 아닌것같았다.
"좋아하세요?"
"?"
"커피 말이에요."
"싫어하지는 않아."
"쥬스보다는 좋아하는거죠?"
살짝 짖궂은 웃음을 지으며 여자는 물었다. 그것이 살짝 낮간지러워서 대답하
지 않았다.
"내일은 조금 다른맛의 커피를 준비해볼게요. 제가 커피에 대해 관심을 가진게
리처드 입장에서는 퍽 감동적이었던 모양이에요. 혹시 좋아하는 커피는 있어요?"
"...그다지."
"커피란거 다 똑같이 검고 쓰고 가슴을 답답하게만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리처드
말로는 그게 아닌가봐요. 같은 원산지의 커피라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맛
이 변한대요. "
"그럴거야."
"혹시 엄청난 커피전문가였나요? 그렇다면 정말로 바보같아보였을텐데."
"아니 잠깐 배달이라던가, 창고관리를 했던적이 있으니까, 그런게 있다는것정도
만 알뿐이야."
"아저씨는 생각보다 이것저것 했던일이 많네요?"
"일을 가려서 할 처지가 아니었으니까."
"그렇군요. 좋은것을 배웠어요."
"...어디까지 어떻게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나같은거한테서 배울건 그냥 그렇
게 살면 안된다는것뿐이야."
"그럴리가 없어요. 오늘도 저는 배운게 많아요. 커피가 종류가 많다는것도 알았고
밤에 주무시지 않는 분들이 있다는것도 알았고 선택지가 많다는것은 오히려 방해
가 될수도 있다는것도 알았으니까요."
"나를 구경거리로 삼는것도 곤란한데."
"지금 웃었군요? 오늘은 친구들에게 자랑할 일도 하나 생겼네요!"
무심코 턱과 볼을 매만졌다. ...패배를 인정할수밖에 없을것같다.
"어떻게 자랑할건데? 이상하고 수상쩍은 아저씨를 생각없이 방에 들였다고?"
"저 사실말이죠. 이미 아저씨 얘기를 친구들에게 하고있어요. 친구들은 그게 고슴
도치 이야기인줄 알고있지만."
"남 속일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오해일뿐이에요. 그 오해를 바로잡지 않는것일뿐이고요."
"하...... 그래서 고슴도치인가."
"화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괜찮으신가요?"
"친구들은 고슴도치로 안다며."
"고슴도치로 알죠?"
"그럼 됐어."
커피를 마시면 잠이 깨야할텐데 오히려 졸리기 시작했다. 창밖은 점점 짙음을 더해
가고있었다. 깊어져가는 어둠속에서 조용히 심장만이 두근거린다. 무슨 음료를 좋
아하는것따위 생각해본적조차 없다. 먹을것이 있다면 먹고 마실것이 있다면 마시고
일할곳이 있다면 일하고 도망칠곳이 있다면 도망쳤을뿐. 선택할수있다는것 자체가
낮설다.
"...저 아저씨 싫어하지 않아요.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에요."
"..."
"무엇이 그렇게 아저씨를 두렵게 만드는건가요?"
"...불길"
"불이 무서우신건가요? 무서우면 도망가도 괜찮아요."
"...그건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가라고 말하는것과 마찬가지야. 나는 그저 불행들을 흩
뿌리고 다닐뿐이야. 나는 불길이야."
"불길은 잘못한게 없어요. 그저 존재하는것이 잘못된것은 없어요. 당신은 그저 껴안고
보듬어줄 랜턴이 없을뿐이에요."
"...하하. 네가.. 그 랜턴이 되어주기라도 할...생각인가?"
"그게 그렇게 대단하고 어려운 일인가요?"
"...쉬운 일인건가?"
"사람은 혼자가 아니에요. 나 혼자서는 아저씨의 불길을 담을수없을지 몰라도 아저씨
가 친구들을 만든다면 다르지 않겠어요?"
"...듣고 보니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아저씨는 지쳤을뿐이에요. 그러니까 지금은 쉬어요. 자, 여기 와서 누워요."
여자가 이끄는대로 몸을 눕혔다. 머리를 무릎에 올리고 쉰다. 눈을 감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