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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P. 자력 능력자관조의헤나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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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lipse Vol.49 유린된 로고스 정보제공자 : 마테오 디아스 (대학원생, 비능력자)

메트로폴리스에 여기저기 빛기둥이 치솟고 괴물이 나타나 도시를 반파시킨 것이 엊그제 같은데
헬리오스와 지하연합을 위시한 능력자 단체의 헌신과 열의 덕분에 우리 사회는 조금씩이나마 적응해 나가는 듯합니다.
마치 작용·반작용의 법칙이 적용된 것처럼 인식의 문의 그림자가 나타난 후 인식의 문의 그림자를 지우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이들이 가진 능력은 기존에 우리가 알던 능력의 유무 혹은 강약과는 별개로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졌죠.
전 세계에 나타나는 문의 그림자를 지우는 역할을 맡은 헬리오스는 문의 그림자를 지우는 능력을 가진 자들을 ‘페넘브라 리더’(Penumbra Ridder),
일명 페넘 리더로 명명하고 이들을 찾는데 전력을 쏟고 있습니다.
최근 헬리오스에 합류한 헤나투 라우렌시오 나시멘투 역시 페넘 리더입니다. 명망 있는 인류학 교수이며, 능력자이기도 하죠.
본지는 헤나투 교수의 제자 한 명과 접선에 성공했습니다. 과연 헤나투 나시멘투는 어떤 사람일까요?

내가 인류학을 전공하게 된 것은

내게는 나이 차가 좀 있는 형이 있는데, 어른들 앞에서는 얌전하게 굴었지만, 사실은 말도 안 되는 장난꾸러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형은 능력자였고, 덕분에 아주 힘이 셌기 때문에 형한테는 무서운 것이 없었던 것이다.
덩달아 사라와 나도 형만 믿고 마음껏 개구쟁이로 지냈다. 형은 항상 우리의 든든한 뒷배였다.
그랬던 형이 변한 건 막내 여동생이 태어난 후였다. 갓난아이를 보면서 능력자인 형은 뭔가를 느꼈던 것일지도 모른다.
막내가 자신과 같은 능력을 타고 태어났다는 것을. 자신이 이 아이의 앞길을 걸어야만 한다는 것을.

고작 9살이던 형은 그때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이후 줄곧 성실하게 무도의 극을 향해 달리면서 막내를 이끌고, 막내가 더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디딤돌을 자처하던 형은 어느 날 갑자기 장래희망을 발표했다. 갑자기 종합대학에 진학해서 지질학을 공부하고 싶단다. 지층이 자기를 부른단다.
기가 차서 나도 부모님도 말이 안 나왔다. 하지만 형은 어려서부터 한다면 하는 성격이었고, 기어코 도장 깨기 하듯 학문의 전당에 달려들어 원하던 성과를 이뤘다.
아버지는 은근히 형이 본인의 뒤를 잇길 바랐던 것 같았지만, 형이 박사님이 되어 귀향하자 누구보다 기뻐하셨다.
사업은 꽤 잘 되는 편이었고, 아내는 강했으며 자식이 다섯이나 되었으니 아버지에게 부족한 건 박사학위뿐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형이 지질학자가 된 것은 내게도 꽤 충격이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나도 코닐리어스 대학에서 인류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무기력한 교수님

구부정하게 서서 쳇바퀴 굴리듯 붓질을 하노라면 내가 나도 모를 어떤 죄를 지어 대학원에 수감된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징징이 에드가가 내 지도 교수인 헤나투 라우렌시오 나시멘투 교수님께 건방지게 굴 때면 교수님도 무슨 죄를 짓긴 한 것 같았다.

“이것 보세요, 교수님. 코닐리어스 대학의 명성과 실적에 크게 기여할 기회입니다. 뭘 망설입니까?”

말본새하고는. 조교인 에드가 갤러거가 흔들고 있는 종이는 분명 로커드 마틴에서 온 세미나 초청장일 것이다.
로커드 마틴이 후원하거나 주최하는 행사에 참석해서 학술적 근거를 제시하고 사업 추진의 정당성을 높이는 일을 하도록 말이다.
애초에 에드가는 학술적 성취가 높지 않아 교수가 되긴 글렀으니, 일찌감치 경제활동에 나선 것인지도 모른다. 자기 밥그릇 찾는데 뭐라 할 건 아니지만,
오늘처럼 자신이 로커드 마틴의 화신인 것처럼 굴 때는 정말 꼴 보기 싫었다.
에드가는 교수님 앞에 편지를 턱 내려놓고는 성큼성큼 걸어 나가버렸다. 교수님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처럼 말이다.
가까이 가보니 교수님은 물끄러미 책상 위에 놓인 두 장의 편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교수님, 차 드릴까요?”

조교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며 모욕을 당해도 반박할 줄 모르는 교수님은 무기력, 그 자체였다.
얼마 전 인류학의 날 30주년 기념행사에 다녀오신 후로는 한층 더 얼굴이 상했다.
로커드 마틴의 행사에 ‘차출’되면 덕분에 공강이 많은 교수님의 수업을 좋아하는 학생들에게는 또 한 번의 희소식이 될 것이다.

“따뜻하게 한 잔 드세요.”
“고맙네, 마테오. 자네 일도 바쁠 텐데……. 지도 교수로서 자네 석사 논문을 잘 봐주지 못하는 걸 항상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시작은 했으니까 끝도 있겠죠, 뭐. 저기 교수님,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물론이지. 그래, 뭐가 궁금한가?”

헤나투 교수님 밑에서 석사 논문을 쓰는 것은 다른 것보다 교수님을 만나기 어렵다는 게 제일 문제였다.
물론 지도교수로서 해야 할 일을 해주지 못한다는 미안함 때문인지 교수님은 항상 너그러웠다.

드러나지 말았어야 했던 것

교수님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잔을 들었다. 나는 앞에 앉아 주전자를 들어서 내 잔을 채우며 말했다.

“교수님, 이 주전자, 쇠로 된 것인데 이걸로 에드가 뒤통수를 후려치시는 거 생각해 보셨어요?”
“물론… 그럼 안될 일이지.”
“하지만 교수님은 능력자시잖아요. 아마도 쇠로 된 걸 움직이는? 안 들키게 잘 때리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교수님은 경계와 불안이 뒤섞인 눈빛으로 나를 봤다.
사회적 명망이 높은 교수님이 능력자라는 게 부담스러운가 싶었지만, 교수님은 별로 자신의 능력을 숨기지도 않았다.
전공서적에 쇠로 된 앵커를 달아 공중에 띄워 놓고 저 혼자 움직이는 만년필로 수업자료를 만드니까 말이다.

“아시다시피 전 형제자매가 다섯이고 그중 둘이 능력자잖아요. 능력자라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둘은 지는 법이 없거든요.
교수님도 마음만 먹으면 오리 궁둥이같이 튀어나온 에드가 입을 반듯하게 반죽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참고 계세요?”
“……일단 인류학도로서, 그, 너무 반인륜적인 건 지양하게나. 그리고 이번 행사는 고민하고 있어.”
“에드가가 재수 없는 건 맞는데요, 때리진 않으려고요. 채점도 시키고 자료조사도 시키고 학생관리도 시키니까 당연히 싫죠.
그래도 뭐 장차 저한테 도움이 될 거라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교수님은 이런 취급을 당하실 이유가 없잖아요.”

교수님은 예의 그 멈칫거리는 듯한, 어정쩡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게 나한텐 쉽지 않네,라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자네에게 능력자인 형제가 있다고 들어서 내가 평소에 좀 편하게 굴었나 보군. 그저 난……. 어쩌면 어린 시절 때문인지도 몰라.
난 철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된 이후 많은 인류학자의 실습장이 된 빌라 노바 드 파말리캉 출신이네.”

유적과 유물이 작은 마을을 지배하던 곳, 교수님은 친구들과 함께 그 마을 아이들이 그렇듯 작은 고랑과 언덕을 누볐다고 한다.
지표 가까이서 철제 무기가 출토되던 곳이라 어린 소년들의 치기 어린 용사 놀이의 배경이 충분히 될 만한 곳이리라.
교수님은 10살에 그 지역의 유일한 능력자가 되었고, 유적을 부수고 친구들을 다치게 한 범인이 되어 마을의 평화를 깼다.
무엇이 계기였는지는 알 수 없다. 발현된 능력은 얕은 지층에서 철기 유물을 불러들였다. 갑자기 치솟은 무기가 아이들을 덮쳤다.
땅에 묻혀 무뎌진 철제 검과 녹슨 망치는 공기 중에서 금세 산화되어 부서졌지만, 뼈를 부수고 피를 흘리게 하는 데는 충분했다.
게다가 마을의 생태가 이미 유적 조사와 유물 발굴에 맞춰져 있었으므로, 유적을 부순 건 어린이들이 다친 것보다 중한 죄였다.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던 가족들에게까지 쏟아지는 손가락질과 부모의 자책과 눈물이 어린 교수님의 마음을 헝클었다.
다행히 그간 마을의 안녕을 위해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선량한 부모덕에 사건은 잘 무마되었다. 친구들도 모두 완쾌했다.
그러나 아마도 교수님은 그때, 어떤 것은 땅속에 묻혀 영원히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명확히 드러내는 순간,
필연적으로 그로 인해 누군가는 불행해질 수 있음을.

영국에서 온 편지

능력자는 대개 교수님처럼 그 지역에서 유일한 존재인 경우가 많다. 어떤 예고도 없이 갑자기 등장한 골칫거리인 것이다.
시대가 바뀌어 사회에 편입되기 시작했지만, 그들은 사람들의 몰이해와 박해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검열해야 했을 것이다.
교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니 뭐든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교수님의 성격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첫 발현 때 유혈사태를 일으켰다면 능력을 사용하는데 거부감이 있는 게 당연했다. 그렇게 숨기고 움츠러드는 것도 말이다.
그래도 교수님이 능력자를 싫어하는 사이퍼포비아는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능력자 중에도 사이퍼포비아가 있다고 들었으니.
새삼 우리 막내는 행운아라는 걸 깨달았다. 함께 고민하고 함께 답을 구할 수 있는 존재가 옆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교수님, 이번 세미나는 참석을 고민하고 있다고 하셨죠? 책상 위의 다른 편지 때문인가요?”
“아, 그래. 영국에서 온 편지인데, 사실 거의 마음을 굳혔네. 자네 혹시 헬리오스라고 아는가?”

교수님은 내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봉투엔 인장이 박혀 있었고, 고풍스러운 편지지는 왠지 빛이 나는 것 같았다.

헬리오스에서는 이번에 특정 지역의 고대 유적이 어떤 문화와 유사한지를 탐사하고자 합니다.
저희는 지질학자 레오 디아스의 추천을 통해 교수님이 이번 목표에 탐사에 있어 전문적인 자문을 주실 수 있다고 판단했으며,
이에 내년 2월 교수님을 초빙할 수 있을지 문의를 드립니다.

“레오 디아스라는 이름을 들어보긴 했다만, 날 어떻게 알고 추천했는지 모르겠군.”
“그야, 우리 집 막내가 디미스트 유적의 연대 측정을 도와달라고 형한테 부탁했는데, 형은 다른 일도 있을뿐더러 현재로서는 지질연대 측정보다
유적의 형태를 분석해서 연대를 측정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해 저한테 인류학자를 추천해줄 수 있냐고 물어봤거든요.
그리고 전 내년에 안식년을 쓰실 수 있는 교수님 이름을 알려드렸죠.”
“……자네가?”
“집에 능력자 둘 있다 말씀드렸죠?”

형은 라틴 아메리카의 지질을 연구하는 학자고, 동생은 헬리오스 소속으로 디미스트 탐사를 했다고는 안 했지만.
아무튼 교수님에게는 나쁜 것 없는 제안일 것이다. 매일 에드가에게 시달리고, 로커드 마틴에게 시달리고, 어쩌면 평생 비능력자들에게 위축된 교수님이
능력자의 도시라는 포트레너드에 가면 조금은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인류학의 날 30주년 기념행사에서 받은 충격과 좌절도 떨쳐내셨으면 좋겠다.

“꼭 가보세요, 교수님. 디미스트는 아주 험하다니까 에드가를 꼭 데리고 가세요. 어차피 따라붙겠지만요.”
“그렇다면 마테오, 그럼 자네 논문은 어쩔 것인가?”
“……금방 오실 거죠, 네?”

인류학이 사망한 날

1934년 한여름에 열린 인류학의 날 30주년 기념행사는 아주 독창적이고 독보적으로 불쾌했다.
교수님은 그날도 로커드 마틴 산하 연구팀 소속으로 불려가 브라질 농민운동에 대한 표제 발표를 해야 하는 처지였다. 일부 ‘능력자’가 포함된
브라질 농민운동이 일반적인 농민 관련 정치 활동과 달리 운동을 어떻게 격화시키고 민중문화를 쇠퇴시키는지를 정리한 보고였다.
그것은 사실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사실이 아니었다. 능력자가 문제가 아니라 ‘일부’의 엇나간 활동이 문제였으니 말이다.
장학금을 벌기 위해, 대학의 실적을 위해 입에 붙지 않는 발표를 하는 교수님을 보는 심정은 편치 않았다. 하지만 이건 빙산의 일각이었고,
가진 자들의 입맛에만 맞춘 행사의 절정은 가지지 못한 자들의 화풀이였다.

“괜찮습니다, 탄성 능력자는 희귀하죠. 자, 늘어나는 것 좀 보십시오. 마음껏 던져보세요!”

행사장 한쪽에는 능력자를 ‘체험’하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유독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탄성 능력자, 경화 능력자, 물 능력자…… 각각의 칸막이 앞에는 능력의 특성이 적힌 팻말이 붙어 있었다.
발현된 능력이 사회, 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지 설명도 들어 있었다. 마치 전시된 동물의 종, 속을
어린이도 알 수 있게 친절하게 풀이한 것처럼.

능력자도 비능력자도 칸막이 밖에서는 평등했다. 그들은 행사장에 준비된 돌을 던지거나 쇠붙이를 휘둘렀다.
비능력자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능력을 가진 자를 짓밟았고 능력자는 자신보다 약한 능력을 가진 자들을 유린했다. 맺힌 피가 흐르는 일은 없었다.
눈 밑이 퀭한 치유능력자가 계속 능력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힘이 부족한 건지, 능력의 한계인지 상처를 완전히 회복시키지는 못했다.

“지금 이게 뭣들……!”
“마테오, 물러서게.”

근처 식당의 식기를 가져왔는지 반짝이는 날붙이가 탄성능력자를 향해 날아가자 교수님이 왼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 손을 잡아 내리는 사람이 있었다. 헤나투 교수님의 은사인 페데리코 클락 석좌교수님이었다.

“헤나투, 그 손을 거두게나.”
“하지만 클락 교수님, 이대로 가면 사람이 죽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곳은 감정을 배설하는 공간일세. 자네에겐 이것을 막을 권한이 없고, 그저 주최 측이 원하는 자문만 하면 되네.”

그 주최 측에 한없이 가까운 에드가가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나타나 코를 찡긋 대며 말했다.

“교수님, 너무 진지하게 굴지 마세요. 아직 금주법이 완전히 폐지되지 않아 사람들이 즐길 거리가 없어요, 즐길 거리가.
그리고 저 사람들도 다 돈 받고 저기 선 거라고요. 치료도 다 해주는데 뭐가 문제예요?”

에드가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 나와 교수님을 몰이하듯 둘러싸고 행사장 밖으로 밀어냈다. 점잖게 쓰리피스 정장을 갖춰 입었지만,
재킷 사이로 홀스터가 보였다. 아마도 로커드 마틴의 용병인 것 같았다.
연구실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밀려난 인류학자였다.

“자네에겐 정말 미안하고, 부끄러울 따름이네. 현시대의 학자들이 이모양이라 정말 미안하네.”

교수님은 내게 사과했지만, 아마 정말 사과하고 싶었던 건 그 행사장의 능력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25년 전, 부모님의 바람대로 포르투갈에서 건축을 전공하지 않고 꿈을 좇아 미국에 온 젊고 순박했던 열아홉 살의 헤나투에게
건네는 사과였을지도 모른다. 그저 평온하게, 능력자의 삶과 문화를 기록하고 가끔은 그 지식을 능력자, 비능력자와 나누고
그들 사이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조언을 건네는 일상을 꿈꿨던 무지렁이 학부생은 이미 신기루처럼 사라졌는데도.

페넘브라 리더

교수님의 안식년 선언은 에드가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일단 로커드 마틴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부터 말이다.

“교수님 정도 되시는 분이 현장을 왜 가십니까? 교수님, 교수님은 지식인답게 로커드 마틴과 정치인들이 필요로 하는 인류학적 논조를
뒷받침하는 연구를 계속하시면 됩니다. 이럴 시간이 없다고요.”

하지만 안식년은 보장된 권리였고, 에드가에게는 교수님을 막을 명분이 없었다. 예상대로 그는 영국까지 교수님을 따라갔다.
뭘 하는지 감시하고 하루바삐 돌아오게 만들기 위해서였겠지.

“이 에드가가 언제나 교수님을 조교로서 보좌하며 교수님의 학문적 성취를 돕겠습니다.”

그럴듯한 말과 함께 잘 차려입은 정장, 반짝이는 구두, 쓸모없는 서류가방을 들고 교수님을 따라갔던 에드가는 역시 예상대로 빠른 귀환을 예고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그 배 타고 다시 오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교수님이 보내신 편지를 보니 에드가의 혼을 빼놓을 만한 큰일이 있긴 했다. 교수님이 페넘브라 리더라니.

그때 나는 홀린 듯 그 빛에 다가갔네. 왠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래야만 한다는 건 알았지.
역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나는 내가 문의 그림자를 지울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네. 방법은 몰라.
내가 그것을 인지하고 부정하는 순간 문의 그림자는 지워졌네. 마치 원래 이 세계에 허락되지 않은 침범으로부터
우리 세계를 보호하는 일을 해낸 것 같았지. 그걸 어떻게 말로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군.

길지는 않은 시간이었던 것 같아. 뒤를 돌아보니 에드가는 한층 더 질린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고, 자네 동생을 비롯한
유능한 헬리오스의 전투원들은 수상한 자들을 제압하고 있었어. 그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가리는 후드가 달린 망토를 입고 있었는데,
그 망토에는 천칭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네. 하도 악을 써대는 통에 단장이니, 의지니 하는 몇몇 단어를 빼고는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현대인인 건 분명했지. 대부분 유럽인 같고, 드러난 턱이나 팔목 등을 봤을 땐 영양상태가 매우 좋지 않은 거로 짐작되더군.
또한 다수가 비능력자, 일부는 아주 약한 능력자였지. 아무 연관점이 없는데 직전에 나타났던 괴물이 자꾸 연결됐네.

문의 그림자는 주변을 변화시킨다던데, 그들이 혹시 원래는 인간이 아니었을까 하는 끔찍한 상상을 하게 된다네.
그리고 에드가, 그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대신 괴물로부터 몇 번이나 목숨을 구해줬건만, 그는 내게서 뒷걸음질을 치더군.
겁에 질린 표정, 공포가 어린 얼굴, 두려움 같은 걸 보니 통쾌한 마음도 없잖아 있었어. 점잖지 못하게 말이야.

도시로 돌아오자마자 에드가는 당장 미국으로 돌아가자며 펄쩍펄쩍 뛰었네. 그렇게 잘 뛰는 줄은 미처 몰랐어.
그러던 중 브뤼노라는 노신사가 내게 헬리오스 소속이 되어 달라고 요청을 하면서 잠시 에드가의 말을 넘길 수 있었어.
안 그래도 돌아오는 길에 자네 동생이 언질을 줬는데, 문의 그림자를 지우는 능력을 가진 자를 페넘브라 리더라고 하며
지금 헬리오스의 임무에 있어 아주 절실한 인재라고 하더군.
사실 디미스트의 유적에서 발견된 천칭 문양도 왠지 흥미로웠고 내 능력이 꼭 필요한 일이라고 하니까 마음이 동하기도 하나
내가 강단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내 가족들과 학교에 변고가 있을지 걱정이 되어서 망설이고 있다네.

다음 장은 종이의 색상과 재질이 약간 다른 걸 보니, 약간의 시간을 두고 추가로 편지를 쓰신 것 같다.
윌라드 크루그먼이라는 자가 날 찾아왔어. 자네가 들어본 적 있을지 모르겠지만 헬리오스의 거물급 임원이라네.
그자는 내게 적어도 안식년 기간만큼은 내 주변 사람들이 피해를 보지 않을 수 있도록 힘을 써보겠다고 했어.
소문이 좋지 않은 사람이네만, 그 영향력은 틀림없는 진짜일 테지. 그를 의지해, 난 여기 남아 이들의 자문에 응할 생각이네.
일이 이렇게 되어 자네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이네. 그간 잘 봐주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오래 자릴 비워서 말이야.
마테오, 언제든지 연락하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요구하고. 내 꼭 자네를 졸업시켜 주겠네.

문을 닫는 자들

편지를 받고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헤나투 교수님은 내 논문에 도움이 될 거라며 디미스트 탐사 보고서 사본을 보내주셨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내 논문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흥미를 돋울 내용은 가득했다.

교수님의 보고서는 디미스트 탐사에서 발견한 천칭 문양이 현재 안타리우스의 문양과 유사성 이상의 관련이 있다고 밝히고,
안타리우스가 강화인간 연구소를 폐기하고 실험실 단위의 능력자 증폭 연구를 이제는 진행하지 않는 현 상태가 인식의 문의 그림자 주변에서 발견되는
안타리우스 신도들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고 추측하고 있었다. 안타리우스가 우리 세계의 과학 대신 인식의 문이라는 새로운 힘,
어찌 보면 재난을 원천으로 삼기로 노선을 변경했으며, 그간의 실험과 강화인간 제작, 그리고 지금 벌어지는 인식의 문의 그림자를 확보하기 위한
무모하다시피 한 전투는 비능력자를 능력자로 전환하여, 능력자의 빠른 양적 확장을 도모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에 가까워 보인다는 것이다.

“교수님의 말대로라면, 그간 안타리우스의 행보는 방식을 달리했을 뿐, 일관된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군.”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능력자의 숫자가 늘어난다면, 안타리우스의 시도가 성공하여 능력자의 수가 비능력자를 앞지른다면, 그럼 우리 세계는 얼마나 달라질까?
지금 능력자를 향한 차별과 혐오가 사라지거나 개선될 수 있을까?
그러나 인류학의 강가에 발을 살짝 담근 나조차 인류가 이상적인 발전을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균형이 무너지면 필연적으로 지배와 피지배의 구도가 형성된다. 그리고 그 구도가 역전되는 순간은 단 한 번도 평화롭지 않았다.

보고서에 동봉된 편지에는 헬리오스의 수뇌부 그리고 연결되어 있을 수많은 능력자가 우리 세계를 지키기 위해 밤낮으로 애쓰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아마도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넣은 말씀일 것이다.

다이무스 홀든이 곧바로 사건의 본질을 꿰뚫어 보더군. 유럽 최고의 검사라는 소리는 들어봤는데, 지력까지 뛰어난 사람이었어.

“그들을 겪어봤다면, 안타리우스의 아주 사소한 무엇도 인류를 위한 것이 없다는 걸 알았을 겁니다.
그들이 뭘 하길 원하든 우리는 우리 일을 해야 합니다. 일단 안타리우스 신도들이 인식의 문의 그림자에 뛰어드는 것부터 막죠.
그리고 인식의 문을 완전히 제거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교수님께 맡아 조사해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의 말대로 인식의 문의 그림자를 지우고 괴물을 제거해도 언제 다시 유사한 현상이 재발할지 모르는 상황이니,
적어도 이 세계를 유지하는 것이 목표라면 응당 이 이상 현상의 시발점에 대한 대응이 요구되어야 하는 것이 맞지.

1931년 장 바티스트 플람이 인식의 문을 닫은 것은 확실해 보이네. 그러나 현재 발생하고 있는 현상들을 살펴보면
정황상 그의 시도는 불완전한 성공이었던 것으로 보이네. 현재로선, 실패야. 응축되어 있던 힘이 방출되듯 지금 인식의 문은
그전에는 없었던 인식의 문의 그림자를 투영하며 우리 세계에 유례없는 혼란을 주고 있지.
마테오, 어느 문화에서나 문을 닫는다는 것은 타인과의 단절을 의미하네. 지금 인식의 문을 ‘닫는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인식의 문이 알 수 없는 어딘가와 연결되는 지점이며, 닫는다는 행위를 통해 연결을 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그러나 마테오, 알다시피 문은 양쪽을 연결하는 통로이며 닫혀 있다는 것은 양쪽에서 봤을 때 통로가 모두 차단되었다는 거야.
만약 한 쪽에서는 문이 ‘닫혀’ 있는데 다른 쪽에서는 문이 ‘열려’ 있다면 이 문은 어떤 상태인 걸까? 플람은 문을 닫은 걸까?

아직 이들에게 말하지 않은 가설이 있네. 머릿속이 아주 복잡하군. 아테나처럼 내 머리를 깨고 태어나줬으면 좋겠어.
이 가설대로 움직인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충돌이 야기될 걸세. 최소한 로커드 마틴이 원하는 방향은 아닐 거야.
솔직히 나는 이 가설을 내 이름으로 발표할 자신은 없네. 자문 의견으로 헬리오스에 전하는 것조차 버거울지도 몰라.
가설의 흐름이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 흐름을 다른 방향으로 영도하고 그 결과를 감당하는 게 두렵다네.
크루그먼 이사가 나와 내 주변의 안위를 보장해준다고는 했으나, 그의 힘이 1년을 넘어 가설의 끝에 닿은 시점에서도
내게 영향력을 행사할지는 확신할 수 없어.

편지는 거기서 끝나 있었다. 아무래도 교수님은 한동안 포트레너드에 머무르게 될 것 같았다.
그렇지만 요구하는 자문을 제공할 뿐, 앞으로도 헬리오스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그들이 직접 논의한 결과일 것이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혼란이 찾아온다면,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대비하는 것뿐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