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yphers

  • [팬픽]떨어지는 천칭좌, 시작되는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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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ta [53급]

2012-03-29 17:30:42

 

 

 

prologue

 

 

 

 

 1931년, 프랑스 파리.


 센 강 인근에는 세계에서 높기로는 첫 손 가는 철탑이 하나 서 있다. 교량기술자 알렉산더 귀스타브 에펠이 설계하고 당대의 모든 공학적 역량이 집중되어 만들어진 철골 구조물. 1889년 준공을 완료, 당해의 파리 만국박람회에 개관한 이 유명한 철탑은 저명한 예술가들의 신랄한 비난을 당당히 이겨내고, 40여년이 지난 지금에서는 파리와 프랑스를 대표하는 랜드 마크가 되었다.


 지금은 파리 시민들도 자랑스러워하는 에펠탑. 7,300톤에 이르는 철강으로 짜 올려진 이 구조물 주변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세계에서 몰려드는 관광객과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어주고 있다. 그리고 오늘도 공원은 그저 평화로웠다.


 하지만 그 평화는 한 사내의 등장으로 무너졌다. 물론 그렇게 나쁜 의미는 아니었지만.


 "캬아, 역시 유럽 본토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먼."


 거리 한가운데서 경박하게 지껄이는 사내. 그것뿐이라면 희한한 사람이라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주변의 사람들은 '갑자기' 그 자리에 나타난 사내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아무것도 없었던 빈 공간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사내. 그 복장은 유럽에서 보기 드문 복식이었다. 화려한 장식이 가미된 커다란 챙의 모자. 챙은 양 옆이 살짝 말려 올라가 어딘지 날렵한 느낌을 주었다. 체크무늬 셔츠 위로 걸친 가죽조끼는 어디까지나 실용성을 위주로 한 디자인. 그리고 최근 유럽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블루 진 위로는 가죽 덧바지를 걸쳤다. 묵직한 버클과 폭 넓은 가죽으로 재단된 허리띠 양 옆에는 리볼버 두 자루가 덜렁거렸다. 바지 아래엔 박차가 달린 견고한 승마 부츠. 품 넓은 덧바지에 가려져 있지만, 그 안쪽에는 날카로운 단검이 동여매여 있다.


 유럽이 아닌 드넓은 신대륙의 평원을 벗 삼은 카우보이, 바로 그 모습이었다. 카우보이 모자 아래로 드러난 벽안은 개구쟁이처럼 빛나고, 햇살에 빛바랜 금발은 이 사내의 노련함을 대변했다. 살짝 그을린 피부는 그의 분위기와 몹시 잘 어울렸다.


 그런 사내가 보는 것은 바로 파리의 명물 에펠탑. 에펠의 역작 앞에 서 있는 사내는 그야말로 행복에 겨운 듯 감탄사를 연발했다.


 "저 정교한 짜임새를 보라지. 이것저것 덕지덕지 쳐 발라 놓는 것보다 저렇게 심플한 매력을 선보이는 것도 훌륭한 선택이야. 그런데 뭐? 어디 사시는 높으신 분들은 저게 흉물스럽다고? 아이고! 그 분들이 저걸 무너뜨렸으면 난 이런 복은 누려보지도 못했겠네!"


 그 뒤로도 한참을 떠들던 사내는 지친 듯 잠시 숨을 고르고는, 지체 없이 에펠탑을 향해 달려갔다. 세월의 풍상이 철골을 부식시켰지만 그 흔적조차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 결코 잊지 않겠다는 듯 주변을 세심하게 살펴 본 사내. 그는 잠시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갑자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아까부터 기행을 일삼던 사내를 흥미롭게 바라보던 주변 사람들이 놀라 자빠졌다.


 "휘이~! 장관이구만! 파리 어디에서도 에펠탑이 보인다고? 에펠탑에서도 파리 어디든지 보이는데! 진짜 끝내주는구먼!"


 사내는 어느새 에펠탑의 꼭대기에 매달려 있었다. 주변을 휘 돌아보던 사내의 눈에 또 다른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저것이 말로만 듣던, 그곳인가!


 "루브르! 내 가슴을 뛰게 하는 단어지! 오늘의 마지막은 저기로 정했다!"


 사내는 또 다시 꺼지듯 사라져버렸다. 그의 말로 미루어 볼 때 지금 그 사내는 루브르 박물관 앞에서 또 다시 탄성을 내지르고 있을 것이다.


 파리 시내에서 일어난 일련의 소동. 어쩌면 이 소동은 좀 특이한 능력자의 변덕으로 취급되어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하고 묻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 사내의 등장은, 바야흐로 세계의 운명을 결정지은 최후의 퍼즐 조각이었다.

 

…………………………………………………………………………………………………………………………


 2차 능력자전쟁이 끝난 직후, 회사와 연합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하이드의 사망과 더불어 전격적인 섬멸전을 강요받은 지하 연합은 그 존립이 위태로울 지경이었고, 그런 공세를 펼친 헬리오스사 또한 상당한 손실을 입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회사의 차기 회장이었던 재스퍼의 배신 또한 뼈아팠다. 차기 회장으로서 그가 관리하던 수많은 업무들이 완전히 마비되었고, 일선에서 물러났던 명왕이 직접 나서서 그 여파를 수습해야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 전쟁과 그 후폭풍은 안타리우스가 노리던 바였다. 스스로를 추스르는데 전력을 기울이던 연합과 회사는 급격하게 세를 불리는 안타리우스를 효과적으로 저지하는데 실패하고 만 것이다.


 아아, 안타리우스. 전갈좌에 위치한 별의 이름을 차용한 이 놀라운 집단은, 그리스의 골목에서 꼭두각시 인형극을 공연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구마스 노인(Goumas Noen)을 그 기원으로 했다. 노인은 어느 날 거리의 좌판에서 황혼에 물든 도시를 그린 그림을 만났다. 노인은 마치 홀리기라도 한 듯 밥줄인 꼭두각시 연형을 전부 처분하고 그 그림을 구입했고, 그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그림에 홀려버린 듯 액자만을 바라보았다.


 노인이 구입한 이 그림이 그저 평범한 그림이었다면, 그리고 일식의 날 이전이었다면 별 일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림은 평범하지 않았고, 구마스 노인이 이 액자를 구한 것은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직후였다.


 구마스 노인은 어느 날 자신이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건강해진 것을 느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이 그림을 담은 액자는 그에게 기적을 선사했다.


 노인은 액자에게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건 어쩌면 진실일지도 몰랐다. 노인의 기적은 대상을 가리지 않았고, 그에 매료된 수많은 사람들이 노인의 주변에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전갈좌의 안타레스에서 이름을 딴 단체를 표방했다. 안타리우스. 지금에서야 연합과 회사를 위협하는 적대세력이지만, 이때만 해도 그저 흔한 사이비종교 취급을 받던 별 볼일 없는 단체였다.


 그들이 표식으로 삼은 심볼은 천칭. 이는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고 여겨졌다. 본래 천칭좌는 전갈좌에 포함되어 있다가 독립된 별자리다. 천칭좌의 알파성, 베타성은 각각 전갈의 남쪽 집게발, 북쪽 집게발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안타리우스는 기존의 세력과는 결코 공존할 수 없다는 의지를 천칭좌를 통해 상징적으로 주장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들의 심볼인 천칭좌는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아가 들고 다니는 저울을 상징하는 것. 안타리우스는 그들이 새로운 정의가 될 것이라 믿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사정은 제쳐두고, 설립된 지 십여 년이 지나자 안타리우스의 세력은 연합과 회사 못지않을 정도로 커졌다. 액자가 가져다 준 기적의 힘은 그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액자는 그 누구보다도 빨리 '안개'와 '수액'의 힘을 깨닫게 해주었다. 구마스 노인은 그의 정부이자 복제능력자였던 옥사나 야코비치, 그리고 몇몇 심복을 거느리고 [포트 레너드]의 깊숙한 곳, 울창한 삼림의 디미스트 인근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끔찍한 실험이 시작되었다.


 인체 실험. 결코 용서받지 못할 천인공노할 행위를 안타리우스는 태연하게 해치웠다. 액자의 기적에 기대는 특성상 능력자보다 비능력자의 비율이 훨씬 많았던 안타리우스는 비능력자를 능력자 못지않게 강화하는 것에 큰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그 실험은 안타깝게도 상당한 진척을 보여 몇 가지 성과를 내놓았다.


 이런 비인도적인 실험과 더불어 안타리우스는 치밀한 두뇌 싸움을 함께 전개했다. 어떤 경로로 포섭했는지는 지금도 확실하지 않지만, 안타리우스는 재스퍼를 포섭하는데 성공하고 그를 끄나풀로 삼아 2차 능력자전쟁을 유도했다. 재스퍼는 충실하게 안타리우스의 주구 노릇을 해내었지만, 결국 그 음모가 아이거 산 정상에서 만천하에 드러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진상을 눈치 채지 못했다.


 심지어 연합의 수석 참모인 토니 리켓조차, 안타리우스에 대한 희미한 편린만을 감지하는 게 고작이었을 정도였으니 그 은밀함은 실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지. 그나마도 안타리우스의 실체를 밝혀낸 숙명의 카인과 숲의 소리를 듣는 드니스가 없었더다면…… 어쩌면 연합은 정말로 괴멸했을지도 모른다.


 1930년. 안타리우스는 베일에 감춰진 실체를 드러내었다. 그들은 '안개'와 '수액', 그리고 '개조'를 미끼로 수많은 능력, 비능력자를 포섭했다. 그리고 안타리우스의 등에 날개를 달아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러시아의 무력단체 적기사단. 얀센스키를 필두로 한 이 가공할 전투 집단이 안타리우스에 합류한 것이다.


 구마스 노인은 마침내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는 액자의 계시를 그 명분으로 삼아 유럽의 능력자 세계를 향해 전면적인 적대행위를 선포했다. 2차 능력자 전쟁이 겨우 마무리 된 것이 1년도 지나지 않았으니, 연합과 회사는 이 선전포고에 제대로 대응할 수조차 없었다.


 마각을 드러낸 안타리우스는 유럽 전역에 차근차근 그 영향력을 비추기 시작했다. 이대로 방치했다간, 유럽 전역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아비규환으로 뒤덮일지도 모른다. 위기감은 마침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 결과물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명왕, 헨리 밀러 3세가 먼저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앤지 헌트와 토니 리켓에게 능력자 세계의 가장 큰 위협으로 떠오른 안타리우스를 무너뜨리기 위해 힘을 빌려달라고 제안했다.


 연합과 회사의 극적인 동맹. 그리고 두 조직의 최초의 합동 작전이 입안되었다. 그 이름하여 [인형실 끊기].

 

 

Main Stream - 떨어지는 천칭좌 -

 

 

 

 

 

 "하아…… 다 좋은데 마땅한 해결책이 나오질 않는군요."


 "동감하네. 앤지 양. 그들의 전략적 판단은 결코 얕볼 수 없군 그래……."


 [코어 레너드]. 세계수의 정원 중앙에 위치한 행정 중심구역의 한 건물에서 두 남녀가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흑발과 황금빛 눈동자의 아름다운 여성과 일흔 줄에 접어든 장년의 사내가 마주앉아 골머리를 썩이는 것은 일견 우습게 보였지만, 이들의 정체를 안다면 보통 사람들은 숨이 턱 막힐지도 모른다.


 눈의 여왕 앤지 헌트. 명왕 헨리 밀러 3세. 각 조직의 수장인 두 사람은 그들의 골치를 아프게 만드는 안건에 대해 끝없는 토론을 계속했다.


 "좀 더 비밀스럽고 빠르게 계획을 진행시켜야 했어요. 그들이 설마 이토록 신속하게 본거지를 옮길 줄은……."


 "허나 연합과 회사의 현 상황으로서는 그것이 몹시 어려운 일이었네. 그나마도 이렇게 동맹을 체결하지 않았다면, 안타리우스에게 각개격파 당했을지도 모르네. 여러모로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확실히 말해 묘안은 떠오르지 않는군."


 둘은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그 뒤에 서있던 남성들도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연합 수석 참모, 토니 리켓. 회사의 차기 회장이자 스카우터의 역할을 겸하는 브뤼노 올랑. 이 두 사람도 몇 번이나 만나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해 봤지만 딱히 해결책을 찾지 못한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이 틀어박힌 곳이 너무 질이 좋지 않아요. 그리스의 루사노.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죠. 지형적으로 천연의 요새인데다가, 이미 그 내부는 강화인간들로 득실득실하겠죠. 감지능력이 강화된 개조인간들 덕에 은신능력자도 침투할 수 없다니…… 상황이 너무 나빠요. 가장 가능성 있는 트리비아의 침투는 칸도르의 액자에 전부 비춰져버리니 시도조차 할 수 없군요."


 "더구나 그리스 정부 또한 대규모의 전투상황이 야기되면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네. 첩첩 산중이로군. 소수 정예로 돌파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지만 결코 소수 정예로 돌파할 수 없는 구조. 거기다가 미니와 앰피라는 쌍둥이 꼬마들의 능력은 소수 정예에게 아주 치명적이지. 이 정도쯤 되면 외려 감탄스럽네. 허허……."


 "안되겠어요. 결과를 위해 수단을 논할 것이 아니라, 일단 시도해 볼 수 있는 수단부터 검토해나가는게 더 생산적이겠군요."


 "그렇군. 그럼 어디 창의성을 있는 대로 짜내어봄세. 간만에 느끼는 압박감이군……."


 명왕은 쓰게 웃었다. 체스로 치면 거의 체크메이트에 가까운 외통수 상태. 하지만 이 위기를 타파할 수단이 단 하나 남아있다면, 그건 아마도…….


 "연합 파리 조합에서 지급으로 전보가 당도했습니다! 확인해주십쇼!"


 폰이 전장을 가로질러, 마침내 퀸으로 귀환하는 순간이리라.

 

…………………………………………………………………………………………………………………………


 "세상에…… 이게 정말인가요?"


 "그렇게 반신반의할 여유도 없습니다, 총수님. 우선적으로 이 남자를 확보해야죠. 진위여부는 그 이후로 미뤄도 충분합니다."


 전보에 담긴 내용은 능력자인 그들로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파리 시내를 신출귀몰하며 여기저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남자라니? 지금까지 밝혀진 능력자들 중에서도 아직까지 그 실체가 파악되지 않아 여전히 상상 속에서나 존재한다 여겨진 환상의 능력…….


 "공간이동 능력자의 출현이라…… 참으로 공교롭군."


 "그렇습니다. 만약 사실이라면 참으로 회사와 연합의 홍복(洪福)이로군요."


 적극적으로 수색을 주장하는 토니 리켓과 달리, 명왕과 브뤼노는 어쩐지 탐탁찮은 기색이었다. 브뤼노는 비꼬는 기색마저 역력했다. 앤지와 토니는 살짝 빈정이 상했지만 그들을 무작정 탓할 수도 없었다. 그만큼 이 남자의 출현은 타이밍이 기가 막힐 정도였으니까.


 "일단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보겠습니다. 토니. 파리로 가는 가장 빠른 교통편을 수색해 주세요. 아니, 트리비아는 근처에 있나요? 힘들겠지만 그녀와 직접 가는 게 더 빠르겠군요."


 "트리비아와 비행기 편을 동시에 물색해 보겠습니다. 아마 트리비아쪽이 더 위험하지만 더 빠르겠죠."


 "토니, 당신은 대체 트리비아를 어떻게 보고 있는 건가요."


 "……그녀의 명예를 위해 여기선 묵비권을 행사하겠습니다."


 "……아, 네."


 총수와 수석 참모는 시시덕거리면서 방문을 열고 나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명왕은 피식 웃으면서 의자에 몸을 깊게 묻었다.


 "젊음이란 비할 바 없이 좋은 것일세. 그렇지 않나? 올랑?"


 "동감입니다. 더불어 위태롭기까지 하죠. 나이 먹고 젊은이들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벌렁대서 힘들군요."


 "일흔 노인 앞에서 나이를 먹었다고 하는 걸 보면 자네도 꽤나 늙었군."


 "하하, 제가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았군요. 뭐, 앞서 흘러간 물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물길을 여는 것 밖에 없을 겁니다."


 "그렇지. 시대는 젊은 사람들의 것이고 우리는 이미 한 시대를 흘러왔네. 이번 차례는 바로 저 젊은이들이겠지……."


 앤지와 토니가 밀고 나간 문을 눈부시다는 듯 바라보는 헨리 밀러 3세. 그 눈길은 마치 손자 손녀를 바라보는 할아버지 같았다.

 

 …………………………………………………………………………………………………………………………


 앤지는 당일 파리에 당도했다.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지만 굳이 언급할 필요까진 없을 것이다. 각설하고, 그녀는 그 사이에 더욱 풍부하게 수집되고 정교하게 짜 맞춰진 정보를 받아들고 고심에 빠져 있었다.


 "에펠탑, 루브르, 마르세유 궁전, 개선문, 뤽상부르 궁전, 그 외에도 자잘한 볼거리가 있는 곳에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라……."


 앤지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이 남자의 목적이 관광명승지를 탐방하는 거라면, 그녀 또한 단 한군데서 기다리면 될 일이니까.


 "오랜만에 모교로 가게 생겼네. ……별로 가고 싶진 않았지만."


 그녀는 살짝 우울해하면서도 지체 없이 채비를 마쳤다. 다행히 이 남자가 돌아다닌 곳 중에서 그녀가 가려는 곳은 보고서에 기입되어 있지 않았다.


 잠시 뒤, 앤지는 파리 국립 고등음악원(CNSM de Paris)의 정문 앞에 서 있었다. 위대한 악성(樂星)의 산실. 그 남자가 오기엔 충분할 정도로 명망 있는 곳. 그리고 앤지로선 마음이 무거워지는 장소.


 "자크. 거긴 살 만해?"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독백하는 앤지. 1년의 세월은 마음의 상처가 아무는 데 너무 짧았다. 시간은 예로부터 만병통치약이지만, 효과가 너무 늦게 온다는 단점 또한 예로부터 잘 알려져 있었다. 앤지는 어째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는 격언이 떠올라 잠시 시무룩해졌다.


 그녀는 정문이 잘 보이는 벤치를 골라 자리를 잡았다. 희한하게도, 그 자리는 햇빛이 잘 들지 않는데도 굉장히 따스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착각이었을까.


 시간이 흐르고, 사위는 황혼에 잠겨들었다. 태양이 내뿜는 진홍의 광채는 최후를 장식하는 듯 선연했고, 음악원의 정문은 몇 번인지도 모를 황혼의 때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 순간.


 "헉!"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던 빈 공간에 무언가가 휙 하고 나타났다!


 "오호! 여기가 파리 국립 고등음악원이구먼! 음, 그 유명한 고전 음악의 산실! 악성의 요람! 장관이로다!"


 나타나자마자 호들갑을 떠는 사내. 경박하게 들리는 목소리지만 의외로 울림이 듣기 좋다. 앤지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를 불렀다.


 "이봐요! 거기, 당신!"


 주변에는 눈길도 돌리지 않은 채, 앤지가 불렀다는 것도 모르는 듯  국립 고등음악원을 찬미하는 사내. 앤지는 왠지 부아가 치밀어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잡아챘다.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요!"


 자신도 모르게 살짝 이를 갈며 말해버렸다. 앤지는 자신의 추태에 얼굴이 벌개질 지경이었지만 꾹 참고 사내의 어깨를 당겼다. 사내는 그제야 그녀의 존재를 눈치 챈 듯 어깨 너머로 시선을 주었다.


 "허어어억!"


 그는 마치 못 볼 걸 본 듯 경악하며 몸을 뒤로 뺐다. 앤지는 그런 반응에 기분이 더욱 가라앉았다. 매서운 황금빛 시선이 사내의 벽안과 마주치자, 사내는 갑자기 매무새를 가다듬더니…….


 "아름다우신 레이디. 이 미천한 카우보이에게 그 존안을 뵙게 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커다란 모자를 정중하게 벗어 내리며 그녀에게 멘트를 날렸다. 앤지는 어쩐지 맥이 탁 풀리는 걸 느꼈다. 정말로 긴장감 없는 사내였다.


 "초면에 실례가 많았군요. 일단 서로 통성명이나 하죠. 저는 앤지 헌트라고 합니다. 앤지라고 불러주세요.


 "오오, 역시 아름다우신 성명입니다. 부끄럽지만 제 이름 또한 받아주시길. 광야의 아들, 평원의 자유로운 영혼, 그리고 빌어먹을 소떼의 수호자 릭 톰슨이라고 합니다. 레이디."


 "빌어먹을 소떼의 수호자님이라, 아주 좋은 이름이네요. 반가워요."


 "에에…… 저, 저도 반갑습니다. 하, 하하, 하하하……."


 릭 톰슨이라 이름을 밝힌 사내는 한방 먹었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푸른 눈동자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


 "자, 그럼 인사치례는 여기까지. 용무를 들을 수 있을까요, 레이디?"


 유들유들하게 물어오는 자칭 카우보이, 릭 톰슨. 주변에 있는 남자들의 과묵함과 침착함을 매력적으로 느끼는 앤지에겐 익숙해지기 어려운 사내였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죠. 톰슨, 당신은 공간을 이동할 수 있는 능력자인가요?"


 "오, 레이디. 그렇게 딱딱하게 부르지 말아요. 릭, 릭이면 됩니다. 그리고 공간이동이라, 아마도 당신이 생각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앤지는 살짝 숨을 삼켰다. 그녀가 눈으로 본 현상과 릭의 긍정. 막막한 길에 돌파구가 생길 것 같았다. 앤지는 숨을 고르고 릭에게 말했다.


 "좋아요, 릭.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오, 노노노. 레이디. 물론 당신은 아름답고, 당신의 부탁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린 서로를 아직 너무 모르고 있군요."


 "……."


 앤지는 기가 막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정말 적응하기 어려운 사내. 릭은 그런 앤지를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오른손을 그녀에게 내밀어왔다.


 "레이디, 이 미천한 카우보이에게 그대를 에스코트할 영광을 누리게 하여주실는지?"


 이젠 놀랍지도 않다. 앤지는 반쯤은 포기하고, 반쯤은 끌려가는 느낌으로 그에게 오른 손등을 내밀었다. 거의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손등의 키스는 마법을, 마법은 그대에게 작은 행복을."


 릭이 앤지의 손등에 가벼운 키스를 남김과 동시에 두 사람은 꺼지듯이 사라졌다.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꺄, 꺄아……."


 앤지는 몹시 당황하여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갑자기 뒤바뀐 풍경과 몰아치는 바람. 누구라도 지금 상황이라면 놀라지 않을 수 없으리라.


 "조금 전의 장소도 멋있었지만 여기는 더 좋군요. 레이디가 아니었다면 놓치고 넘어갈 뻔했습니다."


 릭은 싱긋 웃으며 앤지의 오른손을 놓았다. 그제야 간신히 진정한 앤지는 대체 이곳이 어디인지 주변을 둘러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서…… 설마 이곳은……."


 "장관입니다. 한 낮의 파리도 멋지지만 황혼에 잠드는 파리는 또 다른 맛이 있군요."


 그토록 앤지에게 치근덕거리던 릭은 마치 그녀에게 관심도 없다는 듯, 주변을 풍광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 눈은 순수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고, 입 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다. 고대의 명화를 감상하듯, 감동스런 글을 읽는 듯, 행복으로 가득 찬 그 얼굴은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함마저 느껴졌다.


 "릭, 당신은 어디서 온 건가요?"


 "드넓은 광야. 푸른 초원이 펼쳐진 신대륙. 젊은 아메리카가 저의 고향입니다."


 "신대륙인가요…… 왠지 당신의 목적을 알 것 같군요."


 "호오?"


 릭은 재미있다는 듯 눈꼬리를 슬며시 추켜올렸다. 앤지는 릭이 나타난 곳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파리의 유명한 명승고적들. 이 남자는 아마도…….


 "그저 단순한 여행이겠지요. 당신에게 그 외의 이유를 찾을 수 없겠군요."


 "에……, 그게 맞긴 한데. 그래도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너무 없어 보이잖습니까, 레이디."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이런 곳으로 오시면 설득력이 모자라요, 릭."


 앤지는 눈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야를 방해하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파리 전역이 붉은 노을에 잠겨가는 환상적인 풍경. 이런 멋진 구경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항상 보는 에펠탑이었지만 이렇게 멋진 장소가 될 줄은 몰랐네요. 이건 감사할 수밖에 없군요. 고마워요, 릭."


 릭은 앤지에게 말없이 미소를 보냈다. 어쩐지 그가 꽤 맘에 들 것 같았다.


 "이제 우리는 너무 모르는 사이가 아니겠죠?"


 "물론입니다. 그러니 편하게 말씀하시길, 레이디."


 앤지는 발밑의 철골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작금의 사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꽤 흘러 주변이 어두컴컴해지고, 마침내 앤지의 말이 끝났다. 그리고 릭의 얼굴은 꽤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유럽도 마냥 좋은 곳은 아니었군요. 솔직히 말해…… 상상 초월입니다."


 "부끄럽지만 사실이에요. 그리고 당신이 나타나기 전까진 마땅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어요. 그리고……."


 "광야의 아들인 이 몸이 마침 유럽에 관광차 들렀다, 이거군요."


 "광야의 아들보단 빌어먹을 소떼의 수호자가 더 맘에 드는걸요?"


 "……그건 좀 잊어주십쇼. 에구구, 이거 만만하게 볼 레이디가 아니었군."


 릭은 카우보이 모자를 고쳐 썼다. 뭐, 예정에 없는 일이지만 사내가 되어서 이런 매력적인 레이디의 부탁을 거절하는 건 매너가 아니지. 릭은 유쾌하게 웃으며 앤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럼 부족하나마 한 손을 보태도록 해 볼까요. 그래도 저만 부탁을 들어주기엔 좀 불공평한 것 같으니 저도 레이디께 한 가지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이 일이 끝나고 나면, 레이디께서 직접 파리를 관광시켜 주십쇼. 아직 파리의 반도 둘러보지 못했는데, 그 책임을 져 주셔야 하겠습니다만?"


 "흐응, 그건 데이트 신청인가요?"


 "뭐,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신다면 저야 영광입니다만. 저는 아직 파리의 지리에 익숙하지 못해서 말이죠?"


 어깨를 으쓱하는 릭을 보고 있자니, 방금까지 심각한 주제로 이야기를 했다는 것도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앤지는 가볍게 웃으며 릭의 부탁을 수락했다.


 "그렇게 하죠. 저와 파리 시내를 누비고 싶다면 일을 꼭 성공시켜야겠군요?"


 "물론입니다. 덤으로 그리스 관광도 하려면 확실하게 처리해야죠. 그 쪽에도 멋진 유적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하핫!"


 릭은 자신의 그리스 관광을 위해서라도 이 일을 제대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밤 하늘의 별처럼 광채를 더했다.


…………………………………………………………………………………………………………………………


 "그렇게 되서, 여기 릭 톰슨이 저희의 일을 도울 겁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광야의 아들, 평원의 자유로운 영혼인 릭 톰슨입니다!"


 여전히 경박한 사내. 익숙해진 앤지는 별 딴죽을 걸지 않았지만 릭 톰슨을 처음 만나는 명왕과 브뤼노, 그리고 토니는 그를 못 미덥다는 듯 쳐다보았다.


 "……어째 환영받지 못하는 느낌입니다. 레이디, 구해주세요!"


 "참 믿음직스럽지 못한 빌어먹을 소떼의 수호자님이에요. 다만 능력은 확실합니다. 그러니 자잘한 부분은 신경 쓰지 않도록 하죠."


 "레이디---!!"


 절규하는 릭을 상큼하게 무시한 앤지는 명왕과 함께 이후로의 작전을 논의했다. 그러고 보니, 릭은 몇 명을 이동시킬 수 있는 걸까? 그 의문을 가장 먼저 깨달은 토니는 릭에게 가볍게 질문했다.


 "이봐요, 릭. 당신은 타인과 함께 공간이동이 가능한 거죠?"


 "물론입니다."


 "그럼 몇 명까지 함께 이동이 가능한 겁니까?"


 "……에, 그건 해 봐야 알겠는데요."


 익숙한 앤지조차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는데 다른 사람은 어떨까. 결국 회의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릭의 실험에 강제로 동원되었다.


 "크윽, 다…… 다섯 명이 한계로군요. 이것도 제법 힘듭니다그려."


 최대 인원은 릭을 제외하고 다섯. 최악의 상황은 아니지만 그래도 결코 낙관적이진 않다. 앤지와 명왕은 어두운 얼굴로 의견을 나누었다.


 "다섯…… 애매하군요."


 "다섯이나 되는 것에 감사해야겠지. 최악의 경우가 아닌 것을 감사하게 여기세."


 토니와 브뤼노 또한 믿을 만한, 그리고 강력한 구성원들을 떠올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소외된 릭은 방구석으로 걸어가 쪼그려 앉았다.


 "미안해. 내 애마야. 미안해. 내 소들아. 너희들만이 내 진정한 친구로구나. 여행 끝나고 돌아가면 꼭 잘해줄게. 맛있는 풀도 챙겨줄게. 지금까지 미안했어……."


 혼자서 땅바닥을 긁적이는 릭을 무시한 채 진행되는 회의. 릭은 더욱 서글퍼졌다.


 "그 유명한 태도, 다이무스 홀든을 보내시겠다고요? 괜찮으시겠어요?"


 "그라면 가장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적절한 행동을 할 수 있을걸세. 다른 멤버들이 어떤 이가 되건 그는 마지막까지 믿을 수 있는 남자지."


 회사가 가진 가장 강력한 카드 중 하나인 다이무스를 기꺼이 내미는 명왕. 앤지는 살짝 주눅이 들었다. 역시 이 사람에 비하면 자신은 멀었다.


 "부끄럽지만 연합 쪽에서는 적당한 인원이 없군요. 거기다 첫 카드가 다이무스 홀든이라니, 너무하세요."


 "그럴 것 없네. 다음으로는 다리오 경을 추천하고 싶군."


 "창룡…… 말입니까? 그보다는 검룡이 더 적합하지 않겠습니까?"


 의문을 표한 사람은 앤지가 아닌 토니였다. 2차 능력자 전쟁과 그 간의 실적을 감안하면 보다 믿음직한 쪽은 아무래도 검룡 쪽이었다.


 "그는 아이거 산에서의 책임을 지고 근신 중일세. 아무리 나라도 알베르토 경을 마음대로 부릴 순 없지. 그리고 용기사들은 적기사들과 몇 번이고 맞서 싸운 전적이 있으니 다리오 경은 큰 힘이 되어줄 걸세."


 "그렇습니까. 저희도 흑기사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적기사들과 싸워 본 적은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던 토니의 뇌리에 루사노의 구조가 스쳐 지나갔다. 분지 지형에 밀집한 석조 건물들. 좁은 골목길만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이곳이라면, 어쩌면…….


 "데미언 도일이 거기서 큰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데미언? 그는 누구인가? 처음 듣는 사람이군."


 "아, 아일랜드의 토목 기술자입니다. 그간에는 크게 활동한 적이 없어서 잘 모르시겠군요."


 토니는 좌중에게 도일의 능력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그 특유의 능력이라면 도시 전체를 마비시키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괜찮겠군. 무엇보다 그 비좁은 도시에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는 것은 큰 메리트가 될 걸세."


 "그렇다면 남은 인원은 두 명이군요. 태도가 구마스 노인을, 데미언이 도시를 파괴하고 창룡이 적기사들을 상대한다면……."


 "옥사나 야코비치와 쌍둥이 꼬마들을 잊어선 안 되네. 그들은 구마스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으니."


 "……그렇군요. 그들을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때 가만히 듣고 있던 브뤼노가 나섰다. 브뤼노는 자못 엄숙한 목소리로 한 사람을 추천했다.


 "아나벨라 장 마리에. 그녀라면 이 계획의 한 축을 담당할 수 있을 겁니다."


 "시바 포…… 그녀 말인가요?"


 "지금까지는 강화인간 덕분에 그녀가 침투할 수 없었지만 내부에서 혼란이 발생하고 강화인간들을 상대할 수 있다면 그녀의 은신능력은 결정적인 도움이 될 겁니다."


 "……! 그렇군요. 그녀라면 혼란을 틈타 적어도 미니와 앰피를, 일이 잘 풀린다면 옥사나와 구마스 노인까지 처리할 수 있을지도……."


 "역시 회사의 차기 회장다운 안목이군. 말을 꺼낸 것은 자네이니 그녀의 섭외는 자네에게 일임하겠네."


 "맡겨 주시길. 그럼 저는 그녀에게 연락을 취해 보겠습니다."


 브뤼노는 방문을 나섰다. 남은 사람들은 나머지 한 자리를 누구에게 맡기느냐로 갑론을박을 벌였지만, 결국 만족스런 결론이 나지 않은 채 그 날의 회의는 끝났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릭은 방구석에서 바닥을 긁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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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임무…… 라."


 오스트리아의 한 은행. 고풍스런 집무실의 창문가에 서 있는 사내가 중얼거렸다.


 날카롭지만, 강렬하게 떨어지는 턱선. 꽉 짜인 신체는 사내의 강건함을 말없이 웅변했다. 보기 드문 백발을 단정하게 올백으로 넘겨 가릴 것 없이 드러난 얼굴. 오른쪽 뺨을 가로지르는 십자의 흉터는 강렬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는 손에 든 문서를 응시하다 조용히 손을 내렸다. 오랜 평화가 그의 칼을 무디게 할 리는 없지만, 그래도 편한 마음은 아니다.


 사내는 창문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제 완연한 봄기운이 가득한 거리. 문득 그가 손바닥을 펼쳤다. 그 위로 한 떨기 꽃잎이 날아와 자리 잡았다.


 "……."


 사내가 그 꽃잎을 바라보며 한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그는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는 평온한 삶을 꿈꾸는 것은 아니었을까.


 헬리오스 사의 태도 다이무스는 임무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는 책상에 앉아 유려한 필치로 편지를 써 내리기 시작했다.

 

 

 

 

 


 "출전? 좋지!"


 숨길 수 없는 호승심을 드러내는 사내. 임무를 전하러 온 기사단의 시종이 당황할 정도로 기세가 넘쳤다.


 "거기다가 상대가 적기사 놈들이라 이거지?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결판을 낼 수 있겠군!"


 회청빛 눈을 반짝이며 희열에 몸을 떠는 건장한 체구의 기사. 헤드기어 타입의 투구 밖으로 빠져나온 머리칼은 인상적인 적갈색이지만, 옆머리 일부분이 하얗게 탈색되어 또 다른 매력을 풍겼다. 고집스런 입매. 치겨올라간 검미는 이 기사의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아, 다리오 님. 그리고 회사에서 이 물품을 함께 보냈습니다. 큰 도움이 될 거라는 전언과 함께요."


 "음?"


 순순히 상자를 받아들고 그 내용물을 확인한 기사. 그의 눈은 숨길 수 없는 환희로 가득 차올랐다.


 "이…… 이건 설마 말로만 듣던 그건가……."


 얼마나 감정의 기복이 심했는지 목소리가 떨리기까지 한다. 그는 간만에 창의력이 샘솟는 것을 외치며 기분 좋게 외쳤다.


 "이거라면 재밌는 걸 만들 수 있겠군. 좋아! 그 임무 확실하게 접수했다고 전해!"


 아틀라티코 드라군 소속 창룡 드렉슬러 또한 [인형실 끊기]작전에 성공적으로 합류했다. 그의 활약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뭐라카노? 임무?"


 한창 작업이 한창인 공사판. 다들 한 덩치 하는 인부들 사이에서 특히 눈에 띄는 거구의 사내가 눈을 부라리며 되물었다.


 "예. 총수님께서 직접 부탁하는 겁니다."


 "그라모…… 무작정 거절하면 곤란한 거 아이가?"


 "아무래도 그렇겠죠? 일단 최대한 빠른 답변을 기다린다고 하는데, 어쩌시겠습니까?"


 사내는 노란색 안전모를 벗어서 고개를 두어 번 털고는 큼직한 시가를 빼물었다. 불을 붙이고 몇 번 연기를 들이마신 사내는 공사현장을 휘 둘러보았다.


 "흐음…… 뭐 오늘 하루 빡세게 쪼이면 대충 마무리되긴 하겠구먼."


 사내는 결정을 내린 듯 했다. 그는 큰 목소리로 인부들에게 소리쳤다.


 "문디 자슥들아! 내사마 쪼까 볼 일이 생기뿟다! 그랑께 쪼매 빨리 해치워뿌자! 괜찮겄냐들!"


 "우리 작업반장님이 까자면 까야제! 아그들아! 다들 귓구녕에 콱 박혔제? 쪼사뿌자!"


 "예!"


 급진전되는 작업. 연합의 캐논 도일이 작전에 합류하는데 충분한 속도였다.

 

 


 


 "……자네 괜찮나?"


 "……정직하게 대답해도 괜찮겠습니까?"


 "……아닐세."


 "……감사합니다."


 뭐,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아나벨라 장 마리에. 섀도스토커라는 이명을 가진 암살자 시바 포 또한 긍정의 의사를 밝혀왔다. 고생한 브뤼노 올랑에게 애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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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어 레너드]에 위치한 한 건물. 2층의 구석진 곳에 있는 회의실은 지금 어색한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이무스 홀든. 다리오 드렉슬러. 데미언 도일. 아나벨라 장 마리에. 그리고 릭 톰슨. 다섯 명은 묵묵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 릭은 예외였다.


 '크으…… 입이 근질근질하구먼. 하나같이 유명한 능력자들이란 말이지, 이 사람들이?'


 그는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하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하지만 아무리 유쾌한 릭이라도 이런 분위기에서 호들갑을 떨기엔 조금 무리가 있었다.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의 인내력이 한계에 도달하려는 순간.


 "반가워요. 저는 지하 연합의 수장 앤지 헌트입니다."


 "반갑네. 헨리 밀러 3세일세."


 양 조직의 수장이 들어오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편하게 먹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불이 날 정도로 번쩍이고 있었다.


 "여기 모인 이유는 다들 알고 있겠지. 따라서 시간을 아끼기 위해 곧 바로 전술회의를 시작하겠네."


 좌중은 침묵으로 긍정을 답변했다. 명왕은 만족스레 웃으며 브뤼노에게 브리핑을 지시했다. 토니와 브뤼노가 며칠 간 머리를 싸매고 짜낸 작전의 개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다섯 명이 한 조직의 본거지를 급습하는 작전입니다. 난이도는 최상에서도 최상. 무엇보다 구성원간의 협조가 불가능한 각개 임무라는 것이 치명적입니다. 따라서 단 한사람이라도 역할을 제대로 해 내지 못한다면 작전 실패는 물론이거니와 생명 또한 위험할 수 있습니다."


 묵묵하게 듣는 좌중. 브뤼노는 약간 파리한 안색으로 계속 설명을 이어나갔다.


 "가장 위험한 무력집단인 적기사단은 다리오 경께서 담당하게 될 겁니다. 도시에 일어난 괴변을 눈치 채면 가장 빨리 움직이는 자들은 아마 적기사일 테니, 다리오 경께서 가장 위험한 포지션이 되겠군요. 괜찮겠습니까?"


 "아아, 맡겨둬. 이 몸이 새로 만든 창의 위력을 시험하기엔 딱 좋은 무대로군."


 "그 다음으로는 아나벨라 양이군요. 아나벨라 양은 미니와 앰피를 맡아주십시오. 아직 5살밖에 안된 꼬마들이니 제압하는 데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루사노에 진입한 직후에 곧바로 단독행동을 시작하시면 됩니다. 안타리우스의 수뇌부에서 괴변을 눈치 채기 전에 두 쌍둥이를 처리하는 건, 아나벨라 양에겐 쉬운 일이겠지요."


 "어머? 이번에는 내가 조연인 건가? 살짝 기분 나쁘네……."


 브뤼노의 안색이 살짝 더 파래졌다. 그는 짐짓 헛기침을 하고는 부드러운 말로 그녀를 설득했다.


 "쌍둥이의 제거 후에 손이 남으시면 도움을 더 주셔도 됩니다. 가능하다면 옥사나 야코비치 그녀를, 만약 일이 잘 풀린다면 구마스 노인의 등 뒤를 노릴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주인공은 아나벨라 양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건 마음에 드는군. 좋아, 잘 알았어."


 간신히 아나벨라를 설득시킨 브뤼노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데미언 씨는 그 특유의 파괴능력으로 도시를 완전히 부숴버리십시오. 혼란을 가중시킴과 동시에 구성원들의 행동이 더 편해질 겁니다. 되도록 철저하게, 그리고 광범위하게 파괴해버릴수록 좋습니다.


 "내 전문분야 아이가. 맡겨두래이."


 간단한 임무에, 간결한 대답이었다. 브뤼노는 이 솔직한 사내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다이무스의 역할을 설명했다.


 "다이무스 군은 구마스 노인을 맡아주게. 자네라면 믿을 수 있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


 "충분합니다."


 브리핑을 마친 브뤼노는 잠시 뜸을 들이고는, 침중한 음색으로 부족한 부분을 말했다.


 "여기까진 괜찮지만 아무래도 강화인간들에 대한 대처가 모자랍니다. 아직 한명을 더 추가할 수 있지만, 혼자서 그 무서운 강화인간들을 상대할 만한 사람은……."


 그때 도일이 손을 살짝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하자, 그는 멋쩍은 듯 입맛을 다시고는 발언을 시작했다.


 "그 강화인간이란 놈들, 뭐 이상한 능력같은거 쓰는 놈들은 아니제?"


 "예. 기본적으로는 신체능력이 놀라울 정도로 강화되어 있는 자들이지요. 특정 부위를 개조 받은 이들은 가끔 다른 능력을 쓴다고 알려져 있지만, 대다수의 강화인간들은 그저 좀 많이 강력한 일반인에 가깝습니다."


 "그러면 체력 빵빵하고, 맷집 든든하고, 근성 두둑한 사람이 적임자 아이가? 어차피 시간만 끌면 되는 일일 낀데?"


 "……딴은 그렇군요."


 "그럼 한 사람 추천하고 싶데이. 내 아는 사람 중 하나가 딱 그런 사람이라 안 카나."


 "호오, 그래요? 그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겠습니까?"


 "아마 좋다고 달려들끼라. 내가 한번 설득해 보겠데이. 그럼 대충 인원은 다 골라진 거 맞제?"


 "예. 이제 구성원들이 전부 결정된 것 같군요."


 브뤼노는 마지막으로 릭을 바라보았다. 릭은 어깨를 으쓱함으로서 화답했다. 브뤼노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의 역할을 설명했다.


 "릭 톰슨. 당신이 이 계획의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이들을 전장에 투입하고, 안전하게 데리고 귀환해 주십시오. 그리고 당신 자신도 무사해야 합니다."


 "맡겨주십쇼. 카우보이는 언제나 삶을 사랑하죠. 광야의 아들이 겨우 이런 곳에서 죽을 팔자는 아닐 겁니다. 하핫!"


 "좋습니다. 이제 브리핑을 종료하겠습니다. 질문 있습니까?"


 최고의 정예들답게 사사로운 질문은 없었다. 이제 앤지와 명왕의 차례였다.


 "우선 다들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군."


 운을 띄운 명왕은 그들을 둘러보았다. 젊은 능력자들. 앞으로 이들이 능력자 2세대를 이끄는 주역이 될 것이다. 그 시작은 바로 이들의 손이다.


 "회사와 연합의 첫 공동 작전일세. 역사적이고도, 위태로운 작전이지. 상대는 결코 얕볼 수 없는 강적일세. 하지만 우리도 결코 만만하진 않네. 본인은 여러분들을 한 점 흐림 없이 신뢰하고 있다네. 그러니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겠네. 마지막으로, 부디 다치지 말게나."


 그 뒤를 이어 앤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황금빛 눈동자에 모두를 눈에 담으며 당당하게 선언했다.


 "자, 이제부터 시작하죠. [인형실 끊기]작전, 이 시간부로 실행을 결의합니다!"


…………………………………………………………………………………………………………………………


 "빅토르 위고요. 잘 부탁드리오."


 도일이 끌어들인 남자가 일행에게 간단히 인사했다. 그들이 위치한 곳은 그리스 루사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 이 남자는 작전 결행 당일 합류하기로 했고 무사히 일행과 조우했다.


 나이 지긋해 보이는 중년이지만, 각진 얼굴과 무거운 눈매, 단단한 콧등은 그를 가볍게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깔끔하게 빗어 올린 흑발과 더블 유 모양으로 멋지게 다듬은 수염은 이 사내의 젠틀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복장 또한 흠 잡을 곳 없는 정장. 체구는 장대하지만, 균형 잡힌 체형으로 둔해 보이지는 않았다. 전체적으로 아주 매력적인 남성이었다.


 "간만이다, 이 자슥아. 잘 살고 있었나?"


 "네놈은 여전하군. 너보다는 훨씬 잘 살고 있다. 하핫."


 도일과는 꽤나 막역한 사이인 듯 거침없이 험한 말을 주고받는다. 그런 분위기도 잠시, 일행은 루사노를 내려다보며 계획을 가늠해보았다.


 "왐마, 진짜 되는대로 지어올린 도시구만."


 도일이 자못 한심하다는 듯 탄식했다. 물론 역사가 오래된 도시이니만큼 역대의 건축가들을 모욕할 의도는 없겠지만, 그래도 현대의 토목 기술자로서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물론 일행들은 도일과는 다른 의미로 공감했다.


 "실물로 보니까 더 난감한데요. 제대로 공간이동을 할 장소조차 마땅치가 않은데……."


 "좁군."


 "젠장, 이런 꽉 막힌 시가지면 내 비장의 수를 써먹을 수가 없는데……."


 "좀 넓은 뮤지컬 무대 같아서 마음에 드는 걸? 호호홋."


 "……."


 각양각색의 반응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지금 와서 멈출 수는 없는 노릇. 릭은 망원경을 빼들고는 도시 전역을 면밀하게 살폈다. 그리고 간신히 여섯 명이 몸을 밀어 넣을 만한 공간을 찾아내었다.


 "휴, 자칫하면 옥상 위로 공간이동해서 아주 그냥 '우리들 침투합니다! 와서 막아주세요!'라고 광고할 뻔했는데, 다행히 그럴 일은 없겠군요."


 릭의 너스레에 일행들의 긴장이 한결 풀린 듯,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그들과 함께 와 있는 앤지와 토니는 가슴을 살짝 쓸어내렸다.

 

 

 

 

 


 두 사람은 만류하는 손길을 뿌리치고 이곳까지 따라왔다. 젊은 패기일수도, 무모한 용기일수도 있지만 그 의지는 꺾을 수 없이 확고했다. 실행요원들이 위험을 무릅쓰는 데 지휘부가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고집. 명왕은 앤지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고집불통인 그녀에게 결국 져 줄 수밖에 없었다.


 "하나만 약속해 주게, 눈의 여왕. 어떤 상황이 일어나도 루사노로 난입해 들어가지 말게. 자네마저 잃는다면…… 나는 도저히 견디지 못할 걸세. 그러니 약속해 주게."


 그의 걱정은 당연했다. 벗의 외동딸인 앤지. 슬하에 자식을 두지 않은 헨리 밀러 3세로서는 그녀가 마치 손녀딸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앤지는 명왕이 사정조로까지 부탁하자 결국 명왕에게 결코 대기 장소를 벗어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명왕은 그제야 안심한 듯 미소 지으며 물러났다.


 지금 명왕은 인근의 도시에서 브뤼노와 대기하고 있었다. 만약 작전이 실패한다면, 명왕은 노구에 가해지는 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루사노에 제우스의 번개창을 꽂아버릴 셈이었다. 앤지는 그런 일 따위 결코 일어나게 하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주위를 둘러보자, 요원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몸을 풀고 있었다. 태도는 한 번씩 보이지 않는 속도로 발검을 하는데, 빛이라고는 없는 컴컴한 와중에도 그 칼날은 어둠마저 베어내듯 선명한 궤적을 그렸다. 창룡은 거대한 창을 여기저기 만지고 두들기며 알아듣지 못할 단어를 중얼거렸다. 시바 포는 작은 콤팩트로 화장을 점검했고, 도일은 토니와 무언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합류한 빅토르 위고는 그저 묵묵하게 루사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깊게 가라앉은 그 눈동자에서는 아무런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앤지는 회중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결행의 시간이 임박했다. 그녀는 조용히 일행을 호출했다.


 "곧 작전을 시작합니다. 다들 준비는 완벽하겠지요."


 누군가는 미소 지으며, 누군가는 그저 침묵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그리고 앤지는 릭에게 미리 준비한 것을 건네었다.


 "당신이 쓰는 총에 맞는 조명 신호탄이예요. 이걸 쏘는 건 당신에게 전적으로 일임하겠어요. 이 탄을 쏴 올리면 모두가 그 아래로 집결하는 겁니다."


 "호오, 이런 건 생각하지 못했는데. 과연 레이디, 허술한 구석이 없군요."


 릭은 씨익 웃으면서 탄환을 받아들었다. 이 탄이 검푸른 창공을 가로지르는 때는 과연 작전의 성공을 알리는 봉화일지, 실패를 알리는 효시일지.


 "시간이 되었군요."


 회중시계의 초침과 분침이 목적지에 닿았다. 그와 동시에 앤지가 단호하게 작전의 개시를 선고했다.


 "[인형실 끊기], 시작합니다!"


 그와 동시에 여섯 명의 인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침내 화살이 활을 떠난 것이다.

 

…………………………………………………………………………………………………………………………


 일행이 잠시 눈을 감았다 뜨자 주변의 풍경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사방을 숨 막히게 메운 석조건물들.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지경이다. 그런 감상도 잠시, 일행은 작전 실행을 위해 하나 둘 갈라서기 시작했다.


 "그럼 난 먼저 실례하지. 조연들은 각자의 배역에 충실하길 바라. 그럼 멋진 연기를 펼쳐보자구."


 시바 포는 어느 새 모습을 감추었다. 과연 악명 높은 은신능력자. 그녀가 마음먹고 몸을 숨기자 그 누구도 그녀의 자취조차 느낄 수 없었다. 나머지 인원들은 약간의 오싹함을 느꼈다. 다음으로 움직인 것은 드렉슬러였다. 그는 호승심이 넘쳐흐르는 면면으로 선언했다.


 "이 몸의 활약상, 앞으로 길이길이 전해지겠지. 후후. 다들 괜히 거치적거리지나 말라고!"


 갑옷을 절그럭거리면서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드렉슬러를 보니 믿음직한지 무모한지를 모르겠다. 릭은 콧방귀를 한번 뀌고는 다이무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난 당신과 함께 다니겠소. 아마 그 쪽의 역할이 가장 핵심이었지? 그럼 결착은 당신이 있는 곳에서 지어지겠지. 지체 없이 집결신호를 보내려면 역시 당신의 옆이 낫겠어."


 릭의 말은 타당했다. 생각을 정리한 다이무스는 짧게 대답했다.


 "마음대로. 방해는 되지 말도록."


 두 사람이 함께 나섰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구마스 노인이 있을 거라 예상되는 중심가. 도일과 빅토르 위고는 마지막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움직이려고 했다.


 "그럼 나는 볼 일을 보러 가야겠군."


 "몸 조심하그래이. 마 몸 배리면 니만 손핸기라."


 "그럴 일은 없어. 난 안타리우스에 볼 일이 있어서 자네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니."


 차갑게 가라앉는 공기. 도일은 기복 없는 말투로 되물었다.


 "…… 니 방금 뭐라 씨부렸노?"


 "이런, 잘 못 들었나? 다시 한번 말해주지. 나는 구마스 노인에게 찾아가 봐야겠네."


 빅토르 또한 담담하고 확실하게 선언했다. 도일은 그런 그를 무섭게 쏘아보며 다그쳤다.


 "미친나? 니 돌았나? 갑자기 뭔 개소리고? 니가 금마들한테 뭔 볼 일이 있노!"


 "자네는 내 절친한 벗이지만, 그래도 모든 것을 알고 있지는 않지. 물론 난 인면수심은 아니야. 적어도 자네들의 일을 방해하진 않겠네. 하지만 도움까진 바라지 말아."


 도일은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그의 오른팔에 단단히 물린 '캐논 펀치'가 울부짖듯 마찰음을 토해냈다. 빅토르는 그런 도일에게 못 박듯 선언했다.


 "싸우려고? 마다하지 않아. 하지만 자네는 나와 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 텐데?"


 빅토르의 말이 맞았다. 가장 요란한 임무를 맡은 이상 도일의 행동이 작전의 진정한 스타트 지점이 될 것이다. 이런 곳에서 빅토르와 승강이를 벌여봤자 손해일 뿐이다. 도일이 이를 부드득 갈며 씹어뱉듯 소리쳤다.


 "……꺼지라. 니같은 아새끼를 친구라고 알고 산 내가 등신이지. 약속한대로 사람들 건들지 말래이. 그랬다가는 뼈마디를 아주 녹신녹신 주물러삘끼다."


 "약속하지. 나도 자네와 굳이 드잡이질을 벌이고 싶진 않으니. 그럼 무운을 빌지. 아, 릭에게는 여기까지 데려다 줘서 고마웠다고 전해 줘."


 빅토르는 어디까지나 우아한 걸음걸이로 사라졌다. 이제는 그의 약속이 지켜지길 바랄 뿐. 작전은 처음부터 불안하게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아, 야마 돌아삐긋네. 점마가 와 저 지랄이고. 일단 일부터 끝내고 난주 족쳐봐야제……."


 도일은 착잡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강화인간들을 맡아야 할 빅토르의 배신. 이로서 다른 멤버들에게 돌아가는 부담은 더 커졌다. 그나마 작전이 한창 진행되는 와중에 뒤통수를 치는 것이 아니라서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상황은 결코 낙관적이진 못했다.


 "일단 다 뽀사뿔고 생각하자. 속에 천불이 날 때는 다 박살내는 게 최곤기라."


 그는 목과 어깨를 이리저리 돌리며 철거준비를 마쳤다. 장비는 그의 오른손에 채워진 '캐논 펀치'면 충분했다.


 쿠쾅!


 폭탄이 터지는 듯 한 굉음. 그 원인이 한 사람의 주먹질이라는 걸 누가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엇샤! 간만에 찌뿌둥 한 게 풀리는 거이 쥑이는구먼! 에라! 다 뭉개뿌자!"


 피륙으로 이루어진 주먹이 석조 건물을 내려친다. 돌가루가 튀고 균열이 벽을 내달린다. 건물 하나가 주저앉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다음 작업 시작!"


 도일은 기계처럼 다음 건물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도시 전체로 퍼져가는 소란. 이 순간이 되어서야 안타리우스는 침입자의 존재를 눈치 챘다. 그리고 대응에 나섰다.

 

 

 

 

 

 

 

 길거리를 뛰어가는 드렉슬러의 전신에서 갑옷의 마찰음이 터져 나왔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는 것보다 더욱 효과적인 도발. 얼마 지나지 않아 질주하던 드렉슬러를 가로막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오, 드디어 나오셨군. 적기사 나으리들."


 적기사란 명칭대로, 드렉슬러의 앞에 선 기사들이 걸친 갑주는 붉은색이었다. 그러나 흔히 아는 그런 붉은색이 아닌, 한없이 불길한 핏빛이었다.


 "이 장소에서, 이 시간에 창룡을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네. 대체 무슨 수를 쓴 건가?"


 "얀센스키로군. 뭐, 별건 아니야. 그리고 중요한 것도 아니지. 뭐야, 무뎌진 거냐? 네놈들?"


 드렉슬러의 회청빛 눈이 사납게 번들거렸다. 마치 맹수의 살기어린 눈빛을 마주하는 듯, 적기사들이 조금씩 움찔거렸다. 그러나 얀센스키라 불린 기사는 코웃음을 치며 그의 살기를 흘려 넘겼다.


 "훗! 그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자네와 우리가 마주쳤으면, 그저 싸워야 할 뿐!"


 적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들었다. 그 검신 또한 핏빛으로 번들거린다. 그러나 드렉슬러는 주눅 들지 않고 창을 한번 크게 내리쳤다.


 용창 17식. 용기사 특유의 기수식이 끝나고, 드렉슬러는 본격적으로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그런 그에게 달려드는 적기사. 드렉슬러는 거칠게 웃으며 창을 꼬나 쥐고 내질렀다. 그것을 시작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기사들의 혈투가 시작되었다.


 "22식, 나선창!"

 

 

 

 

 


 "예상 외다."


 "그렇구랴. 어허……."


 다이무스는 짧게 말했고, 릭은 탄식했다. 그들은 구마스 노인이 있다고 예상되는 곳으로 달려가던 와중 반갑지 않은 환대를 맞이했다.


 기계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장비. 전신을 타이즈로 둘러쓰고 차갑게 죽어버린 눈으로 둘을 쳐다보는 사람들. 소름 끼치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동시에 한 단어가 뱉어졌다.


 """""입력되지 않은 오브젝트 발견."""""


 "이봐, 쇳덩이 같은 양반. 저 치들이 아마 그 강화인간인가 하는 족속들 아닌가?"


 "맞다."


 "그럼 빅토르 위고인가 하는 양반이 맡아야 하는 것 아냐? 왜 우리한테 이러고 있는 거지?"


 "……알 수 없다. 그저 막아선다면 베어버릴 뿐."


 냉혹하게 일축한 다이무스가 검병에 손을 올렸다. 그와 동시에 강화인간들 또한 동시에 말했다.


 """""제거 대상으로 판단. 해당 오브젝트를 방해 오브젝트로 설정. 방해 오브젝트 대응 시퀀스 시작."""""


 "저 치들 뭔가 섬찟한 소리를 하시는데, 음……."


 """""방해 오브젝트의 구축 임무를 시작."""""


 "우와와와! 이게 뭐야아!"


 릭의 호들갑스런 절규를 완벽히 무시한 개조인간들이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다이무스의 검 또한 빛을 발했다. 유서 깊은 홀든 가의 쾌검술이 찬란하게 뻗어나갔다.

 


 

 


 "우후. 다들 열심히 하는 중인가보네."


 시바 포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굉음을 들으며 교태롭게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의 눈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두 인영. 이제 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계집아이들이다.


 미니와 앰피. 평화롭게 잠을 자던 두 아이는 자신을 입을 거칠게 틀어막는 물체에 기겁하여 깨어났다. 그러나 아이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능숙한 손길로 재갈을 물리고, 팔을 뒤로 꺾어 제압하고, 팔 다리를 완벽하게 포박했다. 여러 능력자들을 파멸로 이끈 무서운 쌍둥이가 이토록 무력하게 제압될 줄은 아무도 몰랐으리라. 역시 섀도스토커. 그녀의 일처리는 언제나 흠 잡을 곳이 없었다.


 "죽이는 건 너무 간단한데. 흐음. 너희들을 어떡하면 좋겠니?"


 어린 아이들이지만, 그녀의 말꼬리에 묻어나는 피 냄새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파랗게 질린 쌍둥이 자매는 읍읍거리며 몸을 뒤틀었다. 아이들의 사타구니가 축축하게 젖어갔다. 뒤늦게 쌍둥이의 실례를 알아챈 시바 포는 기겁하며 아이들을 달래었다.


 "어머나, 이 언니가 그렇게 무서웠니? 아휴, 무서워 할 필요 없단다. 누가 잡아먹기라도 한다니?"


 방금까지만 해도 죽이느니 뭐니 했던 여자가 하는 말 치곤 신뢰가 가지 않는다. 미니와 앰피는 거의 실신지경이 되어 경련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애 잡지. 시바 포는 쓴웃음을 짓고는 아이들의 목덜미를 매만졌다. 이윽고 두 아이는 그대로 침묵했다.


 "자, 그럼 주연으로서 애드리브를 좀 더 해볼까? 후후, 브뤼노 씨. 당신은 나를 너무 믿지 않는 것이 좋았을 텐데……."


 묘한 여운을 남기는 말. 시바 포는 두 아이를 옆구리에 낀 채 모습을 감추었다. 그녀는 대체 무슨 일을 획책하는 것일까? 진실은 그녀와 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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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예! 역시 난 천재야! 와하하핫!"


 자화자찬하며 창을 내지르는 드렉슬러. 그런 그의 앞으로 낭패한 기색의 적기사들이 몸을 사리고 있다. 그들의 갑옷 곳곳에는 묵직한 창에 찔린 자국이 선명했다. 얀센스키는 이를 부드득 갈며 드렉슬러에게 외쳤다.


 "창룡! 대체 그건 뭔가!"


 "이번에 새로 만든 물건이지! 죽이지 않나?"


 얀센스키의 눈앞으로 창이 날아든다. 익숙한 투창 5식. 그것을 힘겹게 쳐 낸다. 그것으로 드렉슬러는 빈손이 되어야 하지만, 그 뒤로 또 다시 창이 날아든다.


 "수액 광물과 안개 정제술, 진짜 대단하더군! 나도 내가 이런 걸 만들 수 있을 줄은 몰랐어!"


 드렉슬러는 신이 나서 창을 투척했다. 그의 손이 투창 자세를 마치고 돌아가면 그 건틀릿 안에 또 다시 새로운 창이 생겨난다. 적기사들로선 어이가 상실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참으로 빌어먹게도 지금 일어나는 일은 전부 현실이었다.


 "무한정 창을 만들어내는 건틀릿! 이걸로 나만의 투창식(投槍式)이 완성된 거다! 첫 제물이 된 걸 영광스럽게 알라고!"


 쉴 새 없이 퍼부어지는 투창. 드렉슬러는 일기당천을 온 몸으로 재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적대적인 오브젝트를 감지."""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주변을 울린다. 그리고 사방에서 나타나는 강화인간들. 드렉슬러의 투창이 잠시 멈추었다. 적기사들은 그 틈을 타 진열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얀센스키는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적기시단장 얀센스키가 명령을 내린다! 저 자를 제압하라!"


 """명령 접수. 명령권자 얀센스키. 인증 완료. 명령내용, 적대 오브젝트 제압. 해당 시퀀스를 이행."""


 강화인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좁은 길목 덕에 뭉쳐진 진형. 드렉슬러는 먹잇감을 노리는 매의 눈빛으로 놈들을 바라보면서 창의 폼멜을 조작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의 투창이 작렬했다.


 "투창 13식, 분열창!"


 기세 좋게 날아간 창이 선두의 강화인간을 직격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적중된 창은 여러 갈래로 쪼개지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엄청난 기세로 튕겨나가는 창의 파편은 착탄점 주변의 강화인간들을 모조리 날려버렸다. 적기사들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악몽 같은 광경이었다.


 "동체 손손상 확인인인인. 적대 오브-#$%!&#%$^^$#*!?"


 완전히 정지하지 않은 강화인간 하나가 의미 모를 말을 지껄이자, 드렉슬러는 마지막 심판을 내렸다. 강렬하게 찍어 내린 창은 강화인간을 곧바로 침묵시켰다.


 "뭐야, 그 잘난 강화인간이라는 게 겨우 이정도야? 아니지, 역시 내 창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거겠지. 으하핫!"


 끝없이 광오한 자의식. 바라보던 적기사들도 눈꼴 시다는 듯 그를 째려보았다.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 드렉슬러는 오히려 시선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으쓱함은 오래 가지 못했다.


 """적대적인 오브젝트를 감지."""


 """비상 상황 발생. 신호 발신지로 이동 완료. 입력되지 않은 오브젝트 확인."""


 골목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강화인간들. 대체 어디 구석에 처박혀있던지도 모를 정도로 엄청난 수였다. 드렉슬러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우랴우랴우랴!"


 처참한 파괴의 현장. 도일이 휩쓸고 지나간 곳은 돌무더기만이 남아 있었다. 상공에서 본다면, 그의 파괴흔적이 마치 흉터처럼 루사노를 가로지른 모습을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일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눈앞의 건물들을 내려앉히는데 집중했다.


 "오, 우리 참모님이 말한게 이런 긴갑네. 설렁설렁 챙겨둬야제."


 """이상 행동 감지. 해당 오브젝트 발견. 구축 모드 이행."""


 "뭐꼬? 어메? 뭐 저런 흉측한 놈들이 다 있노?"


 도일은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와 그 주인공을 보고는 살짝 기겁했다. 무표정한 얼굴. 무감정한 눈. 기복 없는 말소리는 담대한 그라도 가슴 한 구석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강화인간들은 도일의 사정은 무시하고 곧 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헛, 어헛, 엄머? 요 배라물 놈들 보소?"


 이리저리 몸을 피하는 도일. 다행히 그가 움직일 공간은 충분했기에 공격을 피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피할 수 없는 노릇. 도일은 주먹을 꾹 틀어쥐고 눈앞에 선 강화인간의 아구창을 날려버렸다.


 '캐논 펀치'에 직격당한 강화인간은 저만치 날아가더니 몇 번 움찔거리다가 축 늘어졌다. 뭐, 이 정도면 이놈들을 제압하는데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라고 생각했으나.


 "아이고? 아주 개떼처럼 몰려오누만."


 하나 둘 모여드는 강화인간. 어느새 그가 만든 폐허 위에 수많은 인영이 들어찼다. 도일의 등으로 식은 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주먹질만 갖고는 좀 빡시것네. 아이고, 이거 쓰면 난주 피곤해 뒤질거같은디……. 별 수 없나. 에이, 빅토르 그 똥물에 튀겨죽일 놈. 그놈 땜시 이기 뭔 꼴이고."


 그렇게 중얼거린 도일의 주변으로 일순간 파문이 일렁거렸다. 그의 주변이 일그러진 듯 왜곡되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도일이 강화인간의 물결을 향해 뛰어들었다.


 "파. 괴. 해뿐다 마!"


 닥치는 대로 주먹을 휘두르는 도일. 그 주먹에 얻어걸린 강화인간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침묵했다. 그러나 수가 수인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 강화인간들의 손과 발이 도일에게 닿기 시작했다. 묵직한 타격음이 그의 몸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지만 그는 그저 사납게 웃어젖힐 뿐이었다.


 "마, 쫌 따끔하네! 그라몬 뭐하노! 느그 종자들은 내를 절대 못 자빠뜨린데이!"


 그 어떤 주먹도, 그 어떤 발길질도 도일의 자세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그야말로 천장단애같은 굳건함을 자랑하는 도일. 그것이 바로 도일만의 능력, 진동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력이었다.


 그의 몸 전체에서 퍼져나가는 진동은 외부로부터 오는 타격을 효과적으로 상쇄했다. 물론 충격을 완전히 해소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피해는 점점 누적되어가지만, 결코 그의 행동을 저지하진 못한다. 그야말로 종횡무진 주변을 휩쓸어가는 도일.


 "돌아돌아돌아돌아!"


 양 팔을 쭉 펼치고 팽이처럼 빙글빙글 도는 도일. 강렬한 원심력으로 회전하는 양 팔뚝에 부딪힌 강화인간들이 속수무책으로 날아다녔다. 그야말로 인간병기와 같은 형상. 토니 리켓의 선택은 과연 탁월했던 것이다.


 그렇게 주변을 초토화시키던 도일의 눈앞에 거대한 건물이 들어왔다. 싸우다 보니 공터의 가장자리까지 도달한 것이다. 도일의 눈이 빛난다. 기왕지사, 눈앞의 강화인간들과 건물 몇 채쯤 한방에 날려버려야겠다!


 "초오~"


 '캐논 펀치'가 격렬하게 진동한다. 웅웅 떨리는 강철의 야수는 폭발적인 공명음을 사방으로 내뿜었다. 이것이 바로 도일의 특기. 진동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눈앞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철거하는 스트레이트 펀치!


 "스트레이뚜우!"


 그의 주먹이 내질러지는 방향으로 엄청난 파동이 질주했다. 주변으로 퍼진 충격파는 강화인간들을 전부 날려버리고, 주먹에 직격당한 건물은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버렸다. 그 뒤로도 전달된 진동은 차례차례 건물에 균열을 만들고, 마침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스트레이트 펀치 한방에 수채의 건물이 그대로 박살나 버린 것이다.


 "아따, 얼얼하네."


 뜨겁게 달아오른 '캐논 펀치'를 후후 불어대는 도일. 후대의 물리학자들이 이 광경을 봤다면 놀라 자빠졌을 것이다. 그의 주먹에 가루가 되어버린 석조 건물들은 [공진 현상]에 의해 파괴된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모든 물체에 존재하는 [고유 진동수]. 이 진동수에 맞는 진동을 맞부딪히면 엄청난 진동이 발생하고, 물체는 마침내 파괴되어버린다. 진동을 다루는 능력자이자 숙련된 토목 기술자인 도일은 본능적으로 이 [공진 파괴]를 체득하고 있는 것이다.


 자욱한 먼지가 가라앉자 그 너머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아까 전에 본 갑옷이었다.


 "어? 창룡인가 하는 양반 아니가? 여서 뭐하노?"

 

…………………………………………………………………………………………………………………………

 

 위태로운 지경에서 힘겹게 창을 놀리는 드렉슬러. 끝없이 달라붙은 강화인간들 앞에서 무한히 생성되는 창은 무용지물이었다. 일신의 무력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지만 끝없이 몰려드는 강화인간들에게 점점 무너져간다.


 "제기랄, 접근전을 상정한 창도 만들었어야 했는데, 좀 더 잘 만들 것을!"


 힘이 점점 빠진다. 설령 이 강화인간들을 전부 제압하더라도 적기사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의 패배는 이미 정해진 것 같았다. 마침내 드렉슬러가 강렬한 일격을 먹고 뒤로 쓰러졌다. 그 위로 덮쳐들려 준비하는 강화인간들. 그 순간…….


 콰르르르르르-


 그의 눈앞으로 석조 건물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를 압박하던 강화인간들이 산사태와 같은 붕괴에 일순간 매몰되었다. 그리고 돌덩이들은 드렉슬러도 차별하지 않고 골고루 날아들었다. 그는 기겁하며 배에 힘을 주고 상체를 튕겨올리며 돌덩이를 막아갔다.


 "으다다다, 16식 기상창!"


 간신히 돌덩이를 쳐 내고서, 아직 얼떨떨한 드렉슬러의 귀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창룡인가 하는 양반 아니가? 여서 뭐하노?"


 "당신이었나! 죽을 뻔했잖아! 아니, 도와준 건 고맙지만! 근데 도와주려고 한 거 맞는 건가?!"


 살짝 패닉에 빠져 허둥대는 드렉슬러. 어쩐지 귀여운 느낌마저 든다. 겨우 평정을 되찾은 드렉슬러는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가졌고, 눈이 크게 떠졌다.


 "어? 이게 뭐야? 여기가 내가 있던 그 도시 맞나?"


 황량한 폐허. 갑갑할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던 석림(石林)이 보이지 않는다. 정황을 전부 파악한 드렉슬러의 눈에 점점 자신감이 차올랐다.


 "살았군! 이런 곳이면 내 실력이 100%, 아니, 200%는 발휘되지! 이거 당신이 한 일인가?"


 "음? 그런데?"


 "고맙단 거지. 자, 이제 남은 건 저놈들을 싹 쓸어버리는 거군!"


 사납게 웃으며 창을 추켜세우는 드렉슬러. 도일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들의 정면을 가리키면서.


 "니 혼자서 점마들 싹 쓸어삔다꼬?"


 도일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고 있는 곳에는 셀 수조차 없는 강화인간들이 우글거렸다. 적기사들 또한 여전히 건재했다. 그러나 드렉슬러의 기는 죽을 줄 몰랐다.


 "암. 싹 쓸어버릴 수 있지. 당신이 조금만 시간을 벌어준다면 말이지."


 "뭘 믿고 똥배짱을 부리는가 모르겄네. 확실한기가?"


 "확실해. 이 천재에게 불가능이란 없다고!"


 "아, 불안하데이……."


 내키지 않는다는 듯 앞으로 나서는 도일. 그의 몸 주변으로 다시 한번 파문이 일렁인다. 도일이 뛰어듦과 동시에 드렉슬러도 마지막 준비에 착수했다. 준비에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좋아, 여기에 이걸 접속시키고 출력을 와장창 올려버리면……."


 "마, 아재요! 멀었나? 내 죽긋다 마!"


 아까의 전투로 누적된 충격때문에 오래 버틸 수 없었던 도일이 비명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드렉슬러의 준비가 끝났다. 드렉슬러는 투사각을 크게 잡으며 도일에게 외쳤다.


 "빨리 거기서 빠져나와! 끝내주는 구경을 하게 해 주지!"


 "그냥 빨리 저질러뿌라! 진짜 뒈지것다 이 문디 자슥아!"


 "끙, 후회하지 말라고. 자, 간다. 나의 투창식 최후의 비기!"


 창을 쥔 오른팔이 크게 뒤로 젖혀진다. 팔과 함께 상체, 복근, 허리가 유연하게 꼬인다. 발가락 끝에서 눌러 올린 힘을 종아리, 허벅지를 통해 허리까지 말아 올린 후, 꼬여있던 상체의 근육들이 일시에 가동하며 하체의 힘을 한순간에 증폭시킨다. 그 모든 에너지를 한껏 담아 창을 하늘로 투척한다!


 엄청난 속도로 하늘을 가르는 창.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상승한 창은 정점에 이르자 창날을 아래로 하고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렉슬러가 준비한 장치가 작동되었다. 한순간의 섬광과 함께 창이 분열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이윽고 수를 셀 수조차 없이 늘어난 창들이 중력의 손길에 이끌려 속도를 더했다. 그리고 마침내…….


 "성공이다! 자, 수많은 별을 보아라!"


 드렉슬러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시작된 무시무시한 창의 소나기. 마치 유성우가 쏟아지는 듯 한 파멸적인 광경. 머리 위에서 내리꽂히는 창의 파괴력은 지나칠 정도로 충분했다. 강화인간도, 적기사들도 이 공격에 버티지 못했다. 도일은 강화인간들을 방패삼아 간신히 유성우의 영향권에서 이탈하는데 성공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폭우가 멈추었다. 여기저기 꽂힌 창들은 어느 새 사라졌고, 남은 것은 쓰러져 신음하는 적기사들과 널부러진 강화인간들 뿐이었다. 단 한 번의 투창으로 만들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다리오 드렉슬러라는 남자가 만든 창이었다. 자기 복제가 가능한 창을 최대로 이용한 광역 섬멸기.


 투창 비전식 유성창(投槍 秘傳式 流星槍). 검룡 로라스의 용창 비전식 용성락(龍槍 秘傳式 龍星落)과 더불어 손에 꼽히는 창의 기예가 선보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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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사노의 상황도 일촉즉발이었지만, 대기 장소에서도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발단은 앤지의 폭주였다. 그녀는 작전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보이더니…….


 "총수님, 진정하십시오! 저들은 잘 해낼 겁니다. 그러니 제발……!"


 토니 리켓은 애끓는 목소리로 앤지에게 애걸했다. 그러나 토니의 애원은 앤지에게 가 닿지 못했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넘실거리는 검은 불꽃 앞에서는 철저하게 무력할 뿐이었다.


 앤지는 지금 이성을 잃기 일보직전의 상태였다. 아직 제어가 서투른 흑염(黑炎)이 주변으로 새어나오고, 아름다운 황금빛 눈동자는 탁한 유황색으로 번들거렸다. 누가 보아도 정상적이지 못한 모습. 그러나 앤지로서는 아직까지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것이 더 신기한 일이었다.


 '저기, 바로 저기에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간 원흉이 있는데! 나는 지금 이 순간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야……?'


 자크를 앗아가고, 터커를 앗아가고,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 하이드를 앗아간 원수. 안타리우스의 교주 구마스 노인이 손에 닿을 듯 가까운데, 앤지는 그저 무력할 뿐이었다.


 많은 것을 잃었고, 많은 것을 얻었다. 하지만 얻은 것이 잃어간 것의 공백을 채워 줄 순 없었다. 흑염의 능력도, 지하 연합의 2대 수장이라는 자리도, 그녀의 증오로 비롯된 갈증을 해소해주지는 못했다.


 전부 다 없애버리고싶다. 저주받을 안타리우스를 세상에 그 흔적 한 줌 남겨두고 싶지 않다. 파멸, 붕괴, 말살. 온갖 어둡고 절망적인 감정이 앤지의 마음속을 채워갔다. 지금까지 참은 것이 사실은 용한 것이었다. 그녀가 결단코 이 자리까지 오겠노라 고집을 피운 것은, 어쩌면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뭘 망설이는 거지? 이제 난 예전의 무력한 계집애가 아니야. 어엿한 능력자이고, 흑염 하이드의 하나뿐인 자식. 그렇다면, 아버지와 더불어 모두의 원한은 내 손으로 풀어야 하는 것 아닐까?'


 앤지의 동공이 조금씩 풀려갔다. 탁한 유황색의 홍채는 마침내 시커멓게 물들기 시작했다. 충분할 정도로 참았다. 이젠 편해지고 싶다. 그녀는 본능이 이끄는 대로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쿠구구궁……


 나지막하지만, 확실한 울림을 가지고 퍼져나간 굉음이 그녀의 발을 잠시나마 멈추었다. 현실 너머의 것을 바라보던 동공은 순간적으로 현실을 직시했고, 그 눈동자에 들어온 광경은 거대한 발톱이 할퀴고 지나간 듯한 루사노의 상흔이었다.


 '저건……?'


 굉음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거대한 먼지구름과 함께 분지를 채우는 파괴음. 그리고 루사노는 점점 무너져간다. 이 비현실적인 광경을 보자 앤지 또한 잠시나마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토니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총수님! 굳이 가셔야겠다면, 이제 말리진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주십시오. 이 작전에 왜 총수님과 명왕이 투입되지 않았겠습니까? 당신들은 이제 결코 혼자만의 몸이 아닙니다. 모르시겠습니까?!"


 피를 토하는 듯한 절규. 거기에 담긴 슬픔이 앤지의 마음을 두들겼다. 심장에서 솟아오르는 이 감정은…… 분명히 예전에 느낀 적이 있다. 언제였을까?


 "저는 전대 총수님의 이상에 제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 분의 등을 뒤쫓아 가면 어디까지고 나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토록 강하셨던 분도 그렇게 스러져갔습니다. 저는…… 저는 이제 싫습니다. 제 앞을 걸어가는 믿음직한 뒷모습을 잃어버리는 건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눈물 맺힌 절규는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리고 반비례해서 앤지의 이성은 점점 맑아져갔다. 토니는 마지막으로 힘을 짜내어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처절함마저 감돌았다.


 "그러니, 결단코 저기로 가시겠다면 차라리 저를 죽이고 가십시오. 그런 절망감을 다시 맛보고 제 정신으로 살아갈 자신은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손으로 저를 죽이고 가십시오. 총수님이 내리는 죽음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흑염 하이드의 유일한 후예인 그대이기에……."


 "그런 말 하지 말아요, 토니. 당신이 없으면 저는 주저앉아버리고 말 거예요."


 지친 목소리. 토니는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들어 앤지를 바라보았다. 주변을 잠식하던 흑염은 어느 새 자취를 감추고, 불길하게 번들거리던 탁한 유황색의 눈빛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평소와 그대로인, 하지만 조금은 기운이 없는 듯한 황금의 눈매. 익히 토니가 알고 있는 앤지였다.


 "총수님……."


 "당신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아무것도 몰랐던 저를 연합의 수장으로 만드는 것, 쉽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 당신을 실망시키고 싶진 않아요. 이제 괜찮아요. 그러니 울지 말아요."


 여기까지 말한 앤지는 잠시 루사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먼 거리이지만, 파괴된 건물들은 확실하게 보인다. 그리고 한 순간, 무언가가 반짝였다. 마치 유성의 꼬리처럼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진 광채. 근거모를 믿음이었지만, 앤지는 그것이 [인형실 끊기]의 주역들이 만들어낸 것임을 확신했다.


 "역시 저들은 대단해요. 제가 저들의 대표라는 게 더없이 자랑스럽군요. 저의 아버지도 이런 긍지를 품고 계셨겠죠."


 토니는 앤지의 옆얼굴을 그저 바라보았다.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는 얼굴. 그 얼굴은, 토니가 익히 알던 누군가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눈의 여왕, 앤지 헌트. 아아, 자신이 찾아 지켜낸 공주님은 진실로, 진실로 여왕이 될 자격이 있었다. 그리고 흑염 하이드의 유일한 딸이었다. 숭고한 의지의 계승자.


 "믿고 기다리겠어요. 저들이 낭보를 가져다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겠어요. 그러니……."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미련이 앤지의 등줄기를 싸하게 훑어 내렸다. 그녀는 오한을 견딜 수 없는 듯 두 팔로 자신을 껴안았다. 그 순간이었다.

 

 

 

 

 

 '이제 괴로워하지 않아도 괜찮아. 사랑스러운 나의 앤지.'


 '자크?'


 환청이었을까? 앤지는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 그녀를 반긴 것은 침묵하는 어둠뿐이었다. 그리고 또 다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죄책감을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 목숨을 바쳐 아가씨를 지켜드릴 수 있었던 것은 제 일생에 다시없을 영광이었습니다.'


 '터커? 터커예요?'


 눈물이 솟구친다. 그녀를 위해 쓰러져간 사람들. 과연 자신은 그 생명의 무게를 제대로 짊어지고 있는 걸까. 짙은 죄책감. 이 죄책감은 앤지를 결코 놔 주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모두에게 용서받았다. 아니, 처음부터 용서할 죄는 없었다. 사실은 그 누구도 앤지에게 잘못을 책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나 올곧았기에 스스로에게 무거운 족쇄를 채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 구속은 지금 눈 녹듯이 사라졌다.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그녀의 눈앞에 아이거 산 정상의 기억이 환상처럼 떠올랐다. 나의 수호자, 나의 영웅. 더없이 소중한 겨울의 보석.

 

 

 

 

"Yes, my lord."


예, 그대는 나의 주군이시며.

 

"You are my Queen of forever."


당신은 영원한 나의 여왕입니다.

 

 


 결코 빛바래지 않을 충성의 맹세. 그녀를 공주에서 여왕으로 만든 선언. 선연하게 빛나는 적동(赤銅)의 눈동자가 그녀를 강하게 응시했다. 그 눈빛은 그녀에게 다시 한번 힘을 불어넣었다. 텅 빈 심장을 채워 준 뜨거운 무언가. 그렇다. 루이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결코 무너질 수 없었다.


 '그러니, 꼭 행복해야 한다. 앤지, 사랑하는 나의 딸아.'


 최후에, 낯설지만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인자하게 미소 짓는 사진 속의 아버지였다. 앤지의 뺨으로 한 줄기 눈물이 내달렸다.


 '예…… 저도 당신을 사랑해요. 아빠…….'

 


 토니는 그런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아직은 어린 여왕님. 흑염 하이드가 남긴 마지막 불씨. 그것이 다시금 찬란하게 피어나기 위해서는 결코 쉽지 않은 시련을 넘어서야 할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꺾이지 않도록, 지쳐 주저앉지 않도록 전력을 다해 보좌하리라. 한번 길을 잃었던 사내는 스스로의 심장에 맹세를 박아넣었다. 이 길을 다시 한번 잃어버린다면, 그때는 미련없이 생을 버리겠노라고. 순수하면서도, 너무나 서글픈 맹세였다.


 그런 토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루사노를 응시하는 앤지. 그녀는 아직 스스로를 완전히 용서하진 못했다. 그러나 결코 방금처럼 자신을 잃진 않으리라 맹세했다. 적어도 모두의 복수를 완수하기 전에는 결코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그녀를 위한 구원은, 아직은 너무 먼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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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기장소의 사정과는 상관없이 루사노의 소란은 끝없이 커져갔다. 그 중심지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한 사람은 그저 입을 떠억 하니 벌리고 있었다.


 릭은 눈앞의 광경을 얼떨떨해하며 바라보았다. 표현하자면, 일진광풍(一陣狂風). 사방의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난폭한 바람. 릭이 바라본 다이무스라는 사내는 그런 의미였다.


 강화인간이 달려든다. 베여 나가떨어진다. 또 달려든다. 베여 동강난다. 또 다시 달려든다. 베여 쓰러진다.


 무서울 정도로 무감각한 표현이지만, 릭은 그 외에 이 모습을 표현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강하다. 릭이 다이무스를 처음 보고 느꼈던 쇳덩이 같다는 감상. 그것은 정확했다. 다만, 다이무스는 평범한 쇳덩이가 아니었다. 끝없이 제련하고 단조되어 마침내 한 자루의 검으로 태어난 강철.


 태도의 이명을 가진 다이무스 홀든. 홀든 가문의 모든 것을 그 한 몸에 지닌 자. 급조된 강화인간들 따위로는 막아서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과연, 명왕이 직접 추천할 만한 사내였다.


 "엇? 이봐, 그 쪽으로 가는 건 좀 곤란하지."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릭이 허리춤의 총을 뽑아들었다. 그런데 그 속도가 심상치 않다. 살짝 이완된 신체. 순식간에 뽑혀 나오는 총. 터져 나오는 격발음. 그 모든 것이 0.5초 안에 이루어졌다. 그와 동시에 다이무스의 뒤로 달려들던 강화인간의 눈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퀵 드로우(Quick draw). 불시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초신속의 사격술.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아메리카의 초원에서 단련된 릭의 솜씨가 빛을 발했다.


 탕! 탕! 탕! 탕! 탕!


 6연발 리볼버의 남은 5탄이 연속적으로 불을 뿜었다. 그리고 총성이 터질 때마다 여지없이 강화인간들이 고꾸라진다. 피탄부는 전부 취약한 입과 눈. 엄청난 속도로 쏘면서도 소름끼칠 정도의 정확성. 탄창을 전부 비워 낸 릭은 휘파람을 불며 재장전을 시작했다.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본 다이무스는 짧게 말했다.


 "방해는 안 되는군."


 "뭐, 나도 어디 가서 빠지진 않는다는 거요."


 다시 탄이 가득 찬 실린더를 제자리로 되돌리며 대꾸하는 릭. 배려 없는 말투지만, 성질을 긁어놓진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자신의 감정을 단어로 내뱉는 것뿐이니 경멸도 뭣도 아니고, 그러면 기분 나쁠 일도 없다. 어찌 보면 릭도 다이무스만큼 이상한 사내였다.


 "놈들의 수가 줄어들었다. 어딘가로 이탈하는 것 같군."


 "어라? 듣고 보니 그러네."


 그들이 쓰러뜨린 강화인간들도 제법 많았지만 그 수 이상으로 텅 비어 보인다. 릭의 머리 한 구석에 심상치 않은 기분이 맴돌았다. 그는 본능의 경고를 신뢰하는 사내였고, 본능이 외치는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해 주변의 가장 높은 건물 위로 공간이동을 감행했다. 그리고 망원경을 빼들고는 주변의 정황을 눈에 담았다.


 "어, 저기는 딱 봐도 도일이라는 양반 짓거리구먼. 진짜 확실하게 해 놨네."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 한 구역이 완전히 폐허로 변해버린 곳. 먼 거리지만, 엄청난 수의 강화인간들이 널브러져 있는 걸 확인하기엔 충분했다. 아마도 그 사내의 난동에 상당수의 강화인간이 저 쪽으로 몰려간 듯싶었다. 그들로선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다시 여기저기를 살피던 릭의 망원경이 순간 고정되었다. 한 건물 앞에 강화인간들이 여기저기 모여 있다. 릭은 직감적으로 저곳이 목표지점이란 것을 눈치 챘다.


 "빙고."


 릭은 망원경을 접어 넣고 다이무스의 곁으로 공간이동했다. 그리고 빠르게 설명했다.


 "도일이란 양반이 잘 해준 것 같아. 드렉슬러랑 빅토르 아저씨는 안보이고, 아마 당한 걸지도 모르겠군. 그리고 우리의 목적지를 찾았어. 아주 철저하게 모여 있더구먼. 뭔가 켕기는 놈들이 항상 그런 짓 자주 하고. 그렇지?"


 다이무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표적이 정해졌으면 행동에 나설 뿐. 우선은 눈앞의 떨거지들이다.


 그의 발이 순간적으로 강하게 땅을 짓눌렀다. 단단한 포석이 순식간에 박살나버린다. 그것을 추진력으로 삼은 다이무스는 전방으로 돌진, 검의 궤적에 걸리는 모든 것을 갈라놓는 올려 베기를 가했다. 바람조차 흩어놓는 검격. 그 이름하여…….


 "질풍참(疾風斬)!"

 

 

 

 

 

 

 잠시 뒤, 릭과 다이무스는 수많은 강화인간들을 떨치고 마침내 목적지에 당도했다. 그리고 새로운 강화인간들이 두 사내를 환영했다. 별로 반갑지는 않았다.


 "저 치들, 만만해 보이지 않는데?"


 "그렇군."


 대략 서른에 가까워 보이는 강화인간들. 그들 하나하나가 결코 허투루 볼 수 없는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영혼이 없는 꼭두각시 인형 같았던 강화인간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저들을 모두 상대하는 건 다이무스로서도 불가능해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가 아니지. 다이무스는 릭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 안으로 뛰어들었을 때 2초, 아니 1초만 시간을 벌어줄 수 있나?"


 "1……초?"


 질문의 의미를 모르겠다. 하지만 목적만은 확실하게 알겠다. 릭은 약간 떨떠름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그거면 충분하지? 그리고 확실한 거지?"


 "물론."


 "……제길. 카우보이에게 이런 도박을 시키다니. 딜 하지 않고선 못 참겠잖아, 빌어먹을. 콜!"


 "그렇다면 이 칼과 목숨, 잠시 당신에게 맡기겠다."


 "아, 부담스럽게 또 왜 그러시나!"


 질색하는 릭에게 다이무스는 보기 드문 미소를 지어보였다. 경박한 사내지만, 믿을 수 있다. 마치 그의 철없는 동생을 생각하게 하는 남자. 근거 모를 신뢰를 가지게 한다는 것도 비슷했다.


 "먼저 가 보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예의 질풍참으로 돌진하는 다이무스. 그리고 이 강화인간들은 손쉽게 당해주지 않았다. 그들이 일순간 물러서면서 다이무스의 주변에 공백지가 생긴다. 그리고 릭은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깨달았다.


 다이무스의 등 뒤로 공간이동을 마친 릭의 양 손에는 리볼버가 한 자루씩 쥐어져 있다. 실린더는 가득 차 있고 그의 손가락은 원활하게 움직였다. 강화인간이 달려들고, 릭이 총을 겨누고, 다이무스가 일격을 준비하는 것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다이무스의 몸이 응축된다. 용수철이 눌리듯, 대나무가 굽혀지듯 전신의 근육이 일점으로 수렴되어 간다. 이 힘이 해방된다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와 동시에 릭의 총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Show Time!"


 열두 발의 총성이 밤안개를 내달렸다. 그리고 달려들던 강화인간 열둘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비틀거렸다. 놀랍게도 총탄은 하나도 빠짐없이 강화인간들의 미간에 틀어박혔다. 전 방위로 터져나간 릭의 난사(亂射)는 격살에 이르지 못했지만, 다이무스에게 필요한 시간을 넘치도록 벌어 주었다. 그리고…….


 "엎드려!"


 "에구구!"


 개구리처럼 바닥에 납작 엎드리는 릭. 그리고 다이무스는 준비한 일격을 펼쳐내었다. 한계를 쥐어짜 모은 힘을 한순간에 해방, 무서운 기세를 담고 주변을 휩쓸어가는 발검술이 작렬한다! 그 이름하여…….


 "만월참(滿月斬)!"


 칼날이 그리는 궤적이 보름달을 연상시킨다 하여 만월참. 어두운 거리에 잠시간 밝혀진 보름달은 강화인간들의 허리 어름을 쓰다듬고는 사라졌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처참했다.


 "아, 당신 설마 이런 위험한 짓을 나한테 시킨 거요?! 나도 저 꼴 날 뻔했네! 으휴……."


 "……어흠, 나대지 마라."


 "허어? 그 말은 너무한 거 아뇨? 기껏 고생해서 한 건 해줬더니! 아이고 분해라……."


 허리부터 두 동강이 나서 쓰러지는 강화인간들. 릭이 조금만 늦게 엎드렸어도 같은 꼴이 났을 것이다. 릭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건 말건, 동강 난 그 머릿수가 실로 스물. 이제 남은 열이라면 그럭저럭 평범하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릭은 투덜거리며 재장전을 마쳤다. 다시금 흉기로서의 이빨을 되찾은 리볼버가 섬뜩한 광택을 발했다. 이제 작전의 끝이 머지않은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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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중에 소란스럽더니 객이 찾아오셨구려. 환영하오. 내 집처럼 여기고 편히 있어주었으면 좋겠구려."


 "사양한다."


 "…… 안타깝구려."


 다이무스와 릭은 마침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이 장소는 교회로 쓰던 건물인 듯 널찍한 예배당의 형태였으며, 입구 맞은편의 벽은 소박한 스테인드글라스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십자가가 걸려있어야 할 곳에는 어떤 액자가 걸려 있고, 단상 위에는 화려한 의자. 거기엔 후드 차림의 사람이 앉아있었다. 환영인사를 보낸 사람은 바로 그였다.


 확실했다. 액자의 사도. 안타리우스의 교주. 그리고 모든 일의 흑막.


 "구마스 노인. 맞는가?"


 "음, 내 이름을 묻는 거라면 맞소. 제대로 알고 찾아오신 것 같구려."


 밑도 끝도 없이 평화로운 문답. 그러나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소름이 쫙 돋았다. 굳이 복수형인 이유는, 릭 말고도 노인의 뒤에 한 사람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얼어 죽을! 하필 다이무스 홀든이 오다니! 명왕이 아주 제대로 작심했나보군…….'


 재스퍼. 회사의 전 차기 회장이자, 배신자. 안타리우스의 주구인 그가 함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다이무스의 위험성을 지나칠 정도로 잘 알았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도록 미니와 앰피의 소식이 없어. 또 다른 손길이 있었다는 소리인데. 그렇다면…… 승산은 없다.'


 머리를 쓰는 책사답게 상황을 재빠르게 파악하고 정리한 재스퍼. 그의 전투력으로는 다이무스의 뒤에 서 있는 껄렁한 사내도 감당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구마스 노인은 재스퍼에게 단 한 번도 자신에 대해 설명한 적이 없었다. 재스퍼는 노인이 다이무스를 결코 당해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도 자구책을 찾을 수밖에. 노인, 그동안 감사했소. 고생한 대가는 내가 적당히 챙겨가도록 하지.'


 생각을 정한 재스퍼는 주저하지 않고 행동에 들어갔다. 그는 잽싸게 뒤의 액자를 떼어내고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향해 뛰어갔다. 저것만 깨고 밖으로 나간다면……!


 "이런, 재스퍼. 그래서는 곤란하네. 주최자가 트로피를 들고 도망치면 어쩌자는 겐가."


 스테인드글라스의 지척에서 우뚝 멈춰 선 재스퍼. 그의 관자놀이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는 온갖 용을 쓰는 것 같았지만 미동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에 공포가 차올랐다. 그리고 구마스 노인은 그에게 자비를 베풀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그 동안 고생 많았네. 그러니 이제 편히 쉬도록 하게. 가는 길 외롭지 않게 곧 길동무를 보내 주겠네. 그러니 안심해도 괜찮네."


 어디까지나 평온하게 말하는 노인. 그러나 내용만은 혈향이 흘러 넘쳤다. 그리고 재스퍼는 실이 끊긴 인형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재스퍼의 손에 들려있던 액자는 잠깐 움찔거리더니 다시 원 위치로 돌아갔다. 황혼의 도시가 그려진 평범한 그림. 그러나 지금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그림. 칸도르의 액자. 안타리우스의 시발점이 된 저주받은 기물이다.


 "자, 우승자를 위한 트로피는 저기 있네. 갖고 싶으면 이겨야겠지. 언제든지 오시게."


 그는 분명히 평범한 남자일 것이다. 싸움이라곤 해 본적도 없고, 평생 해 온 일이라곤 꼭두각시 인형극뿐인 남자. 그러나 다이무스는 섣불리 뛰어들 수 없었다. 후드로 가려진 얼굴. 살짝 드러난 입매는 불길한 미소를 띠고 있다. 천하의 태도가 이정도로 긴장을 한 상대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였다.


 다이무스의 손이 검병을 쥐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어떤 방법으로도 타개책이 생각나지 않는다. 구마스 노인이 이 정도의 난적이었다니. 그야말로 상정 밖의 사태였다.


 무거운 침묵을 깬 사람은 다름 아닌 릭이었다. 그는 아까부터 느끼던 의문을 물어보았다. 역시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것이다.


 "저기, 듣기로는 옥사나 야코비치인가…… 하는 여자도 있다고 들었는데, 그녀는 어디 있는 거요?"


 "그녀 말인가? 그러고 보니 아까 전에 빅토르 위고라는 남자가 찾아오더군. 그가 간단하게 사태를 설명하고 그녀를 데리고 피신했다네. 뭐, 본인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네."


 다이무스는 속으로 탄식을 내뱉고, 릭은 얼굴을 와락 구겼다. 왠지 강화인간들이 이상할 정도로 달라붙는다 싶었다. 그를 멋진 중년이라고 생각한 과거의 자신에게 욕을 한 바가지 쏟아 부은 후, 릭은 주저 없이 총을 발포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윽? 어? 이게 뭐야?"


 그의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무언가에 꽁꽁 묶인 듯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구속. 릭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공포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다이무스도 마찬가지였다.


 "이럴……수가……!"


 릭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극한까지 갈고 닦은 그의 육체까지 침범당하다니. 더구나 반격기 심안도(心眼刀)는 재스퍼가 험한 꼴을 당할 때부터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뚫고 들어온 수법은 대체 무엇인가. 다이무스는 구마스 노인의 능력이 대체 무엇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노인은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약간 실망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 목소리엔 절대자로서의 권태로움이 가득 깃들어 있었다.


 "한심스럽군. 결승전에 올라온 선수의 기량이 겨우 이 모양이면 관중들도 실망하는 법일세."


 노인이 손을 살짝 들어올렸다. 설마, 방금 전의 재스퍼처럼 손도 쓰지 못하고 쓰러지는 건가. 그의 손이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릭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러나 예상하던 끝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이런, 부전승자가 하나 더 있었군. 경기가 더 재미있어지겠어. 맘에 드는군."


 그와 동시에 노인의 등 뒤에서 인영 하나가 나타났다. 릭과 마찬가지로 당황한 얼굴. 그 사람의 손에는 박쥐 모양의 단검이 역수로 쥐어져 있었다. 시바 포. 그녀가 노인의 등을 노렸지만 역시 실패한 것이다.


 "으…… 윽! 이게 뭐지? 뭘 한 거야, 네놈!"


 표독스레 소리치는 시바 포. 작전개시 전에 보았던 아름다운 여성이라고는 믿지 못할 지경이다. 노인은 관심 없다는 듯 잠시 의자에 몸을 푹 파묻었다. 기묘한 상황. 세 사람은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하고 노인은 고뇌한다. 숨 막히는 적막도 잠시, 노인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몸을 살짝 세웠다.


 "좋아, 패자 부활전이 적당하겠군. 셋이 싸워서 이기는 단 한사람에게 다시 도전할 기회를 주겠네. 그러니 서로 최고의 기량으로 죽여주길 바라네. 기대하지."


 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다이무스와 릭, 시바 포는 예배당의 중앙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러나 그들의 의지는 아니었다.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움직이는 신체에 비명을 지를 지경이었지만 이제는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셋은 각자 정삼각형의 꼭짓점에 위치한 포지션을 잡았다. 그리고 각자 최고의 공격을 위한 준비 자세에 들어갔다.


 '흐음……!'


 다이무스는 경악했다. 지금 취하는 자세는 결코 노인이 알 수 없는 기술. 그런데도 그의 육체는 뼈와 근육에 새겨진 동작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아니, 충실한 것을 넘어 파멸로 달리는 준비. 한계를 가볍게 돌파하여 다이무스의 모든 것을 쥐어짜내는 손길은 그의 생명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윽……!'


 시바 포 또한 발꿈치의 킬 힐을 빼 올렸다. 그녀의 눈이 점점 경악으로 물든다. 이 암살술은 그 누구도 살아서 기억하는 자가 없는데, 어떻게 노인이!


 '아이고! 내 애마야! 소들아! 레이디 앤지! 제발 나 좀 살려줘!'


 릭 답달까, 속으로 온갖 흰소리를 지껄이며 발악했지만 그의 리볼버 두 자루는 흔들림 없이 다이무스와 시바의 미간을 조준하고 있었다. 손가락에 실낱같은 힘만 더해져도 흉탄은 두 사람에게 치명상을 입힐 것이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리고 마침내 시간은 흐르기 시작했다.


…………………………………………………………………………………………………………………………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패닉에 빠진 릭. 이대로라면 세 명 모두 사이좋게 바닥에 쓰러질 것이다. 그리고 노인의 말대로 재스퍼와 길동무가 되어 요단강 익스프레스를 타게 되겠지. 그러나 도저히 타개책을 찾을 수 없다. 릭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전방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 순간 다이무스와 눈이 마주친 것은, 그야말로 운명의 장난이었다.


 다이무스의 눈은 여전히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깊게 가라앉은 진녹색 눈동자는 이 순간까지도 결코 포기의 기색이 없었다. 릭은 그 눈을 바라보자, 찰나지간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다. 그것은 마치 신의 계시와도 같은 깨달음이었다.


 '능력…… 될 거 같다! 아니, 되게 만든다!'


 릭의 눈에 핏발이 선다. 공간을 이동하는 릭의 능력은 신체접촉이 이루어져야만 타인과 함께 이동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한계를 부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죽게 되니까!


 '끄으으으으!'


 극한의 순간이어서일까, 릭의 머릿속에 살아왔던 인생이 스쳐 지나간다. 철 없던 어린 시절. 장성한 뒤에 독립하여 소를 치기 시작하고, 광야와 초원, 푸른 평원을 벗 삼아 달려온 인생. 그때는 지겨웠지만, 지금에 와서는 너무나 그립다.


 그리고 최근의 기억. 아름다운 파리의 정경. 그리고 노을에 물든 파리. 그 자리엔 앤지가 함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난! 데이트를! 꼭! 해야만! 하겠다아아아아아-----!!!!!'


 앤지와의 마지막 약속이 생각났다. 그리고 지극히 남자다운 소망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다이무스의 몸이 꺼지듯이 사라졌다.

 

 

 

 

 


 다이무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인은 당황했다. 작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두 사람의 상하관계를 증명했다. 다이무스는 노인의 바로 앞에 나타났고, 간격은 기가 막힐 정도로 적당했다.


 공간 이동의 여파로 구마스 노인의 통제가 끊어졌다. 그러나 다이무스는 준비하던 일격을 계속 진행했다. 낮추어진 자세. 한쪽으로 급격하게 틀어지는 상체. 그리고 그 발끝에서 격렬한 진각이 터졌다.


 발과 종아리를 타고 올라오는 반발력. 이 힘을 자연스럽게 대퇴근으로 인도하여 잠시간 응축시킨다. 터질듯이 불끈거리는 허벅지. 다이무스는 기계처럼 다음 동작을 수행했다.


 대퇴근에서 응축되어 더욱 순수해진 힘을 골반, 허리, 등을 통해 위쪽으로 인도한다. 노도같이 몰아치는 힘은 마침내 상박에 도달하고, 마침내 그 힘을 전력으로 발검에 쏟아 붓는다!


 검이 내달린다. 아니, 내달렸다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았다. 지평선. 그래, 그 모습은 마치 지평선과도 같았다.


 다이무스의 검이 그린 궤적은 찬란한 은빛으로 명멸했다. 그러나 한 순간에 사라져야할 그 섬광은, 마치 시간을 멈춰버린 듯 잠시나마 세계를 양분하고 있었다.


 은빛의 지평선. 그 너머에는 구마스 노인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릭은 자신의 심장에 경건함이 솟구쳐 오름을 느꼈다.


 다이무스가 방금 보여준 일격은, 분명히 인간이라는 종의 한계를 넘은 경지. 누천년을 살아온 인간은 마침내 여기까지 도달한 것이다. 릭은 속으로 탄식했다.


 '아아…… 인간은, 언제고 신의 자리에 도달하겠구나. 내가 보는 것은 그 편린이구나.'


 다이무스의 뒷모습과, 그가 그려낸 은빛의 지평선이 주는 감동은 그랜드캐니언의 웅장함과도 비견할 만 했다. 사람의 운명으로 신위에 도전하는 모습. 감복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같은 인간으로서 말이다.

 

 

 

 

 

 

 은의 지평은 시간의 물결에 흐트러지고, 마침내 존재조차 없었다는 듯 스러져갔다. 그러나 그 궤적은 구마스 노인을 확실하게 포착했고, 생명의 근원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구마스 노인은 가슴 어림을 가로질렀던, 이제는 시간 너머에 존재하는 은의 지평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강렬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 벅차오르는 감동은, 자신이 칸도르의 액자를 처음 보았을 때 맛본 감정과 다르지 않다고.


 한 인간의 영혼을 사로잡은 최초의 기억. 그저 마음을 빼앗긴 정경. 그것은 아마 어느 순간의 지평선이었을 것이다. 마치 자신이 보았던 그림과 같은 감동을 주는.


 순간(瞬間) 속에서 영원(永遠)을 느낀다. 억겁(億劫) 속에서 찰나(刹那)를 찾는다. 한 사람이 바라기엔 지나치게 고상했던 목적. 그것은 인간의 힘에 겨운 도달점이자, 너무나 머나먼 지평.


 하지만 그렇기에 갈구(渴求)한다. 모든 것을 걸고 궁구(窮究)한다. 불가능함을 알기에 더욱더 손에 넣길 원한다. 광기(狂氣)마저 초월한, 순수한 성취에의 소원. 그러나 그것은 고작 한 인간의 생명으로는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


 그리하여 집념에 찬 도전이 시작되었겠지. 백단천련(百鍛千鍊). 백의 단조와 천의 제련으로 벼려지는 명검과 같이, 백의 인간이 천의 눈물과 땀으로 쌓아가는 도달점으로의 긴 여정. 이미 업의 영역에 달한 갈망은 마침내 신천지(新天地)의 비밀을 한 꺼풀 벗겨 냈다. 그 비밀의 작은 파편이 바로 자신의 최후였음을 지금은 안다.


 구마스 노인은 최후를 달게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자신 또한 닿을 수 없는 신천지를 꿈에서도 바라마지 않았기에.


 '그렇기에 나는 지금 여기에서 스러진다. 하지만 결코 끝은 아니리. 결국은 새로운 흐름의 시작일 뿐. 후후, 이런 결말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지…….'


 그러니 어찌 그것에 경탄하지 않을쏘냐. 그러니 어찌 그것에 감동하지 않을쏘냐. 그러니 어찌 그것을 칭찬하지 않을쏘냐. 구마스 노인은 그러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훌……륭하다. 훌륭하다 능력자 놈들……."


 마지막까지 오만한 말투를 버리지 않는 구마스 노인. 다이무스는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비기 절명참철도(絶命斬鐵刀)는 더하고 뺄 것도 없이 완벽하게 들어갔고, 구마스 노인은 결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의 일격이었다.


 "허나…… 아쉽군…… 적어도 벌인 판을 접는 건 확인했어야 하는데……."


 "네놈의 죽음으로 판은 끝났다. 걱정 말도록."


 "진정…… 그리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너무나 순진하군. 아니면…… 세상 물정을 아직 모르거나……."


 꺼져가는 구마스 노인의 목소리. 그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선언했다. 적어도 주최자로서 경기를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야만 했다.


 "자네들이…… 이겼네. 상품은 저기 있으니 받아가게. 승리를 축하하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다이무스의 검이 훑고 지나간 노인의 상체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일세를 풍미한 효웅, 구마스 노인의 최후였다.

 

…………………………………………………………………………………………………………………………


 "쓸데없는 걸…… 베었다고 말하진, 못하겠군……."


 다이무스는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눌렀다. 절명참철도를 한계 이상으로 행한 후유증이 그의 신체를 갉아먹고 있었다. 한동안 요양하면서 몸을 추스르지 않는다면, 검사로서의 생명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태.


 "끄…… 끝난 건가?"


 릭은 구속이 해제되고도 믿기 어렵다는 듯 이리저리 몸을 만졌다. 그리고 확실하게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맥이 탁 풀려 그 자리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지…… 진짜 죽는 줄 알았다. 으허허……."


 하지만 둘은 너무 빨리 긴장을 풀고 말았다. 아직 위험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어머, 고생 많았어. 나의 멋진 조연들. 덕분에 최고의 영상이 나올 것 같아. 호홋……."


 다이무스와 릭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노인이 앉은 의자 뒤. 높이 걸려있던 액자는 어느 새 누군가의 손에 들려 있었다.


 시바 포. 그녀 또한 구속이 해제된 것이다. 그것을 빠르게 파악하지 못한 두 사람의 실책은 치명적인 칼날이 되어 그들의 목덜미를 겨누었다.


 "그렇게 긴장하지 마. 누가 보면 잡아먹는 줄 알겠네. 뭐, 사실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래도 한 무대에서 연기한 동료 아니겠어? 그 정도로 양식이 없지는 않아."


 천천히 걸어 나가는 시바 포. 릭은 그녀를 제지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그의 발치에 날아와 박히는 비수에 멈칫했다. 시바 포는 마지막으로 다이무스에서 매력적인 눈웃음을 보내었다.


 "방금은 정말 멋졌어, 검사님. 인연이 된다면 차 한 잔 같이 마실 날이 오겠지?"


 다이무스는 깊게 가라앉은 진녹의 눈으로 시바 포를 응시했다. 왠지 껄끄러워진 시바 포는 지체 없이 모습을 감추었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 넓은 예배당을 나지막하게 채웠다. 그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모두에게 전해줘. 이 액자는 내가 [메트로폴리스]로 가져가도록 하지. 사서 고생이라니, 정말 나답지 않아. 후후……."

 

 

 

 

 

 

 "허…… 뭔가 찝찝하게 끝나버렸는데."


 릭은 입맛을 쩝 하고 다셨다. 구마스 노인은 죽었지만 액자는 시바 포에게 빼앗기고, 옥사나 야코비치는 배신자 빅토르 위고와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이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인형실 끊기]는 이 순간 마무리된 것이다.


 "아, 아직 아니지. 마무리는 모두가 무사히 돌아와야 하는 거였지. 끙, 모두가 아니라서 면목은 없겠군."


 릭은 투덜거리면서 리볼버의 실린더를 개방했다. 그리고 주머니 깊숙한 곳에 넣어둔 탄환 하나를 장전하고 실린더를 폐쇄했다. 이제 모든 것을 끝낼 시간이다.

 

 

 

 

 

 

 "어? 저거 우리 총수님이 말했던 그 신호탄 아이가? 일이 다 끝났는갑네?"


 "그런가 보군. 자, 그럼 꾸물댈 것 없이 저 아래로 가 보자고. 빨리 복귀해서 이번에 얻은 데이터를 반영해야겠어."


 "뭔 말인진 모르겄지만 빨리 복귀하자는 건 동감이데이. 자, 갑세."


 드렉슬러는 난동을 부리느라 진이 빠진 도일을 부축해서 신호탄이 올라온 방향으로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둘 사이에 연합과 회사라는 앙금은 이미 남아있지 않았다.

 

 

 

 

 

 

 "총수님! 신호탄이 올라왔습니다!"


 "저도 보여요! 아…… 그들이 무사히 돌아와야 할 텐데……."


 산 중턱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앤지와 토니의 시야에 신호탄이 들어왔다. 둘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제 곧 릭이 모두를 데리고 이곳으로 귀환할 것이다. 일은 성공일까, 실패일까. 모두가 무사해야 할 텐데. 복잡한 생각의 편린이 앤지를 괴롭혔다. 그리고 마침내…….


 "돌아왔습니다, 레이디!"


 여전히 가벼운 사내, 릭. 그러니 지금은 그 목소리가 눈물겨울 정도로 반갑다. 그러나 앤지의 안색은 곧 어두워졌다. 두 자리가 빈 것을 파악했기 때문에. 앤지는 불안한 표정으로 릭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어진 릭의 목소리에 앤지의 불안은 눈 녹듯이 사라져버렸다.


 "레이디, 이제 저와 파리 시내 투어를 함께 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아, 데이트는 옵션이지요. 하하핫!"


 앤지는 그제야 눈물이 글썽글썽 맺히는 것을 느꼈다. 릭의 손길이 앤지의 눈가를 가볍게 스쳐 지나갔다. 부드러운 손길은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아름다운 레이디, 울지 말아요. 당신은 활짝 웃어야 가장 매력적이랍니다.'


 앤지는 살짝 볼을 부풀렸다. 그리고 릭에게 장난스레 반격했다. 그리고 의외로 치명적인 카운터였다.


 "좋아요. 기꺼이 받아들이죠. 대신 비용은 릭이 다 부담하는 거예요?"


 "어? 그건 좀 곤란한데요?!"


 맑은 웃음소리가 산을 넘어 저 멀리 퍼져나갔다. 그 환희에 답하듯, 찬란한 여명이 저 너머에서 밝아오기 시작했다. 저 하늘에서 불길하게 빛나던 천칭좌가 마침내 떨어진 것이다.

 

 

epilogue - 디오니소스의 선물 -

 

 

 

 

 

 [포트 레너드]에는 유명한 관광도시가 있다. 계획적으로 조성된 호수에는 맑은 물이 샘솟고 녹음이 우거진 수림은 한가로이 흔들린다. 상쾌한 바람이 사랑하는 도시. 사람들은 이곳을 글림듀라 불렀다.


 관광도시답게 수많은 볼거리가 존재하는 글림듀지만, 이곳을 거쳐 간 관광객들이 입을 모아 찬양하는 진국은 따로 있었다.


 술. 신, 혹은 악마가 인간에게 선물한 가장 신비로운 액체. 글림듀의 물과 바람은 언제나 최고의 술을 만들어내고, 숙련된 주도가는 새로운 맛을 추구한다. 천의 술집이 있으면 천의 술이 있다고까지 회자되는 도시. 세계수의 가장 아름다운 정원.


 그런 글림듀의 번화가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골목길. 그곳에서도 꽤나 후미진 곳에 묵직한 문이 있었다. 땅거미가 지는 시간. 어스름 속에 더욱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 문 앞에 한 여성이 다가섰다.


 기품 있는 차림새. 여성치고는 꽤 큰 키와 어울려 귀족적인 느낌이 든다. 손으로 짜 올린 듯한 클로슈 밑으로는 칠흑의 비단과 같은 흑발. 그녀는 잠시 주저하더니 문을 힘껏 밀어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예상외로 문 안쪽은 조용한 바(bar). 해 질 녘이지만 술집으로서는 조금 이른 시간일까. 손님은 아무도 없고, 램프 빛으로 물든 바에는 깔끔한 차림새의 바텐더만이 글라스를 손질하고 있다. 그는 눈을 들어 잠깐 여성을 바라보고는 말없이 글라스를 내려놓았다. 그것이 인사라도 되는 양, 여성은 바(bar)로 다가가 자리를 잡았다.


 바텐더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클로슈와 긴 머리칼에 가려진 눈매가 그제야 보였다. 아름다운 황금빛. 빛이 비춰지는 각도에 따라 진한 호박색으로 물드는 눈동자는 과연 매력적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어딘지 허탈하면서, 또 지친 듯한 눈동자.


 바텐더의 뇌리에 몇 년 전 스쳐간 손님이 떠올랐다. 남성이었고, 중년의 사내였지만 그 눈만은 지금 앞에 앉아있는 여성과 비슷했었다. 삶의 무게에 짓눌린 그 회색빛 눈동자와 여성의 황금빛 눈동자가 겹치자, 바텐더는 이 여성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손님. 외람되지만 바텐더로서 제가 권하는 술 한 잔, 어떠십니까?"


 "……뭐라도 좋아요."


 아름다운 목소리지만 힘이 없다. 절망했다기보다는, 큰일을 해내고 기운이 빠져버린 듯한 그런 뉘앙스. 과연, 바텐더는 속으로 살짝 미소 지었다. 그는 이런 사람들에게 다시금 힘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술을 배웠다. 그녀는 오랜만에 만나는 '좋은 손님'이 될 지도 모르겠다.


 바텐더는 등을 돌려 찬장 가장 깊숙한 곳으로 손을 뻗었다. 몇 년 전, 이 술을 마셨던 잊을 수 없는 손님을 위해 꼭 한 병은 남겨두는 보틀. 그 이후로 중년의 사내는 말했던 것처럼 다시는 이 술집을 찾지 않았지만,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바텐더의 기억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부디 다른 사람에게도 내가 느낀 구원과 안식을 선물해주길 바라오.]


 이 보틀은 혹시라도 찾아올 그를 위해 아껴둔 것이지만, 또한 그 사내라면 지금 눈앞의 여성에게 기꺼이 이 술 한잔을 권할 것이다. 바텐더는 확신할 수 있었다.


 작은 스트레이트 잔에 채워지는 액체. 투명한 잔속에서 빛나는 주정(酒精)은 여성의 눈과 같은 황금빛이었다. 자신의 눈앞에 놓인 잔. 여성은 그 잔을 들고 입술로 가져갔다. 그리고 코끝에 스치는 향기에 크게 놀라 눈을 부릅떴다.


 이 술은 그녀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마신 술. 언제 구입했는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대학에 합격했을 때 어머니는 기뻐하며 이 술을 내놓았다. 그때 느낀 감동은 아직도 잊히지 않고 그녀의 추억 속에 새겨져 있었다. 이후로 이 술을 몇 번 찾아보았지만 결코 구할 수 없었는데, 이 추억의 향기를 바로 지금 느끼다니?


 여성은 조심스레 술을 머금었다. 아…… 추억 속 그대로의 맛. 복잡한 듯 하면서도 명쾌한 아로마. 그 어떤 술도 따라오지 못할 풍부한 향. 시간이 선물한 숙성된 풍취는 그 모든 요소를 아울러 최고의 하모니를 선보인다. 한 잔의 술이라기엔 너무나도 감동적인 오페라. 그녀는 살짝 물기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구원(salvation)…… 이 술을, 다시 마시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바텐더는 살짝 놀랐다. 이 술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이름을 아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다. 아직 젊은 여성인데 어떻게 이 술을 알고 있는 걸까?


 여성은 말없이 잔을 마저 비웠다. 좋은 술이지만, 또한 몹시 독한 술. 한잔만인데 가슴 속은 뜨거운 기운으로 차오른다. 그 열기는 여성에게 작은 힘을 주었다.


 "기쁜…… 제 인생에서 가장 기쁜 날에 이 술을 마셨어요. 저희 어머니가 애지중지 보관하던 술이었죠. 절대로 잊지 못할 추억이에요."


 바텐더는 그저 묵묵하게 서 있다가 다시금 면포를 꺼내들고 글라스를 닦기 시작했다. 그 나름의, 손님에게 귀 기울고 있다는 제스처. 여성은 그 뜻을 알아챘는지 살짝 미소 짓고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술기운 덕이었을까? 아까처럼 힘 빠진 목소리는 아니었다.


 "여자 혼자서 이런 술집에 오다니, 이상하게 보이겠네요. 그래도 오늘은 혼자서 취하고 싶었어요. 제가 꿈에서도 원하던, 무엇보다 바라던 목표가 결국 달성되었거든요."


 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곤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역시,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멋진 술이다.


 "그렇게 되면 무언가 달라질 줄 알았어요. 아니, 달라지긴 했군요. 허무하네요. 제 마음이 충족될 줄 알았는데, 막상 끝나고 나니까 너무나 허무해요."


 자신의 마음을 되짚어간다. 여성은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감정을 바라보았다. 주변엔 아무도 없고 청중은 그녀에게 묵묵히 귀 기울인다. 신세한탄에는 딱 좋은 순간.


 "거기다 끝난 것도 아니군요. 목표를 달성하면 그 다음을 보게 되더군요. 이 끝없는 달음박질의 마지막에 대체 뭐가 있을까요. 모르겠어요. 그리고 두려워요……."


 대체 어떤 삶을 살아가기에 이토록 힘겨워 하는 걸까. 바텐더의 마음 한 구석에 연민이 스쳐갔다. 하지만 그는 이 여성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다.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최고의 한 잔을 만드는 것. 보기 드문 '좋은 바텐더'는 이 손님에게 어울리는 한 잔을 만들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최고급 아삼(Assam) 홍찻잎을 꺼내어 티 포트에 우려낸다. 최적의 온도와 정확한 시간. 향기롭게 우러난 홍차에 구원과 더불어 몇 가지를 더 첨가해 블렌딩하여 머그컵에 담아낸다. 진홍색의 칵테일은 따뜻한 온기와 포근한 김을 풍겨내며 여성의 앞에 놓여졌다.


 "당신에게 이 한 잔이 어떤 의미로 다가갈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지금의 제가 손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한 잔'임을 확신합니다."


 여성은 머그컵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우윳빛 컵 안에 찰랑이는 진홍빛 액체. 뜨겁게 약동하는 혈액을 연상시키는 빛깔. 양 손으로 머그를 감싸 쥐자 작은 온기가 손바닥으로 스며든다. 그녀는 머그를 조용히 기울였다.


 뜨거운 주정과 따뜻한 홍차. 그 둘의 강렬한 존재감. 앞서 마신 구원이 남긴 잔향과 어우러져 또 다른 행복함을 선사한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앞서의 임팩트만큼은 아니지만 이 '온기'를 받쳐주는 은은한 달콤함. 이 칵테일은 지쳐버린 그녀의 심장에 새로운 활력을 채워주었다. 그야말로 환상적인 일품.


 "멋져요. 정말 '최고의 한 잔' 이군요."


 여성의 말에 활기가 맴돌았다. 하지만 바텐더는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몇 년 전보다 그의 기량은 더욱 더 발전했다. 당시에 느꼈던 희미한 아쉬움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기 위한 노력. 그리고 이 손님에게 드디어 그 결과물을 선보이게 된 것이다.


 "손님. 그것으로 만족하십니까? 그렇다면 그걸로도 좋을 겁니다. 다만 그걸로 모자라신다면, 제 '회심의 한 잔'을 더 대접하고 싶군요. 어떻습니까?"


 바텐더의 눈빛이 여성을 응시한다. 마음 깊은 곳까지 들춰내는 듯한 안광.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한 줌의 갈증을 바라보는 그 눈빛. 여성은 이 바텐더에게 점점 감탄하고 있었다.


 "이걸로 끝이 아니라니 정말 대단하네요. 아직 좀 더 취하고 싶어요. 한 잔 더 부탁드릴게요."


 바텐더는 빙긋 웃고는 새로운 셰이커를 준비했다. 탄산수와 약간의 라임 즙을 위주로 하여 칵테일한 후, 따라낼 글라스의 둘레에 레몬 시럽을 바르고 소금을 묻힌다. 마치 글라스에 눈이 내린 것 같은 장식. 칵테일을 잔에 따라낸 후 아직 설익어 푸릇한 레몬 슬라이스를 가니쉬로 끼워낸다.


 "여기 있습니다."


 투명한 글라스에 채워진 액체는 안개에 잠긴 여명을 연상시키는 옅은 황금색이었다. 주저 없이 한 모금을 들이키자, 그녀는 또 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입 안에서 톡톡 튀는 탄산. 그 느낌과 함께하는 라임의 새콤달콤함. 글라스 둘레에 묻힌 소금의 아련한 짠맛이 그 느낌을 더욱더 끌어올린다. 그것을 말없이 받쳐주는 굳건한 향기는 역시 구원. 하지만 보통의 구원과는 달랐다. 최초의 구원과, 앞서 마신 따뜻한 칵테일이 남긴 향기가 녹아들어가 코끝에서 화려하게 폭발한다. 마무리는 레몬 슬라이스. 살짝 깨물자 설익어 더욱 새콤한 레몬즙이 모든 풍미를 깨끗하게 날린다. 어딘지 허무하면서도, 그 다음을 갈구하게 되는 맛.


 레몬의 새콤함 때문일까. 고개 숙인 여성의 눈가로 한 줄기 물방울이 맺히더니 또르르 굴러 내렸다. 점잖은 바텐더는 모른 척 몸을 모로 돌리고 글라스를 닦는데 열중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여성은 간신히 얼굴을 들었다. 술기운과 상기된 감정으로 발그레해진 얼굴은 또 다른 매력을 뽐내었다.


 "하나 물어보고 싶어요."


 "얼마든지요."


 "'최고의 한 잔', 그리고 '회심의 한 잔'. 분명히 다른 이름이 있을 거예요. 그리고 제 생각이 맞는다면 전 이미 그 이름을 알고 있어요."


 "……."


 바텐더는 닦던 글라스를 내려놓았다. 그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당신에게 그 이름을 듣고 싶군요. 괜찮은가요?"


 바텐더는 기꺼이 그 요구에 응답했다. 역시, 이 손님은 '최고의 손님'이었다.


 "처음은 구원(salvation), 그리고 희망(hope), 마지막으로 미래(future)입니다."


 구원은 새로운 삶을 살아갈 희망을 주고, 희망을 가진 자는 미래를 향할 힘을 얻는다. 이 강렬한 메시지를 여성은 확실하게 이해했다. 그렇기에 그녀 또한 다시 한번 힘을 내리라 다짐했다. 그 무엇하나 확실한 것은 없지만,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서 미래로 달려갈 것을.


 "이제 더 이상 마실 필요가 없겠네요. 석 잔의 술로 충분했어요. 후후…… 어쩌면 당신은 저를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디오니소스일지도 모르겠군요."


 올림포스의 주신(酒神)이란 칭찬은 술을 업으로 삼는 자에게 더 할 나위 없는 극상의 찬사. 바텐더는 살짝 허리를 숙여 답례했다.


 "당신같이 아름다운 여성에게 한 잔의 술을 바칠 수 있다면 디오니소스라도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겁니다."


 주거니 받거니 한 손님과 주인은 서로에게 미소를 보내었다. 그 웃음에는 한 점 그림자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쩌면 주신(酒神)은 이런 날을 위해 술을 빚었을지도 모르겠다. '최고의 손님'과 '최고의 바텐더'가 만날 그 날을 위해서 말이다.

 

 

- 대단원 -

 

 

 

 

 그 날 이후, 앤지는 잠시 동안 [포트 레너드]에 머무르며 심신을 추슬렀다. 세계수의 둥치에서 피어오르는 안개는 능력자들에게 힘을 실어준다. 어쩌면 그 효과가 앤지에게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평온한 나날. 몇 가지 중요한 업무 외에는 앤지를 괴롭히는 그 어떤 것도 없었다. 그녀는 2차 능력자전쟁 이후 2년 만에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원기를 되찾은 앤지는 루이스의 힘과 토니의 지혜를 빌려 연합을 정비하고 키워나갔다. 2차 능력자전쟁이 남긴 상흔이 미처 회복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다시 한번 안타리우스와 치른 결전은 연합을 한계까지 소모시켜 놓은 것이다.


 회사는 만신창이가 된 [포트 레너드]를 재건하기 위해 영국 정부와 협상했고, 막대한 자금을 동원하는 대가로 [포트 레너드]의 자치권을 양도받는데 성공했다. 이로서 안개와 수액의 힘은 오롯이 회사가 독점할 듯 보였으나, 과연 토니 리켓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인형실 끊기 작전에 참가한 도일에게 또 다른 부탁을 해 놓았다. 도시를 파괴하던 도일은 어딘가 중요한 곳에 숨겨져 있던 서류란 서류는 전부 챙겼다. 대부분은 별 쓸모없는 종이쪼가리였지만, 몇몇은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회계 상황과 연구기록이 담긴 일지는 안타리우스를 파악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었기에 명왕과 브뤼노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토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꿈꾸며 잠든 마을, 빌로 시티. 행정 중심지, 코어 레너드는 회사와 연합이 동시에 관리하기로 하였다. 관광도시 글림듀와 울창한 수림의 디미스트는 회사가, 번화한 리버포드와 황량한 디시카는 연합이 서로 차지하게 되었고, 이 관할구역을 서로 인정하고 무력충돌을 금지하는 것이 골자인 [우드시티 협약]이 마침내 체결되었다.


 1860년 일식의 날 이후 70여년이 흐른 1932년이 되어서야 진정한 의미의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수없는 목숨, 슬픔, 아픔, 절규를 딛고서 마침내 쟁취한 평화. 사람들은 능력자들, 일반인 가릴 것 없이 이 평화를 찬미했고 삶을 만끽했다.


 하지만 이 평화는 길지 못했다. 몇 달 전, 명왕의 양녀 앨리셔 캘런이 괴한에게 피습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행히 헬리오스의 공주님은 무사했지만, 그녀가 진술한 범인이 세상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녀가 묘사한 괴한의 외양은 연합의 아론 휴톤과 놀랄 정도로 흡사했던 것이다. 회사는 면밀한 조사를 통해 이 습격이 회사와 연합이 안개를 독점, 관리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군소세력의 소행이라고 공식적인 결론을 내 놓았지만, 일부는 휴톤과 연합에 대한 강력한 보복조치를 주장했다.


 앨리셔는 그런 '정치적인'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소녀는 아니었다. 하지만 휴톤 또한 어린 소녀에게 행패를 부릴 만한 소인배는 아니었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아니, 사실 진실 따위는 아무런 필요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원하는 것은, 어쩌면 이미 중독되어버린 뜨거운 피였을지도.


 다시금 험악해진 분위기에 정점을 찍는 사건이 터졌다. 리버포드에서 발생한 화재. 현장에는 회사의 표식이 새겨진 천 조각이 발견되었고, 분노한 연합의 능력자들은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글림듀를 공격했다. 이 사태로 회사의 다이무스 홀든이 큰 부상을 입었고, 두 조직의 관계는 또다시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다.


 다이무스의 동생이며 연합 소속인 이글 홀든은 독자적인 조사를 통해 일련의 사태에 아직까지 뿌리 뽑지 못한 안타리우스의 잔당이 개입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미 격화되기 시작한 분쟁은 이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또다시 싸움터가 되어버린 세계수의 정원. 앞서 있었던 1차, 2차 능력자전쟁을 잊지 못한 영국 정부는 더 이상의 유혈사태가 계속된다면 정부군의 개입을 불사하겠노라 엄포를 놓았다. 때는 1934년. 독일 나치당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재군비 선언]을 선언한 이상 국내의 분란이 커져서는 곤란했던 것이다.


 영국 정부는 회사와 연합, 둘 중 하나에게 통치권을 일임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앤지 헌트와 헨리 밀러 3세는 여러 번의 협상을 통해 합의점을 찾고자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앞서의 전쟁이 남긴 상처와 아픔을 기억하는 능력자들이 최후의 선을 넘기 전에 기적이 일어났다.


 회사의 브뤼노 올랑의 제안으로 환영의 도시 칸도르, 지금의 트와일라잇에 코어 레너드를 복제한 이공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세계수의 피해를 걱정하지 않고 싸울 수 있게 된 연합과 회사는 본격적으로 그 힘을 겨루게 되었고, 그 전쟁은 지금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떨어지는 천칭좌, 시작되는 흐름 End

 


 

 

Another Stream - 시작되는 흐름 -

 

 

 

 

 

 지하 연합의 2대 수장, 눈의 여왕 앤지 헌트는 지금 [코어 레너드]의 연합 지부에서 생활하고 있다. 아직까지 분쟁에 결말이 나지 않은 이상 총수로서 [코어 레너드]를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회사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미 고령인 명왕은 브뤼노 올랑을 전권대리인으로 임명하여 관련 업무를 일임하였다.


 여느 때와 같은 하루. 앤지는 아침 일찍부터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녀에게까지 올라오는 서류는 하나같이 중요한 사안. 서류를 꼼꼼하게 검토하고 가부를 결정한 후 사인을 한다. 필요하다면 추가 서류를 첨부하여 정리하는 손길에 어색함은 없었다. 이런 모습을 본다면 누구라도 앤지가 연합의 총수가 될 자격이 없다고 비웃지 못하리라. 그녀가 아직 스물 중반의 처녀라고 한들 말이다.


 그런 앤지의 집무실로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들었다. 살짝 눈살을 찌푸린 앤지였지만, 그녀는 또한 관대한 상사였다.


 "무슨 일인가요?"


 "총수님! 지…… 지금 지부 건물 앞에 웬 사람이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손님인가요? 그렇다면 접객을 해야지, 저한테 뛰어 올 이유가 없을 텐데요?"


 "손님이면 저도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니까요! 정말,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갑자기 사람이 생겨났어요!"


 여기까지 듣자 앤지는 릭 톰슨을 떠올렸다. 그가 다시 여기 올 일이 있을까? 그녀는 지체 없이 안내를 명했다.


 "제가 나가 봐야겠군요. 그곳이 어디죠?"


 "건물 정문 바로 앞입니다. 아, 저…… 저기 보이는군요."


 앤지의 부하는 집무실 창문을 가리켰다. 그 너머로 보이는 인영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실루엣. 결단코 릭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을 눈에 담는 순간, 앤지는 어떤 강렬한 '예감'을 느꼈다.


 그녀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집무실을 박차고 나섰다. 급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내려가고, 굳게 닫혀있는 정문 앞에 잠시 멈추어 섰다.


 매무새는 완벽하고, 머릿결도 곱게 다듬어져 있다. 타인의 앞에 나설 준비는 만반. 그녀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정문을 열어젖혔다.


 그 '사람'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앤지의 심장이 고동을 더해갔다. 어쩌면, 어쩌면 저 '사람'이야말로…….


 갑자기 열린 정문으로 고개를 돌린 '사람'. 앤지는 그 '사람'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했다. 그녀는 미소 지으며 그 '사람'에게 다가섰다. 황금빛 눈동자는 반짝였고, 아름다운 알토의 목소리는 마침내 [신비한 시작]을 말했다.

 

 

 

 

 

 

 

 

 

 

 

 

 

 

 

 

 

 자, 이 순간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흐름]이 생겨났다. 아직은 아무도 알 수 없는 미래. 그렇다. 바로 이 순간이야말로 [신비한 시작].

 

 


 더불어 비로소, 지금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이야기. 그건 바로 [당신]의 이야기이다!


 

 

 

이클립스 크로니클(Eclipse Chronicle) Fin

 

 


 

 

 

 

 

오타, 오류지적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다들 좋은 하루 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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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 OK Oh! 냠~ Love U~ 궁금해! YES! 히힛~
안녕하십니까? 예~예~ 모든 것은 신의 뜻... 불허합니다. 의외군요. 나 원 참... 시작할까요? 강화인간!!
안녕? OK 궁금하네요. 역시! 재미있네. 깜짝이야! 아~니? ...
웃음 두려움 만족 놀람 동의 분노 좌절 인사
안녕하세요? 넵!! 미안해요!! 앗! 좋아요! 엣헴. 추천! ㅠㅠ
안녕하심까~ 피- 좋다! 못마땅해... 곱다~ 덤비라! 후우- 아슴찮다..
허~허~ 아, 아니... 헐! 흠흠... 끄응... 시, 식은땀이.. 엥? 후어어..
후훗~ Trick or Treat! 사.탕.내.놔. 소녀... 억울하옵니다... 사, 사탕 주세요! 해피... 핼러윈... 날 위해 사탕 정돈 줘야지? 목표? 당연히 사탕이지!
안녕~ ?? 피- 어머! 흐어 오오- 안돼! 랄랄라
우쭈쭈 하하 하? ?? 이거 참... -_- 안녕하십니까 안됩니다
ㅇㅅㅇ 으르릉... 나, 나! (정색) 깔깔 아니야!! 뿌잉 메~
안녕하십니까! 흐응? 흐으으응?! 척! 칫.. 좋-았어! 엥? 후에엥-!!
칫 엄숙하고 근엄하고 진지하다 믿습니다 내 안의 ...가 깨어난다 영업 중 할많하않 충격! 공포! 둠칫 둠칫 두둠칫
파이팅!! 고마워~ 졌어... 히힣 극대노 미안! 거울 앞에서 자의식 과잉된 십대 라이언
저는 지금 극공입니다. 훠이훠이 하.하.하. 매우 화가 납니다. 총기 손질중입니다. 저와 한 판 붙어보시겠습니까? 당신에 대한 정확한 진단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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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기쁩니다. 축하합니다. 칭찬해 드리죠. 놀랍군요. 심기가 불편합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매우 화가 나는군요.
짝.짝.짝.짝 고마워... 멋있어... 지금 이게 뭐하시는 거죠? 대다나다 히에엑... 헉! 깜짝 놀랐습니다. 그만해!!!!!
옳소! 감탄했습니다. 흐음 후회할거요! 감사합니다. 놀랐습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정색) 축하드립니다. 칭찬해 드립니다. 놀랍군요. 매우 화가 나네요. 큰 충격입니다. 놀랍군요.
이럴수가... 감히! 네가! 아니?! 장하군! 응?! 좋다! 그건 아니다! 고맙다!
감사합니다 잘 못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매우 화가 나는군요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좌절상태입니다 감탄했습니다 칭찬합니다
멋지군! 좋았어! 하하! 축하하오! 아아.. 5분전인데. 커피한잔 하겠소?
승리의 정유년! 정의로운 새해복! 극.한.공.성. 복! 받아랏! 음~ 직장인의 정석
많이 배웠습니다! 대단합니다! ?!! 축하드립니다 뭔가.. 부족해요 짝짝짝! 각오하세요! 으윽!
성탄의 축복을~! 메리 X-MAS~! 화이트 크리스마스야 해피~ 크리스마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성탄이구나~
Good! Thank U Missing U Useless It's pretty good Oops WHY! Please wait
멜빈 미이라와 고스트 제피 할로윈에는 카를로스호박 히카르도의 사탕 탄야의 마녀 분장..? 잭-슈타인 강시 루시
기자님의 감탄사 : 호-오! 기자님의 일과 : 신문 보기 기자님의 사과 : 이거 실례! 기자님이 놀라면 : 어이쿠! 기분이 좋아 보이는 잭 기분이 나빠 보이는 잭 천진난만한 잭 상큼한 인사를 날리는 잭
좋군요! 좋은 시간 되소서 Merry 추석~! 우와~! 호~오! 가득해요~! 짱인데! 품위있군
Chu~♡ 파이팅! 우와앙.. 졌어 ㅠㅠ 이겼다! 흐~음? 뜨헉! 돼.. 됐거든! 사.. 살쪘..!
훌륭합니다 궁금하네요 에구머니나! 슬프네요... 경멸스럽군요.. 후훗~ 뭐라고 하셨죠? 이, 이럴수가...!
아이작의 멋진 모습 이글이라 샤샤샤~ 트리비아 슬라이딩 시바 포는 달린다 까미유도 달린다 라이샌더 달린다 마를렌 점프! 샬럿 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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