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글나비] 귀로(歸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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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7 02:23:20
1. 안
"이글, 이번에 임무 가게 됐어."
그에겐 그다지 놀라운 말의 축에는 들지 못했다. 임무란 것이 그리 드문 일도 아니거니와, 벌겋게 달아오른 취기가 '임무'라는 것을 별 일 아닌 것 처럼 오히려 희석시켜버렸던 때문이었다. 또 '임무' 얘기는 오랜만의 술자리에서 할 만한 유쾌한 말은 아닐 지 몰라도, 꼭 못 할 말까지는 되지 않았다.
"그러셔? 뭐....."
이글은 꾹 닫고 있던 입을 겨우 열었지만, 그 외에 더 할 말은 찾지 못하고 말 끝만 줄였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부츠모양의 맥주잔을 다시 입에 대었다. 맺지 못하고 맥주와 함께 삼킨 말 중에는 '잘 다녀오셔' 같은 형식적인 인사도 있을 것이었다. 사실 그런 말에 더 붙일만 한 대답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반사작용처럼 튀어나오는 마음 없는 말들이 전부일테지만ㅡ그러나 애인은 그런 형식이라도 원했는지도 모른다ㅡ. 나이오비는 다소 성의없는 그의 태도를 굳이 책망하지는 않았다. 다만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는 푸 짧은 한숨을 내쉬며 발로 그의 구둣발을 툭 찼을 뿐이었다. 이글은 목구멍에 흘러드는 맥주와 함께 그녀의 허약한 발길질을 느꼈다. 평소 같다면야 저기압의 낌새를 눈치채곤 시덥잖은 농담이라던가 저급한 장난질로 그녀의 기분을 조금 풀어주었을지도 모를 그 이지만, 지금의 그는 많이 취해있었다. 그는 잠시 무언가 망설이더니, 이내 그만두고는 다시 잔을 입에 붙였다. 나이오비는 평소같지 않게 얌전한 그에게 실망한 듯 식탁 위로 푹 엎어졌다.
"우리 연애한지 얼마나 됐지?"
느닷없이 날아온 그녀의 질문이었다. 이글은 맥주를 마시다 말고 잔을 입에서 떼었다. 이 뜬금없지만 나름 중요한 질문에 무언가 대답을 하려고는 했지만, 야속하게도 답은 떠오르질 않았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입에서는 아, 또는 어, 등의 긴 음 뿐이었다.
"모르면 됐어. 마시던거나 그냥 쳐 마셔."
나이오비는 더 이상 뻔한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는 고개를 돌렸다. '쳐 마셔'에서 나오는 독기어린 어감이 이글의 심장을 다시 움켜쥐었다. 그래도 여전히 답은 생각나지 않았다. 이는 그가 특별히 기억력이 나쁘다거나 애인에게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얼마 안 남은 제정신을 바득바득 긁어모아도 도무지 기억을 할래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조금이지만 아주 달랐다. 그는 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내용물을 기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답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 그 사실만이 기억 속에 아로새겨졌을 뿐이었다. 예컨대, 누군가 당신에게 10년 전 졸업식 때 당신 옆에 선 친구를 기억하고 있느냐, 같은 질문에 답하는 일 같은 것이다. '알고 있지만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의 상태를 설명하기에는 가장 좋은 문장이다.
약 30센티의 간격을 두고 둘 사이에 익숙하지 않게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이글은 이 어색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색다른 몸부림으로, 고개를 돌려 시간을 보는 것을 택했다. 그런데 펍의 시계는 고장이라도 났는지, 분명 일러도 새벽 3시 쯤은 되었을 텐데 시침은 7을 가리키고, 분침은 1을 가리킨 채 초침은 8에서 정지해 있었다. 오래전에 수명을 다한 듯 초침은 미동의 기미조차 없었다. 왠지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또다시 애인의 음성이 나지막히 귀에 울렸다.
"이글."
"......왜?"
이번엔 제 때였다.
"내가 만약 못 돌아오면, 어떨거 같아?"
그저 짙은 취기로 튀어나온 말일지는 모르나, 그녀는 아마 무언가를 직감한 것 같이 취한 사람 답지 않게 말투가 굳어있었다.
".......뭔 소리야?"
이글은 어느새 한 잔을 비워냈던 참이었다.
"나 이번 임무, 죽을지도 모른대."
이글은 하마터면 마시던 맥주를 그대로 뱉어낼 뻔 했다. 그녀는 애정, 동정-혹은 적어도 관심 비슷한 것을 갈구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여지껏 수없이 임무를 나가면서도 한 번도 꺼내지 않던 말을 갑자기 꺼내는 것이 그 증거였다. 하지만 이글은 다짜고짜 죽음부터 얘기하는 그녀가 오히려 불길했다. 그녀가 원하는 애정보다는 무서운 상상이 엄습했다.
"...씨이, 새삼스럽게 뭘...... 재수없는 소리 하지 마!"
그는 그녀에게 대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각종 소리로 떠들썩하던 펍에 그와 그녀 주위로 정적이 흘렀다. 이글은 곧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큰 소리에 되려 무안해졌는지 다시 그녀의 눈을 피하고 맥주를 입에 대며 한마디만 흘렸다.
"죽긴 무슨......"
그 라고 그녀의 눈빛의 의미를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닐 것이었다. 다만 그녀가 선택한 단어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지극히 당연한 공포를 들추어내었을 뿐 이었다. 항상 죽음을 마주보고 있는 자들의 유리같은 공포가 있었다. 그들은 죽음의 공포에 있어 둔감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유리는 깨지기 쉬워질 뿐이었다. 그에 따라 그들은 공포를 저 한켠에 밀어놓는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요컨대 그녀는 고의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그런 것을 들추어 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글의 급작스런 화는 그리 이상하게 여길 만한 것도 아니었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화를 내기에는 그 대상이 바르지 못했음을......-그는 후에야 후회하게 되었다. 나이오비는 그런 이글을 구름 낀 눈으로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옆모습만이 비쳐보이는 그 눈에서는 오히려 어떤 원망도 없었다. 그녀는 애써 시선을 피하는 그를 계속해서 쳐다보다, 또 대뜸 입을 열어,
"이글."
하고 그를 불렀다.
"아, 왜 또. 귀치않게......"
조금 전의 일로 조마조마하던 이글은 내심 그녀가 화를 내지 않고 말을 걸어준 것에 기뻤으나, 내색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 생일은 언제야?"
"뭐?"
이글은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몇 번을 머릿속에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죽니 어쩌니 하다가 갑자기 어린애처럼 투정이나 부리는데 그도 그럴 만 했다.
"내 생일은 언제냐고."
나이오비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푸, 취했구만......"
이글은 픽 웃고는, 다시 다시 채워진 잔을 입에 대었다.
"내 생일은 언제야?"
맥주가 입술을 적시기도 전에 다시금 질문이 날아왔다. 이번엔 더 큰 목소리로, 재촉하듯이었다. 알코올에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표정은 조급하기까지 했다. 이상스러웠지만, 이글은 다시 답해주기로 했다. 까짓 것 어려울 것 뭐 있다고.
"마, 내...가 그런 것......두 모를까봐.."
취해서인지 말은 제 길을 잃고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당연히"
하지만 자신만만하던 이글은 다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다시 그 증상이었다.ㅡ알지만, 결코 기억나지 않는ㅡ
"당연히?"
"당연히......"
나이오비는 한 손으로는 턱을 괴고 그의 답을 기다리고만 있었다. 마치 미지막 기회를 주겠다는 듯. 하지만 그는 잔만 멍하니 잡고 있을 뿐, 아무 말도 없었다.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부엉ㅡ' 갑자기 부엉이가 울었다. 푸드덕 홰를 치는 소리가 그의 귀를 뚫고 지나갔다.
그의 고개가 점점 숙여지자, 나이오비는 더 기다리지 않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모르면 됐어."
대답 역시 아까와 다르지 않았다. 나이오비가 다시 고개를 돌리자 이글은 답답함에 머리를 거칠게 벅벅 긁어댔다.
'제기, 술을 먹더니 없던 지랄이람.'
그는 이 말이 목구멍까지 쳐올라왔지만 겨우 삼켜내었다. 이런 사소한 것 조차 대답해주지 못하는 것에 조금이나마 미안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럴 땐 잠자코 들어주다 뻗어버리면 그 때 업어 데려다주면 그만이리라, 생각하고 이글은 그저 그녀가 뻗기만을 기다리며 술잔만 들어 연거푸 들이켰다. 그러다가 고개를 틀어 나이오비 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나이오비는 어느새 또 두 눈을 말똥히 뜨고 너무도 빤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이오비의 검은 눈동자 안에는 심해(深海)가 있었다.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깊은 어둠. 그 안에 비치는 이글도 역시 잠겨들고 있었다. ㅡ어느새 제 목까지 물이 차오르는 것을, 이글은 느꼈다. 시간이 없다, 재빨리 그녀에게 무슨 말이라도 걸어야 한다,고 느꼈다.
"그...그래서. 어디...로 가는데..."
이 상황에서, 제법 무난하면서도 괜찮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나이오비는 그 질문에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를 말하려다, 다시 입을 닫았다. 꾹 입술을 물었다. 거기서 잊고있었던 두려움이 비쳐보였다. 한참을 뜸을 들이더니 그녀는 입을 열었다.
"......델피."
짧은 2음절의 단어지만, 이글의 손을 멈추게 하는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델피, 그녀의 피눈물이 마르지 않을 곳, 그녀가 평생 지고 가야 할 짐이 남은 곳. 이글은 누구보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녀의 앞에서 절대 꺼내지 말아야 할 말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오도록 했던 것을 후회했다. 그 두 음절을 꺼내는데, 그녀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스쳐갔던 것일까. 그 주저하는 시간 동안 그녀의 마음은 몇 번의 불길을 지났던 것인가. 나이오비를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다시 얼굴을 묻고 엎드려 있었다. 어깨를 조금씩 들썩이는 걸 보니 아마 우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그녀를 그런 곳으로 보낸 윗쪽의 결정에 분기충천하여 불같이 화를 내어야 했는가, 아니면 잠자코 말 할 수도 없는 두려움에 휩싸인 그녀를 가만히 두어야 했는가? 어느 쪽이든 간에 지금 그녀에게는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는 순전한 자기만족 뿐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사실 하나는 확실해지고 있었다. 그저 못 본 척 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그녀를 사랑함에 따르는, 이를테면 책임이었다. 지금 이글이 해야 할 것은 그녀와 나누는 모든 것에 있는 의무였다.
"이...글.."
그녀는 고개는 여전히 들지 못한 채 말을 냈다. 겨우 이어지는 '이'와 '글' 사이에 방울져 흐르는 눈물이 있었다.
"이글......"
그녀는 계속해서 그의 이름을 불러댔다. 단지 눈밑으로 차오르는 그것을 삼키기 위해 아무 말이나 꺼내는 건지도 몰랐지만, 그에게 들리는 그 말의 의미는 사뭇 달랐다. 그것은 그녀가 보내는 구조신호처럼 들렸다. 잠겨 있는 것은 그녀였다. 헤어나올수도 없이 빠져드는 수렁에 턱까지 잠겨서는, 날 좀 구해달라고, 날 좀 살려달라고......그의 상상으로 만들어낸 그녀의 목소리가 머릿벽을 세게 치며 웅웅 울려댔다.
"이글......"
그는 휘청이는 정신으로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에게 절뚝이며 다가갔다. 취기에 절어있는 데다가 오랫동안 앉아있다 갑자기 일어나 어지럼증이 일었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그녀의 모습은 이중 삼중으로 겹쳐보였다. 몸은 천천히 그녀에게 가까워졌다. 그의 이름이 그녀의 눈물 절은 입에서 여섯번 째로 불리기 전에, 그는 그녀 앞에 섰다. 나이오비는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도 더 나을 것 없는 낯으로 그녀를 마주보았다. 두 얼굴은 말 없이 한참을 마주보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한 얼굴이 다른 얼굴에게로 가까워졌다.
그 때였다. 갑자기 삐ㅡ익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처음에는 한 번, 다음 순간 세 번, 그 다음 순간은 두 번 더 빠르게 삐ㅡ익. 죽은 듯 멈춰있던 시계가 세차게 돌아갔다. 웅웅거리는 소음이 바를 가득 채웠다. 그녀와 그가 남아있는 의자 옆 부터, 바닥이 채를 썬 듯 얇게 갈라지더니 혓바닥을 낼름거리는 실뱀들로 변해 빠르게 흩어졌다. 벽과 탁자는 나뭇결들이 검은 날개로 변하더니 수백마리의 까마귀가 되어 검은 깃털을 흩뿌리며 공중으로 홰를 치며 흩어졌다. 나이오비는 두 손으로 이글의 어깨를 꽉 잡더니 갑자기 세게 밀쳐냈다. 이글은 영문도 모른 채 뒤로 밀려나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를 붉은 1인용 벨벳 소파 위로 쓰러졌다. 나이오비의 위로 노란색 스포트라이트가 팍 내리쬐었다. 갑자기 배경은 바뀌어 화려한 극장. 그리고 그녀의 애시린 독무대. 그녀는 돌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기차는 멀리 떠나고 당신 역에 홀로 남았네
가슴 속에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었네
앉아만 있었네
그녀는 단 세 소절 만에 노래를 끊었다. 그리고 눈물 고인 눈으로 그윽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에겐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갑자기 바뀐 이 무대가, 이유도 없이 그녀가 부르는 노래가, 또 눈물 고인 눈이 모두 자연스러운 일련의 흐름이었다. 그녀가 그에게 느리게 다가왔다. 스포트라이트는 그녀를 따라왔다. 그녀가 한 발짝, 한 발짝 내딛을 때 마다 진흙을 밟은 것 처럼 레드카펫에는 깊은 발자국이 남았다. 그녀의 눈 밑에 눈물처럼 장식된 피어싱이 빛을 받아 그의 눈이 부시도록 반짝거렸다. 피어싱은 진짜 눈물이라도 되는 양 서서히 턱으로 흘러내렸다. 그녀는 그의 앞에서 멈추었다.
남긴 채 앉아만 있었네
가슴 속에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었네
그녀는 남은 두 소절을 마저 불렀다. 이글은 평소 나이오비가 썩 노래를 잘 하는 편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노랫소리 만큼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머릿속을 계속 맴돌아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노래를 마치고, 그의 코 앞까지 얼굴을 밀착시켰다. 그는 갑자기 다가오는 그녀가 섬짓해 물러서려 했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와 그녀의 숨이 서로의 입술 사이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글."
나이오비가 속삭이듯 물었다.
"내가 누구야?"
"누구냐니. 그건 또 무슨..."
갈수록 괴상해지는 그녀의 질문을 그가 마저 생각하기도 전에, 그의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왔다. 소리를 지를 수도 없이, 극도의 두통만이 그의 머리를 파먹고 있었다. 눈 앞이 흐려지고, 그녀의 모습이 점점 사라져갔다. 귓 속이 날카롭게 깨지고 베이는 소리로 가득 메워졌다. 사이로 부엉, 부엉, 부엉.... 이유없이 들리는 빌어먹을 부엉이 소리, 소리, 그 소리!
2.밖- 허나 아직 안 일지도 모른다-
이글은 눈을 떴다. 누군가 자신을 흔들고 있었다. 빠르게 불리는 자신의 이름에 누군가 자신을 깨웠음을 실감했다. 또한, 자신이 깨었다면 역시 여태까지는 꿈이었다는, 것을. 미묘하게 서늘한 느낌에 그의 몸에 소름이 돋아 살짝 떨리었다. 그러자, 그 떨림을 신호로 수많은 기억의 장면들이 차르르 플래시빽처럼 스쳐지나갔다. 이글은 눈을 뜨고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통 흰색에 초록색, 흰 옷을 입은 사람들. 급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 삐-삐-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울리는 빨간 기계음...... 누가 보아도 병원이 분명했다. 그를 깨운 사람은 루이스였다. 그가 일어난 것을 확인하자, 루이스는 그를 원망스럽게 밀쳐냈다. 차가운 병원의 콘크리트 벽에 그는 살을 비볐다.
"속 편해서 좋으시겠어. 새끼......"
루이스답잖게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어찌보면 억울할지도 모를 말이었지만, 아니- 라고 어떤 반박을 하기도 전에 루이스가 먼저 말을 채갔다.
"나이오비 수술 끝났대. 가 봐."
그는 깼지만, 아직 깨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잠시 멍하니 안과 밖을 드나들었다. 루이스는 기가 차다는 듯 뒤돌아섰다. 그리고 한 마디를 뱉었다.
"보호자라는 놈이..."
보호자, 그래, 보호자. 그는 보호자였다. 환자 나이오비의 보호자. 그 단어에 또렷이 정신이 돌아왔다. 전날 한 밤중, 그는 피투성이가 된 그녀를 안고 이 병원에 뛰어들어왔고, 그 다음엔...... 이글은 왜인지 잔뜩 부은 눈을 석석 비볐다.
"718호실."
루이스가 던지듯 말했다. 이글은 곧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챘다. 뛰었다. 718호실이 어느 쪽에 있는지도 모르는 채, 뛰었다. 그런다 해서 결과가 달라질리도 없다만-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가 뛰는 것은, 그는 그가 원하는 결과만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결과를 당장에라도 눈 앞에서 사실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병실 문을 열었을 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그녀만 수없이 생각했다. 희망보다 강한 믿음이 그의 눈가리개가 되었다. 한참을 달리던 이글은 어느새 병실 앞에 다다랐다. 은빛으로 멋스럽게 빛나는 글자, 7,1,8. 그리고 확실하게 써져 있는 이름, Inge Niobe. 그렇게나 스스로 주문을 걸었는데도, 막상 그 글자를 보자 한켠에 숨겨두었던 의심이 불쑥 튀어나와 문고리를 돌리려는 손을 잡았다. 하지만 열지 않을 수는 없었다. 혹시나, 혹시나 그 너머에 믿었던 그녀가 있다면...... 그는 한 번 침을 삼키고, 문고리를 돌렸다. 천천히 문을 젖혔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가 믿었던 풍경은 찾아볼 수 없었다. 금테 안경을 쓴 의사의 표정은 무슨 말을 먼저 꺼낼지 고민이라는 듯 굳어있었다. 그녀는 웃고 있지도, 손을 흔들지도, 일어나 있지도 않았다. 다만 그녀의 팔이며 몸에 꽂혀있는 수 개의 링거들만이 '우리도 노력하고 있어요,' 라고 치졸한 항변이라도 하는 듯 거꾸로 서서 약물만 방울방울 흘려보내고 있었다. 이글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럴수록 그는 다음 장면을 보는 것이 두려워졌다. 발걸음은 무거워져 다음 발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가까스로 그녀 앞에 도달했을 때, 그는 그녀의 반듯이 감긴 눈을 보았다. 항상 밝았지만, 속으론 까맣게 타들어가던 호박빛 눈이, 어느 때 보다 편안하게 감겨있었다.
"저,"
옆에 서 있던 의사가 정적을 깼다.
"잉게 나이오비 씨 보호자 이글 홀든 씨, 맞으십니까?"
이글은 멍하니 제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다가, 뒤늦게 알아차리고 아, 네... 하며 말을 더듬었다. 의사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흔히 말하는 능력 폭주가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일단은 수술이 잘 돼서 생명에는 큰 지장은 없겠습니다만....."
의사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그는 온 신경을 기울였다. 의사의 말의 마지막 '만'이란 단어에서 그의 얼굴에 불안함이 번졌다. 의사는 여전히 조심스럽게 다음 말을 고르고 있었다.
"그렇습니다만..... 아무래도 후유증이 조금, 남을 것 같습니다."
"후유증?"
그가 되물었다.
"네. 그... 그러니까......"
의사는 무엇이 무서운지 자꾸 뜸만 들이었다.
"그, 기억에 조금, 문제가 생길 것 같습니다. 운 나쁘게 머리를 다쳤어서 말입니다...아, 물론 살아난 것만도 다행이라 할 지 모르겠지만..."
기억상실. 그 단어가 머릿속에 스침과 함께 그는 만감이 교차함을 느꼈다. 그녀에게 좋은 기억이란, 아마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남겨두어 좋을 기억들이나 있었을까. 사람을 잃고, 아이를 잃었다. 불가능한 사랑을 했고, 그와 사랑을 하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온전히 그에게 가있지 못했다. 그녀의 인생 곳곳 피눈물이 묻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기억을 잃었음에 꼭 그가 슬퍼해야만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 정도로 그녀에게 소중했던 옛날들이었을까. 그녀에게 과연 안 된 일이었을까. 차라리 다행으로 여기는 것이 옳지 않을까ㅡ한편으로는, 그녀를 이루고 있던 것은, 그녀는 바로 그 끔찍했던 기억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런 그녀를 사랑했던 것 일지도......그렇다면 그가 눈 앞에 둔 것은 나이오비가 아닐지도 몰랐다. 아마 텅 빈, 그저 껍데기만 남아있는 하나의 실루엣에 불과했을지도. 다시 일어난 그녀를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단순히 그녀의 껍데기만을 사랑했다는 걸 반증하는 것 일지도.
형용하기 어려운 복잡함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그는 그대로 굳어, 입술도 한 번 떨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 때였다. 다시 깨지 않을 것 처럼 누워있던 나이오비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반 쯤 정신을 놓고 있던 이글도 그 장면을 놓치지는 않았다. 재빨리 무릎을 꿇고 누워있는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녀의 그새 더 여윈 손을 잡고, 다시 그 손에 움직임을 느낄 수 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몇 번 더 까딱거리더니, 이내 감긴 눈을 조금씩 떴다. 그리고 으음, 하며 짧은 신음-그것은 아마 그녀의 새로운 삶을 불러오는 신호음일지도 모를-을 뱉었다.이글은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흔들었다. 나이오비는 한 손을 뒤로 짚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간호사와 이글이 부축해주지 않았다면 힘이 없어 몇 번이라도 다시 쓰러졌을 것이다. 간호사는 그녀의 등에 베개를 괴어주었다. 이글은 계속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정신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은 듯 멍한 눈빛으로 이 낯선 곳을 일단 죽 둘러보았다. 모두 낯선 곳, 모두 낯선 사람들. 그리고 제 팔에 꽂혀있는 링거 바늘들, 제 손을 잡고 있는 웬 낯선 남자. 그녀에겐 이것들이 어떻게 다가왔을지.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손을 잡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곤 두 손을 가슴께에 모으곤 다시 불안한 듯 숨을 빠르게 내쉬며 주변을 계속 두리번 거렸다.
"여....여긴..."
그녀의 위축된 목소리에서 짙은 불안감이 비치었다.
"여긴 병원입니다. 혹시, 무엇 기억나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의사는 펜과 수첩을 빼들고는, 얼른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의사와 이글을 번갈아 보았다. 그녀는 퀭한 눈만 이리저리 굴리며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지금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의사는 펜으로 무어라고 계속 끄적였다.
"그...글쎄요."
그녀는 뒤늦게 한 마디를, 답이라고도 할 수 없는 말을 겨우 꺼냈다.
그러자 의사는 또 펜을 움직였다. 이글은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다만 지켜보고만 있었다. 손을 잡으면 아까처럼 뿌리칠 것 같아 조심스러웠다.
"저기, 혹시 이 분은......"
눈치만 보던 나이오비가 이글을 가리키며 물어왔다. 의사는 다시금 그 당황을 표하며 말을 찾고 있었다. 이글이 그 틈을 비집고 말을 가로챘다.
"나이오비."
나이오비는 흠칫 놀라 더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그 이름조차 낯설었던 모양이었다.
"나이오비......?"
그녀가 되물어왔다. 어떤 천진함마저 묻어나오는, 저리도 완벽한 무지의 극(極).
"잉게 나이오비."
그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울 것 같았다. 그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고 입속에서 계속 되뇌었다. 잉게 나이오비, 잉게 나이오비..... 그런 그를 바라보는 그녀는 당황할 뿐이었다.
"그거...당신 이름인가요?"
나이오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웃을 수 없는 아이러니, 그녀는 갑자기 자신의 손에 손을 포개어 오는 이 남자가 전에 무슨 각별한 사이였다고는 겨우 직감한 모양이었다.
"아니...."
그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의사에게 잠시만 나가달라고 부탁했다. 무언가를 아직 열심히 적던 의사는 별다른 이의 없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의 눈빛을 피하면서, 그를 전에 한 번에라도 본 적이나 있었는지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무엇을 사랑했던 것일까. 그녀의 눈?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그 무언가, 그녀의, 라는 접두사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 그는 분명히 뜯어말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라는 것만이 너무도 명확했기에. 그 중 하나를 뜯으라는 것은 너무 잔인하다. 그는 단지 그녀로서 그녀를 사랑했던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아까 그의 고민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리고 사랑하는 그녀는 지금 눈 앞에 있다. 그가 구태여 '지금'의 그녀를 나누어 고민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아무것도 바뀐 건 없다. 그녀는 단지 온 몸에 지워지지 않는 물감들을 마구 덧칠해 있었던 것 뿐 인걸. 수학자라는 노란 물감, 사이퍼라는 주황 물감, 어머니라는 붉디 붉은 물감......이제 다 깨끗이 씻어내려지고, 완벽한 백지의 그녀만 남았다. 그는 단지 하얀 그녀가 낯설었던 것이었다. 단지 낯설음 뿐이라면, 무엇이 두려운가. 그가 이제 붓을 들면 되는 것 아닐까. 다시 그려나가는 것이다. 그녀와 함께, 그와 그녀의 색깔로, 지금껏보다 훨씬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이다. 인제는 그 바닥에 깔린 무거운 색깔을 걱정하며 덧칠하지 않아도 된다. 완벽한 백지에, 누구보다 아름다운 그림을......
ㅡ잘 되었다.
"... 정말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 거야?"
이글은 긴 침묵을 깨고 부드럽게 물었다.
"...네."
"......"
벅차올랐다. 그녀와 이제 어떻게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그럼 자기소개를 하자."
"....네?"
"자기소개를 하는거야. 처음 만났을 때 처럼."
그의 입에는 기대에 찬 미소가 번져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나이오비는 입속으로 되뇌었다.
"그래, 그 때 처럼. 그러면서 또 몇 번 우연처럼 마주치고, 대화를 하고, 같이 레스토랑에도 가고."
"..."
"그러면서 데이트를 하다가, 우리 중에 누군가가 먼저 고백하면, 그 때 다시 연인이 되는거야. 전에 하고 같이..이번엔 더 잘 할게. "
그녀는 대답할 수 없었지만, 무엇인가 하나는 확실히 알아낸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에 부스스한 미소가 띠였다. 그녀는 그녀의 손을 잡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가 언뜻 본 시계에는, 시침은 7을 가리키고, 분침은 1을 가리킨 채 초침이 8에서 9로 마악 넘어가고 있었다.
마지막 이글의 말은 @arim_002 님의 연성 소재에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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