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yphers

  • [팬픽]일식의 시대, 일세의 영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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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ta [52급]

2012-03-14 17:57:40

작가 서문

 

이 글을 쓰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얼마 전 나의 아버지를 먼 곳으로 떠나보낸 아픔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아직 살아갈 날이 많으셨던 나의 아버지는 거대한 시련을 만나셨고, 그에 당당하게 맞섰다.

 

병마가 아버지의 몸을 좀먹고,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아아, 아버지! 당신의 숨결을 기억합니다. 당신의 표정을 기억합니다. 당신의 삶을 기억합니다.

 

부디 저와 어머니의 추억 속에서 영원토록 행복하기를. 그리고 저에게 당신이 채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할 용기를.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께 이 글을 바칩니다.

 

 

-일식의 시대, 일세의 영걸-

 

-序-

 

 

어느 날 태양이 검게 물들었다네


화창하던 햇빛은 사라지고


사방이 어둠으로 채워졌다지?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네


이제껏 없었던 시대가 열린 것을!

 

 

 

마침내 완전한 암흑이 찾아왔을 때


검은 신사가 눈을 떴다네


그리고 찬란한 광명이 돌아왔을 때


하늘의 군주가 눈을 떴다네

 

 

 

시대는 영걸을 낳았고


영걸은 역사를 써나간다네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네

 


<유럽의 뒷골목에서 불리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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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유럽.


 산업혁명이 일으킨 물결이 일파만파 퍼져 나간 대륙은 기분 좋은 소란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일찍이 없었던 긴 평화. 피로 얼룩진 중세의 역사를 넘어 마침내 인류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급속한 경제의 발전은 사회에 더욱 깊은 음영을 드리워지게 하였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격차 또한 손쓸 수 없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러한 점을 고려하더라도, 과거와 그다지 바뀐 것이 없는 것 같더라도, 지금의 시대가 과거의 어떤 때보다도 살아가기 나쁘지 않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삶에 환희했고, 앞으로의 시간에 희망을 걸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 둘 등장하는 문호, 학자, 사상가들은 그런 미래를 대변했다. 그런 사람들의 등장은 인간이 더욱 진보된 시대를 살아갈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임이 틀림없었으니까. 과거에 얽매여 있으면서도 인류는 차근차근 한 발짝씩 나아가고 있었으니까.


 하나 유럽의, 아니 전 세계의 누구도 몰랐으리라.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시대'는 바로 지금 이 순간 태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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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이, 이봐. 저기, 저 하늘 좀 봐!"


 "어억? 저게 뭐야? 해가…… 태양이 사라지고 있어?"


 "아냐. 그건 아니고, 그냥 뭐로 덮는 것처럼 해가 가려지는 걸 거야. 어릴 적에 조부님이 얘기해 주셨는데, 증고조부님도 이런 일을 겪으셨다더라."


 "그… 그래? 별문제는 없는 거겠지?"


 "아무렴. 이대로 마치 밤이 된 것처럼 어두워졌다가, 다시 날이 밝는 것처럼 태양이 나타난다더라. 허 참, 설마 내가 이런 걸 두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그것참, 신기한 일이군. 어찌 한낮에 밤이 찾아온다는 건지, 원."


 1860년의 어느 날. 거짓말과도 같은 일식이 온 세계를 덮쳤다. 흔하지 않은 자연현상이지만, 이미 인류는 이 드문 현상에도 혼란에 빠지지 않을 현명함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곧 모습을 드러내야만 하는 태양이 침묵한 지 반나절이 지나자 세계는 불안에 빠지기 시작했다.


 각국의 정부는 혼란과 불안에 빠진 시민을 수습하고자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고, 다행히도 큰 소요사태 없이 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마침내 하루가 지나자 어둠은 거짓말처럼 물러났고, 햇살은 다시금 온 누리를 비추기 시작했다.


 많은 학자가 이상 일식을 규명하고자 노력했으나 결국 이 특별한 기상 현상은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로 역사에 남겨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온 세계의 전체, 즉 지구의 모든 곳이 하루 동안 완전히 밤의 장막으로 덮였다는 것이다.


 당시의 천문학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아니 지금에서도 밝혀낼 수 없는 이 신비로운 일식은 1860년의 어느 날 이후로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날이 잊힐 일은 결코 없으리라. 왜냐하면, 이 일식이야말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됨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니까.

 

- prologue -


 흑염 하이드.


 능력자 1세대를 이끈 두 인물 중 하나. 지하 연합의 초대 수장. 우리가 알고 있는 흑염 하이드란 저 정도의 의미밖에 없다. 하지만 그도 분명 감정이 있고 심장이 뛰는 한 사람이었고, 흑염이 아닌 하이드로서의 인생이 있었다.


 이토록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의 삶이 반추된다는 사실은 분명 반성해야 하나, 흑염이라는 이름에 가려진 하이드라는 사람은 어쩌면 너무나 나약하고 우리와 다를 바 없었기에 눈길이 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능력자 1세대와 지하 연합의 초창기 맴버가 아직 생존해 있고, 그들이 젊은 시절을 정확히 기억해 낼 수 있는 동안에 이 위대한 인물에 대해 알아보기로 마음먹은 것은 내 인생 최고의 선택 중 하나였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도 하이드는 그저 역사책 속에서 흑염이란 단 한 줄로 표현되어버렸을 테니까.


 지금부터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한 사내의 이야기이다.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사랑받길 바라고 사랑하길 바라던 그런 사람. 원하던 원치 않았던 시대를 대표할 만한 힘을 가졌고, 불꽃이 타오르듯 삶을 불태운 끝에 마침내 시대의 상징이 된 남자.


 그리고 사실은 우리의 가족, 친구, 이웃일 수도 있었던 평범한 사내.


 그와 처음부터 함께 한 지하 연합의 창립 맴버는 하이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원했던 단 한 가지가 있었죠. 가족. 그때고 지금이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하이드 또한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흥미 본위로 결심한 주제였을지도 모르지만,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작가로서 하이드의 삶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느꼈다.


 신이 아닌 이상 그때의 감정을 설명할 순 없겠지만(그리고 신이라 하더라도 나의 사명감을 방해하진 못했을 것이다), 나는 운명적인 이끌림을 따라 하이드의 생애를 되짚어나갔다.


 그 결과물이 지금 여러분의 손에 들린 이 책이다. 독자 제현들이 이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나, 작가 개인으로서는 단 하나만 기억해주었으면 바랄 나위가 없겠다.


 아버지. 이 작고도 위대한 존재를 부디 잊지 말기를. 우리들의 추억 속에서 영원히 평안하기를.


<최초로 발간된 흑염 하이드에 관한 일대기의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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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의 남부에 위치한 나폴리. 항구를 끼고 발전한 이탈리아 남부 최대의 항구도시인 이곳 또한 일식이 드리운 베일을 벗어날 순 없었다.


 나폴리 중심부에서는 조금 떨어진 소도시. 이 도시에서도 꽤 외곽에 위치한 주택가. 조용한 거리에는 한 중년 사내만이 집 앞을 맴돌고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며 서성이던 중년 사내는 사위가 어두워지는 것을 느끼고 불안한 듯 중얼거렸다.


 "허, 이거 참.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에 이런 괴변이라니. 에라…… 씁."


 남성이 혀를 차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 집 안에서는 자신의 아내가 첫 출산의 산고를 치르고 있었으니까. 남편으로서, 곧 아버지가 되는 처지에서 길조만 보여도 모자랄 판국에 갑자기 사라지는 태양이라니? 결코, 기분이 좋을 리 없다.


 태양이 흩뿌리는 마지막 빛살이 사내를 비추었다. 살짝 그을린 탄탄한 육체. 썩 장대한 기골은 아니지만 단단하게 조여진 몸과 거칠게 깎아낸 바위 같은 이목구비는 그가 억센 사내임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흑요석처럼 빛나는 검은 눈동자, 짙은 눈썹과 격렬하게 굽이치는 칠흑의 곱슬머리는 지중해 남부에서는 꽤 흔한 라틴계의 외양이었다.


 집 안에서 가끔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신음은 남자를 더욱더 안절부절못하게 하였다. 혹여 잘못되지나 않을지, 이웃집에 살던 산파 노인의 손에 모든 것이 달리고 자신은 무언가를 할 도리도 없는 이런 상황. 사내는 '무력함'을 뼈에 사무치도록 새기고 있었다.


 마피아의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을 거칠게 싸워 온 이 강인한 사나이도 결국은 사람이요, 남편이요, 이제는 아버지가 될 그저 한 남자에 지나지 않았다.


 "신이시여, 똑똑하지 않아도 좋고 잘난 곳 하나 없어도 괜찮습니다. 부디 제 아내와 제 아이가 무사하기만을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인간은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하면 절대적인 존재를 갈구하기 마련. 결국, 사내는 평소에 찾지 않던 신마저 애타게 찾아 기도했다. 어색한 극존칭이 사내의 입을 뛰쳐나가는 순간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신음과는 다른 우렁찬 울음소리가 창밖으로 새어나왔다.


 사내는 일평생 그보다 빠르게 뒤돌아 달린 적이 없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응애"라는 첫 울음이 미처 끝맺기도 전에 집 안으로 뛰어드는 데 성공했으니까. 거칠게 집 안으로 뛰어든 남자였지만 아무도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마 어느 누군가의 출산이라도 그러할진저.


 새로운 생명의 탄생. 인류가 수백 번을 되풀이해 온 의식이었지만, 그것은 언제 어디에서도 가장 신성하고도 신비로운 순간이니까.

 

 산파의 손에서 꼬물거리는 아기. 어쩜 자신의 자식이 아닐까 못 알아볼 수도 없었다. 그 정도로 사내를 빼닮은 아기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몸을 뒤틀었다. 산파는 힘에 부치는 듯 아이를 힘겹게 얼러대며 몸을 씻기기 시작했다.


 "어이쿠, 지 아비 자식 아니랄까 봐 나오자마자 발버둥치는 것 보소. 보오, 자네 자식일세. 첫 자식이 사내놈이니 자네도 한 시름 놓았구먼그려."


 투박하게 말하는 산파의 말에는 안도의 감정이 스며들어 있었다. 지금껏 수많은 아이를 받아내어 온 감각이 이 아이가 온전하게 세상으로 나왔다는 것을 알려주었기에. 그 안도감은 사내에게도 전달되어 마침내 사내는 무너지듯 무릎을 꿇을 수 있었다. 산파의 말이 떨어지기 전까지 그는 뛰어든 자세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있었던 것이다.


 그런 탈력도 잠시, 사내는 허둥지둥 자신의 아내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사내의 눈길에 다시금 초조한 감정이 깃드는 듯했지만, 침대 위로 눈길이 향하는 순간 그런 감정은 날아가듯 사라져 버렸다. 그가 사랑하는 아내는 힘겹지만, 확고한 사랑을 담은 미소로 그들의 아기를 축복하고 있었으니까.


 "여보,정말 고생했어. 그리고 고마워. 정말, 정말 고마워…"


 사내는 감정이 북받치는 듯 그저 고맙다는 말만을 되풀이했다. 어릴 적부터 마을에서 함께 자라온 소꿉친구였던 아내. 자신과 막상막하일 정도로 거칠고 활달하며,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살갑게 굴던 어린 계집애. 소년 시절에는 그토록 당찼던 계집애와 평생을 함께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두 사람은 사랑하게 되었고, 마치 그렇게 되리라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평생을 함께할 것을 약속했다.


 "남자가 채신머리없이 울고 있어. 가서 빨리 아기나 받아서 와. 젖은 물려야지……"


 그의 아내는 평소와 같이 그를 구박했고, 사내는 직립자세로 경례를 올리고는 서둘러 산파에게서 아기를 받아들었다. 보면 볼수록 사랑스러운 아기. 한낮에 찾아온 밤? 그런 기현상 따위는 이 아기의 머리카락 한 올만도 못하다. 자신을 제대로 올려다보지도 못하는 이 핏덩어리야말로 자신의 보물. 아니, 우리 부부의 보물.


 "자, 어때? 사내놈이라 그런지 딱 날 닮았어."


 "무슨 헛소리야? 눈매며 콧대며 딱 날 닮았는데. 사내든 계집애든 당신 닮으면 인생 피곤해져. 아이를 위해서라도 날 닮았길 기도했어야지."


 "……죄송합니다. 마님."


 이런 작태를 어이없다는 듯 지켜보던 산파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 도구들을 주섬주섬 챙겨 들었다. 무사히 아이를 받아내고, 씻겨내고, 부부에게 아기를 전한 이상 산파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그녀는 세월이 선물한 지혜를 잘 간직했고, 따라서 여기선 서둘러 자리를 피해 주는 것이 더 좋은 일임을 알았다.


 막 방문을 나서려는 순간, 사내는 그 기척을 눈치채고 서둘러 산파를 붙잡았다.


 "아니, 벌써 가시려고?"


 "그럼, 다 늙어빠진 노구가 있어봐야 뭐 하겠나? 아이가 무사히 나왔으니 내 역할은 그걸로 끝난 게야. 뭔가 줄 생각이거들랑 하지도 말어. 그런 거 바라고 시작한 일 아니니께."


 진심이었다. 노인이 젊었을 때는 남편과 함께 크게 포도밭을 일구며 꽤 부를 쌓았고, 남편이 일찌감치 세상을 버린 이후로는 모아둔 재산과 자식들의 보살핌으로 썩 모자람 없는 노후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노인이 산파의 기술을 배운 것은 하릴없이 늙어만 가는 자신을 용납하기 어려웠던 것도 있었지만, 자신의 손으로 새로운 생명을 세상으로 이끌어내는 것에서 커다란 감동을 느꼈기 때문이다. 자신이 자식을 낳는 것과는 또 다른 감정. 그녀가 산파 일을 하면서 참 많은 아이를 받아내었고, 그녀는 그 순간마다 삶의 마지막 불꽃이 희미하게 명멸하는 것을 느꼈다. 태어나서 많은 것을 해왔고, 이제 살아갈 날도 많지 않다. 그러나 가슴 속에 피어오르는 이 작은 불빛은 그녀가 몸이 움직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산파의 일을 그만둘 수 없도록 인도하리라. 그리고 불빛이 피어난 수만큼 세상에는 새로운 가족이 생겨났다. 이 보람은 하찮은 보수 따위는 견줄 수 없는 최고의 보상이 아니겠는가?

 "무슨, 줄 사람은 마음도 없는데 스파게티부터 삶고 있으시나."


 "아니, 그럼 왜 붙잡고 지랄이여? 나 힘드니까 가서 좀 쉬고 싶네."


 "거 노인장 성질 한번 급하네. 아니, 이제 저놈 할머니가 될 사람이 왜 자꾸 딴 데 가려고 그러쇼? 가서 손주 놈 좀 얼러줘야 할 것 아니오."


 "…이건 또 뭔 빌어먹을 소리래? 내가 왜 저놈 할미여?"


 "지금부터는 할머니고, 내 어머니야. 이제 한가족이지. 마피아의 아이를 받았으면 당연한 일 아니오?"


 "개소리하지 말어. 내가 이 마을 마피아 놈들 아기 한두 번 받아본 줄 아나? 자네 같은 소리 하는 종자는 한 번도 못 봤네. 그러니 이 손 좀 놓으라니까, 놔."


 "그건 그놈들이고. 적어도 난 노인장이 이제 딴 집 사람이라고 생각 안 해. 누가 뭐라고 해도 노인장은 지금부터 우리 가족(Family)이야."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노파의 눈에 습기가 차올랐다. 가족. 이미 자식들은 전부 장성해서 독립했고, 그녀의 가족은 산산이 흩어진 지 오래였다. 노인의 머릿속에선 거의 희미해진 가족이란 단어가 상기되자 그 커다란 의미가 다시 한 번 낡은 심장을 두들겼다.


 "아, 빨리 이리 와 보라니까? 아니, 이제 가족인데 이런 말은 좀 그렇구먼. 흠흠, 자, 이리 와 보세요. 이제부터 저놈은 우리 부부 아들이지만 당신 손주 놈이기도 합니다. 어… 어머니."


 살짝 붉어진 얼굴로 말하는 사내 또한 심장이 간질간질해졌다. 소년 시절, 조직 간의 항쟁 와중에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고, 그 충격으로 어머니 또한 크게 약해졌고 시름시름 앓다 돌아가셨다. 보고 배운 게 마피아 짓이라 사내도 마피아로 사는 삶을 선택했지만, 그것은 참으로 재미없는 인생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말해왔던 진정한 마피아는 가족, 친구, 이웃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그들이 위험에 처하면 온 힘을 다해 도우며, 그럴 수 있도록 힘을 가지되 함부로 남용하지 않는, 책 속에나 존재하는 협객(俠客)이었다.


 굉장히 낭만적이었던 아버지의 지론. 하지만 그가 직접 현실에서 느낀 마피아는 이미 변질하여 있었다. 폭력 조직화 된 집단. 무력을 통해 횡포를 일삼고, 세력권을 넓히고 부를 쌓기 위해 다른 조직과의 전쟁을 주저하지 않는다. 시칠리아에서 시작된 마피아 정신은 이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빌어먹을 세계에서 결국 무릎 꿇지 않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아내 덕분이었다. 마모되어버린 감정을, 마음을 옆에서 채워주었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버티지 못했겠지. 마침내 살아남아 일반 단원으로서는 꽤 높은 위치인 카포레짐(행동대장)까지 올라갔고, 지금의 작은 주택가를 구역으로 인정받고 정착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소년기를 채웠어야 할 부모의 사랑은 그 인생에서 말소되었기에 항상 가슴 한구석의 텅 빈 공간을 끌어안고 살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이웃인 노파가 자신의 아내와 아이를 무사히 살려내었다. 가족, 친구, 이웃. 사내에게 이 단어는 이음동의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사내는 본능적으로 텅 빈 가슴 속에 다시 한번 어머니란 이름을 담기로 한 것이다.


 반평생을 거친 싸움터에서 보낸 그였기에 근 이십여 년 만에 꺼낸 어머니란 단어가 어색했지만, 그 단어가 주는 포근함은 이루 말하지 못할 정도였다. 어떻게 어머니 없이 지금까지 살아왔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사내는 진정 이 노파를 어머니로 생각하게 되었다. 마침내 사내는 잃어버렸던 가족을 되찾은 것이다.


 "아, 이거 어머니라고 하니까 근질근질하네. 그래도…… 참 좋습니다. 이제 우린 한가족인 겁니다. 알겠죠?"


 "……나중에 무르기 없기다, 빌어먹을 아들놈. 그래, 그럼 어디 손주 녀석 옹알이나 좀 볼까."


 아내는 젖을 물린 채 그런 광경을 말없이 웃으며 지켜보았다. 그리고 다가온 새어머니와 함께 아기를 돌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손주 녀석 이름은 정해 놓았나?"


 "……어?"


 "어머님, 저 이한테 그런 섬세함을 바라시면 안 된다니까요. 그래도 혹시나 했는데 정말 아무 생각도 없을 줄은……."


 "아니, 아냐. 정말 끝내주는 이름 몇 개를 생각해 놨는데 까먹은 거라니까. 어허, 왜 다들 그런 눈으로 쳐다보고 그래? 어허?"


 당황한 사내는 이리저리 헤매다 마침 적절한 이름을 떠올렸다. 그가 생각해도 정말 기가 막히는 이름이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지금 바깥은 완전히 암흑이야. 뭔가가 태양을 가린 걸까? 아니, 아니야. 분명히 이 아이가 너무 귀여워서 차마 마주 볼 수 없으니까 슬쩍 숨은 걸지도 몰라. 그러니까 하이드(Hide). 태양조차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감춘 아이. 어때?"


 "…저 이가 웬일로 센스를 발휘하네요? 뭐, 나쁘지 않은 이름이네요. 하이드…… 그래, 이제 네 이름은 하이드란다, 우리 아가야."


 "흘흘,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떤가. 아들놈 말마따나 이리 귀여운 것을…"


 마침내 사내는 완전한 가정을 손에 넣었다. 그가 원치 않게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한 번 쟁취한 것이다. 오롯이 그의 두 손으로. 그 또한 사내가 추구하는 마피아다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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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식의 날 이후로 펼쳐진 새로운 세상. 지금까지와는 완벽하게 구분되는 시대. 그 시대의 첫 장을 써 내려간 걸출한 두 영걸.


 시대가 잉태하고 마침내 불꽃처럼, 섬광처럼 피어나 그 삶의 궤적을 역사에 새긴 위대한 영걸.


 지하 연합의 초대 수장. 검은 신사, 흑염 하이드.


 헬리오스 사의 초대 회장. 하늘의 군주, 명왕 헨리 밀러 3세.


 흑염 하이드는 온 가족의 축복과 일식의 세례를 받고 그 불꽃 같은 삶을 시작했다. 그 누구도 알 수는 없었지만…


 명왕 헨리 밀러 3세가 태어나는 것은 하이드의 탄생 이후로 5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그 이유는 일식의 시대만이 알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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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0년 일식의 날 이후, 세계는 일변했다. 영국 남부의 [포트 레너드], 신대륙의 [메트로폴리스]의 갑작스러운 등장. 거대한 나무의 줄기 속에 자리 잡은 도시 포트 레너드와 온갖 기계로 가득한 메트로폴리스는 일식이 걷히고 태양이 빛을 되찾자 마치 본래 거기 있었던 것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처음에는 놀라움의 대상이었지만, 인류는 무서울 정도로 두 도시에 익숙해졌고 이윽고 세계의 일부로 거부감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즈음에 세계는 또 다른 이변을 맞이했다.


 신화, 전설, 동화 속에서나 존재하던 신비로운 이야기.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는 능력을 사용하는 능력자(Cypher)의 출현. 이들의 존재는 조용히, 하지만 확실하게 세상 속으로 번져나갔고, 이윽고 비밀스럽게 치부되던 능력자들은 양지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일식의 날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이었고, 일식의 날 이후 나타난 신비의 도시들과 맞물려 하나를 추론할 수 있게 했다. 세계는 '일식'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변질하였다고.


 사실 그런 추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자, 동화책, 옛 전설, 신화 속의 신비로운 존재들이 갑자기 세상으로 뛰쳐나왔다고 생각해 보라. 일반인들에게 능력자들이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괴물 같은 존재였고, 자연스럽게 탄압과 핍박이 그 뒤를 따랐다. 지금에서야 능력자들이란 이웃이고, 가족일 수도 있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이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부족했던 것이다.


 능력자들은 그 힘을 최대한 감추고 일상에 녹아들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그런 와중에도 힘을 과시하고 행패를 부리는 능력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세인들의 인식이 변하는 데 더욱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이런 상황은 1900년대에 와서야 상당히 호전되었다. 인류가 이들을 받아들이는 데 근 40년의 세월이 지나야 했다.

 

- chapter 1. 숙명(宿命)의 태동(胎動) -


 카모라 패밀리의 카포레짐이라면 적어도 나폴리에서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런 남자의 아들로 태어난 하이드가 소년기에 뒷골목 부랑아 패거리의 일원으로 살아간 것은 일견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부모가 암살당했다고 하면 납득할 수 있겠는가?


 이탈리아에는 생각보다 많은 조직이 난립하고 있으며, 그들 간의 항쟁은 흔한 일이다. 그리고 더러운 암투 또한 빈번하게 발생한다. 카모라 패밀리와 적대 세력의 갈등이 극도로 심화하던 중 하이드의 부모는 적대 세력의 암습을 받았고, 뒤늦게 카모라 패밀리의 조직원들이 그의 집으로 달려갔을 때는 이미 하이드의 부모와 조모는 피살된 채로 발견되었다. 그 와중에서도 하이드만은 낡은 다락에 숨어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의문점은 여전하다. 암습을 가할 정도로 냉혹하고 주도면밀한 자들이 과연 어린 하이드를 발견하지 못했을까? 그저 운으로 여기기엔, 차라리 역사가 하이드가 죽게 내버려두지 않았다고 하는 게 더욱 신빙성 있을 지경이다.


 하이드는 당시의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이드와 함께 한 그 누구도 하이드의 유년기를 들었다는 사례가 없었다. 과연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당사자는 존재하지 않고 진실은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 후세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이야기다.


<하이드의 일대기 중 발췌>

 

 "야, 인마! 너 이 새끼, 제정신이야?"


 거칠게 터져 나오는 욕설. 하지만 목소리에 앳된 구석이 남아 있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사람도 간신히 소년티를 벗은 청년이라면, 그 앞에서 묵묵히 고개를 숙인 소년은 아직 부모의 보살핌이 필요한 십여 세의 어린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왜 말이 없어 자식아? 아까 했던 말 다시 한번 말해 봐. 뭐? 마피아? 너 미쳤냐? 네가 카포레짐의 자식이라고? 솔직히 믿기지도 않고 그게 대단한 끗발이라도 될 줄 아나 본데, 지금 넌 그냥 흔한 부랑아야 이 새끼야! 카모라 패밀리에서 너 같은 놈을 받아주기나 할 것 같아? 정신 차려!"


 "……아니야! 우리 아버지가 항상 말씀하셨어. 가족은 절대 서로를 버리지 않는다고! 아버지는 카모라 패밀리의 가족이었고, 나도 그래!"


 고함을 지르던 청년은 이제 기도 차지 않는다는 듯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남루한 행색. 꼬질꼬질하게 때가 낀 몰골. 어딜 가도 흔하게 볼 수 있는 뒷골목 거지 꼬맹이다. 그래도 단 하나 눈에 띄는 게 있다면 형형하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였다.


 청년은 이 근처 뒷골목의 부랑아들을 통솔하는 리더였다. 이전까지는 그럭저럭 자신을 따르는 아이들을 건사할 만했지만, 최근의 유럽 근황은 일반 서민에게도 힘겨울 정도로 혼란 그 자체였다. 거리를 전전하는 부랑자. 특히 힘없는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시기. 그런 상황에서 입을 하나 더 늘리는 것은 어려운 선택이었지만, 저 눈빛이 맘에 들어 패거리로 받아들였다.


 물론 녀석은 잘해주었지만, 가끔 너무 기가 세서 문제였다. 부랑아들의 세계에도 위계질서는 존재한다. 아니, 그런 상하관계가 없다면 서로 물어뜯는 아비규환이 펼쳐지겠지. 그 생리를 몇 번이나 겪은 리더는 집단의 존속과 이 녀석의 신변을 위해서라도 놈의 기를 계속 꺾었지만, 그 눈빛은 좀체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이에 맞지 않게 인생의 쓴맛을 꽤나 본 리더는 이런 종자들에 대해선 몇 가지 아는 바가 있었다. 정말로 확고한 신념이 있던가, 뭔가 믿는 게 있던가. 전자라면 다루기 어렵고, 후자라면 자신에게 해가 될 수도 있지만 뭔가 이득이 생길 수도 있다. 해서 이 녀석과 개인적인 면담을 시작한 건데, 그냥 이 자식은 또라이였다. 뭐? 카포레짐의 아들? 카모라 패밀리로 가겠다고? 망상도 이정도면 베스트셀러 감이다! 혹여나 저게 다 진실이라고 해도, 나폴리에서 가장 강성한 마피아인 카모라 패밀리에서 뭐가 아쉬워서 이런 거지를 받아주겠는가? 리더는 한숨을 푹 내쉬고 녀석을 설득했다. 녀석은 정말 기가 센 것 말고는 아까운 인재였으니까.


 "……아무래도 내가 널 잘못 본 모양이다. 어지간하면 그냥 쫓아내 버리고 말겠는데, 그래도 네 인생이 불쌍해서 지금 선택권을 주마. 그 잘난 카모라 패밀라로 정처 없이 찾아가볼 테냐, 아니면 여기서 그 성질머리 좀 죽이고 애들이랑 어울리면서 살아갈 테냐? 웬만하면 뒤를 선택해라, 제발."


 녀석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자 리더는 지금이 밀어붙일 타이밍임을 간파했다. 가족? 그래, 가족 좋지!


 "너 이 새끼, 애들도 꽤 잘 돌보고 똘똘해서 좀 기대했거든? 그래, 네가 말하는 그 가족이란 거. 왜 여기 있는 애들로는 부족한 거냐? 네가 생각하는 가족은 꿈속 이야기야 인마. 옆을 돌아봐. 너보다 어린놈들도 살아보겠다고 쓰레기통 뒤지고 있는 거. 가족이 갖고 싶으면 저런 불쌍한 애들이나 가족으로 삼아라. 알겠냐? 자, 내가 할 말은 여기까지다. 결정해라."


 소년은 침묵 속에서 맹렬히 고민했다. 리더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소년이 어찌어찌 카모라 패밀리로 찾아간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자신을 받아들일 거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소년은 아버지를 믿고 싶었다. 마지막까지 카모라 패밀리를 사랑했던 아버지를.


 하지만 현실은 차가웠고, 부모를 잃은 소년이 갈 곳은 많지 않았다. 지금의 패거리가 자신을 받아 준 것이 정말 힘든 결정임도 이제는 알고 있다. 소년은 결국 열망을 접어 마음 한켠에 깊숙이 묻어버렸다. 소년 또한 이미 소년이라기엔 너무 많은 일을 겪은 것이다.


 "……젠장.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체념의 기색을 보이자 리더는 안도했다. 더 말하지 않아도 녀석이 후자를 택했다는 것은 뻔했다. 풀이 죽은 녀석을 보니 안쓰럽기도 해서 마음이 복잡해진 리더는 머리를 세차게 긁고는 녀석을 끌고 거리로 나섰다.


 "자, 오늘도 애들 먹이려면 우리같이 뭐라도 할 줄 아는 놈들이 뛰어야 한다고. 젠장, 오늘은 일거리가 좀 있으면 좋겠는데. 가자, 하이드."


 "예, 리더."


 리더와 소년은 거리의 인파 속으로 묻혀들어갔다. 그들이 오늘 벌어들인 수입에 따라서 패거리가 배를 곪느냐 마느냐가 정해지기에, 그 뒷모습은 참으로 무거워 보였다. 1870년대의 유럽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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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 질 녘, 어스름이 깔려 드는 거리. 리더는 약속된 장소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오늘 저녁에 대한 걱정으로 꽉 차 있었다.


 '빌어먹을, 요즘은 정말 일거리가 없어. 그나마도 나 같은 녀석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몸 쓰는 일밖에 없는데 그마저도 어른들에게 빼앗기는 판국이니.'


 리더는 오늘 하루를 완벽하게 공치고 시름에 잠긴 것이다. 그가 책임져야 하는 아이들은 열 명이 되지 않지만, 그 패거리에서 어떻게든 돈을 벌어올 수 있는 노동 원은 그나마 몸집이 큰 자신 정도. 다른 녀석들도 눈치껏 벌이를 하는 듯하지만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 리더는 등허리를 짓누르는 부양의 책임에 쓰러질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아직 스물이 넘지 않는 소년이 지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짐. 그러나 이 시기의 유럽에서 그것은 동정할 거리도 되지 못했다. 그만큼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던 그런 시대였다.


 그렇다고 아예 허탕을 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닥치는 대로 가게를 돌아다니며 잔심부름을 도맡아 처리했다. 그 대가는 겨우 동전 몇 푼. 그나마도 온종일 모아도 패거리의 한 끼 먹을거리조차 살 수 없다. 이제 믿을 건 하이드 뿐. 리더는 초조한 마음으로 하이드를 기다렸다.


"리더! 조금 늦었어요. 죄송해요."


"아, 하이드. 왔구나."


 큰길 저편에서 뛰어오는 하이드를 보고 애써 평정을 가장하는 리더. 어떻든 간에 그는 한 무리를 이끄는 수장이고, 그렇다면 구성원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리더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난 오늘 영 일진이 별로였다. 넌 어떠냐?"


 "다행히 상회의 대필 작업이 있었어요. 글을 알아도 산수가 약한 사람들뿐이어서 제가 뽑혔죠."


 "그건 다행이군. 오늘 애들이 배 곯을 일은 없겠어. 다 네 덕이다 하이드. 고생 많았어."


 "헤헤. 고마워요. 리더! 늦기 전에 먹을거리를 구해야죠? 빨리 돌아가요!"


 독하다 뭐다 해도 아직은 어린아이. 작은 칭찬에도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한다. 내심 피식 웃은 리더는 녀석을 끌고 식료품점으로 향했다. 길을 걷는 와중에 리더는 잠시 하이드에 대해 생각했다.


 '글도 알고, 쓸 수도 있고, 거기에 산수도 할 줄 알아. 분명 어릴 때부터 제대로 교육을 받았어. 그런 녀석이 대체 왜 이런 꼴로 부랑아가 된 거지? ……설마 정말로 마피아의 자식인 건 아니겠지. 그냥 유복한 집 자식이었는데 집안이 폭삭 망한 게 더 말이 되지. 흠.'


 상념도 잠시, 그들의 앞으로 허름한 식료품점이 다가왔다. 리더는 내심 각오를 다지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하이드가 어렵게 벌어온 돈. 결코, 허투루 쓸 생각은 없다. 최대한 적은 돈으로 최대한 많은 양을! 리더는 전의를 다지고 문을 열어젖힌 후, 식료품점의 주인에게 힘차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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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 힘들었다. 젠장, 그 주인 양반은 인심 좀 쓰면 될 것을 꼭 사람을 힘들게 만들어."


 "그래도 역시 리더예요.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양보단 더 많은걸요, 이거."


 "그런 보람이라도 있어야 이 짓을 해먹는 거지. 매번 느끼는 건데, 그 주인 양반 정말 악취미야."

 투덜거리는 리더였지만 사실 식료품점의 주인을 진심으로 원망하는 건 아니었다. 굳이 그런 취급을 받으면서 꼭 그 식료품점을 가는 것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리더의 협상능력(아줌마의 후려치기가 더 옳은 표현이지만!)을 시험이라도 하듯, 식료품점의 주인은 곱게 물건을 넘기지 않고 기 싸움을 걸어왔다. 그리고 리더가 마음에 드는 반응이나 역공을 가해오면 어깨를 으쓱이며 한 주먹씩 물건을 더 얹어주었다. 물론 그런 상황이 되기 전엔 물건을 살 수도 없었다.


 "……제길, 그런 식으로 갈구지 않아도 어차피 해야 할 일은 잘 아는데. 어지간히 오지랖도 넓으신 양반이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니, 아니다. 아직 너한텐 좀 난해한 사정이니까 잊어라."


 식료품점 주인의 의도는 가슴이 아플 정도로 잘 안다. 어디 가서 무시당하지 않도록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밀고 당기는 법,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려는 것. 한 무리의 리더로서 꼭 필요한 능력이고, 덕분에 자신도 상당히 능수능란해졌다고 자부하지만…….


 '자존심 상한다고, 정말. 경멸도 싫지만, 동정 따위도 받고 싶진 않아. 그게 동정 같지가 않아서 더 열받고.'


 고마움과는 별개로, 수장이 지녀야 할 자존심이 어쩔 수 없이 상처받는 것이다. 하지만 그 댓가가 아이들의 먹거리라면 감내할 수밖에. 그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 소년은 리더의 자격이 충분했다. 그렇기에 식료품점의 주인도 이 소년을 괴롭히는 것이다. 이 정도에 무너져서는 무리를 이끌 수 없으니까. 그것을 잘 알기에 값싼 동정 따위가 아닌 실력행사로 나오는 것이다. 사정이 어떻든 간에, 고객에게 협상 당하면 주인은 손해를 봐야 하는 것이 상도덕 아니겠는가? 참으로 거친 애정 표현이다.


 리더는 혀를 한번 차고는 사고를 전환했다. 어느새 패거리의 아지트에 당도한 것이다. 아지트라고 해봐야 거창한 건 아니고, 도시 외곽의 무너진 담벼락을 기초로 벽을 만들고 거적때기를 둘러친 정도였다. 리더는 입구로 다가가며 패거리들을 불렀다.


 "자, 다들 나와라! 밥 먹을 시간이다!"


 그러자 안에서 아이 하나가 슬그머니 머리를 내밀었다. 그리고 리더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이 환해졌다. 그 녀석은 안으로 뛰어들며 외쳤다.


 "대장이 먹을 거 가져왔어! 다들 나와!"


 그러자 왁자지껄한 소란과 함께 예닐곱 명의 아이들이 뛰어나왔다. 가장 큰 아이도 열 살이 채 되지 않아 보인다. 순진무구한 그 눈동자들에 둘러싸인 리더와 하이드는 씩 미소 지으며 그들의 전리품을 내려놓았다.
 

 "자, 순서대로 줄 서. 오늘은 꽤 넉넉하니까 다들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거다."


 리더는 능숙하게 아이들을 어르면서 먹을거리를 나누어 주었다. 각자 먹을 것을 받아든 아이들은 둥글게 모여앉아 식사를 시작했고, 리더와 하이드도 자기 몫의 음식을 조용히 씹어 삼켰다.


 "리더."


 "왜."


 "아침에는 죄송했어요."


 "……네가 사과할 만한 일은 아냐."


 "아뇨. 꼭 사과해야만 해요."


 거기까지 말한 하이드는 잠시 고개를 들어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정말 어린 아이들. 리더는 십 대 후반이고, 자신은 이제 갓 열 두 살이다. 그리고 이 아이들은 전부 열 살 아래. 이들을 부양하기 위해 리더와 하이드는 하루도 빠짐없이 일거리를 찾아다녀야 한다. 열 살 아래든 열 두 살이든 부모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어린 나이. 하이드는 어린 나이에 비해 너무나 많은 의무를 껴안고 있었다. 그것이 쌓이다가 폭발한 것이 바로 오늘 아침.


 "거리에서 굶어 죽어가던 저를 거두어 준 건 리더였고, 받아들여 준 건 저 아이들이었어요. 그게 얼마나 어려운 결정이었는지 알아요. 그런데도 전…… 그런 철없는 소리나 지껄였죠. 하하…… 리더가 화내는 게 당연해요."


 "……."


 리더는 아무 말 없이 딱딱한 빵을 씹었고, 하이드는 말을 이어갔다.


 "제 가족은…… 이제 없어요. 아니, 빼앗겼죠."


 이 말을 하던 하이드의 검은 눈동자가 섬뜩하게 번쩍였다. 그 말에는 상실감이 아닌 증오심만이 묻어났다. 하지만 리더는 거기에 대해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이 바닥, 무슨 일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는 곳이다. 저런 신파극은 두 골목 건너면 세 번쯤 들을 수 있는 곳이 뒷골목이란 곳이다.


 "리더의 말이 맞아요. 이제 저 애들이, 리더가 내 가족이에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가족(Family)."


 마지막 단어에는 열 두 살 아이가 담기엔 너무나도 복잡한 감정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리더는 그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그리고 그걸 이제야 알다니, 한 대 맞아라. 이 녀석아."


 "으악!"


 하이드의 이마에 딱밤을 먹인 리더는 남은 빵을 전부 씹어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겁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날아가 버린 지 오래. 이마를 부여잡고 끙끙대던 하이드는 리더의 등을 올려다보았다. 넓지는 않지만, 의지할 수 있는 그런 모습. 하이드는 눈이 부신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아버지…….'


 무심코 떠오른 생각. 하이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 아버지라는 이름에 기댈 수는 없다. 아니, 오히려 그가 아버지의 역할을 다 해야만 한다. 하이드는 그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노라 조용히 맹세했다.

 

- chapter 2. 미래(未來)의 분기(分岐) -


 1870년경 아주 유명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한 서커스단에서 박쥐 날개가 달린 여자아이를 선보이며 커다란 이슈를 일으킨 것. 서커스단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어느 순간 그 여자아이는 더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이 소녀가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곳이 바로 하이드의 패거리가 있던 곳과 가까웠던 소도시에서의 공연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서커스를 관람했던 사람들의 기억의 의하면, 이 박쥐 날개의 소녀는 갈색 머리칼과 금빛의 눈동자를 가졌다고 한다. 왠지 누군가가 연상되지 않는가?


 여러분의 생각이 맞을 것이다. 연합의 가장 오래된 능력자 중 하나인 트리비아 카리나와 외견상으론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물론 지극히 드문 우연일 수도 있으나 같은 머리칼의 색, 같은 눈동자의 색, 거기다가 같은 박쥐날개까지. 심증은 충분하지 않은가?


 거기다가 하이드가 살던 곳 인근에서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였다는 점, 능력은 핏줄을 통해 계승되는 경우도 있다는 점, 트리비아 카리나가 굳이 지하 연합을 택한 것.


 위의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흥미로운 상상으로 이끈다. 장막으로 가려진 진실의 가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하이드의 일대기 중 발췌>

 

 "…… 서커스?"


 "응, 응! 대장, 보고 싶어요!"


 "야, 하이드. 내가 애들 관리 똑바로 하라고 했지?"


 "그…… 그게 말이죠."


 "아, 됐고. 그런데 갑자기 웬 서커스냐?"


 "저도 귀동냥으로 들은 거긴 한데……."


 하이드는 리더에게 서커스단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했다.

 상당히 유명한 서커스단이 순회 공연 중이고, 패거리의 근거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소도시에 들를 예정이라고.


 유흥거리가 빈곤했던 시대에 서커스란 거의 유일한 유희였다. 거대한 천막, 기상천외한 묘기, 화려한 의상, 그리고 사나운 맹수까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누구나가 가슴 뛸 수밖에 없는 커다란 이벤트.


 그리고 패거리의 아이들은 단 한 번도 서커스를 본 적이 없다. 그러니만큼 서커스에 대한 환상은 더욱 컸고, 소문을 듣자마자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리더에게 달려간 것이다. 물론 리더로서는 기도 차지 않을 노릇이었다.


 "미치겠구만. 애들한테 바람 들어가면 그걸 뭔 수로 막냐. 응?"


 "그래도 저렇게 좋아하는데…… 거기다가, 솔직히 저도 좀……."


 "야, 야, 야! 너까지 그러면 난 어떡하냐!"


 리더는 기가 막혀 고함을 질렀다.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서커스라니?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는 것도 버거운 마당에 대체 어디서 입장료를 구한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진절머리를 쳤지만,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는 최대한 냉정하게 선고했다.


 "쓸데없는 소문 듣고 다닐 시간 있으면 그 시간에 일거리라도 하나 더 찾아다녀라, 이 녀석들아. 서커스는 무슨 얼어 죽을……."


 리더의 단호한 결정에 아이들은 군소리 없이 고개를 숙였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순 없지만, 그래도 어린 마음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노릇. 몇몇 아이들은 나지막이 울기 시작했다. 리더 또한 씁쓸한 기분에 먼 하늘만 쳐다보았다.


 "애들아. 자, 울지마. 뚝! 리더도 너희가 싫어서 저러는 거 아냐. 자, 코 풀고, 흥! 그렇지."


 애들을 어르고 달래는 하이드를 보니 한층 더 쓴 맛이 번져 나온다. 올해로 열 세 살. 한창 싱그러울 나이에 마치 나이 든 아줌마처럼 애들을 다루는 하이드. 그 광경을 쳐다보던 리더는 입술을 깨물고 다시 한 번 결심했다.


  '저 녀석만은, 내 기필코…….'


 

……………………………………………………………………………………………………………………………………………


 며칠 후, 하이드와 리더는 일거리를 찾아 예의 그 소도시까지 나갔다. 최근 그들의 근거지 주변의 마을에서는 제대로 된 일거리를 찾기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데, 사실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이 구역을 장악한 패거리의 신경을 건드렸다가는 좋지 못한 꼴을 당할 테니까. 다행히 겨우 둘 뿐이어서인지, 리더의 사나운 눈매가 도움이 되었는지 별다른 간섭은 없었다.


 "그놈의 서커스, 애들한테 헛바람 넣은 건 짜증 나지만 그래도 일거리가 생긴 건 다행이군."


 리더는 서커스 천막을 치는 공터를 정리하는 일을 따낼 수 있었다. 온종일 풀을 베어내고 바닥을 고르는 고된 작업이었지만 그만큼 일당도 제법 후했다. 게으름 피우지 않고 죽어라 일을 하던 그가 맘에 들었는지 인부를 관리하던 사내가 내일도 올 수 있으면 오라고 해 주어서 더욱 기뻤다. 보아하니 적어도 이틀은 일거리가 나올 것 같은데, 이번에 바짝 벌어놓고 나면 적어도 일주일은 걱정이 없겠지.


 "하이드 녀석, 늦는군. 설마 별일 있는 건 아니겠지."


 그 뒤로도 꽤 시간이 흐른 후, 저 너머에서 달려오는 하이드를 보며 리더는 씨익 웃으면서 외쳤다.


 "야! 하이드!"


 "리더! 리더!"


 동시에 서로를 부른 둘은 찰나의 침묵 끝에 다시금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저기, 리더……."


 조금 더 거북함이 묻어나는 시간이 지나고 리더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이드는 그제서야 어색한 분위기를 떨치고 리더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리더, 좋은 소식이에요! 어쩌면 애들이랑 서커스를 볼 수 있을지도 몰라요!"


 "뭐? 무슨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너 어디 아프냐?"


 "아이, 참! 좀 끝까지 들어봐요, 리더."


 기쁨으로 충만한 하이드는 텐션이 상당히 올라간 상태였다. 차마 거기에 태클을 걸기 무안했던 리더는 엉거주춤 물러섰고, 하이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위업(?)을 쏟아내었다.


 "오늘은 여기 지주 어르신 창고 장부 정리하는 일을 따냈거든요. 그런데 그 어르신이 제가 한 일이 썩 맘에 들었나 봐요. 그래서……."

 

 무슨 말인고 하니, 하이드의 일 처리가 맘에 든 지주가 그와 몇 마디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와중에 우연히 서커스 이야기가 나오더니 놀랍게도 서커스 천막을 치는 공터가 지주의 땅이라는 거다. 하여 하이드가 욕설을 한바탕 뒤집어쓸 각오를 하고 지주에게 사정을 설명하자 지주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아이들을 데리고 와도 좋다고 한 것이다.


 "대신 내일부터 서커스가 끝날 때까지는 어르신 댁에서 계속 일해야만 하지만요."


 "…… 너 임마."


 리더는 한마디 하려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깟 서커스가 뭐라고. 하지만 그런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다른 아이들을 위해서 이런 일을 벌이고, 정작 자기 자신은 창고에서 먼지에 파묻혀 뒹굴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나무랄 것인가. 리더는 자신의 머리를 세차게 긁고, 다시 하이드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그래, 잘했다. 잘했어. 애들이 얼마나 좋아서 날뛸지 눈앞에 선하군."


 "그렇겠죠? 빨리 가서 애들한테 얘기해주고 싶어요. 헤헤."


 맑은 웃음소리에 결국 리더도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 기다리는 아지트로 걸음을 옮겼다.


 

……………………………………………………………………………………………………………………………………………

 

 시간은 끊임없이 흘렀고, 마침내 서커스 공연 당일의 아침이 밝았다. 패거리의 아이들은 밤새 잠을 못 이루고, 리더 또한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들을 씻겼다. 냇가에 주르르 서서 몸을 씻는 아이들. 리더와 하이드는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꼼꼼하게 점검했다.


 "꼬질꼬질한 꼴로 나설 생각 하지 말고 박박 씻어, 요 녀석들아. 하이드! 그 녀석 잡고 빨리 머리 감겨!"


 "알았어요! 자, 들었지? 깨끗하게 씻고 서커스 보러 가자."


 소란스런 시간이 지나고, 최대한 말쑥하게 차려입은 꼬맹이들이 드디어 길을 나섰다. 리더가 선두에, 하이드가 후미에서 아이들을 다루며 소도시에 이르렀고, 마침내 웅장한 서커스 천막 앞에 도착했다.


 기뻐서 환호성을 내지르는 아이들. 리더는 아이들을 적절히 통제했고, 그 사이 하이드는 지주를 만나 감사를 표했다.


 "어르신, 정말 감사합니다. 아이들이 아주 좋아해요."


 "그래. 저렇게 기뻐하니 나도 기분이 좋구나. 자, 나는 저 아이들과 들어가 보마. 창고 재물 조사는 잘 부탁하마."


 지주는 패거리를 이끌고 천막 속으로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들어서던 리더는 하이드를 돌아보았다. 하이드는 살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리더는 입술을 달싹거리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천막 속으로 사라졌다.


 "자, 그럼 나도 일하러 가야지."


 하이드는 지주의 저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엔 어딘지 쓸쓸함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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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드가 지주댁에서 일한 지 며칠이 지났다. 그간 하이드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일에 열중했고, 그 결과물은 지주를 흡족하게 만들었다. 어느 날, 지주는 하이드에게 다가가 넌지시 말을 걸었다.


 "허어, 너무 열심인 것 아니냐? 그러다 쓰러지겠구나."


 "아…… 아닙니다. 하루라도 빨리 마무리 지어야죠.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그러냐? 그래도 조금 쉬엄쉬엄 해도 된다. 무리하지 말거라."


 하이드는 미소로 답하며 다시 장부로 눈을 돌렸다. 정갈하면서도 꼼꼼한 기록. 지주는 하이드가 더욱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이 성실한 아이를 위해 작은 선물을 주기로 결심했다.


 "그러고 보니 너만 서커스를 구경하지 못했구나. 아쉽진 않더냐?"


 "다른 아이들이 재미있게 놀았으니 괜찮습니다. 그 일은 정말로 큰 신세를 졌습니다, 어르신."


 말은 그렇지만, 역시 하이드는 아직 소년이었다. 노회한 지주의 눈썰미는 하이드의 눈가와 말투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아쉬움을 분명하게 잡아냈다. 그는 살짝 미소 지으며 선물상자를 넌지시 건네었다.


 "내일이 서커스 공연의 마지막 날이다. 보고 싶으면 내 들여보내 주마. 어떠냐?"


 하이드는 예상치 못한 호의에 눈을 크게 떴다. 지주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 따뜻한 배려에 하이드는 눈물이 솟을 것 같았지만 억지로 참아내고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어르신. 이 은혜를 어찌……."


 "그럴 것 없다. 네가 아주 성실하게 내 일을 도왔으니, 나도 작은 보답을 해 주고 싶더구나."


 하이드는 호의를 보이는 사람을 가장 기쁘게 하는 법을 잘 알았다. 정말로 밝은 미소를 짓는 하이드의 면면. 지주는 자신의 결정에 만족했다.


 "그래, 그렇게 웃으니까 얼마나 보기 좋으냐. 오늘은 이만 마무리하고 돌아가 보거라. 내일 천막 앞에서 만나자꾸나."


 "예! 그럼 내일 뵙겠어요,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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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가 지나고 하이드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느끼며 공연장으로 향했다. 지주는 푸근한 미소로 그를 반겼고, 마침내 둘은 장막을 지나 서커스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하이드는 생전 처음으로 꿈결 같은 시간을 보내었다. 밝게 타오르는 횃불. 우스꽝스런 몸짓의 피에로. 화려한 분장과 의상으로 치장한 곡예사. 난생 처음 보는 사자의 모습. 그리고 그들이 펼치는 화려한 묘기와 윤무에 취해갔다.


 환상적인 순간이 쏜살과 같이 지나고, 마침내 공연은 클라이맥스에 이르렀다. 피에로가 무대의 한가운데서 소리 높이 외쳤다.


 "신사숙녀 여러분! 저희의 무대가 즐거우셨습니까? 부디 흡족하셨기를 바랍니다!"


 관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화답했다. 피에로는 과장스런 몸짓으로 서커스단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자, 이제 저희가 준비한 마지막 쇼를 보여 드릴 때군요!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피에로의 말이 끝나자, 공중에서 꽃잎이 하늘하늘 흩날리기 시작했다. 관객들은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대감에 가득 찬 눈으로 무대를 응시했으나, 피에로는 의뭉스런 웃음을 지은 채로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가만히 흩날리는 꽃잎에 질린 관객들이 한마디 하려던 찰나, 피에로가 다시 한번 크게 외쳤다.


 "저희 서커스단이 자랑하는 명물! 하늘을 나는 박쥐 소녀입니다! 위를 봐 주십시오!"


 관객들이 일제히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꽃잎을 뿌리는 사람은 바로 날개를 퍼덕이는 소녀였기 때문이다.


 바구니에서 꽃잎을 흩뿌리던 소녀는 천천히 활강하여 무대 쪽으로 다가갔다. 관객들은 홀린 것 마냥 소녀를 바라보다가 그녀가 바닥에 발을 딛는 순간 환호성을 내질렀다. 세상에, 저게 대체 무슨 조화인가!


 하이드 또한 놀란 눈으로 소녀를 주시했다. 보아하니 자신보다 두어 살은 어려 보이는 앳된 여자아이. 머리칼은 풍성하게 웨이브진 다크 브라운. 큼지막한 눈동자는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귀여운 얼굴은 활짝 미소 짓고, 허리 어림에서 돋아난 날개는 이따금 펄럭였다. 화려한 무대의상으로 둘러싸인 기려(奇麗)한 몸은 어딘지 애달픈 감정을 느끼게 하였다. 소녀는 여기저기 허리를 숙여 환호성에 답했고, 이윽고 준비한 곡예를 선보였다.


 사람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열광했다. 작고 아름다운 소녀가 피막으로 덮인 날개를 퍼덕이며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모습은 과연 장관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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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식의 날 이후 세계는 변했다. 신화와 전설 속에서만 살아가던 존재들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일식 이후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이런 존재들에 대한 소문은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었지만 직접 목격한 사람은 몹시 드물었다. 그런 와중에 저런 소녀를 보게 된 관객들은 당연히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하이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패거리의 아이들과 또래 정도로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가 구경거리가 되는 모습은 절대 유쾌하지 않았다. 더구나 '이형의 존재'이기까지 했으니. 하이드는 고양된 감정이 급속도로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마지막 쇼가 끝났다. 관객들은 열화와 같은 갈채를 보내었고, 피에로는 허리를 숙이며 공연의 폐막을 알렸다. 관객들은 다시금 현실로 되돌아가고, 서커스단원들은 오후의 공연을 준비하겠지. 그 와중에 하이드와 소녀의 눈이 마주치는 것은 정말 우연이었을 것이다.


 검은 눈동자와 황금빛 눈동자가 서로를 응시했다. 하이드는 그 눈에서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그 순간 들이닥친 인파로 소녀가 가려지고, 하이드는 그대로 떠밀려 천막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러나 소녀의 눈길은 하이드의 뇌리에 낙인과도 같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어떠냐, 오늘은 즐거웠더냐?"


 "예. 어르신께는 정말 큰 신세를 졌어요."


 "그런 말 말거라. 네 마음 씀씀이가 오히려 날 기쁘게 하더구나. 요즘같이 각박한 세상에 너처럼 어린아이가 그러기엔 쉽지 않은 일이지."


 "가…… 감사합니다. 헤헤……."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려무나. 일찍 들어가서 푹 쉬고, 내일 마무리를 잘 부탁하마."


 "아, 아닙니다. 너무 큰 폐를 끼치게 되는……."


 "어허, 웃어른이 하는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피자가 생기는 법이야. 너는 자신을 좀 더 아낄 필요가 있다. 알겠니?"


 하이드는 이 속 깊은 배려에 눈물이 솟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선의를 베푸는 사람에게 눈물로 보답할 수는 없는 노릇. 그는 애써 밝은 미소로 화답했다. 지주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하이드를 다시 한번 재촉했다. 하이드는 고개를 한번 푹 숙이고, 조금 머뭇거리더니 이윽고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잘 놀고, 열심히 뛰어다녀야지. 암……."


 지주는 흡족한 웃음으로 그 등을 배웅했다. 그는 자신이 작은 호의를 베풀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호의가 세계의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운명의 흐름은 더욱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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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드는 처음엔 오래간만에 얻은 자유시간을 기뻐하며 아지트로 달려가려고 했다. 그 발걸음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박쥐 날개 소녀의 황금빛 눈동자. 뇌리에 새겨진 그 광채는 하이드의 뜀박질을 느리게 만들고, 이윽고 완전히 멈추게 하였다. 하이드는 그런 자기 자신에게 몹시 당황했다


 '내가 왜 이러지? 대체 왜?'


 하이드는 혼란스러웠다. 일면식도 없던 여자아이. 그 눈빛이 왜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가? 하이드는 근처의 강가로 터벅터벅 걸어가서 둔치 아무 곳에 주저앉아버렸다. 지금의 마음을 정리하지 않는다면 무언가 큰 후회를 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시간은 무심히 흐르고, 마침내 달이 얼굴을 내밀고 밤하늘이 별빛을 품었다. 하이드는 그때까지도 자신에게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시간이 한참 더 흐르고 나서 하이드는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검은 눈동자는 결의에 빛났고 그 몸짓에는 한 치의 주저도 없었다.


 하이드가 달려간 곳은 다름 아닌 서커스 천막이었다. 슬슬 달조차 밤의 장막으로 몸을 가리는 시각. 사위는 고요에 잠기고 정적만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는 이곳에서 하이드만이 조용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조심스레 수레와 짐짝 사이를 오가던 하이드는 잠시 그늘 사이에 몸을 숨기고 생각에 잠겼다.


 '밖에는 없어. 그러면 역시 천막 안쪽뿐인데. 내가 거기까지 갈 수 있을까?'


 하이드는 잠시 갈등했지만, 마음을 결정하고 단호하게 몸을 일으켰다. 하기로 결심한 이상, 해낸다. 하이드는 고양되는 의식을 느끼고 천막 쪽으로 다가갔다.


 조심스레 천을 들추고 들어가자, 어둑어둑한 실내가 하이드를 반겼다. 안쪽에는 서커스 단원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자고 있었다. 하이드는 그들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이곳저곳을 헤맸다. 그리고 마침내 목표를 찾아내었다.


 [쉬이!]


 놀라움으로 크게 열린 황금빛 눈동자. 하이드는 박쥐 날개 소녀를 찾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려다 하이드의 손짓에 간신히 입을 틀어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하이드를 바라보았다.


 하이드는 잠시 그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 사이를 가로막은 쇠창살. 이 아이는 마치 짐승이라도 되는 양 강철의 우리 안에 갇혀 있었다.


 하이드는 그녀에게 작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딱 하나의 단어를 말했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의도는 충분하게 전달될 것이다. 하이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자유.]


 소녀는 다시 한 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번에는 놀라움이 아니라, 자신에게 결코 주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그 무엇을 가지게 된 얼떨떨함이랄까. 하이드는 그 아름다운 눈동자를 말없이 응시했다. 그는 도움을 줄 수 있었지만,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선의를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그 자신이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소녀는 하이드의 검은빛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그만 입술을 열어 조심스레 말했다.


 [너의…… 이름을 가르쳐 줘.]


 그 의도는 과연 무엇이었을지? 이후 하이드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이드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어떠한 의미로든 세계의 운명을 다시 한번 바꿔놓았다.


 [하이드.]


 [하이드, 하이드…… 하이드.]


 곱씹듯이 입안에서 하이드의 이름을 되뇌는 소녀. 하이드는 어쩐지 살짝 쑥스러운 마음이 들어 고개를 푹 숙였다. 소녀는 창살 밖으로 손을 내밀어 그런 하이드의 얼굴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 그리고 두 눈을 마주치고, 그 선의를 받아들었다.


 [하이드, 내게 자유를.]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하이드는 소녀에게 빙그레 미소를 짓고는, 잠시 손짓으로 뒤로 물러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소녀가 창살에서 멀어지자, 하이드는 창살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그 손에서 검은, 한없이 검은 무언가가 피어올랐다.


 얼핏 불꽃과도 비슷해 보이나, 그것은 확실하게 불꽃은 아니었다. 아니,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그것'을 설명할 순 없었다. 깊은 동굴 속 심연과도 같은 칠흑, 피어올라 너울거리는 그 모습이 마치 화염. 굳이 명명하자면 흑염(黑炎)이란 단어가 가장 어울릴 테지만, 그 단어로도 '그것'을 만족스럽게 표현하진 못했다.


 어둠에 잠겨있는 사위. 그 가운데서도 흑염은 명백하게 이질적이었다. 소녀는 약간 오한이 드는 것을 느끼며 그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하이드가 피워 낸 흑염은 창살을 손쉽게 집어삼키고, 마침내 소녀가 나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내었다. 소녀는 주저하지 않고 창살 밖으로 나왔고, 하이드는 소녀를 이끌고 천막 밖으로 빠져나왔다.


 둘은 두 손을 꼭 쥐고 달리기 시작했다. 공터를 빠져나와, 골목을 지나, 벌판을 넘어, 마침내 하이드가 오랜 시간 고뇌하던 강가의 둔치까지 당도해서야 그 달음박질이 멈추었다. 둘은 풀밭에 누워 숨을 골랐다. 올려다본 하늘. 달은 완전히 잠들고, 밤하늘은 별만이 요요로이 빛났다. 왠지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하이드는 호흡이 안정되자 몸을 일으켰다. 소녀 또한 그를 따라 몸을 세우고, 둘은 다시 한번 서로를 응시했다. 입을 먼저 연 것은 소녀였다.


 "하이드, 왜 그랬니?"


 고운 목소리. 그리고 돌려 말하지 않는 직선적인 질문. 하이드로선 예상한 질문이었지만, 그것에 대답하는 건 별도의 문제였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았어. 그리고 내 생각이 맞았어. 단지 그것뿐이야."


 만족스런 대답이었을까? 소녀는 눈을 떼고 다시 한 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옆모습은 소녀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여성스런 매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이드는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그 서슬에 그녀의 허리 어림에서 축 처진 날개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녀는 날개를 한번 펄럭였다. 그 날개야말로 그녀가 이형의 존재라는 증거. 일식으로 변혁 당한 세계. 그 세계가 변덕스레 새긴 낙인. 훗날 사이퍼(Cypher)라 불리울 이능력자. 하이드와 소녀는 어쩌면 그 공통점에 이끌렸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도저히 남 같지가 않았어. 나와 같은, 나랑 비슷한, 평범하지 않은 사람은 네가 처음이었어. 그래서 네가 그런 눈을 하고 있는 걸 참을 수 없었어."


 소녀는 하이드가 만난 최초의 이능력자였다. 지금까지 하이드의 세계에서 이능력자는 그 자신 외엔 없었다. 그 고독함은 때로 하이드를 숨 막히게 하는 고통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하이드의 앞에 나타난 이능력자. 하이드는 이 소녀를 도저히 남이라 여길 수 없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무책임한 행동이야. 난 널 책임져 줄 수 없어. 나도 너만큼 어리고, 나 스스로를 간수하는 것도 힘겨워. 그리고 우리 패거리는 아마 널 받아들일 수 없을 거야. 미안해."


 하지만 하이드는 잔혹한 현실 또한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소녀에게 줄 수 있는 건 자유의 날개뿐. 이 얼마나 치기 어린 행동인가. 그런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끼며 두 팔로 몸을 감싸 안고 부들부들 떠는 하이드. 소녀는 하이드의 앞으로 돌아가, 그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떨리는 몸. 작고 여린 육신. 하지만 그녀와 같은 이능력자. 그리고 자신에게 자유를 선물한 은인. 소녀는 이 소중한 존재를 더욱더 강하게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미안해하지 마. 넌 나에게 자유를 줬어. 네가 남을 꼭 책임져야 할 이유는 없어. 나 또한 나를 건사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울 거야. 하지만 네 손길이 없었다면 그런 책임조차 다할 수 없었겠지. 고마워. 넌 나에게 '나의 삶'을 다시 되돌려줬어. 그것만으로도 널 자랑스러워해도 괜찮아."


 강하고도, 선명한 색채로 가득 찬 소녀의 말. 그 목소리는 하이드의 떨리는 몸을 진정시켰다. 소녀는 다시 한 번 손을 뻗어 하이드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소녀는 하이드의 홍안(紅顔)을 눈에 아로새기듯 천천히 훑어내렸다. 결코 잊지 않겠다는 듯이. 이윽고 소녀는 하이드의 상기된 뺨을 어루만지고는 입술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하이드는 벼락을 맞은 듯 온몸이 곤두섰다. 아찔할 정도로 기분 좋은 향기가 그의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영원과도 같은 순간이 흐른 뒤, 소녀는 두 손을 놓고 강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난 이제 떠날게. 네가 선물한 자유를 결코 헛되이 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널 평생 잊지 않겠어."


 하이드는 아직도 키스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멍하니 주저앉은 채였다. 그런 하이드에게 소녀는 최고의 미소를 보여주었다.


 "후후, 내 선물도 나쁘지 않았나 보네. 안녕, 하이드.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길 바라."


 그녀는 날개를 두어 번 치더니 천천히 날아올랐다. 하이드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그 뒷모습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소녀는 이미 저 하늘로 서서히 상승하고 있었다.


 하이드는 그녀에게 들리길 바라며 힘껏 외쳤다.


 "꼭……, 꼭 잘 살아야 해! 언젠가 다시 만나! 그리고……, 그리고 나도 널 잊지 않을게! 안녕! 안녕!"


 하이드의 외침이 닿은 걸까. 소녀는 살짝 고개를 돌려 하이드를 바라보았다. 황금빛 눈동자는 마지막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마침내 소녀는 성해(星海)의 너머로 사라져갔다. 하이드는 맥이 풀려 그대로 쓰러지듯 뒤로 누워버렸다.


 "하, 하하…… 하하하. 하하하핫! 아하하하핫!"


 맑고 청아한 홍소(哄笑)가 멀리 퍼져 나갔다. 어린 소년의 가슴 속에 터질 것 같은 긍지가 샘솟았다. 오늘의 사건은 좋든 나쁘든 그의 인생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더불어 미래마저도.


 한동안 웃던 하이드가 웃음을 그쳐갔다. 그 말미엔 어쩐지 서글픈 흐느낌도 엿보였다. 그 감정을 깨닫게 되는 날은 아직 먼 훗날.


 그리고 하이드가 소녀의 이름을 물어보지 못한 것을 깨달은 것은 시간이 좀 더 지나서였다.

 

- chapter 3. 유년(幼年)의 종국(終局) -


 부랑아로 지내던 소년 하이드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그의 이명이기도 한 흑염을 선보이면서였다.


 하이드가 몸담고 있던 패거리는 사실상 그 당시의 하이드보다 어린아이들로만 구성되어 있었으며, 수장 또한 스물이 되지 않았었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패거리들이 린치를 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고, 결국 한 패거리가 나서 본격적으로 이들을 핍박했다.


 실랑이 끝에 하이드 패거리의 리더가 흉기에 당하는 순간, 하이드는 온몸에서 검은 불꽃을 피워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상대 패거리들을 재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소각(태운다는 표현은 흑염의 능력에 실례이다)해버렸다.


 당시 하이드의 패거리였던 한 사람은 그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리더는 우리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대처했네. 하지만 그놈들이 리더가 어렵게 모은 돈을 갈취하려고 하자 결사적으로 저항했지. 잊을 수가 없어. 그 돈은…… 그 돈은 우리 모두가 하이드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 조금씩 조금씩 모아온 돈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놈들은 관심도 주지 않았지. 결국, 리더가 그놈들에게 달려들고, 그리고 칼에 찔렸다네. 그 이후는 이미 다 알 거라 생각하네.]


 놀라운 이야기였다. 1870년대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시대였다. 급속한 발전이 드리운 음영은 도시 사이사이로 파고들어 온갖 문제를 일으켰고, 거리는 부랑아들로 넘쳐났다. 그런 상황에서 돈을 모아 학교에 보낸다는 생각을 한 이름 모를 이 소년이 얼마나 대단한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만약 이 소년의 의도대로 하이드가 제대로 된 정규 교육을 마치고 양지에서 그 재능을 꽃피웠다면 다른 의미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의 앞날은 누구도 알 수 없는 법이다. 결국, 시대는 하이드에게 흑염으로서 살아갈 것을 강요했고, 하이드는 흑염이 되어야만 했다.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마치 상황이 의도한 것처럼 어떤 인물을 몰아가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 이후로 흑염의 행보가 바로 그 모습이었다.


 하이드의 강력한 힘에 이끌린 부랑아들이 하나 둘 하이드에게 다가왔고, 그중에는 능력자임을 숨기고 살아가던 이들도 있었다. 하이드는 그들을 포용했고, 이윽고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하이드의 세력을 가장 먼저 탐낸 조직은 하이드의 아버지가 몸담았던 카모라 패밀리였다.


<하이드의 일대기 중 발췌>

 

 리더는 최근 주변의 심상치 않은 기류를 민감하게 느꼈다. 어딘지 모르게 축축하고 기분 나쁜 그런 느낌. 그 때문에 요 며칠간 상당히 저기압인 상태였다. 하이드는 그런 리더가 걱정되어 며칠 간 눈치를 보다, 조심스레 화제를 꺼내 들었다.


 "저기…… 리더. 뭔가 맘에 안 드는 거라도 있으세요?"


 리더는 하이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 녀석이 눈치 챌 정도로 불안해하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흩뿌렸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책망한 리더는, 그런 하이드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으악! 리더! 그만 해요! 아파요!"


 "이놈아, 어른스러운 척하지 말라고 했지? 그리고 기왕 어른스러운 척하려면 좀 눈치껏 넘어가라. 응?"


 하이드는 입을 꾹 다물었지만, 리더의 말에서 좋지 않은 기색을 눈치챘다. 눈치껏 넘어가 달라는 말은, 즉 넘어가고 싶어하는 '일' 이 있다는 것 아닌가? 하지만 하이드는 깊이 캐묻지 않았다. 리더는 어디까지나 리더. 그의 권위는 존중받아야 하는 법이니까.


 "그럼 전 아이들하고 놀아주러 나가볼게요."


 "그래. 얘들 다치지 않게 잘 봐주고."


 허름한 거처 밖으로 나가는 하이드.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리더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부디 자신의 느낌이 별일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그 바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참하게 부서지고 말았다.

 

……………………………………………………………………………………………………………………………………………

 

 "아, 그 주인 양반 진짜. 어지간히 좀 할 것이지 볼 때마다 저러니 죽을 맛이구만……."


 "아하하. 그 아저씨도 리더가 맘에 들어서 그런 것 아니에요?"


 "그럼 다음부턴 네가 해봐라. 그 양반 사실 너도 좋아해."


 "으엑, 사양이에요."


 하루 일을 마치고서 식료품을 사 들고 돌아가는 리더와 하이드.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이었지만, 오늘만은 어딘가 달랐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둘의 등 뒤를 쫓는 눈길이 골목 사이에서 번득였다.


 아지트에 다다른 리더와 하이드는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언제나와 같은 하루. 그리고 그 일상은 불온한 손길에 의해 침범당했다.


 "여어~ 반갑다, 꼬맹이들."


 어디선가 건들거리며 튀어나온 부랑자들. 그 수는 최소 열은 넘는 것 같았다. 리더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재빨리 파악했다. 아직 어린 그의 패거리가 거친 부랑자들의 표적이 된 것이다. 리더는 막 아지트에서 나오려던 아이들에게 소리쳐 다시 아지트 안으로 밀어 넣고는 날카롭게 외쳤다.


 "무슨 일이야? 댁들하고는 엮일 건덕지도 없을 텐데?"


 "허? 요 쥐 방울만 한 놈이 말하는 본새 좀 보소? 이거 교육이 좀 필요하겠는걸?"


 순식간에 험악해지는 부랑자들. 리더는 땀으로 축축이 젖은 손바닥을 감추려 주먹을 힘껏 쥐었다. 이제 겨우 열아홉 살의 소년인 자신과 서른 즈음의 어른인 부랑자들과의 싸움은 도저히 성립할 수조차 없었다. 거기다 하나도 아니고 십여 명.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 것인가?


 "긴말 하지 말고, 용건이나 말해. 뭐, 어차피 즐겁고 신 나는 용건은 아니겠지?"


 리더의 독설이 자못 귀엽다는 듯 빙글거리던 선두의 부랑자는 기꺼이 자신들의 용건을 말했다.


 "자식, 똑똑한데? 그래, 일단 거기 먹을 게 좀 필요해서 말이지. 좀 빌려 가야겠다. 부탁한다? 응?"


 비꼼으로 가득 찬 말투. 리더는 굴욕감을 간신히 묻어버리고, 독기 서린 눈빛으로 부랑자를 노려보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언제고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었다. 서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고, 거리로 밀려난 부랑자들은 점점 위험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으니까. 그걸 알면서도 리더는 패거리의 현실을 바꿀 수 없었다. 오로지 운에 기댈 수밖에 없었는데, 이 빌어먹을 행운의 여신은 그들을 쳐다보지조차 않은 것이다.


 그 순간 아지트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리더는 크게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패거리의 가장 어린 여자아이가 한 부랑자의 손아귀에 잡혀있었다. 부랑자는 여기 있는 놈들이 다가 아니었던 건가?


 "이 우라질 놈들! 뭐 하는 짓이야! 그 애를 놔 줘!"


 리더가 막 돌진하려는 찰나, 여자아이를 붙잡은 부랑자가 날카로운 칼을 들이대었다. 여자아이의 목덜미에 선뜩한 날이 대어지자 아이는 하얗게 질려 히끅거렸고, 리더는 튀어 나가려는 몸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 같지도 않은 새끼들…… 원하는 게 뭐야? 거기 먹을 것? 다 가져가. 대신 아이들에겐 손끝 하나 대지 마라."


 "아, 칭찬 고마워. 그리고 식료품도 잘 받아가지. 언제고 갚을 거야. 아마…… 너희가 죽고 나서 말이지."


 '죽고 나서'라는 말에 순간 오한이 들었지만, 다행히 지금 그들을 해칠 의도는 아닌 것 같았다. 리더는 이를 갈면서도 먹을거리가 든 바구니를 부랑자에게 건네었다. 여자아이는 마침내 억센 손아귀에서 풀려났고, 너무 큰 공포에 질린 나머지 제대로 울지도 못하고 흐느끼고 있었다.


 "하이드, 얘 진정시키고, 따뜻한 물 준비해서 조금씩 마시게 해. 다른 애들도 어디 다친 곳 없는지 꼼꼼히 살펴보고."


 능란하게 아이들을 다루는 리더. 그런 리더를 보던 부랑자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그저 어린놈이 아니라, 조직을 이끌고 구성원을 다룰 줄 알지 않는가? 꽤나 탐나는 인재다. 잘 구슬려서 자신의 부하로 만들면 쓸 곳이 많을 것 같다.


 그런 부랑자의 탐욕스런 눈길을 뒤로하고, 리더는 패거리를 다독이는데 안간힘을 쏟았다. 어차피 저들의 목적이 식료품이었다면, 목적은 달성되었으니 곧 물러날 것이다. 다만 앞으로도 이런 수탈이 계속될 테니, 아지트를 옮겨야 하겠지. 어렵게 자리 잡은 곳에서 떠나야 할 생각을 하니 분통이 터졌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들은 아직 어리고 약했으니까.


 거기까지였으면 다행이겠지만, 부랑자들은 예상보다 더욱 집요했다. 아지트에서 부랑자 한 놈이 더 나타났는데, 그 손에 쥐어진 무언가를 본 순간 리더의 눈이 부릅떠졌다. 저건!


 "이봐! 대박이야! 요 꼬맹이들이 숨겨둔 돈이 제법 많던데? 이 정도면 두어 달 걱정 없겠어!"


 리더는 이번에야말로 분노가 이성을 짓누르는 걸 느꼈다.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부랑자에게 달려들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 그건 안 돼! 그 돈에 손대지 마!"


 부랑자는 살짝 놀란 듯 했지만, 어렵지 않게 리더를 후려쳐서 쓰러뜨렸다. 리더는 흙바닥에 널브러져 엉망이 된 몰골을 아랑곳하지 않고 미친 듯이 대들었다.


 "그 더러운 손 놔! 그 돈만은 건드릴 수 없어! 이 개새끼들!"


 거친 욕설과 함께 묵직한 차돌을 집어 드는 리더. 리더의 이성은 이미 반쯤 마비되었고, 부랑자의 손에 들린 볼품없는 가죽 주머니만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저 돈이 어떤 돈인데, 네까짓 놈들에게 빼앗기려고 모은 돈이 아니다!


 절규하며 달려드는 리더에게 위협을 느꼈는지, 부랑자는 손칼을 빼들고 리더를 위협했다. 그러나 리더는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들었다. 그리고…….


 "흐…… 허억……."


 손칼이 리더의 옆구리에 깊숙이 처박혔다. 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푹 박혀버린 칼. 리더는 힘이 빠져나가는 듯 잠시 휘청했다. 정작 리더를 찌른 부랑자도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리더는 아찔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겨우 이 정도로 굴복할 소냐. 저 주머니는 아이들의 미래다. 자신이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저걸 지키기 위해선, 목숨을 걸 수 있다!


 "그…… 손, 놓으라고 했다----------!!"


 포효와도 같은 외침. 리더는 손에 쥔 돌덩이를 높이 들고 부랑자를 내려치려 했다. 하지만 결국 그 돌은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어이, 어이. 그런 위험한 물건을 휘두르면 곤란하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정·당·방·위를 할 수밖에 없잖냐?"


 아까부터 리더와 대치하던 부랑자가 어느새 그의 등 뒤로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그 손아귀에 들린 칼은 리더의 등 뒤에 박혀 들어간 채였다.


 리더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부랑자는 그 눈을 보는 순간 흠칫 놀랐다. 칼에 두 번이나 찔리고도 그 눈빛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네놈들을 전부 쳐 죽이리라 절규하는 듯한 매서운 안광. 그 안광에 질린 부랑자는 저도 모르게, 박힌 칼을 억세게 비틀어 올렸다.


 "커, 억."


 리더는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과연 이것엔 버틸 수 없지. 이왕 이렇게 된 것,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면 확실하게 끝장내야 한다. 부랑자는 아쉬운 마음을 접어두고, 리더의 옆구리에 박힌 칼을 뽑아 다시 반대쪽 옆구리를 쑤셨다.


 그리고 마침내 힘이 다한 듯 리더는 천천히 고꾸라졌다.


 "리…… 리더?"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 하이드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다가, 리더가 세 번이나 찔리고 쓰러지는 순간에서야 간신히 리더를 불렀다.


 "리더, 리더! 안돼요! 리더! 정신 차려요! 리더!!"


 하이드는 미친 듯이 리더를 부르며 달려갔다. 하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그의 몸 아래로 배어 나오는 피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고, 몸은 차가워져 갔다.


 "하, 하이드냐……."


 리더는 꺼져가는 목소리로 하이드를 불렀다. 하이드는 반색하며 대답했다.


 "예! 저예요! 리더! 제 목소리 들리죠? 빨리, 빨리 치료를……."


 하이드는 불길한 느낌을 애써 무시하며 그의 상처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등과, 양 옆구리에 새겨진 상흔에선 쉴 새 없이 피가 흘러내리고, 그 피는 작은 하이드의 두 손으로 막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그리고 출혈의 기세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리더의 심장이, 점점 멈춰가고 있다는 의미.


 "괜찮아…… 괜찮아. 하이, 드……."


 그의 눈에서 생기가 흐려져 간다. 리더는 몽롱해져 가는 의식을 힘겹게 다잡았다. 마지막으로, 이 녀석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 그전에는 죽을 수 없다. 이렇게 어린 녀석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꼈지만, 이 짐을 부탁할 사람은 하이드 뿐이다.


 리더는 정신을 집중하고, 마지막 힘을 긁어모아 또박또박 말했다. 혹여 하이드가 잘못 들을 염려조차 없을 정도로 선연하게.


 "나 대신, 저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 그리고, 미안…… 하다. 하이드. 미안해……."


 겨우 몇 마디. 이 몇 마디를 위해 남은 힘을 전부 끌어다 쓴 리더는 마지막으로 하이드를 두 눈동자에 담고는,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하이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죽음을 눈앞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하이드는 리더가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잔인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부모도 이렇게 세상을 떠났으니까.


 눈앞으로 환상이 지나간다. 환상인 걸까, 자신의 기억인 걸까. 그도 아니라면 꿈일까.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에서 하이드는 최악의 기억을 다시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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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집 안. 자신을 들어 벽장 안으로 집어넣던 어머니. 그런 자신을 굳건한 눈으로 지켜보던 아버지. 마지막으로 자신의 손을 잡아준 할머니.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그때도, 지금도 모르겠다. 그저 기억나는 것은 날카로운 고함소리와 귀청이 떨어질 듯한 폭발음.


 너무나 무서웠지만, 또한 어머니와 아버지, 할머니가 너무도 걱정되었던 하이드는 문을 슬쩍 열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들어온 것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가족들.


 너무나 놀란 하이드는 저도 모르게 벽장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겨우 예닐곱 살의 꼬맹이였지만, 가족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할머니도,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어머니는 하이드를 애타게 바라보고 있었다. 빨리, 다시 벽장 속으로 숨으라고. 그렇게 눈빛으로 애타게 하이드를 바라보던 어머니. 하이드는 그 눈빛을 이해하지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간신히 기어가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검은 옷을 입은 한 무리가 다시 들이닥쳤다.


 그 뒤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들이 약간 난처한 얼굴로 하이드를 바라보면서 뭐라고 했던 것 같다. 우습게도, 이 잔인무도한 짓을 저지른 놈들도 아직 어린아이를 죽이는 것은 내키지 않았나 보다. 당시의 하이드는 그 사실을 알 수 없었지만, 이 괴한들이 가족을 이렇게 만든 것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자신 안의 무언가가 부서져 나간다. 하이드를 평온한 일상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었던, 앞으로도 그리될 수 있게 했을 자물쇠. 그것이 강제로 비틀려 꺾이고, 마침내 산산이 조각난 순간.


 하이드의 시야는 검게 물들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다시 돌아온 시야. 검은 옷의 괴한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그 자리에는 검은 재만이 약간 흩날릴 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무언가가 자신의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하이드는 약간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금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생명은 경각에 달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아이가 무슨 일을 했는지 확실하게 두 눈에 담았다. 이것이 꿈이건 현실이건, 이제 자신의 아이는 무사할 것이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강하게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벽장 쪽으로 눈길을 보내었다. '저기에 숨거라. 제발. 사랑하는 아들아.'


 하이드는 그 눈빛에 담긴 의미를 읽은 듯,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벽장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눈에 마지막으로 비친 모습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들의 슬픈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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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 불길이 꺼져가던 어머니, 그리고 앞으로 쓰러져 있던 아버지의 모습과 리더의 시신이 겹치는 순간, 하이드는 숨이 턱 막혔다. 무언가가 치고 올라온다. 아, 이것은 결코 남에게 보일 수 없는 것. 자신이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이형의 존재'라는 증거.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 따위, 개의치 않는다. 지금 필요한 건, 저 앞에 서 있는 빌어먹을 놈들에게 복수할 힘!


 하이드가 천천히 일어났다. 두 손과 앞섶이 피로 물든 섬뜩한 자태. 거기서 풍겨 나오는 위험한 냄새에, 리더를 찌른 부랑자 둘은 살짝 뒤로 물러섰다.


 하이드는 오들오들 떠는 패거리의 아이들에게 말했다. 다시없을 정도로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다들 들어가 있어. 그리고 내가 나오라고 하기 전엔 나오지 마. 밖을 보지도 마."


 아이들은 몸서리를 치며 아지트 안으로 들어가 장막을 내렸다. 그리고, '흑염(黑炎)'이 마침내 그 존재를 드러내었다.


 부랑자 둘은 하이드의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던 것을 행운으로 여겨야 했다. 왜냐하면, 인간이 검은 불길에 휩싸여 재로 화하는 것을 맨 정신으로 보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하이드의 몸 어디에선가 흘러나온 새까만 불꽃은 두 부랑자를 감싸더니, 순식간에 한 줌의 검은 재로 만들어버렸다. 처음엔 부랑자 패거리들도 무슨 일이 생겼나 하고 어리둥절해 있었지만, 하이드의 몸에서 줄기줄기 흘러나오는 흑염이 주변에 들러붙어 혀를 날름거리자 드디어 현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말로만 듣고, 소문 속에서나 있으며, 신화와 전설 속에서 살아가던 '것'이 그들의 눈앞에 있었다. 충분한 살의를 가지고.


 부랑자들은 공포에 질려 뒤로 떠듬떠듬 물러섰다. 하이드는 그만큼 성큼성큼 걸어갔다. 너무나 큰 공포에 질린 그들은 뒤돌아 달려간다는 간단한 선택조차 하지 못했다.


 하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흑염을 거세게 피워올렸다. 휘날리는 검은 머리칼. 무감정하게 가라앉은 검은 동공. 타오르는 검은 불꽃. 그 주변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왜곡되어갔다. 마치 칠흑의 악마가 강림한 듯한 모양새. 부랑자들은 마침내 공포에 질려 비명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터져 나온 흑염이 그들이 있던 자리를 뒤덮고, 약간의 재만을 남긴 채 완전히 무(無)로 돌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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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소년으로서 살던 나날의 고별.


 그것은 격동하는 시대의 분기점.


 그것은 새로운 역사의 시작.


 그것은 마침내 실현된 숙명.


 지하 연합의 초대 수장, 검은 신사가 눈을 뜬 날.


 흑염 하이드가 세상에 그 존재를 선포한 날이었다.

 

- chapter 4. 필부의(匹夫)의 방황(彷徨) -


 하이드가 흑염을 선보인 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지금까지 어떻게 능력을 숨겨왔는지 모를 정도로 적극적인 행동을 시작한 하이드는, 주변의 부랑아 집단을 완전히 평정하고 그 세력을 규합했다. 그리고 그 소문을 들은 많은 이능력자, 지금의 사이퍼(Cypher)들이 하이드에게 하나 둘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이드는 그런 사이퍼들을 차별없이 받아들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무력을 지닌 집단으로 성장하였다. 앞서 말했다시피 이들의 힘을 가장 먼저 눈치채고, 가장 먼저 손을 뻗은 조직이 나폴리의 카모라 패밀리였다.


 하이드는 카모라 패밀리에 가입한 후 절대적인 충성심을 보였고, 약 5년의 세월에 걸쳐 거대한 입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20살이 되던 해. 하이드는 쿠데타를 일으켜 수뇌부를 완전히 섬멸시키고 그가 카모라 패밀리의 수장으로 등극하게 된다.


 지하 연합(Underground Union)의 발족임과 동시에, 흑염 하이드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사건.


 그리고 그의 등을 떠미는 계기가 하나 더 있었다. 1888년, 살인마 잭 사건과 그로 말미암은 빅토리아 선언의 선포. 전 유럽은 능력자 사냥의 열풍에 휩싸이고, 대부분 무고했던 능력자들이 목숨을 잃어갔다.


 지금에서는 몸서리쳐질 정도로 무서운 일이나, 당시 일반인들의 공포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아직 비일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궁지에 몰린 능력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개 뿐이었다. 죽던가, 세상의 이목을 피해 슬럼으로 몸을 숨기던가.


 흑염은 이렇게 몰려난 능력자들을 차별없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통제에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는 강력한 제재를 가하고, 비합법적인 방법으로나마 그들이 생계를 꾸려나가도록 노력했다. 연합 소속의 능력자들은 스스로의 힘을 이용해 노동을 하여 물품을 생산했다. 이 최소 단위를 '노동조합'이라고 지칭했는데, 유럽 전역에 위치한 노동조합들끼리 필요한 물품을 교환함으로서 최소한의 삶을 보장하는 방식이었다.


 탄압이 격화될수록 연합의 세력 또한 커져갔으며, 세력이 커진 만큼 다양해진 지하 연합은 마침내 거의 자급자족이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 방법은 당시 유행하던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와 상통하는 면이 있었기에 후일 중부 유럽 팔티잔 연합을 흡수하는 데 큰 힘이 되어주었다. 물론 상당히 후일의 일이다.


 그리고 빅토리아 선언이 남긴 것은 지하 연합만이 아니었다. 회사 법인 헬리오스(Foundation of Helios). 흔히 알고 있는 '회사'의 창설 또한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회사의 대표. 능력자들의 권익을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난 인물. 시대가 낳은 위대한 두 영걸 중 하나. 명왕 헨리 밀러 3세.


 1890년, 35세의 명왕은 위대한 모험가 그랑 플람의 [숭고한 길 재단]을 물려받았고, 밀러 가문의 가업과 재단의 힘을 합쳐 회사를 설립했다.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한 회사는 마침내 핍박받던 능력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 영향력을 펼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음지에서 비밀스레 이루어지던 활동은 1905년에 일어난 커다란 두 사건을 기점으로 양지로 드러나게 되었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피의 일요일 사건, 동유럽에서 일어난 의문의 연속 방화 사건. 큰 인명피해가 발생한 사건이었고, 두 사건 모두 능력자가 연관되었기에 유럽 전역은 다시 한 번 살육의 광기에 휩싸였다.


 집단 공포에 빠진 일반인들은 러시아의 능력자 집단 적기사단을 축출했고, 동유럽에선 수많은 불의 능력자들이 마녀로 몰려 처형되었다. 명심하라. 피에 물든 이 과오는 이제 갓 30년이 지난, 현시대에 일어난 최악의 인권 피해였다. 광기는 멈출 줄 몰랐고, 하루라도 비명소리가 멈추는 날이 없었다.


 애초부터 음지에서 활동하던 연합은 손 쓸 도리가 없었으나, 제도의 그늘 아래 있는 헬리오스 사는 오랜 로비 끝에 1906년, 마침내 큰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유럽 각국의 정부와 비밀리에 교섭한 명왕은 마침내 스위스의 수도 베른에서 체결된 '베른 비밀조약'을 발효, 온 유럽에 만연한 능력자 학살을 마침내 끝내었다. 마침내 능력자들이 양지에서 활동하고, 그 권익을 보호받고, 그 힘을 이로운 방향으로 쓸 수 있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시작된 '능력자 등록제'로 인해 모든 능력자들은 정부 기관에 코드명과 등급을 부여받고 관리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베른 비밀조약'의 대가로 각 정부의 요청에 따라 적합한 능력자를 제공할 의무를 지게 된 회사는 그것을 역으로 이용, 온 유럽에 그 영향력을 합법적으로 퍼지게 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능력자들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 위대한 업적을 일구어낸 헨리 밀러 3세. 그와 동시대를 살아간 것은 커다란 영광일 것이다.


 반대로 이 시기의 연합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마피아를 근거로 하는 연합은 더욱더 음지로 몰렸고, 하이드는 조직을 유지하는데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 다행히 연합은 이 암흑의 시대를 견뎌내었고 미래로 나아갈 기회를 잡아챘다.


 하지만 이 두 조직이 넘어야 할 시련은 아직도 무궁무진했으니, 그 또한 흑염과 명왕이 살아간 시대였다.


 두 사람은 다른 방법으로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갔고, 시대가 제시한 질문을 넘어섰으며, 마침내 스스로 역사를 써 나간 위대한 인물로 거듭났다.


 하지만, 또한 능력자였던 두 사람이 겪었어야 할 고통은 그 누가 보듬어 줄 것인가? 그 의문은 지하 연합의 2대 수장이자 흑염 하이드의 외동딸, 앤지 헌트의 존재로부터 추론할 수 있다.


 <하이드의 일대기 중 발췌>

 

 1906년, 베른 비밀조약으로 인해 능력자들의 활로가 생겼고, 그로 인해 환희하는 능력자들로 거리가 가득 차올랐다. 일식의 날 이후로 40여 년이 흐른 지금, 어쩌면 이 조치 또한 너무 늦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이드는 그것이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스물의 나이로 카모라 패밀리를 손에 넣고 지하 연합을 결성, 그 영향력을 유럽 전역에 퍼뜨리기까지 다시 이십여 년의 세월을 쏟아부었다. 오갈 곳 없는 능력자들을 하이드의 신념에 따라 받아들이고 그들의 삶을 위해 최선의 방책을 찾고, 그것을 온 힘을 다해 현실화시켰다. 마침내 노동조합이 유럽 곳곳에 자리잡고, 여기서 생산되는 물품들이 활발하게 교류되기까지 하이드와 연합의 창립 맴버들이 기울인 노력은 저 헬리오스 사가 벌인 로비와 비교해도 크게 손색이 없을 것이다.


 하이드는 아직 일면식조차 없는 명왕에 대해 생각했다. 모험가 그랑 플람의 [숭고한 길 재단]의 상속자이며, 영국 명문 귀족가 밀러 가문의 수장. 그 힘을 다루어 헬리오스 사를 설립한 수완. 거기다 각국 정부와 극적인 타협을 이끌어 낸 역량. 마침내 능력자들이 마음 놓고 살아갈 토대를 마련한 호인.


 그와는 다른 방법으로 그와 같은 목적을 향하는 명왕. 하이드는 위험한 경쟁자일 수도 있는 이 남자에게 적개심보단 뜻 모를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이드가 꿈꾸는 이상향은, 유럽 전역의 모든 능력자들이 동질감과 유대감을 가지고 서로를 가족처럼 여기고 서로를 돕는 그런 사회였다. 그리고 그 시도는 반평생 넘도록 줄기차게 이루어졌고 결국은 어느 정도 성과를 내는 데 성공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노동조합들은 정기적인 교류로 서로를 보듬고 문제가 생기는 곳은 인근의 조합에서 자발적으로 나서 도와주는 등, 이미 지하 연합 그 자체로 존속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하이드의 가슴은 언제나 한구석이 텅 비어있는 듯 했다. 이 상실감은 언제나 하이드를 괴롭혔다.


 '하하…… 눈앞에서 부모를 잃고, 아버지와 같았던 사람을 또 잃고, 첫 사랑은 이름도 행방도 모르는 사람이 정상적일 순 없는 노릇이지…….'


 하이드는 홀로 자조하곤 했다. 그가 지하 연합을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은 다름아닌 이 상실감 때문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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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모라 패밀리에 가입한 이후, 하이드는 꿈꿔왔던 그 모든 것이 이미 변질되어버린 것을 통감해야 했다.

 


 그의 아버지가 자랑스레 말했던 카모라 패밀리는 이미 없었다. 남은 것은 탐욕에 찬 수뇌부와 이득을 위해서라면 더러운 짓을 서슴지 않는 구성원들 뿐. 협객의 낭만도, 힘에 대한 책임도, 그리고 이웃, 친구, 가족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숭고함도, 그 어떤 것도 자취조차 남아있지 않은 무법조직.


 하이드는 절망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십오 세의 나이로 시작한 말단 조직원부터 시작한 하이드는 5년의 시간에 걸쳐 그의 세력을 다졌다. 가족과도 같은 모임을 원하던 하이드, 그리고 보살핌이 필요했던 거리의 능력자들이 소문을 듣고 하이드에게 속속 다가왔다.


 하이드의 아버지가 사랑했던 카모라 패밀리 자체를 지울 순 없었다. 이렇게까지 타락했지만, 그래도 카모라 패밀리는 하이드와 그의 아버지를 이어주는 작은 매개체였으니까. 하이드가 스물이 되던 해, 마침내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수뇌부를 완전히 제압하고 패밀리의 모든 세력을 접수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로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한 지역의 능력자들을 추스르고 나면 다른 지역에서 능력자들이 탄압받았다. 손닿고, 능력이 받쳐주는 한 그들을 구원하고 가족처럼 대했다. 말은 쉬웠지만, 도중의 시행착오와 실패, 저항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 모든 애로사항을 넘길 수 있었던 이유는 하이드의 절대적인 능력이었다.


 성인이 된 하이드는 175Cm정도의 평범한 체구를 가졌지만, 타오르는 듯 위로 솟구치는 흑색 곱슬머리와 강인한 얼굴선을 가진 억센 남성이었다. 라틴계 특유의 굴곡진 이목구비와 강렬한 인상의 검은색 동공은 외모만으로도 그의 카리스마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검은색 일색의 컬러와 동시에 그의 능력인 흑염이 합쳐지면 대부분의 적들은 싸우기도 전에 꼬리를 내리기 일쑤였다.


 이러한 하이드의 카리스마와 통솔력이 없었다면 연합은 결코 존재할 수 없었으리라. 그리고 그가 갈구하는 것이 가족이 아니었더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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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거친 풍랑을 항해하는 선박과 같은 삶이 그를 피폐하게 만든 것은 당연지사였다. 짧은 세월도 아닌, 이십 년의 투쟁은 그를 마멸하는데 충분하다 못해 위험할 정도였다. 최근 하이드는 정신적으로 상당히 지쳤고 연합을 이끄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거기에 일조한 것은 바로 자신의 가족.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탈리아에 퍼진 마피아 조직을 완전히 흡수하기 위해 한 대부의 딸과 정략적인 혼인을 맺었다. 그는 가족을 손에 넣었지만, 그것은 그가 원하던 가정은 아니었다. 부인이 된 여자는 하이드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이드 또한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가 연합의 세를 불리는 것에 집중한 것도 있었지만, 아직 그의 마음엔 박쥐 소녀가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상황이 복합적으로 맞물려 이 부부는 별거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고, 그나마 의무적으로 낳은 아들에게도 큰 정을 주지 못했다. 이것은 하이드로서도 아쉬운 일이었다.


 여기까지 틀어진 이상, 어떤 계기 없이는 이 가정을 정상으로 되돌리긴 어려웠다. 하지만 하이드는 그러고 싶은 마음도,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너무나 갑갑한 나머지, 그는 심복 하나를 대동하고 무작정 프랑스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수도 파리의 거리에 당도했다.


 짙은 흑색 수트로 몸을 가리고 페도라를 푹 눌러쓴 모습. 거기엔 흑염 하이드가 아닌, 약간 멋 부리기 좋아하는 중년의 신사만이 서 있었다. 이런 모습을 자주 보이는 하이드를 본 어떤 이가 농담 삼아 '검은 신사'라고 부른 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별명이 검은 신사로 정착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이드는 활기에 가득 찬 거리를 둘러보며 새삼 시대가 변한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거리를 당당히 누비는 이능력자들. 눈에 띄는 신체변이 계열 능력자들이 간간히 보이는 걸로 보아 특이능력 계열 능력자들 또한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세상을 변혁한 명왕. 흑염은 언제고 그를 한번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언젠가 이루어질 것이다. 물론 그가 생각하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말이다…….


 그렇게 거리를 누비던 하이드의 눈에 어떤 여성이 들어왔다. 그녀와 우연히 정면으로 마주친 순간, 하이드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밝은 금발. 풍성하게 굽이치는 머리칼은 신비로운 매력으로 빛났다. 눈동자는 연한 호박빛으로 반짝였고, 그 얼굴선은 하이드의 유년기의 일부분을 강제로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의 첫사랑, 박쥐 날개의 소녀. 지금 하이드와 마주보는 여성에게서 그 소녀의 편린을 느낀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을 줄 몰랐기에 잠시 얼떨떨해진 하이드는 걸음을 멈추었고, 그와 눈이 마주친 듯 했던 여성은 인파 속으로 사라져갔다. 정신을 차린 하이드는 그의 심복하게 다급하게 속삭였다.


 "자네, 방금 이 쪽을 보던 금발 아가씨를 봤나?"


 "노란 눈동자의 여자라면, 아마 맞을 겁니다."


 "저쪽으로 금방 사라졌으니, 쫓으면 찾을 수 있을걸세.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확인 좀 해줄 수 있겠나? 나는 이 길로 이곳 조합으로 가 있겠네."


 "분부대로."


 하이드의 심복은 날렵하게 사람 사이를 헤치며 인파 속으로 묻혀갔다. 하이드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발을 돌려 조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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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믿음직한 심복답게 그는 상당히 양질의 정보를 가지고 귀환했다.


 '그녀는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였습니다. 잠깐 들어본 바로는 상당히 좋은 노래를 부르더군요. 인기도 꽤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 다음날, 땅거미가 내려앉는 시간 즈음에 하이드는 조용히 그 술집을 향했다. 이번에는 홀몸이었다.


 술집은 꽤나 후미진 곳에 위치했다. 묵직한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곧바로 안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 흩어진 둥그런 테이블. 그리고 정면에는 제법 그럴듯한 무대가 위치하고 있다. 바(bar)는 무대의 오른쪽에 설치되었다. 아직은 이른 시간인지 손님은 없고, 바의 마스터 또한 조용히 글라스를 닦는 중이었다.


 하이드는 무대와 가장 가까운 바 앞에 자리를 잡고, 도수가 약한 칵테일을 주문했다. 금방 나온 칵테일로 입을 축이면서 그는 조심스레 질문했다.


 "이곳에 꽤 멋진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있다고 들었소. 오늘은 오지 않는 거요?"


 "아, 헌트 양을 말하시는가 보군요. 그녀는 아직 학생이라 좀 더 시간이 지나야 도착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러겠소. 그럼 이것보다 조금 더 센 것으로 한 잔 더 부탁하겠소."


 "기꺼이."


 조용한 바. 신기하게도 하이드가 몇 잔의 술을 마시는 동안 손님은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마스터는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으나 한번씩은 이런 날도 있는 법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하이드가 기다리던 여성이 도착했다.


 "마스터! 죄송해요. 오늘은 조금 늦었죠?"


 "아니다. 보다시피 오늘은 네 노래를 들어주실 분이 이 신사분 뿐이니까."


 "어머? 별일이네요?"


 "그러게 말이다. 자, 준비해서 올라가렴. 이 분은 아까부터 널 기다리고 있었으니 멋진 노래 부탁한다."


 "에이, 제 실력을 못 믿으시는 거예요? 맡겨두세요!"


 당찬 아가씨다. 그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소녀와는 많이 다른 성격. 하지만 그 이목구비에서 그녀의 이미지가 확실하게 겹친다. 가까이서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마치 고양이처럼 샐쭉하게 솟아있는 눈꼬리였다.


 이윽고 무대의상을 차려입은 아가씨가 무대 위로 올라섰다. 어둑어둑한 조명으로 금발이 갈색으로 보였다. 그러자 소녀와 더욱 더 닮아보였다. 그는 하염없이 이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걸까? 무대 위의 아가씨는 그를 향해 생긋 웃어보이고는 노래를 시작했다.

 


 Non, Rien De Rien, 
 아니에요! 그 무엇도 아무것도,

 


 Non, Je Ne Regrette Rien 
 아니에요!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Ni Le Bien Qu'on M'a Fait, 
 사람들이 내게 줬던 행복이건 불행이건

 


 Ni Le Mal Tout Ca M'est Bien Egal 
 그건 모두 나완 상관 없어요

 


 Non, Rien De Rien,
 아니에요 그 무엇도 아무것도

 


 Non, Je Ne Regrette Rien 
 아니에요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C'est Paye, Balaye, Oublie, 
 그건 댓가를 치뤘고,쓸어버렸고,잊혀졌어요

 


 Je Me Fous Du Passe 
 난 과거에 신경 쓰지 않아요!

 


 Avec Mes Souvenirs
 나의 추억들로

 


 J'ai Allume Le Feu 
 나는 불을 밝혔었죠

 


 Mes Shagrins, Mes Plaisirs, 
 나의 슬픔들, 나의 기쁨들

 


 Je N'ai Plus Besoin D'eux 
 이젠 더이상 그것들이 필요치 않아요

 


 Balaye Les Amours Avec Leurs Tremolos Balaye Pour Toujours
사랑들을  쓸어버렸고 그 사랑들의 모든 전율도 영원히 쓸어 버렸어요

 


 Je Reparas A Zero 
 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거예요

 


 Non, Rien De Rien,
 아니에요! 그무엇도 아무것도

 


 Non, Je Ne Regrette Rien 
 아니에요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Ni Le Bien Qu'on M'a Fait, 
 사람들이 내게줬던 행복이건 불행이건 간에

 


 Ni Le Mal Tout Ca M'est Bien Egal 
 그건 모두 나와 상관없어요

 


 Non, Rien De Rien,  
 아니에요! 그 무엇도 아무것도

 


 Non,Je Ne Regrette Rien 
 아니에요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Car Ma Vie, Car Me Joies 
 왜냐하면 나의 삶 나의 기쁨이

 


 Aujourd'hui Ca Commence Avec Toi
 오늘 그대와 함께 시작되거든요!

 

 


 아름다운 샹숑.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하이드를 바라보았다. 생기 넘치는 눈동자는 그 광채가 넘쳐나 호박빛 눈동자를 마치 황금처럼 빛나게 했다. 마치 기억 속의 소녀가 나이를 먹고 그의 눈앞에 서있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박수를 보내었고, 아가씨는 만족한 듯 다음 노래를 시작했다.

 


 Le ciel bleu sur nous peut s'effondrer
 푸른 하늘이 우리 위로 무너져 내리고

 


 Et la Terre peut bien s'ecrouler
 지구까지 뒤집어져 버리더라도

 


 Peut m'importe si tu m'aimes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당신이 날 사랑해준다면

 


 Je me fous du monde entier
 나는 세계가 어떻게 되든 전혀 상관 없어요

 


 Et tant que l'amour inondera mes matins
 사랑이 아침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동안에는

 


 Et tant que mon corps fremira sous tes mains
 나의 몸이 당신의 팔 아래에서 떨리는 동안에는

 


 Peut m'importent les problemes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어요

 


 Mon amour puisque tu m'aimes
 내 사랑이여, 당신이 날 사랑하기만 해준다면

 


 J'irai jusqu'au bout du monde
 난 지구 끝까지라도 갈 거에요

 


 Je me ferai teindre en blonde
 내 머리를 금발로 염색할 수도 있어요

 


 Si tu me le demandais
 당신이 원한다면

 


 J'irai decrocher la Lune
 달을 따러 갈 수도 있어요

 


 J'irai voler la fortune
 행운이라도 가져올까요

 


 Si tu me le demandais
 당신이 원한다면

 


 Je renierai ma patrie
 나라도 버릴 수 있어요

 


 Je renierai mes amis
 친구도 버릴 수 있어요

 


 Si tu me le demandais
 당신이 원한다면

 


 On peut bien rire de moi
 사람들은 날 비웃겠죠

 


 Moi je ferai n'importe quoi
 내가 뭐든지 다 한다고

 


 Si tu me le demandais
 당신이 바라기만 한다면

 


 Et si un jour la vie t'arrache a moi
 만일 언젠가 그대와 내가 떨어지게 된다면

 


 Si tu meures que tu sois loin de moi
 당신이 죽어서 나와 함께 있을 수 없게 된다면

 


 Peu m'importe si tu m'aimes
 괜찮아요, 당신이 날 사랑한다면

 


 Car moi je mourrai aussi
 왜냐하면, 나도, 나도 죽을 테니까요

 


 Et nous aurons pour nous l'eternite
 우린 우리만의 영원함을 가지고 있잖아요

 


 Dans le bleu de toute l'immensite
 무한한 푸른 공간 속에서

 


 Dans le ciel plus de problemes
 하늘에선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Mon amour, crois-tu qu'on s'aime
 내 사랑, 당신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걸 믿나요

 


 Mon amour puisque tu m'aimes 
 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해 줄 것을 믿나요

 


 이 노래가 끝날 즈음이 되자 테이블이 하나 둘 차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이드는 그런 사소한 일은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는 이 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자아내는 마력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자꾸 이 아가씨의 얼굴 위로 박쥐 날개 소녀의 얼굴이 겹쳐졌다. 적당히 오른 취기가 더해져, 하이드 자신은 몰랐지만 그 눈은 아련한 애수로 잔잔하게 떨리고 있었다.


 무대 위의 아가씨는 자신에게 이런 시선을 보내는 하이드에게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그에게 불온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 모를…… 굉장히 안쓰러운 감정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생판 처음 보는 중년의 신사에게 이런 감정이 들자 스스로도 놀랐지만, 그녀는 그 감정을 무시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에서 다시 한 번 감미로운 선율이 흘러나왔다.
 

 


Des yeux qui font baisser les miens
Un rire qui perd sur sa bouche
Voila le portrait sans retouch
De l'homme auquel j'appartiens

 


내 시선을 떨구게 하던 눈길,그의 입가에 사라져버리는 미소
이것이 바로 내가 마음을 바친 남자의 손질하지 않은 모습이예요.


 


Quand il me prend dans ses bras
il me parle tout bas
je vois la vie en rose
Il me dit des mots d'amour,
Des mots de tous les jours
Et ca me fait quelque chose

 

 

그의 품에 안길때면,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여 줄때면
내인생은 장미빛이 됩니다.
그는 사랑의 언어들을, 일상의 언어들을 말하죠.
그리고 그것은 나를 감동시킵니다.

 

 

Il est entre dans mon coeur
Une part de bonheur
Dont je connais la cause
C'est lui pour moi,
Moi pour lui, dans la vie
Il me l'a dit, l'a jure pour la vie
Et des que je l'apercois
Alors je sens en moi,
Mon coeur qui bat.

 


행복의 한 부분이 내 맘 속에 들어 왔어요.
그 행복한 이유를 잘 알아요.
사는 동안 나를 위한 그대이고, 나 또한 그를 위한 나라는 것을
그는 내게 그렇게 말했고, 영원히 맹세 했었죠.
그리고 그를 흘낏 보기만해도 내 안에서 심장이 뛰는 것을 느낍니다.

 

 

Des nuit d'amour a plus finit
Un grand bonheur qui prend sa place.
Des ennuis des chagrins s'effacent
Heureux heureux a en mourir

 

 

한없이 계속되는 사랑의 밤들,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행복
근심들, 슬픔들은 사라지고 죽도록 행복, 행복하답니다.

 
 

 


 노래의 여운이 홀을 맴돌고, 하이드는 마력의 잔향에 여전히 포로로 잡혀 있었다. 터져 나올 것 같으면서도 잔잔히 약동하는 정체모를 감정. 그는 황급히 술을 들이켰다. 술이라도 마시지 않는다면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지 무대에서 내려간 아가씨. 하이드는 텅 빈 무대에서 그녀의 자취를 좇았다. 또 다시 가슴 속에 찬바람이 분다. 잠시나마 채워졌던 빈 공간이 다시 텅 비면서 견디기 힘든 오한이 찾아온다. 결국 그는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주정의 화끈한 기운이 잠시나마 한기를 달래주길 바라며.


 "그렇게 급하게 마시면 금방 인사불성이 되실 텐데요?"


 노래의 잔향을 지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이드는 황급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 곳에는 방금 전까지 무대에 서 있던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하이드는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해 침묵했고, 아가씨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까 들어보니 한참 전부터 절 기다리셨다고 들었어요. 용건이라도 있으셨나요?"


 "아, 아닐세. 지난번에 들었던 노래가 인상 깊어서 오늘 조금 이르게 온 것이니."


 "헤에~ 그렇군요. 이거 기쁜데요. 뭐, 손님 같은 분이 한둘은 아니지만 말이죠."


 그러더니 이 아가씨는 마스터에게 마티니 한 잔을 부탁했다. 마스터는 살짝 걱정스런 얼굴로 잔을 내밀었다.


 "한 잔 만이야."


 "야호, 감사합니다 마스터!"


 그녀는 옆자리의 하이드에게 건배를 청하듯 잔을 내밀었다. 하이드는 피식 웃고는 자신의 글라스를 가볍게 마주쳤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두 남녀 사이에는 기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이드는 유년의 추억을 상기시키는 아가씨에게 애써 눈을 떼면서도 무관심할 수 없었고, 아가씨는 자신에게 알 듯 말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이 사내에게 묘한 이끌림을 느꼈다.


 말 없는, 하지만 온갖 감정의 편린이 교차하는 시간. 잔은 텅 비었고, 마음은 따뜻해져간다. 하이드도 아가씨도 오랜만에 느끼는 평온이었다.


 "헌트 양, 이제 손님들이 제법 자리를 잡았으니 몇 곡 더 부탁해."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네요? 휴우, 그럼 준비하고 올라갈게요."


 아가씨는 다가왔을 때처럼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하이드는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고 다시 술 한 잔을 주문했다. 이번에는 독한 놈으로 마실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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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드는 계속해서 술을 들이켰다. 마침내 마지막 테이블이 비었고, 마스터는 슬슬 폐점을 준비했다. 하이드는 그때까지도 묵묵하게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스터가 바를 정리하는 것을 보고, 자신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아, 손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음? 계산은 앞서 치르지 않았소?"


 "그렇죠. 다만 개인적으로 손님께 권하고 싶은 한 잔이 있습니다. 오늘 매출을 꽤 올려주셨으니 작은 서비스라고 생각하세요."


 "흠……. 공짜 술을 마다할 필요는 없지. 그럼 기대하겠소."


 "만족하실 겁니다."


 그는 찬장 한 구석에 보관해둔 보틀을 꺼내어 들었다. 레이블도 없는 밋밋한 유리병. 마스터는 스트레이트 글라스 한 잔을 가득 채워 하이드의 앞으로 내밀었다.


 "부디 마음에 들었으면 합니다."


 하이드는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혀끝을 감싸고 목으로 넘어가는 맛과 향의 폭발에 경악했다.


 증류주…… 의 일종 같은데, 도수가 높은 술이지만 그 복잡한 풍미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혀끝에서 느껴지는 진한 과일향. 입 안에 머금는 동안 아련히 퍼져나오는 오크통의 향기. 그리고 목으로 넘어갈 때의 짜릿함. 마지막으로 코끝을 아련히 맴도는 형용할 수 없는 향기.


 어쩐지, 기억 속에 남아있는 첫 키스와도 비슷한 충격. 하이드는 겨우 술 한 잔으로 이렇게까지 놀랄 줄 몰랐기에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서비스치고는 너무 과한 술인 것 같소."


 "제가 손님께 드리고 싶은 한 잔이었습니다. 과하다니요."


 "병을 보아하니 기성품으로 나오는 술은 아닌 것 같더군. 혹시 구할 수 있겠소?"


 "죄송합니다. 이 술을 만드는 양조가는 따로 판매를 하지 않아요."


 "그럼, 이 술은 어째서 여기 있는거요?"


 "괴짜의 변덕이랄까요. 여기저기서 술을 마시다가 마음에 드는 술집이 있으면 무작정 술을 보내옵니다. 저도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었는데, 정말 일품이지 뭡니까."


 "그런가…… 아쉽군."


 하이드는 갑자기 취기가 급격히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아무래도 마지막 한 잔이 그의 긴장을 완전히 풀어버린 것 같았다. 반쯤 희미해진 의식. 그는 취기가 더 이상 뇌리를 침범하기 전에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를 도와준 건 차가운 물 한잔이었다.


 "이봐요, 신사님. 이렇게 마시면 내일 고생하실 텐데요?"


 "아, 가수 아가씨. 고맙소."


 하이드는 물을 쭉 마셨다. 잠시 의식이 선명해졌고, 하이드는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 있었다.


 "이 술의 이름, 알 수 있겠소?"


 "구원(salvation) 입니다. 거창할지도 모르지만, 마셔 본 손님들은 모두 인정하죠."


 "아아, 물론. 나도 그 중 한명으로 끼워도 되오. 구원, 구원이라……."


 술 한 잔으로 시름을 잊고 잠시나마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에 구원이란 이름을 붙여도 크게 틀리진 않으리라. 하이드는 만족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엇."


 휘청거리는 하이드를 아가씨가 급히 부축했다. 하이드는 이미 다리가 반쯤 풀려있었다. 마스터는 난감한 기색이었고, 아가씨는 하이드에게 질문했다.


 "신사님, 집이 어디에요?"


 "샹젤리제…… 거리에 있소. 윽……."


 "마스터, 아무래도 제가 이 분을 좀 데려다 드려야겠는데요? 이 분 혼자서 찾아가는 건 절대 무리에요."


 "괜찮겠어, 헌트 양?"


 "아까 잠깐 같이 있어봤는데 나쁜 분 같진 않아요. 마침 제 집이랑 방향도 같으니 중간까지라도 어떻게든 끌고 가 볼게요. 그때쯤이면 술도 조금은 깨겠죠, 뭐."


 "으음, 그럼 부탁할게. 내가 보기에도 양식 있는 분 같으니 별 문제는 없을 거야. 대신, 큰 길로만 가야한다."


 "걱정 마세요. 그럼 마스터, 내일 뵈어요."


 "조심해야해, 헌트 양!"
 

……………………………………………………………………………………………………………………………………………


 하이드를 부축한 이 아가씨는 생각보다 힘이 좋았다. 키도 상당히 커서 하이드를 부축하는데 크게 무리도 없었고. 그녀는 어렵잖게 자기 집 앞까지 하이드를 끌고 왔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여보세요? 신사분?"


 "으…… 음. 무슨 일이오?"


 "여기가 제 집이에요. 상젤리제 거리까지는 얼마 안 남았으니 이제 충분히 혼자 가실 수 있겠죠?"


 "아, 고맙소. 고마워."


 "별 말씀을. 그럼 다음에 인연이 닿으면 또 뵙죠."


 뒤돌아서는 아가씨. 하이드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아가씨는 살짝 놀라서 되돌아보았다. 거기엔 중년의 남자가 아닌, 상처 입은 어린 소년만이 서 있었다.


 "저기, 이러시면 곤란해요."


 "가지…… 가지 마시오. 제발. 날 버리지 마시오……."


 하이드는 생각 이상으로 심하게 취해 있었다. 지금 그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아가씨와 박쥐 날개 소녀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아. 하이드는 두 손으로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애걸했다.


 "너무 힘드오. 힘들어서 죽을 것만 같소. 제발, 매정하게 날아가지 말아주시오. 잠시라도 좋으니 나와 함께 있어 주시오……."


 그 말을 끝으로 하이드의 의식은 천천히 암흑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아가씨는 자신의 품으로 쓰러진 하이드를 엉거주춤 끌어안고 황당하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그냥 내버리고 가?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녀에게 매달리는 하이드가 어쩐지 가여워 보였다. 그리고 아직은 추운 날씨. 이대로 버려두었다간 얼어 죽기 십상이다.


 "으…… 어쩔 수 없지. 에휴, 내 팔자려니 하는 거지 뭐."


 그녀는 살짝 투덜거리면서 그를 질질 끌고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


 하이드가 눈을 뜬 곳은 익숙하지 않은 방이었다. 벌떡 일어나자 방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좁은 내부. 한 사람이 간신이 살 만한 작은 방이었다. 그리고 탁자에 앉아있던 아가씨가 그에게 질렸다는 듯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잘 주무셨어요? 만 하루를 누워 계시더군요. 그러게 작작 좀 마시지 그러셨어요."


 "으음, 대체 무슨 일이……."


 하이드의 뇌리에서 전날 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의식을 잃기 전의 기억이 떠오르자 얼굴이 확 붉어졌다. 이런 실수를!


 "정말 미안하오. 내가 술이 과해서 큰 결례를 범했군. 사과하겠소."


 "아시면 됐어요. 뭐, 죽은 듯이 주무셔서 저야 별로 어려운 건 없었으니까요. 그래도 좀 씻고 오시죠. 아직까지 술 냄새가 풀풀 나네요."


 "아…… 미안하오. 그럼 욕실을 잠시 빌리겠소."


 잠시 후, 말끔해진 하이드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아가씨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당황스러웠지만 결코 싫지는 않았기에 조용히 차의 향기를 즐겼다. 차는 적당하게 우러나 코와 혀를 즐겁게 해 주었다.


 "이제 정신을 완전히 차리신 것 같은데, 뭐 하나 물어도 될까요?"


 "얼마든지."


 "뭐가 그렇게 힘든 거예요? 어제는 깜짝 놀랐어요."


 "……아가씨에게 말하기는 조금 곤란한 사정이오. 잊어주셨으면 하오."


 "아가씨가 아니라, 멜라니 헌트. 그쪽의 이름은요?"


 "그것 또한 밝히기 곤란하오. 내가 아니라 아가…… 멜라니 양을 위해서이니 이해해주셨으면 하오."


 "그렇군요…… 그럼, 대신에 제 부탁 한 가지를 들어줄 수 있겠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저랑 술이나 마시죠."


 "음?"


 "아무래도 당신에게서 이야기를 끌어내려면 술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어디, 어제와 같은 상황까지 가 보죠. 어때요?"


 하이드는 거절하려고 했지만, 그를 바라보며 의뭉스런 미소를 짓는 멜라니를 보고는 이내 포기해버렸다. 술기운을 빌어 얘기하고 싶은 건수는, 사실 많았으니까.


 

……………………………………………………………………………………………………………………………………………


 밤이 깊었고, 테이블 주변에는 빈 와인 병들이 굴러다녔다. 싸구려 와인이었지만 취하는데는 과분할 정도였다. 둘은 아무 말 없이 권커니 잣커니 하며 술을 들이켰지만 어색함은 없었다. 침묵을 깬 것은 하이드였다.


 "먼저…… 멜라니 양께 미안하다는 말을 해 두겠소."


 "뭐가요?"


 "사실 멜라니 양을 찾은 것은…… 당신이 내가 아는 어떤 사람과 닮았기 때문이었소. 어제는 둘러대다 보니 그렇게 된 거요."


 "그래요? 누구랑 닮았길래 저에게 그렇게 애걸복걸하신 걸까 궁금한데요~?"


 "하하, 여기까지 왔는데 말하지 못할 것도 없지. ……내 첫 사랑이었소. 내 마음을 온전히 가져가버린 소녀였지……."


 그렇게 말하는 하이드의 입가에 쓸쓸한 웃음이 맴돈다. 갈 곳 잃은 감정은 하이드를 점점 지치게 만들었다.


 "살짝 기분 나쁘네요. 하지만 용서할게요. 보통 그 나이 대쯤 되시는 분은 항상 로맨스에 빠져 사시니까."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소. 나도 조금 후련해지는군."


 둘은 다시금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취기가 더 오르자 하이드는 저도 모르게 신세 한탄을 시작했다. 마지막 이성으로 연합에 관련된 이야기는 적당히 빼고 구색을 맞춘 이야기였지만, 말하다보니 울컥하는 게 생겼다. 그는 폭풍같이 말을 쏟아냈고 멜라니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내가 하려는 게 과연 올바른지, 이게 잘못된 것은 아닌지 이젠 두렵소. 그게 힘드오. 하지만 난 이렇게 살아왔고, 이렇게 사는 방법밖엔 모르지. 이젠 그마저도 불분명하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계속 해나가는 것 밖에 없소……."


 멜라니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듣다가, 갑자기 와인을 한 잔 가득 채워 한 번에 쭉 들이켰다. 크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하이드에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배부른 소리는 작작 하시죠. 이봐요. 저는 대학생이면서, 보시다시피 이런 골방에 처박혀 살면서 술집에서 노래를 팔고 있어요. 왜 그런지 알아요? 꿈이 있으니까.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에요."


 멜라니는 갑갑하다는 듯 와인을 병째로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이드는 말릴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가 그렇게 힘들어요? 뭐가 두려운 거죠? 모르는 건 두려운 게 당연하고, 삶은 힘들게 맞아요. 당신만이 그런 게 아니에요. 하! 오만하군요, 당신. 그런 고민조차 사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해요. 하지만 당신은? 목표가 있고, 여기까지 왔어요. 그리고 계속 나아가겠죠. 그게 무섭나요? 그럼 집어치워요!"


 멜라니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녀는 점점 고양되었고,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모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모든 단어를 눈앞의 사내에게 쏟아 붓고 싶었다.


 "당신이 하는 일, 들어도 잘은 모르겠지만 거기에 너무 얽매이지 말아요. 당신만의 삶이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그들만의 삶이 있어요. 왜 그걸 모르나요? 왜 그들을 모두 책임지려 하나요? 대체 왜?"


 하이드는 속에서 뭔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그는 참지 않고 쏟아내었다.


 "그것이 내 의무고,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럼 더 웃기네요! 언제 그들이 돌봐 달라고 했나요? 아니, 돌봐 달라고 했다고 쳐요. 그렇더라도 당신이 남의 삶에 치즈 놔라 버터 놔라 할 수 있는 권리는 없어요!"


 "나는 집단의 수장으로서 그들을 이끌어야 하오! 그러기 위해선 불가피한 일은 있을 수밖에 없소! 조직은, 가정은 그런 거요.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멜라니와 하이드는 씩씩거리며 호흡을 골랐다. 이번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멜라니였다.


 "그래요. 내가 당신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처지는 아니죠. 그래도 한 가지만 알아둬요."


 "……."


 "당신의 행동엔 스스로의 행복이 없어요. '당신의 삶'이 없다구요. 내가 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그게 즐겁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내 노래로 기뻐하는 게 좋기 때문이에요. 나는 '나의 삶'에 감사하고 있어요. 당신은, 그런가요? 당신이 하는 일은 당신에게 대체 뭔가요? '당신의 삶'은 대체 누가 책임지는 거죠?"


 '나의 삶'이라는 단어는 하이드에게 강렬한 기시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정신은 다시 한 번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 귓가에 아련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미안해하지 마. 넌 나에게 자유를 줬어. 네가 남을 꼭 책임져야 할 이유는 없어. 나 또한 나를 건사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울 거야. 하지만 네 손길이 없었다면 그런 책임조차 다할 수 없었겠지. 고마워. 넌 나에게 '나의 삶'을 다시 되돌려줬어. 그것만으로도 널 자랑스러워해도 괜찮아. 고마워.』


 아, 왜 이제서야 깨달은 걸까. 자신은 그 선택으로 삶의 방향성을 결정한 것이다. 자신과 비슷했던 소녀를 구해내고 얻은 긍지. 그 긍지가 하이드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으로 변질된 목적의식은 그를 점점 소모시켰다. 하이드의 마음 속 깊숙히 자리잡은 가족의 갈구와 긍지가 합쳐져 완전히 다른 것이 된 삶의 방향은 어느 새 그를 파탄으로 몰고 있었다. 그는 이제서야 그 사실을 똑바로 바라보았고, 마침내 그 강박에서 해방되었다.


 "하, 하하…… 멜라니 양의 말이 맞소. 이건 내가 원한 '나의 삶'이오. 나는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고 싶었고, 그들이 내 가족이 되기를 바랐소. 그래, 거기에 문제는 없었지. 결국 문제는 나였군."


 "……."


 "가정은 가장 한 명만으로 유지되는 건 아니지. 구성원들 하나하나가 그 역할을 다 해야만 하는 거요. 하지만 나는 그 역할을 전부 혼자 떠맡으려 했지! 멜라니 양의 말대로 지독한 오만이었소."


 "이제라도 아셨으니 다행이네요."


 "그렇다면, 틀린 건 없소. 내가 가는 길이 결코 잘못된 길은 아닐 거요. 그럴 거라 믿고 싶소."


 "뭐,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대충 찬성하죠. 대충인 이유는 뭐 아시리라 믿고요."


 "찬성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오."


 둘은 서로 마주보며 빙그레 웃었다. 멜라니의 눈에 어쩐지 하이드가 점점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 싫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하이드 또한 멜라니에게 또 다른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박쥐 소녀와는 완전히 별개의 사람으로 그녀를 인식했지만, 그래도 그 이목구비는 자신의 첫 사랑과 흡사하다. 그리고 그에게 작은 구원을 선사한 아가씨.


 '으, 으흠. 아직 젊은 아가씨한테 망측하게 이 무슨…….'


 둘은 잠시 어색한 침묵에 잠겼다. 그리고 행동이 빨랐던 것은 무모한 젊은이인 멜라니였다.


 "메, 멜라니 양?"


 "가만히 있어봐요. 흐음……"


 그녀는 양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요리조리 그를 바라보던 멜라니는 씨익 웃더니 한 마디를 던졌다.


 "나쁘지 않네요. 나름대로 매력적인 사람이에요. 인정 할 수밖에 없네."


 "하……하하, 고맙소. ……허흡?!"


 그렇게 말하는 동시에 멜라니의 입술이 하이드를 덮쳤다. 그는 꼼짝없이 이 맹랑한 아가씨의 입맞춤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그는 여자들에게 입맞춤을 당하는 운명을 타고난 듯싶었다.


 "멜라니 양, 이게 무슨……."


 "이럴 땐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봐요."


 그녀는 입술을 떼고 가만히 하이드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품에 파묻힌 하이드의 코끝에서 그리운 향기가 스쳐 지나가는 듯 했다.


 "지금까지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당신은 조금 쉬어도 되요. 그러니 오늘은 모든 걸 다 잊어요. 당신만을 생각해요."


 "멜라니……."


 "그리고 오늘만은…… 나만을 봐 줘요. 내가 '당신의 삶'에 잠시간의 쉼표가 되길 바라요."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둘은 다시 한번 열정적으로 입맞춤을 나누었다. 둘은 천천히, 천천히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밤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쉴 시간은 충분하리라.

 

- chapter 5. 영걸(英傑)의 조우(遭遇) -


 1차 세계대전이 남긴 상흔은 거대했다. 유럽대륙은 피폐해졌고 민생은 다시 한 번 도탄에 빠졌다. 이 처절한 시기,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해야만 했던 슬픈 시기.


 이런 시대에도 연합과 회사는 그 영향력을 더욱 넓게 퍼뜨렸다. 전후 처리에 필요한 막대한 인력을 효율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회사와, 비합법적이지만 능력자들을 노동력으로 쓸 수 있는 연합의 성장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명왕은 스스로의 신념과 이상을 관철하기 위해 더욱 큰 힘을 필요로 했고, 그 결과 스페인과의 담판을 통해 황실 직속 근위기사단, 아틀라티코 드라군(Atlético Dragoon)  협력을 얻어내었다. 또한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이즈음 해서 오스트리아의 명문 무가이자 대형 은행 체인인 홀든 가문 또한 끌어들였다. 황실 용기사단의 힘과 홀든의 쾌검사들, 더불어 흡수한 은행 체인은 회사 세력 확장의 정점을 찍은 사건이었다.


 연합은 1차 세계대전 도중 일어난 러시아 혁명을 은밀하게 지원한 계기로 동유럽의 패자로 군림하던 팔티잔 연합과 수많은 재야 능력자를 끌어들였다. 하지만 용기사와 쾌검사의 합류로 인해 힘의 균형이 무너질 것을 우려한 흑염은 아일랜드의 유명한 능력자 집단, 흑기사단을 단기필마로 제압하여 휘하에 복속시켰다. 지하 연합의 문장에 쓰이는 주먹과 불꽃, 교차된 창은 각각 카모라 패밀리, 팔티잔 연합, 흑기사단을 상징하는 심볼이다.


 그 와중에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났는데, 바로 현 시대 연합의 에이스 능력자, 아론 휴톤과 흑염 하이드가 조우한 것이다.


 그 둘의 만남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으나, 흑염이 끌어들인 휴톤은 지금까지 연합의 커다란 주춧돌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휴톤과 비슷한 시기에 연합에 합류한 트리비아 또한 에이스 능력자로서의 기량을 뽐내는 중이다. 그가 사라진 지 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그림자는 아직도 연합과, 연합을 넘어 유럽 전역에 큰 영향력을 주고 있다.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된 흑염과 명왕. 그 둘의 충돌은 어쩌면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확장을 거듭하던 연합과 회사는 격렬하게 충돌했고, 마침내 1차 능력자 전쟁이 시작되었다. 두 영걸은 마침내 대면했다. 그리고 최후의 전장이었던 노르웨이 엘윈 숲에서 최후의 결전이 벌어졌다.

 
<하이드의 일대기 중 발췌>

 

 "척박한 곳이로군."


 페도라를 푹 눌러쓴, 검은 슈트의 사내가 중얼거렸다.


 그는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을 거닐고 있었다. 외세와 오래도록 투쟁해 온 이 섬나라는 1차 세계대전이 남긴 빈곤함으로 휘청이고 있었다. 피폐한 시민들. 음울한 거리. 그는 눈살을 한번 찌푸리고는 목적지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그 등 뒤로 비슷한 차림새의 남자들 몇 명이 따라붙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아일랜드에서 500여 년간 무적으로 군림한 전투 집단, 흑기사단의 본부였다.


 

……………………………………………………………………………………………………………………………………………


 "이곳인가."


 "예."


 "과연, 500년의 전통은 무시할 수 없군."


 사내는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오랜 시간 사람의 발로 다져진 단단한 연병장. 세월의 풍상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도 굳건한 건물은 소박하면서도 웅장함을 뽐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사의 전당이라 불리기 어울리는 곳. 그리고 그는 이곳을 접수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헌데, 이상하군. 왜 아무도 없는 거지?"


 "주변을 좀 더 살펴봐야겠습니다."


 "찾더라도 개입하지는 말도록. 모든 일은 나 혼자 처리하겠다."


 "예."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페도라의 사내는 눈여겨보던 건물 뒤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정답이었군."


 본관으로 짐작된 건물의 뒤에도 제법 넓은 연병장이 있었다. 흑기사들은 전부 그곳에 자리 잡은 상태였다.


 거친 형태.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어떤 기교도 거부한 디자인의 갑옷. 하지만 그렇기에 느낄 수 있는 기능미가 존재했다. 오로지 난전을 상정한 구조, 그에 필요한 형태를 취한 흑색의 갑주. 표면은 윤기가 돌 정도로 관리되어 있었지만, 숨길 수 없는 상흔이 이곳저곳을 가로지르고 있다. 하지만 흉하기보다, 이미 갑주의 일부로서 화한 그 흉터는 이들의 용맹함을 상징하는 훈장일 뿐이었다.


 얼추 서른 명 정도의 흑기사들. 그들 하나하나가 역전의 용사이며, 전장을 호령할 수 있는 용맹한 기사였다. 이들을 끌어들인다면 회사의 용기사들과 좋은 상대가 되어 줄 것이다.


 그가 흑기사들에게 다가가려다가 순간적으로 발을 멈추고 몸을 숨겼다. 다행히 흑기사들은 그가 다가오는 방향으로 등을 돌리고 있어 들키지는 않았다. 사내는 흑기사들이 보고 있는 곳을 슬쩍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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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봐, 이봐! 네놈들 정말 그 유명한 흑기사 맞냐? 이건 너무 심하잖아!"


 "닥쳐라! 나를 모욕하는 건 상관없지만 흑기사단을 폄훼하는 건 용서할 수 없다!"


 "아니, 폄훼고 모욕이고 이건 뭐 상대하는 재미가 있어야지. 너 말고 좀 더 강한 놈은 없냐?"


 "이익, 다른 분들이 나설 필요도 없다! 타하!"


 기합성과 함께 뻗어나가는 장검. 그 검첨이 노리는 것은 거구의 사나이였다.


 웃통을 훌쩍 깐 채로 패기만만하게 미소 짓는 면면. 회색빛의 머리칼과 수염은 거칠게 다듬어져 그의 성품을 대변하는 듯 했고, 드러난 상체는 정말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장대했다. 그 큼지막한 상체에 아로새겨진 문신은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를 압도하는 데는 충분한 위력을 발휘했다. 붉은색 킬트로 재단된 바지는 쫙 달라붙어 강인한 하체를 드러내었고, 묵직한 군용 워커는 제멋대로 끈을 붙잡아매 여기저기 구겨져 있었다.


 겉으로 보아서는 단순한 싸움패, 혹은 파락호 같았지만 그의 눈은 날아드는 검첨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상체가 사라졌다. 그렇다고 착각할 정도로 빠르게 상체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앞으로 돌진하는 거구. 기사는 검을 돌리려고 했지만, 이 남자의 돌진은 그의 예상을 아득히 벗어나는 속도였다. 자신의 품 안으로 파고든 사내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기사는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덥수룩한 수염에 덮인 얼굴이 흉악하게 미소 짓고 있었으니까.


 "후웁!"


 오른팔이 짧게 당겨졌다가, 원호를 그리며 기사의 옆구리로 날아갔다. 판금 갑옷과 피륙으로 이루어진 주먹의 대결. 승자는 놀랍게도 주먹이었다.


 "꺼……어!"


 옆구리에 가해진 막대한 충격에 기사의 입에서 헛바람이 터져 나왔다. 갑옷을 뚫은 충격이 기사의 복부를 사정없이 헤집었다. 저도 모르게 살짝 상체를 숙인 기사는 그것이 실수였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의 시야를 주먹이 한 가득 메웠으니까.


 떠엉!


 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기사의 몸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사내의 왼 주먹이 기사의 턱을 시원하게 올려붙인 것이다. 그 위력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갑주로 감싸인 기사의 발이 바닥에서 떨어질 정도였다.


 그 짧은 체공시간 동안 거구의 사내는 오른팔을 뒤로 당겨 붙였다. 안정된 하체. 완벽한 자세. 그리고 무너지던 기사의 안면이 딱 좋은 위치까지 내려온 순간.


 콰아앙!


 최단 거리를 최단 시간으로 달려 나간 스트레이트 펀치가 직격했다.


 

……………………………………………………………………………………………………………………………………………


 저 멀리 나가떨어진 흑기사. 그의 한쪽 옆구리에는 큼직한 주먹 자국이 새겨지고 투구는 완전히 찌그러져 버렸다. 해머로 두드려도 저렇게까지 망가뜨리는 건 어려울 것이다. 사내는 팔을 돌리며 관절을 풀고는 진을 치고 있던 흑기사들을 도발했다.


 "허 참. 그러게 좀 더 한가락 하는 놈이 나오라니까 뭐 이런 녀석이 설치고 그래? 응?"


 몇몇 흑기사들이 발끈해서 움찔거렸지만, 한 기사가 팔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그리고 거구의 사내에게 질문했다.


 "그대의 실력은 잘 알겠군. 허나 이건 무슨 행패인가? 갑자기 쳐들어 와서는 한 판 붙자고 하다니, 대체 무슨 이유인지 물어나 보지."


 "아앙? 뭐야, 나 혼자 이렇게 삽질하는 거야? 야, 너희들 뚜껑 다 뒤집어 까. 저번 일요일에 시내 술집에서 나랑 시비 붙은 놈들이 분명 있을 거야. 내가 그때 별로 안 취해서 똑똑히 기억하거든? 흑기사인지 나부랭인지 설치다가 나한테 교육 좀 받은 놈들. 왜, 쪽팔려서 지금은 못 까겠냐?"


 기사는 고개를 돌려 흑기사들을 바라보았다. 몇몇이 움찔 하는걸 보니 저 거구의 사내가 허황된 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사내에게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이들의 수장으로서 사과하지. 하지만 말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이렇게까지 키울 필요가 있었나?"


 기사의 말에 거구의 사내는 기도 차지 않는다는 듯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이죽거렸다.


 "말? 무슨 말? 주먹이라는 훌륭한 대화 수단을 두고 왜 말로 해결을 봐? 난 그런 거 질색이니까, 싸움으로 담소를 나눠보자구!"


 "안하무인이군. 그 버르장머리, 아무래도 손을 봐 줘야 하겠어."


 그 즈음 해서, 이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페도라의 사내는 자신이 나서야 할 타이밍임을 직감했다. 그는 구두를 뚜벅이며 현장으로 걸어 나갔다.


 "웬 놈이냐!"


 "아, 이곳에 볼 일이 있어서 찾아온 필부일세."


 그저 평범한 남자 같은데, 흑기사들은 이상한 느낌에 주춤거렸다. 과연, 꽤 수준이 높은 전사들이다. 자신에게서 풍기는 위험한 냄새를 맡고 본능적으로 반응하다니. 그리고 그 반응은 거구의 사내도 똑같았다.


 "호오? 필부라고? 당신이 필부라면 내가 아는 모든 남자들은 자기 무덤 파고 들어가야겠군."


 "과찬일세."


 가볍게 대꾸하며 계속 걸어간 사내는 마침내 거구의 사내와 흑기사단의 사이에 섰다. 그리고 정중하게 페도라를 벗으며 자기를 소개했다.


 "이렇게 만나서 반갑네. 나는 부족하나마 지하 연합의 수장을 맡고 있는 하이드라고 하네."


 

…………………………………………………………………………………………………………………………………………


 흑기사들 사이에 가벼운 동요가 퍼져나갔다. 능력자들 사이에서 명왕과 흑염의 명성은 가볍지 않았다. 그 중 한명이 자신들에게 볼 일이 있다니, 과연 무슨 일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대표 격인 기사가 그에게 용건을 물어갔다. 그 목소리는 최대한 평정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흑염 하이드가 흑기사단에는 무슨 볼일이 있으신 거요. 그대와 우리는 아무 관계도 없을 텐데?"


 "아, 다름이 아니라 당신들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네. 최근 회사 쪽에서 용기사단의 협력을 얻어서 말이지. 아마 자네들이라면 괜찮은 맞수가 될 거라 생각하네. 어떤가, 연합에 힘을 빌려줄 용의가 있는가?"


 "거절하겠소. 흑기사단은 그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소."


 "이런, 고개를 숙이라는 게 아닐세. 그저 동등한 위치에서 협력관계를 맺고 싶을 뿐이야. 용기사들도 결코 회사의 수하가 된 것은 아니네."


 흑기사와 하이드가 팽팽하게 맞서는 동안, 구석으로 밀려나 있던 거구의 사내가 성큼성큼 다가와 으르렁거렸다.


 "이봐, 무슨 수작이야? 당신이 지하 연합의 수장이든 뭐든 간에, 저 치들과는 내가 먼저 선약이 되어 있었다고!"


 "그건 미안하군. 하지만 이해해 주겠나? 나도 꽤나 바쁜 몸이라서 말일세."


 "이해? 이해는 필요 없지. 역시 최고의 설득 수단은 이 주먹 아니겠어?!"


 그와 동시에 휘둘러지는 주먹. 하이드는 예상이라도 한 듯 흑염을 펼쳐 그 주먹을 막아갔다. 사내는 검은 불꽃에 주먹이 닿기 전 간신히 멈추는데 성공했다.


 "뭐야, 능력자였나?"


 짧은 한마디를 남기고는 뒤로 슬쩍 물러섰다. 그리고 두 주먹을 얼굴께까지 끌어올려 단단하게 자세를 다진다. 그러자 사내의 기도가 순식간에 변했다. 아까까지는 거친 북풍 같았다면, 지금은 마치 신중하게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 같은 느낌이었다.


 하이드는 방심하지 않았다. 흑기사 하나를 때려눕힌 그의 실력은 결코 허투루 볼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하이드는 흑염을 한 줄기 피워 올리며 대적자를 맞이했다.


 선공은 사내가 시작했다. 재빠른 대쉬. 아까도 보았지만 정말 경탄할 만한 몸놀림이다. 상체를 숙이며 순식간에 파고드는 움직임은 근접거리에서 대응하기 곤란한 감이 있었다. 하이드는 뒤로 물러서며 흑염을 흩뿌렸다. 그리고 이 사내가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깨달았다.


 "꺼져라!"


 기합과 함께 휘둘러진 주먹이 검은 불꽃을 사그라뜨렸다. 하이드는 재빨리 흑염을 전방으로 폭사했다. 전방으로 터져나가는 검은 불꽃은 무시할 수 없었는지 신속한 움직임으로 뒤로 물러서는 사내.


 "이런, 자네도 능력자였군."


 흑염 하이드의 검은 불꽃은 결코 꺼지지 않는 걸로 악명 높았다. 태울 수 있는 것이 남아있는 마지막 한 조각까지 살라먹는 흑염은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능력자들은 이 검은 불꽃에도 대항이 가능했다. 능력자들이 다루는 힘과는 길항하는 성질이 있었으며, 특이능력 계열은 능력을 상충시켜서, 신체변이 계열은 그 신체 자체가 흑염에 쉽사리 타오르지 않는다.


 방금 사내의 주먹은 분명 흑염에 닿았지만, 결국 사내의 주먹에 옮겨 붙지 못한 것을 볼 때 저 거구 자체가 능력의 산물이라 여겨졌다. 흑염은 전의를 다지며 사내와의 싸움에 진지하게 임할 각오를 굳혔다.


 

……………………………………………………………………………………………………………………………………………


 거구의 사내가 펼치는 맨손 격투술은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합리적인 움직임. 상대를 확실하게 침묵시키기 위한 컴비네이션. 주먹이 닿는 거리까지 몸을 옮겨놓기 위한 하체의 폭발력. 초근접상황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유연하게 위치를 잡는 허리놀림. 그 무엇 하나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다.


 하이드의 흑염이 신체 어디서든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 상당히 위험했을 것이다. 애당초 이 사내가 접근하게 놓아둔 것이 실수였지만, 하이드는 간만의 싸움에 피가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또한 젊었을 때는 직접 몸을 움직여 강적들을 쓰러트려 온 싸움꾼. 상대할 가치가 있는 자들을 때려눕히는 것은 남자가 느낄 수 있는 가장 강렬한 카타르시스가 아니던가!


 하이드는 흑염을 전 방위로 터뜨려내어 사내를 뒤로 물러서게 했다. 그 자신도 뒤로 물러서 거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사내에게 싸움꾼으로서의 예의를 다하기로 했다.


 "자네 같은 사람을 상대로 힘을 아끼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 이번엔 꽤 맘에 들 걸세."


 하이드의 주위로 흑염이 피어오른다. 그것은 점차 가늘어지고, 마침내 실과 같은 형상으로 압축되었다. 그것들이 엮이고 짜여 그의 몸을 뒤덮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모습은…….


 "흑의(黑依)를 쓰는 건 오랜만이군. 조금 어색하지 않은가?"


 흑염의 실로 짜인 한 벌의 정장. 저것이 너울거리는 불꽃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울 정도다. 수트, 셔츠 타이, 페도라, 머플러, 구두까지 완벽한 풀 세트로 이루어진 이 흑의는 하이드의 검은 머리칼과 어울려 어딘지 섬뜩함마저 느끼게 만들었다. 그 모든 것이 완전한 칠흑이었고, 얼굴과 손만이 대비되어 유독 하얗게 보이자 어딘지 무기질적인 공포를 강요할 정도였다.


 흑의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 인해 하이드의 주변이 아지랑이로 일그러져갔다. 마치 세계가 하이드로부터 도망치는 듯한 모양새. 이를 바라보던 사내의 관자놀이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철저하게 다져진 싸움꾼으로서의 육감이 미칠 듯이 경보를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강적을 만나게 되어 환호하는 심장. 세차게 맥동하는 혈류를 느낀다. 오랜만에 힘 좀 제대로 써 볼 수 있겠다!


 "좋구나! 어디 한번 제대로 해 보자구!"


 "맘에 드는군! 부디 죽지 않길 바라네!"


 다시 맞붙기 시작한 두 남자. 하지만 방금까지와는 양상이 완전히 달랐다. 거구의 사내가 날리는 주먹을 어렵지 않게 받아내는 하이드. 타격음이 제대로 터져 나오는 것으로 보아 충격은 그대로인 것 같은데, 하이드는 타격을 받지 않는 듯 여유롭게 반격을 가했다.


 "이런 젠장, 그건 뭐야? 내가 불에 데이다니……."


 사내의 주먹을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물집까지 생기진 않았지만 강렬한 열기에 노출되어 피부가 손상을 입었다는 증거. 아까까지 검은 불꽃을 촛불 끄듯 날려버리던 주먹이라고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흑염은 그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다가갈 뿐이었다.


 그 이후로는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하이드 또한 간만의 백병전으로 감각이 살아나는지 점점 움직임이 좋아졌고, 사내는 하이드를 건드릴 수조차 없어 견제와 회피를 반복하며 쩔쩔매고 있었다. 하이드의 주먹과 발이 사내의 몸에 닿는 수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궁지에 몰린 맹수는 최후의 일격을 결심했다.


 '빌어먹을, 이걸 썼다간 내가 더 위험한데 어쩔 수 없지. 아무래도 한 방 먹이지 않으면 잠도 못 잘 거야!'


 의지를 강하게 다진 사내는 기회를 노렸다. 상체를 모으고 팔뚝을 밀착시켜 완전한 방어태세로 들어간 사내. 하이드는 사내를 그 상태로 제압하기 위해 최대의 힘으로 팔뚝 위를 가격했다!


 이번에야말로 살 타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팔뚝이 푹 익어버렸다. 충격도 만만치 않았던 듯 휘청거리는 상체. 하이드는 이정도면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기다렸다!"


 사내의 상체가 한쪽으로 크게 틀어졌다. 스탠스를 넓게 잡은 하체는 안정적인 포대의 역할을 충분히 다 했다. 발가락 끝에서부터 끌어올린 힘을 유연하게 이끌어 상체까지 비틀어 올린다. 회전하는 상체. 뒤로 젖혀진 오른 주먹은 커다란 호를 그리며 날아들었다. 완벽한 체중이동과 그림 같은 궤적. 그야말로 사내의 모든 힘을 주먹에 몰아넣은 이판사판의 일격!


 '위험하다!'


 이 공격이 치명타라는 걸 예감한 하이드는 공격이 닿기 전 사내를 제압하기 위해 흑염을 폭발시켰다. 정강이, 무릎, 복부, 흉부 등등 신체 곳곳을 피격당한 사내는 그래도, 결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환상이었을까? 사내의 오른 팔뚝에서 푸른빛이 새어나온 것 같았다. 그것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흑염은 두 눈으로 지켜봐야했다.


 크게 휘둘러진 주먹이 그의 옆구리에 닿기 직전, 팔꿈치를 내려 그 사이에 끼워 넣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주먹이 닿자마자 굉음과 함께 새파란 섬광이 사방으로 뻗쳐나갔다.


 "커억!"


 사내의 일격은 흑의의 방어를 완전히 파괴했다. 그것도 모자라 하이드의 왼팔을 부수고 갈비뼈 몇 대를 끊어놓았다. 하이드는 고통으로 불타는 의식을 간신히 추슬렀다.


 '방심했다. 다음 공격은 도저히 막을 수 없어.'


 통증으로 경직된 몸으로는 후속타를 견딜 수 없을 것이다. 하이드는 끝을 예감했다. 하지만…….


 "썩을…… 역시 무리였군……."


 정작 공격을 가한 사내 또한 후속타를 날릴 수 없는 상태였다.


 공격을 가한 오른팔이 비정상적으로 뒤틀려있다. 하이드의 왼팔 못지않은 복합골절. 팔꿈치 아래로는 여기저기 피부가 터져나가 있고, 그 위로는 내출혈이 일어났는지 여기저기 피멍이 떠올랐다. 흑의를 뚫을 정도의 공격을 가한 대가로 스스로의 육체 또한 부서진 것이다. 거기에 흑염으로 피격당한 부위 또한 정상은 아니었다. 그 타격을 견뎌내고 주먹을 날리다니, 대체 어떻게 된 근성인 건지.


 "그래도, 한 방 먹였으니 됐어…… 당신, 그 공격에도 살아남았으니 인정하지."


 "마지막 공격은…… 정말 섬뜩했네. 자네가 그걸 완전히 제어할 수 있었으면 죽는 건 내가 되었겠지."


 "칭찬 고맙군…… 자, 그럼 끝을 낼 시간이야."


 "그렇군. 그럼 잠시 쉬고 있게나."


 그 말을 끝으로 사내가 쓰러졌다. 견딜 수 있는 대미지를 넘어선 것이다. 흑염은 잠시 사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는, 다시 등 뒤를 돌려 흑기사들과 마주섰다.


 "잠시 트러블이 있었네만, 하던 얘기를 계속해 보지. 어떤가, 힘을 보태주지 않겠나?"


 "대답은 아까와 같소. 흑기사단은 결코 타인의 밑에 들어가지 않소."


 "……끝나지 않는 대화는 사람을 지치게 만들지. 그럼 제안을 하나 하겠네."


 "말해보시오."


 "지금부터 나 혼자서 그대들을 전부 제압해 보이겠네. 성공한다면 지하 연합의 힘이 되어주게. 실패한다면 이 목숨을 원한다 해도 기꺼이 감내하지."


 "……제정신이오? 그 상태로 우리 전부를 꺾겠다고?"


 "지극히 정상일세. 받아들이겠나?"


 "우리를 너무 무시하는군. 그 대가는 그대의 말마따나 목숨으로 치러야 할 것이오!"


 그리고 그 날 이후, 아일랜드 최강의 무력단체 흑기사단은 연합에 복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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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억!"


 "아, 정신 차렸나?"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내 팔은 분명……."


 거구의 사내는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만지며 황당한 듯 중얼거렸다. 오른팔은 어쩌면 절단해야 할 정도로 심각하게 손상되었는데, 깨어나 보니 거의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둔한 통증은 이곳저곳에 남아 있었지만 적어도 심각한 상처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마침 함께 온 이들 중에 치유능력자가 있었네. 그에게 감사해야 할 걸세. 그가 없었다면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사망했을 거라고 하더군."


 "끄응…… 목숨을 빚지다니, 한 방 제대로 먹인 것 치곤 손해가 너무 크군……."


 "빚이랄 것까지야. 나도 오랜만에 즐거웠으니 비긴 걸로 치세나. 그러고 보니 자네 이름도 모르고 있었군. 가르쳐 주겠나?"


 "휴톤. 아론 휴톤이오."


 "휴톤…… 자네에게 어울리는 이름 같군. 그럼 자네에게 한 가지 제안할 것이 있는데……."


 "말해 보시오."


 "자네의 그 힘, 연합을 위해 쓸 생각은 없나?"


 "나야 부평초 같은 인생이니 어딘들 상관하랴마는, 그 연합이란 건 당최 뭐요?"


 "정말 야인이었군. 그래서 더 마음에 들어. 그럼 간단하게 설명해주겠네."


 하이드는 휴톤에게 자신의 목표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경주한 노력, 그리고 그 결과물에 대해 담담하게 설명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휴톤은 하이드의 이야기가 끝나자 씨익 웃으며 말했다.


 "당신,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군. 저 명왕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또 있을 줄은 몰랐어."


 "명왕은 알고 있군?"


 "그야, 바로 옆 나라 일이기도 하고. 스카웃 제의도 몇 번 들어왔으니까 말이지."


 "음? 회사의 영입 제의를 받고도 거절했단 말인가? 자네 정도라면 상당한 대우를 받았을 것인데?"


 "이거 저거 따지고 지키고 하면 안 되고 이건 해야 하고…… 난 그런 거 못하우. 마음대로 싸우지도 못하는 건 더 맘에 들지 않아."


 "잘 되었군. 자네만큼 싸움에 굶주린 이들이 연합엔 많아. 서로 몸을 상할 정도만 아니라면 꽤 즐거운 나날을 보낼 수 있을 걸세."


 연합의 모태가 마피아 조직인 카모라 패밀리인 탓인지 일선 전투요원들은 대단히 호전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상대가 없다면 그들끼리 싸우며 파괴본능을 해소하곤 했다. 그들에게도 휴톤은 좋은 자극이 되어 주리라.


 "하지만 자네를 싸움터로 보내라는 지시를 하고 싶진 않군. 그 커다란 몸으로 연합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어주게. 어떤 외력에도 무릎 꿇지 않는 기둥이 되어주게. 내가 자네에게 바라는 건 오직 그것뿐이야. 나의 꿈을 긍정한다면, 부디 그 힘으로 나의 꿈을 지켜주게. 부탁하네."


 "좋아, 당신의 꿈에 한 손을 보태도록 하지. 지금까지보단 훨씬 재미있을 것 같군. 그 전에, 한 가지 조건이 더 있는데."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선 최대한 배려해주겠네."


 "연합 정도 되는 조직의 수장이라면 좋은 술도 꽤 많겠지? 상처 소독에는 술이 최고야. 오늘 코가 제대로 비뚤어지도록 술을 대접한다면 제의를 받아들이지. 어때?"


 "술이라, 좋지. 마침 나도 목이 컬컬하던 참이었네. 좋아, 그럼 일어나지."


 "기대되는걸!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하지, 아니, 잘 부탁하겠소. 연합의 총수님!"


 휴톤은 신비로운 사내였다. 일면식도 없었던 휴톤과 그의 수행원들은 밤새도록 술을 마시면서 십년지기 저리 가라할 정도로 친밀해졌다. 휴톤은 스스럼없이 타인에게 다가가고 자신의 마음속에 타인을 받아들였다. 가식 없고 솔직한 언행 또한 부담스러울지언정 결코 기분 나쁘지 않았다. 천성적으로 남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사내. 자유분방하고 거침없는 사나이.


 어쩌면 하이드는 자신과 모든 면에서 완전히 반대인 휴톤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느낀 건지도 모른다. 휴톤이 살아가는 방식은 하이드가 포기해야만 했던 삶이었으니까.


 이로서 연합은 팔티잔 연합과 흑기사단을 흡수함으로서 전 유럽을 아우르는 거대 조직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휴톤이라는 강력한 에이스의 합류는 연합의 복이었다.

 

 

 이 사건 이후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새로운 에이스 능력자가 연합에 스스로 투신했다. 트리비아 카리나. 그림자를 자유로이 다루는 그녀의 능력은 휴톤의 합류와 더불어 연합의 든든한 기둥이 되었다. 그리고 하이드는 트리비아에게서 박쥐 날개 소녀의 편린을 느꼈으나 더는 거기에 구애받지 않았다. 그저, 이름 모를 소녀가 '자신의 삶'을 힘껏 살아온 증거를 확인한 것으로 만족했다. 작은 소년이 가슴에 품었던 긍지는 마침내 보답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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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과 회사는 암묵적인 합의 하에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별 문제 없이 두 세력이 공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피폐해진 경제로 인해 닥치는 대로 일거리를 찾다보면 결국 사소한 마찰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두 조직의 덩치가 점점 커지고, 마찰이 계속될수록 그 수위는 격화되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유혈사태가 발생한 곳이 벨기에의 앤트워프였다. 피를 봄으로서 마지막까지 유지되던 마지막 선이 끊어졌다.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전쟁은 처절했다. 수적인 우세는 연합이 우위였지만, 일사불란한 지휘체계와 체계적인 보급, 정보의 전달은 회사 측이 우위에 있었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분쟁은 마침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인해 일반 시민의 피해가 심해지자 간신히 쟁취한 능력자의 권익이 다시금 위태로워졌다. 일반인들이 능력자들을 혐오에 찬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1923년에 런던까지 큰 피해를 입자 경각심이 든 각국의 정부들은 헬리오스사를 압박했다. 연합은 그런 정치적 제약에는 자유로웠지만 점조직으로 분산되어 있는 특성상 장기전에는 상당한 불리함을 안고 있었다.


 갈등은 정점에 이르렀고, 마침내 흑염 하이드와 명왕 헨리 밀러 3세까지 전장에 나설 지경이 되었다. 거듭되는 싸움으로 최초의 격전지였던 엔트워프는 반파되었고, 결국 소모를 견디지 못한 연합은 모든 가용 전력을 긁어모아 노르웨이의 엘윈 숲에서 최후의 일전을 준비했다. 회사 또한 만전의 대비를 하고 격전에 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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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숲이군."


 "이 숲의 별칭이 요정의 숲이라더군요."


 최후의 전장을 숲으로 주장한 사람은 지금 하이드의 혼잣말에 대답한 남자. 팔티잔 연합의 수장이었던 흑태자 라이스 킨이었다. 정예 능력자들의 수가 회사보다 적은 연합은 엄폐물을 방패로 삼아 게릴라 전술을 활용해야 조금이라도 승률이 높다는 것이 계획의 골자였다. 그의 전략을 구체화한 사람은 흑태자 휘하의 책사였던 토니 리켓이었다. 이 젊은이는 비상한 두뇌로 팔티잔 연합을 훌륭하게 이끌어왔고, 팔티잔 연합이 자하 연합의 깃발 아래 들어선 뒤 그 능력을 화려하게 꽃피우고 있었다. 평상시의 행정능력 또한 대단했지만, 세 불리한 전쟁을 여기까지 끌고 온 것 또한 토니의 역할이 컸다. 그는 노르웨이의 엘윈 숲을 전장으로 강요하기 위해 치밀한 작전을 입안했고, 그것은 대부분 제대로 먹혀들어가 마침내 이 자리에 선 것이다.


 "요정의 숲이라…… 안타깝군. 이 숲은 이제 완전히 파괴되겠지. 원형을 되찾기 어려울 정도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기분이 좋진 않군. 그럼, 슬슬 준비해 보세."


 "예."


 하이드와 라이스 킨은 삼림 너머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요정의 숲은 지옥으로 화했다.

 

 

 연합과 회사가 전력으로 맞붙은 결과는 처참했다. 수많은 생명이 꺼졌고 신비로운 거목들은 차례차례 땅바닥에 그 몸을 뉘었다. 서로 간에 엄청난 희생을 치른 후, 마침내 하이드와 헨리 밀러 3세가 전장에서 마주쳤다.


 "귀하가 지하 연합의 수장인 흑염 하이드인가 보구려."


 "당신이 명왕인가. 언제고 한번 만나고 싶었네. 이런 자리가 되어서 안타깝네만……."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엇하리. 이 무의미한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이 최선이겠지."


 "동감하네. 그럼 어디 어우러져 보세."


 하이드가 흑의로 그 몸을 감싸고, 명왕이 서 있는 주변의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나직하게 깔렸다. 두 영걸이 마침내 그 힘을 겨루기 시작했다.

 

 

 '까다롭군!'


 하이드는 전력을 다해 번개줄기를 회피했다. 빛의 속도로 내리꽂히는 번개를 피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리냐마는, 명왕의 번개는 아주 정확한 낙뢰위치를 지정할 수 없는 것이 확실했다. 또한 위치를 지정하고 벼락이 내리꽂히기까지 야주 약간의 텀이 존재했다. 하이드가 최대의 속도로 회피기동을 하는 중이면 명왕은 그 일대를 벼락 다발로 초토화 시키는 식으로 그의 행동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하이드가 이렇게 곤란을 겪을 일은 없을 것이다. 명왕의 번개는 그야말로 이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 몰려든 먹구름 전체에서 방전이 일어나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전우좌후, 그 어떤 방향이라도 명왕의 벼락줄기는 그를 완벽하게 보호했다. 전기를 다루는 특이능력 계열의 능력자는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창공의 분노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자는 헨리 밀러 3세 뿐이었다. 그를 적으로 돌린 자는 하늘을 상대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천공을 지배하는 자. 하늘의 군주!


 "대단하군! 하늘의 군주라는 이명이 아깝지 않네! 이 정도로 까다로울 줄 몰랐어!"


 "귀하야말로 놀랍구려! 나의 벼락을 그토록 맞고도 아직 멀쩡하다니! 검은 신사는 결코 매무새가 흐트러지지 않는다더니 사실이구려!"


 실제로 하이드는 낙뢰를 상당수 얻어맞았다. 하지만 흑의가 제공하는 압도적인 방호력은 번개의 힘으로도 쉽사리 깨부술 수 없는 성질이었다. 하이드는 틈틈이 흑염을 투사해 보았지만 어김없이 벼락에 격추당했다. 그는 이를 갈며 타개책을 강구했다.


 '내 공격은 저 자에게 닿지 않아. 하지만 나는 조금씩이나마 피해가 누적되고 있다. 흑의가 언제까지 버틸 순 없다. 더 이상 기력이 떨어지기 전에 승부를 낸다!'


 대응책을 결정한 하이드는 멀찍이 떨어져 잠시 숨을 골랐다. 명왕 또한 수많은 번개를 강림시킨 대가로 상당히 지쳐보였다. 아주 적절한 타이밍을 고른 것 같았다.


 "슬슬 끝낼 시간이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을 준비하지. 받아낼 수 있으면 패배를 인정하겠네."


 "받아들이지. 자, 오시게!"


 하이드는 최후의 공격을 준비했다. 흑의와 대비되던 손이 검은 장갑으로 덮여갔다. 지금이야말로 흑의의 출력이 최대로 상승된 상태. 얼굴을 제외한 전신을 칠흑의 정장으로 휘감은 하이드의 기세는 실로 대단했다.


 흑의의 출력이 한계에 도달하는 순간 하이드가 달리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쇄도하는 검은 신형. 명왕 또한 최고의 기예로 도전을 받아들였다.


 "천벌(天罰)!"


 명왕의 외침이 터져 나오는 순간 주변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주변에서 둘의 격전을 지켜보던 연합과 회사의 구성원들이 일순간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밝은 빛. 그리고 이 빛은 회사에게 있어 준비된 계책을 실행하기 위한 신호탄이었다.

 

 

 


 "지금이다. 대기하고 있던 인원들에게 작전실행을 알려라. 서둘러!"


 후방에 위치한 회사의 본진에서 전령들이 뛰쳐나갔다. 명령을 내린 이는 회사의 2인자, 재스퍼였다.


 "큭큭큭.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어가는군. 토니 리켓이라고 했던가? 똑똑하긴 한데 아직은 어린놈이군. 이걸로 연합의 멱줄을 확실하게 조를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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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으윽!"


 지금까지 받아왔던 번개와는 차원이 다르다. 처절하게 대지를 유린하는 벼락다발. 간간히 벼락 사이로 보이는 명왕 또한 안간힘을 끌어내는 듯 힘겨워 보였다. 그 또한 마지막 승부수를 걸어온 것! 이것만 돌파하면 승리는 연합의 것이다!


 허나 명왕의 비기 '천벌(天罰)'은 결코 만만한 기술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내리꽂혔다 사라지는 벼락이 한 곳으로 극한까지 수렴된 결과, 앞서의 벼락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뒤의, 또 그 뒤의 벼락이 계속해서 대지를 유린한다. 천공과 대지를 갈라놓는 강렬한 흐름. 그 형상이 마치 하늘에서 날아와 꽂혀 작열하는, 올림포스의 주인 제우스의 번개창과도 같은 모습!


 하이드는 이를 악물고 버티고 또 버텼다. 연합의 승리를 위해 목숨까지 도외시한 처절한 돌격. 하지만 승리의 여신은 또 다시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으아아악!"


 "우와악! 기습이다! 후방을 조심해!"


 "제기랄! 회사 놈들, 아직까지 이런 전력이 남아있었나?"


 그의 등 뒤에 모여 있던 연합의 진영이 후방에서 기습해온 회사의 별동대에 의해 처참히 유린당했다. 지쳐있는 연합의 구성원들은 제대로 대항조차 하지 못하고 수수깡처럼 쓰러져갔다. 그 참상이 여과 없이 하이드의 귀로 흘러들어가 그의 전의를 꺾어놓았다. 하이드는 또 다시 자신의 가족을 어이없이 떠나보내길 원하지 않았다.


 "명왕! 패배를…… 패배를 인정하겠네. 저 무의미한 살육을 당장 멈춰주게!"


 명왕은 말없이 천벌을 멈추고 별동대에게 손짓했다. 살육이 멈추자 맥이 풀린 하이드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것으로 1차 능력자전쟁은 양측 모두에게 커다란 피해를 남기고 종결되었다. 분쟁이 시작된 지 6개월이 흐른 뒤였다.

 

- chapter 6. 파국(破局)의 조짐(兆朕) -


 1차 능력자전쟁 이후 밝혀진 사실 중 하나는 세계수의 도시 [포트 레너드]에서 생산되는 이슬과 수액, 그리고 안개가 능력자들의 힘을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천천히 퍼져나간 안개와 수액광물의 힘은 능력자들을 흥분시켰고, 회사와 연합의 결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점점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일촉즉발의 순간, 이 위태한 폭탄에 불이 붙는 사건이 일어났다. 숙명의 카인과 쾌검 이글이 정면으로 맞붙은 사건, 디시카 전투. 이 사건은 이제 일반인들 또한 능력자 못지않은 전투능력을 가지게 된 사실을 알리는 효시였다. 능력자들은 불안에 휩싸였고, 그들은 서서히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 사건 이후로 디시카에 머물던 카인. 그리고 마침내 그에게 마수를 뻗친 능력자들. 연합의 오토와 부처는 이 상징적인 인물을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연합의 능력자 나이오비를 끌어들였다. 하지만 카인에게는 그의 전우와 회사의 능력자인 드니스가 있었다.


 마침내 둘은 충돌했다. 드니스의 도발로 인해 날뛰기 시작한 나이오비는 디시카에 연옥을 현현시켰고, 그에 놀란 오토와 부처는 흑염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반대로 드니스 또한 명왕을 호출했다.


 결사적으로 저항하던 카인이 마침내 쓰러지고, 그 머리 위로 부처의 푸줏칼이 떨어지려는 순간. 디시카에 한발 먼저 도착한 명왕의 번개가 부처를 절명시켰다. 다음으로 오토에게 분노의 화살이 돌아가려는 순간 당도한 흑염이 그를 구했다.


 1차 능력자전쟁 이후 둘의 직접적인 대면은 처음이었다. 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결국 이 사건은 민중들에게 다시 한 번 능력자들의 위험성을 알렸고, 능력자들에게는 안개와 수액의 능력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흑염은 자신의 아들인 검은 두건 칼라를 후계자로 내정, 능력을 개발하고 후계수업을 받도록 조치한다.


 <하이드의 일대기 중 발췌>

 

 1차 능력자전쟁의 패배로 연합 소속의 능력자 또한 의무적으로 '능력자 등록제'를 따라야 했다. 각 조합에서 자유로이 활동하던 연합의 구성원들은 크게 반발했지만, 패자의 입장인 연합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간신히 되찾은 평화. 1차 세계대전과 1차 능력자전쟁이 남긴 상흔은 비록 커다랬지만 서서히 치유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하이드는 점점 망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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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수님. 토니 리켓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게."


 연합 본부의 총수실. 흑염 하이드의 집무실로 쓰이는 방은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소박했다. 질박한 책상 위에는 미처 결제되지 않은 서류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지금 연합이 처한 상황을 대변하는 듯한 참상. 토니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거기에 서류를 추가했다.


 "조금 쉬셔야 할 것 같습니다. 며칠 째 제대로 주무시지도 않고 있잖습니까."


 "내가 해야 할 일이고, 내가 감당해야 할 책무일세. 그런 말 말게나."


 시대는 바야흐로 1928년. 패기 넘치던 흑염 하이드도 시간의 준엄함에는 벗어날 수 없었다. 탄탄한 육신은 조금씩 왜소해져갔고 귀밑머리와 눈썹도 희끗희끗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강렬한 검은색 머리칼은 아직도 선연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 누가 이 사내를 보고 일흔을 바라보는 노인임을 짐작하겠는가.


 올해로 68세. 고희(古稀)에 접어드는 하이드였지만 아직까진 현역이라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생각이 좀 달랐다.


 "총수님. 무례하지만 간언을 드리고자 합니다."


 "말하게. 우리의 수석 참모가 조언을 하겠다는데 무에 거리낄 것이 있겠나."


 "헬리오스의 명왕 또한 일찌감치 후계를 마련했습니다. 명왕보다 고령이신 총수님도 후대를 대비하시는 것이 타당하다고 사료됩니다."


 하이드는 펜을 잠시 멈추었다. 스무 살 이래 쉬지 않고 달려온 나날. 어느 새 그가 살아온 세대는 밀려간 강물이 되었다. 하이드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언제고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옳은 말이군. 그럼 하나 물어보지. 수석 참모인 자네의 입장에서 보면 차기 총수로 적합한 인물은 누구인가?"


 "……저는 수석 참모로서 연합 내의 전원에게 공정한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누구 한 명을 편들 수 없습니다."


 "여기는 아무도 없네. 허나 듣는 귀가 없다고는 장담할 순 없군. 잠시 이리 와 보게."


 토니는 하이드에게 다가갔다. 하이드는 그가 걸어오는 사이 서류 위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책상 앞에 닿은 토니는 그 내용을 들여다보았다.


 [자네라면 예전부터 상관으로 모시던 라이스 킨을 추천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군.]


 토니는 살짝 미소 지었다. 그 미소를 본 하이드 또한 가볍게 미소 지으며 다음 글귀를 써 나갔다.


 [그는 능력 있는 사람이지. 하지만 중도적인 인물은 아냐. 연합은 이미 범세계적 구성원으로 채워져 있지. 하지만 그는 연합의 일원이 되고서도 여전히 팔티잔 연합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어. 흑기시단도, 그리고 카모라 패밀리 또한 마찬가지네.]


 여기까지 쓴 하이드는 눈이 침침해지는 걸 느꼈다. 며칠간 쌓인 과로는 그를 확실하게 좀먹고 있었다. 그는 잠시 펜을 멈추었다 다시 놀렸다.


 [나 자신은 탐탁지 않네만, 가장 잡음 없는 후계는 역시 칼라 그 녀석 뿐인 것 같군. 못난 애비를 두고도 잘 커주어서 기쁘긴 하네만, 그래도 그 녀석에게 이 부담스런 자리를 물려주고 싶진 않았네.]


 하이드의 부인은 1차 능력자전쟁 이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정략결혼이라지만 함께 살다보면 미운 정 고운 정이 들 기회라도 있었겠지. 하지만 하이드는 연합에 매여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과의 사이 또한 소원해져만 갔다.


 그리고 멜라니와 보낸 꿈결같은 시간 이후로 그런 상황은 더욱 심해졌다. 하이드는 그 일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지만, 차마 당당하게 아내의 얼굴을 볼 수 없었기에 부부의 관계는 거의 완전하게 단절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외아들 칼라는 훌륭하게 성장했다. 흑염을 쏙 빼닮은 흑발과 흑안. 제 어미를 닳아 아비보다 훌쩍 커버린 아들. 하이드에게서 차돌을 연상할 수 있다면 칼라에게선 단련된 칼날을 연상할 수 있었다.


 지하 연합 총수의 아들이라는 조건을 모두 내던지고 밑바닥에서 시작, 지금은 연합의 중견 간부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올라간 기특한 녀석. 하이드는 생각을 거듭할수록 칼라에게 마음이 기울었다. 아마, 지금껏 주지 못한 부정을 조금이라도 건네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이드가 잠시 생각에 잠긴 동안 토니 또한 짤막한 글귀를 썼다. 하이드는 유려한 글씨로 씌어진 문장을 눈에 담았다.


 [그는 자격이 있지만 힘이 모자랍니다. 후계자로 내정하려면 총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이드는 빙그레 웃었다. 토니의 의도는 확실했다.


 혈연관계에 의한 능력의 계승은 이미 여러 건 확인되어 있다. 하이드 또한 그 증거를 하나 알고 있었다. 트리비아 카리나. 그의 첫 사랑이었던 박쥐 날개 소녀의 분신.


 하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토니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 이제 연합은 다음 세대를 준비하기 위해 바쁘게 굴러갈 것이다.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그 순간 하이드의 뇌리에 멜라니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너무나 간만에 떠올린 얼굴. 그녀가 배푼 사랑은 그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어주었지만 하이드는 그녀를 의식적으로 떠올리는 것을 스스로 거부했다. 그녀에게는 좋은 추억으로만 남아있고 싶었다.


 하지만 쌓여간 세월이 그를 약하게 한 것일까. 왠지 모르게 그녀가 그리웠다. 너무나 강렬한 이 감정. 아름다웠던 금발과 반짝이던 호박빛 눈동자. 하이드는 저도 모르게 서류에 글귀를 써 내렸다.


 [토니, 프랑스 샹젤리제 거리 인근에 살았던 멜라니 헌트라는 여성을 찾아봐 주게. 이십 년 정도가 흘렀으니 어려울 것 같지만 부탁함세.]


 토니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목소리를 내어 답했다. 이 말은 글로 적을 필요가 없었다.


 "부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명령만 내리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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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이후로 하이드는 아들 칼라에게 흑염을 전수하기 위한 훈련에 들어갔다. 칼라 또한 의욕적으로 훈련에 임했다.


 하지만 진도는 지지부진했다. 혈연으로 능력이 전해지는 것은 여러 사례가 목격되었지만 그것을 의도적으로 전수할 수 있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하이드와 칼라는 여러모로 수를 내어보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런 와중에 토니로부터 보고서 한 장이 도착했다. 서류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멜라니 헌트는 1년 전 사망.]


 거기까지 읽는 순간 하이드는 현기증으로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렇게 생기 넘치던 아가씨가 미처 마흔이 되기 전에 세상을 뜨다니? 하이드는 정신을 다잡고 뒤의 내용을 다시 훑어 내렸다.


 [사인은 과로사로 판명. 주변의 이야기로는 거의 쉬지 않고 일을 했다고 함. 이유는 그녀의 딸을 교육시키기 위해서라고 판단됨. 미혼모였던 멜라니는 1907년 아이를 낳고 재학 중이던 음대를 자퇴 후 양육에 전념했다고 함. 딸의 이름은 앤지 헌트. 현재 파리 국립 고등음악원(CNSM de Paris)에 재학 중. 거주지는 장 조레스 거리. 이하 여백.]


 1907년? 하이드는 충격으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와 멜라니가 만난 날은 1906년. 그렇다면 앤지 헌트라는 이 아이가 설마……?


 하이드는 그 날로 모든 것을 뒤로 미루고 프랑스로 향했다. 사전 준비는 완벽하여 누가 봐도 그가 출장을 겸해 프랑스로 갔다고 여길 것이다.

 

 

 하이드는 어느 새 추억이 시작된 술집 근처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기억에 남아있는 술집은 이미 없었다.


 "아쉽군…… 그 구원은 이제 찾을 도리가 없구나……."


 그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 등은 강인한 연합의 수장이 아닌, 그저 한 사람의 노인네의 등에 지나지 않았다.


 상젤리제 거리 인근. 멜라니 헌트의 집이 있던 건물 앞에 서자 하이드의 눈가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 모든 것이 추억 속 그대로인데, 거기엔 멜라니가 없었다. 슬픔에 잠긴 하이드는 쓸쓸한 모습으로 장 조레스 거리를 향해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물어물어 찾아온 장 조레스 거리의 파리 국립 고등음악원(CNSM de Paris). 18세기에 설립되어 기라성 같은 음악가를 배출한 위대한 산실. 하이드는 입구 근처의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정문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의 눈이 홉떠졌다. 그의 눈길은 막 정문을 나서는 젊은 아가씨에게 고정되었다.


 칠흑빛 비단을 연상시키는 긴 생머리. 아담한 체구에 걸친 코트는 너무 크고 낡아 있었다. 하지만 남루한 차림새로도 가릴 수 없는 생기 넘치는 얼굴.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반짝이는 황금의 눈동자에는…… 그리운 호박빛이 담겨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하이드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멜라니 헌트의 잔영이 겹쳐 지나갔다. 전체적으로 아주 흡사했다. 단, 고양이처럼 치켜 올라가 반짝이던 눈매만은 전혀 닮지 않았다. 그 눈매는…… 너무나 익숙한, 거울 속에서 마주보던 자신의 눈매.


 하이드는 저 아가씨가 앤지 헌트임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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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드는 조용히 앤지 헌트의 뒤를 따랐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근방의 선술집이었다. 하이드는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번잡한 내부를 해치고 들어가 그늘진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앤지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하이드는 내심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종업원을 불러 간단하게 주문을 마쳤다. 다행히 술과 안주를 가져다 준 종업원은 앤지 헌트가 아니었다.


 술을 몇 모금 넘겼을때 웨이트리스 복장으로 갈아입은 앤지 헌트가 매장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활발하게 매장을 돌아다니며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날랐다. 하이드는 아련한 향수에 잠겨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는 일은 달랐지만, 그 모습은 멜라니와 꼭 닮아 있었다.


 하이드는 앤지가 당차게 살아가는 모습을 두 눈에 똑똑하게 담았다. 이제 와서 그녀의 아버지라고 행세할 마음도, 자격도 없었다. 그저 그와 멜라니의 딸이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앤지의 삶에 능력자들의 사정을 끼워 넣기 싫었다. 이 아이만은 평범한 인생을 살아가기를.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페도라를 푹 눌러썼다. 공교롭게도 마침 계산대에는 앤지가 서 있었다.


 "22번 테이블, 2프랑 22상팀 나왔습니다!"


 하이드는 아무 말 없이 돈을 꺼내어 셈을 치렀다. 돈이 오가면서 자연스레 손끝이 스쳤다. 하이드는 그 손을 꼭 붙잡고 싶은 충동을 힘겹게 억눌렀다.


 "잘 먹고 가네. 수고하시게."


 "안녕히 가세요! 다시 찾아 주시기를!"


 하이드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억지로 옮겼다. 어떻게 문을 열고 나왔는지도 몰랐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인근의 공원에서 홀로 쭈그려 앉아 있었다. 하이드의 눈에서 조금씩 물기가 배어나왔다. 그는 소리 죽여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가 가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행복한 가정. 선택하지 못한 미래의 파편이 그의 심장을 날카롭게 헤집었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고 하이드는 철저하게 무력했다.


 아버지와 딸의 만남과 대화는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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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안 울적해 있던 하이드가 자신을 추스르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업무 일선에 복귀한 것은 최근. 그런 그에게 다시 한번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닥쳤다.


 "총수님, 포트 레너드에서 급보입니다!"


 "무슨 일인가?"


 "디시카 조합에서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잉게 나이오비가 날뛰어 큰 화재가 발생! 거기다 군인으로 보이는 무력 집단과의 교전이 있다고 합니다."


 "리버포드나 코어 레너드의 조합에서 지원 병력을 차출하게. 그들로 모자란다면 가장 가까운 곳에서 추가로 지원을 고려하도록."


 "급보입니다! 명왕이 영국으로 향했습니다. 목적지는 높은 확률로 포트 레너드입니다!"


 두 급보를 받은 하이드의 뇌리에 불길한 느낌이 스쳐 지나갔다. 두 사건이 겹쳐 일어난 건 결코 우연히 아니라는 직감.


 "내가 가겠다. 비행 능력자를 최대한 빨리 섭외하도록. 후속 증원부대도 서둘러 준비시켜라. 서둘러!"


 급하게 디시카로 향한 하이드. 그리고 불길에 뒤덮여가는 디시카에 도착하자마자 목격한 것은…….

 

 

 "끄어어어어어!"


 누군가를 자신의 푸줏칼로 찍어 내리려던 부처가 벼락에 직격당해 산 채로 불타오르는 모습이었다. 하이드에게 그 번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상징이었다.


 "그만두게, 명왕!"


 그는 급하게 흑의를 펼쳐 입었다. 하늘이 다시 한번 낮게 울부짖고는 거센 포효를 토해냈다. 하이드는 아슬아슬하게 벼락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의 등 뒤에 쓰러진 흑기사 오토는 겁에 질려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명왕! 엔트워프 협약은 아직 건재할 텐데! 도저히 믿을 수 없군!"


 하이드의 노기에 찬 일갈에 명왕 또한 차가운 눈으로 맞받아쳤다. 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귀하의 부하가 벌인 행패를 모르는 건가? 그렇다면 귀하는 내 생각보다 못한 인물이었군."


 하이드는 명왕의 대꾸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는 지금 디시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전말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발밑에 쓰러져 있는 오토를 달래어 상황을 전파 받았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하이드는 수치심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연합 소속의 능력자들이 일반인을 핍박하고 살해하려 했다니!


 "언제고 귀하에게 연락을 할 생각이었네. 최근 연합의 동태는 협약을 지킬 마음이 있는지조차 궁금할 지경이더군. 귀하야말로 대체 저의가 무언가?"


 "자네야말로 무슨 말인가. 연합의 최우선 행동수칙은 협약의 내용에 의거하고 있네."


 "……허허. 더 이상 무엇을 말하리. 귀하는 집안 단속조차 하지 못하는 소인배였나? 누군가 귀하의 눈과 귀를 막고 있는 건가? 어느 쪽이든 정말로 실망이 크네."


 명왕은 더는 얘기하기도 싫다는 듯 휙 돌아섰다. 숲 너머로 사라져가는 명왕의 등 뒤를 지켜보던 하이드는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솟는 것을 느꼈다. 적어도 저 자에게 저런 식의 말을 듣고 싶진 않았다!


 하이드는 명왕의 뒤를 쫓았다. 둘은 약간의 거리를 둔 채 한참동안 같은 속도로 걸어갔다 조금 뒤, 인적이 없는 곳까지 당도한 명왕은 발을 멈추었다. 그는 등을 돌린 채로 침묵하고 있었다. 하이드는 말없이 그 등을 쏘아보고 있었다.


 문득 명왕이 말을 꺼내었다. 그 어조는 어쩐지 비탄에 잠겨 있었다.


 "귀하만은 나와 같은 곳을 보고 있다고 믿었네. 비록 선택한 길은 달랐지만 올바른 방법을 추구하리라 믿었네. 그런데…… 그런데 귀하는……."


 명왕은 말을 잇지 못했다. 거친 호흡을 간신히 고른 명왕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나의 꿈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귀하가 증명해 주었네. 이 넓은 세상에 나 홀로 고독한 여정을 선택한 게 아니었어. 흑염…… 아니, 하이드. 자네만이 나의 이해자였고 동반자였네. 하하…… 우습겠지. 회사의 대표라는 작자가 적대세력의 수장에게 친근함을 느끼다니!"


 하이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명왕이 내뱉는 말은, 사실은 하이드의 속마음이기도 했다. 명왕과 회사가 아니었다면 그와 연합은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둘은 서로에게 자극받고 경쟁하여, 마침내 누구도 생각지 못한 업적을 이뤄낸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일 뿐이었군. 오늘의 일은 묻어두지. 앞으로 자네를 볼 일이 없었으면 하네."


 말을 끝내고 다시 걸음을 재촉하는 명왕. 하이드는 저도 모르게 그 등에 대고 외쳤다.


 "명왕! 자네 할 말만 하는 겐가? 내 말도 들어주게!"


 명왕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으나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하이드는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되는대로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저 남자와 이런 식으로 헤어지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나 또한 자네와 마찬가지였네. 회사를 설립하고 베른 조약을 이끌어내는 자네를 보고 나와 같은 생각을 지닌 이가 혼자는 아니라고 안심했어! 내가 없더라도 능력자들의 차별은 결국 자네가 해소할 수 있었겠지!"


 하이드는 잠시 숨을 골랐다. 머릿속에서 단어가 명료하게 정리된다. 그는 다시 한번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내 가족이었네! 세상 천지에 홀몸인 나에게, 내가 돌봐줘야 하는 그들은 내 가족이었어! 가장이 가족을 버릴 수 있나? 부모가 자식을 버릴 수 있겠나? 나는 내 가족을 책임질 의무가 있어! 그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네. 그리고 내 이상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걸 가르쳐 준건 자네였어!"


 여기까지 단숨에 말한 하이드는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아직 더 할 말이 있었다. 하이드는 최후의 말을 힘겹게 짜내었다.


 "나 또한…… 자네와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네. 술 한 잔 기울이며 신세 한탄도 해 보고 싶었네. 이런 식의 결말은 바라지 않았어. 명왕…… 아니, 헨리."


 명왕, 헨리 밀러 3세는 자신의 이름을 듣자 잠시 움찔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그리고 긴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은 명왕에 의해 깨어졌다.


 "가족…… 이라고 했나, 하이드."


 "그래. 연합은 내가 책임져야 할 나의 가족이네. 처음부터 그렇게 맹세했지."


 "자네는…… 하이드 자네는, 정말 모르는 건가? 가족이란 집단이 얼마나 손쉽게 무너지는가를?"


 "무슨 소린가? 가족을 그렇게 가벼이 여기지 말게, 헨리! 그건 나에 대한 모욕이니!"


 "하이드…… 지금에서야 묻는데, 자네는 나를 벗이라 여길 수 있겠나……?"


 "지금까지 왔는데 더 이상 말해 무엇하겠나, 헨리. 나 또한 자네를 벗으로 삼겠네."


 "그렇다면 벗으로서 말하겠네. 자네와 내가 꿈 꾼 이상은 같은 방향이었네. 하지만 자네가 선택한 길은 잘못되었어. 그 길은 결코 우리의 꿈에 닿을 수 없네……."


 하이드는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헨리 밀러 3세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이드에게 말했다.


 "벗이여, 자네가 상처받지 않길 바라네. 내 우려를 넘어 자네의 목표가 달성되길 원하네. 내 바람은 단지 그 뿐일세."


 그 말을 끝으로 헨리 밀러 3세는 하이드로부터 멀어져갔다. 하이드는 더 이상 그를 잡을 수 없었다.

 

- chapter 7. 시대(時代)의 황혼(黃昏) -


 1929년 10월, 미국 증권가를 덮친 대공황은 전 세계를 도탄에 빠트렸다. 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보다 더한 혼란이 유럽 전역을 덮쳤고, 심각한 경제난이 사람들을 괴롭혔다.


 능력자들 또한 예외는 없었다. 그들의 능력은 직접적으로 가난을 해결해 줄 수 없었다. 하지만 능력자들은 이 위기를 보다 강한 능력으로 극복하고자 했고, 그 일환으로 주목받은 것이 바로 안개와 수액의 힘이었다.


 연합과 회사 소속의 능력자들은 관리 하에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했으나, 이 두 조직에 속하지 않은 군소 세력들은 삼삼오오 [포트 레너드]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미쳐 돌아가기 시작했다.


 [포트 레너드]에 아비규환이 강림했고, 이 상황을 제어하는데 지쳐버린 영국 정부는 마침내 [포트 레너드]를 치외법권으로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빅토리아 선언'이후 영국이 선택한 최악의 결정이었고,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격렬해졌다.


 연합과 회사는 이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협력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 합의했다. 흑염과 명왕은 해결책을 논의하기 위해 회담을 준비했고, 해가 넘어가기 전에 런던을 회담장으로 삼아 협의를 끌어내기로 정해졌다.


 운명의 날. 런던에 도착한 명왕과 비서 타라가 본 것은 시내를 집어삼키는 검은 불길이었다. 대경한 명왕은 즉시 타라에게 주변의 시민을 대피시킨 후 모든 건물을 파괴하고 불태우라는 지시를 내렸다. 과격한 방법이었지만, 태울 것이 남아 있는 한 끝없이 타오르는 검은 불꽃에 대처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그 불꽃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흑염 하이드 뿐.


 하지만 타라에 의해 완전히 잿더미로 변한 잔해에 검은 불꽃은 옮겨붙지 못했다. 그로 인해 검은 불꽃의 주체가 하이드가 아닌 그의 아들, 검은 두건 칼라라는 것을 눈치 챈 명왕은 다이무스를 즉시 호출하여 현장을 조사토록 지시했다.


 그리고 다이무스는 회담장 인근에서 피살된 채로 발견된 하이드와 칼라의 시신을 발견했다. 두 사람의 사인은 날카로운 흉기에 의한 자상으로 밝혀졌다.


 향년 69세. 달려 나간 궤적이 곧 역사였던 사내. 지하 연합의 초대 수장. 시대가 선택한 두 영걸중 하나. 흑염 하이드는 그렇게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났다.


 <하이드의 일대기 중 발췌>

 

 포트 레너드 사건이 남긴 파장은 컸다. 일반인 또한 능력자 못지않은 전투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디시카 전투. 명왕과 흑염의 충돌.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새로이 밝혀진 사실에 가볍게 묻혔다.


 세계수의 수액과 [포트 레너드]에 떠도는 안개가 능력자들을 강화시켜 준다는 정보가 온 유럽에 퍼졌다. 처음에는 뜬소문 취급받던 이 정보는 곧 진실로 밝혀졌고, 포트 레너드는 모여든 능력자들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연합은 은인자중하고 있었다. 부처와 오토가 저지른 만행에 대한 자숙의 의미로서.


 때는 1929년.


 하이드는 69세가 되었고, 급격하게 쇠약해져갔다. 다행히 칼라는 성공적으로 흑염의 능력을 각성했고 연합의 차기 후계자로 입지를 확실히 굳혔다. 하지만 하이드의 마음은 헨리 밀러 3세와의 이별 이후로 언제나 편치 않았다.


 '헨리의 말이 맞았어. 연합은…… 더 이상 내가 지키고자 했던 연합이 아니었어…….'


 그는 절망했다. 끝없이 절규하고 눈물 흘렸다. 많은 것을 강제로 잃고, 스스로도 온갖 것을 떨쳐버리고, 그러면서도 추구하고자 했던 이상이 있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 보게 될 것이다.]


Wer mit Ungeheuern kämpft, mag zusehn, dass er nicht dabei zum Ungeheuer wird. Und wenn du lange in einen Abgrund blickst, blickt der Abgrund auch in dich hinein.


 프리드리히 니체가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중에서 한 말. 하이드는 집착했던 연합에 오히려 삼켜진 것이다. 너무나 순수하게 갈구했기에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조차 몰랐다.


 모든 것을 깨달았지만 하이드는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그가 꿈꾸었던 미래는 결코 틀린 것이 아니었다. 멜라니가, 헨리가 인정해 주었다. 그렇다면 잘못된 것은 자기이다. 다른 사람이 연합을 이끈다면 이 잘못을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이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마지막 희망을 자신의 아들 칼라에게 걸었다. 그가 저지른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전수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의 아들이 올바른 길로 나아가 마침내 그의 꿈을 대신 이뤄주길 바랐다. 후회 없는 삶을 살길 바랐다. 그리고 칼라는 그 기대에 훌륭하게 부응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이드가 쌓은 업은, 그에게 철저한 파멸을 준비했다. 하이드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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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9년 10월, 신대륙으로부터 시작된 경제공황은 세계 전체를 불황의 늪에 처넣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의 피폐함보다 더한 경제적 혼돈이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연합과 회사 또한 휘청거렸고, 능력자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그들이 돌파구로 삼은 것은 다름 아닌 수액과 안개의 힘이었다.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한 능력자들은 이윽고 격렬하게 충돌했고, [포트 레너드] 곳곳에서 분쟁이 생겨났다. 치안을 유지해야 할 영국 정부는 점점 과격해지는 싸움에 지쳐 결국 [포트 레너드] 전역을 치외법권으로 선포해 버렸다. 이미 [엔트워프 협약] 따위는 모두의 뇌리에서 지워져버렸다. 아름다운 세계수의 정원은 또 다시 피로 물들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연합과 회사 내에서도 이 사태를 어떻게든 수습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것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이는 연합의 최고위 간부, 흑태자 라이스 킨이었다.


 "이미 사태는 연합의 힘만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지경까지 다다랐습니다. 회사와 연수하여 현 상황을 타개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입니다. [앤트워프 협약]은 아직 건재하고 있습니다. 회사는 저희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을 겁니다."


 라이스 킨의 주장은 타당했으며, 누가 봐도 합리적이었다. 연합은 회사에 협력을 제안했고, 회사는 찬동했다. 하이드와 헨리 밀러 3세가 직접 회동하여 타개책을 논의하기로 결정되었고, 회담장은 런던 시내에, 일시는 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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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30일. 런던 인근의 호텔에 하이드와 칼라가 나타났다. 연합은 회담의 주체로 하이드 자신이, 수행원으로 칼라를 대동하기로 했고 회사 측에선 헨리 밀러 3세와 그의 수석 비서 타라 시바스 조노비치가 함께 온다고 통보해왔다.


 둘은 가볍게 저녁 식사를 마쳤다. 부자는 테이블에 앉아 티 타임을 가졌다. 은은히 퍼져나가는 홍차의 향기가 몹시도 좋았다.


 "아들아, 이번의 회담은 네게도 좋은 경험이 될 거다. 앞으로 큰일을 결정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알겠습니다, 아버님."


 짧게 대답한 칼라가 그저 믿음직한 하이드. 그는 런던까지의 여정으로 쌓인 피로가 눈꺼풀을 짓누르자 견디기 어려웠다. 그는 먼저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침실로 들어가는 하이드의 등을 바라보는 칼라의 눈이 일순간 번뜩였다. 그것이 무슨 의미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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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명의 날. 1929년 12월 31일의 아침이 밝았다. 일찌감치 일어난 하이드는 매무새를 깔끔하게 다듬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헨리에게 흉보일 일은 없었으면 했다.


 "하이드 님, 계십니까?"


 방 밖에서 노크와 함께 그를 찾는 말소리가 들렸다. 하이드가 문을 열어보니 사환 청년이 편지 한통을 들고 서 있었다.


 "무슨 일이냐?"


 "한 손님이 하이드 님께 이 편지를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하이드는 약간 의문스러워 하면서도 편지를 받았다. 별 특이한 점은 없는 흰 봉투였다. 수신인도, 발신인도 적혀있지 않은 깨끗한 면면. 하이드는 입구를 열고 편지를 펼쳐 보았다.


 그 순간, 하이드의 업은 마침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의 심장을 겨냥했다. 결코 피할 수 없는 저주가 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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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런던 시내. 하이드와 칼라는 회담장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약간 이른 시간이었지만 서둘러서 나쁠 건 없었다.


 앞서 걷던 하이드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멈춘 곳은 일찌감치 문을 연 레스토랑 앞이었다.


 "시간이 아직 남았으니 조금 여유를 부려도 괜찮겠지. 차 한 잔 하겠느냐?"


 "괜찮지요."


 두 부자는 커피 한 잔씩을 앞에 두고 마주앉았다. 왠지 칼라는 하이드에게서 위화감을 느꼈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아버지,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말씀해 주세요."


 "…… 그렇게 티가 났느냐. 나도 이제 다 되었구나."


 하이드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고 컵 받침에 내려놓았다. 잔과 받침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최후의 망설임을 무너뜨렸다. 하이드는 품속에서 아침에 받은 편지를 꺼내어 칼라에게 건네었다.


 "이걸 보거라."


 칼라는 말없이 봉투를 열고 편지를 꺼내들었다. 내용을 훑던 칼라의 눈이 일순간 크게 떠졌다. 하이드는 기도라도 하는 심정으로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신에게 닿지 않았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칼라. 그 눈은 지금까지 하이드가 몰랐던 눈이었다. 한없이 차갑고 냉정한, 그러면서도 교활하게 번뜩이는 눈. 하이드는 칼라가 이런 모습을 보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이드는 장탄식을 터뜨렸다.


 "모함이었으면 했다. 누군가의 장난이었으면 했다. ……네가 이런 짓거리를 벌일 줄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


 칼라는 그런 아버지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그 목소리 또한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차가운 목소리였다.


 "아버지는 너무 물렀습니다. 연합의 수장이라곤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요."


 하이드는 그저 침묵하고 있었다. 칼라는 이미 모든 것이 밝혀진 이상 '착해빠진 아들'의 가면을 벗어던져버렸다. 하이드가 '계획'을 눈치 채는 것은 상정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별 문제 없었다. 이미 늦어버렸으니까.


 "연합은 강대한 조직입니다.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힘을 가지고도 멍청하게 회사에 이끌려 다니다니, 당신은 정말 어리석었어."


 칼라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하이드를 뒤흔들었다. 칼라의 독설은 계속되었다.


 "이제는 달라질 거야. 우선 지금부터 시작이지. 잠시 뒤면 저 역겨운 회사 놈들의 지도자는 세상에서 사라질 거야. 회사는 혼란에 빠지겠지. 아주 잠시라도 좋아. 그 틈을 이용하면 연합의 힘으로 회사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건 손쉬운 일이지."


 칼라는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선언했다. 하이드의 마음이 마침내 산산이 무너져 내렸다.


 그가 희망을 걸고, 그가 꿈을 맡기고, 그가 미래를 부탁하려던 그의 아들은 그 모든 것을 배신했다. 그 사실이 하이드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네가 얻는 것이 무엇이냐. 연합이 회사를 거꾸러뜨리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유일무이한 지배자!"


 칼라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외쳤다. 그 눈에는 숨기지 못한 욕망이 넘실대고 있었다.


 "최고의 자리는 하나면 족한 거야. 지금까지가 오히려 이상한 거였지. 당신이 그 자리를 차지할 생각이 없으면, 그것도 별 상관없어. 이제 내가 그 자리를 쟁취할 테니까. 그리고 결과적으로 전 세계의 능력자들을 지배하는 것. 그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다."


 어떻게 이토록 어리석을 수 있을까. 세계를 지배하고자 했던 자들의 말로를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품었을까.


 그러다가 하이드는 자조의 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연합이라는 괴물에 먹힌 것처럼, 칼라 또한 스스로의 욕망에 먹힌 것이다. 부자는 어디까지고 닮은꼴이었다. 얄궂은 일이었다.


 "그렇게 놓아 둘 순 없구나. 애비 된 자로서 아들놈이 역사에 악명을 남기는 걸 좌시할 순 없는 노릇이지. 거기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연합 또한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은 자명하다. 연합이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진 않겠다."


 '……그리고 헨리에게 해를 끼치도록 내버려둘 생각도 없다.'


 "하하…… 아버지, 아들을 너무 우습게 보신 것 같습니다. 당신이 키운 자식인데 아무렴 대충 준비했겠습니까?"


 그가 손가락을 튀겼다. 그와 동시에 곳곳에서 인영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앉아있는 티 테이블 주변을 둘러싼 인영. 그 수가 실로 일백에 달했다. 하나하나가 능력자임은 확실했다. 그것도 강력한.


 "원래대로라면 회담 중에 제압하고 명왕만 끝장낼 생각이었지만, 뭐 상관없습니다. 아버지가 끝까지 반대하신다면 저도 어쩔 수 없죠."


 칼라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몸에서 천천히 흑염이 너울거린다. 그가 직접 전수하고 가르친 능력.


 "아들이 잘못된 길을 가면 꾸짖어서 바르게 다잡는 것이 부모가 할 일. 매가 따끔할 것을 각오하거라."


 "기대하지요. 쳐라!"


 인영들이 움직임과 동시에, 그 일대는 터져나가는 흑염의 파도에 휩쓸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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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의 인영은 검은 불길의 파도를 전력으로 막아내느라 그 자리에서 멈추거나 주춤주춤 물러섰다. 유일하게 멈추지 않은 것은 같은 흑염으로 파도를 상쇄한 칼라 혼자였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이제 당신의 왕좌를 물려받을 시간이군요!"


 달려드는 칼라의 손에는 날카롭게 빛나는 단검이 쥐여져 있었다. 칼라는 망설임 없이 하이드의 심장으로 단검을 찔러갔다.


 그리고 단검은 하이드의 가슴에 손쉽게 박혀 들어갔다.


 "……!"


 하이드는 고통으로 미간을 살짝 좁혔다. 정작 그를 찌른 칼라는 너무 간단하게 끝난 일에 어안이 벙벙해져 있었다.


 하이드는 그런 아들의 손목을 단단하게 그러쥐었다. 마치 바이스로 조이는 듯한 압력이 손목에 가해지자 칼라는 몸부림치며 팔을 빼내려고 했다. 그 서슬에 칼날이 이리저리 흔들리자 하이드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핏줄기 또한 더욱 거세졌다. 그 상처는 이미 치명상이었다.


 "이것 놔!"


 "그럴 순 없구나……."


 칼라는 완력만으로는 도저히 답이 없었는지, 검은 불꽃을 줄기줄기 내뿜기 시작했다. 그 기세가 자못 흉험했다. 하지만 칼라의 흑염은 하이드에게 티끌만한 상처도 입히지 못했다.


 "제…… 제길, 다 죽어가면서 발악하지 마!"


 "그래…… 다, 죽어가지. 그래도 너 하나쯤…… 나무라지 못할 정도로 죽진, 않았구나."


 완전히 이성을 잃은 칼라가 전력을 다해 흑염을 내뿜었다. 하이드가 내뿜은 흑염의 파도보다 더욱 거대한 규모의 폭발. 마치 해일 같은 파괴력에 방심하고 있는 백의 인영은 손쓸 틈도 없이 휘말렸다. 그 와중에서도 흑염은 묵묵히 그의 팔뚝을 쥐고 있었다.


 이미 칼라의 책략은 모두 끝장났다. 그가 준비한 암살자들은 스스로 죽여 버렸고 런던은 혼돈에 휩싸여갔다. 이 모든 것이 눈앞에 서있는 아버지란 작자 때문이라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결국 마지막까지 나를 괴롭히는 겁니까! 왜…… 왜 아버지는 항상 저에게 장애물인 겁니까! 대체 왜!"


 "그게…… 무슨, 말이냐."


 "당신이 방치한 내 어머니가! 대체 어떤 삶을 사시다가 떠나셨는지 당신은 모르겠지! 아들이랍시고 낳아놓고는 관심도 없는 듯 내버려 두고는, 정작 후계자가 필요하니까 뻔뻔스레 다가와 아버지 행세를 했지!"


 칼라의 절규는 하이드의 가슴에 박힌 칼보다 아프게 그를 찔렀다. 그런가. 그는 자신의 유일한 가정조차 지키지 못한 어리석은 필부였다. 그런 남자가 그보다 더 큰 꿈을 꾸는 것은, 역시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그의 이상은 분명 옳았지만…… 하이드라는 남자의 인생은 결국 실패한 것이다. 그것이 하이드를 모질게 괴롭혔다.


 "그런데…… 그런데 왜 그런 당신이, 하필 내 아버지인 겁니까…… 차라리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속 시원하게 증오라도 하는 건데! 차라리 마음 놓고 원망할 텐데!"


 칼라는 결국 힘이 완전히 빠진 듯 무너져 내렸다. 이미 모든 것은 끝났다. 그 편지의 출처가 어디든 간에 그의 계획은 이미 새어나가 있었다. 지금 살아난들 그는 회사의 공적이 되어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칼라는 쓰게 웃었다.


 "그래도…… 당신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 그 결심만은 결코 변하지 않아."


 칼라는 이미 오래 전부터 어딘가 망가져 있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어머니를 여의고,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다. 결국은 이 모든 것의 원인인 하이드를 증오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만이 그를 여기까지 데려온 원동력이었다.


 하이드는 속으로 탄식했다. 자신의 어리석은 삶이 남긴 증거는 너무나도 추악했다. 허나 그런 추악함마저도 감싸 안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부모라는 존재였다.


 하지만 하이드는 칼라의 아버지이기 이전에 연합의 수장이었다. 그는 이 모순된 입장에서 선택할 길이 단 하나뿐임을 알았다.


 자신의 가슴에 박힌 단검을 뽑아든다. 벌컥 솟구치는 선혈. 유출된 혈액은 이미 치사량을 넘어섰다. 새파랗게 질린 하이드는 천천히 칼라에게 다가갔다.


 "미안, 하다. 아들아. 아비로서, 그리고 연합의 수장, 으로서……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이것…… 뿐이구나."


 하이드는 아들의 심장에 단검을 깊숙이 박아 넣었다. 칼라는 그 순간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얼굴은 하이드가 기억하는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이걸로 칼라와 나는 누군가에게 암습당해 죽었다고 알려지겠지. 능력의 흔적은 없고, 오로지 단검에 찔린 상처뿐이다. 흑염은 나와 칼라가 결사 항전한 증거가 되겠지. 뒤처리는…… 헨리, 자네를 믿겠네. 자네라면 믿을 수 있지…….'


 그는 마지막 증거물인 단검을 최후의 검은 불꽃으로 완전히 소멸시켰다. 이것으로 할 일은 끝났다.


 서서히 꺼져가는 의식. 하이드의 시야가 천천히 검게 물들어갔다. 이제 더 이상 서 있을 여력조차 없었다. 풀썩 쓰러진 하이드의 동공이 점점 풀려갔다.


 '……앤지. 미안하다. 결국 너에게 사랑한다는 한 마디도 남기지 못했구나…….'


 단 하나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것이었다. 하이드는 최후의 순간, 간절하게 기도했다.


 '앤지, 행복하거라. 네 어머니와 아버지가 불행했던 만큼, 그저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란다. 아아…… 사랑한다, 내 딸아.'


 하이드의 입에서 숨결이 새어나오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와 동시에 진실은 황혼 속으로 가라앉았다.

 

- epilogue -

 하이드 사후 벌어진 사건은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회사는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혼란에 빠진 연합을 조직적으로 사냥해 나갔다. 아니, 미리 계획하지 않았다면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지금 우리는 이 사건을 2차 능력자전쟁이라 부른다.


 무너져가던 연합. 그것을 추스를 수 있었던 2인자인 흑태자 라이스 킨 또한 행방불명되었다. 그와 동시에 휴톤과 트리비아 또한 종적이 묘연해졌다. 최상위 간부들의 공백으로 인해 연합의 붕괴는 가속화되었고, 마침내 회사는 연합을 거꾸러뜨리고 절대자로 군림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야망은 철저하게 분쇄되었다. 모두가 이름을 들어보았을 영웅, 루이스가 그 주인공이다. 연합의 수석 참모 토니 리켓이 준비한 플랜 디코이의 실행원이었던 이 소년은 마치 신화와 전설에 나오는 영웅과 같이 불가능해 보이는 위업을 마침내 완수해 내었다.


 그로 인해 하이드의 외동딸 앤지 헌트가 끝까지 살아남아 회사의 음모를 밝혀내었다. 안타리우스의 첩자로 밝혀진 재스퍼는 달아났고, 그녀는 이 절망적인 상황을 타파함으로서 스스로가 연합의 총수가 될 자격이 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녀는 눈의 여왕이 되어 연합을 이끄는 여걸이 되었다.


 연합의 왕좌 꼭대기에는 눈의 여왕을 지키는 겨울의 보석이 빛난다고 전해진다. 물론 이는 앤지 헌트와 루이스를 가리키는 말이다. 앤지 헌트의 코드 네임과 루이스의 능력을 생각하면 몹시 어울리는 비유이다. 우리는 이들이 써 내린 영웅전설을 후대에 전할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전략) 비록 하이드는 이제 우리의 곁에 없지만, 그가 꿈꾸던 미래는 딸인 앤지 헌트를 통해 이루어질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앤지 헌트는 하이드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흉인 비밀 결사 안타리우스를 파멸시키겠노라 공언했다. 그녀가 아버지의 한을 풀 날이 하루라도 빨리 오길 바란다.


 1860년. 거대 일식의 날에 태어나 숨 가쁘게 달려온 하이드는 마침내 그 스스로가 역사가 되었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시대를 [흑염과 명왕의 시대]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세계가 선택한 남자, 하이드. 그는 시대를 자신으로 물들인 진정한 영걸이었다.


<하이드의 일대기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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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쯤이면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겠지. 큭큭큭……."


 누군가가 연합 총수실의 의자에 앉아있다. 뒤돌아 있기에 그가 누군지 알 수는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완벽한 계획이야. 어떤 경우라도 실패는 있을 수 없지. 정말 적절한 순간에 정보를 입수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군."


 그는 칼라가 비밀스레 준비하던 책략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어떻게 활용할까 고민했다.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연합은 칼라의 손에 들어갈 것이 확실했다.


 "이 내용을 흑염 하이드에게 건네주면 모든 것이 완벽하게 돌아가겠지. 그 외의 수는 있을 수 없어……."


 칼라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명왕을 잃은 회사는 지리멸렬하여 결국은 패망하겠지. 그렇게 되면 연합은 흑염의 사후 칼라의 소유가 될 것이다. 그것은 결코 바라지 않았다.


 그렇다면, 흑염 하이드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연합이 위험에 처할 일은 결코 벌이지 않을 하이드라면 결사적으로 아들을 막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애송이인 칼라는 제 아비에게 당해낼 도리가 없으니 결국 계획은 실패하겠지. 하지만 칼라 또한 수완이 만만치 않았다. 어쩌면 공멸, 적어도 치명적인 상처 한두 개는 입힐지도 모른다.


 "그리고 하이드가 사망하면 그 후계자는…… 바로 내가 되겠지. 후후후……."


 "좋은 계획이었어. 우리도 그 정보를 그렇게 잘 사용할 줄 미처 예상하지 못했지. 당신은 분명 연합의 수장이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


 "누구냐!"


 의자에 앉아있던 남자가 대경하며 벌떡 일어났다. 주변을 철저하게 방비하는데 도대체 언제 침입자가!


 "커억……."


 무슨 수를 썼는지, 남자는 잠시 버둥거리다가 무너져 내렸다. 침입자는 남자를 둘러매고 씨익 웃었다.


 "흑태자 라이스 킨. 욕심이 조금만 적었다면 일인지하 만인지상으로 살아갈 수 있었겠지. 물론…… 우리가 그렇게 내버려 두진 않았겠지만."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린 침입자는 마치 꺼지듯이 사라졌다. 진실을 들은 자는 입이 없기에 전말을 폭로할 수조차 없었다.


 하이드가 오랜 시간 애용하던 의자와 탁자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토해내었다. 마치 주인의 비극을 슬퍼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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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수님, 당신의 이상은 결코 꺼져서는 안 될 횃불입니다. 제가 그렇게 내버려두진 않을 겁니다."


 눈을 빛내는 젊은 남자. 그는 세상 누구보다 연합의 수장 흑염 하이드를 존경하는 남자였다. 하이드의 이상에 동조하고 그 실현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남자.


 "내 보잘것없는 힘으로는 흑태자와 칼라의 수작을 막을 힘이 없다. 총수님께서 버티신다면 더 할 나위 없겠지만……."


 그는 하이드를 절대적으로 신봉했지만, 동시에 현실을 냉정하게 파악할 줄 알았다.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는 것이 그의 책무.


 "내가 할 수 있는 준비는 다 했다. 만일의 경우라도, 결코 총수님의 의지가 사라지는 일은 없을 거다. 내가 그렇게 하고야 말겠어!"


 실제로 이 젊은 남자는 오래 전부터 한 가지 계책을 입안하고 있었다. 칼라의 쿠데타에 의한 정보를 입수하고 흑태자에게 전한 것도 이 남자였다. 그 정보의 출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것도 머지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 순간부터 착실하게 준비를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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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어먹을…… 빌어먹을! 총수님! 으흐흐흑……."


 슬피 울부짖는 남자. 부모가 타계한 것보다 더 구슬피 우는 남자는 세상을 잃은 듯 위태로워 보였다. 아니, 이 표현은 그에게 실례였다. 흑염 하이드는 그에게 있어 부모만큼 위대한 존재였다. 그런 존재의 부고를 방금 들은 것이다. 미처 까무러치지 않은 것도 용할 지경이었다.


 "울고 있을 때가 아니야. 결국 내가 생각한 최악의 상황으로 흘러가는군. 이 플랜은 정말 쓰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


 연합은 총수 하이드, 후계자 칼라, 2인자 라이스 킨을 전부 잃었다. 점조직이라는 특성상 순식간에 무너지진 않겠지만 수작을 부린 쪽이 너무나 위험한 존재였다.


 젊은 남자가 파악한 원흉은 바로 헬리오스사. 명왕의 후계자로 지목된 재스퍼였다.


 "이제 희망은 하나뿐이군. 총수님, 부디 당신의 딸을 저 세상에서라도 지켜주십시오. 저 또한 제 모든 것을 바쳐 그 분을 보필하겠습니다."


 적의 정보력은 만만치 않았다. 이미 불온한 움직임이 포착된 상태. 허를 찌르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한발 먼저 앞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준비해둔 밀서의 말미에 마지막으로 서명했다. 이제 전서구를 통해 각지로 명령이 전달되면 그가 준비한 최후의 반격이 시작될 것이다.


 "당신의 꿈, 제가 대신 이루겠습니다. 부디 편히 눈감으십시오."


 밀서를 접는 손길에는 숨길 수 없는 슬픔이 감돌고, 눈물로 조금씩 종이를 젖혔다. 그 와중에 잠시 드러난 밀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플랜 디코이 발동. 최종 승인 확인. 연합 수석 참모 토니 리켓]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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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하나마 저의 이전 작품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아래의 링크로 가시면 됩니다.

 

헤매이는 구원자, 춤추는 깃털 -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821151

 

신비롭게 피어나라, 동방의 불꽃 -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881337

 

영웅전설 - 눈의 여왕, 겨울의 보석 -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945160

 

오타, 오류 지적은 언제나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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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1

 

4번째 메인이군요. 사랑해주시는 여러분들 감사합니다. 더불어 고생하시는 조커팀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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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2

 

이 글을 쓰면서 참고한 자료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이퍼즈 앱북 - 사이퍼즈 연도표

 

사이퍼즈 공식 홈페이지 - 게임정보 탭의 세계관

 

블로그 이웃 곰방대와의 의견 교류 

 

 

P.S 3

 

얄야르 님의 지적으로 오타를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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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 OK Oh! 냠~ Love U~ 궁금해! YES! 히힛~
안녕하십니까? 예~예~ 모든 것은 신의 뜻... 불허합니다. 의외군요. 나 원 참... 시작할까요? 강화인간!!
안녕? OK 궁금하네요. 역시! 재미있네. 깜짝이야! 아~니? ...
웃음 두려움 만족 놀람 동의 분노 좌절 인사
안녕하세요? 넵!! 미안해요!! 앗! 좋아요! 엣헴. 추천! ㅠㅠ
안녕하심까~ 피- 좋다! 못마땅해... 곱다~ 덤비라! 후우- 아슴찮다..
허~허~ 아, 아니... 헐! 흠흠... 끄응... 시, 식은땀이.. 엥? 후어어..
후훗~ Trick or Treat! 사.탕.내.놔. 소녀... 억울하옵니다... 사, 사탕 주세요! 해피... 핼러윈... 날 위해 사탕 정돈 줘야지? 목표? 당연히 사탕이지!
안녕~ ?? 피- 어머! 흐어 오오- 안돼! 랄랄라
우쭈쭈 하하 하? ?? 이거 참... -_- 안녕하십니까 안됩니다
ㅇㅅㅇ 으르릉... 나, 나! (정색) 깔깔 아니야!! 뿌잉 메~
안녕하십니까! 흐응? 흐으으응?! 척! 칫.. 좋-았어! 엥? 후에엥-!!
칫 엄숙하고 근엄하고 진지하다 믿습니다 내 안의 ...가 깨어난다 영업 중 할많하않 충격! 공포! 둠칫 둠칫 두둠칫
파이팅!! 고마워~ 졌어... 히힣 극대노 미안! 거울 앞에서 자의식 과잉된 십대 라이언
저는 지금 극공입니다. 훠이훠이 하.하.하. 매우 화가 납니다. 총기 손질중입니다. 저와 한 판 붙어보시겠습니까? 당신에 대한 정확한 진단 안돼!
뭐가 궁금하죠? 축하드립니다. 너에게는 뭐든 주고 싶어. 칭찬 드립니다. 대-단하십니다. 내겐 보여, 너의 죽음 당신을 믿습니다. 이런 미래는 싫어!
감사합니다. 기쁩니다. 축하합니다. 칭찬해 드리죠. 놀랍군요. 심기가 불편합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매우 화가 나는군요.
짝.짝.짝.짝 고마워... 멋있어... 지금 이게 뭐하시는 거죠? 대다나다 히에엑... 헉! 깜짝 놀랐습니다. 그만해!!!!!
옳소! 감탄했습니다. 흐음 후회할거요! 감사합니다. 놀랐습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정색) 축하드립니다. 칭찬해 드립니다. 놀랍군요. 매우 화가 나네요. 큰 충격입니다. 놀랍군요.
이럴수가... 감히! 네가! 아니?! 장하군! 응?! 좋다! 그건 아니다! 고맙다!
감사합니다 잘 못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매우 화가 나는군요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좌절상태입니다 감탄했습니다 칭찬합니다
멋지군! 좋았어! 하하! 축하하오! 아아.. 5분전인데. 커피한잔 하겠소?
승리의 정유년! 정의로운 새해복! 극.한.공.성. 복! 받아랏! 음~ 직장인의 정석
많이 배웠습니다! 대단합니다! ?!! 축하드립니다 뭔가.. 부족해요 짝짝짝! 각오하세요! 으윽!
성탄의 축복을~! 메리 X-MAS~! 화이트 크리스마스야 해피~ 크리스마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성탄이구나~
Good! Thank U Missing U Useless It's pretty good Oops WHY! Please wait
멜빈 미이라와 고스트 제피 할로윈에는 카를로스호박 히카르도의 사탕 탄야의 마녀 분장..? 잭-슈타인 강시 루시
기자님의 감탄사 : 호-오! 기자님의 일과 : 신문 보기 기자님의 사과 : 이거 실례! 기자님이 놀라면 : 어이쿠! 기분이 좋아 보이는 잭 기분이 나빠 보이는 잭 천진난만한 잭 상큼한 인사를 날리는 잭
좋군요! 좋은 시간 되소서 Merry 추석~! 우와~! 호~오! 가득해요~! 짱인데! 품위있군
Chu~♡ 파이팅! 우와앙.. 졌어 ㅠㅠ 이겼다! 흐~음? 뜨헉! 돼.. 됐거든! 사.. 살쪘..!
훌륭합니다 궁금하네요 에구머니나! 슬프네요... 경멸스럽군요.. 후훗~ 뭐라고 하셨죠? 이, 이럴수가...!
아이작의 멋진 모습 이글이라 샤샤샤~ 트리비아 슬라이딩 시바 포는 달린다 까미유도 달린다 라이샌더 달린다 마를렌 점프! 샬럿 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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