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글엘리] Forest Of The Pi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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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14 03:15:29
BGM 들으실 분 클릭 (개인적으로는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깊은 숲속은 밖에서의 따가운 빛이 나뭇잎을 통과하면서 부드럽고 따스한 빛으로 변하고 투명하게 물처럼 차올랐다. 나비가 유영하듯 춤을 추고 불어온 실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질인다. 마치 육지에서 바다 속을 걷는 기분이 든다. 소녀는 노란 나비를 길잡이 삼아 따라갔다. 자연이 만들어놓은 흙길을 따라 토끼 걸음으로 깡충거리던 소녀의 귓가에, 숲을 지키던 새들의 노랫소리가 아닌 맑은 피아노 선율이 들렸다. 만약 아이가 아닌 다 큰 어른이었으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겁부터 먹고 가던 길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에 이제 막 나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은 소녀는, 한 번 더 생각해서 위험을 차단하는 요령 같은 게 없었다. 그저 보고 들은 것 그대로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아름다운 소리에 발걸음이 앞섰다.
막 샤워를 하고 나온 것처럼 산뜻한 피아노 선율에 이끌려 소녀가 다다른 곳에는 덩그러니 놓인 피아노를 구경하듯 나무가 빙 둘러싸여 있었고, 긴 은발을 대충 묶은 남자가 흙과 꽃가루가 소복하게 쌓인 나무 의자에 홀로 앉아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남자는 다행히도 소녀가 너무나 잘 아는 얼굴이었다.소녀는 피아노를 치는 사람을 힘차게 부르며 뛰어갔다.
“이글 아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중간까지 치던 피아노를 멈추고 고갤 돌린 남자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 하고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뭐야?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거야?”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을 짓던 남자는 소녀를 안아 올렸다. 한두 번 안아준 솜씨가 아니었다. 소녀는 바동거리더니 피아노 근처에서 내려주길 바랐다.남자는 의자를 대충 털어주고 소녀를 피아노에 앉혔다.
“아찌 피아노 뚱땅 할 줄 알아?”
“아니, 몰라.”
“아까 쳤잖아.”
“하하. 봤어?”
그럼 꼬맹아, 우리 비밀 하나 만들까? 남자가 말하자 소녀는 입을 조그맣게 벌리고 동그란 눈을 크게 떴다. 신나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비미일! 응! 좋아! 하며 방방 뛰자 남자는 소녀를 들어 자신의 무릎에 앉히곤 피아노에 먼저 손을 얹고 그 위에 작은 손을 올렸다. 소녀는 작은 고갤 들어 남자를 바라봤다. 평소보다 훨씬 기분 좋아 보이는 남자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소녀는 발을 휘휘 저으며 소리에 집중했고 남자는 간단한 곡부터 치기 시작했다. 남자가 건반을 누르면 소녀의 손이 같이 따라서 내려간다. 까르르 웃는 소리가 새소리와 피아노 소리 사이에 스며서 마치 한 곡처럼 들린다.
“아찌! 아찌! 엘리 피아노 너무 재밌어!”
“그래? 하긴, 나도 어릴 땐 다른 수업보다는 이걸 가장 좋아했으니까.”
“집에 가서 나이오비 언니한테 가서 피아노 사달라고 하자!”
“안 돼, 아까 여기서 피아노 친 거 비밀하기로 했잖아. 그리고 연합에 그럴 돈이 어디 있어?”
“후이잉…….”
남자가 이 일을 비밀로 하자고 한 건, 그저 자신이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연합 사람들에 들키는 것이 싫어서였지만 피아노를 사줄 돈이 연합에 없는 건 사실이었다. 있어도 둘 곳도 없고,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사람이 연합에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이가 조르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현실적인 말을 내뱉은 것은 남자의 실수였다. 여린 목소리가 시무룩한 소릴 내자 그는 멋쩍은 듯 뒷머릴 긁다가 혼잣말을 하듯 조용히 말했다.
“……뭐, 가끔 같이 여기 와서 알려주면 되지 않나.”
“진짜!?”
“아 깜짝아! 그래, 인마.”
남자는 아이의 큰 소리에 놀란 가슴을 쓸며, 아까 소녀에게 듣지 못 한 대답을 듣기위해 한 번 더 물었다.
“너 근데 여기엔 어떻게 온 거야? 누가 데려다줬어?”
“나비가 데려다 줬어!”
“나비? 무슨 나비?”
“노오란 나비……. 아! 저기 있다!”
소녀가 가리킨 곳엔 이름 모를 들꽃 위에 휴식을 취하려 앉은 노란 나비가 보였다. ‘말도 안 돼. 무슨 나비가…….’ 라고 생각하며 소녀를 바라보자, 벌써 꽃 근처로 달려간 소녀 곁에서 나비가 도망가지 않고 춤을 춘다. 꿈인가.꿈이 아닐지도 모르겠고, 꿈이어도 상관없지만. 이게 환상이라면 당연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온 숲에 피아노가 놓여 있는 것부터 자신이 연주하다가 소녀를 만나게 된 것까지 전부 누군가에게 털어놔도 쉽게 믿어주지 않을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소녀는 한참이나 그 나비와 도란도란 이야길 나눴다. 사실 나비는 대답하지 않으니 혼잣말이었지만. 남자의 눈엔 소녀가 바란 것처럼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보였다. 알 수가 없네. 고갤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파란 하늘이나 구름이 아닌 떡갈나무와 전나무 잎이 우거진 숲의 천장이 보이고 그 작은 틈으로 새어나오는 빛이 비처럼 쏟아졌다.
“……따뜻해.”
혼잣말을 하던 남자가 깜짝 놀라 제 입술을 만졌다. 와, 내가 말한 거야?내 입으로? 정신을 차려보니 소녀가 피아노 의자에 올라와 남자의 무릎 위로 다시 올라갔다. 점점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한 번도 감상에 빠져 혼잣말 같은 걸 해본 적 없는 그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정신이 반쯤 나간 남자가 재밌는지 소녀는 그의 볼을 손가락으로 콕콕 찍으며 아찌! 뭐해! 했다. 그 소리에 겨우 정신이 들어서 바라보니 아까 보지 못 했던 하늘은 소녀의 눈동자에 있었다.
“……아, 별거 아냐. 졸린가봐, 아니면 지금 자고 있다던가.”
“아찌도 낮잠 자는 시간이 있어? 엘리는 아직 멀었어!”
소녀가 계속 피아노를 치고 싶다며 졸랐고 남자는 그 성화를 못 이기고 몇 번이고 다시 피아노를 연주했다. 하얗고 가느다란 긴 손가락 위에 있는 작고 통통한 손가락을 바라보며 계속 피아노를 치던 남자가 갑자기 연주를 멈추고 소녀를 뒤에서 꼭 안았다.
“아찌?”
“너 정말 작구나? 게으름 피우지 말고 무럭무럭 빨리 좀 커라.”
남자는 아이가 이렇게 작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품에 넣지 않을 수 없었다. 가슴께에서 작은 말소리가 옹알거리는 것도, 햇빛이 탐을 낼 정도로 눈부신 금발도, 아이에게서만 나는 기분 좋은 향까지 전부. 그러나 사랑스러움을 느낀 순간 시퍼런 불안도 함께 엄습했다. 소녀의 빠른 성장을 재촉하는 그의 말에는, 작은 만큼 쉽게 망가지거나, 홀연히 사라질 것 같은 이 불측지연에서 자신을 꺼내달라는 간절함이 뚝뚝 떨어졌다.
“그럼 엘리 커서 아찌랑 결혼해서도 피아노 이렇게 쳐줄 거지?”
“어~ 그래그래……. 뭐!?”
당황한 손끝에서 어긋난 피아노 소리에, 그들 곁에서 춤추던 새와 나비가 쿡쿡 웃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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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미션 주신 B 님 정말 감사합니다! 숲을 자세히 묘사하는 게 처음이라 두근두근 했어요. 부디 맘에 드시길 바라요.
- 소재는 본계에서 별 생각없이 쓴 이 썰로 시작한 것인데, 단편적인 내용만 있었고 크게 잡아 놓은 것은 따로 없었어요. 그러다가 지인과 함께 썰을 풀면서 살을 좀 붙였습니다. (썰1)(썰2)
- 사실 이 글은 shall we dance?와 한 묶음처럼 보일 수 있게 짰어요. 홀로 있는 이글에게 가는 엘리라는 점이 비슷해서 전체적으로 비슷한 느낌으로 써보려고 했고... 음, 아마 이 이후로도 몇번은 저런 식의 엔딩으로 글을 쓰게 되지 않을까요? 시리즈라고 하면 민망하지만... 그런 느낌으로^^;
- 그림을 보는 것 같은 감상을 받으셨길 바라며,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 개인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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