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탱커 아이작의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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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8 23:42:58
우리가 ‘영웅’이라고 부르며 존경하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당신이 트와일라잇의 능력자라면 ‘영웅’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당연히 루이스를 떠올릴 것이다. 본래 활용할 길이 없어 보였던 능력을 순간적인 기지와 침착함으로 극복하고, 모두가 패배할 것이라 예상했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쟁의 주역 말이다. 물론 그가 영웅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이는 없으며 실제로도 그는 절체절명의 위기로부터 예상 밖의 활약상을 선보였기에 영웅이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다.
하지만 루이스처럼 역경을 극복해낸 한 명의 주인공으로서 모두에게 알려진 이들만이 영웅인 것은 아니다. 그처럼 ‘화려한 영웅’의 그림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알고 보면 그들 못지않게 활약을 한 ‘숨겨진 영웅’들이 이 세상엔 수도 없이 존재했고, 지금도 어딘가에서 묵묵히 자신의 사명을 위해 땀과 피를 흘리고 있다. 주인공으로서의 활약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주인공으로서 활약할 수 있도록 희생하는 자들. 자신의 이익과 결과에 눈이 멀지 않고, 동료를 위하겠다는 결의에 찬 그 눈으로 그들의 활약을 지켜보며 안위를 얻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되새기는 자들. 사이퍼즈의 능력자들은 그들을 ‘탱커’라 부른다.
공 트리를 타는 능력자라면 자신이 캐리를 하는 순간의 짜릿함을 늘 되새기며 공성전에 임한다. 자신이 날린 회심의 궁극기로 다수의 적군이 추풍낙엽 꼴이 되고, 웃음이 번질 만큼 많은 코인이 한꺼번에 들어온다. 그 기세를 몰아 소극적으로 변한 적들을 하나씩 잘라먹다가 적진의 HQ를 부순 후, 결과 창에 나오는 1만점이 넘는 점수와 그 옆에 붙어 있는 자랑스러운 에이스 마크를 기억할 것이다. 아군들의 칭찬을 받을 때면 그 우쭐해지는 기분 탓에 다음 공성전에서도 이번 게임 같이 캐리를 하게 되진 않을까 내심 기대하게 된다. 그 게임에서 자신이 아군들의 영웅이 된 것임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 당신은 영웅인 것이다.
그런 순간을 가슴에 안고 임한 공성전들에서 연이은 참패를 당한 후, 게임에 대한 열의가 사라질 만큼 풀이 죽어버린 미아는 어떻게든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다시 일반전에 임한다. 이번 공성전에서 지난번처럼 적 탱커와 딜러들의 먹잇감이 된다면 이번 게임을 마지막 판으로 하고 사이퍼즈를 끌 것이다.
원거리 딜러라는 역할은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워서, 보이는 적을 멀리서 공격한다고 해서 본인의 몫을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상대편의 근, 원거리 딜러보다 높은 레벨을 유지하면서 꾸준히 레벨을 올리지 않으면 활약하기 어렵기 때문에 레벨에 상당히 민감해졌다. 철거반이나 립을 돌다가 적에게 물리거나 원거리 스킬이 스치기만 해도 아군의 지원이 당장에 없으면 살아남기가 쉽지 않았다. 원거리 스킬은 어떻게든 임기응변으로 대처한다고 해도 상대 근거리 캐릭터의 진입은 도저히 단독으로 막을 수도 버틸 수도 없어서, 자신이 미아로서 공성전에 임하는 것이 과연 최선의 선택인지 고민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러나 미아는 여전히 캐릭터 선택창이 뜨면 미아를 고른다. 세계수 한 번에 적들이 하늘 높이 날아가고 트리플 킬이 뜨던 그 순간의 짜릿함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 계속 게임이 말렸지만, 사이퍼즈는 아군과 상대의 조합과 실력에 따라 결과가 크게 변할 수 있는 게임인 만큼 모든 공성전이 자기가 원하는 그림대로 그려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건이 좋다면 다시 그 트리플 킬, 아니 그 이상의 짜릿함을 느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순간의 짜릿함과 자신이 활약을 했을 때 아군들이 자신에게 보내는 찬사는, 적 근거리 캐릭터에게 약하다는 점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이겨낼 만큼 자극적이었다.
캐릭터 선택이 끝난 후 뜨는 로딩 창을 보며 미아는 싱긋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아이작, 레베카, 나이오비, 까미유. 이 조합의 능력자들이 각각의 능력을 발휘하며 시너지를 낸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었고, 사실 일반전에서 그런 시너지를 기대하는 것도 무리였지만 한 눈에 보기에 결코 나쁜 조합은 아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기가 활약할만한 조건이 제법 갖춰진 조합이라는 것이었다. 세계수 트리플킬의 순간이 다시 미아의 머리를 스치면서 그녀에게 ‘이번 게임은 잘 될 것 같다.’는 활력이 싹텄다.
그러나 적 조합도 결코 녹록치만은 않았다. 휴톤, 트릭시, 드니스, 토마스, 마틴. 캐릭터들의 특성상 아군의 조합보다 절대적인 딜이 부족할 수 있는 조합이었지만 수비력 하나는 이쪽보다 훨씬 튼튼한 조합이었다. 저들의 무력화 별 개수를 다 합치면 무려 10개가 넘어간다. 아군 아이작과 레베카가 걱정될만한 수준이었으나, 미아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원거리 지형무시 광역기술은 어렵지 않게 아군들이 적진에서 활개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이다. 심지어 한타 중 이들에게 정신이 팔린 적들 사이에 세계수를 세움으로써 한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 드니스의 무슨 손길인지 뭔지 꽃이 되는 방어 기술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적 원거리 캐릭터들에게 특별히 세계수를 빠져나갈만한 방법은 없었다.
“쯧.”
점프 기어에 올라타기도 전에 가면 너머로 혀를 차는 아이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아는 그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저들 중 한 명만 있어도 그의 입장에서는 항상 자신에게 무력화 기술이 들어오지 않을지 예의주시할 만큼 부담이 될 텐데, 두 명도 아니고 세 명이나 있다. 그가 활약하기는 어려워도 한 참 어려운 상대였다.
아군들이 점프 기어에 올라왔지만 카운트는 시작되지 않았다. 시작에 약간의 렉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 게임은 어쩐지 렉 투성이야, 라고 미아는 생각하면서 아군들에게 말을 걸었다.
“다들 템 트리가 어떻게 돼?”
미아가 말하자 아군들이 그녀를 돌아봤다. 미아가 특별히 무슨 생각이 있어서 이들에게 템 트리를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그저 시간이 남아서, 그리고 아군들, 특히 아이작과 레베카가 공을 탈 경우 자신이 활약하기 어려울 것이란 불안감에서 무심코 낸 말이었다.
“극방.”
아이작이 대답하자 미아는 ‘조건은 갖춰졌군.’ 이라고 생각하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아 입장에서 이런 조합에 아이작이 공을 탄다면 아이작의 템 트리 효율성을 떠나서 역시 껄끄러워 했을 것이다. 아이작은 금방 죽을 것이고 자신도 활약할 가능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공밸.”
이어서 레베카가 대답했다. 미아는 레베카에 대해서 잘 몰랐지만, 그녀가 탱커를 서기에 영 힘든 상황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들어 알고 있었다. 미아는 ‘레베카는 몸이 튼튼한데다가 슈아 이동기도 있는데 탱커가 못 된다니 그건 좀 이해하기 힘들다.’ 라고 생각했다. 단단함이 탱커의 전부였다면 레베카 그녀도 선호되는 탱커가 될 수 있었겠지만, 미아는 탱커에게 단단함 이상의 무엇이 필요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까미유와 나이오비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미아는 그들이 공 트리를 탈 것이란 걸 예상했기에 되묻지 않았다. 사실 공을 타든 방을 타든 그들은 나름 1인분을 하는 캐릭터였고, 그들이 어떤 트리를 타든 자신의 활약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진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귀찮게 다시 물어볼 생각도 들지 않았다.
요점은, 자신이 극공을 타서 야금야금 성장하다가 중요한 한타 때 모여 있는 적들을 향한 세계수 한 방으로 게임을 뒤집을 계획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군들은 이런 자신을 잘 보호하면서 판을 만들어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미아는 원거리 딜러가 아군들의 도움을 받아 제대로 활약하는 것이 게임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 게임의 주인공이 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기대는 10분이 지나지 않아 무너졌다.
초반엔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맞 타워를 했고, 이내 중앙의 2번 타워만 남겨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사이드의 시야를 보고 있는 아이작에 의지해, 미아는 상대의 서릿발과 바야바에 주의하며 장판기인 가시를 이용해 2번 타워를 살살 긁었다. 한 번 더 타워를 향해 가시를 뽑는 순간, 보이지도 않던 곳에서 휴톤이 날아와 자신에게 바야바를 질렀다. 미아는 순간 당황했지만 임기응변을 사용해 아군의 타워로 복귀했다. 그러자 아군 아이작이 타워 안에서 수성을 하고 있던 적을 향해 레이지런으로 달려 나갔고 타워에 숨어 있던 아군들도 그를 따라 전진했다. 휴톤의 바야바는 한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아이작은 빙결에 걸린 상태로 적 2번 타워에서 순식간에 녹기 시작했고 미아와 아군들은 진입한 휴톤을 어떻게든 막아보려 애를 썼다. 하지만 안면가드를 올려서 반딧불과 불놀이를 커버하던 휴톤은 갑자기 핵펀치를 질러, 타워 언덕 위에서 교향곡을 쓰려던 까미유를 피구름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다행히도 나이오비가 간신히 초열지옥을 질러 휴톤을 태우기 시작했다. 휴톤이 이 시점에서 죽는 건 시간문제였다. 미아는 적군 2번 타워에서 고통 받고 있는 아이작을 세계수로 지원해야 한다는 생각에 휴톤을 넘어 중앙으로 전진했다.
적들은 아이작을 녹이려고 궁극기를 포함한 온갖 기술을 쏟아붓는 통에 그의 시야에 드러나 있었고 이는 세계수를 넣기 좋은 상황이었다. 미아는 이펙트를 빨았다.
“더 크게…!”
그러나 미아의 세계수는 솟아나지 못했다. 마치 이 순간을 노리기라도 한 듯, 갑자기 트릭시가 왈츠로 접근해 세계수를 쓰려던 그녀를 끊어낸 것이다. 미아는 스페이스바를 연타했지만 임기응변은 이미 바야바에 의해 빠진 뒤였고 이어지는 쐐기와 패닝에 의해 셔츠 한 장도 구비해두지 않은 그녀는 그대로 사라졌다. 초열지옥을 맞고 너덜너덜해진 휴톤을 어떻게든 녹이려던 나이오비도 트릭시의 원무를 끊지 못하고 그대로 갈려나갔다. 적 타워 앞에서 얼어붙었던 아이작은 나이오비가 휴톤에게 초열을 쓴 시점에서 죽은 지 오래였다. 레베카는 아이작이 진입할 무렵 상대 2번 타워 옆 골목으로 들어갔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죽어 있었다. 드니스가 1킬을 한 것을 봐서 공밸인 그녀는 드니스에게 공격을 허용한 모양이었다.
초반에 말린다고 해서 곧 게임이 패배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게임의 전체적인 양상이 불리하게 흘러가는 것은 사실이다. 패배의 5전광에 이어 한 명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적들에 의해 아군의 2번 타워가 순식간에 박살났고, 적들이 희희낙락거리는 소셜 보이스 소리가 아군들에게도 들리기 시작했다.
2번 타워를 차마 긁을 수 없었던 미아와 아군들은 차라리 때마침 등장한 트루퍼를 녹임으로써 역전을 꾀하려 했지만, 스캐닝으로 위치를 낱낱이 들킨 후 아차 싶어 빠지다가 휴톤과 트릭시에 의해 뒤를 잡혔다. 아이작은 이들을 지원하다가 적 원거리 캐릭터들에게 무력화되어 녹았다. 방금 패배했던 한타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다. 두 번의 완패, 상황은 한 마디로 절망적이었고 아군들의 사기는 꺾일 대로 꺾여서 살아나질 못했다.
“망했어.”
한 순간이나마 세계수 대박궁을 꿈꿨던 미아는 본진 앞에 가만히 멈춰 서서 아군들에게 불만을 토했다. 적에게 맞아 죽는 것이 게임이 목적인 마냥 아무 것도 못하는 아군들이 차라리 적이었으면 싶었고, 판만 만들어 준다면 게임을 결정지을 능력이 있음에도 판이 안 되어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탈주 충동으로 변해 그녀를 덮쳤다.
“너무 상심하지 마. 게임은 질 때도 있는 법이니까.”
위로의 말을 건넨 것은 아군의 그 누구도 아닌, 적군 휴톤이었다. 그 말을 들은 미아는 자신들을 약올리는 휴톤에게 갖은 욕을 날리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다. 미아가 엔터를 눌러 생각나는 대로 휴톤에게 할 욕을 쓰고 있는데, 채팅창에 또 누군가가 말을 했다.
“닥쳐. 쓰레기.”
그 말을 한 것은 아이작이었다. 미아는 욕을 치다 말고 채팅창을 닫았다. 그가 휴톤에게 욕을 하는데 같이 욕을 하면 아이작과 한 패 같아 보일 것 같고, 자신의 기분을 대변해 욕을 해줬기 때문인지 기분이 조금 풀렸다. 들어가서 납치는커녕 방해도 못하고 녹아드는 게 전부인 그에 대해 느꼈던 한심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레벨은 이미 한참 차이가 나서, 게임 시작 10분이 넘어선 중반에 접어들고 있음에도 미아의 레벨은 30대를 넘지 못했다. 아이작과 레베카의 경우에는 미아보다 더 레벨이 낮아서, 이젠 적 원거리 캐릭터들의 공격에 스치는 순간 버티기 힘들 정도였다. 어찌어찌 한타를 피하며 아군들을 한두 명씩 희생하면서까지 적의 2번 타워는 부쉈지만 이미 적 휴톤은 방어 아이템을 다 찍어 장갑과 모자까지 욕심낼 수준이 되었고 아이작은 아직도 방어 아이템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이 게임의 목적은 이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비참하게 지지 않는 것이었다.
미아를 비롯한 원캐들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립을 갉아먹으며 휴톤이나 토마스, 트릭시 같은 이니시에 능한 캐릭터들이 언제나 올까 노심초사하고 있었고, 아이작은 이들 주변을 돌아다니며 시야를 밝혔다. 아이작은 간간이 토마스와 마주쳤지만 거리가 너무 멀뿐더러 아군들은 한참 뒤에서 립을 먹고 성장하느라 바빴기에 그의 서릿발을 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결국 게임이 20분 중반대로 흘러 트루퍼가 나왔다. 완전히 압도된 양상을 생각해보면 아군의 저항이 거세서 이 시간까지 버텼다기보다는, 죽었던 아군들의 리스폰이 너무 빨라서 적들이 타워를 안심하고 칠 수 없었던 경향이 더 강하다. 저 트루퍼가 마지막 트루퍼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아군들은 최대한 정신을 집중해서 트루퍼 주변에 돌아다니는 적이 없는지 살폈다. 이번에도 “쉿, 조용히.” 라는 마틴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면서 아군의 위치가 낱낱이 공개됐고, 적들이 보이지 않는데 적들은 아군들을 모두 보고 있다는 이 불리한 상황에서 이들은 적들을 낚으려 하기는커녕 물리지 않도록 빠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적 트루퍼에서 공방이 버프가 나왔고 아군들은 4, 5번 타워의 체력이 바닥나는 걸 지켜봐야 했다. 미아가 세계수를 사용해 저항해봤지만 기껏해야 휴톤에게 주나마나한 타격을 줬을 뿐이었다. 성채가 깔리자마자 서릿발과 패닝이 나이오비의 진입로를 차단하고, 계속 그녀를 평타로 견제하는 적들의 화망이 너무 견고해서 나이오비가 궁극기를 노려볼 건덕지도 없었다. 아이작과 레베카가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던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이 둘은 타워 앞에서 시야만 보면서 얻어맞을 때마다 까미유에게 회복을 받는 식으로 간신히 버텨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적들은 수호타워까지 완전히 부술 기세로 들어오지는 않고 이내 발을 뺐다. 이건 나이오비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적들이 Y존 근처에 서서 춤을 추는 동안 미아와 아군들은 HQ 근처에 돌처럼 박혀 휠만 굴리고 있었다. 수호자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기권을 진행할 수도 없었고 이들은 나가기 버튼을 누르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혀서 립도 먹지 않았다. 게임은 이미 끝났고 패배의 결과가 나오길 기다릴 뿐이었다.
“야. 쓰레기들. 이리와 봐.”
아이작이 아군들을 불러모았다. 그들은 머리를 긁으며 이제 와서 뭔 소리를 하려는 건지 들어나 보자는 태도로 집결했다.
“마지막 한타야. 졌어, 우리는. 그래도 내가 알아낸 게 있어, 지금까지 죽어가면서. 저 녀석들 처음에는 방어 트리를 탔어. 하지만 점점 장갑이랑 모자를 사는 것 같더군. 게임이 만만하게 풀리니까. 이게 무슨 말인 지 알아?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야, 아직은.”
그의 말이 아군에 대한 말 뿐인 위로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지만, 아이작은 끝까지 진지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전략을 바꿔, 쓰레기들. 나는 또 진입할 거야, 트루퍼가 다시 나오면 말야. 그 때 쓰레기 의사랑 분홍머리 쓰레기는 조금 뒤에 떨어져서 날 따라와. 적들에게 들키지 말고. 쓰레기 의사는 궁각만 잡힐 거리면 돼. 분홍머리 쓰레기는 의사를 지켜. 그리고 나무 쓰레기랑 불타는 쓰레기, 너넨 날 따라오지 마. 뒤에서 그대로 있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나무 쓰레기, 너 짜증나. 아까부터 자꾸 날 도우려는데, 하지 마. 내가 죽든 어떻게 되든 날 내버려 둬. 그리고 뒤랑 옆에서 들어오는 쓰레기들이나 막아.”
미아는 아이작이 하는 소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임무는 탱커를 도우면서, 그에게 어그로가 끌린 적들을 세계수로 모조리 띄워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진입하면 쓰레기 돼지랑 기계 쓰레기가 널 잡으러 온다. 그걸 막아. 그래, 너는 이 공성전에서 중요한 녀석이야.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 승부가 결정된다. 나를 도우는 건 돼지 쓰레기랑 기계 쓰레기가 죽은 다음임을 명심해.”
“그 때는 늦어. 휴톤이랑 트릭시를 막으면 당신은 이미 죽었을 거라고.”
“그래. 난 죽어. 상관 없어. 네가 기계랑 돼지를 녹이는 동안 난 죽게 된다. 내가 죽으면 얼음 쓰레기랑 꽃 쓰레기, 모자 쓰레기가 너넬 족치러 올 거야. 그 때를 노려. 그게 네 최후의 기회일 수도 있고, 최고의 기회일 수도 있어. 알아서 잘 판단해.”
미아는 여전히 아이작을 이해할 수 없다. 그녀는 과거의 공성전에서 겪은 경험들을 기억한다. 진입한 후 녹아내리면서, 자신을 지원하지 않은 것에 대해 역정이 난 나머지 자신에게 온갖 욕을 날리는 탱커들을 기억한다. 그러나 아이작은 그들의 욕과는 완전히 다른 말을 했다. 자신이 설령 죽더라도, 뒤를 치는 녀석들을 먼저 잡으라고 한다. 그러면 아이작 자신은 반드시 죽는다. 탱커들이란 자신이 날뛰고 있을 때, 아군의 지원으로 자신을 괴롭히던 적들이 쓸려나가는 것을 보는 게 낙이 아니었던가.
트루퍼가 나왔다. 아이작과 그들은 본인들이 좋든 싫든 더 이상 논의할 시간이 없었다. 아이작은 벌써부터 미니맵에서 조금씩 움직이는 트루퍼를 향해 달려나갔고 아군들은 그를 따라나섰다.
아이작이 앞서 나가면서 적들의 위치가 미니맵에 찍히기 시작했다. 방심한 듯한 적 원캐들은 옹기종기 모여서 트루퍼를 치고 있었고 아이작의 아이콘과 그들의 아이콘이 겹쳤다. 아이작이 그대로 다시 녹을지 아니면 다른 활약을 보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미아는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평소대로의 미아라면 아이작을 뒤따라서 그들에게 세계수를 박았을테지만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억누르며 아이작으로부터 조금 떨어져있었다.
곧 “밝은 빛으로!” 하며 까미유가 교향곡을 키는 소리가 들렸고 그의 옆으로 휴톤이 날아왔다. 까미유가 혼자 있었으면 휴톤에게 물려 죽었겠지만 레베카가 휴톤을 막아섰다. 까미유는 다행히 아군 진영으로 복귀했고, 나이오비와 미아와 까미유는 휴톤과 싸우기 시작했다. 레베카는 이내 골목길을 통해 아이작에게 나아갔다. 그러면서 그녀는 트릭시와 마주쳤고, 트릭시는 방향을 바꿔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나이오비가 초열지옥을 넣어 휴톤을 눕혔고, 미아와 까미유는 엎어진 휴톤에게 스킬을 박으면서 트릭시의 진입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교향곡을 받은 덕분인지 아이작은 휴톤과 비슷한 체력이 되도록 버텼고, 놀랍게도 적 토마스가 아군 진영을 향해 날아왔다. 아이작이 어떻게든 쓰레기를 돌려 아군에게 던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적 마틴과 드니스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이작이 죽은 것이다.
아무리 단단한 휴톤이라고 해도 이들의 집중 포화에 버티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나 나이오비의 초열지옥이 가하는 화상 데미지는 탱커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아서, 일단 제대로 맞았다면 살아나기가 어렵다. 토마스가 휴톤의 주변에 넘어졌고 미아는 특유의 넓은 공격 범위를 이용해서 휴톤과 토마스를 동시에 견제했다. 토마스가 일어나서 가시에서 빠져나가려고 애를 쓰고 있고, 휴톤은 체력이 거의 다 바닥나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이제 때가 온다. 드니스와 마틴이 이들을 지원하는 때가 말이다.
“스파이럴!”
그 소리는 미아의 생각을 벗어난 곳에서 들렸다. 그녀는 자기 바로 옆에 2단 높이 상자가 있음을 잊고 있었다. 도약을 사용해서 맵의 고지대를 자유롭게 누비는 트릭시는 언제 어디서 등장할지 알 수 없다. 휴톤이 다 녹여가는 만큼 까미유와 나이오비가 미아와 함께 모여있는 상황에서 그 소리는 한타의 끝을 알리는 소리였다, 미아는 아찔해졌다. 트릭시가 떨어지며 아군들을 휩쓸기 시작한다.
그러나 미아는 이내 어리둥절해졌다. 트릭시의 궁극기가 도중에 취소당한 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트릭시는 저 멀리 날아가 넘어져 있었고, 궁극기를 사용한 레베카가 트릭시에게 다가가 크래시를 박았다. 휴톤은 일어나서 최후의 발악으로 나이오비에게 어퍼를 날렸고, 미아는 뿌리를 사용해 휴톤을 마무리 지었다. 동시에 뿌리에 토마스가 걸리고, 심지어 뿌리 끝으로 누군가가 걸려서 데미지가 더 들어갔다. 그것은 미아가 정말 마지막으로 활약할 기회라는 신호였다.
“솟아나라!”
네 자리수의 데미지가 두 개, 아니 세 개가 들어갔다. 아군들은 세계수가 솟아난 곳으로 달려갔고 그곳엔 너덜너덜해져서 넘어진 적들이 보였다. 미아와 나이오비, 까미유는 곤죽이 돼서 도망칠 생각밖에 못하는 그들을 마무리했다. 오른쪽을 보니 5전광, 아군의 5전광이 아닌 적의 5전광이 보였다. 레베카가 아군과 합류해서 이 상황이 납득되지 않아 정신이 없는 미아에게 외쳤다.
“빨리 와! 이겼다고!”
공성전을 하다보면 타워란 것은 정말 덧없음을 알게 된다. 레벨이 낮을 때는 하나 부수는 데도 갖은 고생을 해야 하지만, 레벨이 높아진 뒤로 한 번의 한타가 끝나면 타워는 성냥갑이 돼버린다. 후반전의 리스폰 바는 장대처럼 길어서 이 시간동안 적의 방어 타워와 수호 타워, 심지어 수호자와 HQ까지 부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지금까지 별 말이 없던 적들은 순식간에 “이걸 진다니 말도 안 된다.” 같은 소리를 늘어놓으며 한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역전극에 어이가 없어, 서로 욕을 할 기분조차 들지 않아 보였다. 적의 4, 5번 타워가 순식간에 박살이 나고, 수호자가 트루퍼처럼 순식간에 녹아내리고, 수호타워는 아군들이 스킬 한두 번만 써주면 터져버린다. 적의 리스폰이 아슬아슬하게 맞춰지는 타이밍에 적의 HQ가 부서졌고, 공성전이 끝나면서 점프기어를 타고 내려온 적들은 기가 막혀서 멀뚱멀뚱 서있기만 했다.
“말도 안 돼.”
“그래. 그런데 그게 실제로 일어났어.”
“잘 했어. 솔직히 그 때 궁극기가 안 들어갔으면 우린 졌어. 이 정도면 지금까진 잘 못했어도 팀의 영웅이라고 할 만한데.”
미아와 까미유는 하이파이브를 했다.
“하지만… 이 게임의 영웅은 내가 아닌 것 같아.”
미아는 미니맵을 봤고, 점프 기어를 타고 날아오는 가면 아이콘을 봤다. 미아는 아이작과 만나기 위해 지났던 길을 돌아가다가 떨어진 가면을 주웠고, 제법 황급하게 뛰어오는 아이작과 마주쳤다.
“내놔. 나무 쓰레기.”
“어라. 아저씨. 제법 잘 생겼네.”
큰 손바닥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아이작은 아군이 아니었으면 당장에라도 주먹을 날릴 얼굴을 하고는 미아를 노려봤다. 손가락 사이로 살짝 드러나 그녀를 노려보는 눈매가 상당히 날카로워 보이기는 했지만, 미아는 그런 외모마저 마냥 두렵지 않았다.
“내놓으라고.”
“자. 여기요.”
가면을 받은 아이작은 손에 들기 무섭게 가면을 쓰고는 가면을 이리저리 고쳐 만졌다. 어딘가 얼굴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모습이었고 편집증적인 느낌이 나긴 했지만, 미아는 그런 생각은 뒤로하고 아이작에게 꾸벅 인사했다. 그는 인사를 받을 만 했다. 자신을 희생해서, 아군이 활약하도록 도운 사람에게 감사의 인사는 해주는 것이 맞다고 미아는 생각했다.
“아저씨가 이 게임을 이기게 했어요.”
“난 그런 말 듣고 싶어서 게임 하는 게 아냐. 쓰레기.”
“그럼요?”
“….”
“그럼요?”
“잡아서 부숴버리는 맛에 하지. 쓰레기들을. 날 보면 벌벌 떨면서 도망치기 바쁜 쓰레기들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만둘 수가 없다고. 이 지거리를.”
“아 그렇구나.”
가면을 계속 고쳐 쓰며 뒤돌아 떠나는 아이작을 향해 미아가 말한다.
“아무튼 당신은 이번 게임의, 그리고 제 영웅이 됐어요.”
가면을 제대로 썼는지 머리를 슥슥 만지던 아이작은 잠깐 멈춰서서 말했다.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