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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 정보제공자, 오르반 미하이(법학자, 팔티잔 연합, 소리능력자)

너 나 할 것 없이 총포에 화약을 채우는 분주한 손길에 에우로파는 질끈 눈을 감고, 먼 산 아래 고이기 시작한 어스름은 시나브로 밀려와
얼룩이 되어 남았습니다. 한데 모여 쉬는 한숨이 먹구름이 되어 하늘을 덮었을 때, 우리는 간절히 바랐지요.
이 비가 아주 잠시 스쳐가는 비이기를, 목마른 새와 생기를 잃은 들꽃에 작은 기쁨만을 주고 지나치기를.
그러나 날은 개이지 않았고, 단단히 똬리를 튼 어둠은 노래하는 새의 목을 비틀고 들꽃을 짓밟았어요. 전쟁이 내 담 너머 도사리고 있는 시기,
바스티안의 배신은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미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오늘 처음 보신 분들도 있을 테니 제 소개를 먼저 올리지요. 여기 있는 이 남자는 시인을 꿈꾸는 어린 소년이요,
조화로운 세상을 노래하는 법학도랍니다. 팔티잔 연합의 일원이 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으나, 창을 짊어진 독수리의 빛나는 기상을 보고 들으며
단체의 이상에 감화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죠. 그 팔티잔을 이끌고 보우한 자매의 다음 이야기를 들려 드리려 하니,
여러분의 하루에 잠깐의 틈이 난다면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팔티잔의 영광과 위기

능력자 단체를 기반으로 성장한 팔티잔은 폴란드 농민을 포용하면서 중부 유럽의 거목으로 자라났어요.
자, 이 아름다운 나무를 머릿속으로 상상해 봐요. 농민과 노동자, 지식인을 아우르며 넓게 뻗은 뿌리 위로 굳건한 줄기가 우정과 신뢰의
단단한 나무껍질을 두르고 있어요. 셀 수 없이 많은 가지마다 반짝이는 은빛 잎이 물결쳐 만든 선율은 산으로 강으로 퍼져나가는
현의 떨림이 되어 우리 가슴에 뜨거운 메아리로 돌아옵니다. 우리는 함께 웃으며 이 나무 그늘 아래 평화의 샘을 틔웠죠.

이 샘은 승리의 횃불 지기, 마르티나 오스트로프츠카의 발자취입니다. 빛나는 지혜와 단단한 용기를 지닌 이 영리한 지도자는
능력자가 아님에도 능력자 단체인 팔티잔 연합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팔티잔은 마르티나를 사랑하고 따랐답니다.
어쩌면 팔티잔 연합의 그 누구보다 약한 사람인데도 마르티나는 물러서는 법이 없었어요.

“능력자도 아닌 네가 앞에 나서면 어쩌자는 거야?”
“뭐야, 파벨. 지금 비능력자 차별하는 거야?”

파벨이 걱정을 살짝 얹은 잔소리를 할 때마다 마르티나는 물러서는 버릇이 들면 할 수 있는 일조차 손에서 놓게 된다고 맞받아쳤어요.
마르티나가 자기 깜냥도 모르고 나서서 민폐를 끼치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며 앓는 소리를 하면서도
우리는 마르티나와 함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나날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예고 없이 시작된 레퀴엠의 서곡처럼 폴란드의 능력자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에도 몇 건의 실종 신고가 접수될 지경까지 다다르자 팔티잔은 실종자 수색과 더불어 실종 위협이 있는 능력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다각도로 애썼고,
그 중심에 있던 것은 마르티나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마르티나마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마르티나의 실종은 시베리아에서 가볍게 토해낸 차가운 숨결이 북동의 격랑이 되어 밀려온 듯 팔티잔을 순식간에 얼어붙게 했고,
마르티나를 강력히 지지하던 파벨과 바스티안의 의견도 갈라졌어요.
파벨은 팔티잔 전원이 하던 일을 멈추고 마르티나를 찾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했고,
바스티안은 이런 상황일수록 마르티나의 의지가 꺾이지 않도록 하던 일을 꿋꿋이 이어가야 한다고 했어요. 우리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지요.

마르티나를 찾아서

얼마 후 바르샤바의 으슥한 뒷골목 어귀에서 마르티나의 폴암이 발견되었습니다. 뒤처지는 무력을 보완하기 위해 마르티나가
이 폴암으로 얼마나 많은 훈련을 해왔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에, 부러진 채 발견된 폴암을 두고 우린 모두 할 말을 잃었습니다.
누군가는 울부짖고 누군가는 화를 내며 누군가는 절망했지요. 다들 부정하며 눈 돌리고 있었지만 잦은 습격과 수습하기 힘든 피해로
이미 팔티잔은 병들었습니다. 거기에 극명히 밝혀진 마르티나의 부재가 이유 없이 추락하던 독수리의 날개에 화살을 한 발 더 꽂은 것입니다.

결국 힘든 시기를 견디지 못하고 팔티잔을 떠나는 사람도 있었어요. 지금 와서 반추하면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었지만, 당시에는 그들이 정말
자의로 떠난 건지 실종된 건지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마르티나의 의지를 계승하기 위해, 그냥 내가 어딘가에서 활동 중이라는 소속감을 얻기 위해,
또는 별생각 없이, 어떤 이유에서든 팔티잔에 남아 있던 우리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마르티나를 찾는 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던 중 파벨이 대뜸 마르티나의 동생을 데려오자고 제안했어요. 마르티나의 동생이 마르티나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파벨의 말에
바스티안은 지나치게 뜬구름 잡는 얘기라며 반대했지만,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싶어 했던 동료들의 지지 덕분에 일을 진행할 수 있었죠.
당시에는 저도 바스티안처럼 반대하는 입장이었어요. 지지하는 분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파벨의 의견은 곱씹어 보면
어린 시절 할머니가 들려주는 슬라브 신화 같았거든요.

마르티나는 평소에 동생 이야기를 하며 어디에 있던 자신을 찾아내곤 했던 위대한 추적자라고 소개했대요.
파벨은 어린아이의 장난 같은 그 한 마디를 믿고 연합 회비 장부에 적힌 농장 주소를 손에 쥔 채 평원 어딘가 있을 그레타를 찾아 떠났습니다.
그 시기 바스티안은 파벨의 부재를 메운다는 명목으로 새벽부터 밤까지 동분서주했어요. 고립된 팔티잔 소속 능력자를 파악하고
실종 위험이 있는 능력자 목록을 다시 작성했죠. 아, 그때는 그것이 서슬 퍼런 칼날에 뱀의 독을 바르는 것인 줄도 모르고
우리는 바스티안을 돕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 칼날이 마르티나의 구명줄을 조금씩 잘라내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올가미

그레타의 합류로 팔티잔은 잠시 안정을 얻었습니다. 바스티안도 파벨과 대립하기를 멈추고 팔티잔을 정비하는 데 힘을 합쳤죠.
하지만 바스티안은 그레타의 합류를 계속 못마땅해했어요. 초반엔 그레타의 능력이 허섭스레기와 다름없다고 비웃었고,
나중에 그레타가 진짜 능력을 드러냈을 땐 그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적극적으로 싸우려 하지 않는다며 투덜거렸죠.
바스티안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동조된 사람들은 바스티안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레타를 비난할 때도 바스티안의 표현이
점차 지나치게 과격해진다는 걸 느끼지 못했고, 일부는 함께 그레타를 비난하기까지 했습니다.

“분위기 한 번 살벌하구만.”

뒤늦게 이런 상황을 알게 된 파벨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하자 그레타는 말없이 미소만 지었습니다. 바스티안은 짐작도 할 수 없었겠지만,
그레타는 생각보다 훨씬 단단한 사람이었거든요. 자기주장을 적극적으로 내세우지 않고 바스티안의 원색적인 비난까지 참아 넘겼던 것은
마르티나를 존중하고 마르티나의 팔티잔을 보듬으려는 그레타의 너른 마음에서 우러난 배려였습니다. 저는 금세 이 친구가 좋아졌어요.
그레타는 마르티나처럼 돋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지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그레타가 말하기를, 바스티안이 없을 때만 바깥공기가 시원하다고 느낄 정도로 바스티안의 날 선 배척이 버거웠지만
바스티안과 마르티나의 관계를 생각해서 참고 참았는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참지 않고 엉덩이를 걷어찼을 거라고 하더군요.

어쨌든 한동안 격렬했던 팔티잔의 연주가 랄렌탄도의 속도로 전환된 것이 누군가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요?
차츰 조직을 다시 정비하고 상황을 파악하려 했을 즈음, 우리 앞에 새로운 덫이 놓였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알 수 없었던 마르티나의 소식이 신문에 실린 것입니다. 그것도 처형 소식이요.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마르티나를 구하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눈과 귀를 가리고 함정에 발을 디딘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팔티잔은 당시 싸울 수 있는 거의 모든 인원을 잃고 패퇴했습니다. 그나마도 지하연합의 원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퇴각이었죠.
위기의 순간에 등장한 이글 홀든과 히카르도 바레타는 파벨과 그레타, 남은 팔티잔 전력을 최대한 안전하게 후퇴시켰어요.

바르샤바로 돌아온 후 한동안 기묘한 동거가 이어졌습니다. 파벨은 다친 몸을 추스른다고 매일 병원을 들락거리고,
바스티안은 자신이 정찰하러 간 사이 괴물이 팔티잔을 덮친 것 같다며 조심성 없이 자리를 비운 행동을 매일 같이 자책했습니다.
팔티잔의 손님인 이글과 히카르도를 상대하는 건 그레타가 맡았어요. 평소라면 마르티나가 했을 일이죠.
실패로 돌아간 마르티나 구출 작전 직후 외부에 알려진 적 없는 그레타에게 갑자기 수배령이 내려진 일로 팔티잔에는 어수선한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았어요.
불안한 평화 속에서 바스티안은 전투 능력을 상실한 결사대원을 복귀시키고 저를 비롯해 얼마 남지 않은 능력자들을 긁어모으면서도
어렵게 시간을 내어 이글과 히카르도를 자주 찾아갔어요. 지하연합의 막강한 전력이 확보된 지금이야말로 마르티나 수색 및 구출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한다며 더 적극적으로 나섰지요.

마르티나 구조

지난 마르티나 구출 작전은 실패였지만, 한 가지 수확은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마르티나를 구금하고 있던 적의 주체를 알았다는 것이었죠.
우리는 생각보다 큰 적을 상대하고 있더군요. 팔티잔은 낮에는 새가 되고 밤에는 쥐가 되어 그들을 쫓았습니다.
표적을 특정할 수만 있다면, 저는 아주 멀리 있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답니다. 제 능력 중 하나는 바로 그런 파동을 느끼고 이용하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마르티나를 구금하고 있던 적 군부대를 찾아냈고, 다음 집결지를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저희는 바르샤바 외곽의 한 창고에서 마르티나와 다른 실종된 능력자 몇 명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기이할 정도로 일이 잘 풀렸다는 걸 그 땐 미처 알지 못햇습니다. 마르티나의 구출 후 본부로 돌아온 이글과 히카르도는
그레타와 몇 마디 나누고는 곧장 지하연합으로 복귀했습니다. 아쉬워하는 사람들에게 이글이 이제 다들 바빠질 거야~, 하며
너스레를 떠는 통에 그들이 그레타와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르티나를 우리 곁에 데려온 것만으로는 구조가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돌아온 마르티나는 이미 예전과 같지 않았어요. 창공을 바라보던 눈동자는 그 아래 어둠에 사로잡혀 탁해지고, 앞으로 나아가던 두 다리는
꺾여 뒷걸음질 치기 일쑤였지요. 휴식의 축복을 받는 밤이 되면, 마르티나는 더한 공포에 빠져 숨도 못 쉬고 허우적댔어요.
눈 감는 걸 두려워하며 비명을 지르거나 주먹을 휘둘렀고, 급기야 울며 발버둥 치다가 새벽녘 동이 터 올 때 지쳐 쓰러졌어요.
마르티나만 돌아오면 모든 게 되돌아올 줄 알았는데.
사람들의 마음속 불안은 가시지 않고 마르티나의 비명소리가 들릴 때마다 우리 모두 신께 기도를 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원한 밤은 없다

마르티나를 찾으면 고향의 농장으로 돌아갈 거라던 그레타는 결국 떠나지 못하고 마르티나 곁에 머무르기로 했습니다.
마르티나가 바르샤바로 떠날 때 내민 손은 잡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도 마르티나의 손을 꼭 잡아주고 싶다면서요.
그레타는 제 연주가 마르티나를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시간이 될 때 마르티나를 찾아와달라고 부탁했고,
저는 가능한 많은 시간을 자매와 함께 보내며 허디거디를 연주하거나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울프 메싱은 그 뒤로도 제게 여러 번 당부했어요. 절대로 언제 어디서든 노래하지 말라고요.”
“궁금한 마음도 있지만, 금기는 함부로 범해서는 안 되는 거겠죠. 언니는 어때? 도전할 거야?”
“귀여운 그레타. 난 이미 경험했단다. 궁금하면 네 밭 한가운데서 들어보렴. 다른 사람 없는지 잘 확인하고 말이야.”
“뭔가 따돌림당하는 기분인데? 오르반, 내가 돌아가게 되면 초대할게요. 내 농장으로 와줄래요?”
“기쁜 마음으로 농장의 전속 음유시인이 되고 싶네요. 먹여주고 재워주는 조건으로요.”
“간식으로 사과도 드릴게요.”
“계약 체결입니다. 구두 계약도 법적 효력이 있는 거 아시죠?”

낮 시간의 자매는 제법 괜찮아 보였습니다. 저는 제가 능력을 깨달은 계기나 어릴 적부터 자주 어울리던 울프 메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어요.
울프 메싱은 능력자 등록도 하지 않고 능력자 단체에 가입하지도 않아서 그의 능력이 볼품없을 거란 말도 있었지만,
그가 일군 능력자 공동체는 그를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괴짜로 만들어 주었죠.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는 항상 바스티안이 있었어요. 바스티안은 마르티나가 잠드는 순간을 제외하고서는 항상 옆에 머물렀고,
누군가 마르티나에게 말을 걸려고만 해도 경계의 눈초리로 지켜보았습니다. 심지어 그레타마저도요. 마르티나를 아끼던 바스티안의 일화야
제가 팔티잔에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들은 얘기 중 하나였던 만큼, 걱정하는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이렇게 항상 곁에 있으면 답답해서
나을 것도 낫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레타는 최대한 마르티나 곁에 있으려고 했지만, 바스티안이 있으면 떠밀리는 모양새로 물러나야 했죠.
사실 바스티안은 그레타가 어디 있든 못마땅해했어요. 그레타가 팔티잔을 돌아다니며 말이라도 섞으려고 하면 쫓아다니면서
언니를 챙기지 않는다고 구박하고, 마르티나 곁에 있으면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축낸다고 나무랐죠. 하지만 그레타는 기죽지 않고
마르티나를 대신해 팔티잔을 정돈하려고 애썼어요.

“파벨, 그러니까 그때 파벨은 아예 여기 없었던 거죠?”
“바스티안, 아니, 바스티안, 이날 어디 있었는지만, 바스티안…!”
“첼시, 영국에서라면 지하연합에 가입할 수 있었을 텐데 팔티잔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누가 언제 가입했고 무슨 일을 하는지 대화하며 그레타는 팔티잔에 녹아들어 갔습니다.
어떤 자들은 더 이상 독일이든 폴란드든 국가, 정부와 반목하면 안 된다며 수배령이 내려진 마르티나와 그레타의 존재를 우려하기도 했어요.
불안정한 마르티나가 다시 단체의 전면에 나설 경우 기존과는 다르게 팔티잔의 독이 될 거라고 걱정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동안 마르티나가 우릴 지켜왔듯이, 이제 우리가 마르티나를 지켜야 할 차례라는 파벨의 의견에 동조했지요.

마르티나의 귀환

마르티나의 영혼에 새겨진 상흔은 쉽게 나을 것이 아니어서 다들 마르티나가 회복되는 데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짐작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돌아보면 우리 시간은 언제나 반짝거리는 무언가로 가득했고, 그렇게 빛나는 시간은 호박처럼 단단히 굳어져
마르티나를 지지하고 일어서게 해줬던 겁니다. 마르티나는 아마 예전같이 밝고 씩씩하게 날아오를 수는 없겠지만,
깨지고 부서진 영혼이 단단히 이어져 튼튼한 두 다리로 더 빨리 달릴 수 있겠죠. 눈동자에 강한 의지가 차오를수록
마르티나의 공포는 분노가 되어 긴 밤을 물리치고 새벽녘 홰치는 닭의 울음소리처럼 쩌렁쩌렁하게 울렸습니다.

마르티나의 요양이 지속되고 날씨가 변덕스러움을 머금을 즈음, 그림자처럼 마르티나의 곁을 지키던 바스티안이 고향에 가봐야 할 거 같다고 했어요.
우린 별 의심을 하지 않고 떠나는 그를 배웅했지요. 그가 얼마 전부터 중고 무기 거래를 하던 폴란드 병사 몇과 술을 마시며
아버지의 건강이 예전 같지 않다고 얘기를 하는 것을 듣긴 했거든요. 곧 돌아오마, 하며 떠났지만 그가 떠난 뒤에야 그의 방이
깨끗이 정리되어 있다는 걸 알았어요.

바스티안이 사라지고 며칠이 흐르자 마르티나는 밤에 조용히 잠들기 시작했습니다. 아직도 날카로운 냉소가 남긴 했지만
마르티나는 점차 이지를 찾아갔고, 어느 날 아침 눈을 뜨더니 옆에서 자고 있던 그레타를 깨워 잠시 입술을 떨더니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스티안은…첩자다.”

작지만 큰 진군

마르티나가 알린 진실은 팔티잔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특히 그가 능력자였고, 자기 능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돌이켜보니 바스티안의 모든 행적이 그간 팔티잔이 겪은 불행과 맞닿아 있었어요. 그는 독일군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으며,
폴란드 내 능력자 실종의 주범이었습니다. 우리는 보호해야 할 형제들에 대한 정보를 사냥꾼에게 바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허탈한 마음이 지나간 자리에 맹렬한 분노가 팔티잔을 지배했습니다. 바스티안과 함께 팔티잔에 둥지를 틀었던 몇몇 첩자를 색출할 수 있었지만,
정작 바스티안만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스티안을 찾기 위해 팔티잔은 다시 한번 뭉쳤습니다.

마르티나는 우선 바스티안에게 노출된 폴란드 능력자 명단을 다시 확인할 것을 지시했어요. 이미 실종된 사람들도 있었고,
그 결과 팔티잔을 불신하게 된 사람들도 있었지만 팔티잔은 다시 한번 그들에게 그늘을 제공하기 위해 있는 힘껏 팔을 뻗었습니다.
여러모로 혼란한 와중에 저는 급보를 받았습니다. 울프 메싱이었어요.
며칠 전부터 어린 능력자들이 실종되고 있다며 팔티잔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냐고 물어왔어요. 그제야 저는 그동안 마르티나와 그레타,
그리고 그 뒤에 선 바스티안에게 울프 메싱과 그의 공동체에 대해 자세히 알려줬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어디 있는지, 얼마나 어린 친구들까지 거두었는지, 제가 전부 알려주고 말았어요.
저는 이 모든 사실을 즉시 마르티나와 그레타에게 알렸습니다. 제발 도와달라고 말하려는 찰나, 마르티나가 먼저 함께 가자고 말하더군요.
거의 모든 팔티잔이 바스티안 수색과 능력자 보호에 매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티나와 그레타, 저 셋만 이동하기로 했어요.

영원히 잃어버린 조각

가장 빠른 기차를 타고 울프 메싱의 공동체가 있던 지역에 도착하자, 울프 메싱이 마중을 나와 있었습니다.
그는 현재 상황을 요약해 줬지요. 다행히 어린 ‘늑대’ 하나가 탈출하여 바스티안의 은신처를 알렸고, 울프 메싱과 그의 동료들이
은신처를 습격해 대부분의 아이를 구조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붙잡힌 아이들이 있고, 바스티안은 그 아이들을 끌고 도주 중이라고 했습니다.
울프 메싱의 동료들은 탁월한 추적자였고, 우리 셋은 울프 메싱의 동료 발레리의 안내를 받아 그단스크까지 바스티안을 추적했습니다.

그단스크의 항구 근처에서 우리는 바스티안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세 명의 어린 늑대를 인질로 잡고 있었어요.

“소브차크!”

마르티나가 팔티잔의 누군가를, 성으로 칭한 것은 처음 봤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바스티안인데 말이죠.
바스티안을 더는 자기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죠. 그러나 바스티안은 마르티나를 비웃듯 어둠을 불러왔습니다.

“사랑스러운 마르티나, 앞으로는 내 진짜 이름을 불러 줘. 난 바스티안, 슐츠야.

그 말과 동시에 끈적이는 타르 같은 것이 마르티나에게 달려들었지만 발레리가 달려들어 갈기갈기 찢어버렸어요.
액체인 줄 알았지만 바닥에 떨어지는데 고이지 않고 그대로 흩어지는 걸 보고 저는 그게 바로 그의 능력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는 그의 속내만큼이나 시커멓고 기분 나쁜 환영을 연거푸 불러냈어요. 몇 차례의 공세가 오고 간 후, 우리는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순조롭게 바스티안을 몰아붙일 수 있었습니다. 바스티안이 인질로 잡고 있던 아이들을 구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채찍질 소리가 들린 것 같았어요.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렸어요. 불길한 징조였습니다.
이런 곳에서 들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소리들이 현실감을 잃게 했어요. 소리를 차단하려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파동을 통제할 수 없었고,
우리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이제서야 등장하시네.”

이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듯 바스티안이 이죽거렸어요. 원래 바라보기조차 불쾌했던 바스티안의 환영이 너무나 두려워졌어요.
무엇보다 괴로웠던 건 마르티나가 무너지는 모습이었습니다.
억지로 끼워 맞춘 유리 세공품이 무너지듯 서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쏟아진 마르티나는 영혼이 부서지는 것처럼 괴로워하며 울부짖었습니다.
절망, 공포, 무력감, 좌절, 상실감, 낙담, 비탄, 암담함, 불안, 체념, 비관, 두려움, 환멸이 형상을 갖추고 나타나 눈앞을 가리고,
어느새 발치에 다다른 검은 구렁텅이에서 촉수가 튀어나와 우리를 옭아맬 기세로 흔들렸어요.
내 심장 소리에 맞춰 박동하는 듯 꿈틀대는 촉수를 멈출 방법은 내 숨이 멈추는 것 외에는 없는 것 같았죠.

“미하이, 정신 차려!”

울프 메싱이 제 멱살을 잡고 귓바퀴에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면 전 제 목을 조르고 말았을 겁니다.
우리는 마르티나와 아이들의 손을 마구잡이로 잡고 달렸습니다. 그 자리를 멀리 떠나서야 우리는 겨우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납치되었던 아이들을 모두 구해내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바스티안을 놓친 것도 아이들을 더 구하지 못했던 것도 분했지만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다시 절망에 사로잡혀 버린, 어쩌면 영영 용기를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싶은 마르티나를 수습해 바르샤바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그간의 이야기는 일단락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불협화음으로 가득했던 팔티잔의 위기는
이제 곡조를 바꿔 새로운 사건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이어질 노래는 소름 끼칠 정도로 아름다운 아리아가 될지, 웅장한 합창이 될지,
무거운 중창이 될지 지금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 자매의 이야기를 전해 드린 남자가 용기 내 간곡히 부탁드리니,
이 마지막 한 줄을 들어주세요. 팔티잔이 새로운 장을 여는 데에는 여러분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언젠가는 멈춰버린 작곡이 비스와 강의 물줄기처럼 막힘없이 다시 시작되기를 바라며.